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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심세편(審勢編) 박지원(朴趾源, 1737∼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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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심세편(審勢編)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심세편(審勢編)

1. 심세편(審勢編)

 

심세편(審勢編)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중국에 노는 이로, 다섯 가지 허망(虛妄)된 일이 있다. 지벌(地閥)로 서로 뽐내는 것은 애초에 우리나라의 더러운 관습이므로, 유식한 이가 국내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양반(兩班) 이야기를 부끄럽게 생각하거늘, 하물며 외국의 토성(土姓)으로서 도리어 중국의 오래된 종족을 깔보려 하니, 이는 첫째의 허망이다. 중국의 붉은 모자나 이상한 소매는 비단 한족이 부끄러워할 뿐이 아니라, 만인들 역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속(禮俗)이나 문물(文物)은 사이(四夷) 중에서 오히려 당할 자 없음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과 조금도 버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한 줌만큼 작은 상투 하나로써 스스로 천하에 뽐내려 하니, 이는 둘째의 허망이다. 옛날, 월정(月汀) 윤공(尹公) 근수(根壽)가 명()에 사신갔다가 길에서 어사(御史)왕도곤(汪道昆)을 만나, 길가에 피해서 숨을 죽이고 그의 행진(行塵)을 바라본 것만으로써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였다더니, 이제 중국이 비록 변하여 오랑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천자의 칭호는 오히려 고쳐지지 않은 만큼, 그들 각부(閣部)의 대신들은 곧 천자의 공경(公卿)인 동시에, 반드시 옛날이라 해서 더 높다든지, 또는 이제라고 해서 더 깎이었다든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들은 제대로 관장(官長)을 뵈는 예식은 두고도, 그들의 조정에서 절하고 읍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문득 모면하기를 일삼아서 이것이 드디어 하나의 규례가 이룩되었으며, 설혹 그들을 만나면 대체로 거만한 것으로써 고상한 취미를 삼고 공손한 것은 욕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이에 대하여 가혹하게 추궁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우리쪽의 무례함을 우습게 여기지 않겠는가. 이는 셋째 허망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문자(文字)를 안 뒤로부터 중국의 것을 빌려 읽지 않는 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역대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치고 어느 것이나 꿈 가운데 꿈을 점침이 아닌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공령(功令)의 남은 기습(氣習)으로써 억지로 운치(韻致) 없는 시문을 쓰면서, 별안간 중국에는 문장이 없더구먼.’ 하고 헐뜯으니, 이는 넷째 허망이다. 중국의 선비들은 강희(康熙) 이전에는 모두 명()의 유민이었으나, 강희 이후에는 곧 청실(淸室)의 신하와 백성임이 틀림없는 만큼, 실로 그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법률을 존중하되, 보통 때에 언론이라도 외국 사람들에게 그 정부를 반대하는 말을 세운다면, 이들은 곧 이 세상의 난신(亂臣)이요, 적자(賊子)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한번 중국의 선비를 만난 때에, 그들이 그 임금의 은택을 자랑함을 보고는, 정반대로 문득 일부(一部) 춘추(春秋)를 이제야 읽을 곳이 어디 있겠어.’ 하고는, 말마다 연()()의 저자에 옛날과 같은 강개(慷慨)한 선비가 없음을 탄식하니, 이는 다섯째의 허망이다.

그리고, 중국의 선비들은 세 가지 남보다 어려운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한 번 거인(擧人)이 되면 경()()의 전체에 대한 가지가지의 변증(辨證)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백가(百家)구류(九流)에 이르기까지라도 그 원류(源流)는 대략 섭렵해서 물음에 막힘이 없나니, 그렇지 않으면 족히 선비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니, 이것이 첫째의 어려움이었고, 그들의 인간적인 면은 생각이 너그럽고 행동이 속되지 않으며, 예법에 익숙하여 아름다운 얼굴에다 교만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으며, 게다가 몸을 낮추어 가면서 남을 받아들이어 대국의 체면을 잃지 않으니, 이것이 둘째의 어려움이었고,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먼 일이나 가까운 일이나를 막론하고 법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으니, 법을 두려워하므로 벼슬에 조심하고, 벼슬에 조심하므로 제도가 한결같으며, 사민(四民)이 각기 업()을 나누어서 자치에 힘쓰지 않는 자가 없게 되니, 이것이 셋째의 어려움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위와 같은 다섯 가지의 허망을 가진 것은 실로 중국 사람이 저희들끼리 멸시함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끼리의 멸시하는 내용을 따진다면 이 역시 중국의 과오는 아닐뿐더러, 그들이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세 가지의 어려움은 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결코 멸시하지 못할 일이다. 옛날 진경지(陳慶之 남북조 때 양()의 명장)가 위()로부터 남쪽으로 돌아온 뒤에 북방 사람들을 매우 존중하게 여기기에, 주이(朱异 남북조 때 양의 학자)가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더니, 경지는,

 

()() 이후로 낙양을 황무한 지역(地域)으로 본 것은 곧, 장강 이북이 모두 이적(夷狄)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낙양에 이르러, 비로소 예법을 갖춘 사족들이 모두 중원에 있으니 예의의 풍부하고 인물들이 번영하며, 듣고 본 것을 이루 다 전할 수 없겠어.”

하고 답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망양(望洋)의 탄식을 금하지 못함은, 지금이나 예나 마찬가지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가 열하에 있을 동안에 중국의 사대부들과 접촉이 자못 많았었다.

그리하여 보통 때 서로 이야기하는 중에서도, 날마다 전일에 알지 못하던 바를 안 것이 퍽 많았다. 그러나 시정(時政)의 잘잘못이나 또는 민정(民情)의 향배에 대하여는 비록 알려고 애써도 방법이 없었다. 옛글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예법을 살펴보고는, 그들의 정치를 알 것이며, 그 나라의 음악을 듣고는, 그들의 도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 백세를 지난 뒤에 백세 이전의 왕()을 비교해 보더라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벌써 자공(子貢)의 기술과 계찰(季札)의 슬기가 없은즉, 비록 여러 가지의 악기(樂器)와 춤추는 도구가 날마다 앞에 벌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와 도덕이 나온 근본을 알 방법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먼 옛날의 음률을 범론(泛論)해서 어찌 그 당시 정치의 고하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너절하고도 번잡한 혐의를 헤아리지 않고 짐짓 이러한 사리에 닿지 않고 막연한 질문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 하면, 대개 중국 선비들의 천성은 과장을 좋아하고 학문에 해박함을 귀하게 여겨서, 그들의 이론은 경()()에 드나들며 파리채를 휘두르고 바람을 내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첫째 말씨가 아름답지 못한데다가 또한 질문에 급해서 대뜸 시국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려 들며, 또는 스스로 옛 의관의 차림을 자랑하여 그들이 부끄러워하는가 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를 살필 뿐이었고, 혹은 대뜸 만나면,

 

당신들은 민족적인 사상(思想)을 지녔느냐?”

고 물어서, 그들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하니, 이런 일들은 비단 저희들만이 싫어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실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환심을 사려면, 반드시 대국의 명성(名聲)과 교화(敎化)가 갸륵함을 극히 칭찬하여,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또 중국과 우리들과의 사이가 일체가 되었는 듯이 하여, 그 혐의쩍은 것을 피하되, 한편으로는 그들의 예악(禮樂)에 뜻을 붙이며, 그 전아(典雅)함을 숭배하는 듯이 할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역대의 역사를 들출지언정, 최근의 일에는 언급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뜻을 공손히 하여 배우기를 원하되, 그로 하여금 마음 놓고 이야기할 기회를 주고는,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여 그의 마음을 울적하게 하여 본다면, 그의 미첩(眉睫) 사이에는 진실인지 허위인지가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보통 웃고 지껄이는 사이에 그의 정실을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곧, 내가 그 영향을 문자(文字)의 밖에서 얻은 것이리라.

아아, 슬프도다. 중국의 유학은 점차 줄어듦에 따라서 온 천하의 학문이 한 갈래로 나오지 않게 되어, ( 주희(朱熹))()의 나눔이 벌써 수백 년이 되어 서로 헐뜯으며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더니, ()의 말기에 이르러서 천하의 학자가 모두 주자를 숭배하였으므로, 육씨(陸氏)를 따르는 이가 드물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되자, 가만히 학술(學術)의 종주(宗主)가 있는 곳과, 또 당시 그를 따르는 수효가 많고 적음을 살펴서 많은 편을 좇아 힘껏 숭배하여, 주자를 십철(十哲)의 동렬에 올려 모시고는 천하에 외치기를,

 

주자의 도덕은 곧 우리 제실(帝室)의 가학(家學)이야.”

하매, 천하 사람들 중에는 이에 만족하여 열복(悅服)하는 이도 있거니와, 또는 이것을 가장하여 출세의 길을 바라는 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 이른바 육씨의 학문은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아아, 슬프도다. 그들이 어찌 주자의 학문을 알아서 그 올바른 것을 터득하였으리오. 이는 곧 천자의 높은 지위로서 거짓 숭배하였음이니, 이는 그 뜻이 한갓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재빨리 남보다 먼저 이를 차지하여, 온 천하 사람의 입을 재갈먹여서 감히 자기들에게 오랑캐라는 이름을 씌우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어째서 그런 줄 알았는가 하면, 일찍이 중국을 높이며 오랑캐를 배격하였음을 보고서 재빨리 논문(論文)을 써서 송 고종(宋高宗 조구(趙構)) 춘추(春秋)의 정의를 알지 못하였음을 배격하였으며, 진회(秦檜)가 강화를 주장한 죄악을 성토하였고, 주자가 모든 글에 집주(集注 유학 경전의 주석)하였던 것을 보고는, 곧 천하의 선비를 모아서 천하의 글을 증집하여 도서집성(圖書集成)》ㆍ《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을 만들고는 온 천하 사람들에게,

 

이는 곧 주자의 말씀이며 또는 주자의 끼치신 종지(宗旨)들이야.”

하고 외쳤다. 그가 걸핏하면 주자를 드높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하 사대부의 목덜미를 걸터타고는 그들의 목구멍을 조른 채 그 등마루를 어루만지면, 천하의 사대부들은 모두들 그 위협과 어리석게 하는 술법에 휩쓸리어, 구구(區區)하게 예문이나 제도의 가운데에 눌어붙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가 말하기를,

 

청인(淸人)이 벌써 중국의 예문을 숭상하면서도 이내 만주의 옛 풍속을 변경하지 않음은 무슨 이유인가.”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어어,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뜻을 알 수 있지 않아.”

하고 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결코 천하의 이권(利權)을 사랑함이 아니야. 나는 오로지 명실(明室)만을 위하여 커다란 원수를 갚으며 커다란 치욕을 씻어 주려고 함이야. 그리고 천하에는 오랫동안 텅 비어 있는 이치가 없을 것인즉, 나는 천하를 위해서 중국을 지키다가 중국의 주인이 생긴다면 모든 것을 거두어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러므로 나는 감히 우리 조상의 옛 제도를 고치지 못하는 거야.”

하고 변명할 것이요,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저들이 자기의 옛 습속을 그대로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째서 천하를 휩쓸어서 억지로 그들의 법을 따르게 하는 거야.”

한다면, 어떤 이는,

 

그럼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뜻을 알 수 있잖아.”

하고는 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제왕(帝王)이란 문자(文字)라든가 수레의 궤도(軌道)라든가 모든 제도를 통일할 따름인만큼, ()의 신하가 된 자는 마땅히 시왕(時王)의 제도를 따를 것이요, 청의 신하가 되지 않는 자라면 시왕의 제도를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동남 지방은 어디보다도 개명을 하여, 반드시 온 천하 중에 그들이 먼저 일을 일으킬 걱정이 있을뿐더러, 그들의 성격은 경조하고도 부박하여 이론을 좋아하므로, 강희 황제가 강소절강 지방에 여섯 차례나 순행하여 가만히 모든 호걸의 사상을 눌렀으며, 지금 황제는 그 뒤를 밟아서 다섯 차례나 순행하였고, 천하의 큰 걱정은 늘 북쪽 오랑캐에게 있으므로 그들을 항복받은 뒤에도 강희 황제가 열하에다가 행궁(行宮)을 세우며, 몽고의 강력한 군대를 이에 주둔시켜 놓으니, 이는 실로 중국의 군사를 괴롭히지 않고도 호()로써 호를 방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군비(軍費)는 생략되나 국방은 굳셀 것이므로 황제가 친히 통솔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며, 서번(西藩)이 비록 강한(强悍)하나 다만 황교(黃敎)를 몹시 두려워함을 보고는, 황제는 곧 풍속을 따라서 몸소 스스로 그 교를 믿어서, 그 법사(法師)를 모셔다가 집을 찬란하게 꾸며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는, 게다가 명목만 ()’이라 빌려 주어서 그의 세력을 쪼개었으니, 이는 곧 청인(淸人)이 사방을 제어하는 교묘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만 중국에 대하여 마치 무관심한 듯싶으나 역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그는, 온 천하의 세민(細民)들이야 그들에게 세금(稅金)만 헐하게 해 준다면 곧 안정될지니, 그렇다면 그들은 도리어 우리의 벙거지와 의복의 제도를 편리하게 여겨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만 천하 사대부의 사상을 억누를 방법이 없는 만큼 고식적으로나마 주자의 학문을 높여서, 허랑한 선비들의 마음을 크게 위안시킨다면, 그들 중에 호걸은 감히 노여워할지언정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중 야비하고 아유하는 자는 시체(時諦)를 따라서 자기 개인적인 이익을 꾀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불언 중에 중국 선비의 사상을 약체화시키고,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문화인의 대우를 받게 하되, 저 진()의 갱유(坑儒)와 같은 행위를 취하지 않고도, 그들의 선비는 문자 교정하는 사무에 골몰하게 하며, 진의 분서(焚書)와 같은 정책을 떠나서도 그들의 서적은 실제적으로는 취진국(聚珍局)에서 흩어지게 된 셈이다. 건륭은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책판을 가리켜 취진판(聚珍板)이라 하였다. 아아, 슬프도다. 이는 곧, 이른바 구서(購書)의 재앙(災殃)이 분서에 비해서 심하다는 말은, 이를 말함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중국 선비들은 가끔 주자 반박하기에 조금도 거리낌없는 모기령(毛奇齡)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그를 주자의 충신이라 하고, 혹은 그는 위도(衛道)의 공이 있다.’ 하고, 또는 은가(恩家)를 도리어 원망함이다.’ 했으니, 이런 것들을 보아서도 족히 그들의 미의를 짐작할 것이다. 아아, 주자의 도덕은 마치 해가 중천에 떠오른 것과 마찬가지여서 세계 만국(萬國)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이거늘, 저 황제가 사사로이 숭배했다 한들 주자에게는 아무런 누가 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선비들이 이다지 부끄러워하는 것은, 대개 그들이 거짓 높여서 세인을 억누르려 하는 자구(資具)로 쓰는 데에 격분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가끔 한두 가지 집주(集注)의 그릇된 곳을 빙자하여, 백년 동안의 번민하고 원통한 기운을 씻으려는 것인즉, 이로써 가히 지금의 주자를 반박하는 자는, 실로 옛날 육씨(陸氏)의 학문을 하는 이와는 차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뜻을 짐작하지도 못하고, 잠깐 중국 선비를 접견할 때에, 대수롭지 않는 말이라도 약간만 주자에 관계된다면, 곧 깜짝 놀라서, 문득 그들을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호)의 무리라고 배격하고는, 돌아와 국내의 사람들에게 이르되,

 

어어, 중국에는 육학(陸學)이 한창 성하여 사곡한 학설이 쉴 날이 없더구먼.”

한다. 그러면 듣는 이 역시 이에 대한 시말도 연구해 보지 않은 채 이런 말들을 듣자 마음에는 노여움이 먼저 생기고 만다. 아아, 슬프도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성토는 비록 먼 중국에까지 미치지는 않을지라도, 이단(異端)을 용납한 과오는 실로 사람에게 용서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엄계(罨溪) 꽃나무 아래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을 교열(校閱)하여 차례를 정하다가, 이내 붓을 꽃이슬에 풀어서 이 의례(義例)를 만들어 뒷날 중국에 놀러가는 이로 하여금, 그들 중에서 터놓고 주자를 반박하는 이를 만나거든, 그가 반드시 비상한 선배인 줄 알고, 부질없이 이단이라고 해서 배척하지 말며, 말을 잘하여 점차로 그 속까지 스며든다면, 아마 이로 인하여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C-001]심세편(審勢編) : 이 편은 여러 본에 모두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譚) 위에 있었으나 이제 연암의 본편 중에 말한 바에 의하여 이곳에 옮겼다.

[D-001]월정(月汀) 윤공(尹公) 근수(根壽) : 조선 선조(宣祖) 때 명신. 월정은 호요, 근수는 이름. 자는 자고(子固).

[D-002]왕도곤(汪道昆) : 명 세종(明世宗) 때 명신. 도곤은 이름이요, 자는 백옥(伯玉).

[D-003]() …… 없음 : 전국 때에 연()()에는 나라를 잃고 비분강개하는 이가 많았다.

[D-004]백가(百家)구류(九流) : 춘추 전국 시대 전후에 유행되던 여러 학파.

[D-005]망양(望洋)의 탄식 : 해약(海若)이라는 물귀신이 바다의 넓음을 바라보고 탄식하였다는 남화경에 나오는 말.

[D-006]그 나라의 …… 것이다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D-007]자공(子貢) : 전국 때 오()의 현인(賢人).

[D-008]() : 송의 학자 육구연(陸九淵). 자는 자정(子靜)이요, 호는 상산(象山).

[D-009]진회(秦檜) : 송말의 매국적(賣國賊). 회는 이름.

[D-010]구서(購書) …… 심하다 : 모기령(毛奇齡)의 말인 듯하다.

[D-011]엄계(罨溪) : 연암서당(燕巖書堂) 앞에 있는 시내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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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경개록(傾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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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경개록(傾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경개록(傾蓋錄)

1. 경개록 서(傾蓋錄序)

2. 경개록(傾蓋錄)

 

 

경개록 서(傾蓋錄序)

내 사신을 따라 북으로 장성을 나서서 열하에 이르렀다. 그 땅은 본시 왕정(王庭)이 있는 곳이나 그 백성들은 되놈들과 섞여 살았으므로 이야기할 만한 자가 없었다. 이제 태학에 들어 묵게 되매 중원의 사대부들 역시 먼저 여기에 와서 묵는 이가 많았다. 이는 역시 하반(賀班)에 참례하려 온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한 관에 묵자 하니 저절로 밤낮으로 서로 만나게 되는 동시에 어차피 다 나그네의 신세로서 서로 번갈아 주객(主客)이 된 지 무릇 6일 만에 서로 흩어졌다. 옛말에 이르기를,

 

백두(白頭)에 처음 만났으나 마음은 새롭고 일산을 기울이자 곧 옛 친구와 같다.”

라고 하였다. 이제 한 마디 짧은 말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록하여 이 경개록(傾蓋錄)을 쓰기로 하였다.

 

 

[C-001]경개록 서(傾蓋錄序) : ‘박영철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따랐다.

[D-001]백두(白頭)……같다 :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몇 구절.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경개록(傾蓋錄)

 

 

왕민호(王民皥)는 강소(江蘇) 사람이다. 이때 나이는 54세였고, 사람됨이 몹시 질박하여 아무런 꾸밈이 없었다. 지난해에 그가 승덕부(承德府)에 태학을 창건하는 일로 한번 연경에 갔으며, 올해 봄에 일이 끝나매 황제가 친히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그는 거인(擧人)의 몸으로서 이곳에 수양하여 올해 4월 회시(會試)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중에 황제가 7() 대경(大慶)을 맞이하자 거듭 회시를 보였으나 그는 역시 응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어째서 과거를 보러 가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이가 늙었으니까요. 백두로서 고시장에 나타난다는 건 선비로서는 부끄러운 일이거든.”

한다. 왕군(王君)은 순후한 장자(長者)였고 호는 혹정(鵠汀)이라 한다. 따로 혹정필담(鵠汀筆談) 망양록(忘羊錄)을 썼다. 그의 키는 7척이 넘고, 자못 궁수(窮愁)에 싸인 태도를 숨기지 못한 채 가끔 한숨을 내뿜곤 하였다. 단지 한 종이 있어서 서로 의뢰하였을 뿐이다. 어느 날 나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였다.

학성(郝成)은 흡( 안휘성(安徽省)의 지명) 사람이다. 그의 자는 지정(志亭)이요, 호는 장성(長城)이다. 현재 산동도사(山東都司)로 근무중이다. 그는 비록 무인(武人)이었으나 학문이 넓고 아는 바가 많으며, 키는 8척이요, 붉은 수염과 번쩍이는 눈동자에 골상이 비범[精緊]하였다. 나와 함께 밤낮 이야기를 잇달았으나 조금도 피로한 빛을 띠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대개 시화(詩話)로 되어 있다.

윤가전(尹嘉銓)은 직례(直隷) 박야(博野)옛 조()의 땅이다. 사람이다. 그의 호는 형산(亨山)이라 하고, 통봉대부(通奉大夫)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치사(致仕)하였으니 이때 나이는 일흔이다. 올해 봄에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매 황제가 특히 2()의 관모(官帽)와 의복을 하사하여 괴이었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 조예가 깊고, 그의 시는 정성시산(正聲詩刪) 중에 많이 실려 있다. 그가 대청회전(大淸會典)을 편찬할 때 한림(翰林)편수관(編修官)으로 있었으며, 또 황제와 동경(同庚 동갑)이었으므로 더욱이 괴임을 입어 특명을 받들고 행재소(行在所)에 왔을 제 희대(戱臺)에서 악곡을 듣고서 구여송(九如頌)을 지어 바치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81종의 극본(劇本) 중에 가장 먼저 이 구여송을 연출하였으니 그는 황제의 시 벗이라 한다.

나에게 구여송 한 본을 주었으니 이미 간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상자 속에서 부채 하나를 꺼내어 그 자리에서 괴석(怪石)과 총죽(叢竹), 그리고 위에 5() 시를 써서 내게 주고는 이어서 주련(柱聯) 한 쌍을 써 주었다. 또 어느 날 그는 양() 온 마리를 쪄놓고 왕 거인(王擧人)과 나를 초청하여 함께 먹게 하고 그 밖에도 온갖 엿과 과실들을 섞어 내왔다. 이는 특히 나를 위해 마련한 것이다. 그의 키는 7척이 넘고 얼굴과 자태가 아담하고도 조촐[雅潔]하였으며, 두 눈동자가 맑은 채 안경을 쓰지 않고서도 가는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다.

그는 몹시 건강하여 겨우 쉰 살이 넘은 듯싶으나 수염과 머리칼은 하얗게 희었으며 대체로 간솔 화락한 사람이다. 내게 연경으로 돌아가거든 반드시 서로 찾아 줄 것을 다짐하면서 그 집 있는 곳을 그려 보여 주고는 또 내게 술을 끊을 것과 여색(女色)을 멀리 할 것을 부탁한다. 내 그 뒤 연경에 돌아와 그에 대한 물의(物議)를 들어보니 모두들 그를 백부(白傅)에게 견주었다.

그때 마침 그가 황제(皇帝)를 모시고 역주(易州)에 있어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서로 만나 작별하지 못하였다. 따로 그와 함께 고금의 악률(樂律)과 역대의 치란에 대한 문답이 있어서 모두 망양록(忘羊錄) 중에 실었다.

경순미(敬旬彌)의 자는 앙루(仰漏)였고 몽고 사람이다. 현재 강관(講官 교수(敎授))으로 있으며 나이는 서른아홉이다. 키는 7척이 넘고 얼굴은 희면서 눈이 길고 눈썹이 짙으며, 손가락은 파뿌리[葱根]처럼 되었으니 미남자라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나와 엿새 동안 같이 있었으나 한번도 이야기 자리에 오는 적이 없었다. (滿)()을 논할 것이 없이 남에게 정성껏 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유독 이 사람 하나가 제법 오만한 듯싶었다.

추사(鄒舍)는 산동 사람이었으며 거인(擧人)이다. 왕혹정(王鵠汀)과 태학에서 수양하는 중이다. 그때 연경에서 모임이 있어서 이곳에 머물던 선비 70명이 모두 그곳으로 떠나고, 다만 이 왕()() 둘만 잔류하였다. 그의 사람됨이 몹시 강개하여 시휘(時諱)를 피하지 않을뿐더러 얼굴이 괴이하고 행동이 거세었으므로 남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 지목하여 싫어하는 이가 많았다.

기풍액(奇豐額)은 만주 사람이며, 자는 여천(麗川)이다. 현재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로 있으며 나이는 37세이다. 그는 애초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중국에 들어간 지 이미 네 대째였으나 본국에서의 문망(門望)이나 조상은 알 길이 없고, 다만 그의 본성(本姓)이 황씨(黃氏)임을 알 뿐이라 한다. 키가 8척에 얼굴이 희고 풍도(風度)가 아름다운데 곧장 위의를 잘 꾸미며, 넓은 학문에 글 잘하고 또 해학과 웃음을 잘 지었다. 불교를 몹시 배격하고 의논을 가짐이 제법 올바르긴 하나 사람됨이 교만하여 온 세상이 안중에 없다. 태학사(太學士)이시요(李侍堯)가 운남(雲南)귀주(貴州)의 총독(總督)이 되었을 때 귀주 안찰사해명(海明) 2백 냥의 뇌물을 바쳤던 것이 발견되자 이시요를 가두게 되고 해명은 사형을 면하여 흑룡강(黑龍江)에 귀양살게 되었으므로 여천이 해명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내 우연히 그의 거처를 지나다가 누렇게 칠한 궤짝 수십 쌍을 발견하였으나 모두 아무 물건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마 만수절(萬壽節)의 공물을 다 바친 것인 듯싶었다. 나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이별의 말이 나오자 문득 눈물을 흘리곤 한다. 혹자는 이르기를, ‘풍액이 화신(和珅)에게 아부하여 해명을 밀어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한다. 내 연경에 돌아와 그의 집을 찾아 귀주로 떠나는 길에 작별하였다.

왕신(汪新)의 자는 우신(又新)이었으며, 절강(浙江) 인화(仁和)에 살고 있었다. 현재 광동 안찰사(廣東按察使)로 있다가 나의 성명을 여천(麗川)에게서 듣고는 여천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여천의 자리에서 서로 만나 한번 보자 곧 마음을 기울여 옛 친구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의 키는 7척이 넘고, 성긴 수염에 얼굴빛이 검으면서 더러워 별다른 위의는 없었으나 성격이 진솔 그대로 아무런 꾸밈이 없었다. 나와 같은 해, 같은 달에 났으나 나보다는 열 하루 뒤졌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오서림(吳西林) 영방(穎芳)이 무양(無恙)하신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오서림 선생께선 오중(吳中)의 고사(高士)입니다. 나이 80입니다마는 오히려 건강하셔서 저서를 쉬지 않는답니다.”

한다. 나는 또,

 

육소음(陸篠飮) () 그분도 무양하시지요.”

하였더니, 그는 놀라는 어조로,

 

알지 못하겠노라. 존형(尊兄)께서 오()()을 어떻게 아시는지요.”

한다. 나는,

 

소음 말씀이셔요. 그가 건륭 병술년(1766) 봄에 과거 보러 연경에 머물렀을 제 우리나라 어떤 선비(홍대용(洪大容)을 가리킴)가 그를 여저(旅邸)에서 만난 일이 있어서 그의 시문과 서화가 동한(東韓)에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답니다.”

하였다. 그는,

 

소음이야 말로 기이한 선비지요. 올해 회갑(回甲)이에요. 그는 강호에 불우한 채 쓸쓸히 시와 그림으로 생명을 삼고, 산수로 벗을 삼을뿐더러 술마시어 크게 취한다면 광가(狂歌)분매(憤罵)를 일삼는답니다.”

한다. 나는,

 

무엇에 분개하여 타매(唾罵)를 한답니까?”

하였더니, 그는 대답을 회피하기에, 나는 또,

 

그럼, 엄구봉(嚴九峯) () 그 분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내 시골을 떠난 지 오래되어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육()은 저의 지극히 친한 벗이었으며 모두들 그를 육해원(陸解元)이라 부르죠. 그리고 그를 당백호(唐伯虎)와 서문장(徐文長)에게 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호(西湖)를 떠나지 않은 지 서른 해에 부귀가 극치에 달하였답니다. 그리고 저는 시골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만 바람결에 그의 소식을 들었으나 그는 차와 술에 취미를 붙였으며, 대체로 뜻을 얻은 사람이어서 저처럼 풍진 속에 골몰하진 않을 것입니다.”

한다. 그리고 그는 이틀 뒤에 다시 와서 미진한 기쁨을 다하기로 다짐한다. 여천이 왕()에게,

 

박공(朴公)께서 술을 좋아하시니 모름지기 야자주(椰子酒)를 사시우.”

한다. 그는 머리를 끄덕인다. 여천이 또,

 

연암(燕巖)께선 성격이 양()을 좋아하질 않구 낙화생(落花生)을 즐기시던구먼.”

한다. 그는 또 머리를 끄덕인다. 그제야 문에 나가 그를 보낸다. 여천이 나를 돌아보며,

 

이야말로 해량(海量)이여유.”

한다. 이는 주량(酒量)이 많음을 이름이다. 이튿날 왕이 하인을 보내어,

 

내일은 다른 곳에 가지 마시고 꼭 기다려 주십시사.”

하며, 거듭 부탁하였으나, 이튿날 갑자기 연경으로 떠나게 되어서 그와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다.

파로회회도(破老回回圖)는 몽고 사람이었고, 자는 부재(孚齋)였으며, 아호는 화정(華亭)이다. 현재 강관(講官)으로 있으며 나이는 47세이다. 그는 강희 황제의 외손(外孫)이다. 키가 8척에 긴 수염이 심히 성하였고, 얼굴이 여윈데다가 누르고 바싹 말랐으며, 그의 학문은 깊고도 넓었다.

내 그를 주루(酒樓)에서 처음 만났는데 사람됨이 제법 점잖았으며 모신 하인(下人) 30여 명의 그 의모(衣帽)안마(鞍馬) 차림이 호화 찬란한 것을 보아서 그가 병관(兵官)을 겸한 것인 듯싶고 그의 얼굴 역시 장군(將軍)처럼 생겼었다.

호삼다(胡三多)는 승덕부(承德府) 민가(民家) 한인(漢人)을 민가라 한다. 의 작은 아이다. 날마다 아침 일찍 책을 끼고 와서 왕혹정(王鵠汀)에게 글을 배운다. 나이는 방금 열두 살이지만 얼굴이 맑고 빼어나 조금도 속기(俗氣)가 없을뿐더러 예절에 익숙하고 거동이 조용하였다. 부사가 그에게 명하여 복숭아를 두고 시를 짓게 하였더니 운()을 청하여 그 자리에서 지었는데 문장과 이치가 함께 원만하여 붓 두 자루를 상 탔다. 그가 또 운을 청하여 즉석에서 읊어 감사한 뜻을 표하였다. 어느 날 사신이 모두 일찍 조반에 들어가고 방이 빈 채 나 혼자서 남아 있게 되었다. 삼다가 와서 이야기하였다. 내 마침 망건(網巾)을 벗고 누웠을 제 삼다가 망건을 갖고 상세히 들여다보고서 심히 번거롭게 파고 묻기에, 나는,

 

한 개의 되놈도 오히려 많거늘 하물며 셋일까보냐.”

하고, 농담을 걸었다. 삼다는 곧,

 

한 땅덩이에 두 임금이 없사온데 어째서 일소(一少)라 하였답니까.”

하고, 응구 대첩한다. 이는 대개 왕일소(王逸少 왕희지(王羲之)의 자)를 이름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의 음()이 같을 경우에는 그와 같은 글자로 멋대로 쓰곤 한다. 이는 비록 말이 유창하진 못하나 재치 빠르고도 숙성하지 않다고는 이를 수 없으리라. 엄청나게 큰 통관박보수(朴寶樹)의 노새가 달음질쳐 마당 가운데서 뛰노는 것을 보고 삼다가 재빨리 나가 그 턱의 목살을 쥐고 가니 노새가 머리를 숙인 채 굴레를 순하게 받는다. 또 어느 날 정사가 창을 비껴 앉았을 제 삼다가 그 앞을 지나치기에 정사가 그를 불러 환약과 부채를 주었더니 삼다가 절하고 사례하면서 이내 정사의 성명과 관품을 물었다. 그 당돌함이 이러하였다.

조수선(曹秀先)은 강서(江西) 신건(新建) 사람으로 자는 지산(地山)이다. 현재 예부 상서(禮部尙書)이고, 나이는 60세 남짓 되었다. 어제 내가 사신의 뒤를 따라 그를 조방(朝房)에서 만났고, 다음날 내가 우연히 한 곳 새로 창건한 관후묘(關侯廟)에 들렀더니 그 동무(東廡)에 한 학구(學究)가 네댓 명 동자들을 가르치고 있기에 나는 그에게,

 

이곳이 넓고도 통창하니 경대부(卿大夫) 몇 분이나 와 있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 학구는,

 

현재 예부 조대인(曹大人)께서 이곳에 계시답니다.”

한다. 내가 그에게 종이와 먹을 빌려 명함을 써서 통자(通刺)하였다. 학구는 곧 일어나 재빨리 가 버린다. 나는 그곳을 향하여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학구가 섬돌 위에 나서서 손을 들어 나를 부르기에 나는 섬돌 밑에 이르렀다. 조공(曹公)이 벌써 문 밖에 나와 서로 맞이할 제 손수 나를 이끌어 교의 위에 앉힌다. 나는 머뭇거리며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 역시 굳이 앉기를 청한다. 나는,

 

()은 귀인이시오니 먼 나라에 사는 제가 감히 주객(主客)의 예를 차리겠사옵니까.”

하였다. 그는,

 

당신은 공사(公事)로 이곳에 오신 거요.”

하기에, 나는,

 

아니올시다. 상국(上國)에 관광(觀光)하러 온 것이올시다.”

하였다. 그는 또,

 

그럼 벼슬은 몇 품이나 되시오.”

한다. 나는,

 

전 수재(秀才)입니다. 사신의 뒤를 따라왔을 뿐 아무런 직책은 없답니다.”

하였더니, 그는 황망히 나를 이끌어 앉히면서,

 

아무런 직책이 없으시다면 선생은 곧 나의 존빈(尊賓)이고, 제대로 접대해 드릴 예식이 있으니 선생은 굳이 사양하지 마시오.”

하고는, 이내,

 

귀국의 선거(選擧) 제도는 어떠하죠. 대비(大比)에 몇 명이나 뽑으며 시험에는 어떤 식의 문제로써 하시는지요.”

하고 묻는다. 그는 바야흐로 과제(科題)를 쓰는 모양이다. 그는 스스로 안경을 끄집어 내어 한편으로는 귀에 걸며, 한편으로는 재빨리 쓰곤 한다. 얼마 아니되어 30여 명이 별안간 들어와서 일자(一字)로 늘어서더니 그 중 이마가 번쩍번쩍하는 한 사람이 한편 무릎을 꿇고서 일을 여쭙는데 극도로 공손하여 그 와서의 거리가 30여 보나 되었으나 말할 때에는 반드시 손으로써 입을 가리곤 한다. 그러나 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필담(筆談)을 쓰면서 그의 여쭙는 일을 수응하는 것이었다. 이마 번쩍이는 자가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앉아서 여쭙기를 끝내고는 스스로 교의 하나를 이끌어 멀리 동쪽 바람벽 밑에 앉는다. 그리고 그 늘어섰던 자들도 일시에 물러가고 얼마 아니되어 일을 여쭙던 자 역시 하직 인사없이 일어서 가 버린다. 온 집이 다시 사람 없는 듯이 괴괴하였다. 나는 그때 조와 마주 앉았었고, 그 학구는 한쪽 편에 앉았는데, 그의 나이는 50세 남짓하고 머리에는 풀모자를 썼으며 필담을 들여다본다. 별안간 한 사람이 명함을 드리는데 첫 머리에 신수호남(新授湖南)이라는 네 글자가 보이고 그 밑 몇 글자는 소매에 가렸고 끝에는 어사윤적(御史尹績)의 넉 자였다. 조가 붓을 던지고 일어나 재빨리 문을 나간다. 학구가 나를 이끌되 마치 잠깐 피해 달라는 시늉이다. 나는 학구를 따라 나와서 다시 아까 들었던 방에서 기다렸다. 윤적(尹績)이 조와 함께 들어가더니 얼마 아니되어 윤적은 앞에 서고 조는 뒤를 따라 나가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손님 떠나보낸 뒤에는 의당 돌아와 나와 조용히 이야기하겠지 하고는 오래도록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는다. 괴이하여 학구더러 물으니 벌써 대궐에 들어간 것이다. 조의 얼굴은 늙고도 더러워서 아무런 위의가 엿보이지 않으나 사람됨이 개제(愷悌)하고 평화로웠다. 내 연경에 돌아온 뒤에 중국의 사대부가 많이들 조공(曹公)을 두고,

 

지산선생(地山先生)의 문장과 학문이야말로 당세에 으뜸이시지.”

하고 기리면서, 또 그를 구양영숙(歐陽永叔)에게 견주기도 한다. 그리고 장정옥(張廷玉) 명사(明史)를 엮을 때에 조가 역시 사국(史局)에 참여하였으니, 그는 대개 묵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뒤에 다시 관묘(關廟)에 들렀으나 그 학구도 어디론지 가 버렸다. 학구의 성명은 잊어버려서 이에 기록하지 못하겠으나 대개 한인(漢人)이었으며, 글이 짧아서 겨우 필담을 하긴 하나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연구한 뒤에서야 무슨 말인 줄을 알 정도였다.

왕삼빈(王三賓)은 복건 사람으로 나이는 스물다섯이다. 그는 윤형산(尹亨山)의 구종이거나 또는 기려천(奇麗川)의 하인인 듯싶다. 글을 잘 알며 그림에도 명수이다.

 

 

[D-001]백부(白傅) : 당의 저명한 문학가 백거이(白居易). 부는 태자소부(太子少傅). 자는 낙천(樂天).

[D-002]육소음(陸篠飮) () : 소음은 호요, 비는 이름. 자는 해원(解元).

[D-003]엄구봉(嚴九峯) () : 구봉은 호요, 과는 이름.

[D-004]당백호(唐伯虎) : 명의 저명한 문학가 당인(唐寅). 백호는 자요, 또는 자장(子張). 호는 육여(六如).

[D-005]서문장(徐文長) : 역시 명의 저명한 문학가 서위(徐謂). 문장은 자요, 또는 천지(天池).

[D-006]한 개의……셋일까보냐 : 호삼다(胡三多)의 세 글자 풀이.

[D-007]대비(大比) : 3년 만에 한 차례씩 보이는 과시. 곧 식년시(式年試). 뒤에는 흔히들 향시(鄕試)를 대비라 하였다.

[D-008]구양영숙(歐陽永叔) : 송의 저명한 문학가 구양수(歐陽脩). 구양은 성이요, 영숙은 자.

[D-009]장정옥(張廷玉) : 청의 사학가. 명사의 편찬 사업을 맡은 대표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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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연도중록(還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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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15일 신유(辛酉)에 시작하여 20일 병인(丙寅)에 그쳤다. 모두 6일 동안이다.

 

1. 가을 8 15일 신유(辛酉)

2. 16일 임술(壬戌)

3. 17일 계해(癸亥)

4. 18일 갑자(甲子)

5. 19일 을축(乙丑)

6. 20일 병인(丙寅)

 

 

 

가을 8 15일 신유(辛酉)

 

 

날씨가 맑고 잠깐 서늘하였다.

사신들이 서로 의논하되,

 

이제 우리의 사정은 마땅히 연경으로 돌아가야 될 것이나, 예부에서는 우리나라 사신을 경유하지 않고 가만히 정문(呈文)의 사연을 고쳤다니, 이는 비단 눈앞의 일이 해괴할 뿐 아니라, 이를 그대로 두고 변명하지 않는다면 장래의 폐단이 클 것인즉, 마땅히 다시 예부에 글을 제출하여 그들이 몰래 고친 것을 밝힌 연후에 길을 떠나야겠다.”

하고는, 곧 역관에게 시켜서 예부에 글을 제출하니,제독(提督)이 크게 두려워했는데, 대개 덕상서(德尙書)에게 먼저 통했던 때문이다. 상서 등도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위협을 더하되,

 

이 일에 대한 허물을 장차 우리 예부에다 넘기고자 하는 거냐. 예부에서 죄를 얻는다면 너희 사신인들 좋겠는가. 그리고 너희들 전주(轉奏)한 정문이야말로 사연이 모호하여 전연 성의를 표한 실상이 없었으나, 내 실로 너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도로 꾸며 진달해서 그 영광스럽고 감격한 뜻을 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도리어 이렇게 한단 말이냐. 이는 실로 제독의 과오가 더 크겠지.”

하고는, 정문을 떼어 보지도 않고 물리쳤다. 사신이 그제야 제독을 맞이하여 예부에 대한 모든 사정을 상세히 물은즉, 그 이야기가 몹시 장황해서 알아듣기 어려워 한참 동안을 머엉하고만 말았을 뿐이다. 그리고 예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곧 길 떠날 것을 재촉하되,

 

사신 일행의 떠나는 시간을 적어서 곧 위에다 아뢰겠다.”

하니, 이다지 떠나기를 재촉함은 대개 다시 글을 제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이다. 이에 대한 일은 행재잡록(行在雜錄) 중에 상세히 보인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곧 길을 떠났다. 해가 벌써 점심나절이 지났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저 뽕나무 아래에 사흘 밤을 묵은 일도 오히려 추억에 남았다는데, 하물며 나는 우리 부자(夫子 공자)님을 모시고 엿새 밤을 지난 것임에랴. 또 더군다나 그 자고 나온 곳이 신선하고 화려하여 저절로 잊히지 않는다. 내 일찍부터 과거를 폐하여 하찮은 진사(進士) 하나도 이루지 못했은즉, 비록 국학(國學)에 몸을 수양하고자 한들 얻을 수 없음도 사실이거늘, 이제 별안간 나라를 떠나서 만 리 머나먼 변새 밖에 와 엿새 동안을 노닐어 마치 나에게만 고유한 일인 것같이 생각되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선비 중에 능히 멀리 이 중국의 한복판에서 놀아 본 이로서 신라의 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이나 고려의 이익재(李益齋) 제현(齊賢)과 같은 이도 비록 서촉(西蜀)강남(江南)의 땅을 두루 밟았으나, 새북(塞北)에야말로 이를 길이 없었음은 사실이다.

이로부터 천백년(千百年) 뒤일지라도 몇 사람이나 다시 이곳에 걸음을 할는지도 모르는 일이겠는데, 나의 이번 걸음에는 기정(沂鄭)영빈(潁濱)의 수레 자국과 말 발자국이 모두 선하게 눈앞에 벌였으니, 아아, 슬프도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아무런 질정(質定)된 일이 없음이 어찌 이러할 줄이야 알았으리오.

광인점(廣仁店)삼분구(三坌口)를 거쳐 쌍탑산(雙塔山)에 이르러서 말을 멈추고 한 번 바라본즉, 참으로 기절(奇絶)하기 짝이 없다. 바위들은 결과 빛이 마치 우리나라 동선관(洞仙館)의 사인암(舍人巖 바위 이름)과 같고, 높이 솟은 탑의 모습은 금강산(金剛山)의 증명탑(證明塔)과 같이 뾰족하게 둘이 마주 섰는데, 아래위의 넓이가 똑같아서 남에게 의지할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짝짐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는 채, 정직 단엄하고 교려 웅특(巧麗雄特)하여 햇빛과 구름 기운이 마치 비단처럼 찬란할 뿐이다. 난하(灤河)를 건너서 하둔(河屯)에서 묵었다. 이날 모두 40리를 걸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C-001]가을 8 : ‘수택본에는 이 한 구절이 탈락되었다.

[D-001]저 뽕나무 ……  : 불교에서 인연설을 설명할 때에 쓰는 고사.

[D-002]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 : 우리나라 한문학의 문을 연 초조(初祖). 고운은 호요, 치원은 이름.

[D-003]이익재(李益齋) 제현(齊賢) : 고려의 저명한 정치가문학가. 익재는 호요, 제현은 이름이며, 자는 중사(仲思). 그의 시와 사()는 우리나라 몇천 년 이래의 제일이다.

[D-004]동선관(洞仙館) : 황해도 동선령(洞仙嶺)에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6일 임술(壬戌)

 

 

개다.

아침에 일찍 길을 떠나 왕가영(王家營)에서 점심을 먹고 황포령(黃舖嶺)을 지날 제, 나이 스무 남은 살 된 어떤 귀족 청년 하나가 붉은 보석과 푸른 깃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검은 말을 탄 채 달려가는데, 그 앞에 한 사람이 가고 뒤에 따른 자가 기병 30여 명이나 되며, 모두들 금안(金鞍)준마(駿馬)에 의관의 차림이 선명하고도 화려하고, 혹은 화살을 지기도 하고, 혹은 조총(鳥銃)을 메기도 하고, 혹은 다창(茶鎗)을 받들기도 하였으며, 혹은 화로를 들고서 번개처럼 달리면서도 벽제(辟除) 소리 한 마디 내지 않는데, 다만 말굽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 구종군에게 물었더니 그는,

 

황제의 친 조카 예왕(豫王)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 뒤에는 태평거가 따라가는데, 힘센 노새 세 필로 멍에를 짓고는 초록빛 천으로 겉을 가리고 사면엔 유리를 붙여서 창을 내었으며, 그 위에는 파란 실그물로 얽고 네 모서리에는 술을 드리웠다. 대체 귀족들이 탄 가마나 수레는 모두 이런 것들로 꾸며서 그 계급을 표시하였다. 그 수레 속은 마치 보일 듯하나 뵈지는 않고, 다만 여인의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얼마 아니 되어 노새가 멎고 오줌을 흘리는 순간, 우리의 말도 오줌을 눈다. 수레 속으로부터 여인이 북쪽 차창을 열고 다투어 가며 얼굴을 내미는데, 아름답게 뭉친 머리에는 구름이 얽힌 듯, 귀를 꿴 구슬들은 별이 흔들리듯 노란꽃과 파란 줄구슬이 꿈인 듯이 얽히어, 예쁘고도 화려함이 마치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와 같은데, 잠자코 창을 닫고 선뜻 가버린다. 그들은 모두 셋인데, 예왕을 모시는 궁녀(宮女)라 한다.마권자(馬圈子)에 이르러서 묵었다. 이 날에는 80리를 걸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7일 계해(癸亥)

 

 

개고 따뜻하다.

새벽에 길을 떠나 청석령(靑石嶺)을 지날 제, 때마침 황제가 계주(薊州)동릉(東陵)에 거둥하게 되었으므로, 벌써 도로와 교량을 닦되 한가운데에는 치도(馳道)를 쌓고, 각 고을에서 미리 역군을 징발하여 높은 데는 깎고 깊은 곳은 메우되, 맷돌로 다지고 흙손으로 바른 듯 마치 베[]를 펴놓은 듯싶고, 표목을 세웠으되 조금 굽은 것도 없고 기운 것도 없으며, 치도의 넓이는 두 길이요 좌우의 협로(夾路)는 각기 한 길 남짓 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주 나라 가는 길이 숫돌처럼 바르구나 / 周道如砥

라 하였더니, 이제 이 길이 숫돌처럼 되었으니 그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흙을 메고 물을 지는 이들이 가는 곳마다 떼를 이루어서, 허물어지면 곧 흙으로 보수하되, 한 번 말굽이 지나간 곳이면 벌써 흙손질하고는, 나무를 새끼로 어긋나게 묶어 치도 위로 다니는 자들을 금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무를 거꾸러뜨리며 놋줄을 끊어 버리고는 가버린다. 나는 곧 마부에게 타일러 치도 밑으로 가게 했다. 이는 감히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마는, 역시 차마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길 한편에는 반드시 두어 걸음마다 돌담을 쌓았는데, 높이는 어깨에 닿을 정도이고, 넓이는 대략 여섯 자쯤 되는데, 마치 성()에 치첩(雉堞)이 있는 듯싶으며, 교량치고는 난간이 없는 게 없고, 돌난간에는 천록(天祿 상상적으로 생긴 짐승)이나 사자 모양을 앉혔는데, 모두들 입을 열어 생동하는 듯싶고, 나무 난간인즉 단청이 눈부시다. 물이 넓은 곳엔 나무쪽을 짜서 광주리처럼 만들되 둘레는 거의 한 칸, 길이는 한 길쯤 되게 해서, 물가의 자갈을 채워 물속에 굳게 꽂아서 다리 기둥을 만들었고, 난하(灤河)나 조하(潮河)에는 모두 수십 척의 큰 배를 띄워서 부교(浮橋)로 삼았다.

아침밥을 삼간방(三間房)에서 먹을 제 우리 일행이 점방에 들렀는데, 어제 길에서 만난 예왕(豫王)이 관왕묘에 들렀으므로, 우리가 든 점방과 아래위 사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점방에 흩어져 떡고기차 따위들을 사서 먹곤 한다. 내가 우연히 관왕묘를 구경하기 위하여 걸어서 들어간즉, 문에는 지키는 자도 없이 뜰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아무런 사람 하나도 없이 괴괴하였다. 나는 애당초 예왕이 그 속에 머무른 줄을 몰랐던 것이다. 뜰 가운데에는 석류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낮은 솔은 용이 서린 듯이 굼틀굼틀한다. 내가 그 곳을 바장이며 두루 구경하고 섬돌을 디디고 마루턱으로 오르려는 즈음에, 어떤 한 아름다운 청년이 모자를 벗은 채 맨머리로 문밖으로 쫓아나와 나를 보고 웃으며 맞이하되,

 

씬쿠[辛苦].”

하니, 이 말은 대체로 나를 위로하는 뜻이다. 나는,

 

하오아[好阿].”

하고 답하였다. 이는 곧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부(安否)를 묻는 인사의 말이다.

그 섬돌 위에는 아로새긴 난간이 있고, 난간 아래에는 교의 둘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붉은 탁자를 놓고는, 나에게 줘이줘(坐着)”라고 하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앉기를 청함이다. 혹은 칭춰(請坐) 칭줘라고도 하고, 혹은 줘저 줘저라고 거듭 부르기도 하려니와, “() 칭 칭을 잇달아 내기도 하니, 이는 정중하고도 간곡함을 표함이다. 그리고 길가에 오면서 어떤 집에 들어갔을 때마다 주인들은 모두 그렇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는 대개 손님을 접대하는 예식이다. 그리고 그 청년이 모자를 벗고 사복(私服)을 입었으므로, 나는 애초에 그가 주승(主僧)이 아닌가 하였는데, 급기야 상세히 살펴본즉, 그가 곧 예왕인 듯하다. 나는 그래도 아는 척하지 않고 심상하게 봐 버리고, 그도 역시 교만하고 고귀한 서슬을 보이지 않으나, 붉은 빛이 얼굴에 부풀어올랐음을 보아서 아침 술을 많이 마셨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곧 손수 술 두 잔을 따라서 나에게 권한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기울였다. 그는 나더러,

 

만주 말을 할 줄 아셔요.”

하고 묻기에, 나는,

 

모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가 별안간 난간 밑을 향해서 한번 토하자, 술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진다. 문안을 돌아보며,

 

량아(凉阿 시원하다).”

한다. 웬 늙은 환시[老閹] 하나가 방안에서 담비 갖옷[貂裘] 한 벌을 갖고 나오더니, 손으로 나에게 나가라는 시늉을 하기에, 나는 곧 일어서서 나오며 난간 머리를 돌아본즉, 그는 오히려 난간에 비켜 앉았다. 그의 행동은 몹시 경박하고 얼굴은 유달리 창백하여, 조금도 위엄이 없이 마치 시정배의 아들 같았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곧 떠나서 몇십 리를 나아갔다. 뒤에 백여 명이나 되는 말탄 사냥꾼이 멀리 산 밑을 바라보며 달린다. 독수리를 안은 자 10여 명이 산골에 흩어져 갔다. 한 사람은 큰 독수리를 안았는데, 독수리의 다리는 마치 사냥개 뒷다리처럼 살지고, 누런 비늘이 정강이에 번쩍인다. 검은 가죽으로 머리를 싸매고 눈을 가렸으며, 그 남은 것들도 모두 눈을 가렸으니, 이는 그것들이 행여나 물건이 눈에 뜨이면 함부로 퍼덕이다가 다리에 생채기를 내거나 또는 위협을 느낄까 보아서 그런 것이고, 또는 그렇게 해야만 눈 정기를 기르는 동시에 사나운 성질을 그대로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말에서 내려 모래 위에 앉아서 담뱃대를 털어 담뱃불을 붙였다. 그 중 활과 살을 몸에 두른 자 하나가 역시 말에서 내려 담배를 넣더니 불을 청한다. 나는 그제야 그에게 말을 물었더니, 그는,

 

황제의 조카 예왕께옵서, 열다섯 살 되는 황손과 또 열한 살 되는 황손 둘을 데리고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사냥하시는 것이옵니다.”

하기에, 나는,

 

그럼, 소득이 얼마나 되우.”

하였더니, 그는,

 

사흘 동안에 겨우 독수리 한 마리를 얻었답니다.”

한다. 그 즈음에 별안간 옥수숫대 꺾이는 소리가 나며 등골이 서늘해진다. 말 탄 이 하나가 나는 듯이 밭 가운데로부터 달려 나오는데, 화살을 힘껏 버틴 채 안장 위에 엎드려 달리되 그의 희디흰 얼굴은 눈인양 눈부신다. 담배 태우던 자가 그를 가리키며,

 

저이가 열한 살에 드는 황손입니다.”

한다. 그는 토끼 한 마리를 쫓아 달렸는데, 토끼는 달리다가 모래 위에 넘어져 누워서 네 발을 모은다. 말을 빨리 달려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토끼는 다시 일어나 산 밑으로 달음질친다. 그제야 백여 명이 달려가 에워싸니, 아득한 평원에 티끌이 공중을 가리고 총소리가 진동하더니, 별안간 에워쌌던 것을 풀고 가버릴 제 티끌 그림자 속에 일단(一團)의 무엇이 감돌더니 아득히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토끼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말 달리는 법에 있어서는 어른이나 아이를 불구하고 모두 타고난 천재들이다.

대개 책문으로부터 연산관(連山關)에 이르기까지 높은 뫼와 험한 재가 많고 숲이 울밀하여 가끔 새들이 지저귀더니, 요동에서 연경까지 2천 리 사이에는, 공중에는 나는 새가 끊이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장마지고 날씨가 찌는 듯하나, 벌레나 뱀이 숲속에 다니는 것도 보지 못하였거니와, 개구리 소리도, 두꺼비 뛰노는 것도 보이지 않으며, 벼가 한창 누럴 때이지만 참새 한 마리가 내리지 않고, 물가 모래톱 근방에도 물새 한 마리가 보이지 않으며, 다만 이제묘(夷齊廟) 앞 난하(灤河)에서 비로소 두 쌍의 갈매기를 보았다. 그리고 까마귀까치솔개 따위는 흔히 도시 중에 모여듦에도 불구하고, 이 연경에선 역시 드물게 보이니 결코 우리나라 그것들의 공중을 가리고 나는 것과는 같지 않음을 느꼈다. 애초에는 이러한 변새의 수렵(狩獵) 지역에는 반드시 금수가 많으리라 생각하였더니, 이제 이곳의 모든 산은 갈수록 초목이 없고 새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서, 비로소 호인들이 사냥으로써 생명을 유지함이 이와 같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어느 곳에서 사냥을 하겠는지, 짐승들을 이렇게 절종시켰음은 이치에 맞는 일인지, 또는 짐승들이 별도로 도피할 곳이 있는지는 알 수 없겠다.

강희 황제가 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오대산(五臺山)에 놀러 갔을 때 범이 숲속에서 뛰어나오매, 황제가 친히 쏘아서 죽였다. 그 때 산서(山西) 도어사(都御史) 목이새(穆爾賽)와 안찰사(按察使) 고이강(庫爾康)이 황제에게 여쭈어 그 땅 이름을 석호천(射虎川)이라 하고, 범의 가죽은 대문수원(大文殊院)에 간직하여 이제까지 전하고 있으며, 그는 또 친히 화살 서른 개를 쏘아서 토끼 스물아홉 마리를 잡았고, 그가 송정(松亭)에서 사냥할 때에 큰 범 세 마리를 쏘아 죽였는데, 모두들 그림을 그려서 민간에서 서로 팔고 사니, 이는 실로 신기한 기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여러 공자(公子)들이 사냥할 때 재빨리 달리는 것을 구경한즉, 대체로 그들의 가법(家法)이 그러함을 알겠다. 만일 그 때 옥수수밭 속에서 범 한 마리가 뛰어나왔더라면, 비단 그가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 리의 길을 멀리 온 나로 하여금 한 번 유쾌하게 했을 것인데, 이제 그렇지 못하였음이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성 밖에 다다르니, 뫼에 잇달아서 성을 쌓았으므로 높낮이와 굽이가 생겼고 그 요충지(要衝地)에는 속이 텅 빈 돈대를 세웠는데, 높이는 예닐곱 발, 너비는 열네댓 발이나 되었다. 그런데 대체로 요충지에는 4, 50걸음 만에 돈대가 하나씩 있고, 조용한 곳에는 2백 걸음 만에 돈대 하나씩을 두었으며, 돈대마다 백총(百總 현대의 소위(少尉)에 해당)이 지키고, 열 돈대를 천총(千總 중위에 해당)이 지키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1, 2() 사이마다 방울 소리가 들린다. 만일 한 사람이 일이 있을 때에는 좌우에서 횃불을 들어 서로 나누어 전하매, 수백 리 사이에도 모두 재빨리 알아채고 예비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척 남궁(戚南宮)이 끼쳐 준 책략이라 한다.

옛날 육국(六國) 때에도 역시 장성이 있었다. ()의 이목(李牧)이 흉노(匈奴)를 크게 깨뜨려 10여만 명의 기병을 죽이고 첨람(襜襤)을 전멸시키며, 임호(林胡)누번(樓煩) 등을 깨뜨리고 장성을 쌓되, ()와 음산(陰山)으로부터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새 문을 만들어 운중(雲中)안문(雁門)대군(代郡) 등의 여러 고을을 두었고, ()은 의거(義渠 감숙성 지방에 있던 부족)를 멸한 뒤에 비로소 농서(隴西)북지(北地)상군(上郡) 등지에다 장성을 쌓아서 호족을 막았으며, ()은 또 동호(東胡)를 깨뜨려서 천 리를 넓히고 역시 장성을 쌓되,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동(遼東) 등의 여러 고을을 두었다. 그리하여 진조 세 나라가 모두 저 세 곳에 새문을 둔 지가 오래고, 각기 장성을 쌓았으되 그 실에 있어서는 서로 잇달리어 북서에 뻗은 것이 벌써 만 리나 되었더니, ()이 천하를 통일하고 천자가 되자 곧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되 지세를 따라 험한 곳을 이용하여 변새지를 눌러서, 임조(臨洮)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 리에 뻗었으니, 생각하건대 몽염이 옛성을 모두 증수(增修)한 것이었던가. 또는 연조의 옛 성터에다 새로 쌓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겠다. 몽염의 말에,

 

이 성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까지 잇달렸다.”

하였으니, 이 성이 만여 리에 뻗은 그 사이에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겠고, 또 사마천(司馬遷)이 북변(北邊)에 가서 몽염이 쌓은 장성을 보매 그 역정(驛亭)과 돈대가 모두 산을 끊고 골을 메운 것을 보고 그가 가벼이 백성의 힘을 허비하였음을 책망하였다. 그렇다면 이 성은 정말 몽염이 쌓은 것으로, 조의 옛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성은 모두 벽돌로 쌓았으며, 벽돌은 모두 한 기계에서 찍어 낸 것으로서 두껍고 얇음이나 크고 작은 것이 조금도 차이가 없고, 성 밑 돈대는 돌을 다듬어서 쌓았으되 땅 밑에 포갠 것이 다섯이요, 땅 위에 포갠 것이 셋이라 한다. 그 돈대는 가끔 무너진 곳이 있었다. 그 높이는 댓 길쯤 되나, 흙을 섞지 않고 오로지 벽돌에 석회를 발랐는데, 종이를 가린 듯이 얇아서, 겨우 벽돌을 이어붙인 것이 마치 나무에 아교를 합친 듯싶다. 성의 안팎이 대패로 깎은 듯하되, 아래는 넓고 위는 좁아서 비록 대포(大礮)와 충차(衝車)라도 갑자기 깨뜨리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대개 그 바깥 벽돌은 비록 이지러졌으나, 그 속에 쌓은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담결핵(痰結核)을 다스리는 데에는 천년 묵은 석회에다가 초를 타서 떡을 만들어 붙이곤 한다. 묵고 오래 된 석회로는 장성이 으뜸이었으므로, 으레 사신이 오가는 편에 이를 구했던 것이다. 내 일찍이 젊었을 때 주먹만큼 큰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고 결코 그 참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겠다. 길가의 모든 성의 제도는 모두들 장성과 다름없으니, 어디에서 주먹처럼 큰 석회를 얻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일부러 새외로 멀리 돌아서 구득하였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길가의 무너진 성 밑을 지나다가 주운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고북구(古北口)에 들렀다. 내 저번에 새문을 나갈 때에는 마침 밤이 깊어서 두루 구경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그와 반대로 대낮이므로 수역과 더불어 잠깐 모래 벌판에 쉬다가 곧 첫째 관()으로 들어섰다. 말 수천 필이 관문이 메도록 서 있고, 둘째 관문을 들어갔더니 군졸 4, 50명이 칼을 차고 삑 둘러섰고, 또 두 사람이 의자를 맞대고 앉았다. 나는 수역과 함께 말에서 내려 조용히 걸었다. 그 둘은 기쁜 얼굴로 재빨리 앞에 와서 몸을 굽히며 읍하고 위안의 말을 간곡히 보내는데, 그 하나는 머리에 수정관(水晶冠)을 썼고, 또 하나는 산호관(珊瑚冠)을 썼다. 그들은 모두 수비하는 참장(叅將)이라 한다.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2(945)에 거란주(契丹主) 덕광(德光)이 침입하여 호북구(虎北口)로 돌아오다가, ()이 태주(泰州)를 치러 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군사를 통틀어서 남쪽으로 내려갈 제, 거란주가 수레 속에서 철요기(鐵鷂騎)의 기병(騎兵)에게 명령을 하고 말에서 내려 진군(晉軍)의 녹각(鹿角)을 빼고 들어갔었다. 대개 장성(長城)을 둘러 구()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 무려 몇백이나 되었는데, 태원(太原 산서성에 있다) 분수(汾水)의 북에 역시 호북구라는 지명이 있으니, 그때 덕광(德光)의 군사가 기양(祈陽)으로부터 북으로 향해 갔던 바, 그 길이 아니고 보니 유주(幽州)단주(檀州)의 호북이 곧 이 관()이리라 생각된다. ()의 선조에 호()라는 휘()가 있으므로, 당에서 호()를 고쳐 고북구라 하였다. 송인(宋人)이 지은 사료행정록(使遼行程錄)에 이르기를,

 

단주(檀州)로부터 북으로 80리를 지나고, 거기에서 또 80리를 가서 호북구관(虎北口關)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단주의 고북구 역시 호북구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 선화(宣和) 3(1121)에 금인(金人)이 요병을 고북구에서 깨뜨렸고, 가정(嘉定) 2(1209)에 몽고(蒙古)가 금()에 침입하여 고북구에 이르매 금인은 물러가서 거용관(居庸關)을 지켰으며, ()의 치화(致和) 원년(1328)에 태정제(泰定帝 야손철목이(也孫鐵木爾))의 아들 아속길팔(阿速吉八)이 상도(上都 찰합이(察哈爾)다륜현(多倫縣))에서 임금이 되어 군대를 보냈는데, ()를 나누어 연()의 철첩목아(鐵帖木兒)와 대도(大都 북경)에서 싸울 때에 탈탈목아(脫脫木兒)는 고북구를 지키다가 상도의 군대와 더불어 의흥(宜興)에서 싸웠고, ()의 홍무(洪武) 22(1389)에 연왕(燕王)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고북구로 나가서 내안불화(乃顔不花)를 이도(迤都)에서 쳤고, 영락(永樂) 8(1410)에는 고북구 소관(小關)의 어귀와 대관(大關)의 바깥 문을 메워서 겨우 사람 하나 말 한 필을 용납하게 되었다는데, 이제 이 관은 다섯 겹이나 되는 문이 있으나 아무런 메운 흔적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대개 이 관은 천고의 전쟁을 치른 마당이므로, 천하가 한 번 어지러우면 곧 백골(白骨)이 뫼처럼 포개어지게 되니, 이야말로 진실로 이른바 호북구였다. 이제 태평이 계속된 지 1백여 년이나 되어서 네 경내(境內)에 병혁(兵革)의 어지러움을 보지 못하였을뿐더러, 삼과 뽕나무가 빽빽이 서 있으며, 개와 닭 울음이 멀리 들리어, 이와 같이 풍족한 휴양(休養)과 생식(生息)이야말로 한()() 이후로는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었으니, 그들은 무슨 덕화(德化)를 베풀었기에 이 경지에 이르렀을까. 그러나 그 높음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허물어짐은 이치가 으레 그러한 것인만큼, 이곳 백성이 전쟁을 치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은즉, 아아, 앞으로 다가올 토붕(土崩)와해(瓦解)도 걱정이 아닐 수 없구려.

이 관()은 대개 뫼 위에 자리잡아, 비록 수많은 묏봉우리가 삥 둘렀으나 큰 사막이 오히려 눈앞에 보인다. 금사(金史)를 상고하면,

 

정우(貞祐) 2(1214)에 물이 넘쳐 흘러, 고북구의 쇠로 만든 관문을 허물어 버렸다.”

하였으니, 대개 되놈들이 중국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의 나라가 상류(上流)에 웅거하여 형세가 병 목을 거꾸로 달아 놓은 것처럼 된 까닭이다. 내 어렸을 때에 어떤 어른이 백곤(伯鯀)의 홍수(洪水)를 메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변증(辨證)한 것이 기억에 떠올랐다.

 

중국에 커다란 근심 두 가지가 있으니, 곧 하()와 호()이다. 대개 백곤의 재주나 힘이나 인격이나 슬기 그 어느 것이나 저 되놈이 멋대로 날뛸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므로, 그는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소개(疏開)하고 항산(恒山)과 대군(代郡)을 파서 구주(九州)의 물을 이끌어 사막에 끌어 대고는, 중국으로 하여금 도리어 그 상류에 웅거하여 되놈[]을 견제하기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악(四岳) 역시 그의 제안을 옳게 여겨 한 번 시험해 보려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시험해 보고 말 것이다.’가 곧 그것이다. 그러므로 요()는 비록 물을 거꾸로 따냄이 옳다고 여기지 않았건마는, 백곤의 변론이 몹시 강력하므로 반박을 하지 못하였으며, ()도 물의 역행이 마땅한 일이 아님을 알았지마는, 백곤의 재주와 슬기가 심히 뛰어났으므로 감히 간하지도 못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명령을 어기고 화합을 깨뜨린다.’가 곧 그것이었던 것이다. 대개 백곤의 사람됨이 사납고도 꼿꼿하였을뿐더러, 제 마음대로 의견을 주장하되, 오로지 되놈으로써 중국 만세의 걱정을 삼아, 저 높은 데까지도 물에 잠길 것은 눈앞의 둘째 일로 보고서, 지형도 측량하지 않고 공비도 아낌 없이 기어코 거꾸로 개울을 파서 거슬러 흐르게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물이 거슬러 행함을 강수(洚水)라 하므로, ‘강수란 곧 홍수(洪水)이다.’라는 말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개울도 치고 구덩이도 파려니와, 소개도 하고 씻어 내기도 하는 도중에 지세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흙이 저절로 메워지게 되었으니, 이가 이른바, ‘백곤이 홍수를 메웠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처럼 커다란 물을 메워서 스스로 죄과를 범하였으며, 또 당시의 사악과 십이목(十二牧)은 어찌하여 한 목구멍에서 나다시피 그를 역천(力薦)하였으며, 또 요로서도 어떻게 차마 9년 동안이나 두고 보면서 그가 패할 것을 기다렸을까. 아아, 백곤이 만일 이 공업을 이룩하였더라면, 중국이 되놈을 막는 것이나 하()를 막는 계책이 한꺼번에 이룩되어 만세를 두고 힘을 입히는 동시에, 그의 커다란 공로와 거룩한 사업이 당연히 우()의 우위에 올랐을 것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곳 지형을 살펴본즉, 이는 맹랑한 말이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시에 이르기를,

 

황하수 깊은 물이 하늘 높이 내리는 듯 / 黃河之水天上來

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지형이 서편이 높아서 황하가 마치 하늘 위로 내려 흐르는 듯싶다는 것이다.

관내(關內) 점방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 벽 위에 황제의 어필 칠절(七絶) 한 수가 붙어 있었다. 이는 공민(孔敏)에게 내린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남으로 순행하고는 곧장 열하로 돌아올 제, 모든 공씨(孔氏)가 나와서 배알하기에 황제가 이 시를 읊어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공씨의 문장(門長) 공민이 이에 발()을 달았는데, 황제의 은악(恩渥)과 영총(榮寵)을 극도로 포장하였을뿐더러, 벌써 돌에 새겨 널리 찍어서 이 점주(店主)에게 한 벌을 주고 갔다 한다.

그 시는 비록 변변하지 못하나 글씨는 묘하게 썼다. 점주가 나에게 이를 사라고 조르기에 시험조로 그 값을 물었더니, 그는 돈 서른 냥을 부른다. 식사가 끝난 뒤 곧 떠나서 셋째 관문에 들어갔다. 양편 벼랑에 석벽이 깎은 듯이 높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는 차 한 대가 지나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래에는 깊은 시내와 커다란 바위가 더덕더덕하였다. 기공(沂公) 왕증(王曾)과 정공(鄭公) 부필(富弼)이 일찍이 거란에 사신갈 제 역시 이 길을 경유하였으므로, 그의 행정록(行程錄) 중에,

 

고북구는 양편에 준험한 석벽이 있고, 그 사이에는 길이 났으되, 겨우 수레를 용납할 만하다.”

하였음을 보아서 그가 이곳으로 지나간 것을 알 수 있겠다. 한 소사(蕭寺)에서 쉴 때, 거기에 영빈(潁濱)소철(蘇轍)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어지런 뫼가 둘렀으니 갈 곳 없음 의아하더니 / 亂山環合疑無路

가는 길 얽힌 채 시내 곁을 둘러 있네 / 小徑縈回長傍溪

꿈속에 잠긴 듯이 서촉 길을 헤매니 / 彷佛夢中尋蜀道

흥주에서 동편 골이 봉주에선 서라네 / 興州東谷鳳州西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면,

 

원우(元祐 1086~1094) 연간에 소철이 그의 형 소식(蘇軾)을 대신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얼마 아니 되어 예부 상서(禮部尙書)의 직을 대리하여 거란에 사신갔으므로, 그의 관반(館伴)시독학사(侍讀學士)왕사동(王師同)이 능히 소순(蘇洵)소식의 글과 소철의 복령부(茯苓賦)를 외었다.”

하였으니, 이 시는 곧 문정공(文定公 소철의 시호)이 사신으로 갈 때에 이곳으로 지나치다가 쓴 것이리라. 살고 있는 중은 겨우 둘뿐이고, 난간 밑에는 바야흐로 오미자(五味子) 두어 섬을 말리고 있기에, 내 우연히 두어 낱을 주워서 입에 넣었다. 한 중이 주시(注視)하더니, 별안간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며 호통하는데, 그의 행동이 몹시 흉패(凶悖)하였다. 나는 곧 일어서서 난간 가로 비켜 섰다.

마침 마두(馬頭) 춘택(春宅)이 담뱃불을 붙이러 들어섰다가, 그 꼴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줄곧 앞으로 다가서며,

 

우리 영감께옵서 더운 날씨에 찬물 생각이 나셔서, 이 자리에 가득 찬 것들 중에서 불과 몇 알 아니 되는 것을 씹어 침을 돋우려 함이거늘, 너같이 양심 없는 이 까까중놈아, 하늘에도 높은 하늘이 있고, 물에도 깊은 물이 있거늘, 이 당나귀처럼 높낮이도 분간하지 못하고 얕은 것과 깊은 것도 측량한 줄 모르는 이런 무례한 놈,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꾸짖는다. 중은 모자를 벗어 던졌다. 입가에는 흰 거품이 부풀어 오르고 어깻죽지를 기웃거리면서 까치걸음으로 앞으로 나서서,

 

너희들 영감 내게 무슨 감정이 있어, 하늘 높다 하나 너나 두려워하지, 나는 두려울 게 없어. 제 아무리 관노야(關老爺)가 현령(顯靈)하고 태세(太歲)가 문에 들었다 하더라도, 난 그가 두려울 게 없어.”

한다. 춘택이 곧 그에게 뺨 한 대를 치고 이어서 수없이 우리나라의 무리한 욕지거리를 더한다. 중이 그제야 뺨을 손으로 가리고 비틀거리며 들어가 버린다. 나는 목청을 높여 춘택에게 요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다. 춘택은 오히려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곧장 그 자리에서 싸워 죽이고 말 기세였다. 한 중은 부엌문에 서서 웃음을 머금은 채 편을 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말리지도 않는다. 춘택은 또 한 주먹으로 그를 두들겨 엎고는,

 

우리 영감께옵서 이 일을 만세야(萬歲爺 황제를 높여서 하는 말) 앞에 여쭙는다면, 네놈의 대가리를 쪼개 버리든지, 그렇지 않다면 이 절을 소탕하여 깨끗이 평지를 만들겠어, 이놈.”

하며 호통친다. 중은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너희 영감 말이야, 공짜로 오미자를 훔치고, 또 네놈을 시켜 사발처럼 모진 주먹을 보내니, 이게 무슨 도리야.”

하며 꾸짖으나, 그의 기색은 차차 죽어 간다. 춘택은 더욱 기를 내어,

 

무슨 공짜야, 기껏해야 한 말이 되겠느냐, 한 되가 되겠느냐. 그까짓 눈꼽처럼 작은 한 알 때문에 우리 영감님의 높으신 위신을 깎았단 말이냐. 만세야께옵서 만일 이 일을 아신다면 너같은 까까중놈의 대가리통을 대번에 쪼개 버릴 거야. 그리고 우리 영감께옵서 이 일을 만세야께 여쭙는다면, 네놈이 우리 영감은 두렵지 않다지마는 만세야도 두렵지 않단 말이냐.”

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그제야 중이 기가 죽어서 다시 앙갚음의 말도 내지 못한다. 춘택은 또 무수히 욕지거리를 하는데, 세력을 피며 걸핏하면 만세야를 팔아 댄다.

이때에는 응당 만세야의 두 귀가 가려웠으리라 생각된다. 대개 춘택이 말끝마다 황제를 일컬으니, 그가 헛 세력을 믿고 성세를 과장하는 꼴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절도(絶倒)하게 할 일이다. 그 중은 진짜 그를 두려워하여, 만세야라는 석 자를 듣자 마치 뇌성이나 귀신을 본 것처럼 떨 뿐이었다.

그제야 춘택이 벽돌 하나를 뽑아서 중에게 던지려 한다. 두 중은 별안간 웃음을 지으며 달아나 숨어 버렸다가, 곧 산사(山楂 아가위) 두 낱을 갖고 와서 오히려 웃는 얼굴로 바치며 청심환을 요구한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이러한 짓은 청심환을 얻기 위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씨를 따져 본다면, 실로 나쁘다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곧 청심환 한 알을 주었더니, 중은 머리를 무수히 조아리곤 한다. 그 염치 없는 일이 심하였다. 대체 산사는 살구처럼 굵기는 하지마는, 몹시 시금털털하여 먹을 수 없었다.

옛 성인은 남의 물건을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는 것을 심히 삼갔으니, 말하기를,

 

만일 옳은 일이 아니라면, 비록 한낱 지푸라기라도 함부로 남에게 주지도 않을뿐더러, 남에게 받지도 않는 거야.”

하였던 것이다. 대체 한 낱의 지푸라기로 말한다면, 천하에 지극히 작고도 가벼운 물건이어서, 족히 만물 중에서 손꼽을 존재조차 없겠으니, 어찌 이것으로써 사양하고 받는다든지 취하고 준다든지 하는 순간을 논할 나위가 될까보냐. 그러나 성인(聖人)은 이와 같이 엄청나게 심한 말씀을 하여 마치 이에 커다란 염치와 의리가 존재하는 듯 말하였음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이 오미자로 인하여 일어난 일을 체험하고 나서, 비로소 성인의 한낱 지푸라기를 이끈 말씀이 과연 지나치게 심함이 아님을 깨달았으니, 아아,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 두어 낱의 오미자는 실로 한낱 지푸라기와 같은 물건이건마는 저 완패(頑悖)한 중이 나에게 무례(無禮)한 행위를 한 것은 가위 횡역(橫逆)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 말미암아 다투기 시작하여서 주먹다짐에까지 이르렀을뿐더러 바야흐로 그들이 싸울 때에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제각기 생사를 분간하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비록 두어 낱의 오미자일망정 재화가 산더미처럼 높았던 만큼 이는 결코 천하에 지극히 가늘고도 가벼운 물건이라 얕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옛날 춘추(春秋) 전국(戰國) 때에 종리(鍾離)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초()의 여인과 뽕 따기를 다투다가 종말에는 두 나라의 전쟁을 일으켰던 일이 연상된다.

이제 그를 이 일에 비한다면, 두어 낱의 오미자가 벌써 성인이 이른바 한낱의 지푸라기보다 많았을뿐더러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초의 여인이 뽕 따기 다툼과 다름 없음을 보아서, 만일 이때에 그들이 싸우는 도중에 목숨을 잃은 사변이 생겼더라면, 어찌 군사를 일으켜 문책할 일이 없었을 것을 누가 예측하겠느냐.

내 일찍이 학문이 추솔하고도 얕아서 애초에 갓을 바로잡고 들메 끈을 매는 혐의를 삼가지 못하여 스스로 공짜로 오미자를 먹었다는 모욕을 취하였으니, 어찌 부끄럽고도 두려움을 이루 말할 수 있으리오.

길가에서 빈 차가 열하로 달려가는 것이 날마다 몇천 몇만인지 모를 만큼 많았으니, 이는 황제가 장차 준화(遵化) 역주(易州) 등지에 거둥하는 까닭으로 짐바리를 실으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몇천의 탁타(槖駝)가 떼를 지어 물건을 싣고 나온다. 이놈들은 대체 한결같이 크고 작은 놈이 없이 모두 엷은 흰 빛에 약간 누런 빛을 띠었으며, 짧은 털에 머리는 말과 다름 없으나 작은 눈매는 양과 같고, 꼬리는 마치 소와 같이 생겼다. 그리고 다닐 때에는 반드시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쳐들되 마치 나는 해오라기처럼 생겼고, 무릎에는 두 마디가 생겼으며, 발은 두 쪽으로 쪼개졌고, 걸음은 학처럼, 소리는 거위 소리 같았다. 옛날 가서한(哥舒翰)이 서하(西河)에 머무르고 있을 제, 그 주사관(奏事官)이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마다 흰 탁타를 타고 하루에 5백 리를 달린 일도 있거니와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2년에 부언경(苻彦卿)이 거란 철요(鐵鷂)의 군사를 크게 깨치매 거란 임금이 해차(奚車)를 타고 달아날 제 뒤에 적병이 급하게 쫓아오기에 덕광(德光)이 탁타 한 마리를 잡아 그를 태워서 달아났다 하였는데, 이제 탁타의 걸음걸이를 보건대, 몹시 더디고도 둔하니 뒤에 쫓아오는 적군에게 포로를 면하기 어려울 듯싶다. 혹시나 그놈들 중에서도 석계륜(石季倫)의 소와 같이 잘 달리는 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려 태조(太祖) 때에 거란이 탁타 40마리를 바쳤으나, 태조는 거란이 워낙 무도(無道)한 나라라 하여 다리 밑에 매어놓은 지 10여일 만에 모두 굶어 죽었으니, 거란은 비록 무도한 나라라 할지라도 탁타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대체 탁타는 하루에 소금 몇 말과 꼴 열 단쯤을 먹기는 일쑤인 만큼 나라에서 세운 목장이 몹시 빈곤할뿐더러 꼬마 목노(牧奴)가 그를 기르기가 어려움은 물론이요, 또는 그를 이용하여 물건을 싣고자 하여도 도시의 건물마저 낮고 좁으며 문과 거리가 더욱 비좁아서 그를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실로 이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까지도 그 다리 이름을 탁타교라 하여 개성(開城)유수부(留守府)에서 3리쯤 가서 있는데, 다리 곁에 돌을 세워 탁타교(橐駝橋)라 새겼으나, 토인(土人)들은 탁타교라 부르지 않고 모두 약대다리(若大多利)라 한다. 이는 사투리로 약대는 탁타, 교량은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또 와전되어 야다리(野多利)라 부르는 것이 일쑤이다.

내 처음 개성에 놀러 갔을 때 탁타교를 물었으나,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아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사투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함부로 되었음이 이와 같구려. 이날 80리를 갔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동릉(東陵) : 청 능묘의 총칭. 세조의 효릉(孝陵), 성조의 경릉(景陵), 고종의 유릉(裕陵), 문종의 정릉(定陵), 목종의 혜릉(惠陵)이 모두 이어 있다.

[D-002]척남궁(戚南宮) : 명의 명장 척계광(戚繼光). 남궁은 봉호인 듯하고, 자는 원경(元敬).

[D-003]이목(李牧) : 전국 시대의 명장. 염파(廉頗)와 같이 치는 명장.

[D-004]첨람(襜襤) …… 누번(樓煩) : 전국 때 조() 곧 지금의 산서성 서북에 있던 부족.

[D-005]석진(石晉) : 오대 때의 후진(後晉). 석은 그의 성.

[D-006]철요기(鐵鷂騎) : 거란의 기병대 이름인 듯하다.

[D-007]녹각(鹿角) : 군대에서 쓰는 나무로 만든 방어물(防禦物)의 일종.

[D-008]백곤(伯鯀) : 하우씨(夏禹氏)의 아버지로서 9년의 홍수를 맡아 다스리다가 실패하여 귀양살이를 당한 사람.

[D-009]사악(四岳) : ()의 때에 있었다는 사방 산악을 맡은 책임자.

[D-010]시험해 …… 것이다 : 서경(書經)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1]명령을 …… 깨뜨린다 : 서경(書經)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2]강수란 곧 홍수(洪水)이다 : 맹자(孟子)의 고자편(告子篇)에서 나온 한 구절.

[D-013]백곤이 …… 메웠다 : 서경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4]황하수 ……  : 이태백집(李太白集) 장진주(將進酒).

[D-015]소철(蘇轍) : 송의 문학가. 연빈은 호요, 철은 이름이며, 자는 자유(子由). 소식은 아우.

[D-016]소순(蘇洵) : 송의 문학가. 순은 이름. 자는 명윤(明允)이요, 호는 노천(老泉)이며, 소식의 아버지.

[D-017]관노야(關老爺) : 관우(關羽)의 혼령. 노야는 높여서 하는 말.

[D-018]태세(太歲) …… 들었다 : ()이 들었다는 말.

[D-019]옛날 ……  : 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

[D-020]갓을 …… 혐의 : 일명씨가 지은 군자행(君子行) 중에, “오이밭에서는 들메 끈을 매지 말 것이요, 오얏나무 밭에서는 갓을 바로잡지 말 것이다.” 했는데, 군자는 혐의로운 일을 애당초 하지 않는다는 뜻.

[D-021]가서한(哥舒翰) : 당 현종 때 장수로서 서장 지방에 공을 세웠다.

[D-022]석계륜(石季倫) : 중국 고대 춘추 시대 진()의 부호 석숭(石崇). 계륜은 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8일 갑자(甲子)

 

 

아침에는 개더니 늦게 가는 비가 잠시 내렸으나, 곧 멎고 오후에는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어 소낙비가 쏟아졌다.

아침에 떠나서 차화장(車花莊)사자교(獅子橋)를 지났는데, 행궁(行宮)이 있었다. 목가곡(穆家谷)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 떠나서 석자령(石子嶺)을 지나 밀운(密雲)에 이르매, 청실(淸室)의 모든 왕과 보국공(輔國公 황실로서 봉작을 받은 자)과 수없는 관원이 북경으로 돌아가는 자가 길에 잇달았다. 백하(白河)에 이르매, 나루에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시끄럽게 다투는데 이들을 한꺼번에 건너주기가 어려우므로 바야흐로 부교(浮橋)를 매는 것이다. 모든 배들은 대개 돌을 운반하는 것이었고 사람을 건너주는 배는 다만 한 척이 있을 뿐이다. 앞서 이곳을 지날 때에는 군기(軍機)가 나와 맞이하고 낭중(郞中)은 건너는 일을 감독하고 황문(黃門)은 길을 인도하였으며,제독과 통관들의 기세가 당당하여 물가에서 채찍을 들어 친히 지휘하였으되, 그야말로 산하(山河)를 움직일 지경이더니, 이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 근신(近臣)의 호송도 없거니와 황제 또한 한 마디 위로의 말씀이 없었다. 이는 대체로 사신들이 부처님 뵙기를 꺼려한 까닭으로 이러한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기색을 살펴보면, 갈 때와 올 때의 대우가 다름을 나는 느꼈다. 대개 저 백하(白河)는 그저께 건너던 물이었으며 모래 언덕은 전날 발을 멈춘 곳이었고, 제독의 수중에 가진 채찍이나 물 위에 떠 노는 배까지도 올 때의 것들과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독은 입을 다물고 통관마저 머리를 숙였을 뿐이었으며, 저 강산은 아무런 변함이 없건만 세태의 염량(炎凉)은 완연히 눈앞에 떠오른다.

아아 슬프도다. 대개 시세의 믿지 못할 것이 이러하구려. 그리고 세력이 있는 곳에는 모두들 달음질쳐서 따르곤 하였으나, 눈 한번 끔벅할 사이에 시세는 옮겨지고, 일은 식어져서 전연 빙자할 곳 없이 되어 마치 저 진흙에 빠진 소가 바다로 들어가는 듯이 얼음산이 햇빛을 만나 녹듯이 천고의 모든 일이 거의 이와 다름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까보냐. 이렇게 생각하는 차에 별안간 어지러운 구름이 공중을 덮으면서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었다. 그러나 오히려 갈 때에 비하여 그처럼 가공할 위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만 갈 때나 올 때가 모두 이러함을 보아서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는 없겠다. 옛 역사를 더듬어 보건대,

 

()의 천순(天順) 7(1463)에 밀운(密雲)회유현(懷柔縣)에 홍수가 나서 백하가 몇 길이나 불어 올라 밀운의 군기고(軍機庫)와 문서방(文書房)이 표류되었다.”

하였으니, 아마 이곳은 옛 전쟁터로서 맹풍(盲風)괴우(怪雨)가 일기 일쑤여서 분노한 번개와 우레와 그 침울한 원혼이 오히려 풀리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길을 지나오는 곳마다 그들의 배는 제도가 한결같지 않았음은 물론 이 백하의 배는 마치 우리나라의 나룻배와 비슷하면서 어떤 것에는 톱으로 배 한 허리를 에워서 몇 채를 노끈으로 묶어 하나를 만든 것이 있었다. 그 꼴이 하나만으로서도 이상한데 거기다 셋을 연결한 것은 더욱 그러함을 느꼈다.

글자를 만드는 데는 상형(象形)이 가장 많았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배 주() 자의 변에는 도()니 첩()이니 작()이니 항()이니 맹()이니 정()이니 함()이니 몽()이니 하는 따위가 모두 그 꼴을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 가지마다 모두 그렇거늘, 어쩐지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배는 걸오(傑傲)니 나룻배는 날오(捏傲)니 커다란 배는 만장이(漫藏伊)니 곡식을 실은 배는 송풍배(松風排)니 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출범(出帆)할 때에는 당돌이(唐突伊) 상류에 뜰 때에는 물우배(物遇排)라 하였고, 또 관서(關西)에서는 배를 마상이(馬上伊)라 일컫는다. 그 제도는 비록 각기 같지 않으나, 다만 선()의 한 글자로 통일되어 있을 뿐이요, 또 비록 도()()()() 등의 글자를 차용(借用)하였으나, 그 이름과 실물은 맞지 않는 것이다.

때마침 사오십 필의 기병이 회오리바람처럼 달려온다. 그 기세가 퍽이나 사나워 우리나라의 피로하고 잔약한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들은 한꺼번에 배에 오른다. 가장 뒤에 따르는 기병 하나가 팔에는 푸른 매를 끼고 채찍을 드날려 단번에 배에 뛰어오르려다가 말의 뒷굽이 미끄러져 안장채를 맨 채 물속에 떨어지자 한 번 덤벙거리며 다시 솟구쳐 일어서려다가 할 수 없이 가라앉아 힘없이 몸을 굴려 이윽고 물 위에 솟아 지친 몸을 이끌고 배에 오른다. 그리고 매는 마치 기름 항아리에 던져진 나방과 같고, 말은 오줌에 빠진 쥐와 같았을뿐더러 그 고운 옷과 화려한 채찍이 애처롭게도 물망울져 몸둘 곳이 없음에도 오히려 말만을 채찍질하자 매는 더욱 놀라 날곤 한다. 대개 제몸을 과장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갚음이 즉시에 이르고 마는 것을 보아서 족히 경계하여야 함을 느꼈다. 물을 건넌 뒤에 그를 따르는 기병에게 물었더니, 그는 말 등에서 몸을 갸우뚱하면서 채찍으로써 진흙 위에다가,

 

그이는 사천장군(四川將軍)이랍니다. 나이가 늙어서 용맹이 줄었답니다.”

한다. 부마장(駙馬莊)에 이르러서 묵었다. 객점은 그 성 밑에 있고 성은 곧 회유현(懷柔縣)이다. 밤에 문을 나서 뒷간으로 향하였다. 때마침 그들은 20, 30명씩 또는 4백여 명씩 한 곳에 몰려 달릴 제 한 대열마다 등불 하나가 앞을 인도한다. 그들은 아마 모두 귀족인 듯싶다. 그리하여 수레와 말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다. 이날 모두 65리를 갔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9일 을축(乙丑)

 

 

개었다 가끔 비가 뿌리다가 늦어서 갰으나 날씨가 몹시 뜨거웠다.

새벽에 회유현을 떠나 남석교(南石橋)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었다. 비로소 홍시(紅柹)를 맛보았다. 그 꼴을 보니 네 골이 졌는데다 또 턱이 생긴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이른바 반시(盤柹)와 다름없으나, 다만 달고 연하기 짝이 없고 또 물이 많았다. 이 감은 계주(薊州)의 반산(盤山)에서 나는데, 그곳 울창한 숲이 모두 감대추 따위라 한다. 임구(林溝)를 지나 청하(淸河)에 이르러서 묵었다. 이곳에는 곧 한길이 나옴을 보아서 갈 때의 길이 아님을 알았다. 길에 한 묘우(廟宇)에 들렀다. 강희 황제의 어필로,

 

좌성 우불(左聖右佛)”

이라 쓰여 있으니, 좌성은 곧 관운장(關雲長)을 말함이다. 그리고 좌우의 주련(柱聯)에는 그의 도덕과 학문을 높이 찬양하였다. 대개 그들이 관공(關公)을 숭봉한 것은 명() 초기의 일이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을 휘하여 패관(稗官) 기서(奇書) 들까지도 모두 관모(關某)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명()()의 즈음에는 공이(公移)와 부첩(簿牒)까지도 관성(關聖)이니 관부자(關夫子)니 하고 높여 불렀다. 그 그릇됨과 야비함을 그대로 좇아서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그를 학문하는 이로 높여 왔던 것이다. 대개 소위 학문이란 삼가 생각함과, 밝게 변증(辨證)함과, 상세히 물음과, 널리 배움을 이름이다. 그리하여 한갓 덕성(德性)만을 높임에 그쳐서는 아니 되므로 문학(問學)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옛날 하우씨(夏禹氏)가 아름다운 경고에 절하고 촌음(寸陰)을 아낀 것이나, 안자(顔子)가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마음이 추솔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하였은즉, 학문의 극치(極致)에 이르러서도 객()된 기운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기(客氣)를 온전히 제거함에 있어서의 제몸의 사욕(私慾)을 누르며 잃어버렸던 것을 예법의 행동 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방법을 써야 할 것이다. 대체 라는 것이 벌써 사욕에 지나지 않으니, 만일 일호라도 그 사욕이 몸에 따르면 성인은 반드시 그를 마치 원수나 도적처럼 간주하여 기어코 끊어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는,

 

()을 쳐서 기어코 이겨야 하겠다.”

하였고, 역경(易經)에는 또,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쳐서 3년 만에 이겼다.”

하였으니, 전쟁을 3년 동안이나 이끌어 가면서도 반드시 이기고 만다는 것은 실로 싸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제몸의 사욕이 이긴 뒤에서야 비로소 예법으로 돌아올 것이니, 이 돌아온다는 말은 일호라도 미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함이다. 예를 들면 저 해와 달이 때로는 다 먹혔다가 다시 그 둥근 형태로 돌아올 수 있고, 또 잃었던 물건을 도로 추심(推尋)하면 그 무게가 조금도 감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결코 슬기와 어짊과 용맹의 세 달덕(達德)을 갖추지 않는 이로서는 이 학문이란 이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관공(關公)과 같은 정의와 용맹이야말로 자기의 사욕을 이기기 전에 벌써 예법에 돌아온 분이겠지만, 다만 이제 그를 학문한 분으로 일컫는 것은 다만 그가 춘추(春秋)에 밝았던 까닭이리라.

그리하여 그가 일찍이 오()()의 참적(僭賊)을 엄격히 배격했던바, 그가 어찌 스스로 망녕되게 높여 준 ()’라는 칭호를 마음 편히 차지할까 보냐. 그의 영혼이 천추에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런 따위의 명분에 어긋난 일을 받지 않을 것이요, 만일 그의 영혼이 이미 사라졌다면 이렇게 아첨해 본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그리고 그들 오경박사(五經博士) 역시 성현의 후예로서 이어받는 것이었으므로, 동야씨(東野氏 주공(周公)의 후예)공씨(孔氏 공자의 후예)를 비롯하여 안씨(顔氏 안회(顔回)의 후예)증씨(曾氏 증참(曾參)의 후예)맹씨(孟氏 맹가(孟軻)의 후예) 등은 으레 모두 성인의 후예니 현인의 후예니 하였고, 관씨(關氏 관우의 후예)의 박사(博士) 역시 성인의 후예라 하여 동야씨공씨의 사이에 참렬시켰으니 심히 부당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전( 운남성(雲南省))에 문묘(文廟)가 있는데 왕희지(王羲之)를 주로 모셨으니, 이는 그를 서성(書聖)이니 필종(筆宗)이니 하여 높였음에 그릇됨을 깨닫지 못함이다.

성도(聖道)가 더욱 멀고 오랑캐들이 바꾸어 가며 중국의 임금이 되었으므로 제각기 제 방법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여 바른 학문이 아득히 끄나풀처럼 끊어지지 않을 뿐인즉, 어찌 천년 후의 사람들이 저 수호전(水滸傳)으로써 정사(正史)를 삼지 않을 줄 알리오. 혹은 이르기를,

 

남만(南蠻)북적(北狄)이 줄곧 중국의 임금 노릇을 한다면, 왕 우군(王右軍)을 문묘에 주사(主祀)함도 가할 것이며, 수호전으로써 정사(正史)를 삼는다 하더라도 아니 될 것 없을 것인 동시에, 비록 공()()을 내쫓아 버리고 석가(釋迦)를 들여 모신다 하더라도,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을 거요.”

하고는, 서로 한바탕 크게 웃고 일어섰다. 연경으로 돌아가는 관원들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아졌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빈 차가 열하로 향하는 것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마부나 역군들 중에 일찍이 서산(西山)에 가본 자는 멀리 서남쪽에 둘려 있는 돌산을 가리키며,

 

이게 곧 서산이야.”

한다. 구름 속에 출몰하는 천백(千百)의 봉우리가 보일락말락하고 산 위에는 흰 탑이 뾰족뾰족 공중에 솟았으며 병풍처럼 둘린 산들은 그림폭에 푸른 빛이 뜨는 듯이 얽히었다. 그들 둘이 서로 수작하는 말을 들어본즉,

 

저 수정궁(水晶宮)봉황대(鳳凰臺)황학루(黃鶴樓) 등에 붙어 있는 그림이 모두 이를 모방해 그린 거야.”

한다. 강 남쪽에 넓은 호수(湖水)가 열리고 흰 돌을 깎아 다리를 만들었는데, 수기(繡綺)니 어대(魚帒)니 십칠(十七)이니 하는 다리들이 모두 넓이 수십 보에 길이 백여 길이었으며, 굼틀굼틀 무지개처럼 누웠으며 좌우에는 돌 난간이 둘려 있는데, 용을 그린 배와 비단으로 꾸민 돛이 다리 밑에 출몰한다. 이는 40리나 되는 먼 곳의 물을 이끌어서 호수를 만들었으며 폭포가 돌 틈에서 뿜으니, 이가 곧 옥천(玉泉)이다. 황제가 강남(江南)에 거둥할 때나 또는 막북(漠北)에 머물 적에도 반드시 이곳을 거치며 이 샘물을 마신다 한다. 이 샘의 물맛이 천하에 첫째이므로 연경의 팔경(八景) 중에 옥천수홍(玉泉垂紅)이 그 하나라 한다. 마부 취만(翠萬)은 이미 다섯 차례나 왔고, 역졸 산이(山伊)는 두 번이나 구경하였다 하므로, 곧 둘과 서산으로 가기로 약속하였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삼가 …… 배움 : 중용(中庸)에 나오는 몇 구절.

[D-002]문학(問學) : ()의 철학가 육구연(陸九淵)은 존덕성(尊德性)을 주장하였고, 주희(朱熹)는 도문학(道問學)을 주장하였다.

[D-003]고종(高宗) : ()을 중흥시킨 임금 무정(武丁). 고종은 묘호.

[D-004]오경박사(五經博士) : 한 무제(漢武帝) 때 실시한 유학. 오경에 능통한 학자에게 준 학위 혹은 관직.

[D-005]왕 우군(王右軍) : 왕희지(王羲之). 우군은 그의 벼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0일 병인(丙寅)

 

 

개다.

새벽에는 잠깐 비가 뿌렸으나 곧 멎고 일기가 약간 서늘하다.

아침에 떠나 20여 리를 가서 덕승문(德勝門)에 이르렀다. 이 문의 제도는 조양(朝陽)정양(正陽) 등 아홉 문과 다름없을뿐더러 흙탕이 심하여, 만일 그 가운데에 한 번 빠진다면 솟아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 수천 마리가 길에 빽빽하게 몰려드는데, 다만 몇 명의 목동(牧童)이 앞에서 이끌 뿐이다.

덕승문은 곧 원()의 건덕문(建德門)인데, ()의 홍무(洪武) 원년(1368)에 대장군(大將軍)서달(徐達)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 문 밖 8리 되는 곳에 토성(土城)의 옛 터가 있으니, 이는 원대에 쌓았던 것이다. 정통(正統) 14(1449) 10월 기미에 먀선(乜先  로도 쓴다)이 상황(上皇 현존한 황제의 아버지를 말함. 당시는 명 영종(明英宗))을 모시고, 토성에 올라 통정사참의(通政司叅議)왕복(王復)을 좌통정(左通政)으로 삼고, 중서사인(中書舍人)조영(趙榮)을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으로 삼아서 상황을 토성에 나와 뵙게 하였으니 곧 이곳이었다. 그리고 명사(明史)를 상고하면,

 

먀선이 상황을 끼고 자형관(紫荊關)을 깨뜨리고 줄곧 경사(京師)를 엿볼 제 병부상서(兵部尙書)우겸(于謙)이 석형(石亨)과 더불어 부총병(副摠兵)범광무(范廣武)를 거느리고 덕승문 밖에 진을 벌여 먀선을 막을 제, 병부의 사무를 시랑(侍郞)오녕(吳寧)에게 맡기고, 모든 성문을 닫고 친히 싸움을 독려하되, ‘싸움에 임하여 장수가 군졸을 돌보지 않은 채 먼저 물러서는 자 있다면, 그 장수를 벨 것이요, 군사로서 장수를 돌보지 않은 채 먼저 물러서는 자 있다면, 후대(後隊)가 전대(前隊)를 죽일 것이다.’ 하고 호통쳤다. 이에 장수와 군졸들이 각기 반드시 죽을 것을 짐작하고 그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경신(庚申)에 적군(敵軍)이 덕승문을 엿보기에 우겸이 석형으로 하여금 빈 집 속에 군사를 매복하고는 기병 몇에게 시켜 적을 꾀었다. 이에 적이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접근하자 복병이 일어나 먀선의 아우 발라(孛羅)가 포탄에 맞아 죽었다. 그런 지 닷새 만에 먀선이 가끔 도전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또 싸워도 이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화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상황을 모시고 북으로 떠났다.”

하였으니, 이제 이 문 밖의 여염이나, 시전이 번화하고 화려함이 정양문 밖과 다름없고 또 승평(昇平)한 지 날이 오래되어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

()에서 묵었다. 역관비장과 일행 중의 하인들이 모두 길 왼편에서 대기하다가 말에서 내려 다투어 손을 잡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한다. 그러나 다만 내원이 보이지 않는다. 대개 그는 멀리 나와 맞이하기 위하여 홀로 먼저 밥을 먹고 동문으로 잘못 가버렸으므로 서로 어긋났다 한다. 창대가 장복을 보더니, 그 사이 서로 떠났던 괴로움을 말하기 전에 대뜸,

 

너 별상금(別賞金) 얼마나 갖고 왔니.”

하자, 장복 역시 안부하기 전에 얼굴에 가득찬 웃음으로,

 

, 상금이 몇 냥이더냐.”

하며 반문한다. 창대는,

 

천 냥이야, 의당 너와 반분해야지.”

한다. 장복은 또,

 

, 황제를 뵈었니.”

하자, 창대는,

 

뵈었고 말고. 황제 말이야, 그 눈은 호랑이, 그 코는 화롯덩이 같고, 옷을 벗은 채 발가숭이로 앉아 있데그려.”

한다. 장복은 또,

 

그의 쓴 것은 무엇이던.”

하매, 창대는,

 

황금 투구를 썼지 뭐야. 그리고 나를 부르더니 커다란 잔에 술을 부어 주며, 넌 서방님을 잘 모시고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왔다니, 기특도 하이 하데그려. 그리고 상사님껜 일품 각로(一品閣老), 부사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높여 주데그려.”

한다. 이는 모두 거짓말 아닌 것이 없으나 비단 장복이 이에 속았을 뿐 아니라, 하인들 중에 제법 사리를 아는 자치고도 믿지 않는 이 없었다. 변군(卞君)과 조 판사(趙判事)가 나와 환영한다. 곧 서로 이끌고 길 곁 주루(酒樓)에 올랐다. 파란 기에 옛 시 두 구를 썼다.

 

서로 만나 의기 높아 님과 함께 마시려니 / 相逢意氣爲君飮

높은 다락 수양 밑에 말을 매고 오르려네 / 繫馬高樓垂柳邊

이제 수양버들에 말을 매고 높은 다락에 올라 술을 마시매, 더욱 고인의 시 읊음이 즉사(即事)를 묘사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참된 뜻이 완연히 나타나 있음을 느끼곤 하였다. 이 다락은 아래위 모두 마흔 칸에 아로새긴 난간과 그림 기둥에 단청이 눈부시고 분벽(粉壁)사창(紗窓)이 아득히 신선이 살고 있는 곳 같았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고금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畵)가 많이 진열되어 있고, 또 술자리에서 읊은 아름다운 시구가 많이 붙어 있었다. 이는 대개 조신(朝臣)들이 공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또는 해내의 명사들이 석양(夕陽)에 모여들어 수레와 말이 구름처럼 많을 제, 술이 취한 뒤 시 읊기는 물론이요, 글씨와 그림의 고하를 논평하여 온 저녁을 묵으면서 다투어 그 아름다운 시구와 글씨그림을 남기기를 날마다 이러하였으나, 어제 남긴 것이 오늘 다 팔리곤 한다. 이런 일을 술집에서 몹시 부러워하므로 서로 다투어서 그 교의탁자그릇골동 들을 사치하게 벌여놓을뿐더러 온갖 화초를 줄지어 놓아 시의 자료로 이바지하였으며, 좋은 먹과 아름다운 종이, 보배로운 벼루, 부드러운 붓들은 으레 그 가운데에 갖추어 있었다. 옛날 양무구(楊無咎)가 어떤 기생집에 들렀을 제, 짧은 바람벽 위에 절지매(折枝梅) 한 폭을 그려 붙였더니, 오가는 사대부들이 이를 감상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집을 찾아 들었으므로, 그 기생의 문호가 더욱 번영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이 그림을 도적에게 잃어버리자 찾아드는 수레와 말이 점차 적어졌다 하였고, 또 장 일인(張逸人)은 일찍이 최씨(崔氏)의 주로(酒罏),

 

무릉성 깊은 곳에 최씨 집 아름다운 술 / 武陵城裏崔家酒

이 인간에 없을 것이 하늘 위나 있었던고 / 地上應無天上有

구름인 양 이 내 몸이 한 말 그냥 마시고서 / 雲遊道士飮一斗

백운 깊은 저 동구에 취한 채 누웠다오 / 醉臥白雲深洞口

라는, 시 한 절을 썼으므로 손님이 더욱 많이 찾아들었다 한다. 대개 중국의 명사와 대부들은 기생집과 술집에 출입함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여씨(呂氏)의 가훈(家訓) 중에서 다방과 술집에 나들며 거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술 마시는 것을 연하여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더할 수 없는 독음(毒飮)이었으나, 그 소위 술집이란 모두 항아리 구멍처럼 생긴 들창에 새끼로 얽은 문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흔히들 길 왼편 소각문(小角門)에 새끼로 발을 늘이고 체바퀴로 등롱(燈籠)을 만들어서 단 것이 반드시 술집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의 시중에 나타난 파란 기()는 모두 실상이 아니었으니, 나는 여태까지 술집 등마루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술 배는 너무나 커서 반드시 커다란 사발에 술을 따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꺼번에 기울이곤 한다. 이는 무작정 술을 뱃속에 따르는 것이요, 마시는 것은 아닐 것이며 배 불리기 위함이요, 취미를 돋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번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고, 취하면 문득 주정을 하게 되고 주정이 나면 문득 서로 격투를 시작하여, 술집의 항아리와 사발들을 남김없이 차 깨뜨려 버린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소위 풍류(風流)문아(文雅)의 모임이라는 참된 취지가 아랑곳없을뿐더러 도리어 중국의 술 마심이야 아무런 배불릴 것이 없음을 비난하는 것이 일쑤이다. 이제 이런 술집을 압록강 동편에 옮겨 본다 하더라도 하루저녁을 참지 못하여 벌써 그 보배로운 그릇과 골동을 두들겨 깨고, 아름다운 화초를 꺾고 밟아 버릴 것이 가장 아까운 일이리라 생각된다. 그 실례 하나를 들어 보면, 이주민(李朱民)은 풍류문아를 지닌 선비로서 한평생 중국을 기갈(饑渴)처럼 연모하였지마는, 유독 술마심에 있어서는 중국의 옛법을 기뻐하지 않아 술잔의 대소와 술의 청탁을 헤아리지 않고, 손결에 닿으면 곧 기울여 입을 벌리고 한꺼번에 따르곤 하면, 친구들은 이를 복주(覆酒 술을 엎어 버린다는 뜻)’라 하여 아학(雅謔)을 삼곤 하였다. 이번 걸음에 그가 같이 오기로 되었으나, 어떤 이가,

 

그는 주정을 부려서 가까이할 수 없겠어요.”

하고, 고자질하였다. 그러나 내 일찍이 그와 함께 10년 동안을 마셨으되, 얼굴에 단풍 빛 오른 적이나 입에 감거품 게워 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이 마실수록 더욱 얌전해지고, 다만 그의 술 엎는 방법이 조금 결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주민은 늘,

 

옛날 두자미(杜子美)도 술을 엎었다오. 그의 시에 이르기를, ‘아이야, 이리 나오너라 장중배를 엎으련다[呼兒且覆掌中杯]’라고 하였으니, 이건 입을 벌리고 누워 아이들로 하여금 술을 입에다 엎는 게 아니겠어.”

하고, 증거를 댄다. 그러면 온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허리를 꺾곤 하였다. 이제 만리 타향에서 별안간 친구의 옛 일이 기억에 떠오른다. 알지 못하겠다, 주민이 이날 이 시간에 어느 집 술 자리에 앉아서 왼손으로써 잔 잡고, 다시 이 만리 타향에 노니는 나를 생각할런지.

갈 때에 들렀던 객관을 다시 찾았다. 바람벽 위에 붙었던 몇 폭의 주련(柱聯)과 좌우(座右)에 머물러 둔 생황(笙簧)철금(鐵金) 등이 모두 무양하였으니, 옛 시에,

 

병주를 바라보며 나의 고향 이곳이요 / 却望幷州是故鄕

가 곧 이를 두고 말함이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조 주부(趙主簿) 명위(明渭)가 자기 방에 기이한 구경이 있다 하기에 나는 곧 그와 함께 가 보았다. 문 앞에 화초 십여 분(十餘盆)을 진열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 알 수 없겠고, 흰 유리 항아리의 높이는 두 자쯤이고 침향(沈香)으로 만든 가산(假山)의 높이 역시 두 자쯤 되어보이고, 석웅황(石雄黃)으로 만든 필산(筆山 붓을 꽂는 도구의 일종)의 높이는 한 자 넘고, 또 청강석(靑剛石) 필산이 있어 대추나무로 밑받침을 했는데 저절로 괴강성(魁罡星)의 무늬가 이룩되었을뿐더러 흑단(黑檀)으로 다리를 달았다. 그 값은 화은(花銀) 30냥이라 한다. 또 기서(奇書) 몇십 종이 있는데,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 () 포정박(鮑廷博)의 편)》ㆍ《격치경원(格致鏡源 청 진원룡(陳元龍)의 저()) 등은 모두 값이 지나치게 비쌌다.

대개 조군(趙君)은 이십여 차나 연행(燕行)을 하였으므로, 북경이 제집처럼 되었고, 또 한어(漢語)에 매우 익숙할뿐더러 물건을 매매할 때에도 심한 에누리를 하지 않는 까닭으로 단골 손님이 많아서 그가 거처하는 방에 그들을 진열하여 청상(淸賞)에 이바지함이 예사이다. 연전 창성위(昌城尉)황인점(黃仁點)이다. 가 정사로 왔을 때 건어호동(乾魚衚衕)에 있는 조선관(朝鮮館)에 화재가 나서 예비했던 장사치들의 모든 물건이 모두 재가 됐는데, 조군의 방어가 더욱 심하였다. 이는 매매된 물건을 제외하고도 불에 탄 것들이 모두 희귀한 골동과 서책이어서 그 가격을 따진다면 3천 냥의 거액이었으며, 그는 모두 융복사(隆福寺)나 유리창(琉璃廠) 중에서 옮겨 온 물건이다. 모든 단골 손님이 조군의 방을 빌려서 진열한 것이어서 그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며, 그들은 앞에서 겪은 일을 경계하지 않고 이제 또 이 방을 빌려 진열하되, 조금도 전과 다름없게 하여 조군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이에서 족히 중국 풍속이 결코 악착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겠다.

밤에 태학관에서 묵었다. 여러 역관이 모두 내 방에 모여들었다. 약간의 주찬이 있었으나, 행역(行役)한 나머지 전혀 입맛을 잃었다. 모든 사람이 내 곁에 놓인 봇짐을 흘겨보곤 한다. 아마 그 가운데에 먹을 것이나 없을까 하는 표정이다. 나는 곧 창대를 시켜 보를 끌러서 속속들이 헤쳐 보게 했으나, 아무런 다른 물건이 없고 다만 갖고 왔던 붓과 벼루가 있을 뿐, 그 두툼하게 보인 것이 모두 필담(筆談)난초(亂草)로 된 유람할 때의 일기(日記)에 지나지 않는다. 그제야 여러 사람이 모두 석연히 웃음을 지으며,

 

난 괴이하게 여겼어, 갈 때엔 아무런 행장이 없더니, 이제 돌아올 젠 짐이 어찌 이렇게 부풀었어.”

하고, 장복 역시 창대더러,

 

별상금(別賞金)은 어디다 두었어?”

하며,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서로 …… 오르려네 : 당시(唐詩).

[D-002]양무구(楊無咎) : 청의 양무구(楊无咎)인 듯하나 불명.

[D-003]장 일인(張逸人) : 이름은 미상. 일인은 은사(隱士).

[D-004]주로(酒罏) : 술항아리. 혹은 흙을 돋우어서 술 항아리를 두는 곳.

[D-005]여씨(呂氏)의 가훈(家訓) : 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의 가훈. 가훈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훈계하는 글.

[D-006]이주민(李朱民) : 연암의 친우. 주민은 자인 듯하나 이름은 미상.

[D-007]병주를 …… 이곳이요 : 당 시인 가도(賈島)의 시구로서, 고향을 떠나 병주에서 살다가 거기에서 또 여행을 하고 보니, 제이의 고향인 병주를 원 고향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D-008]석웅황(石雄黃) : 유화물(硫化物)로 만든 광석(礦石).

[D-009]화은(花銀) : 청에서 사용하던 은화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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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태학유관록(太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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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전편(前篇) 9일 을묘(乙卯)를 계속하여 14일 경신(庚申)에 그쳤다. 모두 엿새 동안이다.

 

1. 가을 8 9일 을묘(乙卯)

2. 10일 병진(丙辰)

3. 11일 정사(丁巳)

4. 12일 무오(戊午)

5. 13일 기미(己未)

6. 14일 경신(庚申)

 

 

 

가을 8 9일 을묘(乙卯)

 

 

사시(巳時)에 태학(太學)에 들었다. 사시 이전의 일은 이미 길에서 적었고, 사시 이후의 것은 관()에 머무른 일을 기록하기로 했다. 이날 몹시 더웠다. 말에서 내려 곧 후당(後堂)으로 들어섰다. 한 노인이 모자를 벗고 교의에 걸터앉았다가 나를 보고 교의에서 내려,

 

수고하십니다.”

하며 맞이한다. 나도 읍하여 답례하고 좌정한 뒤, 노인이 내게,

 

벼슬이 몇 품()이나 되시는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선비의 몸입니다. 귀국에 관광차로 삼종형(三從兄) 대대인(大大人)을 따라 이곳에 온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정사를 대대인이라 하고, 부사를 얼대인[乙大人]’이라 하니, []은 둘째라는 의미였다. 그는 또 나에게 성명을 묻기에 써 보이니, 그는 또,

 

영형(令兄) 대인의 존명(尊名)과 관직과 품계(品階)?”

하고 묻기에, 나는,

 

명함은 □□□(박명원(朴明源))이요, 일품(一品), 부마(駙馬), 내대신(內大臣)이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또,

 

영형(令兄) 대인께선 한림(翰林) 출신이십니까?”

하므로, 나는,

 

아니어요.”

하였다. 노인이 붉은 명함 한 장을 내어 보이며,

 

저는 이와 같습니다.”

한다. 오른편에 가는 글씨로,

 

통봉대부(通奉大夫 종삼품(從三品)) 대리시경(大理寺卿) 치사(致仕) 윤가전(尹嘉銓).”

이라 씌어 있다. 나는,

 

()이 이미 공사(公事)를 그만두셨다면 무슨 일로 멀리 변새 밖에 나오셨나요?”

하였더니,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었답니다.”

한다. 또 한 사람이,

 

저 역시 조선 사람이올시다. 천명(賤名)은 기풍액(奇豊額)이옵고, 경인년(庚寅年 1770)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현재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로 근무 중입니다.”

한다. 윤공(尹公),

 

이제 사해(四海)가 한 집안이라, 문을 나서면 모두 동포 형제가 아니옵니까. 고려의 박인량(朴寅亮)이 혹시 존문(尊門)의 명망 높은 어른이 아니시옵니까.”

하기에 나는,

 

아닙니다. 주죽타(朱竹坨) 채풍록(採風錄) 중에 나타난 ( 박미(朴瀰))라는 어른이 저의 5대조(代祖)랍니다.”

했더니, 기공(奇公),

 

과연 문망(文望)이 높으신 상경(上卿)이시구려.”

하고, 윤공은 또,

 

왕어양(王漁洋) 지북우담(池北偶談) 중에 그 어른의 시문(詩文)을 상세히 실었습니다. 이른바 제비와 기러기가 서로 등지고,말과 소도 상관이 없는 곳이었는데, 이제 하늘이 주신 연분이 공교로워 이곳 새북(塞北)에서 평수(萍水)의 종적이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책에 나오는 어른의 후손이구려.”

한다. 좌중에 있던 한 사람이 감탄하는 어조로,

 

그의 시를 읊고 그의 책을 읽고도 그의 인품을 몰랐다니 될 일입니까.”

한다. 기공은,

 

비록 옛 어른은 가셨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전형(典刑)은 남아 있지 않소.”

하며, 이어서,

 

귀국의 연사(年事)는 어떻습니까.”

한다. 나는,

 

유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가을이 아직 멀었으므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올 때엔 우순풍조(雨順風調)하였습죠.”

하였다. 좌중(座中)에 또 한 사람은 성명이 왕민호(王民皥)라는 거인(擧人)이다. 그는,

 

조선은 땅이 얼마나 너릅니까.”

한다. 나는,

 

옛날 기록에는 5천 리라 하였지만, 단군의 조선은 당요(唐堯)와 한 때였고, 기자(箕子)의 조선은 주 무왕(周武王 희발(姬發)) 때에 봉한 나라였으며, 위만(衛滿)의 조선은 진() 때에 연()의 백성들을 이끌고 피란왔기에 모두들 부분적으로 한 쪽만을 점유하였으니, 땅이 5천 리가 다 차지 못하였을 것이며, 전조(前朝) 때엔 고구려백제신라 등을 합하여 고려가 되었으니, 동서가 천 리요 남북이 3천 리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중에 조선의 민물(民物)과 요속(謠俗)을 적은 것이 실지와 달라서, 모두 기자위만 때의 조선이요, 오늘의 조선은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를 쓴 이가 대체로 외국 일은 간략하게 하므로, 한갓 옛날의 기록을 좇을 따름이었으나, 그 토풍(土風)과 국속(國俗)이란 제각기 시대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로지 유교(儒敎)를 숭상하여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모두 중화(中華)를 본받았으므로, 예로부터 소중화(小中華)’라는 이름이 있었으며, 나라의 규모라든가 사대부(士大夫)의 행신범절이 전혀 조송(趙宋)과 다름없습니다.”

했더니, 왕군(王君),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할 만하구려.”

하고, 윤공은,

 

아아, 찬란하게도 태사(太師)의 유풍(遺風)이 남았으니 가히 존경할 만하구려. 시종(詩綜)에 실려 있는 영존선공(令尊先公)께서는 어째서 소전(小傳)이 없었는지요.”

하기에, 나는,

 

비단 우리 선인(先人)의 자호와 관작이 빠졌을 뿐만 아니고, 그 중 소전이 있다는 이도 대개가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저의 5대조의 휘()는 미(), 자는 중연(仲淵)이며, 호는 분서(汾西)라 하여, 문집 네 권이 국내에서 간행되어 있고, ()의 만력(萬曆) 때 어른이시며, 소경왕(昭敬王)의 부마(駙馬)로 금양군(錦陽君)이요,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라 합니다.”

했다. 윤공은 이를 품속에 거둬 넣으며,

 

이것으로 빠진 곳을 보충하여야죠.”

하고, 왕 거인(王擧人),

 

여느 잘못된 곳도 바로잡아 주셔야죠.”

하고, 기공도,

 

옳습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입니다.”

한다. 나는,

 

나는 본디 기억력이 분명하지 못해서 책을 놓고 고증(攷證)했으면 좋겠습니다.”

했다. 기공이 왕 거인을 돌아보며 무어라 수작하고, 윤공 역시 서로 이야기한 끝에, 이윽고 왕 거인이 곧 명시종(明詩綜)’이란 석 자를 써서,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르자, 한 청년이 앞에 와 절한다. 왕 거인이 그 종이쪽지를 주니, 청년이 받아 들고 재빨리 어디로 가버린다. 아마 다른 곳에 빌리러 보냄인 듯하다. 그 청년이 곧 돌아와 꿇어앉아서,

 

없습니다.”

한다. 기공이 또 한 사람을 불러 그 종이쪽지를 주자, 곧 돌아와서 무어라 말하니 왕 거인은,

 

새외(塞外)엔 워낙 책점이 없더군요.”

한다. 나는,

 

우리나라 이달(李達)이란 이가 있는데, 그의 호는 손곡(蓀谷)입니다. 이에 이달의 시()를 싣고, 또 따로 손곡의 시를 실었으니, 이는 그의 호를 보고서 딴 사람의 성명으로 잘못 알고 나누어 실은 모양입니다.”

했더니, 세 사람이 크게 웃고 서로 돌아보며,

 

옳아, 그렇구먼요. 치이(鴟夷)나 도주(淘朱)가 애초에 한 사람 범려(范蠡)이거든요.”

한다. 윤공이 갑자기 바삐 일어서면서 붉은 명함 석 장과 자기가 지은 구여송(九如頌)을 내어 주며,

 

선생의 수고를 빌려 영형(令兄) 대인께 뵈옵고자 하옵니다.”

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며,

 

윤대인(尹大人)께서 방금 조정에 나가시니 후일 다시 만납시다.”

한다. 윤공은 이미 모복(帽服)을 갖추어, 조주(朝珠)를 걸고, 나를 따라 나와서 정사의 방 앞에 이르렀다. 아까 문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아득히 그가 이곳에 들를 것을 몰랐었다. 대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윤공이 방금 조정에 나간다 하였을 뿐, 윤공의 명함 내놓는 것이 그같이 간솔하기로, 곧 나를 따라올 줄은 나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사는 밤낮으로 시달린 나머지 겨우 눈을 붙이었고, 부사와 서장관은 내가 소개할 바 아니며, 더욱이 우리나라 대부들은 생()으로 존귀한 체함이 대단하여, 중국 사람을 보면 만인(滿人)한인(漢人)의 구분도 없이 모두 휩쓸어 되놈으로 보고, 한갓 마음만 도도한 체하는 것이 애초부터 몸에 밴 습속이 되어 버렸다. 그가 어떠한 호인(胡人)이며 무슨 지체인지 알기 전에 벌써 그를 반겨 맞이할 리도 없거니와, 비록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필시 견양(犬羊)과 같이 푸대접할 것이며, 또한 나를 불긴하게 여길 것이다. 윤공이 뜰에 서서 기다리므로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내가 그제야 정사에게 들어가 말하였다. 정사는,

 

나 혼자서 만날 수는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한다. 나는 몹시 늙은 손님이 뜰에 오래 서 있음을 딱하게 여겨서 나가,

 

정사께서 밤낮을 가리지 않으시고 먼 길을 오시느라 매우 피로하시므로 삼가 맞이하지 못하오니, 다른 날에 몸소 나아가 사례하려 하옵니다.”

하였다. 윤공은 곧,

 

그렇습니까.”

하고 한 번 읍하고 나가는데, 그 기색을 살펴보니 매우 머쓱한 모양이었으며, 표연히 가마를 타고 가버렸다. 그 가마 차림의 휘황찬란한 품이 참으로 귀인이 타는 것이다. 종자(從者) 10여 명이 모두 비단옷에 수놓은 안장을 하고 가마를 호위하고 가는데, 향내 바람이 멀리 풍기곤 한다.

통관이 당번한 역관에게,

 

귀국에서도 부처를 존경하는지요. 국내의 절은 얼마나 있죠?”.

하므로, 수역이 들어와 사신에게 여쭙되,

 

통관의 이 말은 허투루 하는 것이 아닌 듯하오니 무어라 대답하오리까.”

한다. 삼사가 의논하여 수역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습속에는 본디 부처를 숭배하지 않았으므로, 시골엔 혹 절이 있으나 서울이나 도회에는 없는 거요.”

하고 대답하게 지시하였다. 조금 뒤에 군기장경(軍機章京) 소림(素林)이 관중(館中)에 왔으므로, 삼사가 캉[]에 내려 동면으로 앉았다. 이는 지세를 따른 것이었다. 소림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입으로 전달한다.

 

조선 정사는 이품(二品) 끝의 반열(班列)에 서라.”

이는 진하(陳賀)하는 날의 조정에서의 좌차(座次)를 미리 일러 줌인데, 이는 전에 없던 일이라 한다. 그리고 소림은 나는 듯이 몸을 돌려 가버렸다. 또 예부(禮部)에서 관중에 말을 전해 왔다.

 

사신의 우반(右班)에 오름은 전례에 없는 은전(恩典)인즉, 의당 황감하옵다는 인사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니, 이 뜻으로 예부에 글월을 내면 곧 황제께 올리겠소.”

사신은 곧,

 

배신(陪臣)이 사신으로 와서 비록 황제의 지극하신 은총을 입사와 황감하기 그지없사오나, 사사로이 사례함은 도리에 어긋남일까 하오니 어떠하오리까.”

했더니, 예부에서,

 

무엇이 해롭겠소.”

하고 잇달아 독촉이 빗발치듯 한다. 황제는 나이가 높고 또 재위(在位)한 지 오래여서 권세가 한 손에 있고, 총명이 쇠하지 않았으며 기혈이 더욱 왕성하였다. 그러나 해내가 태평하고 임금의 자리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시새우고 사납고 엄하고 가혹한 일이 많을뿐더러, 기쁘고 성냄이 절도가 없으므로 조정에 선 신하들은 모두 그때그때 잘 꾸며대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오로지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을 시의(時義)에 맞는 일인 줄로 알아, 이제 예부에서 정문(呈文)을 이다지 재촉하는 것도 대체로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일로서, 그들의 거조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지시가 오로지 예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당번 역관의 말이,

 

전년 심양에 사신갔을 때도 글월을 올려서 사례한 일이 있사온즉, 이번 일도 그와 다를 것이 없을 듯하오이다.”

한다. 이에 부사와 서장관이 서로 의논하여 글월을 만들어서 예부에 보내어, 곧 황제에게 바치게 하였다. 예부에서 또 내일 오경(五更)에 궐내에 들어가서 황은(皇恩)을 사례하게 하니, 이는 이품과 삼품으로 우반(右班)에 참하(叅賀)하게 된 은혜를 사례하라 함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다시 윤공(尹公)의 우소(寓所)를 찾았더니, 왕군(王君)은 이미 다른 방으로 옮겨 갔고, 기공(奇公)은 중당(中堂)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윤공과 더불어 기공의 처소에서 이야기하였다. 윤공은 얌전하고도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아까는 몹시 바빠서 이야기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시종의 빠지고 잘못된 곳을 들려 주셔서 선배의 소루한 점을 보충하도록 하여 주시오.”

한다. 나는,

 

우리나라 선유(先儒)들은 바다 저 한 편 구석에서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도록 한 곳을 떠나지 못하고는, 반딧불처럼 나부끼고 버섯처럼 말라서, 겨우 하잘것없는 시편(詩篇)으로써 큰 나라의 책에 실리게 됨은 실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나, 우물에 떨어진 모수(毛遂)가 있는가 하면, 좌중을 놀라게 하던 진공(陳公)이 있다는 것은 불행히도 너무 지나친가 봅니다. 우리나라 선유(先儒) 중에 이선생 이()라는 어른이 있으니, 그의 호는 율곡(栗谷)이요, 또 이 상공(李相公) 정귀(廷龜)라는 이가 있으니, 그의 호는 월사(月沙)인데, 시종에는 이정귀의 호가 율곡이라 잘못 적혔고, 월산대군(月山大君)은 공자(公子)인데, 그의 이름이 ()’이므로 여자인 줄로 잘못 알았으며, 허봉(許篈)의 누이동생 허씨(許氏)는 호가 난설헌(蘭雪軒)인데, 그 소전(小傳)에는 여관(女冠 여도사(女道士))이라 하였으니, 우리나라엔 본디 도관(道觀)’이니 여관이니 하는 것이 없으며, 또 그의 호를 경번당(景樊堂)이라 하였으나, 이는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허씨가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었는데, 김성립의 얼굴이 오종종하게 못생겼으므로 그 벗들이 그를 놀리어 그 아내가 두번천(杜樊川)을 연모한다 하여 조롱한 것입니다. 대개 규중(閨中)의 음영(吟詠)이 본시 아름답지 못한 일인데, 더욱이 두번천을 연모한다고 유전(流傳)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까.”

했다. 기 두 분이 모두 크게 웃었다. 문 밖에 아이놈들이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고 모두 늘어서서 따라 웃는다. 이는 이른바 웃음소리만 듣고 따라 웃는다는 격이다. 알지 못하겠노라, 그들의 웃음이 무슨 일인지. 나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영돌(永突)이 찾아왔으므로 일어서 나오니, 두 사람이 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여 주었다. 때마침 달빛이 뜰에 가득하고, 담 너머 장군부(將軍府)에서는 이미 초경(初更) 넉 점을 치는 야경 소리가 사방으로 울린다. 상방(上房)에 들어가니 하인들이 휘장 밖에 누워 코를 골고 정사도 이미 잠들었다. 짧은 병풍 하나를 격하여 나의 잠자리를 보아 놓았다. 일행 상하가 닷새 밤을 꼬박 새운 끝이므로 이제 깊이 잠든 모양이다. 정사 머리맡에 술병 둘이 있기에 흔들어 보니, 하나는 비고 하나는 차 있었다. 달이 이처럼 밝은데 어찌 마시지 않으리. 마침내 가만히 잔에 가득 부어 기울이고, 불을 불어 꺼버리고서 방에서 나왔다. 홀로 뜰 가운데 서서 밝은 달빛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할할하는 소리가 담 밖에서 들린다. 이는 낙타가 장군부(將軍府)에서 우는 소리였다. 드디어 명륜당(明倫堂)으로 나왔다. 나와 본즉, 제독과 통관의 무리가 각기 탁자를 끌어다 둘을 한데 붙여 놓고 그 위에서 잠들었다. 제 비록 되놈이기로 무식함도 심하다. 그 누워 자는 자리인즉, 곧 선성(先聖)선현(先賢)께 석전(釋奠)이나 석채(釋菜)를 거행할 때 쓰는 탁자인데, 어찌 감히 이를 침상으로 대용할 수 있으며, 또 어찌 차마 누워 잘 수 있으랴. 그 탁자들은 모두 붉은 칠을 하였는데 백여 개가 있었다.

오른편 행각에 들어가니, 역관 세 사람과 비장 네 사람이 한 구들에 누워 자는데 목덜미와 정강이를 서로 걸치고 아랫도리는 가리지도 않았다. 천둥소리처럼 코를 골지 않는 자가 없는데, 혹은 병을 거꾸러뜨려 물이 쏟아지는 소리요, 혹은 나무를 켜는데 톱니가 긁히는 소리였으며, 혹은 혀를 끌끌 차며 사람을 꾸짖는 시늉이요, 혹은 꽁꽁거려 남을 원망하는 정경이다. 만리 길을 함께 고생하고 와서 자나 먹으나 떠남이 없으매, 그 정분이야말로 친형제와 다름없이 사생을 같이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잠든 모습을 볼 때엔 한 자리에 꿈이 다르고, 그의 간담(肝膽)은 초()()처럼 먼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담뱃불을 붙이고 나오니, 개 소리가 표범 소리인양 장군부에서 들려 온다. 그리고, 야경 치는 소리가 마치 깊은 산중 접동새 소리같이 울렸다. 뜰 가운데를 거닐며, 혹은 달려도 보고 혹은 발자국을 크게 떼어 보기도 해서 그림자와 서로 희롱하였다. 명륜당 뒤의 늙은 나무들은 그늘이 짙고, 서늘한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서 잎마다 구슬을 드리운 듯, 구슬마다 달빛이 어리었다. 달 밖에서 또 삼경의 두 점을 쳤다. 아아, 애석하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이런 때에는 어찌 우리 일행만이 모두 잠들었으랴. 도독부(都督府)의 장군도 그러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곧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이 베개에 머리가 저절로 닿았다.

 

 

[C-001]가을 : 이 위에 경자(庚子)’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나, ‘박영철본에 의하여 삭제하였다.

[D-001]얼대인[乙大人] …… 의미였다 : 이 부분은 주설루본에 의거하였다. ‘박영철본에는 얼대인[二大人]’으로 되었다.

[D-002]대리시경(大理寺卿) : 최고 법원장(法院長)에 해당하는 벼슬.

[D-003]박인량(朴寅亮) : 고려 문종(文宗) 때 문장가로서, 송에 사신으로 가 문장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므로, 송에서 그의 문집을 출판하기까지 하였다.

[D-004]주죽타(朱竹坨) : 주이준(朱彛尊). 죽타는 호.

[D-005]왕어양(王漁洋) : 어양은 왕사진(王士稹)의 호.

[D-006]제비와 …… 등지고 : 두 후조(候鳥)가 남북의 추향이 다름을 일렀다.

[D-007]말과 …… 곳이었는데 : 좌전(左傳), “풍마우(風馬牛)가 서로 미치지 못한다.” 하였는데, 풍은 주(), “암수가 서로 유인함이다.” 하였으니, 이는 초자(楚子)가 제후(齊侯)에게 보낸 말로써, 제와 초의 거리가 멀다는 의미.

[D-008]그의 …… 일입니까 :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句節).

[D-009]조송(趙宋) :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성인 조()를 붙여서 다른 송과 구별하였다.

[D-010]태사(太師) : 기자(箕子)가 일찍이 은의 태사 벼슬에 있었다.

[D-011]시종(詩綜) :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의 저.

[D-012]소경왕(昭敬王) : 조선 선조(宣祖)의 시호.

[D-013]이달(李達) : 조선 중종(中宗) 때 시인. 자는 익지(益之).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삼당(三唐)의 시파를 이룩하였다.

[D-014]구여송(九如頌) : 구여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편(天保篇)에 나오는 아홉 가지의 축복, 곧 여산(如山)여부(如阜)여강(如岡)여릉(如陵)여천방지(如川方至)여월항(如月恒)여일승(如日升)여남산수(如南山壽)여송백무(如松柏茂).

[D-015]배신(陪臣) : 제후(諸侯)의 대부가 천자를 대하여 스스로 일컫는 말.

[D-016]사사로이 …… 하오니 : 인신(人臣)은 외교(外交)가 없다는 의미.

[D-017]모수(毛遂) : 모수는 전국 때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식객(食客)으로, ()에 유세(遊說)하여 진()을 물리친 변사(辯士).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우물에 빠졌다 한다.

[D-018]진공(陳公) : 진공은 곧 한()의 명사 진번(陳蕃). 자는 유자(孺子). 그가 일찍이 재명(才名)이 있어서 좌객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와 같은 이름을 지닌 이가 있었다.

[D-019]이선생 이() : 이이를 말한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정치 이론가. 자는 숙헌(叔獻).

[D-020]이상공(李相公) 정귀(廷龜) : 이정귀를 말한다.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문학가. 자는 성징(聖徵).

[D-021]월산대군(月山大君) : 조선 성종(成宗)의 형. 월산은 봉호. 자는 자미(子美).

[D-022]허봉(許篈) : 조선 선조 때 문학가. 자는 미숙(美叔). 허균(許筠)의 형.

[D-023]허씨(許氏) : 조선의 탁월한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D-024]두번천(杜樊川) : ()의 풍류 미남으로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 번천은 호요, 자는 목지(牧之).

[D-025]두번천을 …… 않으리까 : 허씨의 호 경번은 번천을 연모한 것이 아니라 옛 선녀(仙女) 번부인(樊夫人)을 연모한 것이다. 연암이 이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지 않음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D-026]웃음소리만 …… 웃는다 : 우리나라 속담.

[D-027]역관 세 사람 : 홍명복조달동윤갑종.

[D-028]비장 네 사람 : 주명신정창준이서귀조시학.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0일 병진(丙辰)

 

 

개다.

영돌이 나를 깨웠다. 당번 역관과 통관이 모두 문 밖에 모이어, 연방 때가 늦었다고 재촉한다. 나는 겨우 눈을 붙였다가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야경 소리가 아직도 들려 온다. 노곤한 몸에 달콤한 졸음으로 꼼짝하기 싫은데, 아침 죽이 머리맡에 놓여 있다. 억지로 일어나서 따라가 보니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가 있다. 등불 빛에 좌우의 시전(市廛)이 보이나, 연경보다는 어림없고 심양요동에도 미칠 수 없었다.

() 밖에 이르렀으나, 날이 오히려 새지 않았으므로 통관이 사신을 인도하여 큰 묘당에 들어 쉬게 하였다. 이는 지난해 새로 세운 관제묘(關帝廟)이다. 중첩된 누각과 깊은 전당, 굽은 행각, 겹친 곁채들의 조각이 공교롭고 단청이 어리어리하다. 중들이 모여들어 서로 다투어 구경하고 있다. () 안에는 이곳저곳에 연경의 벼슬아치들이 와서 머물러 있고, 왕자(王子)들도 이 속에 많이 와 붙여 있다 한다.

당번 역관이 와서,

 

어제 예부에서 알린 것은 다만 정사와 부사의 사은(謝恩)만을 말하였으니, 이는 대저 황제가 명을 내려 정사부사만을 우반(右班)에 승참(陞叅)하게 함이며, 따라서 그 은혜를 사례하는 것이므로 서장관은 사은하는 일이 없을 듯하다.”

한다. 이에 서장관은 관제묘에 머물고, 정사와 부사는 궐내로 들어갈 제 나도 따라 들어갔다. 모든 전각에는 단청을 꾸미지 않았고,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편액을 붙였는데, 오른편 곁채에 예부 조방(朝房)이 있어서 통관이 이에 인도한다. 한인(漢人) 상서(尙書) 조수선(曹秀先)이 교의에서 내려와 정사의 손을 잡고 매우 반기는 뜻을 보이며,

 

대인(大人)은 앉으시죠.”

한다. 사신은 손을 들고 사양하여 주인이 먼저 앉기를 청하였으나, 조공(曹公) 역시 손을 들어 연방,

 

대인께서 먼저 앉으시죠.”

한다. 사신은 굳이 사양하기 4, 5차에 이르렀으나, 조공은 더욱 사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정사와 부사가 할 수 없이 먼저 캉[]에 올라앉았다. 그런 다음에야 조공이 비로소 교의에 걸터앉아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사신의 의관 그의 모복(帽服)에 비기면 가위 풍채로운 선인(仙人)이라 할 수 있겠으나, 말이 통하지 못하고 행지(行止)가 서툴러서 수어 수작이 저절로 뻣뻣하고 서먹하여, 저네들의 세련되고 은근한 솜씨에 비기면 그 생경(生硬)함이 도리어 중후한 태도를 갖게 된다. 정사는,

 

서장관의 거취(去就)는 어떻게 하오리까.”

하였더니, 조공(曹公),

 

오늘 사은엔 함께 할 것이 아니고, 후일 하반(賀班)에는 함께 나와도 좋겠습니다.”

하고는 곧 일어선다. 통관이 또,

 

만인(滿人) 상서(尙書) 덕보(德甫)가 들어옵니다.”

하기에, 사신이 문에 나와서 맞아 읍하니, 덕보 역시 읍하여 답례하고 발을 멈추어,

 

행리(行李) 무양(無恙)하신지요. 어제 황상께서 내리신 각별한 은총을 잘 아시는지요.”

하므로, 사신은,

 

황은(皇恩)이 거룩하와 영광이 그지없소.”

하였다. 덕보는 웃으면서 무어라 지껄였으나, 그 말소리가 목에 걸리는 듯 꺽꺽하여 ()’인지 ()’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대개 만주 사람들의 말은 이 따위가 일쑤이다. 그도 말을 마치고 곧 가버린다. 내옹관(內饔官)이 찬() 세 그릇을 내어 왔는데, 설기와 돼지고기 적과 과실 들이다. 떡과 과실은 누런 쟁반에 담고, 돼지고기는 은쟁반에 담았다. 예부낭중(禮部郞中)이 곁에 있다가,

 

이는 황제의 아침 찬에서 세 그릇 물려 온 것이오.”

한다. 얼마 안 되어 통관이 사신을 인도하여 전문 밖에 나아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고 돌아온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와서 읍하며,

 

이번 황은(皇恩)이야말로 망극하오이다.”

하고, 그는 또,

 

귀국은 의당 예단(禮單)을 더 보내야 할 것이오. 그러면, 사신과 종관(從官)에게도 두 번째로 상품이 내릴 것이리다.”

한다. 그는 곧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郞) 아숙(阿肅)인데, 만주 사람이었다. 사신은 조방(朝房)에 다시 들고, 나는 먼저 나왔다. 대궐 밖에는 수레와 말이 빽빽이 들어섰는데, 말은 모두 담을 향하여 즐비하게 늘어섰으되 굴레도 없고 고삐도 없는 것이 마치 나무로 만들어 세운 것 같았다. 문 밖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는데, 지껄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황자(皇子)가 오시는 거요.”

한다. 한 사람이 말을 탄 채 궐내로 들어가는데,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가 소위 황륙자(皇六子) 영용(永瑢)이다. 흰 얼굴에 얽은 자욱이 낭자하고, 콧날은 낮고 작으나 볼이 몹시 넓으며, 흰 눈에 눈자위가 세 거풀 지고, 어깨가 넓고 가슴이 떡 벌어져서 체격이 건장하긴 하나, 전혀 귀기(貴氣)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글을 잘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지금 사고전서(四庫全書) 총재관(總裁官)이며, 민망(民望)이 그에게 쏠린다 한다. 내 일찍이 강녀묘(姜女廟)에 들어갔을 때, 그 벽 위에 황삼자(皇三子)와 황오자(皇五子)의 시()를 깊이 간직한 것을 보았다. 황오자의 호는 등금거사(藤琴居士)라 하며, 시가 몹시 쓸쓸하고 글씨마저 가냘파서, 재주는 있으나 황왕가(皇王家)의 부하고 귀한 기상이란 엿볼 수 없었다. 그리고, 등금거사는 호부 시랑(戶部侍郞) 김간(金簡)의 생질이요, ()은 상명(祥明)의 종손(從孫)이다. 상명의 조부는 본시 의주(義州)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갔으며, 상명은 벼슬이 예부 상서에 이르렀고, 옹정(雍正) 때 사람이다. ()의 누이동생이 궁중에 들어가서 귀비(貴妃)가 되어 총애를 받았었다. 건륭제의 뜻은 다섯째 아들에게 뒷일을 맡기려 하였는데, 연전에 일찍 죽어 버리고 지금은 영용이 총애를 독차지하여서, 지난해에 서장(西藏)에 가서 반선(班禪)을 맞아 왔다 한다. 그 죽은 아들이 읊은 시()는 뜻이 몹시 스산하고, 그 남은 아들의 것도 귀기(貴氣)가 전혀 없으니, 폐하(陛下)의 집안 일이 어찌 될지 모를 노릇이다.

가산(嘉山) 사람 득룡(得龍)은 마두로 연경에 드나든 지 40년이어서 중국말에 능숙하였다. 이 날 많은 사람 중에서 멀리 나를 부르기에 사람들을 밀치고 가보니, 마침 한 늙은 몽고왕(蒙古王)과 서로 손잡고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몽고왕은 모자에 홍보석(紅寶石)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나이는 여든 하나요, 키가 거의 한 길[6]이나 되는 장신인데,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 길이는 한 자 남짓한데, 검은 바탕에 회백색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체머리를 흔드는 것이 아무런 보잘것이 없어 마치 금방 거꾸러지려는 썩은 나무등걸 같은데, 전신의 원기(元氣)가 모두 입으로 나오는 듯하다. 그 늙은 모양이 이러하니, 그가 설사 묵돌(冒頓)일지라도 두려울 것이 못 된다. 따른 자가 수십 명이건만 부축하지도 않는다. 또 한 몽고왕이 있는데, 건장하고 기운이 세어 보이기에 득룡과 함께 가서 말을 붙이니, 그는 내 갓을 가리키며 무엇인지 묻고는 말도 채 알아듣지 못한 사이에 가마를 타고 휭 가버린다.

득룡이 그들 귀인(貴人)마다 찾아가서 읍하고 말을 붙이니, 모두 읍으로 답례하며 대꾸하여 준다. 득룡이 나더러도 저와 같이 해 보라 하나, 내 처음 배워서 어색할뿐더러, 또 관화(官話)가 서툴러서 어찌할 수 없었다. 곧 관제묘에 들어간즉, 사신이 이미 나와서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드디어 함께 관()으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에 후당(後堂)으로 들어갔다. 왕 거인(王擧人) 민호(民皥)가 나와 맞는다. 왕 거인의 호는 혹정(鵠汀)이었으며, 산동도사(山東都司) 학성(郝成)과 한 구들에 거처한다. ()의 자는 지정(志亭)이요, 호는 장성(長城)이라 한다. 혹정이 우리나라 과거제도를 물으면서,

 

어떠한 문자로 무슨 글을 지어 바치는지요.”

하기에, 나는 약간 그 대략을 일러 주었다. 그는 또 혼인에 대한 예식을 묻기에, 나는,

 

()()()()는 모두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따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가례는 주부자(朱夫子)가 완성하지 못한 책이므로, 중국에서도 반드시 이것만을 좇지는 않습니다.”

하고, 그는 또,

 

귀국의 아름다운 점 몇 가지를 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기에, 나는,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쪽 구석에 자리잡았으나, 역시 네 가지 좋은 점이 있답니다. 온 나라 풍속이 유교(儒敎)를 숭상함이 첫째요, 땅에 황하(黃河)처럼 큰 수해의 걱정이 없음이 둘째요, 고기와 소금을 다른 나라에서 빌리지 않음이 셋째요,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함이 넷째 좋은 일입니다.”

하였다. 지정(志亭)이 혹정을 돌아보며 서로 무어라 중얼중얼하더니, 이윽고 혹정은,

 

진실로 좋은 나라이구려.”

하고, 지정은,

 

여자가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니, 온 나라가 모두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온 나라의 미천한 농사백성이나 하인들까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명색이 사족(士族)이라 하면, 비록 아무리 가난하고 또 삼종(三從)의 길이 이미 끊어졌다 하더라도, 평생 과부의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기품이 비복하천에게까지도 미쳐서, 저절로 풍속을 이룬 지 4백 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더니, 지정은,

 

금령(禁令)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별로 드러난 금령은 없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중국에서도 이 풍속이 막심한 폐단을 이루어서, 어떤 이는 납채(納采)만 하고 초례(醮禮)를 이루지 않았다거나, 성례만 하고 아직 첫날밤을 치르지 아니하였는데도, 불행히 사고가 있으면 평생토록 과부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데, 이런 건 오히려 나은 편이고, 심지어는 세의(世誼)가 두터운 집 사이면 아이가 뱃속에 들었을 때 이미 언약한다거나, 또는 더벅머리 때 부모끼리 말이 있었다가 불행하면,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어서 같이 따라 합장되기를 구하니, 이는 예()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므로, 군자(君子)들은 그런 것을 시분(尸奔)이라 기롱하기까지도 하고, 또는 절음(節淫)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국법(國法)으로 이를 엄격히 단속하여 그 부모에게 죄를 주기로 하였으나, 마침내 습속을 이루었으며, 동남 지방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유식한 집안에서는 여자가 성년(成年)이 된 뒤에 비로소 혼인을 말하니, 이는 요즈음 일입니다.”

한다. 나는,

 

유계외전(留溪外傳)에 보면, 효자가 간()을 내어서 그 어버이의 병을 낫게 한 일이 있으며, 조희건(趙希乾 명말의 저명한 효자)은 가슴을 뻐개고 염통을 꺼내다가 잘못 그 창자에 한 자 남짓 생채기를 내면서 이를 끊어 삶아서 그 어머니의 병을 고쳤으나, 나중에 그 상처가 아물어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하니, 이를 본다면 손가락을 끊었다든지 똥을 맛보았다 함은 오히려 대단하지 않은 일이었으며,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캐내었다거나 얼음 구멍에서 잉어[鯉魚]를 잡았다거나 하는 일들도 어리석은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이런 일이 많습죠.”

하고, 지정은,

 

최근에도 산서(山西)에서 어떤 효자의 정문(旌門)을 세웠다는데, 그 일인즉 이상하더군요.”

하고, 혹정은 또,

 

눈 속에서 죽순을 캐고 얼음 구멍에서 잉어를 잡은 일이 진실이라면, 이는 천지의 기운이 온통 문란해진 것이지요.”

하고는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지정은 또,

 

육수부(陸秀夫)가 임금을 업고 바다에 들어간 것과, 장세걸(張世傑 송말의 충신)이 향을 피워 배가 뒤집히기를 원한 것과, 방효유(方孝孺)가 그 십족(十族)의 멸함을 달갑게 받은 것과, 철현(鐵鉉)이 기름을 튀게 하여 사람을 데게 한 것 같음은 모두 범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족히 마음에 쾌하달 것이 못 되니, 뒷세상의 충신(忠臣)과 열사(烈士)가 되는 것도 그 역시 어려운 노릇입니다.”

하고, 혹정은,

 

천지가 개벽한 지 오래여서, 뛰어나게 쾌한 일이 아니면 이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남화노선(南華老仙 장주(莊周))의 말에, ‘한숨지으면서 효도를 말하는 것이 된다.’ 함은 이를 두고 말함이었지요.”

한다. 나는,

 

아까 왕() 선생께서 천지의 기운이 온통 문란하다고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단술을 고아서 소주를 만든다면 전내기 술[]을 말할 수 없을 것이요, 입으로 담배를 피운다면 다시는 매운 맛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만일 깊이 꼬집고 캐어 말한다면, 절의(節義)를 배척하는 의론이 세상에 다시 일고 말 것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또,

 

그렇습니다. 귀국 부인의 의관 제도는 어떠합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대강 저고리치마와 또 머리의 쪽찌는 법을 이야기하고, 원삼(圓衫)당의(唐衣) 같은 것은 탁자 위에 그 제도를 대충 그려서 보였더니, 두 사람이 모두 좋다 하였다. 지정은,

 

달리 약속한 곳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곧 돌아올 터이니, 선생께서 조금 더 앉아 계십시오.”

하고는 이내 일어나 버린다. 혹정은 지정을 극도로 칭찬하여,

 

그는 무인(武人)이기는 하지만, 문학이 넉넉하여 당세에 드문 사람입니다. 지금 사품(四品) 병관(兵官)이거든요.”

하고, 그는 또,

 

귀국 부인도 역시 발을 묶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아뇨, 중국 여자들의 활굽정이처럼 생긴 신은 차마 볼 수 없더군요. 휘뚱거리며 땅을 디디고 가는 꼴이, 마치 보리씨를 뿌리는 것처럼 외로 흔들고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려,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쓰러지곤 하니 이게 무슨 꼴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이로 인하여 도륙을 당하였음은 가히 세운(世運)을 짐작할 수 있으리다. 전조(前朝) 명대(明代)엔 그 죄가 부모에게 미쳤고, 본조(本朝)에 와서도 이에 대한 금령(禁令)이 몹시 엄격하였으나, 끝끝내 이를 막을 수 없음은 대개 남자는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때문이어요.”

한다. 나는,

 

모양이 흉하고 걸음이 불편한데, 왜 하필이면 그걸 합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만주 계집들과 한가지로 보일까봐 그런 게죠.”

하고는 곧 붓으로 지워 버리고 그는 또 이어서,

 

죽어도 고치지 않는답니다.”

한다. 나는,

 

삼하통주 사이에서, 늙은 거지 여인이 머리에 가득히 꽃을 꽂고 발을 싸맨 채 말을 따라오면서 구걸하는데, 마치 오리가 배불리 먹은 것처럼 뒤뚱뒤뚱 넘어질 듯하니, 내 보기에는 도리어 만주 여자보다도 흉하더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니까 삼액(三厄)이라 하였습죠.”

한다. 나는,

 

삼액이란 무슨 말씀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남당(南唐) 때 장소랑(張宵娘)이 송궁(宋宮)에 사로잡혀 왔는데, 궁인(宮人)들이 모두 그 작은 발이 뾰족한 게 보기 좋다 하여, 다투어서 헝겊으로 발을 팽팽하게 싸매어, 마침내 풍속이 이룩되었답니다. ()의 시절엔 중국 여자들이 발을 싸맴으로써 스스로 표적을 삼았으며, ()에 이르러선 이를 금했으나 소용이 없었지요. 그러나 만주 계집들이 중국 여자들의 발 싸맨 것을 비웃어 회음(誨淫)이라 하지만, 이는 실로 억울한 일입니다. 이것이 족액(足厄)이오. 홍무(洪武) 때에 고 황제(高皇帝)가 가만히 신락관(神樂觀 도관(道觀)의 이름)에 거둥하여, 한 도사(道士)가 실로 망건(網巾)을 떠서 머리칼을 싸매는 것이 보기에 편리할 듯해서, 이를 빌려 거울 앞에서 써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그 제도를 천하에 명령하였답니다. 그 뒤부터 말 갈기로써 실을 대신하여 꼭 졸라매어서 자국이 낭자하게 났으며, 이를 호좌건(虎坐巾)이라 함은 그 앞이 높고 뒤가 낮아서 흡사 범이 쭈그리고 앉은 것 같음을 이름이었고, 또 수건(囚巾)이라 함은 당시에도 벌써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천하의 두액(頭額)이 모두 그물 속에 갇혔다 함이었으니, 대개 불편히 여긴 이가 많았던 것입니다.”

하고는 붓으로 내 이마를 가리키며,

 

이게, 두액(頭厄)이 아니어요.”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그의 이마를 가리켜,

 

이 번쩍번쩍하는 건 무슨 액()이어요.”

하였다. 혹정은 별안간 슬픈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곧 천하두액(天下頭額) 이하의 글자를 모두 까맣게 지워 버리었다. 그리고 그는 또,

 

이 담배는 만력(萬曆) 말년에 양절(兩浙 절동(浙東)절서(浙西))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답답하고 취하여 넘어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毒草)입니다.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건만, 천하의 좋은 밭에 갈아서 이문(利文)이 좋은 곡식과 다름없고, 부인이며 어린아이들까지도 즐겨 피우지 않는 이가 없을뿐더러, 그 좋아하는 정도가 저 기름진 고기나 또는 차나 밥을 능가하더군요. 쇠끝과 불이 함께 입을 뜸질하니, 이 또한 세운(世運)이지요. 이보다 더한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께서도 이것을 즐기시는 편이지요.”

한다. 나는,

 

.”

하자, 혹정은 또,

 

저는 이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에 한 번 시험삼아 피어 보았더니, 곧 취하여 쓰러질 것 같고 구역질이 나서 죽을 뻔했습지요. 이야말로 구액(口厄)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아마 귀국에서도 사람마다 이를 피우겠죠.”

한다. 나는,

 

. 그러나, 부형이나 존장 앞에서는 감히 피우지 못합니다.”

하였다. 혹정은,

 

그럴 터이죠. 독한 연기를 피움이 남의 앞에서 불공(不恭)한 일이거든, 하물며 부형 앞에서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비단 그래서 그럴 뿐만 아니라, 입에 긴 대를 물고 어른 앞에 나아감은 몹시 거만스럽고 무례하기 때문이어요.”

하였다. 혹정은,

 

그럼, 토종(土種)입니까. 혹은 중국서 사가는 것입니까?”

한다. 나는,

 

만력 연간에 일본(日本)으로부터 들어와서, 지금은 토종이 중국 것과 다름없답니다. ()이 아직 만주(滿州)에 있을 때에, 담배가 우리나라에서 들어갔으며, 그 씨는 본시 일본으로부터 왔으므로 남초(南草)라 이른답니다.”

하였다. 혹정은,

 

이는 본시 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서양(西洋) 배편으로 온 것입니다. 서양 아미리사아(亞彌利奢亞 아메리카)의 임금이 여러 가지 풀을 맛보아서, 이것으로 백성들의 입병을 낫게 하였다죠. 사람은 비장(脾臟)이 토()에 속하였으므로, 허랭(虛冷)해서 습기가 차면 벌레가 생기고, 그것이 입에까지 번지면 당장에 죽는답니다. 이에 불로써 벌레를 쳐서, ()을 이기고 토()를 도와 장기(瘴氣)를 이겨 내고 습기를 덜어서 신효를 거두었으므로, 영초(靈草)라 일렀답니다.”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남령초(南靈草)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 신효함이 이와 같다면, 수백 년 동안에 온 세상이 다 함께 즐겨 피우는 것도 역시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가봐요. 선생의 이른바 세운이라 하심이 실로 좋은 말씀입니다. 만일 이 풀이 아니었더라면, 천하 사람이 모두 입창으로 죽었을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저는 담배를 즐기지 아니하여도, 나이 예순에 아직 입병이란 없고, 지정 역시 즐기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대체로 허황하여 이익을 낚는 데 교묘하니, 어찌 그 말을 다 곧이 듣겠습니까.”

한다. 이윽고 지정이 돌아와서, 혹정의 필담 중에, ‘저는 담배를 즐기지 아니하여도 지정 역시 즐기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에 먹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그거 아주 독하지요.”

하고는 서로 웃었다. 나는 이에 하직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군기 대신(軍機大臣)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전갈하기를,

 

서번(西番)의 성승(聖僧)에게 가보지 않겠느냐.”

하매, 사신은,

 

황제께서 작은 나라를 중국과 다름없이 보시니, 중국의 인사(人士)와는 스스럼없이 오가도 무방하지만, 여느 외국 사람과는 함부로 사귀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법이오.”

하였다. 군기 대신이 가버린 뒤, 사신들은 얼굴에 수심을 띠었고, 당번 역관들은 황황히 분주하여 마치 숙취(宿醉)가 덜 깬 사람 같았다. 그리고 비장들은 공연히 성을 내어서,

 

황제의 일 괴악하거든. 반드시 망할 거야, 반드시 망하지. 오랑캐니까 그렇지. 명 나라 때야 어디 이런 일이 있었나.”

하고, 수역(首譯)은 백망(百忙) 중에서도 비장을 향하여,

 

춘추(春秋) 대의를 논할 때가 아닐세.”

하고 핀잔주었다. 얼마 아니 되어 군기 대신이 또 말을 달려와서 황제의 명령을 거듭 전갈하기를,

 

이는 중국 사람과 마찬가지니 즉시 가보라.”

한다. 이에 사신이 서로 의논하여, 혹은,

 

가보는 것은 결코 중난(重難)한 일이야.”

하고, 또는,

 

글을 예부에 보내어 이치로 따지자.”

하고, 당번 역관은 말끝마다,

 

, .”

할 뿐이었다. 나는 본시 한산한 몸으로서 구경할 뿐, 사행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간섭이 없었으려니와, 또 이때껏 내게 묻는 일도 없었다. 이때 내 마음속으로 하도 희한하여,

 

이는 참으로 좋은 기회이다.”

하고는, 또 손가락 끝으로 공중에 무수히 권주(圈朱)를 치며,

 

좋은 제목(題目)이다. 이런 때 사신이 만일 소장을 올린다면, 그 의로운 명성이 천하에 떨치어서 크게 우리나라를 빛내리로다.”

하고, 또 스스로 묻기를,

 

그렇다고 군사를 낼 것인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이건 사신의 허물이니, 어찌 그 나라에 노여움을 옮길 것인가. 그러나, 사신이 그 빌미로 진( 운남의 별칭)( 귀주의 별칭)이니 운남(雲南)귀주(貴州)니 하는 곳으로 귀양살이가는 것쯤이야 하는 수 없는 일일 테지. 그리되면 내 혼자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 서촉(西蜀)과 강남(江南)의 땅을 내 곧 밟게 되리로다. 강남은 오히려 가깝되, 저 교주(交州 안남 하내(安南河內))니 광주(廣州 광동(廣東))니 하는 곳은 연경에서 만여 리 길이나 된다니, 내 구경이 이처럼 난만(爛漫)하여지리.”

하고, 하도 마음속으로 기뻐서 곧 밖으로 뛰어나가 동상(東廂) 밑에 서서 이동(二同)건량(乾糧)의 마두 이름 을 불러 내어,

 

얼른 술을 사오려무나. 너는 돈일랑 아끼지 말아라. 내 이제부터 너와 이별이다.”

하고, 술을 마시고 들어갔으나, 아직껏 의논이 정하여지지 않았는데, 예부의 독촉이 성화(星火) 같아서 비록 하원길(夏原吉)의 위풍(威風)일지라도 배겨 낼 수 없으므로, 안장과 말을 정돈하는 사이에 저절로 늦어져서 해가 이미 기울었다. 낮이 지나면서 날씨가 몹시 뜨거웠다. 행재소의 대궐문을 거쳐 성을 돌아서 서북으로 향해 반도 못 갔을 무렵에, 별안간 황제의 명령이 내렸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다른 날을 기다리라.”

이에 서로 돌아보며 놀라서 되돌아섰다.

소위 성승(聖僧)이란 서번의 승왕(僧王)인데, 호는 반선불(班禪佛)이요, 또 장리불(藏理佛)이라고도 하며, 중국 사람들은 거개 그를 존신(尊信)해서 활불(活佛)이라 일컫는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마흔두 대 전신(轉身)이라 하며, 전신(前身)은 중국에서 많이 태어났고, 나이는 지금 마흔셋이오.”

한다. 지난 오월 스무날에 열하로 맞아 와서, 따로 궁궐을 짓고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그의 하인들이 많아서, 이곳에 들어온 뒤에 점차 떨어져 남았으나, 그를 따라온 자가 그래도 수천 명이 넘으며, 그들은 모두 비밀히 병장기를 감추고 있건만 황제만이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한다. 이는 공연히 인심을 소란하게 하고자 하는 말인 듯싶다. 또 거리의 아이들이 부르는 황화요(黃花謠)는 이를 두고 말함이라 한다. 그리고 그 시()는 욱리자(郁離子)가 지은 것이다.

 

붉은 꽃 다 지고 누런 꽃 피는구나 / 紅花落盡黃花發

붉은 꽃이란 붉은 모자를 가리킴이었고, 몽고와 서번은 모두 누런 모자를 쓰는 것을 이름이었다. 또 한 노래에,

 

원래는 옛 물건이니 누가 정말 주인인고 / 元是古物誰是主

라 하였으니, 이 두 노래를 보건대 모두 몽고를 두고 부름이다. 몽고는 방금 마흔여덟 부가 강하고, 그 중 토번(吐番)이 가장 사납다. 토번은 서북의 호족(胡族)이었으며, 몽고의 별부(別部)로서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였다.

박보수(朴寶樹)가 예부에 가서 일을 탐문하고 와 하는 말이,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나라는 예()를 알건만 사신은 예를 모르네그려.’ 하더군요.”

하고는 보수와 통관들이 모두 가슴팍을 치고 울면서,

 

우리들은 죽습네그려.”

하나, 이는 통관 무리들이 일쑤 잘하는 버릇이라 한다. 비록 털끝만한 작은 일일지라도, 황제의 명령이라면 문득 죽는다고 야로를 하기가 일쑤인데, 하물며 중로에서 돌아가라 함은 마음에 언짢음을 뜻함에랴. 또 예부에서 전하는 말 중,

 

()를 모르네.”

라는 구절은 곧 불평을 띤 말인즉, 통관들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도 공연한 공갈만은 아니겠으나, 그 거조가 흉측하고 왈패스러워 사람들로 하여금 요절하게 한다. 우리나라 역관들도 두렵긴 할 테지만, 조금도 까딱하지 않았다.

저녁에 예부에서 알려 오기를,

 

내일 식후에나 모레 아침결에 황제께서 사신을 만나보실 테니, 일찍 서둘러서 늦지 말라.”

한다. 저녁 뒤에 윤형산(尹亨山)을 찾았다. 마침 홀로 앉아서 담배를 피우다가, 손수 담아 불을 붙여서 내게 권하고는,

 

영형 대인께서 귀중하신 몸 안녕하십니까?”

한다. 나는,

 

황제 덕택에 별고는 없으시답니다.”

하였더니, 그는 또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묻기에 나는,

 

이는 열수(冽水) 지방의 방언(方言)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공(尹公)은 또,

 

귀국에 악경(樂經)이 있다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는 중에 기공(奇公)이 와서 악경이란 글자를 보고는 역시,

 

귀국에 또 안부자(顔夫子 안회(顔回))가 지은 책이 있으나, 중국에 오는 사신(使臣)이 이 두 책을 지니고 오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지 못한다 하니, 정말 그렇습니까.”

한다. 나는,

 

공자가 계신데 안회(顔回)가 어찌 책을 지었으리까. 또 진() ()》ㆍ《()를 불살랐으니 어찌 악경만이 빠졌을 수 있으리까.”

하였더니, 기공은,

 

참 그럴 터이죠.”

한다. 나는 또,

 

중국은 문명(文明)이 집중되는 곳이니, 만일 우리나라에 참으로 이 두 가지 책이 있어서 가져 오려는 자가 있었다면, 이는 모든 신령이 두호할 일이거늘, 어찌 강물을 잘 건너지 못하였으리까.”

하였다. 윤공은,

 

옳은 말씀이어요. 고려지(高麗志)가 일본(日本)에서 나왔으니까요.”

하기에, 나는,

 

고려지라니, 몇 권이나 됩디까?”

하였더니, 윤공은,

 

난완(蘭畹) 무공련(武公璉)이 초() 청정쇄어(蜻蜓瑣語)에 고려서목(高麗書目)이 있습디다.”

한다. 기공이 나를 이끌고 나와서 달을 구경하는데, 이때 달빛이 낮같이 밝았다. 나는,

 

달 속에 만일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달에서 땅을 바라보는 이 있어서, 그 난간(欄干) 밑에 비겨 서서 우리와 함께 땅의 빛이 달에 가득함을 구경할 터이죠.”

하였더니, 기공이 난간을 치면서 기이한 말이라 일컬었다.

 

 

[C-001]병진(丙辰) :  병진 두 글자는 일재본에 의하여 추록했는데, 다른 여러 본에는 탈락되었다.

[D-001]조방(朝房) : 조회하러 들어갈 때의 대기실.

[D-002]조수선(曹秀先) : 당시 예부 상서. 자는 빙지(氷持), 호는 지산(地山).

[D-003]덕보(德甫) : 소작락덕보(素綽絡德保). ()는 보()의 그릇된 것이다. 자는 중용(仲容).

[D-004]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무릎을 꿇고 절하며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중국 최대의 경례.

[D-005]반선(班禪) : 서장의 국교인 라마교의 교주요, 최고 통치자. 다음 반선시말(班禪始末)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D-006]혹정(鵠汀) : ‘의 음은 흔히들 으로 읽었으나, 이제 원음을 따랐다.

[D-007]학성(郝成) : ‘의 음은 흔히들 으로 읽으나, 이에서는 원음을 좇았다.

[D-008]삼종(三從) : 의례(儀禮)에 나오는 말. 여자가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아들을 따르는 것.

[D-009]시분(尸奔) : 시체를 따라서 음분(淫奔)하는 것.

[D-010]절음(節淫) : 절개를 구실로 한 서방질.

[D-011]똥을 맛보았다 : 남북조 시대 유검루(庾黔婁)의 고사.

[D-012]눈 속에서 …… 캐내었다 : 맹종(孟宗)의 고사.

[D-013]잉어[鯉魚]를 잡았다 : 왕상(王祥)의 고사.

[D-014]육수부(陸秀夫) ……  : 송말의 충신. 최후에 애산(厓山)에서 임금을 업고 바다로 들어갔다.

[D-015]방효유(方孝孺) …… 받은 것 : 명초의 학자. 자는 희직(希直). 연왕(燕王)의 즉위조서(卽位詔書)의 기안을 거부하고는, 온 집안이 학살당했다.

[D-016]철현(鐵鉉) …… 한 것 : 명초의 명장. 연왕에게 사로잡혀서 악형을 당했다.

[D-017]원삼(圓衫) : 옛날 여자 예복의 일종. 연두색 길에 자주색 깃을 달고 색동을 달아 지었다.

[D-018]당의(唐衣) : 역시 옛날 여자 예복의 일종. 거죽은 초록빛, 안은 다홍빛이고, 깃과 고름은 자주색이며, 앞은 짧고 뒤는 길게 지었다.

[D-019]남자는 …… 말라 : 청초에 한족이 만족에 대하여 십부종(十不從)을 부르짖었는데, 그 열 가지의 첫째가 곧, “남자는 그들을 따르되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D-020]남당(南唐) : 오대 때 남경에 수도를 정했던 나라.

[D-021]장소랑(張宵娘) : 남당 후주(後主)의 궁인. 초승달같이 작은 발로 금련(金蓮) 위에서 춤추어서 후주의 마음을 고혹하게 하였으나, 남당이 망하매 송에게 사로잡히었다.

[D-022]회음(誨淫) : 그 발의 좁은 것으로 모든 사내들의 음탕한 생각을 맹동시킬 수 있다는 것. 역경(易經), “여인이 얼굴을 곱게 차림은 음란을 지도하는 것이다.” 하였다.

[D-023]서번(西番)의 성승(聖僧) : 라마교 승려. 서번은 티베트를 중심한 중앙아시아 지방을 총칭해 부르는 지명. ‘은 다른 본에 으로 된 것이 있으나 그릇되었다.

[D-024]하원길(夏原吉) : 명의 홍무 때 명신. 다섯 조정을 역사(歷事)하였으며, 대신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D-025]전신(轉身) : 라마교에서 말하는 전생(轉生). 반선이 죽는 순간 국내 다른 집에서 아기로 다시 태어나면, 그 아기를 찾아 길러서 후계자로 삼는다 한다.

[D-026]욱리자(郁離子) : 명 유기(劉基)의 별호. 이내 그의 저서의 이름이 되었다.

[D-027]() : ‘()’ 원 나라라는 의미로도 통한다.

[D-028]계림유사(鷄林類事) : () 손목(孫穆)이 우리나라 고사(故事)를 적은 책. 계림은 경주(慶州)의 고호.

[D-029]공자가 …… 지었으리까 : 논어에 나오는 안회의, “선생님이 계시니 제가 어찌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해학조로 이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1일 정사(丁巳)

 

 

개다.

새벽에 사신이 궐내로 들어갔다. 덕상서(德尙書)가 사신과 인사를 나눈 뒤에,

 

내일은 의당 만나보시겠다는 명령이 내릴 것이나, 오늘 역시 반드시 없으리라고는 기필할 수 없겠은즉, 잠깐 조방(朝房)에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한다. 사신이 모두 조방에 들어간즉, 황제가 또 어찬(御饌) 세 그릇을 내리었는데, 그 내용은 어제 것과 같았다. 나는 궐문 밖에 나가서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구경하였다. 어제 아침보다 더 분답하여 검은 티끌이 공중에 가득하며, 길가 다방(茶房)과 주점(酒店)에 수레와 말이 들끓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므로 속이 헛헛하여 혼자 사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한 젊은 중이 준마(駿馬)를 타고서 흑단(黑緞)으로 만든 방관(方冠)을 쓰고 공단으로 지은 도포(道袍)를 입었는데, 얼굴도 아름답고 의관의 차림도 말쑥한 품이, 중인 것이 아까웠다. 의기가 양양하게 지나치다가, 아주 큰 노새를 타고 오는 한 사람과 만나 말 위에서 서로 손잡고 반기더니, 중이 별안간 성낸 빛을 띠었다. 그러다가 둘이 다 목소리를 높이더니 마침내 말 위에서 서로 때리었다. 중이 두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또 한 손으로 머리를 팬다. 노새 탄 자는 몸을 기울이며 약간 비키더니, 모자가 떨어져서 목에 걸렸다. 그 역시 몸이 건장하고 머리와 수염이 약간 희끗희끗한데, 그 기색을 살피니 중에게 조금 꿀리는 모양이다. 둘이 서로 붙안은 채 안장에서 떨어져 땅에 뒹굴었다. 처음엔 노새 탔던 자가 중을 가로탔으나, 나중에는 중이 뒤쳐서 위에 올랐다. 제각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어 서로 때릴 수는 없고, 다만 얼굴에 침을 뱉을 뿐이다. 노새와 말은 마주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굴러갈 뿐, 에워싸 구경하는 사람도 없고, 풀어 말리는 자도 없었다. 서로 쳐다보고 내려다보면서 헐떡헐떡할 뿐이다.

한 과일점에 들렀다. 마침 새로 난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노전(老錢 중국의 엽전(葉錢)) 일백(一陌) 열여섯 닢이 우리나라 한 돈에 해당된다. 으로 배 두 개를 사가지고 나오니, 맞은편 술집의 깃대가 헌함 앞에 펄럭이고, 은호(銀壺)주병(酒甁)이 처마 밖에 너울너울 춤을 춘다. 푸른 난간이 공중에 걸쳤고, 금빛 현판은 햇빛에 어린다. 좌우의 푸른 술기[酒旗]에는,

 

신선의 옥패 소리 이곳에 머물렀고 / 神仙留玉佩

공경의 금초구는 끌러서 주는구나 / 公卿解金貂

라 씌어 있다. 다락 밑에는 수레와 말이 몇이 놓여 있고, 다락 위에선 사람들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마치 벌과 모기 떼 같았다. 나는 발걸음 가는 대로 다락 위로 올라가니, 계단이 열둘이었다. 탁자를 사이에 놓고 교의에 앉아 혹은 서넛, 혹은 대여섯 사람들이 끼리끼리 둘러앉았는데, 모두 몽고나 회자(回子)들이요, 무려 수십 패였다. 몽고 사람의 머리에 쓴 것은 마치 우리나라 쟁반 같고, 모자가 없으며, 그 위에는 양털로 꾸몄는데 누렇게 물들였다. 혹은 갓을 쓴 자도 없지 않으나, 그 모양은 우리나라 전립(氊笠)과 같은데, 혹은 등()으로 하고, 혹은 가죽으로 하여 안팎에 금을 칠하고, 혹은 오색 빛깔로 구름무늬 같은 것을 그렸다. 모두 누런 웃옷에 붉은 바지를 입었고, 회자는 대체로 붉은 옷을 입었으나, 또한 검은 옷도 많았다. 붉은 전()으로 고깔을 만들어 썼으나, 모자가 너무 길어서 다만 앞뒤에 차양을 달았을 뿐, 그 모양이 마치 돌돌 말린 연잎이 물 속에서 갓 나온 것 같고, 또 약을 가는 쇠 연[鐵硏]과 같이 두 끝이 뾰족하여 가볍고 부박해서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가 쓴 갓은 전립(氈笠) 이른바 갓이란 벙거지이다. 과 같은데 은으로 술을 새기고 꼭지에 공작 깃을 꽂았으며, 턱을 수정 끈으로 매었으니, 두 오랑캐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 만주족이고 한족이고 간에 중국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다락 위에 없었다. 두 오랑캐들의 생김생김이 사납고도 더러워서, 올라온 것이 후회가 되기는 하나, 이미 술을 청했는지라 그 중 한 좋은 교의를 골라서 앉았다. 술심부름꾼이 와서,

 

몇 냥()어치 술을 마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여기서는 술 무게를 달아 파는 것이다. 나는,

 

넉 냥만 쳐 오려무나.”

하고 가르쳐 주었다. 심부름꾼이 가서 술을 데우려 하기에, 나는,

 

데워선 못 써. 찬 것 그대로 달아 와.”

했더니, 술심부름꾼이 웃으면서 부어 와서 먼저 작은 잔 둘을 탁자 위에 벌여 놓으므로,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쓸어 엎어 버리고,

 

큰 술잔을 가져 와.”

하여, 모두 부어서 대번에 다 들이켰다. 뭇 되놈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개 내가 쾌하게 마시는 것을 장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중국의 술 마시는 법이 매우 얌전하여서, 비록 한여름에라도 반드시 데워 먹을뿐더러, 심지어 소로(燒露 소주)라도 끓이며, 술잔은 은행 알만한데도 오히려 이빨에 대어서 조금씩 마시고, 탁자 위에 남겨 두었다가 때때로 다시 마시며, 단번에 쭈욱 기울이는 법이 없고, 되놈들도 이와 같아서, 세속에서 이른바 큰 종지나 사발에 따라 마시는 일은 아주 없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래서 넉 냥쭝을 단숨에 마신 것은, 이것으로 저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대담한 척하려 함이니, 이는 실로 겁쟁이 짓이요, 용기가 아니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랄 때 여러 되가 이미 3()쯤 놀랐는데, 단번에 마시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도리어 저쪽에서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주머니에서 8푼을 꺼내어 심부름꾼에게 술값을 치러 주고 나오려는데, 여러 되가 모두 교의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 번 앉기를 권하고는, 그 중 한 사람이 제 자리를 비워서 나를 붙들어 앉힌다. 저희는 호의로 하는 것이나, 나는 벌써 등에 땀이 배었다. 내 어릴 때 하인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술 먹는 것을 보았는데, 그 주령(酒令) 중에,

 

자기 집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 본 적 없이 나이 일흔에 생남하고 보니, 등이 땀에 젖었구려.”

라는 구절이 있었다. 내 성미가 본디 웃음을 참지 못하므로, 사흘 동안 허리가 시큰거렸다. 오늘 아침에 만 리 변새에서 문득 뭇 되놈과 더불어 술을 마시매, 만일 주령을 세운다면 정말,

 

등에 땀이 솟는다.”

하여야 의당할 것이리라. 한 되놈이 일어나 술 석 잔을 부어 탁자를 두드리면서 마시기를 권한다. 나는 일어나 그릇에 남은 차()를 난간 밖에 버리고는, 그 석잔을 모두 부어 단숨에 쭈욱 들이켜고, 몸을 돌려 한 번 읍한 뒤 큰 걸음으로 층층대를 내려오는데, 머리끝이 으쓱하여 무엇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와서 길 가운데 서서 위층을 쳐다보니, 웃고 지껄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마 내 말을 하는 모양이다.

사관에 돌아오니 점심때가 아직 멀었기에 윤형산(尹亨山)의 처소에 들렀더니, 조정에 나가고 없었다. 다시 기 안찰(奇按察)을 찾았으나, 역시 없었다.

또 왕혹정(王鵠汀)을 찾았더니, 혹정이 구정시집서(毬亭詩集序) 한 수()를 내어 보이는데, 글도 그리 잘 되지 못하였고, 또 전편이 오로지 강희 황제와 지금 황제의 성덕(盛德)대업(大業)을 기술한 것으로, 그들을 요순처럼 높인 것이 지나치게 번거롭다. 미처 다 읽기 전에 창대가 와서,

 

아까 황제께서 사신을 불러 보시고, 또 활불(活佛)을 가보라 하십니다.”

한다. 나는 밥을 재촉하여 먹고 의주 비장(義州裨將)과 함께 궐내에 들어가서 사신을 찾았으나, 이미 반선(班禪)의 처소로 가고 없었다. 곧 궐문을 나오니, 황륙자(皇六子)가 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문 밖에 매어 두고, 구종들과 더불어 바쁜 걸음으로 들어간다. 어제는 말을 탄 채 그대로 들어가더니, 오늘은 말에서 내리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궁성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드니, 서북쪽 일대의 궁관(宮觀)과 사찰(寺刹)들이 면면이 눈에 들어온다. 혹은 너덧 층 누각도 있으니, 이는 이른바,

 

상강에 배를 타고 굽이굽이 돌아들 제 / 帆隨湘轉

형산 아홉 봉우리 그 얼굴 다 뵈누나 / 望衡九面

가 곧 이를 이름이리라. 군포(軍舖)가 있는 곳마다 숙위(宿衛)하는 장정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하다가, 내가 혼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보고 서로 다투어 서북쪽을 멀리 가리켜 준다. 그제서야 내를 끼고 가니, 물가에 흰 군막이 수천이나 있는데, 모두 수자리 사는 몽고병이었다. 또 북녘으로 눈을 돌려 멀리 하늘 가를 바라본즉, 두 눈이 별안간 어지러워진다. 반공에 우뚝 황금건물[金屋]이 솟았는데, 구름 속에 들어가 햇빛에 눈이 부신 까닭이다. 강에는 거의 1()나 되는 다리가 놓였으며, 난간을 꾸민 단청이 서로 어리었고, 몇 사람이 그 위로 다니는 것이 아련히 그림 같다. 이 다리를 건너고자 하니, 모래 위로 사람이 급히 오면서 손을 휘젓는 것이, 건너지 말라는 것 같다. 마음은 몹시 바빠서 말을 곧장 채찍질하였으나, 오히려 더딘 것 같으므로 마침내 말에서 내려 강을 따라 올라가니, 돌다리가 있고 그 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에 문을 들어서니, 기이한 바위와 이상한 돌들이 층층으로 쌓였고, 그 솜씨의 교묘함은 사람 아닌 귀신의 수법인 듯싶다.

사신과 당번 역관은, 궐내에서 바로 왔으므로 내게 미처 알리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기던 차에 내가 나타난 것이 뜻밖이어서, 모두들 내게 구경 벽()이 심하다고 조롱한다.

연경의 숲 사이에도 자주다홍초록파랑 등 여러 빛깔의 기와로 이은 집이 드러나 보이고, 더러는 정각(亭閣) 꼭대기에 금빛 호로병을 세운 것은 있었으나, 지붕 위에 금기와를 올린 것은 못 보았다. 이제 이 전(殿)에 덮은 기와가 비록 순금인지 도금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2층 대전(大殿)이 둘, 다락 하나, 문 셋이었고, 그 나머지 정각은 여러 빛깔로 된 유리기와인데, 이에 비기면 무색하여 보잘것이 없었다. 동작대(銅雀臺)의 기와는 가끔 캐어서 고연(古硏)으로 쓰나, 이는 가마에 구운 것이요, 유리가 아니었다. 유리기와는 어느 때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시인(詩人)이 이른바,

 

옥섬돌에 금지붕이여.”

하고 떠들던 것이 정말 오늘 내가 보는 것과 같음인지, 그 일이 사전(史傳) 중에 나타난 것으로는,

 

한 성제(漢成帝)가 소의(昭儀)를 위하여 집을 짓는데, 그 체()를 모두 구리로 하여 황금을 입히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가 이에 주()를 내어,

 

()란 문지방이니, 구리를 그 위에 입히고, 게다가 또 금을 입히었다.”

하였고, 또 사전에 이르기를,

 

바람벽 가운데엔 가끔 황금항(黃金缸)을 해 박고는, 남전산(藍田山)에서 나는 옥과 진주와 비취(翡翠)의 날개로 하였다.”

하였는데, 복건은 이르기를,

 

()이란 벽 가운데 가로지르는 것이다.”

하였고, 진작(晉灼),

 

금환(金環)으로 꾸민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영인(伶人) ()이나 반맹견(班孟堅)의 무리가 몇 번이나 힘껏 황금(黃金)이란 글자를 되풀이하여, 천 년 뒤에 한번 책을 펼치면 오히려 눈부시고 휘황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들은 벽이나 문지방에 금칠한 정도임을 보고, 역사를 쓰는 이들이 지나치게 과장했을 뿐이리라. 참으로 소의(昭儀)의 자매(姉妹)에게 이 집을 보였던들, 반드시 몸부림치며 침대에 쓰러져 울고 밥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성제(成帝)가 화려하게 하고 싶어하였더라도, 안창(安昌)무양(武陽)의 무리가 모두 유자(儒者)인지라, 반드시 옛 경서를 이끌어 붙여서 이를 반대했을 것인즉, 성제의 역량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었고, 또 설혹 그 뜻대로 되었다 하더라도, 반맹견의 필력(筆力)으로써 과연 어떻게 포장(舖張)하였을까. 알지 못하겠다. 대뜸,

 

금전(金殿)이 어리어리하구나.”

하지 않았겠느냐. 필시 이를 지워 버렸을 것이요, ,

 

금궐(金闕)이 하늘 높이 솟았다.”

고 하였겠지. 그러고 나서는 한번 읊어 보고 또 지워 버렸을 것이요, ,

 

“2층 대궐을 세우고 기와에 황금을 칠했다.”

하였거나, 또는,

 

임금께서 황금전(黃金殿)을 세웠다.”

라 하였을까. 비록 양한(兩漢) 때 문장이라 하였지만, 그는 늘 작은 제목을 커다랗게 과장하니, 이는 천고 작가(作家)들에게 끼친 한()이 아닐 수 없겠다. 예를 들면, 저 궁실을 잘 그린다고 하더라도 궁실에는 사면이 있고 또 안팎이 있으며, 또 덧놓이고 겹친 곳도 없지 않다. 이에 비록 서양의 그림이 제아무리 교묘하단들, 다만 한 면을 그렸으니 남은 세 면은 그릴 수 없을 것이요, 밖은 그려도 속은 그릴 수 없으며, 복전(複殿)첩사(疊榭)와 회랑(回廊)중각(重閣)은 단지 그 날아갈 듯한 처마와 아련한 대마루를 모사했을 뿐이요, 그 파고 새김이 섬세하여 털끝 같으니, 그림으로는 이를 그려 낼 수 없는 것이 곧 천고 화가(畵家)가 끼친 한이리라. 그러므로, 우리 공부자께서 이미 이 두 가지에 대하여 탄식하시되,

 

글월은 말을 다할 수 없고, 그림은 뜻을 다할 수 없다.”

하였던 것이다. 천하에 사관(寺觀)이 만을 헤아리지만, 금을 입힌 것은 다만 산서(山西) 오대산(五臺山)의 금각사(金閣寺)가 있을 뿐이다. 당 대종(唐代宗 이예(李豫)) 대력(大曆) 2(767)에 왕진(王縉)이 정승이 되어, 중서성(中書省) 부첩(符牒)을 내려서 오대산의 중 수십 명을 사방에 흩어 보내어 시주(施主)를 모아 이를 짓게 하되, 구리쇠로 기와를 굽고 금을 입히어서 그 비용이 여러 만금인데, 그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다. 이제 이 기와 역시 구리쇠로 굽고 금을 씌웠을 것이다.

내가 요양의 거리에서 잠시 쉴 제, 모두들 다투어,

 

황금, 갖고 오셨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금은 토산(土産)이 아니오.”

하였더니, 그들은 모두 비웃는다. 심양산해관영평통주를 지나칠 때에도 모두들 금을 묻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가 번번이 처음같이 대답하면, 그들은 문득 제 모자 꼭대기를 가리키면서,

 

이게, 조선 금이라오.”

한다. 연암(燕巖)에 있는 우리 집이 송도(松都)에 가까워서 가끔 그 곳에 드나들었는데, 송도는 곧 연상(燕商 연경에 드나드는 장사치)을 기르는 곳이었으므로, 해마다 칠팔월서부터 시월까지의 사이에 금값이 폭등하여, 한 푼쭝에 엽전으로 마흔다섯 닢, 또는 쉰 닢씩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을 쓸 곳이 별로 없으며, 문무(文武) 이품(二品) 이상의 금관자나 금띠로 말하더라도, 늘 만드는 것이 아니요, 흔히들 서로 빌려쓰고, 또 시집가는 색시의 가락지나 머리꽂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인즉, 금은 천하기가 흙이나 다름없을 것이어늘, 그 귀함이 이러함은 어인 까닭일까.

내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박천(博川) 땅에 이르러 말을 길 옆에 세우고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들일 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가는 사람들이 떼를 지었는데, 모두 8~9세 되는 사내와 계집아이들을 데리고 마치 흉년에 유리하여 가는 것 같기에 이상히 여겨서 물은즉,

 

성천(成川) 금광으로 가는 것이옵니다.”

한다. 그 기계를 보니, 나무 바가지 하나, 포대 하나, 끌 하나일 뿐인데, 끌로 파내어 포대에 담으며 바가지로 이는 것이다. 온종일 흙 한 포대만 일면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을 수 있으며, 조그만 계집아이들이 더욱 잘 파서일뿐더러, 눈이 밝아서 금을 잘 얻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하루 종일 하면 금을 얼마나 얻는 거요.”

하였더니, 그들은,

 

그건 재수에 달렸지요. 혹은 하루에 여남은 알을 얻는 일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서너 알에 그치며, 재수가 트이면 삽시에 부자가 된답니다.”

한다.

 

그럼, 그 알이 어떻게 생겼던고.”

하였더니,

 

거의 피 낱알만합지요.”

한다. 이는 농사짓기보다 이익이 나으니, 한 사람이 하루에 얻는 금이 적어도 예닐곱 푼쭝은 되어서, 돈으로 바꾸면 두세 냥이나 되므로, 비단 농사꾼들 태반이 농장을 떠나 이에 모여들 뿐 아니라, 사방의 건달패와 놈팽이들이 달려와 저절로 부락이 이루어져 무려 십여만 명이 들끓고, 쌀이나 기타 여러 가지의 물건이 모여들어, 술과 밥이며 떡과 엿 같은 것을 파는 장사들이 산골에 가득 차 있다 한다. 나는 알지 못하겠노라. 그 금이 어디로 가며, 그 캐낸 금이 많은데도 그 값이 더욱 오름이 무슨 까닭일까. 이제 이 기와에 물들인 것이 우리나라 금인지 아닌지 어찌 알 수 있으랴. 청초의 세폐(歲幣)에 제일 먼저 금을 면제하였음은, 토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간상배가 법을 어기고 가만히 이를 팔다가, 혹시 이것이 청의 조정에 알려지게 된다면, 비단 사단이 생길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이미 황금으로 지붕을 칠하였으니 우리나라에 금광을 열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 위의 작은 정각의 창호는 모두 우리나라 종이로 도배하였다. 창 틈으로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고, 혹은 교의탁자향로화병 등이 모두 운치 있어 보인다. 사신들이 하인들을 문 밖에 남겨 두고서 함부로 들어오지 말도록 엄명하였는데, 조금 뒤에 모두 기어올라왔다. 역관과 통관들이 크게 놀라서 꾸짖어 도로 나가게 하자, 그들은,

 

저희들이 감히 함부로 들어왔겠습니까. 문지기가 오히려 저희들이 들어가지 않을까 저어하는 듯이 인도해서 올라온 것이옵니다.”

한다. 찰십륜포(札什倫布)와 반선시말(班禪始末)의 기록이 따로 있다.

정사가 말하기를, 아침나절 사찬(賜饌)이 있은 뒤 조금 지나서 인대(引對)하겠다는 명령이 내려서, 통관이 인도하여 정문 앞에 이르렀더니, 그 동쪽 협문에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이 섰거나 혹은 앉아 있었다. 덕상서와 낭중 몇 사람이 와서, 사신의 출입을 주선하는 절차를 지휘하고 갔다. 이윽고 군기 대신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대의 나라에도 사찰이 있으며, 또 관제묘도 있는지?”

하고 묻더니, 얼마 아니 되어 황제가 정문으로 해서 문 안의 벽돌을 깔아 놓은 위에 나앉았다. 교의와 탁자도 내오지 않고, 다만 평상에 누런 보료를 깔았으며, 좌우의 시위는 모두 누런 옷을 입었는데, 그 중에서 칼을 찬 자는 서너 쌍에 불과하고, 누런 일산을 받들고 선 자는 두 쌍이다. 그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하다. 먼저 회자(回子)의 태자가 앞으로 나와 몇 마디 아뢰고 물러간 뒤에, 사신과 세 통사(通事)를 나오라 하매 모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는 무릎이 땅에 닿을 뿐, 뒤를 붙이고 앉은 것은 아니다. 황제가,

 

국왕(國王)께서 평안하신가?”

하고 물으니, 사신은 공손히,

 

평안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또,

 

만주말을 잘하는 이가 있는가.”

하매, 상통사(上通事) 윤갑종(尹甲宗),

 

약간 아옵니다.”

하고 만주말로 대답하였더니, 황제가 좌우를 돌아보며 기뻐하며 웃었다. 황제는 모난 얼굴에 희맑으면서 약간 누런 빛을 띠었으며, 수염이 반쯤 희고, 나이는 예순쯤 된 듯싶다. 애연히 춘풍화기를 지녔다. 사신이 반열(班列)에 물러서자, 무사 예닐곱이 차례로 들어와 활을 쏘는데, 살 하나를 쏘고는 반드시 꿇어앉아서 고함을 친다. 그리하여 과녁을 맞힌 자가 두 명인데, 그 과녁은 마치 우리나라의, 풀로 만든 과녁과 같으면서 한복판에 짐승 한 마리를 그렸다. 활쏘기가 끝나자 황제가 곧 돌아갈 제, 내시들은 모두 물러가고 사신도 역시 물러갔다. 문 하나를 채 못 나와서 군기(軍機)가 와서,

 

사신은 곧장 찰십륜포(札什倫布)로 가서 반선(班禪) 액이덕니(額爾德尼)를 뵈라.”

하고 황제의 전갈을 내린다. 옛 역사를 상고하건대, 서번(西番)은 멀리 사천(四川)운남(雲南)의 밖에 있는데, 이른바 서장(西藏)의 땅이다. 대체로 변방에 있어서, 중국과 거리가 더욱 멀었다. 강희 59(1720)에 책망아라포원(策妄阿喇布垣)이 납장한(拉藏汗)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 성지(城地)를 점령하여, 묘당을 헐어 버리고 번승(番僧)을 해산시켰다. 그래서 도통(都統) 연신(延信)을 평역장군(平逆將軍)으로, 갈이필(噶爾弼)을 정서장군(定西將軍)으로 삼고는, 장병(將兵)을 거느리고 새로 봉한 달라이라마[達賴刺麻]를 보내어 서장 일대를 평정한 뒤에, 황교(黃敎 라마교의 별칭)를 진흥시켰다 한다. 소위 황교라는 것이 무슨 도()인 줄은 알 수 없겠으나, 대개 몽고 제부(諸部)가 숭배하는 교이므로, 서장이 혹시 침략의 걱정이 있으면, 강희 황제 때부터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영하(寧夏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지명)까지 이르러 장수를 보내서 구원하여 동란을 진정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건륭 을미(1775)에 삭락목(索諾木)이 금천(金川)에서 반기를 들었을 제, 황제가 서장 길이 막힐까보아 두려워해서 아계(阿桂)를 정서장군으로, 풍승액(豊昇額)명량(明亮)을 부장(副將)으로, 해란찰(海蘭察)서상(舒常)을 참찬(叅贊)으로, 복강안(福康安)규림(奎林) 등을 영대(領隊)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쳐서 평정하였으니, 이 역시 서장을 위함이다. 대개 서장의 땅은 황제가 친히 보호하는 곳이요, 그 사람은 천자가 스승으로 섬긴다. 또 황()으로 그 교의 이름을 지은 것은, 혹시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도()를 숭배함이 아닌가 싶었다.

서장 사람들의 옷과 갓은 모두 누르므로, 몽고 사람이 이를 본받아서 역시 누런 빛을 숭상한다. 그렇다면 황제의 시기함과 사나움이 어찌 유독 이 황화요(黃花謠)를 꺼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액이덕니(額爾德尼)는 서승(西僧)의 이름이 아니라, 서번 땅에서도 이런 이름이 있으니, 괴이하고도 황당(荒唐)하여 그 요령을 얻기 어려운 일이다. 사신은 비록 억지로 나아가 반선(班禪)을 보았으나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품었으며, 당번 역관인즉 오히려 일이 날까보아 급급히 미봉(彌縫)하는 것을 다행으로 알았고, 하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번승과 황제를 욕하고 비방하였다. 왜냐하면, 만국의 공통된 군주로서 한 가지의 거조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태학(太學)에 돌아오매, 중국의 사대부들은 모두 내가 반선을 만나 보았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였거니와, 또한 그 도술(道術)의 신통(神通)함을 극구 칭찬하지 않는 자 없었으니, 그들의 희세(希世) 부회(傅會)의 기풍이 이러하였다. 대개 예로부터 세도의 승침(昇沈)이나 인심의 선악이, 모두 윗사람으로부터 인도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학지정(郝志亭)의 집에서 잠시 술을 마셨다. 이날 밤에는 달이 유난히 밝았다. 수작한 이야기는 황교문답(黃敎問答)에 싣기로 한다.

 

 

[D-001]한 성제(漢成帝) …… 입히었다 :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소의(昭儀)는 궁녀의 벼슬 이름으로, 당시의 소의는 곧 조비연(趙飛燕) 자매(姊妹)를 가리킨다.

[D-002]안사고(顔師古) : 당 태종(唐太宗) 때의 학자. 한서의 주석을 냈다.

[D-003]바람벽 …… 하였다 : 한서에 나오는 말이다.

[D-004]복건(服虔) : 전한 말기의 학자. 자는 자신(子愼).

[D-005]진작(晉灼) : ()의 학자. 한서음의(漢書音義)를 지었다.

[D-006]영인(伶人) () : 영인의 이름인데, 시대는 미상. 영인은 악관(樂官) 혹은 배우.

[D-007]반맹견(班孟堅) :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 맹견은 자.

[D-008]안창(安昌) : 성제의 스승 안창후 장우(張禹).

[D-009]무양(武陽) : 성제 때의 재상 무양후 설선(薛宣).

[D-010]글월은 …… 없다 :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에서 나온 구절.

[D-011]왕진(王縉) : 당의 시인 왕유(王維)의 아우. 자는 하경(夏卿). 대종 때 정승으로 불교를 독신하였다.

[D-012]찰십륜포(札什倫布) : 반선 라마 활불이 살고 있는 곳.

[D-013]액이덕니(額爾德尼) : 반선의 이름.

[D-014]책망아라포원(策妄阿喇布垣) : 신강 지방에 있던 준갈이(準噶而) 부족의 장수.

[D-015]납장한(拉藏汗) : 몽고 부족의 추장. 청해고시한(靑海固始汗)의 손자.

[D-016]삭락목(索諾木) : 건륭 때 대금천(大金川)의 토사(土司).

[D-017]금천(金川) : 사천성(四川省) 서북 변경에 있는 물 이름.

[D-018]아계(阿桂) : 아극돈(阿克敦)의 아들. 자는 광정(廣廷).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2일 무오(戊午)

 

 

개다.

새벽에 사신이 조반(朝班)에 들어가 광대(廣大)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몹시 졸음이 오므로, 이내 누워서 편안히 잤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천천히 걸어서 궐내에 들어간즉, 사신은 조회에 참여한 지 이미 오래고, 당번 역관 및 모든 비장은 뒤에 떨어져 궁문 밖 낮은 언덕 위에 머물러 있으며, 통관들 역시 이곳에 앉아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음악 소리가 담장 안 가까이 새어 나오기에 좁은 문틈으로 엿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담장을 돌아 여남은 걸음을 가서 작은 일각문(一角門)이 있는데, 한 쪽은 열려 있고 또 한 쪽은 닫혀 있다. 내가 조금 들어가서 보려 한즉, 군졸 몇이 말리며 문 밖에서 바라보기만을 허용한다. 문 안 사람들은 모두 문을 등진 채 즐비하게 섰는데, 조금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마치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듯하였으며, 엿보려고 하여도 작은 틈도 없기에 다만 그들 머리 사이 빈 곳으로 바라본즉, 은은히 한 더미 푸른 뫼에 솔과 잣나무가 울창한데 잠깐 눈을 돌린 사이 별안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또 채삼(彩衫)에 수포(繡袍)를 입은 자가, 얼굴에는 붉은 연지를 바르고 허리 이상이 사람들 머리 위로 헌걸차게 솟았으니, 아마 초헌(貂軒)을 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대(舞臺)의 거리는 멀지 않으나 그늘지고 깊숙하여 마치 꿈속에 성찬(盛饌)을 만난 것처럼 먹어도 맛을 알 방법이 없었다. 문지기가 담배를 달라기에 곧 내어 주었다. 또 한 사람이 내가 오랫동안 발꿈치를 들고 선 것을 보고는 걸상[]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게 하기에,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또 한 손으로 문지방을 짚고 섰었다. 출연하는 자들은 모두 한인(漢人)의 의관(衣冠)으로 차렸으며, 4, 5백 명이 함께 몰려들었다가 또 물러서면서 일제히 노래를 부른다. 내가 디디고 선 걸상은 마치 횃대를 탄 오리처럼 되어 오래 서 있기 어렵기에, 돌아나와 작은 언덕의 나무 그늘 밑에 앉았다. 이 날은 몹시 더웠으나, 구경꾼들은 빽빽하게 둘러서 있었다. 그들 중에 수정꼭지를 여러 개 단 사람이 있었으나, 그가 어떤 관원(官員)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 청년이 문을 나서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한다. 그 청년이 잠시 발을 멈추고 종자(從者)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돌아보는 모습이 몹시 사나워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잠자코 있었다. 두 군졸이 채찍을 갖고 와서 사람을 몰아내니, 회자(回子) 하나가 앉았다가 성내며 일어나서 두 군졸의 뺨을 치고 한주먹으로 때려 눕혔다. 청년 관원은 눈을 흘기면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다. 남들에게 물은즉, 수정꼭지 단 자는 곧 호부상서(戶部尙書)화신(和珅)이라 한다. 눈매가 곱고 준수한 얼굴에 기운이 날카로웠으나, 다만 덕기가 없으며, 나이는 이제 서른하나라 한다. 그는 애초 난의사(鑾儀司) 호위 군졸 출신으로, 성격이 몹시 교활하여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불과 대여섯 해 사이에 갑자기 귀한 자리를 얻어서 구문(九門)을 통령하는 제독이 되어, 병부 상서(兵部尙書) 복융안(福融安)과 함께 언제나 황제의 좌우에 붙어 있으므로, 그 세력이 조정에 떨쳤다. 이시요(李侍堯)가 해명(海明)의 뇌물 먹은 것을 적발하여 우민중(于敏中 청 건륭 때의 고관)의 집을 몰수하고 아계(阿桂)를 내친 것이 모두 화신의 힘이었는데, 이런 일은 모두 올봄과 여름 사이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함부로 눈을 뜨고 바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황제가 이제 여섯 살 나는 딸을 화신의 어린 자식에게 약혼시켰는데, 황제의 나이가 늙어서 성격이 점차 조급해져 노염이 잦으므로 좌우에게 매질하기가 일쑤였으나, 그가 이 어린 딸을 가장 사랑했으므로, 황제가 크게 성낼 때면 궁인이 번번이 이 어린 딸을 껴안고 와서 황제 앞에 놓는다. 그러면 황제가 노염을 그친다 한다.

이날 조회 반열에는 차와 음식이 세 차례나 내렸다. 사신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떡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누런 것과 흰 것 두 층으로 괴었는데, 네모가 반듯하였으며, 그 빛은 마치 누런 밀랍(蜜蠟)과 같았다. 단단하고 가늘고도 매끄러워 칼이 잘 들지 않았으며, 그 위층이 더욱 옥처럼 윤기가 나고 기름기가 흘렀으며, 떡 위에는 한 선관(仙官)을 만들어 세웠는데 수염과 눈썹이 생동하는 듯 도포와 홀()이 화려했고, 그 좌우에는 또 선동(仙童)을 세웠는데 그 조각이 몹시 기묘하였다. 이들은 대개 밀가루에다 사탕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다. 땅에 묻는 허수아비를 만드는 것도 옳지 않다 하였거늘, 하물며 이 인조(人造) 사람을 어찌 차마 먹을 수 있겠는가. 사탕 여남은 가지를 곁들여 담은 것이 한 그릇, 또 양고기가 한 그릇이다. 또 조정 진신(縉紳)들에게 채색 비단과 수놓은 주머니 등을 주었는데, 사신에게는 채단이 다섯 필, 주머니가 여섯 쌍, 담뱃대가 하나이고, 부사와 서장관에게는 각기 조금씩 줄여 차등이 있었다.

이날 저녁에는 구름이 끼어 달빛이 흐리었다.

 

 

[D-001]화신(和珅) : 만인. 성은 유호록(鈕祜祿)이요, 자는 치재(致齋).

[D-002]난의사(鑾儀司) : 황제의 거둥 때에 필요한 사무와 의장(儀仗)을 맡은 관서.

[D-003]구문(九門) : 황성의 각 성문을 지키는 장군.

[D-004]복융안(福融安) : 복강안(福康安)의 잘못인 듯하다.

[D-005]이시요(李侍堯) : 청의 건륭 때에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뇌물 먹기를 좋아하였다.

[D-006]땅에 …… 않다 : 맹자(孟子)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 4에서 맹자가 공자의 말씀이라고 인용하고 있다. “공자께서 처음 나무 허수아비[]를 만든 자는 그 자손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서 장례에 썼기 때문입니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3일 기미(己未)

 

 

새벽에 비가 잠시 뿌리다가 마침내 쾌청하였다.

사신이 만수절 하반(賀班)에 참가하러 오경(五更)에 대궐로 들어갔다. 나는 포근히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조용히 걸어서 대궐 밑에 이르렀다. 누런 보가 덮인 걸방짐 일곱을 권문 앞에 두고 쉰다. 짐 속에는 옥으로 만든 그릇과 골동이 담겨 있고, 또 보통 사람만큼 커다란 금부처 하나를 앉혀 놓았으니, 이들은 모두 호부상서 화신이 진상한 것이라 한다. 이 날도 음식을 세 차례나 내리고, 또 사신에게 백자(白瓷)로 만든 차호(茶壺) 하나, 차종(茶鐘)()까지 갖추어 한 벌, 실로 뜬 빈랑(檳榔) 주머니 하나, 칼 하나, 자양(紫陽)에서 만든 주석 차호 하나씩을 주었고, 또 저녁에 작은 황문(黃門 환시(宦侍))이 와서 모난 주석 항아리 하나를 내렸다. 통관이,

 

이건 차().”

하고 설명해 주자, 황문은 곧 달려가 버린다. 누런 비단으로 항아리 마개를 봉했기에, 떼고 본즉 빛이 누르면서도 약간 붉어 술과 같았다. 서장관이,

 

이건, 정말 황봉주(黃封酒).”

한다. 맛이 달고 향내가 풍겨 술 기운이란 전혀 없었다. 다 따르자, 여지(荔支) 여남은 개가 떠오른다. 모두들,

 

이건, 여지로 빚은 것이야.”

하고 각기 한 잔씩 마시고는,

 

참 좋은 술이구려.”

한다. 비장과 역관들에게 찻잔이 이르니 마시지 않는 자도 있거니와, 대번에 들이키는 이가 없다. 이는 너무 지나치게 취할까 보아서 그런 것이다. 통관들이 목을 내밀며 침을 흘린다. 수역이 남은 것을 얻어서 주었더니 돌려가며 맛보고는,

 

아름다운 궁중 술이야.”

하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윽고 일행이 서로 돌아보며,

 

취했어, 취했구먼.”

한다. 이날 밤에 기공(奇公)을 찾았을 때 한 잔을 따라서 보였더니, 기공은,

 

이건 술이 아닌 여지즙(荔支汁)이랍니다.”

하며 깔깔대고는, 곧 소주 대여섯 잔을 내어 거기다가 타니, 맑은 빛깔 매운 맛에 이상한 향내가 배로 풍긴다. 이는 대개 여지 향내가 술 기운을 얻어서 더욱 은은한 향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까 꿀물을 마시고 향내를 논한 것이나 여지즙을 맛보고 취함을 말하는 것이, 곧 종 소리를 듣고서 해를 측량함이나 매실나무를 바라보고 갈증을 푸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이날 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기공과 함께 명륜당(明倫堂)으로 나가 난간 밑을 거닐었다. 나는 달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달의 몸뚱이는 언제나 둥글어 햇빛을 빙 둘러 받고 보니, 이 때문에 지구(地球)에서 본 달이 찼다가 기울었다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 저녁 저 달을 온 세계가 한가지로 본다면, 보는 장소에 따라서 달은 살지고 여위며 깊고 옅음이 있지 않을까. 별은 달보다 크고, 해는 땅덩이보다 크되, 보기에는 그와 달라 보이는 것이 멀고 가까운 까닭이 아닐까. 만약에 이것이 참말이라면, 해와 땅과 달 등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별들로 보임이 아닐까. 별에서 땅을 볼 때에도 역시 그렇게 보일 것이 아니겠는가. 땅의 한 줄이 해와 달을 함께 꿰어서 반짝반짝하는 세 낱이 마치 저 하고(河鼓)와 같지 않겠는가. 땅껍질에 붙어 있는 가지가지의 만물은 어떤 것이고 모양이 모두 둥글둥글할 뿐, 하나도 네모진 것은 볼 수가 없는데, 다만 방죽(方竹)과 익모초(益母草) 줄기가 네모졌지마는, 이것 역시 네모 반듯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은즉, 네모 반듯한 물건은 과연 찾을 수 없거늘, 무엇 때문에 땅에 대해서만 네모난 물건이라고들 하였을까. 만일에 땅덩어리를 네모졌다고 하면, 저 월식(月蝕)을 할 때에 달을 검게 먹어 들어가는 변두리가 왜 활등처럼 둥글게 보일까. 땅덩이가 네모지다고 우기는 자는 무어나 방정(方正)해야 된다는 대의(大義)에 입각해서 물체(物體)를 이해시키려 함이요, 땅덩이가 둥글다고 주장하는 자는 실제에 뵈는 형태를 믿고 다른 뜻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아서, 땅덩이란 실제 물체는 둥글고, 대의로 말한다면 모나다는 것이 아닐까.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도는 궤도가 해는 크고 달은 작으며, 도는 속도가 늦고 빠름이 없어 한 해와 한 달은 일정한 도수에 맞거늘, 해와 달이 땅을 둘러싸고 왼편으로 돈다는 말은 우물 속에서 보는 지식이 아닐까. 땅덩이의 본바탕이란 둥글둥글 허공에 걸려, 사방도 없고 아래위도 없이 마치 쐐기 돌 듯 돌다가 햇빛을 처음 받은 곳을 날이 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지구가 더 돌아, 처음에 해와 마주 대하는 데는 차차 어긋나 가며 멀어져서, 오정도 되고 해가 기울기도 하여 밤과 낮이 되는 것이 아닐까. 비유해 말하자면, 창구멍이 뚫어진 곳으로부터 햇살이 새어 콩 낱알만하게 비친다고 하자. 창 아래는 맷돌을 햇살 비치는 자리에 놓고, 바로 햇살 비치는 자리에 먹으로써 표를 해 두고는, 그 다음에 맷돌을 돌리고 보면 먹 자국은 햇살 비치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 서로 떨어져 사이가 멀어져 갈 것인가. 맷돌짝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면, 햇살 비치는 자리와 먹 자국은 잠시 마주 포개어졌다가는 또 다시 떨어지게 될 것이니, 지구가 한 바퀴 돌아 하루가 되는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닐까. 또 등불 앞에 놓인 물레를 가만히 두고 보면, 물레바퀴가 돌 적에는 물레바퀴의 군데군데가 등불 빛을 받고 있으나, 그렇다고 등불이 물레바퀴를 돌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리라. 지구의 밝고 어두운 이치도 역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면 해와 달은 애초부터 뜨고 지는 것이 아니요, 또 오가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땅이 움직여 돌지를 않고 언제나 한 자리에 박혀 있다고 너무 믿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 아닐까. 명백한 이론을 찾지 못하면, 이 땅의 춘동을 가리켜 그 방위를 따라 노는 것이라고 해 버렸으니, 결국 논다는 것은 나가고 물러서고 하는 것을 말함이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미 논다고 할 바엔 차라리 돈다고 함이 어떨까. 저 착각을 한 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땅덩이가 돌 때는 땅 위에 실렸던 일체 물건들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기울어져 떨어질 터이라고. 만일에 쏟아져 떨어진다면 어느 땅에 떨어질 것인가. 만일에 그렇다면, 저 허공에 달린 별들과 은하(銀河)는 기운을 따라 돌아가면서 무엇 때문에 떨어져 쏟아지지 않고 그대로 있을까.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고, 생명도 없는 덩이진 물건이, 어째서 썩지도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견딜 것인가. 땅덩이 거죽에 생물들이 붙어서 살 때는, 공과 같은 물체의 표면에다 발을 붙이고 어디서나 머리에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비겨 본다면, 수많은 개미와 벌들이 혹시는 꼿꼿이 선 바람벽에 기어가기도 하고, 혹은 천장에 붙어서 사는 것을 누가 바람벽에 가로 붙어 섰다고 할 것이며, 누가 천장에 거꾸로 붙어 섰다고 할 것인가. 지금도 이 땅덩이 밑에는 역시 바다가 있을 터인데, 만일에 땅 거죽에 붙어 사는 생물들이 아니 떨어지는가 의심을 한다면, 땅 밑 바다는 누가 둑을 쌓아 두었다고 물이 아니 쏟아지고 그대로 있을 것인가. 저 하늘에 총총한 별들은 그 크기가 얼마씩이나 될 것이며, 역시 거죽 껍질은 지구나 다름없지 않을까. 별도 껍데기가 있을진대 생물이 붙어 살 터이니, 역시 그러할까. 만일에 생물이 있다면, 따로 또 세상을 배판해 놓고 새끼까지 쳐가면서 살지나 않을는지. 지구는 둥글게 생겨 원래 음양이 없을 터인데, 해로부터 불기운을 받고 달로부터 물기운을 얻어, 흡사 살림꾼이 동쪽 이웃에서 불을 빌리고 서쪽 집에서 물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으매, 한 쪽은 불이요 또 한 쪽은 물이라 하여 이를 소위 음양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억지로 오행(五行)이라 이름붙여 저마다 서로 상생한다 하고 서로 상극한다고 하나, 큰 바다에 풍랑이 일 때에 불꽃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현상은 무슨 까닭이라 할까.얼음 속에는 누에가 살고, 불 속에는 쥐가 살고, 물 속에는 고기가 살아서, 저들 각종 생물들은 어디나 붙여 있는 곳을 제각기 땅이라 한다. 만일에 달 속에도 세계가 있다면, 오늘 이 밤에 어떤 두 명의 달세계의 사람이 난간 머리에 마주 서서 달빛 아닌 땅빛의 차고 기우는 이야기를 속삭이지 아니한다고 누가 증명할 것이랴.”

기공은 껄껄대며,

 

참 기이한 이야기요. 땅이 둥글다는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처음 말했지마는 땅덩이가 돈단 말은 하지 않았는데, 선생의 이 학설은 선생이 터득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으신 것인가요.”

한다. 나는,

 

사람의 일도 모르는 터에 하늘 일을 어찌 알겠소. 나는 본디 도수(度數)의 학()에 어두우니까요. 비록 칠원옹(漆園翁 장주(莊周)의 별칭)의 깊은 생각으로서도 아득한 우주에 관한 지식은 덮어 두고 해설을 하지 않았더군요. 이것은 실로 내가 터득한 지식이 아니라 귀동냥이랍니다. 우리 친구에 홍대용(洪大容)이라는 사람이 있어 호는 담헌(湛軒)인데, 그의 학문은 좁지 않아서 일찍이 나와 함께 달구경을 하면서 장남 삼아 이런 이야기를 터뜨렸답니다. 대체로 황당하여 종잡기 어려우나 비록 성지(聖智)를 지닌 이라도 이 학설을 깨뜨리기는 어려울까 합니다.”

하였더니, 기공은 크게 웃으며,

 

남의 꿈속 길을 동행할 수야 없지요. 당신의 친구 되시는 담헌 선생(湛軒先生)께서는 이에 관한 저서가 몇 권이나 됩니까.”

한다. 다는,

 

아직 저서는 없나 봅니다. 선배 되시는 김석문(金錫文)이란 분이 있어서 일찍이 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을 말했는데, 그 친구가 특히 장난 말 삼아 이 학설을 부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실제로 보아 얻은 것이 이렇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일찍이 남더러 꼭 이것을 믿어 달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나 역시 오늘 밤 달구경을 하다가, 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나서 말을 한바탕 늘어놓고 보니, 그 친구를 만나본 듯도 합니다.”

했다. 대개 여천(麗川)은 한인(漢人)과는 다르기 때문에, 담헌이 일찍이 항주(杭州) 인사들과 섞여 논 옛 일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기공은 또 나에게,

 

김석문 선생이 지은 시() 중에서 아름다운 것 몇 구만 들려 주실 수 없을까요.”

하기에, 나는,

 

그에게 아름다운 시구가 있다는 것은 못 들었습니다.”

했다. 기공은 나를 이끌고 자기 방으로 들었다. 벌써 촛불을 네 자루나 켜 놓고, 큰 교자상에 음식을 잘 차려 두었다. 특별히 나를 위해서 차린 것이다. 향고(香糕) 세 그릇, 각색 사탕 세 그릇, 용안육(龍眼肉)여지(荔支)낙화생(落花生)매실(梅實) 서너 그릇, 거위오리 들을 주둥이와 발이 달린 채로, 또 통돼지를 껍질만 벗겨서 용안육여지대추마늘후추호도살구씨수박씨 등을 섞어 쪄서 떡같이 만들었는데, 맛은 달고 매끄러우면서도 너무 짜서 먹기는 어려웠다. 떡이나 과실들은 모두 자 넘어 높이 괴었다. 이윽고 다 물리고는, 다시 채소와 과실만 각기 두 접시씩 차리고, 소주 한 주전자로 시름시름 따라 가면서 조용히 이야기들을 하였다. 이야기는 황교문답(黃敎問答) 중에 실려 있다. 닭이 두 홰째나 울어서 자리를 파하고 숙소에 돌아와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하인들이 벌써 일어나라고 깨운다.

 

 

[D-001]종 소리를 …… 측량함 : 출전 미상.

[D-002]매실나무를 …… 푸는 것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조조(曹操)의 고사. 즉 행군 중 군사들이 갈증을 느끼자 조조가 저 고개를 넘으면 매실나무가 있다고 말하여 군사들이 그 말에 입에 침이 돌아 갈증을 풀었다.

[D-003]하고(河鼓) : 견우성(牽牛星)의 북쪽에 있는 삼태성(三台星).

[D-004]방죽(方竹) : 네모진 대나무. 중국에서 난다.

[D-005] …… 할까 : 옛사람들은 바다에 풍랑이 심할 때 일광(日光)의 반사로 일어나는 현상을 불꽃으로 보아왔다.

[D-006]얼음 속에는 누에 : 빙잠(氷蠶). 습유기(拾遺記)에서 나오는 전설.

[D-007]불 속에 쥐 : 화서(火鼠). 산해경(山海經)에서 나온 전설.

[D-008]김석문(金錫文) : 조선 숙종(肅宗) 때의 학자.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역학도해(易學圖解)를 지었으며 만년에 표천 다대곡(多大谷)에 살았다.

[D-009]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 : 해와 달과 땅과의 세 개 둥근 방울이 공중에 떠서 있다는 학설.

[D-010]담헌이 …… 없었다 : 홍대용은 북경에서 항주(杭州)의 선비 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을 만나서 막역의 벗을 맺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4일 경신(庚申)

 

 

개다.

삼사는 밝기 전에 대궐에 들어가고, 홀로 실컷 자고는 아침에 일어나 윤형산(尹亨山)을 찾아갔다가, 거기서 다시 왕혹정(王鵠汀)을 찾아 함께 시습재(時習齋)로 들어가서 악기(樂器) 구경을 했다. 거문고나 비파는 모두 길고도 넓으며, 붉은 비단에 솜을 넣어서 주머니를 만들었고, 거죽은 붉은 털 천으로 쌌다. ()과 경()은 시렁에 달아매여 있는데 역시 두툼한 비단으로 덮었고, 비록 축어(柷敔) 같은 따위라도 다들 별스러운 비단으로 집을 만들어 넣어 두었다. 대개 거문고와 비파 등속은 그 본이 너무 크고 칠이 지나치게 두꺼웠으며, 젓대와 퉁소 등속은 궤짝 속에 넣고 단단히 채워 구경할 길이 없었다. 혹정은,

 

악기를 보관해 두기는 매우 까다로워 습기 있는 곳을 피해야 되고, 또 너무 건조한 것도 좋지 않을뿐더러, 거문고 위에 앉은 티끌은 사자학(獅子瘧)이라 하고, 거문고 줄 위의 손때는 앵무장(鸚鵡瘴)이라 하며, 생황(笙簧)의 부는 구멍에 말라 붙은 침은 봉황과(鳳凰過)라 하고, 종이나 경에 앉은 파리똥은 나화상(癩和尙)이라 한답니다.”

한다. 웬 얼굴이 곱게 생긴 청년 하나가 바쁘게 들어오더니, 눈을 부라리고 나를 보면서 내 손에 든 작은 거문고를 빼앗아 급히 집에 넣는다. 혹정은 퍽 두려워하는 얼굴로 내게 눈짓하여 나가자는 것이다. 그 청년은 별안간 웃으면서 나를 붙들고 청심환을 달라 한다. 나는 없다고 대답하면서 곧 나왔다. 그 자는 몹시 무안한 기색이다. 사실인즉, 내 허리 전대 속에는 환약 여남은 알이 있었지마는, 그의 버릇이 괘씸하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혹정에게 한 번 읍하고는 가버린다. 나는,

 

그는 누구여요.”

하고 물었다. 혹정은

 

그는 윤대인(尹大人)을 따라서 북경에서 온 자랍니다.”

한다. 나는,

 

그가 악기에 무슨 참견을 하나요.”

하였더니, 혹정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순히 조선 환약을 짜내기 위하여 염치를 돌보지 않고 선생을 속이려고 든 것이니, 선생은 마음에 거리끼실 것 없으시죠.”

한다. 나는 생각 없이 문 밖을 나섰다. 수백 필의 말 떼가 문 앞을 지나간다. 한 목동(牧童)이 큰 말에 올라앉아 수숫대 한 개비를 쥐고 따라간다. 또 뒤따라 소 3,40마리가 가는데, 코도 꿰지 않고 뿔도 잡아 매지 않고, 뿔은 모두 한 자 남짓씩 길며 빛깔은 푸른 것이 많았다. 또 당나귀 몇십 마리가 따라가는데, 목동이 방망이 같은 막대기를 가지고 맨 앞의 푸른 놈을 힘껏 한 대 후려갈기니까 소가 씩씩거리며 달려갈 제, 모든 소도 그 뒤를 따르는데, 마치 대오가 행진하는 듯하였다. 이는 대개 아침나절 방목하기 위하여 끌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가한 때에 다니면서 살펴보니, 집집마다 대문을 열고 말이니 나귀니 소니 양 들을 몇십 마리씩 몰아 내놓는다. 돌아와서 우리 사관 밖에 매어 둔 말의 꼴을 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내 일찍이 정석치(鄭石癡 석치는 호요, 자는 성백(城伯))와 이름은 철조(哲祚), 벼슬은 정언(正言)이며, 술을 잘 마시고 서화에도 능하다. 함께 우리나라 말 값의 높낮이를 이야기하다가, 내가,

 

불과 몇십 년이 안 가서 베갯머리에서 조그마한 담뱃대통을 말 구유로 삼아 말을 먹이게 될 것이야.”

하였더니, 석치는,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반문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서리배 병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씨를 받아서 너덧 해를 지나면, 베개 속에서 울음을 우는 꼬마닭이 되는데, 이 놈을 침계(枕鷄)라고 부른다네. 말도 역시 종자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맨 나중은 침마(枕馬)가 아니 되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석치는 크게 웃으며,

 

우리들이 점차 더 늙어가면 새벽 잠이 자꾸만 없어지는 터에 베개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또 베개말을 탄 채 뒷간길을 가도 무방하겠군. 그러나 요즘 시속에 말 흘레붙이는 것을 대기(大忌)로 알아, 기르는 말이 수놈 암놈 할것없이 모두 동정으로 늙어 죽거든. 국내의 말이 그래도 몇만 필이나 되는데, 그 놈들에게 흘레를 안 붙이면, 기르는 말이 어떻게 번식될 것인가. 이리하여 국내에서는 해마다 말 몇만 필을 잃게 되니, 이러고는 몇십 년이 못 가 베개말이고 무어고 다 절종이 될 것이야.”

하고는 둘이 서로 웃으며 희담을 한 일이 있었다.

실상 내가 연암(燕巖)에 살 곳을 마련한 것은, 일찍부터 목축(牧畜)에 뜻을 두었던 때문이다.

연암에 자리잡으니, 첩첩산중에 양쪽이 편평한 골짜기인데다가, 수초(水草)가 매우 좋아서 마소노새나귀 등 몇백 마리를 치기에 넉넉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것은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되지 못한 까닭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이라야 가장 큰 곳으로 다만 탐라(耽羅 제주도)가 있을 뿐인데, 그 곳의 말들은 모두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가 방목한 종자로서, 4, 5백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고 보니, 비록 애초에는 용매(龍媒 준마(駿馬))악와(渥洼 신마(神馬))와 같은 우수한 종자일지라도, 마침내는 과하(果下)관단(款段 꼬마 말의 이름)과 같은 꼬마말이 될 것은, 이치에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과하와 관단을 대궐 지키는 장사들에게까지 내주니, 고금 천하에 이런 느림뱅이와 꼬마말을 타고 적진을 향하여 달리는 꼴이 어디 있을 일인가. 이것이 첫째로 한심한 일이다. 대궐 안에서 먹이는 말로부터 장수들이 타는 말에 이르기까지 토산 말이란 하나도 볼 수 없고, 모두가 요동심양 등지로부터 사서 들인 말들로서, 한 해에 새로 생기는 말이라고는 네댓 필에 지나지 않는 형편이니, 만일 요동심양 길이 끊어지는 날이면 어디에서 또 말을 얻을 것인가. 이것이 둘째로 한심한 일이다. 임금이 거둥할 때 배종하는 반열에는, 백관들이 말을 많이 빌려 타기도 하고, 혹은 나귀를 타고도 임금의 뒤를 따르게 되어, 이 꼴로서는 위의를 갖추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셋째로 한심한 일이다. 문신들로서 초헌(貂軒)을 탈 수 있는 자 이상은 말을 탈 일도 없고, 또 말을 집 안에서 먹이기도 어려워서 탈 것을 없애 버리고, 자제들이 걷지 않으려고 겨우 작은 나귀나 한 마리쯤 먹이게 된다. 옛날에는 백 리의 강토에 불과한 나라라도, 대부(大夫)쯤 되면 타는 수레 열 대쯤은 가지는 법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로 말한다면 둘레가 몇천 리나 되는 나라로서, ()()급쯤 된다면 타는 수레 백 대쯤씩은 갖추어야만 할 것이거늘, 이제 우리나라 대부의 집안에서 수레 열 대는 그만두고라도 단 두 대인들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이것이 넷째로 한심한 일이다. 삼영(三營)의 초관(哨官)들은 다들 백 명 졸개의 장이 되는 터에 말 한 필을 가질 형세가 못 되고 보니, 한달에도 세 번씩 치르는 훈련에는 임시로 삯말을 내어 타게 된다. 삯말을 타고 전쟁에 나간다는 소리는 아예 이웃 나라에 들릴 수 없는 창피이다. 이것이 다섯째 한심한 일이다. 서울 영문에 있는 장수들이 이러할 바에야, 팔도(八道)에 나누어 둔 기병들이란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을 것은 이로써도 뻔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여섯째 한심한 일이다.

국내에 있는 역말들이란 모두가 토산 말들로서, 그 중에서 좀 낫다는 놈이라도 한번 사신(使臣) 손님이라도 치르고 나면 죽거나 병이 들고 만다. 왜냐하면, 그런 사신 손님들이 타는 쌍가마가 잔뜩 무거운데다가, 네 명의 교군(轎軍)은 으레 말에다가 몸을 싣듯이 양 옆에 붙어서 탄 사람이 까불려 흔들리지 못하도록 가마채를 붙잡고 간다. 말 등에 실린 짐이 이토록 무거우니, 말은 짐을 피하듯이 빨리 안 달릴 수 없게 되었고, 말이 달릴수록 짐은 더욱 눌려지기 때문에 말이 죽지 않으면 병이 든다는 것이다. 죽은 말이 날로 불어나니, 따라서 말 값은 뛰어오른다. 이것이 일곱째 한심한 일이다. 말 등에다 짐을 싣는다는 것은 벌써 틀려먹은 노릇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수레가 국내에서 다니지 못하고 보니, 관청에서고 민간에서고 짐이란 짐은 말 잔등이 아니고는 못 실어 나를 줄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이야 죽든 말든 많이 싣기에만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부득불 힘을 쓸 만큼 먹이를 먹인다고 더욱 여물죽을 많이 먹이게 된다. 그러므로 말 정강이가 힘을 못 쓰고 발굽은 물씬물씬해져, 한 번만 흘레를 겪으면 뒤를 못 가누게 되므로, 요즘 세속에서는 흔히 들 말이 흘레붙어 새끼 치는 것을 금한다. 이러고서야 말이 어디서 생길 것인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고,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했으며, 좋은 종자를 받을 줄 모르고, 일 맡은 관원이 목마에 무식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채찍을 잡고 나앉은 자마다 국내엔 좋은 말이 없다고 떠든다. 그래, 정말 국내엔 쓸 만한 말이 없단 말인가. 이런 한심한 일이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면,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이름이었던가. 무릇 생물들의 성질이란, 사람이나 다름없이 고달프면 쉬고 싶고, 답답할 때엔 시원한 데를 찾고 싶으며, 굽은 놈은 펴고 싶고, 가려우면 긁고 싶을뿐더러, 그놈들은 비록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먹는다 하더라도, 때로는 제 마음대로 편한 것을 찾고 싶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말도 반드시 이따금 굴레와 고삐를 풀어 놓아 물가 같은 시원한 곳에 놀게 해서 답답증을 풀도록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생물의 성질에 따라 그 뜻을 맞추어 주는 것이거늘, 우리나라에서 말 먹이는 법이란, 북띠나 굴레가 단단하지 않은가 염려하여 이것을 될수록 졸라 매어서, 빨리 몰 때에도 말은 견마 잡는 고통을 벗어날 수 없고, 쉴 때만 해도 긁는 재미나 땅에 뒹구는 맛을 얻어 볼 수 없으며, 사람과 말 사이는 언제나 뜻이 통하지 못하여 사람은 툭하면 욕질이 일쑤요, 말은 자나깨나 사람을 상대로 살기(殺氣)가 등등하니, 이런 것이 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다는 것이다. 또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무릇 목마른 고통은 배고픈 고통보다도 심한 법이다. 우리나라 말들은 아직껏 찬 물을 안 먹이고 있다. 말의 성질인즉, 익힌 음식을 가장 싫어하니, 이는 말에게 더운 것은 병이 되기 때문이다. 콩이나 여물죽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먹이를 짜게 하여 물을 켜도록 하려는 때문이요, 물을 켜도록 하는 것은 오줌을 잘 누도록 하기 때문이요, 오줌을 잘 누도록 하는 것은 몸에 지닌 열을 풀게 함이요, 냉수를 먹이는 것은 정강이를 굳세게 만들고 발굽이 단단하게 만들기 위함이거늘, 우리나라 말들은 삶은 콩과 끓인 죽을 먹어, 종일을 달리면 벌써 신열을 못 이겨 병이 되고, 그리하여 한 끼라도 건너뛰어 죽을 못 먹게 되면 시들부들 몸을 못 가누며 느림뱅이 걸음을 걸어 길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 이것은 모두가 더운 죽을 먹인 탓이다. 이보다도 군마가 되고 보면 더운 죽을 먹인다는 것은 더욱 실책이다. 이것을 일러서 말 먹이는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무엇을 가리켜 종자를 잘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말이란, 어떻든 커야지 작은 종자는 못 쓰는 법이요, 건장해야지 약해선 못 쓰며, 준수해야만 되지 노둔해서는 못 쓰는 법이다. 말에다가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달리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마는,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토산말로써는 단 하루의 보통 집안 일도 치러 내지 못할 것이요, 또한 나라의 무비(武備)와 군용(軍容)을 돌보지 않는다면 모르겠으나,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이꼴인 토산말로써는 단 하루도 군사를 치러 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로 보아 우리와 청국(淸國) 두 나라는 태평으로 지나는 사이, 암놈 수놈 아울러 몇십 필쯤 청구한다 해서 저 큰 나라에서 이것쯤을 아끼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외국으로부터 말을 구해 들여, 이것을 사사로 기른다는 것이 좀 혐의쩍어 보인다면, 해마다 드나드는 사신들 편에 가만히 사들일 수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근교에 널찍한 수초(水草) 좋은 땅을 골라, 10년 동안을 두고 새끼를 쳐 가면서 점차로 탐라를 비롯한 국내의 여러 군데에 목장을 퍼뜨려 종자를 개량해야 할 것이며, 또 새끼를 치게 하는 방법으로서는 반드시 주례(周禮)와 월령(月令)으로 표준을 삼아야 할 것이니, 주례에는 대개 말을 먹이는 데 수놈이 4분의 1을 차지한다 하였는데, 그 주석(注釋)에는, 그의 비위에 알맞게 하고 싶어함이니 생물은 기질이 같으면 마음도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정 사농(鄭司農)은 이르기를, ‘4분의 1이라는 말은 암놈 세 마리에 수놈 한 마리를 끼운다는 말이다.’ 했다. 월령에 보면, 늦은 봄 삼월쯤 되어 종마(種馬)와 종우(種牛)를 암놈 있는 목장에다 풀어 놓는다 하였는데, 진혜전(秦蕙田)은 말하기를, ‘말 먹이는 사람이 종마를 교대하여 부리되 그 몸을 너무 피로하지 않게 하여 기운과 혈기를 안정되게 할 것이요, 또 말을 맡은 관리는 반드시 여름에는 수놈을 치워 두어야 한다.’ 하였다. 암말이 새끼를 뱄을 때에는 수놈이 암놈 곁에 못 가도록 하는 것을 말 번식시키는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모두, 옛 임금들이 때를 맞춰서 생물을 길러 생물의 제 특성을 살린다는 뜻이다. 이제 중국에서는, 매년 봄날이 화창하고 풀들이 푸릇푸릇 돋을 때 수놈 목에다가 방울을 달아서 내놓아 흘레를 붙이면, 수놈 임자는 흘레의 대가로 닷 돈씩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말이나 노새 새끼를 낳을 때 수놈으로 준수한 놈을 낳으면, 또 다시 닷 돈을 받는다. 낳은 새끼가 신통하지 못하거나 털빛이 좋지 못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때는, 아비말은 반드시 불알을 까버려 쉽게 종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종자를 특별히 크고 성질이 길들이기 좋은 것으로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장을 감독하는 관리들이 이런 생각을 못하고, 덮어놓고 토산말로만 종자를 받기 때문에, 낳으면 낳을수록 종자는 자꾸만 작아지게 되어, 필경은 똥통이나 나뭇짐 한 짐도 변변히 견디지 못할 만큼 되었으니, 하물며 한 나라의 군국(軍國)의 수요에 이바지할 수 있으랴. 이런 것이 곧 좋은 종자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관직에 있는 자가 목마에 무식하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이른 것인가. 우리나라 벼슬하는 양반들은 일반 허드렛일은 알려고도 않으려는 버릇들이 있어서, 옛날 어디서는 여럿이들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마부에게, 말에게 콩을 좀 더 주라는 말을 한 마디 했다가, 사람이 좀스럽다고 이조(吏曹)의 전랑(銓郞 좌랑(佐郞))에게 버림을 받은 일까지 있었고, 요즘은 어떤 학사가 평소에 말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어, 말을 잘 고르는 법이 백락(伯樂)이나 다름없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옛적에는 양고기 잘 굽는 도위(都尉)가 있다더니, 지금 세상에는 말 잘 다루는 학사가 있네 그려.’ 하며 비방하여, 까다롭기 짝이 없다. 한 나라의 큰 정책으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도리어 수치로 삼아 하인들의 손에만 맡겨 두고 있으니, 비록 그 직책은 감목(監牧)이라고는 하지마는 사람은 유품(流品)이어서, 목마의 지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이것은 실로 능력이 없다기보다도 배우기를 사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들어서, 관원들이 목마에 무식하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옛날 당()의 초기(初期), 암컷 수컷이 섞인 말 3천 필을 적수(赤水)의 언덕에서 몰아 내어 농우(隴右 감숙성의 서쪽)에다 옮기고는, 태복(太僕 목축을 맡은 고관) 장만세(張萬歲 당 태종 때 저명한 목축가)로 하여금 감목하게 하였다. 정관(貞觀)으로부터 인덕(麟德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까지 이르는 동안에 말은 70만 필로 번식되었는데, 무후(武后) 때는 말이 줄어들었으나, 당 명황(唐明皇 당 현종(唐玄宗)) 때에 아직도 24만 필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왕모중(王毛仲)장경순(張景順) 등으로 한구사(閑廐使)를 삼아 여남은 해 동안을 먹인 결과, 43만 마리로 불었다. 개원(開元) 13(725)에는 명황이 동쪽으로 가서 태산(泰山)에 제사할 제, 말 몇만 필을 털빛에 따라 대열을 지어 놓은 것이, 멀리서 바라보면 비단필처럼 보였다고 하니, 이것은 담당한 관직에 적당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말을 좋아하고 말을 잘 먹일 줄 아는 자를 얻어 목마하는 행정을 맡긴다면, 비록 말 잘 치는 학사라는 기롱을 들을망정, 태복 벼슬감으로서는 맞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와서,

 

연암 박 선생님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다. 기공의 심부름하는 이가 나를 가리켜 준다.

그는 곧 내게 읍하면서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 마치 옛 벗을 만나는 듯하였다. 그는,

 

저는 바로 광동(廣東) 안찰사(按察使) 왕노야(汪老爺)의 청지기온데, 우리 댁 노야께옵서 그저께 선생님을 만나뵙고는 퍽도 기뻐하시와, 내일 정오쯤은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하시면서, 절강(浙江)에서 만든 부채에 금칠로 서화 그린 것을 올리겠다고 하십디다.”

한다. 나는,

 

전일은 왕공(汪公)의 과분한 사랑을 입고서도 아무런 대접을 못했는데, 먼저 귀한 선물까지 받는다는 것은 도리어 당치 않은가 하오.”

했더니, 그는,

 

제가 이번에 갖고 온 것은 아닙니다. 노야께서 오실 적에 몸소 지니고 오시겠답니다. 명일 정오 선생님께서는 부디 다른 데 출입하시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약속하지요. 그런데 댁은 고향이 어디고, 성함은 뉘신지요.”

하였더니, 그는,

 

저는 강소(江蘇) 사람이요, 성은 누(), 이름은 일왕(一旺)이며, 호는 원우(鴛圩)라 한답니다. 일찍이 왕노야를 좇아서 광동에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귀국을 떠나신 지가 몇 해나 되셨는지요.”

한다. 나는,

 

금년 오월에 고국을 떠났습죠.”

하였더니, (),

 

우리 광동에 비하면, 오히려 문 밖이나 다름없군요.”

하고는, 그는 또,

 

귀국 황제의 연호(年號)는 무어라 부릅니까?”

한다. 나는

 

무슨 말씀이오.”

하고 되물었더니, 누는,

 

황제의 기원 연호 말이외다.”

한다. 나는,

 

우리나라는 중국의 기원을 쓰고 보니, 어찌 따로이 연호가 있겠소. 금년이 곧 건륭 45년이죠.”

하였더니, 누는,

 

귀국의 임금은 중국과 대등한 천자가 아니옵니까?”

한다. 나는,

 

만국이 한 천자를 받들고, 천지가 모두 대청(大淸)이요, 해와 달이 다 건륭인가봅니다.”

하였더니, 누는,

 

그러시다면 관영(寬永)이니 상평(常平)이니 하는 연호는 어디에서 난 것이옵니까?”

한다.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였더니, 누는,

 

제가 바다에서 표류해 온 귀국의 배에서 보았는데, 관영통보(寬永通寶)라는 돈을 잔뜩 실었습디다.”

한다. 나는,

 

그건, 일본(日本) 사람들이 참칭한 연호요, 우리나라의 것은 아니오.”

하였더니, 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행동거지라든지 말하는 태도로 보아서는, 얼굴만 풍후하고 맑은 듯하나, 어딘지 무식해 보인다.

당초 그의 묻는 바가 무슨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돈이란 워낙 금물인데도, 그가 묻는 까닭은 금물(禁物)이라고 해서 물은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를 정말 천자가 있는 나라로만 알았기 때문에 시방의 연호까지도 물었던 것이요, 그가,

 

귀국 황제.”

하고 묻는 그 한 마디 말에 벌써 그의 무식을 알 수 있겠고, 또 비록 관영이니 상평이니 하는 것들을 우리나라 연호로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못 쓸 것을 쓰는 것인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또 우리나라의 표류한 배가 돈을 실었다손 치더라도 그리 이상해할 일도 아니지마는, 관영통보를 한 배나 가득 실었을 리야 어디 있을 것인가. 그는 필시 관영통보를 구경하고 또 상평통보를 구경했던 것이 뒤범벅이 되어, 모두 우리나라 돈인 줄만 알았던 모양이다.

그는 정말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책력을 쓰는 줄도 몰랐고, 돈을 보고는 우리나라에도 연호가 있는 줄만 알았던 모양으로, 특별히 다른 의심을 갖고 내 속을 떠 보려고 물었던 것이 아님을 알았다.

누가 차를 다 마시자,

 

내일은 부디 다른 데 출입을 말아 주셔요.”

하고 거듭 부탁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즉, 그는 곰곰 섭섭해하는 빛을 보이면서 한 번 읍하고 가버린다. 나는 수역을 보고,

 

돈을 금하는 것은 대관절 무슨 까닭이오?”

하고 물었더니, 수역은,

 

별반 약조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중국 돈을 쓰는 것을 금했고, 또 작은 나라로서 돈을 따로 지어 쓴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하기에, 나는,

 

옛날 제 태공(齊太公 여상(呂尙)의 봉호)이 경중(輕重) 구부(九府)를 두었지마는, ()의 천자가 이를 금한 적이 없었고, 또 돈을 근래에 와서 쓰기 시작하기는 숙종(肅宗 이돈(李燉)) 경신년(庚申年 1680)이니까, 올해는 벌써 101년이나 지났은즉, ()의 초기에 두 나라가 맺은 약조에도 이런 금법이 들지 않았던 것 같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세종(世宗 이도(李祹)) 때 돈을 한번 지어서 한 7, 8년 동안이나 쓰다가는, 민간에서 불편하다고 하여 다시 저폐(楮幣)를 쓰게 되었고, 인조(仁祖 이종(李倧)) 때 와서 두 번째로 돈을 지었다가 진작 말았으나, 모두 민간에서 불편하다 해서 그랬던 것이지, ()을 두려워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제 북도 지방은 돈을 금하고 무명을 돈으로 삼아 쓰고 있으니, 국경이 가깝다 해서 그런 것이요, 관서(關西) 지방으로는 의주로부터 압록강 가의 여러 고을까지 아직 한 번도 돈을 금한 적이 없으니, 이것도 알쏭달쏭하여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표류된 배가 지닌 돈을 금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였더니, 수역은,

 

그렇습니다. 지금도 역원(譯院 통역을 맡은 기관)에서는 몇 해를 두고 임시 변법으로 중국 돈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나라 은()은 자꾸만 귀해지고 중국 물건 값은 날로 비싸지니, 이로써 역원의 손해는 막심하지요. 은 한 냥으로 중국 돈 7()를 바꾸고 보니, 만일 중국 돈을 통용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돈을 만들 수고도 없이 돈은 저절로 헐해질 것이요, 이익은 막대해질 것입니다.”

한다. 주 주부(周主簿)가 있다가,

 

조선통보(朝鮮通寶)는 한()의 오수전(五銖錢)보다도 더 잘 되었을뿐더러, 돈 중에는 가장 오래된 돈이기 때문에, 귀신이 붙어 점치는 돈으로 쓴다죠.”

하기에, 나는,

 

오래 돼서 귀신이 붙다니.”

하였더니, (),

 

이 돈은 기자(箕子) 때 돈으로, 중국 사람들이 보면 의당히 커다란 보물로 삼을 텐데, 애석도 하이, 이걸 못 갖고 와서.”

한다. 나는,

 

이건, 세종 때 지은 돈이야. 기자 때에 해자(楷子)가 어디 있었어. () 동유(董逌)의 전보(錢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돈이 네 가지 실렸는데, 삼한중보(三韓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만 실렸지 조선통보는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돈이 오랜 적 돈이 아닌 것을 알 것이네.”

하고 설명해 주었다.

오후에는 세 분의 사신이 대성전(大成殿)에 배알하였다. 주자(朱子)의 석차를 높여 십철(十哲)의 아랫자리에 모셔 두었다. 위패(位牌)는 모두 번들번들한 붉은 칠을 하고 금자로 썼는데, 옆에는 만주글자로 썼다. 대성문(大成門) 바깥벽에는 검은 빗돌을 둘러 세우고, 강희옹정과 지금 황제의 훈시와 친히 지은 학규(學規)를 새겨 두었으며, 마당에 세운 빗돌은 작년에 세웠다는데, 역시 황제가 세운 것이라 한다. 그리고 대성전 뜰에는 한 길 남짓 되는 향정(香鼎)을 두었는데, 아로새긴 솜씨는 말할 수 없이 정교했다. 전각 안에는 위패 앞마다 작은 향로 한 개씩을 두었는데, 모두 건륭(乾隆) 기해제(己亥製)라 새겨져 있다. 위패 앞마다 붉은 운문단(雲紋緞) 휘장을 드리웠고, 양쪽 행랑채 안 위패들 앞에 차려 놓은 것도 본전의 내용과 다름없이 장엄하고도 화려한 품이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삼사는 돌아와 각기 청심환 몇 알과 부채 몇 자루씩을 추 거인(鄒擧人) 사시(舍是)와 왕 거인(王擧人) 민호(民皥)에게 보냈다.

숭정(崇禎) 갑술년(1634) 6 20일에 명()의 칙사(勅使) 노유령(盧有齡)이 우리나라로 나왔는데, 그는 바로 환관(宦官)이다. 그는 24일에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 참배를 하면서 참렬했던 유생들에게, 백금 오십 냥을 내놓은 일이 있었다. 이제 우리 사신들이 큰 나라에 와서 성묘(聖廟)를 배알하면서 공부하는 두 명 거인에게, 겨우 변변하지도 못한 환약과 부채 따위를 선물로 보낸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몸소 두 선비가 있는 숙소를 찾아서,

 

창졸간에 나선 나그네의 처지라,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어 변변하지 못한 환약과 부채를 올린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두 거인은 허리를 굽히고 사례를 한다.

 

주인된 도리로 인도한 것이 무슨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토록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시니 충심으로 감사하옵니다.”

저녁을 치른 뒤에, 왕혹정(王鵠汀)이 학도 아이를 시켜 붉은 종이 편지 쪽지를 한 장 보내 왔다. 그 사연에는,

 

왕민호는 삼가 연암 박 노선생(朴老先生)님께 부탁을 드리나이다. 수고스러우시겠사오나 여기 천은(天銀) 두 냥을 보내오니, 청심환 한 알만 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뜻이다. 나는 보내온 은을 곧 돌려 보내면서 진짜 청심환 두 알을 보냈다.

저녁 으스름녘에, 황제로부터 사신은 황성(皇城)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행은 부산하게 밤이 이슥하도록 길 떠날 치장을 차렸다. 밤에 기려천(奇麗川)과 작별하였다. 여천은,

 

“18일에 열하를 출발하여 25일에는 북경에 도착해서, 26, 7, 8 사흘 동안은 두루 작별 인사를 다니고, 9 6일에는 선산에 성묘를 갔다가 9일에는 집으로 돌아와, 11일에는 귀주(貴州)로 떠날 터인데, 떠나는 전날은 집에서 기다릴 터이니 꼭 왕림해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응락하고, 다시 왕혹정에게 작별차로 들렀다. 혹정은 눈물을 지으면서,

 

이 밤에 길이 이별을 하면, 또 뵈올 기약이 없겠소이다. 더구나 다가올 밝은 달밤에는 그 심회를 어찌하오리까.”

한다. 이는 전일, 추석날 달밤에 명륜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자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학지정(郝志亭)의 처소를 찾았더니, 지정은 다른 곳에 자러 나가고 없어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또 윤형산(尹亨山)에게 들렀더니, 형산은 눈물을 닦으면서,

 

내 나이 늙고 보니, 이제야 아침 이슬이나 다름없나 봅니다. 선생은 아직 좋은 나이로, 또 다시 연경 걸음이 계시게 된다면 응당 오늘 밤 생각을 하실 거외다.”

하고는 술잔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서,

 

달 아래 이 이별을 하고 보니, 다른 날 만 리 밖에 계신 선생이 그리울 적엔 저 달을 보고 선생을 대하는 듯하리다. 보아하니, 선생은 술도 잘 자시고, 또 한창 시절에 호색하실 테라, 이제부턴 부디 몸조심하시와 수련의 길을 찾도록 하시옵소서. 저는 18일에 연경으로 돌아갈 테니, 선생이 만일 그 때까지 귀국하시지 않으셨거든, 다시 한 번 찾아 주십시오. 동단패루(東單牌樓) 둘째 골목[衚衕] 둘째 집 대문 위에 대경(大卿 대리시경(大理寺卿)) 편액이 붙어 있는 것이 곧 저의 집이올시다.”

한다. 그리고는 서로 악수하고 하직하였다.

 

 

[D-001]축어(柷敔) : 풍류를 시작하거나 그칠 때 치는 나무로 만든 악기.

[D-002]초헌(貂軒) : 종이품(從二品) 이상 문관이 타던 외바퀴 달린 가마.

[D-003]삼영(三營) : 훈련원(訓鍊院)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합칭. 삼군영(三軍營)삼군문.

[D-004]주례(周禮) : 십삼경(十三經)의 하나. 주공(周公)이 지었다 전하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D-005]월령(月令) : 예기(禮記)의 한 편명으로 매달마다 정치적 행사에 관한 요강을 적어 놓은 것.

[D-006]정 사농(鄭司農) : 후한(後漢)의 명신 정중(鄭衆). 사농은 그의 벼슬. 주례의 해석이 있다.

[D-007]진혜전(秦蕙田) : 청의 건륭 때 저명한 학자. 경술(經術)과 독행(篤行)으로 이름났다. 자는 수봉(樹峯). 호는 미경(味經)

[D-008]양고기 …… 도위(都尉) : 후한 때 유현(劉玄)의 고사. 벼슬을 몹시 남발하여 양의 염통 요리를 하는 자는 도위를 주었고, 양의 머리로 요리를 잘하는 자에게는 관내후(關內侯)를 주었다.

[D-009]무후(武后) : 측천무후(則天武后) 무조(武曌).

[D-010]왕모중(王毛仲) : 고려(高麗) 사람으로 당 현종 때의 유명한 목축가.

[D-011]관영(寬永) : 일본 후수미(後水尾)명정(明正) 천황 때의 연호(1624~1643).

[D-012]상평(常平) : 상평통보(常平通寶). 조선 인조(仁祖) 11년에 처음 지었고, 숙종(肅宗) 때 두 번째 지었던 엽전.

[D-013]구부(九府) : 모든 재물과 돈을 관리하는 아홉 곳의 관부.

[D-014]저폐(楮幣) : 지폐(紙幣). 한 장에 쌀 서 되.

[D-015]오수전(五銖錢) : 한 무제(漢武帝) 때 삼수전(三銖錢)이 지나치게 가볍다 해서 새로 지은 돈.

[D-016]동유(董逌) : 북송 말년의 학자. 자는 언원(彦遠).

[D-017]십철(十哲) : 공자의 뛰어난 10명의 제자.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계로(季路)자유(子游)자하(子夏).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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