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괘릉은 경주시 외동읍에 있다. 포항-울산간 산업도로를 따라가다보면 괘릉 표지가 나온다. 송림 속을 100여 미터 들어가면 별난 무덤 괘릉이 나온다. 별난 무덤이라 칭한 것은 호석 무인상에 난데없는 서역인 석상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확인해 본다.
원성왕은 참으로 변난 사람이다. 왕으로 선택된 주원이 알천 홍수로 도성에 진입하지 못하자 대신 왕위에 올랐다.
괘릉의 안내판 기록이 맞다면,또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화장을 했는데 관 속에는 무엇을 넣었는지도 궁금하다.
서역인의 출현에 대해 고 이용범 교수는 신라에 금을 사러 온 아랍상인으로 추정했다.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 상도 같은 모습이다.
볕 바른 쪽의 서역인 사진을 몇 장 찍어 보았다.
[삼국사기]
[즉위년]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발호하였는데, 선덕이 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 측근의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 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바로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14년]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당서」에는 ‘정원 14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정원 16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사기를 기준으로 고찰하면 「통감」이 틀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