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상사(上舍) 정지승(鄭之升)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의 무리가 몹시 추장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草入王孫恨 초입왕손한

花添杜宇愁 화첨두우수

汀洲人不見 정주인불견

風動木蘭舟 풍동목란주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스님을 전송하다[送僧]란 시는 다음과 같다.

爾自西歸我亦西 이자서귀아역서

春風一杖路高低 춘풍일장노고저

何年明月逍遙寺 하년명월소요사

共聽東林杜宇啼 공청동림두우제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또 한 연(聯)은 다음과 같다.

客去閉門惟月色 객거폐문유월색

夢廻虛岳散松濤 몽회허악산송도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지승(之升)의 자는 자신(子愼), 호는 총계(叢桂)

온양인(溫陽人)으로 정렴(鄭)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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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山鬼夜窺金井火 산귀야규금정화

水禽秋宿石塘煙 수금추숙석당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대박(大樸)의 자는 사진(士眞), 호는 청계(淸溪) 남평인(南平人)으로 벼슬은 학관(學官)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高霽峯)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으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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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승지(承旨) 이정립(李廷立)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謝刷還漂海人口表]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越萬頃之波濤 월만경지파도

就堯如日 취요여일

返千里之桑梓 반천리지상재

微禹其魚 미우기어

만 이랑 파도 헤치고

빛나는 요 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천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우 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이 글은 대우(對偶)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李廷立)의 자는 자정(子正), 광주인(廣州人)으로, 호는 계은(溪隱)이고,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79.

신묘년(1591, 선조24) 겨울에 중국 상인 20여 명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 중에 장덕오(莊德吾)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福建) 장포(漳浦)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侍郞) 장국정(莊國禎)과 시랑 주천구(朱天球)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堂叔)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太史) 장이풍(莊履豊)과 어사(御史) 이명(履明)은 당신 당형제(堂兄弟)이겠구려.”

하자, 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王信民)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國子監生)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吏部)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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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성종(成宗) 때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이섬(李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보(崔溥)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揚州府) 굴항채(崛港寨)에 닿으니, 채관(寨官)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布帆十幅不遮風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暹)은 무인(武人)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記事)가 없어 애석하다.

76.

가정(嘉靖) 임술년(1572, 명종17) 간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 정 상공(鄭相公)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海商)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을 가는 길이 공 천사(龔天使 조선에 사신왔던 공용경(龔用卿))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龔氏)는 그때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譯官)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家系)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77.

장흥(長興) 사람 이언세(李彦世)가 왜인(倭人)에게 사로잡혀 남번(南蕃)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주야(晝夜) 40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廣西) 향산현(香山縣)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明) 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반자[火伴]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知縣)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만인(蠻人)이 올린 고장(告狀)이라고 하여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朝鮮國)의 장흥(長興)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南雄府)에 압송하니 삼사관(三司官)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언세는 남창(南昌)과 항주(杭州)ㆍ소주(蘇州)의 풍경이며 북경ㆍ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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