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연암집 제 10 권 별집
[은자주]이 글을 문집에 챙겨 넣은 아들 종채의 주석도 흥미롭겨니와 사마천의 <사기>, 유학 경전의 인용까지 국역번역원의 꼼꼼한 주석은 연암의 사고의 깊이를 더욱 빛나게 한다.
선친의 글을 살펴보니 유실된 것이 많았다. 이 편(篇)은 연암협(燕巖峽)의 묵은 종이 모아 둔 곳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뭉쳐진 두루마리가 터지고 찢어져 윗부분에 몇 항목이 빠지고 중간에도 왕왕 빠진 데가 있으며, 또 편의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조목 중에 ‘원사(原士)’란 두 글자를 취하여 편명(篇名)으로 삼았다.
[주D-001]뭉쳐진 두루마리 : 원문은 ‘局縛’인데, 이본들에는 ‘卷縛’으로도 되어 있으나, 뜻은 비슷하다.
[주D-002]조목 중에 : 원문은 ‘就條中’인데, 이본들에는 ‘남아 있는 조목 중에〔就存條中〕’로도 되어 있다.
[주D-003]아들 …… 쓰다 :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권4에 “일찍이 사훈(士訓)이라는 글을 지으셨는데, 학자가 글을 읽는 취지를 많이 논하셨다. 문집에 있지만 빠진 곳이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무릇 선비〔士〕란 아래로 농(農) · 공(工)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 · 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이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온 천하가 빛나고 밝다.〔見龍在田 天下文明〕”고 했으니, 이는 글을 읽는 선비를 두고 이름인저!
[주D-004]지위로 …… 존재이다 : 원문은 ‘以位 則無等也 以德 則雅事也’인데,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서 맹자가 한 주장에 근거를 둔 말이다. 즉, 노(魯) 나라 목공(繆公)이 자사(子思)에게 “옛날에 제후가 선비를 벗 삼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묻자, 자사가 불쾌해하면서 “옛사람의 말에 ‘그를 섬긴다’고 했을지언정, 어찌 ‘그를 벗 삼는다’ 했으리요.”라고 답하였다. 맹자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자사가 불쾌해한 이유는, “지위로 말하면 그대는 임금이요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임금과 벗을 할 것이며, 덕으로 말하면 그대는 나를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나와 벗이 될 수 있으리요.〔以位 則子君也 我臣也 何敢與君友也 以德 則子事我者也 奚可以與我友〕”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5]나타난 …… 밝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온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르면, 비록 상위(上位)에 있지는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의 교화를 입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이다. 원래 선비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원(身元)은 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되 신원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지위에는 귀천이 있으되 선비는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이지, 선비가 변화하여 어떤 작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를 ‘사대부(士大夫)’라 하는 것은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요, 군자를 ‘사군자(士君子)’라 하는 것은 어질게 여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또 군졸을 ‘사(士)’라 하는 것은 많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사람마다 사(士)라는 점을 밝힌 것이요, 법을 집행하는 옥관(獄官)을 ‘사’라 하는 것은 홀로임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천하에 공정함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이르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이르고,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이르고,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곳을 ‘사림(士林)’이라 이른다.
송 광평(宋廣平)이 연공(燕公)더러 이르기를 “만세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 했으니, 어찌 천하의 공정한 말이 아니겠는가? 환관이나 궁첩(宮妾)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찌 당세의 제일류가 아니겠는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東海)에 몸을 던지려고 하자 진(秦) 나라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으니, 어찌 사해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주D-006]송 광평(宋廣平)이 …… 했으니 : 송 광평은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으로, 광평군공(廣平郡公)에 봉해진 송경(宋璟 : 663 ~ 737)을 가리킨다. 연공(燕公)은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 장열(張說 : 667 ~ 730)을 가리킨다. 송경과 장열이 함께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재직할 때, 무후(武后)의 총신(寵臣) 장역지(張易之)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원충(魏元忠)을 모함하면서 장열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자, 송경이 장열에게 어전(御前)에서 결코 위증(僞證)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만대(萬代)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舊唐書 卷96 宋璟傳》
[주D-007]환관이나 …… 사람이야말로 : 송(宋) 나라 때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에게 고관 중 재상(宰相)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자, 왕소가 “오직 환관과 궁첩들이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선택할 만하다.”고 직언하였다. 이에 인종은 부필(富弼)을 재상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4》
[주D-008]노중련(魯仲連)이 …… 물러갔으니 : 진(秦) 나라 군대가 조(趙)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자청하여 나서 위(魏)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상대로 진 나라 왕의 폭정(暴政)을 성토하고 자신은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 나라의 백성은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조 나라를 돕도록 설득하여 감동시킨 결과 신원연이 마음을 돌렸으며, 그 소문을 듣고 진 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시경》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죽어 가고, 온 나라가 병들었네.〔人之云亡 邦國疹瘁〕”라고 했으니, 이 어찌 군자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하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덕분에 편안하셨네.〔濟濟多士 文王以寧〕”라고 했으니, 학문과 도를 강론하지 않고서야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주D-009]어진 …… 병들었네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 제 5 장의 한 구절이다. 단 《시경》에는 ‘疹’ 자가 ‘殄’ 자로 되어 있다.
[주D-010]하많은 …… 편안하셨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제 3 장의 한 구절이다.
무릇 선비란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자가 태학(太學)을 순시할 때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효(孝)를 천하에 확대하자는 것이요, 천자의 원자(元子)와 적자(適子)가 태학에 입학하여 나이에 따른 질서를 지킨 것은 공손함〔悌〕을 천하에 보여 주자는 것이다. 효제(孝悌)란 선비의 근원〔統〕이요, 선비란 인간의 근원이며, 본디〔雅〕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천자도 오히려 그 본디를 밝히거든 하물며 소위(素位)의 선비이랴?
[주D-011]천자가 …… 것이요 :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은 고대 중국의 천자가 설립하여 부형(父兄)의 예(禮)로써 봉양했다는 직위이다. 정현(鄭玄)의 설에 따르면 이들은 각 1인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및 악기(樂記)에 관련 내용이 있다.
[주D-012]천자의 …… 것이다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善)을 모두 얻는 이는 오직 세자뿐이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순서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고 하였다. 원문의 ‘天子之元子適子’에서 ‘適子’는 ‘衆子’라고 해야 온당할 듯하다. 주자(朱子)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衆子)로부터 공경 · 대부 · 원사(元士)의 적자(適子)와 범민(凡民)의 수재(秀才)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학에 입학한다고 하였다.
[주D-013]소위(素位)의 선비 : 평소의 처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4 장에 “군자는 평소의 처지에 따라 행동하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고 하였다. 여기서 ‘素’ 자는 앞 문장에서 ‘근원’으로 번역한 ‘統’ 자, ‘본디’로 번역한 ‘雅’ 자와 의미가 상통하는 단어이다. 모두 평소, 평상, 본래, 본바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아! 요순(堯舜)은 아마도 효제(孝悌)를 실천한 ‘본디 선비〔雅士〕’요, 공맹(孔孟)은 아마도 옛날에 글을 잘 읽은 분인저!
[주D-014]본디 선비〔雅士〕 : 여기서 ‘雅士’는 아정(雅正)한 선비나 고아(高雅)한 선비라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앞에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라고 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연암은 ‘雅’ 자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다.
누군들 선비가 아니리요마는, 능히 본디〔雅〕를 행하는 자는 적고, 누군들 글을 읽지 아니하리요마는 능히 잘 읽는 자는 적다.
이른바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기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요, 구두(句讀)를 잘 뗀다는 것도 아니며, 그 뜻을 잘 풀이한다는 것도 아니고, 담론을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갖춘 사람이 있을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穿鑿)한 것이요, 아무리 권략(權略)과 경륜(經綸)의 술(術)이 있다 할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가 주먹구구로 맞힌 것이니, 내가 말한 ‘본디 선비〔雅士〕’는 아니다. 내가 말한 본디 선비란, 뜻은 어린애와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일 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애는 비록 연약하여도 제가 흠모하는 것에 전념하고 처녀는 비록 수줍어도 순결을 지키는 데에는 굳건하나니,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그 일인저!
참으로 고아(古雅)하도다, 증자(曾子)의 독서여! 해진 신발을 벗어던지고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마치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도다. 또한 공자가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
[주D-015]해진 …… 같았도다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해진 신발을 끌고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曳縰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연암은 ‘曳縰’를 ‘縱屣’로 고쳐 인용하였다.
[주D-016]공자가 …… 말씀하셨다 :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평소 늘 말씀하신 바는 《시경》과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고 한 구절을 조금 고쳐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구구한데, 여기에서 연암은 ‘雅’ 자를 ‘바르다〔正〕’는 뜻보다 ‘평소 늘〔素常〕’이라는 뜻으로 보았던 듯하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안자(顔子 안회(顔回))는 자주 굶주리면서도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았다고 하는데, 안로(顔路)가 굶주릴 때에도 여전히 또한 즐거웠겠습니까?”
한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쌀을 짊어지고 올 곳이 있다면 백 리도 멀다 아니 했을 것이며, 그 쌀을 구해 와서 아내를 시켜 밥을 지어 올리게 한 다음 대청에 올라 글을 읽었을 것이다.”
[주D-017]안자(顔子)는 …… 않았다 : 원문은 ‘顔子屢空 不改其樂’인데,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도에 가까운저! 그러나 자주 굶주리는구나.〔回也 其庶乎 屢空〕”라는 공자의 말과 옹야(雍也)에서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동네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우울해 마지않는데, 안회는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합쳐서 줄인 것이다.
[주D-018]안로(顔路) : 안회의 아버지이다. 역시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무요(無繇)이고, 노(路)는 그의 자(字)이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가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 곽(槨)을 갖추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자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주D-019]쌀을 …… 것이며 : 《공자가어(孔子家語)》 권2 치사(致思)에, 자로(子路)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에서도 쌀을 짊어지고 왔는데〔爲親負米百里之外〕’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스러워하자, 공자가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무릇 글을 읽는 것은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문장술(文章術)을 풍부히 하자는 것인가? 글 잘 짓는다는 명예를 넓히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학문과 도(道)를 강론하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이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이러한 강학(講學)의 내용이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강학의 응용이니, 글을 읽고서도 그 내용과 응용을 알지 못한다면 강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학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 내용과 응용 때문이다.
만약 고상하게 성(性)과 명(命)을 담론하고, 극도로 이(理)와 기(氣)를 분변하면서 각각 자기 소견만 주장하고 기어이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사이에 혈기(血氣 감정)가 작용하게 되어 이와 기를 겨우 분변하는 동안 성(性)과 정(情)이 먼저 뒤틀어질 것이다. 이는 강학이 해를 끼친 것이다.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私心)이다. 일 년 내내 글을 읽어도 학업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이 해를 끼치는 때문이다.
백가(百家)를 넘나들고, 경전(經傳)을 고거(攷據)하여 그 배운 바를 시험하고자 하고, 공리(功利)에 급급하여 그 사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독서가 해를 끼친 때문이다.
천착(穿鑿)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 속에 사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창 천착할 때에는 언제나 경전(經傳)으로써 증거를 삼고, 천착하다 막힌 데가 있으면 또 언제나 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유추하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마침내 경문(經文)을 고치고 주(註)를 바꾼 뒤에야 후련해한다.
[주D-020]천착(穿鑿)하는 것 : 어떤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주D-021]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 원문은 ‘以經傳反之’인데, 여기서 ‘反’ 자는 유추(類推)한다는 뜻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한 모서리를 들어 보였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유추하지 못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왕망(王莽)은 명예를 좋아하여 천하를 해쳤고,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는 법을 좋아하여 천하를 그르쳤다.” 한다.
[주D-022]《주례(周禮)》는 …… 저술인저 : 정현(鄭玄)은 《주례》 천관(天官) 총재(冢宰) ‘惟我王國’의 주(注)에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육전(六典)의 직책을 만들고 이를 주례(周禮)라고 불렀다.”고 하여 《주례》를 주공의 저술로 보았다. 이것이 후세에 통설이 되었으나, 그에 대한 반론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흠(劉歆)의 위작설(僞作說)이다. 즉, 왕망(王莽)의 명에 따라 유흠이 지어냈다는 것이다.
[주D-023]왕망(王莽)은 …… 그르쳤다 : 한(漢) 나라 때 정권을 찬탈한 왕망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관제(官制)를 개혁하려고 한 사실과, 그와 마찬가지로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신법(新法)을 추진한 사실을 비판한 말이다.
덕보(德保 홍대용)가 말하기를,
“구차스레 동조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억지로 남과 달리하려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였다.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이 어찌 훈고(訓詁)에만 밝고 마는 것이겠으며, 이른바 선비란 것이 어찌 오경(五經)에만 통하고 말겠는가.
무릇 성인의 글을 읽어도 능히 성인의 고심(苦心)을 터득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니(仲尼)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피나는 정성을 쏟은 분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주자 같은 이는 성인의 고심을 터득했다 할 만하다.
[주D-024]중니(仲尼)가 …… 아니겠는가 : 원문은 ‘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으로, 주자의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晦庵集 卷28》 연암은 ‘孔子’를 ‘仲尼’로 고쳐 인용했다. 맹자에 대해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했다’고 한 것은 맹자가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구변(口辯)을 좋아해서 그렇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5]나를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6]내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읽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렇기에, “나를 몇 해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제대로 《주역》을 읽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주역》에 십익(十翼)을 달았으면서도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주역》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맹자는 시서(詩書)에 대한 해설은 잘 하면서도 일찍이 《주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D-027]공자가 …… 하였다 :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말을 약간 고쳐 인용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나를 몇 해를 더 살게 해 주어 쉰 살에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하였다.
[주D-028]십익(十翼) : 주역에 대해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중니(仲尼)의 문하에서 《주역》에 대해 들은 이는 오직 증자(曾子)일 것이다. 왜냐하면 증자는,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D-029]중니(仲尼)의 …… 때문이다 :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만이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부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증자가 대답하였다.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는 이 ‘충서(忠恕)’를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한 건도(乾道)로 확대 해석하였다. 연암은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소개된 이들의 해석을 따라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D-030]《주역》으로 …… 때문이다 :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의 사람됨이 중용을 택하여 한 가지 선(善)을 얻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 구절을 약간 고쳐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호응하는 대목이 《주역》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불선(不善)한 점이 있으면 일찍이 모른 적이 없고, 알고 있으면 다시는 행하지 않았다. 역(易)에 이르기를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뉘우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不遠復 无祗悔 元吉〕’ 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어질지 못하도다, 자로(子路)의 말이여! “거기에는 사직(社稷)도 있고 인민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했으니 말이다.
[주D-031]거기에는 …… 하겠습니까 : 자로(子路)가 학식이 부족한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로 천거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라고 하자, 자로가 “거기에는 인민도 있고 사직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항변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先進》
군자가 종신토록 하루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오직 글을 읽는 그 일인저!
그러므로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자제(子弟)들이 오만하고 방탕하며 빈둥대면서 제멋대로 온갖 짓을 다 하다가도, 곁에서 글 읽는 사람이 있으면 풀이 죽어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자제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준수해도 글 읽기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부인네나 농사꾼일지라도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군자의 아름다운 말 속에도 혹 뉘우칠 만한 말이 있고, 착한 행실 속에도 혹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읽어도 뉘우칠 것이 없으며, 백 사람이 따라서 행하더라도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어린애가 글을 읽으면 요망스럽게 되지 않고 늙은이가 글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져도 해이해지지 않고 천해져도 제 분수를 넘지 않는다. 어진 자라 해서 남아돌지 않고 미련한 자라 해서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집이 가난한 이가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자로 잘 살면서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대숙(大叔)이 《시경(詩經)》을 읽느라 삼 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대청에서 내려와 소변을 보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그를 보고 놀라서 짖었다고 한다.
[주D-032]대숙(大叔) : 누구의 자(字)인지, 아니면 친척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어도 때에 따라 귀가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글을 읽는 경우에는 그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바람은 자식이 글을 읽는 것이다. 어린 아들이 글 읽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글을 읽으면, 부모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 없다. 아아! 그런데 나는 어찌 그리 읽기를 싫어했던고.
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때 술을 많이 못 마신 것을 한스러워했을 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는데, 도연명은 어찌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던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았던가?
[주D-033]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 원문은 ‘陶潛雅士也’인데, 여기서 ‘아사(雅士)’라 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상하고 멋을 아는 선비를 가리킨다. 연암이 말하는 ‘본디 선비’라는 뜻의 ‘아사(雅士)’와는 다르다. 연암은 도연명과 같은 유형의 인물을 ‘아사(雅士)’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주D-034]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글 읽는 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 가면 글의 의미에 정통하게 되고 글자의 음과 뜻에 익숙해져 자연히 외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의 순서를 정하라.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주D-035]글자를 거꾸로 …… 말라 : 원문은 ‘字毋倒 字毋傍’인데,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士小節)》 8 동규(童規) 교습조(敎習條)에 독서와 관련하여 “거꾸로 읽지 말며 …… 글줄을 건너뛰어 읽지 말라.〔勿倒讀 …… 勿越行讀〕”고 하였다.
글 읽는 소리가 입에 머무르되 엉겨붙지 말게 하며, 눈으로 뒤쫓되 흘려 보지 말며, 몸은 흔들어도 어지럽지 않게 한다.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어깨를 잡지 말고, 입을 빨지 말라.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서산(書算)을 만들어 읽은 횟수를 기록하되, 흡족한 기분이 들면 접었던 서산을 펴고, 흡족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서산을 펴지 않는다.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卷帙)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그르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 이전에 외운 것을 복습하고 가만히 다시 음미해 보라.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글자를 착각한 것은 없는가?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등불을 켜고 옷을 다 입고서 엄숙하고 공경스런 마음으로 책상을 마주한다. 이어 새로 읽을 글을 정하고 묵묵히 읽어 가되 몇 줄씩 단락을 끊어서 읽는다. 그런 다음 서산(書算)을 덮어 밀쳐놓고, 가만히 훈고(訓詁)를 따져 보며 세밀히 주소(註疏)를 훑어보아 그 차이를 분변하고, 그 음과 뜻을 깨우친다.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제멋대로 천착하지 말고 억지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밝아지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곧바로 부모님의 침실로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기침 소리가 들리거나 가래침 뱉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가서 문안을 드린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 무슨 일을 시키면, 급히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고 글을 읽는다는 핑계로 거절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글을 읽는 것이니, 혹 글 읽기에 열중하느라 혼정신성(昏定晨省)도 제때에 하지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로 지내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의 먼지를 털고 책들을 가지런히 바로 놓고 단정히 앉아 잡된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얼마쯤 한 연후에 책을 펴고 읽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읽지 말 것이며 자구(字句)를 분명히 하고 고저를 부드럽게 해서 읽는다.
긴요한 말이 아니면 한가하게 응답하지도 말며, 바쁜 일이 아니면 즉시 일어나지도 말라.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바로 일어나며, 손이 오면 읽는 것을 멈추되 귀한 손님이 오면 책을 덮는다. 밥상이 들어오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으면 그 횟수는 끝마치며, 밥 먹고 나면 바로 일어나 천천히 거닐고, 밥이 소화되고 나면 다시 읽는다.
부모가 병이 나면 일과(日課)를 폐하고, 재계(齋戒)를 할 때는 일과를 폐하고, 상(喪)을 당하면 일과를 폐한다. 기공(朞功)의 상(喪)에 이미 성복(成服)했으며 집이 다를 경우는 일과를 시작한다. 친구의 상사(喪事)에는 아무리 멀어도 학업을 같이 하던 사람이면 달려가 조문하고 일과를 폐한다. 일찍이 어려움을 함께 겪은 사람의 상을 만나면 탄식하고, 조문을 가야 할지 주저되는 경우를 만나면 탄식하고, 새로 알게 된 사람이면 탄식한다.
[주D-036]기공(朞功)의 …… 경우 : 상기(喪期)가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 · 백숙부모 · 형제자매 · 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大功)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5개월인 경우를 소공(小功)이라 하는데 증조부모 · 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집이 다름〔異宮〕’, 즉 분거(分居)가 나오므로, 형제의 상(喪)으로 보아야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傳)에 “형제는 사체(四體)이다. 그러므로 형제는 의리상 나누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데도 나누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식이 제 부모를 편애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궁(東宮) · 서궁(西宮) · 남궁(南宮) · 북궁(北宮)을 두어, 거처를 달리하되 재산은 공유한다.〔異居而同財〕”고 하였다.
형제는 한 몸이므로 동거동재(同居同財)함이 원칙이나, 동거(同居)하면 백부(伯父)를 섬기는 데 힘을 다해야 하므로 각자의 부친을 섬기는 데 소홀히 할 우려가 있어 주거를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삼년상에는 장례를 치른 뒤에 예서(禮書)를 읽고, 동자(童子)는 평상시와 같이 글을 읽는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보던 책을 선뜻 읽지 못하는 것은 손 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집에 전해 내려오는 책은 다 선반에 얹어 두고 읽지 않아야 하는가?” 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에 증석(曾晳)이 양조(羊棗 고욤)를 즐겨 먹었으므로 그 아들인 증자(曾子)는 양조를 먹지 않았다.” 하였다.
마치 부모의 명을 들으면 머뭇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면 곧바로 실천할 것을 생각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글 읽는 방법이다.
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
[주D-037]아버지가 …… 때문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나오는 말이다.
[주D-038]옛날에 …… 않았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증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양조를 차마 먹지 못했다고 한다.
[주D-039]곧바로 실천할 것 : 원문은 ‘無宿諾’인데, 《논어》 안연(顔淵)에 “자로(子路)는 승낙한 일을 묵혀두지 않았다.〔子路無宿諾〕”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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