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자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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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壺遂曰(호수왈):
호수가 말했다.

411.“ 孔子之時(공자지시),
공자께서 살아계실 때

412.上無明君(상무명군),
위에는 밝은 임금이 없었고

413.下不得任用(하부득임용),
아래로는 그 자신이 임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414.故作<春秋>(고작춘추),
춘추를 지어,

415.垂空文以斷禮義(수공문이단예의),
내용이 없는 글을 나열하여 예와 의를 규정지어

416.當一王之法(당일왕지법).
당대의 제왕들로 하여금 법전으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417.今夫子上遇明天子(금부자상우명천자),
그러나 지금 그대는 위로는 밝은 천자를 만났고

418.下得守職(하득수직),
아래로는 관직에 있으니

419.萬事旣具(만사기구),
만사가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420.咸各序其宜(함각서기의),
게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각기 그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질서가 정연하게 적당함을 얻고 있는데,

423.夫子所論(부자소론),
그대가 지금 논하는 바는

424.欲以何明(욕이하명)?”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것입니까?”

425.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했다.

426.“ 唯唯, 否否, 不然(유유, 부부, 불연).
“ 아, 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427.余聞之先人曰(여문지선인왈):
저는 돌아가신 선친이 말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428.‘ 伏羲至純厚(복희지순후),
옛날 복희(伏羲)씨는 지극히 순박하고 후덕하여

■복희(伏羲)/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三皇) 중 태호(太昊)를 말하며 그는 자기의 형매인 여왜(女?)와 혼인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었고 주역의 팔괘를 만들었으며, 백성들에게 어업과 목축을 가르쳤다. 삼황은 복희씨와, 신농(神農) 염제(炎帝), 황제(皇帝) 헌원(軒轅)을 말한다.

429.作<易>八卦(작역팔괘).
백성들을 위하여 주역의 팔괘를 만들고

430.堯舜之盛(요순지성),
요순시대의 번성함은

431.<尙書>載之(상서재지),
상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432.禮樂作焉(예악작언).
예와 악이 만들어 졌으며

433.湯武之隆(탕무지융),
탕임금과 무왕이 새로이 나라를 일으킨 것은

434.詩人歌之(시인가지).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다.

435.<春秋>采善貶惡(춘추채선폄악),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쳐

436.推三代之德(추삼대지덕),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덕을 추앙하고

437.褒周室(포주실),
주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438.非獨刺譏而已也(비독자기이이야).’
단지 풍자와 비방만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439.漢興以來(한흥이래),
한나라가 새로 일어난 이래

440.至明天子(지명천자),
영명한 천자가 나타나시니

441.獲符瑞(획부서),
하늘에서 상서로운 징조 있어

442.封禪(봉선),
태산과 양보산(梁父山)에 봉선을 행하게 되었고

443.改正朔(개정삭),
해와 달의 시작하는 날을 바꿔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으며

■정삭(正朔)/ 정(正)은 한 해의 첫째 달이고, 삭(朔)은 한 달의 초하루이다.

444.易服色(역복색),
관복의 색을 바꿔

■관복의 색을 바꾼 것은 오행설에 의해 진나라 때 시작된 수덕(水德)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관복을 화덕(火德)을 의미하는 적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말한다.

445.受命于穆淸(수명우목청),
하늘로부터 미덕으로 교화를 이루라는 천명에 따라

■목청(穆淸)/미덕(美德)으로 교화(敎化)를 이루는 것을 이름

446.澤流罔極(택류망극),
사방으로 베푼 은혜는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447.海外殊俗(해외수속),
나라 밖의 습속이 같지 않은 이민족 국가들이

448.重譯款塞(중역관색),
통역에 통역을 거치며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우리 중국의 변방을 지키는 관문에 당도한 다음

449.請來獻見者(청래헌견자),
천자께 조현을 드리고자 청한 자들의 숫자는

450.不可勝道(불가승도),
하도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451.臣下百官力誦聖德(신하백관력송성덕),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성상 폐하의 높으신 덕을 힘껏 칭송하고 있다고는 하나

452.猶不能宣盡其意(유불능선진기의).
아직도 그 뜻을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453.且士賢能而不用(차사현능이불용),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어질고 유능한 선비들을 불러서 다 쓰지 못하고 있음은

454.有國者之恥(유국자지치),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는 치욕이며

455.主上明聖而德不布聞(주상명성이덕불포문),
주상께서 밝고 성스러운 덕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고하고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456.有司之過也(유사지과야).
바로 관원들의 잘못입니다.

457.且余嘗掌其官(차여상장기관),
그러함에도 내가 이미 그 일을 맡아 하는 관리가 되었으나

458.廢明聖盛德不載(폐명성성덕부재),
밝고 어진 성상폐하의 크나 큰 성덕을 폐하고 기록하지 않으며

459.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멸공신세가현대부지업불술),
공신, 세가, 현대부들이 이룩한 업적을 인멸하고 기술하지 않는다면

460.墮先人所言(타선인소언),
선친께서 나에게 당부한 유언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되어

461.罪莫大焉(죄막대언).
내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클 것입니다.

462.余所謂述故事(여소위술고사),
내가 기술하려고 하는 소위 옛날 일은

463.整齊其世傳(정제기세전),
대대로 전승해 온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지

464.非所謂作也(비소위작야),
내가 지어내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465.而君比之于<春秋>(이군비지우),
그런 까닭에 대부께서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을 춘추와 대비하는 것은

466.謬矣(유의).
잘못 된 일입니다.

태사공자서(13)

467.于是論次其文, (우시논차기문)
그래서 그 사서의 문장을 차례로 논하게 된 것이다.

468.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 (칠년이태사공조이릉지화)
사서를 논하기 시작해서 7년 째 되는 해에 태사공은 이릉(李陵)의 화를 당하여

▶이릉지화(李陵之禍)
기원전 88년 한무제(漢武帝) 2년에 기도위(騎都衛)였던 이릉(李陵)이 흉노를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렀을 때 한나라 군사들보다 몇 배나 많은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은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한무제가 중국에 남아 있던 이릉의 가족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하자 사마천이 나서 이릉을 변호하자 한무제가 노하여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궁형에 처했다. 이 일에 대해 사마천의 심경을 자세하게 토로한 글이 한서의 사마천열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실려있다.

469.幽于縲紲(유우유설).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470.乃 然而嘆曰:(내위연이탄왈)
감옥에 갇힌 태사공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471." 是余之罪也夫! (시여지죄야부)
이것은 나의 죄로다!

472.身毁不用矣."(신훼불용의)
몸은 망가져 이젠 쓸모 없게 되었구나!"

473.退而深惟曰: (퇴이심유왈)
태사공은 물러 나와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474." 夫<詩>, <書>隱約者, (부시서은약자)
무릇 시경과 서경의 내용이 깊고 그윽하면서도 간략한 것은

475.欲遂其志之思也.(욕수기지지사야)
그 지은이가 마음속에 뜻하고 있던 바를 이루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고

476.昔西伯拘 里,(석서백구유리)
옛날에 서백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에게 잡혀 유리( 里)에 갇혀 있으면서

▶서백(西伯)/주문왕 창(昌)을 말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주무왕(周武王)에 이르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유리( 里)/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남 탕음현(湯陰縣) 경내에 있었던 은나라 때의 성읍 이름.

477.演<周易>; (연주역)
주역을 더하여 풀이하였고

▶주역(周易)의 성립은 확실한 것은 아니나 복희씨(伏羲氏)가 8괘를 만들고 다시 신농씨(神農氏)가 64괘로 나누었으며 주문왕(周文王)은 각 괘에 사(辭)를 붙였다고 했다. 이어서 주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丹)이 효사(爻辭)를 공자가 십익(十翼)을 붙였다고 했다. 주문왕이 유리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역에 괘사(卦辭)를 만들어 붙인 것을 말한다.

478.孔子厄陳蔡, (공자액진채)
공자는 진(陳)과 채(蔡)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곤경에 처해진 와중에서

▶주경왕(周敬王) 31년, 기원전 489년 초소왕(楚昭王) 진(珍)이 채(蔡)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479.作<春秋>; (작춘추)
<춘추>를 지었으며

480.屈原放逐, (굴원방축)
굴원은 추방되어 상수(湘水) 강변을 배회하면서

▶굴원(屈原)/굴평(屈平)을 말한다. 평(平)은 이름이고 원(原)은 자(字)이다.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초회왕(楚懷王) 밑에서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좌도(左徒)의 벼슬을 살면서 내정과 외교에 많은 활약을 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았다. 초회왕이 진(秦)나라의 계교에 빠져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객사하자 회왕의 장남이 경양왕(頃襄王)으로 즉위하고 막내아들인 자란(子蘭)이 초나라 상국이 되었다. 자란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갔음으로 굴원은 자란을 비난하였다. 자란은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여 대부의 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자 굴원은 초왕을 걱정하며 지금의 동정호(洞庭湖)와 상수(湘水) 부근을 배회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품고 빠져 죽었다. 고대 시가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사문학을 창시한 사람으로 저작에는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詞)>, <천문(天問)>, <구장(九章)> 및 <초혼(招魂)> 등이 있다.

481.著<離騷>; (저이소)
이소를 노래했다.

▶이소(離騷)/이소는 모두 2490자로 된 굴원의 대표적인 서사이다. 이(離)는 별(別), 소(騷)는 수(愁) 즉 '이별의 슬픔'이라는 왕일(王逸) 설과 '근심을 만나다'라는 반고(班固) 설이 있다. 굴원은 이소의 시에서 그의 충정과 비탄, 애국과 원망, 참회와 절망, 끝으로 절명의 심정을 노래했다.

482.左丘失明, (좌구실명)
좌구명은 실명을 했음에도

▶좌구(左丘)/ 춘추 때 노나라의 태사(太史) 좌구명(左丘明)을 말한다. 공자 직전 혹은 동시대 인. 두 눈을 실명한 장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작자이며 또한 <국어(國語)>의 작자라는 설도 있다.

483.厥有 <國語>; (궐유국어)
국어(國語)를 지을 수 있었으며

▶국어(國語)/국어(國語)가 사마천의 작품이라는 설은 본 구절 때문인데 본서의 기술 내용과는 달리 그 작자가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국어의 집필 연대는 전국시대로 보고 있다. 모두 21권으로 되어 있으며 주(周), 노(魯), 제(齊), 진(秦), 정(鄭), 초(楚), 오(吳), 월(越) 등의 나라로 나누어 편집되었으며 주나라 목왕(穆王 : 재위 기원전 10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어 노도공(魯悼公 : 기원전 466- 429)까지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서술방법은 춘추좌전과 같은 편년체이다.

484.孫子 臏脚,(손자빈각)
손빈은 다리의 슬개골이 잘려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손빈(孫 )/동문수학한 방연(龐涓)의 음모로 무릎의 슬개골(膝蓋骨)을 제거 당하여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후에 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의 군사가 되어 계릉(桂陵)과 마릉(馬陵) 싸움에서 방연이 이끌던 위(魏)나라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위나라는 이 싸움에서 패함으로서 전국시대 초반에 확보했던 주도권을 상실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손자병법은 원래 손자라고 불리우던 춘추 초기의 손무(孫武)의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1972년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 조성된 묘에서 손빈이 저술한 병서 13편의 죽간이 출토되었다. 손무의 병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그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가치가 높은 병서이다.

485.而論兵法; (이논병법)
책을 써 병법을 논했고

486.不韋遷蜀,(불위천촉)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되어 불우하게 되었음에도

▶여불위(呂不韋)/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35년에 죽었다.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대신이며 위(衛)나라 복양( 陽) 사람으로 원래는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 있었던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공자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화(奇貨)로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당시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유세하여 이인(異人)을 그녀의 적자로 삼게 만들었다. 화양부인과 안국군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다. 진소양왕(秦昭陽王)이 죽고 안국군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이인은 그의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의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자 이인이 그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진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그 식읍으로 10만호를 내렸다. 장양왕에게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죽고 진시황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계속 상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부르다가 여불위가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천거한 노애(  )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를 연루시켜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사천으로 유배 시켰다. 여불위는 사천으로 가던 도중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국으로 재직 중에 모두 26권으로 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사천으로 유배가서 지었다는 사마천의 기술은 잘못이다.

487.世傳<呂覽>; (세전여람)
만세에 전해질 여람을 편찬했고

▶여람(呂覽)/여씨춘추(呂氏春秋)를 말함. 여불위가 진나라 상국으로 있을 때 심혈을 기우려 만든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그가 거느린 3000여명의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갖고 있던 견문과 학설 및 설화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처음 편찬할 때에는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되어 있어 이 책의 이름을 여람(呂覽)이라고 했으나 후에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으로 그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십이기의 마지막 편인 <서의편(序意篇)>에 '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인륜 규범을 깨닫고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혔다. 12기는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 맹하(孟夏), 중하(仲夏), 계하(季夏),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각 5편 씩과 서의편(序意篇)을 합한 61편과, 팔람(八覽)은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의 각 8편과 유시(有始)의 각 7편 씩을 합하여 63편 및 육론의 개춘(開春), 신행(愼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의 각 6편 씩의 36편을 합하여 여씨춘추는 모두 160편으로 되어있다. 또한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어 진나라 시대 때의 사상 연구을 위한 귀중한헤 자료이다.

488.韓非囚秦,(한비수진)
한비자는 진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

▶한비(韓非)/ 중국 전국시대 때의 사상가. 법가의 대표적 인물. 원래 한나라의 공족 출신으로,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던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 즉 순자(荀子)에게서 동문수학했다. 도가(道家), 유가(儒家), 묵가(墨家)의 사상을 흡수하여 뒤에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조국 한나라의 쇠약함을 한탄하며 한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변법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설에 능하지 않아 등용되지 못했으나 현실 분석과 대책에 뛰어나 탁월한 저서를 남겼다.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여 군신, 부자, 부부관계 등 인간의 일체의 행위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는 인성이기설(人性利己說)을 주장하였다. 도를 모든 사물이 운동하는 객관적 법칙으로, 이(理)를 구체적 사물이 운동하는 특수법칙으로 보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다 같이 사물 속에 존재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인류사회 역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에 따라 법률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또한 유가적 덕치를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시대착오라고 비판하고, 주관적인 지(智)나 신(信)이 아니라 객관직인 법과 세에 의존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 실무본위(實務本位)의 법치를 주장하였다. 상앙(商 )의 법, 신불해(申不害)의 술, 신도(愼到)의 세를 도모하였으며, 노자의 무위허정(無爲虛靜)을 근본으로 군주의 통치술을 제시하였다.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영향을 주었다. 화평사신으로 진나라에 갔을 때 진시황이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사(李斯), 요가(姚賈)의 무고(誣告)로 옥사하였다.

489.<說難><孤憤>;(세난고분)
세난과 고분을 저술했다.

▶세난(說難)/세란 다른 사람을 말로써 설득하여 동감하게 만드는 유세의 의미이다. 그래서 세난이라 하면 남을 유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전국시대에 유세의 행위란 재주 있는 자들이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였으니 한비 또한 그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자 이 글을 지었다.
▶고분(孤憤)/외롭게 홀로 울분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고립무원에 처한 법술가(法術家)들이 권신들의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비 자신이 처한 불만의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490.<詩>三百篇, (시삼백편)
시 삼백편도

▶시삼백편(詩三百篇)/공자가 편찬한 시경을 말한다. 정확히 시경에는 305 수의 시가(詩歌)가 실려있다.

491.
大抵賢聖發憤之所爲作也.(대저현성발분지소위작야)
대체로 현인과 성인들이 모두 자기 마음속에 맺혀 있던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책을 저술한 것이며
,

492.此人皆意有所郁結,(차인개의유소욱결)
그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혀 있는

493.不得通其道也, (부득통기도야)
자기의 이상과 주장을 풀어 버릴 방법을 얻지 못한 나머지

494.故述往事, (고술왕사)
옛날 일을 말하여

495.思來者." (사래자)
미래의 일을 생각한 것이다."


496.于是卒述陶唐以來,(우시졸술도당이래)
그래서 결국은 요임금과 순임금이래

497.至于麟止,(지우린지)
획린(獲麟)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저술했다.

498.自黃帝始.(자황제시)
그래서 본서는 황제(黃帝)부터 시작했다.


▶황제(黃帝)
중국이 원시사회를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의 부족국가의 추장으로 성은 희(姬)이고 씨는 헌원(軒轅) 혹은 유웅(有熊)이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다스리던 부족은 원래 중국의 서북 고원에 거주했던 소전씨(少典氏) 출신으로 염제(炎帝)와 같은 종족이다. 후에 동쪽으로 나아가 탁록( 鹿)에 살고 있던 구여족(九黎族)의 추장 치우(蚩尤)를 공격하여 죽이고 다시 판천(阪泉)에서 염제(炎帝)와 싸워 패퇴시키고 염제가 이끌던 종족을 규합하여 그들의 부족장이 되었다. 그 부락이 후에 발전하여 중화족(中華族)의 전신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시조라 받들어 졌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를 고안해 행한 것이 전설상으로 내려온다. 창힐(倉 )을 시켜 문자(文字)를 만들게 하였고, 누조( 祖)에게는 양잠술(養蠶術)을, 공(共)에게는 북 만드는 법을, 화적(貨狄)에게는 배 만드는 법을, 희화(羲和)에게는 해를 보고 점치는 법을, 상의(常儀)에게는 달을 보고 점치는 법을, 유구(臾區)에게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알아내게 하였다. 또한 예수(隸首)에게는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내게 했으며, 용성(容成)에게는 달력을 만들게 하고 영(伶)에게는 도덕에 대한 규범을 만들게 했으며, 영장(榮將)에게는 음율(音律)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제를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은자주]아래의 오제본기 이하에서는 130편에 달하는 각편의 집필동기 및 그 내용을 밝혔으나 너무 번잡하여 본 블로그에서는 열전 70편에 대한 것만 수록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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