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자서 04

태사공자서 5-4

767. 武王克紂(무왕극주),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였으나

768. 天下未協而崩(천하미협이붕).

천하의 인심을 미처 얻기도 전에 죽었다.

769. 成王旣幼(성왕기유),

무왕의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770. 管蔡疑之(관채의지),

관숙과 채숙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던 주공을 의심하였고

771. 淮夷叛之(회이반지),

다시 회수(淮水) 강안에 살던 이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772. 于是召公率德(우시소공솔덕),

그래서 소공은 덕으로써 그들을 이끔으로써

773. 安集王室以寧東土(안집왕실이영동토).

천하의 인심을 왕실에 쏠리게 하여 안정시키고 동쪽의 땅을 평안하게 하였다.

774. 燕(易)( )之禪(연이쾌지선),

소공의 후손인 연왕 쾌는 선양의 도를 흉내내다가

775. 乃成禍亂(내성화란).

이윽고는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776. 嘉<甘棠>之詩(가<감당>지시)

<감당(甘棠)>의 시에서 노래한 소공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여

777. 作<燕世家>第四(작<연세시가>제사)

<연세가>제사를 지었다.

778. 管蔡相武庚(관채상무경),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무경(武庚)의 상(相)이 되어

779. 將寧舊商(장영구상);

장차 옛 상나라의 땅의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780. 及旦攝政(급단섭정),

그러나 주공단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의 자리에 앉자

781. 二叔不饗(이숙불향);

두 사람은 마음에 의심을 품었다.

782. 殺鮮放度(살선방탁),

이에 주공단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한 다음

783. 周公爲盟(주공위맹);

어린 성왕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할 것임을 맹세했다.

784. 大任十子(태임십자),

대임은 슬하에 아들을 열이나 두어

▶대임(大任)/ 태임(太任) 혹은 태사(太 )라고도 한다. 주문왕의 정비이며 주무왕의 모친이다. 10명의 아들은 그 순서에 따라 백읍(伯邑) 고(考), 무왕(武王) 발(發), 관숙(管叔) 선(鮮), 주공(周公) 단(旦), 채숙(蔡叔) 도(度), 조숙(曹叔) 진탁(振鐸), 성숙(成叔) 무(武), 곽숙( 叔) 처(處), 강숙(康叔) 봉(封), 심계(沈季) 재(載) 등이다.

785. 周以宗强(주이종강).

주나라는 종실로써 강성하게 되었다.

786. 嘉仲悔過(가중회과).

이어서 채훅의 아들 채중이 그 부친의 잘못을 뉘우쳐 선행을 했음으로

787. 作<管蔡世家>第五(작<관채세가>제오)

<관채세가>제오를 지었다.

788. 王后不絶(왕후부절),

옛날 성왕(聖王)들의 후손들이 끊어지게 하지 않았으니

789. 禹舜是說(우순시설);

이는 우임금과 순임금이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790. 維德休命(유덕휴명),

그들이 베푼 덕은 아름답고 청명하여

791. 苗裔蒙烈(묘예몽열).

그 후세들이 은혜를 입었고

792. 百世亨祀(백세형사),

백세가 되도록 제사밥을 얻어먹다가

793. 爰周陳杞(원주진기),

주나라에 시대에 이르러 분봉되어 진나라와 기나라라는 제후국이 되었으나

794. 楚實滅之(초실멸지).

후에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795. 齊田旣起(제전기기),

그러나 진씨들은 다시 제나라로 들어가 전씨로 성을 바꾸어 제나라를 차지하였으니

796. 舜何人哉(순하인재)?

도대체 순임금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기에 그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그렇게 번창했단 말인가?

797. 作<陳杞世家>第六(작<진기세가>제육)

이에 <진기세가>제육을 지었다.

798. 收殷余民(수은여민),

주무왕은 은나라의 유민들을 수습하여

799. 叔封始邑(숙봉시읍),

강숙(康叔) 봉(封)을 봉하고

800. 申以商亂(신이상란),

상나라 말에 어지럽게 된 것을 일러주며

801. <酒><材>是告(<주><제>시고),

<주고(酒誥)>와 <재재(梓材)>를 글로 써서 경계로 삼게 했다.

▶주고(酒誥)와 재재(梓材)/ 주공이 그 아우인 강숙(康叔) 봉(封) 상나라의 구토에 봉하면서 상나라가 말기에 나라가 부패하여 망하게 된 것을 말하고 그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훈계한 내용을 담은 글로써 상기 두 편 외에 <강고(康誥)> 한 편이 더 있다. 모두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실려 있다.

802. 及朔之生(급삭지생),

이어서 위나라가 혜공(惠公) 삭(朔)의 대에 이르게 되자

▶혜공(惠公) 삭(朔) / 재위 기원전 699년-697, 686-669년. 위선공(衛宣公)의 아들로서 이복형인 세자인 급자와 동복형인 공자수(公子壽)를 살해하고 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 일로 해서 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14년 만에 제양공의 도움으로 다시 위후의 자리를 찾았다.

803. 衛頃不寧(위경불녕);

국세가 기우러져 평안한 때가 없게 되었다.

804. 南子惡  (남자오괴외),

이어서 위영공(衛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그의 아들 괴외를 싫어하여

805. 子父易名(자부이명).

아들과 부친의 명분을 전도시켰다.

806. 周德卑微(주덕비미),

주나라의 덕이 쇠미해지고

807. 戰國旣强(전국기강),

전국의 일곱 나라가 갈수록 강성해지자

808. 衛以小弱(위이소약),

위나라는 소국으로 전락하여 국세가 미약하게 되었으나

809. 角獨后亡(각독후망).

육국이 진나라에 병합된 뒤에도 계속 살아 남아 각왕(角王) 때 최후로 망했다.

810. 嘉彼<康誥>(가피<강고>),

저 <강고(康誥)>의 덕을 칭송하여

811. 作<衛世家>第七(작<위세가>제칠)

<위세가>제칠을 지었다.

812.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3.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4. 正言不用(정언불용),

올바른 말을 했으나 받아들여지기는커녕

815. 乃反爲奴(내반위노).

오히려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구나!

816. 武庚旣死(무경기사),

주나라는 무경이 반하자 죽이고

817. 周封微子(주봉미자).

미자계(微子啓)를 다시 봉했다.

818. 襄公傷于泓(양공상우홍),

이어서 그 후예인 양공(襄公)은 초나라와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의(義) 지키려다가 패하고 부상을 입었는데

819. 君子孰稱(군자수칭).

군자라면 그 누구가 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820. 景公謙德(경공겸덕),

후에 송경공은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나

821. 熒惑退行(형혹퇴행).

형혹성이 위치를 바꾸어 송나라로부터 벗어났다.

822. 剔成暴虐(척성포학),

이어서 척성이 포학무도 했음으로

823. 宋乃滅亡(송내멸망).

송나라는 이로 인하여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824. 嘉微子問太師(가미자문태사),

미자계(微子啓)가 송나라에 책봉되자 기자(箕子)를 태사로 삼아 자문을 구하여 정치를 행한 것을 칭송하여

825. 作<宋世家>第八(작<송세가>제팔).

<송세가>제팔을 지었다.

826. 武王旣崩(무왕기붕),

주무왕이 죽고

827. 叔虞邑唐(숙우읍당).

그 아들인 성왕이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唐)에 봉했다.

828. 君子譏名(군자기명),

그러나 문후 때에 이르자 이름의 순서가 바뀌어

829. 卒滅武公(졸멸무공).

결국은 분봉된 동생의 나라 출신인 무공이 본국을 멸하고 말았다.

830. 驪姬之愛(려희지애),

후에 진헌공은 여희(驪姬)에 빠져

831. 亂者五世(란자오세);

다섯 군주의 치세 동안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832. 重耳不得意(중이부득의),

중이는 오랫동안 뜻을 얻지 못하다가

833. 乃能成覇(내능성패).

유랑생활 19년 동안 결국은 패업을 이루게 되었다.

834. 六卿專權(육경전권),

진나라가 강성하게 되자 육경이 권력을 독점하여

835. 晉國以 (진국이모).

진나라는 끝내는 그 힘을 다하게 되었다.

836. 嘉文公錫珪 (가문공석규울),

진문공이 주천자로부터 옥으로 만든 규(珪)와 울창주(鬱 酒)를 하사 받은 것을 칭송하여

▶규(珪)/ 옥이나 나무로 만든 자루가 달리고 둥그런 모양의 술잔으로 제사를 지낼 때 울창주(鬱 酒)를 담았다. 제기(祭器)의 일종이다.

▶창( )/ 울창주(鬱 酒)를 말하며 제주(祭酒)로 사용하기 위해 울금향(鬱金香)을 넣어서 빚은 술을 말함. 울금향이란 백합과의 다년초인 튜율립에서 채취한 향이다. 봄철에 황색, 백색 등의 꽃이 피며 향기가 있다. 주로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주(祭酒)를 빚는 데에 사용한다.

▶상기 기사는 주양왕(周襄王) 20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이 이끄는 진군(晉軍)과 초성왕의 장수인 성득신(成得臣)이 이끌던 초군(楚軍)이 성복에서 크게 싸운 결과 진군이 이겨 그때 잡은 포로와 전리품을 주천자에게 받쳤다. 주천자는 진문공의 공로를 포상하여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기와 술인 옥으로 만든 규(珪)와 울금향으로 빚은 울창주를 하사한 것을 말한다.

837. 作<晉世家>第九(작<진세가>제구).

<진세가>제구를 지었다.

838. 重黎業之(중려업지),

중려(重黎)는 화정(火正)이 되어 제곡(帝 )을 위해 공을 세웠으나 공공(共工)의 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살해당하고

▶중려(重黎)/고양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고양씨가 칭( )을 낳고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다. 중려(重黎)는 제곡(帝 ) 고신씨(高辛氏)를 위해 화정(火正)의 벼슬에 앉아 큰공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천하가 밝게 빛나게 되었다. 제곡이 명하여 중려를 세상을 밝게 빛냈다는 뜻의 축융(祝融)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공공씨(共工氏)가 란을 일으키자 제곡(帝 ) 중려에게 명하여 공공의 무리들을 잡아죽이게 하였으나 모두 소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곡이 경인(庚寅) 일에 중려를 죽이고 구 후임에 중려의 동생 오회(吳回)를 세워 화정의 벼슬을 주었다. 오회가 축융이 되었다. (초세가)

▶ 창의(昌意)/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로 황제(黃帝)의 비(妃) 누조( 祖)의 소생이다. 누조는 서릉씨(西陵氏)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양육(養 )을 가르쳤기 때문에 선육(先 )이라고도 하고 또 여행 다니기를 즐겨 하다가 길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로신(道路神)이라고도 한다.

839. 吳回接之(오회접지),

오회(吳回)가 그 뒤를 이어 화정이 되었다.

840. 殷之季世(은지계세),

은나라 말기에 이르자 오희의 손자인 계련이 그 대를 이어 초나라의 시조가 되어

▶오회가 육종을 낳고 육종이 여섯 아들을 부인의 옆구리를 갈라 낳게 하였다. 장남을 곤오(昆吾)라 하고 이남을 삼호(參胡), 삼남은 팽조(彭祖), 사남은 회인(會人), 오남은 조성(曹姓)이고 여섯 번째는 계련(季連)인 미성( 姓)이었는데 이가 초나라의 선조이다.

841. 粥子牒之(죽자첩지).

이때부터 죽웅의 후손들에 대한 역사가 쓰여지게 되었다.

842. 周用熊繹(주용웅역),

주나라 죽웅의 후손인 웅역(熊繹)을 초자(楚子)에 봉하고

843. 熊渠是繼(웅거시계).

그 뒤를 웅거(熊渠)가 이었다.

844. 庄王之賢(장왕지현),

어진 마음의 초장왕은

845. 乃復國陳(내복국진);

멸한 진나라를 다시 세워주고

846. 旣赦鄭伯(기사정백),

초나라에 항거한 정나라를 용서했다.

847. 班師華元(반사화원).

송나라의 우사(右師) 화원의 말을 믿고 군사를 물리쳤으며

848. 懷王客死(회왕객사),

후에 전국 때의 초회왕은 진나라에 유인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객사했으나

849. 蘭咎屈原(란구굴원);

자란과 근상은 그 잘못을 모두 굴원에게 돌렸다.

850. 好諛信讒(호유신참),

초회왕은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어진 신하를 참소하는 말을 믿었기 때문에

851. 楚幷于秦(초병우진).

초나라는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망하게 된 것이다.

852. 嘉庄王之義(가장왕지의),

초장왕의 의로운 뜻을 기리어

853. 作<楚世家>第十(작<초세가>제십)

<초세가>제십을 지었다.

854. 少康之子(소강지자),

소강의 아들 무여(無餘)는

855. 實賓南海(실빈남해),

남해(南海)의 바닷가로 가서

856. 文身斷髮(문신단발),

몸에는 문신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

857.   與處(원선여처),

자라와 물고기들과 함께 살며

858. 旣守封 (기수봉우),

우산( 山)에 봉해져 그곳을 지키다가

859. 奉禹之祀(봉우지사).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860. 句踐困彼(구천곤피),

그 후손인 구천은 부차에게 곤욕을 치렀으나

861. 乃用種,  (내용종,려).

이내 문종과 범려를 얻어 신임하였다.

862. 嘉句踐夷蠻能脩其德(가구천이만능수기덕),

구천이 만이들 속에 있으면서 능히 그 덕을 쌓아

863. 滅强吳以尊周室(멸강오이존주실),

강대한 오나라를 멸하고 주왕실을 받든 것을 기리어

864. 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작<월왕구천세가>제십일)

<월왕구천세가> 제십일을 지었다.

865. 桓公之東(환공지동),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그 봉지를 옮긴 것은

866. 太史是庸(태사시용).

주왕실의 태사 백(伯)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다음은 <정세가> 편에 실린 태사(太史) 백(伯)의 말이다.

" 낙수(洛水)의 동쪽이며 하수의 남안(南岸)에 해당하는 땅만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대에는 괵국( 國)과 회국( 國)이 있는데 구 군주들이 탐욕스럽고 이(利) 만을 밝히는 자들이라 백성들이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사도의 직에 계시고 백성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계시니 공께서 그곳 주변의 땅을 성심껏 청하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군주들은 공께서 주왕실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의 봉지를 떼어 줄 것입니다. 경께서 그곳에 자리잡으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백성들은 모두 공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주나라가 쇠하게 되면 제(齊), 당진(唐晉), 섬진(陝秦), 초(楚) 등의 나라가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는 강성(姜姓)이며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백이는 옛날 요(堯)임금을 도와 나라의 법도와 예절을 제정했습니다. 섬진(陝秦)은 영성( 姓)이며 백예(伯 )의 후손들입니다. 백예는 순(舜)임금을 도와 많은 부락을 회유하여 귀순시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조상들도 역시 천하를 위해 큰공을 세웠습니다. 주 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뒤를 이었습니다. 성왕이 당(唐) 땅을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에게 주어 제후로 봉했습니다. 당 땅은 산천의 지세가 험(險)하여 이 곳에서 덕 있는 후손이 태어나 주나라가 쇠퇴하게 되면 같이 병존(竝存)하게 되어 당진(唐晉)은 틀림없이 흥성(興盛)하게 될 것입니다. "

▶괵( )/ 주문왕(周文王)의 동생들인 숙(叔)과 중(仲)이 각각 동괵(東 )과 서괵(西 )에 봉해졌다. 서괵이 후에 동천(東遷)하는 주평왕(周平王)을 따라 같이 동쪽으로 옮겨 북괵이 되고 원래 서괵의 자리에는 잔존세력이 나라를 세워 소괵(小 )이라 했다.

동괵(東 )/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의 동북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졌다. 후에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에게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경성(京城)이라고 했다.

서괵(西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 부근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중(仲)이 봉해졌다. 주평왕(周平王)이 낙읍으로 동천할 때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 이가요(李家窯)인 상양성(上陽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북괵(北 )/ 서괵이 상양성으로 옮긴 나라를 북괵이라 부르다가 주혜왕(周惠王) 22년 기원전 665년 당진(唐晉)의 헌공(獻公) 때 순식(荀息)의 가도멸괵(假道滅 ) 작전에 의해 멸망당하고 당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소괵(小 )/ 주나라가 천도할 때 따라가고 남은 서괵의 잔존세력이 세운 나라를 서괵이다. 주장왕(周庄王) 10년 기원전 687년 섬진(陝秦)의 무공(武公)에 의해 멸망당했다.

▶회국( 國)/ 회(檜)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신밀시(新密市) 동남에 있던 제후국으로써 정무공(鄭武公)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정나라에 병합되었다.

867. 及侵周禾(급침주화),

이어서 정장공(鄭庄公)은 군사를 내어 주나라 경계를 침략하여 벼이삭을 베어오자

868. 王人是議(왕인시의).

주왕실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의론이 분분하며 정나라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869. 祭仲要盟(제중요맹),

제중(祭仲)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함으로써

▶정나라 상경(上卿) 제족(祭足)이 장공의 뒤를 이어 소공(昭公)이 새로 선 것을 알리기 위해 송나라에 특사로 갔다. 그러나 송장공(宋庄公)은 오히려 제족을 붙잡아 소공을 몰아내고 당시 송나라로 망명해 있던 자돌을 대신 세우라고 위협하였다. 제족은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하였다. 제족은 아무도 몰래 자돌을 귀국시켜 소공을 몰아내고 정백의 자리에 앉혔다. 소공은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이 구절은 제족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870. 鄭久不昌(정구불창).

정나라는 강국으로서 오래가지 못했다.

871. 子産之人(자산지인),

이어서 자산(子産)이 나타나 정나라의 정치를 일신하자

872. 紹世稱賢(소세칭현).

후세 사람들은 잊지 않고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873. 三晋侵伐(삼진침벌),

삼진이 번갈아 가며 정나라를 쳐들어오니

874. 鄭納于韓(정납우한).

정나라를 망하여 결국은 한나라 땅이 되었다.

875. 嘉 公納惠王(가려공납혜왕),

정려공(鄭 公)이 왕자 퇴(頹)의 란으로 나라에서 쫓겨난 것을 도와 복국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876. 作<鄭世家>第十二(작<정세가>제십이)

<정세가>제십이를 지었다.

877. 維驥 耳(유기록이),

주목왕(周穆王)에게 명마 기(驥)와 녹이( 耳)를 선사하고

878. 乃章造父(내장조보).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조보(造父)는 조씨(趙氏)들의 시조가 되었다.

879. 趙夙事獻(조숙사헌),

조숙(趙夙)이 진헌공(晉獻公)을 모셨고

880. 衰續厥緖(쇠속궐서).

그의 후손 조쇠가 계속해서 조숙의 유업을 이었다.

881. 佐文尊王(좌문존왕),

진문공을 보좌하여 패자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주왕실을 높여

882. 卒爲晉輔(졸위진보).

이윽고 진나라를 크게 일으킨 공신이 되었다.

883. 襄子困辱(양자곤욕),

조양자가 진양에서 지백을 포함한 삼가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졌으나

884. 乃禽智伯(내금지백).

이내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지백을 사로잡아 조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885. 主父生縛(주보생박),

주보(主父) 무령왕(武靈王)은 사구궁(沙丘宮)에서 그의 신하들에게 포위되어

886. 餓死探爵(아사탐작).

참새를 잡아 허기를 채우다가 굶어 죽었다.

887. 王遷 淫(왕천벽음),

조왕 천(遷)은 편협하고 음락을 즐겨

888. 良將是斥(양장시척).

훌륭한 장수들을 멀리한 결과 조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889. 嘉 討周亂(가앙토주란).

조앙(趙 )이 주왕실의 란을 토벌한 것을 칭송하여

890. 作<趙世家>第十三(작<조세가>제십삼)

<조세가>제십삼을 지었다.

891. 畢萬爵魏(필만작위),

진헌공(晉獻公)을 모신 필만(畢萬)은 그 세운 공으로 위(魏) 땅에 봉해졌다.

892. 卜人知之(복인지지).

점술가는 필만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893. 及絳戮干(급강육간);

이어서 그의 후손인 위강(魏絳)은 진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을 치죄하고

894. 戎翟和之(융작화지).

다시 융적의 무리들을 회유하여 당진의 신민으로 삼았다.

895. 文侯慕義(문후모의),

위문후(魏文侯)는 의로운 선비들을 좋아하여

896. 子夏師之(자하사지).

자하를 스승으로 모셨다.

897. 惠王自矜(혜왕자긍),

그러나 문후의 뒤를 이은 혜왕은 스스로 교만하다가

898. 齊秦功之(제진공지),

제와 진 두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아 국세가 크게 꺾였다.

899. 旣疑信陵(기의신릉),

안리왕은 신릉군을 의심하자

900. 諸侯罷之(제후파지).

제후들이 위나라를 멀리했다.

901. 卒亡大梁(졸망대량),

결국은 진나라가 대량성을 파하고 위나라를 멸했다.

902. 王假 之(왕가시지).

위왕 가(假)는 진나라의 포로가 되어 일개 노역으로 전락했다.

903. 嘉武佐晉文申覇道(가무좌진문신패도),

위무자(魏武子) 주( )가 진문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한 공을 기리어

904. 作<魏世家>第十四(작<위세가>제십사)

<위세가>제십사를 지었다.

905. 韓厥陰德(한궐음덕).

한궐(韓厥)이 음덕을 쌓아

906. 趙武攸興(조무유흥);

조무가 망한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907. 紹絶立廢(소절립폐),

끊어진 후손들을 잇게 하고 없어진 제사를 다시 지내게 만들었으니

908. 晉人宗之(진인종지).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들었다.

909. 昭侯顯列(소후현열),

한소후가 열후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것은

910. 申子庸之(신자용지).

신불해를 임용한 것이다.

911. 疑非不信(의비불신),

한왕 안(安)은 한비를 의심하여 믿지 않았음으로

912. 秦人襲之(진인습지).

결국은 진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913. 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가궐보진광부천자지부),

한궐이 진나라 군주를 보좌하여 패업을 계속 잇게 하고 다시 주천자의 존엄함을 높였다. 이에 그 공을 칭송하여

914. 作<韓世家>第十五(작<한세가>제십오)

<한세가>제십오를 지었다.

915. 完子避難(완자피난),

진나라의 공자 진완(陳完) 난을 피하여

916. 適齊爲援(적제위원),

제나라에 와서 도움을 받아 살다가

917. 陰施五世(음시오세),

그 후손들 중 5세에 연이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자

918. 齊人歌之(제인가지).

제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덕을 노래 불렀다.

919. 成子得政(성자득정),

전성자가 그의 군주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전성자(田成子)/전상(田常)을 말하며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감지( 止)와 정권을 다투다가 기원전 481년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平公)을 대신 세웠다.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성자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920. 田和爲侯(전화위후).

전성자의 오대 손인 전화(田和) 때에 이르러 강씨를 대신하여 제후(齊侯)의 자리를 찾이하였으나

921. 王建動心(왕건동심),

제나라의 마지막 왕 왕건(王建)이 진나라의 공작에 마음이 움직여

922. 內遷于共(내천우공).

이윽고 나라가 망하자, 그는 진왕(秦王)에 의해 공(共) 땅으로 옮겨져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923. 嘉威(가위),

제위왕(齊威王)과

924. 宣能撥濁世而獨宗周(선능발탁세이독종주),

제선왕(齊宣王)이 능히 혼탁한 세상을 밝혀 내고 오로지 주나라를 받든 것을 칭송하여

925. 作<田敬仲完世家>第十六(작<전궁중완세가>제십육)

<전경중완세가>제십육을 지었다.

926. 周室旣衰(주실기쇠),

주왕실이 쇠약해 지자

927. 諸侯恣行(제후자행).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방자해 졌다.

928. 仲尼悼禮廢樂崩(중니도례폐락붕),

공자가 예(禮)가 없어지고 악(鄂)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여

929. 追脩經術(추수경술),

세상을 구하는 방도를 구하여

930. 以達王道(이달왕도),

그것으로써 왕도에 이르게 하여

931. 匡亂世反之于正(광란세반지우정),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길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932. 見其文辭(견기문사),

공자의 저서와 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933. 爲天下制儀法(위천하제의법),

천하를 위해서 의례와 법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934. 垂<六藝>之統紀于后世(수<육예>지통기우후세).

육예의 기강을 후세에 영원히 남겼다.

935. 作<孔子世家>第十七(작<공자세가>제십칠)

이에 <공자세가>제십칠을 지었다.

936. 桀,紂失其道而湯武作(걸, 주실기도이탕무작)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실덕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은나라의 탕임금과 주무왕은 덕을 쌓아 나라를 일으킨 것이다.

937. 周失其道而<春秋>作(주실기도이<춘추>작.

이어서 주나라가 그 도를 잃자 공자는 <춘추>를 지은 것이다.

938. 秦失其政(진실기정),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그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939. 而陳涉發迹(이진섭발적),

진섭이 한 번 일어나니

940. 諸侯作難(제후작난),

천하의 제후들이 그 뒤를 쫓아 난을 일으키니

941. 風起雲蒸(풍기운증),

그 기세가 마치 바람과 구름과 같아서

942. 卒亡秦族(졸망진족).

진나라는 창졸간에 망하게 되어

943. 天下之端(천하지단),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망하게 된 발단은

944. 自涉發難(자섭발난).

진섭이 일으킨 반란에 기인한 것이니

945. 作<陳涉世家>第十八(작<진섭세가>제십팔)

이에 <진섭세가>제십팔을 지었다.

946. 成皐之台(성고지대),

하남의 성고(成皐)에 세운 대(臺)는

947. 薄氏始基(박씨시기).

한문제(漢文帝)의 모친인 박씨(薄氏)가 그 터를 파기 시작했고

948.  意適代(굴의적대),

두황후(竇皇后)는 뜻을 꺾고 대(代) 땅으로 들어갔다가

949. 厥崇諸竇(궐숭제두).

대왕(代王)이었던 유항(劉恒)이 제위(帝位)를 잇게 되자 그녀의 일족들은 모두가 존귀하게 되었다.

950. 栗姬 貴(율회부귀),

율희는 그 사이에 틈을 타서 존귀하게 되었으나 교만해 졌으며

951. 王氏乃遂(왕씨내수).

왕씨들이 그 뒤를 이어 세력을 얻었다.

952. 陳后太驕(진후태교),

진황후는 너무 교만했기 때문에

953. 卒尊子夫(졸존자부).

결국은 한무제에 의해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위자부(衛子夫)가 황후가 되어 존귀하게 되었다.

954. 嘉夫德若斯(가부덕약사),

위자부의 아름다운 덕행을 칭송하여

955. 作<外戚世家>第十九(작<외척세가>제십구)

<외척세가>제십구를 지었다.

956. 漢起譎謀(한기휼모),

한고조가 속임수를 써서

957. 禽信于陳(금신우진);

한신을 진(陳) 땅에서 사로잡았다.

958. 越荊剽輕(월형표경),

한고조는 월(越)이나 초(楚) 나라 사람들은 사납고 민첩하여

959. 乃封弟交爲楚王(내봉제교위초왕),

그의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으로 봉해 두 나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했다.

960. 爰都彭城(원도팽성),

유교는 이어서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961. 以强淮泗(이강회사),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의 고을들을 힘으로 다스려

962. 爲漢宗蕃(위한종번).

한나라를 위한 오랑캐의 종주국이 되었다.

963. 戊溺于邪(무익우사),

초왕 유무(劉戊)는 사간(邪奸)의 죄를 범했다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에 가담하고, 이어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무(劉戊)/ 초왕(楚王)으로 시봉된 유교(劉交)의 손자로 상중에 궁녀를 봉하여 그 죄로 봉지의 일부인 동해군(東海郡)을 빼앗겼다. 이에 불만을 품고 오왕(吳王) 유비(劉 )와 함께 오초칠국의 란을 주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자살했다. 오초칠국의 란의 상세한 전개과정은 655항 참고

▶사간(邪奸)/ 국상 중에 궁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국상 중에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했다.

964. 禮復紹之(예복소지).

그 뒤를 유례(劉禮)가 초왕에 봉해져 초원왕(楚元王)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유례(劉禮)/ 초원왕 유교(劉交)의 아들이다.

965. 嘉游輔祖(가유보조),

초원왕 유교(劉交)가 고조를 보필한 것을 칭송하여

▶유(游)/ 유교(劉交)의 자(字)다.

966. 作<楚元王世家>第二十(작<초원왕세가>제이십)

이에 <초원왕세가>제이십을 지었다.

967. 維祖師旅(유조사려),

한고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968. 劉賈是興(유가시흥);

유고(劉賈)가 함께 참가하여 그 공으로 제후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유고(劉賈)/ 한고조 유방(劉邦)의 사촌형이다. 한고조 밑에서 장군의 신분으로 종군했다가 기원전 201년 형왕(荊王)에 봉해졌다. 후에 반란을 일으킨 영포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969. 爲布所襲(위포소습),

후에 영포(英布)에 의해 습격 당해

970. 喪其荊,吳(상기형,오).

자신은 목숨을 잃고 봉지인 형(荊)과 오(吳)의 땅을 잃게 되었다.

▶형(荊)/ 원래 초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때 백기(白起)의 침입에 의해 도성을 뺏기고 지금의 하나성 진현(陳縣)으로 나라를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으로 옮겼다.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던 옛날의 초나라 땅을 형(荊)이라 하고 초나라가 새로 옮겨 간 수현(壽縣) 일대를 초(楚)라고 명명한 것이다. 항우(項羽)는 팽성(彭城) 즉 지금의 수현에 도읍을 새우고 초나라라고 명명했다.

971. 營陵激呂(영릉격려),

영릉후(英陵侯) 유택(劉澤)은 여태후를 감격시켜

▶유택(劉澤)/ 한고조 유방의 사촌 형제이다. 유방 밑에서 낭중의 벼슬을 살다가 여태후에 의해 영릉후에 봉해졌다.

972. 乃王琅邪(내왕낭야);

이윽고 낭야왕에 봉해졌다.

973. 祝午信齊(축오신제),

그는 축오(祝午)의 말을 듣고 제나라를 믿은 나머지

974. 往而不歸(왕이불귀),

그곳으로 들어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975. 遂西入關(수서입관),

후에 계교를 써서 서쪽의 관중으로 들어가

976. 遭立孝文(조립효문),

효문제를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올릴 때

977. 獲復王燕(획복왕연).

연왕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978. 天下未集(천하미집),

천하의 인심이 아직 모아지지 않았을 때

979. 賈, 澤以族(가, 택이족),

유고(劉賈)와 유택(劉澤)은 황제(皇帝)의 일족으로

980. 爲漢藩輔(위한번보).

번국의 왕이 되어 황실을 도왔다.

981. 作<荊燕世家>二十一(작<형연세가>이십일)

이에 <형연세가>제이십일을 지었다.

982. 天下已平(천하이평),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인심이 안정이 되었으나

983. 親屬旣寡(친속기과);

황실의 종족들의 수효가 많지 않았다.

984. 悼惠先壯(도혜선장),

고조의 아들 중 도혜왕(悼惠王)이 가장 먼저 성인이 되어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庶長子)로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985. 實鎭東土(실진동토).

동쪽의 제나라에 봉해져 그곳을 굳게 지켰다.

986. 哀王擅興(애왕천흥),

애왕(哀王)은 경솔히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애왕(哀王)/ 유비(劉肥)의 아들 유양(劉襄)을 말한다.

987. 發怒諸呂(발노제려),

당시의 실권자들인 여씨(呂氏)들의 전횡에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었으나

988. 駟鈞暴漏(사균폭루),

사균(駟鈞)이 포학하고 잔인했음으로

▶사균(駟鈞)/

989. 京師弗許(경사불허).

조정의 대신들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990.  之內淫(려지내음),

려왕( 王)이 그의 누이와 간음하자

991. 禍成主父(화성주보).

주보언에게 들켜 화를 입었다.

▶주보(主父)/ 주보언(主父偃)을 말한다. 그는 제나라 임치(臨淄) 사람으로 한무제 때 중대부의 벼슬을 지내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그 봉지를 여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 하기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다. 후에 자기의 딸을 제려왕(齊 王)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려왕이 자기의 누이와 간통한 사실을 밝혀 내고 그 사실을 한무제에게 고하여 려왕으로 하여금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주보에게 화를 입었다는 것은 이 것을 말한 것이다.

992. 嘉肥股肱(가비고굉),

유비가 한고조의 고굉지신이 되어 잘 보좌했음을 기리어

993. 作<齊悼惠王世家>第二十二(작<제도혜왕세가>제이십이)

<제도혜황세가>제이십이를 지었다.

994. 楚人圍我滎陽(초인위아형양),

우리의 한고조가 형양(滎陽)에서 초왕 항우에 의해 삼년을 포위 당하여

995. 相守三年(상수삼년);

항복하지 않고 삼 년을 버틴 것은

996. 蕭何塡撫山西(소하전무산서),

소하가 산서의 땅을 위무하여

997. 推計踵兵(추계종병),

호구를 관리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998. 給糧食不絶(급량식부절),

병사들을 위한 군량미를 끊어지지 않게 공급한 때문이었고

999. 使百姓愛漢(사백성애한),

또한 소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로 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1000. 不樂爲楚(불락위초).

초나라를 위해 즐겨 일하지 않게 했다.

1001. 作< 蕭相國世家>第二十三(작<소상국세가>제이십삼)

이에 <소상국세가>제이십삼을 지었다.

1002. 與信定魏(여신정위),

조참(曹參)은 한신(韓信)과 함께 출동하여 위나라를 평정하였고

1003. 破趙撥齊(파조팔제),

조나라를 군사를 파하고 제나라를 함락시킴으로써

1004. 遂弱楚人(수약초인).

드디어는 초나라 세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1005. 續何相國(속하상국),

소하가 죽은 다음에 상국의 자리를 이어 받아

1006. 不變不革(불변북혁),

그가 세워 놓은 제도는 아무 것도 개변하거나 혁파하지 않고

1007. 黎庶攸寧(여서유녕).

그대로 시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했다.

1008. 嘉參不伐功矜能(가삼불벌공긍능),

조참이 자기의 공로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은 것을 칭송하여

1009. 作<曹相國世家>第二十四(작<조상국세가>제이십사)

<조상국세가>제이십사를 지었다.

1010. 運籌 幄之中(운주유악지중),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우고 실행하여

1011. 制勝于無形(제승우무형),

눈에 보이지 않은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은

1012. 子房計謀其事(자방계모기사),

모두가 장자방의 계책에 의한 것이며

1013. 無知名(무지명),

그는 명성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1014. 武勇功(무용공),

무용을 발휘하여 공을 세운 일도 없었으나

1015. 圖難于易(도난우이),

어려운 일을 쉬운 일로 해결하고

1016. 爲大于細(위대우세).

사소한 일을 행하여 큰일을 이루었다.

1017. 作<留侯世家>第二十五(작<유후세가>제이십오)

이에 <유후세가>제이십오를 세웠다.

1018. 六奇旣用(육기기용),

여섯 가지 기묘한 계책을 고조에게 바쳐

1019. 諸侯賓從于漢(제후빈종우한);

천하의 제후들이 한나라를 따르도록 만들었고

1020. 呂氏之事(여씨지사),

여씨들이 전횡하자 그들을 토벌한 것은

1021. 平爲本謀(평위본모),

원래 진평(陳平)의 계책에 의한 것이다.

1022. 終安宗廟(종안종묘),

한나라 종묘와

1023. 定社稷(정사직).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진평의 공적이라

1024. 作<陳丞相世家>第二十六(작<진승상세가>제이십육).

이에 <진승상세가>제이십육을 지었다.

1025. 諸呂爲從(제려위종),

여씨들이 서로 결탁하여

1026. 謀弱京師(모약경사),

황실의 세력을 깎아 내리려 획책했으나

1027. 而勃反經合于權(이발반경합우권);

주발은 정도에 벗어난 권모술수를 써서 여씨들을 주멸했다.

1028. 吳楚之兵(오초지병),

오초가 힘을 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1029. 亞父駐于昌邑(아부주우창읍),

주발의 아들인 주아부가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창읍에 주둔하여

▶주아부(周亞夫)/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한문제 때 세류(細柳 : 지금의 섬서성 함안 서남)에 주둔하여 흉노의 침략을 막아냈다. 한경제 때 오초(吳楚)를 포함한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벌군 대장이 되어 창읍에 주둔하여 반란군의 후방을 끊고 제와 조 두 나라와의 연락도 두절시켰다. 전후에서 보급망이 끊어진 오초(吳楚)의 군사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초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왕은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한나라 조정의 회유책에 넘어간 동맹국의 왕 동월왕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오초칠국의 란을 진압한 공로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무고를 받아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1030. 以厄齊趙(이액제조),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과 오초의 군사들의 연락을 끊었다.

1031. 而出委以梁(이출위이양).

이어서 양나라의 위급함을 스스로 해결하게 하여 결국은 오초칠국의 란을 평정했음으로

1032. 作<絳侯世家>第二十七(작<강후세가>제이십칠)

<강후세가>제이십칠을 지었다.

1033. 七國叛逆(칠국반역),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034. 藩屛京師(번병경사),

한왕조의 변경을 지키던 제후국들 중

1035. 唯梁爲 (유량위한);

오직 양나라만이 대항하였다.

1036.  愛矜功(부애긍공),

그러나 모후의 총애를 너무 믿었고 또한 자기의 공을 너무 자랑한 나머지

1037. 幾獲于禍(기획우화).

화를 입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1038. 嘉其能距吳楚(가기능거오초),

양효왕(梁孝王)이 오초의 군사들을 능히 막아내어 황실을 안정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1039. 作<梁孝王世家>第二十八(작<양효왕세가>제이십팔)

<양호왕세가>제이십팔을 짓는다.

1040. 五宗旣王(오종기왕),

오종이 모두 제후왕이 되자

▶오종(五宗)/ 한경제(漢景帝)는 그 슬하에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한 사람이 한무제(漢武帝)이고 나머지 13명이 모두 제후왕(諸侯王)에게 봉해졌다. 13명은 모두 다섯 명의 여인들 소생이었다. 이에 5명의 여인들을 모두 모친으로 여겨 같은 종친으로 지낸다고 해서 오종이라고 한 것이다.

1041. 親屬洽和(친속흡화),

황실의 친속들은 서로 친하여 화합을 이루었고

1042. 諸侯大小爲藩(제후대소위번),

이어 모두 크고 작은 나라의 제후왕들로 봉해져

1043. 爰得其宜(원득기의),

황실의 변방을 지키는 번국(藩國)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1044. 僭擬之事稍衰貶矣(참의지사소쇄폄의).

이에 자기의 직분을 벗어나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제후들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1045. 作<五宗世家>第二十九(작<오종세가>제이십구).

이에 <오종세가>제이십구를 지었다.

1046. 三子之王(삼자지왕)

무제의 세 아들은 모두 제후왕으로 봉해졌는데

1047. 文辭可觀(문사가관)

그때 지은 책문의 글은 가히 명문이었다.

1048. 作<三王世家>第三十(작<삼왕세가>제삼십)

이에<삼왕세가>제삼십을 지었다.

▶삼왕세가(三王世家)/ 사마천의 삼왕세가의 원본은 소실되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의 삼왕세가는 저소손( 少孫)이 지어 보충하였다. 1049. 末世爭利(말세쟁리),

세상이 말세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익을 다투게 되나

1050. 維彼奔義(유피분의)

오로지 그들만은 의를 추구하여

1051. 讓國餓死(양국아사),

나라의 군주 자리도 마다하고 결국은 굶어 죽었으니

1052. 天下稱之(천하칭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1053. 作<伯夷列傳>第一(작<백이열전>제일)

이에 <백이열전>제일을 지었다.

▶백이(伯夷)/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는 형이고 숙제는 동생으로 지금의 천진시 복쪽의 창려(昌黎)시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군주가 차자인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생전에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백이가 자기 부친의 뜻을 알고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 주기 위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숙제도 형을 제치고 동생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왕자리에 앉지 않고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후 두 사람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하의 나라가 주인 되는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며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비록 곡식일지라도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먹지 않고 고사와 고비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다.

1054. 晏子儉矣(안자검의),

안자(晏子) 평중(平仲)은 검소했으며

1055. 夷吾則奢(이오즉사);

관자(管子) 이오(夷吾)는 사치하여 두 사람은 서로 행하는 바가 달랐으나

1056. 齊桓以覇(제환이퍠),

이오는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1057. 景公以治(경공이치).

평중은 제경공으로 하여금 치세를 이루게 만들었다.

1058. 作<管晏列傳>第二(작<관안열전)제이)

이에 <관안열전>제이를 지었다.

1059. 李耳無爲自化(이이무위자화),

노자(老子) 이이(李耳)는 무위(無爲)를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하게 만들게 하고

▶무위(無爲)/ 도가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060. 淸淨自正(청정자정);

마음을 깨끗하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마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1061. 韓非 事情(한비췌사정),

한비자는 각기 일마다의 정황을 헤아려

1062. 循勢理(순세리).

세력과 도리가 움직이는 이치에 따랐다.

1063. 作<老子韓非列傳>第三(작<노자한비열전>제삼)

이에 <노자한비열전>제삼을 짓는다.

1064. 古王者而有<司馬法>(고왕자이유<사마법>)

옛날 왕들에게도 <사마법>이라고 있었으나

1065. 穰 能申明之(앙저능신명지).

사마양저(司馬穰 )가 그 병법의 쓰임새 넓히고 분명히 밝혔다.

1066. 作<司馬穰 列傳>第四(작<사마양저열전>제사)

이에 <사마양저열전>제사를 지었다.

1067.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비신렴이용불능전명논검),

신(信), 염(廉), 인(仁), 용(勇)이 아니고는 병법과 검술에 대해 논할 수 없으며

1068. 與道同符(여도동부),

부절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맞아야

1069. 內可以治身(내가이치신),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1070. 外可以應變(외가이응변),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1071. 君子比德焉(군자비덕언).

군자가 이것에 더하여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덕이라고 했다.

1072. 作<孫子吳起列傳>第五(작<손자오기열전>제오).

이에< 손자오기열전>제오를 지었다.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1075. 尙旣匡夫(상기광부),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1076. 伍員奔吳(오원분오),

그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달아나 그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1077. 作<伍子胥列傳>第六(작<오자서열전>제육)

이에 <오자서열전>제육을 지었다.

1078. 孔氏述文(공씨술문),

공자는 학문과 문학을 논하고

1079. 弟子興業(제자흥업),

그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일으켰다.

1080. 咸爲師傅(함위사부),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1081. 崇仁 義(숭인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1082. 作<仲尼弟子列傳>第七(작<중지제자열전>제칠)

이에 <중니제자열전>제칠을 지었다.

1083.  去衛適秦(앙거위적진),

상앙은 위(衛) 땅을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1084. 能明其術(능명기술),

그가 배운 술법을 능히 펼칠 수 있어

1085. 强覇孝公(강패효공),

진효공(秦孝公)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1086. 後世遵其法(후세준기법).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높였다.

1087. 作<商君列傳>第八(작<상군열전>제팔)

이에 <상군열전>제팔을 지었다.

1088. 天下患衡秦毋 (천하환형진무염),

천하가 근심하고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강포함이었으나

1089. 而蘇子能存諸侯(이소자능존제후),

소진은 능히 제후국들을 존립하게 하고

1090. 約從以抑貪强(약종이억탐강).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러운 진나라를 제어 하였다.

1091. 作<蘇秦列傳>第九(작<소진열전>제구)

이에 <소진열전>제구를 짓는다.

1092. 六國旣宗親(육국기종친),

육귝이 서로 합종을 맺어 친하게 지내게 되자

1093. 而張儀能明其說(이장의능명기설),

장의는 그 잘못을 능히 지적할 수 있어

1094. 復散解諸侯(복산해제후).

다시 합종책을 깨고 제후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095. 作<張儀列傳>第十(작<장의열전>제십)

이에 <장의열전>제십을 짓는다.

1096. 秦所以東攘雄諸侯(진소이동양웅제후),

진나라가 동쪽의 제후들을 물리치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1097. 樗里, 甘茂之策(저리, 감무지책).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계책 덕분이었다.

1098. 作<樗里甘茂列傳>第十一(작<저리감무열전>제십일)

이에 <저리감무열전>제 십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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