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론(名論)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연암집 제 3 권

 

[은자주]공자님은 정명론(正命論)을 주장하셨다. 세상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 임금된 이는 임금의 역할 수행에 최선을 다해아 하고, 아비된 자는 자식양육에 개으름을 피워선 안된다.

한자문화권의 아이러니는 역성혁명에 성공한 주나라 무왕도 숭배하고, 이에 반대하여 은둔한 백이 숙제도 떠받는 데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근거는 공자님의 정명론에 바탕한 유가의 폭넓은 현실론이 아닐 수 없다.

 

천하라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그 그릇을 무엇으로써 유지하는가?

‘이름〔名〕’

이다.

 

[주D-001]이름〔名〕 : 명칭이라는 뜻 외에도 명분(名分)이나 명예(名譽)라는 뜻을 포함하므로 문맥에 따라 그 뜻을 변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용어의 통일성은 유지해야 하므로, 부득이 변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괄호 안에 별도의 표기를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이름을 유도할 것인가? 그것은 ‘욕심〔欲〕’이다. 무엇으로써 욕심을 양성할 것인가? 그것은 ‘부끄러움〔恥〕’이다.

 

만물은 흩어지기 십상이어서 아무것도 연속할 수 없는데 이름으로써 붙잡아 둔 것이요, 오륜(五倫)은 어그러지기 쉬워서 아무도 서로 친할 수 없는데 이름〔명분〕으로써 묶어 놓은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뒤라야 저 큰 그릇이 아마도 충실하고 완전할 수 있어, 기울어지거나 엎어지거나 무너지거나 이지러질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온 세상의 작록(爵祿)으로도 선(善)을 행하는 자에게 두루 다 상을 줄 수는 없으니, 군자는 이름〔명예〕으로써 선을 행하도록 권장할 수가 있다. 온 세상의 형벌로도 악(惡)을 행하는 자를 두루 다 징계할 수는 없으니, 소인은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밤중에 야광주(夜光珠)를 던지면, 칼을 쥐고 적을 기다리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주D-002]한밤중에 …… 왜인가 : 추양(鄒陽)의 옥중서(獄中書)에 출처를 둔 말이다. 추양은 참소로 인해 하옥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양 효왕(梁孝王)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편지에서 “신(臣)은 듣자온대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을 어둠 속에서 노상에 있는 사람을 향해 던지면, 칼을 쥐고 서로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까닭 없이 제 앞에 이르러 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文選 卷39 獄中上書自明》 명월주와 야광벽은 둘 다 야광주(夜光珠)를 뜻한다.

 

이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주어진 이름〔명예〕이라 기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하라는 큰 그릇임에랴.

조정에 갖옷을 모셔 놓으면,

옷섶을 여미고 예법에 따라 종종걸음을 하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주D-003]조정에 …… 놓으면 : 천자가 승하하고 새 천자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천자의 보좌(寶座)에 선왕(先王)의 갖옷을 모셔 놓았던 것을 가리킨다. 새 천자가 즉위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이렇게 보좌에 선왕의 갖옷을 모셔 놓고서 조하(朝賀)를 올렸다고 한다. 원문의 ‘朝堂’은 몇몇 이본들에는 ‘廟堂’으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이름〔명분〕이 건재하여 한계를 넘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참으로 충효(忠孝)를 다하여 비통해할 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주(周) 나라의 쇠퇴기에 빈 그릇을 끼고 강대한 제후들의 위에 군림해도 아무도 감히 먼저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여전히 그 빈 이름〔명분〕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슴과 말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지만, 한번 그 이름이 어지러워져 버리자 천하에 제 임금을 죽이는 자가 나오게 되었다.

 

[주D-004]사슴과 …… 되었다 : 진 시황(秦始皇)이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국권(國權)을 독차지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세(二世)인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였다. 이세가 말을 가지고 왜 사슴이라 하느냐고 묻자, 조고를 두려워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말이라고 답하였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했던 사람을 죄를 씌워 죽여 버렸으므로,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아, 저 사슴과 말의 이름이 천하의 존망(存亡)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만 그래도 하루도 구별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데, 더구나 선과 악처럼 서로 같지 아니하고 명예와 치욕처럼 분명히 갈라지는 경우에 있어서랴.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 담담하여 욕심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선왕(先王)은 사람들이 장차 태만하고 해이하여 한결같이 물러나기만 하고 나아감이 없게 될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

로써 그들의 눈을 유도하고, 종고(鍾鼓)와 금슬(琴瑟)과 생용(笙鏞 생황과 큰 종)으로써 그들의 귀를 유도하고, 인수(印綬 관직을 상징함)와 거마(車馬)로써 그들의 몸을 유도하고, 남다른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노래로 지어 찬탄함으로써 그들의 기개를 유도하였다.

 

[주D-005]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 : 보(黼)는 도끼 무늬이고, 불(黻)은 기(己) 자 둘이 서로 등진 모양의 무늬이다. 조회는 수초(水草) 무늬를 그린 것이고, 치수는 자수(刺繡)를 뜻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서 순(舜) 임금은 우(禹)에게 일(日) · 월(月) · 성신(星辰) ·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을 그리고, 종이(宗彛 : 종묘〈宗廟〉의 주기〈酒器〉) · 조(藻) · 화(火) · 분미(粉米 : 백미〈白米〉) · 보(黼) · 불(黻)을 수놓아 예복(禮服)을 만듦으로써 존비(尊卑)의 질서를 분명히 밝히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천자는 일(日) · 월(月) 이하 열두 가지 무늬로 장식한 12장복(章服)을 입었고, 왕은 산(山) · 용(龍) 이하 아홉 가지 무늬로 장식한 9장복을 입었고, 신하들은 계급에 따라 7장복 · 5장복 · 3장복 · 1장복 · 무장복(無章服)을 입었다.

 

그리하여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그 누구도 분발하고 단련해서, 의욕을 내야 할 일에 힘차게 나서고, 물러나 남에게 미루거나 제풀에 꺾이고 마는 마음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결같이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날 줄 모른다면, 천하의 재앙 중에 또한 태연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선왕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고상한 품성을 양성하고, 위로하고 타이르며 힘써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사양하고 물러나는 미덕을 양성하였다.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

은 절개를 양성한 때문이요,

형벌이 위로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 것

은 염치를 기르고자 한 때문이다. 신체에 형벌을 가하거나 유배의 형을 내린 뒤에

또한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표시하는 것은,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곧은 절개로써 자신을 지키고, 장차 아무 짓이나 다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때문이다.

 

[주D-006]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 속백은 비단 다섯 필을 한 묶음으로 만든 것으로 귀중한 예물로 쓰였다. 《예기》 예기(禮器)에 제후가 천자를 조회할 때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하는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존경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尊之〕”라고 하였고, 교특생(郊特牲)에서도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한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덕 있는 천자에게 귀의함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往德也〕”라고 하였다. 후대에는 왕이나 천자가 덕 있는 군자를 초빙할 때에도 속백가벽(束帛加璧)의 예를 갖추었다.
[주D-007]위엄과 …… 것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부귀도 그를 방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변절하게 할 수 없으며,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고 하였다.
[주D-008]형벌이 …… 것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예절은 아래로 서민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으며, 형벌은 위로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형벌이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의 형벌을 별도로 정해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대부를 이처럼 예우함으로써 스스로 염치를 알도록 장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주D-009]또한 …… 것은 :
원문은 ‘又從而示其傷慘矜恤之意’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而’ 자가 ‘以’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而’ 자가 옳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욕심 내기로는 부귀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그가 욕심 내는 대상이 도리어 부귀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다.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로는 형벌보다 더 큰 것이 없지만, 부끄러이 여기는 대상이 도리어 형벌보다 클 경우에는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는 법이다.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이른바 이름〔명예〕이 아니겠는가.

 

[주D-010]시퍼런 …… 법이다 : 보통 사람으로는 행하기 힘든 용기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제 9 장에서 공자는 “천하와 나라와 집안도 고루게 다스릴 수 있고,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으되, 중용(中庸)을 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형벌과 포상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방법이요, 이름〔명예〕을 장려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어디서든 제한이 없는 방법이다. 왜 그런가? 사람 중에 혹 선행을 하면서도 포상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작록이 그가 한 선행을 능가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또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형벌을 꺼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질과 회초리로는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억제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 중에는 반드시 포상을 할 필요 없이 권장하기만 하고, 형벌을 가할 필요 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게만 하면, 힘차게 의욕을 내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의(義)라는 이름은 공평하고 정대(正大)하나, 명(名)이라는 이름은 이기적이고 천박한 것이다. 그대의 논법대로 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을 다 몰아서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이른바 이름을 혐오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그 폐단은 어리석은 점이지만, 그래도 근엄하고 자중하여 세속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지경까지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아무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에게 갑자기 실정보다 지나친 칭찬을 가한다면, 그 역시 뒤로 물러서 겸손히 사양하고 불안해하며 그렇다고 자처하지 못할 터이다. 어찌 사람들을 몰아다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을 걱정할 게 있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모두가 다 군자라면, 또한 무엇 때문에 이름〔명예〕에 대해 힘쓰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성취하려고만 한다면,

인의(仁義)의 행실을 욕심으로써 인도할 수 있고, 불의(不義)의 일을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천하의 대중들이 무관심하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선왕이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

과 충효 인의(忠孝仁義)의 행실이 모두 다 텅텅 비어서 빈 그릇이 되고 말 터이니, 장차 어디에 의탁하여 스스로 행해지겠는가?”

 

[주D-011]만약 …… 한다면 : 《중용》에 출처를 둔 말이다. 《중용장구》 제 20 장에 “어떤 이는 편안히 실행하고, 어떤 이는 민첩하게 실행하고, 어떤 이는 있는 힘을 다해 실행하나니, 공을 이루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주D-012]세상을 다스리는 계책 :
원문은 ‘禦世之策’인데, ‘策’ 자가 ‘具’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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