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UE0k3MfT59Q 

 

 

 

https://www.youtube.com/watch?v=r_o1zVGvNGA 

 

 

 

https://www.youtube.com/watch?v=OBCb9y2rR8Q 

 

 

ㅡ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장릉莊陵(단종)위치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457년(세조 3), 1516년(중종 11), 1580년(선조 13), 1698년(숙종 24)능의 구성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이다. 단종이 1457년(세조 3년) 노산군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면서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영월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재실 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마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능의 역사

단종은 1457년(세조 3) 세상을 떠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고, 1580년(선조 13)에 상석, 표석 등의 석물을 세웠다. 그 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어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 이야기

단종(재세 : 1441년 음력 7월 23일 ~ 1457년 음력 10월 21일(또는 24일), 재위 : 1452년 음력 5월 18일 ~ 1455년 음력 윤6월 11일)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렴청정을 할 대비(大妃)가 없어 고명대신 김종서 등이 단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세조)이 불안정한 왕권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도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이후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자 영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숙부 금성대군 등이 계획한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결국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노산군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중종대에부터 노산군의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여 1516년(중종 11) 노산군의 묘를 겨우 찾아 봉분을 만들었으며, 선조대에는 석물을 세웠다.

그 후 숙종대인 1681년(숙종 7년) 노산군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였으며, 여러 논의 끝에 1698년(숙종 24) 왕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자는 3족을 멸한다는 엄명에도 불구하고 신신을 수습하여 묘를 만든 엄흥도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건물

 

[참고]

https://ko.m.wikipedia.org/wiki/%EB%8B%A8%EC%A2%85_(%EC%A1%B0%EC%84%A0) 

 

단종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ko.m.wikipedia.org

1252-1255년 조선의 6대왕.
1255년 숙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함.
11세의 문종 장남에게 왕위를 계승한 것도 운명의 장난인가?
세종의 장손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삼촌이 내린 사약을 마셔야 하다니!
그것이 예나 이제나 생사를 가르는 정치판의 속성인가?  권력의 아이러니인가?

 

[사8신과 생6신]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 있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1]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 근처에 매장되어 있다.

생육신(生六臣)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6인의 신하로 성삼문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김문기도 거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모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인물은 사육신을 비롯해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에 이르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bET_iwwO-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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