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B%8B%B9%EC%86%A1%ED%8C%94%EB%8C%80%EA%B0%80

 

1. 개요

중국 당나라송나라 때 활동한 문학가 8명. 중국 근현대 이전의 문장 형식과 내용, 산문 이론을 정립하여 퍼트린 업적이 있는 인물들로, 당송팔대문학가(唐宋八大文學家)라고도 불린다.

2. 상세

중국의 산문은 춘추전국시대 굴원의 초사(楚辭)에서 시작되어 한나라 때 황제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행간의 음절 수를 정하고 압운(押韻)을 적극 활용한 형식주의적 글인 부(賦)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중국 산문은 삼국시대(중국)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산문의 내용을 더욱 경시하고 적절한 미사여구나 문학적 표현의 사용만을 중시하는 변려문(騈儷文)으로 변화하였다.

변려문은 수필임에도 4자 · 6자의 대구를 많이 사용하여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대우[1]와 대구[2]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각 글자를 음률(성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열하여 노래처럼 읊을 수 있도록 한 수필이다. 격식과 수식을 차려 지배층 간의 소통에 사용하기에 좋은 문체였으나 형식에만 신경을 써서 문맥이 뚜렷하지 않고 글 뜻은 애매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문체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조금씩 생겨났으나 상당수의 학자가 모두 변려문에 익숙하여 문체 개혁의 움직임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변려문의 주 사용 계층이었던 귀족과 상류층이 몰락하고, 반대급부로 상인·부농 등 중하위 계층 출신 인물이 글을 배워 출세하는 경향이 늘어나자 변려문을 대체할 이해하기 쉬운 글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며, 때마침 한유와 유종원이 등장함으로써 중국 산문은 전환기를 맞았다.
문장력이 뛰어났던 한유는 옛 문인들이 정립한 문학 이론을 집대성하여 문장으로서 유교의 전통을 회복하는 고문(古文)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유종원 역시 그와 함께 고문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다만 유교만을 숭상하고 글의 내용만을 중시하여 문장의 미적 형식을 배척하고 유교적 도리가 글의 내용에 담겼는지만을 고려한 한유와 달리, 유종원은 문장을 접하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을 오래 간직하도록 하려면 문장의 일정한 형식을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비단 유교가 아니어도 올바른 도리를 포괄한다면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내용을 품고 있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이토록 사상에 큰 차이가 있던 두 사람이었으나 한유와 유종원은 서로를 최고의 벗이자 협력자로 여겼으며, 그들의 고문운동은 당 말기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으로 다시 유미주의가 확산되며 잠시 주춤하였으나 북송대에 이르러 구양수가 다시 유미주의를 비판하며 한유의 문집을 모범으로 삼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유창하게 읊고 쓸 수 있는 산문을 유행시킴으로써 다시 주목받는다. 또한 소순소식(시인)소철(시인)이 그에 동조하여 각자의 스타일로 고문을 집필하여 고문운동의 주도권을 이어받고, 또 왕안석증공이 임천(臨川)[3] 출신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문운동을 독자적으로 이해하여 확산시켜 완전히 성공시킨다.

이들이 활동한 이후 송나라 때의 진덕수(眞德秀, 1178-1235)[4] 처음으로 이들 8인을 대가라고 평가했고, 이 평가가 그대로 명나라 이후의 문인들에게 수용되어 모곤(茅坤)이라는 문인이 이들의 산문들을 약간 편집하여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라는 160권짜리 문집을 만들어 보급한 이래 지금의 당송팔대가라는 명칭으로 남았다.

현재 중국은 소프트파워 융성을 위해 이 당송팔대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바이두 등 중국 웹 사이트에서도 이들에 대한 자료가 많이 올라온다.

3. 문제점

진덕수가 무슨 근거로 당송팔대가를 선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무늬만 당송이지 여덟 명 중 당나라 사람은 두 명뿐이고, 소씨 가문에서 세 명이나 차지하고 있다. 이 셋 중 소식의 문학적 성취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소순, 소철은 소식의 가족이라는 것 외에 크게 대단한 업적이 없는데도 한유, 유종원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4. 인물 일람

愈之爲古文,豈獨取其句讀不類於今者耶? 思古人而不得見,學古道則欲兼通其辭。通其辭者,本乎古道者也。

유(愈)가 고문을 하는 것이 어찌 그 구두(句讀)가 지금의 것과 같지 않음만을 취하련가? 고인을 생각해도 뵐 수가 없으니, 고도(古道)를 배움에 그 문사에까지도 통하고자 함이라. 그 문사에 통하는 것은 본디 고도에 뜻을 둠이라.

- 제구양생애사후(題歐陽生哀辭後)
 
 
고문운동을 본격적으로 촉발시킨 인물. 스스로 맹자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할 정도로 유교를 크게 숭상하였고, 그의 고문운동 또한 변려문의 지나친 형식미가 유교의 도리가 세상에 퍼지지 못하도록 하므로 유교의 도통을 복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행된 것이다. 그 때문에 도교불교 등의 가르침은 이단시[5]하였고 유교의 오경자사, 그리고 한나라 때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토록 곧고 일관된 주장과 사상 덕에 후세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文之用,辭令褒貶,導揚諷諭而已。雖莫言鄙埜,足以備於用,然而闕其文采,固不足以竦動時聽,夸示後學,立言而朽,君子不由也。

문장의 쓰임은 사령(辭令), 포폄(褒貶), 도양(導揚), 풍유(諷諭)[6]에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 말이 비루하다 해도 쓰임에 대비하기에는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채가 없다면 본디 세상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여 뒷날에 배우려는 이들에게 뜻을 드러내는 수가 없어 생각을 표현한 말이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군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 양평사문집후서(楊評事文集後序)
 
한유와 더불어 간결하고도 산뜻한 고문체의 글을 지어 고문운동을 이끌어 나간 인물. 그러나 형식미를 완전히 배제한 한유와 달리 꾸밈없는 문체는 읽는 이의 관심을 끌지 못하여 그 도리를 전파하지 못한다고 여겨 어느 정도의 미사여구는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사상적 측면에서도 유교 외길을 걸었던 한유와 달리 불교나 도교 등 다른 학문의 가르침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수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唐之文涉五代而弊,至修復起

당대의 문장이 오대를 거치면서 피폐해졌는데 구양수에 이르러 다시 일어났다.

-《사조국사(四朝國史)》
 
한유와 유종원이 활동한 당 중기 이후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러 또다시 유미주의적 문체인 태학체(太學體)가 확산되어 북송대까지 이어지자, 당대의 고문운동에 다시금 주목하여 한유[7]의 산문을 참고하여 명확한 산문이론을 정립하고 실제 창작을 통해 그 이론을 실천함으로써 중국산문사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과거 시험관 등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발굴하였는데, 아래의 나머지 당송팔대가 일원들이 모두 구양수의 도움을 최소 한 번쯤은 받은 인물들이다.
아래의 소식과 소철의 아버지로, 자식들과 함께 삼소(三蘇)로 엮이며 이에 따로 노소(老蘇)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책(幾策)', '권서(權書)', '형론(衡論)' 등 22편의 문장을 구양수에게 보여 주고 그의 추천을 받아 정계에 진출했다.
구양수의 제자이자 소순의 아들로, 별명인 소동파로 유명한 인물. 대표작으로 일유(日喩)가 있다.
위 소식의 동생으로 마찬가지로 구양수의 제자였다.
 
 
삼소(三蘇), 소순 3父子들은 구양수의 제자로 후세에 두드러진 문학 작품을 남긴 이는 소식이다,
 
 
 
 

소식(蘇軾),《赤壁賦》&《後赤壁賦》

赤壁賦 기(起)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

kydong77.tistory.com

가족들 중에도 이름난 문인이 6명 더 있었기 때문에 남풍칠증(南豐七曾)의 일원으로도 불린다. 주요 저서로 월주조공구멸기(越州趙公救災記) 등이 있다.
법률 개혁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지만 시와 산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요 산문으로 곤설(鯀說), 맹상군(讀孟嘗君傳), 상중영(傷仲永) 등이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40318118800005

 

<당송팔대가의 문장은 왜 위대할까>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재능이 붓 위로 떨어지면, 사해가 이미 모두 전하며 외웠고, 아래로는 여염집과 농가에서, 밖으로는 이적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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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문장혁신'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재능이 붓 위로 떨어지면, 사해가 이미 모두 전하며 외웠고, 아래로는 여염집과 농가에서, 밖으로는 이적의 나라까지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군재독서지' 중)

어떻게 글을 썼기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칭찬을 받았을까.

찬사를 받은 주인공은 중국 북송 때 문장가인 소식(蘇軾)이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실제로 소식은 시, 산문, 사부(詞賦), 서화 등에서 두루 최고경지에 다다랐다고 한다. 생활 속의 한 형상을 뛰어난 문장으로 포착해 냈고, 산문의 작법으로 시를 짓기도 했다. '적벽부'(赤壁賦)라는 걸작을 남겼다.

동생 소철(蘇轍)도 대단한 문장가였다. 현실문제를 지적한 논설문으로 유명한 아버지 소순(蘇洵)과 함께 세 사람은 '삼소'(三蘇)라고 불리며 문장가들의 추앙을 받았다.

삼부자는 동시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했다. 당송팔대가에는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修),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까지 아우른다.

이들 당송팔대가의 작품은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작품은 필독 고전이 됐고, 이후 문인들은 문체를 본뜨기에 바빴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이들 문학을 종합적으로 집중 연구한 서적이 많지 않았다.

최근 국내 번역된 '문장혁신'은 당송팔대가의 문학을 비롯해 그들의 삶과 사상을 조망하는 흔치 않은 책이다.

중국문학과 문헌학을 연구한 저자 우멍푸는 이 책에서 당송팔대가의 생애를 요약하면서 그들의 산문이 거둔 성취를 예술과 역사적 차원에서 짚어냈다.

저자는 당송 이전의 진부한 문학을 혁신하려 한 당송팔대가의 시도에 주목했다.

후대에서 '고문운동'(古文運動)이라고 부른 이런 움직임은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궁정 권력에 아부하느라 빈말을 쏟아낸 변려문에 저항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했고, 어투는 통속적이었다.

문장이 난삽해 사리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변려문과 달랐다. 분석과 논리가 시원했다.

저자는 당송팔대가라는 명칭의 유래와 역사적 지위를 살펴본 뒤 8명 각각을 소평전, 문학론, 문장비평, 예술적 성취 등으로 나눠 분석했다.

당나라 명문가 출신인 한유와 관련해서는 "진보적인 정치관이 문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며 "인습에 젖지 않고 진부한 말을 힘써 물리쳤으며, 오히려 잡스러운 이야기를 즐겨 예술적 자양분이 풍부했다"고 평가했다.

구양수에 대해서는 "형식과 기교에 치중한 송대 초기의 산문 풍조에 반발해 통속적 어투와 일상어를 사용함으로써 산문의 외연을 넓히는 데 힘썼다"는 평을 남겼다.

'신법'(新法)으로 유명한 왕안석이 문예 분야에서는 어떤 글쓰기를 남겼는지 소개하는 대목 등도 흥미롭다.

'당송팔대가의 글쓰기는 왜 고전이 되었는가'라는 부제처럼 일반인에게는 이름만 익숙한 당송팔대가의 삶과 글을 묶어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김철범 옮김. 글항아리. 516쪽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570

 

고문(古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정의

한문으로 쓰여진 산문체의 문장.
내용

국문학주1이나 국어학에서는 중세국어로 표기된 글을 현대문과 대칭해서 부르고 있다. 또, 중국에서는 일상어인 ‘백화(白話)’와 대립하여 문언(文言)으로 쓰인 산체문(散體文)을 ‘고문’이라 병칭하기도 한다. 근대 이전의 한문학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고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문자인 고대자체(古代字體)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과두문(蝌蚪文)주2이나 전서(篆書)같은 문자를 통칭하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허목(許穆)이 편찬한 『고문운율(古文韻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체(字體)로서의 개념이 고문이 가지고 있던 본래적인 뜻이다.

두 번째는 고대 전적(典籍)주3이나 학파로서의 고문이다. 한나라 사람들이 유가주4의 전적을 공자(孔子)주5의 옛 집에서 발견하여 ‘벽중서(壁中書)’라 불렀던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후대에 경학연구자들 사이에서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문의 개념이 학파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문체개념으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당나라주6 이전에는 문체적인 뜻으로 고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당나라 때에 와서 당시 유행하던 조작적이고 수식이 많은 사륙변려의 변체문(騈體文)주7과 다른 산문 체제를 독립적으로 유지한 문체가 출현하였다.

이것을 한문학에서는 보편적으로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문체를 고문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석주(金錫胄)가 편집한 『고문백선(古文百選)』의 내용들이 문체적 개념으로서의 고문을 수용하여 구성되고 있다. 문체적 개념으로서의 고문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한유(韓愈)주8를 중심으로 한 당나라 고문운동가들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문학 역사상의 새로운 산물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고문은 낱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복고적인 면모 내지 사조에 영향을 받아 나타났다는 점이다. ‘선진고문(先秦古文)’을 전범으로 생각한 고문운동가들의 처지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고문운동가들이 실천한 고문은 우수한 고대의 문학전통과 정신을 성공적으로 계승하면서 전혀 새로운 문학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나라의 고문운동가들이 가졌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이은 참신한 문학관의 형성에서 비롯되었다.

고문은 문학사의 발전에 따라 그 시대의 요구에 적합한 문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복고 한 방면에만 치중한 고문가들도 있었다. 명나라주9에 와서는 하나의 풍조를 이루기도 하였다. 문장은 반드시 진한의 것을 표방해야 한다는 의고문가(擬古文家)가 그것이다. 그 원인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주11의 문체가 점차로 평이하고 위약(萎弱)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여 형식에 치우친 ‘대각체(臺閣體)’주12나 ‘팔고문(八股文)’주13이 풍미하게 된 것에 있었다. 이것에 반동하여 새로운 문체혁신운동으로서 의고문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명나라의 한편에서는 당송고문을 존숭하는 왕신중(王愼中) · 당순지(唐順之) · 귀유광(歸有光)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당송을 배우는 데에 그치고 창신(創新)의 경지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청나라주14에 와서 당송고문파가 문단에서 큰 세력을 떨쳤다. 중반에는 절충파로서 방포(方苞)주15가 중심이 된 동성파(桐城派)주16가 출현하였다.

방포는 ‘고문의법(古文義法: 고문을 본받는다.)’과 ‘문도합일(文道合一: 글과 도를 하나로 합한다.)’을 내세워 도학가주17의 의리와 고문가주18의 문장 및 진한의 성조(聲調)와 의 규구(規矩: 법도)를 융합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고문관은 요내(姚鼐)주19 · 증국번(曾國藩)주20 등의 명청팔대가(明淸八大家)에게 이어져 청나라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이상 문체개념으로서 고문의 변모양상을 살펴보았다. 결국 진한의 고문과 당송의 고문이 당나라 시대의 고문운동 이후 서로 대립, 갈등하면서, 각 시대 풍기(風氣)에 따라 특징을 달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이 수입된 이래로 줄곧 『문선(文選)』의 영향을 받아 고려 초기까지 변체문이 주로 쓰였다. 한국한문학의 비조(시조)로 불리는 최치원(崔致遠)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산문체의 고문을 사용하여 성공적인 문학 활동을 한 이로는 고려 중엽의 김부식(金富軾)을 꼽는다.

그의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고문체의 문학성이 풍부한 문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송고문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처음 제창된 것은 고려 말엽의 이제현(李齊賢)부터였다. 그의 고문관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과문(科文)의 폐단을 지적한 점 등으로 보면 확고한 고문관이 정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한유와 같은 고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운동은 계기적으로 상당한 인원에 의하여 뚜렷한 양상을 보일 때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제현의 경우는 하나의 고문가로서 뒷날의 고문가들에게 모범이 된 인물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오면 성리학이 도입됨에 따라 고문론자들이 꺼리는 어록체(語錄體)주21 · 주소체(註疏體)의 문장이 보급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체가 대개 이러한 면모를 닮게 되었다. 이수광(李睟光)이 “ 김종직(金宗直)은 동방의 거벽(巨擘)이었지만 속하문자(俗下文字)를 많이 썼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문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그와 같은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최립(崔岦)은 이러한 문풍을 타파하기 위하여, 명나라의 의고문파의 고문이론을 흡수하여 진한고문을 본받고자 하였다. 윤근수(尹根壽) · 신유한(申維翰) 등도 약간 다르지만 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상당한 세력으로 문단을 지배하였다.

허균(許筠)은 의고문을 반대하는 고문이론을 주장하여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고문론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문설(文說)」에서 문답형식을 동원하여 고문을 회복하기 위하여, 옛 명문을 표절하고 험사교어(險辭巧語)주28하는 것은 진정한 고문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송고문의 진정한 가치는 복고에 있지 않고, 바로 자기 시대의 문체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상용어를 그대로가 아닌, 갈고 다듬어 창조하여 사용하는 것이 참다운 고문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허균의 뒤로 장유(張維) · 이식(李植) · 김창협(金昌協) 등이 계속 나타났다. 그들은 종래의 부솔(膚率)주29, 이속(俚俗)주30, 용미(冗靡)주31하던 누습에서 탈피하였다. 그리고 다양하고 참신한 문장을 구사하여 후세 고문가들의 전범(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이 되었다. 이들의 고문관은 의고문을 배격하고, 한결같이 개성 있는 고문론을 강조한 것에서 처지를 같이하고 있다. 장유는 진부한 말을 버리고 창조된 언어로 작문할 것을 강조하였다. 형식보다는 내실을 기할 것과 문장의 화려함보다는 이승(理勝)주22한 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김창협은 『잡지(雜識)』에서 당나라의 한유가 진언(陳言)주23을 버릴 것을 강조한 것은 세속의 용상어(庸常語)만이 아니라 경서주24에 보이는 글이라 해도 옛 사람들이 일단 말하였던 것은 모두 진언으로서 버려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문관에서 보다 강도 있는 개성추구정신을 나타내었다.

이식은 「작문모범(作文模範)」에서 현실적인 문체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시대마다 풍속과 사정이 현격히 차이가 있기에 그 시대에 맞는 고문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의고문파를 배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문가들의 고문관을 계승하면서 보다 혁신적인 내용과 표현을 통한 문학세계를 창조한 이는 박지원(朴趾源)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역사 흐름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체를 창출하여 당시 정조의 ‘문체반정’의 대상인물의 하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의 고문이론은 한마디로 ‘법고이창신(法古而創新 : 옛 것을 기준으로 새것을 만든다.)’이라 하겠다. 이는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그는 복고를 주장하는 의고문파들의 퇴영적 역사의식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발전적으로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고자 하는 최초의 고문운동가들의 정신을 당대의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박지원은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고정 불변하는 예(禮)나 악(樂)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현실에 맞는 문체를 쓰게 되면 오늘날의 글(今文 금문)이 곧 고전적인 가치를 획득한 글(古文 고문)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 결국, 세월의 흐름과 풍속의 변천 속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과 자신의 문제를 진실하게 다루면 자연히 금문이 곧 고문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금문을 통한 고문이론의 설법이다. 매우 독창적이고도 현실성이 강한 점이 특징이다. 그는 실제로 『열하일기』를 통하여 그의 이와 같은 고문관을 구현하고 있다.

홍석주(洪奭周)는 전통적인 주자학을 옹호하면서 청나라의 고증학을 비판하였던 인물이다. 「답이심부서(答李審夫書)」에서 진한고문을 추앙하는 의고문가들을 공격하여 모방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앞서의 고문가들과 맥이 통한다. 그는 도학가적인 취향이 있으면서도 문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많은 논문들이 고문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김매순(金邁淳)은 선대인 창협의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홍석주와 같이 도문일치(道文一致)주25의 문학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답사심서(答士心書)」에서 복고를 함은 형세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적인 소재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당송고문을 통하여 문장의 묘리를 터득하고 나아가 진한고문의 진수를 체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근대의 이건창(李建昌)과 김택영(金澤榮) 또한 모방과 표절을 배격하고 개성 있는 문장을 강조한 사람들이다. 이건창은 글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에 맞게 지을 뿐이라 하였다. 글은 마음에 흡족하면 그만이지 천하후세를 염두에 둘 것이 없다. 더구나 당대의 기림을 바랄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독자성이 강하고 주체적인 관점에 선 문학관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것들과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는 이와 같은 그의 문학관을 실천하기 위하여, 말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 하는 조사(措辭)에 신중을 기하였다.

김택영은 신기(神氣)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글이란 엄정한 구조가 중요하기는 하나 일정한 법칙만을 고수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글에는 변(變)의 묘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 이유는 변하지 않는 중에서도 크게 변해야만 그 법이 생명력을 갖게 되고 문장이 묘한 경지에 이르러 신기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대에 편집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는 앞서의 문인들의 고문선(古文選)으로 한국 고문연구의 지침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하여 본 한국 고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문이란 스스로 일가를 이룬 글이다. 둘째, 시대 현실에 적합한 글로서 그 시대의 진실된 감정을 담고 있는 글이다. 셋째, 진부한 어구나 표현을 쓰지 않고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도(道)를 싣고 있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쓴 글을 고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는 보편적 산문체로서의 고문일반이 가지는 통시적 ·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한문학에서 고문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일정 정도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결된 상태는 아니다. 고문에 대한 심도 있는 개념 정립, 고문가들의 작품 분석, 문학 현상의 출현 배경과 과정을 탐색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각 시대별로 독서계층이 즐겨 읽었던 고전작품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면으로 고문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도 폭넓게 연구해야 한다. 아울러 고문 연구가 옛말의 연구에만 그쳐서는 연구의 의의가 반감될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문체론 내지는 작문론에까지 그 이론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도록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고문 연구가 곧 금문 연구임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연구방향은 자명하다 하겠다.

주석

주1

그 나라 고유의 문학. 또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 우리말샘

주2

고대 중국에서 쓰였던 한자 서체의 하나. 필묵이 쓰이기 전에 쪼갠 대나무 같은 것으로 옻을 묻혀 썼다. 글자 모양이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늘어서 올챙이를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3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 우리말샘

주4

공자의 학설과 학풍 따위를 신봉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학파. 우리말샘

주5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ㆍ학자(B.C.551~B.C.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여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시경≫과 ≪서경≫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에 그의 언행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말샘

주6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7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문 문체.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한다. 우리말샘

참고문헌
『중국문학비평사』(곽소우(郭紹虞), 문사철출판사(文史哲出版社), 1982)
『한국문학사상사시론』(조동일, 지식산업사, 1978)
『연암소설연구』(이가원, 을유문화사, 1965)
『한국한문학사』(이가원, 민중서관, 1961)
『중국문학사』(호문익(胡雲翼), 장기권(張基槿) 역,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61)
「고문의 원류와 성격」(김도련, 『한국학논총』 2,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79)
「영재 이건창과 창강 김택영의 고문관」(김도련, 『한국학논총』 3,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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