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협(麒麟峽)으로 들어가는 백영숙(白永叔)에게 증정한 서문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제1권


[은자주]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수월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궁핍을 면하기 위해 산속 생활에 묻혀야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연암도 1786년(50세) 7월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기까지 일정한 수입원이 없었으니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도 연암협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어 살고 있던 처지였다.


[주C-001]기린협(麒麟峽)으로 …… 서문 :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의 산골짜기로 이주하고자 떠나는 벗 백동수(白東修 : 1743 ~ 1816)를 위해 지은 증서(贈序)이다. 백동수는 자(字)가 영숙(永叔)이고, 호는 인재(靭齋), 야뇌(野餒) 등이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백시구(白時耈 : 1649 ~ 1722)의 서자(庶子)인 백상화(白尙華)의 손자였다. 따라서 신분상 서얼에 속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오랜 낙백(落魄) 시절을 거쳐, 1789년(정조 13) 장용영 초관(壯勇營哨官)이 되어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후 비인 현감(庇仁縣監)과 박천 군수(博川郡守) 등을 지냈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기도 하다. 《硏經齋全集 本集 卷1 書白永叔事》 박제가도 기린협으로 이주하는 백동수를 위해 장문의 송서(送序)를 지어 주었다. 《貞蕤閣文集 卷1 送白永叔基麟峽序》


영숙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그 조상 중에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목숨 바친 이가 있어서 이제까지도 사대부들이 그를 슬프게 여긴다.
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고 전장(典章)과 제도(制度)도 익숙히 잘 알며, 젊은 나이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비록 시운(時運)을 타지 못해서 작록(爵祿)을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그 뜻만은 조상의 공적을 계승함직하여 사대부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아! 이런 영숙이 무엇 때문에 온 식구를 거느리고
예맥(穢貊)의 땅으로 가는 것인가?


[주D-001]그 조상 …… 여긴다 : 백동수의 증조 백시구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옥사한 사실을 말한다. 소론이 집권하자 백시구는 평안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기로소(耆老所)에 은(銀)을 대여해 준 일로 문초를 받으면서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의 죄를 실토하라는 것을 거부했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으며 사후에 가산을 몰수당했다. 영조(英祖) 즉위 후 호조 판서에 추증되고 가산을 환수받았으며, 1782년(정조 6)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렸다. 《夢梧集 卷6 平安道兵馬節度使贈戶曹判書諡忠壯白公神道碑銘》

[주D-002]예맥(穢貊)의 땅 : 강원도를 가리킨다.


영숙이 일찍이 나를 위해서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집터를 살펴 준 적이 있었는데,
그곳은 산이 깊고 길이 험해서 하루 종일 걸어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정도였다. 갈대숲 속에 둘이 서로 말을 세우고 채찍을 들어 저 높은 언덕을 구분하며,

“저기는 울을 쳐 뽕나무를 심을 만하고,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일구면 일 년에 조〔粟〕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다.”

하면서 시험 삼아 부시를 쳐서 바람 따라 불을 놓으니 꿩이 깍깍 울며 놀라서 날아가고, 노루 새끼가 바로 앞에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쫓아가다가 시내에 가로막혀 돌아와서는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인생이 백 년도 못 되는데, 어찌 답답하게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조 농사나 짓고 꿩 · 토끼나 사냥한단 말인가?”

했었다.


[주D-003]영숙이 …… 있었는데 : 연암은 1771년(영조 47) 과거를 폐한 뒤 백동수와 함께 개성(開城)을 유람하다가 그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을 답사한 뒤 장차 그곳에 은거할 뜻을 굳혔다고 한다. 《過庭錄 卷1》
[주D-004]나무와 …… 거처하면서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이 깊은 산속에 살 적에,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사슴이나 멧돼지와 상종하였으니, 깊은 산속의 야인(野人)과 다를 바가 없었다.〔舜之居深山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고 하였다.


이제 영숙이 기린협에 살겠다며 송아지를 등에 지고 들어가 그걸 키워 밭을 갈 작정이고, 된장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장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 그 험색하고 궁벽함이 연암협에 비길 때 어찌 똑같이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 자신은 지금 갈림길에서 방황하면서 거취를 선뜻 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하물며 영숙의 떠남을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의 뜻을 장하게 여길망정 그의 궁함을 슬피 여기지 않는 바이다.

그 사람의 떠남이 이처럼 슬피 여길 만한데도 도리어 슬피 여기지 않았으니, 선뜻 떠나지 못한 자에게는 더욱 슬피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절이 호방하고 웅장하여 마치 고점리(高漸離)의 축(筑) 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주D-005]그 사람의 떠남 : 원문은 ‘其人□行’으로 1자가 빠져 있으나, 이본들에는 ‘其人之行’으로 되어 있다.
[주D-006]고점리(高漸離)의 …… 소리 :
전국 시대 말기 진(秦) 나라에 의해 위(衛) 나라가 멸망당하자 위 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로 망명을 갔다가 축(筑) 연주를 잘하는 고점리를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형가가 연 나라 태자의 간청을 받고 진 나라 왕을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자 역수(易水)를 건너기 전에 전송객을 향해 고점리의 축 반주에 맞추어 강개한 곡조로 노래를 불렀더니, 사람들이 그에 감동하여 모두 두 눈을 부릅떴으며 머리카락이 곤두서 관(冠)을 찌를 듯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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