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태사공자서 03

[태사공자서 5-3]

499.維昔黃帝(유석황제),

옛날 황제 헌원씨(軒轅氏)는

500.法天則地(법천즉지),

하늘과 땅의 법칙을 본 받았고

501.四聖遵序(사성준서),

사성은 각기 그 순서에 따라 .

▶사성(四聖)/ 전욱( 頊), 제곡(帝 ),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말한다.

502.各成法度(각성법도);

황제가 만든 법도를 이루었다.

503.唐堯遜位(당요손위),

당요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504.虞舜不台(우순불태);

우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505.厥美帝功(궐미제공),

이에 제왕들의 공을 찬미하여

506.萬世載之(만세재지),

만세에 전하도록 실어

507.作<五帝本紀>第一(작<오제본기>제일)

제일편인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지었다.

508.維禹之功(유우지공),

우임금의 가장 큰 공적은

509.九州攸同(구주유동),

구주에 고루 혜택을 주어

▶구주(九州)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중국 전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아홉 주의 이름은 기(冀), 예(豫), 청(靑), 서(徐), 양(揚), 형(荊), 연( ), 양(梁), 옹(雍)이다.

기주(冀州) : <하본기(夏本紀)> " 冀州:冀載壺口,治梁及岐" 하북성 동남, 산동 서북부, 하남과 산서 경계 중 하수 이북, 산서와 섬서 경계 중 하수 동쪽의 땅을 관할했다.

예주(豫州) : <하본기(夏本紀)> " 荊河惟豫州" 관할 구역으로 남쪽으로는 지금의 호북성 형산<지금의 호북성 남장(南 ) 서>, 북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렀다.

청주(靑州) : <하본기(夏本紀)> " 海垈維靑州" 해(海)는 발해를 말하고 대(垈)는 즉 태산(泰山)을 말한다. 구주(九州) 중 가장 동쪽에 있었던 주. 오행설에 의하면 동쪽은 청(靑)을 뜻했기 때문에 청주라 한 것이다. 관할 구역은 동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하북(河北) 오교(吳橋) 이동, 마협하(馬頰河) 이남, 산동성 북부와 동부지구에 이르렀다.

서주(徐州) : <하본기(夏本紀)> " 海垈及淮維徐州" 해(海)는 황해를 말하며 대(垈)는 태산(泰山), 회(淮)는 회수(淮水)를 말한다. 동쪽으로는 황해(黃海), 서쪽으로는 태산(泰山), 남쪽으로는 회수(淮水) 즉, 서주의 북쪽은 태산을 경계로 청주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회수를 경계로 양주(揚州)와 접했다.

양주(揚州) : <하본기(夏本紀)>" 淮海維揚州" 회는 회수(淮水)를 말하며, 해는 동해(東海)다. 양주의 관할 구역은 회수 이남과 장강 유역 중 하류의 월인(越人)들이 활동하던 땅이다.

형주(荊州) : <하본기(夏本紀)> " 荊及衡陽維荊州 " 형(衡)은 형산(衡山)으로 지금의 호북성 남장현(南 縣)을 말한다. 대체로 호북성 중부, 남부, 호남성 북부, 중부,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의 일부를 관할했다.

연주( 州) : 연주(沇州)라고도 한다. <하본기(夏本紀)> " 濟, 河維沇州 " 연주(沇州)는 연수(沇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濟)는 즉 제수(濟水), 하(河)는 즉 하수(河水)를 말하며 산동성 서북부, 하남 동북과 하북 동남부를 관할했다.

양주(梁州) : <하본기(夏本紀)> " 華陽黑水惟梁州 " 흑수에 대한 설은 분명하지 않다. 란창강(瀾滄江), 노강(怒江), 금사강(金沙江), 장액하(張掖河), 대통하(大通河) 등 설이 다양하다.

옹주(雍州) : <하본기(夏本紀)> " 黑水西河惟雍州" 하(河)는 지금의 섬서성과 산서성 사이를 흐르는 하수(河水)를 말하나 흑수는 확실하지 않다

510.光唐虞際(광당우제),

당우(唐虞) 시대를 빛내어

511.德流苗裔(덕유묘예);

그 덕이 후세들에게 이르게 한 것이다.

512.夏桀淫驕(하걸음교),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음탕하고 교만하여

513.乃放鳴條(내방명조).

이어서 명조(鳴條)로 추방되었다.

▶명조(鳴條)/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북 봉구현(封丘縣) 서.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은나라의 탕(湯)임금과 싸워 패하고 도망간 곳이다.(桀奔於鳴條)

514.作<夏本紀>第二(작<하본기>제이)

이에 하본기(夏本紀) 제이를 지었다.

515.維契作商(유설작상),

설(薛)은 상을 세웠고

▶설(薛)/제곡(帝 )의 아들로 상족(商族)의 시조이다. 우(禹)임금이 황하를 치수할 때 옆에서 도와 공을 도와 순임금에 의해 사도(司徒)로 임명되어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인 상(商)에 봉해졌다. 그 후예인 탕임금이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웠다.

516.爰及成湯(원급성탕);

이어서 성탕에 이르러 하왕조를 대신하였다.

517.太甲居桐(태갑거동),

태갑(太甲)은 동(桐)으로 쫓겨나 살던 끝에

▶태갑(太甲)/ 성탕(成湯)의 장자인 태정(太丁)의 큰아들이다. 즉위 3년만에 탕이 세운 법을 지키지 않고 덕을 어지럽히며 전횡하자 이윤(伊尹)에 의해 동궁(桐宮)으로 추방되었다. 동궁에 3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개과천선하자 이윤이 다시 그를 데려와 정권을 넘겨주었다. 왕위에 복귀 후 태갑은 성탕의 유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자 제후들이 모두 귀의하였으며 백성들의 생활은 편안해 졌다. 이윤이 이를 찬미하여 <태갑훈(太甲訓)> 삼 편을 지었다.

▶동(桐)/ 동궁을 말하며 여러 설이 있다.

사기집해(史記集解) : 탕임금이 묻힌 곳으로 제음(濟陰)의 박현( 縣)으로 지 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동쪽을 말한다고 했으며

사기정의(史記正義) : 하남성 언사시(偃師市) 서쪽 등 이외에 몇 가지 설이 더 있다.

518.德盛阿衡(덕성아형);

깨달아 아형(阿衡)의 도움으로 세상에 덕을 펼칠 수 있었다.

▶아형(阿衡)/ 상(商) 왕조를 세운 성탕(成湯)의 창업공신인 이윤(伊尹)의 이름이다. 원래 탕임금의 비(妃)인 유신씨(有辛氏)가 시집올 때 데려온 노예였으나 탕임금이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정사를 맡겼다. 이윤은 탕임금을 도와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웠다. 탕임금이 죽자 그의 이자(二子)인 외병(外丙)과 삼자(三子)인 중임(中任)을 차례로 섬기다가, 중임이 죽자 탕임금이 장자인 태정(太丁)의 아들 태갑(太甲)을 왕위에 앉혀 그에게 정치의 근본과 법도를 가르쳤다. 태갑이 즉위하여 삼 년이 되자 탕이 세운 법을 문란하게 하였다. 이에 이윤은 태갑을 동궁(桐宮)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통치했다. 태갑은 동궁에서 삼 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지난날의 과오를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윤이 태갑을 다시 불러 들여 상나라 임금의 자리를 돌려주었다. 제위(帝位)에 다시 오른 태갑은 정치를 쇄신하고 덕정을 베풀어 치세를 이루었다. 이윤(伊尹)은 태갑이 죽고 그의 아들 옥정(沃丁) 치세 때 죽었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윤은 7년만에 돌아와 스스로 왕위에 복귀한 태갑에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519.武丁得說(무정득열),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등용하여 치세를 이루어

▶무정(武丁)/상왕조의 제 23대 왕으로 기원전 1325년부터 1266년까지 59년간 재위에 있었다. 일설에는 기원전 1329년 제위에 올랐다고 했다.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소을(小乙)의 아들이고 조경(祖庚)의 아버지다. 전설에 의하면 무정이 어렸을 때 그의 부왕인 소을이 그를 민가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면서 노역들과 함께 살게 하고, 다시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국경 밖의 이민족을 정벌하게 했다고 했다. 소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무정은 상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찾다가 부암(傅岩)이란 곳에서 노역을 하던 노예 출신의 부열을 얻어 재상으로 삼았다. 부열의 도움으로 정치를 쇄신하고 덕을 베풀었으며 서북쪽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을 정벌하였으며 남쪽의 형만(荊蠻)을 공격하여 상나라의 국세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상나라는 부열의 도움으로 무정 치세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부열(傅說)/다음은 <은본기(殷本紀)>에 나오는 무정(武丁)과 부열에 관한 기사이다.

< 소을제(小乙帝)>가 죽자 그 아들 무정(武丁)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무정은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널리 구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 宰)가 결정하도록 하고서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정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의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정은 성밖으로 나가 자다가 꿈속에서 성인을 봤다. 무정이 관리들에게 자기가 꿈속에서 본 성인을 찾으라고 명했으나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다시 성밖에서 찾아보라고 명하여 드디어 부험(傅險)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도로공사장에서 노역을 하던 열(說)을 찾아냈다. 무정이 열을 불러 대화를 해보니 과연 그는 성인이었다. 열을 그 자리에서 상나라의 제상을 삼고 부험(傅險)에서 찾았다고 해서 부(傅)성을 하사하여 부열이라 부르게 했다.>

< 帝小乙崩, 子帝武丁立. 帝武丁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 政事決定于 宰, 以觀國風. 武丁野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于是乃使百工營求之野, 得說于傅險中. 是時說爲胥靡, 築于傅險. 見于武丁, 武丁曰是也. 得而與之語, 果聖人, 擧以爲相, 殷國大治. 故遂以傅險姓之, 號曰傅說.>

520.乃稱高宗(내칭고종);

무정은 은나라를 부흥시킨 공으로 후세들로부터 고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521.帝辛湛 (제신담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 신(辛)은 주색에 빠졌기 때문에

522.諸侯不亨(제후불형).

천하의 제후들이 와서 받들지 않았다.

523.作<殷本紀>第三(작<은본기>제삼)

이에 <은본기> 제삼을 이었다.

524.維棄作稷(유기작직),

기(棄)가 자라 순임금 때 후직(后稷)이 되어

후직(后稷)/ 순임금 때 농사를 담당했던 관리들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벼슬 이름이었으나 후에 기의 이름이 되었다..

525.德盛西伯(덕성서백);

덕을 베풀자, 그 후손이 번성하여 서백(西伯)이 되었다.

526.武王牧野(무왕목야),

서백의 아들 무왕은 목야(牧野)에서 승전하여

▶목야(牧野)/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부근에 있었던 땅 이름으로 이곳에서 제후들을 규합한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과 결전을 벌려 승리하였다. 주왕은 녹대에 몸을 던져 불에 타 죽고 천하는 주나라의 것이 되었다.

527.實撫天下(실무천하);

천하를 위무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528.幽 昏亂(유려혼란),

유왕(幽王)과 려왕( 王)이 아둔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결과

▶유왕(幽王)/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 )라는 미인에게 탐닉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고 폭정을 행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북방의 이민족인 강융(羌戎)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점령하고 유왕은 살해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나라는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옮긴 것이다.

▶려왕( 王)/서주의 10대 왕으로, 즉위연도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841년에 죽었다. 려왕이 위나라에서 무당을 데려와 공포정치를 행하자 국인(國人)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려왕은 체( ) 땅으로 도망가서 살고 주나라는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섭정을 행했다. 주공과 소공 두 사람은 려왕이 체 땅에서 14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 정(靜)을 왕위에 앉히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이 14년간의 기간을 공화(共和)라 하고 려왕이 체 땅으로 도망간 해인 기원전 841년을 공화 원년이라 한다. 중국의 역사기록은 대략적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 해를 기점으로 분명해 지며 사마천 사기(史記)의 제후연표도 이 해부터 시작한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인 역사학자 진순신(陳舜臣)은 이 해를 중국역사 기원 1년으로 삼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529.旣喪 鎬(기상풍호);

풍호( 鎬)를 잃었다

▶풍호( 鎬)/동주가 하남성의 낙읍으로 옮겨가기 전까지의 서주(西周)의 도읍이었던 호경(鎬京)을 말한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長安) 서남의 풍수( 水) 강안에 있었기 때문에 풍호( 鎬)라 한 것이다. 이 구절은 서주 망하자 풍호를 버리고 낙읍으로 동천한 것을 말한다.

530.陵遲之 (능지지난),

주나라는 차츰 쇠약해지더니 난왕( 王) 때 이르러

▶난왕( 王)/ 동주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315년에서 즉위하여 기원전 256년에 죽었다. 난왕이 죽자 주나라는 진(秦)나라에 병합되었는데 사마천은 이 해를 주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531.洛邑不祀(락읍불사).

락읍에서 사직이 끊기게 되었다.

532.作<周本紀>第四(작<주본기>제사)

이에 <주본기> 제사를 지었다.

533.維秦之先(유진지선),

진나라의 선조는

534.伯 佐禹(백예좌우);

백예인데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을 보좌했다.

535.穆公思義(목공은의),

진목공(秦穆公)은 의(義)를 생각하여

▶진목공(秦穆公)/재위 기원전 660-621년. 춘추오패 중 하나이다. 재위시 진나라의 제도와 풍속을 개혁시켜 중원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나 죽을 때 진나라의 주요 관리들 170명을 순장시켰다. 그 후유증으로 진나라는 국세가 쇠미해져 전국시대 중반기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패권 다툼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진나라가 중권세력으로 대두된 것은 진목공(秦穆公)으로부터 약 300년 후인 효공(孝公 : 재위 기원전 362-338년)이 법가인 상앙(商 )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여 국세가 회복되고 나서부터이다.

536.悼豪之旅(도호지려);

효산( 山)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애도하였으나

▶호(豪)는 즉 효산( 山)을 말한다. 지금의 하남성 북서의 황하 연안의 삼문협시(三門峽市)와 민지( 池) 사이에 있다. 기원전 627년 정나라를 공격하려고 출동했던 섬진(陝秦)의 군사들이 별다른 전공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하다가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던 당진(唐晉) 군사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전멸 당했다. 진목공은 이 패전을 만회하기 세 번의 공격 끝에 3년만에 당진을 굴복시키고 효산( 山)으로 나아가 섬진군의 잔해(殘骸)를 수습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537.以人爲殉(이인위순),

그러나 목공이 죽으면서 사람으로 순장을 지내게 하니

538.詩歌<黃鳥>(시가<황조>),

그 두려움을 <황조(黃鳥)>라는 시가로 노래했고

▶황조(黃鳥)/ <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진풍(秦風)>에 나오는 시가의 제목으로 진나라의 국세를 괄목하게 신장시켜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이 된 진목공이 죽을 때 그의 측근에 있던 신하들 170명이 순장되었다. 일시에 진나라 대부분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던 관리들이 순장을 당하자 진나라의 국세는 갑자기 쇠약해지고, 그 후로는 진(秦)나라는 중원의 세력 다툼에서 뒤 처지게 되었다. 그 순장된 170여 명의 인사들 중 차씨 삼 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진나라의 삼량(三良)이라고 호칭되던 어진 사람들이었다. 진나라 백성들이 차씨 삼 형제를 순장시킨 진목공을 원망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여 부른 노래가 <황조(黃鳥)> 가이다. 그러나 남송의 문장가인 소동파는 차씨 삼 형제가 순장된 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뜻에 의해 진목공과 함께 죽은 것이지 강제적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글을 썼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539.昭襄業帝(소양업제).

후에 소양왕 때에 이르러서야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소양왕(昭襄王)/ 기원전 307년 - 251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범수(范 )와 백기를 등용하여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는 사천성을 점령하여 당시 진나라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초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어서 사천성의 인력과 자원을 이용하여 수로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인 지금의 호북성 강릉인 영성( 城)을 점령하여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하고 진나라 땅으로 삼았다. 초나라는 영성에서 쫓겨나 지금의 하남성 진성현(陳城縣)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장군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40만의 조나라 대군을 몰살 시켜 전국시대 나머지 여섯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막강한 진나라의 국력을 바탕으로 소양왕은 제나라의 민왕( 王)에게 제의하여 자기는 서제(西帝), 민왕은 동제(東帝)로 각각 호칭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얼마 후에 제민왕이 동제라는 칭호를 버리자 소양왕도 더 이상 제(帝)란 칭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소양왕(昭襄王)이 제업을 이루었던 말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540.作<秦本紀>第五(작<진본기>제오)

이에 <진본기> 제오를 지었다.

541.始皇卽位(시황즉위),

진시황이 즉위하자

542.竝兼六國(병겸육국);

나머지 육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543.銷鋒鑄 (소봉주거),

무기를 녹여 쇠북을 만들어

544.維偃干革(유언간혁),

군사들을 쉬게 하고 전쟁을 막고

545.尊號稱帝(존호칭제),

호칭을 높여 제(帝)라 칭하며

546.矜武任力(긍무임력);

무력을 과시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547.二世受運(이세수운),

이세에 이르자 그 운이 다하여

548.子 降虜(자영항로).

자영(子 )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자영(子 )/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기원전 206년에 죽었다. 진시황의 장남 부소(扶蘇)의 아들,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혹은 진시황 동생의 아들이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살해하고 자영을 세웠으나 자영은 제호(帝號)를 버리고 조고를 죽였다. 조고의 삼족도 같이 멸했다. 재위 46일 만에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항복하여 항우(項羽)에게 보내졌다. 후에 항우에 의해 살해 당했다.

549.作<秦始皇本紀>第六(작<진시황본기>제육)

이에 <진시황본기> 제육을 지었다.

550.秦失其道(진실기도),

진나라가 그 도를 상실하자

551.豪傑幷擾(호걸병요);

천하의 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더니

552.項梁業之(항량업지),

항량이 제일 먼저 공업을 세우고

553.子羽接之(자우접지);

항우가 그 뒤를 계승하였다.

554.殺慶救趙(살경구조),

이어서 항우는 조나라를 구한 다음 경자관군(慶子冠軍)을 죽이자

▶경자장군(慶子將軍)/ 송의가 지휘하던 군사들을 부르던 이름.

▶송의(宋義)/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7년에 죽었다. 진나라 말에 반진의 기치를 들고 일어 난 농민군의 장군. 초나라가 진나라에 망하기 전 초나라의 영윤을 지냈었기 때문에 당시 반진 세력의 지도자 격이었던 항량(項梁)을 따랐다. 항량이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같이 종군하다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항량이 교만한 기색을 보이자 송의가 간하기를 " 싸움에 이겼다고 장수들은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고 군사들은 게으르게 된다면 그 군사들은 다음 번 싸움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했으나 항량은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이어서 항량은 계속해서 벌어진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과의 싸움에서 패했다. 초회왕이 송의가 군사를 잘 부리는 것을 알고 그를 상장군에 명하고 항우(項羽)를 차장으로, 여러 장수들은 그의 휘하에 두도록 하였다. 회왕은 송의를 경자장군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조나라를 구하라는 초회왕의 명을 받은 두 사람이 출병하여 조나라를 구원했으나 항우가 초회왕의 거짓 명으로 군중에서 송의를 살해하고 반군의 수장이 되었다.

555.諸侯立之(제후립지);

제후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556.誅 背懷(주영배회),

이어서 항우는 진나라의 왕 자영(子 )을 죽이고 회왕을 배신하니

557.天下非之(천하비지).

천하 사람들은 그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558.作<項羽本紀>第七(작<항우본기>제칠)

이에 항우본기 제칠을 지었다.

559.子羽暴虐(자우포학),

항우는 포학하였으나

560.漢行功德(한생공덕);

한왕 유방은 공을 세우고 덕을 베풀었으며

561.憤發蜀漢(분발촉한),

촉과 한 땅에서 분발하여

▶촉(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지방을 말함.

▶한(漢)/ 지금의 한중시(漢中市) 일대를 말함.

562.還定三秦(환정삼진);

관중으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삼진(三秦)/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옹(雍), 색(塞), 적(翟) 등으로 삼분하여 다스렸다. 함양 이서의 섬서성과 감숙성 동부는 장한(章邯)에게 맡겨 옹왕(雍王)에, 함양 이동지역은 사마흔(司馬欣)에 맡겨 색왕(塞王)에, 섬서성 북쪽은 동예(董 )에 맡겨 적왕(翟王)에 봉했다. 후에 한신의 전격작전에 의해 모두 한왕의 소유가 되어 후에 항우와의 결전에서 유방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

563.誅籍業帝(주적업제),

항우를 죽이고 제업을 이루자

564.天下惟寧(천하유녕),

천하는 비로소 안정되었고

565.改制易俗(개제이속).

엄혹한 진나라의 법제를 고치고 백성들의 풍속을 바꾸었다.

566.作<高祖本紀>第八(작<고조본기>제팔).

이에 고조본기(高祖本紀) 제8을 지었다.

567.惠之早 (혜지조운),

고조의 뒤를 이은 혜제가 일찍 죽은 뒤

▶ 혜제(惠帝) 유영(劉盈)/ 한고조 유방의 아들로서 그의 나이 23세 때 죽었다. 기원전 195 - 188년으로 7년간 재위에 있었다.

568.諸呂不台(제려부태),

여씨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569.崇强祿, 産,(궁강록, 산)

여록(呂祿)과 여산(呂産)을 높여 강력한 권세를 주자

▶여록(呂祿)/ 여후의 둘째 오빠 건성후(建成侯) 여석지(呂釋之) 아들로서 여후에게는 생질(甥姪)이 된다. 여태후(呂太后) 섭정 원년(기원전 187년) 호릉후(胡陵侯)메 봉해지고 무신후(武信侯)라 불리웠다. 섭정 8년 기원전 180년에 여태후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상장군에 임명되어 도성의 북군(北軍)을 관장하였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자 여산(呂産)과 함께 란을 일으켜 여씨 왕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발(周勃), 진평(陳平) 등에게 살해되고 그가 이끌던 여씨 일족들은 멸족되었다.

▶여산(呂産)/ 여태후의 큰오빠 여주(呂周)의 차자. 혜제 원년 기원전 194년 교후(交侯)에 봉해졌다. 여태후 6년 기원전 182년 여왕(呂王)에 봉해졌다. 여태후에 의해 도성의 남군을 관장하는 장군에 임명되고 다시 여태후가 죽자 여록과 함께 란을 일으켰으나 주발과 진평에 의해 살해되었다.

570.諸侯謨之(제후모지);

제후들이 도모하려고 하였다.

571.殺隱幽友(살은유우),

여태후가 조나라의 은왕(隱王) 여의(如意)와 유왕(趙幽王) 우(友)를 죽이자

▶은(隱)/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를 말하며 유여의는 고조의 총비 척비(戚妃) 소생으로 고조가 죽자 여태후가 불러 독약을 먹여 죽이고 척비는 눈알을 뽑고, 팔다리를 자른 다음 우리에 가두어 돼지처럼 키우다 죽였다.

▶유우(幽友)/ 고조 유방의 아들로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조왕(趙王)에 다시 봉해졌다. 혜제가 죽고 여태후의 전힁에 반대하자 살해되었다.

572.大臣洞疑(대신통의),

모든 대신들이 여씨들을 의심하게 되어

573.遂及宗禍(수급종화).

결국은 그 종족들이 멸족의 화를 입게 되었다.

574.作<呂太后本紀>第九(작<여태후본기>제구)

이에 여태후본기를 제 9를 지었다.

575.漢旣初興(한기초흥),

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576.繼嗣不明(계사불명),

제위를 잇는 순서가 확실하지 않아

577.迎王踐祚(영왕천조),

대왕(代王)을 모셔 와 제위(帝位)에 앉히자

▶대왕(代王)/ 고조의 4남 유항(劉恒)이며 문제(文帝)이다. 재위에 오르자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고 산업을 장려하였으며, 검소한 생활을 몸소 행하여 뒤를 이은 경제(景帝)와 함께 치세를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 때를 가리켜 문경(文景)의 치(治)라 부른다.

578.天下歸心(천하귀심);

비로소 천하의 인심이 안정이 되었다.

579. 除肉刑(견제육형),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을 없애고,

580.開通關梁(개통관량),

통행의 요로에 설치한 관(關)과 나루터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581.廣恩博施(광은박시),

그 은혜를 널리 베풀자

582.厥稱太宗(궐칭태종),

그를 일컫어 태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83.作<孝文本紀>第十(작<효문본기>제십)

이에 <효문본기(孝文本紀)> 제 10을 지었다.

584.諸侯驕恣(제후교자),

제후들이 교만 방자해진 결과

585.吳首爲亂(오수위란),

오왕이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586.京師行誅(경사행주),

황제의 군사를 보내어 반란자들을 주살하니

587.七國伏辜(칠국복고),

칠국이 그 죄에 굴복하였다.

588.天下翕然(천하흡연),

천하는 화평하게 되었고

589.大安殷富(대안은부).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이 되어 풍요롭게 되었다.

590.作<孝景本紀>第十一(작<효경본기>제십일)

이에 <효경본기(孝景本紀)> 제 11을 지었다.

591.漢興五世(한흥오세),

한나라가 흥기한 지 오세에 이르러

592.隆載建元(융재건원),

건원(建元) 연간에 융성해 졌다.

▶건원(建元)/ 한무제가 시작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된 연호이다. 한무제 원년 기원전 140년부터 무제 5년 기원전 136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593.外攘夷狄(외양이적),

나라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고

594.內脩法度(내수법도),

나라 안으로는 법규를 정비하였고

595.封禪,改正朔, 易服色(봉선, 개정삭, 이복색).

봉선을 행했으며, 역법을 고치고 , 복색을 바꾸었다.

596.作<今上本紀>第十二(작<금상본기>제십이

이에 금상본기(今上本紀) 제 12를 지었다.

597.維三代尙矣(유삼대상의),

하상주(夏商周) 삼대는 너무 먼 옛날의 일이라

598.年紀不可考(연기불가고),

구체적인 연대기를 고찰할 수 없어

599. 盖取之譜牒舊聞(개취지보첩구문),

대체적으로 보첩이나 전언에

600.本于玆(본우자),

근거하여

601.于是略推(우시략추),

대략적인 추측으로

602. 作<三代世表>第一(작<삼대세표> 제일).

삼대세표(三代世表) 제일을 지었다.

603. 幽 之后(유려지후),

주나라의 려왕( 王)과 유왕(幽王) 이후에

604. 周室衰微(주실쇠미),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자

605. 諸侯專政(제후전정),

제후들이 그 정치를 스스로 행하였으나

606. <春秋>有所不紀(<춘추>유소불기);

춘추에도 그 기록이 빠진 것이 있다.

607.而譜牒經略(이보첩경략),

그러나 보첩에 기록된 경의 간단한 기록들을 보면

606. 五覇更盛衰(오패갱성쇠),

오패가 번갈아 가며 흥하고 망했다.

607. 慾睹周世相先后之意(욕도주세상선후지의),

그래서 주나라 시대에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한 눈으로 살펴보기 위해

608. 作<十二諸侯年表>第二(작<십이제후연표>)

<십이제후연표> 제이를 지었다.

609. 春秋之后(춘추지후),

춘추시대 이후로

610. 陪臣秉改(배신병개),

배신들이 정권을 잡고

611. 强國相王(강국상왕);

강국이 되어 서로 왕호를 칭했다.

612. 以至于秦(이지우진),

이윽고 진나라에 이르러

613. 卒幷諸夏(졸병제하),

중원의 제후국들을 모조리 병합하고

614. 滅封地(멸봉지),

그들의 봉지를 없앤 다음

615. 擅其號(천기호).

제호(帝號)를 제멋대로 칭했다.

616. 作<六國年表>第三(작<육국연표>)

이에 <육국연표> 제삼을 지었다.

617. 秦旣暴虐(진기포학),

진나라가 이미 폭정을 행하매

618. 楚人發難(초인발난),

초나라 사람이 일어나 난을 일으켰다.

619. 項氏遂亂(항씨수란),

항우가 그 뒤를 이으니

620. 漢乃扶義征伐(한내부양정벌);

한나라는 의를 내세워 정벌군을 일으켰다.

621. 八年之間(팔년지간),

그 팔 년 동안

622. 天下三 (천하삼선),

천하는 주인이 세 번 바뀌었으며

▲ 삼선(三 )/ 세 번 바뀌었다는 말은 처음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든 진승(陳勝)과 그 뒤를 이는 항우(項羽), 뒤이어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격파하고 한왕조를 세운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623. 事繁變衆(사번변중),

사건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다.

624. 故詳著<秦楚之際月表>第四(고상저 <진초지제월표>제4)

이에 상세하게 진초쟁패월표 제4를 지었다.

625. 漢興以來(한흥이래),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626. 至于太初百年(지우태초백년)

태초(太初)에 이르기까지 백년이 지나는 동안

▲태초(太初)/한무제 때 사용한 10개의 연호 중 7번째의 것으로 기원전 103년부터 101년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627. 諸侯廢立分削(제후폐립분삭),

제후들은 그 지위를 잃어버리거나 다시 세워지고, 그 봉지는 나뉘거나 깎였으나

628. 譜記不明(보기불명),

그 보첩(報牒)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629. 有司靡踵(유사미종),

사관이 그 행적을 쫓지 못하고

630. 强弱之原雲以世(강약지원운이세)

강약의 원리를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약지원운(强弱之原雲)/ 제후국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먼저 망하고 약하면 약할수록 요행히 살아 남은 현상을 말한다.

631. 作<漢興以來諸侯年表>第五(작<한흥이래제후연표>제오)

이에 <한흥이래제후연표> 제오를 지었다.

632. 維高祖元功(유고조원공),

고조(高祖)가 천하를 얻었을 때,

633. 輔臣股肱(보신고굉),

그를 보좌한 창업공신들은

644. 剖符而爵(부부이작),

모두가 신임을 받아 봉록과 작위를 얻어

645. 澤流苗裔(택류묘예),

그 은혜와 혜택이 후세에 전해졌으나

646. 忘其昭穆(망기소목),

그 중에는, 가깝고 먼 친분관계를 망각한 결과

▶소목(昭穆)/ 고대의 종법(宗法) 제도로서 종묘(宗廟)와 묘지(墓地)에 모시는 신위(神位)의 순서로서, 그 시조(始祖)는 가운데에 두고 소(昭)라 칭했으며, 그 후손들 중 2, 4, 6 세 등의 후손들은 시조의 좌측에, 3, 5, 7 세 등의 후손들은 우측에 두고 목(穆)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소목(昭穆)이라는 말은 종족들 간의 가깝고 먼 관계를 말한다.

647. 惑殺身隕國(혹살신운국).

그 중에 어떤 제후들은 생명을 잃기도 하고 혹은 나라를 잃기도 했다.

648. 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작<고조공후자연표>제육)

이에 <고조공신후자연표> 제육을 지었다.

649. 北討强胡(북토강호),

북쪽으로는 강성한 흉노를 토벌하고

650. 南誅勁越(남주경월),

남쪽으로는 억센 월인들을 죽였으며

651. 征伐夷蠻(정벌이만),

다시 동이와 남만의 오랑캐를 정벌했다.

652. 武功爰列(무공원열)

그때 세운 무공의 순서에 따라 열후에 세워졌다.

653. 作<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작<건원이래후자연표>제팔)

이에 <건원이래제후연표> 제팔을 지었다.

654. 諸侯旣强(제후기강),

제후들이 이미 강성해지자

655. 七國爲從(칠국위종),

칠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칠국(七國)/ 오초(吳楚) 칠국의 란을 말함. 전한의 6대 황제인 경제(景帝 : 재위 기원전 157 - 141년으로 한무제는 그의 아들이다.) 때인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 )가 주도한 반란. 칠국이란 오왕 외에 초왕(楚王) 유무(劉戊), 교서왕(膠西王) 유앙(劉 ),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熊渠), 치천왕(淄川王) 유현(劉賢),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 光), 조왕(趙王) 유수(劉遂) 등을 말한다. 경제가 즉위하자 법가인 조착( 錯)을 기용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줄이려고 하자 칠왕이 령에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周亞夫), 란포(欒布), 두영(竇 ) 등의 장군을 보내어 진압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는 조착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칠국의 제후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 마저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오초(吳楚) 연합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지금의 안휘성 영성(永城) 북서 쪽의 극벽(棘壁)이란 곳에서 양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그러나 오초 반란군도 양나라의 도성인 수양성( 陽城)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다. 오초 연합군이 양나라의 수양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를 태위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주아부는 토벌군을 이끌고 지금의 산동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있던 전략상의 요충지인 창읍(昌邑)으로 들어가 오초 연합군이 본국과의 연락로를 끊었다. 반란군이 창읍으로 달려와 토벌군을 공격했지만 주아부는 대응하지 않고 지구전을 벌렸다. 오초 반란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있었음으로 시간이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반란군은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이었다. 주아부의 생각대로 이윽고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져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한 장병들이 잇달아 달아났다. 주아부가 창읍의 성에서 나와 반란군의 본군을 공격했다. 오왕은 친위대만을 데리고 달아났고 초왕 유무(劉戊)는 자살하고 말았다. 한편 교서, 교동, 치천, 제남의 왕들은 연합하여 오초에 호응하려고 했으나 제남왕이 중도에 마음을 바꿔 반란군에서 이탈하자 세 왕의 연합군이 그 도성인 임치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남왕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싸움은 교착상태로 빠졌다. 그 사이 오초 연합군이 주아부의 토벌군에 패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왕들은 임치성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철수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토벌군이 추격하자 세 왕은 모두 자살했다. 한편 조왕 유수는 한단성(邯鄲城)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지만 한나라 장군 역기( 寄)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 역시 자살하고 말았다. 창읍에서 달아난 오왕 유비는 장강을 도하하여 오나라 본국으로 들어가자 오왕의 요청에 응하여 출동한 동월군(東越軍)의 마중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는 반란군에게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한 동월왕은 한나라 조정과 내통하고 있던 상태였다. 동월군은 오왕을 잡아죽이고 그 목을 한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이윽고 오초칠국의 란은 조왕이 한단성에서 농성하다 자살한 시점을 그 끝으로 본다면 10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림. 8 오초칠국의 란 형세도.

656. 子弟衆多(자제다중),

그러나 제후들의 자제가 많아지자

657. 無爵封邑(무작봉읍),

그들에게 나누어 줄 작위에 봉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658. 推恩行義(추은행의),

이에 은혜를 베풀어 의를 행하도록 하여

▶추은(推恩)/ 한무제 14년 원삭 2년 즉 기원전 127년에 무제는 주보언(主父偃)의 건의에 따라 추은령(推恩令)내려 제후들의 작위를 계승한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자제들에게도 그 봉토를 나누어주어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659. 其勢銷弱(기세소약),

그 세력을 약화시켰고

660. 德歸京師(덕귀경사).

그 덕은 모두 황실로 향하게 했다.

661. 作<王子侯者年表>第九(작<왕자후자연표>제구)

이에 <왕자후자연표>제구를 지었다.

662. 國有賢相良將(국유현상양장),

나라에 어진 재상과 훌륭한 장수가 있음은

663. 民之師表也(민지사표야).

백성들의 본보기다.

664. 維見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유견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장군과 재상 그리고 명신 연표를 보고

665. 賢者記其治(현자기기치),

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그 치적을 기록하고

666. 不賢者彰其事(불현자창기사).

어질지 못할 자에게는 그가 저지른 잘못을 기록하여 널리 알렸다.

667. 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第十(작<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십)

이에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십을 지었다.

668. 維三代之禮(유삼대지례),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예(禮)는

669. 所損益各殊務(소손익각수무),

덜하고 더한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각기 그 일의 사정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670. 然要以近性情(연요이근성정),

그러나 그 요지는 사람의 성정에 가까이 하고

671. 通王道(통왕도),

왕도에 통하고자 한 것이다.

672. 故禮因人質爲之節文(고예인인질위지절문),

그럼으로 예(禮)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화려함을 절제하고

673. 略協古今之變(약협고금지변).

대략 고금의 변을 참작하게 한다.

674. 作<禮書>第一.(작<예서>제일)

이에 <예서> 제일을 짓는다.

675. 樂者(악자),

음악이란 것은

676. 所以移風易俗也(소이이풍역속야).

풍속을 옮기고 바꾸는 것이다.

677. 自<雅><頌>聲興(자<아><송>성흥),

<아(雅)>와 <송(頌)>의 소리가 일어나면서부터

678. 則已好鄭衛之音(즉이호정위지음)

사람들은 이미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어,

679. 鄭衛之音所從來久矣(정위지음소종래구의).

정과 위 두 나라의 음악은 그 유래가 오래게 되었다.

680. 人情之所感(인정지소감),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이 정으로서 감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681. 遠俗則懷(원속즉회).

풍속이 전혀 다른 먼 지방의 사람까지도 회유할 수 있다.

▶遠俗則懷(원속즉회) " 惡子所以感和人情. 人情旣感卽遠方殊俗莫不懷柔向化也" 懷, 人心歸向.-史記集解,

被人情所感發, 那遠方異俗之人就會歸附-文白對照

682. 比<樂書>以述來古(비<악서>이술래고),

악서를 참고하여 상고 이래의 음악에 대해 기술하였다.

683. 作<樂書>第二(작<악서> 제이)

이에 <악서> 제이를 지었다.

684. 非兵不强(비병불강),

군사가 없으면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없고

685. 非德不昌(비덕불창),

나라 안에 덕이 없으면 번창하게 할 수 없다.

686. 黃帝, 湯, 武以興(황제, 탕, 무이흥),

황제와 탕임금, 주무왕은 나라를 일으켜 흥성하게 만들었으나

687. 桀, 紂, 二世以崩(걸, 주, 이세이붕)

하나라의 걸왕(桀王), 상나라의 주왕(紂王), 그리고 진나라의 이세(二世)는 나라를 망친 임금이 되었다.

688. 可不愼歟(가불신서).

이에 이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689. <司馬法>所從來尙矣(<사마법>소종래상의),

<사마병법>은 전해 온지 이미 오래 되었고

▶사마법(司馬法)/ 전국시대 때 제나라 위왕(威王: 재위 기원전 359- 319년)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여 과거 장군들이 써 놓았던 병서를 정리하게 했는데 그 중 제나라 경공(景公 : 재위 기원전 547- 490년) 때의 명장 사마양저(司馬穰 )의 병법이 포함되어 있어 사마양저병법이라고 칭하고 줄여서 사마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690 太公, 孫, 吳, 王子能紹而明之(태공, 손, 오, 왕자능소이명지),

태공(太公) 여상(呂尙), 손자(孫子), 오기(吳起), 왕자성보(王子成父) 등은 능히 그 원리를 이어 받아 병사의 일을 밝힐 수 있어

▶여상(呂尙)/ 병법서인 육도(六韜)를 지었다. 육도는 태공이 주문왕과 주무왕에게 경세제민(經世濟民)과 부국강병(富國强兵) 책에 대해 논한 것이다. 모두 3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 문무도(文武韜) 17편은 치국(治國) 관하여, 제2권 용호도(龍虎韜) 25편은 기변(奇變)과 용맹과단(勇猛果斷), 제3권 표견도(豹犬韜) 18편은 기계(奇計)와 돌진(突進)에 관해 서술했다.

손자(孫子)/ 손자는 오자서와 함께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한 손무(孫武)와, 후에 제위왕(齊威王) 밑에서 방연(龐涓)이 이끄는 위나라의 군사를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에서 대파한 제나라의 손빈(孫 ) 두 사람을 말한다. 두 사람은 각각 별도의 병법서를 저술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자(吳子)/ 오기(吳起)를 말한다. 전국시대 때 전략가로 원래 위(衛)나라 사람이다. 처음에는 노나라에서 장군을 했고 이어서 위(魏)나라로 옮겨 여러 번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위문후(魏文侯)에 의해 서하(西河) 태수로 임명되었다. 위문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위무후(魏武侯)가 즉위하자 초나라로 망명했다. 초도왕(楚悼王 : 재위 기원전 402-381년) 밑에서 영윤(令尹)에 임명되어 초나라의 법률을 개선하고 제도를 혁신시켜 초나라의 국력을 일신시켰다. 도왕이 죽자 오기의 개혁 정치에 불만을 품은 공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왕자성보(王子成甫)/ 춘추 때 제나라 양공(襄公 : 재위 기원전 698-686년) 때 정경(正卿)으로, 유명한 군사전략가. 왕자성보(王子成父), 혹은 왕자성보(王子城父)라고도 한다. 제환공이 재위에 오르자 그를 제나라의 대장으로 삼았다. 그는 군법을 밝혔으며 신상필벌을 행하여 일단 정벌군을 일으키면 싸움에서 이겨 환공을 짧은 시간에 패자의 자리에 끌어 올렸다. 이에 사마천은 그를 태공, 손자, 오기와 같은 반열에 세웠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왕손(王孫)>의 작으로 병법 16편이 실려 있는데 이것을 왕자성보의 병법서로 보고 있다.

691. 切近世(절근세),

근자의 정세를 살피는데 적합하고

692. 極人變(극인변),

인사의 변화에 대해 통하게 했다.

693. 作<律書>第三(작<율서>제삼)

이에 <율서> 제삼을 지었다.

694. 律居陰而治陽(율거음이치양),

율은 음(陰)에 근거로 하여 양(陽)을 다스리며

695. 曆居陽而治陰(역거양이치음),

력은 양을 근거로하여 음을 다스린다.

696. 律曆更相治(율력갱상치),

그래서 율과 역은 번갈아 가며 서로를 다스림으로

697. 間不容 忽(간불용표홀).

간발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다.

698. 五家之文 異(오가지문불이),

옛날 다섯 왕조에서 만든 역법은 서로 같지 않아 옳다고 여겨지지 않으나

▶오가지문(五家之文)/ 황제력(黃帝曆), 전욱력( 頊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을 말한다.

699. 維太初之元論(유태조이원론).

단지 태초 원년만이 바른 것이라고 논하는 바다.

700. 作<曆書>第四(작<역서>제사)

이에 <역서> 제사를 짓는다.

701. 星氣之書(성기지서),

별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에 대한 서적은

702. 多雜 祥(다잡기상),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를 잡다하게 늘어놓고 있지만

703. 不經(불경);

황당하고 근거가 없어 상도가 아니다.

704. 推其文(추기문),

그 문장을 미루어 연구하여

705. 考其應(고기응),

그것의 효험을 고찰해 봤으나

706. 不殊(불수).

결코 특이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707. 比集論其行事(비집논기행사).

황제께서 전문가들을 불러 그 일에 대한 것들을 토론하여 규명하도록 명하여

708. 驗于軌度以次(험우궤도이차),

그 순서에 따라 운행되는 법도를 파악하였다.

709. 作<天官書>第五.(작<천관서>제오)

이에 <천관서>제오를 지었다.

710. 受命而王(수명이왕),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711. 封禪之符罕用(봉선지부한용),

봉선을 행하는데 소홀히 했다.

712. 用則萬靈罔不 祀(용즉만령망불인사).

만일 봉선을 한 번 행한다면 세상의 모든 신들이 따로 제사를 받지 않아도 됨으로

713. 追本諸神名山大川禮(추본제신명산대천례).

이에 명산대천의 여러 신들에 대한 제례에 대해 그 근본을 추구하여

714. 作<封禪書>第六(작<봉선서>제육)

<봉선서> 제육을 지었다.

715. 維禹浚川(유우준천),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하수(河水)를 뚫어

716. 九州攸寧(구주유녕);

구주가 평안하게 되었고

717. 爰及宣防(원급선방),

선방궁(宣房宮)을 건설할 때는

▶선방궁(宣房宮)/원광(元光) 3년 기원전 132년 황하가 호자(瓠子)에서 범람하였다. 그후 20여 년 후에 한무제(漢武帝)가 명하여 호자의 둑을 다시 만들고 그 자리에 궁을 짓고 선방궁이라 이름지었다.

▶호자(瓠子)

718. 決瀆通溝(결독통구).

도랑을 뚫어 강물을 통하게 만들었다.

719. 作<河渠書>第七(작<하거서>제칠)

이에 <하거서> 제칠을 짓는다.

720. 維幣之行(유폐지행),

화폐의 유통시키는 것은 단지

721. 以通農商(이통농상);

농사와 상업을 통하게 함이다.

722. 其極則玩巧(기극즉완교),

그러나 그 극단에 치우치게 되면 농단과 재주를 부리며

723. 竝兼玆殖(병겸자식),

남의 재산을 합쳐 증식시키기 위해

724. 爭于機利(쟁우기리),

서로 그 이익을 다투게 되어

725. 去本趨末(거본추말).

상업이 농업을 압도하게 되어 본말이 전도되게 된다.

726. 作<平準書>以觀事變, 第八(작<평준서>이관사변, 제팔)

이에 그 일의 변화를 보기 위해 <평준서> 제팔을 짓는다.

727. 太伯避歷(태백피력),

태백이 계력을 피해

▶태백(太伯)/ 주족(周族)의 족장.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태백(太伯), 우중(虞仲), 계력(季歷)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고공단보가 계력의 아들인 창(昌)이 주족을 일으킬 재목임을 알고 그의 자리를 계력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계력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남만으로 달아나 만족의 습속을 하고 살다가 그곳의 군주가 되었다. 한편 주나라는 계력의 뒤를 이은 창(昌)이 주족의 족장이 되어 은나라로부터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인 무왕 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창의 시호가 주문왕(周文王)이다.

728. 江蠻是適(강만시적);

강수를 넘어 남만으로 달아났다.

729. 文武攸興(문무유흥),

이어 주나라는 주문왕과 주무왕의 치세에 힘입어 흥기하여

730. 古公王迹(고공왕적).

고공단보가 꿈꾸었던 왕업을 세웠다.

731. 闔廬弑僚(합려시료),

한편 태백의 후예들이 세운 남만의 오나라에서는 합려가 왕료(王僚)를 시해하여 그 군주를 차지하고

732. 賓服荊楚(빈복형초);

다시 초나라를 복종시켰으며

733. 夫差克齊(부차극제),

다시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겨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734. 子胥 夷(자서치이);

다시 오자서를 죽여 말가죽 부대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

735. 信 親越(신비친월),

부차는 백비(伯 )의 간사스러운 말을 믿고 월나라와 친해진 결과

736. 吳國旣滅(오국기멸).

오나라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737. 嘉伯之讓(가백지양),

태백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한 미덕을 기리어

738. 作<吳世家>第一(작<오세가>제일).

<오세가> 제일을 지었다.

739. 申呂肖矣(신려초의),

신(申)과 여(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신(申)/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원래 신나라의 근거지는 섬서성 북쪽이었으나 주선왕 때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의 땅에 봉해졌다.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신의 땅은 초나라가 북진하는데 전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여(呂)/ 역시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사악(四嶽)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쪽에 있었다. 여나라도 역시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병탄 당했다.

740. 尙父側微(상보측미),

상보(尙父)는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었다가

741. 卒歸西伯(졸귀서백),

결국은 서백에게 귀의하여

742. 文武是師(문무시사);

주문왕과 주무왕의 스승이 되었다.

743. 功冠群公(공관군공),

그가 세운 공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었고

744. 繆權于幽(무권우유);

권모술수에 제법 능했다.

745. 番番黃髮(번번황발),

그는 자기의 머리가 황백색으로 변한 90 노구에

746. 爰饗營口(원향영구).

제나라 땅인 영구(營口)를 봉지로 받았다.

747. 不背柯盟(불배가맹),

그의 후손 중 가(柯) 땅의 맹약을 배반하지 않았던

748. 桓公以昌(환공이창),

제환공은 그로 인하여 크게 일어나

749. 九合諸侯(구합제후),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회합시킬 수 있었고

750. 覇公顯彰(패공현창).

패자가 되어 그 업적이 만고에 빛나게 되었다.

751. 田 爭寵(전감쟁총),

후에 전상(田常)과 감지( 止)가 제나라 군주의 총애를 다투다가

752. 姜姓解亡(강성해망).

이윽고 강성의 제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753. 嘉父之謀(가부지모),

상보(尙父)의 훌륭한 권모를 칭송하여

754. 作<齊太公世家>第二(작<제태공세가>제이)

<제태공세가>제이를 짓는다.

755. 依之違之(의지위지),

주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어떤 자들은 복종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따르지 않았다.

756. 周公綏之(주공수지);

주공단이 이것을 안정시키고

757. 憤發文德(분발문덕),

문덕을 베푸는데 한층 분발하자

758. 天下和之(천하화지);

천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759. 輔翼成王(보익성왕),

주공단이 어린 성왕을 보좌했음으로

760. 諸侯宗周(제후종주),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고

761. 隱桓之際(은환지제),

그러나 주공단의 자손들인 노은공(魯隱公)과 노환공(魯桓公) 시대 때는

762. 是獨何哉(시독하재)?

어찌하여 유독 편안하지 못했던가?

763. 三桓爭强(삼환쟁강),

삼환이 서로 세력을 다투었기 때문에

▶삼환(三桓)/ 춘추시대 때 노나라의 국정을 전담했던 세 귀족 가문을 말하며 세 가문의 시조는 모두 노환공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삼환이라 부른 것이다. 노환공은 문강을 따라 제나라를 방문했다가 제양공에게 살해당했다. 노환공이 두 사람의 간통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제양공(齊襄公)이 사람을 시켜 수레 안에서 살해 한 것이다. 노환공의 뒤는 적장자인 노장공(魯庄公) 동(同)이 이었다. 노장공의 서장자인 공자경보(公子慶父)와 숙아(叔牙) 그리고 계우(季友)의 후손들을 삼환이라 한 것이다. 삼환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桓公 x宮女

①孟孫氏/식읍은 성읍( 邑)이다.

公子慶父 ⇒公孫敖 ⇒公孫穀/公孫難 ⇒仲孫蔑

②叔孫氏/식읍은 후읍( 邑)이다.

公子牙(叔牙) ⇒ 公孫玆⇒叔仲彭生 ⇒叔孫得臣 ⇒叔孫僑如

桓公x文姜 ▶庄公(公子同)⇒ 東門遂(장공의 서자/仲遂)⇒

/仲孫氏

③季孫氏/식읍은 비읍(費邑)과 문양(汶陽)이다.

公子友(季友)⇒ 季无佚⇒ 季孫行夫(季文子)

764. 魯乃不昌(노내불창).

노나라는 결국은 크게 번창하지 못한 것이다.

765. 嘉旦<金 >(가단<금등>)

주공단이 행한 금등(金 )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여

▶금등(金 )/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일 년만에 병이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주공단은 주무왕 대신에 자기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선조들에게 기도를 들였다. 그리고 태사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고 축문을 쓰서 읽게하였다. 점의 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 점괘를 금괘 안에 보관하고 금으로 밀봉하였다. 금등이란 금을 녹여 그 물로 봉함한 궤를 말했으나 후에 그 안에 든 축문의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그 축문은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수록되어 있다.

766.作<周公世家>第三(작<주공세가>제삼)

<주공세가>제삼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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