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나의 중형이 언젠가 이손곡(李蓀谷{이달)의 유송경시(遊松京詩) 가운데

宮前輦路生秋草 궁전련로생추초

臺下毬庭放夕牛 대하구정방석우

대궐 앞 거둥하던 길엔 가을풀 스산하고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라는 구절을 칭찬하였으나 사인(舍人) 홍적(洪迪)의,

臺空猶半月 대공유반월

閣廢舊瞻星 각폐구첨성

누대는 비었어도 반월대요

각은 황폐하나 옛 첨성각이네

하는 시만큼 절실하지는 못하다.

홍적(洪迪)의 자는 태고(太古), 호는 하의(荷衣)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27. 나의 중형이 일찍이,

“홍덕공(洪德公:홍경신)ㆍ이명보(李明甫)의 시는 모두 일가라 이를 만한데, 홍덕공은 장편을, 이명보는 칠언율시를 특히 잘 짓는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또,

“명보(明甫:이덕형)는 반드시 대제학(大提學)이 될 것이다.”하더니,

후에 명보는 나이 겨우 서른이 넘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로는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대제학이 되리라던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홍(洪)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는 하였건만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하여 벼슬이 변변치 못하였으니, 재주와 팔자는 이처럼 같지가 않다.

덕공(德公)의 이름은 경신(慶臣), 호는 녹문(鹿門)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만정당(晩全堂) 가신(可臣)의 아우로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명보(明甫)의 이름은 덕형(德馨), 호는 한음(漢陰), 광주인(廣州人)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28. 홍덕공(洪德公:홍경신)의 봉래풍악가(蓬萊楓嶽歌)를 나의 중씨가 아침 저녁으로 한번 죽 읊으면서 장단을 맞추며 감탄하였다.

그 시는 이태백(李太白)의 천로음(天姥吟)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종횡(縱橫)ㆍ억양(抑揚)에 한 자도 세속에 찌든 태가 없다.

반통투수사(飯筒投水詞)ㆍ기택요(沂澤謠) 등 작품은 모두 호방하며 기력이 있으나, 율시(律詩)나 절구(絶句)는 장편만은 조금 못하고,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운부(雲賦)ㆍ격구부(擊毬賦) 같은 작품은 양봉래(楊蓬萊:양사언)가 몹시 부러워하며,

“사마 장경(司馬長卿)과 천년 뒤에 고하(高下)를 다툴 만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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