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ertngdADg9Q 

 

2대 김병하

https://www.youtube.com/watch?v=KkIazZdeVhE 

 

 

https://www.youtube.com/shorts/g8eIMcgOTuo

 

 

http://blog.naver.com/nsunday/150018154155

 

아라리 名家 3代의 <정선아라리>. CD 소개

아라리 名家 3代의 <정선아라리>. CD 소개     첫 장 -1·2대의 아라리- 1. 부친과 할머...

blog.naver.com

 

아라리 名家 3代의 <정선아라리>. CD 소개

첫 장 -1·2대의 아라리-

1. 부친과 할머니의 소리판

2. 부침 김병하의 아라리(긴소리)

3. “ ” (잦은소리)

4. “ ” (장구 반주)

5. “ ” (향피리 연주)

 

둘째 장-3대 길자의 아라리-

1. 헌정곡(獻呈曲)

2. “ ” (긴소리)

3. “ ” (자즌소리)

4. “ ” (엮음소리)

5. “ ” (반주)

 

-아라리 名家 3代의 <정선아라리>, 그 빛나는 위상-

김연갑/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이사

 

1대 모친-정옥선(83세, 1989 사망)

2대 부친-김병하(金丙河·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명예 예능보유자, 臥病 중)

3대 딸-길자

(吉子·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예능보유자, (사)정선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정선, 아라리 그리고, 김병하 가족

 

어디 이 땅에 (旌善)만이 귀한 국토이고, 아라리만이 이 땅의 소리이고, 김병하 가족만이 ‘소리 집안’이랴만 정선,

정선의 아라리, 정선 아라리의 김병하 가족은 그만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

 

정선은 영서지역의 단전(丹田) 쯤에 위치한 산길·물길조차도 어지러워하는 깊은 오지(奧地)이다.

그래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구절리’,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무릉리’라는 지명을 갖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50대 정도의 지역민들은 산촌 생활과 정서를 유지하고 있어 그 전통에서 채득한 기본문법, 그러니까

음악적이고 문학적인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 민속음악 아라리의 전승체계를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는 곳이다. “국토는 역사요, 운명이다. 국토가 민족의 전(全) 역사를 소장하고 있다면, 그 하나가 민요”일

것이고, 정선에는 정선의 아라리가 그 것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라리’라는 말은 고려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새 왕조에 출사하기를 거부하며 정선에

와 숨어살던 고려 유신(儒臣)들이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誰知)라고 애소한 말 ‘알리’에서 유래한 말이고,

이것이 3음절화 하여 ‘아라리’가 된 것이며, 다시 우리민족이 좋아하는 ‘ㅏ‘, ’l', 'ㄹ‘, ‘ㅇ ’의 결정체인 아리랑’이

된 것이다. 이렇게 아라리가 고려말 정치적 격변을 수용하면서 인근 지역으로부터 독자성을 인정받아 정선의

소리로 특화(特化)되면서, 외지로 확산되어 이 땅에서 불러지는 모든 아리랑의 모천(母川), 연원(淵源)이 된

소리이다. 노fot말은 수천 수, 그 “진술의 양식은 문학적으로는 2행시, 음악적으로는 느린 3박자”이다.

 

아라리, 이 소리로부터 전해지는 정서의 정체는 한(恨)의 선율화이다. 그리고 이 선율은 한(恨)에 의한 것일

지라도 한(恨)을 푸는 것이다. 그래서 사설과 선율로만으로도 세상의 그 많은 수식어와 의문문을 대신하고,

복잡한 시정의 생각들을 다 밀쳐 내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아라리 판의 그 끝은 개운함과 함께 묘한 힘을

갖게 한다. 그러니까 아라리는 정선인들의 삶이 빚은 정한과 꿈의 결정체인 것이다.

 

이런 아라리를 삶 속에서 체화해 온, 그래서 이를 올곧게 전승해 온 3대의 명창 가족이 바로 김병하 가족이다.

1대 모친 정옥선은 80평생 정선에서 살면서 근동에 알려진 명창이었고, 모친의 신화를 이어받은 아들 김병하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였고, 딸 길자도 아버지를 이어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아라리를 계승하고 있어 3대에 걸친 명창가족이다. 이는 ‘아라리할머니’로 이름났던 동시대의 윤용산할머니

(89년 당시 나전 2리 거주)의 경우 소리의 맥을 가족에게 계승하지 못한 점과 대비할 때 주목할 만한 것이다.

 

 

정선아라리의 위상

정선아라리의 위상은 무엇보다도 모든 아리랑의 앞선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는 1977년 문화재관리국이 발행한 <한국민속종합보고서>에서 “정선아라리는 강원도의 모든 아리랑의

원형이며 한국 각지에 퍼져 있는 아리랑의 근원이 되는 민요로 생각 된다”고 했다. 또한 최초의 정선아라리

주제 석사논문인 1980년 고숙경(高淑敬)의 논문 <정선아리랑에 관한 연구> 에서도 연구 배경을 밝히면서

“동부지방의 민요에 속하는 강원도 지방의 정선아리랑을 택한 이유는 정선아리랑은 각 지방의 많은 아리랑

중에서 그 기원이 가장 오래 되었고, 가락과 선법에서 한국 민요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감정 또한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민속학자 김열규도 “산간 노래였던 존재가 들노래로 지출하면서 기능의 확장을 이루었고, 또 향토민요

인 존재가 통속 민요로, 그리고 대중가요로 순차적인 전환을 이루면서 아리랑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어서

전국으로, 그리고 다시 동포들이 거주하는 해외로 퍼져 지역을 확장하였고, 또 나운규의 영화 주제곡으로

채택되면서 연극, 문학 등으로 문화적 범주를 확장할 수 있었다”고 우회적으로 피력하였다.

 

한편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정선아라리가 모든 아리랑의 원형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도 분명하다.

그 첫째는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이 땅의 어느 지방 민속 못지않게 기층문화 행위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음악적 원초성을 확인시켜주는 불균등 장단(3·2 혼소박 2박 2대박)에 얹어 불러지고 있다는 점이고,

셋째는 후렴이 ‘아리’·‘알아리’라는 고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음악적인 분석 결과이기 보다는 문화

적인 측면에서의 해석인 것이다. 이상을 확대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여러 특징적인 논점이 도출된다.

 

1).오늘날 까지 불러지는 역사가 가장 오랜 노래이다.

2). “언어란 인간이 감지하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양식을 규정지은것" 이라고 할 때 토속어의 역사적

꾸러미인 아라리는 우리문화의 보고(寶庫)라는 점이다.

3).아라리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전승 능력을 갖고 각지의 민요나 신민요

또는 가요 장르까지 전 분야에 확산되어 일종의 문화어 또는 문화 코드 또는 상징 키-워드가 되었다.

4).다른 민요와 다르게 일반적인 구비문학의 조건을 초월하여 자생적 시공을 확대, 변이 지향성을 발휘, 전승·재창조

의 길을 걷고 있다. 19세기 전승· 전파가 국내에서의 새로운 층위와 동시에 외국인에게도 동시에 이뤄진 특징이 있다.

5).국문학계에서는 기능과 가사를, 음악학계에서는 선법의 지역적 차이를 중시하는데 이러한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정선아리랑은 매우 중요하다.

6).사설에는 전통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에 이르는 민족사적 수난을 충실하게 그렸으며, 이를

자기화 하여 극복하려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성은 어떤 아리랑이, 어떤 민요가 따를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선아라리의 위상은 모든 아리랑의 위상인 동시에 전체 민요의 위상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아리랑의

원류성, 모천성,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렇다. 이 위상을 정선 지역민들은 아리랑이 아닌 ‘아라리’

로 부르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나름의 자부심을 표시인 것이다.

 

3대의 명창 가족

 

그런데 이 같은 자부심의 표현은 아라리를 대(代)를 이어 전문적으로 전승하려는 것으로서도 나타난다. 그 한 예가

바로 3대에 걸쳐 아라리를 계승하고 있는 김병하 명창 가족의 경우이다. 매우 주목되는 사례인데, 1980년대 각종

학술조사자들로부터 ‘인정받은 아라리가족’으로 김병하는 “인생 자체를 아라리와 함께 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고,

집안 식구 중 어머니, 아내, 딸, 형(김규하)이 모두 소리를 잘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외지의 조사자들에게 가족을

대상으로 한 소리판을 벌려주는 알려진 소리가족이었다. 1985년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민속조사팀에게 가족

이 81수의 사설을 채록케 한 예가 그 하나이다.

 

이들은 비록 화전과 물레방아에서 곡식을 찧는 노동현장이 사라졌지만 이를 기억하고 그 소리를 재현해내고 있는

것은 물론, 그런 현장성의 경험이 없는 나이 적은 가족들도 제 소리를 할 수 있다. 이는 민요가 삶의 노래라고 할 때

정선아라리는 아직도 삶의 현장에서 숨 쉬고 있다는 독보적인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류 명창 정옥선, 북면의 소리내력

모친 정옥선은 정선에서 이름 있는 여류명창이었다. 1980년대 외지인들의 조사대상자로 꿰 소문이 났었다.

85세로 작고하기 직전, 막내 손녀 세 살배기 아령이와 밭을 매며 아라리를 부르는 모습은 자주 방송을 탔다.

모친의 명성은 다음의 두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입증해 준다. 하나는 소를 몰 던 사람이 모친의 아라리소리에

넋을 잃어 그만 소가 귀리 밭에 들어가 밭을 다 절단 낸 적이 있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돌다리를 건너던 이가

모친의 소리에 취해 그만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 버렸다는 애기이다.

 

이런 소리의 소유자였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나라가 인정하는 예능보유자가 된 아들과 손녀의 소리내력을 짚어

준다. 아들 병하는 늘 자신과 딸의 소리길은 모친이 열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정선아라리가 고음에서 저음으로 넘어가는 사이가 급속하고도 가파른 것은 정선의 산하를 소리로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산속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 온 내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아라리를 배웠

는데, 실제로 노래할 때 정선의 가파른 산세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노래한다. 내 어머니도 그랬다.”

 

아라리의 생태론이기도 한데, 1988년 42세 때의 진술이다. 다음은 자신의 소리에 대한 성격을 진술한 것인데,

이 역시 어머니로부터 내림받은 가난에 대해 말한 것이다.

 

“7살 때부터 소리를 했다. 정선아라리는 배고픈 사람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만족감이 없는 상태에서 부르는

한의 소리이다. 그래서인지 터진 목소리가 아니고 배가 고파 기진했을 때 나오는 소리로, 골 뒤에서 치받쳐 나는

소리다. 그래서 대중가수들은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

 

첩첩산중 정선의 유폐감(幽閉感), 삶 그 자체가 그랬던 것이 아라리를 한(恨)서린 소리가 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증언에서 확인 했듯이 김병하의 아라리에도 한이 서릴 만 했다. 그래서 김병하 일가(一家)에게 아라리는 그 힘겨움

의 푸념이고 후렴에서 아리랑고개를 넘겨달라는 대목은 애소(哀訴)의 극치를 이루어 낸다.

 

만년의 모친 소리는 특히 그랬다. 가령 경상도의 슬픈 소리인 ‘어사영’이나 ‘베틀노래’나 ‘동덕이 어멈’ 같은 서사적

인 노래의 짜여진 슬픔과는 다르게, 슬픔과 해학과 그리고 이에 대한 공감이 기복을 이뤄내기 때문에 그 뒷맛이

개운 했던 것이다

 

아라리에 미쳐 ‘아라리처럼 사는’ 김병하

뭐니 뭐니 해도 80년대 중반에서부터 90년대 중반 까지, 정확하게는 1984년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는 시기부터

1995년 뇌졸중 발병 때 까지 김병하의 존재는 뚜렷했고 공로 역시 혁혁하다. 감히 이때를 ‘전태화의 아라리 설명

과 김병하의 소리시대’라고 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외지 취재진이나 답사팀에게 제맛나게 아라리를 알려주었고,

KBS <국악한마당> 같은 방송 출연을 통해 전국에 정선과 아라리를 알렸다. 그만큼 자부심과 책임감이 가득 찼

기 때문이고, 아라리에 대한 나름의 지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는 걸 맞는 비유일런지는

모르나 구한말 고덕명·김천유·박순태(사돌)·정명로의 명성을 계승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결국 정선아리랑이

오늘날의 지위를 갖게 되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대략적인 활동상을 정리한 것이다.

 

북면 고양 출생, 6남매 중 막내. 20세에 진부면 장천리 전제옥과 혼인

1970-부터 3년간 외지 생활

1972- 주식회사 <삼성보경> 총무계장 퇴사

1973- 도원가곡 창간호에 <아라리 전수의 긍지를 느끼며> 발표

1976- 9월 24일 개최된 제1회 정선아리랑제 <아리랑경연대회>에서 2등에 입상 (31세, 정선읍 봉양8리 거주)

1977- 제2회 정선아리랑제 <아리랑경연대회> 때 1등 차지, 이때부터 아라리명창 으로 활동함

1979- <전국민요백일장>에서 우수상 수상

1980- 10, 제5회 정선아리랑제, 지도위원으로 활동

1983- 6월 제1회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 출품작 <정선아리랑> 지도. 아라리 지정 학교 정선여고 소리 지도

1984- <전국민요경창대회> 최우수상 수상, 6월 20일,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 지정받음.

정선아리랑 전수학교와 향토학교 등에서 아라리 전승과 보급 활동

1986- 3월 도서출판 한길사 주관 <한길역사기행>에 딸 길자와 함께 초대되어 소리와 특강을 함

1986- 제11회 <정선아리랑제>, 예능분과 위원으로 활동(정선읍 북실리 주공아파트 104동 310호).

<김병하아라리전수회> 결성, 활동함

1987- 정선군청의 배려로 군 공보과 소속(기능직 10등급)으로 근무하며 활동 함

1990- 2월호 건축문화 전문지 <空間>에 최초로 답사 개념의 아라리유적지 탐방로를 구상한 <정선아리랑의

유적 순환로와 노랫말>을 발표, 관심을 끌었음. 이때부터 “<아리랑박물관> 건립을 꿈 꿨고, 아리랑의 발상지

로서의 정선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 했음.

1993- 10월 아리랑문헌전시회 주관(정선문화예술회관 개관 기념)

1991- 3월, 제10회 신나라레코드 정기국악감상회, <남한의 아리랑을 찾아서> 출현

1994- (사) 한민족아리랑보존연합회 부이사장 취임

1995- 2월 26일 뇌졸증 발병, 가혹한 목 씀으로 언어 중추신경 손상으로 언어장애까지 얻음.

원주 상지대학 한방병원, 언어신경 되찾을 때 까지 무료치료 결정(제6내과 520호) 등 관심으로 회복

기미가 있었으나 10월 22일 재발, 오늘에 이름(현재는 치료 때문에 춘천으로 이주 치료 중)

1996- 7월 강원도문화상 전통예술 분야 수상

 

시인 고은이 말했듯 “김병하의 낭낭한 목청은 우리가 넘어온 성마령 쪽에 대고 정선아라리 청승의

극치를 보여 준다”고 했듯이, 분명 극치에 이른 소리였다. 구성진 가락과 비음의 낭낭한 소리로 감동을

전해주는 마력의 소리꾼이다. 그 마력의 원동력은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 있어도 아라리 한

자락 멋들어지게 하고나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아라리를 부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신명이나요.

알 수 없는 기운이 쑥쑥 올라오는 듯 하지요”라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가득 찬 신명으로 소리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막 어깨피고 살려던 차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소리 참 잘하는 김병하도/ 한번 쓰러지더니 그 소리 영 못 듣겠네”

“아라리 잘하는 고덕명이도/ 한번 가니는 그 소리조차 그만 일세”, 이 소리에 빗댄 것이겠지만 이

사설은 공감되는 사설이 아닐 수 없다. 직접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다소 극적인 기대를 갖는다면 딸 길자의 소리가 자기 이상의 익은 소리로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면, 아마 그 때 병마를 털고 일어나 잃었던 소리를 절절이 풀어내주지 않을까?

 

‘아우라지 처녀’ 같은 아라리 명창, 길자

 

길자(吉子), 이 이름대로라면 ‘길(吉)한 운명의 처자’이다. 걷는 길이 아라리와 함께임으로 아라리에

의한 수혜를 받을 운명이란 말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아직 까지는 아닌듯하다. 어떤 이의 연작

<길자씨의 아라리>는 이를 알려준다.

 

길자씨의 아라리(1)

아라리 소리꾼 김병하선생이 주저 앉은지 몇 년,

내내 감자바위 마냥 앉아만 있다

어느 날 서울 뜨내기들이 오가던 길에 선생집에 들려

병상머리에서 위로랍시고 궁상맞은 한 마디를 했다

“선생님이 이러니까 TV에서 아라리를 들을 수 없었군요”

선생은 껌뻑이던 눈에서 주먹눈물을 떨구었다

허허 허망타 소리꾼에게 목을 빼앗아 가다니…·

손등으로 훔친 눈물이 다시 무릎으로 흘러내렸다

이때 또 한 길손이 혼잣말을 했다

“그려 이건 필시 곡절이 있는겨, 곡절이…··

좌중이 길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길손이 아낀 말 인양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려, 이건 딸이 득음을 하라구 한을 앵겨준겨, 한을…·”

이내 좌중의 시선은 딸 길자씨를 찾았다

길자씨는 문지방 너머에서 먼 산을 보고 있었다.

그 여윈 어깨가 간간히 흔들렸다

흐느낌이 새어났다

아라리 아라리 긴아라리조로…··

우선 아라리와 함께한 생을 정리해 보았다.

 

1968- 11월 생.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전국규모의 경창대회에 참가, 각종 수상

1984- 1월 제주 한라문화제 최우수상(문광부장관상) 수상

1986- <정선아리랑 발표회> 최봉출·김병하와 참가(신촌예술극장)

1986- 9월 제10회 아시안게임 개막식 정선아리랑 시연 참가

1986- 10월 도 학생예능 실기대회 금상(도교육감상) 수상

1988- 5월 제2회 아리랑축전 참가

1988- 9월 88올림픽 축하 한강축제 참가

1990-정선여고 졸업

1992- 6월 정선아라리 전수 장학생

1993- 11월 KBS 8, 15특집 <국악춘추> 출연

1994- 4월 서울시 주관 <생명의 소리> 출연(세종문화회관)

1995- 2월 KBS 국악한마당 출연

1995- 9월 제13회 도 민속경연대회 정선아라리 시연 참가

1996- 5월 제 11회 모범군민상(예술분야) 수상

1996- 8월 <한민족아리랑축전> 참가 (서울 인사동)

1996- 10월 폐광지역 특별법제정 1주년 기념공연 참가

1997- 2월 정선아리랑 이수 인정

1997- 2월 제32회 동계체전 개막식 정선아리랑 시연 참가

1997- 12월 강원도 문화예술진흥 유공포상

1998- 1월 정선아리랑 준보유자 인정

1998- 5월, 윤홍식과 결혼

1998- 10월 KBS <강원의 소리> 녹화 참가

1998- 10월 제21회 정선아리랑제 전통문화 계승 유공포상

2000- 10월 KBS 강원문화 초대석 출연

2002- 3월 문화재청 주관 <한국전통음악대공연>(일본 도쿄대 등 3회)

2002- 10월 문화재청 주관 <한국천년의 소리> 참가(일본 고지현 등 공연) 4회

2003- 4월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 예능보유자 지정 받음

2003- 8월 중국 안위성 문화교류 특별공연 참가

2003- 8월 하게 유니버시아드 대회 기념 <팔도아리랑축제> 참가(대구시)

2004- 12월 문화재청 주관 프랑스 특별공연 참가(기메박물관 및 부장송 오페라 극장 4회)

2005-사단법인 정선아리랑보존회 결성, 이사장 취임

이외 20여 년간 500여회 공연 참가

 

80년대 초에 정선을 찾아 부녀간의 소리를 들은 이들, 특히 여고 초년 시절, 아우라지 나루터에서

‘아우라지 뱃사공아···’나 가곡 <아우라지 처녀>(변훈 곡, 정공채 시)를 들었던 이들은 그 소박한

모습을 잊지 못해 할 것이다. 그래서 서슴없이 길자씨를 ‘아라리 처녀’로 부르길 서슴치 않는다.

모습과 소리깔이 정선 산골 순박한 아낙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 본 이들은 그녀에 대한 평가를 이런 모습에서 보다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심을 꼽는다. 모친 역시 오래 동안 신경통 등의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데, 염려와 간호

가 극진하다.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겠지만, 그의 소리는 감동을 준다. 가슴을 에이게도 하고 눈물을 짖게도 한다. 그렇다고

청승맞지는 않다. 지금까지 아라리를 주제로 탄생된 타 장르의 작품(창극·무용 등)이 있었다면,

아마 그 반 이상은 그의 소리에서 받은 감동의 결과 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는 결코 연약하지

않다. 야무지다.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김병하류’의 아라리 전승과 단체적 활동을 목적으로

사단법인체를 결성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단법인 <정선아리랑보존회>의 결성

인데, 타 지역에 비해 법인체(法人體)적 대외 활동이 미비했던 한계를 스스로 헤쳐 낸 것이니,

당참을 보여준 것이다. ‘김병하류’의 아라리 미래상을 보는 듯 하여 뿌듯하다.

 

이번의 음반은 그녀의 효성심과 활동상을 깊이 이해하는 음반사 <신나라>와 후원단체의 뜻으로

부친 회갑을 기념하여 헌정되는 것이다. 뜻 깊고 아름다운 효성과 소리공력의 결과이지 않을 수

없다.

 

병상의 부모 공양, 아내와 엄마로서의 주부 활동, 소리꾼과 소리 지도자로서의 분망함, 단체장

으로서의 공인활동, 등등····. 평범하지 않은 다난한 삶이다. 이는 분명 아라리에 대한 남다른

공력(功力)이 될 것이다. 상처가 되려 빛나는 진주로 되듯이, 그리고 <서편재>의 봉화가 제

소리를 찾듯, 이 다난한 삶은 아라리의 감동을 빚어 낼 것이다. 이를 기대하게 한다. 이 음반이

그 첫 모습, 첫 감동일 것이다.

 

<한길역사기행>을 함께 했을 당시 함께했던 고은선생이 깨우쳐 주었듯이 “사람은 제 자신의

땅에 대하여 뭔가를 기록한 일이 없으면 죄가 된다. 스스로 기록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것

까지 대행하는 그 일이 국토기행이다. 이런 국토기행이 역사와 창조의 핵심에 속하는 그 일!”

이라 했듯이 한 때 필자도 이런 명분으로 정선 땅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병하

선생과 딸 길자씨를 만나게 되었다. 1980년대초 정선읍내 <백양다방>의 마담 김재숙씨의

적극적인 중개로 만나 역전 근처 전기톱 소리가 요란했던 제재소 뒷방에서 30여분 정도 대화

를 나눈 것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의 소리 진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1986년 3월

길자와 함께 <한길역사 기행>에서 얻은 감동에서다.

 

와병 중인 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헌정한 이 음반으로 3대의 소리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그

때의 감동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첫 장에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이종과 고종 사촌들과 벌인 소리판을 담았다. 그리고 김병하

선생의 소리를 여러 자료에서 선별해 담았다. 특히 직접 장고 반주에 의한 소리와 향피리

연주도 담았다. 사설은 약 80여 수가 된다. 이들 자료는 거의 80년대 말 카세트에 담긴 것

으로 상태가 고르지는 못했다.

 

두 번째 장에서는 길자씨의 소리로 첫 번째에서 반주에 의한 헌정곡으로 하고, 무반주와

반주에 의한 세 가지 형태(긴소리, 자즌소리, 엮음소리)를 담았다. 특히 잦은 소리는 물박

장단과 함께 했다. 사설은 약 150여 수 이다. 사설은 길자씨의 소리만을 수록한다.

-끝-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Rainbow / The Temple of the King  (0) 2010.12.02
김길자의 소리 사설  (0) 2010.12.01
김길자/긴아리랑  (0) 2010.12.01
정선아리랑 가사  (0) 2010.12.01
정선아리랑  (0) 2010.12.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