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집서(自笑集序)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禮失而求諸野〕”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림없지 않은가! 지금 중국 천하가 모두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어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알지 못한 지 이미 100여 년인데, 유독 연희(演戱) 마당에서만 오모(烏帽)와 단령(團領)과 옥대(玉帶)와 상홀(象笏 상아로 만든 홀)을 본떠서 장난과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아아, 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이 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혹시 낯을 가리고 차마 보지 못할 이가 있지 않겠는가?
[주D-001]예가 …… 구한다 : 《한서》 권30 예문지(藝文志)에 인용된 공자(孔子)의 말이다. 안사고(顔師古)는 주(註)에서 “도읍(都邑)에서 예가 사라졌을 경우 재야에서 구하면 역시 장차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였다.
[주D-002]한관(漢官)의 위의(威儀) : 한(漢) 나라 관리들의 위엄 있는 복식과 전례(典禮) 제도라는 말로, 중화(中華)의 예의 제도를 뜻한다.
[주D-003]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 : 한족(漢族) 왕조인 망한 명(明) 나라에 대해 여전히 신민(臣民)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노인 세대를 가리킨다.
아니면 혹시 이 연희 마당에서 그것들을 즐겁게 구경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상상하는 이라도 있겠는가?
세폐사(歲幣使 동지사)가 북경에 들어갔을 때 오(吳) 지방 출신 인사와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주D-004]오(吳) 지방 출신 인사 : 오(吳) 지방은 중국의 동남쪽 강소성(江蘇省) ·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명 나라 말에 최후까지 만주족의 침략에 저항하여 유달리 반청(反淸) 사상이 강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고장에 머리 깎는 점방이 있는데 ‘성세낙사(盛世樂事 태평성세의 즐거운 일)’라고 편액을 써 걸었소.”
하므로, 서로 보며 크게 웃다가 이윽고 눈물이 주르르 흐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습관이 오래되면 본성이 되는 법이다. 세속에서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부인들의 의복이 이 일과 매우 비슷하다. 옛 제도에는 띠가 있으며 모두 소매가 넓고 치마 길이가 길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원(元) 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왕이 많아지면서 궁중의 수식(首飾)이나 복색이 모두 몽골의 오랑캐 제도가 되었다.
[주D-005]소매 : 원문은 ‘袖’인데, ‘袂’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궁중의 양식을 숭모하여 마침내 풍속이 되어 버려, 3, 4백 년 된 지금까지도 그 제도가 변하지 않고 있다.
저고리 길이는 겨우 어깨를 덮을 정도이고 소매는 동여놓은 듯이 좁아 경망스럽고 단정치 못한 것이 너무도 한심스러운데, 여러 고을 기생들의 옷은 도리어 고아(古雅)한 제도를 간직하여 비녀를 꽂아 쪽을 찌고 원삼(圓衫)에 선을 둘렀다. 지금 그 옷의 넓은 소매가 여유 있고 긴 띠가 죽 드리워진 것을 보면 멋들어져 만족스럽다.
그런데 지금 비록 예(禮)를 아는 집안이 있어서 그 경망스러운 습관을 고쳐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더라도, 세속의 습관이 오래되어 넓은 소매와 긴 띠를 기생의 의복과 흡사하다고 여기니, 그렇다면 그 옷을 찢어 버리고 제 남편을 꾸짖지 않을 여자가 있겠는가.”
[주D-006]예(禮)를 아는 집안 :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 범절을 대대로 전승해 오는 명문가를 ‘시례지가(詩禮之家)’라고 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는 5대조 박미(朴瀰)의 부인 정안옹주(貞安翁主)가 중국식의 상복(上服)을 착용한 이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이를 집안의 예(禮)로 확정했으며, 조부 박필균(朴弼均)도 집안 부인네에게 이를 따르게 했다고 한다. 《居家雜服攷 內服》
이군 홍재(李君弘載)는 약관 시절부터 나에게 배웠으나 장성해서는 한역(漢譯 중국어 통역)을 익혔으니, 그 집안이 대대로 역관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시 문학을 권면하지 않았었다. 이군이 한역을 익히고 나서 관복을 갖추고 본원(本院 사역원(司譯院))에 출사(出仕)하였으므로, 나 역시 속으로 ‘이군이 전에 글을 읽을 적에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를 알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을 터이니, 재능이 사라지고 말 것이 한탄스럽다.’고 생각하였다.
[주D-007]이군 홍재(李君弘載) : 홍재는 이양재(李亮載 : 1751 ~ ?)의 초명(初名)이다. 이양재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이언용(李彦容)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8) 역과(譯科)에 급제하고 사역원(司譯院)에 재직하였다. 《譯科榜目》 원문은 ‘李君’인데, ‘弘載’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아래에 나오는 ‘李君’은 모두 같다.
[주D-008]그 …… 때문이었다 : 원문은 ‘乃其家世舌官’인데, ‘也’ 자가 추가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09]재능이 …… 한탄스럽다 : 원문은 ‘乾沒可歎’인데 ‘간몰(乾沒)’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물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하루는 이군이 자기가 지은 글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소집(自笑集)’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논(論), 변(辨) 및 서(序), 기(記), 서(書), 설(說) 등 100여 편이 모두 해박한 내용에다 웅변을 토하고 있어 특색 있는 저작을 이루고 있었다.
[주D-010]특색 있는 …… 있었다 : 원문은 ‘勒成一家’인데, 글을 엮어 책을 만드는 것을 ‘늑위성서(勒爲成書)’ 즉 ‘늑성(勒成)’이라 하고, 특색 있는 저작을 ‘일가서(一家書)’라고 한다.
내가 처음에 의아해하며,
“자신의 본업을 버리고 이런 쓸데없는 일에 종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군은,
“이것이 바로 본업이며 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주D-011]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 대본은 ‘果有用 則’인데, ‘則’ 자가 ‘也’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則’이 되면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이본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대개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외교에 있어서는 글을 잘 짓고 장고(掌故)에 익숙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원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익히는 것은 모두 옛날의 문장이며, 글제를 주고 재주를 시험하는 것도 다 이것에서 취합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낯빛을 고치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태어나 어렸을 적에는 제법 글을 읽지만, 자라서는 공령(功令 과거 시험 문장)을 배워 화려하게 꾸미는 변려체(騈儷體)의 문장을 익숙하게 짓는다.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이를 변모(弁髦)나 전제(筌蹄)처럼 여기고, 합격하지 못하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거기에 매달린다. 그러니 어찌 다시 이른바 옛날의 문장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주D-012]변모(弁髦)나 전제(筌蹄) : 무용지물을 뜻한다. 변모는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쓸데없는 치포관(緇布冠)과 동자(童子)의 다팔머리를 말하고, 전제는 물고기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통발과 토끼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올가미를 말한다.
역관의 직업은 사대부들이 얕잡아 보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는 참된 학문을도리어 서리들의 하찮은 기예로 간주하게 된다면, 그것을 연희 마당의 오모나 고을 기생들의 긴 치마처럼 여기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까봐 두렵다. 나는 본시 이 점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이 문집에 대해 특별히 쓰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중국 고유의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보려면 마땅히 배우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요, 부인 옷의 고아(古雅)함을 찾으려면 마땅히 고을 기생들에게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장의 융성함을 알고 싶다면 나는 실로 미천한 관리인 역관들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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