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C%A0%84%EC%88%A0%ED%95%B5%20%EC%9E%AC%EB%B0%B0%EC%B9%98

 

전술핵 재배치 - 나무위키

완전한 전술핵 재배치가 어렵다면 '전술핵 재배치를 할 수 있다' 내지는 '유사시 전술핵 탑재 무기가 확실히 전개된다'는 시그널이라도 보내자는 입장도 있다. 2023년 1월 23일 발표된 미국 싱크탱

namu.wiki

 

요순시절부터 제왕의 덕목은 부국강병이었다.

국가지도자라면 마땅히 국민들을 더욱 잘살게 하고

국가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군사력을 확보하여 안정된 생활을 영위케 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관우를 관왕으로 추존하여 관왕묘(關王廟, 관우 사당)를 세워 위기 극복과 국가의 안정을 기원했다.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고집하여 나토식 핵공유의 제안은 물건너 갔으니 약자가 어떡하나?

 'American Pie' 라도 흉내내어 동맹으로서 절실함을 호소할 수밖에.

가창자는아래 가사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This will be the day that I die

...........

"This'll be the day I die"를 노래하며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https://www.youtube.com/watch?v=yiZ9l3kZ74Y 

 

 

https://www.youtube.com/watch?v=tkxCSb233Rw

 

 

Don McLean, American Pie. 1970/  가사 국역

 
아주 오래전, 아직도 기억나
Long long time ago, I can still remember


그 음악이 나를 어떻게 웃게 했는지
How that music used to make me smile


그리고 기회가 있는지 알았어
And I knew if I had my chance


그 사람들을 춤추게 할 수 있다는 걸
That I could make those people dance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잠시 동안 행복할 것입니다.
And maybe they'd be happy for a while
 
하지만 2월은 날 떨리게 만들었어
But February made me shiver


내가 전달하는 모든 서류와 함께
With every paper I'd deliver


문앞에 나쁜 소식
Bad news on the doorstep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어
I couldn't take one more step
 
울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I can't remember if I cried


그의 미망인 신부에 대해 읽을 때
When I read about his widowed bride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건드렸다
But something touched me deep inside


음악이 죽은 날
The day the music died
 
그럼 안녕, 미스 아메리칸 파이
So bye-bye, Miss American Pie


내 Chevy를 제방으로 몰아
Drove my Chevy to the levee


하지만 제방은 말랐다.
But the levee was dry


좋은 늙은이들이 위스키와 호밀을 마시고 있었어
Them good old boys were drinking whiskey and rye


"This'll be the day I die"를 노래하며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This will be the day that I die
 
사랑의 책을 쓰셨습니까?
Did you write the Book of Love?


그리고 위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까?
And do you have faith in God above?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If the Bible tells you so


당신은 로큰롤을 믿습니까?
Do you believe in rock 'n' roll?


음악이 당신의 필멸의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까?
Can music save your mortal soul?


그리고 정말 천천히 춤추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And can you teach me how to dance real slow?
 
당신이 그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아요
Well I know that you're in love with him


네가 체육관에서 춤추는 걸 봤거든
'Cause I saw you dancing in the gym


둘 다 신발을 벗었습니다.
You both kicked off your shoes


그런 다음 리듬과 블루스를 파헤칩니다.
Then I dig those rhythm and blues
 
난 외로운 10대 야생마였어
I was a lonely teenage broncin' buck


분홍 카네이션과 픽업트럭으로
With a pink carnation and a pickup truck


하지만 난 내가 운이 없다는 걸 알았어
But I knew I was out of luck


음악이 죽은 날
The day the music died
 
난 안녕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미스 아메리칸 파이
I started singing bye-bye, Miss American Pie


내 Chevy를 제방으로 몰아
Drove my Chevy to the levee


하지만 제방은 말랐다.
But the levee was dry


좋은 늙은이들이 위스키와 호밀을 마시고 있었어
Them good old boys were drinking whiskey and rye


"This'll be the day I die"를 노래하며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This will be the day that I die
 
이제 10년 동안 우리는 혼자였습니다.
Now for ten years we've been on our own


그리고 이끼는 구르는 돌 위에서 살이 찐다
And moss grows fat on a rolling stone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But that's not how it used to be


광대가 왕과 왕비를 위해 노래할 때
When the jester sang for the King and Queen


제임스 딘에게서 빌린 코트를 입고
In a coat he borrowed from James Dean


그리고 너와 나에게서 온 목소리
And a voice that came from you and me
 
아 그리고 왕이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Oh and while the King was looking down


광대는 그의 가시 왕관을 훔쳤다
The jester stole his thorny crown


법정은 연기됐다
The courtroom was adjourned


평결이 반환되지 않았습니다.
No verdict was returned
 
그리고 레닌이 마르크스의 책을 읽는 동안
And while Lenin read a book of Marx


공원에서 연습하는 사중주
The Quartet practiced in the park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비가를 불렀다
And we sang dirges in the dark


음악이 죽은 날
The day the music died
 
우리는 노래하고 있었어, 안녕 미스 아메리칸 파이
We were singing, bye-bye Miss American Pie


내 Chevy를 제방으로 몰아
Drove my Chevy to the levee


하지만 제방은 말랐다.
But the levee was dry


좋은 늙은이들이 위스키와 호밀을 마시고 있었어
Them good old boys were drinking whiskey and rye


"This'll be the day I die"를 노래하며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This will be the day that I die
 
여름 무더위에 헬터 스켈터
Helter skelter in the summer swelter


새들은 낙진 대피소로 날아갔습니다.
The birds flew off with a fallout shelter


8마일 높이에서 빠르게 낙하
Eight miles high and falling fast


그것은 잔디에 파울을 쳤고, 선수들은 포워드 패스를 시도했습니다.
It landed foul on the grass, the players tried for a forward pass


캐스트의 부업에있는 광대와 함께
With the jester on the sidelines in a cast
 
이제 반나절의 공기는 달콤한 향수
Now the halftime air was sweet perfume


상사가 행진 곡을 연주하는 동안
While the sergeants played a marching tune


우리는 모두 춤을 추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We all got up to dance


오, 하지만 우린 기회가 없었어
Oh, but we never got the chance
 
선수들이 경기장을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Cause the players tried to take the field


마칭 밴드는 양보를 거부했다
The marching band refused to yield


공개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Do you recall what was revealed


음악이 죽은 날?
The day the music died?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미스 아메리칸 파이
We started singing bye-bye, Miss American Pie


내 Chevy를 제방으로 몰았지만 제방은 말라 있었어
Drove my Chevy to the levee but the levee was dry


좋은 늙은이들이 위스키와 호밀을 마시고 있었어
Them good old boys were drinking whiskey and rye


그리고 "This'll be the day that I die"라고 노래합니다.
And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This will be the day that I die
 
아,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 곳에 있었습니다.
Oh, and there we were all in one place


우주에서 잃어버린 세대
A generation lost in space


다시 시작할 시간이 남지 않은 채
With no time left to start again


그러니 어서, Jack은 날렵해, Jack은 빨라
So come on, Jack be nimble, Jack be quick


잭 플래시는 촛대에 앉았다
Jack Flash sat on a candlestick


불은 악마의 유일한 친구니까
'Cause fire is the devil's only friend
 
아, 무대에서 그를 지켜보던 중
Oh, and as I watched him on the stage


내 손은 분노의 주먹으로 꽉 쥐어졌다
My hands were clenched in fists of rage


지옥에서 태어난 천사는 없다
No angel born in Hell


그 사탄의 주문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Could break that Satan's spell
 
그리고 불꽃이 밤까지 높이 올라갔을 때
And as the flames climbed high into the night


제사를 밝히기 위해
To light the sacrificial rite


나는 사탄이 기쁨으로 웃는 것을 보았다
I saw Satan laughing with delight


음악이 죽은 날
The day the music died
 
그는 안녕, 미스 아메리칸 파이를 노래하고 있었어
He was singing bye-bye, Miss American Pie


내 Chevy를 제방으로 몰았지만 제방은 말라 있었어
Drove my Chevy to the levee but the levee was dry


좋은 늙은이들이 위스키와 호밀을 마시고 있었어
Them good old boys were drinking whiskey and rye


그리고 "This'll be the day that I die"라고 노래합니다.
And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This will be the day that I die
 
블루스를 부르는 소녀를 만났어
I met a girl who sang the blues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행복한 소식을 물었습니다.
And I asked her for some happy news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But she just smiled and turned away


성스러운 가게로 내려갔어
I went down to the sacred store


몇 년 전에 내가 음악을 들었던 곳
Where I'd heard the music years before


하지만 그 남자는 음악이 재생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But the man there said the music wouldn't play
 
그리고 거리에서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And in the streets, the children screamed


연인들은 울었고 시인들은 꿈을 꾸었다
The lovers cried and the poets dreamed


그러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But not a word was spoken


교회의 종은 모두 부서졌다
The church bells all were broken
 
그리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세 남자
And the three men I admire most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
The Father, Son, and the Holy Ghost


그들은 해안가로 가는 막차를 탔다
They caught the last train for the coast


음악이 죽은 날
The day the music died
 
그리고 그들은 작별을 부르고 있었어, 미스 아메리칸 파이
And they were singing bye-bye, Miss American Pie


내 Chevy를 제방으로 몰았지만 제방은 말라 있었어
Drove my Chevy to the levee but the levee was dry


그 좋은 늙은이들은 위스키와 호밀을 마시고 있었지
And them good old boys were drinking whiskey and rye


"This'll be the day I die"를 노래하며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This will be the day that I die
 
그들은 안녕을 노래하고 있었어, 미스 아메리칸 파이
They were singing bye-bye, Miss American Pie


내 Chevy를 제방으로 몰았지만 제방은 말라 있었어
Drove my Chevy to the levee but the levee was dry


좋은 늙은이들이 위스키와 호밀을 마시고 있었어
Them good old boys were drinking whiskey and rye


"This'll be the day I die"를 노래하며
Singing, "This'll be the day that I die"
 
소스: Musixmatch
작사: Don Mclean
 
 
 
 
 
 

Don McLean(돈맥클린) - American Pie(아메리칸파이)...[팝송영어,영한가사번역자막]

Don McLean(돈맥클린) American Pie(아메리칸파이) A long long time ago 아주 아주 오래 전을 I ca...

blog.naver.com

 

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941&bigcateidx=5&subcateidx=6&view_tp= 

 

Neo Music Communication IZM

Tapestry (Don McLean) 돈 맥클린 IZM 1970

www.izm.co.kr

1950년대 버디 할리(Buddy Holly)의 음악을 들으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돈 맥클린(Don McLean)은 비범한 작곡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 34곳의 레이블에서 앨범 제의를 거절당한 후에야 데뷔작을 발표하는 무명의 설움을 겪은 아티스트였다. 1945년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스물 여섯이 되던 해인 1971년 빅히트 앨범 <American Pie>를 발표한다.

동명 타이틀곡인 'American pie'는 1972년 신년벽두를 강타, 빌보드 차트 정상을 4주간이나 점령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 3분 언저리의 곡들이 라디오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 8분27초 짜리 대곡이 전파를 정복한 것부터가 이변이었다. 이 곡은 1999년 여걸 마돈나(Madonna)가 테크노 감성으로 손질하여 다시 익숙해졌다(가사를 많이 생략하긴 했지만).

그 친숙한 멜로디의 'American pie'는 실은 초기 로큰롤의 거장 버디 할리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비틀스를 포함한 1960년대 대부분의 뮤지션들에게 그 모범이자 모델로 자리했던 버디 할리는 록음악과 록 밴드의 기초적인 형태를 완성시키며 록 역사상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936년 텍사스에서 태어난 그는 13살의 나이에 기타, 바이올린, 피아노, 벤조, 만돌린을 연주했고, 독학으로 부기우기(Boogie woogie) 음악을 터득했던 신동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곡으로 직접 노래한 백인 최초의 인기 뮤지션이었고, 최초로 펜더 기타를 사용했으며, 크리케츠(The Crickets)라는 밴드를 이끌며 4인 체제 록 밴드의 형식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컨트리, 블루스, 로커빌리, 흑인 영가를 조합하여 록의 정체를 확립하는데 기여했고 록음악에 있어서 흑백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가치를 부여받지만 그의 활동기간은 단 3년에 불과했다. 1959년 영화 <라밤바>로 잘 알려진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 빅 바퍼(The Big Bopper) 등과 함께 투어에 들어간 그는 1959년 2월3일 위스컨신(Wisconsin) 주의 그린 베이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지로 이동하던 중 탑승한 경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고 만다. 이 때 나이 22세였다. 버디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아쉬움은 10년이 더 흐른 1970년까지 돈 맥클린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70년대의 시작과 함께 그는 1959년 2월로 돌아가 지난 10년의 음악을 8분여의 서사곡으로 담아내게 됐고 그리하여 'American pie'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가 회상하는 1960년대는 그리 달갑지 않은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4B93xIM-2F4 

상단 죄측에 제목이 표시되지 않은 동영상은  YouTube에서 보기를 클릭하면 동영상이 열립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4%80%EC%9A%B0

 

관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관운장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제목 '관운장'으로 불리는 영화에 대해서는 삼국지: 명장 관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관우(중국어 정체자: 關羽, 간체자: 关羽, 병

ko.wikipedia.org

관우(關羽,간체: 关羽,: Guān Yǔ 관위, ? ~219년)는 중국 훈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운장( 雲長, 간체 云长,Yúnzhǎng 윈장)이다. 의제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히며, 한대 이후로 남송의 악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 장비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1]

의리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이나 민간전승과 전설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신격화되어 관제묘(關帝廟)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명나라 시기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國忠義大帝)[2] 로써 황제에 추존되었고, 청나라 시기 신(神)의 시호인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추존되었다. 최종적으론 황제의 시호인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로 추존되었으며[3][4] , 한국에서는 대하네국 고종이 황제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하였다,[5]

생애

생애 초반

사례 하동군 해현(解縣) 사람이다. 관우가 고향을 떠나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관우가 현상수배당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보호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책임지여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장비와 같이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평원의 상(相)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백마 전투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6].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게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6].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6]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적벽 대전 이후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이 때 감녕은 단지 300여명의 병력만 가지고 있었는데 노숙이 추가로 증원해준 천여명의 병력을 더하여 강을 사이로 관우와 대치하였다. 이에 관우는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였고,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 한다.[7]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髯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삼국지에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며 마량과 바둑을 두는 중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말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이 사건으로 우금이 조조에게 비난을 듣는다. ("그대는 누구시오? 40년 동안 날 따른 사람은 아니겠지? 난 방덕은 아오만 그대는 모른다네, 어찌 목숨이 아까워 주인을 버린단 말이냐?")그 사이 손권은 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내고[8] 여몽이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이때 관우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는데 우금을 생포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금과 그 부하들이 먹는 식량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우금의 부하들이 먹어치우는 군량 때문에 관우의 군량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관우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9]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 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 사마 조루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총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목후(壯繆侯)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충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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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또는 동묘(東廟)는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왕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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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또는 동묘(東廟)는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 종로구에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왕릉과 함께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된 동묘(오른쪽)와 남묘(왼쪽 아래) (《대동여지도》 제1첩 8면)

임진왜란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하고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

이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동대문 밖에 1599년 공사를 시작하여 1601년(선조 34년)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였다.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정(丁)' 자 모양과 '일(一)'자 모양이 합쳐진 '공(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남관왕묘는 조정에서 관리하며 왕실에서도 제사를 지냈으나 1908년(융희 2년) 향사이정령 등으로 제사를 폐지하고 동관왕묘는 지방 관청으로 이괄했다.

남대문 밖에는 동묘보더 먼저 생긴 남관왕묘가 있었으며, 고종 때에는 북관왕묘 서관왕묘를 지었다. 남관왕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는 조선총독부가 철거했다.

인근에 수도권전철 1호선 6호선 동묘앞역이 있다. 2011년 10월 동묘의 금동 관우상 뒤편 이월오악도 뒤에서 운룡도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운룡도는 조사를 받고 원래대로 일월오악도로 가려졌다.[1] 

관련 문화재

 

 

관왕묘(關王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를 신앙하기 위한 묘당을 지칭하는 용어.

관성묘(關聖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정유의 왜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 남관왕묘

1598년(선조 31) 처음으로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선조실록』 31년 4월 기묘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접반관(接伴官) 이흘(李忔)의 서계(書啓)에 남관왕묘의 건립에 따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진유격은 그가 거처하는 뒤뜰에 있는 낡은 집을 이용하여 관왕묘를 건립하고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시설이 완비되지는 못하였는데, 그 때 이흘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양노야(楊老爺:명나라의 장수 楊鎬)를 찾아서 관왕묘의 건립에 관한 것을 물어보니 찬성하면서 더 넓은 곳에 크게 건립할 뜻을 비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흘에게 조선의 도움을 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반드시 우리 군사를 쓰겠지만 목수·미장이 등은 조선의 공인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일만은 아니고 조선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니 국왕에게도 알려야 할 것이다.”

이렇듯 관왕묘의 건립은 명나라의 장수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왕실에서도 그 건축비용을 보조하였으며, 따로이 관왕묘의 건립을 맡아보는 도감관(都監官)을 정하여 돕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61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의 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신병(神兵)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 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왕묘가 건립되자 양호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의 생일이 5월 13일이므로 이날 제례를 올리자고 하였으며, 선조의 참례를 강요하였다. 결국은 선조가 직접 묘에 나가 분향하고 잇달아 삼작(三爵)을 올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의 대신들은 관왕묘의 제례를 비판하게 되었다. 중국의 일개 장수인 관우에게 조선의 국왕이 배례함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논쟁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1. 동관왕묘

남관왕묘가 건립된 이듬해인 1599년에 또 하나의 관왕묘인 동관왕묘를 세울 계획이 수립되었다. 건립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헌부의 장계에 의하면 “동관왕묘의 건립은 중국의 건의에 의한 부득이한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동관왕묘의 건립도 사실상 명나라의 종용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관왕묘 건립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뒤따랐다. 『선조실록』 32년 4월 무인조에 관왕묘의 위치 선정에 관한 기사가 있다. 선조는 정원(政院)에 보낸 비밀전교에서 새로운 관왕묘의 위치에 대해서 “전일에는 흥인문 밖에 건립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남대문에 설치한다고 하니 무슨 까닭이냐, 전일의 계획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남대문에는 이미 관왕묘가 있으니 동대문에 설치하도록 명나라의 섭정국(葉政國)에게 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서울의 동쪽이 지리적으로 허(虛)하다는 도참사상에 의한 것이었다. 선조는 끝내 동대문 밖이 안 된다면, 차라리 훈련원에 건립하여 무사들이 관왕의 정신을 이어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 끝에 관왕묘는 동대문 밖에 건립하도록 하였다.

동관왕묘의 건립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서 백성과 군사를 부역시켜야 하는 문제였다. 동관왕묘는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마침내 1602년 봄에 준공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 지방의 관왕묘

서울에 있는 남·동관왕묘 외에 지방에서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을 전후하여 지방에서는 강진·안동·성주·남원 등 네 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지방의 관왕묘 건립시기에 관해서는 『연려실기술』 별집 권4와 『해동성적지(海東聖蹟志)』의 묘사조(廟祠條), 『증보문헌비고』,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다만, 건립연도는 문헌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건립자에 대해서는 일정하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라도의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명나라의 장수 진린(陳璘)이 건립하였으며, 1684년에 개수하면서 이순신(李舜臣)과 진인을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안동의 관왕묘는 명나라의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하였다. 묘 안에는 석상(石像)을 봉안하였으며, 처음에는 안동 성내에 있었으나 1606년 서악(西岳)의 동대(東臺)로 이안(移安)하였다.

성주의 관왕묘 또한 명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하였다.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성주성 동문 밖에 있다가 1727년(영조 3)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겼다.

남원의 관왕묘는 서문 밖에 있었다. 명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건립하였다. 1698년에 신상(神像)을 개건하였는데 모두 중국의 관왕묘를 모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장수인 총부중군(摠府中軍) 이신방(李新芳)·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 등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고종 때에 와서 다시 서울에 북묘·서묘, 지방에는 전주·하동 등에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종 당시의 위태로운 정세에서 관왕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신을 일깨운 것으로 보인다.

1901년 조서에서 “관왕묘를 숭상한 것이 지금까지 3백여 년이다. 관왕의 충의는 천추에 길이 빛난다.”고 하고, 관왕의 호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고 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과 용산구 후암동에 동묘와 남묘가 남아 있다.

 

  1. 관왕묘의 참례와 음악

선조 이래로 관왕묘에 특히 관심을 보인 왕은 숙종이다. 숙종은 무안왕(武安王)의 충의는 진실로 가탄할 만하며 관왕묘를 지나면 감회가 일어난다고 하여, 관왕묘에 역림(歷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우의정과 좌의정에게 관왕묘 참례에 관한 절목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그때 배례와 수읍(手揖)의 의견이 나왔는데, 숙종은 수읍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 같은 관왕묘 참례에 관한 문제는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709년(숙종 35)에 왕은 사관에게 명하여 선조조에 관왕묘에서 행하던 행례의절(行禮儀節)을 실록에서 찾아내라고 하였다.

사관이 “선조 때에는 관왕묘에서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자, 숙종은 자신도 이에 따르겠노라고 하였다 한다. 『숙종실록』 36년 3월 정묘조에 의하면, 숙종은 당시의 좌의정 서종태(徐宗泰)와 판부사(判府事) 이순명(李順命)에게 “선조는 배례하였는데 나도 배례를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서종태는 선조 당시에는 명나라의 장수들의 압력에 못이겨서 한 것인 만큼 이제는 읍례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 또한 관우는 일개 장수였으므로 국왕이 배례를 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관우의 호가 무안왕이며 축문에도 ‘감소고우무안왕(敢昭告于武安王)’이라고 하였으니 배례가 좋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 관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1701년에 숙종은 모든 지방의 관왕묘의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으며, 매년 경칩과 상강일에 향축하도록 하였다. 제수는 변두(籩豆)이고 헌관(獻官)은 고을의 영장(營將) 또는 당상무수령(堂上武守令) 등이 하도록 하였다.

정조도 관왕묘에 관심을 기울여, 1786년에 친히 「관묘악장(關廟樂章)」을 지어 처음으로 관왕묘의 행례(行禮)에 쓰게 하였다. 1832년에는 순조가 남관왕묘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1. 남관왕묘

1598년(선조 31) 처음으로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선조실록』 31년 4월 기묘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접반관(接伴官) 이흘(李忔)의 서계(書啓)에 남관왕묘의 건립에 따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진유격은 그가 거처하는 뒤뜰에 있는 낡은 집을 이용하여 관왕묘를 건립하고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시설이 완비되지는 못하였는데, 그 때 이흘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양노야(楊老爺:명나라의 장수 楊鎬)를 찾아서 관왕묘의 건립에 관한 것을 물어보니 찬성하면서 더 넓은 곳에 크게 건립할 뜻을 비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흘에게 조선의 도움을 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반드시 우리 군사를 쓰겠지만 목수·미장이 등은 조선의 공인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일만은 아니고 조선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니 국왕에게도 알려야 할 것이다.”

이렇듯 관왕묘의 건립은 명나라의 장수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왕실에서도 그 건축비용을 보조하였으며, 따로이 관왕묘의 건립을 맡아보는 도감관(都監官)을 정하여 돕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61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의 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신병(神兵)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 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왕묘가 건립되자 양호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의 생일이 5월 13일이므로 이날 제례를 올리자고 하였으며, 선조의 참례를 강요하였다. 결국은 선조가 직접 묘에 나가 분향하고 잇달아 삼작(三爵)을 올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의 대신들은 관왕묘의 제례를 비판하게 되었다. 중국의 일개 장수인 관우에게 조선의 국왕이 배례함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논쟁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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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남묘(南廟)

  (동작구)남묘(南廟)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180-1번지    남묘(南廟)는 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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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3V-Ll18LLvw 

 

 

https://www.youtube.com/watch?v=kQBApS7N1zo 

 

 

https://www.youtube.com/watch?v=VfVWTKdobH0 

 

 

이계호, 태초먹거리/ 가공식품 주의보

https://www.youtube.com/watch?v=cr-XinMufdE 

 

 

https://www.youtube.com/watch?v=L_rMElTdQ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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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경복궁의 건물명 作名/ 무학대사, 왕십리(往十里)의 유래

http://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palaces/palacesArchitecture.jsp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건축의 특징은 뒤로는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 궁궐을 바라보며 왼쪽에는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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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해태를 마주치게 되는데, 해태는 생활상의 예법과 제도의 의미다.

해태/ 법(法)이라는 단어가 중국의 해치에서 나옴.

 [3]을 의미하는 한자인 법은 원래 '해태가 물처럼 고요하게 판단해서 틀린 상대를 받아버린다는 의미'인 고자(古字) 였다. 하지만 너무 복잡해서인지 해태 치廌 를 제거하고 去자만 남겨 통용되었으니 이것이 지금의 법法자이다.

[3] 여기서는 법률이 아니라 일반적 예법과 법도의 의미에 가깝다.

 

요즈음 정치판 꼴불견이 갈수록 가관이다.

해태는 어디 갔나? 악다구니만 쓰고 혈세만 축내는 저런 인간들 외뿔로 들이받아 싹 쓸어 버리지 않고.

[어원] 해치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獬廌 또는 獬豸라고 쓰고 독음은 해치 또는 해태, 두 가지로 읽는다. 혹 海駝(해타)라는 표기도 쓰이는데 이는 해태라는 발음에 끼워맞춘 군두목 표기이다.

근정문으로 가는 교량 좌우 양편에 4마리의 해태 석상이 있다.

받침돌과 어긋난 해태 한 마리는 모호텔 정문에 놓여 있던 것을 찾아온 것이라 전한다.

북위 때에 만들어진 흙으로 조소한 해태, 뿔이 멋지네요. 

한국의 석상 해태들은 제작의 어려움 때문인지 뿔이 없다. 뿔이 있어야 제 소리만 하는 놈들을 찍 소리 못하게 냅다 들이 받을 텐데. 자세히 보니 뿔을 목 뒤에 붙여 놓았네요.

 

 

 

  조선시대 왕의 집무실

↑ 왕비의 침실, 지붕 마루가 없다. 왕이 지붕마루다.

  무릉도원(운영자가 좋아하는 공간)

십장생도(十長生圖)-  태양····구름·소나무·불로초·거북··사슴/  십장생(열 가지의 장생물)들을 소재로 한 그림

 

 

 

 

- 정지용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고나.

어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金)실로 이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듯, 솟아날 듯, 불리울 듯, 맞아드릴 듯,

문득, 령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한(悔恨)*에 피어오른다.

힌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위에 손을 념이다.*

- 출전 《가톨릭청년》(1933. 9)

[참고]

◎시어 풀이

*어스름 : 조금 어둑한 상태. 또는 그런 때.
*다치랴는 : 닫히려는.
*살포시 : ① 포근하게 살며시, ② 드러나지 않게 살며시.
*회한(悔恨) : 뉘우치고 한탄함. 후회, 한탄.
*힌 : 흰.
*자리옷 : 잠옷. 잠잘 때 입는 옷.
*념이다 : 여미다.

 

3/26(일) 초딩이 6人이 인왕산자락길을 돌고 경복궁에 가다.

용태님 개발: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출발 ㅡ 인왕산자락길 ㅡ 경복궁역 회귀

* 자락길 중간 지점의 석굴암을 넣으면 한나절 코스는 되겠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RAi_kqEaRUY 

 

 

https://www.youtube.com/watch?v=3aXo_yL1U0U 

 

 

 

 

 

https://www.youtube.com/watch?v=PKGgy31ADY4 

YouTube에서 보기 를 클릭하면 열립니다.

 

life is Really simple, but we insist on making it Complicated.

인생은 정말 단순하지만 우리가 복잡하게 만든다

[운영자 생각]

인생이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단순하다는 건 무상(無常)함을 말하는 듯하다.

불교의 '공(空)'의 개념도 형상을 가진 모든 존재는 끈임없이 변화하여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무상(無常)이다. 영원함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lEc2-kjM4I 

 

 

https://www.youtube.com/watch?v=qHtcHxx6UfQ 

 

 

https://kydong77.tistory.com/7871

 

굴원(屈原), 복거(卜居) -어떻게 살 것인가?/초사제6

[은자주]제목을 보면 은둔한 이가 산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자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생사를 고민하는 굴원의 갈등과 번뇌가 구체화되어 있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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詹尹乃釋策而謝, 曰..

첨윤내석책이사, .. 첨윤이 점풀을 내려놓고 말하였다.

夫尺有所短, 寸有所長,

부척유소단, 촌유소장, ‘자[尺]에도 짧은 것이 있고. 치[寸]에도 긴 것이 있으며

物有所不足, 智有所不明,

물유소부족, 지유소부명, 사물에도 부족한 것이 있고, 지혜에도 밝지 못한 것이 있고,

數有所不逮,28] 神有所不通,

수유소불체,28] 신유소불통,  28)數(수); 운명. 逮(체): 미치다. 따라가다.

운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정신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 있거늘,

 

 

用君之心, 行君之意,

용군지심, 행군지의, 당신의 마음으로 당신의 뜻을 행하면 되나니,

龜策誠不能知事.

귀책성부능지사거북과 점풀인들 진실로 세상일을 다 알 수는 없도다.’

 

 

 

공약 3장 작성

 

3·1 만세운동 ‘정재용 선생’ 육성 증언

https://www.youtube.com/watch?v=MrUItG-tw6s

 

 

기미독립선언문의 의의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

서슬 퍼런 일제 경찰의 물샐틈 없는 가시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의 선언문 낭송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부득이 현재 광화문 교보 앞 코너에 남아 있는  "고종 칭경기념비(稱京紀念碑)" 앞에서 학생대표 정재용이 낭송함.

3,1일 택일은 3,3일이 고종 장례일이라 전국민의 집결이 용이함을 고려했기 때문임.

고종 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이나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인산일이라고 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장례식도 인산일이라고 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 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인식

1차 세계대전의 진행상황과 전후 처리 방안에 대해 일부 한국 지식인들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한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공헌한 바가 매우 미약하기 때문에 파리강화회의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자리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창호(安昌鎬)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하고,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할 경우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독립만을 위해 일본과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한국 민족의 정신상의 독립, 생활상의 독립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하였다.

일본 유학생들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시 많은 한국 지식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가 담긴 윌슨의 14개조 원칙이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후처리의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자결주의가 보편적 국제질서의 원리로써 제시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독립운동의 계기로 삼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8년 11월 미국은 크레인(C. R. Crane)을 특사로 중국에 파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있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중국의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게 하여, 승전국이지만 이권을 빼앗긴 중국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크레인은 “중국도 그동안 일본에게 받은 손해를 청구할 수 있다”라고 발언하였다. 또한 “파리에서 개최될 강화회의는 압박민족에 대해서는 해방을 강조한 것이므로 약소민족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크레인의 연설을 들은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민족대표도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전달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를 건 것이었다. 여운형은 크레인을 방문하여 한국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함께 그동안 명칭만 존재하던 신한청년당 이라는 단체를 실제화 했다. 여운형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1통은 1918년 11월 30일 상해를 떠나는 크레인에게 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1통은 당시 상해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밀라드 리뷰(Millad Review)』의 사장 밀라드에게 맡겼다. 그리고 김규식을 대표로 삼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1919년 2월 김규식은 파리로 출발하였다. 파리에 도착한 후 김규식은 한국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여 독립을 호소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와 함께 한국독립에 대한 후원, 동정, 홍보, 청원에 초점을 맞추고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당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미주에서는 이승만, 정한경(鄭翰景), 민찬호(閔燦鎬)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유림을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을 ‘파리장서사건’ 혹은 ‘파리장서운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일본은 자신들의 최대 식민지였던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결과가 동아시아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파리강화회의를 순조롭게 끝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이승만의 여권발급 신청을 거절한 미국정부의 태도는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파리에 있으면서 이승만의 여권발급 요청 소식을 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은 “이박사(이승만)가 파리에 오는 것은 유감”이라고 하였다. 최종적으로 미국 국무장관 폴크(Frank L. Polk)는 이승만에게 여권발급이 불가함을 알렸다.

이러한 국제관계속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하여 독립을 청원한다는 한국독립운동가 들의 시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 칭경기념비(紀念碑)" 

 

W. Wilson, 민족 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 3.1운동 촉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3월 1일 정오경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 · 김병조 · 유여대 · 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도쿄에 밀파된 임규(林圭) · 안세환(安世煥) 등은 뒤에 일본 정부와 의회에 독립선언서 등을 우송하였다. 상하이에 밀파된 김지환(金智煥)은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의 각 대표에게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송신하였다.

이 무렵 탑골공원[이칭별칭: 탑동공원(塔洞公圓)]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몰려와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강기덕(康基德) · 김원벽 등의 연락을 받고서 오전 수업을 마치자 곧 학교별로 달려온 것이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거의 끝날 무렵에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종로 쪽으로 뛰쳐나와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본래 독립선언식은 탑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였던 것이며, 탑골공원의 학생들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를 기다리다가 한 청년이 자진하여 등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것이었다.

이들이 선언을 끝내고 탑골공원을 나설 때는 수만의 군중이 호응, 함께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 대열이 대한문(大漢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시위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러 고종황제의 빈전(殯殿)을 향해 삼례(三禮)를 올렸다.

그리고 대열을 나누어 한 대열은 정동의 미국영사관쪽으로 향하고, 다른 한 대열은 남대문을 지나 왜성대(倭城臺)의 총독부로 향하였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m71_0100_0020_0010_0010 

 

역대 국사교과서 | 우리역사넷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은 일제의 혹독한 무단 통치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독립 운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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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결주의

우리 민족이 독립 운동의 기반을 국내외에서 만들어 가고 있을 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 갈 무렵에 미국 대통령 윌슨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윌슨은 식민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칙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민족 자결주의는 그 동안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던 약소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였다.
 

 2⋅8 독립 선언 결의문 ⋅

1. 본 단은 한⋅일 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 의사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 단은 일본 의회 및 정부에 조선 민족 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주기를 요구함.
3. 본 단은 만국 평화 회의에 민족 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4. 앞에서 요구한 내용이 실패할 때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음.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

 

W. Wilson 民族自決主義 - 3.1운동 촉발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이 발표한 14개조 원칙 중

민족 자결과 식민지 민족 독립에 대한 원칙./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6&levelId=tg_004_1810&ganada=&pageUnit=10 

 

교과서 용어해설 | 우리역사넷

[내용]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받고 난 후인 1917년 4월 참전을 결정하였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져가자 당시 미국의 제28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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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기 위해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이 발표한 14개조 원칙민족 자결과 식민지 민족 독립에 대한 원칙.

[내용]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받고 난 후인 1917년 4월 참전을 결정하였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져가자 당시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미국 의회에서 연두 교서를 통해 새로운 전후 질서의 14개조 원칙을 제안하였다. 이 원칙에는 비밀 외교의 폐지, 패전국에 대한 무병합⋅무배상 원칙, 그리고 국제 평화 유지 기구인 국제 연맹의 결성 등 다양한 제안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민족 자결주의였다. 윌슨이 제안한 민족 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당시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많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은 민족 자결주의가 자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민족 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외교독립론’을 통해 한국의 독립이 성취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의 식민지와 점령지에만 적용되었고, 전승국의 식민지와 점령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연합국이 지배하거나 점령한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문제는 의제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일본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 문제도 논의되지 않았다.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3/2018010300003.html

 

[숨어 있는 세계사] 100년 전 '민족자결주의', 수많은 약소국에 희망 주었죠

[숨어 있는 세계사] 100년 전 '민족자결주의', 수많은 약소국에 희망 주었죠

newsteacher.chosun.com

美, 1차 세계대전 말인 1918년 발표
'각 민족 운명은 스스로 결정' 선언… 우리나라 3·1운동에도 영향 줬어요
사회주의 확산 견제할 목적도 있어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3410&code=kc_age_40 

 

우리역사넷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부터 1920년까지 이루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 전체를 뜻한다.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에서 약 5개월간 영국, 미국,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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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인식

1차 세계대전의 진행상황과 전후 처리 방안에 대해 일부 한국 지식인들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한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공헌한 바가 매우 미약하기 때문에 파리강화회의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자리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창호(安昌鎬)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하고,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할 경우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독립만을 위해 일본과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한국 민족의 정신상의 독립, 생활상의 독립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하였다.

일본 유학생들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시 많은 한국 지식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가 담긴 윌슨의 14개조 원칙이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후처리의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자결주의가 보편적 국제질서의 원리로써 제시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독립운동의 계기로 삼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8년 11월 미국은 크레인(C. R. Crane)을 특사로 중국에 파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있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중국의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게 하여, 승전국이지만 이권을 빼앗긴 중국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크레인은 “중국도 그동안 일본에게 받은 손해를 청구할 수 있다”라고 발언하였다. 또한 “파리에서 개최될 강화회의는 압박민족에 대해서는 해방을 강조한 것이므로 약소민족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크레인의 연설을 들은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민족대표도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전달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를 건 것이었다. 여운형은 크레인을 방문하여 한국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함께 그동안 명칭만 존재하던 신한청년당 이라는 단체를 실제화 했다. 여운형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1통은 1918년 11월 30일 상해를 떠나는 크레인에게 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1통은 당시 상해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밀라드 리뷰(Millad Review)』의 사장 밀라드에게 맡겼다. 그리고 김규식을 대표로 삼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1919년 2월 김규식은 파리로 출발하였다. 파리에 도착한 후 김규식은 한국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여 독립을 호소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와 함께 한국독립에 대한 후원, 동정, 홍보, 청원에 초점을 맞추고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당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미주에서는 이승만, 정한경(鄭翰景), 민찬호(閔燦鎬)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유림을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을 ‘파리장서사건’ 혹은 ‘파리장서운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일본은 자신들의 최대 식민지였던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결과가 동아시아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파리강화회의를 순조롭게 끝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이승만의 여권발급 신청을 거절한 미국정부의 태도는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파리에 있으면서 이승만의 여권발급 요청 소식을 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은 “이박사(이승만)가 파리에 오는 것은 유감”이라고 하였다. 최종적으로 미국 국무장관 폴크(Frank L. Polk)는 이승만에게 여권발급이 불가함을 알렸다.

이러한 국제관계속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하여 독립을 청원한다는 한국독립운동가 들의 시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tCxD0ZRmaw 

 

3·1 만세운동 ‘정재용 선생’ 육성 증언

https://www.youtube.com/watch?v=MrUItG-tw6s

 

 

최남선, 기미독립선언서/천도교 손병희의 요청에 의함.

낭독자 정재용/탐골공원 팔각정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A1%B1%EB%8C%80%ED%91%9C_33%EC%9D%B8

 

민족대표 33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ko.wikipedia.org

 

기미독립선언문에 목숨 걸고 서명하신 ​민족대료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손병희님이 첫 서명자여서 탑골공원의 터주대감으로 우뚝 서 계신 겁니다. 물론 만해스님비도 세웠지만. 삼일공원을 대표하는 본디 상징물은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입니다. 그 정교한 조각을 보면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알 만하지요. 원각사는 세조의 자책으로 건립한 사찰이었습니다.

한용운 1879 1944 충남 홍성 신흥사 승려 신간회, 사회계몽, 징역 3년 공약3장 작성자 대한민국장1962
백용성 1864 1940 전북 장수 해인사 승려 징역 1년 6월 임정 지원 대통령장 1962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84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아래 포스트에 잘 정리된 선언서와 해설을 옮깁니다.

http://blog.daum.net/kw2996/864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宣 言 書(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이 되어, (우리나라의) 역사가 생긴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고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꺽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우르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회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軸)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번 한 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이 이 한 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1.천도교 측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2.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李承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의 16명,

불교측 대표로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成)의 2명이 서명·날인했다.

한용운 1879 1944 충남 홍성 신흥사 승려  징역3년 신간회, 사회계몽 대한민국장1962
백용성 1864 1940 전북 장수 해인사 승려 징역 1년 6월 임정 지원 대통령장 1962

독립선언의 방법을 구상한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은 처음에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를 알게 된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어 3교단이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지방은 물론 3월 중순 이래의 남부지역에서 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33인 자신은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대표자들과의 사전 합의를 어기고, 명월관지점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했다.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추진했다. 현재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3가지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A1%B1%EB%8C%80%ED%91%9C_33%EC%9D%B8

 

민족대표 33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ko.wikipedia.org

 

최제우(1824- 1864) 선생

https://www.youtube.com/watch?v=oHGiOpsScik

 

*3.1운동의 중심세력은 민족종교천도교였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70632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서학의 장점을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민간 신앙, 유교, 불교 등도 모두 녹아 있어요. 그중 동학의 대표적인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다시 편성하면서 내세운 사상이에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재해석한 것이에요.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변화되었지요. 세 가지 사상 모두 인간 존중과,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최제우 侍天主>2.최시형 事人如天 >3,손병희人乃天

*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삼일공원 안의 손병희 동상.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함

 

https://kydong77.tistory.com/12689

 

원각사지 10층석탑/ 파고다공원 4

11/27(목) 대학동기모임 집결지는 파고다공원 원각사지 10층석탑이었다. 탑사진 끝의 석 장은 인터넷에서 퍼왔다. https://namu.wiki/w/%EC%9B%90%EA%B0%81%EC%82%AC 원각사 - 나무위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

kydong77.tistory.com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로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

세조 11년(1465) 사월초파일에 세조가 직접 방문하여 승려 2만 명에게 공양을 베풀고 죄인을 사면했으며 세금을 감면하였다. 1467년 사월초파일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완성하였고 이후로도 절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신하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앞 꼭지의 글에서 92세의 고령인 김동길님이 맑은 정신과 또렷한 발음으로 민족정기 말씀하시는 걸 듣고 최남선님의 기미독립선언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유공자 명단에는 못 올릴 망정 친일론자 명단에 춘원과 함께 올라 있다니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분을 예로 들면 <기미독립선언서> 와 <무정>의 공적을 감안하여 친일은 별건으로 다루는 게 바람직하다. 친일행위는 비판받아 마당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유능한 사람들은 모두 감방에서 생을 마쳐야 한단 말인가? 뉴스에 의하면 좌익운동을 한 사람들도 버젓이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데, 친일 행적으로 그분들의 당당한 역사적 공적마저 폄하하거나 지워버리려 한다는 건 집권세력의 일방통행적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역사는 후세에 국민들이 평가한다.

통일논의가 급물살을 타지만 실상은 국가 체제 논의에 대한 합의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자유민주체제를 포기할 수 없듯이 북한의 집권층도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들의 체제 보장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운영자는 추악했던 종3에 나아가면 자랑스러운 삼일공원(탑골공원, 파고다공원)을 자주 찾는다. 그곳은 소득이 없어 보이는 노인들의 휴식공간이다. 공원 바깥 담벼락 아래엔 바둑, 장기 두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대낮인데도 담벼락 아래엔 허름한 옷을 입은 채 누워 계신 분들도 계신다. 관광 차원에서 가난한 노인분들의 휴식공간인 창덕궁 앞을 정비하다 보니 이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이분들부터 잘 돌보는 것이 복지정책의 1순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용옥 <기미독립선언서>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sYWMKg4h1yM

 

 

국보2호 원각사지10층석탑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파고다공원> 탑골공원> 삼일공원

파고다공원과 탑골공원

* '파고다'는 '탑'의 의미

서울특별시 종로 2가에 있는 탑골 공원은 3 · 1운동 때에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한용운 등 애국지사 33인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 전기(1464)에는 유명한 원각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에는 사찰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백탑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장안 사람들은 이곳을 '탑이 있는 절터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마을' 혹은 '탑골'이라고 불렀고 한자어로 '탑사동()'이라고 부르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이곳을 3 · 1운동 때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파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멀리 인도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파고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서 '신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파가바티(bhagavati)'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이 포르투갈어로 차용되어 파고드(pagode)가 되었고, 다시 영어로 차용되어 파고다(pagoda)가 되었다가 한국어로 차용되어 쓰인 것이다. 그래서 파고다는 '사찰의 탑'을 뜻하는 말이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있고, 보물 3호인 '원각사비' 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으로 면모를 바꾸고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고다 공원과 탑골공원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최기호)

 

윤 대통령 “日, 이젠 협력파트너로…과거 되새기고 미래 번영 위해 할일 생각하자” 

https://www.youtube.com/watch?v=inajzV6Hy1E 

 

 

https://www.youtube.com/watch?v=MrUItG-tw6s

 

 

https://www.youtube.com/watch?v=gG0JgUyObRc&t=130s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9E%84%EC%8B%9C%EC%A0%95%EB%B6%80#cite_note-:39-2

 

대한민국 임시정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https://kydong77.tistory.com/21221

 

최남선, 海에게서 少年에게/ 삼척 덕봉산 둘레길 해안

https://www.youtube.com/watch?v=ZEWx5hh-Qmw&list=RDGMEM0s70dY0AfCwh3LqQ-Bv1xg&start_radio=1&rv=kEbAfIkGQo8 海에게서 少年에게 ㅡ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 18세作 1 처······ㄹ썩, 처······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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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에게서 少年에게

ㅡ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 18세作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泰山(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추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陸上(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權(권)을 부리던 者(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추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只今(지금)까지 업거든*1) 통기*2) 하고 나서 보아라.

秦始皇(진시황), 나팔륜*3)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亦是(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추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그만 山(산)모*4) 를 依支(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者(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추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적은 是非(시비), 적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따위 世上(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추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世上(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中(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膽(담) 크고 純精(순정)한*5) 少年輩(소년배)들이,

才弄(재롱)처럼 貴(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少年輩(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추르릉, 콱.

각주

*1) 업거든 : ‘있거든’으로 바로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2) 통기 : 기별을 보내어 알게 함. 통지.

*3) 나팔륜 : 나폴레옹

*4)산모 : 산모퉁이

*5)순정한 : ‘純情’으로 바로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 최남선 : 서울 출생(1890), 일본 동경부립 제일 중학 입학, 2개월 만에 귀국(1904),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학과 입학(1906), 종합 월간지 『소년』 창간(1908), 종합 월간지 『청춘』 창간(1914), 3·1 운동시 「독립 선언서」 기초. 체포되어 다음해 출옥(1919), 『동명』 발간(1922), 만주 신경에서 『만몽일보사』 고문 역임(1938),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 수감되었다가 병으로 보석 출감(1949), 사망(1957)

(『소년』 창간호, 1908. 11.)

*최남선 18세 作

 

 

https://www.youtube.com/watch?v=3g8Pnsky1e8 

 

 

 

https://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96655 

 

강북구, 광복절 맞아 근현대사기념관에 ‘독립민주기념비’ 제막

“네티즌 성금으로 만든 상징물 뜻 깊어. 근현대 역사 정립·보존하고 알리는데 더욱 힘쓸 것“ [서울=일요신문] 김정훈 기자= 서울 강북구(구청장 박겸수)가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수유동 근현

ilyo.co.kr

 

https://kydong77.tistory.com/18185

 

최남선 - 기미독립선언서/ 해설

최남선 작성 기미독립선언서/천도교 손병희의 요청에 의함. 낭독자 정재용/탐골공원 팔각정 기미독립선언문에 목숨 걸고 서명하신 ​민족대료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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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A1%B1%EB%8C%80%ED%91%9C_33%EC%9D%B8

 

민족대표 33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ko.wikipedia.org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천도교 인사 15명불교 인사 2명이다.[1]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2]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기독교계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1]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3]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2년간의 구금 이후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4],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손병희 등은 복역 후 병사하였다.

불교

한용운 1879 1944 충남 홍성 신흥사 승려 징역 3년 신간회, 사회계몽 대한민국장1962
백용성 1864 1940 전북 장수 해인사 승려 징역 1년 6월 임정 지원 대통령장 1962

 

3·1 만세운동 ‘정재용 선생’ 육성 증언

https://www.youtube.com/watch?v=MrUItG-tw6s 

 

서슬 퍼런 일제 경찰의 물샐틈 없는 가시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의 선언문 낭송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부득이 현재 광화문 교보 앞 코너에 남아 있는  "고종 칭경기념비(稱京紀念碑)" 앞에서 학생대표 정재용이 낭송함.

3,1일 택일은 3,3일이 고종 장례일이라 전국민의 집결이 용이함을 고려했기 때문임.

고종 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이나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인산일이라고 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장례식도 인산일이라고 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 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고종 칭경기념비(紀念碑)" 

 

https://kydong77.tistory.com/12689

 

원각사지 10층석탑/ 파고다공원 4

11/27(목) 대학동기모임 집결지는 파고다공원 원각사지 10층석탑이었다. 탑사진 끝의 석 장은 인터넷에서 퍼왔다. https://namu.wiki/w/%EC%9B%90%EA%B0%81%EC%82%AC 원각사 - 나무위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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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로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

세조 11년(1465) 사월초파일에 세조가 직접 방문하여 승려 2만 명에게 공양을 베풀고 죄인을 사면했으며 세금을 감면하였다. 1467년 사월초파일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완성하였고 이후로도 절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신하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펌]

https://www.youtube.com/watch?v=YaLg05SxEcs 

 

 

 

 

https://www.youtube.com/watch?v=MNGDKW8BgCw 

 

 

 

https://www.youtube.com/watch?v=9nU8m0NpnhY 

 

 

https://www.youtube.com/watch?v=fujbbtFVl94 

 

 

 

 

https://cafe.daum.net/mj13h/QnS6/17889

 

재경 문우 산악회 번개산행

오늘 약간의 추운날씨에 일찌감치 집에서 나서니 지평 막걸리를 사려고 가게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고 약속장소인우이 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에기다리니 하정친구가 제일먼저 도착하고 곧

cafe.daum.net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227/118094972/1

 

李 체포안 찬139·반138로 부결…민주당 이탈표 속출한 듯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1표 많았으나 무효표가 대거 속출한 결과다. 이 대표는 구속수사는 면했지만, 정치적 …

www.donga.com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1표 많았으나 무효표가 대거 속출한 결과다. 이 대표는 구속수사는 면했지만, 정치적 리더십에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에서 이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무기명 투표를 표결했다. 그 결과, 재적의원 299명 중 297명이 표결에 참석해 찬성 139표, 반대 138표, 기권 9표, 무효 11표로 부결시켰다. 무효표 논란이 불거졌던 2표는 국회의장의 판단에 따라 각각 반대 1표와 무효 1표로 분류됐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81450.html

 

민주당 최소 31명 이탈 ‘가까스로 부결’…“이재명 향한 경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대거 이탈 속에 가까스로 부결됐다. ...

www.hani.co.kr

 

https://www.yna.co.kr/view/AKR20230228044000001?section=news 

 

주호영 "野의원 38명이 이재명 '정치탄압' 주장 동조 않은 것"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안채원 기자 =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28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민주당 이탈표가 ...

www.yna.co.kr

주 원내대표는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이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최소 31명, 최대 38명의 민주당 의원이 찬성하거나 기권한 걸로 보여진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현애살수'(懸崖撒手)라는 사자성어를 언급,

"절벽에 매달렸을 때는 손을 놓고 과감하게 뛰어내려야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다가는 훨씬 더 크게 다친다는 말"이라며 "이 대표가 명심해야 할 말"이라고 지적했다.

*懸崖撒手

聖嚴法師, 公案100 

本句出自無門慧開禪師偈頌。在《無門關》這本書中的第三十二頌,共有四句:

「劍刃上行,冰稜上走,不涉階梯,懸崖撒手。」

*撒(살) 뿌리다, 살포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kz5oFHzdrx0 

 

 

https://www.youtube.com/watch?v=5Fpv1C89Ci0&list=PLl9GPcxBUXIl25J4mD67E2Qtg0RKMRz5l&index=13 

 

 

https://www.youtube.com/watch?v=_CyfmIBQczo 

 

 

https://kydong77.tistory.com/21378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공원과 김구 백범광장/‎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 양력 2월14일은 우리나라에는 또 다른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지난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는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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