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222586006556

 

열하일기(熱河日記) - 황도기략(黃圖紀略)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황도기략(黃圖紀略)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황도기략(黃圖紀略) ...

blog.naver.com

 

열하일기(熱河日記) - 황도기략(黃圖紀略)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황도기략(黃圖紀略)

 

1. 황성구문(皇城九門)

2. 서관(西館)

3. 금오교(金鼇橋)

4. 경화도(瓊華島)

5. 토원산(兎園山)

6. 만수산(萬壽山)

7. 태화전(太和殿)

8. 체인각(體仁閣)

9. 문화전(文華殿)

10. 문연각(文淵閣)

11. 무영전(武英殿)

12. 경천주(擎天柱)

13. 어구(御廐)

14. 오문(午門)

15. 묘사(廟社)

16. 전성문(前星門)

17. 오봉루(五鳳樓)

18. 천단(天壇)

19. 호권(虎圈)

20. 천주당(天主堂)

21. 양화(洋畫)

22. 상방(象房)

23. 황금대(黃金臺)

24. 황금대기(黃金臺記)

25. 옹화궁(雍和宮)

26. 대광명전(大光明殿)

27. 구방(狗房)

28. 공작포(孔雀圃)

29. 오룡정(五龍亭)

30. 구룡벽(九龍壁)

31. 태액지(太液池)

32. 자광각(紫光閣)

33. 만불루(萬佛樓)

34. 극락세계(極樂世界)

35. 영대(瀛臺)

36. 남해자(南海子)

37. 회자관(回子館)

38. 유리창(琉璃廠)

39. 채조포(綵鳥舖)

40. 화초포(花草舖)

 

 

 

황성구문(皇城九門)

 

 

북경(北京) 성의 주위는 40리인데 꼭 바둑판처럼 생겼다. 정남향은 정양(正陽)이요, 동남은 숭문(崇文)이요, 서남은 선무(宣武), 정동은 조양(朝陽)이요, 동북은 동직(東直)이요, 정서는 부성(阜成)이요, 서북은 서직(西直)이요, 북서는 덕승(德勝)이요, 북동은 정안(定安)이라 부른다. 성 안에는 자금성(紫禁城)이 있어 주위는 17리인데 붉은 단장에 누런 유리 기와를 덮었고, 문에서 서북쪽을 지안(地安), 남쪽을 천안(天安), 동쪽을 동안(東安), 서쪽을 서안(西安)이라 부른다. 자금성 안은 곧 궁성이 되어 정남은 태청문(太淸門)이요, 2문은 곧 자금성의 천안문(天安門)이요, 3문은 단문(端門)이요, 4문은 오문(午門)이요, 5문은 태화문(太和門)이었으며, 뒤는 건청문(乾淸門)이요, 건청의 북쪽은 신무(神武), 동쪽은 동화(東華), 서문은 서화(西華)였다. 그리고 9개의 문루(門樓)는 모두 처마가 3겹이요, 문마다 옹성(甕城)이 붙어 있으며, 옹성에는 모두 2층 적루(敵樓)가 있고, 쇠로 싼 관문이 성문과 마주보고 섰고, 좌우에는 편문(便門)이 함께 있다. 그 정남쪽 1면은 외성(外城)이 되어 7문이 났으니 제도는 내성 9문과 같다. 정남이 영정(永定)이요, 남쪽 왼편이 좌안(左安)이요, 오른편이 우안(右安)이요, 동쪽이 광거(廣渠), 서쪽이 광녕(廣寧)이요, 광거의 동쪽 모퉁이 문은 동편(東便)이요, 광녕의 서쪽 모퉁이 문을 서편(西便)이라 한다. 지안문 밖에는 고루(鼓樓)가 있고, 고루의 북편에는 종루(鍾樓)가 있다. 각루(角樓) 6개요, 수문(水門) 3개다. 성을 두른 못 물은 옥천산(玉泉山)에서 발원을 하여 고량교(高梁橋)를 지나 물은 두 갈래로 흩어졌다. 한 갈래는 성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꺾어 남으로 흐르고, 하나는 성의 서쪽을 돌아 남으로 꺾어 동으로 자금성에 들어 태액지(太液池)가 되었고, 이 물은 9문을 감돌아 9삽회(牐滙 수문(水門))를 지나서 대통교(大通橋)에 이르는데, 동서 언덕은 모두 벽돌과 돌로 쌓았다. 9문의 못 도랑은 모두 큰 돌다리를 놓았다. 외성의 못 물은 역시 옥천의 물이 갈라져 서각루(西角樓)에서 성을 감돌아 남으로 흘러서 또 동으로 꺾어 동각루(東角樓)까지 이르러 7문을 거쳐 동으로 운하(運河)에 들어간다. 각기 다리 하나씩 걸쳐 있다. 내성이 16개에, 네거리는 24()이 되었으되 태정문의 동쪽 방() 부문(敷文)이요, 서쪽은 진무(振武)라 하고, 숭문문 안의 맞은편 방은 취일(就日)이요, 선무문 안의 맞은편 방은 첨운(瞻雲)이요, 동대가(東大街)의 사패루(四牌樓)는 이인(履仁)이요, 서대가(西大街)의 사패루는 행의(行義), 태학(太學)의 동서로 마주보는 방은 성현(成賢)이요, 부학(府學)의 동서로 마주보는 방은 육현(育賢)이요, 제왕묘(帝王廟)의 동서로 마주보는 방은 경덕(景德)이라 한다. 바로 정양문을 나서 10리 밖 남교(南郊)에는 원구(圓邱)가 있고, 정안문 밖으로 곧장 10리를 가면 북교(北郊)가 되어 방택(方澤)이 있고, 조양문 밖을 줄곧 10리를 나가면 동교가 되어 해가 여기서 뜨고, 부성문 밖으로 줄곧 10리를 나가면 서교(西郊)가 되어 달 지는 데가 여기다. 태묘(太廟)는 대궐의 왼쪽에 있고, 사직(社稷)은 대궐의 오른편에 있고, 육과(六科)는 단문의 좌우에 있으며 육부(六部)와 백사(百司)는 태청문 밖 좌우에 있다. 내가 이미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지난 곳을 매양 회상할 제 모두가 감감하여 마치 아침 놀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침침하기는 마치 넋을 잃은 새벽 꿈결인 양 싶어서 남북의 방위를 바꾸기도 하고 명목과 실상이 헝클어지기도 하였다. 하루는 정석치(鄭石痴)로 하여금 팔기통지(八旗通志 저자 미상)에서 황성일피도(皇城一披圖)를 내어 달라 하여 보니 성지궁궐가방(街坊)부서(府署)들이 손금을 들여다보는 듯하고, 지상(紙上)에서 마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기에 드디어 요긴한 대목을 추려 권수(卷首)에다가 기록하고 황도기략(黃圖紀略)’이라 이름하였다. 대체로 북경의 제도가 앞은 조정이요, 뒤는 저자요, 왼편은 종묘(宗廟), 오른편은 사직이요, 9문이 바르고 9거리가 곧아서 한 번 도성이 바르자 천하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

 

 

[D-001]정석치(鄭石痴) : 연암의 친구 정철조(鄭喆祚)의 호.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서관(西館)

 

 

서관(西館)은 첨운패루(瞻雲牌樓) 안의 큰 거리 서쪽 백묘(白廟)의 왼쪽에 있다. 정양문 오른편에 있는 것은 남관(南館)이라 하니 모두 우리나라의 사관(使館)이다. 동지사(冬至使)가 먼저 남관에 들었을 때 별사(別使)가 뒤미쳐 오게 되면 이 관에 나누어 든다. 혹자는 이르기를,

 

이 집은 죄과로 몰수당한 것이다.”

한다. 앞 담이 10여 칸인데 벽돌로 모란을 새겨 쌓아 알쏭달쏭 물린 무늬가 영롱했다. 정사(正使)는 정당(正堂)에 거처하고 가운데 뜰에는 동서 양당이 있어 부사와 서장관이 나누어 거처하고 나는 전당(前堂)에 거처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금오교(金鼇橋)

 

 

태액지(太液池)를 걸쳐 돌다리를 놓았는데 동서가 2백여 보요, 양쪽엔 백옥 난간을 세웠고, 가운데는 두 자를 더 높여서 길을 닦았고, 양 옆 협도에는 겹 난간을 만들어 난간 머리에 새긴 짐승 대가리는 모두 4 80여 개나 되었다. 모두가 저만큼 모양을 달리하여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다리의 양쪽 끝은 두 방()이 마주 섰는데, 서쪽이 금오요, 동쪽이 옥동(玉蝀)이다. 거마는 문 어귀에 들어차서 울부짖고 수많은 유람객은 몹시 복잡하였다. 호수 물결은 햇빛 아래서 반짝이고 티끌 하나 없는데 북쪽으로는 오룡정(五龍亭)이 바라보이고 서쪽으로는 자금성이 바라다 보였다. 깊은 숲은 자욱한데 층층 누각과 겹겹 궁전이 서로 가리고 마주 비치어 있고, 5색 유리 기와는 햇빛에 따라서 밝았다 어두웠다 한다. 백탑사(白塔寺)의 부도(浮屠)와 정각들의 황금 호로병(葫蘆甁) 꼭대기는 때로 나무숲 위로 솟아 있고, 수풀 저쪽으로 멀리 보이는 하늘 빛은 파란데, 맑은 아지랑이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어 마치 늦은 봄 날씨만 같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경화도(瓊華島)

 

 

태액지 복판에 있는 섬을 경화(瓊華)라고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 태후(遼太后)가 화장하던 대()이다.”

하였고, 원 순제(元順齊)는 영영(英英 미상)을 위해서 채방관(采芳館)을 이곳에 짓고 섬까지 돌다리를 걸쳐서 놓았는데, 제도는 금오교와 같았다. 다리 두 끝에는 역시 두 방()을 세웠는데, 퇴운(堆雲)과 적취(積翠)라고 불렀다. 더러는 이르기를,

 

이 다리의 이름은 금해교(金海橋)라고 부른다.”

한다. 호수 위에는 축대가 있어 옹성(甕城)과 같이 생겼고, 축대 위에는 전각이 섰는데 푸른 일산 같았다. 다리 위에 서서 금오교를 보니 행인과 거마들이 인간 세상과는 달라 보였다. 축대 아래는 금() 나라 때 늙은 소나무가 있어서 명()의 가정(嘉靖) 연간에 녹봉을 내리고 호를 도독송(都督松)이라 불렀다. 이 솔을 전나무라고도 하고, 혹은 노송나무라고도 했다. 명과 청() 사이에 많은 시구들을 남겨 놓았다. 지금은 모두 꺾어져 없어지고 다만 2그루의 썩은 나무둥치만 남아 빛은 허옇고 무슨 나무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토원산(兎園山)

 

 

토원산(兎園山)은 일명 토아산(吐兒山)이다. 높이는 불과 5,6길이요, 둘레는 겨우 1백여 보이다. 깎은 주춧돌이 군데군데 놓여 옛날 전각의 축대 같기도 했다. 안으로는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바깥에는 빙 둘러 태호석(太湖石)을 세워 알쏭알쏭 뚫어진 구멍이 영롱하게 푸를 뿐, 다른 빛깔은 섞이지 않았다. 높이는 모두 한 길 남짓 되는데 돌로서는 아주 다시 없을 만큼 이상하게 생긴 것이다. 돌을 쌓아 작은 굴을 만들었는데 양쪽 머리에는 모두 홍예문(虹霓門)을 달았다. 굴을 빠져 나오면 또 괴석으로 길을 끼고 달팽이집처럼 틀어 올려 봉우리를 만들어 굽이굽이 돌도록 하였으며, 그 위에는 몇 칸 정자를 세워 대궐을 굽어보도록 하였다. 또 다리 몇 10보를 가면 돌로 만든 용이 머리를 쳐들었고, 그 아래로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벽돌로 도랑을 내어 구불구불 틀어지게 하였는데, 이는 흡사 유상곡수(流觴曲水) 자리인 것만 같다. 그러나 기계를 돌려 물을 끌어대던 물건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산 앞에는 돌 평상과 옥 바둑판이 있고, 또 수십 보를 더 가니 3층으로 된 둥근 축대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맷돌과 같았다. 그 아래에는 갓 허물어진 전각이 있었다. 산 속에 있는 돌이란 돌은 모두가 꼿꼿이 서서 기울어진 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허물어진 담장과 부서진 기와는 이곳저곳 흩어져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황제가 일찍이 서산(西山)에서 토목의 역사에 사치가 궁극하였다.”

하는데, 유독 이곳은 금원(禁苑)의 지척에 있건마는 전연 수리를 하지 않은 채 마치 황산과 폐허나 다름없이 두었음은 과연 무슨 까닭일까.

 

 

[D-001]유상곡수(流觴曲水) : 술잔을 물에 띄워 돌려 가면서 마시도록 한 놀이터.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수산(萬壽山)

 

 

태액지를 파서 산을 만든 것이 곧 만수산(萬壽山)인데 또는 매산(煤山)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는 3층 전각이 있고 4개 법륜간(法輪竿)을 세웠으니, 여기가 명()의 의종렬황제(毅宗烈皇帝)가 순국(殉國)하던 곳이다. 나는 항주(杭州) 사람 육가초(陸可樵)와 이면상(李冕相) 등을 오룡정(五龍亭)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북경에 와서 길을 모르고 헤매는 것은 나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옛 사람의 기록에 의거하여 때때로 이것을 옷주머니 속에서 자주 끄집어내어 보면서 때로는 서로 보고 웃기도 하고, 때로는 둘이 마주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였으니, 대체로 그들은 옛날 기록을 뒤적거려 보다가 맞힐 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고 한즉, 스스로 기뻐할 적도 있으려니와 또 놀랄 때도 없지 않았던 것이었다. 저들은 중국 사람이지마는 보고 들은 것이 서로 틀리고, 옛 기록이 때로는 이같이 착오와 거짓이 있거늘 하물며 나 같은 외국인일까보냐. 나도 이 때문에 나 자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처음은 만세산(萬歲山)을 만수산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대체로 중국 발음으로 만() 이라 하고 세() ()’ ()’의 번절(飜切) 쒜이이기 때문에, 만수나 만세는 음과 뜻이 함께 비슷하고 보니 산 하나를 두고 두 이름을 붙이게 된 줄로만 알았더니, 이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옛 기록을 상고해 보면 과연 같은 산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구경한 토원산과경화도가 곧 만세산이다. 비하자면 사람이 자리를 마주 앉아 얼굴을 보고 이름을 물어서 각각 서로 분간해 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세산은 금()의 사람들이 송()의 간악(艮嶽)을 손수레로 실어 옮겨 만든 것으로 당시에는 절량석(折糧石)’이라 불렀었다. 원 세조(元世祖)는 그 위에 광한전(廣寒殿)을 두었으니, 명 선종(明宣宗)의 어제(御製) 광한전기(廣寒殿記)가 바로 이것이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에 원()의 태자(太子)는 고려 찬성사(贊成事) 이공수(李公遂)를 광한전에서 불러 보았다 하였으니 곧 이 만세산이다. 또 고려 원종(元宗) 5(1264) 9월에 왕은 연경으로 와서 10월에 만수산 옥전(玉殿)에서 황제를 작별했고, 또 신사전(申思佺)은 만수산옥전을 두루 구경했다고 하였으나 다만 옥전이라고만 말하고 전각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만수산이라 불렀은즉 소위 옥전은 광한전이 아님은 분명하다. 수황정(壽皇亭)을 구경하고자 했으나 파수꾼이 들여놓지를 않았다. 알지 못하겠다. 정자는 지금도 남아 있는지. 어허, 서글픈 일이로구나.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태화전(太和殿)

 

 

태화전(太和殿)은 명() 때 옛 이름으로 황극전(皇極殿)이다. 3층 지붕에 9층대 뜰이요, 지붕은 누런 유리 기와를 이었다. 월대(月臺) 3층이요, 높이는 각각 한 길이요, 매층에는 백옥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모두 용과 봉을 아로새겼고, 난간 머리에는 모두 이무기 대가리를 새겨 밖으로 향했다. 축대 위에는 쇠로 만든 학을 세워 훨훨 날아가는 것만 같았고, 첫 축대 난간 속에는 솥 8개를 벌여 놓았고, 둘째 축대에는 난간 모서리를 마주 대하여 솥 2개를 놓았고, 셋째 축대 난간 속에는 난간을 사이에 끼우고 각각 솥 1개를 마주 놓았는데 솥의 높이는 모두 한 길 남짓 되었다. 뜰에는 역시 솥 30여 개를 늘어놓았는데 그 물색의 뛰어난 귀신 같은 솜씨는 옛날의 구정(九鼎)이 혹시 이곳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태청문으로부터 백옥 난간을 연이어 굽이굽이 틀어 태화전까지 닿았다. 또 난간은 태화전을 빙 둘러 중화전(中和殿)과 보화전(保和殿)까지 이르러 모양이 마치 아자(亞字)처럼 되었고, 전 앞의 동쪽 전각은 체인(體仁)이요, 서쪽 전각은 홍의(弘義)’라 부른다. 축대의 높이는 거의 태화전 섬돌과 높이가 같으나 다만 한 층대에 한 난간일 뿐이다. 대체로 태화전은 천자가 정치를 하기 위하여 나가 앉는 곳으로 그리 크고 높지도 않게 뵈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의 의견들도 모두 비슷하여 매우 의아했더니 수역(首譯)이 웃으면서,

 

이는 다름이 아니외다. 지금까지 거쳐온 수천 리 어간의 성읍과 민가가 그처럼 장려했고 사찰과 궁관이 굉장히 사치했고 본즉, 보는 안목은 날로 사치해지고 마음과 뜻은 점차 넓어져 태화전을 보기 전에 벌써 머리 속에는 청양(靑陽 ()의 궁전 이름)과 옥엽(玉葉 ()의 궁전 이름) 같은 큼직한 명당(明堂)들이 천자의 좌기하는 곳이리라고 생각했었고, 또 지금 좌우 낭무(廊廡)로부터 갑자기 태화전을 보니 그렇게 색다르게 보이지 않으므로 도리어 어리둥절해져서 예상과 틀리게 보였을 뿐입니다. 사람에게 비한다면 요()와 순()도 역시 보통 사람과 같지마는 만일에 좌우에 보필할 신하로서 원()과 개() 같은 여러 대신이 없이 구차하게 직위를 채울 자로서 모두가 망나니와 나무꾼 따위뿐이라면 아무리 요순과 같은 성인이 있어서 해()()분미(粉米)마름범새끼()() 등의 갖은 무늬를 수놓은 복장을 하고 영롱한 광채를 휘날리며, 겹눈동자를 꿈벅거린다 하더라도 저 혼자서 우뚝 서서 어떻게 그 높고도 넓은 정치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찰과 궁관은 당()() 시대의 악()()에 비한다면, 족히 제후(諸侯)의 조공을 받아서 천하를 지닐 수 있을 것이요, 여염과 시전들은 강()()의 백성들에 비해서 즐비하게 들어찬 연후에야 비로소 황제가 거처하는 곳의 굉걸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3겹 지붕과 아홉 층대의 뜰과 누른 기와는 일반 백성들로서는 참람히 하지 못할 물건이며, 기타 궁전의 제도도 모두 태화전을 본뜨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곧 태화전을 가장 사치하게 꾸민 까닭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태화전 역시 오막살이 초가집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자네 말과 같다면 요순이 걸()()를 겸한 연후에야 비로소 뽐낼 만한 천자가 되겠구먼.”

하였더니, 옆에서 듣는 자들이 모두 크게 웃곤 하였다.

 

 

[D-001]구정(九鼎) : 하우(夏禹)가 만든 황금 솥. 구주(九州)를 상징하였다.

[D-002]() : 중국 상고 때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여덟 사람으로서 백분(伯奮)중감(仲堪)숙헌(叔獻)계중(季仲)백호(伯虎)중웅(仲熊)숙표(叔豹)계리(季貍).

[D-003]() : 고양씨(高陽氏)의 재자 여덟 사람으로서 창서(蒼舒)궤개(隤敱)도인(檮戭)대림(大臨)방강(尨降)정견(庭堅)중용(仲容)숙달(叔達).

[D-004] …… () : 여기의 12가지는 천자의 옷에 수놓은 12().

[D-005]겹눈동자 : 전설에 순()의 눈동자가 둘이라 하였다.

[D-006]()() : 당시 제후(諸侯) 4() 2().

[D-007]() …… () : 강은 5()의 길이요, 구는 4달의 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체인각(體仁閣)

 

 

내무부(內務府)의 관원이 통관(通官)과 함께 우리 역관을 안동(眼同)하여 우리나라에서 바치는 자주(紫紬)와 황저(黃紵)를 체인각에다 살펴 받아들였다. 때마침 각로(閣老)로 있던 이시요(李侍堯)의 가산을 몰수해 들이고 있었다. 시요는 운귀총독(雲貴總督) 해명(海明)으로부터 금 2백 냥을 받은 뇌물 사건으로 인하여 가산을 몰수당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안팎으로 대소와 귀천이 없이 모두 일정한 봉급과 보수가 있지마는 지방관에 이르러서는 복잡하고 시끄러워 일정한 제도를 만들기 어려웠다. 만일 정한 금액 외에 사사로이 부과한 세금이 있든지, 혹시 뇌물을 받은 사건이 탄로되면 이를 추궁하여 비록 털끝만 한 범죄의 사실이 있더라도 뇌물과 살림을 모조리 몰수하고, 다만 관직만은 박탈하지 않기 때문에 벌거숭이로 직위에 있으므로 처자는 의지할 곳 없이 유리하게 된다. 이 법은 대개 명()의 옛 법으로서 더욱 엄격해졌던 것이다. 내무부의 관원이 마주 앉아서 받아들이는데 다른 물건은 없고 모두 부인네들이 입는 초피(貂皮) 갖옷 2백여 벌로 그 중 한 벌은 매우 길고 털 가장자리에는 금으로 용틀임 수를 놓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문화전(文華殿)

 

 

옹화문(雍和門)을 나서면 한 전각이 있는데 문화(文華)라고 부른다. 누런 유리 기와 지붕이다. ()의 고사(故事)에 의하면,

 

문화전 동쪽 방에는 9개 신주함을 만들어 놓고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 등을 모시고 왼쪽 함 1개에는 주공(周公), 오른쪽 함 1개에는 공자(孔子)를 각기 모셨다. 매일 천자가 문화전에 나와 강의 좌석을 베풀고는 먼저 한 번 절하고, 세 번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 각로와 강관은 축대 위 돌 난간 왼편에 서서 기다린다. 그러다가 승지(承旨) 선생님 듭신다.’라는 창()을 하면 각로와 강관들은 고기를 꿰미에 꿰듯이 한 줄로 열을 지어 뒤를 따라 들어와 반을 나누어 자리에 든다. 이때는 여러 가지 대궐에서 쓰는 까다로운 예절을 생략하고 강의하는 신하가 책상에 기대도록 편리를 보아 준다.”

하였다. 알지 못하겠다. 요즘에도 강의하는 좌석에서 이런 예법을 지키는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문연각(文淵閣)

 

 

문화전 앞에 있는 전각을 문연(文淵)이라 부른다. 여기는 천자가 장서(藏書)를 하는 곳이다. ()의 정통(正統) 6(1441)에 송()()() 때의 모든 책들을 합하여 목록(目錄)을 만들었는데 모두 4 3 2백여 권이라 하였다. 그 뒤에 또 영락대전(永樂大全) 2 3 9 37권을 더 보태게 되었다 한다. 만일 그 뒤 다시금 근세에 와서 간행된 도서집성(圖書集成)과 지금 황제가 수집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더 보태었다면 아마도 서고는 다 차고 밖에 노적을 해 두었을 것만 같다. 문을 채웠으므로 간신히 주렴 틈으로 대강 전각의 웅심함을 바라보았으나 천자의 풍부한 장서는 한 번도 엿보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일찍이 듣건대,

 

옛날 우리나라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구왕(九王)을 따라 이 전각에 묵었다.”

한다. 구왕이란 곧 청()의 초기 예친왕(睿親王)다이곤(多爾袞)이다.

 

 

[D-001]영락대전(永樂大全) : 명 성조(明成祖) 때에 칙명에 의하여 엮은 유서(類書).

[D-002]도서집성(圖書集成) : 청조(淸朝)의 칙명에 의하여 엮은 총서(叢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D-003]사고전서(四庫全書) : 청 건륭제(淸乾隆帝)의 칙명에 의하여 엮은 총서.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무영전(武英殿)

 

 

협화문(協和門) 밖에 무영전(武英殿)이 있다. 제도는 문화전과 다름없었다. 옹화문(雍和門)과 서화문(西華門)이 서로 곧장 마주 대하고, 협화문과 동화문(東華門)이 서로 마주 대했는데, 무영전 앞에는 무연각(武淵閣)이 있다. 대체로 전각의 대문과 단장들은 어디고 서로 마주 대짝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뜰의 척수도 반드시 서로 맞아 조금도 차가 없었다. 황강한(黃江漢)경원(景源) 배신전(陪臣傳)에는,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 살합렴(薩哈廉)이 수도에 들어와 명()의 문무관의 조하(朝賀)를 무영전에서 받았다.”

라고 하였지마는, 이는 잘못 전한 일이다. 살합렴은 곧 패륵(貝勒 황족(皇族)이란 뜻의 만주 말)인데 시호록(諡號錄 저자 미상)에 보면,

 

살합렴의 시호는 무의(武毅).”

하였으니, 문무관의 조하를 이 전각에서 받은 자는 곧 다이곤(多爾袞)이요, 살합렴은 아니다. 갑신 3월에 이자성(李自成)이 수도(북경)를 함락시키자 이해 5월에 다이곤이 수도에 들어갔으니 이때는 명이 망한 지 한 달쯤밖에 안 되어서 우리나라 하급 관리로서 무영전의 화려한 댓돌을 볼 때에 박쥐의 똥만 남아있을 뿐이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제는 역졸과 마부들이 전각에 미어지라고 들어와 마음대로 유람을 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당시의 광경을 잘 모를 터이지마는 모두 청인(淸人)의 붉은 모자와 마제수(馬蹄袖)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제 스스로 의복이 남루한 줄 알면서 오히려 비단옷 입은 자들과 함께 버티고 서서 조금도 부끄러운 티가 없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소위 존화(尊華)양이(攘夷)하는 대의가 하급 노예에게도 뿌리 깊게 박혔으며 양심에서 나온 이념이 모두 같다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D-001]경원(景源) : 조선 영조(英祖) 때의 유신(儒臣). 강한은 호요, 경원은 이름. 자는 대경(大卿).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경천주(擎天柱)

 

 

오문(午門) 밖 좌우에는 몇 길 되는 돌 사자를 세워 두었고, 단문(端門) 안 좌우에는 큰 돌 거북을 앉혀 두었고, 그 위에다가 6모 난 돌 기둥을 세웠다. 기둥 높이는 예닐곱 길은 되고, 기둥 몸에는 용 무늬를 둘러 새겼다. 기둥 머리에 앉힌 물건은 무슨 형상인지 알아낼 수 없으나 모두 무엇을 잡아 치는 형상이며, 천안문(天安門) 밖에도 역시 이런 것이 한 쌍 있었는데 아마도 돌문인 듯싶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어구(御廐)

 

 

황실의 말을 먹이는 마방은 전성문(前星門) 밖에 있다. 동서로 나무 울짱을 세워서 문을 만들었다. 말은 불과 3백여 필밖에 안 되는데 모두 굴레를 벗고 제멋대로 있었다. 마침 대낮이 되어 말먹이꾼들이 울타리를 열고 채찍을 쳐들어 부르는 시늉을 하면서 지휘를 하니 동서 양쪽 마굿간으로부터 말들이 일제히 나와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좌우로 갈라섰다. 북쪽 담장 밑에는 큰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는 커다란 돌 구유가 있었다. 사람 둘이 기계를 돌려 물을 길어 계속 구유 속으로 푼다. 말먹이꾼은 채찍으로 말들을 10마리씩 한 무리로 갈라 순서대로 들어가 물을 마시게 했다. 앞 대열이 일제히 마시고 일제히 물러나오니 뒷 대열이 이어 나가 감히 서로 앞서려고 다투는 법도 없이, 들어가는 패는 오른편으로, 나오는 패는 왼편으로 제발로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도대체 천자의 말이 이것뿐이냐.”

하고 물었더니, 말먹이꾼은 웃으면서,

 

천자는 만승(萬乘)이라 일컫는답니다. 서울이나 지방에 살고 있는 웬만한 부잣집이라도 이만한 수효는 가지고 있는 터에 하물며 만승천자이겠습니까.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서산(西山) 등지까지 치면 모두 1만 마리는 될 것입니다. 황제의 장원인 남해자(南海子)에도 역시 천리마(千里馬)가 있답니다. 이제는 천자께옵서 거둥을 했기 때문에 말들은 모두 준화주(遵化州)로 가고, 여기 남아 있는 말들은 모두 늙고 병들어 타기가 어려운 것들로 단문(端門) 앞에 의장으로나 설 만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이는 670살씩은 됩니다.”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중에서 누런 말 한 필을 가리키면서,

 

이 말의 나이는 백세 살 났습니다.”

하면서, 그 입술을 열어 보이는데 이가 단 두 개만 남아 여물을 못 먹은 지가 벌써 30여 년이라 한다. 낮에는 좋은 막걸리 두 동이를 먹이고 아침저녁에는 엿밥과 보릿가루 두 되를 소주에 섞어 주면 구유에 대고 핥아 먹곤 하여 한 달에 삼품(三品)의 급료를 받는다고 한다. 황제가 때로 어찬을 내리면 반드시 두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옹정(雍正) 때에도 오히려 하루 천 리를 갔다고 한다. 말의 털빛으로 보아서 정결하고 윤기가 흘러 그리 많이 늙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다만 눈이 작고 눈곱이 끼고 두 눈동자는 맑고 푸르러서 말갈(靺鞨) 사람 같았다. 두 눈썹에는 터럭 56개가 남아 풀기 없이 늘어졌고, 귓속의 흰 털이 바깥까지 나와 갈기처럼 되었다. 그러나 정강이만은 다른 말들보다는 아주 커서 젊었을 때는 힘이 세었을 것이 상상되었다. 말먹이꾼의 눈치가 나에게 선물이라도 많이 바라는 것만 같고, 얼굴 생긴 꼴이 완악하고 더럽게 되먹은 것으로 보아 이 자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될지 모를 일이다. 해마다 삼복(三伏)에는 한낮에 귀인들이 임금 타는 식의 수레 차림으로 어마감(御馬監)이 관리하는 말들을 인도하여 덕승문(德勝門) 밖 적수담(積水潭)에서 목욕시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오문(午門)

 

 

오문(午門)은 홍예문(虹霓門)이 셋으로 깊기가 굴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되어 여럿이 떠드는 소리가 마주 쿵쿵 울려 요란하게도 웅성거렸다. 다리 5개는 모두가 백옥 난간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묘사(廟社)

 

 

6()는 단문(端門) 안에 있고, 6()와 백사(百司)는 태청문(太淸門) 밖에 나누어 두었으니, 이것을 전조(前朝)라 하며, 태액지(太液池) 북쪽의 신무문(神武門) 안을 후시(後市)라 한다. 종묘(宗廟)는 대궐 왼편에 있고, 사직(社稷)은 대궐 오른편에 있어 전후와 좌우의 배치와 설비가 균형이 잡혔으니, 이래서 임금으로서의 제도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일찍이 유구기략(綏寇紀略 청 나라 오위업(吳偉業) )을 보니 이르기를,

 

숭정(崇禎) 16(1643) 5월 북경서 붉은 비가 내리면서 하룻밤을 새도록 우레와 번개가 번쩍였고, 태묘(太廟)의 신주가 거꾸러지고 보정(寶鼎)과 이기(彝器)들이 모두 녹아 내렸다.”

하였고, ,

 

“6 23일 밤에는 벼락이 봉선전(奉先殿) 묘문(廟門)에서 일어나 쇠 문고리가 모두 용의 발톱에 녹았고 묘 앞에 있는 돌 위에는 용의 누운 흔적이 났다.”

하였으니, 아아, 슬프도다. 갑신년(1644) 이자성(李自成)의 난리는 천고에 없었던 것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종묘가 뒤흔들리면서 드디어 각라씨(覺羅氏)의 판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이 같은 큰 변괴가 없었을 것인가.

 

 

[D-001]각라씨(覺羅氏) : 청 황제의 성 애친각라씨(愛親覺羅氏).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전성문(前星門)

 

 

체인각(體仁閣)으로부터 협화문(協和門)을 나와 동화문(東華門)을 곧장 마주 보면 전각이 있는데 이것은 문화(文華), 그 동쪽에 있는 문을 전성(前星)이라고 한다. 푸른 유리 기와로 이엉을 하였고 대문 안에는 또 겹문이 있었으나 모두 쇠를 채웠다. 겹문 안은 모두 푸른 기와집이었는데 이것만 보아도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전임을 알 수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태자가 살고 있는 집을 전심전(傳心殿)이라 하고 그 뒤에는 활 쏘는 정자가 있는데, 쇠로써 빗돌을 만들어 청() 황실 조상의 교훈을 새겨 묻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이곳까지 이르는 자가 없다.”

한다. 또 전설에 의하면,

 

강희(康熙)가 임금 자리에 오래 있게 되자 태자는 궁에서 일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세상에 미리 세운 태자가 있을 수 있으랴.’ 하며 빈정거렸다. 이 말이 새어나자 태자는 폐출되었고 이로부터 태자를 미리 세우지 않았다.”

한다. 옹정(雍正) 원년(1723) 8 17일에 조서를 내리기를,

 

우리 성조인황제(聖祖仁皇帝)께옵서 나라를 위하시어 삼가 짐()을 택하여 작년 11 13일에 황위를 계승케 하셨다. 이는 말 한 마디로 국가의 대계를 정한 것이다. 나라의 내외를 불구하고 짐을 기쁘게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날 성조가 두 형님의 일로 인하여 몸소 걱정을 매우 하신 것은 천하가 다 들어 아는 바이다. 오늘 짐은 여러 아들들이 아직 어려서 반드시 근심해야 될 것이므로 이 일을 친히 기록하여 단단히 봉한 뒤 건청궁(乾凊宮) 중에 있는 세조장황제(世祖章皇帝)의 친필인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현판 뒤에 간직해 두었으니 곧 여기는 궁중에서는 제일 높은 곳으로 이로써 불의의 걱정을 막는 준비로 삼는다. 따라서 여러 왕들과 대신들에게 이르노니 모두가 함께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부 주사(禮部主事) 육생남(陸生楠)은 소()를 올려 태자를 미리 세우기를 청했으나 옹정은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준절히 꾸짖었다.

 

태자를 미리 봉하지 않는 법은 곧 우리 황가에서 대대로 내려 오는 법이 아니겠는가. 황자들로 하여금 각기 저마다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함에 힘쓰도록 할 것인 바 이래서 천명을 기다릴 뿐이요, 형제간에 시기와 참소와 간특을 끊게 되는 것이다. 이 법이야말로 만대를 통하여 오래 두고 쓸 아름다운 법도이다. 명의 간신 왕석작(王錫爵)이 태자를 세울 것을 청원하여 어진 태자를 세우지 않고 천계(天啓 () 희종(憙宗))를 세워 필경 천하를 망쳤으니 네가 왕석작을 본받을 것이냐.”

하였다. 이로부터 천하에서는 감히 또 다시금 태자를 미리 세우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였으니, 전성문이 닫힌 지도 곧 백 년이 될 것이다.

 

 

[D-001]두 형님의 일 : 태자를 두 번 세웠다가 폐한 일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오봉루(五鳳樓)

 

 

태화전(太和殿) 앞 뜰의 면적은 거의 수백 보요, 한 길 남짓 되는 축대 위에는 백옥 난간을 둘렀고, 그 위에 태화문(太和門)이 섰다. 문은 3층 처마에 누른 기와를 이었으니 이것을 오봉루(五鳳樓)라고 부른다. 황제가 큰 조회를 할 때 태화전에 거둥하여 나와 앉으면 흠천감(欽天監 기상대(氣象台)의 장)은 시간을 아뢰는 북을 누각 위에 설치하고 교방사(敎坊司 음악을 맡은 관서)는 중화소악(中和韶樂)을 누각의 동서에 배설한다. 통관 서종현(徐宗顯)의 말을 들으면,

 

조회를 할 때는 금의위(錦衣衛 황제의 의복과 기구를 맡은 관서)는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태화전 뜰 동서에 벌이어 북향케 하고, 길들인 코끼리를 오봉루 아래 동서로 마주 대하여 세우며, 천자가 타는 수레들을 태화문의 뜰 복판길에 북향으로 세우고, 어마감(御馬監 황제의 말을 기르는 관서)은 의장마를 벌여 세우며, 금오위(金吾衛 궁중 경비군)와 운휘사(雲麾司 황제의 거둥 때 의장을 맡은 관서)는 갑사(甲士)와 의장과 쇠북을 태화문 밖 오문(午門) 안 뜰에 벌여 세우고, 수도를 수비하는 장교 7만 명이 길을 끼고 깃대를 세우고 바둑판 같은 거리를 호위 경계한다. 백관은 단문(端門) 안 경천주(擎天柱) 아래서 시간을 기다리다가 오봉루 속에서 북 소리가 처음 울리면 백관이 반열을 정비하고, 북이 두 번째 울리면 반열을 나누어 태화문의 좌우 협문을 통하여 한 줄로 늘어서서 들어온다. 황제가 탄 수레는 보화전(保和殿)으로부터 중화전(中和殿)을 거쳐 태화전으로 드는데 길잡이 하는 시위는 9개의 옥새(玉璽)와 인부(印符)를 받들고 앞서 간다. 풍악은 비룡인지곡(飛龍引之曲)을 아뢰고, 대악(大樂)은 풍운회지곡(風雲會之曲)을 아뢴다. 이 때야 여러 문을 한목으로 열면 곧장 바로 정양문(正陽門)까지 툭 터져 내다보인다. 안팎이 먹줄로 친 듯 바르고 조금도 굽은 데가 없다. 오봉루 속에서 연주하는 경황도(慶皇都 악곡 이름)와 희승평(喜昇平 악곡 이름) 등의 음악은 마치 하늘에서 울려 오듯 들린다.”

한다. 또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숭정(崇禎) 초년에 오봉루 위에서 하늘이 내린 글이라고 누런 보자기 열 벌을 얻었는데 바깥 제목에는 천계(天啓) 7, 숭정은 17, 복왕(福王) 1년이다.”

라고 씌였으니, 이것은 비록 요언(妖言)이라 하더라도 이같이 큰 나라 왕조의 성쇠에 있어서 어찌 하늘이 정한 명수가 없을 것인가.

 

 

[D-001]비룡인지곡(飛龍引之曲) : 악곡 이름. 황제가 보위(寶位)에 오름을 축하하는 곡조.

[D-002]풍운회지곡(風雲會之曲) : 악곡 이름. 임금과 신하가 서로 제회(際會)를 얻음을 노래한 곡조.

[D-003]천계(天啓) …… 1년이다 : 천계는 7년 만에 끝나고, 숭정은 17년 만에 끝나며, 복왕은 1년 만에 끝난다는 의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단(天壇)

 

 

천단(天壇)은 외성(外城) 영정문(永定門) 안에 있다. 담장의 주위는 거의 10리쯤 되고 그 기반은 세 급()으로 되어 그 위로는 능히 말이라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안에는 원구(圓邱)가 있는데 제1층단의 넓이는 백여 보나 되고 높이는 넉넉히 한 길 남짓이나 되며, 단의 바닥은 모두 푸른 유리 벽돌을 깔았다. 난간 네 둘레는 모두 초록색 유리로 헌함을 만들고 네 군데로 터진 층층대는 모두 아홉 층대로 되었다. 층층대의 넓이는 거의 두 발이나 되는데 역시 푸른 유리 벽돌을 깔았다. 층층대의 양쪽 난간도 역시 초록색 유리로 된 헌함을 했다. 2층의 단면(壇面)은 두 발 남짓이나 되는데 층층대가 네 군데로 터졌고 층대는 아홉 켜다. 단면에는 푸른 유리 벽돌을 깔았고 단의 아래 동아리와 네 둘레의 난간은 역시 다 초록색 유리로 된 헌함이다. 원구의 밖에는 또 누런 기와를 이은 담장으로 둘렀는데, 사면에 기둥을 세워 성문(星門)을 만들었으되 원()()()()으로 나누어 이름 붙여 동북의 방위에 배속시켰다. 동쪽 제1단은 해를 제사하고, 서쪽 제1단은 달을 제사하며, 동쪽 제2단은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제사하고, 서쪽 제2단은 바람구름뇌정을 제사한다. 그리고 황궁우(皇穹宇)신악관(神樂觀)과 태화전의 재궁(齋宮)천고(天庫)신주(神廚) 등은 모두 누런 유리로 된 기와 지붕이다. 신악관은 평일에는 음악무용을 연습시키는 곳으로써 매번 큰 제사를 치를 때는 미리 태화전에서 예습을 한다. 돼지사슴토끼 등을 기르는 각방이 있고, 북쪽 담장 아래로는 네모난 못을 20여 군데나 파서 겨울이 되면 얼음을 캐어서 빙고에 저장한다. 제사에 소용되는 물건은 정결하게 갖추어 두고 무엇이나 이 속에서 가져다 쓰도록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양문 적루(敵樓) 아래의 정남향으로 된 문은 언제나 닫혀 있어서 이상하다 하였더니, 누군가 말하기를,

 

황제가 친히 천단에 제사를 지내러 나갈 때는 정남향을 한 옹성 문을 여는데 기름 백 석을 부은 뒤에야 비로소 열린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권(虎圈)

 

 

어용(御用)하는 마굿간 뒤에는 범 우리가 있는데 연대(煙臺)같이 성을 쌓고 그 위에는 우물 정() 자로 들보를 걸치고 팔뚝만큼씩 한 큰 철망을 덮었다. 담장 면에는 작은 구멍을 뚫고 쇠를 박아 울타리로 삼았다. 옛날에는 범 두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는 최근에 죽었고 한 마리는 원명원(圓明園)으로 데리고 가 버려서 이제는 빈 우리로 있다. 황제가 어디로 거둥을 할 때는 반드시 범 우리를 앞장 세우고 가다가 못마땅한 생각이 날 때는 황제가 우리 앞으로 와서 친히 쏘아 죽인다 한다.

 

 

[D-001]연대(煙臺) : 명의 때에 왜구(倭冠)를 막기 위하여 쌓았던 낭연대(狼煙臺).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주당(天主堂)

 

 

내 친구 홍덕보(洪德保)는 일찍이 서양 사람들의 기교를 논하면서,

 

우리나라의 선배들로 김가재(金稼齋)와 이일암(李一菴)같은 이들은 모두 식견이 탁월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바요, 더구나 중국을 옳게 본 데도 쳐줄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천주당(天主堂)에 대한 기록들은 약간의 유감이 없지 않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잘 미칠 수 없는 것이고, 또 갑자기 얼핏 보아서는 알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뒷날 계속해서 간 사람들에게 이르러서는 역시 천주당을 먼저 보지 않을 자가 없지마는 황홀 난측하여 도리어 괴물 같이만 알고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안중에 아무 것도 보지를 못한 까닭이다. 가재는 건물이나 그림에만 상세하였고, 일암은 더욱이 그림과 천문 관측의 기계에 자세하였으나 풍금(風琴) 이야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체로 이 두 분이 음률에 이르러는 그리 밝질 못했으므로 잘 분별을 못했던 것이다. 내가 비록 귀로 소리를 밝게 들었고 눈으로 그 만든 솜씨를 살폈다 하더라도 이를 다시금 글로써 그 오묘한 곳을 다 옮길 수는 없고 보니 정말 이것이 유감스러운 일로 되었던 것이다.”

하면서, 곧 가재의 기록을 끄집어내어 나와 함께 보았다.

 

방안 동편 벽에는 두 층계의 붉은 문이 달렸는데 위에는 두 짝이요, 아래에는 네 짝이다. 순차로 열리면서 그 속에는 기둥이나 서까래처럼 생긴 통()이 총총하게 섰는데, 크기가 같지 않았다. 모두 금은빛으로 섞어 칠을 발랐고, 그 위에는 철판을 가로 놓고 그 한쪽 가에는 수없이 구멍을 뚫고 다른 한쪽 가에는 부채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방위와 12()의 이름을 새겼다. 잠시 보니, 해 그림자가 그 방위에 이른즉 대 위에 놓인 크고 작은 종()이 각각 네 번씩 울고 복판에 있는 큰 종은 여섯 번을 쳤다. 종소리가 잠시 그치자 동쪽 변두리 홍예문(虹霓門) 속에서 갑자기 바람 소리가 쏴 하면서 여러 개의 바퀴를 돌리는 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관죽 등의 별별 음악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부터 이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다. 통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 음악입니다.’ 한다. 얼마 아니되어서 소리는 그치고 또 다른 소리가 나는데 조회 때 들은 음악 소리와 같이 들렸다. 이는 만주 음악입니다.’ 한다. 조금 있다가 이 소리도 그치고 또 다시 다른 곡조가 들리는데 음절이 촉급하였으니, ‘이는 몽고 음악입니다.’ 한다. 음악 소리가 뚝 그치고는 여섯 짝 문이 저절로 닫혔다. 이는 서양 사신 서일승(敍日昇)이 만든 것이라 한다.”가재의 기록이 여기에 이르러서 그쳤다.

덕보는 다 읽고 나서 한바탕 크게 웃으면서,

 

이야말로 이야기는 하면서도 자세하진 못하다는 말이구료. 속에 기둥이나 서까래처럼 생겼다는 통은 유기로 만들었는데 제일 큰 통은 기둥이나 서까래만큼씩 하여 크고 작게 총총하게 섰는데 이는 생황(生黃) 소리를 내기 위하여 크게 한 것이다.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은 다음 틀을 취하여 곱절로 더 보태고 8()씩 띄어 곧장 상생(相生)케 하여 8()가 변하여 64()가 되는 것이나 같다. 금은 빛을 섞어 바른 것은 거죽을 곱게 보이기 위함이요, 갑자기 한 줄기 바람 소리가 여러 개 바퀴를 돌리는 소리 같이 난다는 것은 땅골로부터 구불구불 서로 마주 통한 데서 풀무질을 하여 입으로 바람을 불 듯이 바람 기운을 보내는 것이요, ‘연방 음악 소리가 났다.’는 것은 바람이 땅골을 통하여 들면 바퀴들이 핑핑 재빨리 돌아 생황 앞이 저절로 열리면서 뭇 구멍에서 소리가 나게 된다. 풀무 바람을 내는 법식은 다섯 마리의 쇠가죽을 마주 붙여서, 부드럽기는 비단 전대처럼 만들고, 굵은 밧줄로 들보 위에 큰 종처럼 달아 매어서 두 사람이 바를 붙잡고는 몸을 치솟구어 배 돛대를 달듯 몸뚱이가 매달려 발로 풀무 전대를 밟으면 풀무는 점차 내려 앉으면서 바람주머니배는 팽창되어 공기가 꽉 들어찬다. 이것이 땅골로 치밀려 들면서 이때야 틀에 맞추어 구멍을 가리우면 어디고 바람은 새지 않고 있다가 쇠 호드기 혀를 부딪쳐서 순차로 혀는 떨려 열리면서 여러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대강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역시 그 오묘한 데를 다 말할 수는 없다. 만일에 국가에서 돈을 내어 이것을 만들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될 법도 하지.”덕보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하였다. 이제 내가 중국에 들어와서 풍금 만드는 법식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잊히지 않았다. 이미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와 즉시로 선무문(宣武門) 안 천주당을 찾았다. 동쪽으로 바라다 본즉 지붕 머리가 종처럼 생겨 여염 위로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이 곧 천주당이었다. 성내 사방에서는 다 한 집씩 있는데 이 집은 서편 천주당이다. 천주라는 말은 천황씨(天皇氏 중국 전설에 나오는 최초의 임금)니 반고씨(盤古氏 중국 전설에 나오는 최초의 임금)니 하는 말과 같다. 이 사람들은 역서(曆書)를 잘 꾸미며 자기 나라의 제도로써 집을 지어 사는데, 그들의 학설은 부화(浮華)함과 거짓을 버리고 성실을 귀하게 여겨 하느님을 밝게 섬김으로써 으뜸을 삼으며, 충효와 자애로써 의무를 삼고,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는 것으로써 입문(入門)을 삼으며, 사람이 죽고 사는 큰 일에 준비를 갖추어 걱정을 없애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저들로서는 근본되는 학문의 이치를 찾아 내었다고 자칭하고 있으나 뜻한 것이 너무 고원하고 이론이 교묘한 데로 쏠리어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여 제 자신이 저절로 의리를 배반하고 윤상을 해치는 구렁으로 빠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천주당 높이는 일곱 길은 되고 무려 수백 칸인데 쇠를 부어 만들거나 흙을 구워 놓은 것만 같았다. ()의 만력(萬曆) 29(1601) 2월에 천진감세(天津監稅) 마당(馬堂)이 서양 사람 이마두(利瑪竇)의 방물과 천주 여상(女像)을 바쳤더니 예부(禮部)에서 이르기를,

 

대서양(大西洋)이란 회전(會典)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으니, 적당히 참작해서 의관을 내려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몰래 북경에 숨어 있지 못하도록 하라.”

하고는, 황제에게는 보고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서양이 중국과 서로 통한 것은 대체로 이마두부터 시작되었다. 건륭(乾隆) 기축년(1769)에 천주당이 헐렸으므로 소위 풍금이란 것은 남은 것이 없었고, 다락 위의 망원경과 또 여러 가지 표본기들은 창졸간에 연구할 수 없으므로, 여기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덕보의 풍금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추억하면서 서글픈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C-001]천주당(天主堂) : 이 소제(小題)는 여러 본에는 풍금(風琴)으로 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수택본을 좇았다.

[D-001]홍덕보(洪德保) : 홍대용(洪大容)의 자.

[D-002]김가재(金稼齋) : 김창업(金昌業)의 호 노가재(老稼齋).

[D-003]이일암(李一菴) : 조선 숙종(肅宗) 때 학자 이기지(李器之)의 호.

[D-004]회전(會典) : 명대(明代)의 유신(儒臣)이 칙명을 받들어 엮은 명회전(明會典).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양화(洋畫)

 

 

무릇 그림을 그리는 자가 거죽만 그리고 속을 그릴 수가 없음은 자연의 세()이다. 대체로 물건이란 불거지고 오목하고,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그 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능한 자는 붓대를 대강 몇 차례 놀려 산에는 주름이 없기도 하고, 물에는 파도가 없기도 하고, 나무에는 가지가 없기도 하니, 이것이 소위 뜻을 그린다는 법이다. 두자미(杜子美 두보(杜甫). 자미는 자)의 시()에 이르기를,

 

마루 위의 단풍나무 이것이 어인 일고 / 堂上不合生楓樹

강과 뫼에 내가 이니 괴이키도 한저이고 / 怪底江山起煙霧

 

라 하였으니, 대체로, ‘마루 위란 나무가 날 데가 아니요, ‘어인 일고란 말은 이치에 맞지 않음을 이름이었으며, 내는 응당 강과 뫼에서 일어나겠지마는 만일 병풍에서 일어난다면 매우 괴이쩍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천주당 가운데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려 낼 수 없었고, 또한 보통 언어문자로는 형용할 수도 없었다. 내 눈으로 이것을 보려고 하는데,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는 듯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그들(화폭 속의 인물)이 내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이 싫었고, 또 내 귀로 무엇을 들으려고 하는데, 굽어보고 쳐다보고 돌아보는 그들이 먼저 내 귀에 무엇을 속삭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숨긴 데를 꿰뚫고 맞힐까봐서 부끄러워 하였다. 내 입이 장차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돌연 우레 소리를 내는 듯하였다. 가까이 가서 보매 성긴 먹이 허술하고 거칠게 묻었을 뿐, 다만 그 귀입 등의 짬과 터럭수염살결힘줄 등의 사이는 희미하게 그어 갈랐다. 터럭 끝만한 칫수라도 바로잡았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림에는 한 여자가 무릎에 56세 된 어린애를 앉혀 두었는데, 어린애가 병든 얼굴로 흘겨서 보니, 그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옆에는 시중군 56명이 병난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참혹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새 날개가 붙은 귀신 수레는 박쥐가 땅에 떨어진 듯, 그림이 슬그머니 돌아 웬 신장(神將)이 발로 새 배를 밟고, 손에는 무쇠 방망이를 쳐들고 새 머리를 짓찧고 있었다. 또 사람 머리, 사람 몸뚱이에 새 날개가 돋아 나는 자도 있으며, 백 가지가 기괴 망측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해 낼 수도 없었다. 좌우 바람벽 위에는 구름이 덩이덩이 쌓여 한 여름의 대낮 풍경 같기도 하고, 비가 갓 갠 바다 위 같기도 하며, 산골에 날이 새는 듯 구름이 끝없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수없는 구름 꽃봉오리가 햇발에 비치어 무지개가 뜨고, 멀리 바라뵈는 데는 까마득하고도 깊숙하여 끝간 곳이 없는데, 뭇 귀신들이 출몰하고, 갖은 도깨비가 나타나 멱살을 붙들고 소매를 뿌리치며, 어깨를 비비고 발등을 밟아서 가까운 놈은 멀리 뵈기도 하고, 얕은 데는 깊어 보이기도 하며, 숨은 놈이 드러나기도 하고, 가렸던 놈이 나타나기도 하여 뿔뿔이 따로 서 있으니, 모두가 허공에 등을 대고 바람을 모는 형세이었다. 대체로 구름이 서로 간격을 두어 이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천장을 우러러 보니 수없는 어린애들이 오색 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 만지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포동포동 살이 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도록 놀라, 어쩔 바를 모르며 손을 벌리고서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C-001]양화(洋畫) : ‘수택본에는 이 소제(小題) 양화가 천주당화(天主堂畫)로 되어서 목차(目次)에만 실려 있고, 원전(原典)에는 소제의 천주당화는 물론이요, 다음 주석과 같이 궐문(闕文)이 많았다.

[D-001]무릇 그림 …… 갑자기 : ‘수택본에는 첫머리의 무릇 그림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궐문(闕文)으로 되었다.

[D-002]구경하는 …… 젖혔다 : ‘수택본에는 구경하는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한 구가 상문(上文) “천주당의 끝에 별행(別行)으로 붙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상방(象房)

 

 

코끼리 우리는 선무문(宣武門) 안 서성(西城) 북쪽 담장 아래에 있다. 코끼리 80여 마리가 있는데, 코끼리들은 큰 조회 때 오문(午門)에서 의장으로 서기도 하고, 황제가 타는 가마와 노부(鹵簿)에 쓰이기도 한다. 코끼리는 몇 품()의 녹봉도 받고, 조회 때는 백관이 오문으로 들어오기를 마치면, 코끼리가 코를 마주 엇대어 서 있어서 아무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게 하였다. 코끼리가 때로 병이 나서 의장으로 서지 못할 때에는 억지로 다른 코끼리를 끌어 내려 해도 코끼리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코끼리 부리는 자가 병난 코끼리를 끌어다가 보여 주어야만 이를 곧이 듣고 바꾸어 선다. 코끼리가 죄를 범하면 칙명이라 하고는 매를 친다. 물건을 다치거나 사람을 상하는 따위다. 그러면 엎드려 매를 다 맞고 나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하며, 봉급을 깎으면 벌 받은 코끼리의 반열에 물러가 선다. 나는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부채와 환약 한 알을 주고 코끼리 재주를 한번 시키라고 했더니 그는 이것이 적다고 부채 한 자루를 더 부른다. 나는 당장 가진 것이 없으므로 꼭 더 가져다 주겠으니 먼저 재주를 시켜 보라 했더니, 그가 코끼리에게 가서 타일렀으나 코끼리는 눈웃음으로 마치 절대 할 수 없다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따라 온 자를 시켜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돈을 더 주었는데, 코끼리는 한참 동안 눈을 흘겨 보더니, 코끼리 부리는 자가 돈을 세어 주머니 속에 넣는 것을 보고서야 승낙을 하고, 시키지도 않는데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린다. 머리를 조아리며 두 앞발을 꿇기도 하고, 또 코를 흔들면서 퉁소 불듯 휘파람도 불고, 또 둥둥 북소리를 내기도 한다. 대체로 코끼리의 묘한 재주는 코와 어금니에 있다. 예전에 코끼리의 그림을 볼 때에 두 이빨이 모두 죽 바로 뻗어 곧추 무슨 물건이라도 찌를 듯하여 코는 늘어지고 이는 뻐드러진 것인 줄 알았더니, 이제 코끼리를 보니 그렇지 않다. 이빨도 다 아래로 드리워져 막대기를 짚은 것만 같고, 갑자기 앞으로 향할 때는 환도를 잡은 것 같기도 하며, 갑자기 마주 사귈 때는 예() 자 같이도 보여 그 쓰는 법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당 명황(唐明皇) 때에 코끼리 춤이 있었다는 말이 사기에 있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의심을 했더니, 이제 보아 사람의 뜻을 잘 알아 먹는 짐승으로는 과연 코끼리 같은 짐승은 없었다. 전하는 말에,

 

숭정(崇禎) 말년에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코끼리 우리를 지나갈 때에 뭇 코끼리들은 눈물을 지으면서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다.”

한다. 대체로 코끼리는 꼴은 둔해 보여도 성질은 슬기롭고, 눈매는 간사해 보이면서도 얼굴은 덕스러웠다. 혹자는 이르기를,

 

코끼리는 새끼를 배면 다섯 해 만에 낳는다.”

하고, 또는,

 

열두 해 만에 낳는다.”

한다. 해마다 삼복날이면 금의위(錦衣衛) 과교들이 의장 깃발을 늘인 노부(鹵簿)로 쇠북을 울리면서 코끼리를 맞아 선무문 밖을 나와 못에 가서 목욕을 시킨다. 이럴 때는 구경꾼이 늘 수만 명이나 된다.또 별도로 상기(象記)가 있다.

 

 

[D-001]또 별도로 …… 있다 : ‘수택본에는 이 원주가 없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금대(黃金臺)

 

 

노군(盧君) 이점(以漸)은 국내에 있을 때 경술(經術)과 행검으로 쳐 주었고, 또 춘추(春秋)의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격하는 대의에 엄격하였으므로 길을 오면서도 사람을 만나면 만(滿)()을 불구하고 한결같이,

 

되놈아.”

하고 불렀다. 거쳐 온 산천이나 누대들은 모두 누린내 나는 고장이라 하여 구경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적으로서 황금대(黃金臺)나 석호석(射虎石)태자하(太子河) 같은 곳은 길을 돌아가는 데나 또는 이름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파고 들어서 찾아내고야 만다. 어느 날 나와 황금대를 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곧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또 옛 기록을 찾아 보았으나 이야기들은 다 같지 않았다. 술이기(述異記)에는 이르기를,

 

연 소왕(燕昭王)이 곽외(郭隗)를 위하여 쌓은 축대로서 지금의 유주(幽州) 땅인 연왕(燕王)의 옛 성 중에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현사대(賢士臺)라고 부르고 또는 초현대(招賢臺)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북경이 곧 기주(冀州) 땅이고 본즉, 연왕의 옛 성이란 데는 어느 곳에 있는지 나는 모를 일이니, 하물며 이른바 황금대일까보냐.  태평어람(太平御覽) 중에는,

 

연소왕이 천금을 대 위에 두고 천하의 현사를 초청했다 하여 황금대라고 불렀다.”

하였다. 그러면 뒷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그 이름만 전할 뿐이요, 정말 대가 없음은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거늘, 노군은 어느 날 몽고 사람 박명(博明)으로부터 얻었다는 장안객화(長安客話) 중에서 초록한 것을 나에게 보인다.

 

조양문(朝陽門)을 나서서 남쪽으로 못을 돌아가면 동남쪽 모롱이에 높다랗게 솟아 있는 흙 둔덕이 바로 황금대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때 옛일을 슬퍼하는 선비로서 이 대 위에 올라간 자는 갑자기 천고의 고사를 회상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거닐게 된다.”

노군은 이때부터 서글퍼하면서 구경을 파하고 다시는 황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노는 날 틈을 타서 노군과 함께 동악묘(東嶽廟)의 연극 구경을 가기 위해 같은 수레로 조양문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을 만났다. 고는 능사헌(凌簑軒) ()와 함께 탔는데, 이르기를,

 

지금 황금대를 찾아 가는 길입니다.”

한다. 능은 본시 월중(越中 절강 지방) 사람으로서 역시 기이한 인물이었다. 북경에 처음 와서 고적 구경을 하기 위하여 나에게 동행을 청한다. 노군은 매우 좋아하여,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이야.”

하고, 가서 본즉, 두어 길 되는 허물어진 흙 둔덕이 주인 없는 황폐한 무덤과도 같으면서도 억지로 이름을 황금대라고 불렀다. 별도로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C-001]황금대(黃金臺) : ‘수택본에는 이 황금대의 전문(全文)이 탈락되었다.

[D-001]술이기(述異記) : () 임방(任昉)의 저.

[D-002]곽외(郭隗) : 전국 때 사람. 연 소왕이 현인을 구하매 곽외가 소왕에게 천리마(千里馬)의 뼈를 사온 고사를 이야기하여 스스로 추천 등용되었다.

[D-003]태평어람(太平御覽) : () 이방(李昉) 등이 칙명을 받들어서 엮은 유서(類書).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금대기(黃金臺記)

 

 

조양문(朝陽門)을 나서 못을 따라 남쪽에 두어 길 되는 허물어진 둔덕이 있으니, 여기가 곧 옛날 황금대(黃金臺)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연 소왕이 여기에다 궁전을 짓고, 천금을 축대 위에 놓고,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맞이하여 당시의 강한 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 일을 슬퍼하는 인사들은 여기에 이르면 비창한 회포를 참지 못하고 감개가 무량하여 거닐면서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곤 한다. 아아, 슬프도다. 축대 위의 황금은 없어졌건마는 국사(國士)는 오지 않는구나.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란 본래부터 아무런 원수가 없으면서도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그칠 때가 없고 본즉 이 축대 위에 놓였던 황금이 반드시 그대로 온 천하에 깔리지 않음은 아니리라. 나는 여기에서 지난 역사상에 모든 원수를 갚던 중에서 가장 큼직한 사건을 역력히 들어서 천하에 가장 황금을 많이 쌓아 놓은 자에게 외쳐 고하련다. () 때에 황금으로써 제후들의 장수에게 먹여서 그 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아서는 몽염(蒙恬 진 시황 때의 명장)을 가장 유력하게 쳐 주어야 할 것이다. 이사(李斯 진 시황 때의 정치가)는 원래 제후의 문객으로 제후를 위하여 몽염을 복수하였으니, 천하에 복수자는 여기에 와서 좀 멈칫해졌다. 얼마 뒤에 조고(趙高)는 이사를 죽였고, 자영(子嬰)은 조고를 죽였으며, 항우(項羽 항적(項籍). ()는 자)는 자영을 죽였고, 패공(沛公)은 항우를 죽였는데, 패공이 항우를 죽일 제 황금 4만 냥이 들었고, 석숭(石崇 ()의 부호가)의 이와 같은 많은 재물도 생겨난 데가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타고난 재물인 듯이,

 

이놈이 내 재물을 탐내는가.”

라고 욕질을 하였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인가. 그러나 재물이란 구르고 굴러 서로 원수를 갚으면서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금덩이가 아직도 어디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줄을 알 것인가. 원위(元魏)의 이주조(爾朱兆 장수인데 반란을 일으켰다)의 난리 때 성양왕(城陽王) ()는 황금 백 근을 가지고 있었는데, 낙양령(洛陽令) 구조인(冦祖仁)의 일문(一門)에서 난 세 자사(刺史)는 모두 자기가 발탁해 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 우리 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마는 저 휘 때문에 걱정이야.”

하고는, 휘를 잡으러 오는 장수가 장차 이를 것을 알고, 휘를 다른 장소로 도망하라고 꾀인 뒤, 길에서 그를 맞아서 죽여 버리고는 그 머리를 조()에게로 보냈다. 조의 꿈에 죽은 휘가 와서 이르기를,

 

내게 황금 2백 근이 있어 조인에게 맡겼으니 빼앗아 가지도록 하여라.”

하기에, 조는 조인을 잡아서 꿈에 시킨 대로 금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를 얻지 못하고 조인을 죽여 버렸다. 이것을 본다면 황금의 복수자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오대(五代) 때에 성덕 절도사(成德節度使) 동온기(董溫箕)는 황금 수만 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온기가 거란에 포로가 되자 아문 안에 지휘사(指揮使)인 비경(秘瓊)이 온기의 한 가족을 한몫으로 다 죽여 한 구덩이에 파묻고 그 금을 빼앗았다. 진 고조(晉高祖 후진의 석경당(石敬瑭))가 왕위에 오르자 비경이 제주 방어사(齊州防禦使)가 되어 부임하게 되어서는 그 금을 싸 가지고 위주(魏州) 길로 나오는데, 범연광(范延光)이 국경에 복병을 했다가 경을 죽이고 금을 몽땅 빼앗았다. 연광은 또 이 금으로 인하여 양광원(楊光遠)에게 살해를 당하고 광원은 진 출제(晉出帝 석중귀(石重貴))가 목을 베어 죽였다. 그리하여 광원의 부하 관리인 송안(宋顔)이 그 금을 죄다 털어다가 이수정(李守貞)에게 바쳤다. 수정은 뒤에 주 고조(周高祖)에게 패하여 처자와 함께 불에 타서 자살했으니 그 금은 아직도 응당 인간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줄을 알 수 있을까. 옛날에 도적 세 명이 함께 남의 무덤 하나를 파서 금을 도적질하고는 저희들끼리 이르기를,

 

오늘은 피곤하니 돈을 많이 벌은 판에 어찌 술 한 잔 사 오지 않겠어.”

하매, 그 중 한 명이 선뜻 일어나 술을 사러 가면서 가는 도중에 스스로 마음속으로 축하하기를,

 

하늘이 시키는 좋은 기회로구나. 금을 셋이 나누는 것보다는 내가 독차지하는 것이 좋겠지.”

하고는, 술에 독약을 타 가지고 돌아오자 남아 있던 도적 둘이 갑자기 일어나서 그를 때려 죽이고는 먼저 주식을 배불리 먹고, 금을 반분하려고 했더니 얼마 못 되어 둘이 함께 무덤 곁에서 죽고 말았다. 아아, 슬프도다. 이 금은 반드시 길 옆에서 굴러 다니다가 또 다시금 딴 사람이 주워 얻게 되었을 것이요, 이렇게 주워 얻은 자는 가만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면서도 이 금이 무덤 속에서 파내어졌고, 독약을 먹은 자들의 유물이며, 또 앞사람 뒷사람을 거쳐 몇 천 몇 백 명을 독살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이로움은 금이라도 끊는다.”

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이런 도적을 전제한 말이리라. 어째서 그럴 줄을 알겠느냐. ‘끊는다는 말은 가른다는 말이다. 가른다는 것이 금일진대 마음을 합치는 것도 잇속이라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리를 말하지 않고 잇속이라고 했은즉, 불의의 재물인 것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적질이 아니고 무엇이랴. 원하건대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것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닥칠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여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이 머리끝이 오싹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C-001]황금대기(黃金臺記) : ‘수택본에는 황금대로 되었다.

[D-001]조고(趙高) : 진 이세(秦二世) 때의 환관으로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 자.

[D-002]자영(子嬰) : 진 시황의 장자(長子) 부소(扶蘇)의 아들.

[D-003]패공(沛公) : 한 고조유방(劉邦)이 천자가 되기 전의 봉호.

[D-004]패공이 …… 들었고 : 패공이 항적과 범증(范增)을 이간시키기 위하여 진평(陳平)의 계교를 써서 황금 사만 냥을 흩었다.

[D-005]주 고조(周高祖) : 후주(後周) 태조 곽위(郭威)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옹화궁(雍和宮)

 

 

옹화궁(雍和宮)은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원당(願堂)이다. 세 겹 처마의 큰 전각이 있고, 그 속에는 금부처가 있으며 열두 개의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것이 무슨 귀신 동굴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사닥다리가 다 하면 누각에 오르게 되어 처음으로 햇빛을 보게 된다. 누각의 네 둘레는 난간으로 두르고 복판은 우물처럼 둘려 파서 금으로 만든 부처의 아랫도리 절반까지 미치게 된다. 또 여기서부터는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 캄캄한 속으로 한참 가야만 여덟 창문이 환하게 터진다. 누각 속 우물처럼 꺼진 데는 아래층 같아서 금부처의 등 절반이 겨우 보이게 된다. 또 다시금 어둠 속을 더듬어 발 가늠으로 캄캄한 데를 올라가노라면 곧장 윗층으로 나오게 되어 비로소 부처의 머리 정수리와 가지런하게 된다. 난간을 의지하고 굽어 보니, 바람이 세차서 마치 소나무 숲이 우수수 불어 오는 것과 같다. 이 절에 있는 중은 모두가 나마(喇嘛)  3천 명으로서 생긴 꼴들이란 완악하고 더럽기 짝이 없었다. 다들 금실로 짠 가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때마침 우중(禺中 상오 10시경)이라 여러 중들은 큰 전각 속으로 한 줄로 죽 들어간다. 다리가 짧은 바둑판 같은 걸상을 늘어 놓고 한 사람이 걸상 한 개씩 차지하여 평좌를 하고 앉는다. 중 하나가 종을 울리매 여러 나마는 일제히 염불을 한다. 다시 역관 이해적(李惠迪)과 함께 대사전(大士殿)에 올라갔다. 마음속으로는,

 

아마 아홉 개의 성문을 한 눈으로 바라다 볼 것은 물론이요, 즐비한 시가와 황성의 전 판국이 눈 아래에 깔릴 것이리라.”

하였던 것이 급기야 창문을 열고 난간에 나서서 본즉 곳곳에 솟은 누대가 겹겹으로 둘러 가렸다. 난간을 한 바퀴 빙 돌고 보니 도리어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다리가 벌벌 떨려 오래 서 있지 못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대광명전(大光明殿)

 

 

서안문(西安門) 안에서 남으로 작은 골목을 수백 보 가면 세 겹 처마에 열두 면으로 된 둥근 전각이 있다. 자줏빛 유리 기와를 이었고, 황금 호로병 모양의 꼭지를 달았는데, 현판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했다. 그 속 네 기둥에는 금빛 용이 위로 올라가는 놈, 아래로 내려가는 놈을 그려, 위로 지붕 끝에 닿을 만했다. 복판에는 상제(上帝)의 소상을 안치하고 빙 둘러 33좌의 소상을 세웠는데, 모두 곤룡포와 면류관에 홀()을 잡고 있었다. 네 바람벽에는 작은 창들이 났고, 벽은 다 푸른 유리 벽돌이다. 아홉 개의 뜰 층대는 세 층 난간으로 되었다. 이 집 이름은 대현도(大玄都)라 한다. ()의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도진인(陶眞人)을 맞아 대광명전에서 내단(內丹)을 강의했다고 했는데 곧 여기이다. ()의 순치(順治) 신축년(1661)에 만주 대신 색니(索尼)오배(鰲拜)소극살합(蘇克薩哈)알필륭(遏必隆) (청조의 훈신들이다)이 세조가 죽을 때 내린 겨우 여섯 살에 임금이 된 어린 강희(康熙)를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을 제 이 네 신하가 이에 올라서 분향을 하고 팔뚝을 찔러 피를 내면서 상제께 맹세를 했다 한다. 뒤에 있는 전각은 태극전(太極殿)인데,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고, 또 그 뒤에 있는 전각은 천원각(天元閣)이라 하여 도사 몇십 명을 기르고 집을 지키는 태감(太監)이 있었다. 대광명전과 천원각의 동편 행랑을 중수(重修)할 때에 김가재(金稼齋) 창업(昌業)이 당시 역군들이 사닥다리를 놓고 기와를 벗기는 역사가 매우 장하더라 했는데, 그의 일기(日記)를 보면 그때가 바로 강희 계사년(1713) 2 9일이다. 이제 태극전과 천원각을 보면 모두 누런 기와와 금벽 단청이 찬란하게 번쩍이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계사년은 벌써 68년 전이지마는 어제처럼 새롭다. 고사기(高士奇) 금오퇴식필기(金鼇退食筆記),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제택(第宅)이 바로 이 전각 왼편에 있었음을 밝히고는, 또 그의 기록에,

 

때는 바로 가을비가 처음 개고 푸른 하늘은 씻은 듯이 맑아 가슴을 풀어 헤치고 밖에 나와 앉으니, 높이 솟은 집은 흘러 내리는 밝은 달빛과 함께 마주 비치어 마치 광한궁(廣寒宮 달 나라의 궁전 이름)에 올라 앉은 듯이 황홀하구나.”

라고 하였다. 대체로 이 터가 앞이 조금 터진 데가 되어 달 밝고 맑은 밤이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D-001]내단(內丹) : 도교에서의 일종의 수련술(修鍊術).

[D-002]삼청(三淸) : 원시천존(元始天尊)태상도군(太上道君)태상노군(太上老君).

[D-003]일기(日記) :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D-004]고사기(高士奇) : 청 강희 때의 문학가. 자는 담인(澹人).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구방(狗房)

 

 

사냥개 몇백 마리를 두었는데, 크고 작게 생긴 모양이 저마다 달랐다. 모두가 매우 여위고, 더러는 눕기도 하고 또는 웅크리기도 하여 거동이 한가해 보인다. 심심해서 졸음을 못 이기는 놈이 있는가 하면, 좋아라고 꼬리를 치는 놈도 있고, 긴 하품을 하는데 아래 윗턱 사이가 거의 한 자나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몇십 명이 달려드니, 복장과 음성이 아마도 눈에 생소하게 보였을 것이나 하나도 놀라거나 짖지를 않았다. 따라온 하인이 육포를 내어 개 치는 사람에게 주면서 개 재주를 한 번 시켜보라 하였더니, 개 치는 사람이 육포를 두어 발 되는 장대 끝에 미끼처럼 매달고 개 한 마리를 불렀다. 그 중에서 누런 개 한 마리가 냉큼 뛰어나오는데, 여러 개들은 발을 재게 디디고 섰을 뿐 경쟁을 하지 않는다. 육포를 단 장대를 들었다 내렸다 하니, 개는 좌우로 껑충껑충 뛰다가 한 발로 끌어 잡아 채려고 하므로 개 치는 사람은 장대를 뿌리쳐 마치 뛰는 물고기가 공중으로 솟듯이 서너 길씩 올리니, 개도 역시 높이 뛰어 도리어 그 긴 장대를 뛰어 넘는데, 날래기가 질풍과 같았다. 개 치는 자는 그 개를 고함쳐 물리치고 이번에는 또 다른 개를 불러 순서로 시험하곤 한다. 개를 치는 법은 물건을 공중에 던지면 개가 고개를 젖히고 뛰어 잡아 채어서 먹게 하고, 땅에 떨어지면 먹지를 않는다. 따로 똥오줌 누는 데가 있어서 울안이 정결하고 더럽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공작포(孔雀圃)

 

 

푸른 놈 두 마리와 주홍빛을 띤 놈 한 마리가 있는데 꼬리 끝의 금전(金錢) 무늬는 다 같았다. 붉은 놈도 몸을 한 번 휙 돌리면 아주 새파란 빛깔로 변하고, 푸른 놈이 한 번 몸을 돌리면 붉은 빛이 되며, 금전 무늬는 아청(鴉靑) 빛으로 변했다. 사람의 기침 소리를 들으면 온몸의 깃과 털이 갑자기 빛깔을 잃어버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처음 빛깔로 되돌아온다. 몸은 해오라기에 비하면 조금 작고, 꼬리의 길이는 석 자가 넘는데, 정강이와 발은 더럽게 생겨 비단 옷에 짚신 감발이란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먹는다는 것이 다만 뱀뿐이며 또 뱀과 흘레도 붙어 온 마당에 흰 것이 남겨 있는 자리가 몹시 더럽다. 원두정이가 우리 하인들이 맨발로 걷는 것을 보고 이것을 못 밟도록 타이르기를,

 

뱀 뼈가 살에 들어가면 살이 곧장 썩는 걸요.”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오룡정(五龍亭)

 

 

태액지(太液池) 뚝에서 서남으로 향하여 물가에 서 있는 채색 정자 다섯 채가 있는데, 따로 부르기를 징상(澄祥)자향(滋香)용택(龍澤)용서(湧瑞)부취(浮翠)라 하고, 통틀어서 오룡정(五龍亭)이라 부른다. 맑은 물결 만경(萬頃)에 금벽 단청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제 멀리 바라다 뵈는 금오교(金鰲橋) 위의 거마와 행인들이 까마득하게 신선이 살고 있는 곳 같이만 보였다. 뒷날 오중(吳中 강소성) 사람들과 놀면서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경치를 물었더니, 그들은,

 

서호를 못 보셨다면 오룡정은 바로 그 일부입니다.”

하였다. 이 정자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명()의 천순(天順) 연간에 태소전(太素殿) 뒤에 초가 정자가 있었다는데, 이제는 없어졌음을 보아서 이곳이 곧 그 옛 터인 듯싶다. 자광각(紫光閣)과 승광전(承光殿)은 자줏빛 기와로 이엉한 추녀가 숲 속에 숨었으며 붉은 담장 속에 채색 기와 이엉이 높고 낮고 겹겹이 주름잡혀 있었다.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과 함께 왔을 때는 마침 석양 무렵이어서 엷은 아지랑이가 하느작거리는 광경이란 더욱 기이하였다. 또 일찍이 어느 맑은 날 아침 한번 갔더니, 돋아오르는 햇발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으나 정자 아래에 있는 수없는 연 줄기에 꽃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을 뿐이다. 역관들의 말을 들으면,

 

오룡정 광경은 비록 아침과 저녁으로 그 경치가 달라지지마는 그래도 한 여름 연꽃 철만은 못하고, 여름 연꽃 철도 역시 깊은 겨울의 얼음놀이보다는 못할 거요.”

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구룡벽(九龍壁)

 

 

오룡정을 거쳐 한 조그만 둔덕을 돌아서 한 대문에 들면 문 앞에는 향장(響牆)이 있는데, 높이가 대여섯 길은 되고 넓이는 여남은 발이나 되었다. 흰 사기 벽돌로 쌓고 아홉 마리 용을 새겨놓았다. 용의 몸뚱이는 모두 몇 발씩이나 되고, 오색 빛깔 이외에 별도로 자줏빛초록빛남빛 등이 섞였었다. 양각(陽刻)으로 도드라져 구불구불한 것을 자세히 보니 용의 사지몸뚱이머리뿔들을 한켜 한켜 구워내어 합쳐서 마주 붙였다. 오르고 내리고 나는 모습이 각기 자세를 갖추어 변화가 불측한데도 터럭끝만큼 이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음먹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알아 챌 길이 없을 만큼 되어 있다. 향장이란 것은 옛날의 색문(塞門 차면(遮面) 담 같은 것이다)이나 다름없으니, 궁궐이나 관청이나 사찰 같은 데에 흔히 있는 것이요, 일반 여염집에서는 다들 대문 안에 세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태액지(太液池)

 

 

태액지는 서안문(西安門) 안에 있는데, 둘레는 몇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일찍이 동해 구경을 할 때에 고성(高城)삼일포(三日浦)의 주위가 10여 리나 되었는데, 이제 이 못은 그만 못한 것만 같다. 옛날 이름으로는 서해자(西海子)라 불렀다. 못 가운데는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길이가 몇백 보요, 흰 돌을 깎아서 난간을 만들었고, 난간 밖에 또 흰 돌 난간이 있어 난간 머리에는 사자(獅子) 수백 마리를 새겼는데, 크기는 같으나 모양은 제각기 달랐다. 다리의 양쪽 머리에는 각기 패루(牌樓)를 세워 동쪽 머리에는 옥동(玉蝀)이라 써 붙였고, 서쪽 머리에는 금오(金鰲)라고 써 붙였다. 또 북쪽으로 바라보면 다리 하나는 경화도(瓊華島)로부터 승광전(承光殿)까지 이어졌다. 이 다리 남북에도 역시 패루를 세워 하나는 적취(積翠), 또 하나는 퇴운(堆雲)이다. 못을 둘러싸고 있는 전각과 누대는 첩첩한 지붕과 엇물린 처마였고 고목들은 회나무와 버들이 많았다.

팔월 초사흗날 나는 옥동에 이르러 월중(越中)에 살고 있는 사람 능야(凌野)를 만나 함께 오룡정에 이르렀다. 능야 역시 북경이 초행으로 온 지가 아직 며칠 되지 않았으므로 나에게 못 위에서 열리는 얼음놀이와 북경의 팔경(八景)이 어디어디인가를 물었다. 그의 소탈하고 꾸밈 없음이 이러하였다. 대체로 북경에서 멀리 만 리 밖에 있어서 북학(北學)하는 이가 드문 까닭이다. 내가 5, 6일 전에 갔었더라면 이 못의 늦 연꽃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거룻배 수십 척이 마름 줄기 사이를 젓고 다니면서 연밥을 따고 있었다.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벌거벗어 몹시 흉해 보인다. 오색 빛깔의 고기가 많이 있으며 큰 고기 세 마리가 보이는데, 모두 두 자 길이는 넘고 온 몸뚱이에 얼룩이 졌다. 막 부들대 밑에 와서 무엇을 먹기에 손뼉을 쳐서 놀라게 하였으나 아주 유유히 제멋대로 노닌다. 해마다 한 여름이 되면 만(滿)() 대신(大臣)과 한림(翰林) 또는 대성(臺省)들에게 경도(瓊島)영대(瀛臺)에서 뱃놀이 잔치를 베풀고 연뿌리와 생선을 하사하였고,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이면 팔기(八旗)를 대오로 나누어 공 차기와 타상(拖床)의 놀이를 하는데, 신 바닥에 모두 쇠이빨을 박아서 달리고 쫓음이 재빠름을 연습하면 이때는 황제도 친림하여 구경하게 된다.

 

 

[D-001]삼일포(三日浦) :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 신라 때 사선(四仙)이 사흘 동안을 놀았으므로 이 이름을 얻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자광각(紫光閣)

 

 

태액지를 돌아들면 지붕이 둥글고 작은 전각이 있는데, 위에는 누런 기와를 이었고, 처마는 푸른 기와를 썼으니 이름은 자광각이다. 그 곁에는 백조방(百鳥房)이 있어 기이한 새와 짐승들을 기른다. 이 전각은 높고도 넓으며 그 아래는 말 달리고 활 쏘는 마당이 있는데, 옛 이름은 평대(平臺)이다. 숭정(崇禎) 경진년(1640)에 계주 순무사(薊州巡撫使) 원숭환(袁崇煥)이 황제를 구원하러 들어왔으나, 황제는 도리어 평대에 친히 나와 앉아서 숭환을 찢어 죽였으니 이곳이 곧 그 땅인 듯싶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불루(萬佛樓)

 

 

구룡벽을 거쳐 몇 걸음을 더 가면 큰 전각이 나타난다. 벽으로 둘러 쌓아 감실을 만들어서 작은 부처를 앉혔는데, 한 감실에 부처가 하나씩 도합 1만 개이다. 또 여섯 길 되는 관음보살의 변상(變相)이 있는데, 머리 위에는 부처 1만 개를 둘러 앉히고, 손이 1천 개, 눈이 역시 1천 개요, 발로는 간사한 귀신과 기이한 귀신, 흉한 짐승과 독한 뱀들로 요정(妖精)으로는 변화했으나 아직 불성(佛性)을 얻지 못한 것들을 밟고 있었다. 그 앞에는 세 발 달린 큰 향로가 놓였는데 높이는 한 길 남짓 되었다. 수많은 요괴들이 와서 팔로 떠받고 다리를 버티며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는 무엇을 부르짖는 것이 마치 귀신의 자모(子母)가 유리발(琉璃鉢)을 떠받든 것과 같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극락세계(極樂世界)

 

 

새로 지은 몇백 칸 되는 큰 전각이 있는데 푸른 기와를 이었다. 방 안에는 침향(沈香)과 전단(旃檀 남방에서 나는 명향(名香))으로 오악(五嶽) 명산을 만들었으되 바위 솟은 봉우리와 깊숙한 동학(洞壑)들이 숨어 있고, 사찰과 누각이 그 위에 벌여져 있으며 비단을 오려 가화를 만들었는데, 소나무나 전나무는 모두 구리와 쇠로 잎을 만들어 붙였으며 유달리 새파랗게 뵌다. 몇 길 되는 폭포는 흰 눈을 뒤번지는 듯 거품이 일어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자아내도록 한다. 어떤 이는,

 

이건 얼음으로 새긴 거야.”

하고, 또는,

 

물결을 치솟구쳐서 이렇게 된 거야.”

하고, 떠들어대나 이는 대체로 유리를 녹여 만든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영대(瀛臺)

 

 

영대는 태액지 가에 있는데, 전각의 이름은 소화전(昭和殿)이요, 정자의 이름은 영훈정(迎薰亭)이라 하여, 모두 누런 기와로 이었다. 못가의 수목들은 모두 아름드리 고목으로 그윽하고도 깊숙하여 무지개 다리를 가렸고, 복도는 구불구불하게 숲 속으로 서로 통했다. 푸른 기와와 자줏빛 지붕은 못 복판으로 그림자가 거꾸로 박혔다. 때마침 연꽃은 갓 떨어지고 갈대가 덮인 물가 마름덩쿨 사이로는 가끔 작은 거룻배가 연방(蓮房)을 따고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남해자(南海子)

 

 

숭문문(崇文門)을 나서 남으로 20리를 가면 큰 동물원(動物園)이 있으니 남해자라 부른다. 둘레가 1 60리나 되는데, () 때 천자가 사냥하던 곳으로 명()에 이르러서는 담장으로 둘러싸고 해호(海戶)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북경의 안팎 할 것 없이 새들이 드물게 보이니, 대체로 짙은 숲이 없는 까닭이다. 남해자를 못 미쳐 몇 리를 두고 울창한 숲이 끝없이 바라다 보이는데 까치솔개해오라기황새들이 벌써 하늘을 뒤덮는다. 조 역관(趙譯官) 달동(達東)이 뒤에 따라와서 하는 말이,

 

지금 해호 마을에는 역질이 크게 번지고 있어 발 들여 놓을 수 없고, 또 해도 저물어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대홍교(大紅橋) 20리요, 대홍교로부터 안응대(按鷹臺)가 십여 리인데, 이 사이에 큰 못 세 군데가 있어 넓은 못물이 듬뿍 실려서 희맑고, 일흔두 개의 다리가 놓였으며 전각과 누대는 길가에서 보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고, 기른다는 기이한 새와 짐승들은 말을 달리지 않고서는 다 구경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곧 빨리 돌아가더라도 성문 닫는 시각까지 닿기는 어려울까 하옵니다.”

라고 하며 한사코 말렸다. 할 수 없이 서글픈 대로 수레채를 되돌렸다. 천녕사(天寧寺)와 백운관(白雲觀)을 거쳐 바삐 정양문(正陽門)에 드니 벌써 황혼이 지났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회자관(回子館)

 

 

회자관의 바깥 문은 벽돌로 쌓았는데, 제도가 기이하기 짝이 없어 천주당(天主堂)에서 보던 것과도 달랐다. 문에 들어서 겨우 걸음을 몇 자국 옮겨놓지도 않아 개 두 마리가 와락 뛰어나와 입을 벌리고 짖으며 으르렁거렸다. 깜짝 놀라 돌아서니 회회(回回) 어린이 수십 명이 손뼉을 치면서 일제히 웃는다. 문안 좌우에는 큰 기둥을 마주 세우고 몇 발 되는 쇠사슬로 기둥 아래에다 개의 목을 비끄러매어 두고는 문을 지켰다. 개가 사람을 보면 비록 와락 달려들기는 하지마는 사슬 길이가 있어 언제나 사람 앞 몇 걸음의 거리에서 멈춘다. 그러나 그 형세는 매우 사납다. 회회 여자 10여 명이 나와 보는데, 모두 남자처럼 건장했다. 볼은 붉고 광대뼈가 넓고 눈썹이 푸르고 눈은 붉었다. 그 중 한 젊은 여인이 두어 살 난 어린이를 안고 섰는데, 꽤 얼굴이 고왔다. 모두 흰옷에 숱이 좋은 머리털을 여남은 가닥으로 땋아 등 뒤에 드리웠다. 머리 위에는 흰 모자를 얹었는데, 광대들이 쓰는 뾰죽모자와 같고 옷은 우리나라 철릭[天翼]과 비슷하되 소매는 좁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유리창(琉璃廠)

 

 

유리창은 정양문 밖 남쪽 성 밑으로 가로 뻗치어 선무문(宣武門) 밖까지 이르니 곧 연수사(延壽寺)의 옛 터이다. 송 휘종(宋徽宗)이 북으로 순행할 때에 정 황후(鄭皇后)와 함께 연수사에서 묵었다. 지금은 공장이 되어 여러 가지 빛깔의 유리 기와와 벽돌을 만든다. 이 공장에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기와를 구울 때면 더구나 금기하는 것이 많아서 비록 전속 기술자라도 모두 넉 달 먹을 식량을 갖고 들어가되 한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공장 바깥은 모두 점포로서 거기에는 재화와 보물이 넘치고 있다. 서점으로서 가장 큰 데는 문수당(文粹堂)오류거(五柳居)선월루(先月樓)명성당(鳴盛堂) 등이다. 천하의 거인(擧人)과 지명의 인사들이 많이들 이 속에서 묵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채조포(綵鳥舖)

 

 

점방 안에는 온갖 새가 우는데 산장(山莊)의 창문 앞에서 봄철의 아침을 맞는 듯싶다. 모두 철사로 만든 작은 조롱으로 한 조롱에 새 한 마리 혹은 두 마리씩이 들었는데, 두 마리 든 것은 자웅이다. 새는 대체로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들이지마는 그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조롱 속에는 다들 작은 종지에 물을 넣어 두었고, 몇 줄기 조이삭을 걸어 두어 쪼아먹고 마시도록 하였다. 빈 조롱을 갖고 온 자들이 어깨를 마주 비비고들 있었다. 그때에 한림(翰林) 팽령(彭齡)이 주 거인(周擧人 이름 미상)과 함께 각기 빈 조롱을 들고 점방에 와서 새 한 쌍이 든 조롱과 바꾸어 가는데, 새는 우리나라의 속명(俗名)으로는 뱝새로서 그렇게 희귀한 것도 아닌데 값은 50냥을 내고 간다. 금계(錦鷄)는 모양이 집닭 비슷한데 볏이 없고, 멱미레에 달린 쌍 귀걸이도 없고 입부리와 목이 함께 붉고, 흰 꽁지가 두 가닥으로 그 끝은 조금 구부러졌는데, 푸른 돈 무늬가 한 점 있었다. 큰 물통에 물을 채워 두고 바깥에는 울을 두르고 위에는 그물로 덮었는데 그 속에다가 금계를 기르고 있다. 큰 쇠광주리 속에 흰 꿩을 두었는데 크기는 까치만 하고 꽁지는 금계와 같았다.

 

 

[D-001]뱝새 : ‘뱝새의 두 글자는 특히 원전에 한글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화초포(花草舖)

 

 

모두가 풀꽃들이다. 가장 많은 것이 수구(繡毬)와 가을 해당화(海棠花)와 철쭉이다. 여러 가지 꽃을 구색에 맞추어 병에 벌여 꽂은 것은 모두 사계화(四季花), 푸른 꽃병에 한 송이의 붉은 연꽃을 꽂았는데 크기가 박꽃만 하고 잎은 손바닥 같았다. 때마침 가을 국화가 한창이었는데, 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으로 학령(鶴翎)이 제일 많았다. 줄기는 그리 길지 못하고 홀로 금국(金菊)만이 가장 이색으로 꽃송이는 겨우 돈짝만큼 하나, 새로 금박칠을 해 놓은 듯했다. 수선(水仙)은 아직 피지를 못했고, 난초는 훤초(萱草)와 비슷하여 잔뜩 푸르기는 하나 맡을 만한 향기가 없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https://blog.naver.com/karamos/222588024567

 

열하일기(熱河日記) - 구외이문(口外異聞)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구외이문(口外異聞)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구외이문(口...

blog.naver.com

 

열하일기(熱河日記) - 구외이문(口外異聞)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구외이문(口外異聞)

 

1. 반양(盤羊)

2. 채요(彩鷂)호접(蝴蝶)

3. 고려주(高麗珠)

4. 숭정상신(崇禎相臣)

5. 이상아(伊桑阿)서혁덕(舒赫德)

6. 왕진묘(王振墓)

7. 조조수장(曹操水葬)

8. 위충현(魏忠賢)

9. 양귀비사(楊貴妃祠)

10. 초사(樵史)

11. 주각해(麈角解)

12. 하란록(荷蘭鹿)

13. 사답(砟答)

14. 입정승(入定僧)

15. 별단(別單)

16. 등즙교석(籐汁膠石)

17. 조라치(照羅赤)

18. 원사천자명(元史天子名)

19. 만어(蠻語)

20. 여음리(麗音離)동두등절(東頭登切)

21. 병오을묘년 원조의 일식[丙午乙卯元朝日食]

22. 육청(六廳)

23. 삼학사가 성인하던 날[三學士成人之日]

24. 당금의 명사[當今名士]

25. 명련자봉왕(明璉子封王)

26. 고아마홍(古兒馬紅)

27. 동의보감(東醫寶鑑)

28. 심의(深衣)

29. 나약국서(羅約國書)

30. 불서(佛書)

31. 황명마패(皇明馬牌)

32. 합밀왕(哈密王)

33. 서화담집(徐花潭集)

34. 장흥루판(長興鏤板)

35. 주한(周翰)주앙(朱昻)

36. 무열하(武列河)

37. 옹노후(雍奴侯)

38. (𢘿)

39. 순제묘(順濟廟)

40. 해인사(海印寺)

41. 사월팔일방등(四月八日放燈)

42. 오현비파(五絃琵琶)

43. 사자(獅子)

44. 강선루(降仙樓)

45. 이영현(李榮賢)

46. 왕월시권(王越試券)

47. 천순칠년회시 때 공원의 화재[天順七年會試貢院火]

48. 신라호(新羅戶)

49. 증고려사(證高麗史)

50. 조선모란(朝鮮牡丹)

51. 애호(艾虎)

52. 십가소(十可笑)

53. 자규(子規)

54. 경수사대장경비략(慶壽寺大藏經碑略)

55. 황량대(謊糧臺)

56. 호원이학지성(胡元理學之盛)

57. 배형(拜荊)

58. 환향하(還鄕河)

59. 계원필경(桂苑筆耕)

60. 천불사(千佛寺)

 

 

 

반양(盤羊)

반양은 사슴의 몸에 가는 꼬리가 있으며 두 뿔이 구부러졌고, 또 등에는 겹친 무늬가 있었다. 밤이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자서 다른 짐승의 침범을 예방한다. 그 모양은 마치 노새처럼 생겼으며, 더운 날씨에 떼를 지어 다니므로 티끌과 이슬이 서로 엉기어 뿔 위에 풀이 나곤 한다. 혹은 그를 영양(麢羊)이라 하고, 또는 원양(羱洋)이라 부른다. 설문(說文 () 허신(許愼) ),

 

영양은 커다란 양()에게 가는 뿔이 돋친 놈이다.”

하였고, 육전(陸佃 () 학자. 자는 농사(農師))의 비아(埤雅)에는,

 

원양은 마치 오()의 양과 같이 생겼으면서도 커다랗다.”

하였다. 이제 만수절(萬壽節)을 맞이하여 몽고에서 이를 황제께 드려서 반선(班禪)에게 공양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채요(彩鷂)호접(蝴蝶)

 

 

강희(康熙) 40(1701)에 황제가 구외(口外)에서 피서(避暑)할 제 날리달번두(喇里達番頭 번족(蕃族)의 이름) 사람이 채요(彩鷂 장끼같이 생긴 새매) 한 둥주리와 파란 날개 호접(蝴蝶) 한 쌍을 바쳤는데, 채요는 범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호접은 새를 잘 잡았다. 이 기록은 왕이상(王貽上 왕사진(王士稹). 이상은 자) 향조필기(香祖筆記)에 실려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고려주(高麗珠)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진주를 보배롭게 여겨서 고려주(高麗珠)라 부르고 있다. 빛이 희맑기가 차거(硨磲)와 같으며, 이제 모자 챙 앞뒤에 한 낱씩을 달아서 남북을 표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진주로서 무게가 8푼 이상이면 벌써 보물로 인정되었다. 황제가 가진 것은 7돈이나 되는 무게였는데, 이로써 악한 꿈을 누르는 보물로 삼았고, 황후(皇后)의 것은 6 4푼인데, 흰 가지처럼 생겼다. 건륭 30(1765)에 황후가 그 진주를 잃었을 제 회후(回后 회회(回回族) 출신의 황후)가 황후를 고자질하여 수사한 끝에 궁중 호위 군졸 집에서 나타났으므로 황후가 곧 폐출(廢黜)을 당하여 냉궁(冷宮)에 갇히었다.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 기풍액(奇豐額)이 모자 끝에 우리나라 진주를 달긴 하였으나 빛깔이 몹시 좋지 못하였다. ()는 말하기를,

 

이 진주는 두께 육칠 리(六七釐)에 값이 마흔 냥이라오.”

하기에, 나는,

 

이 진주, 토산(土産)이 아니어요. 혹시 홍합(紅蛤)을 먹다가 입 안에서 발견되는데, 이를 육주(陸珠)라 하나 너무 가늘어서 보배로울 것 없고, 부녀들의 머리꽂이와 귀이개 따위에 꾸민 것은 대체로 왜산(倭産)이며 붉은 빛깔이 제법 보배롭더군요.”

하였더니, 기 안찰(奇按察),

 

아니어요. 이건 조개 껍질을 둥글게 간 것이었고 진주는 아니라오. 귀국의 진주를 사랑함은 조개 기운이 없이 천연적으로 보배로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지요.”

하고 웃는다. 이 말이 매우 이치에 맞는 것이기는 하나 나는 알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진주가 어디에서 나며, 또 누가 캐어서 이처럼 세상에 널리 깔려 있게 되었는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숭정상신(崇禎相臣)

 

 

숭정제(崇禎帝)가 위에 오른 지 17년 사이에 상신(相臣)들의 임면(任免)이 모두 50명이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조금이라도 임금의 명령을 어긴다면 곧 그 머리를 잘라 구변(九邊)에 돌렸으니, 그때 군율(軍律)의 엄격함이 역대에 드물었으나 역시 승패(勝敗)와 존망(存亡)의 운수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고 말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상아(伊桑阿)서혁덕(舒赫德)

 

 

강희 때의 상업(相業)문장(文章)학문(學問)이 갖추어진 이를 논하면 모두 이상아(伊桑阿)를 추천하게 된다. 그는 만주 사람이었으며 강희 무진(1688)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로서 대배(大拜)하여 상위(相位)를 누린 지 열다섯 해 만에 죽으니, 나이는 여든여섯이요,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그는 예순세 살에 구양(歐陽 구양수(歐陽修))이 걸휴(乞休)하던 예를 이끌어서 서른 번이나 소장을 올렸으나, 그 사의(辭意)가 갈수록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윤허(允許)를 얻었다. 그리고 근년에 이르러 상업(相業)의 상한 이로서는 서혁덕(舒赫德)이 으뜸인데, ()는 역시 만주 사람이었으며, 상부(相府)에 있은 지 40여 년 만인 지난해에 죽으니, 나이는 여든여덟이었으며, 남들은 그를 문로공(文潞公 ()의 명신 문언박(文彦博). 노공은 봉호)에 비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왕진묘(王振墓)

 

 

지난해 곧 건륭 기해(1779)에 왕진(王振)의 무덤을 서산(西山)에서 발견하여 그 관()을 쪼개어 수죄(數罪)하면서 시신을 찢고, 그 파당들의 20여 무덤을 모두 파헤쳐 목을 잘랐었다. 명사(明史)를 상고하면,

 

임금이 토목(土木 ()의 이름)에 이르자 왕진의 수레와 짐바리가 천여 대나 되었다. 적병(敵兵)의 사면 추격을 입어 일시에 종관(從官)과 장병들이 모두 함몰되었다.”

하였으니, 왕진이 어찌 혼자서 빠졌으며, 또 당시에,

 

왕진의 한 집안을 다 베고 마순장(馬順長)을 때려 죽이고, 왕진의 조카 왕산(王山)까지 거리에서 시신을 찢었다.”

하였으니, 그 파당이 어찌 무덤이 있었으리. 그러나 천순제(天順帝 () 명종. 천순은 연호)가 복위(復位)되자 왕진의 벼슬을 돌리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은즉, 그의 무덤이 남아 있었음도 괴이함은 아니리라.

 

 

[D-001]왕진(王振) : 명 영종(明英宗) 때 환관으로서 정권을 잡아 폭정을 행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조조수장(曹操水葬)

 

 

건륭 무진(1748)에 황제가 장하(漳河)에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헤엄치는 자가 별안간 허리가 끊어져 물 위에 떠오른다. 황제가 군졸 수만 명을 풀어 그 냇물 옆을 파서 물을 돌리고 살펴보니, 물 속에는 수많은 쇠뇌에 살이 메워져 있고 그 밑에는 무덤이 있었다. 드디어 발굴하여 한 관()을 얻었는데, 은해(銀海)와 금부(金鳧) 등의 부장품(副葬品)도 있거니와 황제의 면류관(冕旒冠)과 옷차림을 갖추었으니, 곧 조조(曹操)의 시신이었다. 황제가 친히 관묘(關廟) 소열(昭烈)의 소상(塑像) 앞에 나아가 그 시신을 꿇리고 목을 잘랐었다. 이는 비단천고 신인(神人)의 분통을 씻은 것뿐만이 아니라, 쾌히 70()의 의안(疑案)을 깨쳤다.

 

 

[D-001]70() …… 깨쳤다 : 조조가 후세에 무덤이 파헤쳐질까 두려워하여 죽은 뒤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위충현(魏忠賢)

 

 

숭정(崇禎) 초년에 위충현(魏忠賢)을 봉양(鳳陽)에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籍沒)시켰다. 충현이 군졸을 거느려 몸을 옹위하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명령을 내려서 충현을 체포하였다. 충현이 면치 못할 것을 짐작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 시신을 하간(河間)에서 찢었으니 충현이 어찌 무덤이 있으리요. 강희 때 강남도 감찰어사(江南道監察御史) 장원(張瑗)이 소장을 올렸으되,

 

황제께옵서 지난해 남으로 거둥하실 제, 명령을 내려 악비(岳飛)의 무덤을 수축하시고, 또 우겸(于謙)의 비()에 글을 쓰셨사오니, 이는 실로 두 신하의 충성이 일월(日月)을 꿰뚫으며, 정의가 산하(山河)보다 장한 까닭으로 이를 표창하여 온 천하 사람에게 선전하심이 아니옵니까. 제가 칙명을 받들어 서성(西城)을 돌보고 앞으로 나아가 서산(西山)의 일대를 거쳐 향산(香山)벽운사(碧雲寺)에 이르렀답니다. 절 뒤에 높은 집과 둘린 담장이 몇 리나 덮이고, 성한 숲이 뻗쳤으며 단청이 어리었으니, 이는 곧 옛 명()의 역신(逆臣) 위충현의 무덤이었습니다. 그 위에 우뚝한 두 개의 높은 비()가 나란히 섰는데, 두 비면(碑面)에는 흠차총독 동창관기판사 장석신사 내부공용고 상선감인무 사례감병필 총독남해자 제독보화등전 완오 위공충현지묘(欽差總督東廠官旗辦事掌惜薪司內府供用庫尙膳監印務司禮監秉筆總督南海子提督保和等殿完吾魏公忠賢之墓)’라 쓰여 있었사오니, 수도가 가까운 곳에 오히려 이런 더럽고 포악한 자취가 남아 있은즉 장차 어떻게 대악(大惡)을 징계하며, 공법(公法)을 밝히겠사옵니까. 하물며 장차 칙명을 받들어 명사(明史)를 수찬(修纂)하게 되었사온즉, 무릇 명말(明末)의 화를 입은 충량(忠良)한 모든 신하를 위하여 전()을 쓰지 않을 수 없겠사옵니다. 그렇다면 밝은 하늘 햇빛 아래 어찌 간신(奸臣)의 남은 패당이 대담하게도 하늘을 모르고 법을 무시한 일을 용서하겠나이까. 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陛下)께서 지방의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그 비를 엎고 무덤을 깎게 하옵소서. 책명을 내리시면 그 고을 관원들과 함께 그 일을 치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것으로 따진다면 왕진(王振)도 의당 무덤이 있었으리라 생각되기에 이에 아울러 기록하여서, 이로써 명말(明末)에 법률 숭상이 몹시 엄격하였건만 기강(紀綱)이 이렇게 서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양귀비사(楊貴妃祠)

 

 

()이 나라를 세울 제 오로지 어진 사람을 표창하고 악한 자를 누르는 법전으로써 천하 민심을 가라앉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주(薊州) 반산(盤山)에 안녹산(安祿山)의 사당이 있음은 물론이요, 동탁(董卓 동한 때의 역신)조조(曹操)오원제(吳元濟 ()의 역신)황소(黃巢) 따위까지도 가끔 사당이 있으니, 어찌 있는 곳에서 헐어 버리지 않았을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구외(口外) 길가에 양귀비(楊貴妃)의 사당이 있는데, 안녹산의 소상(塑像)도 있다 한다. 마부들이 들어가 보니 양귀비의 상은 요염(妖艶)하기가 마치 살아 있는 듯싶고, 안녹산의 상은 뚱뚱보에다 흰 배가 드러난 채 갖은 추태가 보이더라 한다. 이러한 음사(淫祠)를 헐어 버리지 않음은 이로써 뒷사람들을 경계함이 아닐까 싶었다.

 

 

[D-001]황소(黃巢) : 당 희종(唐僖宗) 때 농민을 대표하여 폭동을 일으킨 사람.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초사(樵史)

 

 

 초사(樵史) 한 권은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명()의 황실(皇室)이 망한 연유를 기록하여 그 비분(悲憤)한 생각을 붙인 것이다. 그 중 객씨(客氏) 및 웅정필(熊廷弼 ()의 장수)을 죽인 일은 특히 이문(異聞)이 많았으며, 또 그 중에는 만력제(萬曆帝 () 신종(神宗). 만력은 연호)가 조선(朝鮮)을 구원하다가 창고가 텅 비고, 인민이 유리되었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그 순간에 한 망령된 자가 시임(時任) 상신(相臣)에게 채광(采礦)하기를 헌책(獻策)하자, 그는 흔연히 받아들였으므로 인민이 더욱 크게 곤궁하고 모두 도적으로 변하여 나라가 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말에 애절한 곳이 많아서 정사(正使)와 함께 읽으니, 눈물이 저절로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만 갈 길이 바빠서 베끼지 못하였으며, 이는 금서(禁書)이기 때문에 다만 이 등본(謄本) 한 책이 있을 뿐이라 한다.

 

 

[D-001]객씨(客氏) : 명 희종(明熹宗)의 유모(乳母)로서 위충현과 간통하여 악정을 함께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주각해(麈角解)

 

 

오직 천자(天子)만이 한 나라의 예법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황제가 월령(月令)을 고쳤으니 이를 보아서 증빙할 수 있으리라. 나의 연암초당(燕巖艸堂)에 일찍이 푸른 사슴이 와서 앞 냇물을 마시는데, 머리는 마치 물레처럼 되었기에 가만가만 가서 자세히 그 털과 뿔을 살펴보려는 차에 사슴이 크게 놀라 뛰어가 버려서 마침내 그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내 장성(長城) 밖을 나와 날마다 진공한 사슴 떼를 구경하였는데, 큰 놈은 노새처럼 생겼고, 작은 놈도 나귀처럼 되었을 따름이었다. 새문(塞門) 안에 돌아와 한 약포(藥舖)에 앉았을 제 사슴 뿔이 성기면서도 길이가 모두 네댓 자나 되는 것이 집안에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이 모두 녹용(鹿茸)이라 한다. 나는,

 

이건 모두 미용(麋茸)이요, 녹용을 좀 보여 주시오.”

하였더니, 약포 주인은,

 

()는 녹()의 큰 놈이란 말을 들은 일은 없습니까. 녹의 큰 놈이 미라면 미의 작은 놈은 녹이 될 것인즉 그 뿔이 무엇이 다르겠어요.”

하며 깔깔댄다. 나는,

 

하지(夏至)에 녹각(鹿角)이 빠지므로 역경(易經)에 있어서 구괘(姤卦 역경(易經)에 나오는 64괘의 하나)가 되는 동시에 일음(一陰)이 나므로 그것이 보음(補陰)의 제()가 되고, 동지(冬至) 미각(麋角)’이 빠지므로 역경에 있어서 복괘(復卦)가 되는 동시에 일양(一陽)이 나므로, 그것이 보양(補陽)의 제가 되는 법인즉 둘의 효과와 쓰임이 아주 다르다 하오.”

하였더니, 포주는,

 

선생은 아직 시헌서(時憲書 책력)를 보시지 못하셨나요. 벌써 월령(月令)이 고쳐졌답니다. 황제께서 일찍이 미와 녹의 뿔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으므로 온 천하에 명령을 내려 글자 중에서 녹() 변을 지닌 것으로서 뿔이 돋친 놈은 모두 사로잡아다가 해자(海子 남해자(南海子). 동산 이름) 중에 길러서 따로 갈라 놓고 서로 흘레하지 말게 하였더니, 하지(夏至)에 이르러 미()나 녹()은 모두 같은 때에 뿔이 빠지고, 동지(冬至)에 뿔이 빠지는 놈은 주() 하나뿐이므로 곧 동짓달 월령 중의 미각해(麋角解)를 주각해(麈角解)라 하였답니다.”

한다. 이로 따진다면 우리나라 관북(關北)에서 나는 녹용(鹿茸)이 반드시 녹용이라 할 수 없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녹용이 날이 갈수록 귀해지니, 어찌 이상하지 않으랴. 나는 또,

 

()라니, 그 모양이 어떠하오.”

하고 물었더니, 포주는,

 

일찍이 보진 못했습니다만 혹은 말하기를, ‘앞은 녹()인데 뒷치레는 말이라 합디다.”

한다. 대체로 월령을 고치더라도 천자의 위세(威勢)가 아니라면 온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어려운 일일 것이므로,

 

오직 천자라야 예법을 고쳐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던 것이다.

 

 

[D-001]월령(月令) : 예기(禮記)의 편명. 옛날 천자가 실시할 일을 열두 달에 배정한 일종의 연중행사표.

[D-002]() …… 큰 놈 : 맹자(孟子)양혜왕 상(梁惠王上) ()에 나오는 구절.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하란록(荷蘭鹿)

 

 

그 포주(舖主)가 또 말하기를,

 

() 중에도 극도로 작은 놈이 있더군요.”

하며, 스스로 제 주먹을 보이면서,

 

이에 불과하더군요. 일찍이 하란(荷蘭 화란(和蘭))에서 바쳐 온 녹() 한 쌍을 보았습니다만 푸른 바탕에 흰 무늬가 놓였습디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사답(砟答)

 

 

나는 또 포주에게,

 

귀포(貴舖) 중엔 희귀한 약료(藥料)가 갖추어져 있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포주가,

 

초목(草木)과 금석(金石)을 논할 것 없이 이름을 지적하신다면 곧 올려 드리렵니다.”

한다. 나는,

 

희귀한 진품(珍品)이 별안간 생각에 떠오르지 않는구려.”

하였더니, 포주가 동편 바람벽 밑 붉게 칠한 궤짝을 가리키며,

 

이 속에 사답(砟答) 하나가 있는데, 참 희귀해서 얻기 어려운 자료지요.”

한다. 나는,

 

사답이란 무슨 물건이어요.”

하고 물었더니, 포주는 웃음을 짓고 일어나면서,

 

구경하시는 것이야 관계하지 않겠죠.”

하고 궤를 열더니, 둥근 돌 하나를 끄집어낸다. 크기는 두어 되들이 바가지와 같고 모양은 흡사 거위알처럼 생겼다. 나는,

 

이건 수마석(水磨石)이 아뇨. 무슨 희롱이요.”

하였더니, 포주는,

 

어찌 감히 짐짓 오만 무례하오리까. 이건 타조의 알인데 이름지을 수 없는 괴상한 병을 치료할 수 있답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입정승(入定僧)

 

 

장성(長城) 밖 백운탑(白雲塔)의 돌 감실 속에 요() 때에 입정(入定)한 중이 있는데, 그는 육신(肉身)이 이제까지 허물어지지 않고, 약간 따사로우며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나, 다만 눈을 감은 채 기식이 없을 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별단(別單)

 

 

북경(北京) 사람 하류(下流) 중에 글자를 아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 소위 필첩식(筆帖式) 서반(序班 () 때의 하급 관리)에는 남방의 가난한 집 아들이 많았는데, 얼굴이 초라하고 야위어서 하나도 풍후한 자가 없었으며, 비록 봉급을 받기는 하나 극히 적어서 만리 객지에서 생계가 쓸쓸하고, 가난하고 군색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었다. 우리 사행이 갈 때면 서책이나 필묵의 매매는 모두 서반패가 이를 주장하여 그 사이에서 장쾌[駔儈]의 노릇을 하여 그 남은 이문을 먹었다. 그리고 역관들이 그 사이의 비밀을 알려고 들면, 반드시 서반을 통해야 하므로 이들이 크게 거짓말을 퍼뜨리되, 일부러 신기하게 꾸며서 모두 괴괴망측하여 역관들의 남은 돈을 골려 먹는다. 시정(時政)을 물으면 아름다운 업적은 숨기고 나쁜 것들만을 꾸며서 천재(天災)와 시변(時變)과 인요(人妖)와 물괴(物怪) 따위에도 역대에 없던 일을 모았으며, 심지어 변새의 침략과 백성들의 원망에 이르기까지 한때 소란한 형상의 표현이 극도에 달하여, 마치 나라 망하는 재화가 조석에 박두한 듯이 장황하게 과장 기록하여 역관에게 주면, 역관은 이것을 사신에게 바친다. 서장관이 이를 정리하여, 듣고 본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사실이라 하여 별단(정식이 아닌 별지의 예단(禮單))에 써서 임금께 아뢴다. 그 거짓이 이러하였으며 임금께 아뢰는 말씀이 얼마나 근엄한 일이기에, 어찌 함부로 돈만 허비하여 허황하고 맹랑한 말들을 사서 반명(反命)의 자료를 삼으랴. 사신이 자주 드나든 지 백 년이 되도록 겨우 이러하였을 뿐이었다. 가장 염려되는 일은 이 따위 문서가 불행히 유실된 채 저들에게 끼쳐진다면 그 피해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번 열하(熱河)에 오가는 일로 말한다면 모두 목격(目擊)한 일이어서 가장 사실적인 기록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먼저 보내 드린 장계(狀啓) 끝에 붙여 아뢴 한두 가지의 사건(事件)에는 시휘(時諱)에 저촉될 만한 것이 없지 않은즉,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는 줄곧 걱정으로 날을 보내곤 하였다. 내 생각에는 저들의 정세에 대해서 허실(虛實)을 논할 것 없이, 장계 끝에 붙여 아뢰는 글은 모두 언서(諺書)로 써서 장계가 도착되는 대로 정원(政院)에서 다시 번역하여 올림이 좋을 듯싶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등즙교석(籐汁膠石)

 

 

왕삼빈(王三賓)의 말에 의하면,

 

( 운남성의 별칭)( 귀주성의 별칭) 지방에 깨어진 돌을 붙이는 대나무가 있는데, ‘양도등(羊桃籐)’이라 하며 그 즙()을 내어 돌을 붙여서 공중에 걸쳐 다리를 놓는다. 그러면 비록 수십 길이라도 한 번 이어지면 끊어지지 않고, 마치 종이에 풀칠하고 널판에 아교칠한 것 같아서 검주(黔州) 사람들은 이를 점석교(黏石膠)’라 부른다.”

한다. 그 말이 몹시 황당하긴 하나 우선 그대로 기록하여 다른 이의 참고로 삼으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조라치(照羅赤)

 

 

번역된 몽고(蒙古) 말 중에 필자치(必闍赤)는 서생(書生)이요, 팔합식(八合識)은 사부(師傅)를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삼청(三廳) 하인(下人) 조라치(照羅赤)’라 하니, 아마 고려(高麗) 때의 옛 말인 듯싶다. 그때는 외올(畏兀)의 말을 많이 배웠은즉, 조라치도 역시 몽고 말이리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원사천자명(元史天子名)

 

 

원사(元史)를 읽어보면 천자의 호와 이름부터 몹시 이상하여 늘 읽기 어려움이 딱하였다. 구외(口外)에 원 나라 때 세운 황폐한 절 하나가 있어서 허리가 잘린 빗돌에 원 나라 모든 임금의 공덕을 빠짐없이 새겼는데, 성길사(成吉思)라 한 것은 태조(太祖), 와활태(窩濶台)는 태종(太宗)이요, 설선(薛禪)은 세조(世祖), 완택(完澤)은 성종(成宗)이요, 곡률(曲律)은 무종(武宗)이요, 보안독(普顔篤)은 인종(仁宗)이요, 격견(格堅)은 영종(英宗)이요, 홀도독(忽都篤)은 명종(明宗)이요, 역련진반(亦憐眞班)은 중종(中宗)을 말함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어(蠻語)

 

 

만어(蠻語) 중에 애막리(愛莫離)는 중국말의 유숙연(有宿緣)이요, 낙물혼(落勿渾)은 중국말의 몰염치(沒廉恥), 예락하(曳落河)란 만주말의 장사(壯士)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여음리(麗音離)동두등절(東頭登切)

 

 

역졸(驛卒)이나 구종군 따위가 배운 중국말은 그릇됨이 많았다. 그들의 말은 저희도 모르는 채 그대로 쓰고 있다. 냄새가 몹시 악한 것을 고린내[高麗臭]’라 한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으므로 발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쁜 까닭이다. 그리고 물건을 잃고는 뚱이[東夷]’라 한다. 이는 동이가 훔쳐 갔다는 말이다. 그러면 려()의 음은 리(), () 터우떵[頭登]’의 절음(切音)임에 불과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 채 나쁜 냄새가 나면,

 

아이, 고린내.”

하고,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될 때에는,

 

아무개가 뚱이[東夷]’.”

한다. 그리하여 뚱이는 곧 물건을 훔쳤다는 별명인 양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병오을묘년 원조의 일식[丙午乙卯元朝日食]

 

 

황제가 등극하는 날에 향안(香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하느님께 감사하였다. 그날 밤 꿈에 옥황(玉皇)께서 황제에게 백년 장수(長壽)를 점지한다 하였다. 황제는 다시금 향안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기를,

 

저는 오는 을묘년(1795)에 이르러서 이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러하오면 저의 통치하는 햇수가 황조(皇祖 강희 황제)보다 한 해가 적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한다. 올해에 흠천감(欽天監 기상대(氣象臺)의 장())이 여쭈기를,

 

이 뒤 6년 만인 병오년(1786) 원조(元朝)에 일식(日蝕)이 있고,  10년 만인 을묘년 원조에도 역시 일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므로, 황제는 계획을 변경하여,

 

만일 을묘년에 선위(禪位)한다면 새 천자 원년(元年)에 마침내 일식을 맞이할테니, 원조의 조하(朝賀)는 그로 하여금 정지하게 될 것이다.”

한다. 이것은 송 고종(宋高宗)이 명색으로 선위를 선언하였으나, 그 실은 금 나라 사람과 맞서지 않으려는 의도에 다름없는 일이다. 황제는 또 그 뒤를 이어서,

 

만일 을묘년을 지나면 짐이 통치하는 햇수가 황조보다 도리어 두 해가 많을 테니, 이는 미안한 일이다.”

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극히 요망한 말이어서 반드시 황제의 말이 아니리라 생각된다.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등극한 지가 오래되면 사방에서 다투어 상서로운 물건을 바침은 물론이요, 모든 신하들이 뜻을 엿보아 경축을 꾸미자니 저절로 지나친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마는, 그렇다 해서 어찌 오늘 미리 미래에 일식할 것을 점쳐서 그 선위할 해를 앞당겼다 물렸다 할 수 있으리요. 이는 반드시 천하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한낱 옛 성인(聖人)의 꿈일을 빌려서 황제의 옳지 못한 점을 덮어 버리는 일이리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육청(六廳)

 

 

열하태학(太學)의 대성문(大成門) 밖 동쪽 바람벽 속에 건륭(乾隆) 43(1778)에 내린 글을 모셔 놓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수도 동북 4백 리에 열하가 있다. 그 지점은 고북구(古北口) 북녘에 있는데, 곧 우공(禹貢) 기주(冀州)의 변두리였으며, ()()() 때의 유주(幽州) 지경이다. ()() 이후엔 판도(版圖)에 들지 않았고, 원위(元魏) 때엔 안주(安州)영주(營洲) 두 고을을 세웠고, ()에서는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를 두었으나, 불과 잠깐 기관(機關)을 내지(內地)에 두었을 뿐이요, ()()과 원()에 이르러서는 시향(始薌)이라 하였으나, 옛 땅은 곧 황폐하게 되었고, ()에선 대령(大寧)을 버려서 이역(異域)으로 보았었다. 앞서 승덕주(承德州)를 세웠으니, 이제 의당 이를 부()로 승격시켜 다시금 시설을 더하고, 그 나머지 육청(六廳)도 객랄하둔청(喀喇河屯廳)은 난평현(灤平縣)으로, 사기(四旗)는 풍녕현(豐寧縣)으로 고치고, 팔구청(八溝廳)은 그 땅이 비교적 넓으므로 평천주(平泉州)를 만들고, 오란합달청(烏蘭哈達廳)은 적봉현(赤峰縣)으로, 탑자구청(塔子溝廳)은 건창현(建昌縣)으로, 삼좌탑청(三座塔廳)은 조양현(朝陽縣)으로 각기 고쳐서 아울러 승덕부(承德府)에 통할하게 하라.”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삼학사가 성인하던 날[三學士成人之日]

 

 

미관첨사(彌串僉使) 장초(張超)의 일기(日記) 중에,

 

오 학사(吳學士) 달제(達濟)와 윤 학사(尹學士) ()이 정축년(1637) 4 19일에 피살되었다.”

하였으므로, 그 양가(兩家)가 일기를 빙거하여 19일에 제사를 올리었다. 정축은 곧 명()의 숭정(崇禎) 10년이었으며, 두 학사가 살해를 당한 때는 청인(淸人)들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였다. 그리고 홍 학사(洪學士) 익한(翼漢)에 대한 일은 그 일기(日記) 중에 실리지 않았으니, 그 성인(成仁)한 날이 명확히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므로 역시 두 학사와 같이 19일에 제사를 올리었다. 이제 청인이 엮은 청 태종 문황제(淸太宗文皇帝)의 사적 중에,

 

숭덕(崇德) 2(1637) 3월 갑진(甲辰)에 조선(朝鮮)의 신하 홍익한(洪翼漢) 등을 죽여서 두 나라의 맹세를 깨뜨리고, 군사를 일으켰으며 물의를 빚어내어 명 나라를 우단(右袒)한 죄를 밝혔다.”

하였으니, 숭덕은 곧 청 태종의 연호(年號)였으며 3월 갑진은 일간(日干)을 따져 보면 초엿새에 해당되고, 그 중의 등()이란 글자가 있음을 보아서 오()() 두 학사의 죽음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인 3월 초엿새리라 생각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당금의 명사[當今名士]

 

 

당세 해내(海內)의 명사(名士)로서는 양국치(梁國治)팽원서(彭元瑞)와 기균(紀勻)의 호 효람(曉嵐)과 오성흠(吳聖欽) 또는 대구형(戴衢亨) 및 그의 형 심형(心亨) 등은 모두 오() 땅의 사람이었고, 축덕린(祝德麟)이조원(李調元) 등은 촉()의 면죽(綿竹) 사람이다. 내게 대심형이 쓴 주련(柱聯) 한 쌍이 있다. ‘개질군언수기아(開帙群言守其雅), 무금육기위지청(撫琴六氣爲之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명련자봉왕(明璉子封王)

 

 

인조(仁祖) 갑자년(1624)에 귀성 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이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과 함께 반()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왔다가 군사가 패하자, 모두 달아나다가 사로잡혀 죽게 되었는데, 명련(明璉)의 두 아들 윤()()은 눈 위에 짚신을 거꾸로 신고, 도망하여 건주(建州)에 들어가 장군이 되었다. 그 뒤 13년에 청 태종(淸太宗)을 따라 동쪽으로 왔다 한다. 이는 당시의 전설(傳說)에서 나왔으므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새로 간행된 태종실록(太宗實錄)을 보니, 과연,

 

조선(朝鮮) 장수 한명련이 그 부하에게 피살당하였으므로, 그 아들 윤()과 의()가 와서 항복하기에, ()를 봉하여 이친왕(怡親王)을 삼았다.”

는 기록이 있으니, 이는 아마 난()이 이름을 의()라 고친 듯싶다. 소대총서(昭代叢書 () 장조(張潮) )중 시호록(諡號錄)에 의당 그의 이름이 실려 있을 테니, 뒷날에 상고해 보기로 하겠다. 아아, 슬프도다. 우리 조선이 나라 세운 지 4백 년 동안 역적으로 죽음을 당한 자가 없지 않았으나, 이 두 역적처럼 군사를 일으켜 대궐 안을 범한 자는 없었던 것이거늘, 그 흉특한 놈이 뒤에 투항하여 장수가 되자, 군사를 빌려서 멋대로 날뜀이 이에 이르렀을 뿐더러 당시 건주 일대는 망명(亡命)으로 모여드는 숲이 이룩되었으니, 평소부터 족히 변문(邊門)의 경비가 엄하지 못하였던 것과 압록강 연변 수어가 허술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고, 또 억센 이웃 나라가 얕보고 업신여기는데, 그 앞에서 일하는 장수의 성명조차 무엇인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인재와 용맹과 슬기 등이 나온 곳일까보냐. 이러고서도 한갓 헛된 말로서만 큰 대적을 꺾으려 하며, 한손으로 대의(大義)를 붙들려고 하니, 아아, 어려운 일이 아니겠느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고아마홍(古兒馬紅)

 

 

고아마홍이라는 자는 곧 의주(義州) 관노(官奴) 정명수(鄭命壽)이며, 강공렬(姜功烈)이라는 자는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이름이다. 그들은 모두 이름을 고치고 뒤에 귀화하였는데, 명수(命壽)는 가장 흉악하여 제 부모의 나라를 모욕함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이 분개를 이기지 못하고 명수를 찔러 죽이려 하던 나머지 그 원리(院吏) 강효원(姜孝元)과 의논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명수의 모든 간리(姦利)에 관한 일을 청인(淸人)에게 고발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도리어 글월 올린 자를 베고 정뇌경과 강효원도 사형에 처할 제, 명수로 하여금 형장을 감독하게 하여 극히 참혹하였다. 그 뒤 청인 역시 명수가 우리나라에 죄가 컸음을 깨닫고 참하였다. 강홍립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어서 심하(深河) 싸움 뒤에 항복하였더니,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그의 온 가족이 도륙되었다는 헛된 소문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도로 군사를 이끌고 평산(平山)까지 이르렀으므로,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홍립의 가족을 군문 앞에 내세웠다. 그의 숙부 진()이 홍립의 잘못을 꾸지람하매 홍립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청인도 역시 홍립의 거짓을 깨닫고, 강화(講和)한 뒤에 가버릴 제 홍립을 머무르게 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처리를 맡겼으나, 조정에서는 청인의 강함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였다. 홍립이 그의 양화도(楊花渡)에 있는 강정(江亭)에 몸을 붙였으나, 나라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서 방안을 나가지 않고, 다만 길게 한숨을 쉬는 소리만 밖으로 들렸다. 그 후 5,6년 뒤에 그 집 사람이 목매어 죽였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의보감(東醫寶鑑)

 

 

우리나라 서적(書籍)으로서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 극히 드물었고, 다만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이 성행(盛行)하였을 뿐이었는데 판본이 정묘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의술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토산 약품이 옳지 못하였으므로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태의(太醫) 허준(許浚)과 유의(儒醫) 정고옥(鄭古玉 고옥은 정작의 호) ()과 의관(醫官) 양예수(楊禮壽)김응택(金應澤)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국()을 차리고 이를 편찬할 제, 내부(內府)의 의방(醫方) 5백 권을 내어 고증의 자료로 삼아서 선조 병신(1596)에 시작하여 광해군 3년 경술(1610)에 이룩하였으니, 때는 곧 만력(萬曆) 38년이다. 그 간본(刊本) 서문(序文)의 문장이 제법 소창(疎暢)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 동의보감은 곧 옛 명() 때 조선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엮은 것이다. 상고하건대 조선 사람들은 애초부터 문자(文字)를 알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는 또 그 중의 세족(世族)이어서 만력 때 봉( 조선 때의 문학가. 자는 미숙(美叔))( 자는 공언(功彦))( 자는 단보(端甫)) 등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날렸으며, 그의 누이 동생 경번(景樊 허초희(許楚姬)의 자)의 재명(才名)이 더욱 그의 오빠들보다 뛰어났으니, 구변(九邊)의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걸출한 자였던 것이다.  동의(東醫)’라는 말은 무엇일까. 그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의원에서도 동()이라 일컫는 것이었다. 옛날 이동원(李東垣 ()의 의학자 이고(李杲). 동원은 호) 십서(十書)를 지었고, 북의(北醫)로서 강()()에 행세하였으며, 주단계(朱丹溪 ()의 의학자 주진형(朱震亨). 단계는 호) 심법(心法)을 지었고, 남의(南醫)로서 관중(關中)에 나타났더니, 이제 양평군이 비록 궁벽한 외국에 태어났으나, 능히 아름다운 책을 지어서 중국에 유행되었으니, 대체로 말이란 족히 전할 것을 기약하는 것이지, 어떤 지역으로써 한계를 지을 것은 아니리라.  보감(寶鑑)’이란 무엇을 이름일까. 햇빛이 새어나오고 잠든 안개가 풀리듯이 살을 나누며, 갈피를 쪼개어,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들추게 하면 요연히 거울처럼 광명함을 말함이었다. 옛날 나익지(羅益之 ()의 의학자 나천익(羅天益). 익지는 자)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 미상)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었을 때 모두 ()’이라 이름하였으나, 지나치게 과장하였다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적이 논하건대 사람에게는 오직 오장(五藏)이 있을 뿐이요, 병은 칠정(七情)에 그치는 것이다. 그 사이 천품이 편벽되고, 온전하고, 점염(漸染)함이 얕고 깊음과, 증세의 통하고 막힘에 차이가 있어서 양후(兩候 1후는 5일간) 간의 맥박이 움직이면 부()()() 등의 세 부()가 있으므로, 가만히 살펴보면 마치 저 밭이랑처럼 한계가 있으니, 넘을 수도 없거니와 횃불처럼 밝아서 덮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대황(大黃 한약의 일종)이 체한 것을 내려가게 하는 줄만 알고서 속을 식히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함을 돕는 줄만 알고, 독을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병이 나기 전에 다스리고 이미 이룩된 뒤에 약을 쓰지 않는 법이니, 병이 난 뒤에 다스림은 가장 하책(下策)임에도 다시금 용렬한 의원에게 맡긴다면 어찌 낫기를 바라리요. 심지어 사리(私利)를 품은 자는 애초에 병 없는 사람을 다스려 공적을 남기려 하고, 처음 이에 종사한 자는 병자를 이용하여 공부하려 함이 일쑤인즉, 역경(易經)중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사(占辭), 남쪽 사람은 항심(恒心)이 없다.’(논어에 나오는 구절)는 경계가 마치 이런 무리를 위하여 어떤 덮개를 떼버리는 듯싶었다. 옛날 편작(扁鵲 전국 때의 의학자)이 이르기를, ‘사람들은 병자가 많음을 걱정함에 비하여 의원은 병 보는 방도가 적음을 골치앓는다.’ 하였으나, ( 황제(黃帝)의 별칭. 헌원(軒轅))() 이후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있어서 이제 이르러서는 그 저술의 번다함이 거의 한우충동(汗牛充棟)할 만큼 적음을 걱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방문을 써서 맞고 안 맞는 것이 있으니, 어찌하여 옛 사람이 각기 본 바로 학설(學說)을 끼친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선택하는 데 정밀하지 못한 자는 설명이 상세하지 못하고, 하나에 집착된 자는 옳은 길을 해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남의 병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마음을 고쳐주지 않았다든지, 또는 남의 마음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뜻을 통하지 못한 까닭이리라 생각된다. 이제 이 책을 살펴 보면 첫째 내경(內景)을 논하였음은 그 근원을 따름이요, 다음에 외형(外形)을 논한 것은 그 끝을 나눔이었고, 다음에 잡병(雜病)을 논한 것은 그 증세를 분간함이었고, 다음에 탕약과 뜸질로써 마친 것은 그 방법을 정함이었다. 그 중에서 인용한 책으로 말한다면, 천원옥책(天元玉冊 저자 미상)으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 저자 미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80여 종이나 되는데, 모두가 우리 중국의 책들이었고, 동국(東國)의 책은 불과 3종뿐이었다. 옛 사람이 이룩한 방법을 따르면서 능히 신통하게 밝혀낸 것이 있어서 우주(宇宙) 사이의 결함을 보충하고 4( 바람)에 양기(陽氣)를 베풀었었다. 이 책은 이미 황제께 올려서 국수(國手)임이 인정되었으나, 다만 여태까지 비각(秘閣)에 간직되어 세상 사람이 엿보기 어려웠었다. 얼마 전에 차사(鹺使 염운사(鹽運使)의 별칭) 산좌(山左) 왕공(王公 미상)이 월( 광동광서운남귀주의 총칭)을 맡았을 제, 시속의 의원이 그릇됨이 많음을 딱하게 여겨 사람을 수도에 보내어 이를 베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한 채 곧 그곳을 떠나 버리고, 순덕(順德)에 살고 있는 명경(明經)좌군(左君)한문(翰文)은 나의 총각 때부터의 친구였는데, 개연(慨然)히 이를 간행하여 널리 전하기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3백 민()이 넘는 돈을 소비하였으나 조금도 아끼는 빛이 없었다. 대체로 그 마음은 병든 생명을 건지고 물건을 이롭게 할 마음이었고, 그 일인즉 음양(陰陽)을 조화하는 일인 동시에 천하의 보배는 의당 천하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니, 좌군의 어진 마음이 크도다. 판각이 끝난 뒤에 나에게 서()를 부탁하므로 드디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그 머리에 쓴다. 건륭(乾隆) 31년 병술(1766) 난추(蘭秋 7월의 별칭) 상완(上浣 상순)에 원임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 충경오임신계유병자사과 호광향시동고관(原任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充庚午壬申癸酉丙子四科湖廣鄕試同考官)번우(番禺 지명) 능어(凌魚 ()의 학자. 자는 서파(西波))는 쓰노라.”

하였다. 내 집에는 좋은 의서가 없어서 매양 병이 나면 사방 이웃에 돌아다니며 빌려 보았더니, 이제 이 책을 보고서 몹시 사 갖고자 하였으나, 은 닷 냥을 낼 길이 없어서 섭섭함을 이기지 못한 채 돌아올 제, 다만 능어가 쓴 서문(序文)만을 베껴서 뒷날의 참고에 자()하려 한다.

 

 

[D-001]칠정(七情) : ()()()()()()().

[D-002]() : 황제의 신하 기백(岐伯). 황제와 함께 중국 의학계의 시조.

[D-003]내경(內景) : 내과(內科) 계통. 원래에는 도가(道家)의 용어(用語).

[D-004]명경(明經) : 국가 고시에 경서(經書)로써 합격한 자. ()에서는 공생(貢生)을 명경이라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심의(深衣)

 

 

우리나라의 심의(深衣)는 반드시 삼베로 만들고 무명으로 하지 않으니 이는 그릇된 일이다. 삼으로 짠 것은 의당 마포(麻布)라 하여야 하며, 모시로 짰다면 저포(苧布), 무명으로 짰다면 면포(綿布)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방언(方言)에 포()를 베[] 보외(補外)의 번역이다. 라 하므로 포() 자를 보포(保布)라고 읽는다. 다만 삼만을 짜는 이를 오로지 베라 한다. 그리하여 마포(麻布) 저자는 베전이요, 저포(苧布) 저자는 모시전이라 부르나, 다만 면포(綿布)에 대해서 구별 지을 것이 없었다. 방언에 면화(綿花)를 목화(木花)라 하므로 무명베를 목()이라 하나, 그들은 면포가 곧 대포(大布)임을 알지 못하므로 면포를 대포라 부르지 않고도 그 저자를 백목전(白木廛)이라 하였으며, 심지어 두 가지의 세금(稅金)을 대포에 부과하면서 전세목(田稅木)대동목(大同木)이라 하고, 대포는 곧 이와 별개의 물건으로 간주하여 전세목이니 대동목이니 하는 이름이 관가의 문부(文簿)에까지 올려져 온 나라가 쓰고 있었다. 어째서 대포라 부르느냐 하면, 옛날 순수하게 흰 옷에는 포백(布帛)의 무늬가 알맞는다 하였으니 무명은 모든 직물(織物)에서의 바탕인 동시에 오채(五采)의 찬란한 빛을 꾸미기는 어려우나, 그 바탕이 검소하고 빛이 순수하여 무늬 아닌 무늬가 있으므로,

 

대포(大布)의 옷(좌전(左傳)에 나오는 구절).”

이라는 말이 곧 이를 이름이었고, ,

 

완전하고도 아무런 허비가 없음이 선의(善衣)의 감이다(출처 미상).”

하였으니, 완전하고도 허비가 없다는 말은 무명베를 이름이었고, 대포의 옷이란 곧 심의(深衣)를 이름이다. 중국의 삼승(三升) 베는 양털에다 무명을 섞어 함께 베를 짠 것이었는데, 우리나라 장사치들이 삼승을 도매로 떼어다 파는 곳을 유독 청포전(靑布廛)’이라 하고, 아울러 대포를 팔면서 그를 큰 베[大保]’라 하고, 또는 문삼승(門三升)’이라 하여 값을 배로 받았으나, 백목전에서 이를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이름과 실지를 규명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중국의 상복(喪服)은 모두 면포로 한다. 이번에 길에서 만났던 상복을 입은 사람들은 마포 옷이란 하나도 볼 수 없었고, 두건도 역시 면포로 하였다. 때가 바로 한여름 철이라 땀과 기름이 흠뻑 젖어서 두건이 저절로 꺾여졌다. 내가 입고 있는 면포 겹옷을 중국 사람들은 뒤적거려 보고는 올 짜인 것이 매우 정밀함을 진지하게 여겨, 감으로 사기를 요구하는 이가 많았다. 나는,

 

중국엔 어째서 가는 베가 없는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모두 탄식하면서,

 

중국은 대체로 여러 가지의 비단을 입어서 대포(大布)로 옷을 지어 입기를 부끄러워하고 보니, 옛날 성인이 만든 원대하고도 경제적인 제도를 버려 두고 연구도 않은 지가 오래랍니다. 그러므로 비록 포대나 전대를 만들 때는 베를 짜기는 하나, 굵고 거칠어서 이것으로는 선의(善衣)의 감이 될 수 없답니다.”

한다. 나는,

 

선의란 어떤 옷인지요.”

하였더니, 그는,

 

선의란 좋은 옷입니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들 상상품 좋은 옷 한 벌씩은 가지고 있어 무늬로써 귀천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심의란 것은 귀천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고, 길흉의 구별도 없이 꼭 같은 복장입니다. 이를 대포로써 만드는 것은 그 검소함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좋은 옷감이 아니겠습니까.”

한다. 우리나라 유가(儒家)에서는 더욱이 심의를 중난히 여겨 그림을 그린다, 말로 설명을 한다 하여 서로 부산하게 다투기도 한다. 소매와 깃 따위를 두고 내가 옳다거니, 네가 그르다거니, 한 치 한 푼을 서로 고집하고 있지마는 면포와 마포 중에서 무엇이 심의의 옷감인지도 모르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닐까보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나약국서(羅約國書)

 

 

 

건륭(乾隆) 44(1779) 12월에 나약국(羅約國) 가달(假㺚)은 황제 폐하(陛下)께 글을 올립니다. ()이 듣자오니 삼황(三皇)이 처음 나오고 오제(五帝)가 뒤를 이어 하늘을 대신하여 억조 창생 위에 군림할 제 하필, ‘중국에만 임금이 있으라.’ 하고, ‘오랑캐에게는 임금이 없으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넓고 커서 한 사람이 혼자 주재할 바 못 될 것이요, 우주는 광대하여 한 사람의 독차지할 바가 못 됩니다. 천하는 곧 천하 인민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나약 지방에 있어 도시들이란 불과 몇 백 리요, 강토는 3천 리를 넘지 못합니다마는 언제나 이를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로 말하자면 중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만승의 주인이 되어 도성들이 몇 천 리요, 강토가 몇 만 리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족하다는 욕심을 가지고 매양 남의 강토를 병탄할 뜻을 가지니, 하늘이 살기(殺氣)를 내면, 귀신이 울부짖는 법이요, 땅이 살기를 내면 용과 범이 달아나 숨는 법이요, 사람이 살기를 내면 천지가 뒤집혀지는 법입니다. ()와 순()은 도덕이 있으매 온 세상이 조공을 바쳤고, ()와 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니, 만국이 손을 잡고 섬기게 되었다 합니다. 또 진 시황(秦始皇)은 자주 흉노(匈奴)를 정벌하다가 그의 몸뚱이가 썩은 고기가 되었고, 거란은 중원 땅을 한 번 유린하다가 몸이 소금에 절인 제파(帝豝)가 되고 말았다 합니다. 덕은 쌓은즉 저와 같고, 악의 결과는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길흉과 화복은 뿌리와 가지가 서로 맞닿는 것과 같고, 그 믿음직함은 춘동이 제때에 닥침과 같고, 그 힘은 뇌성벽력과 같으니, 어찌 조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치에 순응하는 자라 해서 반드시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며, 역행하는 자라 해서 반드시 멸망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치가 상도에 벗어남이요, 천도가 뒤틀려 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홀로 무슨 마음으로 순천부(順天府 북경의 별칭)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을 것입니까. 비록 폐하가 친히 육사(六師 친위군(親衛軍))의 정예를 인솔하고 초원과 사막 지대에 왕래하다가 우리를 하란산(賀蘭山 감숙성에 있다) 기슭에서 행여 만난다 하더라도, 채찍을 들고 서로 문안을 하고, 말 위에서 천하를 의논할 것입니다. 이때에는 바로 구름 사막 만리 길에 범과 용이 자웅을 겨루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전쟁이란 두 편이 다 이기는 법이 있을 수 없고, 복이란 쌍방에 한꺼번에 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전쟁을 중지하여, 생령들의 질고를 풀고 군사들의 가난을 늦추어 줌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마땅히 해마다 조공을 바쳐서 대대로 신하라 일컫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약국에도 문학으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같은 성현의 경술(經術)이 있고, 무략으로는 강태공(姜太公 명망(命望). 태공은 시호)과 손자(孫子 손무(孫武)) 같은 이의 육도(六韜 여망 저)》ㆍ《삼략(三略 황석공이 지은 병서(兵書))이 있는 이상 어찌 중국에 머리를 숙여 많은 양보를 하여야겠습니까.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익히 살펴주옵소서. 이에 대신 다리마(多里馬)를 보내어 폐하께서 계신 대궐에 배알하여 삼가 충심을 보이옵는 바,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덮고 감격한 눈물은 땅에 사무치옵니다.”

조 역관(趙譯官) 달동(達東)이 별단(別單)을 꾸미려다가 이 글을 서반(序班)으로부터 얻어 밤에 나에게 보였다. 서장관(書狀官) 역시 와서 이르기를,

 

아까 나약국서를 보셨는지요. 세상일이 크게 야단났습니다.”

한다. 나는,

 

세상일이란 원래 그런 것이오. 그러나 세상에는 애초에 나약국이란 없는 것인가 하오. 내가 20년 전에 일찍이 별단 중에서 이 같은 문서를 보았는데, 역시 황극달자(黃極㺚子)는 부질없이 쓴다라고 했습니다. 선배들과 함께 둘러앉아 한 번 읽은 뒤 매우 북방을 우려한 적이 있었죠. 더러는, ()의 정권을 대신할 자는 황극이라고 말하는 이도 없지 않았죠. 이제 이 글을 본즉, 가감 없이 그것과 비슷하오. 서반배들이라는 게 모두 강남(江南) 빈민들의 자식으로서 객지에서 몸 붙일 곳이 없어 이 따위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날조하여 우리 역관들에게 공비(公費) 돈을 받고 속여 파는 것이오. 별단에는 비록 보고 들은 사건을 싣게 하긴 하지만 대체로 모두 길목에서 들은 이야기들이었으니, 어째서 이 신빙할 수 없는 허탄한 소리를 사행 때마다 돈을 주고 사서는 막중한 어전에 여쭙는 자료로 삼는단 말이요. 내 의견으로는 별단 중에 적당하게 짐작하여 취사를 함이 좋겠어요.”

하였더니, 서장관 역시 꼭 그러하여야 할 것을 깊이 납득하였다. 그러나 조 역관은 이에 대하여 퍽 변명하려고 애쓰는 모양이기에, 나는 그에게,

 

그대는 나이 젊어 사리를 잘 모르네.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들은 건성으로 춘추(春秋)만 떠들어서 왕()을 높이며 오랑캐를 물리치려는 공담(空談)을 해 온 지 1백여 년에 중국 인사들인들 어찌 이런 마음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연갱요(年羹堯)사사정(査嗣庭)증정(曾靜) 같은 따위들이 상서스러운 일을 보고는 재앙이라 하고, 좋은 정치 실적을 악정이라고 무함하여 온 세상을 선동하고, 문자로 베껴 전파시켜 마치 위급한 형세가 조석에 박두한 듯이 한 것이지. 그리하면 우리 역관들은 허탄한 소리에 속아 넘어가 저절로 바보 놀음을 하네. 그리고 삼사(三使)는 오랫동안을 깊숙한 여관 속에 앉아 소일할 꺼리가 없어서 울적할 즈음에, 걸핏하면 자네들을 불러 새로운 소문을 물을 때에 길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로써 답답한 가슴을 풀곤 했지. 그러면 사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수염을 추어올리고 부채를 치면서, 오랑캐놈들이 백년 운수가 있으랴 하고는 바로 강개하게 강 복판에서 노()를 치던(조적(祖狄)의 고사)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일세. 더구나 먼저 보내는 군관이 밤낮 없이 질주를 할 때는 절반은 말 등 위에서 잠과 꿈으로 지내는 형편이니, 혹시 문서를 저들 국경 안에서 떨어뜨린다면 닥쳐올 재변을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 서장관은 크게 한바탕 웃었으나 일변 놀라면서 조 역관에게 무어라 경계(警戒)하는 모양이다. 그 뒤 추리고 남긴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D-001]제파(帝豝) : ()의 임금 야율덕광(耶律德光)이 죽었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시체의 배에 소금을 잔뜩 넣은 뒤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제파라 불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불서(佛書)

 

 

불교의 서적이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불과 42()으로서 그 뒤 불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태반이 위()() 시대의 문인들의 손으로 지어낸 것이다. 이런 사업이 요진(姚秦) 때 성행하였고, 소량(蕭梁) 때 극성하였으며 당()에 이르러서 완전히 갖추어져 거의 유가(儒家)의 전적들과 상당하였다. 대체로 상고 이래로 이미 이런 학문이 있어서 황제(黃帝)광성자(廣成子 황제(黃帝)의 스승)남곽자기(南郭子綦 남화경에 나오는 도사(道士))묘고야산인(藐姑射山人남화경에 나오는 도사(道士))허유(許由)소부(巢父)변수(卞隨)무광(務光)장저(長沮 논어에 나오는 은사)걸익(桀溺논어에 나오는 은사) 등은 일찍이 그들을 가리켜 부처라 한 자도 없거니와 또 그들은 일찍이 아무런 저서가 없었으므로 후세에 와서 불교가 외국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만 알고 중국에서 먼저 이런 도가 있었다는 일을 똑똑히 모르고들 있다. 공자(孔子)는 이르기를,

 

우리 도는 하나로 꿰뚫는 거야(논어에 나오는 구절).”

하였고, 노자(老子),

 

성인은 하나를 껴안는 거야(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구절).”

하였는데, 불씨(佛氏),

 

만 가지의 법()이 하나로 귀착되는 거요(불경(佛經)에 나오는 구절).”

하였으니, 그의 이른바 만 가지의 법이 하나로 귀착한다는 말은 곧 우리 유가(儒家)의 이치는 하나이나 만 가지로 달라진다는 말과 그 지닌 뜻은 미상불 비슷한 것이었다. 세상에 떠도는 불교 서적이란 모두가 남화경(南華經)의 주석이요, 남화경은 또 도덕경(道德經)의 풀이에 불과한 것이다. 저들은 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생각들이 다 탁월하였으니, 어찌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이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칙이 되는 줄을 몰랐으리요. 불행히 그들은 망하는 세상에 태어나서,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아 있는데 눈을 찌푸리며 상심을 하다가 본즉, 차라리 태고(太古)의 정치를 연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른바 성인을 없애고 슬기를 버리고 도량형기(度量衡器)를 파괴해야 된다(남화경에 나오는 구절)는 따위의 이야기는 모두 세태와 풍속에 분개해서 나온 말들이다. 3천여 년 이래로 이런 책을 배척한 자가 한 사람뿐만이 아니언마는 이 책들은 필경 보존되어 있고, 또 이런 책이 있다 해서 천하가 조용하고 어지러운 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거늘 저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 창려는 자)는 맹자(孟子)가 일찍이 양자(楊子 양주(楊朱). 극단적인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와 묵자(墨子 묵적(墨翟). 사회주의(社會主義)의 선구자)를 배척함을 희미하게나마 보고 역시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교조로 내세웠다. 맹자의 재능이 다만 양자묵자만을 배척함으로써 아성(亞聖 맹가(孟軻)의 별칭. 공자 다음이라는 뜻)이 된 것도 아니언마는, 한창려는 곧 그의 책을 불사름으로써 맹자의 뒤를 계승하려고 하였으니, 한창려는 과연 그 책을 불사를 능력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D-001]허유(許由)소부(巢父) : 허유와 소부는 철인(哲人)으로 요()가 그들에게 천하를 양보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D-002]변수(卞隨)무광(務光) : ()이 변수와 무광에게 천하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받지 않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인이라 부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명마패(皇明馬牌)

 

 

상서원(尙瑞院)에 보관되어 있는 명()의 마패(馬牌 황제가 친히 발급하는 통행증)는 짙은 누런 빛 무늬 없는 비단에 오목(烏木)을 축()으로 한 두루마리다. 길이는 두 자 네 치요, 넓이는 다섯 치 남짓하고, 가장자리에는 이룡(螭龍)을 수놓은 복판에 안장을 갖춘 붉은 말 한 필이 놓여 있다. 황제의 지시문(指示文)을 썼는데,

 

공무로 가는 인원이 역을 통과하는 데는 이걸 나누어 가지고 가서 맞추어 본 다음에야 마필의 제공을 허락한다. 만일 이것을 맞추지 않고 함부로 역말을 준다든가, 법대로 집행하지 않고 정실에 따라 수응한 자는 함께 중죄로 다스릴 것이니, 마땅히 이 명령을 지킬지어다. 홍무(洪武) 23(1390) 월 일.”

이라 하였다. 글자는 모두 검정 실로 수를 놓았고, 연호(年號) 위에는 옥새(玉璽)를 찍었다. 그 새문(璽文)에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 하였다. 그리고 왼편에는 통자칠십호(通字七十號)’라고 가는 글씨로 썼으며, 아래쪽 연폭(聯幅)에는 작은 옥새의 절반을 찍었다. 또 붉은 말 한 필을 그린 축()에는 통자육십칠호(通字六十七號)’라 하였고, 푸른 말 한 필을 그린 축은 통자육십팔호(通字六十八號)’였고, 또 붉은 말 두 필을 그린 축은 달자삼십호(達字三十號)’라 쓰여 있다. 대체로 홍무(洪武) 경오년(1390)에 군산도(群山島)를 거쳐서 배가 출발하여 금릉(金陵)으로 조회할 때에 내린 마패의 네 종류이다. 또 붉은 말 두 필을 그린 축은 만력(萬曆) 27(1599) 월 일 달자십육호(達字十六號)’였고, 또 붉은 말 두 필을 그린 축은 달자십삼호(達字十三號)’로서 그 지시문과 연호는 검정 실로 수를 놓았고, 네 가장자리는 이룡(螭龍)을 수놓고 그 위에 옥새를 찍은 것이 모두 홍무의 제도와 같았다. 그리고 왼편에 가늘게 쓴 통() 자와 달() 자 등의 몇몇 자호(字號)는 모두 수를 놓지 않았음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 임시로 몇째 자호라고 써서 옥새의 반절을 찍어서 내준 것이리라. 그리고 홍무통자육십칠호의 푸른 말 이하의 여덟 필 말은 모두 안장과 굴레를 그리지 않았으니, 대체로 만력 기해년(1599)에 요양(遼陽) 길이 막히고 보니, 가도(椵島)로부터 등주(登州)에 이르러 하륙하여 북경으로 들어갈 때 하사한 마패의 두 종류이다. 마패 축은 모두 붉게 칠한 가죽통에 넣어서 주석 장식을 붙이고 또 녹피(鹿皮) 주머니에 넣었다. 다만 당시의 사절이 이를 돌리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혹시 명()의 구례(舊例)로서 외국 사신이 수로(水路)로 내왕할 때만 이를 위하여 마패를 나누어 주었는지. 이번 열하 행차에도 역시 말을 내 주라는 황제의 지시가 있었은즉, 응당 이런 마패를 내주었을 듯한데 도중에 서로 어긋나서 그런지 증명을 맞추어 보는 절차를 보지 못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합밀왕(哈密王)

 

 

동직문(東直門)을 나서서 열하를 향하여 몇 리를 못 가서 북경의 교군 30여 명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발을 맞추어 간다. 그리고 회회국(回回國) 사람 십여 명이 뒤를 따르는데 얼굴이 사납고, 코가 크며, 눈은 푸르고, 머리와 수염이 억세게 났다. 그 중 두 사람은 눈매가 맑고 고우며, 복색이 가장 화려하였다. 붉은 전립을 썼는데, 좌우 가장자리 끝을 말아 붙이고 앞뒤 가장자리는 뾰족하여 마치 아직 피지 않은 연 잎사귀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볼 때는 경망스러워 보기 우스웠다. 마두(馬頭)들은 추측만 하고 그를 회회국 태자(太子)라고 불렀다. 앞섰다 뒤섰다 작반을 해서 간 지 사나흘 동안 때로는 말 위에서 담배도 서로 나누어 피우곤 했는데, 그 행동이 꽤 공순하였다. 하루는 한낮이 되어 너무 덥기에 말에서 내려 도중 삿자리 가게 아래서 쉬고 있는데 두 사람이 뒤따라 와서 역시 말에서 내려 마주 대면하여 의자에 앉았다. 나에게 묻기를,

 

만주 말을 하시유, 몽고 말을 하시유.”

하기에, 나는 농으로,

 

양반(兩班)이 어떻게 만주 말이고 몽고 말을 알겠어.”

하며 대답하고는 곧 글로 써서 회회국 내력을 물었더니 한 사람은 머리를 흔들면서 다른 편을 쳐다보는 것이 아주 글은 까막눈인 것 같고, 한 사람은 흔연히 붓을 한참 매만지더니 겨우 한 글자를 쓰는데, 젖먹은 힘을 다 내는 듯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다. 그는 스스로 합밀왕이라 하고 같이 온 사람을 가리키면서 역시 12()의 번왕(蕃王)이라 했다. 그리고 대답하는 말이 전연 문리(文理)에 닿지 않아서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메고 온 물건들은 무엇인고.”

하고 물었더니,

 

모두 황제께 진상하는 옥그릇들이요.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자명종(自鳴鍾)입니다.”

한다. 번왕이라 일컬은 사람이 주머니를 풀더니 차()를 꺼내어, 따르는 사람을 시켜 끓여 서로 나누어 마시면서 나에게도 한 잔 권하는 폼이 아마 색다른 차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그 향내와 빛깔을 보아 역시 북경 거리에서 보통 파는 차나 다름없었다. 화로라든가 찻잔들은 모두 붉게 칠한 가죽으로 집을 만들어서 주렁주렁 허리띠에 달린 장식품같이 허리에 차고 등에 짊어졌는데, 보니 극히 간편해 보인다. 그는 차를 마신 뒤 먼저 일어나 채찍을 한 번 들어 치면서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또 강가에서 만나서 중국말로,

 

합밀왕의 나이는 얼마시유.”

하고 물었더니 그는 역시 중국말로,

 

서른여섯이라우.”

대답한다. 그리고 번왕은 더욱이 중국말이 능하나 다시금 손바닥을 두 번 쥐었다 펴고 또 한 손을 펴서 스물다섯 살이란 것을 표시했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회흘(回紇)의 일명은 회골(回鶻)이다.”

하였고, 원사(元史)중에는 외올얼부[畏兀兒部]가 있는데 외올(畏兀)은 곧 회골이었고 회회는 또 회골의 변한 소리다.  고려사(高麗史),

 

()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

하였으니, 외오얼은 또 외올(畏兀)의 변한 말이다. 합밀은 한() 때에는 이오(伊吾)에 속한 땅이요, ()에 이르러서는 이주(伊州)에 속한 땅이다. 고려 말기에 설손(偰遜)이란 이가 곧 회골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다가 공주(公主)를 따라 동으로 와서 이내 고려에 벼슬을 하였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한 설장수(偰長壽)는 곧 설손의 손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서화담집(徐花潭集)

 

 

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경덕(敬德)이다. 은 수학(數學)이 강절(康節 ()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시호)과 비슷하고, ()와 문() 몇 편이 있어 그다지 볼 것이 없으나 사고전서(四庫全書) 지금 황제가 지은 것이다. 중에 편입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장흥루판(長興鏤板)

 

 

오늘의 오사란(烏絲欄 책을 베끼기 위해 줄을 친 종이)은 곧 옛날의 편죽(編竹)이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두 대쪽에다가 칠로 쓰고 가죽끈으로 엮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간책(簡冊)이다. 그 모양은 오늘의 오사란과 같았다. 이는 곧,

 

공자가 역경(易經)을 읽는데,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

는 기록이 그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하동(河東)으로 갈 때 책 다섯 상자를 잃어버리고 다행히 장안세(張安世 ()의 유신(儒臣))가 외는 것을 힘입어 이를 기록하였다는 말이 전함을 보아서 당시에 각판(刻版)이 없었음을 알 것이요, 후세에 판을 처음으로 새기기는 후당(後唐)의 명종(明宗) 때다. 명종은 오랑캐 지방의 사람으로 글이라고는 알지 못했으나 구경(九經)을 편각으로 새기기는 역시 장흥(長興 후한 명종의 연호) 연간의 일이다. 그 공로야말로 홍도(鴻都 () 때 도서를 간직한 곳)와 석경(石經 () 때 태학(太學)에 경서를 새겨 세운 비석)보다 적다고는 못할 것이다. 명종이 당시의 사대부들이 길한 예와 흉한 예로서 죽은 사람끼리 혼인시키는 것과 복상 중에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가 있음을 보고 탄식하기를,

 

선비가 효도와 공경을 중하게 여김은 그것으로써 풍속을 돈독하게 함이거늘, 이제 아무런 전쟁도 없는 터에 복상 중에 있는 이를 관리로 기용할 수야 있을 것인가. 또 혼인은 길한 예례인데 어찌 죽은 사람에게 이것을 쓸 것인가.”

하고는, 곧 유악(劉岳)에게 명하여 문학에 밝고 고금의 역사에 정통한 선비들을 뽑아서 이 예문을 정리하게 하였으나, 태상박사(太常博士) 단옹(段顒)과 전민(田敏) 등은 모두 야비한 자로서 이 책을 다시 정리한다는 것이 당시의 각 사사 가정에서 내려오는 습속들을 참고하였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취진판(聚珍板 사고전서(四庫全書)판 글자의 별칭)으로 내려오는 이 각본은 호부 시랑(戶部侍郞) 김간(金簡)이 감독 간행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주한(周翰)주앙(朱昻)

 

 

사람이 젊을 적에는 전정(前程)이 멀고 보니 자기는 늙을 날이 없을 듯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노인을 업신여기는 실수를 가끔 범한다. 이것은 비단 철없는 악소년의 경박한 짓일 뿐 아니라 대개는 앞날의 복도 받지 못하는 것이니, 불가불 조심해야 할 것이다. 민 찬성(閔贊成 찬성은 민형남의 벼슬) 형남(馨男)은 나이 칠십이 넘어서 손수 과실 나무 접을 붙이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여러 젊은 명관(名官)들이 이를 웃으면서,

 

귀공은 아직도 백 년 계획을 하시는 거요.”

할 때에, 그는,

 

바로 그대들을 위하여 선물로 남길 것이네.”

하였다. 그 뒤 민공(閔公)은 아흔네 살이 되어 여러 명관들의 제삿날에 항상 손수 과실을 따서 부조하였다.

옛날 양대년(楊大年 ()의 양억(楊億). 대년은 자)이 약관(弱冠)일 적에 주한(周翰)과 주앙(朱昻) 두 사람과 함께 한림원(翰林院)에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었었다. 매사를 의논할 때마다 양대년은 그들을 업신여기어,

 

두 노인의 생각엔 어떻습니까.”

라고 하면, 주한은 매우 불쾌하여,

 

그대는 늙은이를 그리 깔보지 마소. 필경은 이 백발을 남겨 그대에게 꼭 선사할 것이네.”

라고 하였다. 주앙이 있다가,

 

백발을 남겨서 그를 주지 마오. 다른 사람이 또 그를 깔보는 것을 못하도록 해야죠.”

하였다. 그 뒤 양대년은 과연 나이 오십도 못 살았다.

열하태학(太學)에는 늙은 학구(學究)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곧 왕혹정(王鵠汀)이라 일컬었다. 그는 민가(民家)의 어린 아이 호삼다(胡三多)에게 글을 가르쳤다. 삼다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또 만주 사람으로 왕라한(王羅漢)이란 자가 있었는데, 나이 바로 일흔세 살이어서 삼다에게 비하면 한 갑자가 더한 무자생(1708)이다. 혹정으로부터 강의(講義)를 받는데 매일 맑은 새벽이면 삼다와 함께 책을 끼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발걸음을 맞추어 혹정을 뵙는다. 혹정이 혹시 이야기 때문에 틈이 없을 때는 노인은 즉시 몸을 돌려 동자인 삼다에게 고개를 숙이고 주저하지 않고 강의를 한 차례 받고자 가곤 한다. 혹정이 말하기를,

 

저 늙은이는 손자가 다섯, 증손이 둘이나 있는데 날마다 몸소 와서 강의를 듣고서는 돌아가 여러 손자들에게 되돌려 가르친답니다. 그의 근실한 태도가 이같이 놀랍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렇듯 늙은이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린이는 업신여김이 없었으니, 중국의 예의가 장하다는 것은 전날에 들은 바 있으나 이런 변방의 풍속이 이렇게 순박한 것을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호삼다가 붉은 종이 첩지에 은 두 냥을 가지고 와서 그 첩지를 나에게 보이는데 거기에 쓰기를,

 

삼가 동학(同學)이자 동경(同庚)의 아우 호()에게 부탁하여 조선 박 공자(朴公子)에게 청심환 한두 개를 전편으로 청하옵니다. 삼가 변변찮은 예폐를 갖추어 대금으로 삼으니, 물건은 하찮으나 정은 깊고 의리는 가이 없이 온 세계에 무거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돈은 돌려 보내고 환약 두 알을 찿아 주었다. 그의 이른바 동학이자 동경의 아우 호라 함은 곧 호삼다를 가리킨 말이니 더욱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그러나 남달리 스스로 혼후하고 원만한 태도는 주앙이 양대년에게 퍼부은 독설과는 매우 달랐으므로 여기에 함께 기록하여 젊은이들이 늙은이를 업신여기는 데 경계로 삼을까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무열하(武列河)

 

 

역도원(酈道元 후위(後魏) 때의 지리학자) 수경주(水經注)를 보면,

 

유수(濡水)는 동남으로 흐르는데 무열수(武列水)가 거기에서 합한다.”

고 하였다. 유수는 오늘의 난하(灤河), 무열수는 오늘의 열하이다. 열하의 이름은 수경(水經 ()의 상흠(桑欽) )에 나타나지 않았은즉, 아마도 무열의 변한 음인 듯싶다. 그 근원은 세 군데에 있으니 하나는 무욱리하(武郁利河)에서 나왔고, 또 하나는 석파이대(石巴伊臺)에서 나왔으며, 또 하나는 탕천(湯泉)에서 나와 한 곳에 모여서 열하가 되어 산장(山莊)을 안고 남쪽으로 흘러 난하에 든다고 한다. 우리 사행이 줄달음질로 열하에 들어왔을 때 더러는 이 길로 바로 질러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사신은 담당 역관으로 하여금 미리 동쪽으로 돌아갈 노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역관은 통관(通官)에게 이를 알아보았더니 통관배는 깜짝 놀라면서,

 

산 뒤는 모두 달자(㺚子)들이 살고 있는 지방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껴안고 동북으로 돌아가는 길 어간에서 반드시 달자를 만나 겁탈당할 것입니다. 우리네 중국 사람도 이 길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 길로 질러 돌아가는 것이 비록 황제의 뜻이라 하더라도 사신은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이 길을 변경하도록 간청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다. 역관은 다시금 탐문할 자리가 없어 방금 답답해 하던 판에 마침 한 늙은 장경(章京 만주의 벼슬 이름)중에 일찍이 이 길을 가 본 자가 있어서 역력히 말을 할 수 있다 하기에 종이와 붓을 내주며 쓰게 하니, 한자를 전연 몰라 하늘만 빤히 쳐다보다가 땅을 그려 손으로 모래를 모아 산 모양을 만들고 다시금 검부러기를 잘라 배 건너는 시늉을 한 뒤에 붓을 잡고 빨리 글씨를 쓰는데 곧 만주 글자였다. 아무도 이를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깔깔 웃었다. 나는 마침 이 종이를 가져다가 왕혹정에게 보였더니, 혹정 역시 해득하지 못하여 왕나한(王羅漢)에게 보였다. 나한은,

 

제가 비록 이 글을 안다고 하나, 한자(漢字)로 번역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사는 이웃에 봉천(奉天) 사람으로서 손님으로 와 있는 이가 있는데, 그가 이런 것을 알 듯합니다. 내일 그에게 물어 상세히 적어서 갖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이내 종이를 건사하여 품속에 집어놓고 가버린다. 이튿날 그는 과연 자세히 적어 가지고 왔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열하로부터 30리를 가면 평대자(平臺子),  30리에는 홍석령(紅石嶺)이요,  25리에는 황토량(黃土梁)이요,  15리에는 서륙구(西六溝)에 이르는데, 여기가 곧 승덕부(承德府)의 경계로서 경계비(境界碑)가 있고, 여기서부터 20리를 가면 상운령(祥雲嶺)이 있고, 여기서 칠구(七溝)까지 30, 또 봉황령(鳳凰嶺)까지 30, 평천주(平泉州)까지 20, 대묘참(大廟站)까지 35리인데, 여기는 평천주의 경계이다. 여기서 양수구(楊水溝)까지 40, 쌍묘(雙廟)까지 25, 송가장(宋家庄)까지 30, 건창현(建昌縣)까지 30, 장호자(長鬍子)까지 30, 야불수(夜不收)까지 25, 공영자(公營子)까지 20, 담장구(擔杖溝)까지 30리인데, 여기가 곧 건창현의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또 행호자대(杏湖子臺)까지 10, 날마구(喇麻溝)까지 25, 대영자(大營子)까지 15, 조양현(朝陽縣)까지 25, 대능하(大凌河)까지 25리인데, 다시금 강을 건너서 망우영(蟒牛營)까지 25, 장가영(張家營)까지 30, 만자령(蠻子嶺)까지 25, 석인구(石人溝)까지 25리인데 여기가 조양현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육대변문(六臺邊門)까지 30, 최가구(崔家口)까지 30리요,  20리를 더 가서 의주성(義州城)을 지나쳐 대능하를 건너 금주위(錦州衛)로 나와 광녕로(廣寧路)를 거쳐 간다.”

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옹노후(雍奴侯)

 

 

어릴 때에 사기(史記)를 읽으면서,

 

()이 구준(冦恂 동한 때 28()의 하나)을 옹노후(雍奴侯)에 봉하였다.”

는 것을 보고서,

 

()로 봉할 이름이 그다지 없어서 하필 옹노후라 했을꼬.”

하며 적이 괴이하게 여겼었다. 이제 알고 보니 옹노는 곧 지명으로서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에 있었다. 내가 앞서 연()() 길을 들 제, 어양과 북평을 지났으나 오늘은 옹노가 어떤 이름으로 변했는지를 알 수 없겠고, 또 이 땅을 지나왔는지의 여부도 모를 일이다. 옹노는 또 소택에 관한 이름으로서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사면에 물이 둘러 있는 것을 ()’이라 하고, 모여서 흐르지 않는 것을 ()’라 한다.”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청하군(淸河郡)에 사제현(題縣)이 있었다.”

하였는데, 내가 막북(漠北)으로부터 고북구(古北口)로 돌아올 제, 밤에 청하현에서 잤으나 이제는 사제현이 어디 있는 줄을 알 길이 없었다. 요컨대 청하의 근방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안사고(顔師古 ()의 학자)의 주()에는,

 

()는 사()의 옛 글자이다.”

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순제묘(順濟廟)

 

 

동서양고(東西洋考 () 장섭(張燮)의 저)에 보면,

 

오대(五代) 때에 민( 복건성)의 도순검(都巡檢) 임원(林願)의 여섯째 딸은 진( 후진)의 천복(天福 고조 석경당(石敬瑭)의 연호) 8(943)에 태어났는데, 옹희(雍熙 () 태종의 연호) 4(987) 2 29일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으며, 그는 늘 붉은 옷을 입고 바다 위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사당에다 모셨더니, ()의 선화(宣和 () 휘종의 연호) 계묘년(1123)에 급사중(給事中) 노윤적(路允迪)이 사신이 되어 고려(高麗)로 가는 도중에, 바람을 만나서 이웃 배들은 모조리 빠졌으나 다만 노윤적이 탄 배만 귀신이 돛대에 내려서 아무 탈이 없었으므로, 사신을 마치고 돌아와 이 일을 조정에 아뢰었더니, 특별히 순제(順濟)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하였다. 요즘 천주당(天主堂)에 그려 붙인 붉은 옷을 입은 여상(女像)이 구름 바다 사이로 날아다니곤 한다. 이것이 곧 그 귀신인 것 같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해인사(海印寺)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해인사(海印寺)는 신라(新羅) 애장왕(哀藏王) 때에 창건되었다. 이름난 가람이나 큰 절들은 흔히 서로 이름을 답습하여 붙이는 수가 많지마는 이것만은 그렇지 않다. 중국 순천부(順天府 북경의 별칭) 서해자(西海子 동산 이름) 위에 옛날 해인사가 있었다. ()의 선덕(宣德) 연간에 다시금 중건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라 이름을 고쳤다가 뒤에 철폐하여 공장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해인사는 곧 천여 년 전에 이룩된 고찰인즉 북경 안에 있던 해인사는 응당 신라 때 창건된 절보다 뒤의 일일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사월팔일방등(四月八日放燈)

 

 

중국의 관등(觀燈)놀이는 대보름날 밤으로서 14일부터 16일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관등놀이는 반드시 사월 초파일에 하는데, 이날이 부처의 생신이라 하나 이는 아마 고려(高麗) 때의 풍속을 그대로 지킨 것만 같다. 석가여래(釋迦如來)는 애초 정반왕(淨飯王)의 태자(太子)로서 주소왕(周昭王) 24(26년인데 잘못된 것이다) 갑인 4 8일에 나서 42(44) 임신에 그의 나이 19세에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도를 닦다가 목왕(穆王) 3(4년인데 잘못된 것이다) 계미에 이르러 도를 이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오현비파(五絃琵琶)

 

 

양염부(楊廉夫 ()의 문학가 양유정(楊維楨). 염부는 자)의 원궁사(元宮詞)에 이르기를,

 

화림(화령(和寧))에 거둥하니 천막도 장할시고 / 北幸和林幄殿寬

고려의 시녀들이 첩여(여관(女官)의 이름)로 시중드네 / 句麗女侍婕妤官

임금이 좋아라고 명비곡을 부르실 제 / 君王自賦明妃曲

임께서 주신 비파 말 위에서 뜯는고녀 / 勅賜琵琶馬上彈

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를 상고해 보면,

 

악기 비파(琵琶)는 줄이 다섯이다(원전(原典)에는 현사(絃四)로 되어 있다).”

라 하였으니, 그러면 첩여(婕妤)들이 탔다는 비파는 반드시 다섯 줄일 것이다. 온광루잡지(韞光樓雜志)에 있다.

 

 

[D-001]명비곡(明妃曲) : ()의 궁녀(宮女)로 호() 땅으로 시집간 소군(昭君) 왕장(王嬙)을 두고 읊은 노래.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사자(獅子)

 

 

철경록(輟耕錄 () 도종의(陶宗儀) )에 이르기를,

 

나라에서 매양 여러 왕과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 것을 대취회(大聚會)라고 일렀다. 이날에는 여러 가지 짐승을 만세산(萬歲山)에 몰아 내어 범표범코끼리 따위를 일일이 따로 둔 뒤에 비로소 사자가 나온다. 사자는 몸뚱이가 짧고 작아서 흡사 가정에서 기르는 금빛 털을 지닌 삽살개처럼 생겼는데, 여러 짐승이 이를 보면 무서워 엎드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는 기가 질리는 까닭이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만세산에 가 보았으나 기르는 짐승들이란 볼 수 없었으니 이는 모두들 서산(西山 북평(北平)에 있다)과 원명원(圓明苑 북평에 있다) 등지에 둔 모양이다. 그리고 열하에서 본 이상한 새와 짐승들도 적지 않았으나 하나도 그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날마다 길들인 곰과 집에서 기르는 범 같은 것을 보았으나 모두 귀를 드리우고 눈을 감아 언제나 가련한 꼴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자를 못 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백년 이래로는 사자를 가져다 진상한 자가 없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강선루(降仙樓)

 

 

우리나라 성천(成川)에 있는 강선루(降仙樓)의 현판은 미만종(米萬鍾)중조(仲詔)가 쓴 글씨이다. 그의 필법은 미원장(米元章 미불(米芾). 원장은 자)에 못지않을 뿐더러 그가 괴석(怪石)을 좋아하는 성벽은 그보다 더하였다. 간재필기(艮齋筆記 우동(尤侗) 간재잡기(艮齋雜記)인 듯하다)에 보면,

 

방산(房山 하북성에 있다)에 돌이 있는데 길이가 세 자, 넓이가 일곱 자인데 빛깔이 푸르고 윤기가 났다. 중조가 이것을 작원(勺園 하북성에 있다)으로 끌어 올 것을 생각하고, 수레를 겹으로 말 10마리에 메우고 인부 1백 명이 끌어서 7일 만에 비로소 산으로부터 나와 또 5일 만에 양향(良鄕 하북성에 있다)에 닿았다. 길에서 힘이 다해서 움직이지 못한 채 밭두둑 사이에 눕혀 놓고, 이를 담장으로 둘러 싸고 초막으로 위를 덮었으며, 이에 대해 오간 편지까지 있어서 한때는 미담(美談)으로 전하였다.”

하였다. 내가 북경을 구경할 제 어떤 이가 민()에 살고 있던 사람 오문중(吳文仲)이 그렸는데, 미 태복(米太僕 미만종. 태복은 벼슬 이름)이 수집한 괴석 그림책 1권을 팔려고 왔었다. 하나는 영벽석(靈壁石)이요, 하나는 방대석(方臺石)이요, 하나는 영덕석(英德石)이요, 하나는 구지석(仇池石)이요, 하나는 연주석(兗州石)이었으며, 또 다른 이름들로서 비비석(非非石)청석(靑石)황석(黃石) 등이 있는데 모두 기기괴괴한 형상이었다. 그 책에다가 자신이 담원시(湛園詩)를 지어 붙인 것이 있었다.

 

주인의 마음씨는 본디부터 맑고맑아 / 主人心本湛

맑다는 이 뜻으로 후원 이름 지었세라 / 以湛名其園

때로는 여기 앉아 숨은 선비 되었다가 / 有時成坐隱

손님이 오실 제엔 술 항아리 열어 보네 / 爲客開靑罇

한가한 저 구름은 푸른 대 물가으로 / 閒雲歸竹渚

너울너울 지는 해는 솔문에 비치누나 / 落日映松門

높은 대에 다시 올라 묏 달을 맞이할 제 / 登臺候山月

밝은 빛 흘러흘러 친구 대해 말하는 듯 / 流輝如晤言

만종(萬鍾)이 벼슬살이로 사방에 다닐 때도 오직 괴석만을 쌓았을 뿐인즉, 역시 명사(名士)가 아닐 수 없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미원장뿐이요, 미중조는 모르기에 특히 여기에 기록한다. 다만 강선루 현판은 어떤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었는지, 역시 뒷날 연구를 기다릴 일이다.

 

 

[D-001]중조(仲詔) : 명의 서예가(書藝家). 만종은 이름이요, 자는 우석(友石). 중조는 또 하나의 자인 듯함.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영현(李榮賢)

 

 

태학지(太學志 저자 미상)를 보면,

 

융경(隆慶) 원년(1567)에 황제가 국학(國學)에 거둥했는데, 조선 배신(陪臣)으로 이영현(李榮賢)  6명이 각기 제 직품에 알맞은 의관을 갖추고 이륜당(彝倫堂) 밖 문관들이 서는 반열 다음에 섰다.”

하였다. 그 당시 참반(參班)을 했다면, 응당 관()에 머문 사신일 터인데, 어째서 6명이나 그렇게 많이 참석했을 것인가. 또 이영현은 오늘 누구의 조상인지도 모를 일이요, 또 따라 참석한 인원들도 성명을 상고할 수 없다. 선배 되는 이만운(李萬運 선조 때의 학자. 자는 원춘(元春))은 옛날의 일을 많이 아는지라 잠시 이것을 적었다가 한 번 물어 볼 기회를 만들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왕월시권(王越試券)

 

 

왕월(王越 () 때의 관리. 자는 세창(世昌))의 과거 시험지가 바람에 날려 우리나라에 떨어져서 그 종이를 주년사(奏年使) 편에 부쳤더니, 중국에서는 기록하기를 유구(琉球)라고 잘못 기록하였다. 당시 왕월을 풍력(風力)이 있다고 해서 사법관의 직책에 탁용했다 한다. 일찍이 낭야만초(瑯琊漫鈔 () 문림(文林))에 보니,

 

성화(成化) 연간에 태감(太監) 왕고(王高)가 휴가를 얻어서 집에 나와 있을 제 병부 상서(兵部尙書) 아무개가 찾아 갔더니, 때마침 도어사(都御史) 왕월과 호부 상서(戶部尙書) 진월(陳鉞)이 역시 왔었다. 왕고가 이윽고 나와 여러 사람 앞에 읍()하고 앉아서 말하기를,

옛날 왕진(王振 () 때의 관리)이 일을 처리할 때 육경(六卿)이 많이들 사사로이 찾아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치를 제멋대로 전단한다고 뒷말을 하였다 하더니, 이제 여러분들이 이렇게 찾아 온다면 어찌 외인들이 왕고를 걸어 시비하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여러분은 나를 방문하였지마는 묻노니 왕고를 어떤 사람으로 알았단 말이오.’

하였을 때, 병부 상서는,

귀공은 성인이외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고는 얼굴빛을 변하면서,

위대한 교화력을 지닌 이를 성인이라 하므로 공자(公子)께서도 오히려 내가 어찌 감히(논어에 나오는 구절)라고 말씀했거늘, 하물며 왕고가 어떤 사람이건대 감히 성인이라고 일컬을 것인가.’

하였다. 여럿은 이 말을 듣고 숨을 내쉬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 당시 병부 상서는 비록 이름을 숨겼으나 공론은 가릴 수 없었은즉, 소위 왕월의 풍력(風力)인들 어디 있을 것인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순칠년회시 때 공원의 화재[天順七年會試貢院火]

 

 

천순(天順) 7 (1463) 2월에 회시(會試)를 보일 제, 때마침 공원(貢院)에 불이 나자 감찰어사(監察御史) 초현(焦顯)이 곧 대문을 걸어 닫아 출입을 못하도록 하여 응시자로 타 죽은 자가 90여 명이나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신라호(新羅戶)

 

 

북경 동북방의 군현 중에도 고려장(高麗庄)이라는 이름이 많을 뿐 아니라, ()의 총장(總章 당 고종의 연호) 연간에도 신라(新羅) 사람이 많은 곳에 관아를 두었으니, 지금 양향(良鄕)의 광양성(廣陽城)이 바로 거기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증고려사(證高麗史)

 

 

주곤전(朱昆田 청의 문학가. 자는 서준(西畯) 또는 문앙(文盎))은 죽타(竹坨 주이준(朱彛尊)의 호)의 아들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원 순제(元順帝)가 북으로 달아나 응창(應昌)에 와서 머물러 있을 때에 태자(太子) 애유지리납달(愛猷識里臘達)이 그 자리를 이어 화림(和林)으로 옮겨가 선광(宣光)이라고 연호를 고쳤으니, 고려(高麗)에서는 그를 북원(北元)이라 불러 신우(辛禑)는 일찍부터 그 연호를 받았으니, 그때는 명()의 홍무(洪武) 10(1377)이다. 그 이듬해 두질구첩목아(豆叱仇帖牧兒)가 즉위하자 북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이를 통고하였고, 이어서 연호를 천원(天元)이라 고친 뒤 고려에 통고하였는 바, 이것이 모두 정인지(鄭麟趾) 고려사(高麗史) 중에 실리고 본즉, 순제를 이어서 연호를 세운 자는 선광까지만이 아니다.”

하였다. 대체로 순제라는 칭호는 중국이 부르는 이름이요, 혜종(惠宗)이란 묘호(廟號)는 원()이 최후의 임금에게 붙인 시호(諡號)이다. 그 뒤에 겨우 선광의 시호가 소종(昭宗)이라는 것밖에 모르고 본즉 천원의 즉위는 역사 편찬가가 생략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들은 고려사에 의거하여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조선모란(朝鮮牡丹)

 

 

육가화사(六街花事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하포모란(荷包牡丹)은 본초(本草 이시진(李時珍)이 저술한 본초강목(本草綱目)) 중에 일명 조선모란(朝鮮牡丹)이라 부르는데, 꽃은 승혜국(僧鞵菊 부자(附子)의 별칭)과 같고 진자줏빛이다. 모란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잎이 서로 비슷한 까닭이었으며 북경 괴수사가(槐樹斜街)자인사(慈仁寺)약왕묘(藥王廟) 등 꽃 저자에서는 언제나 팔고 있다.”

하였다. 소위 하포라고 부르는 까닭은 중국 사람이 수놓은 둥근 주머니를 서로들 선사하면서 하포라고 하는데 곧 주머니의 이름이다. 승혜국은 어떤 모양인지 모르겠으나, 요컨대 모두 일년초 꽃으로, 이름을 조선모란이라 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애호(艾虎)

 

 

단옷날 공조(工曹)에서는 궁선(宮扇) 애호(艾虎)를 바친다.계암만필(戒盦漫筆 () 이후(李詡) )에는,

 

단옷날은 서울에 있는 관료들에게 궁선을 하사하는데, 댓살에 종이를 붙여서 그 위에는 모두 영모(翎毛)를 그리고, 오색 실로써 애호를 둘렀다.”

하였으니, 단옷날 애호를 바침은 역시 중국의 묵은 풍속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십가소(十可笑)

 

 

대두야담(戴斗夜談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북경 서는 열 가지 가소로운 명물이 있으니 그것은 광록시(光祿寺 궁중의 요리를 맡은 관서)의 찻물[茶湯], 태의원(太醫院 황제의 전속 의원)의 약방문[藥方], 신악관(神樂觀 도교의 절과 음악을 연습하는 곳)의 기도[祈禳], 무고사(武庫司)의 칼과 창[刀鎗], 영선사(營繕司 토목 공사를 맡은 관서)의 일터[作場], 양제원(養濟院 국립 요양원)의 옷과 양식[衣 粮], 교방사(敎坊司 기악(妓樂)을 맡은 관서)의 할머니[婆娘], 도찰원(都察院 최고 검찰(檢察) 기관)의 헌법 기강[憲綱], 국자감(國子監 국립대학(國立大學))의 학당(學堂), 한림원(翰林院 학예술원(學藝術院))의 문장(文章) 등이다.”

하였으니, 이는 곧 한()의 속어에,

 

수재(秀才)에 합격되었으나 글을 모르고, 효렴(孝廉)으로 뽑혀도 애비가 별거(別居)한다.”

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속어에도,

 

관청 돼지 배가 아프다.”

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마치,

 

()이 진()의 야윈 꼴을 본다(서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

는 말과 다름없다. 이들은 모두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다는 의미이다. ()의 효렴(孝廉)도 벌써 이렇거늘 하물며 뒷세상의 일일까보냐.

 

 

[D-001]효렴(孝廉) : () 때 관리를 선발(選拔)하는 시험 과목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자규(子規)

 

 

()의 지정(至正) 19(1359)에 자규(子規 접동새)가 거용관(居庸關)에서 울었다 한다. 이 관은 연경과의 거리가 70리요, 연경의 팔경(八景) 중에서 거용첩취(居庸疊翠)가 그 하나이다. 원의 왕운(旺惲 문학가. 자는 중모(仲謀))은 이르기를,

 

진 시황(秦始皇)이 장성(長城)을 쌓을 때에 역군들을 이곳에 두었다 하여 곧 거용(居庸)이라 일컬었으며, 또는 모용수(慕容垂 후연(後燕)의 세조(世祖))가 모용농(慕容農)을 얼옹새(蠮螉塞)로 내어 보냈다는 데가 곧 거용의 잘못 변한 소리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한 번 거용관에 가고자 했으나, 왕복 1 40리나 되고 보니 하루 동안에 다녀 오기에는 어렵겠으므로 그만두었더니, 지금에는 한스러운 일이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경수사대장경비략(慶壽寺大藏經碑略)

 

 

 

국가에서 불법(佛法)을 숭봉하여 큰 절을 세울 때엔 반드시 불경을 안치한다. 그리하여 천하의 글씨 잘 쓰는 자들을 모아서 금가루를 이겨 불경을 베낌으로써 그 위엄을 보이고 천하에 각자(刻字) 잘 하는 자들을 뽑아 좋은 나무에 판각을 하여 보전함으로써 널리 전하게 된다. 북경에 있는 모든 절에는 날마다 중을 먹여 길러, 단정하게 앉아서 떼를 지어 불경을 외고 종을 치며, 소라 고동을 불어 밤낮으로 쉴 사이 없을뿐더러, 한 해에 한두 번은 칙사를 역마에 태워 보내어 향과 폐물을 바치되 온 천하를 골고루 돌아다니는데, 이렇게 해야만 온 항하사(恒河沙)의 세계가 모두 복을 받게 된다. 아아, 참 지극하도다. 고려(高麗)는 예로부터 시서(詩書)와 예의(禮義)의 나라로 불려왔으므로 원이 천하를 차지하자, 세조 황제(世祖皇帝 홀필렬(忽必烈))는 은혜로 맺으며, 예법으로 대접함이 유달랐었다. 부자(고려의 원종과 충선왕)가 왕위를 이어서 모두 부마(駙馬)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지금 왕은 충선왕(忠宣王)이다. 또 총명과 충효로써 황제와 황태후의 사랑을 받게 되어, 대덕(大德 ()의 연호) 을사년(1305)에는 불경을 경수사(慶壽寺)에 시주하여 황제께 영광을 돌렸었다. 이 절은 유황(裕皇 () 성종(成宗)의 별칭인 듯하다)의 복을 비는 곳으로서 수도의 여러 절 중에 가장 오래된 절이다. 황경(皇慶 ()의 연호) 원년(1312) 여름 6월에 나에게 일러 글을 짓고, 이를 돌에 새기게 하였다. 왕의 이름은 장()인데,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 도덕과 문장을 갖추었다. 그는 세조를 섬기게 되자 황제의 생질로서 세자가 되어 숙위(宿衛)로 입직하여 포상을 받았고, 성종(成宗) 때에는 뽑혀서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또 대덕 말년에는 지금 황제를 따라 내란(內亂)을 평정하였고, 무종(武宗)을 세우는데 공로가 있어서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 개부의동삼사태자태사 상주국부마도위 심양정동행중서성우승상(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太子太師上柱國駙馬都尉瀋陽征東行中書省右丞相)으로 되어 고려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하였고, 지금 황제(() 인종(仁宗))의 즉위 책훈(策勳)으로 태위(太尉)를 더하였다.”

이 비문은 정거부(程鉅夫)가 지은 것으로서 설루집(雪樓集 정거의 저서) 중에 실려 있는데, 그 사연을 보아서 풍자의 말이 많았다. 대체로 외국 것을 저술한다고 빙자하여 약간 자기의 견해를 보인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응당 실려 있지 않을 터이므로 이에 잘라서 그 대략을 소개해 둔다.

 

 

[D-001]항하사(恒河沙) :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말. 사물(事物)의 많은 것을 항하 모래의 숫자에 비하였다.

[D-002]정거부(程鉅夫) : 원의 문학가 정문해(程文海). 거부는 자인데, 무종(武宗)의 이름을 휘해서 자를 이름으로 시행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량대(謊糧臺)

 

 

동악묘(東岳廟)를 한 5리 못 미쳐 황량대(莣涼臺)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글자가 그릇된 것이다. 장안객화(長安客話 저자 미상)에 보면,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할 때 일찍이 군사를 이곳에 주둔하고 거짓 창고를 설치하여 적국을 속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이 땅을 황량대(謊糧臺)로 불렀다.”

하니, 그 말이 옳을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원이학지성(胡元理學之盛)

 

 

중국 이학(理學)이 융성하기는 원()의 때보다 지나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또 두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원이 개국하던 초기에 있어서 도사이면서 유학(儒學)을 논하고, 승려이면서도 유학의 행실을 남긴 것이다.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의 별호) 구처기(邱處機 ()의 도사(道士))의 자는 통밀(通密)인데, 등주(登州) 사람이며, 장춘은 그의 별호이다. ()의 황통(皇統) 무진년(1148) 5 19일에 나서, 정우(貞祐 ()의 연호) 을해년(1215)에 금주(金主)가 그를 불렀으나 듣지 않았고, 기묘년(1219)에 송()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역시 일어서지 않았다. 이해 5월에 몽고 태조가 내만(奈蠻 몽고의 별부(別部))으로부터 근시를 시켜 손수 쓴 조서를 보내 초청을 하여 드디어 응하게 되었다. 철문관(鐵門關)을 넘어 수십 나라를 거쳤으며 1만여 리를 걸어 황제를 설산(雪山)에서 보게 되었다. 그는 첫째, 천하를 통일하는 방법에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데 있다고 대답하였고 대규모의 사냥을 말리며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살리기를 좋아한답니다”.

하고, 정치하는 방법을 물음에 대해서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야죠.”

한다. 몸 닦는 도리를 물었더니, 그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옵소서.”

하고, 죽지 않는 약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는, 그는,

 

위생(衛生)하는 글은 있지마는 장생할 약은 없소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가 그를 불러 자리에 나앉을 때마다 황제를 권하는 말은 모두 자애와 효도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것이 어찌 도사의 입에서 나온 유가의 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때에 몽고가 중원 땅을 유린하여,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이 더욱 심하였다.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살육을 당해도 목숨을 도피할 곳이 없었다. 구처기는 연경으로 돌아와서 그 문도를 시켜 통첩을 가지고 전쟁 중에 유랑하는 자들을 불러 구제하였다. 이로써 남의 종이 되었던 자로 양민의 신분을 되찾은 이도 있거니와, 죽을 지경에 있다가 갱생의 길을 얻은 이도 무려 23만 명이다 되었다. 이 이야기는 원사(元史) 중에 실려 있다. 또 해운 국사(海雲國師)의 이름은 인간(印簡)인데, 산서(山西) 영원(寧遠) 사람이다. 나이 열 살에 능히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하여 많은 악당들을 감화시켰다. 그리하여 금 선종(金宣宗)은 그에게 통원광혜대사(通元廣惠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영원성이 함락되자 그의 스승인 중관(中觀)과 함께 붙들렸다. 원의 성길사 황제(成吉思皇帝) 원 태조(元太祖) 가 사신을 대사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늙은 장로(長老)도 젊은 장로도 모두 좋아.”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젊은 장로라고 불렀다. 해운은 매양 당시 대관인(大官人) 홀도호(忽都護)에게 이르기를,

 

공자(孔子)는 성인이시니 마땅히 대대로 봉하여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요, 안자(顔子)와 맹자(孟子)의 후손과 주공(周公)과 공자의 학문을 배운 자는 모두 부역(賦役)을 면하고 그 학업에 종사하도록 할 일입니다.”

하매, 홀도호는 그 말을 좇았었다. 이것은 왕만경(王萬慶 미상)이 지은 구급탑(九級塔) 비문 중에 쓰여 있다. 이것이 어찌 승려로서 유가의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랴. 아울러 여기에 적어 둔다.

 

 

[D-001]철문관(鐵門關) : 소련과 중앙아시아의 접경에 있는 관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배형(拜荊)

 

 

내가 일찍이 풍윤현(豐潤縣)을 지날 때에 그 동북편에는 진왕산(秦王山)이 있는데, 다만 가시 덤불이 떨기로 나서 있었을 뿐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이 산에 올라 가시나무를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이 가시나무는 우리 동리 훈장이 내게 글 구절 떼는 법을 가르칠 때 쓰던 회초리다.’

하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였는데, 그때 가시나무들은 모두 머리를 드리우고 엎드리는 듯하였다.”

하는데, 지금에도 그 시늉을 내는 듯싶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환향하(還鄕河)

 

 

풍윤(豊潤)과 옥전(玉田) 사이에는 환향하가 있다. 모든 물이란 물은 모두 동으로 흐르는 터인데, 유독 이 강만은 서쪽으로 흐른다. 연산총록(燕山叢錄 저자 미상)에 보면,

 

송 휘종(宋徽宗)이 이 강 다리를 건너서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처량하게 하는 말이,

이 물을 지나면 점차 큰 사막이 가까울 거야. 나는 어찌 이 강물처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꼬.’

하고는 먹지 않고 갔다.”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이르기를,

 

이는 석소주(石少主)가 이름 지은 것을 지금 사람도 그대로 부른다.”

하니 석소주라면 아마도 석진(石晉 석경당(石敬瑭)이 세운 후진(後晉))의 젊은 임금인 중귀(重貴 석경당의 아들)로서 역시 거란에게 포로가 되어 이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계원필경(桂苑筆耕)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 중에,

 

신라(新羅) 최치원(崔致遠)의 계원필경(桂苑筆耕) 4.”

이란 글이 적혀 있으나, 뒷날 저서가들이 이 서목(書目)을 인용(引用)하였지마는 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책이 없어진 지 필시 오래된 모양이다.

 

 

[D-001]책이 …… 모양이다. : 계원필경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연암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불사(千佛寺)

 

 

밀운(密雲)으로부터 덕승문(德勝門)으로 들 제 길이 무척 질고 또 양 떼가 앞을 막아 더 갈 수 없어서, 드디어 말에서 내려 홍 역관(洪譯官) 명복(命福)과 함께 길가에 있는 천불사(千佛寺)에 들러서 잠시 쉬었다. 부처 앉은 자리를 천 개의 연꽃이 둘러싸고, 연꽃을 천 개의 불상이 둘러쌌다. 천존불(天尊佛) 24개와 18나한(羅漢)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바친 것이라 한다. 사실 유동인(劉同人 미상) 경물략(景物略) 중에 실려 있지마는, 녹수잡지(淥水雜識)중에는 이미 교응춘(喬應春 미상)의 비문을 의거하여 태감(太監) 양용(楊用 미상)이 주조(鑄造)하여 만든 부처라 고증하였으나, 모를 일이다.

 

 

[D-001]녹수잡지(淥水雜識) : () 납란성덕(納蘭性德)이 지은 녹수정잡지(淥水亭雜識의 약칭.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https://blog.naver.com/karamos/222588024131

 

열하일기(熱河日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산장잡기(山...

blog.naver.com

 

열하일기(熱河日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산장잡기(山莊雜記)

1.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2. 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3.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4.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5. 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6. 상기(象記)

7. 승귀선인행우기(乘龜仙人行雨記)

8. 만년춘등기(萬年春燈記)

9. 매화포기(梅花砲記)

10. 납취조기(蠟嘴鳥記)

11. 희본명목기(戲本名目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에 이르는 데는 창평(昌平)으로 돌면 서북쪽으로는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게 되고, 밀운(密雲)을 거치면 동북으로 고북구(古北口)로 나오게 된다. 고북구로부터 장성(長城)으로 돌아 동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7백 리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기는 2 80리로서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요(險要)로서는 고북구 만한 곳이 없다. 몽고가 출입하는 데는 항상 그 인후가 되는데 겹으로 된 관문을 만들어 그 요새를 누르고 있다. 나벽(羅壁)의 지유(識遺)에 말하기를,

 

연경 북쪽 8백 리 밖에는 거용관이 있고, 관의 동쪽 2백 리 밖에는 호북구(虎北口)가 있는데, 호북구가 곧 고북구이다.”

하였다. ()의 시초부터 이름을 고북구라 해서 중원 사람들은 장성 밖을 모두 구외(口外)라고 부르는데, 구외는 모두 당의 시절 해왕(奚王 오랑캐의 추장)의 근거지로 되어 있었다. 금사(金史)를 상고해 보면,

 

그 나라 말로 유알령(留斡嶺)이 곧 고북구이다.”

했으니, 대개 장성을 둘러서 구()라고 일컫는 데가 백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산을 의지해서 성을 쌓았는데, 끊어진 구렁과 깊은 시내는 입을 벌린 듯이 구멍이 뚫린 듯이 흐르는 물이 부딪쳐 뚫어지면 성을 쌓을 수 없어 정장(亭鄣)을 만들었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시절에 수어(守禦) 천호(千戶)를 두어 오중관(五重關)을 지키게 했다. 나는 무령산(霧靈山)을 돌아 배로 광형하(廣硎河)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 나가는데, 때는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다. 중관(重關)을 나와서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 길이나 되었다. 필연(筆硯)을 끄집어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쓰되,

 

건륭 45년 경자 8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朴趾源)이 이곳을 지나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으면서,

 

나는 서생(書生)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

했다.

옛적에 몽 장군(蒙將軍 몽염(蒙恬))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임조(臨洮)로부터 일어나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는데, 그 중에는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제 그가 보니 그가 산을 헤치고 골짜기를 메운 것이 사실이었다. 슬프다. 여기는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운 전쟁터이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유수광(劉守光)을 잡자 별장(別將) 유광준(劉光濬)은 고북구에서 이겼고, 거란의 태종(太宗)이 산 남쪽을 취할 적에 먼저 고북구로 내려 왔다는 데가 곧 이곳이요, 여진(女眞)이 요()를 멸망시킬 때 희윤(希尹 여진의 장수)이 요의 군사를 크게 파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요, 또 연경을 취할 때 포현(蒲莧 여진의 장수)이 송의 군사를 패한 곳도 여기요, 원 문종(元文宗)이 즉위하자 당기세(唐其勢 여진의 장수)가 군사를 여기에 주둔했고, 산돈(撒敦 여진의 장수)이 상도(上都) 군사를 추격한 것도 여기였다.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쳐들어 올 때 원의 태자는 이 관으로 도망하여 흥송(興松)으로 달아났고, 명의 가정(嘉靖) 연간에는 암답(俺答 미상)이 경사(京師)를 침범할 때도 그 출입이 모두 이 관을 경유했다. 그 성 아래는 모두 날고 뛰고 치고 베던 싸움터로서 지금은 사해가 군사를 쓰지 않지만 오히려 사방에 산이 둘러 싸이고 만학(萬壑)이 음삼(陰森)하였다. 때마침 달이 상현(上弦)이라 고개에 걸려 떨어지려 하는데, 그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 세운 칼날 같았다. 조금 있다가 달이 더욱 고개 너머로 기울어지자 오히려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어 졸지에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횃불 두 개가 산 위에 나오는 것 같았다. 북두(北斗)는 반 남아 관 안에 꽂혀졌는데, 벌레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은 숙연(肅然)한데,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그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 놓은 것 같고, 큰 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하늘 밖에 학이 우는 소리가 대여섯 번 들리는데, 맑고 긴 것이 피리소리 같아 혹은 이것을 거위소리라 했다.

 

 

[C-001]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다백운루본(多白雲樓本)’에는 도고북구하기(渡古北口河記)로 되어 있다.

[D-001]나벽(羅壁) : 송의 학자. 자는 자창(子蒼).

[D-002]정장(亭鄣) : 요새(要塞)같이 만들어 사람의 출입을 검열하는 곳.

[D-003]유수광(劉守光) : 후량(後梁)의 장수로서 뒤에 연()의 황제라 자칭하였다.

[D-004]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 : 몽고 사람. 원실(元室)의 지예(支裔).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우리나라 선비들은 생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강역(疆域)을 떠나지 못했으나, 근세의 선배로서 오직 김가재(金稼齋)와 내 친구 홍담헌(洪湛軒)이 중원의 한 모퉁이를 밟았다. 전국(戰國) 시대 일곱 나라에서 연()이 그 중의 하나인데 우공(禹貢)의 구주(九州 서경(書經)의 편명)에는 기()가 이 하나이다. 천하로써 본다면 가위 한 구석의 땅이지만 원과 명을 거쳐 지금의 청에 이르기까지 통일한 천자들의 도읍터로 되어 옛날의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과 같다. 소자유(蘇子由)는 중국 선비지만 경사(京師)에 이르러 천자의 궁궐이 웅장함과 창름(倉廩)부고(府庫)와 성지(城池)원유(苑囿)가 크고 넓은 것을 우러러 보고 나서 천하의 크고 화려한 것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거늘, 하물며 우리 동방 사람으로서야 한번 그 크고 화려한 것을 보았다면 그 다행으로 여김이 어떠했으리요. 지금 내가 이 걸음을 더욱 다행으로 생각한 것은 장성을 나와서 막북(漠北)에 이른 것은 선배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깊은 밤에 노정(路程)을 따라 소경같이 행하고 꿈속같이 지나다 보니 그 산천의 형승(形勝)과 관방(關防)의 웅장하고 기이한 것을 두루 보지 못했다. 때는 가을 달이 비끼어 비치고, 관내(關內)의 양쪽 언덕은 벼랑으로 깎아 섰는데, 길이 그 가운데로 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이 작고 겁이 많아서 혹 낮에도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조그만 등불을 만나더라도 미상불 머리털이 움직이고 혈맥이 뛰는 터인데, 금년 내 나이 44세건만 그 무서움을 타는 성질이 어릴 때나 같다. 이제 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섰는데, 달은 떨어지고 하수(河水)는 울며,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이 날아서 만나는 모든 경개가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고 이상하였건만 홀연히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고 기흥(奇興)이 발발(勃勃)하여 공산(公山)의 초병(草兵)이나 북평(北平)의 호석(虎石)도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하니, 이는 더욱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 한스러운 바는, 붓이 가늘고 먹이 말라 글자를 서까래만큼 크게 쓰지 못하고, 또 장성의 고사(故事)를 시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동리에서 다투어 병술로 위로하며, 또 열하의 행정(行程)을 물을 때에는, 이 기록을 내 보여서 머리를 모아 한 번 읽고 책상을 치면서 기이하다고 떠들어 보리라.

 

 

[C-001]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김가재(金稼齋) : 조선 문학가 김창업(金昌業). 가재는 그의 별호인 노가재(老稼齋)의 준말.

[D-002]소자유(蘇子由) : 송의 문학가 소철(蘇轍). 자유는 그의 자.

[D-003]초병(草兵) : 팔공산(八公山)에 서 있는 풀까지도 군사로 보였다는 부견(符堅)의 고사.

[D-004]호석(虎石) : ()의 이광(李廣)이 우북평(右北平)의 바위를 범으로 보고서 활을 쏘았다는 고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하수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나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 좌(萬座)로서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흘연(屹然)히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蛟螭)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과 우()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楡河)와 조하(潮河)황화(黃花)진천(鎭川) 등 모든 물과 합쳐 밀운성 밑을 거쳐 백하(白河)가 되었다. 나는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이라, 뜨거운 볕 밑을 가노라니 홀연 큰 강이 앞에 당하는데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 끝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대개 천리 밖에서 폭우(暴雨)가 온 것이다. 물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우러러 하늘을 보는데, 나는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쳐다 보는 것은 하늘에 묵도(黙禱)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이 돌아 탕탕히 흐르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과 함께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가 나면서 물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늘에 비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함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랴.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귀와 눈이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는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등으로 떠받치니 지극히 위험했으나 사생의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밝고 보니,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크거나 작거나가 족히 관계될 바 없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나는 또 우리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을 증험해 보고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자신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건륭(乾隆) 45년 경자에는 황제의 수()가 일흔인데 남방으로부터 바로 북으로 열하까지 돌아 왔다. 가을 8 13일은 곧 황제의 천추절(千秋節)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신을 불러 행재소(行在所)까지 와서 뜰에 참여하여 하례하도록 했다. 나는 사신을 따라 북으로 장성을 빠져 주야로 달렸다. 길에서 보니 사방으로부터 공헌(貢獻)하는 수레가 만 대는 될 것 같고, 또 사람은 지고, 약대에는 싣고, 가마에 태우고 가는데, 형세가 풍우와 같았으며 들것에 메고 가는 것은 물건 중에서 더욱 정하고 다치기 쉬운 것들이라 하였다. 수레마다 말이나 노새를 예닐곱 마리씩 끌리고, 가마는 혹 노새 네 마리에 끌려 위에는 누른빛 작은 깃발에 진공(進貢)이란 글자를 써서 꽂았다. 진공물들은 모두 거죽은 붉은 빛 탄자와 여러 빛 모직 옷감과 대 삿자리나 등자리로 쌌는데, 모두 옥으로 만든 기물(器物)들이라 한다. 수레 하나가 길에 넘어져 바야흐로 고쳐 싣는데, 거죽을 싼 등자리가 조금 떨어진 틈으로 보니, 궤짝은 누른 칠을 하여 작은 정자 한 칸만 했다. 가운데는 자유리 보일좌(紫琉璃普一座)라고 썼는데, () 자 아래와 일() 자 위에는 글자가 두서너 자 있어 보였으나 자리 끝이 덮여져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유리 그릇의 크기가 이만큼 할 적에는 다른 여러 수레에 실은 짐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날이 이미 황혼이 되니 더욱 수레들이 길을 다투어 재촉해 달리는데, 횃불이 마주 비치고 방울 소리가 땅을 흔들며 채찍 소리가 벌판을 울리는 가운데 범과 표범을 우리에 집어 넣은 것이 10여 수레나 되는데, 우리에는 모두 창문이 있고 범 한 마리를 넣을 만큼 만들었다. 범들은 모두 쇠사슬로 목을 매어 눈은 누르고 독스러웠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몸뚱이는 늑대같이 나지막하고 텁수룩한 털과 꼬리는 삽살개 같았다. 이 밖에 곰과 여우와 사슴 등속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사슴 중에도 붉은 굴레를 씌워 말 몰듯 몰고 가는 것은 길들인 사슴이다. 악라사(鄂羅斯)라는 개는 높이가 거의 말만 하고, 온 몸의 뼈는 가늘고 털이 짧고 날씬한 것이 우뚝 서니 여윈 정강이는 학같이 보이고, 꼬리는 뱀같이 놀며, 허리와 배는 가느다랗고, 귀로부터 주둥이까지는 한 자나 되는데 이것이 모두 입이었다. 능히 범이나 표범도 죽인다고 한다. 훨씬 큰 닭이 있는데, 모양은 약대와 같고 높이는 서너너댓 자나 되고 발은 약대 발같이 되어 날개를 치면서 하루 3백 리는 간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름을 타계(駝雞)라 한다. 낮에 본 것은 모두 이런 종류로서 상하가 길 가기에 바빠서 무심코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자, 마침 하인들 중에 표범 우는 것을 들은 자가 있어 드디어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과 함께 범 실은 수레를 가 보고서야 비로소 하루에 수없는 수레를 지나 보낸 것이 비단 옥기(玉器)나 보물뿐이 아니라, 역시 사해 만국의 기금(奇禽)과 괴수(怪獸)도 많았던 것을 알았다. 연극 구경을 할 때에 지극히 작은 말 두 마리가 산호수(珊瑚樹)를 싣고 전각 속으로부터 똑똑히 나왔다. 말의 크기는 겨우 두 자에 몸빛은 황백색(黃白色)인데, 갈기머리는 땅에 솔솔 끌리고 울음을 울고 뛰고 달리는 것이 준마(駿馬)의 체통을 갖추었다. 산호수의 가지는 엉성한 것이 말보다 컸다. 아침에 행재소 문 밖으로부터 혼자 걸어서 여관으로 돌아오다가 보니, 부인 하나가 태평차(太平車)를 타고 가는데 얼굴에는 분을 희게 바르고 수놓은 비단 옷을 입었으며, 차 옆에는 한 사람이 맨발로 채찍질을 하면서 차를 모는데 몹시 빨리 갔다. 머리털은 짧아 어깨를 덮었고, 머리털 끝은 모두 말려 들어 양털처럼 되었는데, 금고리로 이마를 둘렀다. 얼굴은 붉고 살찌고 눈은 고양이처럼 둥근데, 수레를 따르면서 구경하는 자들이 복잡하고, 검은 먼지가 날려서 하늘을 덮었다. 처음에는 차를 모는 자의 모양이 이상하므로 미처 차 속에 있는 부인을 살펴 보지 못했는데,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보니, 이는 부인이 아니라 사람 형상을 한 짐승 종류였다. 털손은 원숭이처럼 생겼고, 가진 물건은 접는 부채 같은데, 잠깐 보건대 얼굴은 아주 예쁜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니 노구(老嫗)와 같고 요괴스럽고 사납게 생겼으며 키는 겨우 두 자 남짓한데, 수레의 휘장을 걷어 올려서 좌우를 돌아보는 눈이 잠자리 눈같이 보였다. 대체로 이것은 남방에서 나는 것으로 능히 사람의 뜻을 안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산도(山都 원숭이의 일종)이다.”

라고 한다.

 

 

[C-001]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 ‘다백운루본에는 진공만차기(進貢萬車記)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내가 몽고 사람 박명(博明)에게 이것이 무슨 짐승이냐고 물었더니 박명은 말하기를,

 

옛날에 장군 풍공(豐公) 승액(昇額)을 따라서 옥문관(玉門關)을 나서서 돈황(燉煌)으로부터 4천 리를 떨어진 골짜기에 가서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장막 속에 두었던 목갑(木匣)과 가죽 상자가 없어졌습니다. 당시 같이 간 막려(幕侶)들이 차차 알아보니 잃은 것이 분명했답니다. 군중에서 말이 있기를, ‘이것은 야파(野婆)가 절도해 간 것이라 하므로 군사를 내어 야파를 포위했더니 모두 나무를 타는데, 나는 원숭이처럼 빨랐다.’고 합니다. 야파는 형세가 궁하매 슬피 울면서 즐겨 붙들리지 않고 모두 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죽으니 이래서 잃었던 물건을 모두 찾았는데, 상자나 목갑은 잠가 놓은 그대로 있었고 잠근 것을 열고 보니 속에 기물들도 역시 버리고 다친 것이 없었답니다. 상자 속에는 붉은 분과 목걸이와 머리꽂이 패물들을 많이 넣어 두었고, 아름다운 거울도 있었으며 또 침선(針線)과 가위와 자까지 있었는데, 야파는 대개 짐승으로서 여자를 본떠 치장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은 것이라 합니다.”

한다. 유황포(兪黃圃 유세기(兪世琦). 황포는 호)가 나에게 막북(漠北)의 기이한 구경을 묻기에 나는 타계(駝雞)를 말했더니, 황포는 하례해 말하기를,

 

이것은 먼 서쪽 지방에 사는 기이한 새로서 중국 사람들도 말만 들었을 뿐 그 형상을 보지 못했는데, ()은 외국 사람으로서 능히 보았습니다.”

한다. 산도(山都)를 말했으나 이것은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열하로부터 돌아올 때에 청하(淸河)에 이르러 거리에서 난장이 하나를 보았는데, 키는 겨우 두 자 남짓하고 배는 크기가 북만 하여 불쑥 내밀어서 그림에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 같고, 입과 눈이 모두 낮게 붙었고 팔뚝과 다리도 없이 손과 발이 몸뚱이에 그대로 달렸고 담배를 물고 뽐내면서 걷는데, 손을 펴서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사람을 보면 문득 크게 웃고 홀로 머리를 깎지 않고 뒤통수에 상투를 했으며 선도건(仙桃巾)을 걸쳤다. 무명 도포에 소매가 넓고 배를 통째 들어 내놓고 모양이 옹종한 것이 말로 그 형용이 기괴함을 다할 수 없으니 조물주(造物主)는 가위 장난을 퍽 좋아하는 모양이다. 내가 이것을 황포에게 이야기했더니, 황포와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천생이물인(天生異物人)으로서 자라의 놀음을 하는 것인데, 지금 거리에서는 이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다. 나의 평생에 괴이한 구경은 열하에 있을 때만 한 것이 없었으나 그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 많고, 문자로써는 능히 형용할 수 없어서 모두 빼놓고 기록하지 못하니 가히 한스러운 일이다. 평계(平溪 연암서당(燕巖書堂) 앞 시내 이름)의 비 내리는 집에서 연암은 쓰다.

 

 

[C-001]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승액(昇額) : 만주 사람. 풍신액(豐申額)인 듯하나 미상.

[D-002]포대화상(布袋和尙) : 불교에서 말하는 일곱 복신(福神) 중의 하나.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상기(象記)

 

 

만일 괴상스럽고 잡스럽고 우습고 기이하며 거룩한 것을 구경하려면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에 있는 상방(象房)에 가 봐야 할 것이다. 내가 북경에서 코끼리를 본 것이 열여섯 마리인데, 모두 쇠사슬로 발을 묶어서 움직이는 모양을 보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코끼리 두 마리를 열하 행궁(行宮) 서쪽에서 보았던 바 온 몸을 꿈틀거리면서 걸어 가는 것이 풍우(風雨)가 움직이는 듯 몹시 거창스러웠다. 내가 언젠가 동해(東海)에 나갔을 때 파도 위에 말처럼 우뚝우뚝 선 것이 수없이 많으며 집채같이 큰 것이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해돋기를 기다려 자세히 보려고 했는데, 해가 돋기도 전에 그것들은 바닷속으로 숨어 버렸었다. 이번에 코끼리를 십보 밖에서 보았는데 그때 동해에서 보았던 것과 방불할 만큼 크게 생겼다. 몸뚱이는 소 같고 꼬리는 나귀와 같으며, 약대 무릎에, 범의 발톱에, 털은 짧고 잿빛이며 성질은 어질게 보이고, 소리는 처량하고 귀는 구름장같이 드리웠으며, 눈은 초생달 같고, 두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름은 되고, 길이는 한 장() 남짓 되겠으며,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이 자벌레 같고, 코의 부리는 굼벵이 같으며, 코끝은 누에 등 같은데, 물건을 끼우는 것이 족집게 같아서 두루루 말아 입에 집어 넣는다. 때로는 코를 입부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다시 코 있는 데를 따로 찾아보기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코 생긴 모양이 이럴 줄이야 누가 뜻했으랴. 혹은 코끼리 다리가 다섯이라고도 하고, 혹은 눈이 쥐눈 같다고 하는 것은 대개 코끼리를 볼 때는 코와 어금니 사이를 주목하는 까닭이니, 그 몸뚱이를 통틀어서 제일 작은 놈을 집어가지고 보면 이렇게 엉뚱한 추측이 생길 만하다. 대체로 코끼리는 눈이 몹시 가늘어서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부리는 눈 같으나 그의 어진 성품은 역시 이 눈에 있는 것이다. 강희 시대에 남해자(南海子)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는데, 길을 들일 수 없어서 황제가 노하여 범을 코끼리 우리로 몰아 넣게 했더니, 코끼리가 몹시 겁을 내어 코를 한 번 휘두르자 범 두 마리가 제 자리에서 넘어져 죽었다고 한다. 코끼리가 범을 죽이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범의 냄새를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 것이 잘못 부딪쳤던 것이다. 아아, 세간 사물(事物) 중에 털끝같이 작은 것이라도 하늘이 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어찌 다 명령해서 냈을까보냐. 하늘은 형체로 말한다면 천()이요, 성질로 말한다면 건()이요, 주재(主宰)하는 이는 상제(上帝), 행동하는 것은 신()이라 하여 그 이름이 여러 가지요, 또 일컫는 명색이 너무 친밀하다. 허물이 없이 말하자면 이()와 기()로서 화로와 풀무로 삼고, 생장과 품부를 조물(造物)이라 하여 하늘을 마치 재주 있는 공장이에 비유하여 망치도끼칼 같은 것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역경(易經)에 말하기를,

 

하늘이 초매(草昧)를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초매란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형태는 안개가 낀 듯하여 마치 동이 틀 무렵 같아서 사람이나 물건을 똑바로 분간할 수 없다 하니, 나는 알지 못하겠다. 하늘이 캄캄하고 안개 낀 듯 자욱한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면 무엇일까. 맷돌에 밀을 갈 때에 작고 크거나 가늘고 굵거나 할 것 없이 뒤섞여 바닥에 쏟아지는 것이니 무릇 맷돌의 작용이란 도는 것 뿐인데, 가루가 가늘고 굵은 데야 무슨 마음을 먹었겠는가.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말하기를,

 

뿔이 있는 놈에게는 이를 주지 않았다.”

하여 만물을 창조하는 데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하나 이것은 잘못이다. 감히 묻노니,

 

이를 준 자는 누구일 것인가.”

한다면, 사람들은,

 

하늘이 주었지요.”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하늘이 이를 준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다면, 사람들은,

 

하늘이 이것으로 먹이를 씹으라고 주었지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다시,

 

이를 가지고 물건을 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면, 사람들은,

 

이는 하늘이 낸 이치랍니다. 금수는 손이 없으므로 반드시 그 입을 땅에 구부려 먹을 것을 찾게 된 것이요, 그러므로 학의 정강이가 높고 보니, 부득이 목이 길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래도 입이 땅에 닿지 않을까 하여 입부리를 길게 해준 것이요, 만일 닭의 다리가 학과 같았다면 할 수 없이 마당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라오.”

하고 말하리라.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대들이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개 같은 것에나 맞는 이치다. 하늘이 이를 준 것이 반드시 구부려서 무엇을 씹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면 코끼리에게는 쓸데없는 어금니를 주어서 입을 땅에 닿으려고 하면 이가 먼저 땅에 걸리니 물건을 씹는 데도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가.”

혹은 말하기를,

 

그것은 코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리라. 그러나 나는 다시,

 

긴 어금니를 주고서 코를 빙자하려면 차라리 어금니를 없애고 코를 짧게 한 것만 못할 것이 아닌가.”

했더니, 이때에야 말하는 자는 자기의 주장을 우겨대지 못하고 수그러졌다. 이는 언제나 생각이 미친다는 것이 소개뿐이요, 거북기린 같은 짐승에게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코끼리는 범을 만나면 코로 때려 눕히니, 그 코는 천하에 상대가 없으나 쥐를 만나면 코를 가지고도 쓸모가 없어 하늘을 쳐다보고 멍하니 섰다니, 이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하면 아까 말한 소위 하늘이 낸 이치에 맞다고는 못할 것이다. 대체로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에 있어 모를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천하 사물이 코끼리보다도 만 배나 복잡함에랴. 그러므로 성인이 역경을 지을 때 코끼리 상() 자를 따서 지은 것도 이 코끼리 같은 형상을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연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C-001]상기(象記) : ‘박영철본에는 이 편이 희본명목기(戲本名目記) 밑에 있었으나, 이제 수택본을 따라 여기에 옮겼다.

[D-001]남해자(南海子) : 북경 숭문문(崇文門) 남쪽에 있는 동산.

[D-002]초매(草昧) : 천지가 개벽되면서 만물이 혼돈한 현상.

[D-003]역경》 …… 것이다 : 역경에 사상(四象)이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가 육십사괘를 낳는다는 사물 변화의 이치를 말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승귀선인행우기(乘龜仙人行雨記)

 

 

14일에 피서산장(避暑山莊)에 들어가서 바라다 보니 황제는 누런 휘장을 늘인 전각 속에 깊이 들어 앉았다. 뜰 밑 반열에는 사람도 드문데, 홀로 노인 하나가 상투에 선도건(仙桃巾)을 걸고 누른 장삼에 검고 모난 직령을 달아 입었는데, 모두 검은 선을 둘렀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띠며, 붉은 신을 신고, 반백(半白) 수염이 가슴을 지났으며, 지팡이 끝에는 금호로(金葫蘆)와 비단 축()이 달렸고, 오른손에는 파초선(芭蕉扇)을 쥐고, 큰 거북 위에 서서 두루 뜰을 도는데, 거북은 머리를 위로 젖히고 무지개처럼 물을 뿜는다. 거북은 검푸른 빛에 크기가 맷방석만 하고 처음에는 가는 비를 뿜어 전각의 처마와 기와를 적시고 물방울이 튀어서 안개처럼 자욱하다. 혹은 화분을 향하여 뿜기도 하고 혹은 가산(假山)을 향해서 뿌리기도 한다. 조금 있더니 비가 더욱 커져서 처마 물은 폭우처럼 쏟아져 햇빛이 비낀 전각 모퉁이는 수정 주렴을 드리운 듯하고, 전각 위의 누른 기와는 흘러내릴 듯이 물이 많다. 동산의 동쪽 나무 잎은 더욱 밝고 화려하며 물은 한 뜰에 가득하여 흡족하게 축인 뒤에 오른쪽 장막 속으로 들어갔다. 황문(黃門) 수십 명이 각각 대비를 들고 마당에 물을 쓰는데, 거북의 배에 비록 물을 백 섬이나 간직하더라도 이같이 뿌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사람이 입은 옷은 적시지 않았으니, 그 비를 오도록 하는 공로가 가위 귀신이라 하겠다. 만일 사해에 비를 바라는 것이 이렇게 한 뜰을 적시는 것에 그친다면 역시 일은 다 되었다 하리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년춘등기(萬年春燈記)

 

 

황제가 동산 동쪽에 있는 별전(別殿)으로 옮겨 거둥하는데, 1천 관리들이 피서산장을 나와서 모두 말을 타고 궁장(宮墻)을 따라 5리나 가서 원문(苑門)으로 들어갔다. 좌우에는 부도(浮圖)가 있어 높이 예닐곱 길이요, 불당과 패루(牌樓)가 몇 리를 뻗쳤으며 전각 앞에는 누른 장막이 하늘에 연했는데, 장막 앞에는 모두 흰 천막을 침침하게 둘러쳤고, 천백 개의 채색 등불이 걸려 있다. 앞에는 붉은 빛 궐문이 세 곳이나 섰는데, 높이가 모두 팔구 길은 되었다. 풍악을 아뢰고 잡희(雜戲)를 시작하자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누른 빛 큰 궤짝을 붉은 궐문에 다니 갑자기 궤 밑으로부터 크기가 북만 한 등불 하나가 떨어지자 등불은 노끈에 이어져서 그 끝에서는 저절로 불이 붙어 탄다. 노끈을 따라 타 올라가서 궤짝 밑에 닿으니 궤짝 밑으로부터 또 한 개 둥근 등불이 매달리고 노끈에 붙은 불은 그 등불을 태워 땅에 떨어뜨린다. 궤짝 속으로부터 또 쇠로 만든 채롱 주렴이 드리워지는데 주렴 면에는 모두 전자(篆字)로 수()() 글자를 썼고, 불은 글자에 붙어 새파란 불에 한동안 타다가 수복 자 불은 스스로 꺼져 땅에 떨어진다. 또 궤짝 속으로부터 연주등(聯珠燈) 백여 줄이 드리우는데, 한 줄에 450등씩 되었고 등불 속은 차례대로 저절로 타면서 일시에 환하게 밝았다.  1천여 명의 미모의 남자들이 있어 수염은 없고 비단 도포에 수놓은 비단 모자를 쓰고 각각 정() 자 지팡이 양쪽 끝에 모두 조그만 붉은 등불을 달고, 나갔다 물러섰다 하여 군진(軍陣) 모양을 하더니 졸지에 삼좌(三座) 오산(鼇山)으로 변했다가 졸지에 변해서 누각(樓閣)이 되고, 졸지에 네모진 진형(陣形)으로 변한다. 이미 황혼이 되자 등불 빛은 더욱 밝아지더니 갑자기 만년춘(萬年春)이란 석 자로 변했다가 또 갑자기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로 변하고 졸지에 변하여 두 마리 용이 되었는데, 비늘과 뿔과 발톱과 꼬리가 공중에서 꿈틀거린다. 경각(頃刻) 사이에 변환하고 이합(離合)하되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글자 획이 완연(宛然)한데, 다만 수천 명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것은 잠시 동안의 놀음이지만 그 기율(紀律)의 엄한 것이 이와 같은데, 더욱이 이 법으로 군진에 임한다면 천하에 누가 감히 다칠 것이랴. 그러나 덕에 있는 것이요, 법에 있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놀음으로 천하에 뵈일 것이랴.

 

 

[D-001]오산(鼇山) : 자라 등 위에 썼다는 삼신산(三神山)의 가장.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매화포기(梅花砲記)

 

 

날이 이미 황혼이 되자 만포(萬砲)가 동산 안에서 나오는데,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매화꽃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치 숯불을 부채질하면 불꽃이 튀어 흐르는 것 같았다.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웃음을 짓는 듯 바람을 맞이하여 춤을 추는 듯도 하려니와 마치 노포(魯褒)의 돈이 이지러진 듯 토끼 주둥이가 살아나지 못한 채(이지러진 달을 말함) 이어져서, 온갖 화병(花甁)을 진열하고는 여사(女士)가 그 품위의 상하를 평정하는데, 화방(花房)에 드리운 술이 분명하고 봉오리에 찍힌 검은 점이 가느다란 듯이 된 것들이 모두 불꽃으로 화하여 난다. 조수(鳥獸)와 충어(蟲魚)의 족속이 날아가고 뛰놀고 하는 것이 모두 정상(情狀)을 갖추었는데, 새는 혹 날개를 벌리기도 하고, 입부리로 깃을 문지르기도 하며, 혹 발톱으로 눈깔을 비집기도 하고 혹 벌과 나비를 쫓기도 하여 혹 꽃과 과실을 쪼아 먹기도 한다. 짐승은 모두 뛰놀고 버티며 입을 벌리고 꼬리를 펴서 천태와 만상이 모두 꽃불로 펄펄 날아 가서 반공에 이르러서는 시름시름 꺼지곤 한다. 대포 소리는 더욱 커지고, 불빛은 더욱 밝아지면서 1백 신선과 1만 부처가 날아 올라가 혹은 뗏목을 타고, 혹은 연잎 배를 타며, 혹은 고래와 학을 타고, 혹은 호로병(葫蘆甁)을 들고, 혹은 보검(寶劍)을 차며, 혹은 석장(錫杖)을 짚고, 혹은 맨발로 갈대를 밟기도 하며, 혹은 손으로 범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허공에 떠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는데, 눈으로 다 볼 새가 없이 번득번득 눈이 어른거렸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매화포(梅花砲)가 좌우로 벌여 있는 것은 그 통이 혹은 크고, 혹은 작아서 긴 놈은 서너 길이 되고, 짧은 놈은 서너 자가 되어 우리나라 삼혈총(三穴銃)같이 만들었고, 불꽃이 반공에서 가로 퍼지는 것이 우리나라 신기전(神機箭)과 같데그려.”

한다. 불이 다 꺼지기 전에 황제는 일어나 반선(班禪)을 돌아다 보고 잠깐 이야기를 하더니 가마를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때는 바야흐로 어두웠는데, 앞에서 인도하는 등불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로 여든한 가지 놀음에 매화포로써 끝을 맺는 바 이것을 구구대경회(九九大慶會)라고 불렀다.

 

 

[D-001]노포(魯褒) : ()의 학자. 자는 원도(元道). 전신론(錢神論)을 지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납취조기(蠟嘴鳥記)

 

 

납취조(蠟嘴鳥)는 비둘기보다는 작고, 메추리보다는 큰데, 회색빛에 푸른 날개요, 큰 입부리가 납초와 같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 오동조(梧桐鳥)라고도 하는데, 능히 사람의 말을 알아들어 무릇 가르치고 시키면 소리를 응해 시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길들여 거리에서 놀리는 자가 골패 서른두 개를 그릇 속에 담고 손바닥으로 비벼서 섞어 놓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골패 한 개를 잡아서 무슨 골패인지 알고 난 연후에 그 골패를 새 놀리는 자에게 주면 새 놀리는 자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보인 뒤에 다시 그릇 속에 넣고 손으로 바삐 흩어지도록 섞은 다음 새를 불러 그 골패를 가져 오라고 하면, 새는 즉시로 그릇 속에 들어가 입부리로 그 골패 쪽을 물고 날아 나와 나무 가름대 위에 올라 앉는데, 그것을 취해 보면 과연 알아 두었던 그 골패 쪽이었다. 또 오색기(五色旗)를 세워놓고 새로 하여금 아무 빛 깃대를 뽑아 오라고 하면 역시 대답을 하고, 그 깃대를 뽑아 사람에게 준다. 종이로 만든 겹 처마의 누른 집을 실은 수레를 코끼리에게 메우고, 새로 하여금 수레를 몰라 하면 새는 머리를 수그리고 코끼리 배 밑으로 들어가 입부리로 코끼리 두 다리 틈을 물고 이것을 민다. 무릇 맷돌을 갈고 말타고 활쏘고 범춤사자춤을 추어 사람의 지휘에 따르는데, 하나도 착오가 없었다. 또 종이로 구중(九重) 합문(闔門)이 있는 조그만 전각을 만들고 새로 하여금 전각 속에 들어가 무슨 물건을 가져 오라 하면, 새는 즉시 날아 들어가 호령에 따라 물고 나와서 탁자 위에 벌여 놓는다. 비록 언어는 앵무(鸚鵡)만은 못하나 그 교묘한 꾀는 오히려 나은 것 같았다. 얼마 동안 부리고 나니 새는 열을 이기지 못하여 입을 버리고 혀를 빼물고 털과 깃이 땀에 젖었다. 매양 한 번 놀릴 때마다 희롱으로 깨 한 알씩을 먹이는데, 새 놀리는 자는 매양 자기 입에서 꺼내 주는 것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희본명목기(戲本名目記)

 

구여가송(九如歌頌)광피사표(光被四表)복록천장(福祿天長)선자효령(仙子效靈)해옥첨주(海屋添籌)서정화무(瑞呈花舞)만희천상(萬喜千祥)산령응서(山靈應瑞)나한도해(羅漢渡海)권농관(勸農官)담폭서향(薝蔔舒香)헌야서(獻野瑞)연지헌서(蓮池獻瑞)수산공서(壽山拱瑞)팔일무우정(八佾舞虞庭)금전무선도(金殿舞仙桃)황건유극(皇建有極)오방정 인수(五方呈仁壽)함곡기우(函谷騎牛)사림가락사(士林歌樂社)팔순분의권(八旬焚義券)이제공당(以躋公堂)사해안란(四海安瀾)삼황헌세(三皇獻歲)진만년상(晉萬年觴)학무정서(鶴舞呈瑞)복조재중(復朝再中)화봉삼축(華封三祝)중역내조(重譯來朝)성세숭유(盛歲崇儒)가객소요(嘉客逍遙)성수면장(聖壽綿長)오악가상(五岳嘉祥)길성첨요(吉星添耀)후산공학(緱山控鶴)명선동(命仙童)수성기취(壽星旣醉)낙도도(樂陶陶)인봉정상(麟鳳呈祥)활발발지(活潑潑地)봉호근해(蓬壺近海)복록병진(福祿幷臻)보합대화(保合大和)구순이취헌(九旬移翠巘)여서구가(黎庶謳歌)동자상요(童子祥謠)도서성칙(圖書聖則)여환전(如環轉)광한법곡(廣寒法曲)협화만방(協和萬邦)수자개복(受玆介福)신풍사선(神風四扇)휴징첩무(休徵疊舞)회섬궁(會蟾宮)사화정서과(司花呈瑞菓)칠요회(七曜會)오운롱(五雲籠)용각요첨(龍閣遙瞻)응월령(應月令)보감대광명(寶鑑大光明)무사삼천(武士三千)어가환음(漁家歡飮)홍교현대해(虹橋現大海)지용금련(池湧金蓮)법륜유구(法輪悠久)풍년천강(豐年天降)백세상수(百歲上壽)강설점년(降雪占年)서지헌서(西池獻瑞)옥녀헌분(玉女獻盆)요지향세계(瑤池香世界)황운부일(黃雲扶日)흔상수(欣上壽)조제경(朝帝京)대명년(待明年)도왕회(圖王會)문상성문(文象成文)태평유상(太平有象)두신기취(杜神旣醉)만수무강(萬壽無疆).

8 13일은 곧 황제의 만수절(萬壽節)이다. 이때 전 3일 후 3일에도 한가지로 연극놀이를 했는데, 모든 관리들은 오경(五更)에 대궐로 들어가 황제에게 문후(問候)하고 묘시(卯時 오전 6) 정각에 반열에 참여하여 연극을 구경하고 미시(未時 오후 2) 정각에 파하고 나온다. 희본(戲本)은 모두 조신(朝臣)들이 황제에게 바친 시와 부()와 가사(歌辭) 같은 것으로 연극을 만들어 하는 것이다. 따로 무대를 행궁(行宮) 동쪽 누각(樓閣)에 설치했는데, 처마 높이는 다섯 길이 넘는 기를 세울 만하고, 넓이는 수만 명이 들어설 만했다. 이 무대를 세웠다가 허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이 쉽게 된다. 무대의 좌우에는 나무로 가산(假山)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전각과 같고 이상한 나무 숲이 그 위에 얽혀 비단을 오려서 꽃을 만들고 술을 달아서 과실을 만들었다. 연극 한 막()씩을 할 때마다 배우들이 무려 수백 명씩 나오는데, 모두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었고 연극이 바뀔 때마다 옷도 바꾸어 입는데, 모두 한족(漢族)들의 의관이다. 연극을 장치할 때는 잠시 비단 막으로 무대를 가리면 무대 위는 조용하여 인기척이 없고, 다만 신소리만 들리다가 조금 지나서 막이 열리면 무대에는 산이 생기고,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소나무가 서고 햇빛이 나는 듯이 되는데 이것은 소위 구여가송(九如歌頌)이다. 노래는 모두 우조(羽調)의 높은 음으로서 악률(樂律)이 높아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 같아 청탁(淸濁)과 서로 화()하는 음이 없었다. 악기는 모두 생황피리경쇠거문고비파 등의 소리로서 다만 북소리만 들리지 않고, 간간이 바다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산이 옮겨지고 바다가 없어지는데 한 가지도 복잡한 것이 없이 정연하였다. 황제와 요순의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본을 뜨지 않은 의관이 없이 제목에 따라 연극을 했다. 왕양명(王陽明)은 말하기를,

 

()는 순의 한 편 연극이요, ()는 무왕의 한 편 연극일진대 걸()()()() 같은 폭군들에게도 한 편씩의 희본이 있을 것이다.”

했는데, 오늘 노는 연극은 곧 오랑캐의 한 편 희본일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이미 계찰(季札 ()의 명신)과 같은 지식이 없으니, 그들의 도덕과 정치를 무엇이라 논할 수 없으나 대체로 음악의 성률이 높고 외로움이 극도에 달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귀지 못할 것이요, 노래가 맑으면서도 너무 격하면 아랫사람이 숨을 곳이 없을 것인즉, 중국에 전래하던 선왕(先王)의 음악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겠다.

 

 

[D-001]왕양명(王陽明) : 명의 학자 왕수인(王守仁). 양명은 호.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https://blog.naver.com/karamos/222587246253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희기(幻戲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희기(幻戲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희기(幻戲記) 1...

blog.naver.com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희기(幻戲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희기(幻戲記)

1. 환희기서(幻戲記序)

2. 환희기(幻戲記)

3. 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

 

 

 

환희기서(幻戲記序)

아침에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를 지나는데 패루 아래 만인이 거리에 둘러서서 웃음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웬 사람이 싸우다가 졸지에 죽어서 길에 가로 넘어진 것을 보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걸음을 재촉해서 지나노라니, 종자(從者)가 뒤에서 갑자기 쫓아오면서 부르기를, 괴이한 구경거리가 있다고 한다. 나는 멀리서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종자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하늘 위에 가서 복숭아를 훔치려다가 지키는 자에게 얻어맞고서 땅에 툭 떨어졌답니다.”

한다. 나는 해괴스럽다고 꾸짖고 돌아다보지도 않고 왔더니, 그 이튿날 또 그곳을 가는데 대체로 천하의 기이한 재주와 음란한 장난과 잡스러운 연극 패들이, 모두 천추절에 열하로 가려고 기다리면서 날마다 패루에 나와 백 가지 노름을 연습하고 있었다. 비로소 어제 종자가 본 것이 곧 요술(妖術)의 한 가지인 것을 알았다. 대개 상세(上世)로부터 이런 데 능한 자가 있어 소귀(小鬼)를 부려 사람의 눈을 속였으므로 이것을 요술이라 한다. ()의 시절에 유루(劉累 술사의 이름)는 용을 길들여 공갑(孔甲 하의 임금)을 섬겼고, 주 목왕(周穆王) 때에 언사(偃師 술사의 이름)란 자가 있었고, 묵적(墨翟)은 군자인데 능히 목연(木鳶)을 날렸으며, 후세에도 좌자(左慈)비장방(費長房 동한(東漢) 때의 요술사)의 무리는 이런 술법을 가지고 사람을 놀렸고, ()()의 오괴(迂怪)스러운 선비들은 신선 이야기로써 당시 임금들을 의혹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요술이다. 당시에 능히 이것을 깨닫지 못한 자는 그 술법이 서역(西域)에서 나왔으므로, 구라마십(鳩羅摩什)과 불도징(佛圖澄), 달마(達摩) 같은 자들이 더욱 요술을 잘할 줄 알았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이런 술법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자는 스스로 왕법(王法) 밖에 두어서 이를 주절(誅絶)시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답하기를, “이는 중국 땅이 커서 한없이 넓으며 끝이 없어 이런 것도 같이 길러내므로 정치에 병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만일 천자가 좀스러워서 이런 것을 자로 계교하고 깊게 추궁한다면, 도리어 깊숙한 곳에 잘 보이지 않게 살다가 때로 나와서 세상을 흐려 놓을 것이니, 천하의 근심이 클 것 이므로 날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장난삼아 구경하게 하면 비록 부인이나 어린이라도 이것을 묘술로 알게 되어, 족히 마음을 놀래고 눈을 현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임금된 자로서 세상을 어거하는 방법이 아니겠소.”

하고는, 드디어 그 구경한 바 여러 가지 요술 스무 가지를 기록하여 장차 우리나라의 이 노름을 못 본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C-001]환희기서(幻戲記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언사(偃師) : 산 사람과 다름없는 인형을 만들었다.

[D-002]묵적(墨翟) : 전국 때 공자와 병칭하던 학자로서 겸애설(兼愛說)을 주창한 철인.

[D-003]구라마십(鳩羅摩什) : 구마라십(鳩摩羅什)의 오기(誤記). 서역 귀자(龜玆)의 명승.

[D-004]불도징(佛圖澄) : () 때 천축(天竺)의 명승. 어떤 본에는 불국증(佛國證)으로 되었으나 잘못되었다.

[D-005]달마(達摩) : 양 무제(梁武帝) 때 인도로부터 들어온 명승. 선종(禪宗)의 시조.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환희기(幻戲記)

 

 

요술쟁이가 대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정하게 닦은 뒤에 얼굴을 정제하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바닥을 치고 이리저리 뒤집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뒤에, 왼손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은 환약을 만지고 이나 벼룩을 잡듯이 마주 비비니, 갑자기 가느다란 물건이 생겨 겨우 좁쌀낱만 했다. 연거푸 이것을 비비니 점점 커져서 녹두알만 해지고 차차 앵두알만 하다가 다시 빈랑(檳榔)만 하더니 차츰 달걀만 해졌다. 두 손바닥으로 재빨리 비벼 굴리니 둥근 것이 더 커져서 노랗고 흰 것이 거위알만 해졌다. 조금 있더니 이번에는 차차로 커지지 않고 별안간 수박만 하게 된다. 요술쟁이는 두 무릎을 꿇고 가슴을 벌리고 더 빨리 비벼 장고를 끌어안은 듯 팔뚝이 아플 만하여 그치더니, 이내 탁자 위에 놓는데 그 몸뚱이는 둥글고 빛은 샛노랗고, 크기는 동이만 한 것이 다섯 말 들이는 되어 보이며, 무게는 들 수가 없고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어 돌도 아니요 쇠도 아니며, 나무도 아니요 가죽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둥근 것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냄새도 없고 향기도 없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만치 제공(帝工) 같았다. 요술쟁이는 천천히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그 물건을 만지는데, 부드럽게 굴리고 가만히 쓰다듬으니 물건은 부드러워지고, 손을 슬며시 대니 가볍기가 물거품 같아 점점 줄어들고 사라져서, 잠깐 사이에 다시 손바닥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비비다가 한 번 튀기니 즉시 사라져 버린다.

요술쟁이는 사람을 시켜 종이 몇 권을 길게 찢어서 큰 통에 있는 물 속에 집어 넣고 손으로 그 종이를 빨래하듯 저으니, 종이는 풀어지고 흐트러져서 흙을 물 속에 넣은 것과 같았다.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 통 속에 있는 종이가 물과 섞인 것을 보이니 가위 한심한 일이다. 이때 요술쟁이는 손뼉을 치고 한 번 웃더니 두 소매를 걷고 두 손으로 통에 있는 종이를 건져 내는데, 마치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이 하니, 종이는 서로 이어져 나오는데 처음에 길게 찢을 때와 같고 이은 흔적이 없었다. 어느 사람이 풀로 발랐는지 띠와 같이 수백 발이나 되는 것을 땅바닥에 풀어놓아 바람에 펄럭거렸다. 다시 통 속을 보니 맑고 깨끗하여 찌꺼기 하나 없이 새로 길은 물과 같았다.

요술쟁이는 기둥을 등지고 서서 사람을 시켜 손을 뒤로 젖혀 붙이고 두 엄지손가락을 묶으라 했다. 기둥은 두 팔 사이에 있고 두 엄지손가락은 검푸르게 되어 아픔을 참지 못하니,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다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금 있더니 요술쟁이는 기둥에서 떨어져 서는데 손은 가슴 앞에 있고 묶은 데는 전이나 다름없이 아직 풀리지 못했다. 손가락의 피는 한 곳으로 모여서 빛은 더욱 검붉어 몹시 아픈 것을 견디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이에 노끈을 풀어주니 혈기가 점점 통하고 노끈 자리는 오히려 붉었다. 우리 일행인 역부(驛夫)가 눈을 모아 자세히 보다가 심중으로 노하여, 얼굴빛을 변해 의분을 내고는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어 큰 목소리로 요술쟁이를 불러 먼저 돈을 주고는, 다시 한 번 자세히 보기를 요구했다. 요술쟁이는 원망하는 듯이,

 

내가 너를 속이지도 않았는데 너는 나를 못 믿으니 네가 맘대로 나를 묶어 보려무나.”

한다. 역부는 분기를 내어 먼저 노끈은 던져버리고 자기가 가진 채찍을 끌러 입에 물어 축인 다음 요술쟁이를 붙들어 등에 기둥을 지우고 뒷 손을 젖혀서 묶는데 먼젓번보다 훨씬 세게 묶었다. 요술쟁이는 아프다고 소리를 치는데 뼛속까지 아파서 콩알만 한 눈물이 떨어진다. 역부가 크게 웃으니 구경꾼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벗는 것을 볼 사이도 없이 요술쟁이는 벌써 기둥을 떠나 서 있고 묶은 데는 아직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런 신통한 것을 세 번이나 보였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술쟁이는 둥근 수정 구슬 두 개를 탁자 위에 놓았는데 구슬을 계란보다 조금 작았다. 한 개를 입을 벌리고 집어 넣으니 목구멍은 좁고 구슬은 커서 삼키지 못하고 구슬을 토해 내어 도로 탁자 위에 놓았다. 다시 광주리 속에서 계란 두 개를 내어 눈을 부릅뜨고 목을 늘이고서 알 하나를 삼키는데, 마치 닭이 지렁이를 삼키는 것 같고 뱀이 두꺼비 알을 삼키는 것 같아 목 속에 걸려서 거죽으로 혹이 달린 것 같았다. 다시 알 하나를 삼키니 과연 인후를 틀어막아 재채기하고 구역질하며, 목에 핏대가 서자 요술쟁이는 후회하고 살고 싶지 않은 듯이 대 젓가락으로 목구멍을 쑤시니 젓가락이 꺾어져 땅에 떨어진다. 이제 어쩔 수가 없어 입을 벌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는데 목구멍 속에는 조금 흰 것이 드러난다. 가슴을 치고 목을 두드리며, 답답하고 쩔쩔매는 꼴을 보고 사람들은,

 

조그만 재주를 경솔히 자랑하다가 아아, 이제는 죽는구나.”

하였다. 요술쟁이는 가만히 귀가 가려운 듯이 듣더니 귀를 기울이고 긁는 것이 무슨 의심이 있는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귓구멍을 후벼 흰 물건을 끄집어 내니 과연 계란이었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오른손으로 계란을 쥐고 여러 사람 앞에 두루 보이더니, 왼쪽 눈에 넣었다가 오른편 귀에서 뽑아내고 오른편 눈에 넣었다가 왼편 귀에서 뽑아내며, 콧구멍에 넣었다가 뒤통수로 뽑아내는데 목에는 아직도 계란 한 개가 남아 있었다.

요술쟁이는 흰 흙 한 덩이로 땅에 큰 동그라미를 그어 여러 사람들을 동그라미 밖에 둘러앉게 했다. 요술쟁이는 이때 모자를 벗고 옷을 끄르고 시퍼렇게 간 칼을 내어 땅 위에 꽂아 놓고 다시 댓가지로 목을 쑤셔 계란을 깨뜨리려 했다. 땅을 버티고 서서 한 번 토해도 알은 종내 나오지 않아 이에 그 칼을 빼어 좌에서 우로 휘두르고 우에서 좌로 휘두르다가, 공중을 쳐다보고 한 번 던져 이것을 손바닥으로 받더니, 또 한 번 높이 던지고는 하늘을 향하여 입을 벌리니 칼 끝이 바로 떨어져 입 속에 꽂힌다. 이때에 여러 사람들은 얼굴빛을 변하여 모두 벌떡 일어나고 깜짝 놀라 말이 없는데, 요술쟁이는 고개를 젖히고 두 팔을 늘이고 뻣뻣이 한참 선 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한참 있다가 칼을 삼키는데, 병을 기울여 무엇을 마시듯 목과 배가 서로 마주 응하는 것이 성난 두꺼비 배처럼 불룩거렸다. 칼고리가 이에 걸려 칼자루만 넘어가지 않고 남아 있다. 요술쟁이는 네 발로 기듯이 칼자루를 땅에 쿡쿡 다져 이와 고리가 맞부딪쳐 딱딱 소리가 났다. 또 다시 일어나서 주먹으로 칼자루 머리를 치고서 한 손으로 배를 만지고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내두르니, 배 속에서 칼이 오르내리는 것이 살가죽 밑에서 붓으로 종이에 줄을 긋는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은 가슴이 섬뜩하여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어린애들은 무서워서 울면서 안 보려고 엎어지고 기어서 달아났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손뼉을 치고 사방을 돌아보고 늠름하게 바로 서서 이내 천천히 칼을 뽑아 두 손으로 받들어 들며, 여러 사람들의 바로 눈 앞에 두루 보이면서 인사를 하는데, 칼 끝에 붙은 핏방울에는 아직도 더운 기운이 무럭무럭 났다.

요술쟁이는 종이를 나비 날개처럼 수십 장을 오리고 손바닥 속에서 비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고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한 어린이에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라 하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니, 그 어린이는 발을 구르면서 울었다. 요술쟁이는 웃으면서 손을 떼니 어린이는 울다가 토()하고 또 울다가는 토하는데, 청개구리를 연달아 수십 마리를 토하여 모두 땅바닥에서 뛰놀곤 하였다.

요술쟁이는 탁자 위를 정하게 닦더니 붉은 탄자 보자기를 툭툭 털어 탁자 위에 펴놓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뼉을 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보였다. 요술쟁이는 천천히 탁자 앞으로 와서 한 손으로 보자기 복판을 누르고 한 손으로는 보자기 귀퉁이를 집어 올려 젖히니, 붉은 새 한 마리가 한 번 울면서 남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또 한 번 손을 동쪽으로 쳐드니 푸른 새가 동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손을 보자기 밑에 집어 넣어 가만히 참새 한 마리를 집어내는데 빛은 희고 입부리는 붉었다. 두 발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요술쟁이의 수염을 움켜잡았다. 요술쟁이가 수염을 쓰다듬으니 새는 다시 요술쟁이의 왼쪽 눈을 쪼았다. 요술쟁이는 새를 버리고 눈을 문지르니 새는 서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요술쟁이는 분해서 한숨을 쉬면서 다시 가만히 손을 넣어 검정 참새 한 마리를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다가, 잘못해 놓쳐서 참새가 땅에 떨어져 돌아서 탁자 밑으로 들어가니, 어린이들이 서로 참새를 붙잡으려고 하자 새는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요술쟁이는 분이 나서 보자기를 집어 치우니, 수없는 집비둘기들이 한꺼번에 날개를 치면서 나와 빙빙 돌다가 지붕 처마 위에 모여 앉았다.

요술쟁이는 작은 주석병을 가지고 오른손으로 물 한 대접을 떠서 병 주둥이에 철철 넘도록 붓더니, 대접을 탁자 위에 놓고 대젓가락을 가지고 병 밑을 찌르니, 물이 병 밑으로 방울져 흐르는데 조금 있다가 낙숫물처럼 줄줄 흘렀다. 요술쟁이는 고개를 젖히고 병 밑을 입으로 부니 새던 물이 뚝 그쳤다. 요술쟁이는 공중을 향해서 옆으로 흘겨보면서 입 속으로 주문(呪文)을 외니, 물은 병 주둥이로부터 몇 자 높이나 솟아 땅바닥에 가득히 쏟아졌다. 요술쟁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솟아오르는 물 중간을 움켜 잡으니, 물은 중간이 끊어지면서 꾸부러져 병 속으로 들어갔다. 요술쟁이는 다시 대접을 가져다가 물을 도로 따르니, 병에 든 물의 분량은 처음과 같고 땅바닥에 물이 흐른 자국은 몇 동이나 쏟은 것 같았다.

요술쟁이는 금고리 두 개를 내어 탁자 위에 놓더니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서 이 고리를 보였다. 크기는 두 뼘이나 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둥글둥글 한 것이 천작(天作)으로 되었다. 요술쟁이는 이때 두 손을 쫙 벌리고 각각 고리 하나씩을 쥐고는 내둘러 춤을 추면서 공중을 향하여 고리를 던졌다가 고리로 고리를 받으니, 두 고리는 서로 이어져서 이어진 고리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데, 끊어진 데도 없고 틈자리도 없으니 누가 이을 때를 보았으랴. 요술쟁이는 이때 두 손을 쫙 벌리고 두 손으로 고리 하나씩을 잡고 한 번 떼었다 한 번 붙였다 하고, 한 번 이었다 한 번 끊었다 하며, 끊고 잇고 떼고 붙이곤 했다.

요술쟁이는 수놓은 모직물 보자기를 탁자 위에 펴놓고 보자기 한 구석을 약간 들어 주먹만한 자줏빛 돌 한 개를 집어내어, 칼 끝으로 조금 찌르고 돌 밑에 잔을 바치니 소주가 조금씩 흘러 내렸다. 잔이 차면 그치는데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돈을 내어 술을 사 먹는다. 사괴공(史蒯公)을 청하면 돌에서 사괴공이 흘러나오고, 불수로(佛手露)를 청하면 돌에서 불수로가 흘러나오며, 장원홍(壯元紅)을 청하면 장원홍이 흘러나온다. 사괴공불수로장원홍은 모두 술의 이름이다. 한 가지만 능한 것이 아니라 청하는 대로 문득 응하여 한 줄기 매운 향기는 위()에 들어가면 볼이 붉어진다. 연거푸 수십 배를 쏟더니 홀연히 돌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요술쟁이는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으며, 멀리 백운(白雲)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돌이 하늘 위로 올라갔소이다.”

하였다.

요술쟁이는 손을 보자기 밑에 넣어 빈과(蘋果) 빈과는 곧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사과(沙果), 중국의 이른바 사과는 곧 우리나라의 임금(林檎 능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없었는데, 동평위(東平尉) 정공(鄭公) 재륜(載崙)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가지에 접을 붙여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 우리나라에 비로소 많이 퍼졌으며, 그 이름이 잘못 전한 것이라고 한다. 세 개를 끄집어냈다. 가지가 연하고 잎이 붙은 것을 한 개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사라고 청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머리를 흔들고 즐겨 사지 않으면서,

 

네가 전일에 항상 말똥으로 사람을 희롱한단 말을 들었거든.”

한다. 요술쟁이는 웃으면서 이것을 변명하지 않는데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사서 먹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비로소 사자고 청하니 요술쟁이는 처음에는 아끼는 듯하다가, 얼마 뒤에 한 개를 집어 주니 우리나라 사람이 한 입 베어 먹고는 바로 토하는데, 말똥이 한 입 가득 차서 온 저자 사람이 모두 웃었다.

요술쟁이는 바늘 한 줌을 입에 넣고 삼켰는데 근지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나, 웃는 것이 평상과 다름없이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천천히 일어나서 배를 문지르고 붉은 실을 비벼서 귓구멍에 넣고 한참 동안 섰더니, 재채기를 몇 번 하고는 코를 쥐어 콧물을 내고 수건을 내어 코를 씻고 나서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코털을 뽑는 것 같더니, 얼마 만에 붉은 실이 콧구멍에서 조금 보였다. 요술쟁이는 손톱으로 그 실 끝을 집어 당기니 실이 한 자 넘게 나오면서 갑자기 바늘 한 개가 콧구멍에서 누워 나오는데 실에 꿰어져 있었다. 가느다랗게 질질 끌려 빠지는 실은 자꾸 길어져서 백 개 천 개 바늘이 실 한 끝에 꿰어졌고, 혹은 밥알이 바늘 끝에 붙어 있었다.

요술쟁이는 흰 빛 대접 하나를 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엎어 보이더니 땅바닥에 놓았는데 아무 물건도 없었다. 요술쟁이는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뼉을 쳐 보이고는 접시 한 개를 가져다가 대접을 덮고 사방을 향하여 노래처럼 부르더니, 얼마 있다가 열어 보니 은 다섯 쪽이 있는데 모양은 흰 마름처럼 생겼다. 요술쟁이는 사방을 돌아보고 손뼉을 쳐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는 다시 접시로 대접을 덮고서 공중을 향하여 옆으로 흘겨보고 진언(眞言)을 외는 소리가 욕하는 것 같더니, 얼마 있다가 열어 보니 은()은 돈으로 화하여 그 수효는 역시 다섯 개였다.

요술쟁이는 은행 한 소반을 땅 위에 놓고 큰 항아리로 이것을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어보니, 은행은 보이지 않고 모두 산사(山査 한약재의 일종)가 되었다. 다시 그 항아리로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어 보니, 산사는 보이지 않고 모두 두구(荳蔲 한약재의 일종)가 되었다. 다시 항아리를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고 보니, 두구는 보이지 않고 모두 붉은 오얏이 되었다. 다시 항아리를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고 보니 붉은 오얏은 보이지 않고 모두 염주(念珠)가 되었다. 전단(栴檀)으로 여러 개의 포대(布袋) 목상(木像)을 조각하였는데 하나하나가 웃음을 머금고 낱낱이 뚱뚱하여 한 줄에 1 8개를 꿴 것이, 처음도 끝도 없이 가지런했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요술쟁이는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뼉을 쳐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 용한 술법을 자랑했다. 다시 그 항아리를 덮어서 땅 위에 엎었다가 뒤집어 놓으니, 항아리는 밑으로 가고 소반은 위에 있게 되었다. 옆눈으로 보면서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치고 한참 만에 열어 보니, 염주는 하나도 없고 맑은 물이 철철 넘치며, 한 쌍의 금붕어가 항아리 속에서 활발히 노는데 물을 먹고 진흙을 토하고 한 번 뛰고 한 번 헤엄치곤 했다.

요술쟁이는 한 자 넓이나 되는 꽃 자기 쟁반 다섯 개를 탁자 위에 놓고 다시 가는 댓개비 수십 개를 탁자 아래 놓았는데, 댓개비의 대소와 장단은 화살과 비슷하고 모두 끝을 뾰죽하게 깎았다. 댓개비 한 개를 가지고 그 끝에 쟁반을 얹고 대를 돌리니, 쟁반은 기울지도 않고 삐뚤어지지도 않으며, 도는데 조금 느리게 돌면 다시 손으로 쳐서 빨리 돌게 한다. 쟁반은 빨리 도는 바람에 미처 떨어질 사이도 없었다. 쟁반이 조금 기울 때는 다시 댓가지로 질러 올리면 쟁반이 한 자 넘어 높이 솟았다가 똑바로 댓개비에 그대로 내려 앉아 팽팽 돌았다. 요술쟁이는 이것을 오른쪽 신 속에 꽂아 놓으니 쟁반은 저절로 돌고 있었다. 다시 한 개비로 쟁반을 처음처럼 돌리다가 왼편 신 속에 꽂고 또 한 개비로 돌리다가 오른편 옷깃에 꽂고 다른 한 개비는 왼편 옷깃에 꽂으며, 또 다른 한 개비는 끝에 쟁반을 얹어 흔들고 치밀고 핑핑 돌리니 손으로 칠 때마다 쟁쟁 소리가 났다. 이때 요술쟁이는 댓개비에 댓개비를 잇달아 꽂는데 쟁반은 무겁고 댓개비는 길어지니 댓가지 중동이 절로 구부러지는데, 쟁반은 떨어져 부서질 생각도 않고 돌리기를 그치지 않는다. 댓개비 10여 개를 이은즉 높이가 지붕 위에까지 올라갔다. 요술쟁이는 이었던 댓개비를 천천히 하나씩 빼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 탁자 위에 도로 놓았다. 이때 요술쟁이는 입에 댓개비 하나를 담뱃대처럼 물고 입에 문 댓개비 끝에 높은 댓개비를 세우며, 두 팔을 늘어뜨리고 뻣뻣이 한참 동안 서니 이때 구경꾼들은 뼈가 자릿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쟁반을 아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상 목격하기가 너무 위험해서였다. 별안간 바람이 일어 댓개비는 과연 중동이 부러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놀라 소리를 치자, 요술쟁이는 역시 재빨리 쫓아가 쟁반을 슬며시 받아서, 다시 공중으로 높이 1백 척이나 되게 던져 놓고 사방 구경꾼을 돌아보면서 편안한 듯 쟁반을 받는데, 자랑하는 빛도 없고 뽐내는 기색도 없이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했다.

요술쟁이는 벼알 네댓 말을 앞에 놓고 두 손으로 다투듯이 움켜쥐고 짐승 고기처럼 잠깐 사이에 다 먹어 버리니 땅바닥은 핥은 듯했다. 이때 요술쟁이는 땅바닥을 버티고 겨를 토하는데, 침이 뭉쳐서 덩어리가 되어 나왔다. 겨가 다 나오더니 계속해서 연기가 입술과 이 사이에 어리어 손으로 수염을 씻고 물을 찾아 양치질을 해도 연기는 끝내 그치지 않았다.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가슴을 치고 입술을 쥐어 뜯으며 연거푸 물을 몇 그릇 마셨으나, 연기의 형세는 더욱 심하여 입을 벌리고 한 번 토하니 붉은 불이 입에 찼다. 젓가락으로 집어내니 반은 숯이요 반은 타고 있었다.

요술쟁이는 금호로병(金葫蘆甁)을 탁자 위에 놓고 또 녹동(綠銅) 화병을 내놓는데 공작의 깃이 꽂혀 있더니, 조금 있다 보니 금호로병이 간 곳이 없다. 요술쟁이는 구경꾼들 중의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노야(老爺)가 감추었어.”

하니, 그 사람은 노하여 얼굴빛이 변해 가지고,

 

어찌 이렇게 무례하단 말야.”

했다. 요술쟁이는 웃으면서,

 

노야께서는 정말 거짓말을 하십니다. 호로병은 노야의 주머니 속에 있습니다.”

하니, 그 사람은 크게 노하여 입 속으로 욕을 하면서 옷을 한 번 털어 보이니, 홀연 품속에서 땡그랑 소리가 나면서 호로병이 떨어졌다. 온 저자가 일제히 웃으니 그 사람은 묵묵히 있다가 딴 사람 등 뒤에 가서 섰다.

요술쟁이는 탁자 위를 깨끗이 닦고 도서(圖書)를 진열하고 조그만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흰 유리 접시에 복숭아 세 개를 담아 두었는데 복숭아는 모두 큰 대접만 했다. 탁자 앞에 바둑판과 검고 흰 바둑알을 담은 통을 놓고 초석을 단정하게 깔아놓았다. 잠깐 휘장으로 탁자를 가렸다가 조금 후에 걷으니, 구슬 관에 연잎 옷을 입은 자도 있고, 신선의 옷과 신 차림을 한 자도 있으며,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고 맨발로 있는 자도 있고, 혹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기도 하며, 혹은 지팡이를 짚은 채 옆에 서 있기도 하고, 혹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조는 자도 있어 모두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들이 고기(古奇)했다. 접시에 있던 복숭아 세 개가 갑자기 가지가 돋고 잎이 붙고 가지 끝에 꽃이 피니, 구슬관을 쓴 자가 복숭아 한 개를 따서 서로 베어 먹고, 그 씨를 땅에 심고 나서 또 다른 복숭아 한 개를 절반도 못 먹었는데 땅에 심은 복숭아나무는 벌써 몇 자를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바둑 두던 자들이 갑자기 머리가 반백(斑白)이 되더니 이윽고 하얗게 세어 버렸다.

요술쟁이는 큰 유리 거울을 탁자 위에 놓고 시렁을 만들어 세웠다. 이때 요술쟁이는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서 거울을 열어 구경시키는데, 여러 층 누각과 몇 겹 전각이 아름다운 단청을 곱게 했는데, 관원 한 사람이 손에 파리채를 잡고 난간을 따라 서서히 걸어갔다. 아름다운 계집들이 서넛씩 짝을 지어 보검을 가지고 혹은 금병을 받들고, 혹은 봉생(鳳笙)을 불고 혹은 비단 공도 차며, 구름 같은 머리와 아름다운 귀고리가 묘하고 곱기 비할 바 없었다. 방 안에는 백 가지 물건과 수없는 보물들이 참으로 세상에서 부귀가 지극한 사람 같았다. 이때 여러 사람들은 부러움을 참지 못하여 서로 구경하기에 바빠서 이것이 거울인 줄도 잊어버리고 바로 뚫고 들어가려 했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구경꾼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즉시 거울 문을 닫아 더 오래 보지 못하도록 했다. 요술쟁이는 한가로이 걸어서 사방을 향하여 무슨 노래를 부르다가 또 거울 문을 열어 여러 사람을 불러 와 보라고 했다. 전각은 적막하고 누사(樓榭)는 황량한데 일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름다운 계집들은 어디로 가고 한 사람이 침상 위에서 옆으로 누워 자는데, 옆에는 아무 물건도 없고 손으로 귀를 받치고 이마 밑으로 김 같은 것이 연기처럼 떠오르는데, 처음은 가늘고 끝은 둥그렇게 늘어진 젖통 같았다. 종규(鐘馗)가 누이를 시집보내고 올빼미가 장가를 드는데, 버들 귀신이 앞을 서고 박쥐가 기를 들고 이마에서 나오는 김을 타고 올라가서 안개 속에서 논다. 잠자던 자는 기지개를 켜면서 깨려다가 또 잠이 드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두 수레바퀴로 바뀌면서 바퀴살이 아직 덜 되었는데, 이때에 구경꾼들은 징그러워 하지 않는 자 없어 거울을 가리고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세계의 몽환(夢幻)이 본래 이와 같아서 오히려 거울 속의 염량(炎凉) 변천도 현저히 달랐다. 일체 인간의 가지가지 일들이 아침에 무성했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 부자가 오늘은 가난하고 잠깐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것이 꿈속에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슬쩍 죽었다가 바야흐로 살고,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으며, 무엇이 참이요 무엇이 거짓인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착한 사내와 보살(菩薩)의 형제들에게 말하노니, 헛 세상에 꿈 같은 몸과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큰 인연을 맺어서,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무를 뿐이니 원컨대, 이 거울을 표준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며, 있는 돈을 흩어서 이 가난한 자를 구제할지어다.

요술쟁이는 큰 동이 하나를 탁자 위에 놓고 수건으로 정하게 닦고 붉은 옷감으로 위를 덮으며, 장차 무슨 요술을 하려고 주선할 즈음에 품속에서 접시 하나가 쨍그렁하고 땅에 떨어지면서 붉은 대추가 흩어지니,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웃고 요술쟁이도 역시 웃었다. 그릇과 도구를 주워 담아 이내 놀음을 파하니, 이것은 재주가 없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날이 저물어 바로 파하려 했으므로 일부러 파탄(破綻)을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본래 이것이 거짓인 것을 보여 준 것이다.

 

 

[D-001]제공(帝工) : 눈도 코도 없이 누른 주머니처럼 생긴 귀신 새 이름. 산해경(山海經)에 나온다.

[D-002]전단(栴檀) : 남양 지방에서 나는 명향(名香).

[D-003]포대(布袋) : 불경에서 이르는 칠복신(七福神)의 하나로서 미륵보살이라고도 하는 중.

[D-004]종규(鍾馗) : ()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귀신의 이름.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불합격한 귀신이라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

 

 

이날 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조광련(趙光連)과 의자를 나란히 하고 요술을 구경했는데, 나는 조경(趙卿)에게 말하기를,

 

눈으로 시비를 분별 못하고 참과 거짓을 살피지 못한다면, 비록 눈이 없다고 한대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요술쟁이에게 속는 것은 눈이 일찍이 헛되게 보여 그런 것이 아니라 눈으로써 밝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탈입니다.”

하였더니, 조경은,

 

비록 요술을 잘하는 자가 있더라도 소경에게는 눈속임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눈이란 과연 떳떳한 것일까요.”

한다. 나는,

 

저의 나라에 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이란 분이 있는데, 그분이 길에서 우는 자를 만나 네 어찌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세 살에 소경이 되어 이제 40년이 되었는데, 전일에는 걸음을 걸을 때는 발을 의지해서 보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을 의지해서 보고 성음(聲音)을 들어 누구인지 분별하니 귀를 의지해서 보고, 냄새를 맡아 무슨 물건인지 살피니 코를 의지해서 보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두 눈만 가졌지만 나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모두 눈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한 하필이면 수족과 귀와 코뿐이겠습니까. 해가 이르고 늦은 것을 낮에 피로한 것으로 보고, 물건의 형용과 빛깔을 밤에 꿈으로 봅니다. 아무런 장애도 없고 일찍이 의심과 혼란이 없었는데, 이제 길을 걸어오다가 홀연히 두 눈이 맑아지고 동자가 스스르 열려 천지가 넓고 크며, 산천이 요란하게 엉켰고, 만물이 눈을 가리고 모든 의심이 가슴을 막아서, 수족과 귀와 코는 착각을 일으키고 전도(顚倒)되어서 모두 떳떳한 것을 잃고 보니, 묘연(渺然)히 우리 집조차 잊어버려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웁니다.’ 하더랍니다. 화담 선생은 말하기를, ‘네가 네 길잡이에게 물어보면 길잡이가 응당 스스로 알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그는 말하기를, ‘내 눈이 이미 밝았으니 길잡이에게 물으면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도로 네 눈을 감으면 너가 서 있는 곳이 곧 네 집일 것이다.’ 했으니, 이로써 논한다면, 눈이란 그 밝은 것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했더니 조경은,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비연(飛燕 () 조 황후(趙皇后)의 별호)은 너무 파리하고 옥환(玉環 () 양태진(楊太眞)의 별호)은 너무 살쪘다고 하는데, 무릇 너무라고 하는 말은 지나치게 심하다는 말로서 이미 그 살찌고 파리한 것을 의논하면서 경솔히 심하다는 말을 더 붙였은즉, 이것은 이미 절세(絶世)의 가인(佳人)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임금(한 성제(漢成帝)당 현종(唐玄宗))의 눈은 살찌고 파리한 데 홀렸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광명한 눈과 진정한 소견이 없어진 지 오랩니다. 태백(太伯)이 몸에 먹으로 문양을 그리고 약을 캔 것은 효도로써 요술을 부린 것이요, 예양(豫讓)이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먹은 것은 의리로써 요술을 부린 것이요, 기신(紀信 한 고조(漢高祖) 때의 장수)의 누렁 뚜껑에 털로 왼편을 꾸민 수레는 충성으로써 요술을 부린 것이요, 패공(沛公 () 고조가 천자가 되기 전의 봉호)의 요술은 깃발로 부렸고(기신에게 주어 투항을 가장하게 함을 말함), 장량(張良)의 요술은 돌로 부렸으며, 전단(田單 전국 때 제()의 장수)은 소로써, 초평(初平 미상)은 약으로써, 조고(趙高 ()의 승상)는 사슴으로써, 황패(黃覇 한 선제(漢宣帝) 때의 승상)는 참새로써, 맹상군(孟甞君)은 닭으로써 요술을 부렸고, 치우(蚩尤 황제(黃帝) 때 제후의 하나)의 요술은 동두(銅頭)와 철액(鐵額)으로 부렸으며 (머리는 구리 이마는 쇠), 제갈량(諸葛亮)의 요술은 목우유마(木牛流馬)로 부렸고, 왕망(王莽)의 금등(金縢)에서 명을 청한 것은 요술이 되다가 만 것이요, 조조(曹操)가 동작대(銅雀臺)에서 향을 나눈 것은 요술의 파탄이요, 안녹산(安祿山)의 적심(赤心) 과 노기(盧杞 당 덕종(唐德宗) 때의 간신)의 남면(藍面 얼굴이 귀신의 얼굴처럼 생김)은 모두 요술의 졸한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부인들이 더욱 요술을 잘 부려 포사(褒姒 () 유왕(幽王)의 애희)의 봉화(烽火)와 여희(驪姬 () 헌공(獻公)의 애희)의 벌이 그러한 것이었으나, 성인(聖人)이 신성한 도로써 교화를 베푸는 데도 역시 그런 것이 있으니, 나는 비록 뜰에 난 풀이 아첨쟁이를 가리키고 소악(韶樂)을 듣고 봉황이 날아왔다(()의 고사)는 것은 감히 의심 못한다 하더라도 황룡(黃龍)이 배를 등에 졌다(()의 고사)는 것과 붉은 까마귀가 집에 들어왔다는 것은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신성(神聖)한 자나 우범(愚凡)한 자는 누구나 한 가지 알지 못할 일이 있는데, 혹은 헌데 딱지를 즐기는 자가 있고, 혹은 노새 울음소리를 즐기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비록 요술이라 해도 가할 것이요, 비록 천성이라 해도 또한 가할 것입니다. 요술의 술법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족히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가히 두려워할 만한 요술이 있으니, 그것은 크게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것과 향원(鄕愿)이면서도 덕행이 있는 체하는 것일 겁니다.”

한다. 나는,

 

호광(胡廣 동한 말 여섯 임금을 역사한 신하) 같은 삼공(三公)은 중용(中庸)으로 요술을 하고 풍도(馮道)와 같이 오대(五代)를 정승 살이한 것은 명철(明哲)한 것으로 요술을 부렸으니, 웃음 속에 칼이 있는 것이 입 속으로 칼을 삼키는 것보다 더 혹독하지 않을까요.”

하고는 서로 크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C-001]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D-001]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 홍려시는 손님을 접대하는 관청. 소경은 차관(次官).

[D-002]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 : 조선 명종(明宗) 때의 학자 서경덕(徐敬德). 자는 가구(可久). 물질불변론(物質不變論)을 주장하였다.

[D-003]태백(太伯) …… 것이요 : ()의 태백이 그 아버지의 뜻을 살펴서 왕위를 아우에게 양보하고 머리를 깎고 몸에 무늬를 그려 형만(荊蠻)으로 피신하였음을 말한다.

[D-004]예양(豫讓) …… 것이요 : 전국 때 사람. 그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거짓 벙어리가 되어서 조양자(趙襄子)를 죽이려 하였음을 말한다.

[D-005]기신(紀信) …… 수레는 : 한 고조가 항적(項籍)에게 포위되었을 때에 평복으로 도망치게 하고, 기신이 대신하여 누른빛 휘장을 씌운 천자가 타는 수레를 타고 항적의 진중에 들어가 항복을 가장했다가 잡혀 죽었음을 말한다.

[D-006]장량(張良) …… 부렸으며 : 장량이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이인으로부터 병서(兵書)를 얻었는데, 황석공은 장량에게 말하기를, “이 뒤에 나를 찾으려거든 이 산 밑에 누른 돌이 곧 나다.”라고 한 고사.

[D-007]전단(田單) …… 소로써 : 전단이 오채 용문(龍文)을 입힌 소의 뿔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몰아넣어 승전하였다.

[D-008]조고(趙高) …… 사슴으로써 : 조고가 권세를 독차지하여 반대자를 없애기 위한 시험으로, 사슴을 이세(二世) 호해(胡亥)에게 바치면서 말이라고 해도 아무도 반박하는 자 없었음을 말한다.

[D-009]맹상군(孟甞君) …… 부렸고 : 맹상군이 진()에서 구금당하여 도망치는데, 함곡관(函谷關)에 닿았으나, 닭이 울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므로 그 부하로 있는 자가 닭울음을 잘하여 관문을 열게 하였음을 말한다.

[D-010]제갈량(諸葛亮) …… 부렸고 : 제갈량이 목우유마를 발명하여 산악 지대에 군량을 수송하였음을 말한다.

[D-011]왕망(王莽) …… 것이요 : 왕망이, 주공(周公)이 금등에 글을 넣었던 옛 일을 본떠서 자기에게 황제의 위()를 전하라는 금등 문건을 꾸며서 나라를 빼앗았음을 말한다.

[D-012]조조(曹操) …… 것은 :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있을 때 동작대를 짓고 죽을 때에 궁녀(宮女)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며, 사후라도 동작대에 와서 자기에게 제사하라 하였음을 말한다.

[D-013]안녹산(安祿山)의 적심(赤心) : 안녹산이 특히 배가 부르매 당 현종이 농으로 뱃속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언제나 붉은 정성이 들어 있다 하였음을 말한다.

[D-014]포사(褒姒)의 봉화(烽火) : 포사의 성질이 잘 웃지를 않아 유왕은 포사를 웃기기 위하여 일없이 봉화를 들어, 제후들이 속아 군사를 몰고 모여들었다가 헛걸음함을 보고 비로소 웃었다.

[D-015]여희(驪姬)의 벌 : 태자 신생(申生)을 미워하여 신생이 벌을 자기의 속옷에 일부러 집어 넣었다고 모함하여 신생을 죽게한 것을 말한다.

[D-016]뜰에 난 풀 : ()의 대궐 뜰에 났던 풀로 아첨하는 신하를 가리킨 지영초(指佞草).

[D-017]붉은 ……  : 주 무왕(周武王)이 제후들과 동맹하고자 가는 길에 강을 건너니 붉은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한다.

[D-018]향원(鄕愿) : 시골 사람으로 아무런 특색이 없이 겸손하고 삼가는 체하는 사람. 논어에 나오는 말.

[D-019]풍도(馮道) : 오대가 혼란할 때 요령 있게 벼슬자리를 지켜 오대 사성(四姓)을 역사한 사람.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