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태사공자서>에서 열전 70권의 기술 동기를 발췌해 보았다.

열전 제70권은 태사공인 사마천 자신의 자서전이다.

열전 70권의 목차를 겸하여 싣는다.

<태사공자서j>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신이다

-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http://blog.paran.com/kydong/27080118

사마천의 주유천하

- 태사공자서

http://blog.paran.com/kydong/27080158

이것은 천명이로다 !

- 태사공자서3

http://blog.paran.com/kydong/27080250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했다

- 태사공자서 4

http://blog.paran.com/kydong/27080372

이것은 나의 죄로다! -발분의 정신

- 태사공자서 5

http://blog.paran.com/kydong/27080493

1050. 維彼奔義(유피분의)

오로지 그들만은 의를 추구하여

1051. 讓國餓死(양국아사),

나라의 군주 자리도 마다하고 결국은 굶어 죽었으니

1052. 天下稱之(천하칭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1053. 作<伯夷列傳>第一(작<백이열전>제1)

이에 <백이열전>제일을 지었다.

▶백이(伯夷)/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는 형이고 숙제는 동생으로 지금의 천진시 복쪽의 창려(昌黎)시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군주가 차자인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생전에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백이가 자기 부친의 뜻을 알고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 주기 위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숙제도 형을 제치고 동생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왕자리에 앉지 않고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후 두 사람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하의 나라가 주인 되는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며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비록 곡식일지라도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먹지 않고 고사와 고비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다.

1054. 晏子儉矣(안자검의),

안자(晏子) 평중(平仲)은 검소했으며

1055. 夷吾則奢(이오즉사);

관자(管子) 이오(夷吾)는 사치하여 두 사람은 서로 행하는 바가 달랐으나

1056. 齊桓以覇(제환이퍠),

이오는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1057. 景公以治(경공이치).

평중은 제경공으로 하여금 치세를 이루게 만들었다.

1058. 作<管晏列傳>第二(작<관안열전)제2)

이에 <관안열전>제이를 지었다.

1059. 李耳無爲自化(이이무위자화),

노자(老子) 이이(李耳)는 무위(無爲)를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하게 만들게 하고

▶무위(無爲)/ 도가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060. 淸淨自正(청정자정);

마음을 깨끗하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마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1061. 韓非揣事情(한비췌사정),

한비자는 각기 일마다의 정황을 헤아려

1062.循埶理(순세리).

세력과 도리가 움직이는 이치에 따랐다.

1063. 作<老子韓非列傳>第三(작<노자한비열전>제3)

이에 <노자한비열전>제삼을 짓는다.

1064. 古王者而有<司馬法>(고왕자이유<사마법>)

옛날 왕들에게도 <사마법>이라고 있었으나

1065. 穰苴能申明之(앙저능신명지).

사마양저(司馬穰苴)가 그 병법의 쓰임새 넓히고 분명히 밝혔다.

1066. 作<司馬穰苴列傳>第四(작<사마양저열전>제4)

이에 <사마양저열전>제사를 지었다.

1067.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비신렴이용불능전명논검),

신(信), 염(廉), 인(仁), 용(勇)이 아니고는 병법과 검술에 대해 논할 수 없으며

1068. 與道同符(여도동부),

부절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맞아야

1069. 內可以治身(내가이치신),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1070. 外可以應變(외가이응변),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1071. 君子比德焉(군자비덕언).

군자가 이것에 더하여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덕이라고 했다.

1072. 作<孫子吳起列傳>第五(작<손자오기열전>제5).

이에< 손자오기열전>제오를 지었다.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1075. 尙旣匡夫(상기광부),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1076. 伍員奔吳(오원분오),

그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달아나 그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1077. 作<伍子胥列傳>第六(작<오자서열전>제6)

이에 <오자서열전>제육을 지었다.

1078. 孔氏述文(공씨술문),

공자는 학문과 문학을 논하고

1079. 弟子興業(제자흥업),

그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일으켰다.

1080. 咸爲師傅(함위사부),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1081. 崇仁厲義(숭인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1082. 作<仲尼弟子列傳>第七(작<중니제자열전>제7)

이에 <중니제자열전>제칠을 지었다.

1083.鞅去衛適秦(앙거위적진),

상앙은 위(衛) 땅을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1084. 能明其術(능명기술),

그가 배운 술법을 능히 펼칠 수 있어

1085. 强覇孝公(강패효공),

진효공(秦孝公)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1086. 後世遵其法(후세준기법).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높였다.

1087. 作<商君列傳>第八(작<상군열전>제8)

이에 <상군열전>제팔을 지었다.

1088. 天下患衡秦毋 (천하환형진무염),

천하가 근심하고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강포함이었으나

1089. 而蘇子能存諸侯(이소자능존제후),

소진은 능히 제후국들을 존립하게 하고

1090. 約從以抑貪强(약종이억탐강).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러운 진나라를 제어 하였다.

1091. 作<蘇秦列傳>第九(작<소진열전>제9)

이에 <소진열전>제구를 짓는다.

1092. 六國旣宗親(육국기종친),

육귝이 서로 합종을 맺어 친하게 지내게 되자

1093. 而張儀能明其說(이장의능명기설),

장의는 그 잘못을 능히 지적할 수 있어

1094. 復散解諸侯(복산해제후).

다시 합종책을 깨고 제후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095. 作<張儀列傳>第十(작<장의열전>제10)

이에 <장의열전>제십을 짓는다.

1096. 秦所以東攘雄諸侯(진소이동양웅제후),

진나라가 동쪽의 제후들을 물리치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1097. 樗里, 甘茂之策(저리, 감무지책).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계책 덕분이었다.

1098. 作<樗里甘茂列傳>第十一(작<저리감무열전>제11)

이에 <저리감무열전>제 십일을 지었다.

1099. 苞河山(포하산),

하수와 화산을 차지하고

1100. 圍大梁(위대량),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1101. 使諸侯斂手而事秦者(사제후렴수이사진자),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비비며 진나라를 받들게 한 것은

1102. 魏冉之功(위염지공).

위염(魏冉)의 공이다.

1103. 作<穰侯列傳>第十二(작<양후열전>제12)

이에 <양후열전>제십이를 지었다.

1104. 南拔鄢郢 (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鄢都)를 함락시키고

1105. 北摧長平(북최장평),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1106. 遂圍邯鄲(수위한단),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1107. 武安爲率(무안위솔);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108. 破荊滅趙(파형멸조),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1109. 王翦之計(왕전지계),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1110. 作<白起王翦列傳>第十三.(작<백기왕전열전>제13)

이에 <백기왕전열전>제십삼을 지었다.

1111. 獵儒墨之遺文(엽유묵지유문),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남긴 글을 섭렵한 맹자는

1112. 明禮義之統紀(명례의지통기),

예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기강을 밝혔고

1113. 絶惠王利端(절혜왕리단),

양혜왕(梁惠王)의 이익에만 집착한 마음을 끊게 만들어

1114. 列往世興衰(열왕세흥쇠).

지난 옛날의 흥망성쇠를 열거했다.

1115. 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작<맹자순경열전>제14 )

이에 <맹자순경열전>제십사를 지었다.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설(薛) 땅으로 모여들었다.

▶설(薛)/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 위치했던 제나라 성읍으로 맹상군(孟嘗君)의 봉읍이었다.

1118. 爲齊扞楚魏(위제한초위).

그는 그 선비들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이었다.

1119. 作<孟嘗君列傳>第十五(작<맹상군열전>제15)

이에 <맹상군열전>제십오를 지었다.

1120. 爭馮亭以權(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여초이구한단지위),

초나라로 가서 구원군을 얻어 한단의 포위를 풀고,

1122. 使其君復稱于諸侯(가기군복칭우제후).

그 군주로 하여금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드높이게 했다.

1124. 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작<평원군우경열전>제16)

그래서 <평원군우경열전> 십육을 지었다.

1125.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1126. 賢能詘于不肖(현능굴우불초),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굽혔으니

1127. 唯信陵君爲能行之(유신릉군위능행지).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1128. 作<魏公子列傳>第十七(작<위공자열전>제17)

그래서 <위공자열전>제십칠을 지었다.

1129. 以身徇君(이신순군),

그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1130. 遂脫强秦(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터 고열왕을 빼내었고

1131. 使馳說之士南鄕走楚者(사치설지사만향초자),

유세하던 선비들을 남쪽의 초나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1132. 黃歇之義(황헐지의).

황헐의 의로운 마음에서 였다.

1133. 作<春信君列傳>第十八(작<춘신군열전>제18)

이에 <춘신군열전>제십팔을 짓는다

1134. 能忍卼於魏齊(능인구우위제),

능히 위제(魏齊)로부터 당한 굴육을 참아내고

1135. 而信威于强秦(이신위우강진);

강포한 진나라에서 신임을 받아 위엄을 떨쳤다.

1136. 推賢讓位(추현양위),

이어서 물러날 때가 되자 어진 사람을 대신 추천하고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니

1137. 二子有之(이자유지).

1138. 作<范睢蔡澤列傳>第十九(작<범수채택열전>제19)

그래서<범수채택열전>제십구를 지었다.

1139. 率行其謀(솔행기모),

군사를 일으켜 계책에 따라 행하였으며

1140. 連五國兵(연오국병),

이웃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연계하여

1141. 爲弱燕報强齊之仇(위약연보강진지구),

국력이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성한 제나라에 원수를 갚아

1142. 雪其先君之恥(설기선군지치).

그 모시선 군주의 치욕을 씻었다.

1143. 作<樂毅列傳>第二十(작<악의열전>제20)

그래서 <악의열전>제이십을 지었다.

1144. 能信意强秦(능신의강진),

강포한 진나라 왕에게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었고

1145. 而屈體廉子(이굴체염자),

또한 염파에게는 능히 몸을 굽혀

1146. 用徇其君(용순기군),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게끔 하였다.

1147. 俱重于諸侯(구중우제후).

이윽고 그 두 사람은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중시되었다.

1148. 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작<염파인상여열전>제21)

이에<염파인상여열전>제이십일을 지었다.

1149. 湣王旣失臨淄而奔莒(민왕기실임치이분거),

민왕이 이미 나라 임치성을 빼앗기고 거(莒) 땅으로 도망쳤다.

1150. 唯田單用卽墨破走騎劫(유전단용즉묵파주기겁),

그러나 전단만이 즉묵을 굳게 지키다가 연나라 장수 기겁(騎劫)을 격파하여

1151. 遂存社稷(수존사직).

결국은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했다.

1152. 作<田單列傳>第二十二(작<전단열전>제22)

이에<전단열전>제이십이를 지었다.

1153. 能說詭說解患于圍城(능설궤설해환우위성),

달변과 궤변으로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된 성의 포위망을 풀고

1154. 輕爵祿(경작록),

작위에 봉록도 개의치 않았으며

1155. 樂肆志(악사지).

단지 자기들의 뜻한 바를 성취한것 만을 즐거워하였다.

1156. 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작<노중련추양열전>제23)

이에 <노중련추양열전> 제이십삼을 지었다.

1157. 作辭以諷諫(이사이풍간),

초사(楚辭)라는 시부를 창조하여 정치를 풍자하여 간하고

1158. 連類以爭義(연류이쟁의),

그와 비슷한 것들을 비유함으로써 의로운 일을 주장했다.

1159. <離騷>有之(<이소>유지).

그가 지은 <이소>라는 시가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

1160. 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작<굴원가생열전>제24)

그래서 <굴원가생열전>제이십사를 지었다.

1161. 結子楚親(결자초친),

조나라의 포로가 된 자초(子楚)와 가까워져 지내더니

1162. 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사제후지사비연쟁입사진).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진나라에 들어가 모시도록 했다.

1163. 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작<여불위열전>제25)

<여불위열전>제이십오를 지었다.

1164. 曹子匕首(조자비수),

조말(曺沫)은 비수를 가슴에 품고 회맹장에 들어가

1165. 魯獲其田(노획기전),

제환공을 위협하여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되찾고

1166. 齊明其信(제명기신);

제환공으로 하여금 그 말을 지켜 신의라는 것을 밝히게 했으며

1167. 禮讓義不爲二心(예양의불위이심).

예양은 의를 지켜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1168. <刺客列傳>第二十六(작<자객열전>제26)

이에 <자객열전>제이십육을 지었다.

1169. 能明其畵(능명기화),

진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듯 그 계책을 명확히 세웠고

1170. 因時推秦(인시추진),

시의에 맞게 시행하였다.

1171. 遂得意于海內(수득의우해내),

결국은 그는 해내에서 뜻을 얻은

1172. 斯爲謀首(사위모수).

진나라 참모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173. 作<李斯列傳>第二十七(작<이사열전>제27)

<이사열전>제이십칠을 지었다.

1174. 爲秦開地益衆(위진개지익중),

진나라를 위해 영토를 더욱 넓혀 백성들의 수효를 증가시켰고

1175. 北靡匈奴(북미흉노),

북으로는 흉노를 막았으며

1176. 据河爲塞(거하위색),

하수에 의지해서는 요새를 쌓았다.

1177. 因山爲固(인산위고),

견고한 산악의 험지를 이용하여

1178. 建楡中(건유중).

유중을 건설했다.

▶유중(楡中)/고대의 지명으로

1179. 作<蒙恬列傳>第二十八(작<몽염열전>제28)

<몽염열전>제이십팔을 지었다.

1180. 塡趙塞常山以廣河內(전조색상한이광하내),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常山)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윽고 그 세력을 하내군(河內郡)까지 넓혀

▶상산(常山)/ 한나라 초기에 설치한 군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하(唐河) 이남과 내구(內丘) 이북......

▶하내군(河內郡)/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과 급현(汲縣) 서쪽의 땅으로 한(漢)과 초(楚)가 다툴 때 중립지역을 두기 위해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1181. 弱楚權(약초권),

이윽고 초나라의 세력을 약화시켜

1182. 明漢王之信于天下(명한왕지신우천하).

한왕(漢王)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1183. 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작<장이진여열전>제29).

<장이진여열전> 제이십구를 지었다.

1184. 收西河(수서하),

위표(魏豹)는 서하(西河)와

1185. 上黨之兵(상당지병),

상당의 병사들을 이끌고

1186. 衆至彭城(중지팽성);

팽성으로 달려가 한왕(漢王)을 도왔다.

1187. 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월지침략양지이고항우).

팽월(彭越)은 양(梁)을 공격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1188. 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작<위표팽월열전>30)

이에 <위표팽월열전> 제삼십을 지었다.

1189. 以淮南叛楚歸漢(이회남반초귀한),

경포는 회남의 땅을 차지했다가 초나라를 반하고 한나라로 돌아섰으며

1190. 漢用得大司馬殷(한용득대사마은),

한나라는 그를 이용하여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얻어서

1191. 卒破子羽于垓下(졸파자우우해하).

결국은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했다.

▶해하(垓下)/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靈壁縣) 남쪽에 있던 전적지로 한신이 이끄는 한군이 항우의 초군을 격파하여 중국은 유방이 차지하게 되었다.

1192. 作<黥布列傳>第三十一(작<경포열전>제31)

이에 <경포열전> 제삼십일을 지었다.

1193. 楚人迫我京索(초인박아경색),

초나라가 한나라를 경성(京城)과 색성(索城)에서 압박할 때

1194. 而信拔魏趙(이신발위조),

한신(韓信)은 그 뒤를 돌아 위(魏)와 조(趙)를 점령하고

1195. 定燕齊(정연제),

다시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했다.

1196. 使漢三分天下有其二(사한삼분천하유기이),

천하는 한신에 의해 삼 분 되었으나 그 중 하나를 한나라에 바쳐 한나라는 그 둘을 차지하게 되어

1197. 以滅項籍(이멸항적).

그 힘으로써 항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1198. 作<淮陰侯列傳>第三十二(작<회음후열전>제32)

<회음후열전> 제삼십이를 지었다.

1199. 楚漢相距鞏洛(초한상거공락),

초나라와 한나라가 공성(鞏城)과 낙읍(洛邑)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1200. 而韓信爲塡潁川(이한신위전영천),

한왕 신(信)은 영천(潁川)의 길을 메워 퇴로를 차단하고

1201. 盧綰絶籍糧饗(노관절적양향).

노관은 항우의 양도를 끊었다.

1202. 作<韓信盧綰列傳>第三十三(작<한신노관열전>제33)

<한신노관열전> 제 삼십삼을 지었다.

1203. 諸侯畔項王(제후반항왕),

제후들이 항우를 배반했을 때

1204. 唯齊連子羽城陽(유제연자우성양),

제왕만이 유독 성양에 있으면서 항우와 연계하였다.

1205. 漢得以間遂入彭城(한득이간수입팽성).

한왕은 이 틈을 타서 즉시 팽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206. 作<田儋列傳>第三十四(작<전담열전>제34)

이에 <전담열전> 제삼십사를 지었다.

1207. 攻城野戰(공성야전),

성을 공략하고 들판에서 적군과 싸움에 임하여

1208. 獲功歸報(획공귀보),

공을 세우고 돌아와 첩보를 전하는데는

1209. 噲, 商有力焉(쾌, 상유력언),

번쾌(樊噲)와 역상(酈商)이 제일 힘을 발휘했다.

1210. 非獨鞭策(비독편책),

그들은 단지 싸움을 위해 말채찍을 잡고 달렸을 뿐만 아니라

1211. 又與之脫難(우여지탈난).

한왕과 함께 위난을 같이 당하다가 벗어나기도 했다.

1212. 作<樊酈列傳>第三十五(작<번역열전>제35)

<번역열전>제삼십오를 지었다.

1213. 漢旣初定(한기초정),

한나라가 서고 처음으로 안정이 되었으나

1214. 文理未明(문리미명),

문물은 밝히지 못했다.

1215. 蒼爲主計(창위주계),

장창(張蒼)이 주계(主計)가 되어

1216. 整齊度量(정제도량),

도량형을 정비하여 통일하고

1217. 序律歷(서율력).

법률과 역법을 바로 잡았다.

1218. 作<張丞相列傳>第三十六(작<장승상열전>제36)

<장승상열전>제삼십육을 지었다.

1219. 結言通使(결언통사),

말로서 결맹을 맺고 사신이 되어 통호하여

1220. 約懷諸侯(약회제후);

제후들과 조약을 맺어 품에 안았다.

1221. 諸侯咸親(제후함친),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와 친해졌으며

1222. 歸漢爲藩輔(귀한위번보).

결국은 귀속되어 번신(藩臣)과 보신(輔臣)이 되었다.

1223. 作<酈生陸賈列傳>第三十七(작<역생육가열전>제37)

<역생유가열전>제삼십칠을 짓는다.

▶역생( 生)/ 진한(秦漢) 교체기 지금의 하남성 서남부에 있던 진류(陳留) 고양향(高陽鄕)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을 찾아가 계책을 바쳐 진류(陳劉)를 쳐부수고 광야군(廣野郡)에 봉해졌다. 초한 전쟁 동안에 그는 제왕 전광(田廣)에게 유세하여 한나라에 귀속시켰으나, 이어서 한신(韓信)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제왕 전광(田廣)은 역생을 끓는 물에 삶아 죽였다. 육가(陸賈)는 초나라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따라 다니며 변설로써 이름을 얻었다. 한고조 11년 남월왕(南越王) 조타(趙 )를 설득하여 한나라를 섬기게 하여 한나라 황제의 위엄을 남해(南海)에까지 미치게 했다고 해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1224. 欲詳知秦楚之事(욕상지진초지사),

진나라 말기 한과 초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알고 싶다면

1225. 維周緤常從高祖(유주설상종고조),

오로지 주설만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고조 곁을 붙어 다니며

1226. 平定諸侯(평정제후).

제후들을 평정한 것을 보았다.

1227. 作<傅靳蒯成列傳>第三十八(작<부근귀성열전>제38)

<부근귀성열전>제삼십팔을 지었다.

1228. 徒强族(도강족),

강성한 족속들을 다른 곳으로 소개시키고

1229. 都關中(도관중),

관중에 도읍을 정했으며

1230. 和約匈奴(화약흉노);

흉노와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1231. 明朝廷禮(명조정례),

조정에 의례를 갖추어

1232. 次宗廟儀法(차종묘의법).

종묘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법으로 정해 황실의 존귀함을 높였다.

1233. 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작<유경숙손통열전>제39)

<유경숙손통열전> 제삼십구를 지었다.

1234. 能摧剛作柔(능최강작유),

계포(季布)는 강직한 성격을 유순하게 고칠 수 있어

1235. 卒爲列臣(졸위열신);

마침내 한나라의 열후에 반열에 설 수 있었고

1236. 欒公不劫于勢而倍死(란공불겁우세이배사).

란포(欒布)는 한고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다.

1237. 作<季布欒布列傳>第四十(작<계포난포열전>제40)

<계포란포열전>제사십을 지었다.

1238. 敢犯顔色以達主義(감범안생이달주의),

감히 천자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펼쳤으니

1239. 不顧其身(불고기신),

이는 자기 일신상의 몸도 돌보지 않으며

1240. 爲國家樹長畵(위국가수장화).

나라를 위해 백년대계의 계책을 세운 것이다.

1241. 作<袁盎晁錯列傳>第四十一(작<원앙조착열전>제41)

<원앙조착열전>제사십일을 지었다.

1242. 守法不失大理(수법불실대리),

법을 지켰으나 대의를 잃지 않았으며

1243. 言古賢人(언고현인),

옛날 현인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1244. 增主之明(증주지명).

자기 군주의 지혜를 더욱 밝게 만들었다.

1245. 作<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작<장석지풍당열전>제42)

<장석지풍당열전> 제사십이를 지었다.

1246. 敦厚慈孝(돈후자효),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자애롭고 효성스러웠다.

1247. 訥于言(눌우언),

말을 함에는 어눌했으나

1248. 敏于行(민우행),

행동을 옮김에는 재빨라

1249. 務在鞠躬(무재국궁),

몸을 낮춰 남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여

1250. 君子長者(군자장자).

군자나 장자의 풍모를 갖췄다.

1251. 作<萬石張叔列傳>第四十三(작<만석장숙열전>제43)

<만석장숙열전>제사십삼을 지었다.

1252. 守節切直(수절절직),

절개를 지켜 강직하며

1253. 義足以言廉(의족이언렴),

의기는 족히 청렴함을 말할 수 있었다.

1254. 行足以厲賢(행족이려현),

그 행동은 족히 어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만 했다.

1255. 任重權不可以非里撓(임중권불가이비리효효).

막중한 자리에 임명되어도 옳지 않으면 행하지 않았다.

1256. 作<田叔列傳>第四十四(작<전숙열전>제44)

<전숙열전>제사삽사를 지었다.

1257. 扁鵲言醫(편작언의),

편작은 의술을 말하여

1258. 爲方者宗(위방자종),

의자(醫者)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1259. 守數精明(수수정명);

그의 의술은 정밀하고 고명하여

1260. 後世(修)(循)序(후세수순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 치료의 순서를 따랐을 뿐

1261. 弗能易也(불능이야),

결코 바꿀 수 없었다.

1262. 而倉公可謂近之矣(이창공가위근지의).

그러나 창공 한 사람만이 편작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으니

1263. 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작<편작창공열전>제45).

이에 <편작창공열전>제사십오를 지었다.

1264. 維仲之省(유중지성),

유중(劉仲)은 흉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대왕의 자리에 쫓겨났으나

▶유중(劉仲)/ 한고조 유방의 형이다. 한나라가 서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합양후( 陽侯)에 봉해졌다.

1265. 厥濞王吳(궐비왕오),

그 아들 유비(劉濞)는 오왕에 봉해졌다.

1266. 遭漢初定(조한초정),

한나라가 처음 서고 나라의 안정을 취해가고 있는 와중에

1267. 以塡撫江淮之間(이전무강회지간).

그는 강수와 회수 사이의 제후국들을 진무하였다.

1268. 作<吳王濞列傳>第四十六(작<오왕비열전>제46)

<오왕비열전>제사십육을 지었다.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嬰賢而喜士(종속유영현이희사),

황실의 외척들 중에 오직 두영(竇嬰)만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으며

▶두영(竇嬰)/두태후(竇太后)의 조카로 오초칠국의 란 당시에 대장군에 임명되어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에 대항했다. 칠국의 란이 진압되자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무제 즉위 초에 승상에 올라 유학을 숭상하고 도학을 배척하여 두태후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이어서 죄를 얻어 목숨을 잃었다.

1271. 士鄕之(사향지),

선비들의 마음도 역시 그에게 쏠렸다.

1272. 率師抗山東滎陽(솔사항산동형양).

군사를 인솔하고 나아가 산동의 형양(滎陽)에서 오초의 반란군을 막았다.

1273.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작<위기무안열전>제47)

이에 <위기무안군열전> 제사십칠을 지었다.

1274. 智足以應近世之變(지족이응근세지변),

지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았고

1275. 寬足用以得人(관족용이득인).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족했다.

1276. 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작<한장유열전>제48)

<한장유열전>제사십팔을 지었다.

▶한장유(韓長孺)/지금의 하남성 민권현(民權顯)인 성안(成安) 사람으로 이름은 안국(安國)이다. 한나라 초기에는 양효왕 밑에서 중대부를 지냈으나 오초칠국의 란 때 오나라의 군사를 격퇴한 공로를 세워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무제 때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위(衛尉)의 직을 지냈다. 후에 재관장군(材官將軍)에 임명되어 흉노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싸움에 패하고 이어서 병사했다.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했다.

1279. 號令不煩(호령불번),

또한 호령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여

1280. 師徒鄕之(사도향지).

장수들이나 군졸들의 마음을 얻었다.

1281.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작<이장군열전>제9)

그래서 <이장군열전> 제사십구를 지었다.

1282. 自三代以來(자삼대이래),

삼대이래로

1283. 匈奴常爲中國患害(흉노상위중국환해);

흉노는 항상 중국에 해를 끼치는 우환의 대상이었다.

1284. 欲知强弱之時(욕지강약지시),

흉노의 세가 강하고 약할 때의 시기를 알기 위해

1285. 設備征討(몰비정토),

만반의 준비 끝에 정벌에 나섰다.

1286. 作<匈奴列傳>第五十(작<흉노열전>제50).

이에 <흉노열전>제오십을 지었다.

1287. 直曲塞(직곡색),

구불구불한 변새의 길을 똑바르게 했으며

1288. 廣河南(광하남),

하남의 땅을 넓혔다.

1289. 破祁連(파기련),

또한 기련산에서 적을 격파하여

1290. 通西國(통서국),

서쪽의 나라들과 길을 통하게 만들었으며

1291. 靡北胡(미북호).

북방의 오랑캐의 남하를 저지했다.

1292. 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작<위장군표기열전>제51)

<위장군표기열전>제오십일을 지었다.

1293. 大臣宗室以侈靡相高(대신종실이치미상고),

조정대신들이건 황실의 종친들이건 서로 다투어 사치를 일삼았으나

1294. 唯弘用節衣食爲百吏先(유홍용절의식위백리선).

오로지 공손홍만이 의식을 절약하여 백관들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1295.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작<평진후열전>제52)

<평진후열전>제오십이를 지었다.

1296. 漢旣平中國(한기평중국),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1297. 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이타능집양월이보남번),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는 양월(楊越)에 흩어진 세력들을 능히 수습할 수 있어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의 번국(藩國)이 되었으며

1298. 納貢職(납공직).

종실에 공물을 바쳤다.

1299. 作<南越列傳>第五十三(작<남월열전>제53)

이에 <남월열전>제오십삼을 지었다.

1300.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1301. 甌人斬濞(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머리를 베어 한나라에 바쳤다.

1302. 葆守封禺爲臣(보수봉우위신).

이어서 봉우산에 봉해져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1303. 作<東越列傳>第五十四(작<동월열전>제54)

이에 <동월열전>제오십사를 지었다.

1304. 燕丹散亂遼間(연단산란요간),

연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진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달아난 틈을 이용하여

1305. 滿收其亡民(만수기망민),

위만은 그 유민들을 수습하여

1306. 厥聚海東(궐취해동),

해동으로 데리고 가서

1307. 以集眞藩(이집진번),

진번 등의 땅을 안정시키고

1308. 葆塞爲外臣(보색위외신).

한나라 황실의 외번을 지키는 외신이 되었다.

1309. 作<朝鮮列傳>第五十五(작<조선열전>제55)

<조선열전>제오십오를 지었다.

1310. 唐蒙使略通夜郞(당몽사략농야랑)

당몽(唐蒙)을 사자로 보내 야랑(夜郞) 국과 통호하고

1311. 而邛笮之君請爲內臣受吏(이공착지군청위내신수이).

공(邛)과 착(笮)의 군장들이 내신이 되어 한나라에서 보낸 관리들을 받아 들였다.

1312. 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작<서남이열전)제56).

<서남이열전>제오십육을 지었다.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대인>부설),

<대인부(大人賦)>에 실린 글은

1315. 靡麗多誇(미려다과),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1316. 然其指風諫(연기지풍간),

그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를 풍자하며 간언을 올려

1317. 歸于無爲(귀우무위).

무위(無爲)로 귀의하려는 노자의 사상에 귀의하려는 생각에서 였다.

1318. 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작<사마상여열전>제57)

<사마상여열전> 제오십칠을 지었다.

1319. 黥布叛逆(경포반역),

경포가 반역을 일으키자

1320. 子長國之(자장국지),

고조의 아들 유장(劉長)이 그 땅을 봉지로 삼고

▶유장(劉長)

1321. 以塡江淮之南(이전강회지남),

강회의 남쪽을 평정했다.

1322. 安剽楚庶民(안표초서민).

유안(劉安)은 사납기로 유명한 초나라 백성들을 차지했다.

▶유안(劉安)

1323.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작<회남형산열전>제58)

<회남형산열전> 제오십팔을 지었다.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이 세운 공로와 재능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1326. 百姓無稱(백성무칭),

그들은 또한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공적에 대한 칭찬도,

1327. 亦無過行(역무과행).

그들의 과실에 대한 비난도 받지 않는다.

1328. 作<循吏列傳>第五十九(작<둔리열전>제59)

<둔리열전>제오십구를 지었다.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허튼 소리를 하지 못했다.

1331. 長孺矜焉(장유긍언);

장유(長孺)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유(長孺)/ 급암(汲 )의 자(字)이다.

1332. 好薦人(호천인),

사람을 천거하기를 좋아했으며,

1333. 稱長者(칭장자),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라고 칭송을 받은 것은

1334. 壯有漑(장유개).

정장(鄭壯)에게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335. 作<汲鄭列傳>第六十(작<급정열전>제60).

<급정열전>제육십을 지었다.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1338. 唯建元元狩之間(유건원원수지간),

단지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연간에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한무제 때의 연호로 건원은 140년부터 135년 원수는 기원전 122년부터 115년까지임. 따라 건원과 원수지간이 함은 기원전 140년부터 115년까지의 기간을 말함.

1339. 文辭粲如也(문사찬여야).

학문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

1340. 作<儒林列傳>第六十一(작<유림열전>제61).

<유림열전>제육십일을 지었다.

1341. 民倍本多巧(민배본다교),

백성들이 본분을 잃고 간사스럽게 되며

1342. 奸軌弄法(간궤농법),

간교함을 일삼아 법률을 농단하니

1343. 善人不能化(선인불능화),

아무리 선인들일지라도 그들을 교화할 수 없었다.

1344. 唯一切嚴削爲能齊之(유일절암삭위능제지).

오직 모든 것을 엄혹하게 다스림으로서 그들을 능히 다스릴 수 있었다.

1345. 作<酷吏列傳>第六十二(작<혹리열전>제62)

<혹리열전>제 육십이를 지었다.

1346. 漢旣通使大夏(한기통사대하),

한나라가 서자 처음으로 대하(大夏)에 사절을 보내

1347, 而西極遠蠻(이서극원만),

까마득하게 먼 서쪽의 오랑캐가

1348. 引領內鄕(인령내향),

모두 중국의 안쪽으로 목을 늘이고

1349. 欲觀中國(욕관중국)

중원의 땅을 살펴보고자 했다.

1350. 作<大宛列傳>第六十三(작<대완열전>제63)

<대완열전>제육십삼을 지었다.

1351. 救人于厄(구인우액),

위난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1352. 振人不贍(진인불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니

1353. 仁者有乎(인자유호)

인자라고 불릴만 하다.

1354. 不旣信(불기신),

또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1355. 不倍言(불배언),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지 않으니

1356. 義者有取焉(의자유취언),

이 역시 의로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357. 作<游俠列傳>第六十四(작<유협열전>제64)

<유협열전>제육십사를 지었다.

1358. 夫使人君能說主耳目(부사인군능설주이목),

군주를 모시고 능히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며

1359. 和主顔色(화주안색),

그 임금의 얼굴에 즐거움이 깃들게 하여

1360. 而獲親近(이획친근),

그 군주를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1361. 非獨色愛(비독색애),

그들이 단지 미색으로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1362. 能亦各有所長(능역각유소장).

그들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363. 作<佞幸列傳>第六十五(작<영행열전>제65).

<영행열전>제육십오를 지었다.

1365. 不流世俗(불류세속),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1365. 不爭勢利(불쟁세리),

권세와 이익을 쫓지 않았으며

1366. 上下無所凝滯(상하무소응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걸림이 없이

1367. 人莫之害(인막지해),

아무에게나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은

1368. 以道之用(이도지용).

그것도 하나의 도(道)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1369. 作<滑稽列傳>第六十六(작<골계열전>제66)

<활계열전>제육십육을 지었다.

1370. 齊,楚, 秦, 趙爲日者(제,초,진,조위일자)

제, 초, 진, 조의 점복가들은

1371. 各有俗所用(각유속소용).

각기 그 나라의 풍속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방법이 이었다.

1372. 欲循觀其大旨(욕둔관기대지)

그들의 대체적인 방법을 살펴보고자

1373. 作<日者列傳>第六十七(작<일자열전>제67)

<일자열전>제육십칠을 지었다.

1374. 三王不同龜(삼왕부동귀),

삼대에 있어서 거북등으로 점을 치는 방법은 서로 달랐으며

1375. 四夷各異卜(사이각이),

주변의 사이들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점을 쳤다.

1376. 然各以決吉凶(연각이결길흉).

그러나 길흉화복은 각기 자기들 방법대로 판단하였다.

1377. 略窺其要(략규기요),

그래서 대략 그 요지를 살펴보기 위해

1378. 作<龜策列傳>第六十八(작<귀책열전>제68)

<귀책열전>제육십팔을 지었다.

1379. 布衣匹夫之人(포의필부지인),

포의를 입은 일반 백성 신분으로

1380. 不害于政(불해우정),

정치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1381. 不妨百姓(불방백성),

귀족들의 일에 방해를 하지 않으며

1382. 取與以時而息財富(취여이시이식재부),

시를 맞추어 재산을 증식하여 부를 쌓았다.

1382. 智者有采焉(지자유채언).

지혜있는 자라면 이것들로부터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1383. 作<貨殖列傳>第六十九(작<화식열전>제69).

<화식열전>제육십구를 지었다.

1384. 維我漢繼五帝末流(유아한계오제말류),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으며

1385. 接三代(統)(絶)業(접삼대(통)(절)업).

삼대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1386. 周道廢(주도폐),

주나라의 도가 폐하게 되니

1387. 秦拔去古文(주발거고문),

진나라가 서서 옛날의 고적들을 없애고

1388. 焚滅<詩><書>(분멸<시><서>),

<시(詩)>와 <서(書)>를 불살랐다.

1389. 故明堂石室金櫃玉版圖籍散亂(고명당석실금궤옥판도적산란).

그 결과 명당(明堂)의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금궤와 옥판의 지도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엉망이 되어버렸다.

1390. 于是漢興(우시한흥),

이어서 한나라가 흥기하자

1391. 蕭何次律令(소하차율령),

소하가 율령을 차례로 발하고

1392. 韓信申軍法(한신신군법),

한신(韓信)은 군법을 밝혔으며

1393. 張蒼爲章程(장창위장정),

장창은 법규를,

1394. 叔孫通定禮儀(숙손통정예의),

그리고 숙손통은 예의를 정했다.

1395. 則文學彬彬稍進(즉문학빈빈초진),

이로써 한나라는 문학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고

1396. <詩><書>往往間出矣(<시><서>왕왕간출의).

<시(詩)>와 <서(書)>가 세상에 나돌기 시작했다.

1397. 自曹參盖公言黃老(자조참천개공언황노).

조참은 개공을 무제에게 천거하여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398. 而賈生(이가생),

또한 가생과

1399. 晁錯明申, 商(조착명신, 상),

조착은 신자와 상군의 법가사상을 밝혔다.

1400. 公孫弘以儒顯(공손홍이유현),

공손홍은 유학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고

1401. 百年之間(백년지간),

그 백년 동안의

1402.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천하유문고사미불필집태사공).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날 전적들이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1403.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태사공잉부자상속찬기직.

태사공의 직책에는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계속해서 임명되었다.

1404. 曰: "於戱 ! (왈 : "어희) !

사마천이 말했다. " 아아!

1405. 余維先人嘗掌斯事(여유선인상장사사),

우리들 선조들께서 이 이일을 일찍이 맡아하여

1406. 顯于唐虞(현우당우),

우임금 때 벌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1407. 至于周(지우주),

주조에 이르러

1408. 復典之(복전지),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1409. 故司馬氏世主天官(고사마씨세주천관).

이런 연고로 사마씨는 대를 이어 천관을 맡아하다가

1410. 至于余乎(지우여호),

이윽고 나에게까지 이른 것인가?

1411. 欽念哉!(흠념재)"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12. 罔羅天下放失舊聞(망라천하방실구문),

이미 없어진 구문들을 천하에서 모아서

1413. 王迹所興(왕적소흥),

왕들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흥함의 처음을 찾고

1414. 原始察終(원시찰종),

끝을 살펴서

1415. 見盛觀衰(견성관쇠),

흥망성쇠를 보고자 하였으며

1416. 論考之行事(논고지행사),

그 일의 진행을 사실적으로 고찰하여

1417. 略推三代(략추삼대),

삼대의 일을 간략히 추정하였으며,

1418. 錄秦漢(록진한),

진한시대의 기록에 유추하여

1419. 上記軒轅(상기헌원),

위로는 황제부터 기록하여

1420. 下至于玆(하지우자),

지금의 금상폐하에 이르기까지

1421. 著十二本紀(저십이본기),

모두 12본기를 지은 것은

1422. 旣科條之矣(기과조지의).

모두 조례를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423. 幷時異世(병시지세),

시대가 같기도 하고, 세대가 다르기도 하여

1424. 年差不明(연차불명),

그 연차가 확실하지 않아

1425. 作十表(작십표).

모두 10개의 연표를 만들었다.

1426. 禮樂損益(예악손익),

예와 악은 없어지고 혹은 더하여지기도 하였으며

1427. 律歷改易(율력개이),

율력은 새로 바뀌어 졌다.

1428. 兵權, 山川, 鬼神(병권, 산천, 귀신),

또한 병사와 권모의 일, 지방제도, 제사에 관한 일

1429. 天人之際(천인지제),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1430. 承敝通變(승폐통변),

그 폐단을 밝혀 변화에 응하게하고자

1431. 作八書(작팔서).

<서(書)> 팔편 을 지었다.

1432. 二十八宿環北辰(이십팔수환북신),

28팔 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있고

1433. 三十輻共一轂 (삼십복공일곡),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한 개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으나

1434. 運行無窮(운행무궁)

그 운행의 법측은 무궁하듯이

1435. 輔拂股肱之臣配焉(보불고굉지신배언),

왕들을 보필하던 고굉지신들을 이것에 빗대어

1436. 忠信行道(충신행도),

충신들이 도를 행하고

1437. 以奉主上(이봉주상),

그 임금을 받든 사람들에 관하여

1438. 作三十世家(작삼십세가).

세가 30편을 지었다.

1439. 扶義俶儻 (부의숙당),

의를 부양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1440. 不令己失時(불령기실시),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1441. 入功名于天下(입공명우천하),

공명을 세상에 세운

1442. 作七十列傳(작칠십열전).

사람들 70명에 대한 열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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