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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행재잡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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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행재잡록(行在雜錄)

 

1. 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2. 행재잡록(行在雜錄)

3. 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4. 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5. 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6. 중존평어(仲存評語)

 

 

 

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아아, 황명(皇明)은 우리 상국(上國)이다. 상국이 속국에게 주는 물건은 비록 터럭같이 작은 것일지라도 하늘에서 떨어진 듯이 그 영광이 전국을 움직이고 경사스러움이 만세(萬世)에 끼칠 것이요, 그 따뜻한 말과 몇 줄 되는 편지쪽을 받들더라도 높기는 운한(雲漢)과 같고, 놀랍기는 우레와 같으며, 감격하기는 때를 맞추어 오는 비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상국인 까닭이다. 무엇을 상국이라 하느냐. 중국을 가리켜 하는 말이니, 우리 선왕(先王)들과 여러 조정에서 명()을 받은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도읍인 연경(燕京)을 경사(京師)라 하고, 그 순행(巡幸)하는 곳을 행재(行在)라 하며, 우리나라 토물(土物)을 바치는 것을 직공(職貢)이라 하고, 당시의 임금을 천자(天子)라 하며, 그 조정을 천조(天朝)라 하고, 사신이 그 조정에 가는 것을 조천(朝天)이라 하고, 그 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천사(天使)라 하여, 우리나라 부인이나 어린애들까지도 상국을 말할 때는 언제나 하늘이라 일컫지 않는 법이 없어 4백 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대개 우리가 명실(明室)의 은혜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왜인(倭人)이 우리 강역(疆域)을 뒤엎었을 때 신종 황제(神宗皇帝)는 천하의 군사를 몰아 우리나라를 원조해서 자기의 사재까지 말려가면서 군비에 다 써서 우리의 삼도(三都 서울개성평양)를 회복하고 우리의 8()를 도로 찾아 주었으매, 우리 조종(祖宗)은 없어진 나라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백성들은 이마에 문양을 새기고 풀 옷을 입는 오랑캐의 풍속을 면하게 된지라 그 은혜 뼈에 사무쳐 만세(萬世)에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모두 상국의 은혜인 것이다. 지금의 청()은 명()의 구신(舊臣)들을 어루만져 사해(四海)를 통일하고서 여러 대를 두고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풀어 왔었다. 우리가 물건을 바치는데, 금은 토산(土産)이 아니라 해서 이것을 그만두게 하고, 말이 작고 약하다 하여 이를 면제했고, 모시종이자리 같은 폐백도 해마다 그 수를 감했으며, 몇 해 동안 칙사(勅使)를 내보낼 만한 일도 반드시 그냥 처리하고 송영(送迎)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이번 우리나라 사신이 열하에 들어오자 특히 군기 대신(軍機大臣)을 보내서 맞게 하고 조정에 있어서는 대신들의 반열 속에 서도록 명령하고 연극을 볼 때에는 조정의 대신들과 나란히 하여 즐기도록 하며, 또 조서를 내려 정공(正貢) 이외에 별사(別使)가 바치는 방물(方物)은 길이 면제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 없는 성전(盛典)으로서 일찍이 황명(皇明) 시대에도 있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대해 주는 것으로 여길 뿐 이것을 은혜로 생각지 않고, 걱정으로 여길 뿐 영화로 생각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상국이 아닌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황제가 있는 곳을 행재(行在)라 일컬어서 그 사실을 기록하지만 상국이라 이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국이 아닌 때문이다. 우리가 힘을 굽혀서 저들에게 복종하고 본즉, 그들을 대국이라 하는 것이요, 대국이 능히 힘으로써 우리를 굴복하게 하기는 했으나 우리가 처음 수명(受命)한 바 천자는 아니었다. 이제 그들이 준 여러 가지 우대와 공물을 감면해 주라는 명령은 대국으로서는 작은 것을 돌보아 주고 먼 곳을 회유하자는 정사에 지나지 않고 본즉, 비록 대()마다 한 번씩 공물을 없애주고 해마다 한 번씩 폐백을 면제해 주더라도 이는 우대일 뿐, 우리가 이르는 은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슬프다. 오랑캐의 성질은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가죽 폐백이 부족하면 개나 말을 받고, 개나 말이 부족하면 주옥(珠玉)을 받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사랑하고 이해하며 관대하고 용서해서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을 베풀지 않아도 어기거나 거절하는 것이 없으니, 바로 우리의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족히 저들을 감동하게 하여 그들의 성질을 부드럽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의 뜻은 역시 아직도 하루라도 우리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하면 저들이 중국에 산 지 백여 년에 아직 한 번도 자기 땅을 객지로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아직 한 번도 우리 동방을 이웃으로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늘과 같이 사해가 승평(昇平)한 날에 와서 가만히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고 대우를 두텁게 하는 것은 그 덕을 팔고자 함이요, 인정을 맺는 것은 진실로 방비를 해이하게 하고자 함이다. 딴 날 자기 땅으로 돌아가 국경을 누르고 앉아서 옛날 군신의 예로써 따져 주린 해에는 구제를 청하고, 전쟁이 날 때에는 도움을 바란다면, 어찌 오늘날의 구구한 종이나 자리 같은 공물을 면제해 주는 것이 딴 날에 견마(犬馬)와 주옥(珠玉)을 청하는 자료가 되지 않으리라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가히 걱정이 될지언정 영화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 황제의 뜻이 반드시 그런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동방이 대국의 후한 대우를 받은 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인심이 편안해져서 소홀하기가 쉬운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황제에게 올린 글과 칙유(勅諭)를 아울러 기록해서 천하의 걱정거리를 먼저 걱정할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바이다.

 

 

[C-001]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8() : 당시 이조의 여덟으로 나눈 행정 구역.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행재잡록(行在雜錄)

 

 

예부(禮部)가 대사(大使) ()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의 대사. 장문금(張文錦)의 자는 환연(煥然)이요, 순천 대흥(大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키가 작되 다부지게 생겼다. 에게 분부하기를,

 

이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이르노니 조선(朝鮮)으로부터 온 정부사(正副使)가 열하에 와서 예를 행할 것이니 즉시 이 뜻을 조선 사신에게 전하고 열하로 같이 가게 하라. 관원과 종인(從人)들의 성명을 베낀 것을 즉시 정찬사(精饌司 음식을 맡은 관청)로 보내고 내일은 곧 데리고 떠나게 하라. 이것을 특히 분부하는 것이다. 8월 초 4일 초저녁.”

이라 했다.

예부가 대사 장에게 분부하기를,

 

황제의 뜻을 받들어 조선 사신 등을 데리고 열하로 가서 예를 행할 것은 이미 명령했거니와, 즉시 사신의 성명과 수행관들의 성명을 함께 베낀 것을 곧 예부로 보내고 기다리라 했는데 아직도 보고가 이르지 않았으니, 황제의 뜻을 받든 바에 어찌 늦출 수가 있는가. 속히 베껴서 예부로 보낼 것을 서서 기다리노라. 다음으로 수행할 통관(通官)오림포(烏林浦) 사가(四哥)서종현(徐宗顯)이다. 보수(保壽)박보수(朴寶樹)이다. 등 세 사람에게 즉시 이 분부를 전해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내일 사시(巳時)에 조선 사신들을 데리고 임구(林遘)에 가서 잘 것을 특히 분부하노라. 아울러 분부할 것은 대사 장이 내일 묘시에 아문(衙門)에서 기다리면 면대해서 알려 줄 일이 있으니 이것을 특별히 분부하노라. 8월 초 4.”

이라 했다.

조선국 진하 겸 사은사(朝鮮國進賀兼謝恩使)로 먼저 열하 행재소(行在所)로 간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정사(正使)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부사(副使)이조 판서잠시 차함(借啣)이다. 정원시(鄭元始), 서장관 겸 장령(書狀官兼掌令)조정진(趙鼎鎭)과 대통관(大通官)홍명복(洪命福)조달동(趙達東)윤갑종(尹甲宗)과 종관(從官)주명신(周命新)정사의 비장(裨將)이다. 정창후(鄭昌後)이서귀(李瑞龜)부사의 비장이다. 조시학(趙時學)서장관의 비장이다. 과 따르는 사람 64명으로 이상 모두 74명과 말 55.”

() ()와 신() ()은 아뢰나이다.” 만인 상서(尙書)는 덕보(德甫), 한인 상서는 조수선(曹秀先)인데, 육부(六部)가 모두 만인과 한인을 써서상서와 시랑(侍郞)을 두었다.

조선국 사신으로 만수절(萬壽節) 경하차로 온 정사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달 초 9일에 열하에 도착시켜 신 등이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잘 보살펴 두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건륭 45 8월 초 9일에 아뢰고 황제의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신 조와 신 덕은 사정에 따라 삼가 천은(天恩)을 감사하는 사건에 대하여 아뢰나이다. 조선국 사신 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 등이 올린 글을 보면, ‘엎드려 아뢰노니 국왕이 황제의 칠순(七旬) 만수절을 당하여 기뻐함을 이기지 못하여 저희들을 시켜 국서를 받들고 경하차 오게 되어 열하에 이르러 예식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영광과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요, 또 다시 성지(聖旨)를 입어 소국(小國) 사신으로 하여금 천조(天朝)의 이품(二品)삼품(三品) 대신들의 다음에서 예식을 행하도록 은혜를 베푼 것은 격외(格外)의 일이었고 실로 천고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가 마땅히 돌아가서 국왕에게 아뢰어 황은(皇恩)에 감격할 것이요, 저희들의 춤출 듯 기꺼운 정성을 청컨대 예부의 대인(大人)들은 이 뜻을 대신 아뢰어 주십시오.’

하고, 진정으로 문서를 갖추어 왔으므로 이로써 삼가 주문(奏聞)합니다.”

건륭 45 8 10일에 아뢰고 다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예부는 삼가 주문(奏聞)하는 일로써 상주하나이다. 이달 12일에 신 등이 분부를 좇아 회동이번원(會同理藩院)사원(司員)들을 보내서 조선 사신 정사 박과 부사 정과 서장관 조 등을 데리고 찰십륜포(札什倫布)에 가서 액이덕니(額爾德尼)에게 뵙는 예절을 행하였습니다. 예가 끝나자, 앉으라 하고 차를 마시며, 그 나라의 원조와 아울러 입공(入貢)하는 내력을 물으매, 사신들은 대답하기를,

황상의 칠순 되는 큰 경사를 축하하는 표()를 올리고 아울러 천은을 삼가 사례하러 온 것입니다.’

하니, 액이덕니는 듣고 나자 심히 기뻐하여 즉시,

영원하도록 공손하면 자연 복을 얻으리라.’

신칙을 하면서, 사신에게 내리는 동불(銅佛)과 서장향과 모직 옷감을 주니 그들은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사신 등에게 준 동불 등 물건의 목록을 적어 황제께 뵈이기 위해서 여기에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건륭 45 8 12일에 아뢰고, 아셨다는 뜻을 삼가 받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사신이 반선을 본 이야기는 내가 찰십륜포기(札什倫布記)에 갖추어서 실었다. 이제 예부의 주문한 글을 보면, 액이덕니를 절해 뵈었다든가 사신에게 물건을 주었을 때 사신 등이 즉시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를 했다고 운운한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상주한 말에는 사세가 부득이했던 것이다. 다만 내가 목격한 바를 자세히 기록하여 산 속에 돌아가 등을 볕에 쪼이는 날 한 번 웃음거리로 삼을 터인데, 이 글을 보는 자는 마땅히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정사에게 동불(銅佛) 1, 보료 18, 합달(哈達) 1, 합달(哈達)은 폐백(幣帛)과 같은 말이다. 붉은 빛 탄자 2, 서장향 24묶음, 계협편(計夾片) 1주머니. 무슨 물건인지를 모르겠다.

부사에게 동불 1, 보료 14, 합달 1, 붉은빛 탄자 1, 서장향 20묶음.

서장관에게 동불 1틀 보료 10, 합달 1, 붉은빛 탄자 1, 서장향 14묶음.

 

 

[C-001]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소위 동불이란 것은 높이가 한 자가 넘으니, 이것은 호신불(護身佛)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으레 멀리 여행하는 자에게 서로 선사하여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조석으로 공양하는 것이요, 서장 풍속에는 연례(年例)로 진공(進貢)하는데, 부처 한 틀로써 방물을 삼는 것이니, 이번 이 동불도 법왕이 우리 사신을 위해서 여행의 무사함을 비는 가장 아름다운 폐백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부처와 인연을 가진 일이 있고 보면, 평생에 누()가 되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것을 준 자가 번승(番僧)이었음에랴. 사신이 이미 북경으로 돌아오자, 그 폐백들을 모두 역관들에게 내주었으나 여러 역관들도 역시 똥오줌처럼 더럽다고 보아 은 90냥에 팔아 일행의 마두배(馬頭輩)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으나 마부들도 이것으로는 술 한 잔도 사먹을 수 없다 했으니, 결백하다면 결백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나라 풍속으로 본다면, 고루한 시골 티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예부는 공무(公務)를 위하여 보낸 조선국 공문 한 통을 병부(兵部)로 보내기 위하여 돌려 발송하는 것이 옳다.

주객사(主客司)는 행재소 예부의 공문에 준하여 아뢴다. 본부에서 상주한 조선 사신이 열하에 도착한 문서 한 통과 또 상주한 조선 사신이 천자의 은혜를 공손히 사례한다는 문서 한 통과 또 반선(班禪) 액이덕니가 조선 사신에게 준 물건의 명목 한 통을 응당 따로 베껴서 알리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각 상주문(上奏文)들은 원문대로 베낄 것은 물론이요, 유지(諭旨)를 받들고 이송(移送)한 글까지도 베껴서 담당한 곳에 보내어 처리하게 할 것이다. 방례과(房禮科)와 절강(浙江 절강의 관원)도 아울러 시행한다.

예부는 삼가 예의(禮儀)에 관한 일을 상주하나이다. 건륭 45 8 13일은 황제의 칠순 만수성절에 경하례(慶賀禮)를 행하겠습니다. 이날 난의위(鑾儀衛 황제의 의례를 맡은 관청)는 미리 황제의 법가로부(法駕鹵簿 황제가 타는 수레)를 담백경성전(淡泊敬誠殿) 뜰에 차려 놓고 중화소악(中和韶樂)을 담박경성전 처마 밑 양편에 베풀고 단폐대악(丹陛大樂)을 이궁(二宮) 문안 양편의 정자 속에 북향하여 차리고 호종(扈從)하는 화석친왕(和碩親王) 이하 여덟 사람과 공작(公爵) 이상과 몽고의 왕공(王公) 토이호특(土爾扈特) 등은 모두 망포보복(蟒袍補服)을 입고 담박경성전 앞에 이르러 벌여 서고 문무 대신과 조선국 정사와 토사(土司)들은 이궁 문 밖에 각각 등급에 따라 벌여 서고 3품 이하 각 관원과 조선의 부사와 번자(番子)두인(頭人)들은 피서산장(避暑山莊) 문 밖에서 각각 품급(品級)에 따라 벌여 설 것입니다. 이때 예부의 당관(堂官)이 황상께서 용포(龍袍)와 곤복(袞服)을 입고 담박경성전 보좌(寶座)에 오르실 것을 주청(奏請)할 것입니다. 중화소악을 지으면 건평지장(乾平之章)을 아뢸 것이요, 황상께서 자리에 오르시면 음악을 그칠 것입니다. 난의위의 관원이 명편(鳴鞭)을 하라고 소리를 지르면 뜰 아래서 세 번 명편을 하고 명찬관(鳴賛官)이 반열을 차립니다. 이때에 단폐대악을 연주하는데, 경평지장(慶平之章 악장 이름)을 아뢰면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이 여러 왕들과 문무관을 인도하여 각각 반열을 차려 섭니다. 명찬관이 창을 하는데 무릎을 꿇라고 창하면 왕들 이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일어나라고 창을 하면 왕 이하 모든 관원들은 세 번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합니다. 명찬관이 물러서라는 창을 하면 왕 이하 모든 관원들은 다 함께 제자리에 돌아와 서게 합니다. 이때에 음악은 그치고 난의위의 관원이 계하에서 세 번 명편(鳴鞭)하면 예부의 당관은 예식이 다 끝났음을 아뢰고, 중화소악을 지어 태평지장(太平之章 악장 이름)을 연주합니다. 황상이 타신 수레는 환궁하시게 되고 음악이 그치면서 왕공 이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나오게 됩니다.

내감(內監 환관)은 황상이 내전에서 보좌에 오르시기를 주청하면 비빈(妃嬪)들은 용포와 곤복을 갖추어 황상 앞에 내놓으면서 여섯 번 숙배(肅拜)하고, 세 번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는 예를 행하면 예식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황상께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비빈들은 대궐로 돌아가고 황자(皇子)와 황손(皇孫)황증손(皇曾孫)들이 예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이것으로써 삼가 갖추어 주문하나이다.

주객사(主客司)는 행재소 예부의 문서에 의준해서 아래와 같이 알리노라. 건륭 45 8 12일에 내각은 다음과 같은 황상의 유지를 받들었노라.

 

조선은 번봉(藩封)을 대대로 지켜서 본래부터 공손하다고 일컬었고 해가 바뀔 때마다 직공(職貢)을 정성껏 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 때로 특별한 칙유(勅諭)를 내리고 또 자기 나라로 돌려 보내는 등 일이 있을 때는 유구(琉球) 같은 나라와 같이 역시 글을 갖추어 진사(陳謝)하게 되는데 오직 조선국만은 반드시 토물을 갖추고 나서 표문(表文)을 부쳐서 정성껏 바쳐 왔다. 저번에도 그들의 사신이 멀리 왔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폐백을 돌려보낸다면, 발섭(跋涉)하는 수고만 더하겠기에 그것을 높이 평가하여 정공(正貢)으로 삼아서 우대하고, 그 나라는 자기들 직분을 분명히 지켜 정공을 보낼 때에는 따로 예물을 갖추어 바쳐서 왕래하기에 더 복잡하고 보니 한 가지 의식이 더 많아진 셈이다. 지금 우리 두 나라는 서로 성의로 맺어지고 한 몸과 같이 되었으니 이러한 번거롭고 헛된 절차가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올해 짐()의 만수절에도 그 나라에서는 표문을 갖추어 사신을 열하 행재소까지 보내어 우리 조신(朝臣)과 일제히 예를 행했다. 가지고 온 표문과 예물은 그들의 경축하는 정성으로 받으려니와 다음부터는 세시(歲時)나 경절의 정공만을 전례대로 받을 것이며, 그 외의 진사(陳謝)하는 표문이나 예물은 모두 정지시켜 짐의 먼 나라를 생각하여 실상을 주로 하고 허식을 취하지 않는 지극한 뜻에 맞도록 하라.”

신 덕과 신 조는 사정에 의하여 천은을 삼가 사례한다는 일에 대하여 아뢰나이다. 조선국 사신 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 등이 글을 올렸습니다.

 

삼가 황상의 만수절을 당하여 구역(九域)에 경사가 넘쳐 흘러서 본국으로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못하나마 진하(進賀)하는 정성을 본받았던 바 예부에서 성승(聖僧)을 뵈옵고 복을 받았다는 문구를 여기에다 첨가하였다. 이에 격외(格外)의 은상(恩賞)을 특별히 소방(小邦)에 내려 천한 사신에게까지 미쳤으니, 예부에서 이 대문을 고쳐서, “국왕과 사신과 아울러 따라온 사람들에게 비단과 은을 더 주었다.”라고 하였다. 영광의 힘 입은 바는 실로 전후에 없었던 일입니다. 삼가 마땅히 돌아가서 국왕에게 여쭈어서 예부에서 이 대문에다 따로이, “표문을 갖추어 감사의 뜻을 올렸습니다.”라고 첨가하였다. 황은(皇恩)에 감격하게 할지니 예부의 대인들도 대신 전하여 아뢰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이 일을 삼가 갖추어 아뢰나이다. 건륭 45 8 14일에 아뢰고 다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C-001]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주객사(主客司) : 황제 직속 접빈처(接賓處).

[D-002]토사(土司) : 남방 만족(蠻族)들의 추장.

[D-003]두인(頭人) : 만주의 벼슬 이름.

[D-004]건평지장(乾平之章) : 악장(樂章)의 이름.

[D-005]명편(鳴鞭) : 채찍을 울려 정숙하기를 경고하는 의례.

[D-006]명찬관(鳴賛官) : 창홀(唱笏)하는 집사(執事).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필첩식(筆帖式)에 있는 문부 가운데는 이러한 뜻으로써 쓴 글이 원본과 많이 달랐으니 대개 예부가 옮겨 상주할 적에 첨개(添改)한 까닭이다. 사신은 크게 놀라 일 맡은 역관을 시켜 먼저 예부의 조방(朝房)으로 가서 그 이유를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바치는 글을 몰래 고쳐서 우리가 모르게 하였느냐.”

했더니, 낭중(郎中)은 크게 노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친 글이 사실을 전부 빼놓았기 때문에 예부의 대인들이 너희 나라를 위해서 주선하여 이미 품()해서 바친 것인데, 너희들은 덕 되는 것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기를 쓰고 와서 질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고 하였다.

6() 가운데 예부가 가장 거행하는 일이 많아서 천지(天地) 교묘(郊廟)와 산천의 제사를 비롯하여 황제의 기거와 사해 만국의 일이 관계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예부가 거행하는 일에 우리나라에 관계되는 것을 보아서 천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가 사신에게 특별한 은혜가 있은즉, 예부는 여기 따라서 즉시 글을 올려 전주(轉奏)하겠다고 협박하여 명령했다. 이것은 사신의 의리에 해당하는 일이라 사례를 하고 않는 것은 사신의 자유일 것이다. 사신이 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록 외국 사신이 제 스스로 사례를 하여 상주할 것을 요구하더라도 번거롭고 시끄러운 폐단이라고 물리치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오직 글을 제때에 올리지 못하여 전주(轉奏)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사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맘대로 글귀를 고쳐서 대체(大體)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한때 황제를 기쁘게 할 자료만 필요로 하여 스스로 위를 속이는 죄를 범하고 외국의 멸시를 달게 취하고 있다. 예부가 이와 같으니 다른 여러 부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신은 며칠이 안 되어 응당 돌아가야 할 처지여서 자문(咨文)도 절로 받아 갈 만한 터인데, 먼저 서둘러서 발송을 하여 자기 공로를 세우기에 눈이 어두워 마치 위항(委巷) 소인의 행세를 한다. 대국의 일이 어찌 그리 천박하니 이것으로서는 족히 천하의 법도를 삼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심히 걱정되는 것이 우리 일에 분주히 서두르는 것이 우리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황제의 명령이 엄하고 급한 것을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다. 사신은 앉은 채로 예부의 독촉만 받고 어렵고 쉬운 일 할 것 없이 오직 속히 이루어지기만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저들도 모르게 대우를 후하게 해준다는 것으로써 세도를 부리는 것이다. 몇 해 이래로 이미 이러한 규례(規例)가 생겨 통관(通官)과 서반(序班 벼슬 이름)도 그 사이에 조종할 바가 없어 우리 사신에게 불평을 쌓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만일 황제가 일조에 조회를 보지 않고 예부의 거행이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서반 한 사람으로써 넉넉히 우리 사신의 진퇴를 제약할 수 있었고, 더욱더 예부가 분주하게 구는 것은 본래 황제의 기쁨을 사는 미봉(彌縫)의 일이었음에랴. 사신 된 자는 이를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릇 사신의 진퇴에 관한 일은 전혀 예부에 관계되는 것이니, 사신이 독촉해서 이루는 일은 담당 역관을 상대할 따름이요, 담당 역관은 통관에게 부탁할 뿐이요, 통관은 아문(衙門)에 부탁할 뿐이어서 소위 아문이란 것은 곧 사역(四譯)의 제독(提督)과 대사(大使)를 말함이다. 제독과 대사가 예부의 당관(堂官) 사이에는 엄격한 등차가 있어서 쉽게 청탁을 못할 처지이다. 그러므로 사신의 의심과 노여움은 항상 역관에게 있으니, 이것은 대개 자신이 언어를 능히 통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다만 피차에 역관의 혀만 믿기 때문이다. 사신은 이미 속는다고 의심하고 역관은 항상 해명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상하의 사정과 처지가 간격이 생기어 서로 통하지 못하니, 역관에 대한 사신의 독촉이 더할수록 서반(序班)과 통관(通官)의 조종은 더욱 심해진다. 진퇴와 완급(緩急)이 비로소 손아귀에 들어 얼핏하면 뇌물을 찾는 것이 해마다 더하고 늘어 드디어 하나의 전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의 조종을 받는 일이란 돌아갈 기한의 연기나 문서의 접수 여부에 불과할 뿐이지만, 만일 급한 일이 생겨서 대국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전일과 달라서 정상을 보전하지 못하고 보면, 여관 속에 깊이 앉아 있는 자는 외국의 배신(陪臣)에 불과할 뿐이니 장차 누구를 믿을 것인가. 오직 서반에게 목을 달아매어 예부에 관한 모든 일은 비로소 패연(沛然)함을 얻어서 공공연히 조종을 부리게 될 것이니 사신된 자는 가히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일어난 지 백 40여 년에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중국을 오랑캐라고 하여 부끄러워하고 비록 사신의 내왕은 힘써 하면서도, 문서의 거래라든지 사정의 허실은 일체 역관에게 맡겨 두고, 강을 건너 연경에 이르기까지 거쳐 오는 2천 리 사이에 각 주()()의 관원과 관액의 장수들은 그 얼굴을 접해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통관(通官)이 공공연히 뇌물을 찾는데, 우리 사신은 그들의 조종을 달게 받고 역관은 황황히 받들어 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항상 무슨 큰 기밀이나 숨겨둔 것 같은 것은 이야말로 사신들이 망령되이 자기 편을 높은 체하는 데 허물이 있는 것이다. 사신이 담당 역관에 대하여 너무 의심을 하는 것은 정리가 아니요, 지나치게 믿는 것도 또한 옳지 않으니, 만일 일조에 걱정이 생기면 세 사신은 장차 말 없이 서로 쳐다보고 한갓 담당 역관의 입에만 의존할 것이니, 사신된 자는 힘써 연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암은 쓰다.

 

 

[C-001]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 여러 본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가하였다.

[D-001]필첩식(筆帖式) : () 때 각 관청에서 만주어로 문서를 만드는 서기(書記)의 벼슬 이름.

[D-002]전주(轉奏) : 남을 대신하여 어떤 일의 내용을 임금에게 상주하여 전함.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는 모두들 깊은 걱정과 먼 생각이다. 이 편은 원집(原集) 중에 실려 있는 은화(銀貨)를 의논한 한 단락(段落)과 함께 정치를 맡은 자는 마땅히 익숙히 연구하여야 하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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