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안열전 /사기 권62

- 관중(管仲) ⁃ 안영(晏嬰) 열전

2-1. 관중(管仲) 열전

管仲夷吾者,潁上人也。〔一〕

관중(管仲) 이오(夷吾)는 영상(潁上)1) 출신이다.

1)영상(潁上): 영수(潁水)의 강변이라는 뜻이다. 영수는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에서 발원하여 하남성을

동남으로 흐른 뒤 안휘성 수현(壽縣)의 정양관(正陽關)에서 회수(淮水)와 합류한다.

少時常與鮑叔牙游,鮑叔知其賢。

어렸을 때부터 항상 관중과 같이 다녔던 포숙아(鮑叔牙)는

그의 현명함을 알았다.

管仲貧困,常欺鮑叔,〔二〕

鮑叔終善遇之,不以為言。

관중의 집은 가난해서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포숙은 끝까지 그를 좋게 대해주고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

管仲事公子糾。

그리고 얼마 후에 포숙은 공자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섬기게 되었다.

及小白立為桓公,

公子糾死,管仲囚焉。

이어서 소백이 제나라의 군주인 제환공(齊桓公)이 되었는데

공자규가 죽고 관중은 죄수가 되었다.

鮑叔遂進管仲。〔三〕

管仲既用,任政於齊,〔四〕

포숙이 관중을 천거하자

제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제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齊桓公以霸,九合諸侯,

一匡天下,管仲之謀也。

제환공이 패자가 되어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재하고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관중의 지모 때문이었다.

管仲曰:「吾始困時,嘗與鮑叔賈,〔一〕

分財利多自與,鮑叔不以我為貪,知我貧也。

관중이 말했다.

“내가 처음에 가난 했을 때,

일찍이 포숙과 같이 장사를 했는데

내가 항상 그 이익금으로 재물을 더 많이 가져갔으나

포숙은 결코 나를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포숙아는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吾嘗為鮑叔謀事 而更窮困,

鮑叔不以我為愚,知時有利不利也。

내가 옛날 포숙아를 위해 사업을 도모했다가

다시 곤궁한 처지에 빠졌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장사를 하다보면 이익이 날 때도 있고

손해가 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吾嘗三仕 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為不肖,知我不遭時也。

내가 또한 세 번 관리가 되었다가

그때마다 군주에게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불초한 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怯,知我有老母也。

내가 일찍이 세 번 전장에 나아가 그때마다 달아났으나

포숙은 내가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집에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公子糾敗,召忽死之,

吾幽囚受辱,鮑叔不以我為無恥,

知我不羞小節 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

공자 규(糾)가 군위 다툼에서 패하고 죽었을 때,

소홀(召忽)은 공자 규를 위해 같이 죽었으나,

나는 죽지 못하고 옥에 갇히어 욕된 몸이 되었는데도

포숙아는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작은 절의(節義)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功名)이 천하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임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

鮑叔既進管仲,以身下之。

포숙은 관중을 제환공에게 천거하고,

자신은 관중 아래에 두었다.

子孫世祿於齊,有封邑者十餘世〔一〕,常為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 而多鮑叔能知人也。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의 녹봉과 받았고

십여 대가 넘도록 봉읍(封邑)을 받아

항상 이름이 높은 대부 집안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말하는 이는 많지 않았으나

포숙이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를 지녔다는 이들이 많았다.

管仲既任政相齊,〔一〕以區區之齊在海濱,〔二〕

通貨積財,富國彊兵,與俗同好惡。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나라의 정치를 맡게 되자

바닷가의 변변치 못한 제나라에 재화을 유통시키고

재물을 쌓아 부국강병(富國彊兵)을 이루고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했다.

故其稱曰:〔三〕

「倉廩實而知禮節,衣食足而知榮辱,

上服度則六親固。〔四〕

四維不張,國乃滅亡。〔五〕

그래서 말했다.

백성들이란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찾게 되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예로움과 욕됨을 알게 된다.

군주가 솔선하여 법도를 잘 지켜야

육친(六親)3)이 비로소 굳게 단결하게 되나,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널리 행해지지 않는다면

나라는 이내 멸망한다.

3) 육친(六親):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왕필(王弼)의 부(父), 모(母). 형(兄), 제(弟). 처(妻), 자(子) 설을 따른다.

下令如流水之原,令順民心。」

故論卑而易行。〔六〕

명령을 내리는 모습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서,

백성들의 마음을 순응하게 한다.

그러므로 추진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용이하게 행해지게 되었다.

俗之所欲,因而予之;

俗之所否,因而去之。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베풀어 주고,

백성들이 반대하는 것은 제거해 주었다.

其為政也,善因禍而為福,轉敗而為功。

貴輕重,〔一〕慎權衡。〔二〕

그가 정사를 돌보는 방법은

화(禍)가 되는 일도 복(福)으로 만드는 일에 능했으며,

실패할 일도 잘 처리하여 성공으로 이끌었다.

일의 경중과 완급을 잘 분별하고

이해득실을 잘 헤아려 신중하게 처신했다.

桓公實怒少姬,〔三〕南襲蔡,

管仲因而伐楚,責包茅不入貢於周室。

제환공이 참으로 소희(少姬)의 개가(改嫁)를 노여워하여4)

채나라에 남정(南征)하였으나

관중은 초나라를 공격하는 구실로 삼아,

초나라가 주왕실에 청모(菁茅)5)를 공물로 바치지 않은 것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4) 소희(少姬)의 개가(改嫁): 제환공의 후부인 소희는 채나라의 군주의 여동생으로 환공과 물놀이를 나갔다가 장난으로 배를 흔들자 제환공이 제지했으나 듣지 않고 계속했다. 제환공이 노하여 소희를 채나라에 돌려보내자 채후(蔡侯)가 노하여 소희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를 시켰다. 이에 제환공이 채후에게 앙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후는 다시 초나라에 구원을 청한 사건을 말한다.

5) 포모(包茅): 띠풀의 일종으로 청모(菁茅) 혹은 삼척모(三脊茅)라고도 한다. 고대에서 청모초(菁茅草)를 볏단으로 만들어 그 위에 부어 거른 술로 제사를 지냈다. 청모는 초나라의 특산물로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가 서자 주왕은 주왕실의 제사를 받들 때 사용하는 술을 거르기 위해 사용하기 위해 매년 마다 청모초를 공물로 바치게 했다. 후에 주왕실의 힘이 쇠약해지자 초나라는 청모를 바치지 않았다.

桓公實北征山戎,

而管仲因 而令燕修召公之政。

또 실제로는 환공이 산융6)을 정벌하기 위해 북정(北征)을 행하면서,

관중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연(燕)나라로 하여금 소공(召公)7)의 선정(善政)을 행하도록 이끌었다.

6) 산융(山戎): 고대 중국의 북방에 거주했던 이민족 이름으로 제환공이 정벌했던 산융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시(昌黎市) 일대이다.

7) 소공(召公): 연나라의 시조인 소공 석(奭)을 말한다. 주나라의 창업공신으로 주공(周公) 단(旦), 태공(太公) 여상(呂尙) 과 함께 삼공(三公)으로 불린다.

於柯之會,〔四〕桓公欲背曹沫之約,〔五〕

管仲因而信之,〔六〕諸侯由是歸齊。

또 가(柯)에서 모인 회맹8)에서

환공은 노나라의 장수 조말(曹沫)에게 한 약속을 어기려고 했으나,

관중이 나서서 신의를 지키도록 함으로 해서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를 따르게 했다.

8) 가(柯)에서의 회맹(會盟): 제환공 5년, 기원전 681년에 환공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가 조말(曹沫)을 장수로 세웠으나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패했다. 노장공이 노나라의 성읍을 바치며 강화를 청하자 환공이 허락하여 가(柯) 땅에서 회맹했다. 가(柯)는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서남이다. 이윽고 회맹의 날이 되자 비수를 가슴에 품은 조말이 단상에 올라 제환공을 위협하여 제나라가 탈취해 간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조말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약속한 제환공은 약속을 파기하고 조말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때 관중이 나서서 약속을 파기하고 조말을 죽이는 일은 일시적으로 통쾌한 일이지만 제후들로부터 신의를 잃어 천하를 잃는 큰일이라고 설득해서 조말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키도록 했다. 제후들이 듣고 제나라를 믿고 따랐다. (제태공세가와 자객열전)

故曰:「知與之為取,政之寶也。」〔七〕

그래서 말하기를,

“주는 것이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금과옥조다.”라고 한 것이다.

管仲富擬於公室,

有三歸、反坫,〔一〕

齊人不以為侈。

관중의 누린 부(富)는 공실의 것과 비슷하여

삼귀(三歸)9)와 반점(反坫)10)이 다 갖추었으나

제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사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9) 삼귀(三歸): 화려하게 장식한 건축물 대(臺), 세 명의 정실부인, 세 개의 가정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반점(反坫): 제후들이 회맹(會盟)할 때 헌수(獻酬)의 예를 행하고 나서 빈 잔을 엎어두는 받침대.

당시 봉건사회에서는 제후 이외의 일반인들은 가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管仲卒,〔二〕齊國遵其政,常彊於諸侯。

後百餘年而有晏子焉。

관중이 죽은 후에도 제나라는 관중의 정책을 준수하여

항상 다른 제후국들보다 강한 국력을 갖추었다.

관중이 죽고 100여 년 후에 안자(晏子)가 태어났다.

[史評]-말미에서 管仲 부분 이동.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吾讀管氏牧民、山高、乘馬、輕重、九府,〔一〕及晏子春秋,〔二〕

詳哉其言之也。

나는 관씨의 목민․산고․병마․경중․구부와 안자춘추를 읽었는데

그 말한 내용이 상세하였다.

既見其著書,欲觀其行事,故次其傳。

이미 저서를 보았으므로 사적을 알고자 하는 생각에서

전기를 정리한 것이다.

至其書,世多有之,

是以不論,論其軼事。〔三〕

저서에 대해서는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논하지 않고 다른 문헌에 빠져있는 것만 기록하였다.

管仲世所謂賢臣,然孔子小之。

관중은 세상에 소위 현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공자는 그를 소인으로 여겼다.

豈以為周道衰微,桓公既賢,

而不勉之至王,乃稱霸哉?〔一〕

그 이유로써 주나라의 도는 이미 쇠미해진 상태에서

제환공은 어진 군주였음에도

그가 왕도를 이루도록 힘써 애쓰지 않고

단지 패자를 칭하게만 했기 때문이었다.

語曰「將順其美,匡救其惡,

故上下能相親也」。〔二〕豈管仲之謂乎?  

옛말에 군주의 장점은 북돋우고

결점은 바르게 고쳐 줌으로 해서

상하가 서로 능히 친숙해 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찌 관중을 두고 한 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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