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위는 순천 송광사의 손질이 마악 끝난정갈한 뒷뜰. 접시꽃도 좋아라 반기네요.

아래는 팝아트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팝아트는 만화의 한 장면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된 '행복한 눈물' 보다 더 잘 그린 만화는

우리나라 만화 중에도 많다. 그럼에도 이 만화 한 장으로 온 나라가 몇 달째 시끄럽다."

http://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77393&section=section4

에서 인용함.

노천명,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여자에겐 본시 이름이 없었다

[주]<자[字] 호[號] 시호[諡號] 에 대하여 >의 꼬리글 주석을 달다가 대입을 준비하면서
읽은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라는 작품이 생각나서 나의 교양국어 강의노트
일부분을 소개한다.

1896년 9월 1일 칙령 61호로 '호구조사규칙'을, 같은 해 9월 3일 내부령(內部令) 8호로

'호구조사세칙'을 공포했다고 하니, 그 이전에 태어났다면 시에서 표출한 무명의 욕망도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그 꼬리글 주석은 아래와 같다.

1909년 이전에는 여자에겐 대체로 기록된 이름인 관명(관명)이 없었다. 굳이 이름이라고
한다면 어릴 적 부르던 아명이 있었다. 아명이란 토박이말이어서 보통명사이거나 이에 가까워
유사한 이름이 많아 고유명사라 하기엔 부족하다. 김유신(金庾信)의 두 누이동생인 보희(寶姬) ·
문희(文姬)에게도 ‘阿海’ ‘阿之’와 같은 토박이 이름이 있었다고 하나, "아해'든 '아지'든
'아이'를 뜻하는 말이고 보면 다른 집 아이도 그 집안에서는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기록해 보았자 고유명사로서의 기능은 없다고 보면 된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한국의 성씨는 274개로 기록되었는데, 족보를 가진 집안도
상당수에 달하지만, 족보를 들여다보면 여성의 실명기록은 1909년 이후로 보면 된다.
물론 개화기 지식인들은 그 이전에도 딸아이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여성의 경우,
특별한 사례 외에는 친정에서는 출가와 함께 남편의 성씨 뒤에 '--실'을 붙여 아명조차 없어지고
시가에서는 고향마을 이름에다 '--댁'을 붙여 택호(宅號)로 불리웠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일부 양반계층 중에는 남정네들처럼 당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자연, 노비 신분이거나 설화의 주인공이 아니면 여성의 이름이 기록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909년 3월 법률 6호로 민적법(民籍法)이 공포됨으로써 여성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10년 5월 10일에 완성된 사상 최초의 민적부(民籍簿)에 의거하면,
그때까지 성이 없는 사람의 수가 있는 사람에 비하여 1.3배나 되었다고 하니, 여자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은 아예 성명 없이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나 보다..

그 이유를 나는 여성에게는 사회적 역할이나 역[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시의 선구자; 노천명


노천명(盧天命,1912-1957)

황해도 출생. 이화여전.

본명 기선. 병마에 시달려 天命으로 바꿈.

불우한 일생. 자전적 문학- 서정시의 기본.

작품 <사슴>은 처녀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에 수록된 초기 시작품.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

여성적 지적 시풍으로 생의 고뇌와 현실의 차가움을 주로 노래한 시인.


독신으로 지낸 건 짝사랑한 유부남 때문임.

(아래 기록을 보면 노천명의 처절한 사랑이 짐작될 겁니다.)

<사슴>에서도 情人(애인) 기다림.

애인은 유부남. 보성고보. 노동경제학 전공자.

노천명이 연극에 참여했는데 관객으로 와서 만나기 시작.

친일 훼절- “조선의 딸들이여”- 정신대 권장.

해방 후 연인 월북. 6.25때 도강 안하고 애인 기다림.

애인은 고위층으로 서울에 내려옴. 사회과학원 원사.

전쟁이 끝나고 20년 징역형 받음.

김광섭의 구명운동으로 전국교도소 돌며 친공 친일 참회.

[참고] 시집 《사슴》(1936)은 백석의 시집.


1.자전적 문학세계

- 사회 역사의식 부족

“댓돌 밑에 우는 귀뚜라미처럼 나는 그대를 기다린다.”

2.민속연희 풍물시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3.현실적 수난과 고통 <면회>

옥중시. “언니 앞에 머리를 숙이다”

4.평범한 여인의 행복론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현실도피, 패배의식. 이름 때문에 수난.

절망적 몸부림 통해 찾은 평등의식

[결론] 여성시를 개척한 선구자


<사슴 >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 하겠오.

(1938)



김종찬, 당신도 울고 있네요.
http://blog.daum.net/cc1024/13896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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