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양주 최치원 기념관 얖 백옥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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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격황소서(檄黃巢書)

최치원(崔致遠) ,격황소서(檄黃巢書)동문선 제49권 격서(檄書) http://www.minchu.or.kr/index.jsp?bizName=MK [고전번역서] 廣明二年七月八日。諸道都統檢校太尉某告黃巢。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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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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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 격황소서(檄黃巢書) · 雙女墳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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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 격황소서(檄黃巢書) · 雙女墳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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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쌍녀분기(雙女墳記 ) or 최치원전(崔致遠傳)

https://www.youtube.com/watch?v=eWIxclVd1_s https://www.youtube.com/watch?v=0zqjMTVKtaE [참고] 인귀교환설화의 첫 작품으로는 최치원의 〈쌍녀분전기〉(雙女墳傳記)이다. 으로 명칭하기도 한다. 실상 최치원이 쌍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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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쌍녀분기(雙女墳記 ) or 최치원전(崔致遠傳)

 

최치원, 쌍녀분(雙女墳)/ 인귀교환(人鬼交歡)설화 - 산 사람이 죽은 이와 시를 수작함.

>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 중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에도 동일한설정임.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othugi&logNo=70148464471

 

최치원 설화

최치원 설화   인물 전설 설화. 신라 말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일화에 관련된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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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현승환, 최치원설화의 형성

https://oak.jejunu.ac.kr/bitstream/2020.oak/2613/2/%EC%B5%9C%EC%B9%98%EC%9B%90%20%EC%84%A4%ED%99%94%EC%9D%98%20%ED%98%95%EC%84%B1.pd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644

 

선녀홍대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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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5 거성(去聲) 대(隊)조에는 ‘선녀홍대(仙女紅袋)’란 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성임(成任)의 『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에는 ‘최치원’으로 되어 있다. 또 중국 남송 때의 장돈이(張敦頤)가 편찬했다는 『육조사적유편(六朝事迹類編)』의 분릉문(墳陵門) 제13에는 ‘쌍녀분(雙女墳)’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태평통재』에 수록된 내용은 『대동운부군옥』의 수록 내용에 비하여 훨씬 내용이 길 뿐만 아니라 문학화되어 있어 설화보다는 소설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마도 중국 현지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최치원과 쌍녀분’에 관한 전설이 『육조사적유편』으로 기록되었던 것을 바탕으로, 『대동운부군옥』 수록분과 같은 기록문학 작품으로 발전하였다가, 다시 『태평통재』 수록분과 같은 단편소설로까지 승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동운부군옥』에 수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중국으로 유학갔을 때 초현관(招賢館)에서 놀았는데, 그 앞 언덕에 ‘쌍녀분’이라는 오래 된 무덤이 있어, 그 석문에다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그 뒤 갑자기 손에 홍대를 쥔 여자가 최치원에게 와서 “팔낭자와 구낭자가 화답하여 삼가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최공이 깜짝 놀라 그 낭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여자는 말하기를 “공께서 아침에 시를 지으셨던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홍대를 받아 보니 두 낭자가 화답한 시가 들어 있었고, 뒷폭에는 한 번 만나기를 청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공이 여자의 이름을 물으니 ‘취금’이라 했다. 공이 또 시를 짓고, 끝에다 역시 만나자는 내용을 써 취금에게 주어 돌아가게 했다. 한참 후 한 쌍의 구슬 또는 두 송이 연꽃과 같은 두 여자가 나타났다. 공이 두 여자를 맞아 근본을 물으니, 두 여자가 들려주는 내력은 이러했다.

그들은 원래 부호인 장씨집의 딸들로서, 언니가 18세, 아우가 16세 때에 각각 소금장사와 차장사에게 시집가기를 부모가 권유하였다. 그러나 자매의 마음에 차지 않아 울적한 마음이 병이 되어 마침내는 요절하였는데 다행히 최공과 같은 수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매는 오늘 같은 좋은 밤에 시나 지으며 즐기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먼저 시를 짓자 이어 두 낭자가 차례로 시를 지어 읊었다. 마침내 그들의 간 곳은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태평통재』의 것과 비교하여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는 거의 같으나 「선녀홍대」에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은 시들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또 작품 말미에 남녀 주인공들이 하룻밤을 동침하고 나서 이튿날 새벽에 작별한 뒤 최공이 다시 쌍녀분을 찾아가 지난 밤 일을 회상하며 장가(長歌)를 불렀고, 그 뒤 신라로 돌아와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렸다는 「최치원」의 내용이 없다.

이 설화는 당나라 때의 전기소설인 장문성(張文成)의 『유선굴(遊仙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자와 사자와의 교정(交情)이 중심 모티프이고 산문 작품 속에 삽입시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내용적인 면에서나 형식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 하는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 중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 등에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gtI0F0b0gs&t=655s 

 

내초도 금돈시굴(金豚始窟)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 말기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을 든다. 최치원은 그 높은 학문이 이 나라는 물론 멀리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한학자일뿐 아니라 동방문학을 처음으로 만든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최치원은 기이한 전설을 남기고 있다. 원래 경주 최씨의 시조는 금빛 나는 돼지에서 낳았다하여 일명 「돼지 최씨」라고 불리어 오는데 이것은 단군이 곰에서 낳았다는 전설과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박속에서 낳았다는 민족 설화와 함께 이 경주 최씨에 관한 것도 중요한 민족 설화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 설화가 지금은 군산시에 속해있는 고군산 열도의 하나인 내초도에서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하루는 내초도라는 섬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누런 황돼지한테 붙들려 바위 밑 토굴로 끌려가서 몇 달 동안을 사는 동안에 황돼지에 태기가 있어 열 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점점 자라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해도 못나오고 황돼지와 같이 짐승처럼 살게 되었다. 하루는 어미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는 새에 다섯 살 난 아들에게 아버지는 사실 이야기를 다하면서 치원이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은 어미돼지가 날마다 해다 놓은 나무토막을 몰래 엮어서 배를 만들어서 타고 나가자고 했다.

어느 날 돼지가 또 산에 나무를 하러 나간 사이에 나무를 발처럼 엮은 뗏목을 타고 육지로 나오는데 어느새 어미돼지가 알고서 헤엄을 쳐 쫓아오고 있었다. 금새 앞발이 배에 닿을 듯 하자 아들이 미리 잘라서 실어 놓은 나무토막 하나를 던져 주었다. 욕심이 많은 돼지는 나무토막이 떠내려 갈까봐 아까워서 얼른 물어다가 섬에다 갖다두고 또 쫓아오자 아들은 계속 나무토막을 던져 주어 끝내는 어미 황돼지가 기진맥진해서 죽었다.

가까스로 살아서 육지에 닿은 아들은 머리가 총명해서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해서 뒷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경주 최씨의 시조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 의해서 옥구군 일대에서는 경주 최씨는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으며, 내초도에는 금돈시굴(金豚始窟)이라는 굴이 아직도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그의 뛰어난 업적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담고 있고 또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기에 그만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가 오늘날에는 믿기 어려운 금돼지에서 태어났다는 것인데 이것이 내초도에 있는 금돈시굴과 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데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산 지역의 인근인 옥구 일대는 최치원과 얽힌 사연을 여러 가지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금 옥구 상평마을에 있는 자천대가 바로 그것이다. 「옥구군지」에 나타난 이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찌기 당나라에서 큰 벼슬과 학문을 닦고 나라에 돌아왔을 때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이 자천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는 것인데 애당초 이 자천대는 옥구의 비행장 안에 있던 것을 상평마을에 옮겼다는 것으로 원래 자천대 부근에 있는 곧고 매끄러운 암석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먹을 갈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옥구군지」에는 또 그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고을의 태수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더 큰 벼슬을 내렸어도 그는 이를 거절하고 이곳 태수만을 지냈다고 한다.

아무튼 최치원과 옥구땅은 이러한 전설을 통해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내초도의 금돈시굴에서 최치원이 낳았다는 설화를 더욱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B9%98%EC%9B%90%EA%B8%B0%EB%85%90%EA%B4%80

 

최치원기념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치원기념관은 신라 말기 문신인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장수성 양주시에 2007년에 건립되었다.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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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기념관은 신라 말기 문신인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장수성 양주시에 2007년에 건립되었다.

 

 

중국 양주에서 최치원 기념관이 있는 당성유적지를 찾아서

https://hyeanj.tistory.com/18354789

1층 양쪽 벽에 동판으로 그려진 그림들

삼당시인은 삼당(三唐)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며 이들의 시를 삼당시(三唐詩)라 한다. 삼당이라는 명칭은 임상원(任相元)이 ≪손곡집 蓀谷集≫의 서(序)에서 이들 세 사람의 문집을 합간(合刊)하여 삼당집(三唐集)이라 하였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이후 신위(申緯)가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다시 “재천삼당최백이(才擅三唐崔白李)”라 하였고, 그 주에 이들 세 사람을 세상에서 삼당이라 일컬는다고 하였다. 삼당시인의 가장 큰 의의는 고려 전기 이래 지속되어 온 송시풍(宋詩風)을 당시풍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주(李冑), 김정(金淨), 신광한(申光漢), 나식(羅湜), 김인후(金麟厚), 박순(朴淳) 등이 나와 당시풍의 시를 썼으나 이러한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는데, 이들에 이르러 당시풍이 시단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송시(宋詩)의 관념적이고 이지적인 면 대신, 흥취와 여운을 중시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낭만적인 경향을 띠는 것이 많다.
이달이 박순(朴淳)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교유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 등에서 시회(詩會)를 가지면서 시사(詩社)로서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특히 봉은사(奉恩寺)에서 시재를 자주 겨루었다고 한다. 이달은 처음부터 당시풍을 지향한 것은 아니어서 송시풍을 선호하다가 최경창과 백광훈을 만나면서 당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당시를 배웠지만, 최경창은 청경(淸勁)하고 백광훈은 고담(枯淡)하며 이달은 부염(富艶)하다는 개성의 차이는 있다. 또 이들이 성당(盛唐)의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만당(晩唐)의 기미(綺靡)에 머물렀다는 한계도 아울러 지적되고 있으며, 모두 그 생애가 불우하여 맹교(孟郊)와 가도(價島)의 유(類)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또 율시보다는 절구에 능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출처 : 네이버고전문학사전, 권영민교수 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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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풍(詩風) 개괄(槪括)

◈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풍(詩風) 개괄(槪括) 삼당시인(三唐詩人)이란 조선 중기에 세 사람의 당풍시(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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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白光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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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은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江湖)에서 시와 서도(書道)로 자오(自娛)하였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백광훈은 1577년(선조 10)에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예빈시(禮賓寺)·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일컬었다.

송시냐 당시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백광훈의 시는 당풍(唐風)을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詩風)을 지녔던 것이다.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백광훈은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백광훈은 이산해(李山海)·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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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崔慶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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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은 백광훈(白光勳)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했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 · 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 영광군수로 좌천됐다. 이때에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했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년(선조 16) 4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 ·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945

 

이달(李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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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 당나라 때의 유명한 열두 명의 시인)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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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앙엽기(盎葉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앙엽기(盎葉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앙엽기(盎葉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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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앙엽기(盎葉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앙엽기(盎葉記)

 

1 앙엽기서(盎葉記序)

2 홍인사(弘仁寺)

3 보국사(報國寺)

4 천녕사(天寧寺)

5 백운관(白雲觀)

6 법장사(法藏寺)

7 태양궁(太陽宮)

8 안국사(安國寺)

9 약왕묘(藥王廟)

10 천경사(天慶寺)

11 두로궁(斗姥宮)

12 융복사(隆福寺)

13 석조사(夕照寺)

14 관제묘(關帝廟)

15 명인사(明因寺)

16 대륭선호국사(大隆善護國寺)

17 화신묘(火神廟)

18 북약왕묘(北藥王廟)

19 숭복사(崇福寺)

20 진각사(眞覺寺)

21 이마두총(利瑪竇塚)

 

 

 

앙엽기서(盎葉記序)

 

북경 안팎에 있는 여염집과 점포들 사이에 있는 사찰과 궁관들이 천자의 명령으로 특별히 지은 것들만이 아니라, 모두 여러 왕과 부마(駙馬)들과 만(滿)한족(漢族) 대신들에게 기증한 집들이 있으며, 또 큰 장사꾼들이 반드시 한 채 묘당(廟堂)쯤은 짓고, 자신들을 위한 명복(冥福)을 빌어 천자와 더불어 사치하고 화려함을 경쟁하므로, 천자도 새삼스레 건축을 일삼거나 따로 이궁(離宮)을 두지 않고도 천자 있는 도성을 사치롭게 하고 있다. 명의 정통(正統)천순(天順) 연간에는 황제가 직접 돈을 내어 세운 집이 2백여 군데나 되었는데, 근년에 새로 지은 집들은 흔히들 대궐 안에 있어 외인으로서는 얻어 구경할 수가 없었으나, 다만 우리나라 사신이 이르면 때로 끌어들여 마음대로 구경을 시켰다. 그러나 내가 유람한 곳이란 겨우 백 분의 일이나 될까, 때로는 우리 역관들이 억제하기도 하고, 때로는 들어가기 힘든 곳을 문지기와 다투어 가면서 모처럼 들어가면, 바쁘고 총총하며 그저 시간이 부족하였을 뿐이었다. 창건된 역사는 비석 같은 것을 상고하지 않고서는 어느 시대 어느 절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겨우 빗돌 한 개만 읽는 데도 언뜻 몇 시간씩 보내므로, 자개와 구슬처럼 찬란한 궁궐의 구경도 문틈을 지나가는 말이나 여울에 달리는 배처럼 되고 보니, 오관(五官)이 함께 피로만 해지고, 아울러 사우(四友)가 맥이 풀리어 언제나 꿈에 부적 보는 것만 같고, 눈은 신기루(蜃氣樓)를 본 듯 의아하게 거꾸로 기억이 되며 명승 고적은 틀리게 안 것이 많았다. 돌아와서 약간의 기록을 수습해 보니, 어떤 것은 종이쪽이 나비의 날개 폭이나 될까 하면 글자는 파리 대가리만큼씩이나 하니, 대체가 그 총망 중에 빗돌을 얼른 보고 흘려 베낀 것이다. 드디어 이것을 엮어서 얇은 책 앙엽기를 만드니, ‘앙엽이란 말은 옛 사람이 감 잎사귀에 글자를 써서 항아리 속에 넣었다가 모아서 기록했다.”(출처 미상)는 일을 본받아서 한 것이다.

 

 

[C-001]앙엽기서(盎葉記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서는 주설루본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D-001]오관(五官) : ()()()()().

[D-002]사우(四友) : ()()()().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홍인사(弘仁寺)

 

 

홍인사의 맨 뒤에 있는 전각에는 관음(觀音) 변상(變相)이 있으니 손이 천 개요, 눈도 역시 천 개인데, 손에는 각기 잡은 것이 있었다. 불상 뒤에는 큰 족자 그림이 걸려 있는데, 파도가 치솟는 큰 바다에 빈 배만 떴다 잠겼다 하고, 바다와 하늘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올라 상서로운 오색 구름으로 되었는데, 구름 속에는 금관과 옥대로 어린 아이를 껴안은 자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갖추었는데, 곱게 생겼으면서도 근엄한 태도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몇천 명이나 되는 사람의 무리가 구름 속에 빙 둘러서서 옹위를 하였는데, 모두들 이마에는 부처의 원광이 둘러졌다. 바다의 언덕 위에는 수없는 남녀들이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어 거의 만 명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린 이의 성명도, 그린 해나 날짜와 낙관(落款)도 없으니, 구경하는 이도 무슨 인연으로 시주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그림이 송()의 육수부(陸秀夫 () 충신. 자는 군실(君實))가 임금을 안고 바다로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안 것인가. 일찍이 송의 군신도상(君臣圖像 저자 미상)을 보니,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관과 옷이 이와 같았고, 어제 문승상사(文丞相祠)를 참배할 때에 본 소상(塑像)의 관대가 역시 이와 비슷했다. 어린이로 임금의 면목을 갖춘 이는 틀림없이 송의 황제 병( ()의 마지막 황제)일 것이다. 빈 배가 출몰하는 것은 그가 황제를 안고 바다에 떨어지자, 배 가운데 탔던 사람들이 다들 따라서 빠진 것이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이마에 불광(佛光)을 두른 자들은 후세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니, 그림 그리는 이의 고심(苦心)인 것이다. 이때는 송의 운명이 넓은 바다 위에 떠 있어서 임금이나 신하나 위아래가 없이 하루살이 같은 생명을 고래등 같은 파도 속에 붙였고 보니, 그야말로 물이 아니면 하늘인지라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날마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주희(朱熹) )를 써서 어린 임금을 가르치니, 그 조용하고 한가한 폼이 바로 전각 속 털방석 위에서 강의를 하는 것만 같으니, 이 어찌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 충신과 의사란 나라가 망해 엎어진다 해서 조금이라도 그 간절한 충군애국의 마음을 늦추지 않고 본즉, 정성이 곧 천하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이는 오로지 뜻을 정성스럽게 해서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는 것이다. 하루라도 이 같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없다면 모르겠지마는, 하루라도 이 같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있다면 이런 과업은 그날그날의 급선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대의에 밝지 못하면 비록 만 리의 강토를 지니고 있더라도 오히려 천하 국가가 없음이나 다름없을 것이나, 만일 이런 대의를 앞세울 줄을 안다면 비록 조각배 속에서라도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미상불 준비되었다고 볼 것이다. 밥이 없으면 죽고 군사가 없으면 망하지마는, 성인도 오히려 죽고 망한 뒤에라도 신의를 지키고자 하였는데, 하물며 당시에 있어 문 승상은 밖에서 군사를 맡아 보고 등광천(鄧光薦 ()의 명신. 자는 중보(中甫))은 안에서 군량을 동독(董督)하고 있는 그때이니만큼 배 가운데 든 천하라도 오히려 법도만은 먼저 회복해야 할 참된 이치가 있지 않겠는가.

 

 

[D-001]범 문정공(范文正公) : 송의 명신 범중엄(范仲淹). 문정은 시호. 자는 희문(希文).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보국사(報國寺)

 

 

보국사는 선무문(宣武門) 밖으로부터 북으로 1리쯤 가서 있다. 매월 3일과 5일을 장날로 정했는데 국내의 백화가 몰려든다. 불전은 세 채가 있고, 행랑채가 빙 둘러 있으나 사는 중들은 얼마 아니 되었다. 모두가 수도와 외읍으로부터 몰려든 행상들로서 아주 장터나 다름없이 참선하는 절간 속이 버젓한 도회처럼 되었다. 첫째 전각의 편액에도 일진부도(一塵不到)’라 썼고, 셋째 전각 위에는 비로각(毘盧閣)이 있는데, 그 중간은 한 길이 되어 점포들이 쭉 늘어섰고 거마들이 잡다하게 모여드니, 비단 장날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사기(史記)에 소진(蘇秦 전국 시대의 변사(辯士))이 제왕(齊王)을 보고 말하기를, ‘임치(臨淄 ()의 수도)의 거리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은 어깨를 마주 비비며 땀을 뿌리면 비가 되고, 옷자락을 잇대면 휘장이 된답니다.’라고 하였기에, 나는 너무 과장한 말이라고 하였더니 이제 아홉 채 성문을 구경하니 과연 그렇구려. 또 보국사와 융복사(隆福寺) 같은 것들이 모두 아홉 거리[]나 다름없음을 본 연후에야 더욱이 옛 사람들의 말이 그리 허튼소리나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구려. 열국(列國) 시대로 말하면 언제나 난리판이었지마는 도성들의 부유하고 번화함이 그 같았거늘, 하물며 승평한 날 천자가 기거하는 수도일까보냐.”

비로각에 올라가 보니, 전각은 서른 다섯 칸이요, 복판에는 문창성군(文昌星君)을 안치하고 좌우로는 불상과 신장들을 늘어놓았다. 북쪽 바람벽으로부터 층층다리를 밟고 꼭대기로 오르니, 윗층은 캄캄하기가 칠야와 같아서 층층대를 겨우 더듬어 가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일곱 길이나 올라가니 층층대는 끊어지면서 환하게 밝아졌다. 윗층은 열다섯 칸인데 큰 금부처가 열한 좌나 있었다. 난간을 한 바퀴 돌아보니 황성의 아홉 성문 안팎이 손금 보듯 자세히 보였다. 콩알만 한 사람과 한 치에 지나지 않는 말이 티끌 뭉치 속에서 꾸물거렸다. 천녕사(天寧寺)의 영탑(影㙮)은 구름 속에 높이 머리를 박았고, 태액지(太液池)는 맑게 툭 터졌는데, 구슬처럼 깨끗한 섬 가운데에 솟은 흰 탑은 수정을 깎아 세운 듯이 스스로 얼굴을 나타내었다. 이 절은 명의 성화(成化) 초년에 황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하였는데, 한림 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유정지(劉定之 ()의 문학가. 자는 주정(主定))가 지은 비문을 왕용(汪容 미상)이 썼다.

 

 

[D-001]문창성군(文昌星君) : 문창부(文昌府)를 맡았다는 귀신 이름. 곧 문창제군(文昌帝君).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녕사(天寧寺)

 

 

보국사로부터 천녕사로 왔다. 이 절은 위() 때의 이름은 광림사(光林寺), () 때에는 홍업사(弘業寺)였고, ()의 개원(開元) 연간에는 천왕사(天王寺)로 현판을 고쳤다. ()의 대정(大定) 21년에 만안선림(萬安禪林)이 되었다가 명의 선덕(宣德) 연간에 고쳐서 천녕사라 하였고, 정통(正統) 연간에는 또 수리하여 만수계단(萬壽戒壇)이라고 불렀다. 한길 가에 닿아서 축대 2층을 쌓아 높이는 댓 길이나 됨직하다. 축대 위에 집채들은 빙 둘러 잇달아서 거의 몇 리나 되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불전이 다섯 채나 있었다. 옛 이야기에,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 인수(仁壽) 2(602) 정월에, 황제가 아라한(阿羅漢)을 만나 사리(舍利) 한 주머니를 받아 이를 곧 칠보함(七寶函)에 넣어 기( 섬서성에 있는 고을 이름)( 섬서감숙 지방) 등 서른 고을에다가 각각 탑 한 자리씩을 세우고 이를 간직하도록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지금 천녕사 탑도 그 중의 하나이며 탑의 높이는 스물일곱 길 다섯 자 다섯 치라 한다. 탑은 13층으로 팔모가 났는데, 네 둘레로 방울을 단 것이 만 개는 되어 방울 울리는 소리가 끊어질 때가 없었다. 탑 꼭대기에 구리쇠 바퀴는 바람에 갈리어 번쩍번쩍 사람의 옷자락에까지도 비치어서 희락푸르락하였다. 옛 말에는,

 

탑 그림자가 거꾸로 대사전(大士殿)에 들고, 해가 정오에 이르러 전문을 닫으면 햇빛이 문 틈으로 새어들어 탑의 그림자가 온통으로 돌 위에 비친다.”

고 하였다. 내가 이제 오자 마침 구름이 끼어서 그 그림자는 구경하지 못했으나, 다만 대사상(大士像 불보살(佛菩薩)의 상) 뒤에 걸어 놓은 화엄경(華嚴經) 장자(障子)는 기교하기 짝이 없었다. 강희(康熙) 신미년(1691)에 대흥현(大興縣)에 있던 이지수(李之秀)의 처 유씨(劉氏)가 손으로 베낀 화엄경으로 전부 81권에 60 43자인데, 이것을 구불구불 구부려 접어서 5층 전각을 만들어 복판에는 불상을 두었다. 글자는 가늘기가 개미 대가리만큼씩한데, 한 점 한 획을 다 조심스럽게 긋고 삐친 글씨체가 한 군데도 허술한 곳이 없었다. 전각과 지붕과 문창들도 한 칫수도 어긋남이 없고, 불상의 눈매는 마치 산 사람 같고 옷자락의 구김살도 자연스러웠다. 어허, 한 여인의 마음과 손 재간도 이같이 신기롭거든, 하물며 온 절간의 이룩함이란 천하의 뭇 힘을 모아 놓았음이랴. 절 가운데 있는 보물과 기완들은 틈이 없어 다 구경하지 못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백운관(白雲觀)

 

 

백운관(白雲觀)의 둘레는 놀랍고 화려한 폼이 천녕사에 못지 않았다. 도사 백여 명이 살고 있는데, 패루(牌樓)의 바깥 현판에는 동천가경(洞天佳境)’이라 썼고, 안쪽 현판에는 경림낭원(璚林閬苑)’이라 썼다. 홍예다리 셋을 건너 옥황전(玉皇殿)에 들어가니, 옥황은 황제의 복색을 갖추었다. 전각을 둘러 삼십삼천(三十三天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제군(帝君)은 홀()을 잡고, 면류관 술을 드리운 것이 옥황이나 다름없으며 천봉신장(天蓬神將)은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으로 각기 병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앞 전각에는 남극노인성군(南極老人星君)이 흰 사슴을 탄 채로 안치되었고, 왼편으로 한 전각에는 두모(斗母 선녀(仙女)의 하나)를 안치하였고, 오른편 전각에는 구장춘(丘長春)을 안치하였으니, 이는 원 세조(元世祖)의 국사(國師)이다. 옥황전의 현판에 자하진기(紫霞眞氣)’라 붙어 있고, 두모전(斗母殿) 현판은 대지보광(大智寶光)’이라 붙었으니 모두 강희 황제의 어필이다. 도사들이 거처하는 행랑채는 모두 천여 칸으로 어디든지 밝고 깨끗하고 조용하여 티끌 한 점도 움직이지 않았다. 쌓아 둔 서적들은 모두 비단 두루마리 책에 옥으로 축을 만들어 집 안에 가득 찼고, 기이하고 오래 묵은 그릇들과 병풍이며 글씨나 그림들은 세상에서 드문 보물들이었다.

 

 

[D-001]남극노인성군(南極老人星君) : 인간의 수고(壽考)를 맡은 남국 노인성.

[D-002]구장춘(丘長春) : 원의 도사 구처기(丘處機)의 도호(道號).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법장사(法藏寺)

 

 

천단(天壇) 북녘 담장을 따라 동으로 몇 리 가면 법장사(法藏寺)가 있다. 이 절은 금()의 대정(大定) 연간에 창건되었는데, 옛 이름으로는 미타사(彌陀寺)이다. ()의 경태(景泰) 2(1451)에 중수하고는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제도는 천녕사와 비슷하고, 탑은 7층에 높이가 여남은 길이나 되었다. 가운데는 텅 비어 나선형으로 층층대를 놓았는데, 한밤중같이 캄캄하므로 손으로 더듬어 발을 떼어 놓는데, 마치 귀신 동굴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벌써 한 층을 올라오고 보니, 여덟 개 창문이 활짝 터져 눈과 정신이 시원해졌다. 7층까지 차례로 올라가는데, 한 번씩 꿈을 꾸었다 깨는 듯했다. 층대마다 팔 면이요, 한 면마다 창문이 났고, 창마다 부처가 있어 무려 쉰여덟 개나 된다. 부처 앞에는 모두 등잔 한 개씩을 놓아 두어 더러는 말하기를,

 

정월 대보름날 밤엔 탑을 둘러싸고 불을 켜고는 번갈아 풍악을 잡히면 소리가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것만 같다.”

고 한다. 그 제일층에는 우리나라 김공(金公) 창업(昌業)의 제명이 있고, 그 밑에는 또 내 친구 홍군(洪君) 대용(大容)의 제명이 있는데, 먹빛이 금방 쓴 것 같았다. 서글프게 거닐다 보니, 마음을 털어놓고 마주 이야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난간을 의지하여 사방을 바라다보니 황성 지도의 전폭이 역력히 눈 안에 들어왔다. 안력이 벌써 다하고 보니 심신이 흔들리고 머리칼이 오슬오슬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둘째 전각에는 빗돌 두 개가 섰는데, 하나는 급사중(給事中) 오헌(吳獻)의 글에 홍려 시승(鴻臚寺丞) 고대(高岱)의 글씨였고, 또 하나는 국자좨주(國子祭酒) 호형(胡瀅)의 글에 태자빈객(太子賓客) 회음(淮陰) 김렴(金濂)의 글씨요, 좌도어사(左都御史) 고소(姑蘇) 진감(陳鑑)의 전자(篆字)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태양궁(太陽宮)

 

 

법장사를 나와 서로 몇백 보를 가면 태양궁(太陽宮)이 있다. 참배하는 사람이 많아서 거마가 빽빽이 모여든다. 안팎의 여러 전각과 좌우 행랑채는 남녀 기도군이 하루에도 천만으로 헤아릴 만하였다. 층계 어간에는 촛불똥이 봉우리처럼 모였고, 향불에서 떨어진 재가 눈같이 날렸다. 앞에 전각 바로 복판에는 자미성군(紫微星君 자미성의 신())이요, 동쪽에는 태양성군(太陽星君 태양신)이요, 서쪽은 태음성군(太陰星君 월신(月神))이요, 뒷 전각에는 구천성군성모(九天星君聖母 구천신(九天神)), 왼편의 한 쪽 전각은 관제(關帝 관우(關羽)), 오른편 전각은 석가(釋迦)를 모셨다. 술이야 밥이야 꽃과자 등속을 팔고, 새들을 놀린다, 땅재주를 한다, 요술을 보인다, 야단법석을 하여 절 집 안은 큰 도회지가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안국사(安國寺)

 

 

숭문문 밖 서남쪽에 금어지(金魚池)가 있는데, 또 하나의 이름은 어조지(魚藻池)이다. 못을 작은 웅덩이로 구획하여 복숭아와 버들을 많이 심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해마다 오색 금붕어를 키워서 파는 것으로 업을 삼고 있다. 금빛 붕어가 제일 많으므로 금어지라 부른다. 해마다 단옷날이면 도성 사람들이 한목 나와 말을 달리면 못뚝과 또 응달의 일대는 정자와 장원들이 많은 중에서도 안국사(安國寺)가 가장 장하고 화려하다. 절문 좌우에는 종각(鍾閣)과 고루(鼓樓)가 있고, 큰 전각 셋이 있으며 그 앞의 동리 낭각은 몇백 칸인데, 어디나 불상을 모셨고 금벽 단청이 현란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전각 뒤에는 또 큰 다락 세 채가 있어서 금빛 난간에 수놓은 들창은 구름 속에 나풀거렸다. 중 두 명이 마주 지키고 있을 뿐 참배하는 자가 드문 것은 괴이한 일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약왕묘(藥王廟)

 

 

천단 북녘에 약왕묘(藥王廟)가 있으니, 무청후(武淸侯)이성명(李誠銘)이 창건하였다. 전각 속에는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 중국 신화(神話) 중의 인물. 3() 중의 하나)를 모셨고, 왼편은 신농씨(神農氏 3황 중의 하나), 오른편은 헌원씨(軒轅氏 3황 중의 하나)였으며, 역대의 이름난 의원들을 배향했으니, 손진인(孫眞人 ()의 손사막(孫思邈))기백(岐伯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편작(扁鵲 ()의 명의(名醫))갈홍(葛洪 ()의 도사. 자는 치천(稚川))화타(華陀 후한(後漢)의 명의(名醫))왕숙화(王叔和 ()의 명의)위진인(韋眞人 미상)태창령(太倉令 미상)장중경(張仲景)황보사안(皇甫士安)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대체로 문묘(文廟) 종향(從享)의 제도를 본뜬 것이다. 매월 초하루 보름에 남녀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질병 기도를 하는데, 촛불똥이며 향불 태운 재가 눈처럼 쌓였었다. 방금도 한 여인이 화려하게 단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분 땀이 자리를 적시었다. 전각의 장려한 폼은 태양궁과 거의 비슷하였다.

 

 

[D-001]장중경(張仲景) : 후한(後漢)의 명의 장기(張機). 중경은 자.

[D-002]황보사안(皇甫士安) : ()의 명의 황보탄(皇甫坦). 사안은 자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경사(天慶寺)

 

 

약왕묘와 담장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천경사(天慶寺)가 있다. 큰 전각 넷이 있는데, 첫째가 사왕(四王)이요, 둘째가 원통(圓通)이요, 셋째가 대연수(大延壽), 넷째가 공상(空相)이다. 공상전 복판에는 한 치 남짓 되는 금부처 몇천만 개를 주렁주렁 쌓아서 큰 부처를 만들었으니, 눈매는 산 사람 같고 이마 주름살이나 옷 주름은 모두 꼬마 부처들을 가로 모로 세우고 눕히어 마치 그림붓으로 모방해 그린 듯이 만들었다. 이 같은 정성과 기술이라면 건축을 이룩함에 있어서나 단청의 화려함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인가. 이처럼 큰 절간에 단지 한 명의 늙은 중이 두세 명의 젊은 중을 데리고 있을 따름이요, 행랑채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공장이들이 살면서 물건을 만드느라 법석이다. 서화의 긴 축들과 표구 장황들을 모두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동북쪽 모퉁이의 높은 다락 속에는 13층 금탑을 세웠는데, 조각과 그림이 훌륭하기가 귀신의 솜씨로 된 것만 같았다. 이 절은 명()의 천순(天順) 3년 기묘(1459)에 세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두로궁(斗姥宮)

 

 

천단의 서쪽에 두로궁(斗姥宮)이 있다. 대문 앞의 정면 거리에는 패루(牌樓)가 셋이 있어 남쪽 패루 바깥 현판에는 여천동수(與天同壽)라 썼고 안쪽 현판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 썼으며, 동쪽 패루 바깥 현판은 봉래심처(蓬萊深處)라 썼고, 안쪽 현판은 동화주주(東華注籌)라 썼으며, 서쪽 패루 안쪽 현판은 천축연상(天竺延祥)이라 썼고, 바깥 현판은 잊어버렸다. 세 개의 패루가 솥발처럼 서서 금벽 단청빛이 현란하여 눈을 바로 뜨고 볼 수 없었다. 첫째 전각 현판은 북극전(北極殿)이라 하여 북두성군(北斗星君 북두성의 신())을 안치하고, 둘째 전각부터 다섯째 전각까지는 모두 쇠를 채워 구경을 시키지 않았다. 대체로 건축의 훌륭한 폼이라든가 그림의 기교는 보통 슬기와 역량으로서 미칠 바가 못 되었다. 좌우 행랑채의 바람벽 위에 그린 그림들은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나, 갈 길이 바빠서 상세히 보지를 못했다. 또한 전각에 이르러 들창 틈 사이로 멀리 들여다보니, 보물과 골동인지는 모르겠으나 푸른 빛이 귀신 불처럼 반짝반짝 하고, 포개어 있는 꼴이 부처의 배처럼 옹기종기하여 짐짓 알고자 해도 알 길이 없고, 마치 꿈에 부적 읽는 것만 같았다. 또 한 방에 이르니 옛 서화를 많이 두었는데, 미불(米芾 송 나라의 서예가(書藝家). 자는 원장(元章))의 천마부(天馬賦)와 산정목매도(山精木魅圖)가 있었으나 다만 그 제목만을 보고 떠났다. 강희 때에 태감(太監) 고시행(顧時行)이 태황 태후(太皇太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제 사재를 시사하여 빗돌을 세웠으니, 글은 한림 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고사기(高士奇 청 나라의 문학가. 자는 담인(澹人))가 지은 것으로 강희 을해년(1695)에 세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융복사(隆福寺)

 

 

융복사(隆福寺)의 장날은 매월 사흘과 하루이다. 의주(義州) 상인 경찬(鏡贊)과 동행하였다. 이날이 바로 장날이라 거마들이 더욱 복잡하여 절간 지척에서 그와 서로 잃어버리고는 할 수 없이 혼자서 다니면서 구경을 하였다. 비석에 기록하기를,

 

경태(景泰) 3(1452) 6월 공부 시랑(工部侍郞) 조영(趙榮)이 역군 1만 명을 동독하여 5(1454) 4월에 준공하였는데, 황제는 날을 골라서 거둥할 제 태학생(太學生) 양호(楊浩)와 의제낭중(儀制郞中) 장륜(章綸)이 함께 소장을 올려 간하매 그날로 거둥을 파하였다.”

한다. 절 안에는 공경과 사대부들의 수레와 말이 연이어 이르러 손수 물건을 골라 잡아 사곤 한다. 온갖 물건이 뜰에 가득 차고, 주옥과 보물들이 이리저리 발길에 채다시피 구르고 있어 걷는 사람의 발길을 조심스럽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송구스럽게 하였으며, 사람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섬돌 층대며 옥돌 난간에 걸어 둔 것은 모두 용봉 무늬를 놓은 담요와 모직들이며 담장을 둘러 싸다시피 한 것은 모두가 법서(法書)와 명화(名畵)들이다. 이따금 장막을 친 채 징과 북을 치는 곳은 재주를 부리고, 요술을 부려서 돈벌이를 하는 곳이다. 지난해 이무관(李懋官 이덕무(李德懋)의 자)이 이 절을 유람할 때는 마침 장날로서 내각 학사(內閣學士) 숭귀(崇貴)를 만났는데, 그 역시 손수 여우 털 갖옷 한 벌을 골라서 깃을 헤쳐 본다. 입으로 털을 불어 본다. 몸에 대고 짧고 긴 것을 재어 본다. 손수 돈을 끄집어내어 사는 것을 보고 깜빡 놀랐단 말을 들었다. 숭귀란 자는 만주인으로 지난해에 칙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에 왔던 자이다. 그의 벼슬은 예부 시랑(禮部侍郞)이요, 몽고부도통(蒙古副都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선비들로서 비록 부리는 하인 한 명 없는 집안일지라도 아직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는 장사치들을 상대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은 좀스럽고 더러운 일로 치는 터이니, 이런 광경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돌아다니면서 본 흥정꾼들은 모두 오중(吳中 강소성 지방)의 명사들이요, 특별히 거간꾼들 따위 외에 유람차 온 자는 대체로 한림서길사(翰林庶吉士) 같은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은 친구를 찾아 고향 소식을 묻기도 하고, 겸하여 그릇 등속과 의복을 사기도 한다. 그들이 찾는 물건들이란 대개 골동 그릇이며 새로 발간된 서적이며 법서명화관복염주향랑안경 등으로서 남을 함부로 대신 시켜 군색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차라리 자기 손으로 유쾌하게 골라놓은 것만 못한 까닭인 것이다. 자신들이 멋대로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데 있어서도 역시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곳을 볼 수 있는 바 이래서 중국 사람은 저마다 물건을 감상할 줄 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석조사(夕照寺)

 

 

석조사(夕照寺)로 유세기(兪世琦)를 찾았다. 절은 그리 크지는 못하나 정쇄하고도 그윽하여 이야말로 티끌 한 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이곳 선림 중에서 이처럼 맑은 곳은 처음 보았다. 중은 한 명도 없고 거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복건(福建)이나 절강(浙江)에서 온 낙제한 수재로서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가 없어, 이곳에 많이들 묵고 있으면서 서로 글을 지어 발간하여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당시 그들은 모두 서른한 사람으로서 남의 글 품팔이를 하려고 아침에 나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아 한 사람도 집에 없으니 절 안은 고요하였다. 거처하는 방들은 다들 정결하고 자리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감회에 잠겨 거닐면서 발길을 못 돌리게 하였다. 석진일기(析津日記)에는 이르기를,

 

연경 팔경(八景) 중에 금대석조(金臺夕照)가 있으니, 이 절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유군(兪君)은 원래 복건 사람인데, 섬서성 병비도(陝西省兵備道) 진정학(陳庭學)의 자형(姊兄)이 되었다가 금년 2월에 상처를 하고, 아들도 없이 네 살 난 젖먹이 딸을 그의 처가에 두고 자기는 홀로 심부름 하는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이 절에 붙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관제묘(關帝廟)

 

 

관제묘(關帝廟)는 천하에 어디든지 비록 궁촌 벽지라도 사람 몇 호만 사는 데는 반드시 사치한 묘우를 떠받들어 지어 놓고, 제사에 정성이 대단하여 소 먹이는 아이와 곁두리 먹이는 지어미[饁婦]들까지 뒤떨어지기가 두려워 달려든다.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황성까지 2천여 리 사이에 새로 지은 것이나 묵은 것이나 혹은 크고 작은 수많은 관제묘가 서로 마주 바라다보고 있다. 그 중에도 요양(遼陽)과 중후소(中後所)에 있는 것이 가장 영험이 있다 하고, 북경에 있는 백마관제묘(白馬關帝廟)라 하여 사전(祀典)에 실렸으니, 곧 정양문 오른편에 있는 관제묘가 이것이라 한다. 매년 5 13일이면 제사를 올리는데, 10일 앞서 태상시(太常寺)가 본시(本寺)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어 예식을 집행한다. 이날은 특히 민간의 참배가 더욱 극성스럽다. 대체로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제사를 모셔서 고해 바친다. ()의 만력(萬曆) 시대는 특히 삼계복마대제신위진원천존(三界伏魔大帝神威鎭遠天尊)으로 봉했으니, 이 지시는 궁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남관왕묘(南關王廟) 바람벽 위에 걸린 그림도 대체로 이곳의 것을 모방한 그림이다. 초굉(焦竑 () 학자. 자는 약후(弱侯))이 묘비문을 짓고 동기창(董其昌 ()의 서예가. 자는 원재(元宰))이 글씨를 썼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이절(二絶)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명인사(明因寺)

 

 

명인사에는 위촉(僞蜀 왕건(王建)이 세운 전촉(前蜀))왕연(王衍 전촉의 후주(後主). 자는 화원(花源))의 때에 관휴(貫休 전촉의 저명한 중)가 그린 열여섯의 나한상(羅漢像)이 세상에서 기기괴괴한 그림으로 전하는 것과 다르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 번 보려고 생각했다. 좌중에는 초 한림(初翰林) 팽령(彭齡)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드디어 날짜를 약속하여 함께 수레를 몰아 절에 닿았다. 절은 정양문 밖 3리 되는 강의 동편 언덕에 있는데, 그리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고, 다만 해소병 들린 중 한 명이 있었는데, 위인이 더럽게 무뚝뚝하여 굳이 이 그림이 없다고 기휘하면서 절 구경도 못하도록 했다. 초 태사(初太史)는 중을 향하여 재삼 간청하였으나 중은 완고하게도 점점 더 뻣뻣하여 머리를 숙이고 대답도 하지 않더니 조금 있다가는 고함을 치면서 큰 소리로 욕을 해 왔다. 초 태사는 얼굴을 붉히고 물러 나와 심히 흥취를 깨뜨렸다. 나를 이끌고 함께 돌아 오는 길에 호국사(護國寺)를 거쳐 왔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대륭선호국사(大隆善護國寺)

 

 

호국사(護國寺)는 도성 사람들이 불러서 천불사(千佛寺)라고 하니, 부처 천 개가 있기 때문이요, 또 숭국사(崇國寺)라고도 한다. 크고 작은 불전이 열한 군데나 있어 크기는 굉장하나 역시 많이 헐렸다. ()의 정덕(正德) 연간에 황제의 명령으로 서번(西番) 법왕(法王) 영점반단(領占班丹)과 저초장복(著肖藏卜) 등이 거주하였다. 소위 반단이니 장복이니 하는 것은 지금 열하에 있는 반선(班禪)인 것 같다. 절의 창건은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원()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의 소상이 있는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붉은 옷에 수염이 길고 눈썹도 빼어나 기품이 깨끗해 보이고, 의관은 모두 중국 제도와 비슷하다. 원의 재상도 왜 머리를 깎지 않았는지 좀 이상해 보였다. 곁에서 봉관(鳳冠)을 쓰고 붉은 치마를 입고 있는 노파가 곧 탈탈의 처다. 또 요광효(姚廣孝)의 화상이 있는데, 얼굴이 맑고 점잖게 생겼으며 중머리 바람으로 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세상의 온갖 티끌과 인연을 끊은 것 같이 보여 서호(西湖)에서 엉덩이를 치면서 혼자 시를 읊던 때와는 딴판이다. 옛날 사마천(司馬遷 전한(前漢) 때의 문학가. 자는 자장(子長))은 장자방(張子房 장량(張良). 자방은 자)의 얼굴이 여인과 같다고 했는데, 내가 이 그림을 보지 못했을 때는 필시 하늘을 찌를 만한 살기(殺氣)를 띠고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이 지금 와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D-001]요광효(姚廣孝) : 명의 중이고 도사이며 또 문학가. 승명(僧名)은 도연(道衍)이요, 자는 사도(斯道).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화신묘(火神廟)

 

 

화덕진군묘(火德眞君廟)는 북안문(北安門)일중방(日中坊)에 있다. 원의 지정(至正) 연간에 지었고, 명의 만력 때에 고쳐 증축하였으며, 천계(天啓) 원년(1621)에 명령을 내려 매년 6 22일에는 태상(太常)의 관원으로 하여금 화덕신(火德神)을 제사하게 되었다. 앞에 전각은 융은(隆恩)이요, 뒤의 전각들은 만세(萬歲)경령(景靈)보성(輔聖)필령(弼靈)소령(昭寧)이라 하여 모두 여섯 개의 전각이 있어 푸른 유리 기와를 이었으며, 섬돌 층층대도 죄다 초록빛 유리 벽돌을 깔았다. 그 뒤에는 수정이 호수를 굽어보고 섰는데, 금벽 단청이 비단 물결의 무늬 위에 비치어 번쩍였다. 장하고 화려하기는 약왕묘와 상당하지마는 경치는 그 보다 나을 것만 같다. 빗돌 한 개는 주지번(朱之蕃)의 글이요, 또 한 개는 옹정춘(翁正春 ()의 고관(高官). 자는 조진(兆震))의 글이다.

 

 

[D-001]주지번(朱之蕃) : 명의 문학가이며 서예가. 자는 원개(元介) 또는 원승(元升).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북약왕묘(北藥王廟)

 

 

북약왕묘는 전각이나 모셔둔 위패 같은 것이 남묘와 꼭 같고, 동쪽은 해자(海子)를 굽어 보아 물가에 수없는 버들은 그늘이 짙은데, 물가에 노니는 손들은 언제나 가득했다. 천계 연간에 위충현(魏忠賢 ()의 간신(奸臣))이 세운 것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숭복사(崇福寺)

 

 

숭복사는 본시 민충사(憫忠寺)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친히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와 전쟁에 죽은 장사들을 불쌍히 여겨 이 절을 짓고 명복을 빌었었다. 두 개의 탑이 마주 보고 섰는데, 더러는,

 

안녹산(安祿山 당 현종(唐玄宗)의 반신(叛臣))이 세운 것이다.“

라 하였고, 혹은

 

사사명(史思明 당 현종(唐玄宗)의 반신(叛臣))이 지은 것이다.”

라고도 한다. 높이는 각기 열 길씩이나 된다. 이렇게 두 역적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은 오히려 천년 고적이라 하여 그대로 남겨 두었다. 송사(宋史)에는,

 

사첩산(謝疊山)이 원()의 지원(至元) 26(1289) 4월에 연경에 이르러 사 태후(謝太后)의 빈소(殯所)와 영국공(瀛國公 미상)이 있는 곳을 찾아 절을 하면서 통곡하매, 원의 사람들이 그를 민충사에 보내어 두었더니 벽 사이에 서 있는 조아비(曹娥碑)를 보고 울면서, ‘한 여인으로도 오히려 이렇거늘…… 하고는 이어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라고 하였다. 또 장불긍(張不肯 미상)이 사사명을 위하여 당 숙종(唐肅宗 이형(李亨))을 찬송한 비문으로서 소영지(蕭靈芝 미상)가 쓴 것을 찾았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러나 이는 의당 주이준(朱彛尊 ()의 학자. 자는 석창(錫鬯))의 변증으로 옳음을 삼아야 할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에는,

 

충선왕(忠宣王)이 연경에 이르니 황제가 머리털을 깎아서 석불사(石佛寺)에 두었다.”

라고 하였는데, 혹은 이 절이라 하지마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D-001]사첩산(謝疊山) : 송의 충신 사방득(謝枋得). 첩산은 호요, 자는 군직(君直).

[D-002]사 태후(謝太后) : 송 이종(宋理宗)의 황후로서 원에 붙들려서 피해를 입었다.

[D-003]조아비(曺娥碑) : 후한(後漢) 때 채옹(蔡翁)이 효녀 조아를 위하여 지은 비문.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진각사(眞覺寺)

 

 

진각사는 속명으로 오탑사(五塔寺), 또는 정각사(正覺寺)이다. 탑 높이는 열 길이나 되는데, 금강보좌(金剛寶座)라고 부른다. 그 안으로 들어가 캄캄한 속에 나선형 다리를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 가니, 위에는 평평한 대가 되고 그 위에 또 다섯 모가 난 작은 탑을 두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명의 헌종 황제(憲宗皇帝 주견심(朱見深))가 살아 있을 때에 의관을 보관해 두었던 곳이다.”

라고 한다. 이 절은 더러는,

 

몽고인이 지은 것이다.”

라 하고, 혹은,

 

명의 성조 황제(成祖皇帝 주체(朱棣)) 때에 서번(西番)의 판적달(板的達)이 금부처 다섯을 바쳤으므로 이 절을 세워서 그를 맡겼다.”

라고 한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으로 금지붕 속에 들어 있는 서번 중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놀라지마는 중국은 역대로 반드시 이같이 떠받들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천자가 소일 삼아 쉬는 곳이며 아울러 명복을 비는 곳이라 인정하므로 이곳은 비록 궁극으로 사치롭게 꾸몄더라도 여러 신하들은 감히 지적을 못하고 다만 서로 용서하였던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마두총(利瑪竇塚)

 

 

부성문(阜成門)을 나와서 몇 리를 가니 길 왼편으로는 돌기둥 450개를 쭉 늘여 세우고, 위에는 포도 시렁을 만들어 포도가 한창 익었었다. 돌로 만든 패루(牌樓) 세 칸이 있고, 좌우에는 돌로 깎은 사자(獅子)가 마주 쭈그리고 앉았다. 그 안에는 높은 전각이 있는데 수직군에게 물어서 비로소 이마두(利瑪竇)의 무덤인 줄을 알았다. 모든 서양(西洋) 선교사(宣敎師)들의 무덤으로서 동서 양쪽에 계장(繼葬)한 것이 모두 70여 분이나 되었다. 무덤 둘레는 네모로 담장을 쌓아 바둑판처럼 되었는데, 거의 3리나 되니, 그 안은 모두 서양 선교사들의 무덤이었다. ()의 만력 경술년(1610)에 황제는 이마두의 장지를 하사하였는데, 무덤의 높이는 두어 길이나 되고 벽돌로 쌓았다. 무덤 꼴은 시루같이 생겼는데 기왓장이 사방으로 처마 끝까지 멀리 나왔다. 바라보면 마치 다 피지 못한 커다란 버섯처럼 생겼다. 무덤 뒤에는 벽돌로 높다랗게 싼 육모 난 집이 섰는데, 마치 철종 같아 보였다. 삼면으로는 홍예문을 내었고,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빗돌을 세워 글을 새기기를 야소회사이공지묘(耶蘇會士利公之墓)라 하였고, 왼편 옆에는 잔 글씨로,

 

이 선생(利先生)의 휘()는 마두다. 서태(西泰) 대서양(大西洋) 이태리아국[意太利亞國]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참다운 수양을 하였다. 명의 만력 신사년(1581)에 배를 타고 중화(中華)에 들어와 교를 널리 펴고 만력 경자년(1600)에 북경에 와서 만력 경술년(1610)에 죽으니 세상을 누린 지가 쉰다섯 해에 교회에 있는 지는 마흔 두 해이다.”

라고 하였고, 오른쪽에는 또 서양 글자로 새겼다. 빗돌 좌우에는 아름답게 조각한 돌기둥을 세우고, 양각(陽刻)으로 구름과 용의 무늬를 새겼다. 빗돌 앞에는 또 벽돌 집이 있는데, 지붕은 평평하여 돈대와 같았다. 구름과 용의 무늬를 새긴 돌기둥을 쭉 늘여 세워 석물로 삼았다. 제사 받드는 집이 있고, 그 앞에는 또 돌로 만든 패루와 돌 사자가 있으니, 이는 탕약망(湯若望)의 기념비(紀念碑)이다.

 

 

[D-001]이마두(利瑪竇) : 이태리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던 저명한 선교사. 자는 서태(西泰).

[D-002]탕약망(湯若望) : 독일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선교사. 자는 도미(道味).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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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알성퇴술(謁聖退述)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알성퇴술(謁聖退述)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알성퇴술(謁聖退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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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알성퇴술(謁聖退述)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알성퇴술(謁聖退述)

 

1 순천부학(順天府學)

2 태학(太學)

3 학사(學舍)

4 역대비(歷代碑)

5 명조진사제명비(明朝進士題名碑)

6 석고(石鼓)

7 문승상사(文丞相祠)

8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

9 관상대(觀象臺)

10 시원(試院)

11 조선관(朝鮮館)

 

 

 

순천부학(順天府學)

 

 

북경의 동북 모퉁이 시시(柴市)에 두 방()이 맞서 있으니, 그를 육현(育賢)이라 부른다. 두 방의 복판이 곧 순천부학으로 되었다. 영성문(欞星門)에 들면 반월형으로 못을 팠는데, 이것이 반수(泮水)이다. 세 개의 구름다리를 놓고 난간은 흰 돌로 둘렀다. 다리 북쪽에 세 대문이 있는데, 복판이 대성(大成)이요, 왼편이 금성(金聲)이요, 오른편이 옥진(玉振)이다. 성전(聖殿)의 바깥 편액에는 선사묘(先師廟)라 했고, 안으로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썼는데 강희황제(康熙皇帝)의 글씨이다. 위패에는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 하였고, 네 분의 배향으로서는 복성 안자(復聖顔子 안회(顔回))와 술성 자사(述聖子思 공급(孔伋))가 동에 있고, 종성 증자(宗聖曾子 증참(曾參))와 아성 맹자(亞聖孟子 맹가(孟軻))는 서에 있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사이에는 늙은 전나무들이 많은데 세상에 전하기를,

 

허노재(許魯齋) ()이 손수 심은 나무라오.”

하고, 혹은,

 

야률초재(耶律楚材 () 학자. 자는 진경(晉卿))가 심은 거야.”

한다. 명륜당(明倫堂)은 성전의 동에 있고, 계성사(啓聖祠)는 명륜당의 북에 있으며, 규문각(奎文閣)은 명륜당의 동북에 있고, 문승상사(文丞相祠)는 명륜당의 동남에 있는데, 중문 밖의 왼편은 명환사(名宦祠), 오른편은 향현사(鄕賢祠)이다. 부학은 옛날 보은사(報恩寺)로서 원()의 지정(至正) 말년에 유람하던 중이 호남(湖南) 지방에서 시주를 받아서 절을 짓고, 불상을 채 안치하기도 전에 명()의 군대가 북경에 쳐들어왔다. 그들이 군졸들에게 공자묘에 못 들어가도록 명령하자, 중이 창황히 공자의 위패를 빌려다가 성전 속에 모셨다. 그 뒤에 마침내 이 위패를 감히 옮기지 못하게 되어 결국 북평(北平)의 부학이 되었다가, ()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뒤에 곧 순천부학이 되었다 한다.

 

 

[D-001]허노재(許魯齋) () : 원의 유학자. 노재는 호요, 형은 이름. 자는 중평(仲平).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태학(太學)

 

 

북경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곳을 숭교방(崇敎坊)이라 하고, 패루(牌樓) 네거리를 성현가(成賢街)라 하며, 패루 안은 국자감(國子監)이라 썼다. 영락(永樂) 2(1404)에 이룩되었는데, 왼편은 묘(), 오른편에는 태학을 세웠더니, 선덕(宣德) 4(1429) 8월에는 대성전(大成殿) 앞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수리하였다. 이에 앞서, 태학은 원()에 의해 더럽혀졌다고 하여 이부 주사(吏部主事) 이현(李賢)이 수리할 것을 아뢰어 그 말을 좇았던 것이다. 정통(正統) 9(1444) 1월에 태학이 낙성되자, 천자가 친히 나와서 선성(先聖)에 참배하고 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하고는, 이륜당(彛倫堂)에 물러나와 좨주(祭酒) 이시면(李時勉)에게 강의를 명령하였고, 홍치(弘治 () 효종(孝宗)의 연호)라 연호(年號)를 고치고 나서는 또 태학에 거둥하였는데, 이때에 성가임옹록(聖駕臨雍錄 () 주홍모(周洪謨) )이라는 책이 이룩되었으니, 황제의 칙지(勅旨)장주(章奏)의례(儀禮)문이(文移)강의(講義)관직(官職) 등에 관한 일이 빠짐 없이 기록되었으므로 태학의 제도는 이에서 완전히 갖추어졌다. 만력(萬曆) 경자년(1600)에는 성전을 유리 기와로 바꾸었으니, 사업(司業) 부신덕(傅新德)의 청에 따른 것이었고, 숭정(崇禎) 14(1641)에 또 태학을 수리하였는데, 낙성이 된 뒤 8월에 천자가 태학에 거둥하여 좨주(祭酒 태학(太學)에 속한 벼슬) 남거인(南居仁)이 고요모(皐陶謨 서경의 편명)를 강의하고, 사업 나임대(羅大任) 역경(易經)의 함괘(咸卦)를 강의하였으니, 이때에는 벼슬의 문()()를 논할 것 없이 삼품 이상은 함께 앉아 청강하고 천자로부터 차를 하사받았다. 강의가 끝난 뒤 천자가 경일정(敬一亭)에 들러 세종(世宗)이 세운 정자(程子 () 유학자 정이(程頤))의 사잠비(四箴碑)와 석고(石鼓)의 헐어진 글자를 보고, 다시금 수리하고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장안객화(長安客話 저자 미상) 중에는,

 

국초(國初)에 고려(高麗)에서 김도(金濤) 등 네 사람을 보내어 태학에 들었는데, 홍무(洪武) 4(1371)에 김도가 진사(進士)에 올라 귀국하였다.”

라 하였고,  태학지(太學志 저자 미상)를 상고해 보면,

 

융경(隆慶) 원년(1567)에 천자가 국자감에 거둥하였는데, 조선(朝鮮) 사신 이영현(李榮賢) 등 여섯 사람이 각기 제 급수에 알맞은 의관(衣冠)을 갖추고 이륜당에 가서 문신(文臣) 반열의 다음에 섰다.”

라고 했다. 나는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을 따라 뜰에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내가 얼마 전에 열하의 태학에서 참배한 제도는 우리 서울의 태학과 같더니, 이제 두루 이 묘의 제도를 살펴보니, 아마 명()의 옛 제도를 본뜬 듯한데, 태화전에 비하면 비록 조금 모자라는 것 같기는 했으나 그 제도의 정제된 폼은 비슷했다. 뜰의 넓이라든가 아랫집들의 둘레는 역시 동악묘(東岳廟)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위패는 모두 독()을 덮어 감실 속에 넣고 누른 휘장을 드리웠다. 강희 연간에 주자를 10()의 다음에 올려 모셨다. 거문고비파북 등의 악기를 성전 속에 진열해 놓았으며, 동무와 서무에 종향(從享)된 분에게도 모든 설치가 성전과 다름없었고, 태학당(太學堂)에는 일곱 개의 윤리를 강론하는 장소가 있으니, 회강(會講)솔성(率性)수도(修道)성심(誠心)정의(正義)숭지(崇志)광업(廣業) 등이 모두 여러 생도들의 공부하는 곳이라 한다. 이륜당 앞에 심은 솔과 전나무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는 원()의 유학자 허형(許衡)이 손수 심은 거야.”

라고 한다. 묘문에는 석고(石鼓) 열 개를 늘어 놓았는데, 주 선왕(周宣王)의 엽갈(獵碣)이다. 혹은 이르기를,

 

안로공(顔魯公)의 쟁좌위첩(爭座位帖 안진경의 서첩(書帖) 이름)과 장평숙(張平叔)의 금단사백자(金丹四百字)와 조 문민(趙文敏)이 임모(臨摹)한 왕 우군(王右軍)의 악의론(樂毅論 저자 미상)황정경(黃庭經 도경(道經)의 일종)난정정무본(蘭亭定武本) 등의 다섯 비()가 모두 이 태학 안에 있다.”

고 하나, 찾을 곳을 몰라서 구경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D-001]사잠비(四箴碑) : 정이가 논어(論語)의 비례물시(非禮勿視)비례물청(非禮勿聽)비례물언(非禮勿言)비례물동(非禮勿動)을 취하여 사물잠(四勿箴)을 지었는데, 이 글을 새긴 빗돌.

[D-002]석고(石鼓) : ()() 때의 돌 북에 새긴 고문(古文).

[D-003]엽갈(獵碣) : 수렵(狩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빗돌.

[D-004]안로공(顔魯公) : 안진경(顔眞卿)의 봉호. 자는 청신(淸臣).

[D-005]장평숙(張平叔) : 송의 도사(道士) 장백단(張伯端). 평숙은 그의 자.

[D-006]금단사백자(金丹四百字) : 장백단이 유해섬(劉海蟾)으로부터 받았다는 연금술(鍊金術) 비결(秘訣).

[D-007]조 문민(趙文敏) : 조맹부(趙孟頫)의 시호. 자는 자앙(子昻).

[D-008]왕 우군(王右軍) : 왕희지(王羲之). 우군은 벼슬. 자는 일소(逸少).

[D-009]난정정무본(蘭亭定武本) : 왕희지 자신이 지은 난정기(蘭亭記)를 쓴 서첩. 무정은 남북조(南北朝) 때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의 연호.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학사(學舍)

 

 

어제는 조교(助敎 태학의 교관(敎官)) 구양(歐陽)이 국자감 안팎 학사의 제도를 기록해 보였다. 내호(內號)로서 광거문(廣居門)의 오른편에 있는 것은 퇴성호(退省號)라 하여 사방으로 잇달린 것이 모두 49칸인데, 남에는 목욕탕과 뒷간이 있고, 퇴성문(退省門)으로부터 점차 북으로 꺾어져 서에는 천()()()()()()()()()()()()()()()()()() 등의 글자로 표시한 것이 모두 18호가 있는데, 매호마다 21칸씩이다. 도자호(度字號)의 북에 보안당(保安堂)이라는 5칸이 있어 감생(監生) 중의 병자를 수용한다. 이륜당 뒤에는 격()()()() 등의 번호를 붙인 사호가 있으니 전체가 98칸인데, 가정(嘉靖) 7(1528)에 경일정(敬一亭) 밖에 고쳐 세웠고, 동호(東號)는 문묘(文廟)의 왼편에 있어 모두 34칸이다. 대동호(大東號)는 거현방(居賢坊)의 새만백창(賽萬百倉) 서문가(西門街)에 있다. 문이 둘이 있고 하나는 등준호(登俊號)인데, 동서의 양쪽으로 잇달린 집이 모두 40칸이었고, 또 하나는 집영호(集英號)인데 27칸이다. 신남호(新南號)는 북성(北城) 두 갈래 길 동쪽 어구에 있는데, 문이 한 채에 동서로 방이 잇달려 모두 34칸이요, 남북으로는 4칸이다. 소북호(小北號)는 거현방 거리에 있고 문이 한 채요, 남북으로 집이 두 줄로 나뉘어졌는데 80칸이다. 교지호(交趾號)는 국자감의 남쪽에 있고 문 한 채에 남북으로 나뉜 집 두 채가 모두 28칸이다. 서호(西號)는 성현가(成賢街)의 서북에 있고 국자감과의 거리는 50보쯤 되는데, 옛날 운간사(雲閒寺) 터이다. 작은 방 10칸과 또 2층 방까지 모두 9칸인데 국자감의 속관들이 번갈아 거처한다. 북쪽 작은 방 4칸과 남쪽 1칸과 서쪽에 가까운 작은 방 16칸이 있는데, 여기는 감생(監生)만이 거처하는 곳이라 한다.

밤에 내원(來源)과 함께 계산을 해보니, 전부가 5 80여 칸이다. 그 밖에도 이륜당을 비롯하여 동서 강당과 서적고, 식량 창고와 식사장, 의원 약방과 종 치고 북 치는 다락, 부엌목욕탕과 범죄자를 취조하는 방, 박사(博士)가 앉는 대청과 계성사(啓聖祠)토지사(土地祠) 등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구양조교의 이러한 기록은 아마도 외국 사람에게 자랑삼아 떠벌리는 것 같으나, ()()에 비한다면 벌써 쓸쓸한 감이 없지 않다. ()의 경력(慶曆) 연간에 왕공신(王拱辰)이 국자감을 맡고 있을 때에 말하기를,

 

()의 태학이 1 8백 칸에 생도가 3만 명이나 되었고, ()에 이르러서는 6 2백 칸이나 되었다.”

라고 하였으니, 당시 학사의 넓음과 생도의 수효가 많았던 것은 뒷날 세상에 비교할 바 아니다. 또 옛 일을 상고해 보면,

 

()의 홍무(洪武) 4(1371)에 천자의 명령으로 지방에서 뛰어난 수재들을 뽑아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당시는 난리가 갓 평정되어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아직도 많았을 무렵이었지마는, 그래도 진여규(陳如奎)  2 7 82명이 입학하였고, 26년에는 감생으로 열자(悅慈)  8 1 24명을 얻게 되었고, 영락(永樂) 19(1421)에는 감생이 방영(方瑛)  9 8 84명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아직 만의 수를 채우지 못했으니, 옛날 시대의 선비를 양성시키던 성대함에 비교해 보면 엄청나게 틀린다. 이제 청()은 나라를 세운 지도 이미 오래되어 국내가 승평하고 문물과 교화가 혁혁하여 제 스스로 이르기를,

 

당보다야 낫겠지.”

라고 자랑하지마는, 오늘 내가 여러 학사를 돌아보니 십중 팔구는 텅텅 빈 방뿐이요, 더구나 며칠 전에 간신히 석전(釋奠)을 지내는데 대성문(大成門) 왼편 극문(戟門)의 왼편 벽에 써 붙여 둔 참례한 제생(諸生)의 명단을 본즉 겨우 4백여 명에 지나지 않고, 그것 역시 모두가 만주인과 몽고인뿐이요, 한인은 하나도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한인은 비록 벼슬을 하여 공경(公卿)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성 안에서는 집을 얻을 수 없은즉, 이 수선(首善 경사(京師))의 아름다운 곳에 유학하는 선비도 감히 거처를 못함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중화족이 스스로가 되놈의 종자와 한 책상에서 공부함을 치욕으로 여김이었던가. 그러나 여기에서도 오히려 본받을 일이 없지 않다. 이곳 서재와 학사들이 텅텅 비어 있다면 응당 먼지에 파묻히고 잡풀이 돋았을 터인데, 어디든지 씻고 닦아 맑게 정돈하지 않은 데가 없어 탁자들은 가지런하고, 창호는 비록 종이로 바른 지는 오래되었으나 밝고 하나도 찢어지고 떨어진 곳이 없었다. 이것은 비록 한 가지 조그마한 일이지마는 중국 법도의 대체를 짐작할 수 있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역대비(歷代碑)

 

 

반적(潘迪 ()의 학자)의 석고음훈비(石敲音訓碑)는 대성문 왼편 극문(戟門)에 있고, ()의 대덕(大德) 11(1307)에 세운 가봉성호조비(加封聖號詔碑) 한 개는 외지경문(外持敬門)에 있으며, 지순(至順) 2(1331)에 세운 가봉선성부모처병사배제사비(加封先聖父母妻竝四配制詞碑) 한 개는 대문 서쪽에 있고, ()의 홍무(洪武) 3(1370) 신명학제비(申明學制碑) 한 개, 15(1382) 칙유태학도비(勅諭太學圖碑) 한 개, 16(1383) 정학규비(定學規碑) 한 개, 30(1397) 흠정묘학도비(欽定廟學圖碑) 한 개, 가정(嘉靖) 7(1528)에 지은 경일정(敬一亭), 어제성유비(御製聖諭碑) 한 개, 정통(正統) 9(1444) 어제중수태학비(御製重修太學碑) 한 개, 홍무 연간에 세운 네 개 비는 남태학(南太學)에 있던 것으로, 뒤에 다시금 새겨 이 태학 가운데 세운 것 같다. 이제 청의 인황제(仁皇帝)가 지은 선현찬(先賢贊) 한 개와 안증사맹찬(顔曾思孟贊) 한 개는 모두 강희 28(1689)  3월에 세웠고, 아로덕유(阿魯德猶)를 평정한 뒤 어제헌괵비(御製獻馘碑) 한 개는 강희 43(1704)에 세운 것이다. 조 역관(趙譯官) 달동(達東)을 시켜 여러 비문들을 나누어 베끼도록 하였는데, 다 베낄 수가 없었다. 볼 만한 글이 많았으나 두루 열람을 못한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명조진사제명비(明朝進士題名碑)

 

 

국자감의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는 명()의 선덕(宣德) 5(1430) 임진(林震)의 방()으로부터 시작되어 숭정(崇禎) 13년 경진 위덕조(魏德藻)의 방까지 7개이다. 그 아래도 오히려 빗돌 2개는 더 세울 만했으나 황제는 진사에 싫증이 나서 낙제한 거인(擧人) 사돈(史惇)오강후(吳康矦) 등을 머물게 하고 특별히 임용하게 되자, 사돈 등이,

 

진사의 전례에 따라 성묘에 배알하고 석채례(釋菜禮)에 참가하와 비를 세워 이름을 기록코자 하옵니다.”

하고 청원하였더니, 황제는 이를 승낙하였다. 태학사(太學士) 주연유(周延儒)가 칙명을 받들고 글을 지어 경진년에 세운 비 다음에 이를 세웠다. 16년 계미(1643)에 양정감(楊廷鑑)의 방 다음부터는 비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어져서 이로부터 명의 진사제명비는 끝났다고 한다. 이제 청의 과거 제도는 일체 명의 옛 것을 본떠 제명을 한 빗돌은 파서 이랑처럼 빽빽하게 들어서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만일 깨끗한 덕()이 향기롭고 나라의 운명이 한없이 뻗어나가거나 또는 중국의 정통이 자주 갈리면서도 언제나 이곳을 수도로 삼아 태학에 비를 세우는 옛 행사를 그대로 지킨다면, 나는 저 이무기 대가리와 거북 등의 흔한 빗돌들을 어느 땅에 다 세울지 모르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석고(石鼓)

 

 

석고(石鼓) 10개인데 천간(天干)의 차례로 대성문 좌우 극문(戟門) 안에 각기 5개씩 세웠다. 주 선왕(周宣王)이 기산(岐山) 남쪽에서 사냥놀이를 크게 하고는 돌을 깎아 북을 만들어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높이 두 자 남짓하고 폭이 한 자 남짓 되는데, 그 글씨는 사관(史官) ( () 선왕 때의 태사(太史))의 필적이요, 글은 풍()()의 체와 같으니, 천자의 사냥을 찬송하는 노래이다. 애초에는 진창(陳倉 섬서성에 있던 옛 지명)의 들판에 있던 것을 당()의 한유(韓愈 ()의 유학자. 자는 퇴지(退之))가 박사로 있을 때, 좨주(祭酒)에게 청하여 둘러메어 태학에 가져다 두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재상(宰相)으로 있던 정여경(鄭餘慶)이 봉상부(鳳翔府 섬서성에 있던 옛 고을)의 장관으로 있을 때, 이 북을 봉상의 성묘에 가져다 두었다. 뒤에 오대(五代)의 난리통에 석고는 모두 흩어져 잃어버렸다. ()의 사마지(司馬池)가 봉상부의 장관으로 있을 때에 이를 찾아서 다시 본부의 태학에 두었으나, 한 개는 잃어버렸다가 황우(皇祐) 4(1052)에 상부사(尙傅師)가 잃었던 북 한 개를 찾아 드디어 10개를 마저 채웠다. 대관(大觀) 2(1108)에는 북경으로부터 변경(汴京)으로 옮기고 황제가 금으로 그 글자 새긴 자국을 메우도록 명령하였다. 애초에는 태학에 두었다가 다음은 보화전(寶和殿)으로 옮겼다. 정강(靖康) 2(1127)에 금인(金人)들이 변경을 함락시키면서 담요로 거듭 싸서 수레로 끌어 북경까지 가지고 왔다. 메웠던 금은 후벼 내버리고 왕선무(王宣撫)의 집에 두었다가 다시 대흥부학(大興府學)으로 옮겼다. ()의 대덕(大德) 11(1307)에 우집(虞集 ()의 문인. 자는 백생(伯生))이 대도(大都)의 교수(敎授)로 있으면서 이를 풀숲의 진흙 속에서 찾아내어 비로소 국학에 두게 되었다. 그 중에 기자고(己字鼓)는 민간에 굴러 다니면서 머리를 우묵하게 파서 확을 만드니 새긴 글자는 더욱 닳고 이지러졌지마는, 그래도 고적으로서 가장 이채로운 물건으로는 이 석고 같은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나이 18세 때 처음으로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봉호)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의 석고가(石鼓歌)를 읽고, 그 글을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으나 다만 석고에 새긴 전문(全文)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했더니, 오늘 내 손으로 석고를 어루만지면서, 입으로 반적(潘迪)의 음운비(音韻碑)를 읽고 본즉, 외국 사람으로서 이 어찌 행복스러운 일이 아닐까보냐.

 

 

[D-001]변경(汴京) : 하남성에 있다. 북송(北宋) 때의 수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문승상사(文丞相祠)

 

 

문 승상의 사당은 시시(柴市)에 있으니 동리 이름은 교충방(敎忠坊)이다. 사당은 세 칸으로 앞이 대문이 되고, 또 대문 앞으로 사당의 서쪽은 회충회관(懷忠會館)이 되어 강우(江右 강서성 지방) 지방의 사대부들이 설에는 이곳에 모여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명의 홍무 9(1376)에 북평 안찰부사(北平按察副使) 유송(劉菘)이 비로소 사당 짓기를 청원하여 영락(永樂) 6(1408) 태상박사(太常博士) 유이절(劉履節)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제사에 대한 의례를 정리할 때에,

 

문천상이 송()의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고, 연경은 곧 그의 입절하던 땅이오니 사당을 지어 제사지냄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황제가 이를 좇았었다. 유악신(劉岳申 () 학자. 자는 고중(高仲)) 신공전(信公傳 신공은 문천상의 봉호 신국공)을 상고해 보면,

 

()이 연경 객사에 이르자 상빈(上賓)처럼 대우하여 장막을 치니, 공은 의리에 차마 여기서 거처를 못하고 앉아서 날을 밝히었다. 장홍범(張洪範)이 와서 그가 굴복하지 않던 진상을 상세히 여쭈매 병마사(兵馬司)를 보내어 형틀을 채우고 빈 집 속에 가두었다가 10여 일 만에 결박을 풀고 칼을 빼앗은 뒤에 4년 동안을 감금하였다. 시를 지어서 지남록(指南錄) 3권과 그 후록(後錄) 다섯 권, 집두(集杜 두시(杜詩)에서의 집구(集句)) 2백여 편이 있었는데, 모두 자작 서문을 남겼다.”

고 하였고, 조필(趙弼 미상) 신공전(信公傳)에는,

 

공이 시시(柴市)로 끌려 나오자 구경꾼이 만 명이나 되었다. 공은 남으로 향하여 두 번 절을 하였다. 이날에 대풍이 일어 모래를 날려 천지가 캄캄해지매 궁중에서는 촛불을 켜들고 다니게 되자, 세조(世祖)가 장진인(張眞人)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이는 아마도 문 승상을 죽인 소치인가 봅니다.’ 하였으므로, 황제는 곧 공에게 특별히 금자광록대부 개부의동검교태보 중서평장정사 여릉군공(金紫光祿大夫開府儀同檢校太保中書平章政事廬陵郡公)이라 추증하고, 또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여 추밀(樞密) 왕적옹(王積翁)을 시켜 신주를 써서 시시를 깨끗이 소제하고, ()을 모아 제사를 하였다. 승상 발라(孛羅)가 초헌례(初獻禮)를 행할 제 별안간 회오리바람이 불어 신주를 구름 속으로 휩싸서 올라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신주에 전송승상(前宋丞相)이라 고쳐 썼더니 하늘이 비로소 맑게 개었다. 처음에 강남(江南)으로부터 10명의 의사(義士)가 와서 공의 시체를 거적에 싸서 둘러메고 남문(南門) 밖 한길 가에 장사를 지냈다. 대덕 2년에 공과 의로 맺은 아들 승()이 직릉호(織綾戶)의 여인을 만났는데, 그는 곧 공의 옛날 몸종인 녹하(綠荷)이다. 그는 승을 위하여 이야기를 하고 드디어 공의 시체를 여릉(廬陵)에 반장하였다. 선덕 4년에 부윤(府尹) 이용중(李庸重)이 사당을 짓고, 춘추 중간 삭일에 유사(有司)가 제사를 차려 모시게 되었다.”

고 하였다. 따로 한 편 기문을 남겼다.

 

 

[D-001]문 승상의 사당 : ‘수택본에는 이 일절(一節)의 전문(全文)이 없이 곧 하문(下文)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가 이 자리에 올라 있었다.

[D-002]장진인(張眞人) : 송의 도사 장백단(張伯端). 자는 평숙(平叔).

[D-003]여릉(廬陵) : 강서성에 있던 옛 현()의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

 

 

문 승상의 사당을 참배하러 갔다. 사당은 시시에 있으니, 곧 선생이 입절한 곳이다. 동리 이름은 교충방(敎忠坊)이다. 원의 시대에는 선비 복색으로 소상(塑像)을 만들었더니, 명의 정통(正統) 13(1448)에 순천 부윤(順天府尹) 왕현(王賢)이 임금에게 여쭈어 송() 때 승상의 복장으로 고쳤고, 제사를 올리기는 영락 6(1408)에 처음으로 하였으며, 매년 춘추(春秋) 중삭(仲朔)에 황제가 순천 부윤을 보내어 제사를 차리는데, 술이 세 종류요, 과실이 다섯 종류, 비단이 한 필, ()이 한 마리, 돼지가 한 마리였다. 나는 두 번 절하고 물러나면서 후유하고 한숨을 쉬고는 탄식하여 말했다.

 

천고에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하늘 뜻을 단연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상서로운 경사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쫓기도 하고, 알뜰하게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 아이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이나 의사들이란 한갓 단신으로 하늘에 버티다시피 하고 보니, 이 어찌 억지 놀음이 아니며 또 어려운 일이 아닐까보냐.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위엄과 무력이라도 한낱 지사의 절개를 꺾지는 못한다. 이야말로 지사 한 사람이 버티는 절개는 백만 명의 군대보다도 강한 것이요, 만대를 통하는 떳떳한 도덕 규범은 일시에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할 것이니, 이 역시 천도(天道)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나라를 흥륭시킨 임금이 충분한 자신을 가지고 천자의 지위를 얻었다면, 이는 하늘이 명한 것이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 얻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늘이 이미 천자의 지위를 명하였고 자신의 힘을 들이지 않았다면, 역시 자신으로써 천하의 책임을 맡게 한 것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천하로써 자신에게 이롭게 하려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이미 자신으로써 천하에 이익을 주고자 할진대, 천하에 이익을 주는 방법은 역시 어떤 원칙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곧 자신이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도탄 속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낼 따름일 것이다. 그러므로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한 것은 무왕이란 개인이 이를 멋대로 한 것이 아니라, 곧 정의를 가지고 무도한 자를 정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당히 천하를 차지하고서도 무왕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대하여는 의심이 없고, 사람에 있어서도 기탄이 없었으며, 적국에 대하여는 원수가 없었고, 천하에 대해서는 나라는 것을 없애고, 도가 있는 곳을 따라 나아갔을 뿐이었다. 무왕이 기자(箕子)를 방문한 것은 기자 개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의 도를 찾은 것이요, 도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것이 천하에 이익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무왕이 기자를 강박하여 신하를 삼았다면, 기자로서도 역시 구주(九疇)를 껴안고 시시(柴市)로 갔을 뿐이었을 것이다. 도를 전하지 못한다고 자기에게야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후세에 와서 천하를 차지한 자는 역시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 않는 이 없지마는, 그는 다만 확호(確乎)한 자신이 없었던 만큼 하늘을 믿지 않았고, 하늘을 믿지 않았던 까닭에 사람을 꺼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무릇 자기 힘으로써 굴복시킬 수 없는 자는 모두 자기의 강적일 것이므로, 언제나 그들이 정의의 군대를 규합하고 옛날의 것을 회복할 것을 두려워하여 천하를 차지한 자는 차라리 그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 사람이란 역시 자신이 한 번 죽음으로써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자 하고 있는 것인즉, 여기서 그 사람이란 천하의 부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천하의 부형을 죽이고서 어찌 그 자제들의 원수가 됨을 면할 수 있으랴. 어허, 천하의 흥망이란 운수가 없지 않지마는 전조의 유민으로 문 승상 같은 분이 배출되지 않았음은 아니리라. 그러면 당시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는 임금으로서 이 같은 그 사람에 대하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그를 백성으로 대하되 신하로 삼지 말고, 존경은 하되 직위는 주지 말며, 봉작도 조회도 하지 않는 반열에 둘 뿐이라고 일러 주리라. 그러면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로서 할 일은 친히 문 승상의 사관을 찾아 들어 손수 그가 쓴 칼을 벗기고 동으로 향하여 절을 하면서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키는 방도를 묻고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그를 스승으로 섬겼더라면 이 역시 옛날 임금들의 아름다운 법도일 것이다. 백이(伯夷)의 좁은 성격이나 이윤(伊尹 ()의 명상(名相))의 책임지울 수 있는 그것은 곧 선생이 자유대로 택할 길이리라. 여릉(廬陵)의 백묘쯤 되는 밭을 떼어 주고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면, 봉록을 주지 않아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저 황관(黃冠 농부가 쓰는 갓)을 쓰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지망이란 곧 흰 말을 타고 동으로 나가려는 뜻이나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예악(禮樂)이란 언제나 사람이 응당 지켜야 할 윤리 도덕에서 나오는 것인즉, 선생의 먹은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음을 뉘라서 알리요.”

 

[C-001]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 : ‘수택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이 일절(一節)의 전문이 상문(上文) 문승상사(文丞相祠) 소제 밑 자리에 올라 있었다.

[D-001]구주(九疇) : 기자가 무왕의 물음에 응한 아홉 가지의 정치 요강(要綱). 곧 홍범(洪範).

[D-002]동으로 나가려는 뜻 : 기자가 주()의 신하가 되기 싫어서 흰 말을 타고 조선으로 나왔다는 고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관상대(觀象臺)

 

 

성에 붙여 쌓은 높은 축대가 성첩보다 한 길 남짓이 솟은 데를 관상대(觀象臺)라 한다. 대 위에는 여러 가지 관측하는 기계들이 놓였는데, 멀리서 보면 큰 물레바퀴 같았다. 이로써 천체와 기후의 일체를 연구한다. 무릇 일월성신과 풍운기색의 변화하는 현상을 이 대에 올리면 예측할 수 있다. 대 아래는 이 사무를 맡은 마을이 있으니, 곧 흠천감(欽天監)이다. 그 정당(正堂)에 붙어 있는 현판에는 관찰유근(觀察惟勤)’이라 씌었다. 뜰에는 여기저기에 관측하는 기계를 놓아 두었는데, 모두 구리로 만들었다. 비단 이 기계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만든 모양들도 모두 이상스러워서 사람의 눈과 정신을 얼떨떨하게 하였다. 대에 올라가니 성은 한 눈에 굽어볼 만하였으나 수직하는 자가 굳이 막으므로 올라가지를 못하고 돌아섰다. 대체로 대 위에 진열한 기계들은 아마도 혼천의(渾天儀 천문 기구(天文器具))와 선기옥형(璿璣玉衡 천문 기구) 종류 같아 보였다. 뜰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들도 역시 내 친구인 정석치(鄭石癡 정철조(鄭喆祚). 석치는 호)의 집에서 본 물건과 같았다. 석치는 일찍이 대나무를 깎아 손으로 여러 가지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보러 갔더니, 그는 벌써 부셔 없애 버렸다. 언젠가 홍덕보(洪德保 홍대용(洪大容). 자는 덕보)와 함께 정의 집을 찾아갔는데, 두 친구가 서로 황()적도(赤道)와 남()북극(北極) 이야기를 하다가 때로는 머리를 흔들고, 또는 고개를 끄덕이곤 하였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까마득하여 알기 어려워서 나는 자느라고 듣지 못하였더니, 두 친구는 새벽까지 그대로 어두운 등잔을 마주 대하고 앉았다. 정의 말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강진현(康津縣) 북쪽 끝에 나온 곳은 북극 몇 도인데, 황하(黃河)가 회수(淮水)에 들어오는 어귀와 직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탐라(耽羅)의 귤()이 바다를 건너 강진에만 오면 탱자가 된다.”

하였다. 이 이야기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리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시원(試院)

 

 

시원의 담 둘레는 거의 5리나 되는데, 벽돌로 쌓아 성과 같고, 미끄럽기가 깎은 듯하였다. 높이는 두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는 가시를 올려 놓았다. 복판에는 큰 집이 한 채 있고, 네 둘레에는 한 칸 집 수천 채가 갈리어 한집 한집 간격이 반 칸씩은 되었다. 좌우편은 창문을 내어 햇볕을 받아들이고, 앞에는 판자문을 내고, 가운데는 작은 온돌을 만들고, 부엌과 목욕탕까지 갖추었다. 바깥은 벽돌담으로 처마가 묻히도록 쌓았는데, 한 집도 허물어진 데가 없고, 안팎이 정결하여 비록 담장을 뚫고 작간(作奸)을 하고 싶어도 담장이 쇠벽과 다름없이 튼튼하므로 할 수 없을 형편이다. 어제 낙제한 거인(擧人)의 시권(試券)을 보았는데, 길이는 두 자 남짓하고 넓이는 여섯 자인데 행용(行用)하는 책종이나 다름없었다. () 자 형의 붉은 줄을 쳤는데, 해자(楷字)로 가늘게 쓴다면 한 천 자는 담을 만하였다. 맨 첫머리에 붉은 도장으로 예부(禮部)라는 두 글자를 찍었고, 밑에는 봉미(封彌 시험관이 봉하는 것)가 되었다. 아마도 예부에서 인쇄한 시험지로서 응시자에게 나누어 준 모양이다. 시험지 교열하는 것을 보니, 옛 사람의 글을 비평하라는 논제(論題)가 있고, 밑에는 본방(本房)이라 하여 직함과 성명을 갖추고 몇 줄 비평문이 있으며, 또 여러 고시관의 성명을 죽 늘어 기록하였다. 평점란(評點欄)에는 모두 붉은 글자로 썼는데, 한 난()에 한 글자씩 했으며, ()()(), ()()() 등의 차례로 하지도 않았고, 비록 낙제한 시험지라도 제품(題品)이 친절하고 상세하여, 응시자로 하여금 똑똑히 낙제된 연유를 알도록 되었다. 그 정성스럽고 간곡한 태도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 일깨우고 가르치는 태도 그대로이다. 이에서 족히 큰 나라 시험장 제도의 간명하고 엄격한 점과 고시하는 절차의 상세하고도 주의 깊은 것은 과거보는 자로서 넉넉히 유감이 없도록 해 놓았음을 보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조선관(朝鮮館)

 

 

조선 사신이 묵는 곳은 애초에는 옥하관(玉河館)이라 이름하여 옥하교(玉河橋) 위에 있었는데, 아라사(鄂羅斯) 사람들에게 점령되고, 지금은 정양문 안 동성(東城) 밑 건어호동(乾魚衚衕) 한림서길사원(翰林庶吉士院)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연공사(年貢使)가 먼저 와서 관에 머물게 되고, 다시 별사(別使)가 왔을 때는 서관(西館)에 나누어 들게 되므로 여기를 남관(南館)이라 한다. 작년에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가 사행으로 왔을 때 남관에 불이 났었다. 밤중 삼경(三更)이나 되었는데, 여러 사람들은 물 끓듯이 후닥닥 뒤집혀져 일행이 가졌던 폐백과 돈들을 성 밑에 쌓아 둔 채 말 수백 필은 대문이 메이도록 먼저 뛰어나가려고 덤볐다. 삽시간에 장갑군 수천 명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물수레 몇십 대가 몰아 달려 들어왔다. 두 통씩 둘러멘 물통이 뒤따라 연거푸 수레 물통 속에 물을 길어 붓는데, 한 방울 물도 허비가 없었다. 불 끄는 자는 죄다 전()으로 만든 벙거지와 갖옷을 갖추고 벙거지나 복장이 함께 물에 젖었으나 손에는 긴 자루가 달린 도끼갈퀴창 등을 들고 불길을 무릅쓰고, 마음대로 헐고 돌격하여 얼마 지난 뒤 불을 껐는데, 끽소리 없이 조용하여 흐트러진 물건들이 하나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이것으로서도 중국의 규율이 엄격함과 매사에 구차함이 없음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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