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가 화장된 곳 라지가트(Raj Ghat), 정방형의 비석을 세우고 꽃잎과 꽃엮음으로 평면 비석을 장식했다. 사원처럼 신발은 벗어야 했다. 백과사전 몇 부분을 발췌했다. 둥근 빵떡모자를 쓴 이들은 힌두교도들이다.

Gandhi, Mohandas Karamchand

인도 민족주의 지도자.

넷째 아내였던 어머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서벵골 구자라트 주의 작은 공국(公國) 포르반다르의 데완(dewan:총리)이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는 공적인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유능한 행정가로 변덕스러운 군주들과 그들에게 오랫동안 고통당해온 백성과 권력을 쥐고 있는 고집불통의 영국 관리들 사이에서 잘 처신했다.

어머니 푸틀리바이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은 힌두신 비슈누를 신봉하는 비슈누파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 파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우주만물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인도종교인 자이나교의 경향을 많이 가졌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그는 아힝사(ahiṃsā: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와 채식주의, 자기 정화의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며 자랐다.

그는 1888년 9월 영국으로 건너가 도착 10일 후 런던에 있는 이너템플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지만 봄베이 고등학교의 시간제 교사직조차 얻기 어려워 그는 라지코트로 돌아와 소송인의 탄원서를 작성해주며 생활했으나 이 일마저도 영국인 관리의 비위에 거슬리자 계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탈의 어느 인도인 회사로부터 1년 기한의 계약 요청을 받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갔다.

민족지도자로서의 활동
1915~18년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민중탄압법인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투쟁을 선언했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의 암리차르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1년 안에 다시 투지를 갖고 1920년 가을 그는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35년 된 인도 국민회의당을 인도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기구로 바꾸어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중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영국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마지막 투쟁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인도 민족주의운동은 마지막 국면에 들어섰다. 그는 파시즘을 증오했으며 전쟁 또한 싫어했다. 인도 국민회의당은 자치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인도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역사적 평가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간디를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로 여기거나, 가장 나쁘게는, 영국인에 대한 우애를 설교하면서 뒤로는 영국을 쫓아내려고 하는 위선자로 여겼다. 간디는 이러한 편견의 벽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 벽을 '사티아그라하'로 뚫으려고 했다. 1920~22년, 1930~34년, 1940~42년에 그가 펼친 3번의 운동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전후에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었다.

간디에 대한 비판은 인도인 가운데에서도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가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반대로 영국의 축출과 국내 기득권층의 제거 또는 카스트의 철폐 등과 같은 사회개혁에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보기도 했고 이슬람교에 편견을 가졌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건 정치인과 급진주의자, 테러리스트와 의회정치주의자, 도시의 지식인과 농촌의 대중들, 힌두교의 카스트와 불가촉천민,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그리고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시켰던 간디의 위대한 역할은 최근에 와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간디는 분명히 정치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주된 동인(動因)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 있었다. 그가 "30년 동안 열망한 것은 신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종교는 형식주의나 교리, 의식, 또는 종파주의를 뜻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리는 개인적인 수도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생활 속에서 도전하며 확인되는 것이었다. 그는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그는 "마하트마의 고뇌는 마하트마만이 아는 것"이라고 썼다.
간디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많은 남녀노소 그리고 서구의 많은 종파의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정파로부터 애정과 충성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 동료들 중에 비폭력을 신조로 받아들이고 그의 길을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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