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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漢 學者들의 詩經 解說에 대한 새로운 理解
金學主(전 서울대 중문과 교수)
1. 서론 2. 毛詩, 三家詩와 故事 3. 「毛詩序」의 周南 해설 4. 賦에 대하여 5. 맺는 말 |
1. 서론
詩經을 공부하면서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큰 의문의 하나는 西漢에 나온毛詩와 三家詩의 詩解說 내용이 왜 그러한가 라는 문제이다. 시경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西漢으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서한의 詩經學을 대표하는 저술이 모시와 삼가시이다.
그리고 이들 중 삼가시는 일찍이 魏晉대에 이르러 거의 전해지지 않게 되었으나, 모시만은 東漢 鄭玄(127-200)의 箋이 나오고 唐대 孔穎達(574-648)의 正義가 나오면서, 전통적인 시경 해설서로서 학계에 군림해 왔다. 그러나 宋대로 들어와 모시를 제쳐놓고 자기 뜻대로 시경을 해설하기 시작하고1), 다시 모시에 대한 의문까지도 제시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2)
그 결과 청대에 와서는 姚際恒(1647-?)의 詩經通論이나 崔述(1740-1816)의 讀風偶識 처럼 시경연구의 중점을 모시의 詩說의 부정에 두었다고도 할 수 있는 저술까지도 나왔다. 결국 지금 와서는 모시의 시 해설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문 형편이 되었다. 屈萬里(1906-1979)교수의 「先秦說詩的風尙和漢儒以詩敎說詩的迂曲」(屈萬里先生文存, 第一冊 所載) 같은 논문은 현대의 시경에 대한 학자들의 인식을 가장 잘 대표해 준다.
그러나 한 대의 학자들이 단지 “詩敎觀念” 때문에 시경의 시의 뜻을 “迂曲”시켜 해설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速斷인 듯 하다. 굴만리 교수가 “우곡한 說詩”의 보기로 들고 있는 「關雎」편의 경우를 보자. 우선 魯說로 다음 두 대목을 인용한 뒤 齊詩와 韓詩 및 모시를 각각 한 대목씩 인용하고 있다. “옛날 주나라 강왕은 文王의 盛世를 계승하였으나, 어느 날 아침 늦게 일어나 夫人은 佩玉소리를 내며 움직이지 않고, 宮門에서는 딱다기를 치지 않자, 關雎의 작자가 잘못될 기미를 알고 지은 것이다.”4) “孔子는 시를 분류하면서 關雎로 시작을 삼았다. 그것은 가장 위에 계신 분은 백성들의 부모이니, 后夫人의 행실이 天地에 부합되지 못하면 곧 神靈스런 傳統을 받들어 만물을 적절히 다스릴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에서 ‘아리따운 얌전한 여인은 君子의 좋은 짝이라’고 한 것은, 그의 貞淑함을 다하고 그의 節操를 바꾸지 아니하며, 情慾的인 감정을 용모와 몸가짐에 개입시키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즐기는 뜻을 행동에 들어내지 아니하게 되어야만 至尊의 짝이 되어 宗廟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紀綱의 으뜸이며 王者로서의 敎化의 發端인 것이다.”5) “시인은 雎鳩가 貞潔하고도 짝을 짓는데 신중하여 소리로서 추구하면서도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조정에서 물러나 私宮으로 들어가도 后妃는 맞이하여 뵙는데 법도가 있어, 應門에서는 딱다기를 치고 북재비는 북을 울리어, 물러나 편안히 지냄에 몸은 편안하고 뜻은 밝게 되는 것이다. 지금 높은 사람들은 안으로 女色에 기울어져 있다. 현명한 사람이 그 싹을 보았기 때문에 關雎를 읊어 淑女는 용모와 몸가짐을 올바로 해야함을 말함으로써 시대를 풍자한 것이다.”6) 이에는 필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서한의 학자들이 그러한 풀이를 한 확실한 근거가 전하지 않기 때문에 송대 이후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학자들은 「모시서」나 삼가시의 해설을 거의 무시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시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옛 학자들의 업적의 경시는 결국은 시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 이 小論에서는 이들 서한 학자들의 說詩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 시는 민간의 가요에서 나온 것이라는 전제 아래 옛날 중국 민간에 이들 가요들이 전해지던 상황을 상정하며 추구해보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 西漢의 시경해설은 故事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데 먼저 주목하였다. 중국 민간의 가요들은 說書나 歌舞戱 같은 요러 가지 曲藝와 함께 널리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西漢의 시경해설도 그러한 戱曲的인 民藝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해설을 하게 된 것이라고 추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毛詩序의 周南 해설이, 그 시들을 歌舞戱에서 불리어지던 노래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임을 周頌의 大武樂章을 참고로 하며 추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경의 賦에서 시작하여 楚辭와 漢賦 및 俗賦에 이르는 賦 계열의 작품들도 모두 歌舞戱的인 曲藝와 관련이 많다는 사실에 착안하게 되었다. 이 小論은 이러한 西漢 학자들의 시경해설의 성격을 추리를 통해서일 망정 어느 정도 증명해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시경의 시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毛詩,三家詩와 故事 시경은 敍情詩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도 「모시서」나 삼가의 남아 전하는 해설을 보면 상당히 복잡한 故事를 동원시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미 앞에 든 「관저」시의 해설만도 좋은 보기가 된다. 왕선겸의 <시삼가의집소>에는 앞 서문에 인용한 것 이외에도, 또 다음과 같은 「魯說」네 조목이 더 보인다. “주나라가 점차 쇠하여지자 康王이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畢公은 탄식을 하면서 옛날의 도를 생각하고, 저 관저의 새는 본성이 두 배필을 갖지 않으며, 周公을 구하여 얌전한 여자에게 짝지어줌으로서 잘못되어지는 것을 막고 나빠지는 경향을 없앰으로써 임금을 풍자하여 일깨워주려 하였음에 감동하였다. 공자는 그런 점을 위대하게 여기어 책의 첫 머리에 배열하였다.”9) “주나라의 도가 무너지자 시인이 잠자리를 근거로 하여 관저를 지었다.”10) “주나라의 강왕 부인이 늦게 조정에 나왔는데, 관저의 작자는 그것을 예견하고 숙녀를 얻어서 군자에게 짝지어 주려 했던 것이다.”11) 모두 어디에도 그럴만한 근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얘기들이다. 한시에서는 나라에 있어서 后妃의 행실의 중요성을 말한 뒤 “지금의 大人들이 안으로 女色에 빠져있어, 賢人이 그런 사실을 보고서 시세를 풍자하기 위하여 「관저」시를 읊은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제시와 모시에서는 대체로 后妃의 행실을 읊은거라 말하고 있다. 모두 「관저」라는 시에서는 전혀 그런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얘기들이다. 시 해설의 근거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짧은 노래의 가사 해설치고는 관계가 전혀 없어 보이는 얘기들이 상당히 여러 가지로 인용되고 있다. 周南의 여덟 번째 시인 「芣苢」는 다음과 같은 시가 3 장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간단한 시이다. 采采芣苢, 薄言采之. 采采芣苢, 薄言有之. 질경이를 캐고 캐세, 캐어오세. 질경이를 캐고 캐세, 듬뿍 캐세. “宋나라 사람의 딸로 蔡나라 사람에게 시집간 사람이 있었다. 채나라로 시집간 뒤에 그에 남편이 나쁜 병에 걸리어 그의 어머니가 딸을 개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남편의 불행은 곧 저의 불행이기도 합니다. 어찌 그 분을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혼인의 도는 하나입니다.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면 평생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여 나쁜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 듯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질경이 풀을 뜯고 또 뜯되, 비록 그 냄새가 나쁘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뜯고 따고 하는 일로 시작하여 끝에 가서는 품고 앞치마에 담고 하여 갈수록 더욱 친근히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부부의 도에 있어서야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그분에게 큰 일이 난것도 아니고 또 저를 쫓아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끝내 그의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부이」시를 지은 것이다. 군자가 말하였다. ‘ 송나라 여인의 뜻은 매우 정숙하고도 한결같다.’ ”12) 또한 모시에 있어서는 國風 周南의 시 11 편 모두를 后妃(文王의 妃)와 관계있는 작품으로 해설하고, 召南의 시 14 편은 대부분의 시들을 夫人(諸侯의)과 관계지어 해설하고 있다. 그리고 國風 이하 小雅에서 頌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들의 해설을 보면 연이어 여러 편의 시들을 한 사람에 관한 얘기와 관련지어 해설한 곳이 많다. 보기를 들면 衛나라의 시(邶, 鄘, 衛 세 國風)를 보면「綠衣」,「燕燕」,「日月」,「終風」,「碩人」 등 여러 편을 衛나라 莊公의 부인인 莊姜의 얘기와 관련시켜 해설하고 있고, 그 밖에도 州吁의 故事, 宣公과 그의 부인 夷姜과 宣姜 및 두 아들 伋과 壽에 관한 故事, 許穆夫人, 宋桓夫人, 共姜, 黎侯 등에 관한 故事가 동원되고 있다. 鄭나라의 시를 보면 정나라 莊公과 그의 世子였던 忽 및 武公?文公과 高克의 고사를 인용하여 해설하고 있고, 齊나라 노래에서는 여러 편을 齊나라 襄公과 그의 누이 文姜의 얘기와 관련지어 해설하고 있는 등, 보기를 모두 들기조차도 힘든 지경이다. 小雅에는 宣王(B.C.827-B.C.782 재위)을 찬미하고 幽王(B.C.781-B.C.771 재위)을 풍자한 것이라고 해설한 시가 수 십 편에 이르고, 大雅에는 文王(B.C. ?-B.C.1135 재위)의 덕을 칭송했다는 작품에 이어 武王(B.C.1134-B.C.1116 재위)과 成王(B.C.1115-B.C.1076 재위)을 기린 시들에 이어, 厲王(B.C.878-B.C.828 재위)을 풍자하고 宣王을 찬미한 것이라는 작품들이 뒤를 잇고 있다. 頌은 본시가 조상들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시들이니 그것들이 여러 위대한 조상들의 고사와 관련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들 시는 비록 간단한 노래라 하더라도 상당히 복잡한 故事와 관련을 갖게되기 마련이다. 보기로 邶風의 「日月」시를 든다. 모두 4 장으로 이루어진 시이나 대체로 아래의 첫 장과 같은 내용을 되풀이 노래한 시이다. 日居月諸, 照臨下土. 乃如之人兮, 逝不古處. 胡能有定? 寧不我顧. 그런데 그 분은 옛처럼 대해주지 않네요. 어찌하면 마음 잡을 수 있을까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衛나라 莊姜이 자신을 슬퍼하는 것이다. 州?의 難을 당하여 자기가 先君으로부터 보답을 받지 못하고 곤궁하여진 것을 슬퍼한 시이다.”14) 이 「모시서」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莊姜은 衛나라 莊公의 부인이며 齊나라 임금의 딸인데, 현숙하면서도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陳나라에서 온 戴?가 아들 完을 낳아 莊姜은 그를 친아들처럼 길렀고, 莊公이 죽은 뒤엔 뒤를 이어 桓公이 되었다. 그러나 妾의 아들 州?가 평소에도 교만하였는데, 결국은 桓公을 죽이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 莊姜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대강 이런 정도의 故事는 알아야만 「모시서」의 해설을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魯說에서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宣姜은 齊나라 제후의 딸이며 衛나라 宣公의 부인이다. 본시 宣公의 부인 夷姜이 伋子를 낳아 太子가 되어 있었다. 다시 齊나라의 선강에게 장가들어 그는 壽와 朔을 낳았다. 이강이 죽은 뒤에 선강은 수를 태자로 삼고자 하여, 수와 삭과 더불어 급자를 처치할 모의를 하였다. 마침 선공이 급자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자, 선강은 곧 몰래 力士들로 하여금 국경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를 죽이도록 하면서, ‘흰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흰 깃털을 꽂은 깃발을 갖고 오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죽이라’고 일렀다. 수는 이 말을 듣고 태자에게로 달려가 ‘태자께서는 피하십시오’하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급자는 말하였다. ‘안되오! 아버지의 명을 버린다면 어찌 아들이라 할 수 있겠소?’ 수는 태자가 틀림없이 그대로 갈거라 생각하고, 태자와 술을 마시고는 그의 흰 깃털이 꽂힌 깃발을 갖고 자신이 갔다. 도적들은 그를 죽였다. 급자는 깨어나서 흰 깃털이 꽂힌 깃발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급히 뒤쫓아 달려갔다. 가보니 수는 이미 죽어있었다. 급자는 수가 자기를 위하여 죽은 것을 가슴아파 하며 곧 도적들에게 말하였다. ‘너이들이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나이다. 이 사람이야 무슨 죄가 있느냐? 나를 죽여라!’ 도적들은 그도 죽여버렸다. 두 아들이 죽은 뒤 삭이 마침내 뒤이어 태자가 되었다. 선공이 죽은 뒤 삭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가 惠公이다. 그는 끝내 후손이 없었고, 혼란은 五世를 두고 이어지다가, 戴公 때에 이르러서야 안정되었다. 시경에 읊기를 ‘그런데 그 분은 소문이 좋지 않네요’라 한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15) 시는 간단한데 사설이 무척 길다. 西漢 학자들의 대부분의 시 해설이 이러하다. 그런데 宋대의 歐陽修, 王柏, 朱熹 이후 「詩序」에 대한 의심이 보편화되면서 시경연구는 이러한 西漢 학자들의 故事를 이용한 해설이 附會임을 증명하려는 노력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淸대에 와서는 姚際恒이 詩經通論에서 「모시서」를 僞說이라 규정하고 시의 해석에 있어서 「모시서」의 망녕됨을 증명하기에 힘쓰고 있고, 崔述의 讀風偶識 같은 책은 거의 「모시서」의 부정, 특히 거기에서 시의 해설을 위하여 인용하고 있는 故事가 시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讀風偶識의 「通論詩序」를 보면 「모시서」는 東漢의 衛宏(25 전후)이 지은 것이라 단정하고, 삼가시에서도 특히 노시(孔子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와 제시(孔子의 이웃 고장이라 하여)는 七十子로부터 전해진 것이며, “책이 일찍이 나와 그것을 본 사람들이 많아 傅會를 하기가 비교적 어려웠다”, 그러나 모시는 후세에 나온 것이어서 시 해석에 멋대로 傅會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모시는 늦게 나와 左傳이 이미 세상에 유행하고 있었음으로, 그것을 갖다가 억지로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좌전의 기록과 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考證하여 보면 전혀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들이 있다.”16)고 하면서, 「모시서」에서 얘기하고있는 故事가 그 시의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학자들은 완전히 西漢 학자들의 시 해설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邶風 「綠衣」를 해설함에 있어서는 姚際恒까지도 그 시가 莊姜의 故事와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고, 崔述은 삼가시만은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앞에서 인용한 「關雎」, 「芣苢」, 「日月」시의 경우만을 놓고 보더라도, 모전이나 마찬가지로 삼가시에서 인용하고있는 故事도 시 본문과의 직접적인 관련 근거는 전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감히 西漢 학자들이 아무런 이유나 근거도 없이 그러한 시 해석을 했다고 단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음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듯 하다. 좀 더 과감한 「시서」에 대한 부정과 시 본문에 따른 새로운 시의 해석은 주로 외국의 중국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17) 그러나 西漢의 학자들이 근거나 이유도 없이 시의 해석에 그러한 故事나 說話를 인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시경의 시들은 틀림없이 여러 가지 故事나 說話와 관계가 있는 노래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다만 이 시들이 고사와 어떻게 관련이 되고 있느냐고 하는 점이 문제이다. 3. 「毛詩序」의 周南 해설 우선 周南 11 편의 「毛詩序」를 보기로 하자. 1)「關雎」; 后妃의 德을 읊은 것이다. 風의 시작이니, 天下를 風하고 夫婦를 바로잡는 근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鄕人들이 쓰고 나라에서도 쓰는 것이다.----그리하여 「關雎」는 淑女를 구하여 君子에 짝지어 주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걱정은 현명한 이를 추천하는 데에 있고 女色에 빠지지 아니하며, 충심으로 얌전한 이를 추구하고 현명한 재질을 생각하여 훌륭함을 손상케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관저」의 뜻이다.18) 2)「葛覃」; 后妃의 근본을 읊은 것이다. 후비는 부모의 집에 있을 적에는 곧 뜻이 부녀자들의 일에 있었다. 몸소 검소하게 절약하고 빨래한 옷을 입으며 스승을 존경하기 때문에 곧 覲親을 하여 천하를 婦道로 敎化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19) 3) 「卷耳」; 후비의 뜻을 읊은 것이다. 더욱이 君子를 보좌하여 현명한 이를 구하고 벼슬자리를 살핌이 마땅한 것이다. 신하들의 수고로움을 이해하고, 속으로는 현명한 이를 추천할 뜻을 지니되 바르지 않거나 사사로운 뜻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생각하면서 걱정하고 부지런하게 행동하는 것이다.20) 4) 「樛木」; 후비가 밑의 첩들을 잘 살펴주는 것이다. 밑의 첩들을 잘 살펴주면서 질투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21) 5) 「螽斯」; 후비가 자손이 많음을 읊은 것이다. 여치처럼 투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손이 많다는 것이다.22) 6) 「桃夭」; 후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투기를 하지 않으면 곧 남녀가 올바르게 되어, 제 때에 혼인을 함으로써 나라에 시집장가 못 드는 사랑이 없게되는 것이다.23) 7) 「兎罝」; 후비의 교화를 읊은 것이다. 관저의 교화가 행하여지니 모두가 덕을 좋아하게 되어 현명한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24) 8) 「芣苢」; 후비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이다. 평화스러워지면 부인은 자식이 있음을 즐기는 것이다.25) 9) 「漢廣」; 덕이 널리 미치게 된 것이다. 文王의 道가 남쪽 나라에 퍼져, 아름다운 교화가 江水와 漢水 지역에도 펴져, 예를 범하려는 이가 없게 되어 求愛를 해도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된 것이다.26) 10) 「汝墳」; 道의 교화가 행해진 것이다. 문왕의 교화가 여분의 나라에 행하여지니, 부인이 그의 군자를 생각하고 올바름으로써 勉勵하는 것이다.27) 11) 「麟之趾」; 관저의 應驗이다. 관저의 교화가 행하여지니 곧 천하엔 非禮를 범하는 자가 없게 되어 비록 쇠하여 가는 세상의 公子라 하더라도 모두 信厚하기가 麟趾의 시대와 같다는 것이다.28) “시는 풍?아?송으로 나뉘어지는데, 송을 ‘성덕을 찬미하는 것’이라 풀이한 것은 餘義이며, 송을 ‘형용’이라고 풀이한 것이 본 뜻인 것이다. 또한 송(頌)이란 글자는 곧 용(容)이란 글자이다.----오직 三頌 각 장은 모두가 舞容이기 때문에 송이라 일컫는 것이다. 마치 元나라 이후의 戱曲에서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가 악기와 더불어 다함께 움직이는 것과 같다. 풍?아는 다만 南宋사람들이 악기로 節拍하며 사설을 노래하던 것과 같을 따름이어서 반드시 악기연주의 節拍을 따라서 춤추지 않아도 되었다.”30) 그가 頌은 모두가 춤이 동반되던 시라고 주장했던 점은 뒤에 王國維(1877-1927)에 의하여 부정되지만,31) 송의 시들을 元雜劇이나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고, 풍?아의 시들을 南宋의 講唱이나 같은 성질의 것으로 본 것은 뛰어난 견해라고 본다. 王國維가 송의 시들만이 모두 춤을 동반한 것은 아니었음을 논증하며, 송과 풍, 아의 차이는 춤이 있고 없는데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음악의 차이에서 온 것 같다고 논증한 것도 빼어난 견해라 할 수 있다. 곧 왕국유의 의견을 완원의 이론에 확대 적용시키면, 송에도 원잡극 같은 성격의 노래뿐만이 아니라 남송의 강창 같은 성질의 노래가 있고, 풍?아에도 남송의 강창 성질의 노래뿐만이 아니라 원잡극 성격의 노래도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왕국유는 「周大武樂章考」32)에서 周頌 중의 1)「昊天有成命」 2) 「武」 3) 「酌」 4) 「桓」 5) 「賚」 6) 「般」의 여섯 편을 大武에서 노래불리워지던 악장이라 하였다.33) 禮記 권 39 樂記를 보면 孔子는 賓牟賈와의 대화 속에서 大武의 연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樂이라는 것은 상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방패를 들고 우뚝 서 있는 것은 무왕의 일을 상징하는 것이오, 소매를 휘두르며 발을 구르는 것은 太公의 뜻을 상징하는 것이오, 춤추던 행렬이 어지러워지다가 모두 앉는 것은 周公과 召公의 다스림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武를 추기 시작할 적에는 북쪽으로 나아갔다가, 再成(곧 第二章)에는 商나라를 멸망시키고, 三成(第三章)에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四成에는 남쪽 나라들이 평정되며, 五成에는 陝州를 나누어 周公은 왼편을 召公은 오른 편을 다스리게 되며, 六成에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이다. 천자와 대장이 방울을 흔들며 춤을 지휘하여, 네 번 치고 찌르고 하는 것은 온 중국에 威勢가 극성함을 뜻하는 것이다. 부서에 따라 나누어져 나아가는 것은 일이 이미 다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제 자리에 오래 서 있는 것은 諸侯들의 來朝를 기다리는 것이다.”34) 다시 左傳 宣公 12 년을 보면, “武王克商作頌曰”하고는 「時邁」의 시구를, “又作武”하고 “其卒章曰” 아래 「武」의 시구를, “其三曰” 아래 「賚」의 시구를, “其六曰” 아래 「桓」의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모시서」를 보면 「昊天有成命」은 “천지에 郊祀를 지내는 것.”37), 「時邁」는 “巡狩하다가 하늘과 山川에 告祭하는 것.”38), 「賚」는 “廟堂에서 공이 있는 신하들을 제후에 봉하는 노래.”39) 「桓」은 “군사들을 훈련하고 하늘과 정벌할 땅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노래.”40), 「般」은 “巡狩하다가 四嶽과 河海를 제사하는 노래.”41)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 여섯 편뿐만이 아니라 周頌의 다른 여러 시들도 大武를 연주할 때 노래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곧 一成에 한 편의 시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편의 시를 노래불렀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 周頌 첫머리 淸廟之什의 앞 세 작품은 工祝(巫)과 文王의 尸(神保)의 對歌인 듯 하다고 추리한 학자도 있다.42) 곧 「維天之命」은 工祝이 노래한 것이고, 「淸廟」는 그에대한 答歌이며, 「維淸」은 다시 工祝이 그에 대하여 和答한 노래라는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음으로 이를 믿을 수는 없지만 시경의 시들 중에는 두 사람 이상의 사람들이 주고받으며 불렀다고 추측되는 시들도 있음을 알 수는 있다. 그것은 頌 만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風, 雅에도 독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西漢 학자들의 說詩가 故事 또는 說話와 관련이 많고, 宮廷에서도 大武 처럼 노래(여러 편의 시)와 춤으로 故事를 연출하는 歌舞戱 같은 曲藝가 연출되었음을 생각할 때, 周南 11 편 시에 대한 모전이 모두 后妃와 관련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들 시가 后妃에 관한 故事를 연출하는 講唱 또는 戱曲 형식에 동원되었던 노래들임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魯詩에서 「關雎」시를 康王에 관련지어 해설한 것은, 魯나라 지방의 가장 대표적인 曲藝에서 그 시가 康王의 일을 연출할 때 노래불리어졌기 때문에 그런 해설을 한 것일 것이다. 따라서 「「芣苢」 같은 시는 魯나라에 있어서는 蔡나라로 시집 간 宋나라의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나뿐 병이 생기어 그의 어머니가 改嫁할 것을 종용하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貞節을 지키며 남편을 섬기는 얘기를 연출할 때 부르는 노래여서,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긴 얘기를 바탕으로 한 해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關雎」시는 내용이 이상적인 이성을 그리는 시인데도, 文王이 덕이 많은 그의 后妃를 구하여 결혼하는 과정을 연출하는 중에 부르던 노래여서 모전에서는 “后妃의 덕을 노래하는 시”라 풀이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卷耳」시 같은 것은 나라 일로 집을 떠나 있는 사람이 집을 그리는 시이지만, 文王이 后妃와 떨어져있을 동안의 일을 연출할 때 노래부르던 것이어서, 모전에서 “后妃의 뜻을 노래부르는 시”라고 풀이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그 밖의 시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모전에서 召南의 시 14 편을 모두 諸侯의 夫人과 관련지어 해설한 이유도 그처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밖에 國風들 중에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 사람의 고사와 관련된 시가 여러 편씩 연이어 있는 것도, 그 시들이 그 사람에 관한 故事를 연출하는 曲藝에서 노래부르던 것이기에, 그러한 해설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보기를 들면 豳風 7 편은 모전에서 모두 周公과의 관련 아래 시의 뜻을 해설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뒤에 다시 논할 예정이지만 書經 金縢 편의 얘기 같은 周公의 故事를 연출할 때 불리어지던 노래였을 것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지금 우리가 본문만을 읽고 이해하는 것과는 달랐기 때문에, ??儀禮??를 보면 鄕飮酒禮(第四)와 鄕射禮(第五)? 燕禮(第六) 등에서 음악연주와 노래를 통한 줄김이 무르익으면 끝에 가서 모두 周南의 「關雎」「葛覃」「卷耳」와 召南의 「鵲巢」「采蘩」「采蘋」을 合歌하고 있는데, 이런 연유 때문에 그런 노래들이 지금 우리의 견해와는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 연주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시경 국풍은 흔히 여러 나라의 민요를 모아놓은 것이라 말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순수한 민요의 모습 그대로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의 내용이 상당히 귀족화 하여 있기 때문이다. 주남 11 편의 시들을 먼저 검토해 보기로 한다.「관저」에서는 “鐘과 북을 울리며 즐긴다” 노래했는데, 종과 북은 귀족들의 雅樂에나 쓰이는 악기이다. 「갈담」시의 여인에게는 귀족에게나 있었던 가정교사 비슷한 “師氏”가 있다. 「권이」도 주인공이 말을 타고 하인을 거느리고 금 술잔과 쇠뿔 잔에 술을 마시니, 집을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귀족의 武人이다. 「규목」시도 밑의 사람들을 돌보아주며 복을 누리는 君子이니 귀족인 듯 하다. 「螽斯」시는 자손이 많은 것을, 「桃夭」는 화려한 결혼을, 「兎罝」는 스스로가 公侯의 心腹임을, 「汝墳」은 군자가 불타는 듯한 왕실에 대한 걱정을, 「麟之趾」는 公子와 公族을 읊고 있으니 모두 순수한 민요 그대로의 모습이라 볼 수는 없다.43) 先秦時代에는 한자의 字體도 통일되어있지 않았고 글을 쓰는 용구도 매우 불편한 위에, 글은 실상 봉건 지배계급의 專有物이었다. 따라서 민간의 노래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 그것을 베끼는 사람, 그것을 읽는 사람의 意識에 의하여 그 내용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경의 시들이 민요의 본래 모습에서 약간 벗어나 귀족화 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시경은 누가 언제 편찬한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그것이 孔子(B.C.551-B.C.479)에 의하여 정리되어 萬人의 교과서인 六經의 하나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西漢의 시경연구와 그 시의 해석은 그러한 기초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毛傳에 유가적인 倫理意識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毛傳에서 周南의 시들을 天子와 后妃의 일에 연관시켜 해설하고, 召南은 諸侯와 그 夫人,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들을 어떤 사람의 故事를 바탕으로 하여 그를 찬미하거나 풍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민간에 있어서나 상류계층의 演藝에 있어서도 이 시들은 더욱 다양하고 자유롭게 援用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 민간에 유행하고있는 曲藝로는 故事를 唱으로 연출하는 彈詞와 鼓詞 종류의 것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44) 道情이나 蓮花落 같은 곡예를 보면45) 본시는 淸唱에서 출발하여 노래로 불리어지던 것이나 때와 장소에 따라 고사를 연창하기 시작하여 講唱 형식으로 연출되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旦?淨?丑 등 서너 명의 각색이 등장하여 고사를 연출함으로써 戱曲 형식으로 발전한 것들도 있다. 곧 중국 민간에 있어서는 노래가 경우에 따라서는 故事를 바탕으로 하여 講唱 또는 戱曲의 형식으로도 연출된 것이다. 이미 시경의 시대부터 중국의 민간 연예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阮元은 三頌은 元대 이후의 노래와 춤으로 故事를 연출하는 희곡과 같은 성격의 것이고, 風, 雅는 南宋 때의 講唱이나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風, 雅, 頌 모두가 간단한 노래로도 불리어지고, 故事를 講唱 형식으로 연출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하고, 戱曲 형식으로 연출하는 데에도 원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시경」연구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착수한 선구자는 불란서 학자 Marcel Granet의 「중국 고대의 축제와 노래( Fete et Chansons anciennes de la Chine, 1919)」이다. 그는 雲南?貴州 등 여러 지방의 민속 조사를 근거로 하여, 시경 특히 國風 대부분의 詩篇은 본시 고대 농민들의 田園的인 季節祭에서 젊은 남녀들이 唱和한 戀愛歌 도는 民謠이다고 전제하고, 그 시들을 해석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日本 학자 田仲一成이 중국 鄕村의 祭祀儀式의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中國演劇史(東京大學出版會, 1998)라는 책을 내고 있다. 모두가 획기적인 연구성과이다. 중국의 민간연예가 鄕里의 廟會나 社火 등을 중심으로 하여 계승 연출되어 왔음을 생각할 때, 이런 중국 詩歌나 演劇에 대한 社會學的인 접근 시도는 적절한 것이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여하튼 중국의 廟會나 社火의 성격을 두고 볼 때 시경의 시들은 단순한 노래의 가사일 뿐만이 아니라, 講唱이나 戱曲의 형식으로 일정한 故事나 說話 같은 것을 연출할 때에도 援用되던 歌詞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모전이나 삼가시의 시해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4. 賦에 대하여 周策縱은 古巫醫與「六詩」考(臺北 聯經出版事業公司,1986)에서 시의 <六義> 또는 <六詩>라고 부르는 風, 賦, 比, 興, 雅, 頌의 여섯 가지는 賦, 比, 興까지도 모두가 詩體였을 거라 추정하고46), 이들 <육시>의 하나 하나가 모두 옛 巫에서 나왔음을 고증하고 있다. 風, 雅, 頌은 詩體로서 지금도 우리가 보는 시경에 분류되어 있지마는, 賦, 比, 興은 지금 와서는 어떤 시체였는지 알 길이 없게 되었고, 일반적으로는 毛詩正義의 孔穎達(574-648) 疏에 인용된 東漢의 鄭玄, 鄭衆의 해설 등을 근거로 시의 표현방법을 뜻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이 중 賦만은 후세에 독특한 시체로 다시 발전하기 때문에, 賦라는 시체의 성격은 어느 정도 추구해볼 수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周策縱은 <육시> 중 風,賦,比,興은 모두 古巫인 巫凡, 巫比, 巫盼47)과 관계가 있는데, 賦는 특히 巫盼과 관계가 깊으며 일종의 특수한 歌舞 형식을 갖춘 노래의 歌辭라 하였다. 따라서 班固(32-92)가 “부라는 것은 古詩의 유파이다.”48)고 말하고, 劉熙載(1813-1881)가 “부는 시가 아닌 것이 없으나, 시는 모두가 부인 것은 아니다.”49) 말한 것은 모두 옳은 말이다. 다만 문제는 부가 어떤 종류의 시였느냐는 것이다. 먼저 옛 학자들의 부라는 말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漢대 劉熙는 釋名에서 “그 뜻을 널리 펴는 것을 부라 한다.”50)하였고, 시경 大雅 蒸民의 모전에서는 “부는 펴는 것(布)”이라 하였고, 王逸(89?-158?)은 楚辭주에서 역시“부는 펴는 것(鋪)”이라51) 하였다. 이상은 모두 賦라는 글자 뜻을 설명한 것이나, 陸機(261-303)는 「文賦」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의 한 종류인 賦를 설명하여 “詩는 감정을 따르는 것이어서 묘하고도 아름다우며, 賦는 事物을 묘사하는 것이어서 밝고 분명하다.”(詩緣情而綺靡, 賦體物而瀏亮.) 하였는데, 李善은 注에서 “부로서는 일을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2)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부라는 詩體는 물건을 펴놓듯이 사물을 묘사하는 문체라는 뜻으로 이상의 논의를 종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巫에서 나왔고, 歌舞하고도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歌舞戱 또는 戱曲的인 연출과 관계가 깊은 시가였다고도 추측된다. 한 편 班固는 漢書 藝文志에서 “노래는 하지 않고 읊는 것을 賦라 하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賦를 할 줄 알아야 大夫가 될 수 있다.”53)하였는데, 周策縱은 <古巫醫與「六詩」考>에서 모전의 “높은 곳에 올라가 부를 할 줄 알아야---- 大夫라 할 수 있다.”54)한 말을 인용하며, “登(升)高而賦”55) 는 옛 무당들의 전통이고 大夫는 본시 巫를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다만 賦는 “노래는 하지 않고 읊었다” 하였으니, 左傳에 무수히 나오는 시경의 “某 시를 賦했다”는 표현은 시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방법으로 읊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이 巫歌에서 나왔고 어떤 사물을 펼쳐놓듯이 길게 묘사한 것이라면, 읊는 방식이 주라 하더라도 辭說과 唱의 도움도 받는 講唱 형식의 연출방식이 主宗을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장 최초의 賦는 屈原(B.C.339?-B.C.278?)의 이름 아래 전하여지는 楚辭에 실린 「九歌」인데, 이것은 王逸이며 朱熹(1130-1200)모두가 巫歌의 가사를 개작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日本 학자 靑木正兒가 「楚辭九歌의 舞曲的結構」56)에서 「九歌」를 祝巫와 神巫가 對舞를 하면서 서로 주고받은 노래의 歌詞라고 주장한 이래, 지금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그것은 巫에 의하여 戱曲的으로 연출되던 것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聞一多(1899-1948) 같은 이는 「九歌」 전체가 여러 명의 巫覡들에 의하여 춤과 노래로 연출되던 하나의 套曲으로 해석하였다57). 藤野岩友는 楚辭 전체를 巫歌라 규정하고 巫系文學論(大學書房, 1951)이란 책을 썼다. 藤野岩友는 이 책에서 屈原의 대표작이라 칭송되는 「離騷」도 巫의 自序文學(祝辭系文學)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름은 正則이고 字는 靈均이라는 巫의 내력과 修養 및 理想을 노래한 講唱 형식으로 연출되던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소」에는 자신의 자가 靈均이라 하고,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로 靈修가 나오는데, 王逸 스스로가 「九歌」의 주에서 “靈은 巫를 말한다”, “楚나라 사람들은 巫를 靈子라 불렀다”58) 설명하고 있으니, 이들은 모두 巫의 이름임이 분명하다. 다시 「이소」에는 神巫의 이름으로 靈?과 巫咸이 등장한다. 그리고 끝머리에 “나는 彭咸이 사는 곳으로 가서 함께 살겠다.”59)고 읊은 구절의 彭咸에 대하여, 王逸은 이들을 “殷나라의 大夫로 임금을 諫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물에 投身自殺한 사람이다”60)고 屈原이 물에 投身自殺하였다는 전설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는데, 근거 없는 말임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였다. 그보다는 何天行이 주장한 것처럼 山海經 大荒西經에 보이는 十巫에 보이는 유명한 巫彭과 巫咸의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가능성이 많다. 荀子의 「成相」,「賦」 두 편의 작품은 가장 틀림없는 戰國時代의 작품이다. 盧文?(1717-1795)는 「成相」편에 주를 달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편의 音節은 바로 후세 彈詞의 조상이다. 편 앞머리에 말하기를 ‘만약 장님에게 相이 없었다면 얼마나 허전하겠는가?’ 하였으니, 뜻이 이미 분명하다. 첫 구절에서 ‘請成相’이라 한 것은 이 곡을 연주합시다 하는 뜻이다.”61) 「賦」 편의 글도 성상과 큰 차이가 없으니 후세 彈詞 형식으로 연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賦」편은 수수께끼 식의 대화로 主題를 알아맞히는 형식의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禮, 知, 雲, 蠶, 箴의 다섯 가지가 주제이고, 끝머리에는 佹詩가 한 편 붙어있다. 佹詩는 천하의 治亂에 대하여 韻文으로 서술하고 끝머리에 “其小歌曰” 하고 楚辭의 “亂曰”이나 같은 결말을 짓는 한 대목이 있으니, 모두 읊고 노래하는 형식으로 읽혔던 글인 듯 하다. 荀子(B.C.298?-B.C.238?)는 儒家의 敎理를 쉽게 해설하여 선전할 목적으로 민간 曲藝의 한가지 형식을 빌어 「成相」과 「賦」편을 썼던 듯 하다.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본격적인 초기의 賦라고 알려진 宋玉(B.C.290?-B.C.223?)의 대표작인 「高唐賦」,「神女賦」도 모두 問答體로 散文과 韻文을 함께 써서 巫山 神女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얘기를 서술한 것이다. 문장의 형식이 講唱體 또는 戱曲體라 할 수 있는 것이고, 高唐이나 巫山?神女 등의 지명이나 등장인물이 巫歌와의 관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漢 초 賈誼(B.C.200-B.C.168)의 「服鳥賦」와 「弔屈原賦」도 산문과 운문으로 이루어진 架空的인 얘기와 전설을 읊은 것이다. 司馬相如(B.C.179?-B.C.117)의 「子虛賦」,「上林賦」등도 모두 戱劇的인 구성의 작품이다. 子虛와 烏有先生?亡是公 등 架空的인 인물들이 虛構的인 얘기를 산문과 운문을 섞어 사용한 것이다. 이 뒤로 이른바 문인들이 지은 賦들은 차춤 戱劇的인 성격이 약해지고 事物을 묘사하는 데에 보다 힘을 기울이게 된다. 史記 酷吏列傳의 張湯傳과 漢書 朱買臣傳을보면 朱買臣은 楚辭를 잘함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서 출세했다는 기록이 있다62). 西漢 때의 楚辭라는 말은 東漢 王逸(89?-158?)의 楚辭章句의 경우와는 달리 “楚聲으로 하는 說書” 정도의 뜻을 지닌 말로, 楚辭를 잘 했다는 것은 楚辭를 說書 형식으로 잘 읊고 노래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漢書,王褒傳에는 九江被公을 불러들여 楚辭를 誦讀케 했다는 얘기를 쓰면서 그 앞에 “奇異한 좋은 것을 널리 모아들였다”는 말이 붙어있고63), 漢書地理志에는 嚴助와 朱買臣이 출세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楚辭가 전해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너무 技巧에만 빠져서 믿음이 적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64). 楚辭를 誦讀하는 것이 민간의 說書 같은 속된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楚辭라는 말은 흔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책으로서의 초사와는 다른 “楚 지방의 說書”라는 말과 비슷한 뜻이었을 것이다. 사기 屈原賈生列傳에서 “屈原이 죽은 뒤에 楚나라에는 宋玉, 唐勒, 景差의 무리가 있어, 모두 辭를 좋아하여 賦로서이름이났었다.65)” 하였는데, “辭를 좋아하여 賦로서 이름이 났었다”는 것은 楚辭의 작품을 잘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한 說書를 잘하였다는 말로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隋書經籍志에 “隋나라 때에 道騫이란 중이 있었는데, 讀을 잘 하고 楚聲을 할 줄 알았는데 音韻이 淸切하였다. 지금도 楚辭를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騫公의 소리를 祖宗으로 받든다.66)” 이란 기록이 보인다. 楚辭의 說書는 唐대까지도 이어졌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뒤에 얘기할 俗賦의 존재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屈原, 荀子, 宋玉에서 시작하여 漢대 작가들이 지은 賦는 모두 巫歌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순수한 巫歌나 민간의 曲藝 형식과는 상당히 멀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荀子의 부는 儒家思想을 선전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고, 宋玉 이하의 작가들 賦는 귀족이나 皇帝를 위하여 지은 것임으로, 그 형식이나 문장도 귀족화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귀족화란 戱劇的인 성격의 상실을 뜻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민간에는 先秦時代로부터 후세에 이르도록 보다 戱劇的인, 곧 講唱이나 戱曲의 형식을 지닌 賦가 유행하여 왔을 것이다. 후세의 작가들의 賦 중에서도 張衡(78-139)의 髑髏賦, 蔡邕(133-192)의 短人賦, 曹植(192-232)의 雀賦 등은 비교적 민간희의 問答과 嘲戱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이라 여겨진다. 徐堅(659-729)이 편찬한 初學記 권19에는 劉謐의 「龐郞賦」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시작이 다음과 같다. 내가 엮은 글 들으시라는 거죠, 河間 지방 일을 얘기한 것이라오.“67) “皮日休가 歸融 尙書를 뵈려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게 되자, 「挾龜蛇賦」를 지었는데, 그가 머리를 내밀지 않았다고 비꼰 것이다. 그러자 歸融의 아들도 「皮靸鞋賦」를 지어 서로 비방하였다.”68) 賦를 지어 거북이나 뱀처럼 “머리를 내밀지 않고” 만나주지 않았던 일을 비꼬고, 또 그러한 賦를 지어 비꼰 것을 비방하는 賦를 다시 지었다는 것을 보면, 지금 그 작품은 전하지 않고 있지만 講唱 형식의 우스개 소리를 위주로 하는 글이었다고 짐작이 간다. 마침 敦煌文卷 속에 變文과 함께 발견된 「晏子賦」,「韓朋賦」,「燕子賦」,「茶酒論」 등의 俗賦들이 그런 성격의 講唱이다. 「茶酒論」의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생각해 보건대, 神農께서는 모든 풀을 맛보시어 이에 五穀을 가려내셨으며, 軒轅은 衣服을 만들어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으며, 倉?은 문자를 마련하셨고, 孔子는 儒敎의 교리를 밝히셨다. 처음부터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니 그 요점이 되는 부분을 추려 얘기하겠다.”69) 그리고 「燕子賦」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참새와 제비가 함께 본 노래를 지어 부르겠네.”70) 5. 맺는 말 지금도 중국의 민간 曲藝들을 보면, 거의 모든 종류의 것들이 본시는 단순한 노래인 淸唱에서 출발하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나, 다시 거기에 故事가 보태어져 講說과 歌唱을 엇섞어가며 고사를 연출하는 이른바 講唱 형식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다시 같은 악곡으로 몇 명의 藝人들이 모여 함께 노래와 賓白을 사용하여 연출하는 戱曲 형식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곧 한 종류의 곡예 속에는, 보기를 들면 秧歌나 蓮花落, 道情 속에는 같은 呼稱 속에 淸唱도 있고 講唱도 있고 戱曲도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이미 先秦時代부터 시작되고 있던게 아닐까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모전이나 삼가시의 시해설이 故事 또는 說話와 관련이 많다는 것은, 西漢 초까지도 시경의 시들이 故事와 직접 연결되어있는 시들이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경의 시들은 西漢 때까지도 여러 가지 故事를 연출할 때, 곧 故事나 說話를 講唱 도는 戱曲 형식으로 연출할 때 援用되기도 한 노래라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關雎」라는 시는 文王의 后妃 얘기를 연출할 적에도 쓰이고, 康王이 결혼한 뒤 朝會에 늦게 나온 얘기를 연출할 적에도 노래불리어진 노래의 가사여서, 모시와 삼가시는 각각 그러한 해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西漢 학자들은 시 본문 자체의 해석보다도 그러한 시의 활용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孔子가 시경을 刪定한 뜻을 알리려 했던 듯 하다. 특히 <詩의 六義> 중에서도 賦는 처음부터 戱曲的인 성격이 두드러졌던 듯 하다. 楚辭에서 시작하여 漢賦 및 후세의 俗賦로 이어지는 賦라는 문학 형식은 분명히 巫歌에서 나온 것이며, 歌舞戱의 형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墨子 公孟편을 보면 묵자의 말 중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誦詩三百, 弦詩三百, 歌詩三百, 舞詩三百.” 이는 시경의 시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연출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 생각된다. “誦詩”는 시를 특수한 방식으로 읇는 것이고, “弦詩”는 琴으로 반주를 하며 시를 노래한 것이고, “歌詩”는 시를 노래하는 것이고, “舞詩”는 시의 노래와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추던 것이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시경의 시들은 단순한 노래의 가사였을 뿐만이 아니라, 故事를 講唱 형식으로 연출하는 데에도 활용되었고, 심지어 故事에 얹히어져 戱曲 형식으로 연출되는 演藝에도 援用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시경은 中國文學史에 있어서 傳統文學의 중심을 이루는 詩歌의 祖宗이라 받들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중국 小說 戱曲의 祖宗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여야만 西漢 學者들의 시경 해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시경의 시들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 傳統文學의 특징에 대하여도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周나라가 쇠하여지자 시가 지어졌는데, 대체로 康王 때였다. 강왕은 內房에서의 덕이 부족하여 대신이 朝會에 늦게 나옴을 풍자하려 하였음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다.”3)
끝으로 굴만리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毛詩序」는 다음과 같다.
“關雎는 后妃의 덕을 노래한 것이다. 風의 시작이어서, 천하 일을 풍자하고 부부 관계를 바로잡는 근거가 된다.----그래서 관저는 숙녀를 구하여 군자에 짝지어 주는 것을 즐기는 것인데, 걱정은 현명한 이를 추천하는 데에 있고 女色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충심으로 얌전한 이를 찾으며 현명한 재질의 사람을 생각하되 훌륭함을 손상시키려는 마음은 없는 것이 바로 관저의 뜻인 것이다.”7)
이 밖에도 王先謙(1842-1917)의 詩三家義集疏에는 위에 인용한 것과 다른 魯說 4 종이 더 모아져 있다. 우리가 虛心坦懷한 입장에서 「관저」시를 읽어보면 분명히 이는 젊은이가 이상적인 이성을 그리는 시이다. 곧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는 구절이 시의 주제를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모시나 삼가시에서는 어찌하여 위와 같은 해설을 하고있는 것일까? 西漢의 학자들은 어리석어서 그처럼 시의 뜻과 관계도 없는 迂曲한 해설을 하고 있다고 웃어넘겨도 되는 것일까?
“后妃가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을 제어함으로,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흥하고 망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후비가 늦게 일어나 佩玉을 울리며 활동하자 관저의 작자는 그것을 탄식하며, 女色을 좋아하는 것이 본성을 손상시키고 목숨을 단축시키니 삶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법도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았다. 온 천하가 그 영향을 받아 혼란하여질 것이기 때문에, 淑女가 임금의 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을 읊음으로써 忠孝를 독실히 하고 仁厚하여지라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8)
해석이 각양각색이다. 대체로 노시에서는 주나라의 成王(B.C.1115-B.C.1079 재위)의 뒤를 이은 康王(B.C.1078-B.C.1053 재위)이 부인에게 빠져 늦잠을 자느라 조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일과 관련시켜 시를 해설하고 있는데, 文王의 열 다섯 번 째 아들인 畢公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魯說은 다음과 같다.
韓說에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부이는 澤寫이다. 부이는 냄새가 고약한 나물인데, 시인이 어떤 남편에게 나쁜 병이 생기어 부부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을 가슴아파하고, 발분하여 일어나도록 일로서 자극한 것이다. 부이가 비록 냄새가 악한 풀이기는 하나 내가 뜯고 또 뜯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남편에게 비록 나쁜 병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로 지키며 떠나가지 않겠다는 것을 일깨운 것이다.”13)
이처럼 매우 간단한 시의 해설에 다른 곳에서는 어떠한 근거도 찾아볼 수 없는 복잡한 얘기를 동원하고 있다는 것은, 옛날의 시들이 이러한 얘기와 어떠한 형태로든 관련이 있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옛 학자들이 모두가 근거도 없는 말로서 시를 엉터리 해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와 달은 땅을 비추고 있네.
우리가 보기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婦人이 자신의 愁嘆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모시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하고 있다.
阮元(1764-1849)은 「釋頌」이란 글29)에서 「모시서」의 “송이란 성덕을 찬미하는 형용(頌者美盛德之形容)”이라 한 말을 부연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곧 왕국유는 앞에 든 여섯 편의 시들이 각각 이 六成의 大武에서 일성에 한 편 씩 노래불리어지던 것이라는 주장이다. 「모시서」를 보면 이 중 「武」에 대하여는 “大武를 演奏하는 것이다.”35), 「酌」에 대하여는 “大武가 완성된 것을 고하는 것이다.”36)고 설명하고 있다.
“자리의 여러 군자님들, 모두 귀기울여 들어주소!
“귀기울여 들어달라” 하였으니, 분명히 이 賦는 강창의 일종이다. 또 孫光憲(? -968)의 北夢瑣言 권7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이 노래는 몸이 스스로 들어맞아, 천하에 이보다 더한 것이란 없다네.
이상을 보면 辭說과 唱이 모두 동원되는 變文이나 같은 형식의 민간 曲藝가 俗賦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민간에는 줄곧 이런 형식의 賦가 說唱되어왔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가 있다. 곧 賦는 본시부터 詩體의 일종이었으며, 楚지방을 중심으로 한 민간에 講唱이나 戱曲과같은 종류의 曲藝로 유행해온 것임을 알게 된다.
이상 毛傳과 三家詩를 중심으로 하는 西漢 學者들의 시해설을 본다면, 그들의 해설이 “迂曲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해설을 하고 있는 까닭을 깨닫게 된다. 지금 일반적인 경향처럼 西漢 學者들의 시해설이 모두 엉터리라 단정하고 팽개치는 것은 오히려 후세 사람들의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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