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유사에는 천수관음전도 나오는데, 사찰의 전각이라곤 종각과 이 보광전뿐이었다. 사찰입구의 길은 황룡사지 발굴작업으로 파헤쳐지고 절간문도 폐쇄되고 옆구리로 임시통로를 만들었다. 경주는 한 발짝만 내디뎌도 문화재이니 분황사는 그 순위가 한참 뒤인 듯했다.

접경한 황룡사지 구층탑이 경주의 진산인 남산과 금강산, 토함산과 선도산을 이으면 그 교차점이 된다고 하니 분황사도 경주의 한복판애 자리했다 하겠다. 사전에서 분황사 약사여래입상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다.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

1996년 5월 14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후기 작품으로, 높이 3.45m의 청동제 불상이다. 1800년대 조성된 분황사 보광전(殿) 안에 안치되어 있다.

분황사에는 원래 755년(경덕왕 14) 본피부()에 사는 강고내말()이 주조 봉안한 무게 30만 6,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 엄청난 대불()은 지금 흔적조차 없다.

1998년 3월 13일부터 보광전을 개축하기 위하여 건물을 해체하였는데, 3월 24일 그 안에서 상량문과 벽화가 발견되었다.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지금의 보광전은 1680년(강희 19) 5월 3일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현재의 약사여래상도 만력 기유년, 즉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조성하였다고 나와 있다.

이 약사여래동상의 왼쪽 손 위에 놓인 약함의 뚜껑에는 주사()로 〈중수개금화원() 육행서홍() 건륭 39년() 을미 4월 25일 조성야()〉라고 쓰여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것은 1774년(영조 51)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전형적인 18세기 후반의 양식과 조형 기법을 따르고 있다. 육계는 낮고 작으며, 상호()는 둥글고 육감적이며, 얼굴은 동안()이다. 이 때문에 종교적 신비감이나 자태를 느낄 수 없는, 다분히 세속적인 요소가 많이 보인다. 통견()의 법의()는 두꺼운 편이고, 의습()은 유려하지 않으며, 치마띠는 화형()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장식 없는 판석()으로 되어 있다. 약합() 뚜껑의 파손 부분을 살펴보면 건칠제()임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불상 전체도 건칠제일 가능성이 높다.

약사여래좌불()의 정식 이름은 약사유리광세계부처님 또는 대의와울이라고 한다. 동방으로 갠지스강 모래알 수의 열 배에 해당하는 국토를 지나 정유리정토라는 곳에 계신다고 한다. 원래 《약사여래본원경()》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등에서 주로 설법되는 이 부처님은 보살이었을 때 12가지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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