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연암집 제 10 권 별집


[주C-001]운종교(雲從橋) : 한양의 종로 네거리 종루(鐘樓 : 종각〈鐘閣〉)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은자주]달밤에 탑골공원 주위에 모여살던 북학파 인사들이 술을 마시고 종각이 있는 종루로 나와 수표교까지 거닐며 새벽 닭이 울 때까지 흥청거린 풍류가 예나 이제나 별반 차이가 없다. 1920년대 양주동 오상순 선생팀은 우이동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해거름에 알몸으로 소를 타고 동대문으로 진출했고, 서정주 선생은 이상 등과 어울리며 불켜진 술집을 만나면 한 잔씩 들이키며 서울역에서 동대문까지거닐며 밤시간을 허비했으며, 1960년대 후반엔 나도 쥐뿔도 없으면서 가끔 착한 '악동' 주당들과 어울리며 필동을 출발하여 세운상가를 거쳐 광화문까지 비틀거리며 밤시간을 탕진했다. 젊음의 객기로 인해서 청춘은 아름다운 건가?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떠난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주D-001]박성언(朴聖彦) : 1743 ~ 1819. 서자(庶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 박제도(朴齊道)로, 성언은 그의 자이다.
[주D-002]서원덕(徐元德) :
1738 ~ 1802. 서유린(徐有隣)으로, 원덕은 그의 자이다.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관찰사와 형조 · 병조 · 호조 · 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으면서,

“진(秦)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주D-003]진(秦) 나라 …… 쫓아내는구려 : 원문은 ‘非秦者逐’인데,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에 나오는 말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객경(客卿) 즉 진 나라 출신이 아닌 관리들을 추방하려 하자 이사가 글을 올려 “진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떠나게 하고, 객경이 된 자는 추방하는〔非秦者去 爲客者逐〕” 축객령(逐客令)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추방을 면하고 복직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文選 卷39 上書秦始皇》 여기서 서유린은 그와 같은 표현을 써서, 일행이 아닌 자신을 따돌리려는 것을 농담 섞어 항의한 것이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獒〕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앉아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주D-004]삼경(三更) 사점(四點) : 현대 시각으로 밤 12시 반쯤이다. 3경은 밤 11시에서 다음날 오전 1시까지인데, 1경은 5점으로 1점은 24분이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 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상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 취중에 그놈의 자(字)를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련(柳璉))이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城)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은자주]수표교: 삼일빌딩 가가이 잇는 삼일교 아래 다리가 수표교이다

[주D-005]서쪽으로 기울어 : 원문은 ‘西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西墮’로 되어 있다.

[중국이 재구한삼선산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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