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집 제 7 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자서(自序)

문장의 사실성을 확보하라


아, 포희씨(庖犧氏)가 죽은 뒤로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벌레의 촉수(觸鬚), 꽃술, 석록(石綠), 비취(翡翠)의 깃털에 이르기까지도 그 문장의 핵심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며, 솥 발, 병 허리, 해 고리, 달 시울에도 그 자체(字體)가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바람과 구름, 천둥과 번개, 비와 눈, 서리와 이슬 및 새와 물고기, 짐승과 곤충 등이 웃고 울고 지저귀는 소리에도 성(聲) · 색(色) · 정(情) · 경(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주D-001]포희씨(庖犧氏)가 …… 오래다 : 포희는 복희(伏羲)라고도 하며, 태곳적 중국의 삼황(三皇) 중의 한 사람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포희가 천지를 관찰하여 팔괘(八卦)로 된 최초의 《역(易)》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문장이 흩어진 지 오래다’라는 것은, 포희가 팔괘와 각 효(爻)를 풀이한 문장〔繫辭〕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D-002]석록(石綠) :
공작석(孔雀石)이라고도 한다. 녹청색의 아름다운 광물로 장식품이나 안료(顔料)로 쓰인다.
[주D-003]비취(翡翠)의 깃털 :
원문은 ‘羽翠’인데, ‘翠羽’와 같은 뜻이 아닌가 한다. 비취는 물총새로 아름다운 녹색 깃털을 지녔는데, 귀중한 물건으로 여겨져 장식품으로 쓰인다.
[주D-004]솥 발 …… 남아 있다 :
솥 정(鼎) 자는 솥의 세 발을 상형(象形)으로 나타낸 것이고, 병 호(壺) 자는 병의 허리 부분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해 일(日) 자는 해의 둥근 고리 모양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달 월(月) 자는 달의 휜 가장자리인 시울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을 읽지 않으면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포희씨가 《주역》을 만들 적에 위로는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땅을 관찰하여 홀수인 양효(陽爻)와 짝수인 음효(陰爻)를 서로 포갠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그림이 되었으며, 창힐씨(蒼頡氏)가 문자를 만들 적에도 사물의 정(情)과 형(形)을 곡진히 살펴서 상(象)과 의(義)를 전차(轉借)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D-005]사물의 …… 전차(轉借) : 한자(漢字)의 조자(造字) 방법인 ‘육서(六書)’를 가리킨다. 사물의 정(情)과 형(形)을 곡진히 살펴서 글자를 만든 것은 지사(指事) 및 회의(會意)와 상형(象形)에, 상(象)과 의(義)를 전차한 것은 형성(形聲) 및 전주(轉注)와 가차(假借)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글에도 소리〔聲〕가 있는가?
이윤(伊尹)이 대신(大臣)으로서 한 말
주공(周公)이 숙부(叔父)로서 한 말을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정성스러웠을 것이며, 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의 모습과 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의 모습을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간절하였을 것이다.


[주D-006]이윤(伊尹)이 …… 말 : 탕왕(湯王)이 죽고 그의 아들 태갑(太甲)이 왕이 되자 이윤이 어린 왕을 훈도하는 글을 올렸다. 《서경(書經)》 이훈(伊訓) · 태갑(太甲) · 함유일덕(咸有一德) 등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주D-007]주공(周公)이 …… 말 :
무왕(武王)이 죽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왕이 되자 무왕의 아우인 주공 단(旦)이 어린 왕에게 안일(安逸)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훈계하였다. 《서경》 무일(無逸)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주D-008]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 :
주(周)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백기가 계모(繼母)의 모함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이상조(履霜操)’라는 노래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樂府詩集 琴曲歌辭1》
[주D-009]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 :
춘추 시대 제(齊) 나라 대부인 기량이 전사(戰死)하자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목놓아 크게 울다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녀의 여동생이 언니의 이러한 죽음을 애도하여 ‘기량처(杞梁妻)’라는 노래를 지었다. 《古今注 音樂》


글에도 빛깔〔色〕이 있는가?
《시경(詩經)》에도 있듯이,
“비단 저고리를 입으면 엷은 덧저고리를 입고, 비단 치마를 입으면 엷은 덧치마를 입는다네.〔衣錦褧衣 裳錦褧裳〕”라 하고,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달비도 필요 없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노래한 것이 그 예이다.


[주D-010]비단 저고리를 …… 입는다네 : 《시경》 정풍(鄭風) 봉(丰)에 나온다.
[주D-011]검은 머리 …… 필요 없네 :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에 나온다. 달비〔髢〕는 여자들이 머리를 장식하기 위해 덧넣은 가발로서 ‘다리’라고도 한다.


어떤 것을 정(情)이라 하는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른 것을 말한다.


[주D-012]새가 …… 말한다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양 귀비(楊貴妃)와 사별(死別)한 뒤에, “새가 울고 꽃이 지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르니〔鳥啼花落 水綠山靑〕” 더욱 슬프다고 탄식했다 한다. 여기에서는 ‘花落’을 ‘花開’로 고쳐 인용한 것이다. 《說郛 卷111下 楊太眞外傳下》


어떤 것을 경(境)이라 하는가?
멀리 있는 물은 물결이 없고 멀리 있는 산은 나무가 없고
멀리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요 공수(拱手)하고 있는 사람은 듣고 있는 사람이다.


[주D-013]
멀리 …… 없다 : 산수화에서 원경(遠景)을 간략하게 그리는 수법을 말한 것이다. 왕유(王維)의 산수론(山水論)이나 형호(荊浩)의 화산수부(畵山水賦)에 유사한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에게 고할 때의 심정과, 버림받은 아들과 홀로된 여인의 사모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함께 소리〔聲〕를 논할 수 없으며, 글에 시적인 구상(構想)이 없으면 《시경》 국풍(國風)의 빛깔〔色〕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별을 겪지 못하고 그림에 고원한 의취(意趣)가 없다면 글의 정(情)과 경(境)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벌레의 촉수나 꽃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문장의 핵심이 전혀 없을 것이요, 기물(器物)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글자를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주D-014]
고원한 의취(意趣) : 왕유는 산수론에서 “산수를 그릴 때 의취가 붓질보다 우선한다.〔凡畵山水 意在筆先〕”고 하여, 원경(遠景)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원의(遠意)를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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