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

다음 꼭지의 편지 아래 "부(附) 원서(原書)"라 한 것을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먼저 싣는다. 열하일기에 남긴 사실적 문장을 정조는 벌레소리 같은 것이라 하여 고문에 의거한, 열하일기의 명성에 걸맞는 고문을 지어 바치라는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남공철이 편지로 연암에게 전달한 내용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글의 방향을 제시한 남공철의 연암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느껴진다.

연암이 표방한 문체 창신의 길은 가시밭길이었고 험란한 파도에 비딪쳐 좌초의 운명을 맞을 지도 모르는 재난이 예고된 길이었다. 왕명인데 어찌 법고(法古)를 거역하겠는가?

이방익 표류사건에 대한 글과 농서 <과농소초>는 왕명에 따른 성과물이다.

정조의 문체반정책에 의한 이 지시는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에게도 내려져 북학파 인사들을 괴롭혔다. 이덕무는 임종의자리에서도 자식에게 당송팔가문을 읽게 했다.

부(附) 원서(原書)

서울에는 한 자가 넘게 눈이 내려 가죽옷을 껴입지 않고는 외출을 못할 지경인데, 남쪽 소식은 어떤지 몰라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요즘 정사(政事)에 수고로운 몸 안녕하신지요? 영남(嶺南)은 가뭄의 피해가 이루 다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귀하의 고을은 세금 독촉이며 기민 구제 사업으로 정신이 괴롭지나 않으신지 이것저것 삼가 염려되옵니다. 기하생(記下生)은 어지러운 진세(塵世)와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 예전의 저 그대로입니다.


[주D-017]기하생(記下生) : ‘기억해 주시는 아랫사람’이란 뜻으로, 편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다.


지난번에 문체(文體)가 명(明) · 청(淸)을 배웠다 하여 임금님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치교(穉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함추(緘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내각(內閣)으로부터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내각에서 북청 부사(北靑府使)로 부임하는 성사집(成士執)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대개 사집(士執)은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낙서(洛瑞) 영공(令公)과 여러 검서(檢書)가 다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성사(盛事)요 난파(鑾坡)의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


[주D-018]치교(穉敎) …… 하였습니다 : 치교는 심상규(沈象奎 : 1766 ~ 1838)의 자이다. 함추(緘推)는 함사추고(緘辭推考)의 준말로 6품 이상의 관원이 경미한 죄를 범한 경우 서면(書面)으로 죄를 추궁하고 서면으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심상규는 정조로부터 그의 이름과 자를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792년 음력 11월 규장각 대교로서 함추를 받아 지어 올린 함답(緘答)이 구두(句讀)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고 그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올리라는 엄명을 받았다. 당시 심상규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을 즐겨 본 전과가 있던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에게도 함추의 처분이 내렸다. 《正祖實錄 16年 10月 24日, 11月 3日 · 8日》
[주D-019]성사집(成士執) :
사집은 성대중(成大中 : 1732 ~ 1809)의 자이다. 성대중은 호가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에 오래 재직했으며 어명으로 문신들이 지어 올린 응제(應製)에서도 자주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 16년 12월 정조는 성대중이 공령부체(功令賦體)로 지어 올린 글을 칭찬하면서 서얼 출신임에도 특별히 북청 부사에 임명하고 규장각에서 그의 송별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6年 12月 18日》 《硏經齋全集 卷10 先府君行狀》 이와 같이 성대중은 정조의 보수적인 문예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출세한 인물로, 연암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주D-020]낙서(洛瑞) 영공(令公) :
낙서는 이서구(李書九 : 1754 ~ 1825)의 자이다. 이서구는 호가 척재(惕齋) · 강산(薑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조선 후기 한시(漢詩) 4대가로 불린다. 승지를 영공(令公)이라고도 부른다.
[주D-021]검서(檢書) :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담당하는 규장각의 5 ~ 7 품 벼슬로 주로 서얼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성대중을 위한 규장각의 송별연에는 승지 이서구, 규장각 직각 남공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검서로 이덕무와 유득공이 참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1 年譜 壬子 12月》
[주D-022]난파(鑾坡)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규장각을 가리킨다.


어제 경연(經筵)에서 천신(賤臣 남공철)에게 하교하시기를,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하시고, 천신에게 이런 뜻으로 집사(執事)에게 편지를 쓰도록 명령하시면서,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하시며, 이로써 곧 편지를 보내라는 일로 하교하셨습니다.


[주D-023]집사(執事) : 편지에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쓰는 경칭이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다.
[주D-024]남행(南行)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 즉 음직(蔭職)을 이른다. 문임은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종 2 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이른다.


이런 임금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줄 상상되오나, 다만 이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은 진실로 졸지에 지어 내기는 어려울 터이니,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성상의 고심과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나마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집사는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도리상 더욱이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나, 그 제목을 정하기가 딱하게도 쉽지 않으니, 명 · 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한두 권 글을 지어서 올려 보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남(嶺南) 산수기(山水記) 한두 권이나 혹은 서너 권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막론하고 두어 달 안에 올려 보내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보낸 것은 이 때문이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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