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幷序

*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한다.

(본문 중에서)

 

[비명 제목전문] 비명병서의 전문 번역문을 싣는다.

비명병서는 생애를 산문으로 적고 운문의 비명을 적는다.

이 글은 한문사대가의 한 분이신 계곡 장유 선생의 작품이다.

<동사열전> '30.청허존자'편에는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이 비명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선생집 제13권

비명(碑銘)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淸虛堂大師碑銘 幷序

청허당대사비명 병서

 

有明朝鮮國 賜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幷序

유명조선국 사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병서

 

서산(西山)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입멸(入滅)하고 나서 28년이 지나 그 법사(法嗣)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해안(海眼), 쌍흘(雙仡) 등이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岳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 이상공(李相公)이 명(銘)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영골(靈骨)을 이제 이곳에 봉안하기는 하였다마는, 속세에서 출가하여 법을 얻으신 것으로 말하면 실로 남쪽 지방에서 비롯되었고 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야말로 스승께서 일찍이 주석(駐錫)하신 곳이니, 뭔가 글을 남겨 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해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서 쌍흘이 대표로 나의 집을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임제(臨濟)로부터 18대를 전해 내려와 석옥 청공(石屋淸珙)에 이르는데

려조(麗朝,고려)의 국사(國師)인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실로 석옥의 법을 전수 받았고, 이로부터 다시 6대를 전하여 우리 스승에게 이르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여래(如來)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중국에 전해졌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60여 세 만에 우리 스승에게 부촉(咐囑)되었는데, 그 원류(源流)가 이처럼 심원하니 이런 내용으로 명(銘)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에 대해서는 내가 본디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렇게 주고받는지를 내가 장차 어떻게 알아서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자, 쌍흘이 다시 말하기를,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안팎으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인데, 예로부터 공문(空門 불가(佛家))의 기숙(耆宿)들 가운데에는 왕사(王事)에 힘을 쏟은 분들이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우리 스승께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납자(衲子)의 신분으로 한마디 말씀을 올렸다가 성조(聖祖 선조(宣祖)를 말함)의 지우(知遇)를 받고 임금의 글을 받는 은총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마침내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나 무리를 한데 모은 뒤 명(明) 나라의 정토(征討) 사업에 협조하여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움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스승의 마음으로 말하면 어찌 일찍이 작위적(作爲的)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었던 것이겠는가. 인연을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공적이 탁월하게 나타난 것일 뿐으로서 공유(空有)에 처한 마음이 충의(忠義)의 일로 빛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감히 이런 점들을 빙자하여 굳이 청하게 된 것이다.”

하기에, 내가 훌륭한 말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응낙을 하고 그 행장을 펼쳐 보았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그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모친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가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간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조금 자라나면서부터 풍신(風神)이 빼어났으며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주목(州牧)의 사랑을 받으면서 기동(奇童)이라고 일컬어졌다.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州牧)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出家)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러다가 뒤에 시골 마을을 유행(游行)하던 도중 한낮에 우는 닭 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평생 바보같이 살아갈망정 문자 가르치는 선생 노릇 안 하리라.”

하고는, 붓을 들어 낙엽에 시를 짓기를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지 않는 것을 옛사람 일찍이 밝혀 놓았지. 이제 닭 울음 소리 한 번 듣고는 대장부 해야 할 일 모두 끝냈네[髮白心未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라 하였다.

이로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들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경사(京師)에 들어간 기회에 선과(禪科)에 응시해서 선발되었으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는 옷을 떨치고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을 지었다.

일선 화상(一禪和尙)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기기를

 ‘누구엔가 주어야 할 나의 옷 한 벌,

나무 인형들이 푸른 눈빛 다투누나.

다리가 누군들 없을까마는,

남쪽 바다에서 누가 오리라.

[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  來自南溟]’

하였는데, 때마침 대사가 모처(某處)에서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니 신령스럽게 반응하며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기축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함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인견(引見)하여 어제(御製)의 절구시(絶句詩) 1수와 어화(御畫)로 된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대사가 그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唯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공 율(權公慄)과 병력을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문도(門徒) 1천 5백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 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

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가 일단 묘향산(妙香山)에 돌아오고 나서는 무심하게 한가이 지내는 하나의 도인(道人)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 정월 23일에 장차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려고 하였는데, 이날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고 설법을 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팔십년 전에는 그가 나로 되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그로 되는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하고, 또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등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사의 세수(世壽) 85세요, 선랍(禪臘)은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사유(闍維 다비(茶毘) 즉 화장(火葬)임)를 행하여 영골(靈骨) 1편(片)과 사리(舍利) 3립(粒)을 얻었으므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다 탑(塔)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유정(唯政)과 자휴(自休) 등이 또 정골(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는 사리 몇 과(顆)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모셨다.

대사는 젊었을 적에 영관(靈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하였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통탈자재(通脫自在)한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는 무리들이 계(戒)를 뛰어넘는 행동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식자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禪家龜鑑)》ㆍ《선교석(禪敎釋)》ㆍ《운수단(雲水壇)》ㆍ《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총림(叢林)에 유행되고 있는데, 그 시게(詩偈)를 보면 상랑(爽郞)하면서 놀랄 만한 말들이 많고 필적(筆跡) 또한 소경(疏勁)하여 운치가 있다고 한다. 행장에 서술된 내용이 대략 이와 같은데, 이쯤되면 또한 두루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아, 대사의 환신(幻身)은 이미 변화되어 티끌로 돌아갔지만 환(幻)이 아닌 그 무엇은 변화되어 사라진 적이 일찍이 없었으니, 한 조각 돌에 몇 장의 글을 새긴다 한들 대사를 불후(不朽)하게 하는 일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그 도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마 그 자취를 민멸(泯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려는 그 문도들의 마음씨야말로 진정 근실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세교(世敎)에서도 또한 수긍하고 있는 바이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마침내 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諸佛之心

제불지심 부처의 심인(심인)

祖師傳之 

조사전지 조사가 전하였고

祖師之傳

조사지전 조사의 의발(衣鉢)

淸虛延之

청허연지 청허가 받들었네

淸虛之學 

청허지학 청허의 경지

得乎天全

득호천전, 본래면목(本來面目) 투득(透得)하여

一絲不罣

일사불괘 한 올 걸림 없는 것이

如魚在淵

여어재연 연못 속의 물고기라

半偈徹聞

반게철문 반쪽 게송에 철저히 깨닫고서

嘿契聖心

묵계성심 성인의 마음 말없이 계합(契合)했고

宸翰寵賁

신한총분 임금이 친서(親書) 내려 은총을 쏟아줌에

光動叢林

광동총림 그 영광 총림을 진동시켰네

遘難奮義

구난분의  국난당하여 의승군(義僧軍) 일으켜서

贊我中興

찬아중흥 나라의 중흥 협찬한 결과

錫號國一

석호국일 존자(尊者)의 칭호 하사받았나니

莫之與京

막지여경 그 영예 누구도 겨룰 수 없었어라

 緣盡而逝

연진이서,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殺活自由

살활자유 죽이고 살리는 일 방편이 자재(自在)하고

隱見無累

은견무루  숨고 나오는 일 장애가 없어

世出世間

세출세간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兩盡能事

량진능사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도다

緣盡而逝

연진이서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譬彼薪火

비피신화 비유하면 다른 섶에 불을 다시 지핌이라 

茫茫三界

망망삼계 망망한 삼계 가운데에서

誰渠誰我 

수거수아 누가 그이며 누가 나일런고

幻化雖滅 

환화수멸 허깨비 같은 육신이야 사라졌어도

非幻自如

비환자여 곡두 아닌 당체(당체)는 원래가 여여(여여)한 법

 名山石龕

명산석감 명산에 세워진 사리탑 속에

永閟玄珠 

영비현주 영롱한 사리 구슬 모셔져 있네

睠玆靈區

권자령구 신령스런 이 구역 돌아다보니

實惟覺場 

실유각장 실로 깨달음의 도량(도장)이라 할 만한데

鑱珉紀蹟 

참민기적 옥돌에 그의 행적 이곳에 새겨

昭眎無疆 

소시무강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 하는도다

 

이정구 - 서산대사비명 병서, 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幷序

https://kydong77.tistory.com/10863

 

이정구 - 서산대사비명 병서, 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幷序

[비명 제목전문] 비명병서의 전문 번역문을 싣는다. 비명병서는 생애를 산문으로 적고 운문의 비명을 적는다. 이 글은 한문사대가의 한 분이신 월사 이정구 선생의 작품이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kydong77.tistory.com

 

그 명은 다음과 같다.

 

金天之西 

금천지서 금천의 서쪽

薩水之濱 

살수지빈 살수의 물가에

淑氣亭毒 

숙기정독 맑은 기운이 모여

乃降眞人 

내항진인 이에 진인이 탄생했어라

屳婆抱送 

선파포송 신선 노파가 안아 보냈고

釋老提携 

석로제휴 불가 노인이 손을 잡아 인도했지

天開寶光 

천개보광 하늘은 보광을 열었고

帝借金鎞 

제차금비 상제는 금비를 주었어라

靈符妙契 

령부묘계 신비한 꿈의 징조와 꼭 맞아

秀骨超凡 

수골초범 준수한 골상이 범상치 않았으니

蚌珠出海 

방주출해 진주가 바다에서 나온 듯하고

龍鏡發函

룡경발함 용경이 상자에서 나온 듯하여라

失怙無依 

실호무의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어

千里負笈 

천리부급 천리 먼 한양으로 공부하러 가서

淹貫諸家 

엄관제가 제자의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卓然自立 

탁연자립 학문을 쌓아 우뚝 자립하였지

乃超覺路

내초각로 그러다 불교의 길로 들어서더니

遂登法席

수등법석 마침내 스승으로 법석에 오르니

祖月重輝 

조월중휘 조사의 달빛이 다시금 비침에

群昏一廓

군혼일곽 중생의 어리석음이 한바탕 걷혔지

餘事詩聲 

여사시성 도 닦는 여가에 지은 시의 명성이

上徹楓宸 

상철풍신 위로 대궐에 계신 임금께 들렸으니

殊恩異渥 

수은손악, 그 남달리 우악한 성은이야말로

榮耀千春 영광이 천추에 길이 빛나도다

身雖巖穴 몸은 비록 암혈에 묻혀 살아도

忠不忘君 충성은 임금을 잊지 못하였네

遇難一呼 난리를 만나 한 번 부르자

 

義旅如雲 

의려여운 의병의 무리 구름처럼 모였지

協助天戈 

협조천과 이에 중국 군사를 도우며

憑仗靈祐 

빙장령우 부처의 영험에 의지하였나니

驅除腥穢 

구제성예 더러운 오랑캐를 몰아내고

福我寰宇 

복아환우 우리의 강토에 행복을 주었어라

出而濟世 

출이제세 나가서 세상을 구제함에는

名動華夷 

명동화이 그 명성이 화이에 진동하였고

入而修定 

입이수정 들어와서 선정(선정)을 닦음에는

法闡宗師 

법천종사 종사로서 진리를 천명하였도다

在掌靈珠 

재장령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명주

虛明自玩 

허명자완 그 허명한 빛을 스스로 즐기고

倘來榮辱 

당래영욕 외부에서 오는 덧없는 영욕은

如夢一幻 

여몽일환 한바탕 꿈과 허깨비처럼 여겼지

瞻彼妙香 

첨피묘향 멀리 저 묘향산과

與夫金剛 

여부금강 금강산을 보니

寔唯淨界 

식유정계 이야말로 청정한 세계라

宜我法王 

의아법왕 우리 법왕이 거주하실 곳이지

來往諸天 

래왕제천 이에 제천을 내왕하니

百靈護持 

백령호지 온갖 신령들이 호위하였네

乘化返眞 

승화반진 세연이 다해 입적하니

去又何之 

거우하지 떠나서 또 어디로 갔는고

功紀人間 

공기인간 공적은 인간 세상에 기록되었고

道在山中 

도재산중 도는 산중에 남아 있어라

一片貞珉 

일편정민 이 한 조각 비석이여

萬古英風 

만고영풍 만고에 영명한 풍모로다

[금강산 서산대사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