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국한시의 최고봉은 누가 뭐래도 정지상의 <송인>이다.

送人

-정지상

雨 歇 長 堤 草 色 多 비 개인 긴 뚝에 풀빛이 진한데

送 君 南 浦 動 悲 歌 남포에서 임 보내니 노랫가락 구슬퍼라.

大 洞 江 水 何 時 盡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건가.

別 淚 年 年 添 綠 波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하는데.

(<동문선> 권19)

동국여지승람 권51평안도 평양부 산천 남포924쪽,6책 352쪽/동문선19.

*제목을 <파한집>에는 送友人,<성수시화>에는 西京, <대동시선> <동시정수>에는 大同江으로 나타냄.<파한집>에는 送君南浦를 南浦千里로, 添綠波를 添作波로 표기함.

[해설]

그의 탁월한 서정성 내지 감수성을 들 수 있다. 등과하기까지의 고독했던 젊은 날들은 그의 뛰어난 감수성을 갈고 닦아 名器로 단련했을 것이다. <13.送人>의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에서 보여주는 곰살궂은 표현은 그 작품을 천고의 절창으로 떠받들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시구의 내용을 부등식으로 나타내 보기로 하자. 강물을 R이라 하고 눈물을 ‘α’라 하면, 언제나 ‘α> 0’이다. 따라서 ‘R+α>R’이다. 눈물 한 방울로 불어나는 강물, 해마다 강나루에서 이별하는 연인들의 눈물로 강물이 마르지 않는다니 이런 억지가 없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과학적으로도 사리에 딱 들어맞는 이러한 상상력을 표출한 이가 없으니 정지상은 단연코 천고의 절창 자리를 차지하였다. 남포 나루의 강물은 이미 자연의 강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마음 속에 자리한 또 다른 강이다. 이 마음 속의 강물은 눈물 한 방울에도 광풍을 만난 듯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는 그런 강물이다.

[김영동, 정지상 한시의영원한 생명력, 東岳語文論集 31집,東岳語文學會,1996.12.]

정지상 [鄭知常]

?~1135(인종13).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

서경(西京)인으로 초명은 지원(之元).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서경에 두었던 분사국자감시(分司國子監試)에서 진사가 된 후, 서울인 개경(開京)으로 올라와 최종 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준비한 듯하다. 1112년(예종 7)에 과거에 급제하여 1113년에 지방직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1114년 중앙관리로 개경에 올라와 벼슬을 했는데, 이 무렵에 사신의 일행으로 송(宋)나라에 가서 해를 넘기고 체류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1127년(인종 5)에 척준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을 인종이 받아들여 척준경을 유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인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척준경을 유배시킨 그 날로 왕명에 의해 기린각에서 〈서경〉을 강론하고 주식(酒食)을 하사받았다. 1130년 선왕(先王)의 벗이자 총신이었던 곽여가 죽자 왕명에 의해 제문과 〈동산재기 東山齋記〉를 짓기도 했다. 시에서 뿐만 아니라 문(文)에서도 명성을 떨쳐 당대에 김부식과 쌍벽을 이루었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자는 논의와 서경천도(西京遷都)를 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 묘청과 함께 서경천도를 주장했는데, 중앙문벌귀족의 중심세력인 김부식은 이를 강력히 반대해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했다. 1135년 묘청은 인종의 서경천도의 뜻이 미약해지자 성급하게 난을 일으켰다 (→ 묘청의 난). 관군 총사령관으로 반란진압에 나선 김부식은 먼저 국론을 통해 정지상·김안·백수한 등이 반역에 가담했으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해 개경에 있었던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체포되어온 그는 김부식의 사명(私命)에 의해 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처사를 두고 후에 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시중(侍中) 김부식과 학사(學士) 정지상은 문장으로 한때 이름을 나란히 했다.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라고 적고, 김부식이 자기에 의해 피살되어 음귀(陰鬼)가 된 정지상에 의해 죽었다는 일화를 실었다.

그는 불교와 도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지니면서 풍수도참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결국 묘청의 난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으나 계속 격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문집으로 〈정사간집 鄭司諫集〉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20수가량의 시와 7편의 문장이 〈동문선〉·〈파한집〉·〈백운소설〉·〈고려사〉 등에 실려 전한다.

시는 절구에 능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율시가 더 많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현에 뛰어났다. 문자의 수식과 조탁(彫琢)에 비중을 두는 만당시풍(晩唐詩風)을 이루면서도 세속의 번거로움과 갈등을 초월한 맑고 깨끗한 세계를 그렸다. 고사의 인용이 적으며, 감각을 통해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그의 시세계를 두고 후에 홍만종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했다(→송인). 그러나 시어(詩語)가 너무 다듬어져 만당시풍의 시가 가지는 단점도 지니는데, 이를 두고 최자는 "웅휘(雄輝)하고 깊은 대작(大作)은 없다"라고 평했다. 최치원 이후 고려 전기 한시문학을 주도했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B&i=184936&v=47

[부벽루 & 대동강 & 맨아래가 새벽을 맞은 남포 앞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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