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와 <회사부(懷沙賦)>도 나온다.

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屈原者,名平,楚之同姓也。〔一〕

為楚懷王左徒。〔二〕

博聞彊志,明於治亂,

嫺〔三〕於辭令。

入則與王圖議國事,以出號令;

出則接遇賓客,應對諸侯。

王甚任之。

굴원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나라 왕족 출신이다.

초회왕(B.C.328년- B.C.296년 재위) 때 좌도(佐徒)였다.

위인이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밝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왕과 함께 국사를 논한 후에

호령을 내렸으며

밖으로 나와서는 제후들이 보내는 빈객들을 접대하고

제후들을 상대했다.

이에 왕이 그를 매우 신임했다.

  〔一〕正義屈、景、昭皆楚之族。王逸云:「楚王始都是,生子瑕,受屈為卿,因以為氏。」

  〔二〕正義蓋今(在)左右拾遺之類。   〔三〕集解史記音隱曰:「音閑」。

上官大夫與之同列,爭寵而心害其能。

굴원이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과 같은 반열에 오르자

근상은 초왕의 총애를 차지하고자

마음속으로 굴원의 능력을 시기하여 해치려했다.

懷王使屈原造為憲令,

屈平屬草稿〔一〕未定。

上官大夫見而欲奪之,〔二〕

屈平不與,因讒之曰:

회왕이 굴원에게 명하여 나라의 율령을 제정하라고 했다.

굴원이 율령의 초안을 미처 완성하기 전에 상관대부가 알고

그 일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원이 그 일을 넘겨주지 않자 상관대부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참소했다.

  〔一〕索隱屬音燭。草稿謂創制憲令之本也。漢書作「草具」,崔浩謂發始造端也。

  〔二〕正義王逸云上官靳尚。

「王使屈平為令,眾莫不知,

每一令出,平伐其功,(曰)以為「非我莫能為」也。」

“ 대왕께서 굴원을 시켜 율령을 제정하라고 명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령이 나올 때마다 그는 자기의 공이라고 자랑하며

‘ 내가 아니면 율령을 제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王怒而疏屈平。

屈平疾王聽之不聰也,讒諂之蔽明也,

邪曲之害公也,方正之不容也,

故憂愁幽思而作離騷。

이에 초왕은 노하여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왕이 한쪽의 말만 듣고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것과,

아첨과 모함하는 말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과,

사악하고 비뚤어진 무리가 공명정대한 사람을 해치려는 것과,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우수와 근심에 잠겨 <이소(離疎)>를 지었다.

〔一〕離騷者,猶離憂也。

이소는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음을 말한다.

夫天者,人之始也;

父母者,人之本也。

대저 하늘은 사람의 시초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人窮則反本,故勞苦倦極,未嘗不呼天也;

疾痛慘怛,〔二〕未嘗不呼父母也。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근본을 돌이켜보는 까닭에

힘들고 피곤할 때에 하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참담해지면

부모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屈平正道直行,〔三〕竭忠盡智以事其君,

讒人閒之,可謂窮矣。

굴원은 올바른 도리를 곧게 실천하여

충성을 다 바치고 지혜를 다 발휘하여

그 임금을 섬기었는데,

도리어 군주와 그의 사이가 이간질 당하여,

궁지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信而見疑,忠而被謗,能無怨乎?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았고,

충성을 바쳤으나 비방을 당하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屈平之作離騷,蓋自怨生也。

굴원이 지은 <이소(離騷)>는

본디 이런 원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國風好色而不淫,小雅怨誹而不亂。〔四〕

若離騷者,可謂兼之矣。

<국풍(國風)>은 미인을 읊으면서도 음탕하지 않았고,

<소아(小雅)>는 원망과 비난을 담고 있으나 반란의 내용이 아니었다.

이 이소와 같은 것은 그 두 가지를 다 겸한 것이라고 하겠다.

上稱帝嚳,下道齊桓,

中述湯武,以刺世事。

위로는 제곡(帝嚳)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환공(齊桓公)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에 대해 기술하여

그것으로써 세상일을 풍자한 것이다.

明道德之廣崇,治亂之條貫,

靡不畢見。

도덕의 넓고 높음과

나라의 흥망성쇠의 인과관계를 밝혀

모두 자세히 드러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其文約,其辭微,

其志絜,其行廉,

其稱文小而其指極大,

舉類邇而見義遠。

其志絜,故其稱物芳。

그 문장은 간략하나 자세하고,

그의 정신은 정결하며 그의 행동은 청아하다.

그 문장은 비록 작은 것을 세세하게 묘사했으나

그것이 뜻하는 바는 지극히 크고 깊으며

예로 든 것은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오(深奧)하다.

그의 정신은 고결했음으로

그는 즐겨 그 자신을 향초(香草)로 비유했다.

其行廉,故死而不容自疏。

濯淖〔五〕汙泥〔六〕之中,

그는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죽어서도 소인배들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몸은 진흙 구덩이 속에서 있으나

능히 더러운 것을 씻을 수 있고,

蟬蛻於濁穢,〔七〕

以浮游塵埃之外,不獲世之滋垢,

皭然〔八〕泥而不滓者也。〔九〕

마치 매미가 더러운 오물 속에서 허물을 벗어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듯이

세속의 먼지구덩이 밖으로 헤엄쳐 나와

더러운 세상의 떼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청백하고 고결하여 진흙 속에 있어도

결코 물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推此志也,雖與日月爭光可也。〔一0〕

이에 그의 지조를 추측해 본다면

그는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一〕索隱,亦作「騷」。按:楚詞「」作「騷」,音素刀反。應劭云「離,遭也;騷,憂也」。

又離騷序云「離,別也;騷,愁也」。

  〔二〕正義上七感反,下丁達反。慘,毒也。怛,痛也。

  〔三〕正義寒孟反。   〔四〕正義誹,方畏反。

  〔五〕索隱上音濁,下音鬧。

  〔六〕索隱上音烏故反,下音奴計反。

  〔七〕正義蛻音稅,去皮也,又他臥反。

  〔八〕集解徐廣曰:「皭,疏淨之貌。」索隱皭音自若反。徐廣云「疏淨之貌」。

  〔九〕索隱泥亦音涅,滓亦音淄,又並如字。

  〔一0〕正義言屈平之仕濁世,去其汙垢,在塵埃之外。推此志意,雖與日月爭其光明,斯亦可矣。

屈平既絀,

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一〕

굴원이 배척되어 왕과 사이가 소원해진 뒤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었다.

惠王患之,乃令張儀詳去秦,厚幣委質事楚,曰:

진혜왕(秦惠王)이 이를 근심하여

장의를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을 바치게 하고

위질(委質)의 예를 행하여 초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秦甚憎齊,齊與楚從親,

楚誠能絕齊,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

“ 우리 진나라는 제나라에 많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초나라가 진실로 제나라와 절교를 한다면

우리 진나라는 상오(商於)의 600리 땅을 할양하겠습니다.”

楚懷王貪而信張儀,

遂絕齊,使使如秦受地。張儀詐之曰:

초회왕은 욕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장의의 말을 믿고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한 후에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상오의 땅 600리를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가 사술을 부려 말했다.

「儀與王約六里,不聞六百里。」

“ 이 장의가 초왕과 주기로 한 땅은 6리이지

600리를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楚使怒去,歸告懷王。

懷王怒,大興師伐秦。

秦發兵擊之,

大破楚師於丹、淅,〔二〕斬首八萬,

虜楚將屈,[三]遂取楚之漢中地。[四]

초나라 사자가 화를 내며 돌아와 회왕에게 보고했다.

분노한 회왕이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도 군사를 보내 반격했다.

초군을 단수(丹水)와 석수(淅水)에서 대파한 진군은

그 군사 8만의 목을 베었으며

초장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한중(漢中) 땅을 점령했다.

懷王乃悉發國中兵 以深入擊秦,

戰於藍田。

회왕이 다시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가

남전(藍田)에서 진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魏聞之,襲楚至鄧。[五],

楚兵懼自秦歸。

이에 위나라가 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기습하여 등(鄧)에 이르렀다.

이를 두려워한 초군은 할 수 없이 진나라로부터 회군했다.

而齊竟怒不救楚,楚大困。

합종을 파기한 초나라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제나라는

초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아

이로써 초나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注[一]正義上足松反。

注[二]索隱二水名。謂於丹水之北,淅水之南。丹水﹑淅水皆縣名,在弘農,

所謂丹陽﹑淅。正義丹陽,今枝江故城。

注[三]索隱屈,姓。,名,音蓋也。

注[四]索隱徐廣曰:「楚懷王十六年,張儀來相;十七年,秦敗屈。」正義梁

州。

注[五]索隱按:此鄧在漢水之北,故鄧侯城也。

明年,秦割漢中地 與楚以和。楚王曰:

「不願得地,願得張儀 而甘心焉。」

다음 해에 진나라가 한중의 땅을 떼어 초나라에 돌려주겠다며

강화를 청해왔다. 이에 초회왕이 진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한중의 땅이 아니오.

내가 장의만 얻는다면 그것으로써 매우 만족하겠소.”

張儀聞,乃曰:「

以一儀而當漢中地,臣請往如楚。」

장의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 이 장의 한 사람으로 한중의 땅을 감당할 수 있다면,

제가 초나라에 들어가겠습니다.”

如楚,又因厚幣用事者臣靳尚,

而設詭辯於懷王之寵姬鄭袖。

懷王竟聽鄭袖,復釋去張儀。

이윽고 장의가 초나라에 당도하여

많은 뇌물을 초나라의 권신 근상(靳尙)에게 바쳤다.

근상은 초왕의 총희 정수(鄭袖)로 하여금

궤변으로 초왕을 현혹시키게 했다.

초왕은 정수의 말에 미혹되어

장의를 석방하여 진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是時屈平既疏,不復在位,使於齊,

顧反,諫懷王曰:

「何不殺張儀?」

이때 굴원은 이미 초왕과 사이가 소원하여

관직에 다시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 있었다.

이윽고 제나라에서 돌아온 굴원이 초왕에게 물었다.

“ 어째서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懷王悔,追張儀不及。[一]

회왕이 후회하고

추격군을 보내 장의를 잡으려고 했으나

장의는 멀리 달아난 후였다.

注[一]索隱按:張儀傳無此語也。

其後諸侯共擊楚,大破之,殺其將唐眛。[一]

그 후에 제후들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물리치고 그 대장 당매(唐眛)를 죽였다.

注[一]集解徐廣曰:「二十八年敗唐眛也。」正義眛,莫葛反。

時秦昭王與楚婚,欲與懷王會。懷王欲行,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 소양왕(昭襄王)이 혼인을 맺어

양국이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초회왕과 회합을 갖자고 했다.

屈平曰:

「秦虎狼之國,不可信,不如毋行。」[一]

이에 굴원이 회왕에게 말했다.

“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나라입니다.

결코 믿을 수 없으니 가시면 안 될 것입니다.”

懷王稚子子蘭勸王行:「柰何絕秦歡!」

懷王卒行。

그러나 회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이

“ 어째서 진나라의 호의를 물리치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자

결국은 회왕은 진왕을 만나러갔다.

入武關,秦伏兵絕其後,因留懷王,[二]

以求割地。

회왕이 무관을 통하여 진나라 땅에 들어가자

진나라가 군사를 매복시켜 그 퇴로를 끊고 회왕을 억류시켰다.

진나라는 회왕에게 초나라 땅을 떼어 할양하라고 강요했다.

懷王怒,不聽。

亡走趙,趙不內。

復之秦,竟死於秦 而歸葬。

회왕이 노하여 진나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후에 회왕은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조나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의 후환을 두려워한 조왕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회왕은 다시 진나라에 끌려가

결국은 그곳에서 죽었다.

진나라는 회왕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注[一]索隱按:楚世家昭睢有此言,蓋二人同諫王,故彼此各隨錄之也。

注[二]集解徐廣曰:「三十年入秦。」

長子頃襄王立,[一]以其弟子蘭為令尹。

楚人既咎子蘭 以勸懷王入秦而不反也。

회왕의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고

그의 동생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환국하지 못한 것은

모두 자란의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注[一]索隱名橫。

屈平既嫉之,

雖放流,睠顧楚國,

繫心懷王,不忘欲反,

冀幸君之一悟,

俗之一改也。

굴원도 자란이 행한 옛날 행위에 대해

매우 통탄스럽게 생각했다.

비록 몸은 이미 추방되었음에도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초회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음에

언젠가는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왕이 어느 날 갑자기 깨우쳐서

나쁜 습속이 개량되기를 기대했다.

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

一篇之中三致志焉。

然終無可柰何,故不可以反,

卒以此見懷王之終不悟也。

그는 왕을 모시고 나라를 부흥시켜

쇠퇴해 가는 국세를 역전시켜 보고자

한 편의 시 중에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하여 그 뜻을 전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노력도 모두 허사가 되고

진나라에 들어간 회왕은 돌아오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 회왕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人君無愚智賢不肖,[一]

莫不欲求忠以自為,

舉賢以自佐,

남의 군주가 되는 자는

그 자신이 총명하거나, 우둔하거나,

재주가 있거나, 재주가 없거나를 불문하고

모두가 충신을 찾아 자기를 위하도록 하고

또한 현인을 임용하여 자기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보좌토록 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然亡國破家相隨屬,

而聖君治國累世而不見者,

其所謂忠者不忠,

而所謂賢者不賢也。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가문이 절단 나는 것이 끊이지 않고

성군이 대를 이어 나타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보기 힘든 것은

소위 충신이란 자는 충성을 다하지 않고,

현명하다는 자는 어질지 않은 것에 기인한 것이다.

懷王以不知忠臣之分,

故內惑於鄭袖,外欺於張儀,

疏屈平而信上官大夫﹑令尹子蘭。

회왕도 역시 충신들을 구분하지 못했음으로

안으로는 정수에게 현혹되었고,

밖으로는 장의에게 속임을 당했으며,

충신인 굴원을 멀리하고

탐욕스러운 상관대부 근상(靳尙)과 자란(子蘭)을 가까이 한 것이다.

兵挫地削,亡其六郡,

身客死於秦,為天下笑。

此不知人之禍也。

군사들은 꺾이고 영토는 잠식당해

무려 6개 군에 달하는 영토를 진나라에 빼앗겼으며

자신의 몸은 진나라에 사로잡혀 객사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입은 화인 것이다.

易曰:「井泄不食,[二]為我心惻,[三]可以汲。[四]

王明,並受其福。」[五]

王之不明,豈足福哉![六]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 우물 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은,

이 물은 가히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명철하다면,

또한 그 복을 받는 법이다.”라고 했으니

왕이 밝지 못하니,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注[一]索隱此已下太史公傷懷王之不任賢,信讒而不能反國之論也。

注[二]集解向秀曰:「泄者,浚治去泥濁也。」索隱向秀字子期,晉人,注易。

注[三]集解張璠曰:「可為惻然,傷道未行也。」索隱張璠亦晉人,注易也。

注[四]索隱按:京房易章句言「我道可汲而用也」。

注[五]集解易象曰:「求王明受福也。」索隱按:京房章句曰「上有明王,汲我

道而用之,天下並受其福,故曰『王明並受其福』也。」

注[六]集解徐廣曰:「一云『不足福』。」正義言楚王不明忠臣,豈足受福,故

屈原懷沙自沈。

令尹子蘭聞之大怒,

卒使上官大夫短屈原於頃襄王,

頃襄王怒而遷之。[一]

영윤 자란은 굴원의 그러한 태도를 전해 듣고 대노하여

마침내 상관대부 근상을 시켜 굴원을 경양왕에게 모함했다.

경양왕도 노하여 굴원을 도성 밖으로 쫓아냈다.

注[一]集解離騷序曰:「遷於江南。」

屈原至於江濱,(굴원지어강빈)

굴원이 강수의 강변에 이르자

被髮行吟澤畔。(피발행음택반)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수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배회했다.

顏色憔悴,(안색초췌)

안색은 초췌하고

形容枯槁。(형용고고)

몸은 비쩍 말라 야위어 있었다.

漁父[一]見而問之曰(어부견이문지왈):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보고 물었다.

「子非三閭大夫歟?(자비삼려대부여?)[二]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닌가?

何故而至此?」(하고이지차?)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屈原曰:(굴원왈)

굴원이 대답했다.

「舉世混濁而 我獨清,(거세혼탁이아독청)

온 세상이 모두 탁했으나 나 혼자만은 맑았으며

人皆醉而 我獨醒,(인개취이아독성)

세상 사람들은 모두 취했으나 나 혼자만은 깨어 있었소.

是以見放。」(시이견방)

그래서 나는 추방당했소.

漁父曰:(어부왈)

어부가 말했다.

「夫聖人者,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부성인자,불응체어물이 능여세추이)

옛날 성인들께서는

어느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시지 않고

세상의 돌아가는 추이에 따랐소.

舉世混濁,何不隨其流[三]而 揚其波?

(거세혼탁,하불수기류이 양기파)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그 세상 사람들이 빠져 있는 흐름을 따라

그 흙탕물을 튀겨서 파고를 일으키지 않는가?

人皆醉,何不餔其糟而 啜其醨?

(인개취,하불포기조이 철기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어찌하여 술지게미를 배불리 먹고

그 거른 술을 같이 마시지 않는가?

何故懷瑾握瑜[四]而 自令見放為?」

(하고회근악유이 자령견방위?)

얼마나 아름다운 옥 같은 생각을 품었기에

스스로 화를 취하여 쫓겨나게 되었는가?

屈原曰:(굴원왈)

굴원이 대답했다.

「吾聞之,(오문지)

내가 들기에

新沐者必彈冠,(신목자필탄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필히 관을 벗어서 털어야 할 것이며

新浴者必振衣,(신욕자필진의)

새로이 몸을 씻은 사람은

필시 자기의 옷을 벗어 흔들어야 한다고 했소.

人又誰能以身之察察,

(인우수능 이신지찰찰)[五]

어찌 이 맑고 깨끗한 몸으로

受物之汶汶者乎!

(수물지문문자호!)[六],

더럽고 욕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常流[七]而 葬乎江魚腹中耳,

(녕부상류이 장호강어복중이)

차라리 내가 설사 상수에 빠져

수장되어 고기들의 밥이 된다 할지언정

又安能以晧晧之白 而蒙世俗之溫蠖乎!」[八]

(우안능이호호지백이 몽세속지온확호!)

어찌 희고 깨끗하며 결백한 마음의 내 몸에

이 속된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습니까.

[<漁父辭>의 누락부분]

遂去 不復與言.

어부는 마침내 가 버렸다. 그후로 다시는 그와 얘기하지 못했다.

注[一]索隱音甫。

注[二]集解離騷序曰:「三閭之職,掌王族三姓,曰昭﹑屈﹑景,序其譜屬,率

其賢良,以厲國士。」

注[三]索隱按:楚詞作「滑其泥」。

注[四]索隱按:楚詞此「懷瑾握瑜」作「深思高舉」也。

注[五]集解王逸曰:「己靜絜。」

注[六]集解王逸曰:「蒙垢。」索隱汶汶者,音閔。汶汶猶昏暗也。

注[七]索隱常流猶長流也。

注[八]索隱蠖音烏廓反。溫蠖猶惛憤。楚詞作「蒙世之塵埃哉」。

乃作懷沙之賦。[一]其辭曰:

그리고 나서 굴원은 <회사(懷沙)>라는 부(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注[一]索隱按:楚詞九懷曰「懷沙礫以自沉」,此其義也。

陶陶孟夏兮,草木莽莽。[一]

傷懷永哀兮,汩徂南土。[二]

眴兮窈窈,[三]孔靜幽墨。[四]

冤結紆軫兮,離愍之長鞠;[五]

撫情效志兮,俛詘以自抑。

陶陶孟夏兮(도도맹하혜)

햇볕이 따가운 초여름이라

草木奔奔 (초목망망)

초목이 무성도 하구나.

傷懷永哀兮(상회영애혜)

쓰라린 마음에 영원한 슬픔 안고

汩徂南土(율조남토)

유유히 흘러서 남쪽 땅으로 가련다.

瞬兮杳杳(순혜묘묘)

쳐다만 보아도 아득하고 멀어서

孔靜幽黙(공정유목)

조용한 것이 소리조차 없구나.

鬱結紆軫兮(울결우진혜)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

離愍而長鞠(이민이장국)

시름에 겨우니 못내 괴롭다.

撫情效志兮(무정효지혜)

정(情)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寃屈而自抑(원굴이자억)

원통함을 삼키고 스스로 참네.

注[一]集解王逸曰:「陶陶,盛陽貌。莽莽,盛茂貌。」索隱音姥。正義莫古反。

注[二]集解王逸曰:「汩,行貌。」索隱王師叔曰:「汩,行貌也。」方言曰:「謂

疾行也。」

注[三]集解徐廣曰:「眴,眩也。」索隱眴音舜。徐氏云:「眴音眩。窈音烏鳥

反。」

注[四]集解王逸曰:「孔,甚也。墨,無聲也。」正義孔,甚。墨,無聲。言江

南山高澤深,視之眴;野甚清淨,歎無人聲。

注[五]集解王逸曰:「鞠,窮。紆,屈也。軫,痛也。愍,病也。」索隱離湣。

湣,病。鞠,窮。

刓方以為圜兮,常度未替;[一]

易初本由兮,君子所鄙。[二]

章畫職墨兮,前度未改;[三]

內直質重兮,大人所盛。[四]

巧匠不斲兮,孰察其揆正?

玄文幽處兮,矇謂之不章;[五]

離婁微睇兮,瞽以為無明。[六]

變白而為黑兮,倒上以為下。[七]

鳳皇在笯兮,[八]雞雉翔舞。[九]

同糅玉石兮,槪面而相量。[一0]

夫黨人之鄙妒兮,羌不知吾所臧。[一一]

刓方以爲圜兮(완방이위환혜)

모난 것을 깎아서 동그라미 만들어도

常度未替(상도미체)

일정한 규범은 바꾸지 않는데,

易初本廸兮(이초본적혜)

근본(根本)이나 초지(初志)를 고치는 것은

君子小鄙(군자소비)

군자(君子)가 얕보는 것이라.

章畫志墨兮(장화지묵혜)

먹으로 분명히 그려 놓은

前圖未改(전도미개)

옛날의 설계는 고치지 않으며,

內厚質正兮(내후질정혜)

충정이 후덕하고 성질이 올바르기를

大人所盛(대인소성)

대인(大人)이 기리는 바요.

巧倕不斲兮(교수불착혜)

교수(巧倕)라도 자르지 않는데

孰察其揆正(수찰기규정)

누가 그 칫수의 바름을 알겠나?

玄文處幽兮(현문처유혜)

검은 무니가 어두운데 놓이면

矇睡謂之不章(몽수위지부장)

청맹과니는 불분명타 하고

離婁微睇兮(이루미제혜)

이루(離婁)가 실눈을 뜨더라도

瞽以爲無明(고이위무명)

소경은 못 보는 줄로 여기지.

變白以爲黑兮(변백이위흑혜)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倒上以爲下(도상이위하)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鳳凰在笯兮(봉황재노혜)

봉황(鳳凰)은 새장 속에 있는데

雞鶩翔舞(계목상무)

닭과 집오리는 나다니며 춤을 추네.

同糅玉石兮(동류옥석혜)

옥(玉)과 돌을 한 곳에 섞어 놓고

槪面相量(일개면상량)

하나의 평미래로 재려고 하니

夫惟黨人之鄙固兮(부유당인지비고혜)

저 도당들의 비천함이여!

羌不知余之所藏(강부지여지소장)

내가 가진 것의 값어치를 모른다.

注[一]集解王逸曰:「刓,削;度,法;替,廢也。言人刓削方木,欲以為圓,

其常法度尚未廢也。」索隱刓音五官反。謂刻刳方木以為圓,其常法度尚未廢。

注[二]集解王逸曰:「由,道也。」正義本,常也。鄙,恥也。言人遭世不道,

變易初行,違離光道,君子所鄙。

注[三]集解王逸曰:「章,明也。度,法也。言工明於所畫,念其繩墨,修前人

之法,不易其道,則曲木直而惡木好。」索隱章,明也。畫,計畫也。楚詞「職」

作「志」。志,念也。餘如注所解。

注[四]集解王逸曰:「言人質性敦厚,心志正直,行無過失,則大人君子所盛美

也。」

注[五]集解王逸曰:「玄,黑也。矇,盲者也。詩云『矇瞍奏公』。章,明也。」

注[六]集解王逸曰:「離婁,古明視者也。瞽,盲也。」正義睇,田帝反,眄也。

注[七]索隱音戶。

注[八]集解徐廣曰:「笯,一作『郊』。」駰案:王逸曰「笯,籠落也」。索隱笯

音奴,又女加反。徐云一作「郊」。按:籠落謂藤蘿之相籠絡。正義應瑞圖云:

「黃帝問天老曰:『鳳鳥何如?』天老曰:『鴻前而麟後,蛇頸而魚尾,龍文而

龜身,燕而?喙,首戴德,頸揭義,背負仁,心入信,翼俟順,足履正,尾

繫武,小音金,大音鼓,延頸奮翼,五色備舉。』」

注[九]索隱楚詞「雉」作「鶩」。

注[一0]集解王逸曰:「忠佞不異。」

注[一一]集解王逸曰:「莫昭我之善意。」索隱按:王師叔云「羌,楚人語辭」。

言卿何為也。正義羌音彊。

任重載盛兮,陷滯而不濟;[一]

懷瑾握瑜兮,窮不得余所示。[二]

邑犬之群吠兮,吠所怪也;

誹駿疑桀兮,固庸態也。[三]

文質疏內兮,衆不知吾之異采;[四]

材樸委積兮,莫知余之所有。

重仁襲義兮,謹厚以為豐;[五]

重華不可牾兮,[六]孰知余之從容!

古固有不並兮,豈知其故也?[七]

湯禹久遠兮,邈不可慕也。

懲違改忿兮,抑心而自彊;

離湣而不遷兮,願志之有象。[八]

進路北次兮,[九]日昧昧其將暮;

含憂虞哀兮,[一0]限之以大故。[一一]

任重載盛兮(임중재성혜)

무거운 짐을 많이도 실어

陷滯而不濟(함체이부제)

바퀴가 빠져서 움직이질 않네.

懷瑾握瑜兮(회근악유혜)

아름다운 보석을 품고 있지만

窮不知所示(궁부지소시)

길이 막혔으니 보일 데를 모르겠다.

邑犬之群吠兮(읍견지군폐혜)

마을 개들이 떼지어 짖는 것은

吠所怪也(폐소괴야)

이상한 사람있어 짖는 것이고

非俊疑傑兮(비준의걸혜)

영웅과 호걸을 비방하는 건

固庸態也(고용태야)

본래가 용렬해서 그렇다.

文質疏內兮(문질소내혜)

무늬와 바탕은 안으로 갖췄으니

衆不知余之異采(중부지여지이채)

중인(衆人)들은 이채로운 걸 모르고

材朴委積兮(재박위적혜)

재목과 원목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莫知余之所有(막지여지소유)

내 것인 것을 모르는 구나.

重仁襲義兮(중인습의혜)

어짐(仁)이 겹치고 정의가 이어지고

謹厚以爲豊(근후이위풍)

근신과 온후함이 풍성하여도

重華不可迕兮(중화불가오혜)

순임금님은 만날 수 없으니

孰知余之從容(숙지여지종용)

누가 나의 거동을 알아나 줄까?

古固有不竝兮(고고유불병혜)

옛적에도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같이 나지 않는

豈知其何故(기지기하고)

그 까닭을 알기나 하랴?

湯禹久遠兮(탕우구원혜)

탕(湯)과 우(禹)는 먼 옛날이야기

邈而不可慕(막이불가모)

아득하여 생각할 수도 없다.

懲違改忿兮(징위개분혜)

잘못을 뉘우치고 원한을 삭이고

抑心而自强(억심이자강)

마음을 억눌러서 스스로 참아

離愍而不遷兮(이민이불천혜)

시름이 겨워도 변하지 않으리니

願志之有像(원지지유상)

이 뜻을 본보기로 하리라.

進路北次兮(진로북차혜)

길을 나아가 북쪽에 다달으니

日昧昧其將暮(일매매기장모)

해는 뉘엿뉘엿 어두워진다.

舒憂娛哀兮(서우오애혜)

시름을 풀고 서글픔을 달래며

限之以大故(한지이대고)

지나간 큰일들을 마감하리라.

注[一]集解王逸曰:「言己才力盛壯,可任用重載,而身陷沒沈滯,不得成其本

志也。」

注[二]集解王逸曰:「示,語也。」

注[三]集解王逸曰:「千人才為俊,一國高為桀也。庸,賤之人也。」索隱按:

尹文子云「千人曰俊,萬人曰桀」。今乃誹俊疑傑,固是庸人之態也。

注[四]集解徐廣曰:「異,一作『奧』。」駰案:王逸曰「采,文采也」。

注[五]集解王逸曰:「重,累也。襲,及也。」

注[六]集解王逸曰:「牾,逢也。」索隱楚詞「牾」作「」,並吳故反。王師

叔云「牾,逢也」。

注[七]索隱楚詞作「莫知其何故」。

注[八]集解王逸曰:「象,法也。」

注[九]正義北次將就。

注[一0]索隱楚詞作「舒憂娛哀」。娛音虞。娛者,樂也。

注[一一]集解王逸曰:「娛,樂也。大故謂死亡也。」

亂曰:[一]

浩浩沅﹑湘兮,[二]分流汨兮。[三]

脩路幽拂兮,[四]道遠忽兮。

曾吟恆悲兮,永歎慨兮。

世既莫吾知兮,人心不可謂兮。[五]

懷情抱質兮,獨無匹兮。

伯樂既歿兮,驥將焉程兮?[六]

人生稟命兮,各有所錯兮。[七]

定心廣志,餘何畏懼兮?[八]

曾傷爰哀,永歎喟兮。[九]

世溷不吾知,心不可謂兮。

知死不可讓兮,願勿愛兮。

明以告君子兮,吾將以為類兮。[一0]

亂曰(난왈)

노래 끝에 이르기를,

浩浩沅湘(호호원상혜)

넘실거리는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分流汩兮(분류율혜)

두 갈래로 굽이쳐 흐르고

脩路幽蔽(수로유폐혜)

닦아 놓은 길은 깊숙이 가리워져

道遠忽兮(도원홀혜)

멀고도 먼 길은 끝이 없네.

曾吟恆悲兮(증음긍비혜)

이렇게 읊조리며 슬퍼하며

永歎慨兮(영탄개혜)

길이 개탄하여도

世既莫吾知兮(세기막오지혜)

세상에 이미 나를 알아주는 이 없으니

人心不可謂兮(인심불가위혜)

인심이란 말할 것도 없네.

懷情抱質(회정포질혜)

가슴에 품은 도타운 정은

獨無匹兮(독무필혜)

비할데 없이 우뚝하지만

伯樂旣沒兮(백락기몰혜)

백락(伯樂)이 이미 죽었으니

焉程兮(기장언정혜)

천리마를 어찌 알아보리오?

人生稟命兮(인생품명혜)

인생은 천명을 받아

*[萬民之生(만민지생):만민(萬民)이 한 세상에 태어나]라고 한 곳도 있음.

各有所錯兮(각유소착혜)

각기 제자리가 있거늘

定心廣志(정심광지)

마음을 정하고 뜻을 넓히면

余何畏懼兮(여하외구혜)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增傷爰哀(증상원애)

상심이 더하여 서럽게 울며

永歎喟兮(영탄위혜)

길게 한숨을 쉰다.

世溷濁莫吾知(세혼탁막오지)

세상이 혼탁하여 알아주는 이 없으니

人心不可謂兮(인심불가위혜)

사람의 마음을 일깨울 수 없구나.

知死不可讓(지사불가양혜)

죽음을 물릴 수 없음을 알았으니

願勿愛兮(원물애혜)

애석하다 여기지 말아라.

告君子(명이고군자v)

분명히 군자에게 고하노니

吾將爲類兮(오장이위류혜)

내 이제 충신의 본보기가 되리라!

注[一]索隱王師叔曰:「亂者,理也。所以發理辭指,撮總其要,而重理前意也。」

注[二]索隱二水名。按:地理志湘水出零陵陽海山,北入江。沅湘之後流也。

正義說文云:「沅水出牂柯,東北流入江。湘水出零陵縣陽海山,北入江。」按:

二水皆經岳州而入大江也。

注[三]集解王逸:「汨,流也。」

注[四]索隱楚詞作「幽蔽」也。

注[五]集解王逸曰:「謂猶說也。」索隱楚詞無「曾」已下二十一字。

注[六]集解王逸曰:「程,量也。」

注[七]集解王逸曰:「錯,安也。」

注[八]索隱楚詞「餘」並作「余」。

注[九]集解王逸曰:「喟,息也。」

注[一0]集解王逸曰:「類,法也。」正義按:類,例也。以為忠臣不事亂君之

例。

於是懷石 遂自*(投)**[沈]*汨羅以死。[一]

그리고는 마침내 가슴에 돌을 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注[一]集解應劭曰:「汨水在羅,故曰汨羅也。」索隱汨水在羅,故曰汨羅。地

理志長沙有羅縣,羅子之所徙。荊州記「羅縣北帶汨水」。汨音覓也。正義故羅

縣城在岳州湘陰縣東北六十里。春秋時羅子國,秦置長沙郡而為縣也。按:縣

北有汨水及屈原廟。續齊諧記云:「屈原以五月五日投汨羅而死,楚人哀之,每

於此日以竹筒貯米投水祭之。漢建武中,長沙區回白日忽見一人,自稱三閭大

夫。謂回曰:『聞君常見祭,甚善。但常年所遺,並為蛟龍所竊,今若有惠,可

以練樹葉塞上,以五色絲轉縛之,此物蛟龍所憚。』回依其言。世人五月五日

作,并帶五色絲及練葉,皆汨羅之遺風。」

屈原既死之後,楚有宋玉﹑唐勒﹑景差[一]之徒者,

皆好辭而以賦見稱;

然皆祖屈原之從容辭令,終莫敢直諫。

其後楚日以削,數十年竟為秦所滅。

굴원이 죽은 후

초나라에는 송옥(宋玉), 당륵(唐勒), 경차(景差)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문학을 좋아하여 부(賦)로써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굴원과 같이 완곡하고 함축적인 문체에는 능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직간을 행하지 않아

결국은 초나라는 날이 갈수록 국세가 약화되어

굴원이 죽고나서 몇 십년 후에 진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注[一]集解徐廣曰:「或作『慶』。」索隱按:楊子法言及漢書古今人表皆作「景

瑳」,今作「差」是字省耳。又按:徐﹑裴﹑鄒三家皆無音,是讀如字也。

自屈原沈汨羅後百有餘年,

漢有賈生,為長沙王太傅,

過湘水,投書以弔屈原。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진 이래 100년여 년이 지나자

한나라에 가의(賈誼)란 사람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가 되어

상수(湘水)를 지나다 제문을 지어 물속에 던져 굴원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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