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사천왕사와 문두루(文豆婁) 비법

원문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8/2009052801800.html

668년(문무왕 8년), 신라의 운명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기쁨도 잠깐, 당나라 군대는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쳐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킬 기세였다. 문무왕은 기습적인 선제공격으로 이를 막았다. 당나라가 배은망덕이라며 발끈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670년 당 고종은 장수 설방(薛邦)에게 50만 대군을 주어 신라를 침공케 했다.

대군의 침공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던 왕에게 명랑(明朗) 법사는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법도량을 베풀 것을 주문했다. 사정은 급박했다. 당의 대군을 실은 배들이 벌써 가까운 바다를 가득 덮고 있었다. 명랑은 채색 비단을 둘러 임시변통으로 없던 절을 만들었다. 오방신상(五方神像)은 풀로 엮어 대신했다. 그리고는 단 위로 올라가 문두루 비법을 베풀었다. 문두루의 위력은 놀라웠다. 난데없는 바람과 파도가 당나라 50만 대군을 실은 배를 일제히 침몰케 해 몰살시켰다.

문두루는 밀교의 결인(訣印)을 뜻하는 범어의 음역이다.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구체적 방법이 보인다. 문두루비법은 국가적 위난과 재액을 당했을 때 중앙에 높게 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서 방위에 따라 각종 진언을 베푸는, 대단히 장엄하고 거창한 의식이었다. 이후 당나라에서 신라를 결코 얕잡아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사천왕사의 문두루 도량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6일부터 사천왕사 특별전이 개최된다. 여러 해 계속해온 발굴조사를 망라하는 전시가 될 듯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녹유전(綠釉塼·녹색 유약을 입혀 구운 벽돌판) 부조상(浮彫像)의 파편들도 비로소 한자리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보관되어 있던, 투구 쓰고 갑옷 입고 화살과 칼을 든 채 악귀를 깔고 앉은 수호신상들이 90여 년 만에 합체되어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안팎의 국가적 위난을 한마음으로 물리쳤던 사천왕사 문두루 도량의 상징성이 새삼스러운 요즘이다. 그 도량 터 부조상의 합체를 계기로, 흩어졌던 마음들이 하나로 되모이고, 뒤숭숭한 나라 안팎의 시름도 씻은 듯이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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