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서산에 사는 중학동기 이명희님 사진이니까 서산 어디쯤이겠지요? 지명이 확인되는 대로 보고드릴께요. 허긴 모심기 끝난 지가 두어 주 되니께따끈따끈한 사진은 아니군요. 보리를 베어낸 논에 모른 심거던요. 어쨌거나 바람에 쓰러지지도 않고 빳빳이 선 채 결실을 한 풍요로운 보리밭 보니 무지하게 디기 반갑네요.




















'자연 >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들녘  (0) 2008.10.06
더위야 물렀거라!  (0) 2008.07.16
아데니움 (Adenium)  (0) 2008.06.21
용혈수(龍血樹)  (0) 2008.06.21
아, 백두산 천지!  (1) 2008.03.25

한 친구의 고향 얘기를 듣고 나도 전에 성묘 가서 찍어 두었던 고향 마을 풍경을 모아 보았다.















'자연 >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향집 풍경 02  (0) 2009.07.12
고향집 풍경 01  (0) 2009.07.12
귀로  (1) 2009.05.16
고향 원경  (1) 2009.03.26
자[字] 호[號] 시호[諡號] 에 대하여  (1) 2008.02.17











아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daum.net/baoro2020/14365915

'자연 >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들녘  (0) 2008.10.06
더위야 물렀거라!  (0) 2008.07.16
아데니움 (Adenium)  (0) 2008.06.21
용혈수(龍血樹)  (0) 2008.06.21
보리가 탱글탱글 영글었네요  (0) 2008.06.20


[사진] 마을 앞 시내 건너 앞산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 가서 찍은 고향마을의 원경.

비석이 서 있는 무덤의 주인공이구한말 한성판윤을 역임한 大자 鎭자 할아버지이시다.

[주]

비문(碑文)이나 개인의 전기인 행장(行狀)에는 명(名) 외에 자(字), 호(號)를 기록하고

사후에 국가로부터 시호(諡號)를 받은 경우에는 시호까지 밝히는 것이 보통이다.

중학동기 전병근님이 의정부 신숙주 비석 앞에서 자 호 시호에 대한 질문을 해 왔다.

이에세 가지 호징에 관하여 정리해 보았다.



<자[字] 호[號] 시호[諡號] 에 대하여>


자 [字]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

육조시대 晉나라 도연명(陶淵明365~427)은 이름은 잠(潛)이고 연명은 자(字)이나
흔히 도연명으로 부른다. 호(號) 오류선생은 작품 <五柳先生傳>에서 유래한다.
이태백, 소동파처럼 성씨에 호를 붙여 그 사람의 이름을 대신하는 경우는 있지만
字로써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드문 예이다.

왕조시대 양반 남자들은 성인식인 관례를 행할 때 字를 받는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여자들에겐 字는 물론 이름[名]조차 없다.
남자들이 사용하는 당호(堂號)를 쓰는 경우는 있었다.
본관에다 성씨를 붙여서 부르니 딸네들은 모두 같은 이름이어서 실상
고유명사라 할 수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국가가 백성들의 노동력을 수취하던 제도인 역[役]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양반, 양인 여자들은 역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천인이 아닌 양인여자
이름을 굳이 호적에 등재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후에도 사방공사, 도로정비 등에 동원하는 걸 부역(賦役)이라 했다.
꼬리글에 역[役]에 관한 사전의 설명을 옮겼다.

성인식인 관례를 행할 때 자를 받는다. 왕조시대

양반 남자들은 성인식인 관례를 행할 때 字를 받는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여자들에겐

字는 물론 이름[名]조차 없었다.남자들이 사용하는 당호(堂號)를 쓰는 경우는 있었다.
본관에다 성씨를 붙여서 부르니 딸네들은 모두 같은 이름이어서 실상 고유명사라 할 수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국가가 백성들의 노동력을 수취하던 제도인 역[役]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양반, 양인여자들은 역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천인이 아닌 양인여자 이름을 굳이 호적에

등재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후에도 사방공사, 도로정비 등에 동원하는 걸 부역(賦役)이라 했다.

중국에서 비롯된 풍습으로, 본명이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해 자는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며 자가 생기면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명을 휘명(諱名)이라고도 한다. 흔히 윗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을 본명으로 말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쓴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도 자를 사용하나 손아래 사람인 경우, 특히 부모나 스승이 그 아들이나 제자를 부를 때는 본명을 사용한다.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顔淵)을 회(回), 자공(子貢)을 사(賜)라 부르고 있다.

또 공자는 본명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는데 중(仲)은 아우라는 뜻으로 공자에게는 형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지었고, 니(尼)는 그가 이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낳은 아들인 것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 습속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설총(薛聰)의 자가 총지(聰智)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자의 사용이 보편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동시대인인 원효(元曉)는 자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근세의 유학자들이 중국을 본떠 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호 [號]

본 이름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

호는 흔이 자기 고향의 산이름이나 강이름을 쓰기도 하고 고전에 근거하여 가치관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다. 인명록을 찾다보면 같은 호를 쓰는 사람들이 여럿인 것은 후자에 근거한다.

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등 주로 동양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호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 ·사대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호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송나라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 이름인 이백(李白)이나 소식(蘇軾)보다도 호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호의 사용이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자들간에 학문적 교류와 편지 교환이 일반화되면서 본 이름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호는 집안에서 사용한다는 의미의 당호(堂號)와 시 ·서 ·화 등에 쓰는 아호(雅號)로 나누어지기도 했으나, 양자간에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되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규보(李奎輔)의 경우는 초기에는 시 ·술 ·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호를 바꾸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로 호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황의 퇴계(退溪), 이이(李珥)의 율곡(栗谷), 서경덕(徐敬德)의 화담(花潭)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퇴계문인 ·화담문인 ·율곡문인 등으로 호를 사용하였다. 성리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용어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하였다.

호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시 ·서 ·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호는 추사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선객(仙客) ·불노(佛奴) ·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서 유 ·불 ·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 후기 이래로 호 사전의 성격을 띤 많은 ‘호보(號譜)’들의 편찬은 호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다.

1945년에 편찬된 《대동명가호보(大東名家號譜)》에는 호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당(堂) ·암(巖) ·실(室) 등으로 끝나는 호가 많았다. 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목표를 한 경우, 완호물(玩好物)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주시경(周時經)의 ‘한힌샘’, 최현배(崔鉉培)의 ‘외솔’ 등의 호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김정식(金廷湜)의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의 목월(木月) 등의 호도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외에 이상백(李相佰)의 호 상백(想白)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는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체제가 다원화되면서 2종 이상을 쓰는 호보다는 자신의 실명(實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문학 ·예술 등 일부 분야에서 호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를 통하여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시호 [諡號]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

역대 왕들의 호칭은 모두 시호에 해당한다. 사후에 붙여진 칭호이기 때문이다. 太祖는 개국왕, 成宗는 그 왕조의 문물제도의 완비 등 그 왕의 행적에 기초한다. 연산군, 광해군 등은 왕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왕답지 않은 왕이어서 시호를 받지 못하고 --군의 칭호를 유지한 경우이다.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비,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시호는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은 주나라 주공(周公)부터이다. 한국에서는 514년(신라 법흥왕 1)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여 증시를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일반 관리의 경우에는 봉상시(奉上寺)에서 주관하였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수는 194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나중에 봉상시의 건의에 따라 새로 107자를 첨가하여 모두 301자를 시호에 쓰게 되었다.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 ·정(貞) ·공(恭) ·양(襄) ·정(靖) ·양(良) ·효(孝) ·충(忠) ·장(莊) ·안(安) ·경(景) ·장(章) ·익(翼) ·무(武) ·경(敬) ·화(和) ·순(純) ·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착한 행장이 없고 악하고 사나운 일만 있던 사람에게는 양(煬) ·황(荒) ·혹(惑) ·유(幽) ·여(厲) 등이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의 직품이 시호를 받을 만한 위치라면 후손들은 시호를 청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또 좋지 않은 글자가 쓰인 시호가 내려질 경우에도 다시 시호를 청하거나 개시를 청할 수 없었다. 시호를 내리는 목적은 여러 신하의 선악을 구별하여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연 >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향집 풍경 02  (0) 2009.07.12
고향집 풍경 01  (0) 2009.07.12
귀로  (1) 2009.05.16
고향 원경  (1) 2009.03.26
수구초심(首丘初心)  (0) 2008.06.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