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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핵심 구성요소인 3門3朝 가운데 3조는 외조(外朝), 치조(治朝) 및 연조(燕朝)다.

외조는 국왕 취임, 외국 사신 접견, 문무백관 조회 등 국가의 주요 의전을 행사하는 권역으로 경복궁의 경우 근정전이 이에 해당한다.

치조는 정무를 보는 권역으로 만춘전, 천추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치조 권역의 건물들을 통틀어 편전이라고도 한다.

연조는 왕과 권솔들의 생활공간으로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3조는 3문과 함께 왕궁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권역으로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분할과 대칭구도를 이루고 있다.

경복궁의 미적 압권은 3문3조 뒤편에 내밀하게 조성되어 있다.

교태전 뒤편의 아미산 정원과 자경전, 교태전의 꽃담장 등이 이에 해당한다.

아미산 정원은 십장생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는 굴뚝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조성되어

여성미의 극치를 이룬다. 꽃담장에도 십장생을 비롯한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양을

배치하여 미적 감각을 극대화시켜놓았다.

이러한 조경은 자금성은 물론 서양의 어느 궁궐에서도 맛볼 수 없는 심미적 여유와

우월성으로 가득 차 있다. 서양 궁궐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오래도록 감탄하고 서 있는 이유다.

아미산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산이름으로 중국불교의 4대 명산 가운데 하나다.

억불정책을 표방하면서도 뿌리 깊은 불교정신을 생활공간에 접목시키기 위해 따다

붙인 이름이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그 흙을 가져다 쌓은 인공산이다.

대궐을 비롯하여 큰 저택을 축조할 때 종종 사용하는 기법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아미산 정상부는 교태전 담장과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담장 아래로는 여러 층의 꽃계단을 만들어놓고 석분(石盆), 석련지(石蓮池), 괴석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아기자기한 후원의 맛을 더했다. 자경전과 교태전의 구들을 거쳐온

4기의 굴뚝을 아름답게 치장한 실용미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경복궁 답사에서 반드시 찾아보고 잠시 숙연한 자세로 역사를 반추해봐야 할 장소가 있다.

궁궐 가장 안쪽, 담장 넘어 청와대와 근접한 건청궁과 향원정이다.

바로 고종과 민비가 생활하던 연조공간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은 여기까지만 설명하고 있다.

미술사학자로서 정통역사 부문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금도이리라.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지배에 입김에 드세지기 시작한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는 왜인 폭도들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과 왕세자를 협박

하는 한편, 건청궁 뒤편 옥호루에 숨어 있던 민비를 살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건청궁 후원에서 불에 태워버렸다.

[은자주]안내표지판에는 "곤녕합은 1985년 을미사변 때 명성왕후가 시해된 역사적 비극의

장소다."라고 기술하였다.

조선정부가 친일파를 몰아내고 친러파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자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취한 극단적 조치였다.

왜놈들은 관련 자료를 인멸 또는 왜곡하고 관련자들에게 엄중한 함구령을 내렸으며,

외국 특파원들을 매수하고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등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갖은 수법을

다 동원했다.

비록 대원군과 민비 간에 권력을 다투는 암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모가 시해된 마당에

정부 차원에서 엄중한 항변 한 마디 못하고 우물쩍 넘어간 사실은 역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일본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기 위한 소인배들에게 국모 시해라는 치욕은 안중에도 없었다.

약소국의 서러움이었다고 둘러대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치열한 이권다툼이었다.

결국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은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 매국노들의 비열한 이기주의는 부산저축은행 불법청탁을 수사하는 검찰의 칼끝이 정치권으로 향하자 서둘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권 폐지를 결의한 국害의원들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국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망국적 무리들이다.

민간에서는 을미의병이라 하여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들고 일어나 왜군을 공격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기운 국세(國勢),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수천 년이 지나도 우리는 왜놈들의 이 잔학한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흔히들 민비라고 하면 명성황후를 비하하기 위한 호칭으로 잘못 알고 있다.

명성황후는 민비 사후 2년 뒤인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추존한 명칭이니

을미사변으로 최후를 맞을 때까지는 민비로 부르는 게 옳다.

향원정은 민비가 대원군과 팽팽히 맞서는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한 살 연하인 고종과 밀어를

속삭이던 곳이다.

40대 초반의 국왕 부부가 정담(情談)을 나누던 100여 년 전을 연상하면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색다른 역사체험이 될 터이다.


[下 만춘전]

[下 천추전]


[下 천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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