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3015#home

 

바티칸 대성전에 첫 아시아 성인 성상이…한국인 김대건 신부였다 | 중앙일보

성상이 설치된 장소 인근에서 축복식이 거행됐다.

www.joongang.co.kr

 

https://www.youtube.com/watch?v=0-Q1smMznh8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 솔뫼 성지 -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순례지

http://www.grandculture.net/dangjin/toc/GC06401440?search=TT003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관련항목 보기

신부의 탄생지이며 2014년 8월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문한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천주교 성지.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있는 솔뫼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솔뫼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일뿐만 아니라 솔뫼 출신 인물들과 관련 신앙인들의 활동과 순교가 한국 천주교에 끼친 영향이 상당하기에 일찍부터 주목받는 장소였다. 조선 후기에 솔뫼는 서해 바다와 연결된 하천의 지류를 통해 만조 때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유입되는 지역이었다. 지금은 모두 개간되어 평야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포구가 가까이 있어 외부와의 소통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솔뫼 성지가 위치한 송산리 2구에는 ‘하포(下浦)’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2014년 8월 한국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Asian Youth Day)에 함께하기 위해 방한한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문한 천주교 성지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nOxBvTSx8I

 

 

https://www.youtube.com/watch?v=3am8tuGFPEc

 

 

https://www.youtube.com/watch?v=qkLBN9FVoMM

 

https://www.youtube.com/watch?v=p4XS-dfYHFc

 

https://www.youtube.com/watch?v=80KwUs4KGHg

 

 

 

 

 

https://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3512

 

'해미국제성지' 세계 명소로 만든다 - 대전일보

충남도가 서산시에 있는 \'해미국제성지\'를 세계적인 명소로 키운다.도는 14일 도청에서 서산시 공무원, 전문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워크숍을 개최, 해미 국제성지 세계 명소화 추진 현황을 공

www.daejonilbo.com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10315/105874500/1

 

해미순교성지, 국내 2번째-亞 3번째 ‘국제성지’ 지정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순교성지(사진)가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성지로 최근 지정됐다. 천주교 대전교구에 따르면 교황청은 1일 해미순교성지를 국제성지로 선포하고 승인 교령을 …

www.donga.com

 

https://ko.wikipedia.org/wiki/%ED%95%B4%EB%AF%B8%EA%B5%AD%EC%A0%9C%EC%84%B1%EC%A7%80

 

해미국제성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해미국제성지 전경 노천 성당과 해미 순교탑 해미국제성지(海美國際聖地, 영어: Haemi Sanctuarium Internationale)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에 위치한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 순교 성지이다.

ko.wikipedia.org

 

 
https://www.yna.co.kr/view/MYH20210309006100704



 
해미순교성지
https://www.youtube.com/watch?v=Fn25iNSEjJ0

 

 

https://www.youtube.com/watch?v=qK5pKyvCE18

 

 

https://www.youtube.com/watch?v=T3hokl3SunE

 

 

https://www.youtube.com/watch?v=v3OWvrDuWUY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93655

 

"해미국제성지, 서산의 대표 브랜드 될 것"

2022년 7억 원 예산 확보...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세계명소화 조성 계획 예정

www.ohmynews.com

 

https://www.youtube.com/watch?v=J-0n-oKSaTE

 

 

https://m.blog.naver.com/lsw24001/221358457089

 

[서울 천주교 순례길(2018년 9월)코스 안내] / 아시아 최초로 '천주교 서울 순례길' 공식 선포

서울 순례길 2015년부터 서울시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공동으로 조성..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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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9k3E9zG-Ic8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tarshine867&logNo=221282539485

 

절두산 순교성지 - 천주교 순교자들의 터

천주교 신자들의 피가 배여 있고 흐르는 잠두봉(절두산)과 양화나루 유적지를 처음으로 다녀왔습니다. 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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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종태 (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

해미의 순교 터와 시신을 유기·매장한 터에 대한 연구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203130

초록·키워드

이 글에서는 연구가 미진한 해미 순교 터와 아직 연구가 없는, 해미순교자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터에 대해 규명해 보았다. 그중 읍성 안의 옥은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정사박해(1897~1899)부터 병인박해(1866~1868) 때까지 순교 터를 알 수 있는 56명 중 33명의 순교자가 옥에서 나왔다. 1799년 12월 15일 이보현과 인언민이 매 맞아 순교한 장터는 5일에 서는 남문 안 장터였다. 1817년에 체포된 손연욱이 오래 옥살이하다 1824년에 순교한 터는 옥 근처 샘이 있던 곳이다.
바로(Barraux, 范) 신부가 1935년에 병인박해 당시의 여러 목격 증인과 다수의 전문(傳聞) 증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해미에서 벌어진 천주교도의 처형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한 『해미 순교자 약사』의 내용과 박해 시기 해미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구체적인 구전 자료로 볼 때, 서문 밖에서는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된 1866년 10월 이후와 그 여파가 미친 1867년에만 한시적으로 교수(絞首) 처형과 자리개질 처형만 이루어졌다.
그동안 참수 처형 터로 추정된 서문 밖은 그 터로 입지적 조건이 적합하지 않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반면에 해미천 변 숲정이는 입지적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고, 숲정이에서 일반 죄인도 죽였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있으며, 박화규가 참수 처형된 곳도 숲정이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병인박해 때 6명이 참수당해 순교한 곳은 숲정이 해미천 변 모래밭으로 판단된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방(盤石坊) 중림동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 · 약현(若鉉) · 약종(若鍾) · 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李檗)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주2 · 묵주(默珠)주3 · 상본(像本)주4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 · 권일신 ·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堅振聖事)주5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주6를 주도하였다.

1787년에는 정약용과 반촌(泮村:지금의 惠化洞)에서 천주교 교리를 강술하는 등 교회활동을 영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790년 음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2월 서부도사를 거쳐 6월에 평택현감이 되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 · 권상연(權尙然)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체포되어 서양 서적을 구입해 온 사실과 1787년의 반회사건(泮會事件)이 문제되어 문초를 받고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리고 1792년 초에는 평택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소문 때문에 다시 한 번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천주교 서적을 조선에 전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 정약종 · 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 · 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71sNXPib_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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