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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반선시말(班禪始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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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반선시말(班禪始末)

 

1. 반선시말(班禪始末)

2. 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3 중존평어(仲存評語)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는 서번(西番) 오사장(烏斯藏 서장 지방의 일부)의 대보법왕(大寶法王)입니다. 서번은 사천(四川)운남(雲南)의 지경 밖에 있고, 오사장은 대개 청해(靑海) 서쪽에 있는데, 옛 경()에는 당() 때의 토번(吐蕃) 옛 땅으로 황중(湟中)에서 5천여 리 떨어져 있다 합니다. 혹은 반선을 장리불(藏理佛)이라고도 하는데, 소위 삼장(三藏)이 바로 그 땅입니다. 반선액이덕니는 서번 말로는 광명(光明)신지(神智)와 같은 말인데, 법승(法僧)들이 말하기를, ‘그의 전신(前身)은 파사팔(巴思八)이라 하여 그 말에 허탄하고 이상한 것이 많으나, 도술(道術)이 고명해서 때로는 징험(徵驗)이 있다고도 합니다. 대개 파사팔이란, 토파(土波)의 계집이 새벽에 나가서 물을 긷다가 웬 수건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찼더니, 얼마 있다가 점점 기름으로 엉키며 이상한 향기가 나고, 먹으면 맛이 좋으면서 곧 사내의 생각이 나더니 무엇이 감촉되고 파사팔을 낳았는데, 그는 나면서부터 신성했다 합니다. 원 세조(元世祖)가 사맥에 있을 때 그가 어려서부터 능히 능가경(楞伽經 불경의 일종) 등을 1만 권이나 왼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맞아 오니 과연 지혜가 있고 명랑하며, 전신이 향기롭고 걸음걸이는 천신 같으며, 목소리는 율려(律呂)에 맞는지라,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여래를 본 것같이 기뻐했으며, 당시 요()()와 같은 모든 어진 사람들도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했습니다. 능히 소리를 맞춰 몽고의 새 글자를 만들어 천하에 반포하매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호를 하사했으니, 이것은 불교의 존호요, 국토를 가진 왕의 작위는 아니었으나, 대개 법왕의 이름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죽자 황천지하일인지상선문대성지덕진지대원제사(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大元帝師)라는 호를 하사했습니다. 그 뒤에 청산압마(淸繖壓魔)라는 놀이가 있어, 군사 수만 명을 내어 비단 바지와 수놓은 도포를 입고, 수레나 말에는 깃대를 달고 보물로 일산을 만드는 등 모두 금주(金珠)와 보옥과 비단으로 장식하여 황성을 에워싸고, 사문(四門)을 지나고 나서 다시 서번과 한()의 음악으로 산()을 맞이하여 궁중으로 들이는데 이것을 파사팔교(巴思八敎)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는 본래의 교지와는 크게 틀려, 기괴하고 요란해서 귀신의 도까지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황제와 후비와 공주들이 모두 소식(素食)을 해 가면서 산을 맞아서, 막배(膜拜)를 하고 억조 창생들의 복을 비는데, 이것을 소위 타사가아(打斯哥兒)가 파사팔(巴思八)을 만나는 놀잇날이라 하여, 심지어는 집을 파산하고 재산을 기울여, 만 리 길을 와서 보는 자도 있었다 합니다. ()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이로써 일을 삼았으니, 그 교를 숭봉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시에 담파(澹巴)라는 중이 있었고 그 뒤에 가린진(加璘眞)이란 중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번 중으로서 비밀한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파사팔교와는 달라서 능히 딴 사람의 마음을 알고 황제의 마음속까지 알아 맞힌다고 하여, 황제가 그들을 모두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시 남에게 태어난다는 말이 아직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초년에 황제가 서번 여러 나라에 널리 유시를 내리자 이에 오사장(烏斯藏)이 먼저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했는데, 그 왕은 난파가장복(蘭巴珈藏卜)이라는 중으로 오히려 황제의 스승이라고 자칭했습니다. 이때 여러 번지에 있는 황제의 스승과 대보법왕은 이미 자기 나라를 가진 칭호로 되어, ()이나 당()의 선우(單于)극한(可汗)의 칭호와 같았습니다. 황제는 제사(帝師)란 명칭을 모두 고쳐서 국사라 일컫고, 옥으로 된 도장을 하사하는데 황제가 친히 옥의 품질을 보살펴서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었고, 그 글에는 출천행지선문대성(出天行地宣文大聖) 등의 칭호를 썼던 것이나 역사가들이 이것을 생략했었습니다. 이 인()은 옥새와 같이 쌍룡이 얽힌 모습을 그렸는데, 그 뒤로 서번 여러 나라를 법왕이니 제사(帝師)니 하고 불러, 더욱 사신을 보내어 그 이름이 천자의 뜰에까지 들리게 된 자가 무려 수십 국으로서 이들을 모두 국사로 봉하고, 혹 대국사를 더해서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성조(成祖) 때에는 부마를 보내어, 서번의 중 탑립마(嗒立麻)를 맞고자 법가(法駕)를 하사했는데, 반은 천자의 쓰는 것이나 다름없이 참람되었고, 금은 보화와 비단을 하사한 것이 이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고제(高帝)와 고후(高后)를 위하여 절을 세워 복을 빌었는데, 이때에 경운(卿雲)과 감로(甘露)의 상서와 조수화과(花果)의 길조가 나타나니, 성조가 크게 기뻐하여 탑립마를 만행구족십방최승등여래대보법왕(萬行俱足十方最勝等如來大寶法王)에 봉하고, 금으로 짜고 구슬로 꿴 가사를 하사했으며, 그 막리들을 모두 대국사에 봉했습니다. 그가 가진 불가의 비법은 신통하여, 환술과 같은 것이 많아서 능히 조그마한 귀신을 시켜, 경각 사이에 만 리 밖에 있는 때 아닌 얻기 어려운 물건을 가져 오는 등, 그의 술법은 현란하고 괴망해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서장 각지에 대승(大乘)이니 대자(大慈)니 하는 법왕의 칭호를 얻은 자도 있고, 또 천교(闡敎)천화(闡化)라는 다섯 교왕이 있어서, 이 다섯 교왕의 조공 바치는 사신들이 서령(西寧)조황(洮潢) 사이를 쉴새없이 다니니 중국도 또한 일찍부터 그들의 번거로운 비용을 괴롭게 여겼으나, 실상은 넉넉한 대접으로 그들을 어리석게 만들었고, 넓게 왕호를 봉하여 제각기 조정에 조공하게 함으로써 그 세력을 남모르게 쪼개었지만, 서번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더러 또한 중국이 주는 상금을 탐내어 조공하는 것을 오히려 이로운 일로 여겼었습니다. 정덕(正德) 연간에는 중관(中官)을 보내어 오사장 활불을 맞아오는데 황금으로 공물을 하고, 황제황후와 왕비와 공주들은 서로 다투어 패물이나 노리개머리꽂이 같은 보물을 내어 그를 맞는 비용으로 쓴 것이 몇 만 금으로 셀 정도였다 합니다. 그들은 온 지 10년 만에 돌아가기로 했었는데, 돌아갈 기한이 이미 다 되자 활불은 피해 숨어서 찾아 볼 수도 없었고, 가졌던 보옥은 다 없어져 빈손으로 도망했다 합니다. 만력(萬曆) 때에는 또 신승(神僧) 쇄란견조(鎖蘭堅錯)라는 자가 있었는데, 역시 중국에 통하여 활불이라 일컬었다 합니다. 이것이 그 서번 이야기의 대략입니다.”

한림서길사(翰林庶吉士)왕성(王晟)이 일찍이 나를 위하여 그 시말(始末)을 이같이 말했었다. 왕성의 집은 영하(寧夏)로 본래는 채씨(蔡氏)의 아들인데, 자기 말로는 그 숙부가 차()를 팔기 위하여 자주 국경 밖으로 왕래하면서 서번 지방 사정을 익혔다고 한다. 또 왕씨는 대대로 서방(西方)의 관리로 있었는데, 왕성은 어려서부터 자못 오사장의 시말에 밝았었다. 왕성은 금년 초에 평생 처음으로 북경에 들어와 4월 회시(會試)에 몇 째 안 되게 합격했고, 전시(殿試)에 열셋째로 붙었다. 경서와 사기를 넓게 알고 기억하는 정신이 남에게 뛰어난 사람으로 내가 우연히 창중(敞中)에서 만나 그의 뜻을 살펴보니, 자못 자기도 기이한 인연으로 아는 것 같았다. 또 그는 처음 북경에 와서 교유하는 데도 넓지 못하고 기휘(忌諱)할 것도 알지 못하는 터이다. 그 이튿날 천선묘(天仙廟)로 나를 찾아와서 서번 중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는 필담(筆談)도 물 흐르듯 하여 박식함과 문아한 것을 자랑하는 듯하나, 그의 말을 역사와 전기에 고증해 보면 실지 기록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말하기를,

 

파사팔을 비롯하여 중국에 들어온 자 중에 혹 어진 자도 있고 혹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는데, 활불이란 칭호는 없었고 활불의 칭호는 명()의 중년 때부터 비롯하여, 비록 그를 승왕(僧王)이라 불렀지만 모두 처자를 가지고 있어 그 아들로 대를 잇게 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아내는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봉함을 받으려고 요청한 일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하는 중국의 예우가 비록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음에도 특히 이것만을 아니한 것은 대개 그 왕들이 모두 중인 때문일 것입니다. 홀로 오사장만은 법승들이 서로 이어 스스로 왕이 되어 명()의 중년으로부터 그 후 오래도록 중국으로부터 봉호를 받는 번거로움이 없이, 항상 대법왕(大法王)소법왕(小法王)이 있어 대법왕이 죽을 때는 소법왕에게, ‘아무데 아무개의 집에 아이가 날 때 이상한 향기가 날 것이니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부탁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법왕이 이미 죽고 나서 아무데서 난다면 아이가 과연 나게 되고, 아이의 살에서 과연 향기가 나는가를 알아보고 나서 즉시 의장을 꾸미되, 보배로운 일산과 구슬 늘인 양산과, 옥 가마금 수레를 갖추어 가지고 가서 그 아이를 수건에 싸서 맞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애당초 파사팔이 향기로운 수건에 감촉되어 난 때문이라 했습니다. 드디어 이를 길러서 소법왕으로 삼고 전에 있던 소법왕을 대법왕으로 삼는데, 지금의 반선인 대보법왕은 이미 14대째 환생한 법왕으로서 원()() 사이에 있었던 신승들은 모두 그의 전신이라 합니다. 그는 도중에 원의 시절에 타사가아(打斯哥兒)가 파사팔의 교를 맞을 때의 고사(故事)를 역력히 이야기하면서, 이번에 자기를 맞이하는 예식이 간소한 의장과 악기를 써서 위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운휘사(雲麾使)와 난의십이사(鑾儀十二司)에 속한 의장을 모두 내게 하고, 태상시(太常寺)의 법악(法樂)과 청진악(淸眞樂)과 흑룡강(黑龍江)의 고취(鼓吹)와 성경(盛京)의 고취 등의 모든 음악으로서 교외에 나가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태상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자세히 모릅니다.”

한다. 나는 또,

 

청진악은 어떤 것이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회자(回子)들이 뜯는 70줄 대슬(大瑟)입니다.”

한다. 나는,

 

흑룡강 고취란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그는,

 

“12구멍이 뚫린 용적(龍笛)으로 랄와가등(剌窩哥登)이라 하는데, 그 기계는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한다. 나는,

 

운휘사(雲麾使)와 난의(鑾儀)란 어떤 것입니까.”

하였더니, 그는,

 

노마(路馬)에 견주면 어림없습니다.”

한다. 이때 주 거인(周擧人)이 옆에 있다가 훈상(訓象)훈마(訓馬)정편(靜鞭)골타(骨朶)종천(椶薦)비두(篦頭)선수(扇手)반검(班劍) 등을 열서(列書)하는데 그 종목이 수없이 많았다. 그가 이내 먹으로 지워 버려서 알 수 없게 되었다.

왕 한림(王翰林)의 자는 효정(曉亭)이다. 효정은 말하기를,

 

반선은 도중에 내각(內閣)에 대해서 말하기를, ‘조왕(趙王)이 보운전(寶雲殿) 동편 마루에서 나를 위하여 금강경(金剛經)을 쓰던 중, 겨우 29자를 쓰자 때마침 가경문(嘉慶門)에 불이 붙어 조왕은 놀라서 정신이 산란하여 능히 다시 쓰지 못하였다고 하나 천하의 보배가 되었다 하며, 지금 그 글씨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것을 학사(學士)가 전했다.’ 하는데 조왕이라 한 것은 조맹부(趙孟頫)를 말하는 것입니다. 패엽(貝葉) 29자를 옻으로 썼는데, 세상에서는 무슨 까닭에 29자만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처음에 성안사(聖安寺) 부처 뱃속에 감춰 두었던 것을 명() 천계(天啓) 연간에 강남 지방의 큰 장사치 ()’씨 성을 가진 자가 부처 몸뚱이를 고쳐 새기다가 이 글씨를 얻어서 몰래 갖고 갔더라고 합니다. 본조(本朝) 강희 연간에 황제가 남방으로 순행하는데 이과(李果)라는 늙은 선비가 이 글씨를 갖다가 바치매, 드디어 이것이 비부(秘府)에 간직되고 무근전(懋勤殿)에는 황제가 이 글씨를 모사(摹寫)한 것까지 간직해 두었습니다. 창정(滄亭)에 이르자 반선이 글씨를 대하게 되어, 이에 탑본(搨本)을 보였더니 아니라 하면서 글씨의 힘이 고르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패엽에 쓴 진적(眞蹟)을 보였더니 기뻐하면서 이 글씨야말로 진짜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효정은 또 말하기를,

 

영락천자(永樂天子)가 나와 함께 영곡사(靈谷寺)에서 분향을 하는데, 천자의 수염이 아름다워서 그 수염을 쥐어 품속으로 넣다가 갓끈을 건드려 구슬 두 개가 떨어져 없어지니, 천자가 노하여 태감(太監)위방정(魏方庭)을 꾸짖었는데, 이때 유리 국사(琉璃國師)가 흰 코끼리를 타고 따라 와서 육환장(六環杖)으로 절 문지기를 치니 그 문지기가 무서워서 우는데 국사가 손바닥으로 그 눈물을 받자 구슬 두 개로 되었고, 태감도 이로써 꾸지람을 면했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안 것은 유걸(劉傑) 오운비기(五雲秘記)에 실린 말을 읽은 것인데, 역대의 좋은 일, 궂은 일과, 제왕들의 수요를 모두 점괘(占卦)처럼 적어둔 것으로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어, 민간에서는 얻을 수 없고 오직 비부에 간직해 둔 것이 있을 뿐인데, 반선은 어디에서 이것을 알았을까 했습니다. 반선이 또 말하기를, 정덕 천자(正德天子)를 나의 표방(豹房)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정덕 시대에는 소위 활불이 일찍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음은 모두 증거가 있고, 옛 사람들의 전기에도 그렇게 말했으나 수백 년 동안 내력이 끊어졌으니 모두가 황홀한 일입니다. 이로써 반선을 파사팔의 후신이니, 혹은 탑립마이니, 혹은 전대에 있던 활불들도 모두 반선의 윤회로 환생했다고 하는 것은 그 진위를 단정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가 나를 위해 말하기를,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三危 나라 이름) 땅으로 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이 나라는 셋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위()라 하여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오사장이요, 하나는 장()이라 하여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이름도 역시 장이요, 하나는 객목(喀木)이라 하여 서쪽으로 더 나가 있는 땅으로서 이곳에는 대라마(大喇嘛)는 없고 옛날의 강국(康國)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땅들은 사천(四川)마호(馬湖)의 서쪽에 있어 남으로는 운남(雲南)으로 통하고 동북으로는 감숙(甘肅)에 통하여 당의 원장 법사(元裝法師)가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원장이 갈 적에는 이 땅에 사람이 없었고 큰 물을 건너 갔었는데, 그가 돌아올 적에는 물은 말라버리고 촌락이 생겼으며, 당의 중엽에는 갑자기 토번(吐蕃)이란 큰 나라가 생겨서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를 숭상했는지는 알 수 없고, 원의 초년에 불교가 북쪽으로 흘러 들어 번승(番僧)이 생겼는데, 그를 파사파(巴斯巴) ()는 팔()과 음이 같으니 역시 파사팔(巴思八)이다. 라고 불렀으나 이것도 별호요, 그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큰 신통력(神通力)을 갖추어 원의 초년에 제사(帝師)로써 대보법왕을 봉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조카로 대를 잇게 했습니다. 명의 초년에 여러 법왕들이 중국에 왔을 때 성조(成祖)는 당의 예법을 따서 모두 우대하였는데, 그 중들도 역시 환술(幻術)을 할 줄 알아서 더욱 높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라마는 대체로 명의 중엽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중에도 이상한 중이 있었으니 종객파(宗喀巴)라고 하는데, 역시 먼 곳으로부터 서장으로 들어온 자로서 이상한 술법이 있어, 한 번 보면 사람마다 놀라 자빠졌다고 합니다. 그는 또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말도 있었는데 모든 법왕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제자의 반열에 들기를 달게 여겼습니다. 종객파는 두 제자에게 그 대를 전했는데, 첫째는 달뢰라마(達賴喇嘛)이고, 둘째는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라고 했습니다. 달뢰라마는 이제 7대를 거듭 환생했고, 반선라마는 4대째 태어났다고 합니다. 본조의 천총(天聰 청 태종의 연호) 시절에 반선은 동방에 성인이 난 것을 알고 큰 사막을 넘어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해왔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들을 보내서 조공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강희 때에 인조(仁祖)는 그를 중국으로 입조(入朝)시키고자 하였으나 일찍이 오지 못 했으며, 지난해에 만수절(萬壽節) 그는 스스로 주를 내기를 곧 금년이라 하였다. (스스로라는 것은 왕효정을 일컬었다.) 이 오면 입근(入覲)할 것을 청했으므로 우대해 주었으니, 대체로 이교에서 이름은 중이라 했지만, 실상인즉 도교(道敎)였습니다. 정신이나 술법이나 주문(呪文) 같은 것이 도가(道家)와 비슷하고, 그 글의 넓고 깊은 것과 과장해 말하는 것이 또한 도가에 비하여 지나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외에 또 호도(胡圖)와 극도(克圖)란 자가 있으니, 모두 그의 제자로서 역시 56대 이상을 환생했다 합니다. 국왕의 스승으로서 신통력은 없고, 다만 선리(禪理)에 대한 것을 잘 말했다 합니다.”

했다. 경순미는 또 말하기를,

 

중의 이름을 가졌어도 실상은 도교라 하는 말은 곧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분명하지 못하기에 나는,

 

왕성(王晟)의 말과는 많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왕성의 말에는, 명의 중엽에 특이한 중이 있어 종객파라고 했는데, 그 맏제자는 달뢰라마요, 다음은 반선액이덕니라 하고, 그는 또 말하기를, ‘천총 때에 반선이 큰 사막을 넘어 조공하러 왔다.’ 하였으니, 천총은 명의 중엽으로부터 1백여 년이나 되었고, 지금까지는 또 1백여 년이 되니, 한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인가요, 아니면 4대째 환생해서 한 이름을 답습한 것일까요. 그리고 소위 호도니 극도니 하는 자는 또 누구의 제자입니까.”

하고 묻고는 나는 또,

 

국왕의 스승으로서 선리(禪理)를 잘 말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하고 물었으나, 순미는 모두 대답하지 않고 마침내 딴 이야기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장성(長城) 아래에서 어느 손 하나를 만나 서번 일을 물었더니, 손은 대답하기를,

 

서번은 옛날 토번(吐蕃) 땅으로, 장교(藏敎)를 숭상하고 있으니 역시 황교(黃敎)라고도 부르는데, 본래 그 나라의 풍속이 그러한 것으로, 중이란 명칭은 일부러 붙인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중이란 것은 실상 불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한다. 이제 중국의 불교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비록 조정의 귀관(貴官)들이라도 도리어 나에게 반선의 모습을 물어 보았으니, 대개 친왕(親王)이나 부마나 또는 조선 사신이 아니고서는 얻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경(燕京)으로 돌아오자 날마다 유황포(兪黃圃)진입재(陳立齋) 등 모든 사람들과 놀았는데, 그들은 일찍이 한 마디도 반선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혹시 물어보면 번번이 말하기를,

 

그건, 명 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고, ,

 

우리들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여 마침내 한 마디도 즐겨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과 함께 단가루(段家樓)에서 술을 마시다가 고 태사가 반선의 말을 바야흐로 꺼내려 하는데, 그 자리에 풍생(馮生 풍병건(馮秉健))이란 자가 있다가 눈짓을 하여 그치니, 이것을 나는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 오래 있다가 들으니, 산서(山西)에 사는 포의(布衣) 하나가 일곱 가지 조목으로 상소했는데, 그 중에 하나로서 반선의 이야기를 크게 말했다가 황제가 크게 노하여, ‘살을 벗겨 죽이라.’ 했다 한다. 우리나라 역부(驛夫)들이 이것을 선무문(宣武門) 밖에서 많이 보았다 한다. 이로부터는 감히 다시 반선의 말을 물어보지 못했으니 비록 유황포진입재처럼 서로 친한 사이에도 그러했고, 더구나 산서 포의 선비는 성명도 알아볼 수 없었다. 혹은 상소를 올린 자는 거인(擧人) 장자여(張自如)라고 한다. 서번의 시말은 대체로 왕효정의 말만큼 자세한 것이 없는데, 이에 술을 뿌려서 불을 끄고, 물결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난파(欒巴)나 달마(達摩)의 지난 사적이므로 여기에 쓰지 않는다.

 

 

[D-001]황중(湟中) : 감숙 지방으로 흘러드는 서녕하(西寧河)의 좌우 서강족(西羌族)이 사는 곳.

[D-002]토파(土波) : 땅 이름인 듯하나 미상.

[D-003]() : () 때 사씨(史氏) 중에 명인이 많았으나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D-004]청산압마(淸繖壓魔) : 신을 맞아서 마귀를 누른다는 말.

[D-005]정덕(正德) :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D-006]이것이 …… 대략입니다 : “반선액이덕니 …… 대략입니다 이 단락은 왕성이 연암에게 일러준 말이다.

[D-007]노마(路馬) : ()는 큰 수레요, ()는 승마(乘馬). 시경(詩經) 채숙장(采菽章)에 나오는 말.

[D-008]훈상 …… 반검(班劍) : 이 여덟 가지는 황제가 거둥할 때에 동원하는 기물의 명칭.

[D-009]무근전(懋勤殿) : 자금성 대궐 안에 있는 전각. 그림과 글씨를 진열해 두는 곳.

[D-010] …… 보냈다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 한 구절.

[D-011]원장 법사(元裝法師) :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중. 곧 현장 법사(玄裝法師). ()은 청의 어휘를 피한 것이요, ()은 장().

[D-012]난파(欒巴) : 후한 때의 도가(道家). 자는 숙원(叔元).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적이 말하건대, 옛날의 제왕들은 자기가 능히 배운 뒤에 그 사람을 신하로 삼았으므로 더욱 성스러웠고, 천자로써 필부(匹夫)를 벗 삼되 자기의 높은 것이 깎이지 않으므로 더욱 크게 되었으나, 후세에는 이러한 도가 없어졌음에 따라, 다만 호승(胡僧)이라든가 방술(方術)이라든가 비뚤어진 도라든가 하는 이단의 유에 대해서는 자기 몸을 낮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이제 그 일을 목격했거니와, 반선이 과연 어진 자라면 황금집은 지금 황제로서도 능히 거처하지 못하는 터인데, 저 반선이 무엇이기에 감히 안연(晏然)히 점령하고 있었을까. 혹은 말하기를,

 

명 이래로, ()의 토번 난리를 경계하여 반선이 오기만 하면 문득 봉하여 그 세력을 쪼개어 놓고, 그들을 대우하기를 신하의 예로 아니 했으니, 역시 유독 지금에 와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리라. 당시에는 천하가 처음으로 정해진 때로서, 뜻이 일찍이 이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에서 그의 제사(帝師)에게 황천지하일인지상선문대성지덕진지(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라고 호를 주었는데, 일인(一人)이란 천자를 가리킨 말이니, 천자는 만방(萬邦)에서 함께 임금으로 받드는 터에 천하에 어찌 다시 천자보다 높은 자가 있단 말인가. ‘선문대성지덕진지는 공자를 가리킨 말이니, 백성이 생긴 이래로 어찌 다시 공자보다 어진 자가 있단 말인가. 원 세조(元世祖)는 사막에서 일어났으니 족히 괴이할 것도 없겠지만, 황명(皇明) 초년에 맨 먼저 이승을 찾아 귀족들의 자질로 하여금 스승으로 섬기게 하고, 널리 서번의 중을 불러서 높이 대접하면서도, 스스로 중국을 낮추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지존(至尊)을 깎고 선성(先聖)을 욕뵈며, 참다운 스승을 억눌러 나라를 세우는 시초부터 이것으로 자제들을 가르쳤으니, 또 무슨 더러운 짓인가. 대저, 그 술법이란 능히 오래 살고 오래 본다는 것으로 이것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데, 이것으로 세속 임금들의 마음과 귀를 흐리고 말았을 뿐이다. 혹은,

 

()()의 제왕들은 자기 몸을 버리고 불가(佛家)의 종이 되었으니, 중이 천자보다 높아진 지가 오래긴 했으나, 다만 황금 궁전을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네 그려.”

라고 말하는 자 있으리라.

 

 

[C-001]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따라 추록하였다.

[D-001]백성 …… 있단 말인가 :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에 나오는 구절.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가 말하기를,

 

이는 대저 모두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글이나, 다음날 일대의 역사를 쓰려면 부득이 반선을 위해서 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지나가서 이 글만큼도 자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외국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 역사 쓰는 사람의 참고가 되기에는 인연이 없으니, 이것은 가석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C-001]중존평어(仲存評語) : 여러 본에는 이 소제가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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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찰십륜포(札什倫布)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찰십륜포(札什倫布)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찰십륜포(札什倫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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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찰십륜포(札什倫布)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찰십륜포(札什倫布)

 

1. 찰십륜포(札什倫布)

2. 중존평어(仲存評語)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를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보았다. 찰십륜포란, 서번(西番) 말로서 대승(大僧)이 거처하는 곳이란 말과 같다.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부터 궁성을 돌아서 오른쪽으로 반추산(盤捶山)을 바라보고 더 북쪽으로 십여 리를 가서 열하를 건너면, 산을 의지하여 동산을 만들었고 언덕을 뚫고 산 모롱이를 끊어 산 뼈다귀만 드러내고 있는데, 저절로 언덕이 찢어지고 석벽이 깎여져 십주(十洲)와 삼산(三山)의 모양같이 바윗돌이 착낙(錯落)하여, 마치 짐승이 입을 벌리고 새가 날개를 펴서 구름이 흩어지고 우레가 터지는 듯한데, 공중에 다리 다섯이 놓였고 다리로부터 층계로 길을 내어 그 평평한 곳에 용과 봉을 새겼다. 길을 따라 흰 돌로 된 난간이 구부러지고 꺾이어 문까지 닿았다. 또 두 개의 각문(角門)이 있는데 모두 몽고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문에 들어서니 땅에는 벽돌을 깔아 층계로 세 길을 만들었는데, 흰 돌로 된 난간에는 모두 구름과 용을 새겼고 길은 한 다리로 합치게 되었다. 다리에는 구멍 다섯이 있고 대()의 높이는 다섯 길이나 되는데, 난간을 둘렀고 모두 무늬 있는 돌에는 해마(海馬)나 기린 같은 짐승들을 새겼는데, 비늘과 뿔과 갈기와 발굽들은 모두 돌 빛깔을 따라서 했다. 대 위에는 전각 둘이 있는데 전각은 모두 처마를 겹으로 했고 황금 기와를 이었다. 집 위에는 여섯 마리 용이 걸어 다니는 듯이 만들어졌는데 모두 황금으로 그 몸뚱이를 만들었다. 둥근 정자나 굽은 집과 겹쳐 있는 다락과 포개어진 전각이나 드높은 헌함과 층으로 된 행랑들은 모두 푸른빛초록빛자줏빛남빛으로 된 유리 기와를 이어 억천만금의 비용을 들였다. 채색은 신기루(蜃氣樓)를 능가했고, 아로새긴 솜씨는 귀신도 부끄러워할 만하고 헛 신령이 우레를 핍박하는 듯하고 어둡기는 새벽녘과 같았다. 동산 가운데는 새로 어린 소나무를 심었는데 산골짜기에 연해서 모두 곧고 크기는 한 길이나 되었다. 나무에는 종이를 매어 그 전에 심은 것을 표해 놓았다. 섞어 심은 기이한 화초는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그 이름도 알 수 없는데, 이때 바야흐로 죽도(竹桃)가 만개했다. 나마(喇嘛) 수천 명이 모두 붉은 선의(禪衣)를 끌고 누런 좌계관(左髻冠)을 쓰고 팔뚝을 내놓고 맨발로 문이 메도록 몰려드는데, 그들의 얼굴은 모두 칼로 깎은 듯, 검붉고 코가 크고 눈이 오목하며, 턱이 넓고 곱슬 수염에 손과 발은 사슬로 채우고 머리는 맨머리였다. 귀에는 금고리를 달고 팔뚝에는 용 무늬를 수놓았다. 전각 속 북쪽 벽 아래에는 침향(沈香)으로 높이가 어깨에 닿게 연꽃 탁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반선은 남쪽을 향해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누런 빛 우단으로 된 관을 썼는데 말갈기 같은 털이 달렸고 모양은 가죽신같이 생겨 높이가 두 자 남짓이나 됐다. 금으로 짠 선의(禪衣)를 입었는데 소매가 없이 왼쪽 어깨에 걸쳐서 온몸을 옷으로 쌌다. 오른편 옷깃 겨드랑 밑으로 오른 팔뚝을 드러냈는데 장대하기가 다리만 하고 금빛이었다. 얼굴빛은 누렇고 둘레가 예닐곱 뼘이나 되는데 수염 난 자리는 없고, 코는 쓸개를 떼어 달아맨 것 같으며, 눈썹은 두어 치나 되고 흰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음침하고 컴컴해 보였다. 왼쪽에는 낮은 상 두 개가 있어 몽고왕 둘이 무릎을 연해 앉았는데, 얼굴은 모두 검붉으며 그 중 하나는 코가 뾰족하고 이마가 드높고 수염이 없었으며, 한 명은 얼굴이 깎인 듯하고 올챙이 수염에 누런 옷을 입었다. 중얼거리면서 서로 보고는 다시 머리를 들고 무엇을 듣는 듯했다. 나마 두 명이 오른편에 모시고 섰고 군기 대신(軍機大臣)은 나마의 밑에 서 있다. 군기 대신이 황제를 모실 적에는 누런 옷을 입었는데 반선을 모실 적에는 나마의 옷을 바꾸어 입었다. 내가 아까 황금 기와가 햇빛에 번쩍이는 것을 보다가 전각 속에 들어가니, 집 안은 침침하고 그가 입은 옷은 모두 금으로 짰으므로 살갗은 샛노랗게 되어 마치 황달병 걸린 자와 같았다. 대체로 금빛깔로 뚱뚱 부어 터질 듯이 꿈틀거리는데 살은 많고 뼈는 적어서 청명하고 영특한 기운이 없으니, 비록 몸뚱이가 방에 가득하나 위엄(威嚴)을 볼 수 없고, 멍청한 것이 수신(水神)과 해약(海若)의 그림과 같았다. 황제가 내무관(內務官)을 시켜서 조서(詔書)를 전달하게 하는데 오색 비단 한 필을 가지고 반선을 보게 하여, 내무관이 손수 비단을 세 곳에 나누어 사신에게 주었다. 이것은 이름을 합달(哈達)’이라 하는 것으로, 대개 반선은 자기 말에 그의 전신(前身)이 파사팔(巴思八)이라 하고, 파사팔은 그 어머니가 향내 나는 수건을 물고 낳았으므로 반선을 보는 자는 반드시 수건을 갖는 것이 예절로 되어 있어, 황제도 매양 반선을 볼 때마다 역시 누런 수건을 갖는다 한다. 군기 대신의 처음 말로는, 황제도 머리를 조아리고 황육자(皇六子)도 머리를 조아리며 부마도 머리를 조아리니, 이번 사신도 응당 가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했다. 사신은 아침에 이미 예부(禮部)와 다투어 말하기를,

 

머리를 조아리는 예절은 천자의 처소에서나 하는 것인데, 이제 어찌 천자에 대한 예절을 번승(番僧)에게 쓸 수 있겠소.”

하여 항의하였더니, 예부에서 말하기를,

 

황제도 역시 스승의 예절로 대우하는데, 사신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었을 적에야, 같은 예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했다. 사신이 즐겨 가지 않으려 하여 굳이 서서 다투니, 상서(尙書)덕보(德保)는 노해서 모자를 벗어 땅에 던지고, 몸을 던져 방바닥에 쓰러지면서 큰 소리로,

 

빨리 가, 빨리 들어가.”

하면서 사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때 군기 대신이 무슨 말을 하는데 사신은 못 들은 것 같았고, 제독(提督)이 사신을 인도하여 반선(班禪) 앞에까지 이르니, 군기 대신이 두 손으로 수건을 받들고 서서 사신에게 준다. 사신은 수건을 받아 가지고 머리를 들고 반선에게 주니, 반선은 앉은 채 수건을 받으면서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수건을 무릎 앞에 놓으니, 수건이 탁자 아래까지 늘어졌다. 차례로 수건 받기를 마친 다음에 반선은 다시 군기 대신에게 주니, 군기 대신이 수건을 받들고 반선의 오른편에 모시고 섰다. 사신이 막 돌아서려 하는데 군기 대신은 오림포(烏林哺)에게 눈짓을 하여 중지시켰다. 이것은 대개 사신으로 하여금 절을 하게 하기 위함인데, 사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머뭇머뭇 물러서서 검은 비단에 수놓은 요를 깐 몽고왕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앉을 때 조금 허리를 구부리고 소매를 들고는 이내 앉으니, 군기 대신은 얼굴빛이 황급해 보였지만 사신이 벌써 앉아버렸으니 또한 어쩔 수가 없는지라 숫제 못 본 체했다. 제독은 수건을 나누어 얻을 때 남은 것이 한 자 남짓하였는데 이것을 반선에게 올리면서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고, 오림포 이하 모두들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차를 몇 바퀴 돌린 뒤에 반선은 소리를 내어 사신이 온 이유를 묻는데, 말소리가 전각 안을 울려 독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머리를 숙여 좌우편을 고루 둘러 보더니, 미간(眉間)을 찡그리고 눈동자가 눈 속에서 반쯤 드러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굴리는 것이 시력(視力)이 나쁜 사람 같았다. 눈동자는 더 희어지고 흐릿하여 더욱 정광(精光)이 없어 보였다. 나마가 말을 받아서 몽고왕에게 전하자, 몽고왕은 군기 대신에게 전하고 군기 대신은 오림포에게 전하며, 오림포는 우리 역관(譯官)에게 전하니, 대체로 이것은 오중(五重)의 통역이다. 상판사(上判事)조달동(趙達東)이 일어나 팔뚝을 걷어붙이며,

 

만고에 흉한 사람이로군. 옳게 죽을 리가 없을 거야.”

하기에, 나는 그에게 눈짓을 했다. 나마 수십 명이 붉고 푸른 모직과 붉은 탄자와 서장 향()과 조그마한 금 불상을 메고 와서 등급대로 나누어 주는데, 군기 대신이 받들고 있던 수건으로 불상을 쌌다. 사신은 그 다음에 일어서서 나왔는데, 군기 대신은 반선이 하사한 모든 물건을 펴 보고 황제께 아뢰기 위하여 말을 달려 갔다. 사신은 문을 나와 560보쯤 가서 절벽을 등지고 소나무 그늘 모래 위에 둘러 앉아 밥을 먹으면서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번승을 볼 적에 예절이 많이들 소홀하고 거만해서, 예부의 지도대로 못했으니 저이는 만승 천자의 스승인지라, 앞으로 우리에게 득실이 없을 수 없을 것이야. 그가 준 선물들을 물리친다면 불공하다 할 것이요, 받자니 또 명색이 없는 일인즉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다. 당시의 일이 창촐간이라 받고 사양하는 것이 마땅한지 않은지를 계교(計較)할 여가도 없었고, 모두 황제의 조서에 매인 일인데다가 저들의 행사는 번개 치고 별 흐르듯이 삽시간에 끝내버렸기 때문에 우리 사신의 진퇴와 좌립은, 다만 저들의 인도에만 따를 뿐이어서 흙으로 뭉치고 나무로 깎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이다. 또 통역은 중역(重譯)이 되어 피차의 통관이 도리어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마치 벌판에서 괴상한 귀신을 갑자기 만난 듯 어떻다고 측량할 수 없었다. 사신은 비록 묘한 말과 익숙한 행동이 있었지만 장황스레 늘어놓을 수도 없었고, 저들도 역시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도 그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다. 정사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유숙하는 집은 태학관(太學館)이라서 불상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리 역관을 시켜 불상 둘 곳을 찾아보게 하라.”

고 했다. 이때, 번인(番人)한인(漢人) 할 것 없이 구경꾼이 성같이 둘러싸서 군뇌(軍牢)들은 몽둥이를 휘둘러 쫓았으나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들었다. 모자에 수정 구슬을 단 자와 푸른 깃을 꽂은 궁중의 근신(近臣)들이 와서 그 속에 섞여 서서, 염탐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영돌(永突)이 큰 소리로 나를 불러,

 

사신께서 좋지 않은 기색으로 마당에 나앉아서 오랫동안 잘잘못을 의논하고 수군대시는 것이, 저 사람들에게 공연히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

하기에, 내가 돌아다 보니, 전에 황제의 조서를 전하던 소림(素林)이 내 등 뒤에 서 있다가 여러 사람 틈으로 나가 말에 올라 달려 가는 것이다. 여러 사람 중에 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데, 자세히 보니 그들은 모두 환관 나부랑이들이다. 박불화(朴不花)가 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원의 내시들은 우리나라 말을 많이 배웠고, ()의 시절에도 얼굴이 잘생긴 조선 고자들을 시켜 내시들에게 조선말 공부를 시켰으니, 지금 우리를 엿보고 간 두 사람도 어찌 조선말을 배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랴. 소림과 같이 있던 푸른 깃을 꽂은 자도 와서 말을 세우고 자못 오랫동안 있다가 갔는데, 그 왕래가 하도 빨라서 마치 나는 제비와 같았다. 사신과 역관들은 이 자들이 와서 엿듣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고 반선에게 받은 불상도 미처 처치하지 못했으므로,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지도 못하고 모두 묵묵히 앉았는 판에, 황제는 어원(御苑)에서 매화포(梅花砲)를 놓고 사신을 불러 들어와 보게 하였다. 전각은 처마가 겹으로 되었고, 뜰에는 누런 장막을 치고 전각 위에는 일월과 용봉을 그린 병풍과 벌여 놓은 보물들이 심히 엄숙했다. 일천 관리들이 차서대로 섰는데 반선이 혼자 먼저 탁자 위에 앉으니, 일품(一品) 보국공(輔國公)들과 조정의 고관들이 모두 탁자 아래로 나아가서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반선이 손수 한 번씩 이마를 어루만져 주자 그들은 일어서서 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여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후 천자가 누런 빛 작은 가마를 타니 다만 칼찬 56쌍 시위(侍衛)가 길을 인도한다. 풍악은 퉁소 한 쌍, 젓대 한 쌍, 징 한 쌍, 비파생황거문고와 구라파의 쇠 거문고 두세 대와 박자판 한 쌍이요, 의장(儀仗)도 없이 따르는 자는 백여 명쯤 되었다. 황제가 탄 가마가 앞에 이르자, 반선은 천천히 일어나 탁자 위에 몇 걸음 발을 옮겨 동쪽으로 향해 즐거운 빛으로 웃는 얼굴을 짓는다. 황제는 45칸 떨어져 가마에서 내려 빨리 쫓아가서, 두 손으로 반선의 손을 잡고 서로 흔들면서 마주 보고 웃고 이야기를 한다. 황제는 갓 꼭지가 없는 붉은 실로 짠 모자에, 검정 옷을 입고, 금실로 짠 두꺼운 요 위에 평좌(平坐)하고, 반선은 금 삿갓에 누런 옷을 입으며, 금실로 된 두꺼운 방석 위에 부처 모양으로 동쪽으로 나가 한 탁자 위에 앉는다. 둘의 방석은 무릎이 닿을 듯한데, 자주 몸을 기울여 서로 이야기할 적에는 반드시 둘이 서로 웃음을 띠고 즐거워했다. 자주 차를 올리는데 호부 상서(戶部尙書)화신(和珅)은 천자에게 바치고, 호부 시랑(戶部侍郞)복장안(福長安)은 반선에게 바치는데, 복장안은 병부 상서융안(隆安)의 아우로서 화신과 함께 시중(侍中)으로 귀한 품위가 조정에 진동한다. 날이 이미 저물자 황제가 일어서니 반선도 역시 일어나 황제와 함께 마주 서서, 둘이 서로 악수를 하고 얼마 있다가 등을 지고 갈라져 탁자에서 내려섰다. 황제는 이내 안으로 들어가는데 나올 적의 차림대로 돌아가고, 반선은 황금 교자를 타고 찰십륜포로 돌아갔다.

 

 

[D-001]십주(十洲) : 중국 전설 중의 신선이 살고 있는 열 군데의 섬.

[D-002]삼산(三山) : 역시 전설 중의 신선이 살고 있는 세 군데의 명산.

[D-003]해약(海若) : 바다의 귀신. 남화경(南華經) 추수편(秋水篇)에 나온다.

[D-004]합달(哈達) : 나마교에서 예물로 쓰는 엷은 비단.

[D-005]박불화(朴不花) : 원 순제(元順帝) 때 곧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우리나라 환관으로 원에 들어가, 황후의 사랑을 받은 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는 말하였다.

 

목천자전(穆天子傳)으로부터 이하 한의 동방삭전(東方朔傳)》ㆍ《비연외전(飛燕外傳)》ㆍ《서경잡기(西京雜記) (() 유흠(劉欽)이 지음) □□□ 등 서적은, 모두 궁중 밖에서는 참견할 것이 못되는 여관(女官)들이 쓴 책이므로 일체 이것을 패관(稗官)으로 돌리지만, 모두 족히 당시 제왕들의 취미와 행동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실린 글은 무엇이라 일컬을는지 모르겠다.”

하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의 사대부들로서 반선을 얻어 보지 못한 자는 도리어 우리에게 그 모양이 어떻더냐고 물었으니, 이것은 그들의 뜻이 사람의 이목을 더럽히지 않고자 함인데, 우리는 그들의 외설된 일에 이끌려서 아무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가히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C-001]중존평어(仲存評語) : 여러 본에 모두들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가한다.

[D-001]중존씨(仲存氏) : 연암의 처남 이재성(李在誠)의 자.

[D-002]목천자전(穆天子傳) : 주 목왕(周穆王)이 서역을 여행한 기록이다. 저자는 미상.

[D-003]동방삭전(東方朔傳) : 한 무제(漢武帝) 때 동방삭의 골계적(滑稽的)인 일을 기록한 것. 저자 미상.

[D-004]비연외전(飛燕外傳) : 한 성제(漢成帝) 때 황후인 비연의 자매(姉妹)에 대한 고사. 영현(伶玄)이 지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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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혹정필담(鵠汀筆談)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혹정필담(鵠汀筆談)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혹정필담(鵠汀筆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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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혹정필담(鵠汀筆談)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혹정필담(鵠汀筆談)

1. 혹정필담서(鵠汀筆談序)

2. 혹정필담(鵠汀筆談)

 

 

 

혹정필담서(鵠汀筆談序)

어제는 윤공에게 이야기를 하여 해가 저무는 줄을 몰랐다. 윤공이 가끔 졸며 머리로 병풍을 받곤 하였다. 나는,

 

윤 대인(尹大人)께선 아마 피로하신 모양이니, 나는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더니, 혹정(鵠汀),

 

그야 조는 이는 졸고 이야기하는 이는 이야기하는 것이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한다. 윤공이 약간 그 말을 들었는지 혹정을 향하여 무어라고 두어 마디 말을 하자, 혹정은 곧 머리를 끄덕이고는 담초(談草)를 거두고 나에게 읍하며 함께 일어났다. 이는 대저 윤공은 노인인 데다가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한낮이 지나도록 수작하였으니, 그가 피로해서 조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고 하겠다.

혹정이 그 이튿날 아침밥을 짓기로 하고, 나에게 같이 먹기를 청한다. 나는,

 

이야기 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늘 해가 짧음이 걱정이니, 내일은 특히 일찍이 가겠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렇게 하시죠.”

한다. 그 이튿날 오경(五更)에 사신이 일어나 조회에 나갈 때 나도 함께 일어나서 곧 혹정을 방문하여 촛불을 밝히고 이야기할 적에, 학도사(郝都司) ()은 왔으나, 윤공은 벌써 새벽에 조회하러 들어갔다. 밥을 먹으며 필담(筆談)하는 사이에 수십 장이나 되는 종이를 허비하였다. 그러고 보니, 인시(寅時)에서 유시(酉時)까지 무려 8시간으로 계산된다. 학공(郝公)은 좀 늦게 왔다가 먼저 가 버렸다. 이 담초(談草)를 차례대로 엮어서 혹정필담(鵠汀筆談)’이라 이름하였다.

 

 

[C-001]혹정필담서(鵠汀筆談序) : ‘박영철본에는 본래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혹정필담(鵠汀筆談)

 

 

나는 말하기를,

 

윤 대인께선 어제 손 접대에 몹시 괴로우신 모양이어서 제 마음이 편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지루하지 않으실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윤공은 늘 한나절이면 한참 졸기 마련이므로, 남들에게 그의 이런 꼴을 뵈지 않으려고 했긴 하나, 결코 손님을 싫어하는 뜻은 없을 거요.”

하고는 또 나에게,

 

윤공은 어떠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한다. 나는,

 

그는 참 신선(神仙) 같은 분입니다. 선생은 그와 친한 지 오래됐습니까.”

하였다. 혹정은,

 

다북쑥과 도리(桃李)처럼 문벌과 가는 길이 전혀 다르답니다. 요즘 벗한 지 겨우 한 10여 일 넘었습니다.”

한다. 혹정은 다시 묻기를,

 

공자(公子)께서는 아마 기하학(幾何學)에 정통하신가 봅니다.”

한다. 나는,

 

어째서 그런 줄 아십니까.”

했더니, 혹정은,

 

저 윗방에 든 기 안사(奇按司), 고려 박 공자(朴公子)는 우리나라를 부를 때는 고려라고 불러,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을 말할 때 한()이니 당()이니 하는 것과 같고, 그들은 나를 부를 적에 가끔 공자(公子)라 하였다. 기하학에 정통하다고 크게 칭찬하며, 그의 말에 의하면 달 가운데 한 세계가 있다면 마땅히 이 땅과 같을 것이고, 또는 지구(地球)가 저 공중에 걸려 있으니 그는 실로 한 개의 작은 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또 지구의 자체에서 빛이 생겨서 달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라고 하더이다.’ 하니, 이들은 모두 기이한 이론인 동시에 경천(經天) 위지(緯地)의 재주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한다. 나는,

 

저는 솔직하게 말한다면, 기하학에 대하여서는 반 글자도 엿본 적이 없습니다. 요전 밤에 우연히 기공(奇公)과 함께 앞 청에서 달을 구경하다가, 기이한 흥취를 걷잡지 못하여 아무런 헤아림도 없이 멋대로 지껄인 것이니 이야말로 일시적인 허튼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는 저의 억측(臆測)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기하학으로 유추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혹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겸손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지구의 빛에 대한 이론을 좀 듣고 싶습니다. 만일 지구에 빛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햇빛을 받아서 빛이 생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자체에서 저절로 빛이 생기는 것입니까.”

한다. 나는,

 

마치 꿈결에 푸른 글씨로 쓴 부적을 읽은 것처럼 되어서, 지금은 벌써 잊어버렸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저도 평소에 남 몰래 발명한 것이 없지 않으나, 역시 남을 만나서 발표하진 못했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의 여러분들로 하여금 대경(大驚) 소괴(小怪)하게 할까 보아서입니다. 그래서 마치 무엇이 탯덩이처럼 가슴속에 뭉쳐 있어서 오래도록 소화되지 않아, 겨울과 여름철이 되면 더욱 괴로워집니다그려. 선생도 이런 증세가 이루어지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한다. 나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서 그걸 깨뜨려 버립시다. 몇 해 동안의 숙증(宿症)을 약 쓰기 전에 낫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아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손을 흔들며 웃는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손된 이가 먼저 꺼내진 못하는 겁니다.”

하고는 말을 끝냈다. 얼마 아니 되어 밥상이 들어온다. 그 차린 순서를 본즉, 과실과 나물이 먼저 오르고 다음에는 떡, 또 다음에는 볶은 돼지고기와 지진 달걀 등이 오르고, 밥은 가장 뒤에 올랐는데, 하얀 쌀로 지은 데다가 양곱창국을 끓였다. 중국 음식은 모두들 저를 사용하고 숟갈은 없었으며, 권하거니 받거니 하며 작은 잔으로 기쁨을 나눈다. 우리나라처럼 긴 숟갈로써 밥을 둥글둥글 뭉쳐 한꺼번에 배불리고는 곧 끝내는 법이 없이, 가끔 작은 국자로써 국물을 떴을 뿐이다. 국자는 마치 숟갈과 비슷하면서 자루가 없어서 술잔 같기도 하나, 또 발이 없어서 모양은 연꽃 한 쪽과 흡사하였다. 나는 국자를 집어서 한 공기 밥을 떠 보려 하였으나 그 밑이 깊어서 먹을 수 없기에,

 

빨리 월왕(越王)을 불러 오셔요.”

하고는, 무심코 웃었다. 학지정은 나더러,

 

무슨 말씀이셔요.”

한다. 나는,

 

월왕의 생김새가 목이 썩 길고 입부리가 까마귀처럼 길었답니다.”

하였더니, 지정은 혹정의 팔을 잡고 웃느라 입에 들었던 밥이 튀어나오며 재채기를 수없이 한다. 지정은 이내,

 

귀국 풍속에는 밥을 뜰 때에 무엇을 쓰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숟갈을 쓴답니다.”

했더니, 지정은,

 

그 모양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한다. 나는,

 

작은 가지잎 같습니다.”

하고는, 이내 탁자 위에다 그려 보였더니, 둘은 더욱 배꼽을 움켜쥐고 절도한다.

지정은 곧,

 

어떻게 생긴 가지잎 숟갈이 / 何物茄葉匕

저 혼돈하 구멍을 뚫었던고 / 鑿破混沌霞

라고 읊자, 혹정은,

 

많고 적은 영웅들 손이 / 多少英雄手

젓가락 비느라 얼마나 바빴으랴 / 還從借箸忙

한다. 나는,

 

기장밥은 저로써 먹질 않고 남과 함께 먹을 때는 손을 국물에 적시지 않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에 들어와선 숟갈을 구경하지 못하겠으니, 옛 사람들이 기장 밥 자실 때 손으로 뭉쳐서 잡수셨던가요.”

하였더니, 혹정은,

 

숟갈이 있긴 하지만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기장밥이고 쌀밥이고 저를 쓰기로 관습이 되었답니다. 소위 조행이 습관이 된다는 것도 예와 지금이 저절로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한다. 나는 또,

 

혹정 선생은 뱃속에 가득히 꾸불꾸불 뒤틀어져 있는 그 무엇을 끝내 해산하기 어려운지요.”

하였더니, 지정은,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한다. 나는,

 

아까 이야기하던 대경 소괴의 탯덩이 말씀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웃으며,

 

여기에는 도라면탕(兜羅綿湯 한약)’을 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매, 지정은,

 

그야말로 홀륜탄조(囫圇呑棗 우물우물해서 삼키는 것)이군요.”

한다. 나는,

 

이는, 만일 안기생(安期生)의 대추가 아니라면, 아마 위왕(魏王)의 고주박일 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런 정도이지요.”

하고는 껄껄 웃는다. 나는,

 

그러나 저는 온몸에 가려움증이 나서 배기지 못하겠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시다면 어디서 마고(麻姑)의 손톱을 구해 오란 말씀이요.”

한다. 지정이 다시 지구의 빛에 대한 설명을 청하기에, 나는,

 

제가 다만 허망한 말씀을 드렸으니, 선생께서는 역시 허망한 말로 들어 주신다면 좋겠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는 것도 해롭진 않을 것이오.”

한다. 나는,

 

낮이면 만물이 모두 환하게 보이다가도 밤들면 곧 모든 것이 암흑 속에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이어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그것이야 햇빛을 받아서 밝은 것이지요.”

한다. 나는,

 

모든 물건이 그 자체로서는 밝음이 없으니 그 본질(本質)은 어둡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저 어두운 밤중에 거울을 대해 보더라도 목석(木石)과 다름없으니, 이는 비록 빛을 받아들일 성격은 포함되었으나 그 자체가 밝을 수 있는 바탕을 갖춘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햇빛을 받은 연후에야 빛을 낼 수 있으므로 그 반사(反射)하는 곳에 도리어 밝은 그림자가 생기니, 물의 밝음도 역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구(地球)의 밖에 바다가 둘린 것은, 비유하건대 한 개의 큰 유리 거울과 같습니다. 만일 월세계(月世界)에서 이 땅의 빛을 바라본다면, 역시 현()이니 보름이니 또는 그믐이니 초하루니 하는 것이 있을 테며, 그 해와 마주 대한 곳에는 큰 물과 큰 땅덩이가 서로 잠기며 비춰져서 그 빛을 받아 반사되어 바꾸어 가며 밝은 그림자를 토하되, 마치 저 달빛이 이 땅에 고루 퍼졌으나 햇빛을 받지 못한 곳은 저절로 어두워져서 현()이 이룩되기 전 초승달처럼 빈 넋둘레만 걸려 있어, 그 흙의 깊은 곳이 마치 달 속의 검은 그림자처럼 엉성하지 않겠소.”

하였더니, 혹정은,

 

저도 역시 일찍이 망령되이 지구에 빛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선생의 논하신 것과는 좀 다른 것이 있을 뿐이어요.”

한다. 나는,

 

그야 반드시 서로 같아야 됨은 아니니까, 이에 대한 설명이나 듣고 싶습니다.”

하였다. 지정이 혹정을 돌아보며 잇달아서 몇 마디 말로,

 

산하(山河)의 그림자.”

하므로, 혹정은 머리를 흔들며, 연달아,

 

그렇지 않아.”

라고 한다. 나는,

 

무엇이 아니란 말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선생께서는 방금 지구의 빛을 설명하셨는데, 학공(郝公)은 산하의 그림자로 안 까닭이어요.”

한다. 나는,

 

불가(佛家)의 설에 의하면, 저 달 가운데에서 마치 무엇이 춤추는 듯한 것이 곧 산하(山河)의 그림자라 하였은즉, 이는 곧 달은 한 둘레의 허명체(虛明體)에 지나지 않아서 마치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이 대지(大地)에 내리쬠을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 소위 철요형(凸凹形)이란 것도 역시 산하의 높고 낮음으로서, 마치 그림의 부본(副本)처럼 위로 올라서 달 가운데 물들인 것이니, 이는 모두 땅과 달의 본분(本分)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달 속의 세계란, 참으로 한 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지구의 빛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나타내 보일 만한 것이 없으므로 이러한 달 속의 세계를 가설(假設)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위치를 바꿔서 대처해 보자는 것이니, 설사 우리들이 달 가운데에서 지구의 바퀴를 쳐다본다면, 역시 이 땅 위에서 저 달의 밝음을 바라봄과 똑 같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옳습니다. 선생의 이 말씀은 내 벌써 명백히 알아들었소이다. 이미 달 속의 세계가 있다면 자연 산하가 있겠고, 산하가 있다면 자연 철요가 있겠으므로, 멀리 서로 바라본다면 으레 이런 형태가 나타날 것이니, 이는 대지(大地)를 빌리지 않아도 그 그림자는 나타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구의 빛에 대해서 나는, 햇빛을 빌려서가 아니요 그 자체에서 빛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체로 물건이 크면 신()이 그를 지키는 것이요, 물건이 오래 묵으면 정기가 어리는 법이니, 늙은 조개가 구슬빛을 토하여 어두운 밤을 밝혀 줌은 곧 신과 정기가 한 곳에 모인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땅덩이야말로 참으로 크고도 오래갈 수 있는 감공보주(嵌空寶珠)인즉, 큼직한 신정(神精)이 저절로 빛을 발할 것이니, 예를 든다면 저 도덕 있는 군자가 그의 화순한 마음이 속에 쌓여서 그 영화(英華)가 외면에 나타남과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저 공중에 가득한 별이나 은하에는 모두 제 몸에서 나오는 빛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다.

지정은 옆에서 읽다가 웃으며, 위에 적은 월중 세계(月中世界)에서 이 지구의 빛을 바라본다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치고는,  지구는 곧 감공보주라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치며,

 

두 분 선생께서는 아마 한 번 달나라에 가셔서 항아낭랑(姮娥娘娘)에게 소송을 걸어 판결지어야 하겠소이다. 그때에는 아예 학성(郝成)더러 증인이 되라 마십시오.”

한다. 혹정은 곧 그 항아낭랑에게 소송을 걸라는 구절에다 동그라미를 친다. 혹정은 또,

 

달 가운데에 만일 한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어떨 것이라 생각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웃으며,

 

아직 월궁(月宮)에 한 번도 가 구경한 적이 없은즉, 그 세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다만 우리들 티끌 세계의 사람으로서 저 달의 세계를 상상한다면, 역시 어떤 물건이 쌓이고 모여서 한 덩이가 이룩되었으되, 마치 이 큰 땅덩어리가 한 점 미진(微塵)이 모인 것과 같을 것이니, 티끌과 티끌들이 서로 의지하되 티끌이 부드러운 것은 흙이 되고, 티끌이 거친 것은 모래가 되며, 티끌이 굳은 것은 돌이 되고, 티끌의 진액(津液)은 물이 되며, 티끌이 따스한 것은 불이 되고, 티끌이 맺힌 것은 쇠끝이 되며, 티끌이 번영한 것은 나무가 되고, 티끌이 움직이면 바람이 되며, 티끌이 찌는 듯하게 기운이 침울하여 모든 벌레(생물을 뜻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람들은 곧 모든 벌레 중의 한 족속에 불과함이니, 만일 달 세계가 음성(陰性)으로 형성되었다면 그 물은 곧 티끌일 것이요, 그 눈은 곧 흙일 것이며, 그 얼음은 곧 나무일 것이고, 그 불은 곧 수정일 것이며, 그 쇠끝은 곧 유리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달 세계가 반드시 진정코 이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비록 제가 추상적으로 이런 명제를 설정했지마는, 역시 어찌 그다지 크나큰 물체가 이룩되어 그 덕()은 햇빛에 비교할 수 있고, 그 체()는 해에 배합할 수 있으면서, 오히려 한 물건도 기운이 모여서 벌레처럼 변화함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우리들 사람은 불에 들어가면 타 버리고, 물에 빠지면 가라앉곤 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일찍이 불과 물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비록 물과 불 속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대체로 모든 벌레는 물속에 살고 있는 것이 다만 고기와 자라 등속뿐이 아니고, 비록 비늘과 껍질로 주를 삼았다 하나, 역시 날개가 돋친 놈이나 털에 감싸인 놈들로써 이웃을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저 고기와 자라는 비록 뭍에 놓는다면 죽어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나 역시 때에 따라서는 깊이 진흙 속에 숨어 사는 것을 보아서는, 이는 인()과 개()의 족속도 또한 일찍이 흙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 직방(職方)이 소개한 외에 정말 몇 개의 세계가 있을는지요.”

하였다. 지정은,

 

저 서양 사람들의 기록한 바를 믿는다면, 아마 구국(狗國)귀국(鬼國)비두국(飛頭國)천흉국(穿胸國)기굉국(奇肱國)일목국(一目國) 등의 여러 가지 기기괴괴한 것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모두들 보통 생각으로는 미칠 바 아니었습니다.”

하매, 혹정은,

 

이는 다만 서양 사람의 기록에 나타났을 뿐 아니라, 우리 경()에도 있지 않습니까.”

한다. 나는,

 

어떤 경()에 실려 있나요.”

했더니, 혹정은,

 

산해경(山海經)이지요.”

한다. 나는,

 

이 대지를 둘러서 몇 곳의 인황(鱗皇)과 모제(毛帝)가 있는지 알 수 없은즉, 이 땅에서 저 달을 생각해 볼 때에는 그에 한 개의 세계가 있음도 이치에 괴이할 건 없으리라 생각되어요.”

했더니, 혹정은,

 

달 세계의 있고 없음이야 우리들 진세에 아무런 상관이 없은즉, 이는 곧 이른바 월인(越人)의 살찌고 여윈 것이 진인(秦人)에게 관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옛 성인들도 말씀하지 못한 것이거늘 이제 선생이 말씀해 주시니 나로 하여금 티끌 세상의 모든 번뇌가 별안간 없어지곤 마치 저 광한궁(廣寒宮 달 속에 있는 궁전)에 앉아서 얼음 비단을 입은 채 싸늘한 술을 마시며 백이(伯夷)와 오릉(於陵)의 진중자(陳仲子)로 더불어 노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 떼를 타고 바다에 뜬다 함은 곧 공자의 별계 망상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선생이 영연(泠然)히 서늘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향할 때에는 저는 저 중유씨(仲由氏)에게 결코 뒤질 생각은 없소이다.”

한다. 지정은 곧 별계 망상에다 동그라미를 치며,

 

그럴 때에는 저는 팔짝팔짝 저 토끼나, 펄쩍펄쩍 저 두꺼비의 노릇을 할지라도 사양하진 않겠어요.”

하고는, 온 좌석이 왁자하고 웃었다.

혹정은 또,

 

우리 유학자 중에서도 근세에 이르러선 저들 지구의 설을 제법 믿는 모양이어요. 대체로 땅이 모나고 고요하여 하늘이 둥근 채 움직인다 함은 우리 유학자의 명맥임에도 불구하고 저 서양 사람들이 이러한 혼란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이에 대하여 선생은 어떤 학설을 좇으려 하십니까.”

한다. 나는,

 

선생은 어떤 것을 믿으십니까.”

하고 반문했더니, 혹정은,

 

전 비록 손으로 육합(六合)의 등마루를 어루만지지는 못했습니다만 자못 지구가 둥글다는 설을 믿지요.”

한다. 나는,

 

하늘이 만든 것 치고 어떤 물건이고 간에 모진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저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등과 같은 것이라도 둥글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저 산하대지와 일월성신들도 모두 하늘의 창조였으나, 우리는 아직 모난 별들을 본 적이 없은즉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는 비록 서양 사람들의 저서를 읽어 본 적이 없으나 일찍이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 없다고 생각하였거든요. 대체로 지구의 꼴은 둥그나 그 덕()인즉 모나며, 그의 사공(事功)은 동()하는 것이나 그 성정(性情)은 정()한 것이니, 만일 저 허공이 땅덩이를 편안히 한 곳에 정착시켜 놓고, 움직이지도 못하며 구르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저 공중에 매달려 있기만 하게 하였다면, 이는 곧 썩은 물과 죽은 흙인 만큼 잠깐 사이에 그는 썩어 사라져 버릴지니, 어찌 저다지 오랫동안 한 곳에 멈추어 있어서 허다한 물건을 지고 싣고 있으며, ()()처럼 큰 물들을 담고서도 새나가지 않게 하였겠습니까. 지금 이 지구는 면면마다 구역이 열리고, 군데군데 발을 붙여서 그 하늘로 머리 솟고, 땅에 발을 디딤은 나와 다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벌써 땅덩어리를 구()로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구가 구르는 데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으니, 이는 땅덩어리가 둥근 줄은 알면서 둥근 것이 반드시 구를 수 있음은 모르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 땅덩어리가 한 번 구르면 하루가 되고, 달이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한 달이 되며, 해가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한 해가 되고, () 세성(歲星) 가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일기(一紀 12)가 되며, () 항성(恒星) 이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일회(一會 1 8백 년)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뿐 아니라 저 고양이의 눈동자를 보고서 역시 지전(地轉)을 증험할 수 있겠으니, 고양이의 눈동자가 열두 시간을 따라 변함이 있은즉, 그 한 번 변하는 순간에 땅덩어리는 벌써 7천여 리나 달리는 것입니다.”

했다. 지정은,

 

이야말로 토끼 주둥이에 달린 건곤이요, 고양이 눈에 돌아가는 천지라고 이를 만합니다.”

하고는 크게 깔깔댄다. 나는,

 

우리나라 근세 선배에 김석문(金錫文)이 처음으로 큰 공 세 개가 공중에 떠 논다는 학설을 했고, 저의 벗 홍대용(洪大容)이 또 지전설(地轉說)을 창안했던 것입니다.”

했더니, 혹정이 붓을 멈추고 지정을 향해서 무어라고 하되 마치 홍()의 자와 1호를 말하는 듯하였다. 그러더니 지정은,

 

담헌 선생(湛軒先生)은 곧 김석문 선생의 제자이십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아뇨. ()은 돌아간 지 벌써 백 년이나 되었으니 서로 사수(師授)할 터수가 못됩니다.”

했더니, 혹정은,

 

김 선생의 자와 호는 무엇이며, 아울러 저서는 몇 편이나 있습니까.”

한다. 나는,

 

그의 자와 호는 모두 기억되지 않소이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한 저서도 없거니와 홍도 역시 저서가 없고 다만 제가 일찍부터 그의 지전설을 깊이 믿었으므로, 나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저서하기를 권했던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국내에 있을 때, 그럭저럭 하지 못했더니 어제 저녁에 우연히 기공(奇公)과 함께 달을 구경하다가 달을 보고는 친구 생각이 난 것이니, 이는 곧 곳에 따라 생각이 솟은 것인 만큼 저절로 진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체로 서양 사람들이 지전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저가 생각하건대 그들의 생각에는 만일 땅덩어리가 한 번 구른다면 모든 전도(躔度)야말로 더욱 추측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이 땅덩어리를 붙들어서 한 곳에다 안정시켜 놓되, 마치 말뚝을 꽂은 듯이 한 연후에 측량하기에 편리하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혹정은,

 

전 본래부터 이런 학문에는 어두웠으나 역시 한두 가지의 엿본 것이 없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일곱 잔 차[]를 마신 듯이 다시 정신을 허비하지 않았더니, 이제 선생의 말씀은 저 서양 사람들의 발명한 바도 아닌 만큼 저는 감히 꼭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거니와, 역시 감히 갑자기 그르다고 배격하기도 어렵고, 요컨대 아득히 상고할 곳이 없더니 이 선생의 변설은 몹시 정밀하여 마치 고려에서 만든 송납(松衲) 꿰매는 바늘 구멍처럼 되어서 그 둘린 선과 길이 하나하나가 투명하군요.”

한다. 지정은 또,

 

어떤 것을 큰 공 세 개라 하고 또 어떤 것을 하나의 작은 별이라 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공중에 떠도는 큰 공 세 개란 곧 해와 땅과 달을 이른 것입니다. 지금 대체로 이에 대해서 논하는 이는 말하기를, 저 별은 해보다 크고 해는 땅보다 크며 땅은 달보다 크다 하였으니, 만일 그들의 말과 같다면 저 공중에 가득찬 별들은 모두 이 땅과는 상관이 없는 채, 다만 이 세 개의 공이 서로 가까운 이웃에 있어서 그 둘이 땅덩어리의 사유물처럼 되자, 그의 이름을  이니 하고서 해를 양이라 하고 달을 음이라 일컫되, 예를 들면 마치 어떤 살림집에서 동쪽 이웃에 불을 빌리고 서쪽 집에 물을 꾸는 것과 같아서, 저 공중에 가득히 박힌 별들로서 이 세 공을 본다면 저 태공에 얽혀 붙은 것이 저절로 쇄쇄(瑣瑣)한 작은 별들에 지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들이 한 둘레의 물과 흙 어울음에 앉아서 시야가 넓지 못하고 생각이 한계가 있은즉, 그제야 망령되이 저 열수(列宿)들을 갖고 구주(九州)에다 분배(分配)시킨 셈이니, 이제 저 구주가 사해 안에 있음이 마치 검은 사마귀가 얼굴에 찍혀 있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는 곧 이른바 큰 못에 뚫린 작은 구멍이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별이 제각기 분야(分野)를 맡았다는 설이야말로 어찌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지정은 워낙 이 말을 믿었으므로 쇄쇄한 작은 별들이라는 구절에 이르러선 어지럽게 동그라미를 쳤고, 혹정도,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이론이며, 상쾌한 이론이어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습니다.”

하고는, 몹시 칭도하였다.

나는 또,

 

저는 만리나 머나먼 길을 걸어서 귀국에 관광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극동에 있고 구라파는 곧 서양인 만큼 이 극동과 서양의 사람으로서 평소에 한 번 만나기를 원했더니, 이제 갑자기 열하에 들어왔으나 아직 천주당(天主堂)을 구경하지 못했은즉 이로부터 칙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다시 연경에 들어올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 외람되이 대인선생들과 교제하여 많은 가르침을 받았사오니, 비록 나의 큰 원을 덜었으나 다만 저 멀리에 사는 서양 사람들은 서로 만날 길이 없사오니, 이것이 나의 한스러운 바이었습니다. 이제 들은즉 서양 사람도 대가(大駕)를 모시느라고 이곳에 머물러 있다 하니, 원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혹시 그들과 아시거든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했더니, 혹정은,

 

이런 일은 워낙 관서에 매인 일인 만큼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않는 법일 뿐더러, 또 이 행재(行在)한 곳은 모두 일하(日下 수도(首都))로서 인산과 인해인 만큼 그들을 찾기가 곤란할지니 헛수고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정은,

 

저는 저녁에 잡무가 있습니다.”

하고는, 먼저 일어나 담초(談草) 오륙 장을 거두고 가 버렸다.

혹정이 또 묻되,

 

홍담헌 선생은 건상(乾象)을 점칠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아니, 아뇨. 역상가(曆象家)와 천문가(天文家)는 같지 않소이다. 대체로 해와 달의 무리와 꼬리별이 떨어질 때에 그 빛의 움직임을 보아서 길흉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천문가였으니, 장맹(張孟 () 때의 천문가)유계재(庾季才 () 때의 천문가) 등이 이에 속하는 바요, 선기옥형(璿璣玉衡)으로서 일월과 성신을 살펴서 칠정(七政)을 다스림은 역상가였으니, 낙하굉(洛下閎 () 때의 태사)장평자(張平子 동한 때의 역상가) 등이 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도 천문가 20여 명과 역법가(曆法家) 10여 명을 둘로 나누지 않았습니까. 저의 벗도 자못 기하학(幾何學)에 관심을 갖고서 그 전도(躔度)의 느리고 빠름을 알고자 했으나 이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송 경공(宋景公)의 세 마디 말에 형혹성(熒惑星)이 물러가고, 처사(處士)가 임금의 몸에 발을 올리자 객성(客星)이 제좌(帝座)를 범하였다는 이야기는 사학가들이 부회한 것이라 하였답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옛날의 혼의(渾儀)에 정통한 자로서는 낙하굉과 장평자 이외에도 채백개(蔡伯喈 동한 때의 채옹(蔡邕), 백개는 자)와 오()의 왕번(王蕃)이 있었고, 유요(劉曜 전조(前趙)의 임금)의 광초(光初) 연간의 공정(孔定)과 위()의 태사령 조숭(晁崇) 등은 모두 선기옥형의 옛 법을 얻었으며, 송의 원우 연간에, 소자용(蘇子容)이 종백(宗伯)이 되어서 옛 의기(儀器)를 참고하여 수년 만에 이룩하였더니, 서양 학술이 중국에 들어오자 저 의기는 모두 쓸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학술이 천루하여 가소로울 뿐이었고, 저 이른바 야소(耶蘇)는 마치 중국 말에 현인을 군자(君子)라 함과 번속(番俗)에 승려를 나마(喇嘛)라 함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야소는 온 마음껏 하느님을 공경하되 온 팔방에 교리를 세웠으나, 나이 서른에 극형을 입었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몹시 애모하여 야소회(耶蘇會)를 설립하고는 그의 신()을 높여서 천주(天主)라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교에 들어간 자는 반드시 눈물지며 슬퍼하여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천주는 어릴 때부터 네 가지의 신서(信誓)를 세웠으니, 첫째로는 색념(色念)을 끊을 것, 둘째로는 벼슬 생각을 버릴 것, 셋째로는 팔방을 다니며 선교하되 다시 고국으로 돌아옴을 원하지 말 것, 넷째로는 헛 이름을 연모하지 말 것 등이었고, 그는 비록 부처를 배격했으나 다만 윤회(輪回)의 설을 독신하였다고 합니다. ()의 만력 연간에 서양 사람 사방제(沙方濟 미상)라는 이가 월동(粤東)에 이르러서 죽었고, 그 뒤를 이어서 이마두(利瑪竇) 등 모든 사람들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교리는 일을 밝힘으로써 종지를 삼고, 몸 닦기로써 요체(要諦)를 삼고, 충효와 자애로써 공부를 삼으며, 천선(遷善)과 개과(改過)로써 입문(入門)을 삼고, 생사와 같은 큰 일에 대해서 예비하여 걱정이 없게 함을 극치로 삼는답니다. 그리하여 서방의 모든 나라들이 이 교를 신봉한 지 벌써 천여 년이 되매, 나라가 아주 편안해졌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허탄한 편이어서 중국 사람들은 믿는 이가 없답니다.”

한다. 나는,

 

만력 9(1581)에 이마두가 중국에 들어와 수도에 머물러 산 지 29년이나 되었는데, 그는 이르기를, 한 애제(漢哀帝) 원수(元壽) 2(기원전 1)에 야소가 대진국(大秦國 로마 제국(帝國))에서 나서 서해 밖을 다니면서 교를 선전했다 하였으나, 한의 원수로부터 명의 만력까지 이르기에는 1 5백여 년이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른바 야소라는 두 글자마저 중국 서적에 나타나지를 않았으니 이는 아마 야소가 저 절량(絶洋)의 밖에 났으므로 중국 선비들이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는지 또는 비록 들어서 안 지가 오래되었으나, 그가 이단(異端)이므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진국의 또 한 가지의 이름은 불림(拂菻)이라고도 하고, 그의 이른바 구라파는 곧 서양의 총칭이 아닌가 합니다. 홍무(洪武) 4(1272), 날고륜(捏古倫 미상)이 대진국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와서 고 황제(高皇帝)를 뵈었으나, 야소교(耶蘇敎)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일까. 대진국에는 애초에 이른바 야소교란 것이 없었던 것을 이마두가 비로소 천신(天神)에게 의탁하여 중국 사람들을 의혹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그는 어째서 윤회(輪回)의 설을 독신하여 천당과 지옥의 설로써 불씨를 비방하며 공격하되 마치 원수나 다름 없었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 내시니 / 天生烝民

사물 있으면 법칙 있네 / 有物有則

라고 하였는데, 대체로 불씨의 학문은 형기(形器)로써 환망(幻妄)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모든 백성에게 사물과 법칙이 없음이었고, 또 야소교는 이()로써 기()라 하였는데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모든 일은 / 上天之載

소리 냄새 다 없고녀 / 無聲無臭

라고 하였는데, 이제 야소교에서는 안배(安排)와 포치(布置)로써 소리와 냄새라 하였으니, 이 두 가지의 교에서 어떤 것이 낫겠습니까.”

했더니 혹정은,

 

그야 서학(西學)이 어찌 불씨를 헐뜯을 수 있으리까. 불씨는 참 고묘(高妙)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그에는 수많은 비유의 말이 많아서 아무런 귀숙(歸宿)시킬 곳이 없다가 겨우 깨달아 보았자 결국은 한 개의 환() 자만 남음이 결점이었으나, 저 야소교는 애당초 정확치도 않게 불씨의 조박만을 얻어 가지고는 중국에 들어오자 곧 중국의 서적을 배워서 비로소 중국 사람들이 불씨의 배격함을 알고서, 곧 중국을 본받아 불씨를 같이 배격하되 중국 서적 중에서 상제(上帝)니 주재(主宰)니 하는 말들을 따서 우리 유학에 아부하였을 뿐이었으나, 그 본령인즉 애초부터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만큼 이는 벌써 우리 유학에서의 제이의(第二義)에 떨어진 것이었으나 그도 역시 ()’에 대해서 아무런 본 바가 없음은 아닌가 싶습니다. ‘ ()’를 이기지 못한 지도 오랜지라, () 때의 장마와 탕() 때의 가뭄도 역시 기수(氣數)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합니다. 나의 친구 개휴연 선생(介休然先生)도 자못 기수에 대한 이론을 믿어서 일찍이 이르기를, 기수와 는 본래 한 속으로서 기수가 이렇게 되면 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으니, ()의 호는 희암(希菴)이요, 자는 태초(太初)이며, 또 자를 북궁(北宮)옹백(翁伯)이라고도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천리와 인사를 겸통하여 옹백담수(翁伯談藪) 1백 권과 북리제해(北里齊諧) 1백 권과 양각원(羊角源) 50권을 지었는데, 올해 그의 나이는 60여 세나 되었으나 오히려 저서를 중지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양각원에는 더욱이 천근(天根)과 월굴(月窟)의 이치에 깊었다 하였은즉, 지전설(地轉說)도 혹시 그 속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해설(解說) 중에 솔개가 하늘을 날 때에 발을 움켜쥐고 뒤로 뻗었으며, 물고기가 물에 뛰놀 때에는 부레를 믿고서 버티는 것과 같이 만물이 모두 땅에다가 중심(重心)을 붙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 땅의 중심이란 마치 우박이 제 몸을 스스로 싼 것과 같고, 그 움직이지 않는 곳이 마치 수레바퀴에 굴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였으니, 이런 것들이 모두 그의 오묘한 이론들이었습니다. 제자 일찍이 나이 어릴 때에 세심히 읽지 못하고는 다만 그 대략의 제목들만을 엿봤을 뿐이었더니, 이제 와서는 벌써 그 대지(大旨)까지도 잊어 버렸습니다.”

한다. 나는,

 

그러면 개희암 선생을 오늘 당장이라도 만나 뵙고 싶은데 다행히 선생의 소개를 얻었으면 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개는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애초에 촉인(蜀人)으로서 지금은 역주(易州) 이가장(李家庄)에서 차[]를 팔아서 생애를 삼는답니다. 그곳은 북경으로부터 2백여 리인데, 저 역시 서로 만난 지 벌써 7년이 넘었습니다.”

한다. 나는,

 

그러면 희암 선생의 용모는 어떻게 생겼는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눈이 깊숙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분으로 각로(閣老) 조공(兆公) 이름은 혜()이다. 이 그의 경학과 행검을 조정에 추천하여 특히 강서교수(江西敎授)를 주었으나, 그는 병들었다 핑계 대고 응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일찍이 수염이 아름다웠던 것을 별안간 깎아 버려서 이것으로써 조()가 자기를 그릇되어 추천한 것을 밝혔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칠품(七品)의 모자와 복장이 주어졌으며, 어떤 높은 벼슬아치가 장차 그의 모든 저서를 추천하려 하매, 그는 흔연히 허락하였으나, 하룻밤 집에 불이 나서 글이 모두 타 버렸으므로 마침내 주달되지 않았답니다.”

한다. 나는,

 

선생의 가슴속에 얹힌 체증을 이제는 토해 냄직도 하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저는 애초부터 그런 증세가 없더니 늙은 뱃가죽의 간사로움이 많아서, 삶아 먹은 고기가 살아서 양양히 갔다 한들 무엇이 군자에게 손실이 되겠습니까.”

하고는, 서로 껄껄대고 웃었다. 혹정은 또,

 

태초(太初)의 저서는 실로 일찍이 불사른 것이 아니요, 그 벗 동정(董程)과 동계(董稽)에게 숨겨 두었던 만큼 반드시 뒷세상에 전할 것입니다. 선생은 외국 사람이시므로 나는 흉금을 터놓고 한 번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다. 나는,

 

그럼, 개선생의 저서 중에는 기휘할 것이 많단 말씀이지요.”

했더니, 혹정은,

 

아무런 기휘될 건 없답니다.”

한다. 나는,

 

그럼, 무슨 까닭으로 숨겼을까요.”

했더니, 혹정은,

 

해마다 금서(禁書)는 모두 삼백여 종이나 되는데 그들은 대체로 군()( 삼공(三空) 별의 이름이다)()()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한다. 나는,

 

금서가 어째서 이다지 많단 말입니까. 그들은 모두 최호(崔浩) 사기를 비방한 것과 같은 책들이란 말씀입니까.”

했더니, 혹정은,

 

그는 모두 뒤틀어진 선비들의 구부러진 글들이었습니다.”

하기에, 내가 금서의 제목들을 물었더니, 혹정은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의 호)서하(西河 모기령(毛奇齡)의 호)목재(牧齋 전겸익(錢謙益)의 호) 등의 문집(文集) 수십 종을 써서 보이고는 곧 찢어 버린다. 나는 또,

 

저 영락 때에 천하의 군서(群書)를 수집하여 영락대전(永樂大全 () 성조(成祖) 때 엮은 유서(類書)) 등을 만들되, 당시의 선비들로 하여금 머리가 희도록 붓을 쉴 사이 없게 했다더니, 지금 도서집성(圖書集成) 등의 편찬도 역시 그런 뜻인지요.”

했더니, 혹정은 곧 재빨리 붓으로 이 말을 지워 버리며,

 

본조(本朝)의 문치 숭상은 백왕(百王)들 중에서 탁월합니다. 그러니까 사고(四庫 사고전서(四庫全書))에 편입되지 않은 글이야말로 아무런 쓸 곳이 없겠습지요.”

한다. 나는 또,

 

앞서 선생은 무슨 까닭으로 조송(趙宋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국명(國名))을 낮추어 보셨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그는 왕통이 서지 않았습니다. 송 태조는 아무런 갸륵한 공업도 없이 우연히 나라를 얻었으므로, 당시로 본다면 판에 박아 놓은 천자에 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경륜은 고성묘(顧成廟)에 있을 뿐이었고, 태종(太宗)은 가정에 있어서도 배심한 사람을 면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한다. 내가,

 

촛불 그림자 사건이 만일에 참말이라면 어찌 태종이 배심한 것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혹정은,

 

그야말로 천고에 억울한 일입니다. 그때에 태조의 병은 벌써 위급하여 아침저녁 시간을 다툴 지경이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다지 괴로운 일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모든 행위를 보아서는 그러한 비방을 받게 되었습니다그려. 이 이야기는 애당초 호일계(胡一桂 ()의 학자)와 진경(陳經)의 사사(私史)에서 나와서 이도(李燾 ()의 학자)의 장편(長編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약칭)에 비로소 기록되었는데, 이는 실로 오중(吳中)의 중 문형(文瑩 ()의 중)이 지은 상산야록(湘山野錄)에서 계시해 준 것으로, 저 한 개의 중이 어디에서 이런 비밀을 알아내었겠습니까. 대체로 그의 글이 전연 의도적이지 않았음은 아니었으나 그 글 중의 멀리서 촛불 그림자가 붉게 흔들리는 것이 보이면서 큰 소리로 잘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라는 여남은 글자가 천고의 의문의 실마리를 열었으나, 촛불이란 원래 컴컴한 밤에만 쓰이는 물건이요, 촛불 그림자라는 것은 희미한 것이며, 붉게 흔들린다는 것은 촛불 빛이 껌벅거린다는 것이요, 큰 소리라는 것은 화평하지 못한 소리요, 잘하라는 말은 그 뜻이 똑똑치 못한 말입니다. 또 멀리서 본다든가 멀리서 듣는다는 말은 이 또한 분명스럽지 못한 까닭에 참으로 천고의 의문의 실마리가 되고 말았으니, 뒤틀린 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사대부들은 태종에 대해서, 첫째로 해를 넘기지 못한 채 개원(改元)한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고, 둘째로 형수를 핍박하여 중이 되도록 하고, 또 형수가 죽었는데 복을 입지 않은 것을 옳지 못하게 여겼으며, 셋째로 정미(廷美)와 덕소(德沼)가 죽은 것을 옳지 못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으니 천하 인심을 어떻게 눌러 나갈 것입니까. 6()의 선비들은 노여움이 진()에게 쌓이자 진이 6국보다 먼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불위(呂不韋 ()의 정승)의 사건을 교묘히 만들어서 한갓 기화(奇貨)로 삼았거늘, 하물며 진 시황(秦始皇)이 서책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묻어 죽인 데 대해서야 그 욕설이 어떠했겠습니까. ()의 책사(策士)가 무엇보다도 먼저 진을 욕하려 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문(奇文)이 만들어진 것이니, 촛불 그림자 사건만 해도 역시 이와 같은 의도일 것입니다. 송 인종(仁宗)의 영특한 기운은 한 문제(漢文帝)와 비슷하나 학식은 위였고, 송 신종(神宗)은 정치를 하려는 의욕은 한 무제(漢武帝)보다 앞서나 재주와 책략이 미치지 못했으며, 건염(建炎 남송(南宋) 고종의 연호) 이후로는 족히 이야기할 거리도 없습니다. 그 중에도 제일 통탄할 일은 원수를 잊고 이를 어버이로 인정했으니, 이미 천륜이 아닌데 어찌 조카라고 부를 것입니까. 힘이 모자라서 그에게 굴복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니 복()이나 신하로 자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는지 모르겠지마는, 조카나 손자라고 일컬은 것이야 이 위에 더 큰 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시의 사대부들은 속국 신하 노릇 한 치욕만 면하기 위해서, 신하란 명목을 조카로 바꾸어 마침내는 그 임금으로 하여금 인륜을 무시하는 경지에 빠지게 했으니, 그 인륜을 무시하고 강상에 어긋나게 한 것이 석진(石晉)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신의 귀함만 소중히 여겨 난데없는 애비를 맞이하면서도 임안(臨安 남송의 수도)의 군신들은 바야흐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축하했으니 무식하기가 심한 것입니다. 눈앞의 급한 일에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연히 헛일을 이야기하기만을 일삼았으니 정말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송 이종(理宗) 40년 동안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공부한 보람으로 죽은 뒤에 이종(理宗)’이라는 ()’ 자를 얻은 것이니 가소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모를 일입니다. 이종이 평생에 연구한 이치란 과연 어떠한 물건이었는지요. 옛날로부터 남의 신하가 누구나 자기 임금의 학문을 위하여 애쓰지 않는 이가 없지만 천 년 동안 적막하다가 겨우 이종 한 사람을 얻었습니다그려. 그러나 그의 학문도 나라의 존망승패에는 이로운 일이 없으니, 그를 만일 귀산(龜山 양시(楊時)의 호)의 문하(門下)에다가 둔다면 높은 제자가 무난히 되겠지마는, 그 학문은 또한 눈으로 한 글자도 보지 못하는 석세룡(石世龍 후조(後趙)의 고조(高祖))막길렬(邈佶烈)을 따르지 못할 것이니, 천하 일을 보리 떠내려가는 줄 모르는 것과 같이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구사량(仇士良 ()의 포악한 관리)은 벼슬을 내놓으면서 그 무리들에게 훈계하여 글을 읽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보경(寶慶 ()의 연호)경정(景定 ()의 연호) 사이에 40년 동안이나 어두운 안개가 사방 천지를 막은 속에서 고금의 이치를 연구하느라고 서당(書堂) 문을 닫고 앉아 이로써 두 이랑 무논마저 반 넘게 묵혔다 하니 이것이 바로 그 시절 일인가 봅니다. 도군 황제(道君皇帝 () 휘종의 별칭)는 참으로 명사(名士)라 할 수 있어 비록 동파 선생(東坡先生)처럼 송균(松筠 송죽(松竹)과 같다) 같은 기절은 적다 하더라도 그의 풍류와 감상하는 안목은 반드시 진( ()의 진사도(陳師道))( ()의 황정견(黃庭堅)) 두 분에게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산은 뒤따라 필담 초기를 열람하고는 웃으면서 못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낫다고 하였다.

한다. 형산은,

 

그러나 한 성제(漢成帝)에게 비한다면 더욱 방탕한 셈입니다. 초여름에 황제가 강관(講官)에게 칙유(勅諭)하되, ‘내가 매양 옛날 역사를 보니 신하는 아첨하고 임금은 교만하였는데 …… ,’ 하였는데 대성문(大成門) 오른편 담벽에 붙인 방()이 바로 그것이랍니다.”

하고는 껄껄댄다. 나는,

 

이야말로 위()의 무공(武公)의 억계(抑戒 무공이 스스로 경계하기 위하여 시를 지었다)라도 더할 수는 없더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참 그렇구 말구요.” 어제 내가 세 사신을 따라서 공자묘를 가 뵈올 때 왕혹정과 추거인 사시(舍是)가 주인이 되어 길을 인도했다. 대성문 앞에 오석(烏石)을 첩첩이 놓고, 벽에 강희(康熙)옹정(雍正)과 또 지금 황제의 훈유(訓諭)한 글들을 새겨 두었다. 그 오른편 담벽에는 새로 방()을 붙였는데, 곧 황제가 강신(講臣)에게 내린 칙유로서 그 내용을 보니 모두 자가(自家)의 학문과 문장을 굉장히 자랑하고, 옛날에 학문에 힘쓰던 임금들은 모조리 비방하되, 실속 없이 허식만 일삼아서, 전각 위에서는 만세를 부르느니 조정에서는 감탄을 낸다느니 하는 것이 모두 그 조칙 중의 말들이다. 대체로 여러 신하들이 글 뜻을 꾸며 윗사람에게 아첨함을 경계하면서도, 윗사람은 함부로 자기 잘난 것만 믿고 아랫사람들을 멸시한다 하였다. 내가 혹정과 함께 누누(累累) 천여 언(千餘言)을 읽어 보니 모두가 자기들의 자랑뿐이다. 내가 전각 위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물으니 혹정은, ‘경연(經延)에서 강의나 토론을 할 때 임금이 글 뜻을 알아맞힐 때에는 좌우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를 부르며, 또 강의하는 자가 알아맞혀서, 임금이 좋아할 때에도 좌우가 역시 만세를 불러서 좋은 것은 모두 임금에게 돌려보내는 법이니, 이는 소위 임금의 옳은 견해에 따른다는 것이요, 또 신하의 좋은 말을 발견했다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한의 육가(陸賈)가 임금 앞에 나아가 글 한 편씩 아뢸 적마다 임금은 칭선(稱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좌우는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였다.

한다. 나는 또,

 

이종(理宗)은 송이 망할 무렵 맨 끝의 임금으로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족히 의논할 바가 못되지만 어떤 임금이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만 가지고서 그가 곧 총명한 자질(資質)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선생의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문제송 인종의 아름다운 자질과 한 무제, 당 태종의 영특한 성품에다가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학문을 겸하고 보면 이야말로 요()()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글짓는 말예(末藝)와 기송(記誦)하는 폐단만을 가지고 경솔히 남의 임금된 자를 무식하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고개를 흔들면서,

 

그렇지 않지요. 내 본래 송 이종을 말한 것이 아니지요. 송사(宋史) 형법지(刑法志)를 보면 이상하게도 사람의 심사가 번민해집니다. 내가 말한 것은 학문의 폐단인데, 대체로 옛날에 총명하고 영특한 임금이란 바로 한 무제나 당 태종을 두고 말한 것뿐이요, 선생이 말씀한 정자나 주자의 학문을 겸했다고 운운한 것은 가설(假說)입니다. 이러한 가설이 곧 천고의 뜻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소의 한스러움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다소의 한스러움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옛 시에,

군사 내어 이기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죽으니 / 出師未捷身先死

뒷 세상 영웅들이 길이길이 눈물 짓누나 / 長使英雄淚滿襟

라고 한 것이 바로 한스러움을 품었다는 말입니다.”

한다. 나는 또,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만일 조맹덕(曺孟德 조조(曺操). 맹덕은 자)이 두통을 앓다가 죽었더라면, 어찌 그가 한()의 제 환공(齊桓公)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다시,

 

그 말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웃으면서,

 

선생이 말씀하신 만약에라든가 설사라든가 하는 것은 가설과 비유해서 하는 말이요, 결코 이것이 참말은 아닐 것입니다. 가사 제갈량(諸葛亮)이 사마중달(司馬仲達 사마의(司馬懿). 중달은 자)을 죽이고 군사를 몰아 중원 땅으로 들어갔던들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또 가령 당() 명황(明皇)이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러서 양귀비(楊貴妃)를 만나 빙그레 웃으면서 눈을 굴리게 되었다면 이 또한 얼마나 통쾌했을 것이며, 또 만약에 송 고종(宋高宗)이 진회(秦檜)의 머리를 베었던들 얼마나 통쾌했을 것이며, 만약에 정자주자 두 선생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고 만기를 총람하는 정치를 할 때 다시 정자주자 같은 이가 옆에 있어서 요순의 도로써 충고해 준다면 후세에 무슨 한스러움이 있겠습니까. 또 이 부인(李夫人)의 혼령(魂靈)이라도 한 번 보였던들 무슨 한스러움이 남았겠습니까. 대체로 한때의 임금된 자로서 지극히 어둡고 못난 자를 제외하고는 보통 볼 수 있는 임금일지라도 당대의 이름난 학자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당시 명석(名碩)들로 하여금 자리를 한 번 바꾸어 본다면 도리어 그들만큼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묻기를,

 

옛날부터 제왕은 그 신하들에게 자기가 가르치기만 좋아하였으나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 밑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영화를 탐내고 녹봉에만 눈이 어두워 그 임금에게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다면 반드시 이렇지도 않을 것이니, 밝은 이를 내세우고 미천한 이를 뽑아내어 어진 사람 쓰는데 그 지위를 가리지 않고 보면 꿈속에 담 쌓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점을 쳐서 낚시꾼도 만날 수 있어서 함께 사업을 하는 데도 마음이 서로들 맞았기 때문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만약 저들이 구하지 않았다면 어찌 하늘이 내려 주는 인재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란 당했을 때와 말할 때가 서로 같지 않은 법이요, 바둑이란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직접 두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맹공작(孟公綽 점잖기로 유명했다)이 조()()의 장로(長老)로서는 넉넉하다 할 수 있으나, ()()의 대부 노릇은 못한다.’(맹자(孟子)에서 나온 구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역사를 읽으면서 평심(平心)하고 연구한 대목입니다. 만일 송 인종이 염계(濂溪 ()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출생지)나 낙양(洛陽 () 유학자 정이(程頤)정호(程顥)의 출생지)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도학의 아름다움이 어느 현자(賢者)에게도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양(紫陽)은 평생 정력을 사서(四書)에 더욱 기울였으나, 그 실상인즉 인종이 먼저 길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왕요신(王堯臣 () 유학자)이 과거에 급제하매, 대기(戴記 소대기(小戴記) 즉 예기(禮記)) 중에서 중용(中庸 이때에는 중용이 예기 중의 한 편이었다) 한 편을 하사(下賜)하였고, 여진(呂瑧 ()의 유학자)이 과거에 오르자 다시 대학(大學 대학도 예기 중의 한 편이었다) 한 편을 뽑아서 하사했습니다. 그 학식의 고명한 품은 당세 선비들 중에 뛰어났고, 중용 대학 두 편을 따로 뽑아 낸 공로는 범문정(范文正 범중엄(范仲淹). 문정은 시호)보다도 앞섰다고 하겠습니다. 후세 선비들은, 한 문제가 가의(賈誼)를 재상으로 등용하지 않은 까닭에 한()의 업적에 많은 손실이 있었다고 책망하고, 또 장석지(張釋之 ()의 법관)의 고론을 배척했다 해서 문제를 얕잡아 판단했지만, 그 실상인즉 문제가 가의보다는 훨씬 어질었던 것입니다. 가생(賈生 젊은 가의를 가리킨다)을 보지 않았을 때는 자신이 가생보다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가생을 따를 수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문제가 자기 중심에서 우러나 한 말이지, 문제가 자기 스스로 가생과 현부(賢否)를 비교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역량을 헤아리고 남도 잘 짐작해야 하는 것이니, 선제(先帝) 때부터 있던 장상과 대신들은 어찌하고, 일조에 아무런 경험도 없는 서생으로 하여금 그들을 탄압하게 한단 말입니까. 선실(宣室)에서 앞자리에 가까이 앉게 했을 때에 가생이 지닌 포부는 이미 다 들었던 것이니, 요컨대 문제는 그의 재주를 길러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가생의 아량은 이업후(李鄴侯 ()의 이필(李泌). 업후는 봉호)에게 따를 수 없었으니, 이업후는 백의(白衣)로 재상이 되었다가 강서 판관(江西判官)으로 좌천된 일이 있었지만, 일찍이 한 번도 이를 한스럽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생은 언제나 가슴속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수없이 드러내려고 애썼으나, 문제는 이것을 잘 간직하고 이용하는 수단이 능란하여 아무런 객기(客氣)도 부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문제의 장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세 명의 서자(庶子)에게 천하의 절반을 나누어 주었고, 당시의 부귀를 누리던 대신들은 모두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 전쟁을 치른 인물들로서, 이제는 편안히 앉아 종정(鍾鼎)을 누리고 있는 터에, 누가 즐겨 뛰어나와 사업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문제는 가생보다 앞서 통곡하고 긴 한숨을 지었을 것입니다. 가생은 조급한 것을 참지 못하고 곧 분개하여, 어느 한 사건을 뼈아프게 지적하여 통곡하고 한숨 쉰 것이니, 이야말로 거리에 서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통곡하는 격이니 그렇게 하고서 과연 얼마나 상대방을 놀라게 하고 또 의혹시켰겠습니까. ()()의 검객(劍客)들은 먼저 원앙(袁盎 ()의 명신)의 배를 찔렀고, ()()의 용사(勇士)들은 마땅히 배도(裵度 ()의 명신)의 머리를 부수리라는 것을 문제는 미리부터 근심했던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건대 바둑 두는 것과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當局者)요 신하들은 옆에 앉은 구경꾼으로서, 선생의 이른바,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당국자보다 낫다.’라는 말이 곧 이것입니다. 바둑을 두는 자가 잘 판단을 못할 때에도 어찌 구경꾼의 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아니올시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면, 언제나 자기 열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고 자랑하는 법이며, 대를 이어서 수성(守成)하는 임금은 호화로운 옷을 입고 부녀가 시중드는 것이 본래 있는 것처럼 여김이 통례입니다. 천하 일이 모두 폐하(陛下)의 집안 일이 된 지가 이미 오랜 일인바, 이는 또 천고에 바꿀 수 없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짐()이란 한 글자를 지워 버렸을 때는, 자기는 당장에 요순 같은 임금 노릇을 할 것같이 될 것이요, 만약 짐이란 글자를 붙여 놓고 보면, 누가 감히 그 앞에 나가 소매 속에 넣은 손이나 꺼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자가 소정묘(小正卯 ()의 정치가)를 죽인 것은, 임금까지 떨도록 한 지나친 위엄이라는 비평을 듣게 되었고, 주공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한 것이 모반한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도, 그 지위에 따라 이런 비평을 들었던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후로는 유학(儒學)을 주장하는 대신으로서 왕망(王莽)만한 사람이 없었건만, 그는 처음부터 천하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지나치게 독신하여 평생에 배운 학문을 한번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책임을 맡았다고 자처했으니, 어찌 임금의 비위만을 맞추기 일삼았으리요. 다만 그의 품성(稟性)은 초조하고 분주하여, 가만히 앉아서 요순의 도를 의논하는 것보다도 몸소 자신이 당대에 시험하고 실천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성인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역적이 되라고 가르쳤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도 역시 웃으면서,

 

이는, 신하로서 일을 할 때는 아무래도 일대(一代)의 제왕보다는 못하다는 증거를 말씀한 것입니다. ()()의 학문으로 천하를 다스릴 때는 혹 일시의 효력을 거둔 적도 있었지마는, 경술(經術)로 세상을 다스릴 때는 일찍이 나라를 무너뜨리고 생령을 도탄에 빠지도록 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왕개보(王介甫 왕안석. 개보는 자)의 학술에는 범( 범중엄)( ()의 한기(韓琦))과 같은 이도 따르지 못할 바이지마는, 가의나 왕망개보나 방손지(方遜志 방효유(方孝孺). 손지는 자) 같은 이들은 한결같이 조급하게 서두르는 축들입니다.”

하였다.

이때 어느 사람 하나가 몸에 망포(蟒袍)를 입고 주렴을 걷어젖히면서 들어와 의자에 앉는데, 보복(補服)도 입지 않았고 모자도 쓰지 않았다.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무어라고 말을 하기에, 나는 못 알아듣겠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은 혹정과 귀엣말로 몇 마디 하고 일어서서 나갔다. 나는 그가 누구냐고 물으니, 혹정은 대답하기를,

 

그는 본래 제남(濟南) 사람으로, 성은 등()이요, 이름은 수()인데, 현재 호부 주사(戶部主事)로 있습지요. 그 못생긴 자가 무엇을 보려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는 갔는지 모를 일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그분은 선생의 친지(親知)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그가 등수라는 것만 알았을 뿐입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귀국이 우리와 같은 문자(文字)를 쓰고 있는 동방의 한 나라인 줄도 모르지 않아요.”

한다. 나는 다시 묻기를,

 

제남에는 아직도 백설루(白雪樓)가 있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백설루는 원래 우린(于麟 ()의 이반룡(李攀龍). 우린은 자)의 누각으로서, 처음에는 한창점(韓倉店)에 있었는데, 그 뒤에 백화주(白花洲) 위에 고쳐 지어 벽하궁(碧霞宮) 서쪽에 있었답니다. 지금은 박돌천(趵突天) 동쪽에 백설루가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옛날 그 집이 아닙니다.”

한다. 나는 또,

 

선생은 황()()를 귀하게 여기고 경술(經術)을 천하게 여기며 역적에게 관대하여, 성인을 독실(篤實)히 믿는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왕개보를 가리켜 범문정보다도 더 어질다 하니, 억누르고 찬양하는 것이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경술이 천하를 파괴하는 도구라 하시니, 이것은 나를 한번 시험해 보려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선생이 이처럼 죄주시니, 소자(小子)가 다시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선생의 의논하시는 바는 모두 고원(高遠)해서, 구구한 선비들의 짧은 소견으로서야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실로 하한(河漢)의 놀라움이 없지 않으니, 선생의 이론을 어찌 감히 처사(處士)들의 잘못된 억설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선생의 저속한 것을 가리시지 않는 아량에 감격합니다. 대개 세상 일이란, 마치 저 사냥하는 데 있어서 정도가 아닌 일로 짐승을 잡아서는 아니됨과 같은 것이요, 또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바로잡는다 해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다면, 모두 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삼척 동자라도 오패(五霸)를 추앙함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렇게만 이론을 세운다면, 다시 다른 일이 생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 창려는 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고, 그 이론은 불살라 버린다(원도(原道)에서 나온 말), 도리어 세상은 태평해질 것이요, 또 동중서(董仲舒 () 때의 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의리를 바로잡고, ()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한서(漢書)에서 나온 말), 세상 사람은 응당 길에 흘린 물건도 줍지 않을 것입니다. 또 선생의 말씀대로, 삼대 이후로 경술로써 정치를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입니까. 창공(倉公 () 때의 의원), 사람의 병을 고칠 때에는 화제탕(火齊湯 한약)에 대황(大黃 한약) 네 근을 넣어 달이라고 했는데, 그 후 2백 년을 지나 장중경(張仲景 () 때의 의원 장기(張機). 중경은 자)은 팔미탕(八味湯 한약)에 부자(附子 한약) 닷 냥을 넣으라고 했으니, 얼마 못 되는 동안에 고금이 이같이 달라졌습니다. 백이숙제가 말머리에서 말렸을 때에는 그래도 이를 옳다 하여 데리고 간 태공(太公) ()이 있었으니, 세상에 양쪽이 모두 옳고 양쪽이 모두 그르다는 법이 없을 바에는, 이 두 사람 중 하나는 마땅히 흑룡강(黑龍江)으로 귀양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저 천하 일이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다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줄이 끊어지면 짧은 쪽이 먼저 넘어지는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처음에 두 편은 힘이 비슷했기 때문에, 역리와 순리만 있고 옳고 그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차지함에 있어서, 분명히 성패가 밝혀진 뒤는 역리라든지 순리란 말도 도리어 등불 뒤에서 하는 귀엣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릇 이치를 말하는 자는 까마귀가 고기를 간직하는 것과 같으니, 까마귀가 고기를 감추어 둘 때는 구름으로 안표(眼標)를 하고 감추어 두는데, 그 구름이 지나가 버리면 감추어 둔 곳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의리가 말뚝 박아 놓은 듯한 법은 없으니, 의리란 때를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비들의 처사라는 것은 구름을 바라보는 까마귀 친구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구름은 가 버려도 고기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비록 때는 흐르고 일은 지나가 고금이 다를지라도 의리는 제자리에 있겠건만, 사람들이 이것을 찾지 않는 것뿐이지요.”

했더니, 혹정은,

 

본래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가는 자가 임금이 되는 것이지요.”

한다. 나는 또,

 

경술(經術)이 국가를 파괴한다는 것은 어찌 그것이 경술의 죄이겠습니까. 저속한 선비들이 경술의 이름만을 도둑질한 까닭이지요. 그래서 세상을 어지럽게 한 것은 경술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만일 올바로 경술을 썼더라면, 세상에 밭이란 밭은 모조리 정전법(井田法)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요, 천하의 제후(諸侯)들은 모두 다섯 가지 등급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 혹정은,

 

선생은 꼭 내가 대담스럽게 경술을 배척하는 줄만 아십니까. 옛날부터 말이란 것은 반드시 마음에 있어야만 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요, 실천을 하는 자도 반드시 말이 먼저 있으란 법도 없습니다. 일부 세계는 허위 세계이니, 선생의 말씀은 약방문을 믿고 단번에 신선이 되겠다고 날뛰는 친구들의 말투에 지나지 못합니다.”

한다. 나는 이에,

 

신선이 되겠다고 날뛰는 자들의 단번 말투란 무엇을 말함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문성장군(文成將軍 () 이소옹(李少翁)의 봉호)이 말간[馬肝]을 먹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나는 다시,

 

성인도 역시 적은 것을 상대로 일을 착수하려고 하지 않지만, 이것도 고금이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다. 탕은 70리를 나라로 삼았고, 문왕은 백 리를 가지고 일어났는데, 맹자는 걸핏하면 이 은주를 인용하여 당시 임금들에게 유세했습니다. 그러나 등 문공(藤文公)은 천하의 어진 임금으로, 그가 임금이 되었을 때 허행(許行 ()의 농학자)과 진상(陳相) 같은 호걸들도 그의 신하가 되어 등()으로 갔던 것입니다. 맹자는 등 문공에게, 국가의 반록(班祿)과 경계(經界)에 대해서는 그 큰 강령을 들어 말했지마는, 한 번도 등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긴 곳을 끊어다가 짧은 것을 보탠다 하더라도 모두 해야 50리밖에 되지 않으니, 대국의 지도자가 될지언정 그의 크나큰 경륜을 베풀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의 임금들은 지극히 못났건만, 그래도 이들에게 미련을 두어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것은, 그 토지가 넓고 백성이 많고 군사가 강하며 재물이 풍부했던 까닭입니다. 그 형세로 인해서 성공하기가 쉬웠던 까닭에, ()로써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손바닥 한 번 뒤집는 것과 같이 쉽다고 말했던 것입니다.”(맹자에 나오는 말)

하고 말하니, 혹정은,

 

공자는 말씀하기를 1년이면 바로잡을 수 있다(논어에 나오는 말) 하고, 맹자는 이미 5년이나 7년이라고 (맹자에 나오는 말)구별을 하였으니, 이는 정치를 하는 방도에서 제를 높이고 등()을 깎아서 말한 것이 아니라, 고금의 형편이 다르고 대소의 형세가 다른 까닭입니다. 그러나, 맹자는 결코 요순 같은 제왕의 이야기를 먼저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졸음이 오도록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다. 나는 또,

 

위앙(衛鞅 진의 정치가 상앙(商鞅). 위는 봉호)이 먼저 말한 것은 무슨 제왕이었던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특히 황제(黃帝)와 요순의 이름을 빌려서 한만하고 쓸모 없는 이야기를 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싫증이 나게 했으니, 이는 손무자(孫武子 제의 장군 손무. 자는 높이는 말)의 삼사술(三駟術)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혹정이 고금의 인물과 학술의리 등 여러 가지를 논변함에 있어서, 억누르고 찬양하며 세로로도 가로로도 멋대로 하니, 대체로 내 속을 떠보려는 뜻이 있어 보였는데, 나는 처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까 조심하여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데, 간신히 원칙을 지었더니, 혹정은 붓을 들면 몇 장씩 쓰다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다가 갑자기 얼버무리고 말았다. 나는 늦게야 이것을 깨닫고, 맹자의 내용을 들어 한번 시험해 보았더니, 혹정의 주론(主論)은 역시 순정(醇正)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아래 몇 대목은 잃어버려서 말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혹정이 말하기를,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학문을 신(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원통한 일입니다. 그가 비록 세밀히 글을 읽은 것이 후세의 선비들만은 못했다 하더라도, 맹자 한 질에 대해서는 도리어 대의를 뚜렷이 찾아 내어, 분명히 그의 가슴속에는 공()이란 글자 한 자를 새겨 두었고, 그의 안중에는 성()이나 패()의 두 글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대 이래로 홀로 공명(孔明) 한 사람이 가히 대신의 직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론을 볼 때 다스리는 방법을 말할 적에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한 몸이 된다.’ 하였고, 임금을 권면할 적에는 함부로 자신을 비하시켜서 쓸데없는 말을 끌어 의리를 저버리지 말라.’ 하였으며, 또 자신이 천하의 중임을 맡은 데 대해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나의 과실을 부지런히 공격하라.’ 하였으니, 이야말로 만세 뒤에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대승상(大丞相)이라 할만합니다.”

한다. 나는,

 

그러나 유장(劉璋)의 땅을 빼앗은 것은,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바르게 하자는 노릇이 아닐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공명이 반드시 유장의 자리를 억지로 빼앗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장에게 대하여 그를 성토하는 것은 합당할 터이지만, 당랑(螳螂)이 매미를 잡듯이 한 것은 잘못입니다. 유장은 자기 아버지 언()의 때부터 천부(天府)의 나라 촉()을 통째로 점령하고 있으면서, 한 번도 제후(諸侯)들을 도와 나라의 역적(조조(曹操))을 토벌하지 못하였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표(劉表 한의 종실)는 형주(荊州)의 아홉 고을 땅을 차지하여 학교를 세우고 아악(雅樂)을 만들었으니, 이때가 어느 때인데 이렇게도 옹용(雍容)히 앉아 있었단 말입니까. 만약 한()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자들을 추궁한다면, 의당 같은 성을 가진 유씨(劉氏) 제후의 죄를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공명이 초려(草廬)에 높이 누웠을 때부터 유표유언(劉焉)의 무리들에게 분개한 지 오래된 것입니다. 만일 한의 제실(帝室)의 자손으로 신의가 드러난 후손이 있어서,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 봤다면, 손권(孫權)이나 조조보다 먼저 이 자들을 토벌했을 것입니다. 정자(程子)나 주자(朱子)는 매양 공명의 학문이 순정(純正)하지 못하다 하여, 그가 촉을 빼앗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형주익주(益州 유장이 웅거했던 지방) 사이에 걸터앉는다는 것은, 본래 초려에서 생각한 제일의(第一義)로서, 이야말로 국적(國賊)에 대한 공명의 안목이 밝은 것과 또 그의 학술이 정대한 것입니다. 다만 유언에게 대하여는 한의 종실로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죄로 그를 성토할 자료는 된다고 보지만, 유장에게 대해서는 그를 속여 가면서 땅을 빼앗을 것은 못 됩니다. 형주는 지탱할 만한 형세가 되지 못하나, 유종(劉琮)에게 대하여는 습탈(襲奪)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종은 분명히 국토를 역적에게 바쳤으니, 소열(昭烈)이 이를 대의로써 빼앗는데도 세상에서 어느 누가 잘못이라 했겠습니까. 그러나 소열은 형주에서는 한사코 신의를 지키다가 익주에서는 갑자기 간웅(姦雄)의 버릇을 드러내어, 차려다 줄 때에는 먹지 않다가 빼앗아 갔다는 비평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그야말로 원앙각(鴛鴦脚)으로써 지리소(支離疏)를 차 버렸습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선생 역시 관화(官話)도 하실 줄 아십니다그려. 우리나라 속담에, 약한 놈을 업신여겨 무슨 물건을 빼앗는 것을 어린아이 눈물 묻은 떡이라 하고,  난장이 턱 차기라고도 한다. 내가 오는 길에 통관(通官) 쌍림(雙林)의 무리는 사람이 남과 싸우는 것을 보고 꾸짖을 적에, 원앙각(鴛鴦脚)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난장이 턱 차기라는 말과 같고 글귀가 묘하기에, 이때에 중국 발음으로 이 말을 써 보았더니, 입이 둔해서 발음이 잘 되지 않아 혹정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이것을 종이에 써서 보였더니,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이런 조롱을 한 것이다. 가령 성왕(成王)이 주공을 죽였다면, 소공이 어찌 감히 집에 있으면서 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는 위원리(魏元履 ()의 유학자)에게 글을 보내어 소열에 대해서 논하면서, 유종이 조조를 맞아들이던 날 형주를 쳐서 빼앗지 못하고 자기 근거지를 갖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면서 비로소 도적의 꾀를 취했으니, 이는 정도와 권도를 모두 잃어버린 셈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 당시 소열이 비록 형주를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지켜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공(曹公 조조를 높인 말)이 이미 80만 대군으로 지경을 억누르고 있는 판에, 어찌 구구하게 새로 만든 형주를 가지고 그를 막아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청렴하고 사양하는 절조나 굳게 지켜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의가 놀랍다는 소리나 듣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이래서 유종이 조조를 맞이하던 날 형주를 빼앗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정도와 권도를 다 얻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장은 암약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잘 보살필 줄 몰라, 공명이 초려에서 소열과 처음 만났을 때 벌써 약한 자를 집어삼키고 어두운 자를 쳐부수는 계획에 찬성했던 터이고, 결코 꼭 속여서 취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치당(致堂) 호씨(胡氏 ()의 유학자 호인(胡寅). 치당은 호)는 현덕을 가리켜 노식(盧植 후한 때의 학자)진원방(陳元方 후한 때의 학자 진기(陳紀). 원방은 자)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 강성은 자) 같은 인물들과 교제했다 하여, 정말 착실히 경술과 학문을 한 선비로 쳤는데, 이것은 실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그 당시의 현덕은 구름이 찌는 듯하니, ()이 틀어올라가는 격으로 사람을 씹어먹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효웅(梟雄)으로서, 일이 없을 때는 시름에 겨워 울기를 잘하고, 큰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서 변고(變故)가 있는가 묻고, 천지 사이에 자기 한 몸이 없어질까 근심하여 급할 때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원숭이 새끼 같은 유장에게야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 당시 공명은 결코 유장의 땅을 빼앗으라고 권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후세 선비들이 한갓 지난 일만 가지고 선주(先主)를 탕()이나 무왕(武王)의 위에 치켜세우고 있으니, 이것도 역시 후세 선비들의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탕이나 무왕의 한두 가지 사적에 대하여 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입 밖에는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대하여는 으레 그들을 두둔하고 편을 들어서 천고를 통하여 동림당(東林黨)처럼 정의를 굳혀 실로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백금(伯禽)이 종아리를 맞은 것은 필경 무슨 죄이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아버지는 저더러 잘하라고 하시지만 아버지도 다 옳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반발을 일으킬까 걱정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의 결과만 가지고 마음가짐을 달리 판단하는 것은, 후세 유학자들의 편파적인 버릇입니다. 공명을 평해서 이윤과 여상에 비하여 형과 아우 같다고 한 것은 옳은 비평입니다. 대개 천고의 군신에 대하여 일정한 단안(斷案)이 있는데, ‘일부(一夫)일부(一婦)가 그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그 사람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것과 같이 여긴다.’(맹자에 나오는 말) 하였으니, 만일 임금된 자가 모두 이런 심정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한 명의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한 가지 불의를 행해서 천하를 얻는다 하여도 이를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호도 이런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후세의 임금들에 대한 하나의 정평(定評)일 것입니다. 포악한 임금과 어두운 임금이라도, 오히려 때로는 충성을 받아들이고 옳은 일을 권장하는 일을 행할 때도 있었지마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어진 재상이라도, 자기에 대한 공격을 달게 받고 자기 스스로 언로(言路)를 열어 놓는 자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임금된 사람으로서는 비록 옹치(雝齒) 같은 미운 사람이라도 때로는 마음을 놓고 안심하도록 할 수 있었으나, 신하의 처지에 있어서는 비록 한기(韓琦)부필(富弼) 같은 어진 사람으로도 자기의 몸이 죽어 가면서도 자신에 대한 유감을 풀지 못했으니, 이는 천고를 통하여 신하된 자에 대한 단안일 것입니다.”

한다.

내가 혹정과 더불어 닷새를 같이 있었는데, 매양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언제나 탄식하는 소리를 자주 내었다. 그 소리는 한숨 쉬는 것으로, 옛날부터 이르던 위연태식(喟然太息)이란 말이 곧 이것이다. 나는,

 

선생은 평소에 어째서 자주 탄식을 하십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나의 한 가지 병으로서, ‘휴우 하고 기운을 내뿜는 버릇이 드디어 탄식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평생에 글을 읽어도 세상에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십중팔구이니, 어찌 이 병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글을 읽을 때마다 세 번씩 탄식을 지으신다면, 선생의 탄식은 가 태부(賈太傅)의 여섯 번 지은 탄식보다도 6만 번이나 많을 것 같군요.”

하자, 혹정은 웃으면서,

 

천하 일이란, 매양 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는 싸움이라 할 수 있어, 제가 글을 읽다가도, 공자가 하수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하는 것은 명()이야.’ 한 구절에 이르러 세 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항우(項羽)가 오강(烏江)을 건너지 않았다는 대문에 이르러 또 세 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종 유수(宗留守)가 세 번 외쳐 하수를 건너라.’ 하는 데 이르러서 또 세 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만해도 아홉 번이나 탄식을 한 것으로, 가 태부의 여섯 번 탄식보다 많지 않습니까.”

하고는, 둘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또,

 

머리 깎는 봉변을 당했으니, 지사(志士)로서 이미 만 번은 탄식을 하였겠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얼굴빛을 변했다가 얼마 뒤에 낯빛을 바루고는, 머리 깎은 봉변이라고 쓴 종이를 찢어서 화로에 던지면서,

 

()의 사람들이 사냥하기 경쟁을 하였는데, ‘나도 사냥 경쟁을 하겠다.’ 했으니, 어찌 시중(時中)의 성인이 아니겠습니까.(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 뜻) 이탁오(李卓吾)는 자진하여 갑자기 머리를 깎았으니, 이는 흉성(凶性)이더군요.”

한다. 나는 또,

 

듣건대 절강(浙江) 지방에서는, 머리 깎는 전방에다가 성세낙사(盛世樂事)라는 편액을 써 붙였다는데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들은 일이 없는데요. 이것은 석성금(石成金 ()의 학자)의 쾌설(快說)과 같은 뜻이지요.”

한다. 전일 혹정과 이야기할 때에, 머리와 입과 발에 세 가지의 대액(大厄)이 있다는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나는 또 묻기를,

 

()의 국가 창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니, 혹정은,

 

주례(周禮)에 이른바 승국(勝國)이라 한 것이 이것이지요. 공자가, ‘()에는 어진 임금이 67명이나 있다.’(맹자에 나오는 말)고 칭찬한 것처럼, 이것으로써 더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 시대란 볼 만한 것이 없었으니, 무력이 강하지 못한 것은 범중엄한기 두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원칙은, 흡사 누대 선비의 집에서 그 자제들이 옹용(雍容)히 제사를 모시고, 빨리 말하거나 갑자기 얼굴빛을 고치거나 하는 법이 없고, 하인들은 조심스러이 발을 디디고, 뜰에서 빠른 걸음이나 큰 기침을 들을 수 없이, 이야말로 절이 끝나기도 전에 음식은 썩고, 사당이 타 버린 뒤에 축관(祝官)을 부르는 격이었습니다.”

한다. 나는 또,

 

특별한 예악(禮樂)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실은 여러 방면으로 한()의 제도를 본뜬 것이 적지 않지마는, 그때는 섬라(暹羅) 소주를 마셔서 술이 크게 취하면 노래하는 놈, 우는 놈, 춤추는 놈, 욕설하는 놈들 모두가 천진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송조(宋朝)에 와서는 한의 찌꺼기 술을 물려 먹으면서도 서로 쳐다보고 술맛이 좋다고 하면서 몸을 똑바로 가지고 종일토록 마셔도, 질서가 어지럽지 않았으나 정말 진의(眞意)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종실(宗室)의 대신 중에는 한 사람의 하간헌왕(河間獻王)도 볼 수 없으니, ()의 재육(裁堉) 같은 인물이 있을 수가 있나요.”

하고 대답한다. 나는 다시,

 

()은 어느 때 사람인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의 종실 정왕(鄭王)의 세자(世子)이지요. 이름은 재육인데, 율려정의(律呂精義)를 지었습니다. 이 명()이야말로, 참으로 종소리로 시작하여 편경 소리로 끝냈던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시 광명(光明)하여, 하나도 구차한 데가 없었지요.”

한다. 나는 다시,

 

과연 그러했을까요.”

하고 묻자, 혹정은,

 

태조(太祖) 운운 …… . 그는 붓으로 점만 툭툭 치면서 나를 향하여 무어라 무어라 하면서도 즐겨 쓰지 않는다. 이는 아마 명이 원()의 오랑캐를 몰아낸 것이 가장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고 하는 듯싶었다. 건문(建文 ()의 연호)이 대궐 안에서 편안히 살다가 죽었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지만, () 원종(元宗)은 필경 머리에 구리철사로 테를 매게 되었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무슨 말씀인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이보국(李輔國 ()의 정치가)은 방망이로 장양제(張良娣)를 때려죽였고, 오래 취하는 치뇌주(鴟腦酒)를 바쳐 숙종(肅宗)을 벙어리로 만들었지요. 천순(天順 ()의 연호)의 복위(復位)는 기적이어서, 천고에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천자가 잡히고 보면, 누가 능히 술잔을 올리고 일산을 받드는 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숭정(崇幀)으로 말하면 17년 동안 50명의 재상을 갈아 썼는데, 사람 쓰는 법이 이토록 어지러웠으니 일 처리도 엉망진창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마는, 군자는 차라리 부서질지언정 옥을 택하지 온전하다고 하여 기왓장을 택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야말로 숭정의 공명정대한 처사로서, ()의 흥하고 망한 역사는 천고에 둘도 없는 모범이었습니다.”

한다. 내가 이때,

 

사해(四海)의 남은 백성들.”

이라고 가는 글씨로 썼더니, 혹정은 얼핏 말하기를,

 

청조(淸朝)가 나라를 얻을 때 공명정대했다는 것은, 천지에 대하여 유감이 없습니다. 대체로 국가를 창건한 자가 정권을 잡을 때는 전조(前朝)에 대하여 원수와 같이 대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입국 당초에 큰 은혜를 베풀어 명의 원수를 갚아 준 것은 우리 청조밖에 없습니다. 여덟 살 난 어린아이로서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다는 것은, 생민(生民)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우리 세조장 황제(世祖章皇帝)는 처음에는 천하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다만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히며, ()의 원수를 갚고 천하 백성을 혈해(血海)와 골산(骨山) 속에서 구해 내려 하였으나,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이 한결같이 귀순했던 것입니다. 맨 처음 숭정을 따라 죽은 대신 범경문(范景文 ()의 명신)  20명을 표창했고, 지난해에도 황제는 숭정의 죽음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 1 6백여 명에게 충민(忠愍)민절(愍節) 등의 시호를 주었습니다. 공명정대하고 강상(綱常)을 올바로 붙들어 잡은 일은, 삼황(三皇)오제(五帝) 이래로 이러한 일을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천하를 차지하는 자는, 자기 집안에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만 능히 그 나라를 오래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을미년(1775) 11월에 내각(內閣)에 내린, 숭정의 죽은 일에 대한 조서(詔書)를 좀 보자고 했더니, 혹정은 밤에 보여 주겠다고 허락하였다. 나는 다시 묻기를,

 

앞서 선생이 백이숙제 이전에는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있었고, 백이숙제 뒤에는 관숙(管叔)채숙(蔡叔)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였더니, 혹정이 미소를 띠면서 대답하지 않기에, 내가 다시 졸랐더니 혹정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의리라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쇠를 녹여서 모형(模型)에 붓는 것과 같아서, 쇠 스스로가 무슨 물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형에 따라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또 조개껍질을 보는 것과 같으니, 조개껍질은 일정한 빛이 있기는 하지만 보는 사람이 바로 보고 옆으로 보는 데 따라 그 빛도 각각 다른 것입니다.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터지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터지는 것은, 다만 물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묻기를,

 

물을 격동시켜서 올리면 산 위에까지 올릴 수 있으나, 그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세상일이란 거꾸로 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요.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태백은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했다.’(논어에 나오는 말)고 칭찬했지만, ()의 주왕(紂王)으로 말한다면 그때 아직 뱃속에도 들지 않았을 적이요, 당시 고공(古公)의 일을 여러 제후(諸侯)들의 나라에 비교해 본다면 한 변방의 부용(附庸 위성국(衛星國))된 나라에 지나지 못하니, 당시의 천하는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할 일이요, 태백이 과연 누구에게 천하를 세 번씩이나 양보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주자(朱子), 계력(季歷)이 아들 창( 주 문왕의 이름)을 낳으며 거룩한 덕이 있어, 태왕(太王 고공의 묘호)이 이 때문에 은()을 멸망시킬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지마는,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는 너무 일찍 서둔 계획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자기 집안이 창성하는 것을 꾀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망령되이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랄 것입니까. 주자는 또 말하기를, ‘이 같은 뜻은 지극히 공변된 마음에서 나왔다.’고 했으나, 이 역시 잘못된 말이니, 모르기는 하지마는 지극히 공변된 마음이란 과연 어떠한 마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렇고 보면, ()가 국가를 창건한 사적에는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겠지마는, 다만 후세에 전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공자가 홀연히 태백의 신상(身上)에 대하여 탄복한 것을 본다면, 주가 국가를 창건할 시초에는 은연히 무슨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뇌공(雷公 뇌신(雷神))이 이에 대하여 주자를 공박한 이론은, 마치 조민(刁民 교활한 백성)들이 소장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한다. 내가,

 

뇌공이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모기령(毛奇齡)입니다. 국초의 대가(大家)라 합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털보 뇌공 말입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또 위공(蝟公 고슴도치)이라고도 부릅니다. 전신이 모두 가시거든요.”

한다. 나는,

 

서하집(西河集)을 나도 한 번 얼핏 보았지만, 그가 경전(經典)의 뜻을 고증(攷證)한 데는 혹 그럴싸한 의견이 없지도 않더군요.”

하고 말하자, 혹정은,

 

대단히 망령된 사람입니다. 그의 문장도 역시 교활한 백성의 소장과 같은 점이 많습니다. 모기령은 소산(蕭山) 사람이어서, 그 지방은 글하는 아전들이 많아 글장난을 잘하므로, 안목 가진 사람들은 모기령을 지목하여 소산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다. 나는 또,

 

문왕은 태왕의 막내아들의 아들인데, 태왕이 본래 어린 손자가 갸륵한 덕()이 있음을 보았으니, 아무래도 태왕의 나이가 백 살은 먹었을 것이요, ()나 옹()으로부터 형만(荊蠻)까지라면 만 리 길이 될 터인데, 백 살된 어버이를 집에다 남겨 두고 만 리 길에 약을 캐러 갔다니, 이야말로 3년 동안 앓는 환자를 위하여 7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중국의 속담)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태백을 보고 지극한 덕을 갖춘 인물이라 하고, 주자는 태왕을 가리켜 지극히 공변된 인물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아무런 충돌도 없는 백이와 태공의 사이와는 같지 않습니다. 태백으로 본다면 태왕이 지극히 공변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태왕으로 본다면 태백이 지극한 덕을 갖추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현들이 말씀한, 지극히 은미하고 지극히 정미한 뜻을, 겉만 핥는 얇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추측조차 못할 바이지만, 저도 역시 이 사실에는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니,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좁은 골목에 몰아넣을 것은 아닙니다. 소자첨(蘇子瞻), 다만 외면만 보고 얼핏 무왕을 성인이 아니라고 배척했으나, 이것은 소자첨의 공부가 거칠기 때문입니다. 논어(論語)에는 문왕의 지극한 덕을 찬양하여,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도 오히려 은()을 섬겼다고 했는데, 그 집주(集注 주희 저)에 보면, ‘()()()()() 등의 여러 고을은 주()로 돌아가서, 은의 주왕(紂王)에게 속한 땅은 다만 청()()() 등 세 고을뿐이다.’ 했으나, 이는 잘못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천하의 3분의 2라 함은 삼국시대 촉한(蜀漢)과 오()()와 같이 서로 정치(鼎峙)함과 같지 않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우()()가 송사를 단념하고 물러간 것과 마찬가지로, 3분의 2가 되는 천하의 인심이 주()로 돌아갔다는 것일 것입니다. 왕망(王莽)이나 조조(曺操) 같은 자들은, 정말 천하의 3분의 2가 되는 땅을 점령하고서는 종주국(宗主國)을 섬기는 예절을 폐기하였지만, 문왕은 진실로 3분의 2가 되는 천하의 인심을 얻고서도 자기란 존재가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주왕의 죄악을 꼬집어 보지도 않아서, 마치 자제들이 부형 앞에 하듯이 자기 몸을 굽혀 스스로 신하의 도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설자(說者 주희를 말한다)의 말과 같이 정말로 9() 가운데 6주의 땅을 차지하고, 그 세력은 능히 은을 대신하여 천하를 차지할 만하였으나, 일부러 신하의 도리를 지켜 공손하게 몸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의 말과 같다면, 조조 같은 주 문왕을 무엇으로써 지극한 덕이 있었다 하겠습니까. 3분의 2, 많은 수를 쪼갠 것이요, 그의 지극한 덕행이란, 바로 문왕이 시비를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 같은 점을 말한 것이니, 후세에서 말하는 소위,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 돌아온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란 말이 문왕을 두고 한 말입니다. 주자가 그를 무왕보다 낫게 쳐 준 것도 바로 이것이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볼 때 거북의 등에 털이나 난 듯, 토끼 머리에 뿔이나 돋은 듯이 이상하게 보고서, 세상 일을 가지고 이리저리 큰일을 만들어 보려고 떠드는 자들은, 저 뱁새의 둥지나 하수를 마시는 물쥐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 것입니다. 옛날 세상에도 이러한 학문이 없지 않고 보니, 공자의 태백에 대한 평가도 그리 과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상 태백은 머리를 하늘로 두고 발을 땅에 붙인 한 개의 평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태왕이야말로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사기(史記)에는 오자서(伍子胥 ()의 정치가 오원(伍員). 자서는 자)를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 하였고, 장주(莊周)는 은()의 탕왕(湯王)을 뱃심좋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 했더군요.”

하고 말하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어질고도 사람을 죽일 줄 알고, 예절을 지키면서도 무력을 쓸 줄 알며, 지혜가 있으면서도 물을 줄 알고, 용맹이 있으면서도 머리를 숙일 줄 알며, 신의가 있으면서도 변할 줄 아는 것을 가리켜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 합니다. 성정이 그렇지 않고서는 역시 혁신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또 반란을 바로잡지도 못할 것입니다. 대체로 창업(創業)을 이룩하는 자는 갖은 풍상을 겪지 않고서는 하늘을 맑히고 땅을 평정하지 못합니다. 천지의 기운이 뒤바뀔 때는 바람과 서리와 우레와 우박이 없이는 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10월은 곧 천지 자연이 한 번 뒤집히는 시절이니 어찌 무서운 변화가 없겠습니까. 주공은 선대의 아름다운 덕을 기술하여 한 편의 신도비(神道碑 죽은 사람의 사행을 기록한 비())를 지었으니, 그 비문에,

영롱한 저 중추월을 님과 함께 구경하였지마는 / 玲瓏共玩中秋月

뉘라서 간밤에는 빗발이 창을 두들겼다 하는고(작자 미상) / 誰道前宵雨打窓

했습니다. 후세에서 참으로 태왕이 천하를 얻는 데 무심했다고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

점검이 취해서 전연 알지 못했네(작자 미상) / 點檢醉睡渾不知

라는 말이 어찌 백정이 칼을 갈면서 염불을 함과 다름이 있을 것이며,

침대 밖에 남이 자는 것 허용치 않는데 / 不容榻外他人睡

군막에서 몸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서야 되겠는가(작자 미상) / 肯自營中醉似泥

하였음도 역시 이를 말한 것입니다. 태백의 지극한 덕은 천하를 양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양보한다는 말은 공자가 장래 일을 거꾸로 말씀한 것이요, 그의 지극한 덕이야말로 참으로 백성들이 이렇다고 칭찬해 낼 수 없는 점일 것입니다. 이는 바보가 아니면 귀머거리이니, 그는 전혀 은()의 왕실에 어떠한 악한 천자가 태어날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요, 또 자기 집안에 어떠한 거룩한 성덕(聖德)을 지닌 아이(문왕)가 태어날 것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큰 천치가 아니면 바보를 면치 못했을 것이니, 말하자면 우리 태백이 천하의 형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천하가 우리 태백의 이른바 백성들이 이렇다고 칭찬해 낼 수 없는 점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자가 그를 문왕보다도 높이 여긴 것도 이 까닭으로서, 춘추전(春秋傳 좌전(左傳))에서는 이르기를, 태백은 태왕의 말을 듣지 않아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태왕이 이런 것을 가지고 숙덕거리며 모의를 했는데 태백은 이것을 간절히 간()했을 수 있겠는가. 만일 천하로 하여금 이 같은 태백의 행동을 지극한 덕이라고 쳐 준다면, 태왕의 일이야말로 도리어 난처할 것인즉, 이렇기 때문에 제가 말한 하늘로 머리 두고 땅에 발을 디딘 평범한 인물이란 이를 말함입니다. 전에 제가 이른바 백이숙제 이전에는 태백중옹이 있었다는 말은 다만 논어의 집주를 좇아서 한 말이요, 지금 한 말과는 뜻이 다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백이숙제의 뒤에는 관숙(管叔)채숙(蔡叔)이 있었다고 한다면, 선생은 또한 장차 관숙채숙의 덕을 태백에게 비하려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내가 말씀한 본지(本旨)는 이와 다릅니다. 다만 한()의 국가를 창립한 것이 광명정대하다는 것을 밝혔을 따름이요, 관숙채숙에게 도리어 지극한 덕이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관숙채숙은 은()의 왕실에의 충신이며 문왕의 효자들이라고 일컫는 이가 있으나, 이것이 아무리 꼬부라진 학자들이 세상에 아첨하는 데 분개하고, 썩은 선비들이 함부로 남의 말을 따르는 것이 미워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입론(立論)을 어찌 어그러진 이론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사람들이 남의 고금 성패의 자취만을 보고, 의리를 굽히고 의리 위에 다른 의리를 덮어 씌워서, 추켜 세울 때는 하늘 위에까지 올려놓고 억누를 때는 땅속까지 파묻는 것을 개탄한 것입니다. 우리 선비들도 역시 종횡(縱橫)하는 습관이 없지 않으니, 억양함이 너무 심한 것도 역시 한낱 종횡입니다. ()의 건평(建平 ()의 연호)원시(元始 ()의 연호) 시절에 왕망은 신야(新野)의 밭을 받지 않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대궐 앞을 떠나지 않고 황제에게 왕망을 칭송하는 글을 올린 자가 전후 48 7 5 72명이요, 제후와 왕공과 열후(列侯)와 종실(宗室)들은 안한공(安漢公 왕망이 자칭한 봉호)에게 구석(九錫)을 내릴 것을 머리를 조아려 황제에게 무수히 청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정으로 의논한다면, 적의(翟義)진풍(陳豐) 같은 사람들은 어찌 주() 때의 주공이 모반한다고 유언을 퍼뜨린 관숙채숙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에 관숙채숙이 성공하여 당시 주공에 대하여 왕법(王法)을 행할 공안(公案)이 성립되었던들, 비록 천수관음(千手觀音)이 있다 하더라도 주공을 역모죄로부터 구해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왕안석(王安石)의 시(),

가령 당년에 그 몸이 죽었더라면 / 假使當年身便死

한평생 참과 거짓을 뉘라서 알았으랴 / 一生眞僞有誰知

라고, 읊었지마는 그가 쉽게 죽지 않고 보니 성인인지 도적인지를 당장에 판단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천의(天意)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그것은 형공(荊公 왕안석의 봉호)의 시가 아니라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의 자)이 지은 것입니다. 주의 왕실은 원래 변고가 많은 집안이요, 주공은 또 비방을 많이 받는 성인입니다. []을 쪼개고, 저울을 꺾고, 도적을 풀어놓는다(남화경에 나오는 말)는 말은 좀 괴상한 이론이지만, 실로 백대의 폐단이 되는 근원을 밝게 비춰 준 말입니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은 뒤에 말씀하기를, ‘나의 공적을 아는 것도 춘추이며 나의 죄과를 아는 것도 춘추이다.’(논어에 나오는 말)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아 주공의 제작한 제도들도 장래에 어떤 화근이 되리라고 스스로 상심했을 것입니다. 근세에 먹을 만드는 자는 모두들 담성규(詹成圭 ()의 제묵가)를 본떠서 만들고, 바늘을 만드는 자는 대체로 이공도(李公道 ()의 제침가)의 이름을 빌리는 것과 같습니다. 당 태종(唐太宗)은 제 환공(齊桓公) 노릇을 한 번 해 보고자 하여 갑자기 관이오(管夷吾)와 같은 인물을 구하려 하였을 때에, 위징(魏徵)은 천하의 간사한 인물로서 그 앞에 소리를 응하여 예이 하고 긴 대답을 하며 나타나 얼굴을 마주 대고 딱 버티고 서서, ‘관중(管仲)이 여기 왔습니다.’ 하고 나선 셈입니다. 이런 때 누가 묻기를, ‘너 관중은 어째서 공자(公子) ()와 함께 죽지 아니하였는가.’ 한다면 위징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성인이 나에게 죽지 말라고 허락하였습니다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또 묻기를, ‘어떤 성인이 너를 살려 주더냐.’ 하면, 위징은 노 나라의 공 부자인데, 그는 다문박식한데다가 지공혈성(至公血誠)을 지닌 성인으로서 만세에 사표가 되어, 말 한 마디 땅에 떨어져도 금이 되고 돌이 되어,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고 세상에 세워서 어긋남이 없으며, 이후 백대의 성인을 기다려도 틀림이 없을 것이오.’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공자가, ‘어찌 너를 죽지 말라고 허락했을 것인가.’ 하고 물으면, 위징은 소리를 높여 긴 소리로 읊기를, ‘어찌 성명 없는 평범한 지아비와 지어미의 신의를 지키는 버릇과 같이 개울 속에서 목매어 죽어, 아무도 알 바 없는 신세가 되리요 했으니, 이것이 어찌 중니(仲尼 공자의 자)가 나를 죽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리요.’ 할 것이니, 이것은 비단 위징이 스스로 해석하였을 뿐 아니라, 실은 당 태종에게 붙어서 아첨으로 한평생을 지낸 수단이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을 그 동네의 보정(保正)으로 하여금 그의 네 이웃에다 통문이라도 돌렸다면 하후영녀(夏侯令女)가 아마도 귀를 베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위징에게 소백(小白 제 환공의 이름)은 형이요 규()는 아우가 아닌가. 또 관중은 규의 올바른 신하도 못 되지 않았던가 하고 물어 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위징은 진왕(秦王 이세민이 천자가 되기 전의 봉호) 세민(世民)과 함께 모두 당()의 태자인 건성(建成)의 부하였습니다. 위징의 신분은 원래 도사(道士)로서 허망한 도를 믿었습니다. 그의 십점소(十漸疏)는 아주 친절하게 깨우치는 것 같지마는,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천고에 중보(仲父 관중)가 죽을 리가 전혀 없으니, 정관천자(貞觀天子 () 태종. 정관은 그의 연호)도 모름지기 나 같은 시골뜨기를 죽일 까닭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리이다. 그리하여 임금과 신하가 거간꾼이나 장사치의 노름으로 상하 없이 공리(功利)만 추구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고금의 성패에 있어 한 개의 단안(斷案)이었습니다. 성패라는 두 글자는 선비들의 입으로는 형용 못할 글자였으며, 오히려 제후(諸侯)의 집에 인의가 붙여 있을 뿐이요, 제범(帝範)의 한 편 글은 다만 요()를 본뜨고 순()을 꾸몄을 뿐입니다. 우리 선비들이 말하는 바 천명(天命)이란 것은 기수(氣數)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기수란 것은 역시 성패의 행적만을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항상 말하듯이 하늘이 임금의 지위를 주고 인심이 저절로 돌아온다는 말은 한낱 거짓말이니, 예로부터 역리로 취하여 순리로 지키는 자 어느 누구를 천명이 돌봐주지 않았으며, 후직(后稷 중국 고대에 농사를 관장하던 관리)의 농사짓는 법으로 사람들이 지극한 도움을 받는 바에야 어느 귀신이 제향(祭享)을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편안하고 보니 날마다 한()의 백성들이 왕망의 공덕을 찬송함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의 귀신이 진()이 주는 음식이라고 토했다(좌전에서 나온 구절)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혹정의 이 말은 속으로 무엇을 지목하는 점이 있는 것이요, 그저 역대를 평범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매양 청()의 창건한 것이 정당하다고 말끝마다 외고 있으나 그래도 이야기할 때는 때때로 자기의 본정을 탄로했으니, 특히 역대 왕조의 역순과 성패의 자취를 빌려서 이리저리 자기의 회포를 표시한 것이다.

한다. 나는 다시,

 

다만 운수로만 미룬다면 세상에 손댈 데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성인들은 천명이란 말을 자주 하지 않았으니, 이는 세상을 위하여 가르침을 세우는 데는 이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오면 바람이 등왕각으로 보내고 / 時來風送滕王閣

운이 가면 천복비에 벼락이 친다네 / 運去雷轟薦福碑

라 하였으니, 세상 일이란 도시 때가 오고 운이 가고에 있나 봅니다.”

하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소위 운수가 터진 인재(人才)는 하늘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세상을 교화하는 것으로 본다면 비록 순리라고 할 것도 천의(天意)로서 보면 도리어 흠이 되고 반대로 어그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마는,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이에게는 왕패(王霸)가 거짓말로 얼음이 굳게 얼었다고 하였으나 하늘은 그 거짓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고, 지성을 들여 기도를 하더라도 반드시 원대로 들어주는 것이 없건마는, 나라가 망할 적에는 장세걸(張世傑 ()의 충신)이 분향을 하면서 하늘에 빌던 대로 들어맞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것은 제때에 우는 닭 울음인데,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의 봉호)이 호구(虎口)를 벗어나게 하려 하여, 한 사람이 울음 소리를 내자 닭이란 닭은 모조리 따라서 울었습니다. 천하에 틀림없는 것은 조수[潮汐] 같은 것이 없지마는, ()의 왕조가 더 버티지 못하게 되니, 전당(錢塘)의 조수(潮水)가 사흘 동안을 들지 않았습니다.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귀신의 조화조차 거짓과 진실이 서로 엇갈리며 성실과 휼계가 함께 씌어져, 어느 사람이 천하를 얻게 될 때에도 하늘은 반드시 즐겨한 바 아니지만 자기만을 공교로이 도와주는 것 같고, 또 어느 사람이 천하를 잃게 될 때에도 하늘은 반드시 미워하지 않건마는, 잔인하고 흉악하기가 깊은 원수에게 하듯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우리나라 패륵(貝勒) 박락(博洛)이 군사를 거느리고 절강(浙江) 군사를 강 언덕으로 옮기는데 이때도 조수가 연일 들지 않았답니다.”

한다. 나는 또 묻기를,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섭정왕(攝政王)은 누구를 이른 것입니까.”

하니, 혹정은,

 

이는 예친왕(睿親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휘()는 다이곤(多爾袞)인데 우리 청()의 주공(周公)이지요. 순치(順治) 원년(1644) 4월에 예친왕이란 왕호를 주고 황제 앞에서도 수레를 타고 일산을 받을 수 있는 특전을 내렸습니다. 성경(盛京)으로부터 대군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영원(寧遠)을 향하여 진군할 때에 이자성(李自成)이 벌써 북경을 점령하게 되자, 평서백(平西伯) 오삼계(吳三桂)는 우리 군사를 맞아서 산해관으로 들어오게 하여 원수를 갚고 흉적을 물리쳤습니다. 예친왕이 관민들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흉적만 잡을 뿐이요 백성은 살해하지 않고 함께 태평을 누리겠다는 뜻을 발표하니,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5월에 예친왕이 조양문으로 나가는데 그가 탄 연()은 명()의 노부(鹵簿 천자가 거둥할 때 쓰는 의례)의 절차를 차리고 명의 문무 백관의 조회를 무영전(武英殿)에서 받았습니다.”

한다. 나는 또,

 

이때는 천하를 도시 예친왕이 얻은 셈인데 어찌해서 자신이 천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이런 까닭에 우리 청조(淸朝)의 주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당시의 형편으로서도 역시 그렇게 하지 못할 내력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친왕(親王)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영용하고 호걸스러웠습니다. 우리 세조(世祖) 9월에 북경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밖으로는 강 왼편이 평정되지 못했으나 안으로는 종실(宗室)의 어진 신하들이 보좌(補佐)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당시의 여러 친왕들 중에는 공덕으로 보아 섭정왕(攝政王) 같은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열성실록(列聖實錄)이 아직도 국내외에 두루 퍼지지 못했으니 응당 선생께서 모르실 것입니다. 명이 망한 뒤에 복왕(福王 ()의 신종(神宗)의 손자)은 강녕(江寧)에서 천자라 일컫고 연호를 고쳐 홍광(弘光)’이라 하였습니다. 순치(順治) 2(1645) 5월에 예친왕(睿親王)은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으로 내려가 이긴 기세로 강을 건너 강녕까지 바로 이르렀습니다. 복왕은 무호(蕪湖)로 달아나 숨었다가 6월에 총병(總兵) 전웅(田雄)과 마득공(馬得功)에게 잡혀서 항복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예친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다탁(多鐸)이라고 하는데, 그의 영무(英武)스러운 점은 예친왕(睿親王)에 못지 않을 것입니다. 영친왕(英親王)의 이름은 아제격(阿濟格)으로 이자성을 추격하여 토벌했고, 숙친왕(肅親王)은 장헌충(張獻忠 ()의 역신)을 손수 쏘아 죽여서 통쾌하게 여러 사람의 설분을 했습니다. 숙친왕의 이름은 호격(豪格)인데 모두가 하늘이 세운 것이니 누가 감히 당해낼 것입니까.”

한다. 나는 또,

 

복왕(福王)이 만일 마사영(馬士英 ()의 역신)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사가법(史可法 ()의 충신) 같은 어진 사람들을 믿었던들, 강남(江南)의 땅을 어찌 대대로 지켜내지 못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이 위연(喟然)히 탄식하고 하는 말이,

 

하늘이 폐한 것인데 누가 다시 일으켜 주겠습니까. 그의 행적을 보면 전날의 유왕(幽王 ()의 폭군)여왕(厲王 ()의 폭군)환제(桓帝 ()의 용주(庸主))영제(靈帝 ()의 용주(庸主)) 등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예친왕(睿親王)은 사가법에게 보낸 글 속에 춘추(春秋)의 대의를 이끌어 임금이 죽임을 당했는데, 역적을 토벌하지 않고 새 임금을 세운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책망하며 또 말하기를, 역적이 쳐들어 와서 나라의 부모를 죽였건만 중국의 신민들은 활촉 한 개도 쏘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정은 묵은 혐의를 없애버리고 군대를 갖추어 흉적을 소탕하여 천하를 위하여 임금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먼저 예절을 갖추어 회종(懷宗)과 황후를 장사지냈고 국가가 수도로 정한 북경은 이자성으로부터 얻은 것이요, 명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아니니 마땅히 존칭을 깎아버리고 번국(藩國)이 되어 길이 복을 누릴 것이니, 그리하면 조정으로서는 우빈(虞賓)으로 대접할 것이라 하였더니, 사가법의 답장에는, 국가는 없어지고 임금은 죽으니 사직(社稷)이 중한지라 금상(今上)을 맞아 임금으로 세우니, 혹정이 자기 스스로 주를 내기를, 명의 복왕(福王)이라 하였다. 실로 하늘이 준 바요, 인심이 귀순하였습니다. 전하(殿下)가 수도에 들자, 우리 황제황후를 위하여 발상(發喪)을 하고 복을 입게 되니, 무릇 대명(大明)의 신자된 자로서 누가 감격하여 은혜를 갚으려고 하지 않으리요. 그런데 이에 춘추를 이끌어 내어 정통(正統)의 대의를 모르는 자와 같이 힐책을 하려 하니, 장차 무엇으로 인심이 거칠어져 가는 것을 붙들 수 있겠습니까. 왕망(王莽)이 한()의 제위를 빼앗았을 때 광무(光武)가 중흥하였고, 조비(曹丕)가 산양(山陽 () 헌제(獻帝)의 폐위된 뒤의 봉호)을 폐하자 소열(昭烈)이 제위를 밟게 되었고, 회제(懷帝 ()의 임금)민제(愍帝 ()의 임금)가 북방으로 달아나자 원제(元帝 ()의 임금)가 대를 이었고, 휘종(徽宗)흠종(欽宗)이 몽진(蒙塵)하자 강왕(康王 남송의 임금)이 위를 이었으니, 이는 모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전에 국가의 위호를 바로잡은 것으로서 주자도 강목(綱目) 속에 이것을 커다랗게 쓰고 그르다고 배척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황제(건륭 황제)가 친히 쓴 글 한 편 속에 그 시비를 바로잡았고, 또 황제가 비정(批定) 통감집람(通鑑輯覽)은 극히 공평하고 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북왕이 조금이나마 뜻을 분발하여 무언가 해 보려고 하였으면 송 고종(宋高宗)처럼 남쪽으로 건너가서 한 쪽에서라도 편안히 있었을 것인데, 드디어 마( 마사영(馬士英))( ()의 역신 완대무(阮大錻)) 같은 간당(奸黨)을 임용해서 옳고 그른 일이 거꾸로 되어 버렸는데, 비록 사가법이 혼자서 애써 고충(孤忠)을 기울여 보아도, 한 나무로 큰 집을 떠받들 수 없는 격이 되고 보니 황제의 이 유고(諭告)야말로 가히 천지와 더불어 같이 크다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패하고 흥하는 일에 운수가 있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을 어찌할 것입니까.”

했다. 나는 다시,

 

사가법의 편지에는 또 귀국은 일찍이 명으로부터 봉호(封號)를 받게 되고 나도 역시 스스로 주를 내기를, 귀국의 두 글자는 원서(原書)에는 지금 청()을 말함이라고 했다. 이제 난역(亂逆)을 몰아 쫓아 없앴으니 가위 대의라 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강토를 규정함으로써 덕을 끝까지 다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런 것을 일컬어 의리로써 시작했다가 이해로써 끝을 낸다는 것이다 했으니, 이 글이야말로 일월과 더불어 밝은 빛을 다툴 만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깜짝 놀라면서,

 

()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글을 읽어 보셨습니까.” 이 두 편 글은 모두 이현석(李玄錫) 명사강목(明史綱目)에 실려 있는 바 혹정의 짐작으로는 나를 외국인이라 하여 응당 명청 사이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사가법의 답서를 모두 말한 뒤 그 하단(下段), 일찍이 봉호(封號)를 받았다는 등의 말에 주석(註釋)을 달았다. 그의 뜻으로는 섭정왕이 관내(關內)에 들어온 일을 국가끼리 서로 재난을 구해주듯 했으므로, 나는 계속해서 그 글을 외운즉 혹정은 내가 이 글을 갖추어 아는 것에 놀란 것이다.

한다. 나는 또,

 

사공(史公)의 이 글도 역시 금서(禁書)에 드는가요.”

하고 묻자, 혹정은,

 

금서가 아닙니다. 황제가 손수 여러 편 글을 편찬하면서 이 글을 뽑아 실었습니다. 우리 청조(淸朝)의 관대하고도 숨기지 않은 점은 전대에도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한다. 나는 또,

 

이 두 글은 어느 편이 의리가 옳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빙그레 웃으면서,

 

서로들 춘추(春秋)를 이끌어서 말했으나 그 춘추도 썩은 지 벌써 오래인지라, 모두들 하늘의 명수(命數)라 하니, 하늘이 순순(諄諄)히 말하는 것(맹자에 나온 말)을 누가 들었나요.”

하고는, 이내 지워 버린다. 나는 또,

 

예친왕(睿親王)이 죽은 뒤에 무엇 때문에 그 집 재산이 모두 몰수되었나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손을 흔들면서,

 

말을 하자면 길어집니다. 이는 치효(鴟梟)의 시()를 짓게 된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일컫기를, 금등(金縢)은 근세의 축문(祝文)과 같은 것으로 태워서 땅에 묻는 법인데,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금등에 간수하였다(이정전서(二程全書)에 나오는 말) 하여, 공교롭게도 주공의 고사(故事)에 맞추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신비(李宸妃)의 수은(水銀) 염습도 역시 한 가지 금등이 될 것입니다. 화림(華林)에서 나는 개구리 울음 소리는 공()을 위해서 우는 것입니까, ()를 위해서 우는 것입니까. 대체로 세상을 교화하기 위한 언론이란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저마다 제 들은 것을 제일이라 하여 이를 정당화시킵니다. 송의 사대부들은 이학(理學)을 말하기 좋아하지만 그 중에는 마음을 불교(佛敎)에 붙이는 자도 있고 도교(道敎)를 궁행(躬行)하는 자도 있어, 21대의 전사(全史)는 모두가 연의(演義)한 것이요, 13()의 주소(注疏)는 태반이 억지로 모은 글이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말은 대개가 모두 우언(寓言)입니다. 이같이 구구하게 얻은 지식이란 위로는 임금에게도 바칠 수 없고, 아래로 자손들에게도 가히 전할 수 없으며, 옆으로 동창(同窓)들에게 억지로 변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해상(海上)으로부터 오신 이인(異人 연암을 가리킨다)을 만났으니, 죽는 날까지 또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며 어찌 나의 충성인들 솟구치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산연(潸然)히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크게 웃더니,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 요부는 자)는 매사에 사주(四柱)를 풀이하는 식으로 하였으니 정말 몹시도 막힌 사람이지요.”

한다. 나는,

 

이를테면 분()을 사면서 그것이 성한지 깨졌는지를 점쳤다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과 인()()()()와 황()()()()와 금()()()() 등 그의 학술이란 아무런 활기(活機)가 없고 정밀한 듯하면서도 거칠었기 때문에 주자는 그를 장자방(張子房)에게 따를 수 없다(주자대전에 나오는 말) 하였고, 또 그의 학문에는 간웅(姦雄)의 수단이 있어서 장주(莊周)보다 10배나 못하다(주자대전에 나오는 말) 하였으니 주자의 밝은 안목 앞에는 도망할 수 없었습니다. 주자는 장주를 평하여 그가 이치의 본질을 말한 것은 매우 좋은 의논이요, 그의 명분(名分)과 의리는 후세의 유학자들이 미치지 못할 바라(주자대전에 나오는 말) 하였으니, 이는 주자의 공변되고 밝은 점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천지간에 가득찬 만사와 만물이 주자의 감정(勘定)이 아니면 위조물을 면하지 못했을 테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그러면 주자의 뒤에 난 자는 모두 흙이나 나무로 빚어 놓은 형해(形骸)랍디까. 주자야말로 진량(陳亮 ()의 학자)의 말을 지나치게 듣고 보니 당중우(唐仲友 ()의 학자)는 너무 혹독한 탄핵을 당했던 것이며(주희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통서(通書 주돈이 (周敦頤) )를 잘못 해석하고는 사국(史局)의 주장을 반대하는 글을 꾸며대어 속이는 감이 있었으니, 소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통서(通書)에 나오는 구절)는 구절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만큼 한 붓으로 흐려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말하기를,

 

귀국의 문교(文敎)는 사해에 퍼져 우리나라도 동쪽으로 미쳐 오는 교화를 입고 있지마는 중국과 외국이 다르고 보니, 국가를 창건하는 규모라든지 전수하는 심법(心法) 같은 것은 얻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저로서는 글자가 같은 땅에 사는 터에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나라를 세우는 규모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오제(五帝)는 음악이 모두 다르고 삼왕(三王)은 예절이 모두 다르니 하()는 충성을 숭상하고 은()은 질박(質朴)한 것을 숭상하며, ()는 문명(文明)을 숭상했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혹정은,

 

그 원인을 살펴 본다면 비록 백세 동안이라도 그 손익(損益)을 알 수 있을 것(논어에 나오는 말)이니, 옛날 사람은 천하를 두고 금항아리에 비했지마는 오늘의 금항아리는 잘 익은 수박과 같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금항아리는 흠집이 나지 않지만, 수박은 깨어지기 쉬울 걸요.”

하였더니, 혹정은 손을 흔들면서,

 

아니지요. 수박이란 겉은 푸르고 속은 누르며, 씨가 많고 맛이 시원하여 말하자면 천하를 천하 속에 간직함 셈입니다. 전조(前朝) 때 반란 사건을 증험해 보건대 빈민(貧民)을 구제하는 정책도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어 밖으로는 삼왕(三王)을 겸하고, 안으로는 이교(二敎 유불(儒佛))를 펴서 천하의 사대부를 몰아다가 문교와 명분 속에 모아 두었으므로 하찮은 백성들은 저마다 본래의 직분을 지켰습니다. 전대에 있어서 근본을 강하게 하고 지엽(枝葉)을 약하게 하는 정책이란 큰 도시를 점령하고 호걸들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든 전()()소씨(昭氏)를 관중(關中)으로 옮길 뿐이었고, 그들을 어루만져 안도시키는 수단을 몰랐지만, 오늘의 청조(淸朝)는 문모(文謨)와 무열(武烈)이 정비되어 전대보다 훨씬 훌륭하고 유학을 떠받들어 오로지 중국 땅에 퍼져 은연중 호걸들의 온당치 않은 마음을 녹이고, 봉지(封地)를 넓혀 외번(外藩)들에게 두루 나누어 오랑캐들의 겸병(兼幷)하는 세력을 쪼개고, 만주(滿洲)를 억눌러 군사와 국방에 관한 일을 맡김으로써 황제의 근본되는 기지를 튼튼히 하고, 치수(治水)하는 공사를 자주 착수하여 천하에 별별 야릇한 재주를 가진 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서 놀고 먹는 무리들을 위로(慰勞)하면서 삼가 몸을 바로잡아 황제의 행정(行政)을 할 뿐이니 세상일이 어찌 인위적인 사려(思慮)로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순은 의상(衣裳)만을 드리우고 있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진 것은 자연의 섭리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대개 천하를 차지하고 통치를 할 때에는 백성이란 따라오게 하면 되는 것이지 일일이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논어에 나오는 말), 이는 요순의 뜻인데 공자가 부연하였고, 진인(秦人 진 시황(秦始皇))이 실천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이것은 기이한 의논이군요. 그 말을 들려 주십시오.”

하고 말하니, 혹정은,

 

밭 갈고 샘 파는 것이 분수를 따를 뿐이니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말은, ()가 미복(微服)으로 강구(康衢)에 나가서 들었을 때 속으로 슬며시 기뻐했던 점이요, 공자가 위()로부터 노()에 돌아와 시()()를 산정(刪正)하고 예()()을 바로잡은 것은 당시 세상 형편으로는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봉건(封建)을 깨우치고 정전법(井田法)을 없애고, 서를 불사르며 선비들을 산 채로 파묻은 노릇은 천하를 통일하는 천자로서 크게 한 번 함직한 일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제왕들은 자기의 덕을 요순에게 비하면 기뻐하고 진 시황에게 비하면 성화를 내지만, 순을 배운 자가 있단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 시황의 사업을 계승하고 또 발전시키면서 한 시대의 천자로서 천하에 명()을 내려서 이것은 요순의 사업이니 이를 실천할 것이요, 이것은 망한 진의 사업이니 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도 듣지 못했으니 13경과 21사의 어디를 뒤져 보아도 이와 같습니다. 재상(宰相)을 소하(蕭何)나 조참(曺參)에게 비하면 감당할 수 없다고 표정을 하면서도 상앙(商鞅)이나 이사(李斯)에게 비하면 잡아 먹으려 들지만 소하조참과 방현령(房玄齡 ()의 명상(名相))두여회(杜如晦 ()의 명상(名相)) 등은 한때 이름 높은 재상으로 쳐주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상앙이나 이사의 죄인들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상앙이나 이사 같은 자들은 오히려 공()을 앞세우고 사()를 막아 아래 위가 서로 믿게 되었지만, 그들의 공렬(功烈)을 저토록 적게 평가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학문이 유학이 아니라는 데 있는 것뿐입니다. 소하조참은 원래 죄를 줄 만한 학문을 가지지 않아 겨우 자기 몸만 빠져 죄를 면했을 뿐입니다. 대체로 임금에게 잘 보이면 백성에게 인심을 잃고, 백성의 마음에 맞게 하면 임금에게 의심을 사는 법이니, 한 시대의 임금을 도와서 정치를 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렁을 매어 두고 난간을 막아 두어 손 한 번만 실수하면 넘어져서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하였다.

윤형산(尹亨山)은 반중(班中)으로부터 나와서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소로 왔다. 나와 혹정은 모두 의자에서 내려서 윤공에게 공손히 읍을 하였더니, 윤공은 바쁘게 나를 붙들어 의자에 앉히고 품속으로부터 담배통을 꺼내서 보이는데 그것은 붉은 만호(㻴瑚)로 만든 것이다. 윤공은 또 품속에서 누런 보자기로 싼 색다른 비단 두 필을 꺼내어 나에게 보이는데 혹정은 연달아 황제께서 주신 것을 축하한다. 윤공의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해 보인다. 그 한 가지는 아청빛 우단(羽緞)에 복숭아꽃을 수놓은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고동색 운문단(雲紋緞)에 금실로 신선과 부처를 수놓은 것이다. 이때 형산(亨山)은 바쁘게 우리가 이야기한 초지(草紙)를 훑어 보더니 곧 붓을 들어 쓰기를,

 

건문 황제(建文皇帝)가 대궐 안에서 자기 명에 죽었다는 것은 본래 이런 일이 없는데 왕 선생(王先生)이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한다. 혹정은,

 

의심나는 것을 전하는 것도 역사가(歷史家)의 한 체제이지요.”

한다. 나는,

 

오량(吳亮)이 산적을 던졌던 고사는 어째서 참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진실로 전배(前輩)들의 길고 짧은 변론들이 많지만 꼭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이 만일 참말일 때에는 어찌 천고에 기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백룡암(白龍菴)의 고사(출처 미상)도 비록 이락와피(籬落臥被 갈현(葛玄)의 신선전(神仙傳)에서 나온 이야기)와 같은 글에 들지만, 역시 이것도 망사대(望思臺 () 무제가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지었다) 내력과 같은 것으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낱낱의 붓끝마다 솟아 오른 피는 / 筆筆心頭血

한 점만 떨어져도 천지에 물드누나(작자 미상) / 一落染天地

나는 다시,

 

사중빈(史仲彬 미상) 치신록(致身錄)도 역시 후세 사람들의 모방해 지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그 책에는,

패물만 쓸쓸히 혼과 함께 달밤에 돌아왔네 / 環佩空歸月夜魂

해마다 접동새는 동청수에 우지지네 / 年年杜宇哭冬靑

라고 읊었는데, 이는 애태우는 사람들의 괴로운 실정일 것입니다.”

한다. 형산은,

 

어제 왕 선생의 말에 한()의 창업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덕이 없었으므로 능히 예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신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호령을 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조정에서 우레같이 움직이고 바람처럼 행할 때는, 그 어진 소리가 미치는 곳에 사방 억조의 백성들도 모두 그 득실을 판단해 낼 수 있지만, 그들의 안방에서 벌어지는 사생활로서 은밀한 행동과 조그마한 행실쯤은 바깥 사랑방에서 알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진 종실(宗室)에 하간헌왕(河間獻王) 같은 이가 있어 이 같은 사실을 노래로 읊어 서술하고, 또 묘하게 능히 음률을 살핀 뒤에야 그 덕행(德行)에 맞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소위 금슬(琴瑟)이 맞으니 사시가 평화롭고 율려(律呂)가 골라서 만물이 통합된다는 것입니다. ()의 악가(樂歌)로서는 안세(安世)방중(房中)이 가장 근사하다고 하지만, 혼자 한 환관(宦官)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미앙궁(未央宮)의 서까래를 쳐다보고 헤아린다는 것은 옛날 원수(元首)가 좀스럽다는 노래(서경에 나온다)와 큰 바람이 일어남이여라는 씩씩한 모습이 땅에 떨어진 셈입니다. 심지어 벽양(辟陽)의 수치는 바깥 세상에도 숨기기 어려운 일이요, 인체(人彘)의 혹독한 것은 신인(神人)이 모두 분개할 노릇인즉 조단(造端)의 시초라 할지라도 이 같은 꼴로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희(薄姬)는 위왕(魏王) ()의 미인이요, 효 경제(孝景帝)의 왕 황후(王皇后)는 금왕손(金王孫)으로부터 빼앗은 계집이요, 음려화(陰麗華)에게 자나깨나 사모하던 지저분한 일들이 있지마는 누가 이것을 노래로 지어 읊었겠습니까. 이러한 왕실(王室)의 지친에는 하간헌왕만한 이가 없고 보니, 관저(關雎)의 교화나 이강(釐降)의 아름다움같이 읊을 바도 못 되었으니, 이러므로 풍류는 풍류대로 덕행은 덕행대로 따로 떨어진 것을 알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백등(白登)의 기이한 계교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그 계교란 비밀이라 세상에는 얻어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그 기이한 꾀란 것은 적의 성 아래 무릎을 꿇고 항복한 것이 아닐까요. 일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비밀에 붙였습니까.”

하고 물으니, 윤공은 크게 웃으면서,

 

먼저 사람들이 하지 못하던 말을 하시는군요.”

한다. 나는,

 

그 당시 묵돌(冒頓)은 응당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다 지는 허다한 절차를 몰랐겠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옛날부터 중국은 오랑캐에게 성공한 일이 없어 강거(康居)가 항복을 하고 힐리(頡利)가 당()의 궁정에 와서 춤을 춘 것은 울고 싶던 차에 지쳤음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한다. 나는 또,

 

천하의 걱정거리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만승(萬乘)의 자리야말로 참으로 괴로운 것이니, 한 고조가 환관의 다리를 베고 집 천정을 쳐다볼 때야 8년 동안 경영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물이 말라들매 이[]가 찬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응당 천하 일이 도무지 계륵(鷄肋) 같을 뿐이었겠지요.”

하니, 형산은,

 

재상도 또한 그러하니 술과 계집과 재물에 지쳐날 때에, 젊어서 오색 찬란한 구름 속에서 자기의 이름을 불렀을 때(과거의 창방)를 회상해 본다면 과연 어떠한 심사였겠습니까.”

한다. 이에 혹정은,

 

영감님은 영수 가에 밭뙈기나 장만하고 저술(著述)이나 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하니, 형산은 크게 웃으면서,

 

눈앞에 급급(汲汲)한 것은 모두 죽은 뒤 일을 계획하는 것이니 누에가 늙으면 저절로 꼬치를 짓는 것이요, 사람에게 비단 옷을 입히고자 목적한 것은 아닙니다.”

한다. 나는 또,

 

혹정은 아직도 과거를 단념하지 않고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이미 등우(鄧禹 후한 때의 장군)와 마찬가지로 남의 적막함을 웃었습니다.(단념했다는 뜻) 선생은 어떻습니까.”

한다. 나는,

 

선생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혹정은,

 

백두(白頭)로 과거를 본다는 것은 선비의 수치입니다.”

한다. 이때 형산은 붓을 잡고 무엇을 쓰려다가 혼자서 크게 웃으면서 혹정에게 무슨 말을 하니 혹정 역시 크게 웃는다. 나는,

 

두 선생이 그렇게도 웃으실 적에는 응당 절기(絶奇)한 일이 있는 거지요. 저는 그 까닭을 모르니 배를 쥐고 두 분의 즐거움을 도와 드릴 수 없습니다그려.”

하였더니, 둘이서는 더욱 크게 웃는 것이다. 형산은,

 

강희(康熙) 기묘년(1699) 과거에 1 2세 된 거자(擧子)가 있었습니다. 성은 황이요 이름은 장()인데 광주(廣州) 불산(佛山)에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번 과거에 급제를 못할 때는 오는 임오년(1702) 과거에 올 것이요, 그때 또 급제를 못할 때는 을유년(1705) 곧 내 나이 1 8세 될 때에는 꼭 급제를 할 터이니, 그땐 그나마 허다한 사업을 하여 국가를 위하겠다 하였답니다.”

하여, 나도 또한 절도(絶倒)함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다시,

 

그 황장(黃章)이란 사람은 과연 을유년 과거에 급제를 했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두 사람은 고개를 흔들면서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혹정은,

 

그가 급제를 못할 때는 세상의 결함(缺陷)을 넉넉히 알 수 있겠지만, 만일 급제를 했다면 도리어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일이지요.”

했다. 형산이 말하기를,

 

선생은 오시는 길에 일찍 천산(千山)을 유람하셨는가요.”

하고 묻기에, 나는,

 

천산은 1백여 리를 돌아야 가게 되고, 또 여정이 바빴기 때문에 다만 하늘 밖에 있는 두어 점 산봉우리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였다. 형산은 다시,

 

노복(老僕)은 일찍이 무인년(1758)에 강향(降香) 행차 때 의무려(醫巫閭)까지 갔더니 귀국 인사들의 성명이 먹글씨로 씌어져 있습디다.”

하기에, 나는,

 

그 성명이 누구이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모두 6, 7명 되었지만 누구였는지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한다. 내가 또,

 

우리나라 선배(先輩) 김창업(金昌業)의 자는 대유(大有), 호는 노가재(老稼齋)인데, 일찍이 강희(康熙) 계사년(1713)에 천산을 유람하였으니 의무려산에도 응당 제명(題名)한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더니, 형산은,

 

천산은 저도 한 번 구경할 인연이 없었는데 혹시 가재(稼齋) 김공(金公)은 좋은 시구(詩句)를 지은 것이 있었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문집이 몇 권 있지만 아름다운 글귀는 한두 구절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김가재는 역시 창춘원(暢春苑)에서 이용촌 선생(李榕村先生)을 만났다는데 그는 당시 각로(閣老)였지요.”

했다. 형산은,

 

용촌 선생은 강희 계사 연간에는 필시 남쪽으로 돌아갔을 터인데 어떻게 서로 만났단 말이요.”

하고 묻기에, 나는 다시,

 

용촌 선생의 휘가 이광지(李光地)였지요.”

하고 물으니, 두 사람은 모두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인다.

형산이,

 

나는 아교를 달여서 해와 달을 붙여 두련다(사공도(司空圖)의 시) / 癡欲煎膠黏日月

라는 시를 읊는다. 이때 해는 이미 저물어 방안이 침침하였으므로 촛불을 켜놓았다. 나는,

 

인간의 촛불이란 켤 것이 무엇 있나 / 不須人間費膏燭

해와 달 이 두 빛이 이 천지를 쌍으로 밝혀다오 / 雙懸日月照乾坤

하고 읊었다. 혹정이 손을 흔들면서 먹으로 쌍현일월(雙懸日月)’이란 네 글자를 지워 버렸으니, 대개 일월을 쌍으로 쓰면 명()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마침 점교(粘膠)’라는 글귀에 대()를 맞추어 쓴 것인데, 그는 쌍현일월을 자못 꺼리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어제 성묘(聖廟)에 배알했을 때 보니 주자를 전상에 올려 모셨으니, 이렇다면 11()이 되는 셈인데 언제부터 올려 모셨나요.”

하고 물으니, 형산은,

 

강희 시절에 올려 모신 것인데, 10철은 원래 공자의 문하(門下)에서는 적당한 정론(定論)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한때 진()() 사이에서 함께 난을 만났을 뿐인데, ()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아무도 감히 다른 의논을 내놓지 못했지요. 유약(有若 공자의 제자)에 대한 말이 네 번이나 논어(論語)에 보이는데, 그가 성인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자하(子夏 복상(卜商)의 자)자장(子張 전손사(顓孫師)의 자)의 무리들은 심지어 공자를 섬기던 예로 섬기려고 했으니 그가 어질다는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요, 공서적(公西赤 공자의 제자)은 예악(禮樂)에 뜻을 두어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질이 있었으니, 역시 재아(宰我 재여(宰予). 재아는 그의 자. 자아(子我))와 염구(冉求)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염구재아의 언행(言行)은 여러 가지 사전(史傳)을 증험하지 않고, 논어에 나온 것만 상고하더라도 그 우열(優劣)은 가히 한 가지로 말할 수 없으니, 마땅히 유약과 공서적 두 분은 전상으로 올려 모시고 염구와 재아를 무중(廡中)으로 고쳐 모셔야 한다고 선배 정단간(鄭端簡 미상)왕이상(王貽上 왕사진(王士稹). 이상은 자)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상은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있을 때 글을 갖추어 이를 개정하고자 하다가 사람들에게 정지당하고 글이 올려지지 못했으니, 이야말로 만세의 공론이라 할만한 것으로 사류(士流)들이 지금껏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한다. 형산은 다시 묻기를,

 

박 선생(朴先生)은 지금 저술한 책이 몇 권이나 있으며, 또한 아름다운 시집을 중국에 가지고 오신 것이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평생에 학식(學殖)이 노무(鹵莽)해서 일찍이 몇 권 책도 저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더니, 형산은,

 

비록 주공(周公) 같은 아름다운 재주가 있더라도 만일에 교만하고 인색하면 말할 거리도 못 되지요. 선생이 만일 ……  이 다음은 미처 글씨를 쓰기 전에 기풍액(奇豐額)이 들어와서 나에게 황제가 하사한 담배통을 보이므로 드디어 자리를 파하여 일어섰다.

하였다.

내가 입은 흰 모시옷은 해가 저물자 좀 서늘하였다. 이때 달이 추녀 끝에 걸렸는데 뜰에서 서로 산보할 때 형산이 내 옷을 만지면서,

 

좌중이 맑은 기운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내가 혹정과 이야기한 것이 제일 많았는데, 엿새 동안을 창문을 대하여 밤을 새워가면서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능히 조용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진실로 굉유(宏儒)요 괴걸(魁傑)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종횡 반복이 많았다. 내가 우리 서울을 떠나서 8일 만에 황주(黃州)에 이르렀는데, 말 위에서 혼자 생각하기를,

 

학식이 본래 없는 나로서 이번 중국에 들어가 만일 큰 선비를 만난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질문을 하여 그를 애먹여 볼까.”

하고, 드디어 옛날 들은 지식 중에서 지전설(地轉說)’이라든가 월세계(月世界)’ 이야기를 찾아내어, 매양 말고삐를 잡고 안장 위에 앉은 채 졸면서도 누누(累累) 수십만 마디의 말을 연역(演繹)해서, 가슴속에 글자 아닌 글을 쓰고 하늘에 소리 없는 글을 읽어가면서 하루에 몇 권의 책을 꾸몄다. 이것이 말은 비록 이치에 닿지 않더라도 이치는 역시 따라 붙일 만하였지만, 말타기에도 더 피로했거니와 붓과 벼루도 들 사이가 없었다. 기이한 생각도 밤이 지나면 사충(沙蟲)과 원학(猿鶴)처럼 변천함을 면하지 못하는데, 이튿날 다시 높은 산을 쳐다보면 뜻밖의 기이한 봉우리가 떠오르고, 또 바람 돛을 따라서 포개었다가 퍼졌다 한다. 이야말로 먼 길에 좋은 길동무가 되고 멀리 가는 데 지극히 즐거운 자료가 되었다. 열하(熱河)에 들어간 뒤에 먼저 이 이야기를 가지고 기 안찰사(奇按察使) 풍액(豐額)에게 소개했더니, 풍액도 수긍은 했으나 전혀 이해는 못하였고, 혹정과 지정은 역시 분명히 알아듣지 못했으나 혹정은 이 학설을 그렇게 틀렸다고는 하지 않았다. 대개 혹정은 문답하는 데 민첩하여 종이를 잡으면 문득 수천 마디의 말을 내려 써서 종횡으로 떠벌리고, 천고의 경()()()()을 손에 닿는 대로 들춰내어 아름다운 구와 묘한 게()가 입만 열면 선듯선듯 만들어지지만, 모두 조리에 닿고 맥락이 어지럽지 않았다. 더러는 동쪽을 가리키다가 서쪽을 치고, 때로는 자기 말을 고집하되 견()을 백()이라 하여 나를 치켜 올리고 억눌러서 나로 하여금 말을 꺼내게 했으니, 굉장히 박식하고 말을 좋아하는 선비라 이를 만하거늘 백두(白頭)인 채 궁한 처지로 장차 초목으로 돌아가려 하니 정말 슬픈 일이다. 연경(燕京)에 들어간 뒤에도 사람들과 더불어 필담(筆談)을 해 보면 모두 능란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또 그들이 지었다는 모든 문편(文篇)들을 보면 필담보다 손색이 있었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우리나라에 글 짓는 사람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알았으니, 중국은 바로 문자(文字)로써 말을 삼고 있으므로 경집이 모두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성어(成語)였다. 그 기억력이 남과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억지로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벌써 그 고정(故情)을 잃어버리고 글과 말이 판이하게 두 가지 물건이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글을 짓는 자는 서어(齟齬)해서 틀리기 쉬운 옛날 글자를 가지고, 다시 알기 어려운 사투리를 번역하고 나면 그 글 뜻은 캄캄해지고 말이 모호하게 되는 것이 이 까닭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국인(國人)들에게 두루 이 이야기를 하자 많이들 그렇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족히 개탄할 뿐이로다. 엄계우옥(罨溪雨屋)에서 심심풀이로 이를 쓰다.

 

 

[D-001]젓가락 …… 바빴으랴 : 장량(張良)이 한왕(漢王)의 밥상 앞에서, “젓가락을 빌려 주시면 천하의 계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D-002]안기생(安期生) : ()의 방사(方士). 그가 오이 만한 대추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 한다.

[D-003]위왕(魏王) : 전국 때 위의 임금. 그가 닷 섬들이 큰 바가지를 얻었으나, 너무 커서 쓸 데가 없었다. 남화경에 나오는 말.

[D-004]마고(麻姑) : 선녀의 이름. 손톱이 길어서 등을 긁기에 좋다는 전설이 있다.

[D-005]항아낭랑(姮娥娘娘) : 달 속에 선약을 찧고 있다는 전설 중의 선녀.

[D-006]미진(微塵) : 일체 물질에 공통하여 존재하는 물질의 최초의 단위를 의미하였다.

[D-007]티끌이 …… 침울하여 : 화학적 변화와 같은 현상을 의미한다.

[D-008]직방(職方) : 천하의 지도(地圖)를 맡은 관원.주례(周禮)에 나오는 말.

[D-009]오릉(於陵)의 진중자(陳仲子) : 전국 때 제()의 청렴하기로 저명한 사람.

[D-010]영연(泠然) : 다른 본에 흔히들 냉연(冷然)’으로 되었으나 잘못되었다.

[D-011]중유씨(仲由氏) : 중유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의 성명. 그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용맹있기로 이름이 높았다.

[D-012]그의 …… 않소이다 :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D-013]일곱 …… 듯이 : ()의 시인 노동(盧仝)이 지은 시의 칠완다흘부득(七碗茶吃不得)’이라는 구절에서 나왔는데, 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D-014]큰 못에 …… 구멍 : 남화경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구절인데 지극히 작다는 말.

[D-015]별이 ……  : 옛날 중국을 9()로 나누어서 분야를 설정하였다.

[D-016]칠정(七政) : 해와 달과 화토의 오성(五星).

[D-017]송 경공 …… 물러가고 : 전국 때 송 경공이 형혹성이 비치었음을 보고 걱정을 했으나 천문가의 권고하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임금다운 말 세 마디를 하였으므로 형혹성이 물러갔다는 고사.

[D-018]객성 …… 범하였다 : 동한 때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친구로서 함께 자면서 천자의 몸에다 발을 얹었더니, 태사가 객성이 자미성을 범했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

[D-019]() :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불변의 원리.

[D-020]() :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후천적 현상.

[D-021]삶아 먹은 …… 갔다 한들 : () 나라의 공손교(公孫僑)가 남으로부터 잉어를 선사받고 차마 먹기가 어려워서, 하인을 시켜 그 잉어를 물에 놓으라 하였더니, 하인이 잉어를 삶아 먹고는 양양히 자유롭게 가더라고 보고하였다. 맹가(孟軻)는 이 일을 논평하기를, “군자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은 방법으로 속일 수 있다.” 하였다.

[D-022]() : 삼군(三君)을 가리킨 것으로 동한(東漢) 때 두무(竇武)유숙(劉淑)진번(陳蕃)이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전서(黨錮傳序)에 나온다.

[D-023]() : 팔고(八顧)를 가리킨 것으로 덕행(德行)으로써 사람을 이끌 수 있는 분 8명이니, 동한 때의 곽태(郭泰)종자(宗慈)파숙(巴肅)하복(夏馥)범방(范滂)윤훈(尹勳)채연(蔡衍)양척(羊陟)이다. 후한서 당고전서에 나온다.

[D-024]() : 8()를 가리킨 것으로 재물로써 남의 급한 일을 구출할 수 있는 분 8명이니, 동한 때의 도상(度尙)장막(張邈)왕고(王考)유유(劉儒)호모반(胡母班)진주(秦周)번무(蕃撫)왕장(王章)이다. 역시 후한서 당고전서에 나온다.

[D-025]최호(崔浩) : 후위(後魏)의 학자로, 국서(國書)라는 책을 저술하여 사기를 비방하였으므로 피살되었다.

[D-026]왕통이 …… 않았습니다 : 조광윤이 천자가 된 뒤에 그의 아들에게 왕통을 계승하게 하고자 했으나, 둘째 아우 태종에게 빼앗긴 것을 가리킨 말.

[D-027]태종 …… 못했던 : 태종이 조카들을 모두 죽인 것을 말한다. 평소에 태조는 태종을 지극히 사랑하여 태종이 병으로 뜸을 뜰 때에 쑥을 갈라 떠서 형제가 서로 아픔을 나누었다 한다.

[D-028]촛불 그림자 사건 : 역사에는, “태조가 병석에 누웠을 때, 태종이 좌우를 물리치고 무슨 말을 하는데 잘 들을 수 없었고, 멀리서 보니 촛불 그림자 아래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도끼를 마룻바닥에 던지면서 큰 소리로 잘하여라.’는 말을 한 마디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라고 써 있는데, 이로써 후세에서는 이 기록을 보고 태종이 태조를 죽였다고 하며 촛불 그림자 사건이라 한다.

[D-029]진경(陳經) : ()의 역사학자. ‘박영철본에는 진경(陳牼)으로 되었으나 그릇된 것이다.

[D-030]개원(改元)한 것 : 그의 원년의 일년 동안에 태평(太平)’ 흥국(興國)’의 두 연호를 썼다.

[D-031]정미 ……  : 정미는 송 태종의 아우인데 피살되고, 덕소는 태종의 아들인데 자살하였다.

[D-032]여불위의 사건 : 여불위가 자기의 애인 한단(邯鄲) 계집이 태기가 있음을 알고 장양왕(莊襄王)에게 바친 뒤에 아들을 낳은 것이 곧 진 시황이라고 세상에서 전하였다.

[D-033]이미 …… 것입니까 : 송이 북방의 호족인 금()에게 패하여 휘종과 흠종이 포로가 된 뒤에 항복을 하고 공목을 조카뻘 되는 나라라 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D-034]석진(石晉) : 오대 때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나라. 석경당은 당을 치기 위하여 거란에게 구원병을 청하면서 아비의 예로 모실 것을 약속하였다.

[D-035]답답한 일이었습니다 : 남송(南宋) 때의 성리학(性理學)을 지적한 것이다.

[D-036]천하 ……  : 후한 때 고봉(高鳳)의 고사.

[D-037]형산은 …… 하였다 : 이 부분은 다른 본에는 없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보충하였다.

[D-038]군사 …… 짓누나 : 두보(杜甫)가 제갈량(諸葛亮)을 슬퍼하는 시 중의 두 귀.

[D-039]제 환공(齊桓公) : 전국 때 제()의 임금 소백(小白). 환공은 시호. 당시 오패(五霸) 중에서 가장 이름 높았다.

[D-040]마외역(馬嵬驛) : 섬서성에 있는 지명.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만나서 피란하는 도중에 이곳에 이르러서 군사들의 요청에 의하여 양귀비를 죽였다.

[D-041]이 부인 …… 남았겠습니까 : 한 무제의 애인으로서 그가 죽은 뒤 문제가 그를 다시 한 번 보기를 원하여 방사의 말에 의하여 그의 혼령을 접견하였다는 고사.

[D-042]꿈속에 …… 있고 : ()의 고종(高宗)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꿈꾸어 얻은 고사.

[D-043]점을 …… 있어서 : 주 문왕(周文王)이 여상(呂尙)을 얻은 고사.

[D-044]문제 …… 것입니다 : 가의가 문제에게 상소한 글 중에서 나온 구절. 통곡할 일이 한 가지요, 눈물지을 일이 두 가지요, 긴 한숨 쉴 일이 여섯 가지라 하였다.

[D-045]() …… 찔렀고 : 원앙이 곧은 말을 잘 하였으므로, 당시 여러 종실 중의 하나인 양왕(梁王)에게 피살되었다.

[D-046]() ……  : 배도가 조정에서 곧은 말을 잘 하였으므로, 그를 싫어하던 자가 많았다.

[D-047]말 위에서 …… 얻으면 : 한 고조(漢高祖)가 숙손통(叔孫通)에게 하였던 말. 자기가 직접 말등에서 천하를 쟁취했다는 말이다.

[D-048]천하 …… 일인바 : 임금이 신하의 충언을 듣지 않고 독재함에 반발한 말인데, 사기(史記)에 나온다.

[D-049]한 자를 …… 것입니다 : 맹자(孟子) 등문공 하편에 나오는 구절.

[D-050]오패(五霸) : 전국 때의 제환(齊桓)진문(晉文)진목(秦穆)송양(宋襄)초장(楚莊).

[D-051]흑룡강 …… 것입니다 : 청 때에는 죄인을 흔히들 흑룡강 지방으로 귀양보냈으므로, 이를 꼬집은 말.

[D-052]먼저 …… 것이지요 : 유방과 항적이 진()에 쳐들어갈 때에,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자가 그곳의 임금이 된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

[D-053]문성장군 …… 것입니다 : 문성장군은 한 무제가 신선을 좋아하고 죽은 애인 이 부인(李夫人)을 연모하기에, 이 부인을 보여 준다고 술법으로 무제를 홀리다가 영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자이다. 뒤에 오리장군(五利將軍)이란 자가 역시 방술로 무제를 꾀면서 죽은 문성장군을 애도할 때에, 무제는 거짓으로 문성장군은 말의 간을 먹고 죽었다고 조롱하였다.

[D-054]진상(陳相) : 전국 송의 학자. 진량(陳良)의 제자로서, ()에 갔다가 허행을 보고서 전에 배운 학문을 버리고 허행을 좇았다. 최초의 북학자(北學者).

[D-055]이는 …… 삼사술(三駟術) : 전기(田基)라는 장수가 제 위왕(齊威王)과 경마를 하는데, 언제나 졌으므로 손무자에게 이기는 법을 물었을 때에, 손무자가 상하급의 말 중에서 제일 나쁜 말을 먼저 내어놓는 법으로부터 재미없는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 내었다가, 중간에 중요한 이야기로 주의를 환기시킨 일종의 화술(話術).

[D-056]궁중(宮中) …… 공격하라 : 이 말들은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바친 출사표(出師表) 중에서 나온 구절.

[D-057]그러나 …… 아닐까요 :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서, 사천 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한의 종실이며 유비와 동성인 유장의 영토를 빼앗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D-058]유종(劉琮) : 유표의 아들. 유표가 죽은 뒤 유종이 형주를 조조에게 바쳤다.

[D-059]그 당시의 …… 묻고 : 현덕은 조조와 영웅을 논하다가, 우레가 일자 수저를 땅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

[D-060]급할 때는 …… 도망쳤으니 : 하비(下邳)의 전쟁에 패하여 두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도주한 것을 말한다.

[D-061]선주(先主) : 유비(劉備)를 그의 아들 후주에 비겨서 선주라 하였다.

[D-062]동림당(東林黨) : 명의 만력 연간에, 고헌성(顧憲成)이 고반룡(高攀龍)과 함께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맺은 유당(儒黨).

[D-063]백금 …… 죄이겠습니까 : 백금은 주공의 아들. 주공은 어린 조카 성왕에게 잘못이 있을 때는, 자기의 아들 백금에게 매질하였다 한다.

[D-064]한 가지 일 …… 것은 : 제갈량을 존경하여 유비까지 떠받들었다는 의미이다.

[D-065]공명을 …… 것은 : 두보(杜甫)가 제갈량을 칭찬한 시구 중에서 나온 말.

[D-066]옹치(雝齒) : 한 고조의 장수. 한 고조가 천하를 정하고 공신을 녹정할 때, 평소에 가장 미워하던 옹치를 제일 먼저 공신으로 봉하여 모든 장수들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켰다.

[D-067]가 태부(賈太傅) : 가의(賈誼). 태부는 그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로 귀양갔었기 때문이다.

[D-068]항우 …… 않았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고사.

[D-069]종 유수(宗留守) : 송의 충신 종택(宗澤). 유수는 그가 동경(東京)의 유수로 있었을 때, 임금에게 하수를 건너자고 20여 번이나 소장을 올렸으나, 듣지 않으므로 분개해서 병을 얻어 죽을 때에, “하수를 건너십시다.” 하고 세 번 고함을 쳤다 한다.

[D-070]나도 …… 하겠다 : 맹자 만장편(萬章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

[D-071]이탁오(李卓吾) : 명의 저명한 사상가 이지(李贄). 탁오는 자요, 처음 이름은 재지(載贄). 가려운 병을 얻어서 머리를 깎고 파직을 당하였으며, 남녀의 공학을 실시하였다.

[D-072]쾌설(快說) : 그의 저서 전가보(傳家寶) 사집(四集) 백여 종 중에 있는 글인 듯싶다.

[D-073]승국(勝國) : 현존한 나라의 직전에 있던 나라. 현존한 나라가 그를 이겼다는 뜻. 청이 명을 이를 때 하는 말.

[D-074]하간헌왕(河間獻王) :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유덕(劉德). 하간은 봉호요, 헌은 시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을 처음 제창하였다.

[D-075]검문 …… 되었습니다 : 안록산의 난리에, 현종은 아들 숙종이 그 아버지도 모르게 임금이 되고, 현종을 퇴위시켜 감금하다시피 하며, 현종이 두통이 난다고 철사로 머리를 동여매고 실상 제명에 죽지 못한 반면에, 명 혜제는 그의 숙부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에게 위를 빼앗겼으나 오히려 제명에 죽었다는 의미이다. 원종(元宗)은 청 성조(淸聖祖) 현엽(玄燁)의 현()자를 기휘하여 당 현종(唐玄宗)을 원종(元宗)으로 고쳤다.

[D-076]장양제(張良娣) : () 숙종(肅宗)의 황후. 양제는 봉호. 장씨가 이보국을 처치할 것을 태자인 대종(代宗)에게 부탁한 것이 탄로나서, 숙종이 죽은 뒤에 이보국이 장씨를 때려죽였다.

[D-077]천순 …… 일입니다 : 북방족과 전쟁하는 중에, 황제의 위를 차지한 아우 경제(景帝)를 폐하고 8년 만에 다시 황제가 되었다. 이것으로 명은 왕통의 명분이 바로섰음을 증명한다는 의미이다.

[D-078]술잔을 ……  : ()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이 유요(劉曜)에게 항복하여, 청의(靑衣)를 입고 술잔을 돌렸다.

[D-079]동쪽으로 …… 것은 : 맹자 고자(告子)에 나오는 구절로서, 맹자가 고자(告子)와 문답하였던 말.

[D-080]고공(古公) : 주 문왕의 조부 단보(亶父). 고공은 봉호.

[D-081]이것은 …… 않습니다 : 태왕이 맏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문왕을 위하여 끝의 아들에게 위를 전했기 때문에, 태백은 아버지의 처리에 불평을 품은 듯이 아우 하나를 데리고 멀리 출가를 한 부자 사이의 충돌이 있는 듯함이라는 말.

[D-082]태백 …… 것이며 : 맏아들인 자기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는 것.

[D-083]태왕 …… 것입니다 : 왕위를 계승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것.

[D-084]() …… () : 중국 고대 행정 구역의 9() 중에 5주의 이름들이다.

[D-085]() …… 것입니다 : 주 문왕 때에, 우와 예라는 두 나라가 땅 시비를 하여 판결을 하고자 문왕을 찾아갔다가, ()에서는 백성들이 밭두렁을 서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일을 보고, 자신들이 부끄러워서 되돌아와 서로 다투던 땅을 양보하였다고 전한다.

[D-086]뱁새의 둥지 : 뱁새가 숲 속에 둥지를 지어도 고작 가지 하나를 차지하는 정도라고 한 장자(莊子)의 말을 인용한 것임.

[D-087]하수를 마시는 물쥐 : 물쥐가 하수를 마셔봤자 고작 작은 배를 채우는 정도라고 한 장자의 말을 인용한 것임.

[D-088]점검이 …… 것이며 : 송 태조 조광윤이 천자가 되기 전에 점검(點檢)이라는 군직으로 군막 속에 누워 술에 취해서 자는 동안에 부하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조광윤은 술에 취해서 이 일을 전연 몰랐다 함을 풍자한 것이다.

[D-089]침대 …… 것입니다 : 조광윤이 임금이 된 뒤 아직 서북 변방을 평정하지 못한 것을, 자기의 침대 곁에 남의 소리를 듣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로 조보(趙普)와 이야기하는 중에 말했다.

[D-090]구석(九錫) : 국가의 최고 훈업의 표창으로 아홉 가지의 선물을 내리는 것.

[D-091]적의(翟義)진풍(陳豐) : 두 사람은 한()의 장수로서 왕망이 모반할 것을 알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D-092]근세에 …… 같습니다 : 모두 주공과 공자를 떠멘다는 의미이다.

[D-093]위징(魏徵) …… 간사한 인물 : 위징은 본시 당 태종의 형인 건성(建成)의 부하로서 후일의 태종이 된 이세민을 죽여 없애라고까지 권고한 일이 있었으나, 뒤에 당 태종이 황제가 되자 이 원한을 덮어 두고 그를 등용하여 유일의 협조자가 되었다.

[D-094]너 관중 …… 아니하였는가 : 관중은 애초에 제 환공의 아우 규()의 부하로서, 제 환공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나 그 뒤 규가 죽은 뒤에 도리어 제 환공을 도와서 대업을 이룩하였다.

[D-095]어찌 …… 되리요 : 공자가 관중이 공자 규와 함께 죽지 않았음을 옳다고 변명하여 한 말. 논어 헌문편(憲問篇)에 나온다.

[D-096]하후영녀 …… 것입니다 : 조위(曹魏) 때 열녀(烈女). 하후는 성이요, 영녀는 이름. 개가하지 않기 위하여 처음에는 머리를 깎고, 다음에는 두 귀를 베었다.

[D-097]제범(帝範) : 당 태종이 지은 책으로 제왕들이 지킬 도리를 서술하였다.

[D-098]때가 …… 보내고 : 등왕각은 강서성에 있는 유명한 정각. 당의 문학가 왕발(王勃)이 등왕각에서 열리는 문회(文會)에 닿기가 어려웠을 때 바람이 배를 휘몰아서 마당(馬當)에서부터 남창(南昌)까지 하루에 도달하여, ‘등왕각시서(騰王閣詩序)’를 짓고서 이름을 드날렸다.

[D-099]운이 …… 친다네 : 범중엄이 요주(饒州)에 있을 때에 어떤 서생 하나가 가난에 시달려서 천복사 비문을 박아서 팔려고 하니, 범중엄이 천본을 박을 종이와 먹을 준비하였는데, 하루저녁에 벼락이 천복비를 쳐서 부수었다. 묵객휘서(墨客揮犀)에서 나온 이야기.

[D-100]왕패(王霸) :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수. 자는 원백(元泊). 어떤 본에는 후패(侯霸)로 되었으나 그릇된 것이다.

[D-101]하늘은 …… 따라 주었고 : 광무제가 왕랑(王郞)의 군사를 피하여 호타하(滬沱河)로 향할 때 왕패로 하여금 물을 건널 수 있겠는가를 보게 하였다. 왕패는 거짓으로 얼음이 얼었다 하였더니 군사가 그곳에 이르자 얼음이 과연 얼었으며, 건너자 곧 풀어졌다 하였다.

[D-102]나라가 …… 들어맞았습니다 : 장세걸이 몽고군에게 몰려 남해로 쫓겨 가면서도 송의 왕통을 유지하고자 혈육을 두 번이나 추대했으나 다 죽고, 세걸은 필경 경애(瓊崖)로 도망가는 길에 또 모진 태풍을 만나 하늘을 향하여 분향하면서 외치기를, 또 한 번 더 조씨의 왕통을 세워 보겠는데 하늘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거든 내가 탄 배를 엎어달라고 했더니, 말대로 바람이 당장에 배를 엎어버려서 세걸은 물에 빠져 죽었다 한다.

[D-103]세상에서 …… 울었습니다 : 맹상군이 진()에 갔을 때 소왕(昭王)이 죽일 것을 알고 밤중에 도망하여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으나, 관문을 열 시간이 안 되었으므로 그의 문객 하나가 닭울음 소리를 내자 여러 닭이 다 울어서 관문이 열렸다 한다.

[D-104]천하에 …… 않았습니다 : 송말에 원()의 군사와 싸울 때 전당의 조수가 뜻밖에 사흘 동안이나 들지 않아서 송에게 불리하였다.

[D-105]성경(盛京) …… 물리쳤습니다 : 이자성 때문에 자살한 숭정 황제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

[D-106]예친왕 …… 책망하며 : 숭정제를 자살하게 한 이자성을 토벌치 않았다는 의미다.

[D-107]치효(鴟梟)의 시 : 시경(詩經)의 장명(章名). 주공이 주의 동쪽 나라에 있을 때, 모반을 한다는 풍문을 지어낸 자들이 있으매, 주공 자신이 치효라는 새에 의탁하여 성왕에 대한 충성심을 읊은 것이다.

[D-108]금등(金縢)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 무왕이 병이 들었을 때 주공은 자기 몸을 희생하였다고 제관이 되어 축문을 지어 읽고는 그것을 금등으로 된 궤짝 속에 간직해 두었더니, 그 뒤에 주공을 모함하는 소문이 돌자 동도에 피신해 있을 동안 성왕은 궤짝 속에 든 축문을 내어 읽어 보고, 주공의 애매함을 알고서 주공을 다시 맞아들였다.

[D-109]이신비 …… 것입니다 : 이신비는 본시 송 진종 황후의 시비로서 진종의 꾀임을 받아 아들을 낳은 것이 곧 인종이었으므로 황후는 그를 자기의 아들로 삼고, 이신비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하여 비빈 중에 두었더니 이신비가 급질로 죽자, 이 내용을 안 어느 신하가 황후가 모르게 황후의 예식으로 수은 염습을 하였던바, 황후가 죽은 뒤에 인종은 그가 자기의 생모임을 알고 통곡을 하면서 관을 쪼개어 보니 산 사람같이 황후 복색을 하고 있었다 하였다.

[D-110]화림 …… 것입니까 : 진 혜제(晉惠帝)가 화림원(華林園)에서 개구리 소리를 듣고 좌우에서 이 개구리의 울음이 관을 위한 것인가 사를 위한 것인가 하였을 때, 시중 가윤(賈胤)이 대답하기를, 관지에 있는 놈은 관을 위할 것이요, 사지에 있는 놈은 사를 위해 울 것입니다 하였다.

[D-111]모든 …… 소씨(昭氏) : 전씨는 제()의 이름 높은 성이요, 굴씨와 소씨는 초()의 이름 높은 성이다.

[D-112]오량(吳亮) : 네 사람의 같은 이름이 있으니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D-113]혼자 ……  : 젊은 환관과 추잡한 생활을 한 한 고조(漢高祖)를 가리킨 것이다.

[D-114]큰 바람이 일어남이여 : 한 고조가 자기 출신 고향인 풍패(豐沛)에 갔을 때 부른 대풍가(大風歌)의 한 구절.

[D-115]벽양 …… 일이요 : 심이기(審食其)의 봉호. 그는 미남자로서 한 고조의 총애를 받고 여후(呂后)와 불의의 관계가 있었다 한다.

[D-116]인체 …… 노릇인즉 : 여후가 한 고조의 애희 척부인(戚夫人)을 질투하여 고조가 죽은 뒤에 그의 수족을 자르고 눈알을 빼며 귀를 벤 뒤 벙어리를 만들어 뒷간에 두고 사람돼지라 하였다.

[D-117]박희 …… 미인이요 : 위왕 표가 포로가 되자 한 고조는 그의 애희 박희를 빼앗아서 문제(文帝)를 낳았다.

[D-118]효 경제 …… 계집이요 : 왕 황후는 애초에 연왕(燕王) 장다(藏茶)의 손녀인 장아(藏兒)의 맏딸로서 장아의 첫 남편인 왕중(王仲)의 딸인데, 처음에는 금왕손에게 시집을 보냈다가 장아가 점을 치니 그 딸이 귀하게 되겠다 하여 금왕손으로부터 빼앗아 궁녀로 바쳐서 경제의 왕후까지 되었다 한다.

[D-119]음려화 …… 일들이 : 후한 광무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음려화의 인물 잘난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여자를 얻는다면 음려화를 얻을 것이요, 벼슬을 할진댄 집금오(執金吾)가 되련다고 맹세를 하였다가 뒤에 음려화를 취했다.

[D-120]관저(關雎) : 시경(詩經)의 장명(章名). 주희의 주석에 의하면 어진 후비의 덕을 찬송한 노래라 하였다.

[D-121]이강(釐降) : ()의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낸 고사. ‘는 행장을 꾸림이요, ‘은 하가(下嫁)의 뜻이다.

[D-122]백등 …… 계교 : 한 고조가 산서성에 있는 백등이란 산에서 흉노(匈奴) 묵돌(冒頓)에게 칠일 동안을 포위당했을 때 모사 진평(陳平)의 말을 좇아 묵돌에게 미인계를 써서 포위에서 벗어났다는 기사가 있으나 그 내용은 창피해서 한의 역사에 밝혀지지 않았다.

[D-123]그 당시 …… 몰랐겠지요 : 옛날 전쟁에 져서 항복할 때는 죽은 사람의 시늉을 차리던 의식.

[D-124]강거 …… 힐리(頡利) : 강거와 힐리는 신강성의 북부에 있던 고대 흉노족의 나라 이름.

[D-125]계륵(鷄肋) : 닭의 뼈. 버리면 아깝고 먹어도 맛이 없다. 조위(曹魏) 때 문학가 양수(楊脩)의 말이다.

[D-126]강향(降香) : 황제가 봉산(封山)할 때에 향을 하사하는 의식.

[D-127]좌중이 …… 하였다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가하였다.

[D-128]기이한 …… 못하는데 : 군자는 원숭이와 학으로 변하고, 소인은 벌레와 모래로 변하였다는 말. 포박자(抱朴子)에 나오는 말.

[D-129]동쪽을 …… 치고 : 간사한 꾀를 쓴다는 말. 通典 兵6

[D-130]엄계우옥(罨溪雨屋) : 엄계의 비가 내리는 서옥(書屋). 엄계는 곧 연암에 있는 엄화계(罨畫溪)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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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망양록(忘羊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망양록(忘羊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망양록(忘羊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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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망양록(忘羊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망양록(忘羊錄)

 

1. 망양록 서(忘羊錄序)

2. 망양록(忘羊錄)

 

 

망양록 서(忘羊錄序)

 

아침에 윤형산(尹亨山)가전(嘉銓)과 왕혹정(王鵠汀)민호(民皥)를 따라서 수업재(修業齋)에 들어가 악기(樂器)를 훑어보고 돌아오다가 형산의 처소에 들렀더니 윤공은 양을 통째로 쪄 놓았는데, 이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차린 것이다. 바야흐로 악률(樂律)이 고금에 같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느라고 음식 차려 놓은 지가 오래지만 서로 먹으라 권하지 못했는데, 얼마 있다가 윤공이 양을 아직 찌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심부름하는 자가 대답하기를, 차려 놓은 것이 벌써 식었다고 하므로, 윤공은 자기가 정신을 못 차리고 두서가 없었다고 사과한다. 나는,

 

옛날, 공자는 소()를 듣노라고 고기맛을 잊었다더니, 이제 나는 대아(大雅)의 이야기를 듣다가 양 온 마리를 잊었습니다.”

했더니, 윤공은,

 

이른바 장()과 곡()이 모두 양을 잊었다는 것이올시다.”

하여, 서로 크게 웃었다. 이에 그 필담(筆談)한 것을 모아서 망양록(忘羊錄)이라 이름한다.

 

 

[C-001]망양록 서(忘羊錄序) : ‘박영철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으나, ‘주설루본을 따라서 추록하였다.

[D-001]수업재(修業齋) : 열하 태학 명륜당의 오른편에 있는 집 이름.

[D-002]공자는 …… 잊었다 :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절. ()는 순() 때의 음악 이름.

[D-003]대아(大雅) : 형산을 가리켜서 굉달(宏達)하고도 아정(雅正)한 학자라는 뜻. 이는 대개 학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높여서 하는 말.

[D-004]() …… 잊었다 :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말로 장과 곡 두 사람이 양을 치는데, 장은 글을 읽고 곡은 노름을 하다가 둘이 다 양을 잃었다.’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망양록(忘羊錄)

 

나는,

오음(五音)으로 정명(正名)을 삼고 육률(六律)로 허위(虛位)를 삼아, 소리가 날 적에 헤아려서 맞는 소리를 율()이라 하고 맞지 않는 것을 율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고금에 다름이 없을 것이요,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의 구별이 없을 터인데, 시대마다 각각 음악과 풍아(風雅)가 변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혹시 악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고금의 다름이 있어 소리와 율이 여기에 따라 변하는 것인가요?”

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저는 이 학문에 본래 어둡습니다만, 그래도 한두 가지의 의견은 없지 않아서, 항상 학문이 올바른 군자에게 한 번 시정을 받고자 하던 터입니다. 소리는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이로부터 나와서 그 형상이 각각 다르고 보니 악기의 음도 또한 따라서 다르므로,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소리에 따라 분배해 놓았으니, 오직 그 정한 이름이 있은 연후에야 그 변하는 바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요, 그 변하는 바를 안 연후에야 만 가지를 불어도 소리가 같지 아니하고, 닮은 소리를 음의 이름에 맞추어 표준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5음의 이름이 생긴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변하는 것으로써 본다면 음이 하필 다섯 가지뿐이겠습니까. 백 음이라 한대도 가할 것입니다. 또 율이란 법률의 율과 같은 것이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미 고저(高低)와 청탁과 크고 가는 구분이 있을진대, 귀로 들을 수 있는 악기를 만들어 일정한 법을 만들었으니, 비유하건대 문법(文法)에는 물론 차등이 있으나 각각 법칙에 맞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직 그 소리가 나는 것을 기다려서 거기에 맞추어야 비로소 표준을 삼을 수 있으므로 6율은 허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등이 있는 것으로써 헤아린다면 어찌 여섯 가지에만 그치겠습니까. 천 률이라 한대도 가할 것입니다. 제가 비록 무엇이 궁()이요 우()인지, 무엇이 종()이요 무엇이 여()인지 모르지만, 만일 기장 알로 치수를 재고갈대 태운 재로 분분히 후기법(候氣法)을 하는 것은 또한 의심스럽다고 봅니다.”

한다. 나는,

 

악기로 비유해 말하자면 골짜기와 같고, 소리로 비유한다면 바람과 같을 것이니 골짜기를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안다면 바람도 부는 것이 변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거센 바람과 화한 바람, 회오리 바람과 싸늘한 바람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니, 이로써 의논한다면 음률이 고금에 다름이 있는 것은 악기가 고쳐진 것이 있어서 소리가 변한 것이나 아닐까요.”

했다. 혹정은,

 

그렇습니다. 율이 연해서 조(調)가 되고, 조가 어울려 강()이 되고, 강이 합하여 곡()이 되는데, 율에는 간성(姦聲)이 없어도 조에는 편벽된 소리가 있으니, 과연 한 골짜기 바람 중에도 거세고 화하고 회오리와 찬 구별이 있고 새벽과 밤과 아침과 낮의 변화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 곡조의 정취(情趣)가 달라짐과 듣는 자가 달라지는 데 따라 때때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여 비로소 고금의 다름과 정성(正聲)음성(淫聲)의 구별이 생깁니다. ()() 시절에 백성의 풍속이 맑을 때에는 귀에 즐거운 음악이 소()()의 곡조이었으니 또 그들에게 배척당한 바를 가히 알 수 있는 것이요, ()()의 시절에는 민속(民俗)이 음탕해서, 그들의 귀에 즐거운 음악은 상()()의 곡조였으니, 또 그들에게 배척된 바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근세 잡극(雜劇), 서상기(西廂記)를 할 때에는 지리해서 졸음이 오다가도, 모란정(牡丹亭)을 연출하면 정신이 나서 고쳐 듣게 됩니다. 이것이 비록 시정의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족히 민속의 취향(趣向)이 때를 따라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대부들은 고악(古樂)을 부흥(復興)할 것을 생각하여 강()을 고치고 조(調)를 바꿀 줄을 모르고, 졸지에 모든 악기를 부숴서 원음(元音)을 찾고자 한다면 사람과 악기가 한꺼번에 망하게 되고 말 것이니, 이것이 화살을 따라서 과녁을 그리고, 취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술을 억지로 마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한다. 나는,

 

제가 심양에 이르렀을 때 생황(生簧)을 부는 사람이 있기에, 이것을 취해서 한번 불어 보았더니 과연 우리나라의 음에 맞았고, 연음(聯音 여러 음의 배열)이나 기조(起調)가 우리나라 율에 맞았습니다. 그 뒤 곧 북경에 들어와 유리창(琉璃廠)에서 또 한번 불어 보니 이 생황도 그 소리나는 구멍이나 또 부는 구멍들의 금엽(金葉)이 여와씨(女媧氏) 때의 옛 제도와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으니 웬일일까요.”

했더니, 혹정은,

 

이것은 만든 구조에 달린 것이니 저는 아직 이 악기를 손에 들고 자세히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한다. 형산은,

 

어찌 변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팔음(八音) 중에서 포()는 곧 생황(笙簧)이 이것인데, 벌써 오래 전부터 대뿌리를 잘라서 포() 대신으로 쓴답니다.”

한다. 혹정은,

 

율려(律呂)가 변하는 것은 악기의 죄가 아닙니다. ()과 복()도 그 부는 악기가 관약(管籥)이 아니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 부는 것이 반드시 관약일 때는 그 제도는 마땅히 당우 시절의 옛 법일 것이요, 그 치는 바가 종경(鍾磬)이 아니면 모르거니와 그 치는 바가 반드시 종경일 때는 그 음률도 응당 소호의 옛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하는 조(調)가 무슨 음으로부터 나와서 음이 연하며, 율에 화한 연후에 정음(正音)과 간성(姦聲)이 비로소 갈라질 것입니다. 합쳐지는바 간()이 어떤 심정에 감동되어 곡조가 된 후에야 고금 음악이 구별될 것이며, 그 음률이 잘 맞고 맑은 것은 정음이요, 음탕하고 슬프고 사나운 것은 간성이 될 것입니다. 이제 무슨 악기이고 단 한 개의 음과 한 개의 율을 가지고서야 어찌 소호를 의논할 것이며 또한 어떻게 상복이라 이를 것입니까.”

한다. 나는,

 

오음(五音) 소리를 한번 얻어들을 수 있을까요?”

했더니, 혹정은,

 

저는 입으로 능히 소리를 내지는 못합니다만 그 형상을 들은 바 있습니다. 광대하고 웅심한 소리는 예로부터 궁음(宮音)이라 하고, 지나치게 높고 조급한 소리는 예로부터 상음(商音)이라 하고, 정확하고 뚝 그치는 것은 예로부터 각음(角音)이라 하고, 빠르고도 치솟는 소리는 예로부터 치음(徵音)이라 하고, 가라앉고 가는 소리는 예로부터 우음(羽音)이라 불렀습니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모두 칠정(七情)을 거쳐서 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 변궁(變宮)변상(變商)변각(變角)변치(變徵)변우(變羽) 소리가 있으니, 율은 소리를 따라 화해서 마음에 느끼는 바 바르고 편벽된 데 따라서 음이 변하고 율이 맞고 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음에는 혹시 선악(善惡)이 있을까요?”

했더니, 혹정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반문을 한다. 나는,

 

궁음(宮音)처럼 광대하고 웅심한 것은 선()이요, 상음(商音)같이 조급한 소리나 치음(徵音)같이 빠른 소리는 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5음은 모두 바른 소리입니다. 소위 광대하고 웅심하며 조급하고 빠르다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소리의 본질을 형용한 것뿐이요, 그 작용인즉 바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궁도 아니요, 상도 아니요, 각도 치도 우도 아닌 것을 간음(間音)이라 하여 5음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이것이 곧 간성(姦聲)입니다. 5음은 변해서 반음(半音)이 되고, 또 반을 쪼개서 반의 반음으로 되나 이러고도 근본되는 율을 잃지 않을 때는 맑고 탁한 음이 서로 화하고, 높고 낮은 음이 서로 응하여 음이 서로 연하고, 조가 생긴 연후에야 그 음악의 선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한 가지 일로써 증명할 수 있으니, 궁은 맨처음 정음으로 나와서 임금의 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파(琵琶)에서 새로 나는 궁성이 기조만 되고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왕영언(王令言)은 수양제(隋煬帝)가 대궐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니, 어찌 궁성에 무슨 나쁜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같이 한번 가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연음(連音)과 기조(起調)의 죄입니다. 왕망(王莽)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명당(明唐)에 바쳤더니, 그 소리가 슬프고 사나워서 듣는 자가 나라를 일으킬 음악이 아니라 하였고, 진후주(陳後主 진숙보(陳叔寶))는 무수곡(無愁曲)을 지었는데, 듣는 자가 슬퍼하고 원망하는 듯,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의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연호) 초년에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라는 것이 나오자 항상 음탕하고 사납고도 슬프더니 필경 천하가 오래지 않아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대개 음악을 만들 때는 언제나 궁음 자리에서 조가 시작한다는 말은, 소리가 상음에서 시작될 때는 상이 궁음이 되고, 각음에서 시작될 때는 각이 궁음이 되고, 치음에서 시작될 때는 치가 궁음이 되고, 우음에서 시작될 때는 우가 궁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한다. 형산은,

 

유송(劉宋) 순제(順帝 유준(劉準)) 때 상서령(尙書令)왕승건(王僧虔)은 황제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청상(淸商)은 실상 동작삼조(銅爵三租 ()의 대표적 음악)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이 남겨놓은 풍류다운 음은 양양(洋洋)해서 귀에 넘치고 있어 소리가 알맞고 고르고 단아한 것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었으나, 수년 동안에 없어진 곡조가 반이나 되고, 민간에서는 서로 다투어 새 잡곡(雜曲)을 만들어 음탕하고 시끄럽기가 한이 없으니, 마땅히 유사(有司)를 시켜서 이것을 모두 고치고 보철(補綴)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위()는 한()을 계승했고 한은 진()을 이었으니, 진의 수도 형산은 주()의 형산에서 멀지 않거든, 하물며 진의 음악은 열국(列國)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마땅히 그 유풍(流風)과 여운(餘韻)이 오히려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진서(晉書) 악지(樂志)에 이른바 비무(鼙舞)는 한()의 시절에는 잔치 자리에서 쓰던 춤이요, 강좌(江左)에서는 옛날에는 아악(雅樂)이 없었습니다. 양홍(楊泓)은 말하기를, ‘처음에 강남(江南)에 와서 백부무(白符舞)를 보았는데 혹은 백부구무(白鳧鳩舞)라고도 하여 이것은 오()의 사람들이 손호(孫皓 ()의 말주(末主))의 학정(虐政)을 걱정하여 지은 것으로, 그 곡조에 흰 비둘기는 우글우글, 갈석(북방의 지명)에만 녹을 주네[白鳩濟濟獨祿碣石]란 구절이 있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백부구무는 곧 백부(伯符 손책(孫策)의 자)가 창춤을 잘 추어서 당할 자가 없었으므로 강동(江東) 사람들이 손랑(孫郞 손책을 가리킴)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혼이 나갔다가, 그가 나라를 정한 뒤에 강동 어린이들은 드디어 노래를 지어 전했다.’고 합니다. 동작삼조란 말은 위 무제(魏武帝 조조(曹操))가 업()에다 동작대(銅爵臺)를 세우고 스스로 악부(樂府)를 지어 악기에 맞추었다 합니다. 문제(文帝 조비(曹丕))와 명제(明帝 조예(曹叡)) 무렵에는 청상령(淸商令 음악을 맡은 기관)을 두어 이를 관리하게 하였는데, 소리가 알맞고 고르고 단아한 품이 비록 반드시 왕승건의 말과는 같지 않다 하더라도 지나간 옛날이 오히려 멀지 않으며, 그들의 남겨놓은 풍류다운 음은 양양하여 아직도 귀에 가득하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진씨(晉氏)가 도읍을 파천(播遷)한 뒤로부터 중원(中原)의 옛 음악은 저절로 유리(流離)하게 되어 부견(苻堅 전진(前秦)의 임금)이 한위의 청상악(淸商樂)을 얻게 되자 전진(前秦 부건(符健)이 창립한 나라)과 후진(後秦 요장(姚萇)이 창립한 나라)에 전했고, 송 무제(宋武帝 유유(劉裕)의 묘호)가 관중(關中)을 평정하자 악공(樂工)과 악기들을 모두 강남으로 옮겼습니다. 그 뒤에 수()가 진()을 평정하자 이것을 모두 얻게 되어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상이 악기에 대한 고금의 연혁입니다. 수에서는 강남에서 얻은 악공과 악기를 본래 화하(華夏)의 정성(正聲)이라 하여 청상이란 옛 칭호를 따라 관서(官署)까지 두었으니, 그것을 통틀어 청악(淸樂)이라고 합니다. 내 옛 친구에 태산(太山)에 사는 비불(費黻)이 있었으니 그의 자는 운기(雲起), 호는 노재(魯齋)로서 율려(律呂)에 정통하고 밝아 삼뇌정의(三籟精義) 30권과 청상리동(淸商理董) 30권을 지었습니다. 제가 대청회전(大淸會典)을 짓는 데 참가했을 때 비불은 찬국(纂局)에 와서 자기가 지은 악학(樂學)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바치고 성음(聲音)과 악기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되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쓰기도 하여 역대 아악의 변천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는 것이 마치 손바닥에 있는 손금 세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직 혼자서만 알 뿐이요, 다른 사람으로서는 그 이론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또 그 글 속에는 당시의 대신들에게 저촉되는 데가 많았을뿐더러 또는 비군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서 그 글이 마침내 위에 전달되지 못하매, 식자들은 지금까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나이 젊었을 때 한번 보았지만 능히 자세히 해득할 수 없었고, 그후로 해가 오래고 보니 모두 잊어버렸으니 더욱 가석한 일입니다.” 형산이 이 글을 써서 혹정에게 보이니, 혹정은 연상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사람이 한참 수작이 오가곤 한다. 아마 비불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한다. 나는,

 

구라파의 동현(銅鉉) 소금(小琴)은 어느 때부터 나왔던가요?”

했더니, 혹정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모릅니다만 아마 백년이 넘어서부터지요.”

한다. 형산은,

 

()의 만력(萬曆) 때 오군(吳郡)에 사는 풍시가(馮時可)가 서양 사람 리마두(利瑪竇)를 북경에서 만났을 때 그 거문고 소리를 들었고, 또 자명종(自鳴鍾)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미 기록에 남아 있으니, 대개 만력 시대에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모두 역법(曆法)에 정통하고 기하(幾何)를 아는 데는 세밀하고 자세해서, 무엇이나 물건을 제조하는 데는 모두 이 방법을 쓰고 있답니다. 중국에서 기장낱을 포개 놓고 크기를 측량하는 일 같은 것은 도리어 추잡한 노릇입니다. 또 그들의 문자는 소리로 뜻을 삼아, 새와 짐승의 소리나 바람과 빗소리까지도 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 없이 혀로 이것을 형용해 냅니다. 저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능히 팔방(八方)의 풍속을 알고 만국 말을 통한다.’ 하는데 이 거문고를 천금(天琴)이라 하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그 빨간 글씨로 표해 놓은 것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그것은 줄을 고르는 음악의 부호입니다. 그런데 귀국에도 이 거문고가 있습니까?”

한다. 나는,

 

원래 중국에서 사 가지고 온 것인데 처음은 줄을 맞추지 못해서 다만 그 줄마다 나는 띵뚱 하는 소리가 소반 위에 구르는 구슬 소리 같아서, 노인들의 잠 안 올 때나 어린애 울음 그치는 데 가장 좋았지요.”

했더니,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그는 또,

 

귀국의 금슬(琴瑟)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금과 슬이 다 있습니다. 제 친구 홍대용(洪大容)의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인데 음률에 능하여 금슬을 잘 탈 줄 압니다. 우리나라 금슬은 중국과 다르고, 타는 방법 역시 다릅니다. 옛날 신라 시대에, 거문고를 만들었더니 현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다 하여 이름을 현금(玄琴)이라고도 합니다. 또 가야금(伽倻琴)이란 것이 있어 큰 슬()의 반 쪼갠 것이 되고 줄은 열둘이 되어, 그 타는 법이 중국의 거문고 타는 모양과 비슷합니다. 담헌은 처음으로 동현금(銅絃琴)의 소리를 골라서 가야금에 맞추었는데 지금은 금슬을 타는 악사들이 모두 이 본을 보고 현악이나 관악에 맞추고 있습니다.”

했다. 나는 또 묻기를,

 

중국에는 아직도 소()()의 곡조가 남아 있습니까?”

했더니, 형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다. 혹정은,

 

대개 소호의 시대는 어떠한 세계였던지, 그 시대 사람들이 지키는 떳떳한 도리와 시대의 유행과 풍속의 숭상하는 바로써,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를 임금으로 삼고 순()을 신하로 삼고 고요(皐陶)를 스승으로 삼아서 당시의 사대부들 중에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젊은이들을 골라서 학교에 넣었으니, 이른바 생활로써 기질을 바꾸고 수양으로써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또 가르친다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너그럽고 간략하고 온순하고 강직한 것으로써, 성정(性情)을 훈도(薰陶)하고 신기(神氣)를 고무(鼓舞)하여 심령과 총명을 어릴 때부터 깨우치고, ()와 같은 음악에 밝고 이치에 통하는 자가 전사(典司)하는 관원이 되어 있으면서 평소에 교양 받은 천하의 자제들을 데리고 일대의 음악을 만들었으니, 이는 당시 임금의 도덕과 정치를 상징하고 백성들의 추향(趨向)에 맞추었으니, 이런 음악으로써 상제(上帝)께 바치면 하늘이 즐겨하고, 이런 음악을 종묘(宗廟)에 바치면 조상들이 감동했으며, 이로써 교화를 삼아 사방을 움직이면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한 가지 물건이라도 억눌림이 없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도시 일단(一團) 평화스러운 기운뿐이니, 음악이 여기에 미친 것이 마땅하지요. 그후 천 백 년을 지나서 우리 부자(공자) 같은 이가 나서 한번 그 음조(音調)의 가락과 음절의 여운(餘韻)을 들어 보고 나서 멀리 옛날을 상상하여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어버렸다고 하거늘, 하물며 당시에 친히 그 춤추는 봉황을 본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손이 춤추고 발이 뛰놀았을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왕(武王 () 희발(姬發)의 묘호)의 시절은 어떤 세계였기에, 당시의 백성들을 주지(酒池)포림(脯林) 속으로부터 건져 내어 한번은 그 나쁜 풍속을 씻기도 했지만, 전에 물든 더러운 풍속은 오히려 남아 있어 이같은 폐단을 단단히 고친다는 것은 진실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방패를 모은 것이 산처럼 둘러섰다는 말은 벌써 순리로 나라를 전해 받은 것만 같지 못하고, 거칠고 억센 기풍을 발양했으니, 이는 또 너그럽고 간략하고 온순하고 강직한 데 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대무(大武 주 무왕의 음악 이름)가 이루어진 것은 성왕(成王 희송(姬誦)의 묘호)강왕(康王 희교(姬釗)의 묘호)의 시대로서, 이 악곡에 무() 자 하나를 붙여 이름을 지었고 보니 부자(夫子)의 비평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능히 진선(盡善)이 못 될 것은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는 번영할 때를 당해서 비록 후기(後虁 ()의 풍악을 맡은 명신)로 하여금 음악을 맡도록 했더라도 그 성취한 바는 여기에 지나지 못하고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황우(皇祐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원풍(元豐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에는 범()과 마() 같은 여러 군자들이 옛날부터 있는 음악을 밝게 해득하지 못하고는 희미하게 고악(古樂)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소소(素韶)의 구성(九成) 같은 옛날 음악을 다시 부흥하려고 했지만, 당시의 도덕과 정치가 하늘과 사람의 마음에 합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더구나 우스운 것은 채씨(蔡氏) 신서(新書 율려신서(律呂新書))에는 원성(元聲)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 찾아낼 수 있다는 원성이 본률(本律)을 버리고 다시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사, 채씨의 말과 같이 원성을 찾아내어 구성을 본떠서 만든다 하더라도, 당시의 임금들이 진실로 중화(中和)하는 덕과 육성하는 공로가 없고 본즉, 비유하건대 글제 없는 공령(功令)이요, 시동(尸童)이 제물(祭物)이라 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는 목소리가 율이 되고 몸이 척도가 되었다 하고, 옛날에는 태자(太子)가 나면 태사(太史)는 음악으로 가르치고 소경으로 만져보게 했다 하니, 필시 일대의 음악은 임금의 목소리로 율을 삼았겠지요. 성인은 원기(元氣)를 타고났다 할 것이니, 성음을 내면 반드시 광대하고 화평하여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인즉, 옛날의 성왕(聖王)은 역시 우와 더불어 다름 없이 소리가 음률일 것인데 홀로 우의 소리만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했더니, 혹정은,

 

제왕들이 천하를 집으로 삼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모태에서 떨어지자 시랑[]의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었는데, 그 소리는 마땅히 무슨 음률에 속하겠습니까. 사간(斯干 시경(詩經)의 편명)에서 이른바 황황(喤喤)한 울음 소리나 하()의 계()와 같은 고고(呱呱)의 소리가 모두 음률에 맞았기 때문에 제후(諸侯)가 되고 천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다. 형산은,

 

옛 기록에 이르기를, 무릇 소리가 시작될 때는 사람의 마음을 거쳐서 나는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극히 귀하고 오래 사는 사람은 목소리가 큰 종소리와 같고 내뿜는 힘이 웅장하고 화창하여, 간혹 황종률(黃鍾律 육률에서 기본 표준음)에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곧 척도가 되고, 소리가 음률이 된다고 하면 우의 언행이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고 움직이면 곧 법도에 맞는다는 것을 극도로 찬양해서 말한 것이요, 그 목소리의 청하고 탁한 것이 음률에 맞고 몸뚱이의 길고 짧은 것이 척도에 맞는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몸이 천하에 앞장 서서 인간의 윤리 도덕의 표준이 되고 보면 스스로 사방 억조 생민이 법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하니, 혹정은,

 

윤 대인(尹大人)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한다. 형산은,

 

귀국의 악률(樂律)은 어떠합니까? 혹 성신(聖神)이 임금의 스승이 되어 마음을 다하여 율을 만든 것인지요. 그렇지 않으면 중화의 것을 본뜬 것인지요.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에도 모두 음악을 쓰는지요. 또 춤은 몇 일()을 쓰는가요?”

한다. 나는,

 

우리나라 삼국 시절에는 비록 성악(聲樂)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동이(東夷)의 향악(鄕樂)에 지나지 않았고, 당 중종(唐中宗 이석(李晳)) 때에 신라 악부(樂府)가 있었고 측천(則天) 때에 양재사(楊再思)가 자줏빛 옷을 입고 구려무(句麗舞)를 추었다고 하니 필시 속되고 고상하진 못했을 것이요, 송 휘종(宋徽宗 조길(趙佶)) 때에 우리나라에 대성악(大晟樂)을 보내 왔다고 하나 모두 세월이 오래되어 가히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명의 홍무 때에는 우리나라에 팔음(八音)이 들어왔고, 춤은 육일(六佾)을 쓰게 되어 돌아가신 임금의 제사를 지내는 예법을 갖추었습니다. 악기는 처음에는 중국으로부터 나왔으나 그후는 국내에서 그것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향음(鄕音)은 잘못 변하기 쉽고 옛날의 척도는 표준 삼기가 어려웠습니다. 선군(先君) 장헌왕(莊憲王 조선 세종(世宗)의 시호)은 성덕(聖德)이 계시와, 상서롭게도 검은 기장과 고옥(古玉)을 얻어서 아악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 악기가 모두 고율(古律)에 맞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토산(土産)인 기장 알로써 헤아려 보아 과연 옛날 기록의 전하는 바에 착오가 없었다고 합니다.”

했더니, 형산은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굽히면서,

 

참으로 동방의 성덕 있는 임금이십니다. 귀국의 노래 몇 장()을 들을 수 없을까요?”

한다. 나는 몽금척(夢金尺)이라든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같은 노래를 창졸간에 외워서 대답할 수 없었고 또 기휘(忌諱)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서 딴 말로 돌린즉 형산도 역시 다시 묻지 않았다.

혹정은,

 

귀국의 음조(音調)는 어떠한지 선생은 능히 형용(形容)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저는 본래 소리 재주가 없어서 형용은 낼 수 없습니다만, 다만 그 음조가 느리고 길고 박자가 드문드문 합니다.”

했더니, 형산은,

 

참으로 군자의 나라입니다.”

한다. 나는,

 

제가 처음 요동에 왔을 때 길가에서 노랫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 보니 피리 한 사람, 퉁소 한 사람, 젓대 한 사람, 비파 한 사람, 월금(月琴) 한 사람이 노래에 맞추어 반주하고, 사발만 한 북을 가지고 박자를 맞추는데 피리 소리는 납 소리 같고, 젓대는 우리나라 우조(羽調)보다 청()이 배나 높았습니다.”

했더니, 혹정은,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소위 우조란 것은 오음(五音)에서 말하는 우조가 아니고 즉 가락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비 우() 자를 써서 우조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 속악(俗樂)에는 또 계면조(界面調)가 있는데 이것은 우조를 뒤집은 음입니다. 청이 배나 된다고 한 것은 대개 율을 말할 때는 다들 청()이라 하는데, 이것은 청탁의 청이 아니요, 청이 배라고 하는 것도 본율(本律)보다 청이 갑절 높다는 말입니다.”

했다. 혹정은,

 

그러면 본율의 반이군요.”

하기에, 나는,

 

어제 황제의 어전에서 하는 음악을 들으니, 역시 요동에서 들은 것과 비슷하고 또 징과 바라로써 박자를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아악입니까. 왜 그 음조가 그렇게 높고 박자가 그렇게 빠릅니까?”

했다. 형산은,

 

선생은 어제 대궐에 들어가셨던가요?”

하고 묻는다. 나는,

 

아닙니다. 대궐에 들어가지는 않고 담 밖에서 들었을 뿐입니다.”

했다. 형산은,

 

그것은 아악이 아닙니다. 이것은 연극을 놀 때에 하는 음악입니다. 아악에는 징과 바라를 쓰지 않습니다.”

한다. 나는,

 

아악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대체로 명의 제도를 따라서 크게 조회를 할 때는 악공 예순 네 사람을 쓰는데, 인악(引樂)이 두 사람, 퉁소 네 사람, 비파 여섯 사람, 공후(箜篌) 네 사람, () 여섯 사람, 방향(方響 강철편을 배열한 타악기) 네 사람, 두관(頭管 피리의 일종) 네 사람, 용적(龍笛 큰 젓대) 네 사람, 장고 스물네 사람, 큰 북 두 사람, 박자판이 두 사람입니다. 협률랑(協律郞 음악의 기술을 지닌 관원)은 먼저 모든 악기를 궁전 뜰 위에 차려놓고, 천자의 수레가 장차 떠나며 구름 깃발이 움직이려 할 때 협률랑은 기를 높이 들어 비룡인지곡(秘龍引之曲)을 연주합니다. 황제가 용상 위에 앉으면 음악은 그치고 찬관(贊官)이 모두 국궁(鞠躬)하고 창을 하면, 협률랑은 풍운회지곡(風雲會之曲)을 아뢰고 합니다. 이 음악이 시작되면 백관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며, 절을 마치고 일어나면 음악은 그칩니다. 화석친왕(和碩親王)이 전각 위로 올라가고 보국공(輔國公)들과 각로(閣老)들이 따라 올라가면 협률랑은 경황도(慶皇都)와 희승평(喜昇平)의 악을 아룁니다. 지금은 그 이름들이 비록 달라졌지만 악기는 바뀌지 않았고 소리 곡조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악공들의 복색(服色)은 어떠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굽은 두건을 쓰고, 붉은 비단에 꽃을 그린 소매 넓은 장삼을 입고, 금칠한 띠를 띠고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둘러 싸매고, 검정 가죽 신을 신었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이것은 한인들의 제도와 같습니다그려.”

했더니, 형산은,

 

아닙니다. 아악에는 비단이나 수놓은 망포(蟒袍) 같은 것을 쓰지 않고, 또한 번인(番人)의 모자도 쓰지 않습니다. 태상시(太常寺 음악을 맡은 기관) 아악에는 무릇 구주(九奏)팔주(八奏)칠주(七奏)육주(六奏)의 네 가지 등급이 있어 음탕하고 지나치고 흉하고 거만한 소리를 금하고 있습니다. 큰 제사 때는 악생이 72명이요, 무생(舞生) 1 30명인데 먼저 신악관(神樂觀)과 태화전(太和殿)에서 연습을 합니다. 한 시대에는 태상관(太常官)을 심히 중히 여겼으니 무릇 나라에 큰 정사가 있어서 승상(丞相)과 열후(列侯)와 구경(九卿)들에게 의논을 한다면 박사(博士)는 으레 이 의논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연명(聯名)해서 창읍왕(昌邑王)을 폐하자고 태후(太后)에게 청하는 글월 중에 이르기를, ‘신 창() 등은 삼가 박사와 더불어 의논했습니다.’ 운운하였으니, 이것이 천하에 얼마나 큰 일이기에 반드시 먼저 박사의 말에 의거하고 있습니까. 지위는 낮고 사람은 미천하나 이같이 중히 여기는 것은 대개 그 천지신명과 종묘에 제사하는 예악(禮樂)의 근본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찬례(贊禮 축문을 맡아 읽는 관원)는 곧 송()의 대축(大祝)인데, 송에서도 역시 그 벼슬을 중하게 여겨 반드시 재상의 임자(任子)들을 임명하였으니, 이것은 귀족의 자손들을 추려서 가르친다는 옛 뜻일 것입니다. 명의 초년에는 역시 문학하는 선비로 여기에 처하게 했지만, 후에는 누런 모자를 쓴 도사(道士)들로 자리를 채웠으니 이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옛날에 관리를 쓰는 데는 그 본업을 바꾸지 않았으며, 인재를 쓰는 데는 겸직을 시키지 않고 의례를 맡은 이()나 음악을 맡은 기()가 구별되어, 각각 한 가지 직책을 오로지 하여 이것으로써 몸을 마치도록 익히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와 기가 그 벼슬에 종신토록 있을 뿐 아니라, 대를 이어가면서 그 직책에 있는 것도 옳은바 태사(太史)나 음악 맡은 관리가 더욱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그 직책이 한결같지 못하여 위로는 기에게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광대도 못 된 채 창졸간에 등용을 당하면, 마치 신부가 처음 와서 한 임에게 의탁하듯이, 대궐 위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거동이 마치 저 관청 섬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와 같아서 참으로 우습습니다. 귀국의 음악을 맡은 관원도 응당 그럴 것입니다.”

한다. 나는,

 

저의 이번 길이, 계찰(季札)이 주()의 고악을 감상한 것에 비하면 부끄럽습니다.”

했더니, 형산은,

 

저의 옛날 친구 도규장(陶逵章)은 제()에 사는 사람으로, 일찍이 태상관(太常官)으로 있으면서 나한테 보낸 편지에 우스개 소리로 자신을 조롱해서 말하기를, ‘도적이 해당(奚唐)의 서라 하는 말에 부끄러워하며, 매양 전부(田父)가 왼편으로 가라고 속일까 보아 의심합니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수풀 개구리가 음악을 이야기하고, 대들보 위에 있는 제비가 회여지지(誨汝知之)’를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서로 웃어대어 집이 떠들썩했다. 형산은,

 

홍무(洪武) 초년에 처음으로 신악관(神樂觀)을 천단(天壇) 서쪽에 두고 음악과 무용을 가르쳤는데, 고황제(高皇帝)는 친히 산천에 지내는 제사에 나누어 쓰는 악장(樂章)을 만들고, 그 후에는 합쳐서 제사를 지내게 되자 다시 합사(合祀)하는 악장을 만들었으며, 또 예식이 이룩되자 노래 아홉 장을 불렀던 것입니다. 식자(識者)들은 그 음률들이 아직 옛날로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병으로 여겼습니다. 상서(尙書)도개(陶凱)와 협률랑냉겸(冷謙)에게 조서를 내려 아악을 제정하게 하고, 또 학사(學士)송렴(宋濂)에게 명하여 악장을 만들게 했습니다. 무릇 원()이나 능()에 제사를 지낼 때는 음악을 쓰지 않고 또 교제(郊祭)나 종묘의 제사에는 악기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홍무 6(1373)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악생(樂生)무생(舞生)들을 앞세워 길을 인도하게 되고, 한림(翰林)들과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음악의 가사를 짓도록 하여 공경하고 삼가고 경계하는 뜻을 갖도록 했습니다. 황제는 말하기를, ‘()이 일찍이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후세의 악장들이 헛된 말로만 송미(頌美)하니, 이것은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이냐, 당시의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이냐.’ 하였습니다. 이에 유신들은 뜻을 받들어 감주(甘酒)준우(峻宇)색황(色荒)금황(禽荒) 등의 여러 곡조를 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장으로서 이름을 회난가(回鑾歌)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가히 음악의 근본을 알았다고 할 수 있으나 오히려 글에 응하는데 그치고 말았으니, 성률(聲律)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식자들이 전부 틀렸다고 하였습니다.  12(1379)에 조서를 내려, ‘짐이 한미한 처지에서 일어나 천하에 군림(君臨)하면서 상하의 신령들을 받들어 모시니, 만일 조금이라도 정성스럽지 않다면 생민들의 복을 비는 본정이 아닐 것이요, 또 영장(靈長)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고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옛날 성숙공(成肅公 주 문왕의 아들 성백(成伯))이 제물을 물려받고서 게으름을 부리는 것을 보고 군자들은 그의 지위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하니 동작(動作)과 위의(威儀)의 범절도 정명(定命)이 이와 같거든, 하물며 음성이 나게 되는 원인이 지성으로부터 감동되지 않음이 없음에랴. 귀신이 없다 하여 믿지 않는 자는 거짓이요, 귀신에 아첨하여 복을 비는 자는 혹했다 할 것이다. 짐이 신악관을 설치한 것은 음악을 갖추어 천지신명과 종묘의 신령께 제사지낼 따름이요, 구차히 전대의 제왕들이 허탄한 절차를 떠벌여 오래 사는 도를 맞아들이는 버릇을 본받음은 아니다. 설사 그런 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마음을 맑게 닦고, 빨리 오고 빨리 가서 어려움과 장애가 없도록 하는 데 불과할 것이니, 만약에 과연 오래 사는 이치가 있었다면 은주의 부로(父老)들이 어디로 갔으며 한당의 기숙(蓍宿)들은 어디 있는가.’ 하고는 이내 돌에 새겨 신악관 안에 세웠으니 이 비석을 보면, 가위 음악의 이치에 밝고 사리를 통달한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가류(道家流)를 이끌어서 운위한 것은 마침내 옛날 뜻을 받들지 못하고 보매, 우리 성조 인황제(仁皇帝 강희 황제)는 예로써 천지에 제사 지내는 음악과 만방을 협화(協和)하는 성대한 식전을, 누런 모자를 덮어쓴 저 도사들에게 맡겨 관리시킬 것은 못 된다고 하여 이에 모두 태상(太常)에게 돌리게 되었고, 또 정 세자(鄭世子)와 같이 음악에 밝은 이로서도 당시에는 능히 쓰이지 못했음을 깊이 애석하게 여겼으니, 오늘의 율려정의(律呂精義) 등 서적이 이것입니다. 큰 성인이 중화(中和)의 덕을 세우게 되니 음악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비로소 대아(大雅)를 바로잡게 되었습니다.”

한다. 혹정은,

 

귀국의 악기와 악공은 응당 고려의 옛것일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송의 숭녕(崇寧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때 반포된 대성악(大晟樂)일 것입니다.”

하기에, 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것은 홍무 때에 들어온 것입니다.”

했다. 혹정은,

 

홍무 때 나갔다는 것이 실은 대성악의 나머지입니까. 주자는, ‘숭녕 말년에 아첨한 자들의 모임에나 죄인들의 찌꺼기를 가지고 어찌 천하의 화평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했습니다. 그러나 송이 이미 강남(江南)으로 건너간 뒤로 금 태종(金太宗 완안성(完顔晟))은 변경(汴京 송의 수도 개봉(開封))에 있는 악기와 악공을 모조리 거두어 북쪽으로 옮겨가 태화악(太和樂)이라고 이름을 고쳤으니, 이것도 그 실상은 대성악입니다. 금이 망함에 이르러 다시 또 남쪽 변채(汴蔡)로 옮기고 변채가 함락되자 중국의 옛 물건은 모두 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원의 오래(吳萊 원의 음악을 맡은 관원)가 태상이 되어 쓴 음악은 본래 대성악의 유법(遺法)으로 옛날 악공을 가르쳐 종묘의 제사에 썼으므로 원의 악호(樂戶)의 자손은 대대로 하변(河汴)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명에 이르러서는 원을 쫓아내고 악공과 악기들을 모두 얻게 되었으므로 태상 아악과 악관들이 익히던 음악은 오히려 대성악이라고 불러 심지어 여럿이 추는 춤이나 모든 놀음은 원의 옛 제도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명의 고황제(高皇帝)는 원의 정치를 일신하게 개혁하면서 대성악에 이르러서는 금은 송에 따랐고 원은 금에 따르고 보니, 그 전통이 이미 오래되어 중국의 옛 제도를 지키고 있다 하여 음악을 새로 고쳐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로써 홍무 때에 반포된 것이 대성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다. 나는 묻기를,

 

옛날은 천자의 가운데 손가락 길이로써 율을 만들어 땅속에 묻고 후기법(候氣法)을 썼다는데 이 이치는 어떤 것입니까?”

했더니, 혹정은,

 

이것은 곧 방사(方士) 위한진(魏漢津)이 휘종(徽宗)의 손가락을 재어 대성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한진은 본래 촉()의 천인 출신으로 그는 말하기를, 성왕(聖王)의 타고난 천품은 천지 음양으로 더불어 한 몸뚱이로서 목소리는 율이 되고 몸은 척도가 된다 하여, 휘종에게 청하여 가운데 손가락 세 마디의 길이로 황종률(黃鍾律)을 정하고 이로써 천지의 정리와 음양의 조화에 맞춘다 하였습니다. 당시에 채경(蔡京)이 유독 그 말을 기특히 여겨 갖은 아첨으로 황제를 달래어 먼저 솥 여덟 개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가장 가소로운 일입니다. 옛적에 처음 난 성왕이 비로소 말과 자를 만들면서 아무 것도 의거할 것이 없으므로 마침 손가락 마디로 율()을 삼았고 기장 알 개수를 세어 표준을 삼았습니다. 또 당시 세상은 사시 기후가 그 절후를 잃지 않고, 소위 바람은 나뭇가지에 울지 않고 바다는 물결이 일지 않았다 하여 그런 기후가 사시의 기운을 얻었으니 이치가 괴이할 것은 없겠지만, 후세에 이르러서 임금이 어질어야 천지 기후도 고르고 생물이 자란다는 이치는 생각지도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써 율을 가늠하고 갈대 태운 재로써 좋은 기후를 얻고자 하니, 이것은 흰 바탕이 있은 뒤에야 채색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격이요, 그 근본은 헤아리지 않고 끝만 가지런히 하려고 하는 격이니, 이러고서는 설사 절후에 맞추어서 어떤 기운이 뻗친다 하더라도 이 기운이 어디에 속하는 기운인지 모를 것이거든, 하물며 사람의 손가락 마디는 길고 짧음이 같지 않은즉, 숭녕의 손가락이 길어서 악률이 높아졌으므로 한진(漢津)은 크게 놀라서 그 무리 임종요(任宗堯)에게 가만히 이르기를, ‘율이 높은 것도 북비(北鄙 북쪽 변방)의 음악이라 북쪽이 요란하니, 천하에 장차 무슨 변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하였답니다. 음악이 이미 이루어지자 드디어 정강(靖康)의 화가 있었으니 음악이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한진 같은 소인이 비록 음률을 들을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음악을 지을 덕이 없었고, 당시 사대부들이 또 한진의 재주만한 자도 없어 급급히 그에게 아부했으니, 주자가 배척한 아첨하는 자들의 모임이요, 죄인들의 찌꺼기란 것이 이것입니다.”

한다. 형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겸(冷謙)이 정했다는 음악과 춤은 홍무 6년의 일로서 대성률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대성악은 귀신을 맞는 첫 연주에는 남려(南呂)의 각음(角音)이니, 이는 대려(大呂)의 변조(變調)입니다. 홍무 때에 만든 태주(太簇)의 우음(羽音)은 중려조(中呂調), 냉겸의 칠균(七勻)은 태족으로부터 이측(夷則)협종(夾鍾)무역(無射)중려(中呂)는 모두 정조(正調)인데 다만 청황종(淸黃鍾)청림종(淸林鍾)의 변조입니다. 본소리는 무겁고 커서 임금과 아비에 속하고, 응하는 소리는 가볍고 밝아서 신하와 자식에 속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사청성(四淸聲)이라 하는데, 만일 사청성을 쓰지 않는다면 이것은 감응하는 음이 없어서 임금의 덕은 치밀며 신하의 도리는 끊어지고 아비의 도리는 없어지매 자식의 직분은 허물어지게 됩니다. 한진의 음률은 옛 제도에서 두 율씩을 낮추어 임종(林鍾)을 궁음으로 할 때는 상음각음이 정조(正調)가 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가 변조가 됩니다. 또 남려(南呂)가 궁음이 될 때는 오직 상음 하나만 정조가 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변조에 속합니다. 이것은 칠균 중에 변조가 다섯 가지로서, 의논하는 자는 이 때문에 임금의 도가 미세(微細)하게 되고 백성과 귀신과 사물의 힘이 떨치지 못한다 하는바 이것은 참으로 망국의 음률로서 슬프고 음란하고 원망하고 흐느끼게 되어 오래 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송잠계(宋潜溪 잠계는 송렴(宋濂)의 호)가 말한, 한진이 만든 음악이 난세의 음악이라 한 것도 바로 이 까닭입니다. 주자가 건양(建陽) 땅 채원정(蔡元定)의 균조(勻調)와 후기의 방법이 치밀하고 통창한 것을 칭도하고, 자기의 예서(禮書) 중 악제(樂制)악무(樂舞)종률(鍾律) 등 각편을 대체로 채씨의 신서(新書)에 의거하여 고증하면서 부연해서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주자는 음률에 대하여도 그다지 명백히 해득하지 못하여, 오로지 채씨를 믿고 이른바 선입의 견해로서 한진을 배척한 것도, 음률을 감정하여 옳고 그름을 안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채경의 주장한 것이라 하여 있는 힘을 다 들여 이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원정(元定)의 저서는 능히 행사에 시험해 보지 못했고, 한진의 음악은 그 당세에 밝게 시험을 했던 터로 그 후의 의논하는 이들은 그 일을 지적하기가 쉬웠던 것입니다. 실상 채씨가 음악에 밝은 것은 고정(考亭 주희의 별칭)보다는 나으나 너무도 천착(穿鑿)집요(執拗)하게 다루었다는 평을 면치 못할 것이요, 한진의 음률을 감상하는 것이 원정보다 정밀하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맞추고 아첨하고 있으며, 냉겸의 음악을 제정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옛 제도를 곡진하게 답습했다 하겠지만 그 소리는 송원의 율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회전(會典)을 편찬하는 데 참가했을 때 여러 대가들을 연구하였는바, 홍무 때 제정한 것은 실상 대성악과도 판이하게 달라 왕노야(王老爺)가 말씀한, 귀국이 홍무 때 가져갔다는 대성악이 옛날 것이란 것은 사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다. 혹정은,

 

어찌해서 그럴까요?”

하고 물으니, 형산은 웃으면서,

 

그저 그렇지요.”

하고는 그는 또,

 

대체로 중국의 악공은 진() 시절에 망했고, 악기는 수() 때에 망했으며, 잡극과 백 가지 놀음이 아악을 어지럽게 만든 것은, 당 현종(唐玄宗)이 마땅히 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원컨대 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했더니, 형산은,

 

춘추 시절에 세상은 비록 어지러웠으나, 지나간 옛날이 그다지 멀지 않아서 진한 이래로 비록 큰 난리가 자주 일어났으나 화는 나라 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악기나 악공을 딴 데로 옮겨가지 않았고, 제도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나라를 가진 자도 창과 칼을 버리고 우선 생()과 용()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맡은 관원들은 세대와 더불어 함께 일어나고, 풍진(風塵)이 조금 밝아지면 다투어 악기를 안고 관직에 나와서 자손들에게까지 세업(世業)을 전하여, 마음대로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진씨(晉氏)가 도읍을 옮기게 되자 다섯 가지 성이 섞이고 어지러워 사해가 쪼개어 무너지고, 음악의 세밀한 기술은 도탄에 유리되었고, 석씨(石氏 후조(後趙)의 석륵(石勒))가 업()에 도읍하자 동작(銅爵)과 청상(淸商)은 모두 표령(飄零)하여 없어지고 모용초(慕容超 남연(南燕)의 임금)는 이불(李佛)태악관(太樂官)을 잡아온 대신 그 어머니를 요진(姚秦)에 바쳤으나 옛날 악공들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송 무황제(宋武皇帝 남조의 송)는 관내에 들어왔지만 그가 얻었던 악기와 악공은 가히 알 만한 것이요, 그는 또 바쁘게 동쪽으로 돌아갔으니 그가 옮겨간 것도 또한 가히 알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일찍이 중원의 악기는 진() 시절에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서(隋書)에 실려 있는 역대의 동척(銅尺)은 열다섯 가지나 되어 주척(周尺)을 비롯하여 한의 유흠(劉歆)이 만들었다는 동곡척(銅斛尺)과 동한(東漢) 건무(建武 광무제의 연호) 시절의 동척(銅尺), ()의 순욱(荀彧)이 만든 율척(律尺) 조충지(祖冲之)의 동척들은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위 주척은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신망(新莽) 15년 동안에 만든 물건은 무엇이나 주()의 것을 모방하여 이름을 붙였으나 이미 위조가 많았고 또 맘대로 아침에 만들었다가 저녁에 부셔버려서 척도가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후세에 주척이라고 불리는 것이 왕왕 유흠이나 왕망의 무리가 만든 위조로써 우문씨(宇文氏)가 한번 가짜 주를 창건하자 그가 가졌던 보물들은 바로 수의 소유로 돌아갔습니다. 수 문제(隋文帝)는 본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성질이 또 음악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미 천하를 얻고 본즉 부득이 음악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패국공(沛國公) 정역(鄭譯)은 지음(知音)에 통하여 고악 십이율을 말하면서 궁음을 빨리 알아내어 칠성(七聲)을 각각 사용했으나 세상에는 통하지 못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주 무제(周武帝) 때에 백소지파(白蘇祗婆)는 원래 구자(龜玆 지금의 신강(新疆) 지방) 사람으로 비파를 잘 탔습니다. 한 균() 가운데 칠성이 끼어 있었으니 소위 파타력(婆陀力)이란 중국말로 궁성(宮聲)이요, 계식(雞識)이란 중국 말로 남려(南呂), 사식(娑識)이란 중국 말로 각성(角聲)이요, 후가람(侯加藍)이란 중국말로 응성(應聲)이니 즉 변치(變徵), 사렵(沙獵)이란 중국말로 치성(徵聲)이요, 반첨(般瞻)이란 중국 말로 우성(羽聲)이요, 이건()이란 중국 말로 변궁(變宮)이라 합니다. 정역은 그 법을 연구하여 12 84조로 정하고,  7음 밖에 다시 한 가지 음을 더 정해서 응성이라 했습니다. 정역은 본래 무뢰배요, 교묘한 자로서 여러 번 나라를 파는 행동을 했다가 다시 반복하곤 했습니다. 문제는 처음엔 그를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미워하였으니, 정역의 쓴 법은 비록 그럴싸했으나 그 근본은 이악(彛樂)에서 나왔기 때문에 율은 조금 높으며 거칠고, 만보상(萬寶常 ()의 음악가)이 만든 여러 악기는 정역의 것보다 두 율이 낮아서 그 소리가 맑고 고왔으므로 속된 귀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모두 능히 자기의 기술로서 당세에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타(何妥)소기(蘇夔)우홍(牛弘) 등은 제각기 붕당(朋黨)을 모아서 하타는 임금에게 아첨하여 황종이 임금의 덕을 상징한다고 하니, 무제는 그 말을 기뻐하여 황종 한 궁음만 쓰는 데 그치고 다른 율은 쓰지 않았습니다. 우홍 등은 당시 선궁음(旋宮音)을 쓰지 않는 문제의 뜻에 맞추어 아첨했고, 다시 전대의 금석(金石) 악기들은 부수고 녹여 없애버려서 이로부터 역대 악기의 전형(典刑)을 고증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 까닭에 저는 중국의 악기가 수에 와서 망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의 초기에는 조효손(祖孝孫)에게 명하여 아악을 제정했는데 효손은 일찍부터 하타소기의 무리와는 뜻이 맞지 않아 수의 시절에는 배척을 당했다가 당에 와서는 뜻을 폈고, 장문수(張文收)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악을 제정하는 데 퍽 전아(典雅)하다고 말했지만,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공리에 급급하고 본래부터 음악은 좋아하지 않아서 음악이란 정치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소박한 듯하면서도 실상은 고루한 것입니다. 더욱이 예악이 정치의 근본이 되는 줄은 모르고 배우(俳優)는 남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노리개로 인정했습니다. 장문수는 또 세상에 아첨하여 하청(河淸)경운가(景雲歌)를 짓고, 주안(朱雁)천마(天馬)를 본떠서 연악(燕樂)원회(元會)로 이름을 붙였으니 당 시절의 아악은 문헌에 따라 숫자나 채우는 데 그칠 뿐이었습니다. 현종(玄宗) 때 와서는 그가 음률을 잘 알았고 보니, 다시 좌우 교방(敎坊)을 두고 황제의 이원(梨園) 제자라고 불러, 몸소 악공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천보(天寶 당 현종 후기의 연호) 연간의 전성기에는 매양 잔치를 베풀고, 고창(高昌)고려(高麗)천축(天竺 인도의 별칭. 서북 인도)소륵(疏勒) 등 여러 나라의 부()를 두었고, 코끼리춤, 말춤에 이르기까지 추게 되어 이에 역대로 내려오던 음악의 제도는 씻은 듯 없어졌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안녹산(安祿山)의 화가 있어 드디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당 현종이 음률에 밝았던 죄입니다.”

한다. 나는,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란 근자에 보는 서상기(西廂記)같은 잡극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그렇습니다. 예상우의 열두 편이 세상에 전하기로는,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양경술(楊敬述)이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이것을 얻고서 매우 기뻐하여 드디어 스스로 이것을 연출하였다 합니다. 이것이 후세 잡극의 시작으로서 그 소리가 느리고 슬프고 가늘었습니다.”

한다. 나는,

 

송이 인후한 것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숭녕 이전은 아악이 응당 볼 만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했더니, 형산은,

 

이것은 화현(和峴)이 제정한 아악으로서, 송 태조(宋太祖) 때에 주왕박(周王朴 송의 음악가)이 만든 율척(律尺)을 서경(西京)에 있는 옛날 석척(石尺)에 비교하여 보니 조금 짧았으므로 악성(樂聲)이 좀 높아서 중화(中和)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건덕(乾德) 4(966)에 화현에게 명령하여 옛날 제도를 본떠 자를 만들었으니, 역사에서 말하기는, 화현의 아악은 음조가 화창하나 세상에 아첨하고 시세에 따르는 말이라 했습니다. 나라를 얻은 지 겨우 해를 지났을 뿐인데 무슨 인후한 것이 깊어서 그 빛이 사방을 뒤덮어 백성과 물건을 화락하게 했겠습니까. 화현이 말한 바 겸손한 태도로 나라를 얻었다고 하여 현덕승문(玄德升聞)의 춤을 만들었으니, 이 춤은 한 줄에 열여섯 사람씩을 여덟 줄로 세워 8()의 갑절을 만든 것이 더욱 우스운 일입니다. 현덕승문이라면 우빈(虞賓)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니, 혹정도 역시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아 빨리 쓰기를,

 

()에 있지요.”

했다. 형산이 말하기를,

 

대저 제왕이 음악을 모를 수는 없는 일이요, 또한 음악을 알아도 걱정입니다. 음악을 알지 못하면 수의 문제나 당의 태종같이 가위 정치는 성공했다 할 수 있는 임금으로서 비록 부득이 음악을 제정하기에 힘썼다 하지만 그의 근본 취지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고, 당의 명황이나 송의 도군(道君) 같은 이들은 본래 음악을 잘 안다고 했으나 천보(天寶)정강(靖康)의 두 난리를 불러일으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대개 음악의 덕이란 후충(候蟲)시조(時鳥)와 같으며 음악의 재주란 시정(市井)과 같고, 음악의 사업이란 역사와 같으며, 음악의 이름이란 시호(諡號)와 같습니다.”

한다. 나는,

 

어째서 후충과 시조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종사(螽斯)와 사계(沙雞 메뚜기)는 본래 같은 벌레요, 황조(黃鳥)와 창경(倉庚 꾀꼬리)은 본래 한 새인데, 때를 따라 변화해서 우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는 말이지요.”

한다. 나는 또,

 

시정이란 무슨 뜻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저자에서는 인화를 볼 수 있고, 우물 터에서는 질서(秩序)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건을 서로 교역하는데, 팔고 사는 두 편 뜻이 맞는 것이 시도(市道), 뒤에 온 자가 먼저 온 자를 원망하지 않고 그릇을 벌여놓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제 뜻에 찼을 때 그치는 것이 정도(井道)입니다. 무릇 역사의 대체는 정직해야 하고, 시호라고 하는 것은 잘잘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다. 형산이 일어서서 조그마한 가죽 상자를 열고, 작은 검정 종이부채를 내어 나에게 보이는데, 그 표정이 너그러웠다.

또 아주 작은 사기합을 끄집어 내어 책상 위에 늘어놓는데, 무엇을 하려는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차례로 합을 여는데 보니, 석록색(石綠色)수벽색(水碧色)유금색(乳金色)니은색(泥銀色)의 물감들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부채를 펴놓고, 노석(老石)과 함께 치죽(穉竹)을 그린다. 나는,

 

저는 선생이 용면(龍眠)의 높은 솜씨를 가지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였더니, 형산은,

 

그저 마음먹은 뜻을 표해 본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한다. 나는,

 

저 뱀의 발등과 매미의 날개처럼 생긴 것이 문득 천 길을 뻗을 기세가 있어 보이는데요.”

하였더니, 형산은 크게 웃으며 이내 화제로서,

 

아름다운 푸른 대는 임의 풍채 보는 듯이 / 綠竹瞻君子

굽어진 저 언덕에는 임의 소리 듣는 듯이 / 卷阿矢德音

이 부채를 펼쳐 내어 그림 한 폭 그려 들고 / 揮毫開便面

두 손을 맞잡으니 마음마저 같으이 / 握手得同心

라는 네 글귀를 쓰고 나서, 또 이름과 자를 새긴 작은 인()을 다른 종이에 찍어 도려내어 왼쪽에 붙이고는 접어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옛날 음악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말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웃으면서,

 

선생은 퍽이나 옛것을 좋아하는 주장이십니다. 대개 세상에서 음악을 말하는 자가 율을 말하면서도 시는 말하지 않고, 시는 말하면서도 덕은 말하지 않고, 덕은 말하면서도 가세(家世)는 말하지 않고, 가세는 말하면서도 풍속은 말하지 않고, 풍속은 말하면서도 운수는 말하지 않아, 의론만 분분하여 헛되이 상당(上黨)양두산(羊頭山)에서 검정 기장을 찾는다든지, 진회(秦淮) 못가에 가서 가회법(葭灰法)을 한다 하여, 음악은 필경 옛날의 고아한 것은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궁률(旋宮律)이나 기조(起調)에 관한 법은 제가 본 바를 앞에서 대강 말했지만, 노래와 시에 있어서는 고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유쾌한 사람은 웃지 않을 수 없고, 슬픈 자는 울지 않을 수 없고, 배고픈 자는 먹을 것을 찾지 않을 수 없고, 목마른 자는 물을 찾지 않을 수 없어, 허위와 가식이 없고 억지로 하는 일이나 구차한 것이 없습니다. 이같이 마음에 한번 감동되면, 비록 너무 즐거우면 음탕해지고, 너무 슬프면 병이 나는 폐단이 있지만, 모두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소위 시경 3백 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간사함이 없는 생각이란 이것입니다.

윤대인(尹大人)의 시()()의 비유는 정말 음악의 실정을 얻은 것으로, 양쪽이 서로 팔고 사고 할 때에 값을 다투다가도 뜻에 맞지 않으면 매매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니, 사람을 협박하고 억지 흥정을 하는 것은 인화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경 3백 편은 모두 사람의 감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바일 것입니다. 이상은 시를 논한 것이다. 유천(維天)과 집경(執競)을 칙천(勅天)과 갱재(賡載)에 비하면, 진실(眞實)하고 소박(素朴)한 품이 좀 모자라나 문장의 화려한 면은 더욱 나을 것입니다. 위의 악가로서 안세(安世)방중(房中)을 비롯하여 주안(朱鴈)천마(天馬)삼조(三祖) 같은 사장(詞章)들의 뜻을 너무 과장해 놓았으니 과연 유천집경에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건대, 송사(訟事)를 듣는 것과 같아서, 이유가 바른 자는 모양이 씩씩하고 말이 간단하며 목소리는 화창한 것이요, 이유가 그른 자는 얼굴에 성이 나고 기색은 거칠며 말은 많고 소리가 떠들썩한 것입니다. 후세의 사신(詞臣)들이 이런 가사를 위조하는 데는 오로지 간사하고 아첨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이고 보면, 이미 그 덕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가 먼저 떨릴 것입니다. 귀신이 내릴 때나, 사람들이 화락할 때는 말할 것 없이, 노래를 부를 때는 기쁘지도 않은데 억지로 웃고, 슬프지도 않은데 억지로 우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니, 마음에 감동되어 우러나오는 소리처럼 화창하다 하겠습니까, 괴굴(愧屈)하다 하겠습니까. 그 말로 읊는 것도 이러할진대 음률의 소리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음률의 소리가 이러할진대, 소리에 조화된 음률이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또 서산(西山) 채씨(蔡氏)가 말한, 이른바 원성(元聲)을 어디에 의거해서 찾을는지 모르지만, 이 원성이란 음률에 있는지요, 도덕에 있는지요. 이것은 도덕을 근본으로 삼은데다가 시를 짝지었을 것이요, 소리를 주장으로 삼고 율은 다음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이상은 덕을 논한 것이다. 군자가 나라를 창설하고 대를 이을 때는, 만세에 무너지지 않을 터전을 세우지 않는 이가 없어, 주공이 노()를 다스리고, 태공이 제()를 다스리던 것과 같았으나, 또한 말손(末孫)이 불초(不肖)하고 본즉, 그들 둘은 일찍이 이에 대하여 의론이 있었고, 그 자손의 일이 이미 백 세 앞서 변천될 줄을 알고, 음악에서도 역시 변천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상은 가세(家世)를 논한 것이다. 풍속에 이르러서는 사방이 각각 달라서, 소위 백 리에 풍()이 같지 않고 천 리에 속()이 같지 않다는 것이 곧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정(刑政)으로도 미치지 못하고, 언어로도 달랠 수 없는 처지라도, 오직 음악만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신기(神機)와 묘용(妙用)이야말로 바람처럼 움직이고 햇빛처럼 비치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무시켜서 그 공화(功化)의 빠름이 우() 춤을 두 뜰에서 춘 지 70일 만에 오랑캐가 감화되었다 하니, 비록 이것을 일러 풍속을 바꾸어 단번에 도에 이르렀다 하여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남방의 부드러움과 북방의 강한 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요, 정성(鄭聲)의 음란한 것과 진성(秦聲)의 거센 것은 변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제각기 향토의 소리를 기품으로 타고 났으므로 성인도 역시 풍속의 다른 바를 어쩌지 못한다 하여, 정의 음탕한 소리를 내쳐 버리라 하였을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이상은 풍속을 논한 것이다. 성인도 능히 어쩌지 못하는 것은 운수입니다. 영휴(盈虧)와 소장(消長)은 하늘의 운수요, 고허(孤虛)니 왕상(旺相)이니 하는 것은 땅의 운수입니다. 오래되면 변화를 생각하고, 묵으면 새것을 찾고, 궁하면 통하고 싶어하는 것은 운수의 기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칠일겁(七日劫 찰나의 반대로 가장 오랜 세월), 우리 유교에서 말하는 5백 년의 일기(一期)인데, 이 기회에 성인이 탄생하면 시운이 잘 조화되어 천지간의 모든 일을 이룩할 따름입니다. ()가 충성을 숭상한 것이라든지, ()이 질박함을 숭상한 것이라든지, ()가 문화를 숭상한 것이라든지, 영씨(嬴氏 ()의 성)가 봉건(封建)을 파하고 정전법(井田法)을 없애어서 천고에 죄안(罪案)이 된 것은, 실상 시운의 어쩔 수 없었던 바였습니다. 기름진 고기는 사람마다 즐기는 바이지만, 오랫동안 앓는 사람에게는 비록 한 솥의 고깃국이나마 냄새만 맡아도 구역이 날 수 있고, 비록 풀 뿌리와 나무 열매라도 흔연히 입맛에 맞을 수 있습니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자라도, 한 곡조만 항상 부르면 듣던 좌중도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요,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고칠 줄 모르는 자를 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인정이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순의 정치가 없이는, 비록 소무(韶舞)가 있더라도 찬성하고 반대하는 틈에서 귀신과 사람이 화합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이것은 성인도 세상 운수의 순환에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운수를 논한 것이다. 무릇 글자가 생긴 지 오랜지라, 공자가 산정(刪定)하여 기술한 것이 곧 천지시운의 한 개 커다란 변화라 할 것이니, 공자도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공자가 돌아가신 뒤로부터, 백가(百家)의 말이 분분히 그 사이에 섞여 나와, 그 책들도 몹시 많아서 사람마다 제각기 마음대로 하여, 조그마한 아이들까지도 함부로 천성(天性)이니 인명(人命)이니 하는 이굴(理窟) 속으로 데려가곤 해서 육예(六藝)를 헌 갓처럼 보았기 때문에, 드디어 사도(師道)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가 없어지매, 옛날 사도(司徒)의 직분과 전악(典樂)의 관직은 헛된 자리만을 그대로 두고는 구차한 헛소리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음악은 천한 광대에게 돌아가고, 귀인 자제로서 총명하고 준수한 자는 헛되이 무작(舞勺)무상(舞象)의 나이를 지내고 보니, 비록 상현(上絃)과 하관(下管)에 팔음(八音)이 잘 맞는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 궁성우성이 되고, 어떤 것이 종()과 여()가 되는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음률을 좋아하여, 여염집에서 거문고를 타고 젓대를 부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부랑자(浮浪者)나 파락호(破落戶)를 면하지 못하고 보니, 자제들의 치욕으로 여기고, 부모들의 금하는 바가 되며, 향당(鄕黨)이 천히 여기는 바가 되어, 옛 성인들이 교육과 정치를 잘하는 데는 신기묘용으로 알던 것이 오로지 광대나 천인들의 책임으로 되어 버렸으니, 만에 하나라도 이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한다. 형산은,

 

옳은 말씀입니다. ()의 시절에는 국자(國子)에게 춤을 가르치는 데 대서(大胥)를 시켜서 춤추는 자리를 바로잡고 소서(小胥)를 시켜서 춤추는 항렬을 바로잡았으니, 이 법이 한의 시대까지 있었습니다. 천하고 낮은 자의 자식들은 종묘의 제사 때 춤을 추는 데 참가하지 못했고, 무릇 무생(舞生)은 모두 2천 석()으로부터 6백 석에 이르는 관내후(關內侯)나 대부(大夫)의 적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은 옛날이었으나, 그 선택하는 것이 일정했고, 교육을 위한 준비가 이같았습니다.”

한다. 나는,

 

“7()이니 12균이니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였더니, 형산은,

 

균이란 것은 가지런하고 고른 것으로, 말하자면 운() 자와 같습니다. 시를 짓는 자가 말하는 4(四韻)이니 8운이니 10운이니 하는 것과 같습니다. 7균이란 것은 7()의 한 운이요, 12균이란 것은 12율의 한 운입니다. 옛날에는 운이란 글자가 없었으므로 균()이라 했습니다.”

한다. 형산은 다시,

 

귀국에는 악경(樂經)이 있다더니 참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것은 떠돌아다니는 말입니다. 중국에도 없는 것이 어찌 외국에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세상에서는 악경도 진()의 불 속에 들어갔다고 한탄하지만, 제 생각은 중국에도 처음부터 악경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다. 나는,

 

사전(史傳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피해 올 적에 시()()()()과 의()()복서(卜筮)공기(工伎)의 무리 5천 명을 데리고 함께 동쪽으로 나왔다 하였으니, 6()는 모두 진 시황(秦始皇)의 화염 속에 타지 않고 우리나라에 유전(流傳)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웃으면서,

 

이것은 본래 중국에서 호기(好奇)하는 인사가 꾸며서 만든 말입니다. 풍희(馮凞) 고서세본(古書世本)도 이런 것으로, 소위 기자조선본(箕子朝鮮本)이란 본래 기자를 조선에 봉할 때부터 전해 오던 고문 서경(書經)이라 하여 제전(帝典 서경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으로부터 미자(微子 서경의 편명)까지에 그쳤고, 그 끝에는 다만 홍범(洪範 서경의 편명) 한 편을 붙였는데, 팔정(八政 홍범 중에 있는 말) 밑에는 52자를 더했습니다. 고정림(顧亭林) 일지록(日知錄)에서, 왕추간(王秋澗) 중당사기(中堂事記)에 의거하여 이미 위찬(僞撰)이란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한다. 나는,

 

제가 심양에 들어온 뒤부터, 수재(秀才)를 만나면 문득 우리나라에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기자가 조선으로 나올 때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혹은 위만(衛滿)이 가지고 나왔다고 하는데, 위만은 비록 저 스스로 상투를 묶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지만, 역시 저대로는 호걸로 자처하였을뿐더러, 그 무리 수천 명 중에는 역시 선비로서 경서를 안고 진()을 피하여 따라 나온 자가 없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인즉, 이치에 괴이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본래 무력을 숭상하여 다만 약탈을 좋아하고 보니, 설사 끼쳐진 경서가 있었더라도 이것을 받들어 소중히 여길 줄 몰랐을 것이고, 또 여러 차례 난리를 치른 나머지 우리나라에서 1천여 년 이래로 고문상서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선배 주석창(朱錫鬯)이 이미 변증한 바입니다. 주서(周書 서경의 편명) 공안국(孔安國)의 서문에, 성왕(成王)이 동쪽 이 한 점은 이() 자인데, 그가 나를 대하였으므로 이를 피했다. 대체 그는 호()()()() 등 글자는 모두 기휘하였다. 을 이미 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하니, 성왕은 영백(榮伯 ()의 종실이요, 정치가)을 시켜 숙신에게 보내는 칙서(勅書)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 전기(傳記)에 의하면, 해동의 여러 종족들로서 구려(句麗 고구려의 약칭)부여(扶餘)간맥(馯貊) 등은 무왕이 상()을 쳐서 이겼을 때부터 교통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는 주서(周書)의 왕회편(王會篇), ()()()() 같은 나라는 처음으로 보이지만 구려니 부여 같은 이름은 없다 하여 동국사(東國史)에서 인용하기를, ‘구려의 건국이 한 원제(漢元帝 유석(劉奭)) 건소(建昭) 2(B.C.37)이라면, 공안국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이 글을 쓸 때는, 구려와 부여는 중국과 아직 교통이 없었을 때이거늘, 더구나 주가 상을 처음 이겼을 때일까보냐.’ 했습니다. 주자는 사람이 8세가 되어서 모두 소학에 들어가면, ()()()()()()에 관한 글을 가르쳤다고 했지만, 이 이야기는 옛날 세상의 학교를 말한 것으로서 고대에야 이런 글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위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것은 예라는 것이요, 노래 부르며 춤추는 것은 악이요, 수도 이런 것으로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니, 6()를 가르쳤다는 것은 옳지만 6예의 글을 가르쳤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억설일 것입니다. 옛날 세상에는 과녁으로 밝히고 채찍으로 가르쳤을 따름이니, 공자가 말한 학예에 논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열다섯 살이 되면 천자의 맏자식과 중자(衆子)들을 비롯하여 공경(公卿) 대부(大夫)의 적자들과 민간의 준수한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하였으니, 이는 옳은 말입니다. 또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고, 자기 몸을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쳤다는 말은 후세의 억설일 것입니다. 6예를 강습하는 것이 곧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실증이므로, 옛날 사람은 실천궁행에 힘쓰고 보니 이런 것은 저절로 터득했을 것인데, 어쩌자고 15세 전에는 서둘러서 6예에 관한 글을 배우고, 15세 후에는 6예는 버리고 먼저 자기 몸을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알아야만 했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세(上世)에 어느 도학선생(道學先生)이 고을에 있는 학교나 서당마다 앉아서, 무슨 이학전서(理學全書)를 펴놓고 이것은 형이상(形而上)의 이론이요, 이것은 형이하(形而下)의 실천이라고 가르쳤겠습니까. 13세에 작()춤을 추고 15세에 상()춤을 추며, 20세에 대하(大夏 () 때의 무악(舞樂))춤을 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상고 세상에 있었던 소학대학의 과목 순서가 이러하였음에 불과했을 터인데, 후세 선비들은 상세에는 6예에 관한 글이 본래 없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입만 열면 제각기 진 시황을 욕하면서 불태우기 전에 있었던 완전한 경서가 모두 해외로 유락(流落)되었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구구(歐九)가 지었다는 일본도가(日本刀歌) 같은 것은 더구나 가소로운 일입니다. 대체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사물이란, 형상과 동작과 정리와 환경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이것을 6예에서 따져 본다면, 예란 것은 실천을 해야 되는 것으로, 무엇이나 실천을 할 때는 반드시 자취가 있는 법입니다. 활을 쏠 때도 제 몸을 바로잡은 후에야 화살을 놓는 법이니, 이것이 활쏘는 형식입니다. 말고삐를 깍지끼듯 잡고 두 마리의 말이 춤추듯 뛰는 것은 말을 타는 법식이요, 하나에 둘을 더하면 셋이 되는바, 이로부터 1천 년을 가도록 이렇게 계산하면 이것은 수학의 기술이요, 글씨의 육의(六義)에는 형상을 본뜻 상형(象形)이 가장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만은 내용은 있지만 형체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무릇 형체가 있다는 것은 굵직한 형적을 보인 것으로, 모두 언어로 형용할 수 있고 문자로 기록할 수 있지만, 형체가 없다고 한 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멀고 아득한 사이에서 깨우쳐 교양시킬 수 있고, 황홀한 속에서 활동을 합니다. 감추면 조용하고, 소리를 내면 화()하고, 소리가 아름답게 모일 때는 예절에 맞고, 소리가 적중하는 것은 활쏘기와 같고, 고르기는 말타기와 같고, 빌려 쓰기는 글씨와 같고, 숫자를 더하는 것은 수학과 같아서, 털끝 사이에서 감돌고 핏줄처럼 퍼집니다. 올 때에는 어렴풋하여 마중하고 싶고, 갈 때에는 묘연하여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더듬어도 얻을 것이 없고, 보아도 눈에 띄는 것이 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뼈까지 비통하도록 하고 내장까지 즐겁도록 하여, 가다가도 되돌아서서 못 잊는 것만 같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질 때는 갑자기 딴 생각이 나는 듯합니다. 몹시 맑고 향내도 없으며 지극히 가늘고 보니 그림자도 없으며, 매양 빽빽하게 틈도 없고, 몹시 크고 보니 바깥이 없으며, 화목하니 흩어지지 않고, 아담하니 빛깔도 없으며, 신비스러우니 마음도 없고, 현묘(玄妙)하니 말도 없는바, 대개 가볍고 민첩한 말로써도 이것을 형용할 수 없거늘, 하물며 문자의 조박(糟粕)으로써 될 것이겠습니까. 이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삼대(三代) 이래로 당초에 악경(樂經)이 없었다고 여깁니다.”

한다. 형산은 수없이 권주를 치고는,

 

먼저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악기(樂記) 한 편은 도리어 추솔함에 족할 것입니다. 악기란, 본래 한()의 선비들의 부랑(浮浪)한 글입니다.”

한다. 나는,

 

성인이 지은 책들은, 전성(前聖)의 도를 계승하고 뒤에 오는 학자들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공자가 위()로부터 노()에 돌아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을 때에, 어찌 홀로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저술한 것이 없을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그런 저술은 없습니다. 공자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았다는 것이 곧 악학(樂學)입니다. 음악의 본질은 시에 딸려 있는 것이요, 음악의 이용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언어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물정이 그릇되기 쉽고, 문자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천기(天機)가 얕은 것입니다. 무릇 음악이란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빠르지만 촉박하지 않고, 나타나지만 드러나지 않고, 깊지만 어둡지 않고, 완곡하지만 굳셀 수 있으며, 곧으나 굽힐 수 있으며, 부앙(俯仰)하고, 감개(感慨)하고, 희희(欷歔)하고 간절해서, 그것을 사람이 들으면 두렵고, 떨리도록 놀랍고, 죽은 듯이 텅 비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언어와 문자 밖에 따로 말하기 어려운 말과 글자 아닌 글자를 빌려서, 높게는 하늘에 배합하고 낮게는 땅에 배합하며, 굴신하기는 귀신과 배합하고, 순환하기는 세시(歲時)와 배합하며,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우로(雨露)의 덕택을 빌리지 않고, 사람을 일깨움에는 일월의 빛을 기다릴 것이 없으며, 사람을 고동(鼓動)시킴에는 바람과 우레처럼 급하지 않고, 점차 스며들되 강물의 범람과는 달라서, 목의 소리가 효제(孝悌)충신(忠信)예의(禮義)염치(廉耻)의 행실이 아니건만, 입으로 불고 손가락으로 타고 팔로 춤추고 발로 뛰는 것도 모두 사단(四端)이 유연(油然)하고 칠정(七情)이 한연(汗然)한 것은, 이 누가 시킨 것이겠습니까. 사람의 사지와 백체를 말없이 깨우쳐 준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개 상세(上世)에는 문서가 넓지 못하여, 항간에서 부르는 노래를 나라에서 세운 학교로 끌어들여 글자를 맞추어 구절을 만들고 이것을 악기에 맞추었으므로, 옛적에는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반드시 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이 곧 학문으로 되었었습니다. ()의 슬()과 회( 안회(顔回))의 거문고가 있는 데는 유상(遺像 공자의 초상)이 홀로 남아 있고, 청묘(淸廟 주문왕의 사당)에서 세 번 읊으면 문왕을 보는 듯하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5음이란 것이 소리의 문리(文理)라면, 6률이란 소리의 뜻일 것입니다. 몸은 각각인데, 똑같이 맞는 것은 소리의 덕행이요, 잡티 없이 순수하여 드러내는 것은 아()하다는 것으로, 아하다는 것은 소리의 광휘(光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특히 이같은 저작하지도 않은 책과 말도 없는 뜻에 유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해서, 성격이 좋은 자는 덕을 알게 되고, 성격이 나쁜 자는 음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인이 과거의 학문을 계승하고 뒤에 오는 후진들을 계시하는 뜻일 것입니다. 이래서 저는 악경(樂經)이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6예에, 음악에 관한 저서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들은 말입니다. 그러나 악보(樂譜)는 있는가요?”

하였더니, 형산은,

 

가석하게도 고보(古譜)는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것도 진()의 불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아닙니다. 수의 만보상(萬寶常) 악보 64권을 지어, 8음이 저마다 궁()에서 기조가 되는 법을 함께 말하면서, 줄을 갈고 지주(支柱)를 바꾸어 84 1 44율로 변하여 8 1백 소리에 맞도록 했더니, 당시의 사대부들이 이를 배척하여, 보상은 마침내 굶어죽으면서 격분한 나머지 그 책을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명의 가정(嘉靖) , 태복승(太僕丞) 장악(張鶚)이 지은 악서에는, 첫째로 대성악도보(大晟樂圖譜)라 하여 거문고 종류로부터 이하 여러 악기들의 보()를 하나씩 지었고, 둘째로 고아심담(古雅心談)을 지었으며, 같은 시대에 요주 동지(遼州同知) 요문찰(姚文察)이 저작한 악서로서 사성도해(四聲圖解)》ㆍ《악기보설(樂記補說)》ㆍ《율려신서보주(律呂新書補注)》ㆍ《흥악요론(興樂要論) 등이 있었고, 그 후에도 율려정의(律呂精義)》ㆍ《오음정의(五音正義)》ㆍ《악학대성지결(樂學大成旨訣) 등과 같은 책은 모두 성기(聲器)의 도수(度數)를 강론한 것입니다. 금보(琴譜)에는 조현(調鉉)농현(弄鉉)수법(手法)수세(手勢) 등이 있고, 당랑포선(螳螂捕蟬)이니, 평사낙안(平沙落雁)이니, 일간명월(一竿明月)이니, 감군은(感君恩)이니 하는 법은 모두 금사(琴師)의 구결(口訣)입니다.”

한다. 혹정은,

 

대개 음악이란 보()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귀신이 통할 만큼 조화가 붙으면 역경(易經)한 부가 곧 악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음악이란 것은 비결이 없을 수도 없으니, 사물에 따라서 뜻을 붙여 늘이면 우소(虞韶) 한 편도 저절로 천지 사이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글자를 포개어 써서 모두 음악의 비결로 삼았던바, 바람의 습습(習習)함과 비의 처처(凄凄)함과 사슴의 유유(眑眑)함과 새의 영영(嚶嚶)함과 기러기의 옹옹(嗈嗈)함과 여우의 유유(綏綏)함과 저구(雎鳩)의 관관(關關)함과 벌레의 훙훙(薨薨)함과 날개의 숙숙(肅肅)함과 사냥개의 영영(令令)함과 방울의 장장(將將)함과 얼음 뜨는 충충(冲冲)함과 나무 베는 정정(丁丁)함이 모두 인용하여 비결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중국의 악성(樂聲)은 한 글자가 한 율이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한 글자에도 청탁과 억양의 법이 있고 평()()()()의 다름이 있거늘, 하물며 노래란 영언(永言)이요, 영언을 읊는 것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공자가 백어(伯魚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에게 말한 주남(周南)소남(召南)을 하였느냐는 것도, 후세에서 논한다면 하루아침에 가히 욀 수 있을 것이요, 반드시 어진이에게 물어 볼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읽었느냐고 묻지 않고 했느냐고 물었으니, ‘한다는 것은 음악을 노래한다는 말입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것은 먼저 사람들이 하지 못한 말을 하신 것입니다. 옛적의 노래는 후세의 독서나 다름이 없습니다. 상세의 서적은 역경》ㆍ《서경》ㆍ《시경》ㆍ《예기에 불과하여 모두 천자의 도읍에 감추어 두었던 것이므로, 공자가 주에 가서 노담(老聃 ()의 후손)에게 예를 물었다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비록 공자 같은 성인으로서도 50세에 비로소 역경을 읽었다고 하여, 70명 제자들이 한번도 역경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고 언제나 시예를 논함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모두 입으로 전한 것으로 후세에서 날로 늘어가는 번문(繁文)과는 달라서, 당시에 배운다는 것은 제사지내고 인사하는 동안에 문관(文官)은 깃을 꽂고 무관(武官)은 도끼를 들고, 아침에는 거문고를 타고 저녁에는 노래를 했을 따름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의 예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으나 기( ()의 후손)로써 증험삼기 부족하고 은()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을 증험하기 부족한 것은 문헌이 부족한 탓이다.’ 한 것을 보아, 이런 예절도 흘러온 내력이 입으로 전해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이미 배운 것을 때로 복습한다는 말도 곧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백어에게 말씀한 다음 장에는 예()라 악이라 일렀지마는, 이 구절도 실상은 제사지내고 노래부르는 것 이외에 예악의 근본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의미를 일깨워 이르는 말투입니다. 관저장(關雎章) 같은 시는 그 시가 된 품이 친절하게 재삼 번복하여 지성에서 우러나오고, 애끊는 동정의 표정이 마음의 덕성과 사람의 도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대체로 가사의 뜻이 그러함이요, 즐거워도 음탕하지 않고 슬퍼도 몸을 상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그 성음이 그러했던 탓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태사(太師) ( 태사의 이름)가 처음 음악을 지도하게 되자, 관저의 조리 있는 음률이 귀에 출렁출렁 넘친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후세에는 시를 공부할 때 악기와 노래를 없애고는 네모난 책만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소리와 시가 둘로 갈리고 보면, 주자가 시경을 주석(注釋)하면서 정풍(鄭風)위풍(衛風)과 같은 시를 아주 음탕한 것으로 돌려 버렸으니, 이는 시의 음탕한 뜻만 깨닫고, 음곡은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남녀 간의 사사로운 즐거움은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바인데, 어찌 길가에서 자신들의 음탕한 행실을 큰 소리로 나타내겠습니까. 그렇다면,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대답할 제, 왜 정의 시를 멀리하라 하지 않고 다만 정의 소리를 멀리하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정의 소리로써 노래를 부르면, 표매(標梅)니 야균(野麕)이니 하는 것도 응당 음탕한 시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소리를 눈으로 감상할 것인가, 귀로 감상할 것인가. 학사나 대부들이 그 근원을 따져 음악을 만드는 원리만 찾아 내려고 헤매다가 드디어 음률을 눈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중세(中世)의 성인들은 귀로 익히는 데 힘썼으나, 오늘의 선비들은 일조에 이것을 눈으로 배우려 하여, 실지로 아침에는 줄을 타고 저녁에는 노래부르고 하는 데는 아무런 공부도 없이, 소리와 음률은 그만두고 한갖 책만 읽게 되었습니다. 이는 송의 시절에 모든 대유들이 입만 열면 음률을 말하였으나 실상 소리를 감상할 줄 모르고 보니, 도리어 악공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필경에는 고루한 데 그치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한 이래로 옛날 음악을 회복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좋은 시운(時運)이 돌아오더라도 음악을 지을 만한 사람이 나지 못할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어찌 그렇겠습니까. 주가 쇠할 때에, 문치의 폐단은 극심해지고 제후(諸侯)들은 강대해져서 서로 다투어 가면서 무력을 숭상함에 이르러, 태학관을 비워 놓고 제각기 자리를 깔고 장소를 나누어 기세를 높인 자들은 모두가 모사나 술객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백가(百家)의 학설이 종횡잡답하여 저마다 자기 학설을 옳다 하고 있었으니, 그 뜻인즉 필경 인의에 근본을 두고 유교의 학설을 빌려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학교를 떠나 한갓 분요하게 되고, 악은 함부로 입으로 떠들 뿐 몸으로는 익히지 않아, 의례에 관한 모습은 점차 눈앞에서 사라지고, 음악 소리는 날로 귀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질 수 없는 실물이 쓸데없는 도구가 되어 다시는 익힐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쓸데없는 학문으로써 이치만 밝히려는 자들의 탓입니다. 이러고 보니, 인정은 문식을 싫어하고 질박한 것을 생각하며, 화려한 것을 미워하고 실지를 취하고,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번거로운 것을 두고서 간략한 것을 찾게 되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자는 백성들로 하여금 암흑과 어리석은 구덩이로 몰아 넣었으니, 이는 반드시 옛날 성인의 정치의 요령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파묻는 짓이 진()에 있어서는 진실로 실책을 면할 수 없었으나, ()으로 보아서는 그대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또 유방(劉邦)과 항적(項籍)이 싸우던 사이에는, 천하의 젊은이들은 도탄 속에 시달리다가 다행히 칼끝에서 벗어나게 되어, 비로소 자기의 총명을 가지고 타고난 천품을 발휘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시운이 한번 돌아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형벌이란 세 가지 약법(約法)에 지나지 않고 보니, 법률이 가혹하지 못하여 자기 공로를 주장하던 장수들이 기둥을 치면서 취해 떠들었으므로, 신하들을 그다지 억제하지 않았던 터이요, 조정의 위에는 소박하고 말을 가벼이 하지 않는 장자들이 많아서 남의 과오를 말하기 부끄러워했으니, 풍속도 그다지 박하지는 않았고, 큰 부호들이 죽고 유리하게 되어 농토는 일정한 주인이 없어졌은즉, 천하의 밭을 비로소 한 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文帝)경제(景帝) 사이에는 이미 한이 일어난 지 40여 년이 되어 숨을 돌린 때라, 들에는 말을 길러 떼를 이루었고, 창고에는 곡식이 썩을 정도로 쌓이고 보니, 각 지방에는 학교를 세울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학사나 대부들은 박사(博士)의 집에 와서 머리를 숙이게 되매, 넉넉히 교육을 실시할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의 초년에는 책 끼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법률이 오히려 풀리지 않아 천하의 서적은 모두 정부에 몰려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관리만 믿을 뿐이요, 처사(處士)들은 감히 함부로 정치에 관한 일을 의논하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이것은 단사(段師)가 강()을 곤륜(崑崙)으로 보내서 10년을 두고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여 음악의 본령(本領)을 잊어버리도록 한 것이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세상에 드문 숙손통(叔孫通) 같은 이는 아첨배 속에 끼어 멀리 배척당했고, 나이 젊고 총명한 조조(鼂錯 한 무제 때 신진 정치가)와 가의(賈誼)  1 10여 명은 눈을 막아 다른 책은 못 보게 해서, 음악으로써 문학을 대신 삼고 노래와 악기로써 행실을 깨우쳐, 멀리는 임금에게, 가까이는 부모에게 수족(手足)을 놀리며 춤을 추어서 섬기게 한 후에, ()의 두 선비를 사도(司徒)의 벼슬에 임명하였다면, 반드시 예악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또 다시 두 마씨(馬氏)와 같은 이들을 학교에 벌여 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찬송의 노래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음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은 무슨 공을 기록하고 무슨 덕을 찬양할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당송의 제작(制作)이 전혀 공덕으로 표현할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두 마씨는 그들의 문사(文辭)만 취한 것일까요. 가의나 조조도 또한 두 마에게 견주어 어찌 못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비단 그 문장만 취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음악과 역학(曆學)이 모두 태사(太史)에게 속하여, 한의 율서(律書)에는 음악을 먼저 말하지 않고 군사를 말했으며, 군사 쓰는 법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군사를 쉬게 하는 법을 말했으니, 음악과 군사와는 그 거리가 멀지마는, 그러나 천하가 부유하고 백성이 즐겁게 놀 만하면 이것은 평화로운 근본이니, 대개 음악을 제정할 뜻을 깊이 알았다 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이 천하를 차지한 때가 그렇게도 성()했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선생은 이 무슨 말씀이시오. 어찌 선생은 그렇게도 한의 왕실을 작게 보시나요. 제 생각으로는 한 고조의 공로는 주 무왕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요, 그 덕은 주의 왕실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못한 것은 서백(西伯 주 문왕의 봉호)의 세가(世家)가 아니요, 주공 같은 숙부와 소공(召公) 같은 대신과 주()와 같은 8백 년의 천록(天祿)이나 공자 같은 유민(遺民)이 없었을 뿐입니다. 무릇 삼대 때에는 천자가 다스린 땅이 천 리를 넘지 못했고, 천백 제후들이 각각 땅을 나누어 다스리면서 대간(大姦)만 아니면 천자에게 관계가 없었습니다. 천자는 25년에 한 번씩 순수(巡狩)를 하고, 율도(律度)와 양형(量衡)을 옳게 만들 뿐이었고, 큰 역적이나 없으면 자기 처소에서 잠자코 두 손 잡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었으니,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상하가 유지하고 강약이 견제되어서, 소위 발이 백이나 있는 벌레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한 이래로 영토가 만 리나 되고, 필부(匹夫)와 필부(匹婦)의 기포(饑飽)한난(寒煖)이 모두 천자의 생각 하나에 달려 있어, 천자가 생각 한번만 잘못 가져도 나라는 흙처럼 무너지고 기와처럼 깨어져서 문지방 없는 문정(門庭)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부견(苻堅)의 강함과 두건덕(竇建德)의 꾀로도 천하의 절반을 얻었다가 일조에 자기 몸이 잡히게 되니 흥망이 덧없었습니다. 한 치 땅과 한 명의 백성이라도 반드시 천자 하나에 매이게 되었으니, 큰 운수가 아니고는 그 지위(地位)를 길이 누릴 수가 없고, 큰 제도가 아니고는 능히 진압할 수가 없었으니, 이와 같이 쉽고 어려움이 고금의 형세와 달랐습니다. 주가 일어날 때에 백이숙제의 앞에는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이 있었고, 백이와 숙제의 뒤에는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있었는데, 한의 왕실이 일어날 때에도 역시 이런 일이 있었는가. 그러고 보면 고제(高帝)는 공로는 컸지만 그 마음이 없었고, 문제(文帝)는 덕행은 있었지만 학문이 없었으며, 무제(武帝)는 의지는 있었지만 식견이 없었습니다. 가석한 일은, 미앙궁(未央宮)은 축대도 온전히 쌓지 못하고 지형도 바르지 못한 채, 흙 한 줌 돌 한 덩이도 공장이에게 맡기지 않고 함부로 몇 길 되는 흙담을 바삐 쌓아서 3백 년 동안을 우물쭈물 지탱해 왔으니, 비유하건대 시골 늙은이가 보리밥에 오이김치로 입에 맞게 배를 채워서 도무지 홍운사(紅雲社 유명한 요리집인 듯하다)의 풍미(風味)를 돌아보지도 못한 것과 같습니다. 삼로(三老) 동공(董公)이 여상(呂尙)보다 더 어질고, 호소(縞素)의 한 격문이 태서(泰誓)보다 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한의 공덕에 대한 선생의 말씀은 지나칩니다. 한 고제는 처음에 백성들을 건지겠다는 마음이, 술에 취하여 함부로 고함치던 김에 아방궁을 보고서 망녕되이 일어날 뜻을 세운 데 불과하니, 이같은 군도(羣盜) 중의 걸출을 어찌 주의 덕으로 일어난 데에 비하겠습니까. 만일 사적만을 가지고 공을 의논한다면, 고래로 난세(亂世)의 간웅(姦雄)들이 모두 후세에 할 말이 있겠지만, 천하가 이미 정해지고 보면 비록 한두 가지 표현할 것도 없지는 않으나, 이 또한 때를 따라 이해와 편의를 노린 데 불과한 것이니, 소위 신하로서의 의리로야 무엇이 귀하다 하겠습니까. 항우가 한을 위하여 의제(義帝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를 몰아내어 죽이게 한 것은 하늘이니, 만일 항우로 하여금 이러한 난처한 일을 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한왕(漢王)은 천하를 3분하여 그 둘을 차지하면서도 도리어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는 의제의 뜰에 옥()과 비단과 죽고 산 새짐승을 조공해야 했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청하건대 선생은 노여워 마십시오.”

한다. 나는 크게 웃고는,

 

저는 원래 노여워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한왕으로 하여금 의제를 섬겨 복종하게 해야 된다는 것은, 선생이 의리를 형식으로 따지는 말씀입니다. 삼대 이상은 불가불 덕을 의논해야 할 것이요, 삼대 이하로는 불가불 공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천명(天命)의 두터운 바로써 짧고 긴 것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니, 주와 한의 덕을 비록 같이 말할 수는 없지만, 만일 어리고 외로운 임금을 속여서 천하를 취한 데 비교한다면 어찌 천양의 차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역대 왕조의 길고 짧은 것은 공덕의 많고 적은 데 달려 있습니다. ()와 진()의 보복은 진실로 선배들의 의론이 있었지만, 송이 천하를 차지한 뒤에 몇 대가 못 되어 왕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천보(天寶) 이후로는 가위 나라는 나라가 아니요, 임금은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양한(兩漢)을 여기에 비교한다면, 애제(哀帝 유흔(劉欣))영제(靈帝 유굉(劉宏))로도 오히려 임금의 기율을 잡고 있었으며 강토도 나누어지지 않았으니, 이로써 나라를 얻은 것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데 따라 천명의 두텁고 두텁지 않은 것을 족히 증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의제가 있은 연후에 한()의 공덕이 더욱 빛났으니, 당시에 의제를 받들어 세운 것은 항씨(項氏)의 한때 권도에 불과한 것으로, 마침 거소노인(居巢老人)의 졸한 꾀에서 나온 것이 당연합니다. 풍진 속에 갑자기 만든 명분을 초매(草昧)의 영웅에게 의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복을 입고 성토(聲討)한 것은, 비유하건대 양쪽으로 갈려서 송사를 하는데 서로 억지 탈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한 고제가 수수(濉水)에서 패해 죽었던들, 강목(綱目)에서는 예대로 의제 원년에 한왕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항우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썼을 것입니다. 의리를 형식으로 따진다면, 무왕이 미자(微子)나 기자(箕子)를 받들어 세우고 자기는 물러나 번방에 처하였다면, 그가 은의 순수한 신하로서 해로운 것이 없고,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려 끝까지 천위(天威)를 두려워한 것은 경시(更始)의 어진 종실이 되는 데 해롭지 않았으리다. 청궁(淸宮 ()의 대궐 안채)을 차지하고 거처하는 것은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성제(成濟)에 옮겼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천천히 궁리한다면, 항씨의 집에서 높이는 의제가 한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의제를 강상(江湘) 백 리 되는 나라에 봉하고 한의 손님으로 여겼던들, 백 년에 제일 가는 성덕(盛德)으로 해로울 데가 없을 것이니, 의제를 처리함이 어찌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또 후세의 군자들은 의론을 세울 때 높은 체하여 한당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해서, 한의 덕을 낮게 여기고 이를 찬송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의 여러 대 임금들은 모두 대를 전해 가면서 효도와 우애를 했고, 사람을 쓸 때는 순량한 관리를 먼저 채용했으며, 백성을 지도하는 데는 농사에 힘쓰도록 장려하였는데, 이 세 가지는 천하의 근본되는 방침으로서 역대에 드문 바였습니다. 급암(汲黯)의 바른 것이나, 곽광(霍光)의 어린 임금을 도운 것이나, 자릉(子陵)의 고상한 것이나, 황헌(黃憲 동한의 고사(高士))의 모범될 만한 것이나, 제갈량(諸葛亮)의 올바른 출처라든지, 하간효왕(河間孝王)의 예절을 좋아함과 동평헌왕(東平憲王)의 착함을 즐긴 것은, 천하의 원기(元氣), 역대의 미치지 못할 바입니다. 무릇 이 여러 가지 사실은 질박하고 정직하고 충성되고 간절하고 참다운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의 덕을 행하고 사랑의 이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 음악을 만드는 실상으로서, 영가(詠歌)하고 감탄해서 대아(大雅) 같은 음악이 생겨도 부끄러운 빛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생령(生靈)들은 한()의 문화에 익어서 오래도록 생각에 남았으므로, 유연(劉淵 오호(五胡)의 하나로 전한(前漢)을 세웠다)은 이를 빌려서 안락공(安樂公)에 이어 종묘를 세웠고, 유유(劉裕 남북조의 송 무제(宋武帝))가 관()으로 들어가자 부로(父老) 십릉(十陵 한의 역대 왕릉)을 설명했고, 유지원(劉知遠 오대 때 한 고조(漢高祖))유엄(劉龑 남한(南漢)의 고조(高祖)) 들도 오히려 묘금도유()’ 자를 빙자해서 대호(大號)를 세웠으니, 이는 비록 전한(前漢)에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다른 왕실이 한번에 패해서 망한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한다.

이때 해가 이미 저녁때나 되었고, 종일 마신 술이 각기 10여 배()나 되어, 형산은 낮부터 의자 위에서 잠이 깊이 들었고, 혹정은 자주 칼을 빼어 양고기를 베어서 큼직하게 먹으며 자주 나에게도 권하는데, 나는 심히 그 노린내가 싫어서 떡과 과실을 먹을 뿐이었다. 혹정은,

 

선생은 제노 같은 큰 나라는 즐기지 않으십니까?”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큰 나라는 노린내가 나서요.”

하였더니, 혹정은 부끄러운 빛이 있었고, 나 역시 그 촉휘(觸諱)된 것을 깨닫고 즉시 먹으로 지우면서 이내 사과하기를,

 

저는 자공(子貢)처럼 사랑하진 않아도, 실정은 왕숙(王肅)과 같습니다.” ()의 왕숙(王肅)이 처음으로 위()에 들어갔을 때에, 양고기를 먹지 않고 늘 붕어를 반찬으로 하였다. 고조(高祖)가 묻기를, “양고기가 생선국에 비해서 어떠하냐.” 했더니,고려 왕숙은 대답하기를, “양고기는 제노의 큰 나라와 같다면, 생선은 주()()의 작은 나라와 같습니다.” 하였다. 팽성왕(彭城王) ()이 말하기를, “그대가 제노의 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주거의 작은 나라를 좋아한다면, 명일에는 주거 요리를 차려 봄세.” 하였다. 혹정이 내가 양고기를 먹지 못함을 보고서, 내가 작은 나라에 나서 큰 나라의 맛을 모른다고 놀리려고 한 것인데, 내가 큰 나라는 노린내가 난다고 대답하여 도리어 그들이 기휘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무안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였다. 혹정은,

 

고려의 공안(公案 고려에 대한 공문)을 공은 아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 지림(志林)에 실려 있는가요. 고려가 죄가 없는데 동파가 가장 미워했습니다. 고려 명신에 김부식(金富軾)과 부철(富轍 부식의 아우)이 있는데, ()를 사모하였으므로 그들의 이름을 지었으나, 동파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자첨(子瞻 소식의 자())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는, ‘고려가 조공을 드리는 것이 털끝만큼 있으니, 청하건대 서적을 사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책부원귀(冊府元龜)는 그때 나간 것인데, 귀국에서 널리 인쇄되지 않았는지요.”

한다. 나는,

 

동파의 상소는 실언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작은 나라가 중국을 사모해서 사간 것을 하필 이해로 따졌을까요.”

하였다. 혹정은,

 

그렇습니다. 송의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을 올려서 국신(國信 지금의 대사격)으로 삼아 하국(夏國)의 윗자리에 있게 하고, 인반(引伴)압반(押伴)을 고쳐서 접송(接送)관반(館伴)이라 불렀는바, 고려는 요()를 섬겼다가 금()에게 신하 노릇을 했기 때문에 중국의 예의를 많이 저버려서, 송 고종(宋高宗)은 심히 한스러워했습니다. 고려가 조공하던 길은 항상 명주(明州)명월(明越) 지방을 경유하므로 공급(供給)에 곤란했고, 중국에서 맞이하는 비용이 여러 만 냥으로 계산되어, ()( 강소 절강) 지방은 이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옛날 형남(荊南)의 고계흥(高季興)은 오대(五代) 시절의 절도사(節度使)로서, 당시에 한 개의 고을을 웅거한 자는 그 지방의 패권을 쥐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고씨는 이런 비용을 받고자 일부러 자신을 낮추어 외번(外藩)으로 자처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무뢰(高無賴)’라고 지목했습니다. 송 나라 시절에 회제에서도 역시 고려를 고무뢰라고 불렀으니, 대개 그 비용을 부담하기에 괴로웠던 탓이요, ()씨의 다섯 가지 해로움이란 말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사(御史) 호순척(胡舜陟)과 시어(侍御) 오불(吳芾) 등도 모두 이것을 말했으니, 비단 폐단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 허실을 탐지하는데, 실상 금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이것은 진실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사모하는 것은, 곧 그 천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21대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신라와 고려로 국호를 삼은 상하 수천 년 동안에 아직 한번인들 귀국의 국경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조선이 한()의 사신을 죽인 것은 곧 위만의 조선이요, 기자의 조선이 아니며, ()나 당()에 대하여 항거한 자는 곧 고씨(高氏)의 고구려(高句麗), 왕씨의 고려가 아닙니다. 중국의 사전(史傳)에는 문득 구() 자를 뽑고, () 변을 없애서 고려라고 통칭했으니, 이것은 왕씨가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있었던 이름인데, 앞뒤가 뒤바뀌고 명실(名實)이 혼돈되었으니 족히 한심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에 신라가 가장 먼저 당을 사모하여, 수로(水路)로 중국을 통하면서 의관과 문물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가위 이()가 변하여 중화가 되었습니다. 왕제(王制 예기의 편명)에는 동방을 ()’라고 불렀는데, 이는 뿌리박는다는 뜻이니, 곧 성품이 어질므로 생물을 좋아해서 만물이 땅에 뿌리박고 자라나는 것을 말한 것으로, 천성이 유순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여 5백 년 동안에 비록 왕위를 잇는 데 예닐곱 번 잘못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중국을 사모하는 정성은 바뀌지 않아서 몽매간이라도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좋은 글을 얻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고 받들어 읽다시피 하였습니다. 두 의원이 돌아올 때 가만히 음우(陰雨)의 경계를 가지고 온 일이 있었는데,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역사에 남김없이 기록되었으니, 이는 곧 중국에 마음을 주고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정성이 지극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고려의 본심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웃 나라의 간첩으로 의심했으니, 또한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건염 천자(建炎天子 건염은 남송 고종의 연호)는 설분에 대한 대의는 잃어버리면서 양응성(楊應誠)의 옹졸한 계책을 쉽게 믿고, 지름길을 빌려서 황제를 업고 도망치려다가 필경 장수 적여문(翟汝文)의 선견대로 맞았으니, 송고종 2년에 절강로마보도총관(浙江路馬步都摠管) 양응성(楊應誠)이 상주하기를, “고려를 거쳐 여진까지 가기에는 길이 심히 빠르니, 청하건대 제가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鷄林)과 약속을 맺어 두 황제를 맞아 오겠습니다.” 하매, 곧 응성을 임시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삼고 국신사(國信使)로 임하였더니, 절강 장수 적여문(翟汝文)이 말하기를, “만일에 고려가 금인(金人)들과의 관계로 거절을 하거나, 또 이를 기회로 길을 묻는다고 빙자하여 중국의 남방을 엿보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였다. 응성이 고려에 이르자, 과연 적여문의 말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드디어 약한 나라로 하여금 감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일러, 고려의 공안이 아니라 고려의 원안(寃案)이라 하고 싶습니다. 왕씨는 본래 거란 때문에 통로를 끊기고 중국에 다닐 길이 없어, 비록 들어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변경(汴京)과의 문화 교류는 앉아서 이룬 것이 아니라, 험한 먼 길을 가리지 않고 뱃길로 만 리를 왕래했으며, 신라가 다니던 옛 자취를 찾아서 무서운 고래와 악어를 밟으며 앞 배가 넘어지면 뒷 배가 잇달아, 만 번도 더 죽을 뻔한 고비를 무릅쓰고 성의를 다했던 것이니, 이것은 작은 나라로서의 떳떳한 직분이요, 어찌 이것을 큰 나라에 대하여 잇속을 노리는 짓으로 보겠습니까. 변변하지 못한 토산물품이야 천자의 뜰에 갖출 수 있는 것이 못 되지만, 그래도 옛날을 회상하면 인사 차리는 범절을 어김없이 하여 누르고 붉은 꾸러미를 보에 싸서 보내니, 이나마 중국을 사모하는 정성인데, 어찌 이것을 상국(上國)에 잘 보이려는 수단으로만 보겠습니까. 고려가 비록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하다 하지만, 기름진 곡식들은 족히 조상께 제사를 모실 만하고, 실과 삼은 족히 제복(祭服)을 갖출 만하며, 산에서 나는 쇠와 바다에서 구운 소금은 남의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지낼 수 있으니, 어찌 상국의 재물에 욕심을 내고 천자의 유사(有司)들에게 시끄럽게 했겠습니까. 송의 여러 황제들은, 관곡(館穀)이 허비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멀리 찾아온 수고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뜻은 다른 나라보다 더했습니다. 오래 전해 온 기자 같은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 하여 본래부터 예의의 나라로 불려서 대우가 심히 두터웠으니, 중국의 부유하고 포용력이 큰 것을 볼 수 있는지라, 어찌 사해의 부력을 가지고 한 개 사신의 비용을 아끼겠습니까. 천자의 높음으로 옥백(玉帛)의 모임에 이해를 따지겠습니까. 자첨은 학식이 천단(淺短)해서,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는 뜻을 알지 못하고, 갑자기 조그마한 이익과 다섯 가지 손해를 말하여 장사치들이 장단을 다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로써 장사꾼의 도()로 사방과 사귀어서 만국의 오는 정을 끊어 버렸으니, 저는 일찍이 소식의 상소문은 당시 조정의 수치라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 의논할 때는 대체로 어긋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당시를 헤아려 볼 때는 매우 심장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자는 촉당(蜀黨 소식의 당)과 낙당(洛黨 정호(程顥)정이(程頤)의 당) 때문에 극도로 자첨을 비방(誹謗)하여, 오히려 공문중(孔文仲)이 정자(程子 흔히 숙정자(叔程子) 정이(程頤)를 가리킨다)를 비방한 것보다도 심해서, 다섯 귀신 중에 괴수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진관(秦觀 촉당의 한 사람. 자는 소유(少游))이천(李薦 송의 문학가. 촉당의 한 사람)의 무리를 경솔하고 허탄한 도배로 지목하면서, 남헌(南軒)과는 교의가 친하다 하여 장준(張浚)을 추존했으니, 군자가 파당에 가담하지 않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선생은 주자의 정론(定論)을 끼고 소()를 배척하는 품이 오히려 주자보다도 엄하니, 고려를 위한 감정풀이를 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는다. 나도 웃으면서,

 

원통한 것을 호소했다고 하면 그럴 법하지만, 어찌 감정풀이라고야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애오라지 농담이었습니다. 천고에 공적이 옳은 일이나 공적이 옳지 아니한 일에는 인정이 대동(大同)할 터인즉, 누구로 하여금 권하게 하며 누구로 하여금 막게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웃으면서,

 

주자와 같은 당이라 함은 진실로 감심(甘心)하는 바입니다만, 대면해서 착오를 하시니 아직 지독한 촉당(蜀黨)인데요.”

하였다.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아닙니다, 아니어요. 민호(民皥)는 주자 문하의 자로(子路)입니다.”

한다. 나는,

 

성인의 문장(門墻)에까지 이른 모양이니 불러들이지요.”

했더니, 혹정은,

 

주자와 같은 당이면 세상에 드문 한아(漢兒)이겠군요. 한아가 문약(文弱)한 것은 주자의 책임에 불과합니다.”

한다. 나는,

 

주자가 전고에 의리를 지키는 주인인데, 의리가 이기는 곳에는 천하에서 더 강할 수 없겠거늘, 문약한 것을 무얼 걱정합니까.”

했더니, 혹정은 세상에 드문 한아란 구절을 찢어 화로 속에 던지면서,

 

일부러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하고는, 혹정은 또 말하기를,

 

홍간록(弘簡錄) 군서목(群書目)에는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高麗史)가 들어 있는데, 선배 고령인(顧寧人 고염무(顧炎武))은 역사가의 문체를 갖추었다고 칭찬했으나, 나는 아직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무석(無錫) 왕안(王晏)이 초출(鈔出) 고려기략(高麗紀略)에는, 외국의 국가 정통(正統)의 대의를 몰라 보고 고려 건국 초기의 사건에 관계된 연호를 쓰면서 첫머리에 역적 양( 오대의 후량(後梁). 주온(朱溫)이 세운 나라)의 가짜 연호를 걸었다고 이것을 배척했습니다.”

한다. 나는,

 

고려가 처음 일어난 것은 주량(朱梁)의 정명(貞明) 4(918)으로서, 중국에는 아직 일통(一統)한 천자가 없었으니, 외국의 연호를 무엇으로 붙이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어느 대인들 없으리오만, 한때나마 거짓으로 나라를 정한 것은 모두 선왕(先王)들을 본뜬 것으로, 주온(朱溫)의 내력은 순전한 도적입니다. 황제의 위를 찬탈(簒奪)한 순서로 황제의 정통으로 떠받든 자는 홀로 사마광(司馬光) 한 사람뿐입니다.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의 자)의 광명정대한 식견으로써 유 예주(劉豫州 유비(劉備)가 일찍이 예주목(豫州牧)이 되었다)를 제실(帝室)의 후손이라 했으니, 당시 견문의 확실한 것을 어찌 후세에서 도보(圖譜)만 따지는 데 비할 수 있겠습니까. 후세에 역사를 짓는 자는, 공명의 말을 믿지 않고 어디에서 대의를 취하였던가요. ()란 것은 남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도둑질하는 것을 말함인데, 공명은 제실의 종신(宗臣)으로서 자기 스스로 자기 집에 들어가서 다른 도적을 쫓아 잡으려던 것이니, 천하에 어느 사람이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제갈자(諸葛子 제갈량을 높이는 말)를 구()라고 한다면, 천하의 문헌으로부터 의() 자를 모두 깎아 버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의 말을 한 번 씹어 보자면, ‘소열(昭烈 유비의 묘호)은 비록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라 이르지만이라고 했는데, ‘비록 이르지만이란 말은 더구나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합니다. ‘비록 이르지만이란 말은 도청도설(塗聽途說)의 믿을 수 없는 말을 이름인데, 누가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극온이나 그런 말을 했겠습니다. 이변(李昪)은 본래 권신의 가짜 아들로서, 교묘하게 양( 양행밀(楊行密))( 서온(徐溫))의 기업(基業)을 빼앗고, 그 뜻을 얻은 후에는 또 찬탈한 자취가 부끄러워서 죽은 의부(義父)를 배반하고 조상을 문황(文皇)에게 의탁시켰으니, 천하의 이씨가 비단 농서(隴西)뿐이 아닐 터인데 널 앞에서 왕조를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막길렬(邈佶烈)도 이와 같은 자입니다. (사마광(司馬光))는 곧 역적 양()에게 정통을 내주면서 당당한 제실의 후손(유비(劉備))에게 비하였으니, 무슨 배짱으로 주씨(朱氏 주온(朱溫))로 당을 대신하여 온 사방이 산산이 흩어지게 했으며, 주사(朱邪)가 변경(汴京)에 들어온 것을 신( 왕망(王莽)의 나라)에 비교하여 국운이 끊어졌다고 한탄했겠습니까. 강목(綱目)에 연대를 쓴 예는 비록 대단히 정당한 자리에 섰다 할 수 있으나, 아직도 익도(益都 산동성 청주(靑州)) 종 상서(鍾尙書) 이름은 우정(羽正)이다. 가 그 권형(權衡)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정통론(正統論) 중에는, 준열하게도 사마광구양수의 잘못된 이론을 배척하면서 삼대와 한송을 정통이라 하였습니다. 바르고도 통일을 못한 자는 동주군(東周君 ()의 말주로서 혜왕(惠王)의 아들)과 촉한(蜀漢)의 소열제, 진의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 송의 고종이요, 통일은 했지만 바르지 못한 자는 진 시황진 무제(晉武帝 사마요(司馬曜))수 문제(隋文帝) 등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정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을 오랫동안 비워 둘 수는 없고 보니, 역사를 만드는 자는 할 수 없이 제()라고 하였습니다. 조비(曹丕 조위(曹魏)의 문제(文帝))와 왕망(王莽)과 주온(朱溫) 같은 자들은, 이미 의리도 바르지 못하고 형세도 같지 않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장주(長洲 강소성에 있다) 송실영(宋實穎)이 양()의 연호를 엄격하게 배척한 논평만 같지 못하니, 그는 왕망에게 ()’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안녹산(安祿山)에게 ()’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누가 전충(全忠 주온의 또 다른 이름) 같은 흉악한 역적에게 양의 이름을 줄 것입니까. 하물며 당시에 진()()()() 등의 여러 왕들이 격문을 돌려 당을 회복하고자 하였던들 당의 왕실이 망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두 천우(天祐 당 애제(哀帝) 때의 연호)란 연호를 20년이나 오래도록 붙여 왔으니 당의 왕조는 아직 존속했던 것입니다. ()은 비록 당이 사성(賜姓)한 나라지만, 그는 제후들 중의 종맹국(宗盟國)으로서 자기 임금의 원수요, 나라의 역적을 자기 손으로 베어서 소탕했은즉, 세상에서 일찍이, “전충(全忠)의 양()이 없었다.” 운운했습니다. 당시 외번(外藩)들은 중국에서 열립한 임금의 진위를 알지 못하고, 혹은 중국을 사모하는 극진한 정성으로나, 또는 자기 나라의 국경을 방위하기 위해서나, 대국과 결탁해서 우리를 진압시키기 위하여 굽실거리면서, 외번으로 자처하고 그 연호를 받드는 것도 이치에 괴이할 것이 없지만, 다만 후세에 역사를 쓰는 자로서 의논한다면, 진위가 밝아지고 득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땅에서 문헌들이 해마다 압록강을 건너서, 교화는 태사(太師 기자(箕子))를 따르고 학문은 자양(紫陽 주자의 별칭)을 표준하여 예의의 나라라 일컬어 오는 터에, 천 년의 춘추 대의는 어진 자의 책임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비록 온공(溫公 사마광의 봉호) 같은 어진 이로서도 출척(黜陟)하는 일에는 오히려 이런 과실이 있었거든, 하물며 외국이겠습니까. 저의 나라는 비록 한 집이나 다름없지만, 오히려 중국에게는 벽을 뚫고 불빛을 빌리며 얼굴을 가린 채 더듬어 찾는 것과 같거든, 하물며 식견이 여기에 이르지 못함이겠습니까. 이제 선생의 양()을 배척하는 의론을 들으니, 모르는 사이에 상쾌해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따름입니다. 그런즉, 고려사의 연호는 마땅히 어디에 매어야 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당시의 진()()()의 예로 상고해 보면 정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더니, 드디어 일어나서 탁자 위에 있는 조그만 가죽 상자를 열었다. 형산은 코를 우레처럼 골면서 가끔 머리로 병풍을 건드린다. 혹정은 웃으면서 높은 소리를 질러 읊기를,

 

목침십자열(木枕十字裂).”

하니, 형산은 코 골던 것을 즉시 그쳤다가 이내 또 시작한다. 나도 이에 큰 소리로,

 

목침십자열.”

하였더니, 혹정은 손에 조그만 책을 들고 눈을 크게 뜨더니,

 

알아듣는군.”

하니, 그것은 내가 능히 한어(漢語)를 안다는 말이다. 작은 책은 과거보는 사람들이 갖는 역대 기년(紀年)을 적는 책이다. 혹정은 후당(後唐) 장종(莊宗)의 연대를 훑어 본 뒤에, 동광(同光) 원년(923) 갑신(甲申 계미(癸未)의 그릇된 것)으로부터 거꾸로 세어 양()의 균왕(均王 양 말제(末帝)의 봉호) 우정(友貞 균왕의 이름)의 정명(貞明) 4(918)을 가리켜,

 

고려의 건국은 당의 소선제(昭宣帝) 천우(天祐) 15(918) 무인(戊寅)인 듯합니다. 천우 4(907)에 전충(全忠)이 황제를 폐하여 제음왕(濟陰王)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해 무진(戊辰)에 죽음을 당했으나, ()의 정삭(正朔)은 오히려 당시의 제후들에게 쓰인 지 16년이 되었으니, 이것은 역시 공()이 건후(乾侯 하북성(河北省)의 지명)에 있다는 뜻입니다.”

한다. 나는,

 

지금 해내(海內)의 학문으로 주()() 중에서 어느 편을 숭상하나요.”

하였더니, 혹정은,

 

모두 자양을 존숭합니다. 모신(毛甡)과 같은 사람은 글자마다 주자를 반박했지만, 그는 천성이 왕법(王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주자를 반박하는 것이 옳은 데는 적고 억지가 많았는데, 그 옳다는 것도 반드시 유문(儒門)에 공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의 억지는 도리어 세도(世道)에 해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죽이려 하는 자가 도리어 지기(知己)가 되고, 때리지 않으면 정을 알지 못한다 하여, 조사(祖師)를 욕하는 것은 도리어 그 근본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 주자를 반박한 것은 비록 공신(功臣)으로 자처하지만, 때리면 피를 보는데야 누가 그의 사랑을 믿어 주겠습니까. 주자의 문생들은 이웃을 맺었으므로, 마땅히 부득불 바삐 임안부(臨安府 남송의 수도)로 가서 한 소장(訴狀)을 내니, 포염라(包閻羅)는 곡직(曲直)을 불문하고 모신을 잡아다가 먼저 죽비(竹篦) 30대를 때렸으나, 모신은 참고 이내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으며 자꾸만 더 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포공(包公)은 크게 노해서 다시 건장한 자들을 불러 더 사납게 때렸으나, 모신은 마침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모신은 평생에 자기를 알고, 자기를 죄줄 점이 모두 주자를 공박한 데 있다는 것을 자인(自認)했습니다. 주자는 홀로 춘추에만 손을 대지 않았으니, 이는 통달한 사람이나, 보망(補亡) 한 장으로 인하여 소아배(小兒輩)의 허다한 말썽이 되었고, 소서(小序)를 모두 깎아 버려서 독한 노권(老拳)의 맛을 본 셈입니다. 참동계(參同契) () ……  날이 저물어 파해 일어서느라고 끝을 맺지 못했다.

 

[D-001]무엇이 …… ()인지 : 십이율(十二律)의 하나.

[D-002]기장 …… 재고 : 중국 고대에서는 악기의 일정한 치수를 극히 정확하게 맞추기 위하여 관악기의 빈 곳의 적()을 헤아릴 때는 천연 산물로서 그 크기가 가장 고르고 변화가 없다고 치는 검정 기장 낱알로써 척도의 표준으로 삼았다.

[D-003]갈대 …… 후기법(候氣法) : 후한서(後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나오는 후기할 때에 쓰는 것.

[D-004]()() : 우순(虞舜)과 은탕(殷湯) 때의 음악 이름.

[D-005]()() : ()의 폭군.

[D-006]()() : 상은 상간(桑間), 복은 복상(濮上). 시경에 나오는 음탕한 노래.

[D-007]모란정(牡丹亭) : 명의 탕현조(湯顯祖)가 지은 전기소설(傳奇小說)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

[D-008]기조(起調) : 일정한 율에 맞추어 음이 처음 시작되는 음계.

[D-009]여와씨(女媧氏) : 뱀의 몸에 사람 머리를 한 전설상의 인물. 중국 고대에 생황(笙篁)을 지었다고 함.

[D-010]왕영언(王令言) : 수 양제(隋煬帝) 때의 저명한 음악가.

[D-011]수 양제(隋煬帝) …… 알았다 : 수 양제의 성명은 양광(楊廣). 그 뒤 과연 강도(江都)에서 시해당했다.

[D-012]유송(劉宋) : 유유(劉裕)가 창건한 남송(南宋).

[D-013]진서(晉書) 악지(樂志) : ()의 방교(房喬) 등의 저.

[D-014]백부무(白符舞) : 마상(馬上)에서의 무악(舞樂).

[D-015]진씨(晉氏) …… 파천(播遷) :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서진(西晉)이 낙양(洛陽)에서 건강(建康)으로 옮겼다.

[D-016]리마두(利瑪竇) : 1580년 중국에 온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릿치.

[D-017]()() : 우순(虞舜)과 은탕(殷湯) 때의 음악.

[D-018]한번 …… 잊어버렸다 : 논어에 나오는 말.

[D-019]주지(酒池)포림(脯林) : 폭군 은주(殷紂)의 고사. 술 못과 고기 숲.

[D-020]방패를 …… 둘러섰다 : 서경(書經) 무성편(武成篇)에 나오는 구절. 무왕이 무력으로 은을 쳐서 평정했음을 말한 것이다.

[D-021]()과 마() : 송의 학자요, 정치가. 범은 범중엄(范仲淹), 자는 희문(希文). 마는 사마광(司馬光), 자는 군실(君實).

[D-022]소소(素韶)의 구성(九成) : 소소는 곧 소악(韶樂)인데 그 풍류가 아홉 번 마치자 봉황이 와서 춤추었다 한다.

[D-023]채씨(蔡氏) : 송의 학자 채원정(蔡元定). 자는 계통(季通).

[D-024]시동(尸童) : 중국 고대 신주(神主)가 이룩되기 전에는 제사에 동자를 신 대신으로 앉혔다.

[D-025]()의 계() : ()의 아들로서 천자가 되었다.

[D-026]고고(呱呱)의 소리 : 사기(史記) 중에서 나오는 말.

[D-027]몇 일() : 대열(隊列). ()의 제도에 천자는 팔인 팔열의 팔일이요, 제후는 육인 육열의 육일.

[D-028]구려무(句麗舞) : 고구려의 춤. ‘()’의 본음은 였으나 뒤에 변해서 가 되었다.

[D-029]대성악(大晟樂) : 송 신종(宋神宗) 때 대성부(大晟府)에서 만든 음악.

[D-030]팔음(八音) : ()()()()()()()().

[D-031]몽금척(夢金尺) : 조선 때 궁중(宮中) 연회에 쓰던 무악의 명칭.

[D-032]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 조선의 창업을 칭송한 아유 작품. 최초에 한글을 이용하였으므로 귀중히 여긴다.

[D-033]우조(羽調) : 우리 옛 음악에서 곡조의 웅장하고 장쾌한 성질을 띤 장조(長調) 계통이다.

[D-034]() : 우리 음악에서의 음정(音程).

[D-035]계면조(界面調) : 우리 음악에서의 우아한 곡조 또는 슬프고 애끊는 듯한 느낌을 띤 비곡 계열로 양악의 단조(短調)에 해당한 것.

[D-036]찬관(贊官) : 의례를 집행할 때 창홀(唱笏)하는 관원.

[D-037]창읍왕(昌邑王) : ()의 폐왕(廢王) 유박(劉髆). 창읍은 봉호.

[D-038]신 창() : 장창(張敞). 당시의 대장군.

[D-039]임자(任子) : 한의 제도에 이천석(二千石)의 벼슬 이상으로써 삼년의 임기가 차면, 자기와 자산 등급이 같은 사람의 아들 한 사람을 추천하여 낭()을 삼았는데 이를 임자라 하였다.

[D-040]() : () 임금 때 의례를 맡은 신하.

[D-041]계찰(季札) : 전국 때 오()의 어진 왕자로서 노()에 초빙을 받아서 주()의 고악을 감상하였다.

[D-042]도적이 …… 부끄러워하며 : 출전 미상.

[D-043]매양 …… 의심합니다 : 항적(項籍)이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강동으로 갈 때에 전부에게 길을 물었는데, 전부가 일부러 속여서 왼편으로 가게 하였다.

[D-044]수풀 …… 이야기하고 : ()의 공규(孔珪)가 숲을 깎지 않고 개구리 소리로써 양부(兩郛)의 고취(鼓吹)를 대신한다 하였다.

[D-045]대들보 …… 회여지지(誨汝知之) : 논어,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시지지야(是知之也)’가 제비가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와 같다는 것이니 이는 설부(說部)에 나오는 왕안석(王安石)의 말이다.

[D-046]감주(甘酒) …… 금황(禽荒) : 이 네 가지는 모두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나오는 말들. 감주는 아름다운 술이요, 준우는 집을 굉걸하게 짓는 것이요, 색황은 여색에 음탕함이요, 금황은 사냥에 방탕하는 것이다.

[D-047]정 세자(鄭世子) : 명의 정공왕(鄭恭王)의 세자 재육(載堉).

[D-048]숭녕 …… 있으랴 : 주자가 당시 조정의 예악을 맡은 자들을 평한 말.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나오는 구절.

[D-049]악호(樂戶) : 죄인의 처자를 적몰하여 음악을 전공하는 악공으로 삼은 집안.

[D-050]바람은 …… 않았다 : 순의 지치(至治) 시대의 일. 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

[D-051] …… 있다 : 논어에 나오는 구절.

[D-052]정강(靖康)의 화 : 정강은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정강 2(1126) ()이 송을 쳐들어와 송은 강남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D-053]청황종(淸黃鍾)청림종(淸林鍾) : 음명 위에 청을 붙일 때는 표준 옥타브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을 표시하는 말이다.

[D-054]사청성(四淸聲) : 표준 옥타브보다 한 옥타브 높은 상황종(上黃鍾)으로부터 시작하여 넷째 협종(夾鍾)에 이르기까지 네 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D-055]진씨(晉氏) …… 무너지고 : 서진(西晉)이 강남으로 쫓겨가자 강북에는 다섯 종족의 오랑캐가 서로 다투어 16개국이 명멸했다.

[D-056]요진(姚秦) : 요씨(姚氏)에 의해 건국된 후진(後秦). 부진(苻秦)과 구분하여 요진이라 한다.

[D-057]유흠(劉歆) : 서한(西漢)의 한학자. 흠은 이름이요, 자는 자준(子駿).

[D-058]순욱(荀彧) : 진의 학자. 욱은 이름이요, 자는 자증(子曾).

[D-059]조충지(祖冲之) : 남제(南齊)의 학자. 충지는 이름이요, 자는 문원(文遠).

[D-060]신망(新莽) : 왕망(王莽)이 세운 나라 신().

[D-061]우문씨(宇文氏) …… 창건하자 : 우문씨는 북주를 세우고 스스로 주()의 종실이라 일컬었다.

[D-062]주무제(周武帝) : 북주(北周) 우문옹(宇文邕). 무제는 묘호.

[D-063]이악(彛樂) : 동이(東夷)의 음악. 연암은 흔히 이()를 이()로 썼다.

[D-064]하타(何妥) …… 우홍(牛弘) : 모두 수의 학자. 하타의 자는 서봉(棲鳳), 소기의 자는 백니(伯尼), 우홍의 자는 이인(里仁).

[D-065]주안(朱雁) : 한 무제(漢武帝)가 동해에 거둥하여 기러기를 얻고서 지은 노래.

[D-066]천마(天馬) : 한 무제 때에 악와(渥洼)에서 말이 나왔으므로 이 노래를 지었다.

[D-067]고창(高昌) : ()의 때 신강 지방에 있었던 나라.

[D-068]소륵(疏勒) : 역시 신강 지방에 있었던 나라.

[D-069]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 연출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는데 이것은 악원(樂苑)에서 나오는 말이다. 악원에 예상우의곡은 개원(開元) 연간에 서량부절도(西凉府節度) 양경술이 바쳤다 하였다. 그러나 당일사(唐逸史)에는 나공원(羅公遠)이 현종과 함께 월궁에 이르렀을 때 선녀가 예상과 우의를 입고 광정에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악공을 시켜 이 곡을 지었다 하였고, 또 일설에는 현종이 엽법선(葉法善)과 더불어 월궁을 구경하고 이 곡을 지었다 하였다.

[D-070]화현(和峴) : 송대의 학자. 자는 회인(晦仁).

[D-071]현덕승문(玄德升聞)의 춤 : ()의 숨은 덕행이 요()에게 달렸다는 것을 모방하여 지은 춤이다.

[D-072]현덕승문이라면 …… 있었습니까 : 빈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하였으므로 천자의 위를 순에게 전하매 순은 단주를 국빈(國賓)의 예로써 대접하였는데 송 태조는 누구에게 전위를 받은 것이 아닌 만큼 이 현덕승문의 춤이란 적당하지 않다는 것.

[D-073]송의 도군(道君) : 송 휘종(宋徽宗)의 스스로 일컬은 이름.

[D-074]용면(龍眠) : 송의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 용면거사(龍眠居士). 용면은 산 이름.

[D-075]아름다운 …… 보는 듯이 : 시경(詩經) 기욱편(淇澳篇)에 나오는 말.

[D-076]굽어진 …… 듣는 듯이 : 시경 권아편(卷阿篇)에 나오는 말.

[D-077]상당(上黨) …… 찾는다든지 : 산서성 상당 고을에 있는 산으로서, 악기와 수척을 맞추는 데 쓰는 검정 기장이 난다 한다.

[D-078]진회(秦淮) …… 한다 : 강서성에 있는 강인데, 아름다운 갈대의 소산지.

[D-079]시경 …… 생각 :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

[D-080]유천(維天) : 주 문왕(周文王)에게 제사하던 노래의 한 구인 유천지명(維天之命). 시경의 주송(周頌)에 나온다.

[D-081]집경(執競) : 주 무왕(周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에게 제사하던 노래의 한 구인 집경무왕(執競武王). 시경 주송에 나온다.

[D-082]칙천(勅天) : ()의 노래 중의 한 구로 칙천지명(勅天之命). 서경 익직편(益稷篇)에 나온다.

[D-083]갱재(賡載) : 계속해서 이룩한다는 뜻인데, 고요(皐陶)가 순의 노래를 계속하여 화답한 노래. 서경 익직편에 나온다.

[D-084]안세(安世)방중(房中) : () 방중(房中)에서 제사하던 노래의 일종.

[D-085]주안(朱鴈) …… 삼조(三祖) : 한 무제(漢武帝) 때 지은 악장(樂章).

[D-086]서산(西山) 채씨(蔡氏) : 채원정(蔡元定). 서산은 호.

[D-087]주공이 …… 있었고 : 주공은 노를 다스리고, 태공은 제를 다스릴 때, 주공은 문치(文治)를 주장하였으나 후손이 문약(文弱)에 빠질 것을 예측했고, 태공은 무치(武治)를 주장하였으나 후손이 무단(武斷)이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D-088]() 춤을 …… 감화되었다 : 시경에 나오는 구절.

[D-089]정의 …… 버리라 : 논어에 나오는 구절.

[D-090]사도(司徒) : () 시대에 교육을 맡았던 관리.

[D-091]전악(典樂) : 주 시대에 음악을 맡았던 관리.

[D-092]무작(舞勺)무상(舞象) : 주공(周公)이 지었다는 춤으로 어려서는 무작을 익히고, 장성해서는 무상을 익힌다고 했다.

[D-093]대서(大胥) …… 바로잡았으니 : () 시대에 음악을 맡은 관원.

[D-094]7() : ()()()()()변궁(變宮)변치(變徵).

[D-095]() : ‘수택본에는 으로 되었다.

[D-096]풍희(馮凞) : 후위(後魏)의 정치가. 희는 이름이요, 자는 진창(晉昌).

[D-097]왕추간(王秋澗) : ()의 학자 왕운(王惲). 추간은 호요, 자는 중모(仲謀).

[D-098]주석창(朱錫鬯) : 주이준(朱彛尊). 석창은 그의 자.

[D-099]공안국(孔安國) : 한의 저명한 학자. 안국은 이름.

[D-100]동쪽 : 여러 본에 모두 로 되어 있으나 그릇된 것이므로, 여기서는 수택본을 따랐다.

[D-101]숙신(肅愼) : 고조선(古朝鮮)과 병립했던 북방족.

[D-102]() …… 가르쳤다 : 대학장구 서(大學章句序)에 나오는 한 절.

[D-103]학예에 논다 : 논어에 나오는 구절.

[D-104]열다섯 …… 가르쳤다는 말 : 대학장구 서문에 나온다.

[D-105]구구(歐九) : 구양수(歐陽脩). ()는 형제의 순서. 유분(劉蕡)이 일찍이 구양수를 평하기를, “아름다운 구구가 글을 많이 못 읽은 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D-106]빌려 …… 같고 : 육서(六書) 중에 가차(假借)의 법이 있는데, 예를 들면 장() 자는 길다는 뜻을 빌려서 어른의 뜻으로 쓰는 것.

[D-107]()의 슬()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 그는 슬을 잘 탔다. 논어에 나오는 말.

[D-108]주남(周南) …… 하였느냐 : 논어에 나오는 한 절.

[D-109]() …… 탓이다 :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

[D-110]태사(太師) …… 넘친다 :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

[D-111]표매(摽梅)니 야균(野麕)이니 : 시경의 장명(章名).

[D-112]세 가지 약법(約法) : 유방이 관중에 들어왔을 때 진()의 부로들과 세 가지의 조항만을 정하고, 나머지 가혹한 법은 모두 제거하였다.

[D-113]책 끼고 …… 법률 : 진 시황(秦始皇)이 지은 협서율(挾書律).

[D-114]단사(段師) …… 한 것 : 출전 미상.

[D-115]숙손통(叔孫通) : ()의 초기에 국가의 의례를 제정한 유학자. 숙손은 성이요, 통은 이름.

[D-116]두 마씨(馬氏) : 저명한 문학자인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사마천(司馬遷). 사마는 성, 상여천은 이름.

[D-117]두건덕(竇建德) : ()의 말기에 하북 지방을 근거하여 장락왕(長樂王)이라 자칭하였다.

[D-118]중옹(仲雍) : 곧 우중(虞仲). 형 태백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가서 그의 아우 계력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계력은 문왕의 아버지.

[D-119]관숙(管叔) : 문왕의 셋째 아들 희선(姬鮮)의 봉호. 주공과 성왕(成王)의 사이를 이간하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D-120]채숙(蔡叔) : 문왕의 다섯째 아들 희도(姬度)의 봉호. 역시 관숙과 동조하다가 추방을 당했다.

[D-121]삼로(三老) : 한의 제도에 백 리에 한 정()을 두고, 십 정에 한 향()을 두어서, 향에는 삼로를 두어 교화의 사업을 맡게 하였다.

[D-122]동공(董公) : 삼로의 한 사람으로서, 한 고조가 낙양 신성(新城)에 갔을 때에 서로 만났다. 동은 성이요, 공은 봉호.

[D-123]호소(縞素)의 한 격문 : 호소는 백색의 상복. 한 고제가 항적을 치러 신성으로 출병하였을 때, 동공이 길을 가로막고 명분이 없는 군사를 낼 수 없다고 하매, 고제는 그의 말에 의하여 항적이 의제(義帝)를 죽인 죄를 문책하여, 군사들에게 흰 상복을 입히고 제후들에게 격문을 돌려 항적을 칠 것을 호소하였다.

[D-124]태서(泰誓) : 서경의 편명. 주 무왕이 은()을 치러 맹진(孟津)에 이르러서 군사와 제후들에게 서약한 글.

[D-125]항씨(項氏) : 항량(項梁)항적의 숙질.

[D-126]거소노인(居巢老人) : 항적의 모사 범증(范增). 거소는 그가 살고 있던 곳이요, 노인은 그가 나올 때에 벌써 7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D-127]미자(微子) : 주왕(紂王)의 서형. 미자는 봉호.

[D-128]경시(更始) …… 않았으리다 : 경시는 광무제의 족형으로 앞서 황제를 칭한 회양왕(淮陽王) 유현(劉玄)의 연호. 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경시의 부하로 있을 때에 경시가 그의 형 연()을 죽였는데, 유수는 상복을 입지 않고 태연하였으나, 잠자리에 들 때는 그 형을 생각해서 울었다.

[D-129]청궁(淸宮) …… 옮겼습니다 : 성제는 위의 신하로서 사마소(司馬昭)에 붙어 위의 마지막 황제 조모(曹髦)를 죽였는데 사마소는 정권을 전횡하여 대궐에 웅거하고서 황제를 죽인 죄를 성제에게 돌렸다.

[D-130]안락공(安樂公) :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이 위()에게 망한 뒤의 봉호.

[D-131]큰 나라는 …… 나서요 : 큰 나라를 양고기에 견준 고사도 있었거니와, 큰 나라가 노린내가 난다는 말은, 한족이 북방 호족을 노린내가 난다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청에게 통치를 받는 대국은 노린내가 난다고 풍자하는 의미이다.

[D-132]책부원귀(冊府元龜) : 송의 왕흠약(王欽若)양억(楊億) 등이 칙명을 받아서 엮은 것인데, 중국 역대 군왕의 사적을 서술하였다.

[D-133]하국(夏國) : 송의 초기에 조원호(趙元昊)가 세운 나라.

[D-134]인반(引伴)압반(押伴) : 둘 다 외국 사신을 인도하는 자.

[D-135]명주(明州)명월(明越) : 둘 다 지금 절강성의 해안 지방.

[D-136]음우(陰雨) …… 온 일 : 송 휘종 때에, 고려가 송에 의원을 구하매 황제가 의원 두 명을 보냈는데, 그 둘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편에, 실상은 고려가 의원을 구함이 아니라, 송은 당시에 거란보다도 오히려 여진을 경계하여야 된다고 비밀의 실정을 보고하게 한 사실이 있었다.

[D-137]지름길을 …… 도망치려다가 : 당시 금에 포로가 된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두 황제를, 몰래 고려를 통해서 구출할 계책을 세웠다.

[D-138]송 고종 …… 한다 : 이 원주는 모든 본에 다 이 편의 끝에 있었으나, 여기에다 옮기는 것이 옳을 듯하다.

[D-139]공문중(孔文仲) : 촉당의 한 사람으로, 왕안석(王安石)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

[D-140]남헌(南軒) : 주자의 친우인 장식(張栻). 남헌은 호, 자는 경부(敬夫).

[D-141]장준(張浚)을 추존했으니 : 주자가 장식과 지극히 친한 사이이므로 장준의 행장을 지었는데, 장준은 소인이라는 명을 들었으므로 주자가 그 뒤에 스스로 후회하였다.

[D-142]성인의 …… 불러들이지요 : 자로의 학문이 공자의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으나 그 문에까지는 왔다는, 공자의 말을 이용하여 혹정을 조롱하였다.

[D-143]() :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조위(曹魏)를 정통으로 하고, 촉한(蜀漢)이 위를 쳤을 때에 그를 침략적인 ()’라 하였다.

[D-144]이변(李昪) : 당의 말년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오왕(吳王) 양행밀(楊行密)에게 양자로 들었다가, 뒤에는 후임 오왕이 된 서온(徐溫)에게 양자들어, 서지고(徐知誥)의 이름으로 뒷날 남당(南唐)의 임금이 되었다.

[D-145]문황(文皇) : 당 문종(唐文宗). 이변이 남당을 창건하고 당조(唐朝)를 정통으로 계승한다 하여 성명을 변하였다.

[D-146]막길렬(邈佶烈) :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별칭. 이극용(李克用)의 양자.

[D-147]주사(朱邪) :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본성(本姓).

[D-148]송실영(宋實穎) : 청 세조(淸世祖) 때의 학자. 자는 기정(旣庭).

[D-149]() : 당의 말년에 이극용(李克用)을 봉했던 나라 이름.

[D-150]제후들 …… 소탕했은즉 :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이 양()을 정복하였다.

[D-151]목침십자열(木枕十字裂) : 목침이 십() 자로 쪼개어진다는 뜻.

[D-152]알아듣는군 : 혹정은 물론 한음으로 읊었겠고, 연암도 역시 한음으로 읊었으므로, 혹정이 알아들음을 칭찬하였다.

[D-153]() …… 뜻입니다 : 전국 때 제 소공(齊昭公)이 왕의 자리를 쫓겨나와 건후에 있을 때에도 연호는 그대로 썼다. 춘추(春秋)에 나오는 고사.

[D-154]모신(毛甡) : 모기령(毛奇齡). 신은 본명(本名). 본자는 초청(初晴). 고친 자는 대가(大可).

[D-155]포염라(包閻羅) : 송 인종(宋仁宗)의 공정한 신하 포증(包拯)이 죽어서 염라왕이 되었다 한다.

[D-156]포공(包公) …… 않았습니다 : 이상의 서술은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적으로 소설체로 써서 모기령을 조롱한 말들이었다.

[D-157]모신은 …… 자인(自認)했습니다 : 공자가 일찍이, “나를 알아 줄 자도 춘추, 나를 죄줄 자도 춘추.” 한 말씀을 암암리에 빌렸다.

[D-158]보망(補亡) : 주자가 대학(大學) 중에 한 장이 누락되었다 해서, 스스로 한 장을 지어서 보충하였다.

[D-159]소서(小序) : 복상(卜商)이 지었다는 시경(詩經)의 해제인데, 주자가 모두 깎아 버렸다.

[D-160]참동계(參同契) :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도가서(道家書)인데, 주자가 자기의 별호와 성명을 고쳐서 공동도사(空同道士) 추기(鄒祈)라 하여 고이(考異)를 지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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