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관기(孔雀館記) -박지원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 제 1 권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의 남헌(南軒)이 공작관(孔雀館)이고, 남으로 수 십 걸음 채 안 가서 꼭대기에 호로(胡盧)를 얹고 맞서 있는 것이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이다. 뜰 중간을 가로질러 대를 엮어 시렁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구기자, 해당화, 팥배나무, 박태기나무를 섞어서 심으니, 길게 뻗은 가지와 부드러운 넝쿨이 얽히고 우거져 어릿어릿 비치면서 앞을 가려 봄여름에는 병풍이 되고 가을과 겨울에는 울이 되니, 병풍에는 어우러진 꽃이 제격이고 울에는 쌓인 눈이 제격이다.

 

[주D-001]호로(胡盧) :

‘호로(胡蘆)’라고도 하며, 누각 지붕의 중앙 정점에 설치한 조롱박 모양의 장식물을 말한다.

[주D-002]박태기나무 : 원문은 ‘紫荊’인데, 까치콩을 뜻하는 ‘白扁荳’, 또는 인동덩굴을 뜻하는 ‘忍冬籐’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그 길쭉이 트인 곳이 자연스러운 문이 되어 사립도 달지 않았다. 또 북녘 담을 뚫고 도랑을 끌어다 북지(北池)에 들이고, 북지가 넘쳐 그 물이 앞을 지날 땐 곡수(曲水)가 되니, 연잎을 따서 술잔을 실어 띄워 흐르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작관이 집은 같아도 주위 환경이 달라지고, 자리를 옮기면 전망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내가 십팔구 세 때에 꿈에 한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거창하고 훤칠하여 공관(公館) 같기도 하고 법당 같기도 하였다. 좌우에는 비단 
책갑(冊匣)과 옥첨(玉籤)이 질서 정연하게 꽂혀 있었으며 겨우 한 사람 들어갈 만한 통로로 굽이굽이 들어가니 그 가운데에 두어 자 되는 푸른 화병이 놓여 있었는데 지붕에 닿을 만한 비취새 꼬리 두 개가 거기에 꽂혀 있었다. 그곳에서 한참 배회하다가 그만 깨어난 적이 있었다.

 

[주D-003]책갑(冊匣) : 책을 넣어 둘 수 있게 책의 크기에 맞추어 만든 작은 상자를 이른다.

[주D-004]옥첨(玉籤)책갑이 벗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옥으로 만들어 끼우도록 한 뾰족한 찌를 이른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나 내가 중국에 들어가 공작 세 마리를 보았는데,

학보다는 작고 해오라비보다는 크며, 꼬리는 길이가 두 자 남짓하고, 정강이는 붉고 뱀이 허물 벗은 것 같으며, 부리는 검고 매처럼 안으로 오므라들었으며, 털과 깃이 온 몸을 덮어 불이 타오르듯 황금이 반짝이듯 고왔다.

깃 끝에는 각각 한 개의 황금빛 눈이 달려 있는데, 석록색(石綠色)의 눈동자와 수벽색(水碧色)의 중동(重瞳) 에 자주색이 번지고 남색으로 테를 둘러, 자개처럼 아롱지고 무지개처럼 환하니, 그것을 푸른 물총새라 해도 아니요 붉은 봉황새라 해도 아니다. 이따금 움칠해서 빛이 사라졌다가 곧바로 나래 쳐 되살아나며 금방 번득거려 푸른 빛이 돌고 갑자기 너울거려 불꽃이 타오르니, 대개 문채의 극치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무릇 색깔〔色〕이 빛〔光〕을 낳고, 빛이 빛깔〔輝〕을 낳으며, 빛깔이 찬란함〔耀〕을 낳고, 찬란한 후에 환히 비치게〔照〕 되니, 환히 비친다는 것은 빛과 빛깔이 색깔에 떠서 눈에 넘실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지으면서 종이와 먹을 떠나지 못한다면
아언(雅言)이 아니고, 색깔을 논하면서 마음과 눈으로 미리 정한다면 정견(正見)이 아니다.


[주D-005]그 뒤 …… 보았는데 : 연암은 1780년(정조 4) 진하별사(進賀別使)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해 음력 8월 북경에 도착하여 열하(熱河)를 다녀온 뒤 9월 중순까지 북경에 머무르며 관광하였다. 《열하일기》 황도기략(黃圖紀略) 공작포조(孔雀圃條)에 공작을 구경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D-006]석록색(石綠色)의 …… 중동(重瞳)
   석록(石綠)은 공작석(孔雀石)이라고도 하는 녹색 보석으로 진한 녹색을 내는 물감의 재료로 쓰인다. 수벽(水碧)은 벽옥(碧玉)이라고도 하는 옥의 일종인데 누런 녹색을 띤다. 중동(重瞳)은 눈에 동자가 겹으로 된 것을 말하며 귀인(貴人)의 상(相)으로 간주되었다. 

 

 [주D-007]아언(雅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정언(正言) 즉 정확하고 합리적인 언론이란 뜻이다.

 

 

내가 북경에 있을 때 중국의 동남 지방 선비들과 날마다 단가포(段家舖)에서 술을 마시고 글을 논하였다.

매양 ‘공작과 흡사하다〔似孔雀〕’는 말로 그들의 시와 산문을 평하였더니, 좌중에 태사(太史) 고역생(高棫生)이 있다가 농담으로 “우리 손님 얼굴은 부자(夫子)의 가금(家禽) 에 비해 어떠합니까?”라고 하여 서로 크게 웃었다.


[주D-008]내가 …… 논하였다 : 《열하일기》 피서록(避暑錄)에 의하면 단가포(段家舖)는 북경 유리창(琉璃廠)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있던 단씨(段氏)의 백고약포(白膏藥舖)로 ‘단가루(段家樓)’라고도 하였다. 현존하는 《열하일기》에 서목(書目)만 전하는 양매시화(楊梅詩話)와 단루필담(段樓筆談)은 바로 이 단가포에서 연암이 중국 문사 유세기(兪世琦) · 능야(凌野) · 고역생(高棫生) · 초팽령(初彭齡) · 왕성(王晟) · 풍병건(馮秉建) 등과 시화(詩話)를 이야기하고 필담을 나눈 기록들로 짐작된다. 이가원(李家源) 선생의 《국역 열하일기》 Ⅱ(민족문화추진회)에 양매시화의 서문과 본문 일부가 발굴 소개되어 있다.

 

[주D-009]태사(太史)  청(淸) 나라 때 한림원(翰林院)의 관원을 가리킨다. 주로 사관(史官)의 임무를 수행했으므로 태사라고 하였다.

[주D-010]부자(夫子)의 가금(家禽)  부자는 공자(孔子)를 가리키며, 부자의 가금이란 공자의 집에서 기르는 새라는 뜻으로 공작(孔雀)에 빗대어 말하였다. 취기가 올라 연암의 얼굴빛이 공작처럼 붉으락푸르락 변함을 풍자한 것이다.

 

그 후 5년이 지나, 중국에 다녀온 사람이 ‘공작관(孔雀館)’이란 세 글자를 얻어 왔는데 전당(錢塘) 사람 조설범(趙雪帆)이 쓴 것이었다. 지난날에 내가 조설범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 다른 사람에게서 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만 리 밖에서 성의를 담아 보내온 것이리라. 그러나 관(館)이란 사실(私室)에 붙이는 이름이 아니요, 또 나는 늙어서도    조그마한 서실 도 없으니, 도대체 어디다 그것을 걸겠는가. 그런데 이제 다행히 임금의 은혜로 명승지의 수령이 되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지낸 지 4년 동안에 관아로 집을 삼으니 헌 책을 담은 해진 상자도 내 몸 가는 대로 따라 항상 같이 있게 되었는데, 장마 끝에 책을 말리다가 우연히 이 필적을 발견했다.
아아, 공작은 다시 볼 수 없으나 옛 꿈을 되새겨 보니, 숙연(宿緣)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드디어 새겨서 앞기둥에 걸고, 아울러 이처럼 기록한다.

 

눈으로 색깔을 보는 것은 다 같으나, 빛이나 빛깔이나 찬란함에 있어서는 보고도 똑똑히 보지 못하는 자가 있고, 똑똑히 보고도 잘 살피지는 못하는 자가 있고, 살피고도 입으로 형용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 것은, 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심령(心靈)에 트이고 막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 종이와 이 먹에 대해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는 장님이요, 흑백은 구분하지만 그것이 글자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어린애요, 그것이 글자임은 알지만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자는 노예요, 겨우 소리를 내어 읽어도 반신반의하는 자는 시골의 서당 선생이요, 입으로 술술 읽어 그 전에 기억하던 것을 외우듯 하면서도 덤덤히 마음에 두지 않는 자는 과거 시험장의 서생이다.

 


[주D-011]조그마한 서실 : 원문은 ‘一廛之室’인데, 《주례》 지관(地官) 수인씨(遂人氏)에, 나라에서 평민 남자 한 사람 즉 일부(一夫)에게 나누어 준 주거지(住居地)를 ‘일전(一廛)’이라 하였다.

[주D-012]눈으로 …… 서생이다   김노겸(金魯謙 : 1781 ~ 1853)의 증언에 의하면, 이는 연암의 말이라 한다. 김노겸이 어린 시절에 우연히 좌중에서 연암의 그 말을 듣고 신기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연암의 문집에 바로 그 말이 있음을 보고 감회를 이기지 못해 기록한다고 하였다. 《性菴集 卷7 附錄 囈說》
이글은  설전(雪牋) 에 쓰고 옅은 파란색으로 비점(批點)을 찍어 오래된 좀먹은 상자 속에 감추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찌 한 번 주욱 논설을 펴서 흑백을 가리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말을 듣게 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이런 무리의 입과 눈을 한 번 거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무리는 광대 상모 꼭지의 아롱다롱한 털이 동전 쌓이듯한 기상(氣像)만 익숙히 보았지, 도리어 녹색 술병을 쇄창(瑣窓) 아래에서 기울이는 운치는 알지 못한다.

 

[주D-013]설전(雪牋) : 문자 그대로는 눈처럼 흰 소폭의 종이란 뜻이다. 혹은 ‘설전(薛牋)’ 즉 짙은 붉은색이 나는 소폭의 채색 종이인 설도전(薛濤牋)의 오기(誤記)인지도 모르겠다.


[주D-014]쇄창(瑣窓) :
꽃무늬를 새긴 격자창(格子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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