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9 

 

벽암록(2) 11칙 ~ 20칙

벽암록 제11칙 황벽화상과 술 찌꺼기나 먹은 놈(酒糟漢) “수행자 흉내낸다고 깨달음 얻어지지 않는다” {벽암록} 제11칙에는 황벽 화상이 당나라에는 많은 선승이 있지만, 모두 선사인체하면서

kr.buddhism.org


[第011則]噇酒糟漢
〈垂示〉垂示云。佛祖大機。全歸掌握。人天命脈。悉受指呼。等閑一句一言。驚群動衆。一機一境。打鎖敲枷。接向上機。提向上事。且道什麽人曾恁麽來。還有知落處麽。試擧看。
〈本則〉擧。黃檗示衆云。汝等諸人。盡是噇[口+童]酒糟漢。恁麽行脚。何處有今日。還知大唐國裏無禪師麽。時有僧出云。只如諸方匡徒領衆。又作麽生。檗云。不道無禪。只是無師。
〈頌〉凜凜孤風不自誇。端居寰海定龍蛇。大中天子曾輕觸。三度親遭弄爪牙。

벽암록 제11칙 황벽화상과 술 찌꺼기나 먹은 놈(酒糟漢)

“수행자 흉내낸다고 깨달음 얻어지지 않는다”

{벽암록} 제11칙에는 황벽 화상이 당나라에는 많은 선승이 있지만, 모두 선사인체하면서 진정한 선을 지도할 선사가 없다고 비판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황벽 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그대들은 모두가 술찌꺼기나 먹고 진짜 술을 마시고 취한 듯이 흉내 내는 녀석들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 언제 불법을 체득할 수가 있겠는가? 위대한 당(唐)나라에 선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 때 어떤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전국 여러 총림에서 대중을 지도하고 거느린 선승들은 무엇입니까?”

황벽 화상이 말했다.
“선(禪)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사(禪師)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擧. 黃檗示衆云, 汝等諸人, 盡是酒糟漢, 恁行脚, 何處有今日. 還知大唐國裏無禪師. 時有僧, 出云, 只如諸方匡徒領衆, 又作生, 檗云, 不道無禪, 只是無師.



“선은 있지만 선사가 없다”는 지적
공부 게으른 사람 귀담아 들어야

황벽 선사의 법문은 〈전등록〉제9권에 진정한 수행자가 되도록 간절하게 설하고 있다.

{벽암록}에서 원오는 “황벽(?~850) 선사는 7척의 큰 키에다 이마에는 둥근 구슬이 있었고, 천성적으로 선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또, 체구도 당당한 천성의 선승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특히 황벽의 문하에 임제의현이라는 걸출한 선승이 배출되어 당대 선불교의 사상을 극대화한 사실은 어록의 왕이라고 불리는 {임제어록}에 유감없이 잘 전하고 있다.

그런 황벽 선사가 수행자들에게 “그대들은 모두가 술찌꺼기나 먹고 진짜 술을 마시고 취한 듯이 흉내 내는 녀석들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 언제 불법을 체득할 수가 있겠는가? 위대한 당(唐)나라에 선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라고 충격적인 말을 하고 있다.

당주조한(酒糟漢)이라는 말은 월주(越州) 지방의 사람들이 술 찌꺼기를 좋아해 잘 먹었기 때문에 월주 사람들을 욕하는 말로 사용했었는데, 뒤에 유행되어 사람을 욕하는 말이 되었다. 진짜 술을 마시지도 않고 술찌꺼기나 조금 먹은 주제에 술에 취한 행세를 하는 사람을 욕하는 말이다.

선에서는 특히 언어 문자에 집착하여 불법의 대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승을 매도하는 말로 사용하며, 어록에 “옛 사람의 술 찌꺼기나 빨아먹는 놈”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선수행을 하면서 제대로 불법의 대의를 철저하게 체득하지 못한 선승이 선승들의 어록을 몇 마디 이해한 분별심에 만족한 사람이 진짜 대단한 선승처럼 행세하는 사이비 선승들을 매도하는 말이다.

엉터리 선수행자들은 선수행자 행세를 하면서 천하를 이리 저리 왔다 갔다 세월만 보내고 신발(짚신)만 소비시킨다. 시주들의 은혜를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빚 덩이로 짊어지고 다니는 한심한 놈들이다. 이러한 수행자가 어느 세월에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밝히고 중생을 구제할 수가 있겠는가?

황벽 선사는 또 “이렇게 큰 당나라에 선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라고 충격적인 말을 하고 있다. 술 찌꺼기나 먹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선수행자가 진정한 수행을 하지 않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정신 차려 진정한 수행자가 되도록 경책하는 법문을 하고 있다. 원오는 수시에 이러한 황벽선사의 법문은 대중을 놀라게 하고 수행자의 마음을 움직인 법문이었다고 말한다.

그 때에 어떤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황벽 선사에게 말했다. “전국 여러 총림에서 대중을 지도하고 거느린 선승들은 무엇입니까? 선사는 당나라에 전국에 선사가 한명도 없다고 말했는데, 황벽산을 비롯하여 천하의 선원에 훌륭한 선사들이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 합니까?”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 스님은 제법 선승의 기개가 있는 말을 한 것이다.

황벽 선사는 이러한 선승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禪)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사(禪師)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이 공안의 안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이 없다(無禪)는 것이 아니라, 선법을 체득하여 분명히 수행자들을 지도하며 선을 깨닫게 하는 진정한 선사가 없다고 주장한 말이다. 황벽의 말은 선의 궁극적인 정신을 확실하고 완전하게 제시하고 있다. 선은 근원적인 본래심(불심)으로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지혜롭게 전개하는 불성의 지혜작용 그 자체인 것이다.

선의 수행으로 불법을 체득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선사의 가르침과 지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본인이 자각하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에서는 물이 차고 따뜻한지 본인이 물을 마시고 자각해야 한다는 의미로 냉난자지(冷暖自知)라는 말을 강조한다.

선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과 함께 온 우주에 가득히 충만 되어 전개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존재가 인연법에 따라서 여법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시절 인연에 맞추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선은 각자의 불심으로 자각하여 체득되는 것이며, 불심의 지혜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본래심의 지혜작용(선)은 그대로 숨김없이 전개되는 것이다.

선은 다른 사람이나 스승으로부터 선의 깨달음을 직접 전해 받거나 남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불심(본래심)의 지혜작용 그 자체이기 때문에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보고 듣게 하는 상대적인 어떤 물건이 아니다.

황벽 선사가 당나라에 선사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 것은 지극히 올바른 안목으로 설한 법문이다. 온 우주에도 선사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디에 유명한 선사가 있다고 찾아가고, 운수 행각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서로 왔다 갔다 세월만 보내고 있다. 이런 놈은 술 찌꺼기를 먹고 술에 취한 행세를 하는 놈이니 언제 불법을 깨닫고 선을 체득할 날이 있을까? 황벽의 법문은 수행자들에게 진정한 자비심을 베푼 위대한 선승의 모습이다.

설두는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늠름한 기상을 자랑하지 말라. 단엄하게 세상에 머물며 용과 뱀을 구분하네. 대중천자(大中天子)가 일찍이 가볍게 건드렸다가 발톱과 어금니에 세 차례나 할퀴었네.”

먼저 “늠름한 기상을 자랑하지 말라. 단엄하게 세상에 머물며 용과 뱀을 구분하네.”라는 두 구절은 황벽 선사의 위풍당당한 풍모를 칭찬한 것이다. “당나라에 선사가 없다”라고 말한 황벽의 선법은 천하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에 머물며 용과 뱀을 구분할 수 있는 진정한 불법의 안목을 구족한 선승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술 찌꺼기나 먹는 수행자와 올바른 선승을 판단하는 지혜의 안목을 구족한 황벽선사를 지혜작용(大機大用)을 칭찬하는 말이다.

황벽이 용과 뱀을 확정한 지혜작용(大機大用)을 “대중천자가 일찍이 가볍게 건드렸다가 발톱과 어금니에 세 차례나 할퀴었네.”라는 게송으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대중천자는 당 선종(宣宗) 황제로서 13살 때에 왕실에서 추방되어 잠시 출가하여 제안(齊安)선사의 문하에 서기로 일할 때, 당시 황벽은 수좌로 함께 있었다. 어느 날 황벽이 부처님께 예불하는 모습을 보고, 대중천자는 “예배를 해서 무엇 하려는가?”질문하자 황벽이 갑자기 뺨을 후려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설두는 이것을 게송으로 읊고 있다.

뒤에 선종은 황벽 선사에게 거친 사문이라고 호를 내렸는데, 배휴가 건의하여 ‘단제선사’라는 법호를 내렸다고 전한다. 원오는 평창에 “설두의 이 게송은 참으로 황벽 화상의 본래면목(眞贊)과 똑같이 닮았는데, 사람들은 본래면목(眞贊)인지 잘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第012則]麻三斤
〈垂示〉垂示云。殺人刀活人劍。乃上古之風規。亦今時之樞要。若論殺也。不傷一毫。若論活也。喪身失命。所以道。向上一路。千聖不傳。學者勞形。如猿捉影。且道。旣是不傳。爲什麽。卻有許多葛藤公案。具眼者。試說看。
〈本則〉擧。僧問洞山。如何是佛。山云。麻三斤。
〈頌〉金烏急玉免速。善應何曾有輕觸。展事投機見洞山。跛鱉盲龜入空谷。花簇簇錦簇簇。南地竹兮北地木。因思長慶陸大夫。解道合笑不合哭。咦。

벽암록 제12칙 동산화상의 삼 세근(麻三斤)

“세근 짜리 삼베가사 입은 그대가 부처라네”

{벽암록}제12칙에는 유명한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 화상의 삼베 세근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수초화상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동산 화상이 말했다. “삼 세근(麻三斤)이다.”

擧. 僧問洞山, 如何是佛. 山云, 麻三斤.


‘삼세근’은 가사걸친 수행자 상징
부처를 다른 데서 찾지 말라는 뜻

동산은 두 사람이 유명한데, 당대 조동종의 개창자인 동산양개 화상과 동산수초(洞山守初(910~990) 화상이 있다. 여기는 운문문언의 제자인 동산수초 선사이다. 이 공안은 {무문관} 18칙에도 제시하고 있는데, {전등록}23권 명교대사전과 {오등회원}15권 동산전 등에 수록하고 있다. 동산 화상이 처음 운문 화상을 참문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이야기는 ‘평창’에 자세히 싣고 있으며 {무문관}15칙에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스님이 질문한 부처는 어떤 부처를 말하고 있는가? 부처의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三身) 가운데 어떤 부처인가? 화신인 석가불인가. 보신인 아미타불인가. 법신인 비로자나불인가? 도대체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부처를 체득할 수가 없다.

여기서 질문하는 스님은 부처란 고귀하고 위대하고 존엄한 청정하신 부처의 이미지를 가지고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부처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산은 곧장 “삼 세근(麻三斤)”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무문관〉21칙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니, 운문은 “똥 젓는 막대(乾屎)”라고 대답한바 있다.

{벽암록} 제7칙에는 혜초가 법안 선사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법안은 “그대는 바로 혜초이다.”라는 선문답과 똑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산 화상이 대답한 ‘삼 세근(麻三斤)’은 어떤 것인가. 먼저 이 말의 의미부터 이해해야 한다. [통전(通典)] 제6권에 의하면 당나라에는 세근(三斤)의 마사(麻絲)가 하나의 단위로서 한 뭉치 마사(麻絲)의 무게가 세 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 세근의 실은 가사 한 벌(승복)을 만들 수 있는 재료이다. 당시에는 삼베(麻布)로 가사나 승복을 만들었다. 동산의 스승인 운문문언의 〈비문〉에도 “兩斤麻 一段布” 혹은 “三斤麻 一匹布”라는 문답이 있다.

{전등록} 10권 ‘조주’장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다. “노승이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승복을 만들었는데 마포의 무게가 7근이나 되었지.”라고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공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씹기 어려워 입에 갖다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질문에 많은 대답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춘 분’ 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장림산 밑에 있는 지팡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삼 세근(麻三斤)’ 이라고 했으니 참으로 옛 사람의 혀를 꼼짝 달싹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 저런 말을 둘러대어, ‘동산스님이 그 때 창고에서 마포(麻)를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에 ‘삼세근(麻三斤)이라고 대답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였다’ 고 한다. 또는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 때문에 동산스님은 우회해서 대답한 것이다’ 라고도 말하고 있다. 더욱이 안목 없는 녀석들은 한결같이 ‘삼세근(麻三斤)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너희들은 만약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미륵부처가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구해도 불법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즉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스님의 질문에 동산 화상이 “마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은 “세근(三斤)의 마사(麻絲)로 만든 가사(승복)를 걸친 스님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질문하고 있는 그대가 바로 부처일세!’라는 의미이다.

법안 화상이 “그대가 바로 혜초일세!”라고 대답한 것처럼, ‘혜초 그대가 바로 부처다’라고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부처를 밖에서 찾아도 찾을 수가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또한 부처란 어떤 형체가 있는 존재도 아니다. 결국 부처란 자기 자신이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선에서 말하는 부처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일에 번뇌 망념이 없는 불성의 지혜작용을 전개하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말한다. 본래 면목이란 자기의 참된 모습과 지혜의 안목을 구족한 자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삼신(三身)은 지금 여기서 불성의 지혜로운 삶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보살의 원력과 서원을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 보신이요, 시절인연에 맞추어 다양하게 변화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화신이고, 자신의 원력과 지금 여기서 시절인연의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이 법신인 것이다.

{금강경}에서 “모든 모양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파악해서 볼 수 있는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다면 곧바로 여래를 친견할 수 있다(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래도 외부에 존재하는 여래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의 깨달음의 당체인 법신 여래를 말한다. {금강경}에서 음성으로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설하고 있는 말씀도 잘 사유하고 음미해야 한다.

설두 화상의 게송을 통해서 설두의 견해를 살펴보자.

처음 “해(金烏)는 급하고, 달(玉兎)은 빠르다. 멋지게 근기에 응수 했으니 어찌 경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스님의 질문에 동산은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삼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을 읊은 것이다. 해와 달이 급히 지나가는 것처럼, 스님의 질문에 시간을 맞추고 학인의 근기에 대응하여 적절하게 잘 대답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로서 학인을 상대했다고 동산의 안목(견해)을 파악하려 한다면, 절름발이 자라와 눈먼 거북이 빈 골짜기로 들어가는 꼴이다.”는 말은 부처나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로 대답했다고 부처나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에 집착한다면 동산 화상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또 “꽃도 수북수북, 비단도 수북수북, 남쪽에는 대나무, 북쪽에는 나무.”라고 읊은 말은 고사가 있지만 생략하고, ‘봄이면 살쾡이가 천지에 만발하고, 가을이면 온 산에 비단의 단풍이 가득하며, 남쪽지방에는 대나무가 많고, 북쪽 지방에는 나무가 많은 산의 모습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아닌가?’라는 의미로 읊고 있다.

마지막에 “그래서 장경 화상과 육긍 대부를 생각하니 웃어야지, 통곡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네. 아이쿠()!”라고 읊고 있다. 이 역시 고사 있는 말인데, 생략하자. 말하자면 설두는 동산이 “삼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은 세간의 인정(人情)과 분별적인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으니, 수행자들은 이 공안을 잘 사유하여 참구해야 한다는 주의를 하고 있다.



[第013則]銀椀盛雪
〈垂示〉垂示云。雲凝大野。遍界不藏。雪覆蘆花。難分朕跡。冷處冷如冰雪。細處細如米末。深深處佛眼難窺。密密處魔外莫測。擧一明三卽且止。坐斷天下人舌頭。作麽生道。且道是什麽人分上事。試擧看。
〈本則〉擧。僧問巴陵。如何是提婆宗。巴陵云。銀碗裏盛雪。
〈頌〉老新開端的別。解道銀碗裏盛雪。九十六箇應自知。不知卻問天邊月。提婆宗提婆宗。赤旛之下起淸風。

벽암록 제13칙에는 파릉(巴陵) 화상에게 제바종(提婆宗)의 종지를 밝힘

“교종과 선종은 방법 달라도 목적지는 같아”>

{벽암록} 제13칙에는 파릉(巴陵) 화상에게 제바종(提婆宗)의 종지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파릉 화상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제바(提婆)의 종지 입니까?” 파릉 화상이 대답했다. “은쟁반에 흰눈을 가득 담았다.”

擧. 僧問巴陵, 如何是提婆宗. 巴陵云, 銀椀裏盛雪.


은쟁반과 흰눈은 같지만 다른 것
선교우열 따지면 ‘분별’에 떨어져

본칙의 공안은 〈연등회요〉 26권과 〈선문염송〉 27권 등에 전하고 있다. 파릉 화상은 운문문언 선사의 법을 이은 뛰어난 걸승으로 법명은 호감(顥鑑)이라고 하며, 호남의 파릉 신개원(新開院)에서 교화를 펼친 선승이다. 그에 대한 생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평창’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특히 호감 화상은 독특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잘 지도하였기 때문에 ‘감다구(鑒多口)’라는 별칭이 있었다.

사실 운문종은 운문 화상이 한 글자로 불법의 종지를 제시하는 일자관(一字關)의 법문을 비롯하여 동산수초의 ‘마삼근(麻三斤)’처럼 불법의 근본을 짧은 한 두 마디의 언구로 제시하는 독창적인 종풍이 있는데 파릉 화상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스님이 “제바종의 종지는 어떤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파릉 화상은 “은쟁반위에 흰 눈을 가득 담은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조정사원〉과 〈인천안목〉 제2권 등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공안은 파릉 화상이 스승 운문 선사에게 올린 ‘세 마디 깨달음을 체득하는 말(三轉語)’ 가운데 하나이다. 파릉 화상의 유명한 취모검(吹毛劍)은 벽암록 100칙에 수록하고 있다.

제바종에 대해서 평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천 15대 제바(迦那提婆) 존자는 처음 외도의 한 사람이었다. 제14대 용수 존자를 친견하고 바늘을 발우 속에 던지자 용수 존자는 그를 큰 그릇으로 여기고 불법의 심종을 전수하여 15대 조사로 삼았다. 〈능가경〉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佛語心)을 근본(宗)으로 삼고 고정된 문이 없는 무문(無門)을 법문으로 삼는다”라고 하고, 마조스님은 “대개 언구(言句)가 있으면 제바의 종지이다. 제바종은 언어 문자를 주요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용수의 제자 제바 존자는 〈백론(百論)〉의 저자로서 불법의 논의에 뛰어난 변론가였다. 그는 당시 96종의 외도를 논쟁으로 항복받고 불교인으로 전향시킨 인물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바종’이란 제바 존자의 종지를 중심으로 한 대승 반야사상의 불교교단을 말한다. 마조가 “대개 언구(言句)가 있으면 제바종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제바 존자가 날카로운 논법으로 많은 외도들을 논파한 것에서 언구에 의거하여 불법의 대의를 교시한 입장을 말한다.

마조의 말은 〈마조어록〉에는 보이지 않고 〈운문광록〉에 보이며, 운문 화상은 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조 대사는 좋은 말을 했지만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어떤 스님이 다시 “어떤 것이 제바의 종지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운문 화상은 “96종의 외도 가운데 그대가 최하의 한 종류이다”라고 대답하여, 질문자의 논쟁을 타파하고 있다. 운문어록에 제바종에 대한 대화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운문종의 교단에서는 언어 문자로서 불법의 종지를 설하는 제바종과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주장하는 선종의 입장에 대하여 선승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선문답이 자주 거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창에서 원오는 〈능가경〉에 “불어심(佛語心)을 근본으로 삼고 무문(無門)을 법문으로 한다”는 일절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불어심(佛語心)이란 부처님이 불법을 언어 문자로 말씀한 그 마음으로 경전으로 전한 불어종(佛語宗: 교종)의 입장을 말한다. 그러나 선종은 세존이 49년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은 일자불설(一字不說)의 입장에서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가섭에게 교외별전과 이심전심으로 전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불교의 경전에서 주장하는 불법의 가르침이나, 선종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불법의 수행 목적은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 청정한 부처의 마음[佛心]을 깨닫도록 하는 점에서 똑같은 목적지에 귀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인 부처의 말씀[佛語]이나 경전의 언어 문자는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방편의 도구에 불과하다. 방편의 도구 없이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부처의 말씀[佛語]을 무시하고 부처의 마음[佛心]은 체득될 수 없고, 부처의 마음을 여의고 부처의 말씀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스님이 파릉 화상에게 “선사는 제바의 종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제바종과 선종의 입장에 대한 선사의 견해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파릉 화상은 곧바로 “은쟁반 위에 흰 눈을 가득 담은 것”이라고 대답하여 천하의 수행자들의 혀를 차단시키고 있다. 이 말은 동산(洞山)의 〈보경삼매가〉에 “은쟁반 위에 흰 눈을 담고(銀椀盛雪), 밝은 달빛아래 백로를 감춘다(明月鷺藏)”라고 읊고 있는 노래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얀 은쟁반과 흰눈, 가을 밝은 달빛아래 서있는 백로의 모습은 똑같은 흰색으로 구분 할 수 없지만, 은쟁반과 눈은 각기 다른 사물로서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은 두 사물이 흰색이라는 점은 같지만, 그러나 사물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섞여 있으면서도 각각 독특한 사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불일 불이관(不一不二觀)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은쟁반과 눈은 흰 색깔로 동일성과 평등성을 나타내지만, 사물의 다른 특성은 차별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평등즉차별, 차별즉평등의 입장으로 상즉원융(相卽圓融)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선에서 말하는 주관적인 자아와 객관적인 사물과 불법의 근본에서 일체로 하는 천지동근 만물일체(天地同根 萬物一體)와 만법일여(萬法一如)의 경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을 초월한 절대(一切皆空)의 공관(空觀)에서 무아무심이 되어 객관적인 만물과 주관적인 자기가 하나가 되어 일체가 되고 일여(一如)가 된 경지에서 자신의 일에 몰입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파릉 화상의 대답은 언어 문자로 불법을 설하는 제바의 종지나 불심을 깨닫게 하는 선종의 입장은 수행체계나 교화방법은 다를지라도 모두 불법의 근본의 입장에서 볼 때 반야바라밀의 실천으로 깨달음의 지혜를 체득하여 견성성불의 경지를 이루는 불법의 대의는 같다는 주장이다. 사실 선종과 교종의 입장을 나누고 구별하며 우열을 논하는 것은 중생의 분별과 차별심인 것이다.

원오의 착어에도 “흰 말이 흰 갈대 꽃밭 속으로 들어간다”라고 하고, 수시에도 “흰눈이 갈대 꽃밭 속에 내리니 흔적을 구분하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또, 파릉 화상의 대답에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이론을 제시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로 “천하 사람들의 혀를 차단하고 있다”고 코멘트 하고 있다. 또 원오는 “일곱 조각 여덟 조각으로 깨졌다(七分八裂)”고 착어하고 있는데, 이 말은 파릉 화상의 한마디로 제바종에 대한 많은 논쟁이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는 의미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파릉 화상의 안목을 칭찬하고 있다. “신개원에서 교화를 펼친 늙은이의 안목은 뚜렷하게도 남다르다. 은쟁반위에 흰눈을 담았다고 말 할 수가 있었다. 96종의 외도들도 “은쟁반위에 흰눈을 담았다”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면 다시 하늘 저편의 달에게 물어봐야 하리라. 제바의 종지여 제바의 종지여! 붉은 깃발아래 맑은 바람을 일으키네.”

파릉 화상이 제시한 제바의 종지는 천하의 외도나 제불조사도 모두 붉은 깃발을 세운 곳으로 모여 귀결되도록 제시한 가르침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第014則]對一說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一代時敎。雲門云。對一說。
〈頌〉對一說太孤絶。無孔鐵鎚重下楔。閻浮樹下笑呵呵。昨夜驪龍拗角折。別別。韻陽老人得一橛。

벽암록 제14칙 운문화상의 대일설(對一說)

“설법은 환자따른 처방…언구에 매이지 말아야”

{벽암록} 제14칙은 운문 화상이 부처님이 한평생 설법한 내용의 의미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은 짧은 한마디로 대답한 내용을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 화상에게 질문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평생 설하신 법문의 가르침(一代時敎)은 무엇입니까?” 운문 화상이 대답했다. “질문에 알맞은 일대일(一對一)의 설법을 한 것이다(對一說)”.

擧. 僧問雲門, 如何一代時敎. 雲門云, 對一說.


일대시교는 근기에 따른 방편일 뿐
교학불교의 번쇄한 교판 경계해야

선어록에는 교학의 전문가인 강사[座主]들이 선사들에게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나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를 제시하여 선승들이 주장하는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이 한 평생 중생을 위해서 설하신 불법의 가르침에 대한 선승들의 견해를 시험하는 질문을 많이 하고 있다. ‘일대시교(一代時敎)’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평생 설하신 불법의 가르침을 말하는데, 천태나 화엄교학에서 제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용어이다.

즉 천태종에서는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오시(五時) 팔교(八敎)로 분류하여 불법을 통합하고 있다. ‘오시’란 첫째로 화엄시(華嚴時)로서 세존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루고 21일간 대승 무상의 법문인 {화엄경}을 설한 시기이다. 두 번째는 아함시(阿含時)로 화엄의 교리는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심자들을 위하여 12년간 녹야원에서 소승의 아함경을 설한 시기이다. 세 번째는 방등시(方等時)인데, 소승에서 대승을 향한 8년간 대소승의 불교를 설한 시기로 {유마경}과 {능가경}, {금광명경} 등이다. 네 번째는 반야시(般若時)로 22년간 {대반야경}을 설하여 제법의 참된 진실과 이치를 설한 시기이다. 다섯 번째는 법화시(法華時)로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시기로 석가세존이 출세하여 중생을 구제한 실다운 대승의 법문을 설한 최후의 8년간을 말한다.

천태의 교판에서 주장하는 ‘팔교’는 교리상의 분류로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라는 네 가지의 교화법으로 분류하고, 또 중생의 근기에 맞는 석가세존의 설법을 돈교(頓敎), 점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 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중국 화엄종에서는 일체의 불교를 오교(五敎)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소승교(小乘敎)로 {아함경} 등 소승불교를 설한 시기이다. 두 번째는 대승시교(大乘始敎)로 대승의 법문이지만 대승의 극치에 이르지 못한 최초의 가르침을 설한 시기로 {해심밀교}이나 {유식론}과 같은 법상(法相)의 시교와, {반야경}과 {중관론}과 같은 설법을 공시교(空始敎) 라고 한다. 모두 진여의 본성을 설하고 있지만 화엄에서 주장하는 이사원융(理事圓融)의 묘한 이치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세 번째는 대승종교(大乘終敎)로 {능가경}과 {기신론}과 같이 대승의 참된 정신을 밝히고 이사(理事)가 원융함을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 수행의 단계가 남아 있기에 곧바로 부처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승시교와 더불어 점교라고 하고 분류하고 있다. 네 번째는 돈교(頓敎)로서 점교처럼 단계와 방편을 두지 않고 곧바로 진리에 계합하는 법문으로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 등의 가르침이다. 다섯 번째는 원교(圓敎)인데, 원교 가운데 {법화경}은 삼승(三乘)의 근기에 맞는 일승(一乘)의 묘한 이치를 설하기 때문에 동교(同敎)의 일승(一乘)이라고 하고, {화엄경}은 보현보살의 큰 근기에 대한 설법이기 때문에 별교일승(別敎 一乘)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여기 부처님의 일대 시교(時敎)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화엄이나 천태교학에서 제시한 교판(敎判)을 전제로 한 점으로 볼 때 교학의 전문가인 강사로 보인다. 그런데 운문선사는 선불교 입장에서 한마디로 대답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일단의 대화는 선과 교의 입장을 단적으로 분명히 제시한 선문답이다.

교학승려들은 선에서 주장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다. 선종에서는 부처님이 49년 동안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부처님이 한평생 중생교화를 하면서 펼친 법문[一代時敎]에 대하여 선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라는 날카로운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운문 선사는 ‘부처님은 질문자와 일대일(一對一)의 설법을 한 것일 뿐’이라는 의미로 ‘대일설(對一說)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운문의 ‘대일설’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언제나 질문자와 일대일로 만나서 질문자의 근기와 질문 내용은 물론, 당시 질문자와 마주하고 있는 시절인연과 여러 상황에 가장 적합한 대답을 하여 중생을 구제한 설법을 한 것이었다.

부처님은 언제나 개별적으로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설법을 한 것이며, 5040여 권의 8만4000의 법문도 그러한 대화를 종합한 것이다. 천태나 화엄에서 주장한 5시 8교의 교학체계를 계산한 설법이 아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볼 때 5시 8교도 ,교외별전도 없었다. 오직 시절인연에 응하여 일대일의 대화에 최선을 다한 중생교화의 법문이었다. 부처님의 일대 시교란 항상 눈앞에 있는 중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을 뿐이다.

즉 질문자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의 질문에 꼭 맞은 법문을 설하여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중생의 근기에 가장 적합하게 설하는 부처님의 설법을 수기설법(隨機說法) 혹은 근기설법(根機說法)이라고 한다. 또한 질문자와 부처님이 만난 시간과 장소와 중생의 근기에 적합한 설법이라는 의미로 수의소설(隨宜所說)이라고도 한다.

{유마경}에서는 부처님은 훌륭한 의사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은 중생의 병(心病)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지혜를 구족하고 있다.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을 중생의 병에 알맞은 약을 처방하여 제시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한다.

운문이 ‘질문자의 질문에 알맞은 설법을 한 것’이라는 ‘대일설(對一說)은 중국의 교학불교에서 제시한 부처님의 일대교설에 대한 시간적인 분류와 교설에 대한 논리적인 교판의 입장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부처님의 설법정신을 단적으로 제시한 선종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실 선불교의 선문답도 부처님이 중생교화의 대화와 같이 대화를 통하여 불법의 참된 정신을 지금 여기서 직접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 청정한 불성을 체득하도록 하는 견성성불과 직지인심(直指人心)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는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선문답이라는 대화로 새롭게 전개했다. 선문답의 일대일의 대화는 때와 장소와 사람을 전제로 한다. 사제간의 일대일 대화는 불성을 체득하여 견성성불을 이루도록 하는 직지인심의 법문이다.

설두는 “운문 화상이 질문에 알맞은 일대일의 설법은 너무나 뛰어났네.”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리고 “구멍 없는 철추로 거듭 쐐기를 박았다. 염부제 나무아래서 껄껄대고 웃으니, 어젯밤 검은 용의 뿔이 요절났네. 별나고 별났네. 운문노인이 용의 뿔을 하나 꺾었도다.”

그것은 마치 세존이 ‘5시8교’를 설하고도 49년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운문도 ‘일대일의 설법’이라는 한마디로 구멍 없는 철추로 거듭 쐐기를 박고 있다. 인간의 세계인 염부제의 모든 사람이 운문의 ‘일대일의 설법’이라는 철추로 5048권이나 되는 석존의 일대시교를 모두 분쇄해버렸기 때문에 언어문자의 경전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하게 되었다. 검은 용의 소중한 뿔에 비유되는 일대시교를 꺾어버린 것은 일체 경전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인데, 마음의 경전인 본래면목을 체득하면 언어문자의 경전에 속박될 필요가 없다는 운문의 법문을 게송으로 읊고 있는 것이다.



[第015則]倒一說
〈垂示〉垂示云。殺人刀活人劍。乃上古之風規。是今時之樞要。且道。如今那箇是。殺人刀活人劍。試擧看。
〈本則〉擧。僧問雲門。不是目前機。亦非目前事時如何。門云。倒一說。
〈頌〉倒一說分一節。同死同生爲君訣。八萬四千非鳳毛。三十三人入虎穴。別別。擾擾匆匆水裏月。

벽암록 제15칙 운문화상의 도일설(倒一說)

“병든 환자가 없다면 처방전도 필요 없어”

{벽암록} 제15칙에는 운문 화상이 일대시교에 대한 질문에 ‘일대일(一對一)의 설법도 완전히 끝내버렸다’고 하는 ‘도일설(倒一說)’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 화상께 질문했다. “현재 눈앞에 직면한 상대의 마음 작용(機)도 없고, 현재 눈앞에 직면한 문제(事)도 없을 경우는 어떻습니까?”

운문 화상이 대답했다. “일대일(一對一)의 설법도 끝났다(倒一說)”

擧. 僧問雲門, 不是目前機, 亦非目前事時如何. 門云, 倒一說.

‘倒一說’은 본래 청정한 경지 표현
‘一字不說’‘刹竿倒却’도 같은 의미

이 일단은 {벽암록} 제14칙에 제시한 ‘대일설(對一說)’과 짝을 이룬 선문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운문광록} 상권에는 각각 수록하고 있다. 질문자가 같은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원오의 시대에는 대화의 내용을 한 짝으로 파악하고 있다.

‘목전(目前)의 문제(事)’란 눈앞에 직면한 지금 여기 자기 일(事)을 말하며, ‘목전(目前)의 마음 작용(機)’이란 눈앞에 직면한 자기 일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선어록에 자주 언급하는 선기(禪機)나 대기(大機)는 마음의 지혜작용을 표현하는 말이다. 불교교학에서 작용(機)이란 주관(能觀)적인 마음이고, 문제(事)는 객관(所觀)적인 경계로서 인간의 인식은 이 주관과 객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금 여기서는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하여 “눈앞에 직면한 지금 여기 자기 마음의 작용도 없고, 눈앞에 직면한 지금 여기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일도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날카롭게 던지고 있다.

{벽암록} 제14칙에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일대일(一對一)의 대화로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한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번뇌 망념의 문제가 있는 중생도 없고, 중생심에 떨어진 번뇌 망념의 일(문제)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운문 화상이 질문하고 있다. 즉 ‘병든 환자도 없고, 번뇌 망념의 병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지도 하시겠습니까?’

운문 화상에게 질문한 스님은 마음과 경계,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본래 한 물건도 없는 세계(本來無一物)’, ‘천지(天地)라는 차별심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경지’ 혹은 ‘부모(父母)라는 차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의 경지를 체득한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불법을 설하여 지도 하시겠습니까? 라고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언설로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 혹은 한 글자로도 설할 수 없는 불립문자의 세계를 체득한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제시합니까? 라고 날카롭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스님의 질문에 대하여 원오는 “이러한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대개 많은 사람이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고 코멘트를 하면서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참으로 작가 선객이기에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의 질문은 법문을 청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질문이며, 또한 지혜작용의 칼날을 숨긴 질문이라고 하겠다. 만약에 운문이 아니었다면 그의 질문을 어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문 선사는 이러한 기량이 있었기에 그의 질문에 응하여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운문 화상은 ‘일대일(一對一)의 설법도 끝났다’라는 의미로 역시 ‘도일설(「倒一說)’이라는 일구(一句)로 대답했다. 앞의 14칙에서는 ‘대일설(對一說)’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도일설(倒一說)’로 말했는데, 여기서 ‘도(倒)’라는 한 글자가 이 선문답에서 운문 화상이 설한 중요한 법문인 것이다.

질문자가 마음으로 번뇌 망념이 있을 때는 부처님께 질문하고 설법을 듣지만, 질문자도 없고, 질문할 문제도 없을 때는 일대일의 설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설법이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로 일대일의 설법도 타도해 버린다고 하면서 ‘도일설(倒一說)’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즉 ‘일대일의 설법을 타도해 버렸다’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일대일의 설법은 끝나 버렸다는 의미이다.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한 것이 일대일의 설법이었다. 설법을 듣고 진실을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만사는 끝난 것이다. 병든 환자가 처방을 받고 병이 나았다면 본래 건강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병든 흔적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일대일의 설법을 듣고 진실을 체득하여 본래의 청정한 불심으로 되돌아간 경지는 마음에 번뇌 망념도 없고, 경계에 대한 차별심과 집착도 없다. 일체의 흔적과 자취도 남김이 없는 몰종적(沒跡)의 경지, 본래 텅 빈 근원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한다. 본래 한 문제도 없어진 경지에서는 일대일의 대화나 문답도 필요 없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질문하는 것이고, 올바른 법문을 설하는 것이 대답이다. 일문일답(一問一答)의 선문답은 대화를 추론하거나 분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체의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인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일대일의 대화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하나하나의 대화를 모두 텅 비우고,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것이 49년간 설법한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자불설(一字不說)’의 참된 소식인 것이다.

<증도가>를 보면 “깨닫고 나면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 근원적인 자성이 천진불이다(覺卽了 無一物)”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불법의 근본을 깨닫고 나면 마음의 번뇌도 경계에 떨어진 차별 분별심도 없는 것이다.

{무문관} 제22칙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전법에 대한 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난존자가 가섭존자에게 질문했다.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에게 금란가사를 전한 일 이외에 또 무엇을 전했습니까?’ 그러자 가섭은 ‘아난이여!’라고 불렀다. 아난은 ‘예’라고 대답하니, 가섭은 ‘문전의 찰간(刹竿)에 걸려있는 깃발을 철거하라(倒却門前刹竿着)!’ 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깃발을 철거하라(倒却)’는 말은 운문의 ‘도일설(倒一說)’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찰의 문전에 있는 찰간에 깃발을 세우는 것은 설법이 있다는 표시이다. 가섭이 아난에게 찰간의 깃발을 철거(倒却)하라고 지시한 것은 설법과 전법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깃발을 걸어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말한다. 가섭이 “아난이여!” 부르고, 아난이 “예!”라고 대답한 그것으로 이심전심의 전법이 모두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쓸데없이 깃발을 내세워 모양과 형식으로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운문이 ‘도일설(倒一說)’이라고 한 일구(一句)도 문제를 제기하여 해결을 구하는 일대일의 대화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를 단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일대일의 대화가 끝났다(倒一說)고 한 말씀, 한 덩어리를 쪼개어, 생사를 같이하는 각오로 그대를 위하여 결단해 주었네. 8만 4천의 대중은 봉황의 털이 아니며, 33인의 조사는 호랑이 굴로 들어갔도다. 별나고 별남이여, 술렁술렁, 한들한들 물속에 비친 달이로다.”

‘한 덩어리를 쪼개어(分一節)’는 스님의 질문과 운문이 대답이 한 치의 틈도 없고,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는 것과 같이 분명하고 적절한 답변이었다. ‘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운문의 살인도와 활인검을 휘두르는 법문은 질문한 스님을 위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비결을 제시한 것이다. 부처님의 문하에도 8만4천의 대중이 있었지만 모두 불법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오직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심인을 전해 받았다. 또한 서천 28조와 동토 6대 조사 33명의 조사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 새끼를 얻은 것처럼, 목숨을 걸고 수행하여 석존의 불법을 전해 받은 것이다. 이러한 조사들의 풍광은 각각 독특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마치 달빛이 천만의 강물 속에 비치는 것처럼, 법신의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함을 읊었다.



[第016則]啐啄
〈垂示〉垂示云。道無橫徑。立者孤危。法非見聞。言思逈絶。若能透過荊棘林。解開佛祖縛。得箇穩密田地。諸天捧花無路。外道潛窺無門。終日行而未嘗行。終日說而未嘗說。便可以自由自在。展啐啄之機。用殺活之劍。直饒恁麽更須知有建化門中一手抬一手搦。猶較些子。若是本分事上。且得沒交涉。作麽生是本分事。試擧看。
〈本則〉擧。僧問鏡淸。學人啐。請師啄。淸云。還得活也無。僧云。若不活遭人怪笑。淸云。也是草裏漢。
〈頌〉古佛有家風。對揚遭貶剝。子母不相知。是誰同啐啄。啄覺猶在殼。重遭撲。天下衲僧徒名邈。


벽암록 제16칙 경청화상과 형편없는 수행자(草裏漢)

“형식적 줄탁이 아니라 내용의 진지함 있어야”

{벽암록} 제16칙에는 경청 화상과 형편없는 졸승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경청 화상에게 질문했다. “학인이 달걀 속에서 나오려고 신호하면(?) 화상께서는 병아리가 태어나도록 달걀을 쪼아(啄) 주시오”

경청 화상이 말했다. “과연 살아날 수 있겠는가?” 그 스님이 말했다. “만약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경청 화상이 말했다. “역시 형편없는 놈(草裏漢)이군!”

擧. 僧問鏡淸, 學人, 請師啄. 淸云, 還得活也無. 僧云, 若不活遭人怪笑. 淸云, 也是艸裏漢.


‘줄탁동시’는 무심의 경지서 작용
참된 ‘줄탁’이 있는지 반성할 필요


경청 화상은 道(868~936)선사로 {조당집} 제10권 등에 그의 약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경청 화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처음 설봉 화상을 친견하고 종지를 얻은 뒤에 항상 줄탁(啄)의 기연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학인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였다. 그는 대중법문에서 ‘대개 수행하는 사람은 줄탁(啄) 동시의 안목을 가지고 줄탁동시의 지혜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수행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병아리가 달걀 속에서 껍질을 쪼면 어미 닭이 밖에서 달걀 껍질을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질문했다. ‘어미 닭이 쪼고 병아리가 쪼면 화상의 경지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 좋은 소식이다.’ ‘ 반대로 병아리가 쪼고 어미닭이 쪼면 학인의 경지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본래면목이 들어나지.’ 이 때문에 경청 화상의 문하에서는 줄탁의 기연(이야기)이 있게 되었다.”

이 공안에서 문제로 제시하는 말은 줄탁동시(啄同時)이다. 즉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고 신호를 보내는 소리를 줄()이라고 하고, 어미닭이 병아리가 알에서 태어날 시기를 알고 껍질을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달걀 속에서 성장된 병아리가 내부에서 알을 쪼는 것을 줄()라고 하고, 그 순간에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 깨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달걀 속의 병아리와 어미닭의 호흡과 기합(氣合)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고 불법을 체득하는 깨달음의 인연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깨달음을 체득하는데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학인이 좌선의 수행으로 불법의 대의를 참구하는 내적(內的) 사유와 스승의 올바른 지도와 교시를 제시하는 외적(外的) 사건(기연, 인연)이 동시에 부합되어야 한다.

경청 화상은 줄탁의 기연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본칙과 같은 어떤 학인이 도 이 문제를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 즉 학인은 “나는 달걀 속에서 쪼아 신호를 보낼테니, 화상은 밖에서 달걀을 쪼개어 주십시오.” 이 말은 ‘저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깨달음을 열도록 하고자 하니 화상은 방편으로 빨리 학인을 깨닫도록 지도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인의 질문은 병아리가 어미닭에게 알에서 나갈 것을 재촉하고 있는 것인데, 달걀 속에서 성장한 병아리의 부화시기가 맞지 않는데 어미닭이 껍질을 쪼개면 병아리는 죽고 만다. 그래서 경청 화상은 그대가 재촉하면 껍질을 쪼아 쪼갤 수는 있지만, “과연 무사히 살아 날 수 있을까?”라고 걱정스럽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어미닭으로서는 병아리가 무리하게 재촉하면서 요구하기 때문에 당연한 걱정에서 한 말이다. 줄탁동시의 작용이란 조작심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 작위성이 없이 자연스럽고,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학인은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대꾸하고 있다. “만약에 살아남지 못한다면 천하의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만약 내가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안목이 없는 존재라면 화상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라는 의미이다.

원오는 “이 학인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산다고 하여,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걱정하도록 만들고 있다”라고 하면서, 그 학인은 “한 쪽만 쳐다보고 가는 놈(擔板漢)”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 말은 편견에 떨어져 융통성이 없는 놈이란 말이다. 즉 경청 화상의 유명한 줄탁동시의 법문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수행과 근기는 고려하지 않고 화상의 지시만을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는 놈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경청 화상은 “역시 형편없는 놈(草裏漢)이군”이라고 평하고 있다. 즉 학인은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입장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지만, 경청 화상의 눈에는 번뇌 망념의 차별심과 분별심에 떨어져 풀밭에서 헤매며 안목이 없는 형편없는 놈이라고 나무라고 있다. 즉 줄탁동시의 인연과 기회를 만들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는 녀석이다. 밖으로 깨달음을 체득하는 분위기는 추구하고 있지만, 안으로 불법수행의 안목이 전혀 구족되지 않고, 근기가 익지 않은 놈이라고 꾸짖는 말이다.

원오도 경청 화상이 주장하는 ‘줄탁동시’의 공안을 적당히 생각하면 안 된다고 이 공안을 읽는 수행자들에게 주의하면서, ‘평창’에 남원화상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남원 혜옹(南院慧 : 860~930) 화상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여러 총림에서 줄탁동시의 안목을 갖추었을 뿐, 줄탁동시의 작용은 갖추지 못했다.’ 라고 말하자, 어떤 스님이 나와서 질문했다. ‘무엇이 줄탁동시의 작용입니까?’ 남원 화상이 말했다. ‘작가 선지식이라면 줄탁을 하지 않는다. 줄탁을 하면 동시에 죽게 된다.’”

남원 화상이 제시하고 있는 줄탁동시의 안목과 작용에 대한 법문을 잘 음미하고 사유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해야 경청 화상의 법문을 충분히 소화할 수가 있다. 작가는 생사대사의 본분사(일대사)를 체득한 선승인데, 그러한 선승은 줄탁(啄)같은 쓸데없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줄탁과 같은 조작과 작위성에 떨어진 행위는 이미 줄탁의 선기(禪機:지혜작용)는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고, 어미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형용하며 말하는 줄탁동시의 작용은 전광석화와 같고 의식적인 분별의 여지가 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본칙에서 “학인이 안에서 쪼면, 화상은 밖에서 쪼아 주십시오”라는 질문은 조작과 의식적인 줄탁동시를 요구하는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줄탁동시의 질문은 벌써 줄탁동시의 안목이 아니며, 지혜작용인 선기도 죽은 것이다. 그래서 남원 화상은 작가 선지식은 분별과 의식으로 조작된 줄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의미로 게송으로 읊고 있다. “경청 고불(古佛)은 줄탁동시의 가풍이 있네. 선승은 선문답으로 종지를 거양할 때에 반드시 학인의 잘못됨을 완전히 벗기고 들어내어 본래면목을 체득하도록 해야 한다” 경청 화상의 줄탁동시 법문은 어미닭이 병아리가 달걀 속에서 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병아리는 어미닭이 껍질을 쪼는 것을 알고서 쪼는 것이 아니라고 “새끼와 어미가 서로 모르는데, 누가 동시에 줄탁 할 수 있으랴!”라고 읊고 있다. 어미닭과 병아리가 모두 무심의 경지에서 줄탁이 동시에 작용하여 근기가 서로 익은 상응된 묘용인 것이다. 분별 의식으로 줄탁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에게도 과연 그런 줄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경청 화상이 ‘살아 날 수 있을까?’ 라는 말을 ‘쪼았다(啄)’고 하고, 학인인 ‘살아남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는 말은 ‘자각했다(覺)’고 읊고 있다. 지도해 주시면 깨닫게 되지요 라는 의미이다. 학인이 “살아남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고 말했지만 “아직도 그대는 껍질 속에 병아리로 남아 있군” 경청 화상이 “형편없는 놈”이라고 한 말로 다시 한번 두드려도 “천하의 납승은 부질없이 겉모습만 더듬네”라고 읊고 있다.



[第017則]坐久成勞
〈垂示〉垂示云。斬釘截鐵。始可爲本分宗師。避箭隈刀。焉能爲通方作者。針箚不入處。則且置。白浪滔天時如何。試擧看。
〈本則〉擧。僧問香林。如何是祖師西來意。林云。坐久成勞。
〈頌〉一箇兩箇千萬箇。脫卻籠頭卸角馱。左轉右轉隨後來。紫胡要打劉鐵磨。

벽암록 제17칙 향림화상과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

“지식으로 알기보다는 삶 자체를 바꿔야”

{벽암록} 제17칙은 향림 화상에게 조사가 중국에 오신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어느 스님이 향림 화상에게 질문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향림 화상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앉아서 좌선하니 피곤하군.”

擧. 僧問香林, 如何是祖師西來意. 林云, 坐久成勞.


‘부처님 정법 전파’라는 생각도 분별
‘불법은 당연한 일’ 멋대로 왜곡말라


이 공안은 〈오등회원〉 15권 향림장에 전하고 있다. 향림 화상은 운문문언의 법을 이은 징원(澄遠: 908~987)선사다. 그의 전기는 〈전등록〉22권, 〈회요〉26권 등에 전하고 있다. 중국 사천성(蜀) 성도의 향림사 주지로서 운문 선사의 선풍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원오도 ‘평창’에서 인정하고 있다. 이 공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향림 화상은 운문 선사의 문하에서 18년간 시자로 있었기 때문에 ‘원시자(遠侍者)’로 잘 알려진 선승이다. 운문의 불법을 직접 체득하는 시기는 늦었지만 참으로 그는 그릇이 큰 선승이었다고 원오도 ‘평창’에 칭찬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향림 화상에게 “달마 조사가 중국에 오신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즉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에 불법을 전하게 된 참된 정신은 무엇입니까?’ 라는 의미의 질문이다. 원오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의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듯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는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질문은 선어록에 약 220회 이상 등장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천하의 모든 선승들이 가졌던 문제였음을 말해준다. 사실 선수행자가 이 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수행한 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대답이 〈종용록〉47칙과 〈무문관〉37칙에 싣고 있는 조주 화상의 ‘뜰 앞의 잣나무’이다.

〈벽암록〉제20칙에도 용아 화상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라는 공안을 싣고 있다. 과연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오신 의도가 있는가를 문제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마가 중국에 오신 의도나 목적을 묻는 말이 아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한 선불교의 참된 정신은 무엇인가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을 잘못 이해하면 엉뚱한 줄(칸)에 답안을 쓰게 된다.

향림 화상은 이에 대해 한마디로 “오래 앉아서 좌선 수행하느라고 애썼네(坐久成勞)!”라고 대답하고 있다. 원오도 “물고기가 헤엄치니 흙탕물이 일어나고, 새가 날아가니 깃털이 떨어진다.”고 코멘트를 붙이고 있다. 즉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사실(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선원에서는 상당설법이 끝난 뒤에 주지는 대중들에게 “오래서서 나의 법문을 듣느라고 수고 했네(久立珍重)!” 라고 일상적인 인사말을 한다. 향림 화상의 대답도 선원에서 수행자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주고받는 지극히 당연한 인사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단순한 범부의 중심으로 나눈 인사말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원오도 ‘평창’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향엄 화상이 ‘오래 앉아서 좌선수행 하느라 애썼네!’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고 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9년 동안 면벽(面壁)을 했으니 오랫동안 앉아 있어 피로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지만, 전혀 근거도 없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향엄 화상이 체득한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불법의 깨달음의 경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안목 없는 주장이다.”

원오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불법에 대한 안목 없는 선승들이 향엄 화상이 대답한 ‘오래 앉아서 좌선 수행하느라고 애썼네(坐久成勞)’란 말을 가지고 여러 가지 제멋대로 이해하고 주장하는 말들을 비판하고 있다. 다시말해, 올바른 안목으로 향엄 화상의 법문을 참구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하는 안목 없는 사람들은 글자대로 해석하여 달마대사가 9년간 앉아서 좌선수행한 모습으로 이해한 말이다. 최근에 간행한 〈벽암록〉 주석서에도 “달마는 소림사에서 오랫동안 앉아 좌선하며 뛰어난 제자가 오는 것을 기다리다 지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달마가 아니라 “향엄 자신이 오랫동안 좌선 수행하고 앉아 있지만 찾아오는 제자가 없어 지치고 피로했다”라는 해석도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누가 누구에게 “오랫동안 앉아서 좌선 수행하느라고 애썼네!”라고 말을 했을까? 라고 그 주인공을 찾는 분별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선문답을 단순히 글자 해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선승들이 대답한 한마디 한 구절에도 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법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이 없으면 선문답의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단순히 글자로 이해할 수 있는 대화라면 굳이 선문답이라는 말로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 선문답은 평범한 범부들의 차별심 분별심으로 나눈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일체의 분별과 차별적인 인식으로 이해하는 중생심을 초월한 불심(佛性)의 지혜로 나눈 법문이기 때문이다.

불법의 지혜를 체득한 선승들의 대화(선문답) 내용은 평범한 일상생활의 대화를 나누는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임과 동시에 불법의 진실을 나누는 보살행의 법문이다. 불법을 체득한 선승들의 지혜로운 법문이기 때문에 기록할 가치가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대화를 통하여 불법을 체득할 수 있는 참된 인간교육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공안의 이해에 가장 어려운 점은 ‘달마가 중국에 오신 의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와 ‘오랫동안 좌선 수행하느라 애썼네!’ 라는 말을 글자대로 해석하는 오류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달마가 중국에 오신 의도(의지)를 파악하려고 참선을 한다. 무자화두를 참구할 때도 “왜 무(無)라고 했는고?”라면서 조주의 의지를 참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 자신의 의지를 참구하지 않고, 달마의 의지나 조주의 의지를 참구해서 무엇 하려고 하는가? 참구한다고 달마나 조주의 의지가 파악될 수 있는 문제인가?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자신도 중생심의 선병에서 허덕이는 불법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달마가 중국에 온 것은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별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마가 중국에 온 것은 의도나 의지가 없다. 의도나 의지는 목적의식이 있는 중생심인데, 달마대사는 한갓 범부로서 중생심으로 불법을 전하고 중생을 교화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마대사는 자신이 세운 원력을 실행하기 위해서 시절인연에 맞는 자기의 일을 당연히 실천한 것일 뿐, 별다른 목적의식이나 의도를 가지고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다. 불보살이 실행하는 일은 원력을 세운 보살도의 일임과 동시에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일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 가운데 지극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하며, 결코 남이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움직이고 숨쉬는 일,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과 같이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향엄 화상은 “오랫동안 좌선수행 하느라 애썼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말은 선원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 좌선하며 불법을 사유하고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달마가 중국에 오신 참된 정신이 자신의 일을 당연히 한 것처럼, 그대도 “좌선 수행하느라 애쓰고 있네!”라고 지극히 당연한 일을 일상의 인사말로 대답한 것이다. 일상의 인사말 하는 가운데 불법의 정신을 체득해야 하는 것이 선문답이다. 불법의 체득한 깨달음의 생활은 지금 여기 자신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떠나서 존재하거나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오는 “향림 화상이 ‘오랫동안 좌선수행 하느라 애썼네(坐久成勞)!’라고 말한 의미를 이 공안을 읽는 그대는 아는가? 안다면 자신의 삶이 안목 있는 불심의 생활이 되어 다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第018則]無縫塔
〈本則〉擧。肅宗皇帝問忠國師。百年後所須何物。國師云。與老僧作箇無縫塔。帝曰。請師塔樣。國師良久云。會麽。帝云。不會。國師云。吾有付法弟子耽源。卻諳此事。請詔問之。國師遷化後。帝詔耽源。問此意如何。源云。湘之南潭之北。中有黃金。充一國。無影樹下合同船。琉璃殿上無知識。
〈頌〉無縫塔見還難。澄潭不許蒼龍蟠。層落落。影團團。千古萬古與人看。

벽암록 18칙 혜충국사의 ‘무봉탑’

삼라만상 그대로가 이음새 없는 ‘무봉탑’

{벽암록} 제18칙에는 남양혜충 국사가 입적할 때에 숙종 황제에게 이음새가 없는 탑(無縫塔)을 만들어 줄 것을 간청하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숙종 황제가 혜충 국사에게 물었다. “국사께서 입적한 뒤에 필요한 물건이 무엇입니까?” 국사는 대답했다. “노승을 위해서 이음새가 없는 탑(無縫塔)을 만들어 주십시요.” 황제는 말했다. “국사께서는 탑의 모양을 말씀해 주십시오.” 혜충 국사가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알았습니까?”라고 하자, 황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국사가 말했다. “나의 법을 부촉한 제자 탐원(耽源)이 있는데, 이 일(此事)을 알고 있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에게 묻도록 하십시요,” 국사가 입적한 뒤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탐원에게 물었다. “이 국사가 말씀한 이 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탐원이 말했다. “상주(湘州)의 남쪽, 담주(潭州)의 북쪽” (설두가 착어 했다. “한 손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황금이 있어 온 나라에 가득하다” (설두가 착어 했다. “산처럼 생긴 주장자로다”) “그림자 없는 나무아래 함께 타는 배가 있다.” (설두가 착어 했다. “바다는 잠잠하고 강물은 맑다”) “유리로 만든 궁전위에 아는 사람이 없도다” (설두가 착어 했다. “무봉탑에 대하여 할 말은 다했다”)

擧. 肅宗皇帝, 問忠國師, 百年後, 所須何物. 國師云, 與老僧, 作箇無縫搭. 帝曰, 請徙搭樣, 國師良久云, 會. 帝云不會. 國師云, 吾有付法弟子眈源, 却此事, 請詔問之. 國師遷化後, 帝詔眈源, 問此意如何. 源云, 湘之南(兮)潭之北, (雪竇着語云, 獨掌不浪鳴.) 中有黃金充一國. (雪竇著語云, 山形杖子.) 無影樹下合同船. (雪竇著語云, 海晏河淸.) 瑠璃殿上無知識. (雪竇著語云, 拈了也.)


진리의 모습은 바깥에서 찾을 수 없어
모양과 소리에 집착하면 번뇌에 불과

이 얘기는 〈전등록〉 제5권에 전하고 있는 것으로, 혜충 국사가 입적하기 직전 대종(代宗)황제와 하직할 때에 나눈 대화이다. ‘평창’에서도 숙종과의 대화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혜충(? ~775)국사는 육조혜능의 제자로 하남성 남양의 백애산(白崖山) 암자에서 40년간 거주하였다. 그의 도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숙종과 대종황제의 국사로 초빙되었기 때문에 혜충 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황제는 혜충 국사와 하직할 때에 “국사가 입적한 이후에 내가 국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국사는 “저를 위해서 이음새가 없는 탑(無縫塔)을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대답한다. 입적한 스승을 위해서 탑을 세우는 것은 보은과 공양의 의미인데, 인도나 중국, 한국에도 많은 선승들의 부도탑이 조성되었다.

이음새가 없는 무봉탑(無縫塔)이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는 탑을 말한다. 원오도 “형체를 파악 할 수 없다”라고 착어를 하고 있다. 형체가 없는 탑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온 우주의 법계를 하나의 탑으로 말한 것이다. 즉 우리들 각자의 본성은 자타(自他)나 미오(迷悟)의 차별과 분별심으로 꿰맨 자국이 없다. 선에서는 일원상(一圓相)과 같이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상징어로 사용하는 말인데, 아상, 인상이 텅 비워진 자기가 우주 만법과 하나가 된 만법일여 만물일체(萬法一如, 萬物一體)의 경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황제는 국사가 말한 이같은 무봉탑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탑의 모양에 대하여 질문했다. 국사는 황제에게 잠시 침묵하는 모습으로 보여 주고는 “내가 침묵으로 보여준 의미를 잘 파악했습니까?”라고 확인하고 있다. 국사의 침묵은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과 분별심을 초월하고, 아상 인상을 텅 비운 불심의 경지를 직접 보여 주고 있다.

황제는 국사의 무봉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사는 황제에게 나의 제자 탐원(耽源)이 내가 말한 무봉탑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니 그에게 자세히 물어 보라고 말했다. 탐원은 길주 탐원사 응진(應眞)선사로 국사를 오랫동안 모신 시자다. 국사의 법을 계승한 인물이며, 〈무문관〉 17칙에 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부른 공안을 싣고 있다. 선문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을 앙산혜적에게 전수한 선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국사가 입적한 뒤에 황제는 탐원에게 국사가 말한 무봉탑에 대하여 문의하자, 탐원은 무봉탑의 형체를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상주의 남쪽, 담주의 북쪽, 그곳에는 황금이 있어 온 나라에 가득찼네. 그림자 없는 나무아래 함께 타는 배가 있다. 유리로 만든 궁전 위에 아는 사람이 없네.”

상주와 담주는 중국 동정호(洞庭湖)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상강(湘江)과 담강(潭江)을 말한다. 석탑의 모양과 형체에 집착하고 있는 황제에게 “상주의 남쪽 담주의 북쪽”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탐원의 말은 남쪽의 끝, 북쪽의 끝과 같은 말로, 우주 건곤(乾坤)이 모두 무봉탑 아닌 것이 없다는 소식을 읊고 있다. 무봉탑은 어떤 고정된 모양이 없고, 어떤 고정된 장소에 한정되어 있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방세계가 모두 무봉탑인 것이다.

이말에 대하여 설두는 “한 손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고 착어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손은 탐원을 비유한 말이다. 황제가 무봉탑에 대하여 질문하자, 탐원이 “상주의 남쪽, 담주의 북쪽”이라고 대답했지만 황제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탐원 혼자 아무리 무봉탑에 대하여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 듣고 있다는 의미이다.

탐원의 두 번째 게송에 “그 곳에는 황금이 가득 있어 온 나라에 가득 찼네”라고 읖은 것은 시방세계의 무한한 공간에는 일체의 모든 불법(황금)이 가득 충만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미타경〉과 〈화엄경〉 등에서는 불국토(法界)를 황금과 칠보(七寶) 등으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들의 본체인 진여 법성의 무봉탑(法界) 가운데는 일체의 모든 만법이 여법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게송에 설두는 “산처럼 생긴 주장자”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산에서 꺾어온 자연 그대로의 주장자를 말한다. 주장자는 선승이 갖는 도구로서 불성의 지혜작용을 무애 자재하게 활용하는 것을 상징한다. 탐원이 “그 곳에는 온 나라에 황금이 가득”이라고 읊은 것은 무봉탑의 세계를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완전히 제시하여 보여준 말이다.

탐원은 “그림자 없는 나무아래 함께 타는 배가 있다”라고 읊고 있다. 그림자 없는 나무(無影樹)는 무봉탑을 말한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상대적인 차별과 분별이 없는 절대의 경지이다. 선악(善惡)과 미오(迷悟), 시비(是非)는 모두 중생심의 차별로 나타난 그림자다. 이 게송은 일체중생이 절대(一味)평등한 불심(佛心)의 배를 함께 타고 있는 경지를 읊고 있다.

이 게송에 대해 설두는 “바다는 잠잠하고 강물은 맑다”고 착어했다. 일체 중생이 함께 타고 있는 배는 바람(중생심) 한 점 없는 잠잠한 불성의 바다에서 근심 걱정 없이 순조롭게 항해 할 수 있다. 일체의 차별심이 없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불심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탐원이 “유리로 만든 궁전 위에 아는 사람이 없네”라고 읊고 있는데, 유리 궁전은 수정궁전으로 일체의 분별과 지해, 망념이 없는 청정한 불국토로서 무봉탑을 말한다. 무봉탑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무봉탑을 찾고 있는 것처럼, 무봉탑의 경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무봉탑은 각자의 번뇌 망념을 비운 진여 불성이며, 삼라만상의 일체 만법과 함께하고 있는 불심을 말하는데 각자의 불심을 밖을 향해서 어떤 모양과 형체로 찾아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비판하고 있는 게송이다.

설두는 “무봉탑에 대하여 할 말을 다 했다”라고 착어했다. 즉 탐원의 게송은 국사가 말한 무봉탑을 올바른 설명으로 남김없이 잘 표현했다고 칭찬하고, 게송에도 “무봉탑은 보기 어렵다”라고 읊고 있다. 무봉탑을 보려고 하면 도리어 더욱 보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第019則]只竪一指
〈垂示〉垂示云。一塵擧大地收。一花開世界起。只如塵未擧花未開時。如何著眼。所以道。如斬一綟絲。一斬一切斬。如染一綟絲。一染一切染。只如今便將葛藤截斷。運出自己家珍。高低普應。前後無差。各各現成。儻或未然。看取下文。
〈本則〉擧。俱胝和尙。凡有所問。只豎一指。
〈頌〉對揚深愛老俱胝。宇宙空來更有誰。曾向滄溟下浮木。夜濤相共接盲龜。

벽암록 19칙 구지화상의 한 손가락 법문

“손가락 하나에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있다”

{벽암록} 제19칙에는 구지(俱) 화상이 한 손가락을 세워 불법을 설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구지 화상은 누구라도 불법에 대하여 질문하면, 단지 한 손가락만을 세우기만 했다.

擧. 俱和尙, 凡有所問, 只竪一指.


일지선은 화엄과 유마와 동일한 세계
지혜 체득없이 손가락만 세우면 망상

조사들의 행장을 모아놓은 {조당집} 19권 '구지화상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구지 화상은 천룡(天龍)의 법을 이었고 경안주(敬安州)에 살았다. 그 밖의 행적은 알 수가 없어 기록하지 못한다. 선사가 암자에 살고 있을 때에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와서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선사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주장자를 우뚝 선사 앞에 세우고 서서 말했다. '화상께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삿갓을 벗겠습니다.' 선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비구니는 그냥 떠나려고 했다. 이에 선사는 말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하루 저녁 묵어가도록 하시오' 비구니가 말했다.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묵어가겠지만 대답을 못하시면 이대로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떠나 가버렸다.

이때 선사는 혼자 탄식하였다. '나는 명색이 사문이라고 하면서 비구니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외람되이 장부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장부의 작용이 없구나! 이 산을 떠나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리라.' 그리고 조용히 선정에 드니 갑자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삼(三), 오(五)일 안에 큰 보살이 오셔서 화상께 설법해 드릴 것이요' 그런지 열흘이 지나지 않아 천룡 화상이 왔거늘 선사는 뛰어나가 말에 절을 하고 맞아들여 모시고 서서 앞에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한 즉 천룡 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니 즉시에 환히 불법을 깨달았다.

선사는 그 뒤로 대중에게 말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룡 화상에게 일지선(一指禪)을 얻은 뒤로 평생 동안 사용해도 다 사용하지 못했다.'" 구지 화상은 항상 구지관음다라니(俱觀音陀羅尼: 七俱佛母心陀羅尼經)를 외우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마조도일의 제자 법상(法常: 752~839)의 법을 이는 천룡 화상의 제자이다. 천룡 화상의 전기도 잘 알 수가 없다.

구지 화상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불법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을 할지라도 단지 한 손가락만을 세웠다고 한다. 원오도 '평창'에 "만약 손가락을 가지고 이렇쿵 저렇쿵 말한다면 구지화상을 법문을 저버린 것"이라고 주의하고 있다. 손가락을 보는 자는 경계에 떨어진 중생이다.

선어록은 선승들의 대화와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 언행록이다. 말(言句)은 행위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행위는 말(言句)보다도 한층 더 깊이 있는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원오도 '수시(垂示)'에 "한 티끌이 일어나니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라고 한 말은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난다는 {기신론}의 말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티끌이 일어나기 전에, 꽃 한 송이가 피기 전의 지혜작용이 오직 이 구지 화상의 한 손가락에 현성(現成)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도 같은 뜻이다. 즉, 번뇌 망념이 일어나기 이전, 언어 문자의 방편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불법의 근본을 구지 화상이 한 손가락을 세워서 제시하고 있는 법문을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를 한 손가락으로 제시한 것이다. 마치 세존이 영산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것과 같은 법문이다.

선불교에서 하나(一)는 불법의 근본인 진실을 표현하는 불립문자의 경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또, 둘(二)은 언어 문자로서 진실을 체득하는 방편법문이다. 선문답에서 행동으로 제시한 불법의 근본은 만법의 근원인 일심(一心)의 법문이다. 불법은 마음으로 만법의 진실을 깨닫고 지혜를 체득하는 심법(心法)이다. 달마가 일심(一心)의 불법을 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심(一心)의 법문인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말한다. 선에서 제시한 일심(一心)의 법문은 {화엄경}에서 설하는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이 만드는 것(一切唯心造)'이나 '만법유심(萬法唯心)' 그리고 '하나가 곧 많음(一卽多)'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라는 법계의 연기를 사상적인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모든 법은 하나(一心)로 되돌아간다고 주장하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법문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조당집} 제7권 설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산이 앙산에게 질문했다. '그대가 밤새도록 불법을 사유하고 궁리하여 이룬 것이 무엇인가?' 앙산이 선뜻 한 획(불법의 대의)을 그어 보이니 위산이 말했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의 경지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어떤 사람이 장경에게 물었다. '앙산이 한 획을 그은 뜻은 무엇입니까?' 장경이 손가락을 하나 세워 일으켜 보였다. 또 순덕에게 질문하니 순덕도 역시 손가락을 하나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불법은 불가사의하여 천성(千聖)이 같은 길을 달린다.'"

원오는 '수시'에서 "한 티끌이 일어나면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라고 했다. '평창(評唱, 선에서 옛 사람의 이야기를 평하고 제창하는 것)’에서는 "한 티끌이 일자마자 대지는 전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온 세계가 열린다. 사자의 한 터럭에 백억 마리의 사자가 나타난다."라고 했다. 이는 낙보원안(834~898)의 말을 인용하여 일즉다(一卽多)의 융통과 대소(大小)가 무애자재한 불법의 불가사의한 경지를 설한 것이다.

{유마경}에 '한 터럭 속에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포용한다'고 하여, {소부사의경(小不思議經)}이라고 하였고, {화엄경}에 '일심(一心)에 法界를 포용한다'고 하여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이라고 한다. {능엄경}에서 '한 터럭(一毛端)에 두루 모두 시방국토를 포용한다'고 하는 불법의 정신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운 법문으로 전개하고 있다. 구지의 일지선(一指禪)은 불법의 일심법계(一心法界) 정신에 {장자} '제물론편'에서 "천지(天地)는 한 손가락(一指)이며, 만물은 한 마리의 말(一馬)이다", "천지(天地)는 같은 뿌리요, 만물(萬物)은 일체(一體)"라는 사상을 수용하여 철학과 이론으로 이해하는 불법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직접 불법을 정신을 현실에서 체득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행위의 법문이다.

{무문관}에는 구지화상의 일지선(一指禪) 법문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구지 화상을 시봉하는 동자가 한 명이 있었는데, 구지화상이 외출하였을 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구지화상께서는 어떤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묻자, 그 동자 역시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후에 구지화상은 이처럼 동자가 자기의 불법을 흉내 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느 날 하루는 드디어 칼로서 동자의 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동자는 아픔을 참지 못해 통곡하며 달아나고 있을 때에 구지화상은 동자를 불렀다. 동자는 머리를 돌려 화상을 쳐다보았다. 그 때에 구지화상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 때 동자는 홀연히 깨달았다."

무문선사는 "구지 화상과 동자의 깨달음이 손가락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잘 파악하여 깨달음을 체득했다면 천룡과 구지, 동자와 이 공안을 읽고 있는 그대가 하나의 꿰미에 꿰어 놓은 것처럼, 똑같은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라고 평하고 있다. 원오도 '평창'에서 "구지화상이 손가락을 세우는 법문는 참구하기는 쉽지만 깨닫기는 어렵다. 요즘 사람들은 질문을 하면 손가락을 세우고 주먹을 불끈 드는데, 이것은 망상 분별일 뿐 반드시 뼛속에 사무친 투철한 견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게송을 읊고 있다. "구지화상은 누구에게나 손가락 하나만 세워 언어 문자를 초월한 법문으로 학인을 지도한 선풍(禪風)을 좋아한다. 손가락 하나로 전 우주를 텅 비워버리고, 들어올려 이러한 법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라고 칭찬했다.



[第020則]西來無意
〈垂示〉垂示云。堆山積嶽。撞牆磕壁。佇思停機。一場苦屈。或有箇漢出來掀翻大海。踢倒須彌。喝散白雲。打破虛空。直下向一機一境。坐斷天下人舌頭。無爾近傍處。且道從上來。是什麽人曾恁麽。試擧看。
〈本則〉擧。龍牙問翠微。如何是祖師西來意。微云。與我過禪板來。牙過禪板與翠微。微接得便打。牙云。打卽任打。要且無祖師西來意。牙又問臨濟。如何是祖師西來意。濟云。與我過蒲團來。牙取蒲團過與臨濟。濟接得便打。牙云。打卽任打。要且無祖師西來意。
〈頌〉龍牙山裏龍無眼。死水何曾振古風。禪板蒲團不能用。只應分付與盧公。這老漢。也未得勦絶。復成一頌。盧公付了亦何憑。坐倚休將繼祖燈。堪對暮雲歸未合

벽암록 20칙 용아화상과 달마가 오신 뜻

“조사의 뜻을 편견으로 재단하지 말라”

{벽암록} 제20칙에는 용아(龍牙) 화상이 취미(翠微)선사와 임제(臨濟) 선사를 찾아가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질문하는 공안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용아화상이 취미 선사에게 질문했다.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무엇입니까?" 취미 선사는 "나에게 선판(禪板)을 건네주게나.!"라고 말했다. 용아화상이 선판을 취미 선사에게 갖다 드리자, 취미 선사는 선판을 받자마자 곧바로 후려쳤다. 용아화상은 말했다. "치는 것은 선사 마음대로 치시오. 그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용아화상은 다시 임제선사에게 질문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임제 선사는 말했다. "나에게 방석을 건네주게!" 용아화상은 방석을 임제선사에게 갖다 드리자, 임제선사는 곧장 후려쳤다. 용아화상은 말했다. "치는 것은 선사 마음대로 치시오. 그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擧. 龍牙問翠微, 如何是祖師西來意. 微云, 與我過禪板來. 牙, 過禪板與翠微. 微, 接得便打. 牙云, 打卽任打, 要且無祖師西來意. 牙, 又問臨濟, 如何是祖師西來意. 濟云, 與我過蒲團來. 牙, 取蒲團過與臨濟. 濟, 接得便打. 牙云, 打卽任打. 要且無祖師西來意.


고정관념에 떨어지면 본래의 뜻 오해
좌선 흉내낸다고 진리 체득할 수 없어

용아 화상은 동산양개의 법을 이은 거둔(居遁: 835~923)선사로 호남 용아산 묘제선원에서 선풍을 떨친 선승이다. 그의 전기는 {조당집} 8권, {송고승전} 13권에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 제시한 공안은 {전등록} 17권과 {임제록}, {굉지송고} 80칙 등에도 전하고 있다.

{벽암록} 제4칙에 덕산이 위산영우선사를 참문한 것처럼 용기가 충천한 젊은 수행자 용아 화상은 먼저 취미 선사을 방문하여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취미선사는 단하천연(丹霞天然)선사의 법을 이은 당대의 유명한 무학(無學)선사이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은 {벽암록} 17칙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선승들이 많이 사용하는 정형구의 질문이다. 수행자가 정면에서 돌파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불법의 근본문제이다.

그런데 취미 선사는 "저기 있는 선판을 건네주게!"라고 말했다. 선판은 좌선 수행중에 잠시 턱을 기대고 쉴 수 있는 도구이다. 용아 화상은 "예!"하고 노스님이 시키는 대로 정직하게 선판을 건네주자, 취미 선사는 선판을 받는 순간 곧장 후려쳤다. '이 멍청한 녀석! 조사의 뜻을 알기나 해? 지금 나에 선판을 건네주는 그 지혜작용의 일이 바로 살아있는 조사의 뜻이라는 사실을 체득해야지!'라는 친절한 훈계다.

용아화상은 "때리는 것은 노스님 맘대로 하세요. 그러나 조사의 뜻은 없군요"라고 말하고 곧장 나가 버렸다. 용아 화상은 "번뇌 망념이 한 생각도 없는 무념무위(無念 無爲)의 경지가 조사가 오신 뜻(祖師意)"이라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취미 선사를 점검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취미 선사가 조사의 뜻을 직접 친절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법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다시 젊은 패기로 당시 유명한 임제선사를 찾아가 똑같은 질문을 제시하며 임제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임제선사는 "나는 지금 좌선을 하려고 하는 참인데, 그대는 나에게 방석을 건네주게!”라고 말했다. 임제는 조사의를 체득한 경지의 삶을 지금 여기서 좌선하는 자신의 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용아 화상은 역시 임제의 법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예!"하며 방석을 건네주고 있다. 임제는 방석을 건네 받는 즉시에 "이 멍청한 놈!"하고 주장자로 후려쳤다. 용아 화상은 역시 "때리는 것은 노스님 맘대로 하시오. 조사의는 없군요!"라고 자기 나름대로 임제의 선기(지혜작용)를 점검하고 있다.

원오는 "귀신의 소굴에서 살림살이하고 있군"이라고 착어했는데, 용아 화상이 '조사의 뜻(祖師意)은 없다'고 하는 고정관념에 떨어져 지혜작용이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즉 용아 화상이 '조사의'가 없다고 하는 주장은 '일체의 생각을 텅 비운 공무(空無)의 경지가 조사의 뜻이라는 편견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일을 통한 지혜의 작용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용아 화상은 '조사의 뜻(祖師意)이 없다'고 하는 한 생각에만 사로잡힌 편견으로 취미와 임제 선사를 점검하려고 하는 승부심에 떨어져 있는 것인데, 이기고 지는 승부심을 가지고 선문답을 하는 것은 주객(主客)의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용아 화상이 뒤에 선원을 열고 수행자들을 지도할 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화상이 취미와 임제 선사를 참문 하였는데 그 두 존숙을 인정하십니까?" 용아 화상은 "두 존숙이 불법을 체득한 경지를 인정하지만 단지 조사의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생각하는 편견으로 점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산어록}에 의하면 용아 화상은 동산 선사를 참문하여 똑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동산 선사는 "동수(洞水)의 물이 역류할 때에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라고 말하자 곧바로 깨닫고 동산의 법을 계승하게 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용아화상은 한결같이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며 선법과 인격을 탁마하였으니 후대에 수행자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설두 화상의 게송을 살펴보자. "용아산의 안목 없는 용이여!" 이 말은 용아 화상이 취미와 임제 선사를 점검하러 가는 기세는 용아(龍牙)라는 이름에 걸맞게 훌륭한 용(龍)의 모습이었는데, 두 존숙의 지혜법문을 체득하지 못한 것은 불법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썩은 물속에서 어떻게 고풍(古風)을 떨칠 수가 있으랴!" 용아화상은 자신이 조사의는 없다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적멸(寂靜)세계가 불법을 깨달은 경지로 생각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물에 빠져있는 눈알(정법의 안목)이 빠진 용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취미가 선판을 제시하고, 임제가 방석을 제공해도 그러한 도구를 조사의로서 활용할 수 있는 안목이 없게 되었으니 그 선판과 방석을 나 설두(盧公)에게 넘겨 주시오라고 읊고 있다.

설두는 "이 늙은이(용아)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군(絶)! 또 하나의 게송을 더 지어야 겠네!"하고 게송을 짓고 있다. 설두는 앞의 게송에서 용아는 참된 불법의 깨달음을 체득하지 못하여 안목없는 선승으로 취급했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완전히 죽여 버리는 것(絶)은 아까운 인물이다. 미련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하나의 게송을 더 첨가한다고 하고 있다. 초절(絶)은 {서경}에 나오는 말로 '소멸시키다'라는 의미이다.

"선판과 방석을 나 설두(盧公)에게 넘겨준들 어찌 의지할 것이 있으랴!. 방석에 앉거나 선판에 기대어서 조사의 등불을 계승하려 하지 마오." 나는 앞의 게송에서 용아 화상에게 선판과 방석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나에게 건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판과 방석을 받으면 불법을 전해 받았다는 분별심을 일으키기 쉽지만, 나는 이러한 정식(情識)을 끊었기 때문에 방석과 선반을 의존하지 않는다. 방석 위에 앉아서 9년 면벽하며 좌선한 달마와 같이 조사의 흉내를 낸들 조사의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의미있는 일도 아니며, 또한 선판에 기대어 피로를 푸는 일도 모두 쓸데없는 일이다. '조사가 오신 뜻(祖師意)'이란 좌선 수행을 하는 자세나 모양을 취한다고 체득되는 것이 아니며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옛날에는 황벽과 임제처럼, 선판과 방석이 전법의 인가증명으로 활용된 적은 있지만. 나 설두는 그것보다 달마가 중국에 오기 이전의 소식을 존중하고 싶다. 설두는 참된 조사의를 세계를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로서 제시했다. "저녁 구름은 돌아가느라 모여들지 않나니, 먼 산은 아득히 푸르름에 쌓여 있도다."

 

 

http://kr.buddhism.org/%ec%a1%b0%ec%82%ac%ec%96%b4%eb%a1%9d/?mod=document&uid=82 

 

벽암록 (碧嚴錄) 원문 해제 1칙~100칙

0 벽암록 원문 1 벽암록(碧嚴錄) 해제 2 벽암록(1) 1칙 ~ 10칙 3 벽암록(2) 11칙 ~ 20칙 4 벽암록(3) 21칙 ~ 30칙 5 벽암록(4) 31칙 ~ 40칙 6 벽암록(5) 41칙 ~ 50칙 7 벽암록(6) 51칙 ~ 60칙 8 벽암록(7) 61칙 ~ 70칙 9 벽

kr.buddhism.org

 

목차

한문 원문

0 벽암록 원문
1 벽암록(碧嚴錄) 해제
2 벽암록(1) 1칙 ~ 10칙
3 벽암록(2) 11칙 ~ 20칙
4 벽암록(3) 21칙 ~ 30칙
5 벽암록(4) 31칙 ~ 40칙
6 벽암록(5) 41칙 ~ 50칙
7 벽암록(6) 51칙 ~ 60칙
8 벽암록(7) 61칙 ~ 70칙
9 벽암록(8) 71칙 ~ 80칙
10 벽암록(9) 81칙 ~ 90칙
11 벽암록(10) 91칙 ~ 100칙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81 

 

벽암록(碧巖錄) 해제

해제 선문에서는 옛 조사들이 남긴 언행 중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것을 고칙(古則)이라 한다.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스님이 명주(明州:지금의 浙江省 奉化縣)에 있는 설두산의 자성사(

kr.buddhism.org


선문에서는 옛 조사들이 남긴 언행 중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것을 고칙(古則)이라 한다.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스님이
명주(明州:지금의 浙江省 奉化縣)에 있는 설두산의 자성사(資聖寺)에 머물면서,
고칙을 100개로 정리하고 거기에 송을 붙인 것이「설두송고」이다.

이 송고 집은 당시 절강성을 중심으로 한
선과 문학의 조화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
「선림보훈」에 의하면 임제종 분양선소(汾陽善昭:947-1024)의
「분양송고(汾陽頌古)」를 본 따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많은 승려들이 이런 송고류를 만들었는데,
이 풍조는「경덕전등록」의 편찬을 거슬러 올라가서
「조당집」의 편찬 등에 의해 격발된 것으로 보인다.

사천성 출신인 설두스님은
설봉 - 운문 - 향림 - 지문 - 설두로 이어지는 운문계의 선사이다.

그러나 여하경(呂夏卿)이 지은 탑명에 의하면
설두스님은 마조의 9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특출한 선사는 모두 마조의 법손이라고 믿는
당시의 사상을 잘 반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에는 이미 마조 - 백장 - 황벽 - 임제로 이어지는
임제종이 선풍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송대 임제종에 속하는 원오스님이 이 송고집을 거량하여
「벽암록」으로 후세에 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설두송고」를 대본으로 원오 극근(?悟克勤:1063-1135)스님이
당시의 수행자들에게 제창한 것이 바로 이 「벽암록」이며,
이 책은 「벽암집(碧巖集)」, 「불과원오선사벽암록(佛果?悟禪師碧嚴錄)」등으로 불려왔고,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는 칭호와 함께 선서(禪書)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설두스님이 하신 [본칙]·[송]과
원오스님이 하신 [수시]·[평창]·[착어]로 구성되어 있다.

[수시]는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 일종의 문제제기이고,
[평창]은 [본칙]과 [송]에 대한 설명이고,
[착어]는 한두 마디로 상대를 격발시키는 간단한 평가이다.

그러나 원오스님의 제창은
단순한 글자 해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님 자신의 전인격이 투여되어 있다.
특히 말이나 문헌에 대한 집착을 끊어주기 위하여
당시의 구어와 속어를 종횡무진하게 사용하여 수행자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러한 원오스님의 생생하고 발랄한 강의의 모습은
그의 훌륭한 기록자들에 의해 그 몸짓마저도 전해지고 있다.

설두스님이 표전(表詮)의 논리로 본분의 소식을 알린 반면,
원오스님은 차전(遮詮)의 방식으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뛰어넘어
자기의 본래면목을 단박에 깨치도록 하였다.

“「벽암록」을 읽으면 모든 알음알이가 딱 끊어진다”고 한 성철스님의 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벽암록」은 문학적으로도 매우 밀도 있게 완성되어,
중당 이후의 문단(文壇)의 중심적인 사조인 돈오무심(頓悟無心) 사상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더구나 송대의「창랑시화(滄浪詩話)」등의 시평어집에서
당대(唐代)에 유행하던 돈오돈수 사상을 근거로
당시(唐詩)를 평한 것을 상기할 때에
「벽암록」이 갖는 불교문학사적 위치는 대단히 크다.

순간적으로 포착된 느낌을 압축된 언어로 정착시켜야만 하는 시인의 긴장감이
일체의 사량분별이나 점진적인 단계를 철저히 거부하는 선사의 삶과
잘 조화를 이룬 것이다.

선 사상사로 보더라도 돈오견성을 부르짖는「육조단경」의 사상과,
철저한 자기 주체성을 강조하는 선사들의 정신이「벽암록」에 집약되어 있다.

“기봉이 단계적인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독바다에 떨어진다"라든가,
“남으로부터 얻은 보물은 자기의 보물이 아니다"라는 옛 조사들의 말을
원오스님은 누누이 인용하고 있다.

원오스님은 팽주 숭녕(彭州崇寧:사천성 성도) 출신으로
자(字)는 무착(無着)이고 극근(克勤)은 스님의 휘(諱)이다.

생전에는 북송의 휘종 임금이 불과(佛果)라는 법호를,
사후에는 남송의 고종 임금이 원오라는 법호를 내렸다.

어려서 출가하여 뒷날 오조 법연(五祖法演:?-1104)스님의 법을 이어
임제의 가풍을 날렸으나, 문하에는 항상 천여 명의 납자가 있었으며
그 중 대혜 종고(大慧宗 )와 호구 소륭(虎丘韶隆)스님이 유명하다.

당시의 한림학사 곽지장(郭知章)과 재상 장상영(張商英)의 귀의를 받아
여러 관사(官寺)에서 종풍을 선양하던 중
성도의 소각사(昭覺寺), 호남의 협산사(夾山寺)와 도림사(道林寺) 등지에서

「설두송고」를 제창하여 「벽암록」으로 오늘에 전하고 있다.
'벽암'은 협산(夾山) 영천원(靈泉院)에 있는 한 건물의 편액에 있는 글자이다.

스님의 법어는 제자들에 의해 '어록'과 '심요'로 편집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벽암록」의 텍스트와 그 계통은 매우 복잡한데,
여기서는 이 책의 대본이 된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이하 삼성본으로 약칭)을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선화(宣和) 7년(1125)에 쓴 무당(無黨)스님의 후서에 의하면,
원오스님이 성도에서「설두송고」를 제창했다고 한다.

그 후 협산·도림에서도 또다시 제창하였는데
그때마다 말씀은 조금씩 달랐으나 그 뜻은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건염(建炎) 2년(1128)에 쓰인 보조스님의 서에 의하면
협산 영천원의 벽암에 주석하시던 중 제창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모순이다.

아마도 성도 강의록과 협산 강의록이 필사본의 형태로 둘 다 유행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뒷날 여러 다른 종류의 판본으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성본「벽암록」은 조선조 세조 11년(1465)에 제작한
을유자(乙酉字:중간 크기의 동활자)로 찍은 책이다.

이 책은 ①보조의 서, ②만리방회의 서, ③삼교노인의 서,
④주치의 서의 순으로 서가 붙어 있다.

그리고 ①무당의 후서, ②희릉의 후서, ③정일의 후서, ④풍자진의 후서,
⑤중간 원오선사벽암집소 순으로 후서가 붙어 있다.

이 후서 중 ② ③ ④에 모두 장명원의 재판(再版)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성본은 장명원본 계통을 저본으로 하여 활자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가흥장속장본과 건륭장경본의 권제10 뒤에,
「북판(北版)」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대목이 있는데,
삼성본도「북판」이 오류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장명원본 계통 중에서도「북판」과 같은 계통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삼성본은 각 칙의 내용을 표시하는 제목이 없고,
각 칙의 본칙의 첫머리에 번호가 붙어 있고,

권제1 끝에 '협산무애선사항마표'가 없는 점 등이
중국의 명본(明本), 가흥장속장본, 건륭장본, 대청광서본 과는 다른 점이다.

이런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에 삼성본은
옛날의 원형에 가까운 계통이라 할 수 있다.

삼성본은 1991년 9월 30일에 보물 제1093호로 지정된 책으로,
두 권씩 제본하여 5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1책은 27장, 제2책은 1장, 제3책은 12장,
제4책은 3장이 각각 빠져 있고, 제5책은 온전하다.

그리고 뒷사람들이 수리하는 과정에서 제1책·제4책·제5책의
일부의 순서가 뒤바뀐 듯하다.

본 선림고경총서의 영인본에서는
다른 판본 등과 대조하여 삼성본으 순서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삼성본의 빠진 부분과 파손된 글자는,
조선의 을유자로 인쇄된 일본의 대동급기념문고(大東急記念文庫) 소장본을
이용하여 복원하였다.

이 일본 소장본은 일본인의 손에 이한 토 가 달려 있어,
독자들은 삼성본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문의 오자(誤字)나 낙자(落字)는
일본 암파문고(巖派文庫)의「벽암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삼성본「벽암록」의 원형이 학계에 알려짐에 의해,
조선 초기「벽암록」의 유통과 중국 선서를 수용하는
당시 우리나라 불교계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중국 선종의 여러 가풍 중에서
임제의 가풍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우리나라 선종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귀중한 문헌을 제공해준
삼성출판박물관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백련선서간행회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80 

 

벽암록(1) 1칙 ~ 10칙

벽암록 제1칙 달마대사와 양무제 “불법의 지혜는 현실의 삶에서 구현돼야” {벽암록}제1칙은 중국선종의 초조로 추앙받는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와 처음 불법천자라고 하는 양(梁)

kr.buddhism.org

 

碧巖錄

[第001則]不識
〈垂示〉垂示云。隔山見煙。早知是火。隔牆見角。便知是牛。擧一明三。目機銖兩。是衲僧家尋常茶飯。至於截斷衆流。東湧西沒。逆順縱橫。與奪自在。正當恁麽時。且道。是什麽人行履處。看取雪竇葛藤。
〈本則〉擧。梁武帝問達磨大師。如何是聖諦第一義。磨云。廓然無聖。帝曰。對朕者誰。磨云。不識。帝不契。達磨遂渡江至魏。帝後擧問志公。志公云。陛下還識此人否。帝云。不識。志公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帝悔。遂遣使去請。志公云。莫道陛下發使去取。闔國人去。他亦不回。
〈頌〉聖諦廓然。何當辨的。對朕者誰。還云不識。因茲暗渡江。豈免生荊棘。闔國人追不再來。千古萬古空相憶。休相憶。淸風匝地有何極。師顧視左右云。這裏還有祖師麽。自云。有。喚來與老僧洗脚。

국역

벽암록 제1칙 달마대사와 양무제

“불법의 지혜는 현실의 삶에서 구현돼야”

{벽암록}제1칙은 중국선종의 초조로 추앙받는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와 처음 불법천자라고 하는 양(梁)의 무제(武帝)와 불법에 대한 대의에 관하여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질문했다.
“ 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 만법은 텅 빈 것. 성스럽다고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는 다시 질문했다.
“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불식(不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달마대사는 마침내 양자강을건너 위(魏)나라로 갔다.
양무제는 뒤에 달마대사와의대화를 지공화상에게 말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 폐하!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양무제는 말했다.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지공화상이 말했다.
“그는 관음대사이며,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사람입니다.”

양무제는 깊이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다시 초빙하고자 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온 나라 사람이 모시러 가도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으면
‘본래면목’은 영원히 못찾아

양무제가 질문한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聖諦第一義)’는 {육조단경}에서 홍인이 제자들에게 과제로 제시한 ‘불법의 대의’를 말한다. 불법의 대의란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으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반야사상과 반야의 지혜를 언제 어디서고 마음대로 전개하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육조단경}에서는 불성을 깨닫는 돈오견성(頓悟見性)과 반야바라밀의 법문으로 대승불교의 전체를 통합하여 조사선의 새로운 선불교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게송으로 제시하고 인가를 받아 조사로서 불법을 계승하도록 {육조단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벽암록} 제1칙에서는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부처님의 정법을 이은 선종의 초조인 달마에게 불법천자로 유명한 양무제가 질문하는 대화를 통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달마는 일체의 만법은 본래 텅 빈 것(一切皆空)인데 성(聖)스럽다고 할 고정된 법은 없다고 대답한다.

{금강경}에는 ‘고정된 법은 없다(無有定法)’는 말이 있다. 반야의 지혜는 마음을 어디서도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무주(無住)와 어떠한 경계나 모양도 취하지 않는 무상(無相)의 실천을 하라는 것이다. 즉 불법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일체의 존재와 함께 반야의 지혜와 자비를 나누는 삶을 지혜롭게 사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양무제의 질문에는 불법은 ‘성(聖)스러운 진리’이며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달마는 이러한 양무제의 착각과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양무제가 성(聖)스럽다고 생각하고 질문한 것은 세간과 출세간적인 차별심에 토대를 둔 범부(凡)와 성자(聖)라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작용하고 있다. 성(聖)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범부(凡)적인 차별심에서 비롯된 중생심이다. 시끄러움을 버리고 조용함을 추구하거나, 미혹함을 버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상대적인 분별심도 마찬가지이다.

즉, 양무제의 질문은 불법의 근본이 성스러운 것이라는 차별심과 착각에 떨어진 양무제를 범성(凡聖)의 차별이 없는 본래의 텅 빈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불법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제시한 정확한 대답인 것이다.

그러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다시 중생심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 달마대사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양무제는 자기와 달마라는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에 떨어졌고, 또한 달마대사 당신은 성스러운 성자가 아닙니까? 라는 고정관념과 분별심으로 질문하고 있다.

이러한 주객과 상대적인 분별심에 떨어진 양무제의 질문에 대하여 달마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달마가 말한 불식(不識)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번역하면 주객(主客)과 범성(凡聖)에 대한 상대적인 분별심이 된다. 즉 알고 모르는 중생심의 분별 의식에 떨어진 대답이 된다.

달마가 ‘불식(不識)’ 이라고 말한 것은 ‘나는 황제인 당신과 주객(主客)의 대립이나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다.’는 입장이다. {열반경}에 “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며, 지혜에 의거하지 분별의식(識)에 의거하지 말라”고 설한 불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식(識)은 중생심의 분별작용이며 불식(不識)은 불심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이다.

즉, 달마는 주객(主客)과 범성(凡聖)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으로 질문하고 있는 양무제를 불심의 지혜로 정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심으로 접근한 양무제는 달마가 불심의 지혜로 제시한 정법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법의 참된 정신(大意)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양나라에서 추방하게 되었고,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당시 위(魏)나라의 숭산 소림사에서 벽을 향해 앉아서 좌선 수행하며 머물게 된다.

양무제는 당시 유명한 지공[寶誌]화상에게 달마대사가 어떤 인물인지 묻자. 지공은 그는 관음대사이며 부처님의 정법을 전해 받은 조사라고 말하자 그를 다시 불러오도록 한다.

지공은 온 나라 사람이 찾아가서 그를 다시 모시려고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달마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달마의 동요됨이 없는 불심의 경지와 양무제의 안목없는 후회를 통감하게 하는 입장을 함께 대변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는 이러한 양무제의 입장을 ‘천고 만고에 부질없이 아쉬워하네’라고 게송으로 읊고 있다.

양무제의 허물은 달마를 마주하고도 달마의 참된 모습(眞相: 法身)을 친견하지 못하고 지공화상의 설명을 듣고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중생의 분별심으로 인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공화상이 “폐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질문하니, 양무제는 “모릅니다(不識)”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양무제가 말한 불식(不識)은 중생심으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지혜없는 무지(無知)이다. 달마가 대답한 불식(不識)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대답한 달마의 입장과 내용은 전혀 다르다.

설두의 게송에 “여기에 달마가 있느냐? 스스로 ‘있다.’라고 대답하고는 그를 데려다가 노승의 다리나 씻기도록 해야겠다.”라고 읊고 있다. 이 일단은 {조주록}에서 조주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인데, 이 공안을 읽고 있는 학인들에게 경책하는 일절이다.

여러분들은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한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는가? 양무제처럼 달마를 대상으로 찾는 마음이 있는가? 달마나 부처를 자신의 마음 밖에서 대상으로 찾는다면 영원히 양무제처럼 달마의 본래면목(眞相)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달마대사를 찾는 그대의 마음이 달마의 참된 면목이니, 그(자신의 불심)를 데려다가 자신의 발이나 씻기도록 하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지혜로운 삶은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발을 씻는 일’이다. 불법의 지혜는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삶)을 떠나서 실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第002則]至道無難
〈垂示〉垂示云。乾坤窄。日月星辰一時黑。直饒棒如雨點。喝似雷奔。也未當得向上宗乘中事。設使三世諸佛。只可自知。歷代祖師全提不起。一大藏敎詮注不及。明眼衲僧自救不了。到這裏。作麽生請益。道箇佛字。拖泥帶水。道箇禪字。滿面慚惶。久參上士不待言之。後學初機直須究取。
〈本則〉擧。趙州示衆云。至道無難。唯嫌揀擇。纔有語言。是揀擇是明白。老僧不在明白裏。是汝還護惜也無。時有僧問。旣不在明白裏。護惜箇什麽。州云。我亦不知。僧云。和尙旣不知。爲什麽。卻道不在明白裏。州云。問事卽得。禮拜了退。
〈頌〉至道無難。言端語端。一有多種。二無兩般。天際日上月下。檻前山深水寒。髑髏識盡喜何立。枯木龍吟銷未乾。難難。揀擇明白君自看。

 

벽암록 제2칙-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至道無難)

“미혹함과 깨달음에 대한 분별심을 초월하라”
2칙은 조주화상의 법문은 [신심명]의 일절을 인용하여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至道無難)’는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싣고 있다.

조주화상이 대중스님들에게 법문 하였다.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직 취사 선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에 벌써 취사선택(揀擇)하는 마음에 떨어지거나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떨어진다.’ 나는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깨달음(明白)의 경지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는가? ”

그 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깨달음(明白)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른다(不知)”

그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깨달음(明白)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 하십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나에게 질문하는 일이 끝났으면 인사나 하고 물러가게!”

깨달음을 기대하거나 집착하면
선병(禪病)걸려 바른 수행 할 수 없어

2칙에 인용된 [신심명]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오직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들어나리라.”

여기서 말하는 지도(至道)는 차별 분별심과 시기 질투의 미혹한 중생심을 벗어나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 청정한 불심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조사선에서 ‘번뇌 망념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 도(無心是道)’라고 했고, 마조도 평상심(본래심)이 도(道)라고 설했다. 혜능도 ‘도(道)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도(至道)나 불도(佛道)는 불심을 깨닫는 그 마음이며 부처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어떤 고정된 불도(佛道)나 지도(至道)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불도를 마음 밖에서 찾아 해매는 사람은 영원히 불도를 깨달을 수가 없다.

{신심명}은 이러한 조사선의 선사상을 토대로 하여 불도를 깨닫는 법문과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로 읊은 선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인데, 특히 조주화상은 신심명을 많이 인용하여 독자적인 법문을 펼치며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다.

불도란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자각하여 본래 청정한 불심(佛性)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번뇌 망념이 없는 청정한 불성(佛心)을 깨닫게 되면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요약한 말인데, 화엄교학에서도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一念不生名爲佛)’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 번뇌 망념이 없어진 그대로가 불심이기 때문이다. 불심을 깨닫는 것이 지도(至道)이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중생심(不覺)에서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는 논리적인 구조로 설명하고 있는데,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방법이 참선수행이며 깨달음을 체득하는 불법이다.

{신심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불도를 체득하기란 지극히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자 자기 마음으로 자각하고 체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도나 불법을 자신의 마음 밖에서 얻고, 남에게서 받아내야 한다면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마치 자신의 몸과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일과 같이 지극히 쉬운 일이다. 취사선택하는 번뇌 망념의 분별심(중생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지도’의 경지를 이루게 되며, 또한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기만 하면 불심을 깨닫고 불도를 이루게 된다.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구절을 약간 바꾸어서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취사 분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설한다.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지(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다. 개념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를 대상화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과 분별의식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조주 화상은 “나는 분별심의 중생세계에도 머무르지 않고 또한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데, 그대들은 중생심의 경지를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를 목적으로 수행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안주하려고 하느냐?”라고 설하고 있다. 즉 ‘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은 물론,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의 경지까지도 초월하여 살고 있는데 그대들은 깨달음을 구경의 목적으로 삼고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학인들을 경책하는 법문이다.

선수행은 미혹함과 깨달음을 모두 함께 초월해야 올바른 깨달음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미혹함에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여 그 경지에 도달하고 그 곳에 안주하게 되면 깨달음의 경계가 결국 집착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올바른 수행이 될 수가 없고 불도를 장애하는 수행이 되기 때문에 가장 고치기 어려운 수행자의 선병(禪病)이 된다.

또한 참선 수행자가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사람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는 선병이다. 깨달음을 기대하거나 그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그대로 중생심이며 집착심이기 때문에 이러한 집착심을 가지고는 영원히 불심을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수행자가 조주화상에게 “깨달음(明白)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할 것이 있습니까?”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있다. 사실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한다면 아끼고 보호하고 수행의 목적과 대상으로 삼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나도 모른다(不知)” 라고 대답했다. 조주가 말한 ‘부지(不知)’는 지혜가 없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아니다. 선어록에서 지(知)나 식(識)은 알음알이(知解)나 분별의식을 말한다. 조주가 ‘나는 깨달음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는데’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의 차별과 불심의 깨달음(明白)의 경지까지도 모두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심(佛心)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제1칙에서 언급한 달마의 ‘불식(不識)’과 마찬가지로 중생심의 차별과 분별의식이 없는 조주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 수행자가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깨달음(明白)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 하십니까?” 라고 다구치며 조주화상이 달아나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극근은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주화상은 훌륭한 선지식(作家)이기 때문에 그 스님에게 “나에게 질문하는 일이 끝났으면 인사나 하고 물러가게!” 라고 마지막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고 조주화상의 기지(機智)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질문한 스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고 하고 있다.

이에대해 설두는 “불법을 체득하는 일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취사선택하는 중생심과 깨달음의 불심을 그대의 마음에서 잘 살펴서 깨닫도록 해야 한다.” 라고 수행자들에게 각성시키는 게송을 남겼다.



[第003則]日面佛月面佛
〈垂示〉垂示云。一機一境。一言一句。且圖有箇入處。好肉上剜瘡。成窠成窟。大用現前不存軌則。且圖知有向上事。蓋天蓋地又摸索不著。恁麽也得。不恁麽也得。太廉纖生。恁麽也不得。不恁麽也不得。太孤危生。不涉二塗。如何卽是。請試擧看
〈本則〉擧。馬大師不安。院主問。和尙近日。尊候如何。大師云。日面佛月面佛。
〈頌〉日面佛月面佛。五帝三皇是何物。二十年來曾苦辛。爲君幾下蒼龍窟。屈。堪述。明眼衲僧莫輕忽。

벽암록 제3칙 - 마조화상의 병환
마조화상의 병환생사대립 초월한 경지가 곧 ‘법신불 세계’
마조도일화상이 병환으로 몸이 편치 않았다.

원주스님은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는 요즈음 법체가 어떠하십니까?”

마조화상이 대답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이네.”

擧. 馬大師不安. 院主問, 和尙近日, 尊候如何. 日面佛月面佛.

이공안은 〈조당집〉14권 마조화상전에 전하고 있는 유명한 선문답인데, 마조화상이 입적하기 얼마 전에 병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가 건강을 여쭙는 인사말이다.

일면불 월면불은 불생불멸 상징
머리로만 이해말고 ‘체득’해야

‘불안(不安)’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않는 상태로서 육체적인 병환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선불교에서는 육체적인 병환과 함께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고통 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불교의 가르침은 번뇌 망념의 불안한 중생심의 고통을 벗어나(解脫) 깨달음의 경지에서 평안하고 안정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방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안은 마조화상의 육체적인 병환을 걱정하여 여쭙는 원주의 질문에 마조화상은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지” 라고 짧게 대답하고 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에 대해서 〈불명경(佛名經)〉 제7권에는 “월면이라는 부처님이 있는데, 그 월면불의 수명은 일일일야(一日一夜)이며, 일면(日面)이라는 부처님이 있는데 그 일면불의 수명은 1800세라고 한다.” 라고 설하고 있다. 마조화상은 불명경에서 설하고 있는 월면불과 일면불을 입장을 예로 들어 자신의 경지에서 대답하고 있다.

사실 대승불교의 특징은 불명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과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무수히 많은 부처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즉 다불(多佛)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부처는 어떤 존재인가?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부처라는 모양(色)으로 부처를 구하거나 음성(소리)으로 부처를 구한다면 여래를 친견 할 수가 없다.”라고 설한다. 즉 부처나 여래를 자신의 마음 밖에서 추구하는 목적 대상으로 설정하여 찾아 구한다면 영원히 부처나 여래를 친견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主)가 부처(客)를 구한다는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대립과 부처나 여래라는 대상적인 분별심으로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심과 중생심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여래나 부처를 친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부처나 여래를 친견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여래나 부처는 어떤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다고 한다면 부처나 여래는 어디에 있으며 부처나 여래는 무엇이며 어떻게 친견해야 하는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참된 부처나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한 평생 헛되이 엉뚱한 옆길에서 불법을 찾아 해매는 한심한 수행자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나 여래를 친견한다는 것은 마음 밖의 어떤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부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불성을 깨닫고 부처를 이룬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기의 법신불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불성과 법신불을 체득하는 것을 선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며, 부보(父母)라는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심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의 불성을 깨닫는 자각적인 견성(見性)의 체험이 그대로 부처나 여래를 친견하는 것이며 이러한 친견은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법신(法身)은 형상이 없고 여래도 가고 옴이 없기 때문에 형상으로 보거나 소리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의 본래심(佛心)으로 자각(깨달음)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성의 자각적인 지혜작용을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이러한 깨달음의 지혜작용을 법신불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 경전에 등장하는 많은 부처는 법신불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마조화상은 원주의 질문에 “일면불 월면불” 이라고 대답한 의미는 무엇인가? 마조화상은 자신의 경지를 ‘일면불과 월면불’로 표현하고 있다. 일면불과 월면불은 불명경에서는 수명이 짧은 월면불, 수명이 긴 일면불로 설명하고 있지만, 부처는 수명의 길고 짧음에 관계할 것 없이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법신불의 지혜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마조화상은 원주가 육체적인 병환을 걱정하여 여쭙는 질문에 자신의 입장을 병환으로 고통받는 육체적인 대상을 설정하여 대답하지 않고, 병든 환자의 몸과 병들지 않은 육체, 육체나 마음이라는 이원적(二元的)이고 상대적, 차별적인 분별심을 초월한 법신의 경지에 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일면불과 월면불은 단순히 경전에서 설명하는 부처 이름이 아니라 마조의 법신불이며 본래면목인 것이다. 마조는 육체적인 병환과 정신적인 병환, 병(病)과 불병(不病), 장수불(長壽佛)과 단명불(短命佛)의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한 자신의 법신은 언제나 태양과 달처럼, 여여(如如)하게 변함없이 살고 있는 경지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태양과 달(日月)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법신불의 경지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깨달음(법신불)의 경지는 중생심의 생멸이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번뇌 망념의 생사가 없는 불생불사(不生不死)의 경지이다. 그래서 법신불의 대표적인 아미타불은 나고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수명(無量壽)이라고 한다.

또한 법신불의 지혜광명은 시방세계에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한다. 〈화엄경〉제34권 ‘보왕여래성기품’에도 법신 여래의 지혜광명을 태양과 달에 비유하고 있으며, 일월이 출현하면 세간과 깊은 산 계곡에까지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광명도 이와 같다고 설한다. 설두화상도 마조의 일면불 월면불에 대한 법문을 체득하기 어려웠지만, 그가 20년간의 많은 각고를 겪은 수행으로 이 공안의 의미를 파악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마조화상이 말한 일면불과 월면불이여!. 오제(五帝) 삼황(三皇)은 무슨 물건인가? 20년간 수행하여 고생을 겪으면서, 그대(本來心)를 위하여 푸른 용이 사는 동굴에 몇 번이나 내려 갔던가? 많은 고충을 받았다(屈). 그 고충을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네. 눈 밝은 수행자여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

설두는 마조화상의 ‘일면불 월면불’을 중국인들의 이상적인 황제 오제 삼황에다 비교하여 어떠한 부처나 어떠한 황제의 이름에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말고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두는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부처나 오제나 삼황의 권위를 초월하여 자신의 법신불을 체득하기 위해서 20년간 많은 어려움을 견디는 수행을 하였다.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寶珠: 법신불)을 체득하기 위해서 용이 살고 있는 창용굴에 여러 차례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신명을 돌보지 않고 수행에 전념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한 고백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상신실명(喪身失命)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행하여 마조의 법문을 통해서 자신의 법신불을 체득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조화상의 ‘일면불 월면불’을 머리로 적당히 이해하지 말고 신중하고 철저하게 수행하여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第004則]雪上加霜
〈垂示〉垂示云。靑天白日。不可更指東劃西。時節因緣。亦須應病與藥。且道。放行好。把定好。試擧看。
〈本則〉擧。德山到潙山。挾複子於法堂上。從東過西。從西過東。顧視云。無無便出。德山至門首卻云。也不得草草。便具威儀。再入相見。潙山坐次。德山提起坐具云。和尙。潙山擬取拂子。德山便喝。拂袖而出。德山背卻法堂。著草鞋便行。潙山至晩。問首座。適來新到在什麽處。首座云。當時背卻法堂。著草鞋出去也。潙山云。此子已後。向孤峰頂上。盤結草庵。呵佛罵祖去在。
〈頌〉一勘破。二勘破。雪上加霜曾嶮墮。飛騎將軍入虜庭。再得完全能幾箇。急走過。不放過。孤峰頂上草裏坐。咄。

 



擧. 德山到山, 挾複子, 於法堂上, 從東過西, 從西過東, 顧視云, 無無便出. (雪竇, 著語云, 勘破了也.)

德山, 至門首, 却云, 也不得草草, 便具威儀, 再入相見. 山坐次. 德山, 提起坐具云, 和尙. 山擬取拂子, 德山, 便喝拂袖而出. (雪竇, 着語云, 勘破了也.)

德山, 背却法堂, 著草鞋便行. 山至晩, 問首座, 適來新到在什處. 首座云, 當時背却法堂, 著草鞋出去也. 山云, 此子已後 向孤峯頂上, 盤結草庵, 呵佛罵祖去在. (雪竇, 著語云, 雪上加霜.)

벽암록 제4칙 덕산이 위산 화상을 참문하다

벽암록 제4칙 덕산이 위산 화상을 참문하다

‘고봉정상에서 가불매조할 녀석’을 가르치다
{벽암록} 제4칙 - 덕산이 위산 화상을 참문하다

덕산선감(德山宣鑑)선사가 당대의 명승 위산영우(山靈祐)화상을 참문하여 불법의 지혜작용(禪機)으로 도전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덕산스님이 위산영우화상을 참문하여, 걸망을 짊어진 채로 법당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뒤돌아보면서 “無(없다). 無(없어)!” 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법당을) 나가 버렸다. 설두스님이 착어(코멘트)로 말했다. “완전히 파악해 버렸네.”

덕산스님은 대문 앞에 이르러 말했다. “경솔해서는 안되지.”다시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법당에 들어가 위산화상을 친견하였다. 위산화상이 앉아 있는데, 덕산스님은 (절을 하려고) 방석을 들면서 “화상!” 하고 불렀다. 위산화상이 불자(拂子)를 잡으려 하자, 덕산스님이 갑자기 소리(喝)를 지르고, 소맷자락을 떨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설두스님이 착어했다. “완전히 파악해 버렸네.”

덕산스님은 법당을 뒤로하고 짚신을 신고 곧바로 떠나가 버렸다. 위산화상이 저녁때에 수좌에게 물었다. “아까 낮에 찾아온 그 스님은 어디 있는가?” 수좌는 말했다. “그 당시 법당을 뒤로하고 짚신을 신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위산화상이 말했다. “이 사람은 훗날 높은 산봉우리(高峰頂上)에 암자를 짓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할 것이다.” 설두스님이 착어 했다. “눈 위에 또 서리를 첨가(雪上加霜) 하는군.”

擧. 德山到山, 挾複子, 於法堂上, 從東過西, 從西過東, 顧視云, 無無便出. (雪竇, 著語云, 勘破了也.)

德山, 至門首, 却云, 也不得草草, 便具威儀, 再入相見. 山坐次. 德山, 提起坐具云, 和尙. 山擬取拂子, 德山, 便喝拂袖而出. (雪竇, 着語云, 勘破了也.)

德山, 背却法堂, 著草鞋便行. 山至晩, 問首座, 適來新到在什處. 首座云, 當時背却法堂, 著草鞋出去也. 山云, 此子已後 向孤峯頂上, 盤結草庵, 呵佛罵祖去在. (雪竇, 著語云, 雪上加霜.)

‘분별심 사라진 본래심의 만남’이 곧 선문답
서로의 속내 알아보는 ‘방행과 파정’보여줘

제4칙 덕산의 젊은 혈기와 용기 있는 수행자의 면모를 잘 전하고 있다. 덕산이 걸망을 맨 채로 위산영우화상의 법당에서 동서로 왔다갔다하며 뒤돌아보고 “무(無)”라고 말한 뒤 법당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선어록은 단순한 선문답이라는 대화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선승들의 대화와 행동, 표정까지 기록하고 있다. 법당은 깨달음의 세계이며 불법을 설하는 청정한 법계이다. 따라서 법당은 선지식(법신불)의 설법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덕산이 이러한 법당에서 ‘무무(無無)’라고 한 것은 자신이 불법을 깨달은 법신불의 경지에서 일체의 만법을 초월한 공(空)의 경지에 있다는 사실을 위산화상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법당을 나갔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까지도 초월한 자신의 경지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산의 지혜작용(禪機)을 ‘방행(放行)’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체득한 불법의 경지를 위산화상에게 자유롭게 전부 다 제시해 보여주면서 불법의 지혜로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산의 경지를 위산화상은 완전히 파악하였다고 설두는 코멘트를 붙이고 있다.

위산은 법당에서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위엄 있고 냉정한 눈으로 덕산의 경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며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덕산은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까지 나가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경솔해서는 안된다’라고 자각하고, 또다시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위산화상을 친견하고 있다. 덕산은 법당의 조실자리에 앉아 있는 위산화상에게 예배를 올리기 위해 방석을 잡고서 “화상”이라고 불렀다. 위산화상은 수행자를 맞이하기 위해 불자를 잡으려고 하는 그 순간 덕산은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소맷자락을 떨치고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러한 덕산의 지혜작용(禪機)을 ‘파정(把定)’이라고 한다. 파정은 예절과 법규를 준수하는 여법한 경지에서 불법의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위대한 선승은 자유롭고 걸림 없는 선기(禪機)를 펼칠 수 있는 방행과 여법한 경지를 모두 적절하게 잘 활용할 수 있는 방편을 갖추어야 한다. 덕산은 위산화상의 처소에서 방행과 파정의 두 가지 선기를 모두 용기 있게 펼치고 떠나갔다.

설두는 두 번째 착어로 “완전히 파악해 버렸다”라고만 한다. 여기서는 덕산이 위산화상의 경지를 파악한 것을 말한다. 즉 덕산이 “화상” 이라고 인사 올리려고 하는 순간 위산화상이 덕산의 예배에 대하여 인사를 하기 위해 불자를 잡으려고 하는 마음을 파악하고 고함을 친 것이다. 조실이 불자를 드는 것은 수행자를 맞이하는 인사이다.

덕산은 위산화상의 몸과 행동을 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산의 법신인 본래면목을 친견하기 위한 것이다. 불자를 잡으려고 하는 위산의 본래면목을 친견했기 때문에 덕산도 자신의 본래 면목을 불성의 지혜작용인 고함으로 보답하고 곧바로 법당을 나가 버린 것이다. 선지식을 참문하여 친견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차별심, 분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불성)과 본래심과의 만남이며, 법신불의 지혜작용을 선문답이라는 언어나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고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때 위산화상이 선원의 지도자인 수좌에게 덕산의 소식을 묻자, 덕산은 걸망을 메고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떠나갔다고 한다. 이 일단은 위산화상이 ‘그대는 덕산의 경지를 어떻게 보았는가’라고 수좌의 안목을 점검하는 말이다. 그러나 수좌는 위산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덕산의 행동을 그대로 전한다.

덕산이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떠나갔다고 하는 것은 덕산은 자신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법당)에 안주하지 않고, 그 절대적인 불심의 세계까지 초월하여 중생이 살고 있는 저자거리(사바세계)로 나아가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산이 수좌에게 “이 사람(덕산)은 훗날 독자적인 깨달음의 경지(高峰頂上)를 이루고, 법당을 열어 부처나 조사의 경지까지 초월하여 불법을 펼칠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선어록에서 말하는 ‘높은 봉우리의 최정상(高峰頂上)’은 ‘백척이나 되는 긴 장대 끝(百尺竿頭)’과 같이 독자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는 말이다.

설두는 세 번째 착어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하였다.

위산상이 덕산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말은 사실 덕산의 스승인 용담숭신(龍潭崇信)선사가 덕산이 깨달음을 체득했을 때 말한 예언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눈과 서리는 흰색이라는 동일성이 있지만 분명히 다른 물질인 것처럼, 덕산에 대한 평가는 용담과 위산이라는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이 똑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두는 코멘트 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덕산이 위산에게 방행과 파정의 선기(禪機)로서 불법을 도전하는 덕산을 한(漢)나라의 장수 이광(李廣:飛騎將軍)에 비교하고 있다. “이광이 오랑캐의 조정에서 죽다가 살아난 것처럼, 위산의 법당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덕산과 같은 위인이 아니면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덕산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덕산이 비록 위산의 법당에서 도망쳤지만 위산은 그를 놓아 주지 않고 냉철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하면서 덕산이 위산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경지를 읊고 있다. 덕산이 펼친 방행과 파정의 두 가지 선기는 모두 칼날이 상하고 말았다고 원오극근 선사도 코멘트 하고 있다.



[第005則]如粟米粒
〈垂示〉垂示云。大凡扶豎宗敎。須是英靈底漢。有殺人不眨眼底手脚。方可立地成佛。所以照用同時卷舒齊唱。理事不二。權實並行。放過一著。建立第二義門。直下截斷葛藤。後學初機難爲湊泊。昨日恁麽。事不獲已。今日又恁麽。罪過彌天。若是明眼漢。一點謾他不得。其或未然。虎口裏橫身。不免喪身失命。試擧看。
〈本則〉擧。雪峰示衆云。盡大地撮來如粟米粒大。抛向面前漆桶不會。打鼓普請看。
〈頌〉牛頭沒馬頭回。曹溪鏡裏絶塵埃。打鼓看來君不見。百花春至爲誰開。

벽암록 제5칙 설봉의 온 대지
“좁쌀 한 알에도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다”
설봉의존(雪峰義存 : 832~908)선사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 크기만 하네. 이것을 눈앞에 내던졌지만 새까만 칠통같이 (대중은) 전혀 알지 못하네. 북을 쳐서 전 대중이 노동(普請)이나 참여 하도록 하라.”

擧. 雪峰示衆云,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 抛向面前, 漆桶不會. 打鼓普請看.

‘만법은 하나’라는 소식 드러낸 말씀
‘망념 없애려는 것도 망념’ 깨달아야

{운문광록}과 {조당집}을 보면 “북쪽에는 조주가 있다. 남쪽에는 설봉이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설봉이 문하에 1,700명이 넘는 많은 대중을 거느릴 만큼 위대한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음을 말해준다.

{벽암록}에 원오선사는 설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들에게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크기만 하네.’라고 법문 하였다. 옛사람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행화는 뛰어난 지혜와 방편이 있었으니 참으로 고생하였다. 설봉화상은 투자산(投子山)에 세 번 오르고, 동산(洞山良价)화상을 아홉 차례나 찾아뵙는 수행을 하였다. 그는 물통과 주걱을 들고 가는 곳마다 밥 짓는 소임을 맡아서 수행한 것도 이 생사대사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만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심명]에서 말하고 있는 “만법과 자기와 하나가 된 경지(萬法一如)”를 말한다. 즉 일체의 만법을 자기와 상대하는 존재로 두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보장록}에도 {불설법구경}의 일절을 인용하여 “삼라만상은 일법(一法)의 도장 찍힌(所印) 것이다.”라고 하며 “도장 찍힌 것(印)은 근본(本際)이다”라고 설한다. 또한 일법(一法)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처럼, 온 대지를 움켜쥐어 하나의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일체 만법의 근본을 체득하여 자기와 하나가 되고 일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자신과 온 대지나 만법을 대상으로 두고 있는 한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온 대지나 일체의 만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을 초월하여 일체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화엄경〉의 설법으로 정리하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논리이다. 온 대지와 만법은 많음(多)이지만 하나(一)이다. 〈법성게〉에서도 “법성은 서로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만법을 근본인 일심(一心)에서 깨달으면 만법(萬法)이 하나가 된 일여(一如)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일(一), 혹은 제일의(第一義), 제일월(第一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일(一) 은 근본이며 본래의 입장을 의미한다. 불법의 근본으로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 말이다. 반야경전에서 설하는 불이(不二)나 불이(不異) 역시 하나(第一)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이(二)나 이월(二月)은 차별과 분별을 상징하는 중생심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

조주화상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萬法歸一)”고 설한 말도 설봉의 법문과 마찬가지 입장이다.

온대지를 움켜쥐고 좁쌀만한 크기라고 말했다는 것은 실제로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은 현상법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는 심법(心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말하는 것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텅 비우는 것이 공(空)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물을 상대하고 있는 자신의 차별심과 번뇌 망념과 착각된 마음을 텅 비워서 일체의 모든 사물에 집착하지 않도록 공(空)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온 대지를 움켜서 하나의 좁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존재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과 집착을 텅 비워 버린 것을 말한다. 번뇌 망념의 마음을 없애고 비우려고 하면 더욱 비울 수가 없다. 비우려고 하는 마음이 번뇌 망념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번뇌 망념의 함정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번뇌 망념을 비우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자신의 불성을 자각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견성(見性)은 번뇌 망념이 없는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수행방법이다. 자각이란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을 말하는데, 차별의 세계(만법)에서 본래의 세계(불성)으로 되돌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마치 번뇌 망념의 숲(중생심)에서 벗어나 편안한 자기 자신의 집(불성)으로 되돌아가는 구조와 같다.

견성의 체험은 한 생각 한 생각(念念)의 자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좌선의〉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텅 비워(空)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번뇌 망념을 자각하는 일이 불성의 지혜작용이며, 중생심의 차별세계를 초월하여 근원적인 불성의 집으로 되돌아 간 깨달음의 체험이다.

설봉의 설법은 일체의 모든 사물이나 만법을, 자신과 하나가 된 깨달음의 경지를 “온 대지를 움켜쥐니 좁쌀만 하네.”라고 설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사물과 만법을 설봉이 마음대로 활용 할 수가 있게 된 경지를 설하고 있다.

그래서 설봉은 온 대지를 좁쌀만한 크기로 만들어 대중에게 내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설봉의 법문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여기서 설봉이 대중에게 던진 행위는 일체의 만법을 대중에게 펼친 방편법문을 말한다. 설봉이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뭉친 것은 만법을 근본의 일심(一心)에서 깨달아 자기자신의 지혜로 만든 것이며, 대중에게 던진 것은 자신이 체득한 불법의 근본정신을 대중들에게 펼쳐 보인 자비심인 것이다. 설봉이 이렇게 온 대지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구족했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설봉의 법문 내용과 보살행의 자비심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설봉화상은 북을 쳐서 대중들에게 모두 노동(普請)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은 당대 선원의 독창적인 종교운동의 하나다. 전 대중이 의무적으로 공동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규정을 {선원청규}에 두고 있다. 선원의 노동은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인 노동력을 생산에 참여하여 대중과 함께 나누는 보살행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선원의 보청(普請)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아니라 신심을 하나(萬法一如)로 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일이다.

설봉화상은 대중들을 노동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설봉이 설법한 내용을 본인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즉 땅을 파는 노동을 하면서 온 대지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직접 활용하는 체험을 하도록 한 것이다. 불법은 법당에서 제시한 이론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와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전개해야 하는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第006則]日日好日
〈本則〉擧。雲門垂語云。十五日已前不問汝。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自代云。日日是好日。
〈頌〉去卻一拈得七。上下四維無等匹。徐行踏斷流水聲。縱觀寫出飛禽跡。草茸茸。煙羃羃。空生巖畔花狼籍。彈指堪悲舜若多。莫動著。動著三十棒。

벽암록 제6칙 운문의 날마다 좋은 날
매순간 깨달음의 삶 살아가면 ‘날마다 행복’

운문(雲門文偃 : 864-949)화상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유명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15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 마디(一句) 해 보아라.” 스스로 자신이 말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지(日日是好日)!”

擧.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귀중한 인생 허비하지 않으려면
‘지금여기’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당송대의 선원에서는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정기적으로 설법하는 것을 상당(上堂), 혹은 시중(示衆)이라고 한다. 선원의 주지 설법은 1일,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실행된 상당 법문을 대참(大參)이라고 하고, 또한 아침저녁에 수시로 설법하는 것을 소참(小參)이라고 한다.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은 중생교화의 보살행으로 학인들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전인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운문의 법문도 15일 실시하는 정기설법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문이 말하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인데, 마침 15일은 정기 설법으로 상당법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 15일을 기준으로 하여 학인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15일 이전은 지난 과거가 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생각하는 일은 쓸데없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15일 이후는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분명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 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대들은 각자 자신이 체득한 지혜의 안목으로 한 마디(一句) 말해 보아라!”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 마디(一句)는 불법의 대의를 언어 문자의 개념으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로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는 한 마디를 말한다. 불법의 교리나 정신에 대해서 지식으로 설명하거나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어도, 한 마디(一句)로서 깨달음의 경지를 만들어 살 수 있는 지혜로운 말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법을 완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운문의 문하에 모인 대중들도 운문의 문제제기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이 스스로 대답한 일구(一句)가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다. 운문이 말하는 ‘날마다 좋은 날’은 그냥 매일 매일 즐겁고 보람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불법의 대의와 사상은 의미 없는 종교가 된다.

불법의 정신을 모르고 사바세계에 사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생활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가 있는가?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날이 자기에게 닥쳐오기를 바라는 요행이 아니라 좋은 날을 만들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능력과 지혜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는가? 매일 좋은 날로 만들어 살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과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하면 이 법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로 끝난다.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 날짜임과 동시에 우리들의 삶을 살고 있는 매일이다. 한달은 하루하루의 연속이며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있지만 시간은 물과 같이 연속된 것이기 때문에 쪼개고 나누어 토막을 낼 수가 없다.

사실 한달이나 하루는 ‘지금’이라는 한 순간(一念: 刹那)의 연속시간이다. 따라서 좋은 하루를 만들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실 불교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과 이웃, 좋은 친구나 많은 것들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상(無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생사대사(生死大事) 혹은 일대사(一大事)는 무상에 관련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도록 함과 동시에 소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지혜로 극복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를 좋은 날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교의 정신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바세계의 삶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자아의 영원한 존재가 없는 무아(無我)이고, 탐.진.치 삼독과 오욕에 물든 더러운 예토(穢土)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반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사는 법신의 삶은 번뇌 망념의 나고 죽음이 없는 불변의 세계(常)에서 항상 법희(法喜)의 즐거움(樂)이 있고, 자신의 청정한 불성의 지혜작용을 청정한 법계(淨土)에 두루 지혜의 광명으로 비추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각자 자기자신이 주인이며 주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경전에서는 ‘불성’, ‘여래장’, ‘진여자성’, ‘청정심’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선불교에서는 평상심, 본래심, 주인공, 진인(眞人), 본래인(本來人) 등으로 불린다. 사물에 집착하고 삼독심에 떨어진 범부의 중생심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한 깨달음의 주체를 말한다.

따라서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자기가 깨달음의 본래심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 하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 교차되는 곳에 살고 있다. 자신이 있는 여기라는 공간을 바꾸고 옮길 수가 없으며, 또한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미리 끌어당겨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불교에서는 시절인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란 육체적인 일과 정신적인 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가장 절박한 숨쉬는 일에서 육체를 움직이는 일(行住坐臥 語默動靜),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 노동을 하는 일, 매사 인간은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자신의 일인 것이며, 일과 삶은 같은 말이다. 또한 정신적인 일은 일념(찰나) 일념에 번뇌 망념이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생멸(生滅; 生死大事)의 일을 비롯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 위해 경전을 읽고 사유하는 지혜작용의 일 등 한순간도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자신의 위대한 보살도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을 깨달음의 지혜로운 일이 되도록 하라’고 법문을 하고 있다. 자기의 일에 몰입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본래심으로 삼매의 경지에서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조사선의 참선은 언제 어디서나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하는 생활종교이다. 임제가 “자신이 곳에 따라서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라고 설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운문의 설법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일상생활속에서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로 위대한 보살도를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第007則]汝是慧超
〈垂示〉垂示云。聲前一句。千聖不傳。未曾親覲。如隔大千。設使向聲前辨得。截斷天下人舌頭。亦未是性懆漢。所以道。天不能蓋。地不能載。虛空不能容。日月不能照。無佛處獨稱尊。始較些子。其或未然。於一毫頭上透得。放大光明七縱八橫。於法自在自由。信手拈來無有不是。且道得箇什麽。如此奇特。復云。大衆會麽。從前汗馬無人識。只要重論蓋代功。卽今事且致雪竇公案又作麽生。看取下文。
〈本則〉擧。僧問法眼。慧超咨和尙。如何是佛。法眼云。汝是慧超。
〈頌〉江國春風吹不起。鷓鴣啼在深花裏。三級浪高魚化龍。癡人猶戽夜塘水。

 

벽암록 제7칙 법안화상과 혜초스님
“그대 자신외에 다른데서 부처를 찾지 말라”

〈벽암록〉 제7칙은 혜초(慧超)스님이 법안종을 개창한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화상에게 질문한 한마디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혜초스님이 법안화상에게 질문했다. “제가 화상께 질문하겠습니다. 무엇이 부처 입니까?” 법안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혜초이다.”

擧. 僧問法眼, 慧超咨和尙, 如何是佛, 法眼云, 汝是慧超.

두선사의 ‘줄탁동시의 선문답’
“그대 혜초와 부처는 같은 것…”

법안은 당말 오가(五家) 종풍으로 선풍을 떨친 법안종(法眼宗)의 개창자인 문익(文益) 선사이다. 문익 선사는 젊은 시절 도반과 전국을 행각할 때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 어떤 암자에 뛰어 들어갔다. 암자의 주인인 나한계침(羅漢桂琛) 선사는 법안이 인물인줄 알고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불법의 대의를 논의하였다. 법안은 특히 화엄사상과 유식사상에 조예가 깊었다.

날씨가 맑아져 법안은 지장원을 떠나 다시 행각하려고 할때 나한 선사는 뜰 앞의 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대는 어제 ‘삼계는 오직 마음이며 , 만법은 오직 인식에 있다(三界唯心, 萬法唯識)’고 말했는데, 지금 이 돌은 그대의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법안은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그 돌은 마음 안에 있지요.” 라고 대답하자, 나한 선사는 탄식하며, “행각하는 수행자가 어째서 하나의 돌을 마음 안에 짊어지고 다니는가?”라고 말하자 말문이 막혀, 그 암자의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탐구하게 되어 나한 선사의 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유식사상을 아무리 잘 이해한다고 해도 지금 여기 자신의 생활에서 불법의 지혜로운 삶으로 전개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지식은 불법의 지혜가 아니다.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기 위해서 참선 수행하고 사유해야 한다.

법안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한 혜초는 부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사유한 수행자이다.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제시한 부처는 어떤 것인가? 수행자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혀야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과 방법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철저한 자각이 없이 많은 선사들이 주장하는 견성성불과 부처에 대한 법문을 아무리 많이 듣고 배운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부처가 되는 구법수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처란 무엇인가? 법당에 모신 등신불이 부처인가? 목불(木佛)인가. 동불(銅佛)인가? 아니면 부처의 삼신(三身)으로 설하고 있는 보신불(報身佛)인가? 법신불(法身佛)인가? 화신불(化身佛)인가? 불법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부처라는 말에 혼란을 일으키고 미혹하게 된다.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선문답에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운문은 “똥막대기(乾屎)”라고 하고, 동산은 “마삼근(麻三斤)”이라고도 대답했다. 질문은 같지만 대답은 모두 다르다. 선문답은 스승이 학인의 질문을 파악하여 수행자의 병폐(禪病)를 고쳐주는 처방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병이 다양한 것처럼, 처방도 다양해야 하는 것이다.

〈조당집〉12권에 선종화상의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길, ‘밤마다 부처를 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는 말했다. “그대는 옛 사람의 말을 믿는가?” “학인은 절대로 위배하지 않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옛 사람을 믿는다면 합장하고 묻는 그대가 바로 부처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어떤 대상과 모양에서 찾지 않는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마조가 “마음이 부처(卽心是佛)”이라고 주장한 법문을 발전시켜 〈백장광록〉에서는 “부처는 바로 이 사람이며,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주장처럼, 마음과 불성을 부처라고 주장하는 시대를 거쳐 이제 백장과 임제의 시대 이후에는 지상에서 활동하는 구체적인 사람이 부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의 제자인 반산보적 선사도 “전심(全心)이 바로 부처요, 전불(全佛)이 곧 사람이며, 사람과 부처는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체득하면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조당집 15권), 마음과 부처, 부처와 사람에 대한 일체의 차별도 없는 경지에서 불법의 지혜를 지상의 일상생활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혜초라는 수행자도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하고 법안 화상에게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자문을 청하는 질문하고 있다. 선문답은 지식을 익히는 대화가 아니라 불법을 자기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확신을 체득하기 위한 절박한 질문이다. 질문하는 사람이 철저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대화를 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을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법안 화상은 혜초의 질문에 “그대는 혜초이다.”라고 한마디로 대답한다. 법안 화상은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부처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고 부처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부처란 무엇인가? 그대 자신을 두고 또 달리 밖을 향해서 부처를 구하지 말라. 그대의 이름은 혜초가 아닌가?, 그대의 이름과 부처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대답을 하고 있다. 법안화상은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원오극근도 법안 화상과 혜초의 선문답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어미닭이 껍질을 쪼아 생명이 새로 태어나게 하는 줄탁동시(同時)의 지혜작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법안 화상이 학인을 근기를 파악하는 지혜가 있었고, 혜초는 불법에 대한 참구와 수행이 무르익은 간절한 질문에 법안화상의 한마디에 깨달음을 체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가 무엇인가? 아무리 간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도 자기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고 음미하며, 반조(返照)하고 자각하지 않으면 부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것은 질문하는 수행자의 간절한 구도심으로 응어리진 의문의 깊이에 따라서 스승의 대답이 영향을 좌우하는 것이다. 종은 종을 치는 사람의 힘에 따라서 울림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원오 화상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혜초가 법안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대는 혜초이다.”라고 대답했다. 서로가 위배한 것이 없었다. 듣지 못했는가? 운문 화상이 “불법을 제시해 주어도 스스로 살펴보지 못하면 곧 잘못되고 만다. 사량분별하면 어느 세월에 깨닫겠는가?”라고 한 말을. 옛 사람이 한마디의 선문답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게 되는 것을 살펴보면 불법의 대의를 정신 차려서 스스로 잘 사유하고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불법의 대의를 사유하고 살피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경전과 어록을 읽고, 법문을 들어도 체득할 수 없고,불법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두스님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강남 지방에 봄바람이 불지 않는데, 두견새는 꽃밭에서 지저귄다. 세 단계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 물고기는 용으로 바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밤새 연못의 물을 퍼내고 있다.”

앞의 두 구절은 법안화상과 혜초가 한마디의 선문답으로 부처가 무엇인지 곧바로 깨닫게 된 불성 지혜작용의 경지를 봄소식의 풍경으로 읊고 있다. 그러나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사량 분별하는 사람은 용문의 삼 단계 폭포를 오르지 못하고 쓸데없이 연못의 물이나 퍼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고 있다.



[第008則]眉毛在麽
〈垂示〉垂示云。會則途中受用。如龍得水。似虎靠山。不會則世諦流布。羝羊觸藩守株待免。有時一句。如踞地獅子。有時一句。如金剛王寶劍。有時一句。坐斷天下人舌頭。有時一句。隨波逐浪。若也途中受用。遇知音別機宜。識休咎相共證明。若也世諦流布。具一隻眼。可以坐斷十方。壁立千仞。所以道。大用現前。不存軌則。有時將一莖草。作丈六金身用。有時將丈六金身。作一莖草用。且道。憑箇什麽道理。還委悉麽。試擧看。
〈本則〉擧。翠巖夏末示衆云。一夏以來。爲兄弟說話。看翠巖眉毛在麽。保福云。作賊人心虛。長慶云。生也。雲門云。關。
〈頌〉翠巖示徒。千古無對。關字相酬。失錢遭罪。潦倒保福。抑揚難得。嘮嘮翠巖。分明是賊。白圭無玷。誰辨眞假。長慶相諳。眉毛生也。

벽암록 제8칙 취암 화상의 눈썹
“선승은 일체만법을 자기것으로 만드는 사람”
〈벽암록〉 제8칙은 취암 화상이 하안거를 마칠 때에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취암 화상이 하안거 끝에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다. “하안거 동안에 형제 여러분들을 위해서 설법 했는데, 잘 보게! 나(취암)의 눈썹이 붙어 있는가?” 보복(保福) 화상이 말했다. “도둑놈은 늘 마음이 편치 못하지.”

장경(長慶) 화상은 말했다. “(눈썹이) 생겼네!” 운문(雲門) 화상이 말했다. “관문이다.(關)”

擧. 翠巖, 夏末示衆云, 一夏以來, 爲兄弟說話. 看, 翠巖眉毛在?, 保福云, 作賊人心虛. 長慶云, 生也, 雲門云, 關.

취암이 눈썹이 빠져가며 설법한 뜻
보복.장경.운문이 날카롭게 촌평

여기에 등장하는 취암, 보복, 장경, 운문은 모두 당대 설봉의존(雪峰義存) 문하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전등록〉에는 설봉의 법을 이은 제자 45명을 싣고 있는데, 운문(雲門), 현사(玄沙), 장경(長慶), 보복(保福), 경청(鏡淸) 등의 순서로 열거하고 있다.

취암 화상은 하안거를 마치는 날 대중에게 “나는 90일간 여러분들이 불법의 대의를 깨닫도록 여러 가지 많은 설법을 하였다. 여러분들은 나의 얼굴을 잘 보게! 나의 눈썹이 남아 있는가?” 수행승들에게 자기의 눈썹이 남아 있는지 확인시키고 있는 말이다.

취암 화상이 이러한 법문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조당집〉 제7권 암두장에 협산 화상이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노승이 두 줄기 눈썹을 아끼지 않고 말해야 겠다.”라는 말처럼, 중생을 위해서 방편문(第二義)에서 여러 가지 설법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불립문자의 경지인 불법의 근본(第一義)정신을 언어 문자로 표현한 죄로 눈썹이 빠지는 과보를 받는다는 일반적인 속신(俗信)이 있었다. 〈임제록〉에도 보면 “나의 얼굴을 잘 보게! 눈썹이 몇 개 남아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조당집〉 4권에 단하천연이 혜림사에서 목불(木佛)을 쪼개어 불 피우고 잠자고, 암자의 주지가 천연선사를 꾸짖은 죄로 눈썹이 다 빠졌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벽암록〉제27칙에는 ‘눈썹을 아끼지 않고(不惜尾毛)’라는 말도 있는데 중생을 위해서 설법하여 눈썹이 빠지는 벌칙을 받는다고 해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설법하는 자비심을 말한다.

취암 화상도 하안거 90일간 매일 눈썹이 빠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서 설법했다. 그래서 해제 날, 눈썹이 하나도 없어졌는지 대중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불법을 깨닫도록 설했는데 그대들은 나의 설법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는가? 각자 반성하라는 각성의 설법인 것이다.

취암 화상의 설법에 대하여 원오는 “아니 눈썹뿐만 아니고, 눈까지 땅에 떨어졌네. 그 뿐인가. 코(鼻孔:본래면목)도 없네.”라고 착어(코멘트)하고 있다. 즉 취암 화상의 얼굴이 없어진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취암 화상은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등 자아에 대한 일체의 분별심을 텅 비워버린 경지(身心脫落)에서 중생을 위해 불법을 설한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보복 화상은 “도둑놈은 늘 마음이 편치 못하지.”라고 말하고 있다. 보복 화상은 이러한 법문을 한 취암 화상을 천하와 우주를 훔친 도둑질 하는 사람으로 평하고 있다. 자아의식과 상대적인 차별심,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무심도인(취암)은 만법과 하나가 된 경지에 사는 사람이기에 일체의 만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 도둑으로 평가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선승을 도둑놈이라고 평하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 데 이는 불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천하를 훔치는 도둑의 기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복 화상이 “도둑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한 것은 취암 화상의 설법은 만법을 자기 것으로 훔친 도둑(취암)에게도 눈썹이 있는가를 대중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말이다. 즉 도둑놈이 뭔가 꺼림칙해서 하는 말이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이러한 보복의 평가에 원오는 “분명히 그렇다(灼然)”라고 하면서 “도적은 도적을 잘 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보복은 취암이 만법을 훔친 도적이라는 사실을 도적의 입장에서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다음 장경 화상은 “(눈썹이) 생겼다.”라고 평하고 있다. 즉 취암 화상 그대는 얼굴의 눈썹을 가지고 말하는가? 나는 우주에 가득 찬 눈썹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즉 장경 화상은 취암 화상이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본래면목을 체득한 것처럼, 나도 그러한 경지를 체득하고 있다는 본인의 입장을 표명한 말이다.

선어록에 “거북의 꼬리에 털이 생겼다.” “토끼의 머리에 뿔이 생겼다.” “불타는 숯불 속에 연꽃이 피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장경의 독설은 무엇이 생겼다고 밝히지 않고 있지만, 원오는 “장경의 혀가 땅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했다. “장경 화상 당신의 혀도 너무 길어. 지나치게 잔소리 많이 하고 있네!”라고 하면서 “잘못을 가지고 잘못에 나아감(將錯就錯)‘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원래 취암 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한 것 자체가 불법의 근본에서 벗어난 잘못이 있는데, 또 장경화상이 쓸데없이 눈썹이 생겼다고 말한 것은 잘못에 또 잘못이 첨가된 꼴이라고 한 평가이다.

마지막에 운문 화상이 ‘관(關)’이라는 한 글자로 취암의 설법을 평했다. 운문의 설법은 한 글자로 선의 요지를 대답하여 수행자를 지도하는 일자관(一字關)으로 유명하다. 즉, 어떤 것이 정법안장입니까? 라는 질문에 “보(普)”라고 대답하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면 어디서 참회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로(露)”라고 대답했다. 보(普)는 절대 보편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정법안장이며, 로(露)는 자신의 본래면목 전체를 숨김없이 들어내어 참회해야 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을 주장하고 있다.

관(關)은 관문으로 반드시 누구나 타파해야 할 관문 즉 벽(壁)과 같은 의미이다. 관문은 미혹과 깨달음, 중생심과 불심의 차별을 초월하는 관문으로 본래면목를 밝히는 고정된 문이 없는 관문이다. 불법의 수행자는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불법의 대의와 절대 깨달음의 경지(본래면목)를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취암과 보복, 장경이 자신의 경지에서 이 공안의 견해를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운문은 그대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하고 있지만 내가 제시한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독자적인 관문을 설치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운문은 ‘관(關)’이라는 일자관의 공안을 제시하여 천하 선승들이 제멋대로 주장하는 입을 봉쇄해 버리고, 불법을 체득하는 유일한 관문을 설치한 것이다.

원오는 “천하의 납승도 이 관문을 통과 할 수 없다.”고 코멘트 하고 있다. 이는 수행자가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지혜의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문의 관문을 통과하면 천하를 활보하며 자유자재한 경지를 체득 할 수가 있다. 지금 이 공안을 읽고 있는 수행자는 이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깊이 반조하고 사유하여 본래면목을 체득해야 한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취암 화상이 수행자들에게 “눈썹이 있는가?”라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제시했지만, 천고 만고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네. 운문이 “관문”이라고 대답하자, 취암, 보복, 장경 세 사람은 돈도 잃고 죄까지 지었네. 노련한 보복 화상은 취암 화상을 칭찬한 것인가, 꾸짖은 것인가? (본래면목은 칭찬해도 훌륭하게 되지 않고, 욕을 해도 보잘것없는 것이 아닌데.) 수다쟁이 취암 화상 분명히 천하를 자기 것으로 훔친 훌륭한 도적이다. 흰 구슬(본래면목)에 티가 없으니 누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구별하랴. 아니 장경 화상이 알아 차렸으니 눈썹이 생겼다고 말했네. 장경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는 한 줄기 눈썹(본래면목)이 천지에 들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第009則]趙州四門[조주사문]
〈垂示〉垂示云。明鏡當臺。姸醜自辨。鏌鎁[金+耶]在手。殺活臨時。漢去胡來。胡來漢去。死中得活。活中得死。且道到這裏。又作麽生。若無透關底眼轉身處。到這裏灼然不柰何。且道如何是透關底眼。轉身處。試擧看。
〈本則〉擧。僧問趙州。如何是趙州。州云。東門西門南門北門。
〈頌〉句裏呈機劈面來。爍迦羅眼絶纖埃。東西南北門相對。無限輪鎚擊不開。

벽암록 제9칙 조주화상과 사문(四門)
“진리의 세계는 항상 대문을 열어놓고 있다”
{벽암록}제9칙은 {조주록}에 수록된 조주 화상의 동서남북 네 개의 문(四門)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조주(趙州) 입니까?”
조주 화상은 말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지.”

擧. 僧問趙州, 如何是趙州. 州云, 東門, 西門, 南門, 北門.

조주의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받고
‘문없는 문’활짝 열고 자비로 응대

조주 화상은 제2칙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설한 종심 선사(778~897)선사를 말한다. 하북성 서족에 있는 조주성(趙州城) 관음원에 머물면서 선법을 펼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조주 화상 혹은 그냥 조주라고 불렀다.

조주는 60살에 다시 구법행각의 길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참문 하였다. ‘7살 아동이라도 나보다 뛰어난 불법의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나아가 불법을 자문하고, 100살 노인이라도 나보다 견해가 못하면 나는 곧장 그에게 불법을 가르치리라’라고 서원을 세우고 80살 때 까지 깨달음을 체득한 이후(悟後)의 수행을 계속한 선승이다.

조주 화상이 조주 관음원에 있을 때에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조주 화상의 견해와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이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질문자의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질문하는 스님도 안목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에 조주 화상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지명(地名)임과 동시에 조주 관음원에 살고 있는 조주 화상을 지칭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 라는 질문에 조주 화상이 자기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질문인가라고 생각하고 대답하면, 아니 조주 화상의 견해나 종풍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조주성이라는 지명(地名)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조주성이라는 지명에 대한 질문이라고 파악하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지명과 경계를 질문한 것이 아니라 조주 화상 당신의 견해에 대한 질문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이 질문은 두 가지 문제에 걸친 질문이기 때문에 원오는 “하북 하남(河北 河南)”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河)는 황하(黃河)로서 하북과 하남은 이 황하를 두고 나누어진 것처럼, 조주도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을 포함한 문제라고 비유한 것이다. 원오는 이것은 진흙 속에 가시가 있는 질문이니 함부로 발을 내밀면 안 된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조주 화상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대답했다. 조주 화상을 곤경에 몰아넣고 조주의 안목을 시험하려던 그 스님은 조주의 대답에 오히려 본인이 곤경에 처하게 된 상황이다. 조주 화상의 대답은 단순히 조주성의 동서남북에 있는 문에 대한 대답인가. 아니면 조주 화상 자신의 입장을 대답한 것인가.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주성에도 동서남북에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조주 화상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발심, 수행, 보리(菩提), 열반(涅槃)의 네 개의 문(四門)인데, 밀교의 태장계만다라에서는 이것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에 배치하고, 발심은 동문, 수행은 남문, 보리는 서문, 열반은 북문으로 하며, 불법 수행은 이 네 개의 문(四門)을 통과하는 순서로 삼고 있다.

조주 화상처럼 위가 없는 불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는 발심은 출가수행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깨달음(보리)을 성취하여 불법을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발심 수행하여 깨달음을 체득하여 열반적정을 경지에서 살고 있는 조주 화상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발심과 수행, 보리와 열반의 경지에서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조주화상은 원오의 수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밝은 거울과 같은 지혜를 구족하고,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는 살활자재(殺活自在)의 지혜의 칼(寶劍)을 손에 쥐고 어려운 질문을 한 스님에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한 것은 정말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원오는 조주의 대답에 “문이 열렸다(開也)”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조주성의 네 개의 문(四門)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자유롭게 출입 할 수가 있다. 이 조주성의 사문은 장군과 귀족, 승려나 거지 등 사람뿐 만아니라 말이나 마차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불교의 팔만 사천 법문(法門)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가 출입한다. {무문관}에는 “불법을 체득하는 대도(大道)에는 고정된 문이 없다(大道無門)”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고정된 문이 없는 무문(無門)을 법문(法門)으로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일체의 모든 것이 깨달음의 문(門)이기 때문이다. 문이 없는 무문이라면 문을 닫거나 열거나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문은 언제나 활짝 여덟 팔자(八字)로 열려 있는 것이다. 당대 관계(灌溪) 화상도 “시방에 울타리가 없고, 사면에 문이 없다”는 것은 온 천지가 그대로 완전히 열려 있는 텅 빈 허공의 세계(깨달음의 경지)를 읊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질문한 말에 선기(禪機)를 드러내어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지만, 삭가라(迦羅)의 눈에는 가는 티끌도 없다. 동서남북의 문이 마주 보고 있는데, 아무리 철퇴를 휘둘러 처부셔도 열리지 않네.”

“어떤 것이 조주 입니까” 라고 질문한 스님의 지혜는 뛰어난 선기를 갖춘 인물이었다고 읊고 있다. 원오도 “고기가 움직이면 물이 흐린다”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흐린 물 속에 고기가 숨어 있는 것처럼, 스님의 질문한 말(句裏) 속에는 가시(함정)가 있는 질문이라고 하면서 조주 화상에게 가시 있는 질문을 한 것은 좀 실례된 것이 아닌가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두 번째 “삭가라의 눈에는 가는 티끌도 없다”고 한 말은 조주화상을 칭찬한 말이다. 삭가라는 금강(金剛), 견고하다는 의미인데, 조주의 금강과 같은 지혜의 안목은 아무리 작은 먼지라도 분명히 밝혀내고 있다. 즉, 조주는 질문한 스님의 의도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다.

세 번째 “동서남북의 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말은 설두가 조주의 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조주의 눈에 티끌도 없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원오의 착어에 “문이 열였다(開也)”라고 한 것처럼, 대도무문(大道無門)이기 때문에 이 문은 예부터 본래부터 열려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불도의 문은 본래부터 열려 있기 때문에 불법을 체득한 사람은 언제나 마음대로 통과 할 수 있지만, 불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언제라도 통과 할 수가 없다.

원오는 “어디에 그렇게 열려있는 문이 있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원래 조주의 발심, 수행, 보리, 열반의 네 개의 문(四門)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 {능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하나의 길인 열반의 문(一路涅槃門)"이다. 일체의 모두가 그대로 조주의 네 개의 문(四門)이며, 아니 온 우주가 그대로 조주의 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조당집}제7권에, 설봉이 일체의 모든 천지(乾坤)가 바로 해탈의 문”이라고 주장하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무리 철퇴를 휘둘려 쳐부숴도 이 문은 열리지 않네”라고 맺고 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조주의 철문을 열수가 없다. 왜 그럴까? 항상 열려있는 이 무문(無門)의 문은 누구나 쉽게 통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조당집}제5권에 운암이 “문으로 들어온 것은 참된 집안 보물이 될 수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고정된 문으로 들어온 물건은 시절인연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되는 것이다. 경전과 어록의 설법을 사유하고 음미하여 불법의 지혜를 체득할 때 무문의 문은 열리며, 한 길인 열반의 문은 열려 있는 것이다.



[第010則]掠虛頭漢
〈垂示〉垂示云。恁麽恁麽。不恁麽不恁麽。若論戰也。箇箇立在轉處。所以道。若向上轉去。直得釋迦彌勒。文殊普賢。千聖萬聖。天下宗師。普皆飮氣呑聲。若向下轉去。醯雞蠛蠓。蠢動含靈。一一放大光明。一一壁立萬仞。儻或不上不下。又作麽生商量。有條攀條。無條攀例。試擧看。
〈本則〉擧。睦州問僧近離甚處。僧便喝。州云。老僧被汝一喝。僧又喝。州云。三喝四喝後作麽生。僧無語。州便打云。這掠虛頭漢。
〈頌〉兩喝與三喝。作者知機變。若謂騎虎頭。二俱成瞎漢。誰瞎漢。拈來天下與人看。

 

벽암록 제10칙 목주화상과 사기꾼
가짜로 소리만 지르는 것은 ‘사기꾼’에 불과
{벽암록}제10칙에는 목주 화상과 엉터리 사기꾼 스님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목주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갑자기 고함(喝)을 쳤다.
목주 화상이 말했다.
“노승이 그대의 고함(一喝)에 한번 당하게 되었군!”
그 스님이 또 고함(喝) 쳤다.
목주 화상이 말했다.
“그렇게 서너 차례 고함(喝)친 다음에는 어찌 하려는가?”
스님이 아무 말이 없자,
목주 화상은 곧장 그 스님을 치면서 말했다.
“이 사기꾼 같은 놈!”

擧. 睦州問僧, 近離甚處. 僧便喝. 州云, 老僧被汝一喝. 僧又喝. 州云, 三喝四喝後, 作生. 僧無語. 州便打云, 這掠虛頭漢.

“고함 지른 뒤에는 어쩌려는가?”
예리한 반문으로 엉터리 가려내

목주 화상(780~877)은 황벽희운 선사의 제자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19권, 〈전등록〉12권 등에 전한다. 임제의현과 동문이며, 젊은 운문의 발을 문지방에 치게 하여 깨달음을 체득하게 한 진존숙(陳尊宿)이라고 불리는 선승이다. 그는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한 평생 은거하며 짚신을 만들어 팔아서 노모를 봉양한 효행이 알려지면서 진포혜(陳蒲鞋)라고 불리게 되었다.

경율론 삼장(三藏)의 교학에 통달하여 계율을 청정히 하고 제자 교육에 엄격한 선승이다. 그의 이름을 {고존숙어록}에는 도종(道), {오등회원}에는 도명(道明)이라고 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목주 화상을 친견하려고 찾아왔기에, 목주화상은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지금까지 그대는 어디서 수행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이것은 어떤 학인에게도 던질 수 있는 평범한 물음이지만, 학인의 견해를 시험하는 날카로운 물음이다. 원오도 목주 화상의 물음은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 임제의 네 번의 할(四喝)에 나오는 말인데 〈종용록〉14칙에도 ‘탐간(探竿)은 손에 있고, 영초(影草)는 몸을 따른다.’라는 말이 보인다. 즉 탐간(探竿)은 어부가 고기 잡는 도구로서 긴 장대 끝에 오리 깃털을 묶어서 물 속의 고기떼를 찾아 한 곳으로 모아 투망을 던져 고기를 잡는 도구이며, 영초(影草)는 풀을 베어 물 속에 던져 놓고 고기떼가 그 풀 더미 속에 숨기를 기다려서 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목주 화상이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은 흔히 학인에게 던지는 인사말 같지만 고기를 잡기 위해 물속에 던져둔 풀 더미와 같은 도구이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는 물음이라는 의미이다.

목주 화상의 물음에 그 스님은 곧장 고함(喝)을 쳤다. 이 스님도 보통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목주 화상의 물음을 단순한 인사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큰 소리로 할(고함)을 한 것이다. 원오도 ‘대단한 선승(作家禪客)’이라고 평하고 있다. 선문답에서 고함(喝)을 하는 것은 지금 여기자기 불성(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을 단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일체 언설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인 불립문자의 세계를 곧바로 제시하는 직접적인 행위이다.

목주 화상이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여기에 여여(如如)하게 왔다는 사실을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목주 화상은 “노승이 그대의 할에 한방 얻어맞았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그대는 정말 대단한 선승이야!’ 라고 겉으로 칭찬하는 말이지만, 원오가 “호랑이를 함정에 빠지게 하는 기지(陷虎之機)”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학인을 사로잡는 목주의 노련한 기지를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스님도 보통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할(고함)을 했다.’ 여기서 이 스님이 진짜 작가인지 작가 흉내를 낸 졸승인지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오는 “머리에 뿔이 있는지 잘 점검하라.”라고 하면서, “닮기는 닮았는데, 아직 진짜가 아니니, 아마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될까 걱정스럽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용두사미라는 말은 〈전등록〉12권에 처음 등장하는 말로 처음 큰 소리로 고함친 이 스님이 뒤에는 꼬리를 감추는 것을 말한다.

목주 화상은 “그렇게 서너 차례 고함을 친 다음은 어찌하려는가?” 라고 다구 쳤다. 즉 그대가 처음 한두 번 고함(喝)은 대단한 기세였는데, 다시 세 번 네 번 고함을 친 뒤에는 어떻게 할 참인가? 라고 목주 화상이 먼저 그 스님의 입을 봉쇄하기 위해 선수를 치고 있는 말이다. 즉 그대가 진정 대장부라면 불법의 안목과 지혜로 이 문제를 뚫고 나와 봐라!

원오는 목주 화상의 지혜작용(機鋒)이 날카로워서 누구한 사람 머리를 내미는 자가 없다고 하면서 이 스님이 “어디로 도망갔는가? 어디로 들어갔나?”라고 착어하고 있다.

목주 화상이 선수 치는 말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스님이 처음 한 두 번고함(할)을 친 것도 진짜 불법의 안목을 갖춘 할이 아니라 가짜로 흉내 낸 할이었다는 사실이 들어 났기 때문에 용두사미라는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원오는 “그 스님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라고 착어를 하고 있는데, 기세등등한 그 스님은 어디로 도망갔지? 꼬리를 감추고 도망 가버렸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목주 화상은 주장자로 곧장 치면서 “이 사기꾼 같은 놈(掠虛頭漢)!” 이라고 말했다. 掠(략)은 탈취하다는 의미로서 허위로 한갓 남의 말이나 언어 문자를 모방하여 적당히 흉내만 내는 엉터리 사기꾼을 말한다. 불법수행을 진실로 하지 않고 착실하지 못한 엉터리 수행자를 꾸짖는 말이다. 참선 수행은 몸과 목숨까지 아끼지 말고 우직하고 착실하게 정진해야 한다. 〈임제록〉을 비롯하여 당대의 어록에도 선승이 학인들을 지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사량 분별을 차단하는 직접행동으로 고함(喝)을 하거나 방망이를 내리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에도 선승들이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활용하는 할(喝)을 흉내 내는 엉터리 사기꾼 같은 수행자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두 번의 할(兩喝)과 세 번의 할(三喝). 작가 선객은 근기에 맞출 줄 알았네. 만약 범의 머리에 올라탔다고 여긴다면, 둘 다 눈먼 장님이 되리라. 누가 눈먼 장님인가? 온 세상에 들추어내어 사람들께 보여 줘라.”

두 번의 할(兩喝)은 스님이 목주 화상에게 두 번이나 할을 한 것이고, 세 번의 할(三喝)은 목주 화상이 스님에게 세 번 네 번 할을 한 뒤에는 어떻게 하려는가? 라고 반문한 것을 말한다. 작가 선객은 목주 화상을 지칭하는 말로, 목주는 지혜 작용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스님에게 세 번 네 번 할을 한 이후에는 어떻게 하려는가? 라고 선수를 친 임기응변이 뛰어난 것을 읊고 있다.

“만약 범의 머리에 올라탔다고 여긴다면, 둘 다 눈 먼 장님이 되리라.”라고 읊고 있는 말은 목주화상 앞에서 두 번이나 고함(喝) 치는 스님의 할을 마치 범을 타고 질주하는 기세로 인정한다면 할을 한 스님과 이 공안을 읽고 그렇게 인정한 당신이나 두 사람 모두 불법의 안목 없는 장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어째서 장님이라는 말인가? 이 공안을 읽고 있는 당신도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들추어내 제시해보도록 하라. 그대의 안목도 천하의 사람들에게 한번 점검 받아 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눈 뜬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잘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모두가 불법의 대의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지 못한 장님이 되고 말 것이다.

설두는 여기서 이 공안을 읽는 수행자들에게 불법을 지혜를 구족하지 못한 안목 없는 눈먼 장님(漢)이라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설두가 말한 눈먼 장님은 누구인가?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80 

 

벽암록(1) 1칙 ~ 10칙

벽암록 제1칙 달마대사와 양무제 “불법의 지혜는 현실의 삶에서 구현돼야” {벽암록}제1칙은 중국선종의 초조로 추앙받는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와 처음 불법천자라고 하는 양(梁)

kr.buddhism.org

 

 

황문이신 학이성 수호불망자

 

 

 

 

http://kr.buddhism.org/%ec%a1%b0%ec%82%ac%ec%96%b4%eb%a1%9d/?mod=document&uid=42 

 

보조국사 지눌스님 수심결 修心訣

보조국사 지눌스님 수심결 修心訣 1. 밖에서 찾지 말라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kr.buddhism.org

 

https://m.cafe.daum.net/seojinam/eyey/6?listURI=%2Fseojinam%2Feyey 

 

수심결(修心訣) 원문과 번역본

수심결(修心訣) 원문과 번역본(동국대 역경위원 김원각 번역본)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참선하여 마음을 닦는 데 필요한 내용을 저술한 《

m.cafe.daum.net

 

수심결(修心訣) 원문과 번역본

(동국대 역경위원 김원각 번역본)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참선하여 마음을 닦는 데 필요한 내용을 저술한 《수심결》에 경복궁 비현합(丕顯閤)에서 토를 달고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한글로 번역하고 풀이한 책이다. 

목우자는 지눌의 호이다. 1984년 5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70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지은 『수심결(修心訣)』은 조선 세조 때의 승려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언해한 책이다. 

목우자(牧牛子)는 지눌의 법호(法號)이며, ‘수심결’은 지눌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대립을 막고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밝히고자 하여 저술한 글이다. 

본서에는 ‘수심결’ 외에도 「환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皖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등 4편의 법어(法語)가 함께 묶여 있다. 

규장각 소장본은 1467년(세조 13)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당대의 명필(名筆)인 안혜(安惠) 등이 정성들여 써서 목판에 새긴 후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크기는 세로 23.1cm, 가로 17cm이다. 간경도감의 성격 및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목우자 수심결(牧牛子修心訣)은 보조국사 수심결 (普照國師修心訣)이라고도 한다. 

보조국사 지눌이 40세 이후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며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참선(參禪)의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지눌은 이 책의 서두에서 〈법화경〉의 '화택비유'(火宅比喩)를 인용하여 삼계(三界)의 뜨거운 고뇌는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이처럼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부처를 이루는 일이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곧 참 부처이고 자신의 성품이 곧 참다운 법(法)임을 알지 못하여 밖에서만 찾으니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본론은 마음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론을 9문9답을 통해 제시했다, 

제1문답에서는 불성(佛性)은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지만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지각하는 것 자체가 곧 불성의 작용임을 설명했다. 

제2문답에서는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돈오(頓悟: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점차로 닦아나감)의 이문(二門)에 있음을 밝혔다.  

제3문답에서는 돈오와 점수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돈오란 자기의 본성이 곧 제불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란 그 깨달음에 의지하여 무시 이래로 훈습(熏習:향기가 옷에 배는 것처럼 業力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된 망념(妄念)을 점차로 걷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제4~6문답은 돈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깨달음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으며 만약 방법을 써서 깨닫고자 한다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는 것과 같으니, 눈을 잃지 않았음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영지(靈知:신령스런 앎)도 이미 자신의 마음이므로 볼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곧 견성(見性:자신의 불성을 보고 깨달음)이다. 

제7~9문답은 점수의 방법론에 대해 선정(禪定)과 지혜를 균등하게 유지하는 정혜등지(定慧等持)로 설명했다. 정혜(定慧)를 체(體)·용(用)의 관점에서 보면, 정은 곧 자성(自性:자기가 본래 갖춘 성품, 곧 佛性)의 본체이고 혜는 곧 자성의 작용이므로 체·용이 분리될 수 없듯이 정·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점수의 방법론은 정과 혜를 동시에 골고루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정혜쌍수는 수행자의 근기(根機:敎法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나뉜다. 자성정혜를 닦는 자는 돈오문에서 '힘씀이 없는 힘씀'(無功之功)으로서 정과 혜를 아울러 부리고 스스로 자성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사람이고, 수상정혜를 닦는 자는 깨닫기 전의 낮은 근기의 공부로서 마음마다 의혹과 번뇌를 끊고 고요함만을 취해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깨달은 관점에서 보면 양자는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비록 돈오 후에 점수라고는 하나, 망념은 본래 공(空)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아도 닦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눌은 이 책에서 자신의 수심관(修心觀)을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체계화했고 이는 곧 한국불교의 선수행(禪修行)의 지침이 되었다. 

 

목우자 수심결(牧牛子修心訣)

 

■ 보조의 수심결 1 - 자기 마음을 알면

- 윤회고통 마치 불난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러 있는가?

三界熱惱 猶如火宅 其忍淹留 甘受長苦
삼계열뇌 유여화택 기인엄류 감수장고 

삼계(三界:욕계·색계·무색계)를 윤회하는 고통은 마치 불난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오랜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欲免輪廻 莫若求佛 
욕면윤회 막약구불

그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다. 

若欲求佛 佛卽是心 心何遠覓  不離身中 
약욕구불 불즉시심 심하원멱  불리신중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몸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色身是假 有生有滅 
색신시가 유생유멸

眞心如空 不斷不變 
진심여공 부단불변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여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이 진심(眞心)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故云百骸潰散  歸火歸風 一物長靈 蓋天蓋地 

고운백해궤멸  귀화귀풍 일물장령 개천개지

그러므로 ‘육체는 죽으면 흩어져 불이나 바람의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마음)은 영원히 신령하여 하늘과 땅을 덮는다.’ 하였다.

 

嗟夫今之人 迷來久矣 
차부금지인 미래구의

不識自心是眞佛 不識自性是眞法 
불식자심시진불 불식자성시진법

欲求法而遠推諸聖 欲求佛而不觀己心 
욕구법이원추제성 욕구불이불관기심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미혹된 지가 오래되어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품이 참 진리인 줄 알지 못해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면 멀리 성인들만 추앙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는다.

 

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
약언심외유불 성외유법

堅執此情  欲求佛道者 

견집차정  욕구불도자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뜻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縱經塵劫 燒身燃臂 
종경진겁 소신연비

骨出髓 刺血寫經 長坐不臥 
고골출수 자혈사경 장좌불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눕지 않고 오래 앉아 참선만 하며, 

 

一食卯齋 乃至轉讀一大藏敎 
일식묘재 내지전독일대장교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只益自勞爾 
수종종고행 여증사작반  지익자로이 

아침 한 끼만 먹으며 나아가 모든 대장경을 다 읽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해도 이는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但識自心 恒沙法門 
단식자심 항사법문

無量妙義 不求而得 

무량묘의 불구이득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알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찾지 않아도 절로 얻게 될 것이다.

 

 보조의 수심결 2 - 마음은 본래 스스로 원만한 것

-망령된 생각 여의면 그대로 부처, 그대 몸에 있는데도 보지 못할 뿐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  智慧德相
고세존운 보과일체중생 구유여래  지혜덕상 

그러므로 세존께서 ‘널리 모든 중생을 관찰하니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다’ 하시고 

 

叉云一切衆生 種種幻化 
차운일체중생 종종환화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離 
개생여래원각묘심 시지이

또 이르시되 ‘가지가지의 허망 된 생각들이

다 원만히 깨달은 여래의 묘심(妙心)에서 나온다.’ 하셨다. 

 

此心外 無佛可成 

차심외 무불가성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과거제여래 지시명심저인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현재제현성  역시수심저인 

과거의 모든 여래도 오직 이 마음을 밝히신 분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역시 마음을 닦은 사람들이다.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미래수학인  당의여시법

그러니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응당 이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心性無染 
원제수도지인 절막외구 심성무염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본자원성 단리망연 즉여여불

바라건대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밖에서 찾지 말라.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본래 스스로 원만한 것이라

단지 망령된 생각들만 여의면 곧 그대로가 부처일 것이다.

 

問若佛性 現在此身 旣在身中 
문약불성 현재차신 기재신중

不離凡夫 因何我今 不見佛性 
불리범부 인하아금 불견불성

更爲消釋 悉令開悟 
갱위서석 실령개오 

 묻다. “만약 불성이 지금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이 몸 안에 있으므로 범부를 떠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석하여 속속들이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答在汝身中 汝自不見 
답재여신중 여자불견 

답하다. “그대 몸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汝於十二時中  知飢知渴 知寒知熱 或嗔或喜 
여어십이시중  지기지갈 지한지열 혹진혹희

竟是何物 且色身 是地水火 
경시하물 차색신 시지수화

風四緣所集 其質頑而無情 
풍사연소집 기질완이무정

豈能見聞覺知 能見聞覺知者 
기능견문각지 능견문각지자

必是汝佛性 故臨濟云 
필시여불성 고임제운

四大不解說法聽法 虛空不解說法聽法 
사대불해설법청법 허공불해설법청법

只汝目前 歷歷孤明 勿形段者 
지여목전 역역고명 물형단자

始解說法聽法 
시해설법청법

所爲勿形段者 是諸佛之法印 
소위물형단자 시제불지법인

亦是汝本來心也 則佛性 現在汝身 
역시여본래심야 즉불성 현재여신

何假外求 汝若不信 略擧古聖 
하가외구 여약불신 약거고성

入道因緣 令汝除疑 汝須諦信 
입도인연 영여제의 여수체신

그대가 하루 가운데서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는 것을 알고, 

춥다, 덥다 하는 것을 알고 혹 성내거나 기뻐할 줄 아는데 이것이 결국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서

그 바탕이 둔하여 감정이 없으니 어찌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 스님은 ‘이 몸뚱이는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 못하고

단지 그대 눈앞에 밝음이 역역하지만 형상이 없는 그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 없는 그것’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째서 헛되이 밖에서 구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믿을 수 없다면 간략하게 옛 성인들이 도를 깨친 인연을 들어 그대의 의심을 풀어 줄테니

그대는 잘 듣고 믿기 바란다.

 

■ 보조의 수심결 3- 불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견성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昔異見王 問婆羅提尊者曰 何者是佛 
석이견왕 문바라제존자왈 하자시불

尊者曰 見性是佛 王曰 師見性否 
존자왈 견성시불 왕왈 사견성부

尊者曰 我見佛性 王曰性 
존자왈 아견불성 왕왈성

在何處 尊者曰 性在作用 
재하처 존자왈 성재작용

王曰是何作用 我今不見 尊者曰 
왕왈시하작용 아금불견 존자왈

今現作用 王自不見 王曰於我有否 
금현작용 왕자불견 왕왈어아유부

尊者曰 王若作用 無有不是 王若不用 
존자왈 왕약작용 무유불시 왕약불용

體亦難見 王曰若當用時 幾處出現 
체역난견 왕왈약당용시 기처출현

尊者曰 若出現時 當有其八 
존자왈 약출현시 당유기팔

王曰其八出現 當爲我說 尊者曰 
왕왈기팔출현 당위아설 존자왈

在胎曰身 處世曰人 在眼曰見 
재태왈신 처세왈인 재안왈견

在耳曰聞 在鼻辨香 在舌談論 
재이왈문 재비변향 재설담론

在手執捉 在足運奔 現俱該沙界 
재수집착 재족운분 현구해사계

收攝在一微塵 識者知是佛性 
수섭재일미진 식자지시불성

不識者喚作精魂 王聞心卽開悟 

불식자환작정혼 왕문심즉개오

 

옛날에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견성(見性)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왕이 물었다.

“스님은 견성했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는 불성(佛性)을 보았습니다.”

왕이 물었다.

“그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불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가 말했다.

“지금도 나타나서 작용하고 있습니다만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왕이 물었다.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존자가 말했다.

“만약 왕께서 작용하고 있다면 불성 아닌 것이 없지만 왕께서 만약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몸도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물었다.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타날 때는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말했다.

“그 나타나는 여덟 군데를 나를 위해 설명해주십시오.”

존자가 말했다.

“태(胎)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는 놈이라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 놈이라 하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을 땐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으며, 발에 있으면 부지런히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계를 다 감싸지만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곧 불성인줄을 알지만 모르는 자들은 정혼(情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바로 열리었다.

 

又僧 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우승 문귀종화상 여하시불 종운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誡言 
아금향여도 공여불신 승운 화상계언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언감불신 사운 즉여시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이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려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스님이 말했다.

“화상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보조의 수심결 4- 어떻게 보림(保任)해야 합니까?

   입으로만 진리 말하고 사견에 빠지면 자신도 그르치고 남도 잘못되게 한다.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 在眼 
승운 여하보림 사운 일예재안

空花亂墜 其僧 言下有省 
공화난추 기승 언하유성

上來所擧古聖 入道因緣 明白簡易 
상래소거고성 입도인연 명백간이

不妨省力 因此公案 若有信解處 
불방성력 인차공안 약유신해처

卽與古聖 把手共行 

즉여고성 파수공행

 

스님이 말했다.

‘어떻게 보림(保任:깨달은 경지를 잘 보호하며 닦아가는 것)해야 합니까.

’화상이 말했다.

‘하나의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허공의 꽃(空花:눈병이 생기면 때로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꽃무늬 같은 헛것이 보인다)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그 스님은 이 말에 곧 깨달음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옛 성현이 도에 들어간 이야기가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로움을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공안(公案:즉 공부의 규범이 되는 것)을 의지해서 믿음과 이해가 있게 되면 바로 옛 성현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問汝言見性 若眞見性 卽是聖人 
문여언견성 약진견성 즉시성인

應現神通變化 與人有殊 
응현신통변화 여인유수

何故今時修心之輩 無有一人 
하고금시수심지배 무유일인

發現神通 變化耶 

발현신통 변화야

 

물었다.

‘스님은 성품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만일 참으로 성품을 보았다면 바로 성인이시라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즈음 마음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이 없습니까.

 

答汝不得輕發狂言 不分邪正 
답여부득경발광언 불분사정

是爲迷倒之人 今是學道之人 
시위미도지인 금시학도지인

口談眞理 心生退屈 返墮無分之失者 
구담진리 심생퇴굴 반타무분지실자

皆汝所疑 學道而不知先後 
개여소의 학도이부지선후

說理而不分本末者 是名邪見 
설리이불분본말자 시명사견

不名修學 非唯自誤 兼亦誤他 
불명수학 비유자오 겸역오타

其可不愼歟 
기가불신여

夫入道多門 以要言之 
부입도다문 이요언지

不出頓悟漸修兩門耳 雖曰頓悟頓修 
불출돈오점수양문이 수왈돈오돈수

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 已是 
시최상근기득입야 약추과거 이시

多生 依悟而修 漸熏而來 至於今生 
다생 의오이수 점훈이래 지어금생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문즉발오 일시돈필 이실이논

是亦先悟後修之機也 則而此 

시역선오후수지기야 즉이차

 

대답하다.

‘그대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지 못하면, 이는 미혹에 빠진 사람이다. 요즘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은 포기상태여서 도리어 분수에 없다는 잘못(無分之失: 중생으로서는 성인의 경지에 들 수 없다는 착각)에 떨어진 자들은 다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되 선후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되 본말(本末)을 분간하지 못하면 이를 일컬어 사견(邪見)이라 하지 수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이는 자신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겸하여 남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대개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와 점수는 최상의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미 여러 생애에 걸쳐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진리를 들으면 즉시 깨닫게 되어 일시에 모든 것을 끝낸다. 하지만 사실 이것 역시 먼저 깨달고 뒤에 닦은 근기이다.

 

보조의 수심결 5-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야

    망상 사라지면 광명의 작용 생기니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야

敦漸兩門 是千聖軌轍也 
돈점양문 시천성궤철야

則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즉종상제성 막불선오후수

因修乃證 所言神通變化 
인수내증 소언신통변화

依悟而修 漸熏所現 
의오이수 점훈소현

非謂悟時 卽發現也 

비위오시 즉발현야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다.

과거의 모든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갔고, 그 닦음에 의해 증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대가 말한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如經云 理卽頓悟 乘悟倂消 
여경운 이즉돈오 승오병소

事非頓除 因次第盡 故主峰 
사비돈제 인차제진 고주봉

深明先悟後修之義曰 識氷池而全水 
심명선오후수지의왈 식빙지이전수

借陽氣以鎔消 悟凡夫而卽佛 
차양기이용소 오범부이즉불

資法力以薰修 氷消卽水流潤 
자법력이훈수 빙소즉수유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心靈通 應現通光 
방정개척지공 망진즉심영통 응현통광

之用 是知事上神通變化 
지용 시지사상신통변화

非一日之能成 乃漸熏而發現也 
비일일지능성 내점훈이발현야

況事上神通 於達人分上 
황사상신통 어달인분상

猶爲妖怪之事 亦是聖末邊事 
유위요괴지사 역시성말변사

雖或現之 不可要用 
수혹현지 불가요용

今時迷癡輩 妄謂一念悟時 卽隨現無 
금시미치배 망위일념오시 즉수현무

量妙用 神通變化 若作是解 
량묘용 신통변화 약작시해

所謂不知先後 亦不分本末也 
소위부지선후 역불분본말야

旣不知先後本末 欲求佛道 如將方木 
기부지선후본말 욕구불도 여장방목

逗圓孔也 豈非大錯 旣不知方便故 
두원공야 기비대착 기부지방편고

作懸崖之想 自生退屈 
작현애지상 자생퇴굴

斷佛種性者 不爲不多矣 旣自未明 
단불종성자 불위불다의 기자미명

亦未信他人 有解悟處 見無神通者 
역미신타인 유해오처 견무신통자

乃生輕慢 欺賢 聖 良可悲哉 

내생경만 기현광성 양가비재  

경에 이르기를 “이치로는 돈오(頓悟:단번에 뛰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하여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사라지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례차례로 없어진다.”하였다.

그러므로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는 뜻을 분명히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어 있는 연못이 순전히 물 인줄 알지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인줄을 알지마는 법의 힘을 빌려서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 바야흐로 그 물에 씻는 보람이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과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하였다.

그러므로 사실상 신통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익히고 닦아야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사실상의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요사하고 괴이한 일이고 또한 성인에게도 말단의 일이라서 혹 그것이 나타나더라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으면 즉시 한량없는 묘한 작용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견해를 가진다면 이른바 선후를 알지 못하고 본말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미 선후와 본말을 알지 못하고 불도를 구하려 한다면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끼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미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절벽을 바라보는 듯 한 생각을 내어 스스로 포기하여 부처의 종성(種性)을 끊는 이가 적지 않다. 이미 스스로가 밝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깨달음까지도 믿지 않고, 신통이 없는 이를 보고는 곧 업신여긴다. 이것은 성현을 속이는 일이니 참으로 슬프다.

 

■ 보조의 수심결 6-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점점 익혀서 성인의 자질을 길러가는 것이 점수

問汝言頓悟漸修兩門 千聖軌轍也 
문여언돈오점수양문 천성궤철야

悟旣頓悟 何假漸修 修若漸修 
오기돈오 하가점수 수약점수

何言頓悟 頓漸二義 更爲宣說 
하언돈오 점수이의 갱위선설

令絶餘疑 

영절여의

 

물었다.

“스님께서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라 하였습니다.

깨달았다면 이미 돈오한 것인데 어째서 점점 닦아야 하며, 그 닦음이 만약 점점 닦아야 할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돈오와 점수의 두 가지 뜻을 다시 설명하여 남은 의심을 끊게 해주십시오.”

答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답돈오자 범부미시 사대위신

妄想爲心 不知自性 是眞法身 
망상위심 부지자성 시진법신

不知自己靈知 是眞佛也 心外覓佛 
부지자기영지 시진불야 심외멱불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파파낭주 홀피선지식 지시입로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일념회광 견자본성 이차성지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원무번뇌 무루지성 본자구족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즉여제불 분호불수 고운돈오야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점수자 수오본성 여불무수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무시습기 졸난돈제고 의오이수

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점훈공성 장양성시 구구성성

故云漸修也 比如孩子 初生之日 
고운점수야 비여해자 초생지일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其力未充 
제근구족 여타무이 연기력미충

頗經歲月 方始成人 

파경세월 방시성인

 

답하다.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으로 삼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신령한 지혜가 참 부처인줄을 알지 못해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치듯이 흘러다니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바른 길로 들어가 한 생각에 심광(心光)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 성품에는 본래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하는 것이다.

점수라는 것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랜 세월의 습기(習氣)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그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점점 익혀서 공을 이루고, 또 오랜 동안 성인의 자질을 잘 길러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실하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성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問作何方便 一念廻機 便悟自性

 문작하방편 일념회기 변오자성

물었다.

“어떤 방편을 써야 한 생각의 기틀을 돌려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答只汝自心 更作什 方便 若作方便 
답지여자심 갱작십마방편 약작방편

更求解會 比如有人 不見自眼 
갱구허회 비여유인 불견자안

以謂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이위무안 갱욕구견 기시자안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여하갱견 약지불실 즉위견안

更無求見之心 豈有不見之想 
갱무구견지심 기유불견지상

自己靈知 亦復如是 旣是自心 

자기영지 역부여시 기시자심  

 

대답했다.

“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쓴다는 말인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신의 눈인데 어째서 다시 보려고 하는가.

만약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보지 못한다는 마음이 있겠는가.

자신의 신령스런 앎도 역시 그와 같아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째서 알려고 하는가.”

 

보조의 수심결 7 - 공하고 고요한 신령스런 지혜의 마음

  -지혜의 마음이 그대의 본래면목, -이 마음 깨친다면 삼계를 초월-

何更求會 若欲求會 便會不得 
하갱구회 약욕구회 변회부득

但知不會 是卽見性 

단지불회 시즉견성

 

만약 알려고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며 다만 알 수 없다는 것임을 알면 바로 견성(見性:성품을 봄)이니라.’

 

問上上之人 聞卽易會 中下之人 
문상상지인 문즉이회 중하지인

不無疑惑 更說方便 令迷者趣入 

불무의심 갱설방편 영미자취입

 

물었다.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들은 즉시 쉽게 알겠지만 중하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설하여 모르는 사람들을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答道不屬知不知 汝除却將迷待悟之心 
답도불속지부지 여제각장미대오지심

廳我言說 諸法如夢 亦如幻化 
청아언설 제법여몽 역여환화

故妄念本寂 塵境本空 諸法 
고망념본적 진경본공 제법

皆空之處 靈知不昧 
개공지처 영지불매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즉차공적영지지심 시여본래면목

亦是三世諸佛 歷代祖師 
역시삼세제불 역대조사

天下善知識 密密 
천하선지식 밀밀

相傳底法印也 若悟此心 
상전저법인야 약오차심

眞所謂不踐階梯 徑登佛地 
진소위불천계제 경등불지

步步超三界 歸家頓絶疑 
보보초삼계 귀가돈절의

便與人天爲師 悲智相資 
변여인천위사 비지상자

具足二利 堪受人天供養 
구족이리 감수인천공양

日消萬兩黃金 汝若如是 眞大丈夫 
일소만량황금 여약여시 진대장부

一生能事 己畢矣 

일생능사 기필의

 

답하다.

‘도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리석게도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버리고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수아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녕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진경(塵境:감각의 대상인 객관세계. 즉 眼, 耳, 鼻, 舌, 身, 意에 비춰지는 대상인 色, 聲, 香, 味, 觸, 法을 말 함)은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는 신령스런 지혜가 어둡지 않으니, 이 공하고 고요한 신령스런 지혜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本來面目: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성품을 말함)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하게 서로 전한 진리(法印)이다.

만약 이 이런 마음을 깨친다면 참으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이 삼계를 초월하고 집에 돌아가(歸家: 본래 부처인 마음자리를 뜻함) 단박에 의심을 끊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대비(大悲)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므로 하루에 만량의 황금을 소비하듯이 한량없이 귀한 공양을 인간과 천상으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으면 참다운 대장부로서 일생의 할 일을 다 마쳤다 하겠다.’

問據吾分上 何者是空寂靈知之心耶

문거오분상 하자시공적영지지심야 

 

 물었다.

‘저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것이 공적(空寂)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의 마음입니까.’

 

答汝今問我者 是汝空寂靈知之心 
답여금문아자 시여공적영지지심

何不返照 猶爲外覓 我今據汝分上 
하불반조 유위외멱 아금거여분상

直指本心 令汝便悟 汝須淨心 

직지본심 영여변오 여수정심

 

대답했다.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다.

어째서 돌이켜 비추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내가 지금 그대의 입장에 의거해서 바로 본래의 마음을 가리켜 그대를 깨닫게 할 것이니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말을 잘 들어라.

 

■ 보조의 수심결 8- 성품은 밝고 밝아 일체의 분별도 없다

    보고 듣고 말하고 동작하는 것은 그대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니다.

 

聽我言說 從朝至暮 十二時中 
청아언설 종조지모 십이시중

或見或聞 或笑或語 或瞋或喜 
혹견혹문 혹소혹어 혹진혹희

或是或非 種種施爲運轉 且道畢 
혹시혹비 종종시위운전 차도필

竟是誰 能伊 運轉施爲耶 
경시수 능이마운전시위야

若言色身運轉 何故有人 一念命終 
약언색신운전 하고유인 일념명종

都未壞爛 卽眼不自見 耳不能聞 
도미괴란 즉안부자견 이불능문

鼻不辨香 舌不談論 身不動搖 
비불변향 설부담론 신부동요

手不執捉 足不運奔耶 
수불집착 족불운분야

是知能見搏作 必是汝本心 
시지능견문동작 필시여본심

不是汝色身也 
불시여색신야

況此色身 四大性空 如鏡中像 
황차색신 사대성공 여경중상

亦如水月 豈能了了常知 明明不昧 
역여본심 기능요요상지 명명불매

感而遂通恒沙妙用也 故云神通 
감이수통항사묘용야 고운신통

幷妙用 運水及搬柴 

병묘용 운수급반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혹은 성내거나 기뻐하거나 또는 옳다, 그르다 하는 갖가지의 행위와 동작은 필경 누가 그렇게 하게 하는가를 말해보라.

만약 육신이 동작하게 한다면, 어째서 금방 명이 끊어진 사람의 몸은 아직 썩지 않았는데도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고,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 못하는가?

이러므로 보고, 듣고, 동작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본심이지 그대의 육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 地,水,火,風)의 성품은 비어서 거울 속의 형상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은데, 어떻게 항상 뚜렷이 알고, 분명하고 어둡지 않아 갠지스강의 모래 수같이 한량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신통과 묘한 작용은 물을 긷고, 나무를 운반하는데 있다.’하였다. 즉 물을 긷고 나무를 나르는 일상의 생활을 뜻한다.

且入理多端 指汝一門 令汝還源 
차입리다단 지여일문 영여환원 

汝還聞鴉鳴鵲之聲 曰聞 
여환문아명작조지성마 왈문

曰汝返聞汝聞性 還有許多聲 曰 
왈여반문여문성 환유허다성마 왈

到這裏 一切聲一切分別 俱不可得 
도저리 일체성일체분별 구불가득

曰奇哉奇哉 此是觀音入理之門 
왈기재기재 차시관음입리지문

我更問爾 爾道到這裏 一切聲 
아갱문이 이도도저리 일체성

一切分別 總不可得 旣不可得 
일체분별 총불가득 기불가득

當伊 時 莫是虛空 曰元來不空 
당이마시 막시허공마 왈원래불공

明明不昧 曰作 生 是不空之體 
명명불매 왈작마생 시불공지체

曰亦無相貌 言之不可及 
왈역무상모 언지불가급

曰此是諸佛諸祖壽命 更莫疑也 

왈차시제불제조수명 갱막의야

 

그리고 진리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그대에게 한 길을 가리켜서 그대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그대는 저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돌이켜서 그대가 듣고 있다는 성품을 들어 보아라. 거기에도 많은 소리가 있는가?”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습니다.”

“기특하고 기특하구나. 이것이 바로 관음보살이 진리에 들어간 문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거기에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미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때는 허공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공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것의 본체인가?”

“형상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보조의 수심결 9- 지혜로써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도 점차로 닦습니까?

        무명의 습 갑자기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니라.

故云在聖智而不輝 隱凡心而不昧 
고운재성지이불휘 은범심이불매

旣不增於聖 不少於凡 
기부증어성 불소어범

佛祖奚以異於人 而所以異於人者 
불조해이이어인 이소이이어인자

能自護心念耳 汝若信得及 
능자호심념이 여약신득급

疑情頓息 出丈夫之志 發眞正見解 
의정돈식 출장부지지 발진정견해

親嘗其味 自到自肯之地 
친상기미 자도자긍지지

則是爲修心人 解悟處也 
즉시위수심인 해오처야

更無階級次第 故云頓也 
갱무계급차제 고운돈야

如云於信因中 契諸佛果德 
여운어신인중 계제불과덕

分毫不殊 方成信也 

분호불수 방성신야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라고 해서 빛나는 것도 아니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 있다고 해서 어둡지 않다’하였다. 이미 성인이라 해서 불어나는 것도 아니오, 범부라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면

부처나 조사들이 어찌 보통 사람과 다르겠는가. 그러나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 마음을 잘 보호하는 것뿐이다. 그대가 만약 이 말을 믿어서 의심이 담박 없어지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참되고 바른 견해를 일으켜서 직접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긍정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깨달은 자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계급이나 차례가 없으므로 돈(頓:문득, 또는 담박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요인이 모든 부처의 과덕(果德:최상의 결실로 얻어지는 덕)과 일치하여 조금의 차이도 없어야 비로소 믿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 말과 같다.

 

問旣悟此理 更無階級 
문기오차리 갱무계급

假後修 漸熏漸成耶

하가후수 점훈점성야

 

물었다.

“이미 이런 이치를 깨달아서 다시는 계급이 없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도 닦아서 점차로 익히고 점차로 이루려고 합니까.”

 

答悟後漸修之義 前已具說 
답오후점수지의 전이구설

而復疑情未釋 不妨重說 
이부의정미석 불방중설

須淨心 諦聽諦聽 凡夫 
여수정심 체청체청 범부

無始曠大劫來 至於今日 
무시광대겁래 지어금일

流轉五道 生來死去 堅執我相 
유전오도 생래사거 견집아상

妄想顚倒 無明種習 久與成性 
망상전도 무명종습 구여성성

雖到今生 頓悟自性 本來空寂 
수도금생 돈오자성 본래공적

與佛無殊 而此舊習 
여불무수 이차구습

卒難除斷 故 逢逆順境 瞋喜是非 
졸난제단 고 봉역순경 진희시비

熾然起減 客塵煩惱 與前無異 
치연기감 객진번뇌 여전무이

若不以般若 加功着力 
약불이반야 가공착력

焉能對治無明 

언능대치무명

 

답했다.

“깨달은 뒤에 점차로 닦아야 하는 뜻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의심을 풀지 못했으니 거듭 설명하겠다.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세히 들으라.

범부는 시작이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다섯 갈래의 세계(五道)에 흘러다니며 태어나고 죽고 하되,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뒤바뀐 망상(妄想顚到:현재의 번뇌)과 무명의 습기(無明種習:근본 번뇌)가 오랫동안 지금의 성품을 이루었다.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신의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금방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온 습성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기 때문에 역경이나 순경을 만나면 성내거나 기뻐하며,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관 세계에 대한 번뇌가 그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지혜로써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 보조의 수심결 10- 깨달은 뒤에 소먹이는 행

-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得到大休大歇之地 如云頓悟雖同佛 
득도대휴대헐지지 여운돈오수동불

多生習氣深 風停波尙湧 理現念猶侵

다생습기심 풍정파상용 이현념유침

 

이것은 ‘단박 깨치면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의 습기가 깊구나.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엄습한다.’하는 말과 같다.

 

又고禪師云 往往利根之輩 不費多力 
우고선사운 왕왕이근지배 불비다력

投發此事 便生容易之心 更不修治 
투발차사 변생용이지심 갱불수치

日久月深 依前流浪 未免輪廻 
일구월심 의전유랑 미면윤회

則豈可以一期所悟 便撥置後修耶 
즉기가이일기소오 변발치후수야

故悟後 長須照察 妄念忽起 都不隨之 
고오후 장수조찰 망념홀기 도불수지

損之又損 以至無爲 方始究境 
손지우손 이지무위 방시구경

天下善知識 悟後牧牛行是也 
천하선지식 오후목우행시야

雖有後修 己先頓悟妄念本空 
수유후수 기선돈오망념본공

心性本淨 於惡斷 斷而無斷 於善修 
심성본정 어악단 단이무단 어선수

修而無修 此乃眞修眞斷矣 

수이무수 차내진수진단의

 

또 대혜 종고(宗고)선사도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이런 이치를 알고는 아주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는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그전처럼 유랑하게 되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된다.’하였다.

그러니 어찌 한번 깨쳤다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따르지 말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究境)이니, 천하의 선지식이 깨달은 뒤에 소먹이는 행이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뒤에 닦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임을 먼저 깨쳤기 때문에 악을 끊되,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되, 닦아도 닦음이 없어야 이것이 참다운 닦음이고 참다운 끊음이 되는 것이다.

 

故云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 고운수비수만행 유이무념위종
圭峰總判先悟後修之義云 頓悟此性 규봉총판선오후수지의운 돈오차성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원무번뇌 무루지성 본자구족
與佛無殊 依此而修者 是名最上乘禪 여불무수 의차이수자 시명최상승선
亦名如來淸淨禪也 若能念念修習 역명여래청정선야 약능염염수습
自然漸得百千三昧 達磨門下 자연점득백천삼매 달마문하
展轉相傳者 是此禪也 전전상전자 시차선야
則頓悟漸修之義 如車二輪 闕一不可 즉돈오점수지의 여거이륜 궐일불가

 

그러므로

‘온갖 행을 다 닦으나 오직 무념으로 근본을 삼는다.’하였다.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총괄하여 말하기를 ‘이 성품은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와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담박 깨닫고, 이 깨침에 의해 수행하면 이것을 일러 최상승선(最上乘禪), 또는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만약 생각 생각에 닦고 익히면 저절로 차츰 차츰 백천삼매를 얻을 것이니,달마 문하에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이 바로 이런 선(禪)이다.’하였다.

그러므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或者 不知善惡性空 堅坐不動 
혹자 부지선악성공 견좌부동

捺伏身心 如石壓草 以爲修心 
날복신심 여걱압초 이위수심

是大惑矣 故云聲聞 心心斷惑 能斷之心是賊 
시대혹의 고운성문 심심단혹 능단 지심시적

혹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조복받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하였다.

 

보조의 수심결11-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아라.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但諦觀殺盜狀妄 從性而起 起卽無起 

단체관살도음망 종성이기 기즉무기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當處便寂 何須更斷 所以云 당처변적 하수갱단 소이운
不 念起 唯恐覺遲 불파염기 유공각지
又云念起卽覺 覺之卽無 故悟人分上 우운염기즉각 각지즉무 고오인분상
雖有客塵煩惱 俱成醍 但照惑無本 수유객진번뇌 구성제호 단조혹무본
空華三界 如風卷煙 공화삼계 여풍권연
幻化六塵 如湯消氷 환화육진 여탕소빙
若能如是念念修習 不忘照顧 약능여시염념수습 불망조고
定慧等持 則愛惡自然淡薄 정혜등지 즉애오자연담박
悲智自然增明 辜業 비지자연증명 고업
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煩惱盡時 자연단죄 공행자연증진 번뇌진시
生死卽絶 若微細流注永斷 생사즉절 약미세유주영단
圓覺大智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원각대지낭연독존 즉현천백억화신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 어시방국중 부감응기 사월현구소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영분만수 응용무궁 도유연중생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쾌락무우 명지위대각세존

 

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하였고 또‘생각이 일어나거 던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였다.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관 세계에 대한 번뇌가 있다 해도그것은 다 제호(醍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맛있는 음식. 여기서는 부처의 성품에 비유했음)를 이룬다.

다만 미혹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처럼 실체가 없는 삼계(三界)는 바람에 사라지는 연기와 같고, 허수아비와 같은 객관 세계는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 것이다.

만일 이처럼 생각 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없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되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고, 즐거움만 있고 근심이 없으리니, 이를 일러 크게 깨친 세존이라 한다.”

 

問後修門中 定慧等持之義 實未明了 
문후수문중 정혜등지지의 실미명료

更爲宣說 委示開迷 引入解脫之門 

갱위선설 위시개미 인입해탈지문

 

물었다.

“깨친 뒤에 닦아나가는 문중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동등히 가진다는 뜻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말씀하시어 미혹을 없애고 해탈의 문에 들게 해 주십시오.”

 

答若說法義 入理千門 莫非定慧 
답약설법의 입리천문 막비정혜

取其綱要則但自性上 體用二義 
취기강요즉단자성상 체용이의

前所謂空寂靈知是也 
전소위공적영지시야

定是體慧是用也 

정시체혜시용야

 

답하다.

“만약 법과 그 뜻을 말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은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요강을 든다면, 단지 자기 성품의 본체와 작용의 두 가지 뜻이니, 앞에서 말한 비고 고요함과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그것이다. 선정은 곧 본체요 지혜는 작용이다.

 

보조의 수심결 12- 악을 끊거나 선을 닦는다는 것도 없다

   - 마음에 산란함 없는 것이 선정,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지혜

卽體之用故 慧不離定 卽用之體故 
즉체지용고 혜불리정 즉용지체고

定不離慧 定則慧故 寂而常知 
정불리혜 정즉혜고 적이상지

慧則定故 知而常寂如 
혜즉정혜 지이상적여

曹溪云 心地無亂自性定 
조계운 심지무란자성정

心地無癡自性慧 

심지무치자성혜

 

그래서 본체를 떠나지 않는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았고, 

작용을 떠나지 않은 본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선정은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도 항상 아는 것이고, 

지혜는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도 항상 고요한 것이다.

그래서 조계스님이‘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 자기 성품의 선정이요,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기 성품의 지혜이다.’한 말과 같다.

 

若悟如是 任運寂知 遮照無二 
약오여시 임운적지 차조무이

則是爲頓門箇者 雙修定慧也 
즉시위돈문개자 쌍수정혜야

若言先以寂寂 治於緣慮 後以惺惺 
약언선이적적 치어연여 후이성성

治於昏住 先後對治 均調昏亂 
치어혼주 선후대치 균조혼란

以入於靜者 是爲漸門劣機所行也 
이입어정자 시위점문열기소행야

雖云惺寂等持 未免取靜爲行則 
수운성적등지 미면취정위행즉

豈爲了事人 不離本寂本知 
기위요사인 불리본적본지

任運雙修者也 故曹溪云 自悟修行 
임운쌍수자야 고조계운 자오수행

不在於諍 若諍先後 卽是迷人 

부재어쟁 약쟁선후 즉시미인

 

만약 이처럼 깨달아서 고요함과 아는 것에 자유로워서 선정(遮)과 지혜(照)가 둘이 아니게 된다면

이것이 곧 돈문에 들어간 뛰어난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닦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고요함으로써 반연하는 생각들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깨어있는 정신으로 혼미함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면서, 선후를 따라 다스려 혼미함과 산란함을 가라앉혀 고요함에 들어가는 사람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그는 비록 깨어있음과 고요함을 평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고요함만을 취하는 수행을 면하지 못하니, 어

찌 깨달은 사람이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앎을 떠나지 않고 자유롭게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계스님은 ‘스스로가 깨쳐서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된 사람이다.’하였다.

 

則達人分上 定慧等持之義 不落功用 
즉달인분상 정혜등지지의 불락공용

元自無爲 更無特地時節 見色聞聲時 
원자무위 갱무특지시절 견색문성시

但伊 着衣喫飯時 
단이마 착의끽반시但伊 屎送尿時 但伊 
단이마 아시송뇨시 단이마

對人接話時 但伊 乃至行住坐臥 
대인접화시 단이마 내지행주좌와

或語或默 或喜或怒 一切時中一 
혹어혹묵 혹희혹노 일체시중일

一如是 似虛舟駕浪 隨高隨下 
일여시 사허주가랑 수고수하

如流水轉山 遇曲遇直 而心心無知 
여류수전산 우곡우직 이심심무지

今日騰騰任運 明日任運騰騰 
금일등등임운 명일임운등등

隨順衆緣 無障無碍 於善於惡 不斷不受
수순중연 무장무애 어선어악 부단불수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경지에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은 애써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무위라서 어떤 특별한 때도 없다.

즉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에도 그러하고, 

똥 누고 오줌 눌 때에도 그러하고, 남과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고, 

내지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언제든지 항상 그러하다.

마치 빈 배가 물결을 따라 올랐다 내렸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을 돌아나갈 때

굽이돌아 가기도 하고 바로 흘러가기도 하듯이 마음 마음이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무심하여 자유롭고, 내일도 무심하여 자유로워서 

온갖 반연을 따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고, 악을 끊거나 선을 닦는다는 생각도 없다.

 

■ 보조의 수심결 13- 걸림 없는 자유인

     선악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이는 반연을 잊고 없애는 공부하라.

質直無僞 視聽尋常 則絶一塵而作對 
질직무위 시청심상 즉절일진이작대

何勞遣蕩之功無 
하로견탕지공무

一念而生情 不假忘緣之力 

일념이생정 불가망연지력

 

 또한 순박 솔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보고 들음에 무심하여 한 티끌도 상대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감정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다.

 

然障濃習重 觀劣心浮 無明之力大 
연장농습중 관열심부 무명지력대

若之力小 於善惡境界 
반야지력소 어선악경계

未免被動靜互換 心不 淡者 不無忘 
미면피동정호환 심불염담자 불무망

緣遣蕩功夫矣 如云六根攝境 
연견탕공부의 여운육근섭경

心不隨緣 謂之定 心境俱空 
심불수령 위지정 심경구공

照鑑無惑 謂之慧 
조감무혹 위지혜

此雖隨相門定慧漸 
차수수상문정혜점

門劣機所行也 對治門中 不可無也 
문열기소행야 대치문중 불가무야

若掉擧熾盛 則先以定門 稱理攝散 心不隨緣 契乎本寂 
약도거치성 즉선이정문 칭리섭산  심불수연 계호본연 

若昏 沈尤多 則次以慧門 擇法觀空 
약혼 침우다 즉차이혜문 택법관공

照鑑無惑 契乎本知 以定治乎亂想 
조감무혹 계호본지 이정치호난상

以慧治乎無記 動靜相亡 對治 
이혜치호무기 동정상망 대치

功終 則對境而念念歸宗 遇緣而心心 
공종 즉대경이염염귀종 우연이심심

契道 任運雙修 方爲無事人 
계도 임운쌍수 방위무사인

若如是則眞可謂定慧等持 明見 佛性者也
약여시즉진가위정혜등지 명견 불성자야

 

그러나 업의 장애는 두텁고 습기는 무거우며,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으며, 선악의 경계에서는 마음이 동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을 잊고 없애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근이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해서 미혹됨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 한다.

이것은 비록 수상문(隨相門:경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공부) 의 선정과 지혜이고,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라지만 경계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망상이 들끓거든 먼저 선정의 이치대로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계합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많으면 이젠 지혜로써 법에 따라 공(空)함을 관조하여 미혹됨이 없음을 비추어서 본래의 앎에 계합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멍청함(無記)을 다스려서 동요함도 고요함도 서로 없어지고, 경계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경계에 대하여 생각 생각이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도에 계합하는 등 마음대로 안팎을 닦아나가야 비로소 걸림 없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 불성을 밝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한 말과 같다.”

  

問據汝所判 悟後修門中 
문거여소판 오후수문중

定慧等持之義 有二種 
정혜등지지의 유이종

一自性定慧 二隨相定慧 

일자성정혜 이수상정혜

 

물었다.

“스님의 말씀대로, 깨친 뒤에 닦는 방법을 보면,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 보조의 수심결 14- 한 생각의 망령된 정(情)도 일어남.

    돈문과 점문의 선정과 지혜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나요?

自性門則曰 任運寂知 
자성문즉왈 임운적지

元自無爲 絶一塵而作對 
원자무위 절일진이작대

何勞遣蕩之功 無一念而生情 
하로견탕지공 무일념이생정

不假忘緣之力 判云此是頓門箇者 
불가망연지공 판운차시돈문개자

不離自性 定慧等持也 
불리자성 정혜등지야

隨相門則曰 
수상문즉왈

稱理攝散 擇法觀空 
칭리섭산 택법관공

均調昏亂 以入無爲 
균조혼란 이입무위

判云此是漸門劣機所行也 
판운차시점문열기소행야

就此兩門定慧 不無疑焉 
취차양문정혜 불무의언

若言一人所行也 爲復先依自性門 
약언일인소행야 위부선의자성문

定慧雙修然後 
정혜쌍수연후

更用隨相門對治之功耶 
갱용수상문대치지공야

爲復先依隨相門 均調昏亂然後 以入自性門也 
위부선의수상문 균조혼란연후 이입자성문야

 

자기 성품이란 ‘걸림 없는 고요함과 아는 것이 원래 무위여서 하나의 티끌도 상대함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정(情)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다.’ 하고는

결론짓기를 ‘이것이 담박에 깨닫는 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은 ‘이치에 따라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법에 따라 공을 관조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에 들어간다.’ 하고

결론 짓기를 ‘이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은 뒤에 다시 수상문, 즉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경계를 다스려나가야 합니까.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공부로써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뒤에 자기 성품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若先依自性定慧則任運寂知 
약선의자성정혜즉임운적지

更無對治之功 
갱무대치지공

何須更取隨相門定慧耶 
하수갱취수상문정혜야

如將皓玉 彫文喪德 若先以隨 
여장호옥 조문상덕 약선이수

相門定慧 對治功成然後 
상문정혜 대치공성연후

趣於自性門則宛是漸門中劣機 
취어자성문즉완시점문중열기

悟前漸熏也 豈云頓門箇者 
오전점훈야 기운돈문개자

先悟後修 用無功之功也 
선오후수 용무공지공야

若一時無前後則二門定慧 
약일시무전후즉이문정혜

頓漸有異 如何一時竝行也 

돈점유이 여하일시병행야

 

만약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고요함과 아는 것이 자재하여 다시 대상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공력이 없을 텐데

어째서 수상문, 즉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마치 흰 옥에 무늬를 새김으로써 본바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먼저 상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얻어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완성한 뒤에 자기 성품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점차로 수행하는 열등한 근기가 깨닫기 이전의 점차로 닦아나가는 공부이니, 

어째서 돈문(頓門)의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되 노력 없는 노력을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만약 전후가 없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돈문과 점문의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가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 보조의 수심결 15 - 선정과 지혜에 의지해서 자유롭게 겸..

    -말을 따라 알려하면 의혹 생기고 뜻 얻고 말 잊으면 힐문 필요 없다.

 

則頓門箇者 依自性門 任運亡功 
즉돈문개자 의자성문 임운망공

漸門劣機 趣隨相門 對治勞功 
점문열기 취수상문 대치노공

二門之機 頓漸不同 優劣皎然 
이문지기 돈점부동 우열교연

云何先悟後修門中 竝釋二種耶 
운하선오후수문중 병석이종야

請爲通會 令絶疑情 

청위통회 영절의정

 

 즉 돈문의 사람은 자기 성품에 따라 걸림이 없으니 노력할 것이 없고, 

점문의 열등한 근기는 상을 따라서 대상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돈문과 점문의 두 문은 서로 근기가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방법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아울러 말씀하십니까. 

다시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答所釋皎然 汝自生疑 隨言生解 
답소석교연 여자성의 수언생해

轉生疑惑 得意忘言 不勞致詰 
전생의혹 득의망언 불로치힐

若就兩門 各判所行 則修自性定 
약취양문 각판소행 즉수자성정

慧者 此是頓門 用無功之 功竝運雙寂 
혜자 차시돈문 용무공지 공병운쌍적

自修自性 自成佛道者也 
자수자성 자성불도자야

修隨相門定慧者 此是未悟前漸門 
수수상문정혜자 차시미오전점문

劣機 用對治之功 心心斷惑 
열기 용대치지공 심심단혹

取靜爲行者 而此二門所行 頓漸各異 不可參亂也
취정위행자 이차이문소행 돈점각이 불가참란야

 

답하다.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다시 의혹이 생기고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힐문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 두 문에서 각기 수행할 바를 판단한다면,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자는 이 돈문의 노력없는 노력으로 두 가지 고요함, 즉 돈문의 고요함과 수상문의 고요함을 아울러 운용(運用)하여 자기 성품을 스스로 닦아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자는 깨치기 전의 점문의 열등한 근기로서 대상을 따라 다스리는 공력으로 인해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해서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두 문의 수행은 돈(頓)과 점(漸)이 다르니 혼동해서는 안된다.

 

然悟後修門中 兼論隨相門中對治者 
연오후수문중 겸론수상문중대치자

非全取漸機所行也 取其方便 
비전취점기소행야 취기방편

假道托宿而已 何故於此頓門 
가도탁숙이이 하고어차돈문

亦有機勝者 亦有機劣者 不可一例 
역유기승자 역유기열자 불가일예

判其行李也 若煩惱淡薄 身心輕安 
판기행리야 약번뇌담박 신심경안

於善離善 於惡離惡 不動 
어선이선 어악이악 부동

八風 寂然三受者 依自性定慧 任運雙修 
팔풍 적연삼수자 의자성정혜 임운쌍수

天眞無作 動靜常禪 成就自然之理 
천진무작 동정상선 성취자연지리

何假隨相門對治之義也  無病不求藥 
하가수상문대치지의야  무병불구약  

그러나 깨달은 뒤에 닦는 문에서 겸해서 상(相)을 따라 다스리는 법을 말한 것은 점문(漸門)의 근기가 닦는 것을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해서 길을 빌리고 숙소를 의탁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이 돈문에도 역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있으므로 한 가지 예로, 가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대해서도 무심하고, 

여덟 가지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고, 

세 가지 느낌에도 고요한 이는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하여 자유롭게 겸해서 닦아나가되 천진하여 조작됨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에 있으므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한 것인데

왜 상을 따라 다스리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 보조의 수심결 16

생각 생각에 의심이 없어 번뇌에 물..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생사의 세계에 자재로 울 수 없다.

 

雖先頓悟 煩惱濃厚 習氣堅重 
수선돈오 번뇌농후 습기견중

對境而念念生情 遇緣而心心作對 
대경이염념생정 우연이심심작대

被他昏亂 使殺昧却寂知常然者 
피타혼란 사살매각적지상연자

卽借隨相門定慧 不忘對治 均調昏亂 
즉차수상문정혜 불망대치 균조혼란

以入無爲 卽其宜也 

이입무위 즉기의야

 

그러나 비록 먼저 깨달았다 하더라도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면 생각 생각에 감정이 일어나고,

반연을 만날 적마다 마음은 대상을 만들어 혼침과 산란에 빠져서 고요함과 아는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곧 상을 따라 수행하는 선정과 지혜를 빌려서 다스려야 함을 잊지 말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雖借對治功夫 暫調習氣 
수차대치공부 잠조습기

以先頓悟心性本淨 煩惱本空故 
이선돈오심성본정 번뇌본공고

卽不落漸門劣機 汚染修也 
즉불락점문열기 오염수야

何者修在悟 前 則雖用功不忘 
하자수재오 전 즉수용공불망

念念熏修 着着生疑 未能無 
념념훈수 착착생의 미능무애

如有一物 在胸中 不安之相 
여유일물 애재흉중 불안지상

常現在前 日久月深 對治功熟 
상현재전 일구월심 대치공숙

則身心客塵 恰似輕安 雖復輕安 
즉신심객진 흡사경안 수부경안

疑根未斷 如石壓草 猶於生死界 
의근미단 여석압초 유어생사계

不得自在 故云 修在悟前 非眞修也 

부득자재 고운 수재오전 비진수야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빌려서 잠시 습기를 조절하지만 이미 마음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에 물들은 수행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이란 비록 공부를 잊지 않고 생각 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을 일으켜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익으면

몸과 마음과 객관의 대상이 편안해진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한 것 같으나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자재로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 닦는 것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悟人分上 雖有對治方便 念念無疑 
오인분상 수유대치방편 염념무의

不落汚染 日久月深 
불락오염 일구월심

自然契合天眞妙性 任運寂知 
자연계합천진묘성 임운적지

念念攀緣一切境 心心永斷諸煩惱 
념념반연일체경 심심영단제번뇌

不離自性 定慧等持 成就無上菩提 
불리자성 정혜등지 성취무상보리

與前機勝者 更無差別 則隨相門定慧 
여전기승자 갱무차별 즉수상문정혜

雖是漸機所行 於悟人分上 
수시점기소행 어오인분상

可謂點鐵成金 若知如是 
가위점철성금 약지여시

則豈以二門定慧  有先後次第二見之疑乎
즉기이이문정혜  유선후차제이견지의호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방편이 있지만

생각 생각에 의심이 없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가면 자연히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계합되어 고요하고 아는 것이 자유롭고, 

생각생각이 일체의 경계에 반연하면서도 마음마음은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되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루어 앞에 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상을 따르는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는 비록 점차로 수행해야 하는 근기를 가진 자가 행하는 것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쇠로 금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안다면 어찌 자성문(自性門) 수상문(隨相門)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 앞뒤의 차례가 있다는 두 가지 견해의 의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 보조의 수심결 17 - 자기에게로 돌아가 근본에 계합한다.

    글에 집착 말고 참뜻을 바로 깨닫고 자기에게 돌아가 근본에 계합해야

願諸修道之人 硏味此語 更莫狐疑 
원제수도지인 연미차오 갱막호의

自生退屈 若求丈夫之志 
자생퇴굴 약구장부지지

求無上菩提者 捨此奚以哉 切莫執文 
구무상보리자 사차해이재 절막집문

直須了義 一一歸就自己 契合本宗 
직수요의 일일기취자기 계합본종

則無師之智 自然現前 天眞之理 
즉무사지지 자연현전 천진지리

了然不昧 成就慧身 不由他悟 

료연불매 성취혜신 불유타오

 

바라건대, 모든 도 닦는 사람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해서

다시는 의심으로 인해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장부의 뜻을 가지고 최상의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결단코 글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참뜻을 깨달아서 일일이 자기에게 돌아가 근본에 계합한다면

스승 없는 지혜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고 천진한 이치가 분명하여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않으리라.

 

而此妙旨 雖是諸人分上 
이차묘지 수시제인분상

若非夙植般若種智 大承根器者 
약비숙식반야종지 대승근기자

不能一念而生正信 豈徒不信 
불능일념이생정신 기도불신

亦乃謗 返招無間者 
역내방독 반초무간자

比比有之 雖不信受 一經於耳 
비비유지 수불신수 일경어이

暫時結緣 其功闕德 不可稱量 
잠시결연 기공궐덕 불가칭량

如唯心訣云 聞而不信 
여유심결운 문이불신

尙結佛種之因 學而不成 
상결불종지인 학이불성

猶蓋人天之福 不失成佛之正因 
유개인천지복 불실성불지정인

聞而信 學而成 守護不忘者 
문이신 학이성 수호불망자

其功德 豈能度量 

기공덕 기능탁량

  

이러한 묘한 뜻은 비록 모든 사람에 해당되긴 하나

일찍이 지혜의 종자를 심은 대승의 근기가 아니면, 능히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다.

한갓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여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자가 허다히 많다.

그러나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한 번 귀를 스쳐 잠시라도 인연을 맺은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그러므로 <유심결>에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부처가 될 인연을 맺고, 배우고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렇게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서 이루고, 이를 잊지 않고 수호하는 사람의 그 공덕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追念過去輪廻之業 不知其幾千劫 추념과거윤회지업 부지기기천겁
墮黑暗入無間 受種種苦 타흑암입무간 수종종고
又不知其幾何 而欲求佛道 不逢善友 우부지기기하 이욕구불도 불봉선우
長劫沈淪 冥冥無覺 造諸惡業 장겁침륜 명명무각 조제악업
時或一思 不覺長▲ 其可放緩 시혹일사 불각장우 기가방왼 
再受前殃 又不知誰復使我 今値人生 재수전앙 우부지수부사아 금치인생
爲萬物之靈 不昧修眞之路 위만물지령 불매수진지로
實謂盲龜遇木 纖芥投鍼 실위맹구우목 섬개투침
其爲慶幸 曷勝道哉 기위경행 갈승도재

 

과거에 윤회하던 업을 돌이켜 보면 몇 천 겁을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온갖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또 불도를 구하고자 해도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여 그 얼마나 오랜 겁을 나고 죽는 바다에 빠져든 채 깨닫지 못하여 많은 악업을 지었던가. 때때로 한 번씩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긴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또 게으름을 피워 지난 날의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로 하여금 지금 인생으로 태어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진리의 길을 닦도록 하였는가. 실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나고, 작은 겨자씨가 바늘에 꽂힘과 같으니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 보조의 수심결 18-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

   -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살펴라

 

我今若自生退屈 或生懈怠 
아금약자생퇴굴 혹생해태

而恒常望後 須臾失命 退墮惡趣 
이항상망후 수유실명 퇴타악취

受諸苦痛之時 雖欲願聞一句佛法 
수제고통지시 수욕원문일구불법

信解受持 欲免辛酸 豈可復得乎 
신해수지 욕면신산 기가부득호

到臨危 悔無所益 願諸修道之人 
급도임위 회무소익 원제수도지인

莫生放逸 莫着貪淫 如救頭然 
막생방일 막착탐음 여구두연

不忘照顧 無常迅速 身如朝露 
불망조고 무상신속 신여조로

命若西光 今日雖存 明亦難保 
명약서광 금일수존 명역난보

切須在意 切須在意 

절수재의 절수재의

 

내가 지금 만일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악도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한 구절 불법을 들어서 믿고, 알고, 받들어서 고통을 면하고자 해도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위태로운데 이르러서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원컨대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살피고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라.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석양과 같으니, 

비록 오늘 살았다 해도 내일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간절히 마음에 새겨라.

 

且憑世間有爲之善 亦可免三途苦輪 
차빙세간유위지선 역가면삼도고륜

於天上人間 得殊勝果報 受諸快樂 
어천상인간 득수승과보 수제쾌락

況此最上乘甚深法門 
황차최상승심심법문

暫時生信 所成功德 不可以比喩 
잠시생신 소성공덕 불가이비유

說其少分 如經云 
설기소분 여경운

若人以三千大千世界七寶 
약인이삼천대천세계칠보

布施供養爾所世界衆生 
보시공양이소세계중생

皆得充滿 又敎化爾所世界一切衆生 
개득충만 우교화이소세계일체중생

令得四果 其功德 無量無邊 
영득사과 기공덕 무량무변

不如一食頃 正思此法 所獲 
불여일식경 정사차법 소획

功德 是知我此法門 最尊最貴 
공덕 시지아차법문 최존최귀

於諸功德 比況不及 

어제공덕 비황불급

  

또 세상의 유위(有爲)의 선을 따라도 삼악도의 고통을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온갖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의 깊은 법문이겠는가. 

잠시만 믿더라도 그 공덕은 어떤 비유로도 말할 수 없다. 

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세상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여 다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사과(四果)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다.

그러나 밥 한 그릇 먹는 잠깐 동안만이라도 이 법을 바로 생각하여 얻는 공덕만은 못하다.’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이 가장 높고 귀하여 모든 공덕에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故云經 一念淨心是道場 
고운경 일념정심시도량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竟碎爲塵 
승조항사칠보탑 보탑필경쇄위진

一念淨心成正覺 願諸修道之人 
일념정심성정각 원제수도지인

硏味此語 切須在意 
연미차어 절수재의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차신불향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道場)이니,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칠보탑은 마침내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하였다. 

원컨대 수도하는 모든 사람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

 

■ 수심결 19 - 보배를 얻으려거든

    -보배 있는 곳 알고도 구하지 않겠는가?

今若不修 萬劫差違 今若强修 
금약불수 만겁차위 금약강수

難修之行 漸得不難 功行自進 
난수지행 점득불난 공행자진

嗟夫 今時人 飢逢王饍 不知下口 
차부 금시인 기봉왕선 부지하구

病遇醫王 不知服藥 
병우의왕 부지복약

不曰如之何如之何者 
불왈여지하여지하자

吾末 如之何也已矣 

오미 여지하야이의

 

지금 만약 닦지 않으면 만겁에 어긋나고, 지금 만약 억지로라도 닦으면

닦기 어려운 수행도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공행(功行)이 저절로 나아갈 것이다. 

슬프다, 지금 사람은 배가 고프면서도 맛난 음식을 보고 먹을 줄을 알지 못하고, 

병이 들어 의사를 만났어도 약을 먹을 줄 모르는구나. 

참으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하며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

  

且世間有爲之事 其狀可見 其功可驗 
차세간유위지사 기상가견 기공가험

人得一事 歎其希有 我此心宗 
인득일사 탄기희유 아차심종

無形可觀 無狀可見 言語道斷 
무형가관 무상가견 언어도단

心行處滅 故天魔外道 毁謗無門 
심행처멸 고천운외도 훼방무문

釋梵諸天 稱讚不及 
석범제천 칭찬불급

況凡夫淺識之流 其能髣髴    

황범부천식지류 기능방불

 

 또 세상 유위(有爲)의 일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있고 그 공덕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지 일만 얻어도 희귀하다고 감탄한다. 

그러나 나의 이 마음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마와 외도들이 훼방하려 해도 길이 없고

제석천과 범천의 모든 하늘이 칭찬하려 해도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얄팍한 범부의 무리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悲夫井蛙 焉知滄海之闊 
비부정와 언지창해지활

野干何能師子之吼 故知末法世中 
야간하능사자지후 고지말법세중

聞此法門 生希有想 信解受持者 已於 
문차법문 생희유상 신해수지자 이어

無量劫中 承事諸聖 植諸善根 
무량겁중 승사제성 식제선근

深結般若正因 最上根性也 
심결반야정인 최상근성야

故金鋼經云 於此章句 能生信心者 
고금강경운 어차장구 능생신심자

當知是人 已於無量佛所 種諸善根 
당지시인 이어무량불소 종제선근

又云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우운위발대승자설 위발최상승자설

 

슬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법 세상에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한 생각을 내어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겁 동안 모든 성인을 받들어 섬겨서 모든 선근을 심고

지혜의 바른 인연을 깊이 맺은 최상의 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 ‘이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은 것이다.’하였고, 

또 ‘이 법은 대승의 마음을 낸 사람과 최상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하였다.

 

願諸求道之人 莫生怯弱 
원제구도지인 막생겁약

須發勇猛之心 宿劫善因 未可知也 
수발용맹지심 숙겁선인 미가지야

若不信殊勝 甘爲下劣 生艱阻之想 
약불신수승 감위하열 생간조지상

今不修之 則縱有宿世善根 今斷之故  
금불수지 즉종유숙세선근 금단지고

彌在其難 展轉遠矣 今旣到寶所 
미재기난 전전원의 금기도보소

不可空手而還 一失人身 萬劫難復 
불가공수이환 일실일신 만겁난복

請須愼之 豈有智者 知其寶所 
청수신지 기유지자 지기보소

反不求之 長怨孤貧 
반불구지 장원고빈

若欲獲寶 放下皮囊 

약욕획보 방하피낭

 

원컨대 도를 구하는 사람은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부디 용맹스런 마음을 내어야 한다.

숙세에 맺은 거룩한 인연 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처럼 수승한 근기를 믿지 않고 스스로 못났다고 하여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금생에 닦지 않으면 비록 숙세에 선근이 있다 해도 지금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되므로 더욱 어려워지고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 있는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회복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부디 삼가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보배가 있는 곳을 알고도 그것을 구하지 않다가 오래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하겠는가. 만약 보배를 얻으려거든 그 가죽주머니를 놓아버려라.”

 

https://blog.naver.com/ancit0/221287958481

 

수심결(修心訣) 해석

우리의 선조이신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께서 저작하신 마음을 닦는 비결(수심결修心訣)에 대한 해...

blog.naver.com

 

문광스님

https://www.youtube.com/watch?v=sZ_QiQwvVhI 

 

 

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A%B2%BD%EA%B0%81

 

구경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경각(究竟覺, ultimate enlightenment, final enlightenment, supreme enlightenment)은 불교의 수행이 완성되어 증득(證得)하게 된 완전한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곧 부처의 상태

ko.wikipedia.org

구경각(究竟覺, ultimate enlightenment,[1] final enlightenmentsupreme enlightenment[2])은 불교의 수행이 완성되어 증득(證得)하게 된 완전한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곧 부처의 상태를 이룬 것이나 부처가 되는 자리를 뜻한다.[3]

구경각을 가리키는 다른 낱말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 보리(菩提) 또는 (覺), 또는 번역하여 깨달음
  • 묘각(妙覺) 또는 번역하여 묘한 깨달음[4]
  • 묘각지(妙覺地) · 묘각해지(妙覺海地) · 묘과(妙果)[5][6]
  • 적멸심(寂滅心) · 적멸심묘각지(寂滅心妙覺地)[7][8]
  • 보리(菩提) · 대보리(大菩提) 또는 번역하여 큰 깨달음[9]
  • 반야(般若) · 마하반야(摩訶般若)[10][11]

여러 불교 종파와 경전에서는 구경각을 깨우치게 되는 선정(禪定)도 거론하는데 예컨대 《화엄경》과 화엄종의 교의에 따르면,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면 비로소 구경각을 깨우쳐 부처가 된다. 《금강경》에 따르면,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의거해, 《수능엄경》에 따르면,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의거해 구경각을 깨치게 된다.

대승불교의 주요 논서 중 하나인 《대승기신론》에서는 시각(始覺), 즉 수행을 통해 증득한 깨달음의 경지의 차이를 불각(不覺) · 상사각(相似覺) · 수분각(隨分覺) · 구경각(究竟覺)의 4각(四覺)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2][13]

 

탄허스님의 교육관 

https://www.youtube.com/watch?v=sZ_QiQwvVhI 

 

 

https://www.youtube.com/watch?v=EGjcnv40LZY&t=1951s 

 

목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845

 

직지심체요절권하(直指心體要節下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civil58.tistory.com/3285

 

佛祖直指心體要節 註解

佛祖直指心體要節과거칠불(過去七佛) 1. 비바시불(毘婆尸佛)은 정관(淨觀)이니 이것은 정신수양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고요히 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 좋으니 무엇이 좋으니 해도 정

civil58.tistory.com

 

 

 

https://civil58.tistory.com/3285?category=787260

 

佛祖直指心體要節 註解

佛祖直指心體要節 과거칠불(過去七佛) 1. 비바시불(毘婆尸佛)은 정관(淨觀)이니 이것은 정신수양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고요히 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 좋으니 무엇이 좋으니 해도 정

civil58.tistory.com

 

 

https://civil58.tistory.com/3291

 

佛祖直指心體要節 / 過去七佛 偈頌

佛祖直指心體要節過去七佛■ 제1존 비바시불- 毘婆尸佛身從無相中受生 신종무상중수생하니 猶如幻出諸形像 유여환출제형상이로다 幻人心識本來無환인심식본래무하니 罪福皆空無所住죄복개

civil58.tistory.com

 

https://civil58.tistory.com/3289

 

佛祖直指心體要節 / 祖師 偈頌 2

佛祖直指心體要節 三十三 祖師 偈頌■ 제8조 불타난제존자- 佛陀難提尊者虛空無內外 허공무내외하니 心法亦如此심법역여차라 若了虛空故약료허공고하면 是達眞如理시달진여리이니라허공은

civil58.tistory.com

 

https://civil58.tistory.com/3288

 

佛祖直指心體要節 / 祖師 偈頌 3

佛祖直指心體要節 三十三 祖師 偈頌■ 제15조 가나제바존자- 迦那提婆尊者 本對傳法人 본대전법인하야 爲說解脫理 위설해탈리나 於法實無證 어법실무증하니 無終亦無始 무종역무시로다본래

civil58.tistory.com

 

https://civil58.tistory.com/3287

 

佛祖直指心體要節 / 祖師 偈頌 4

佛祖直指心體要節 三十三 祖師 偈頌■ 제22조 마나라존자- 摩拏羅尊者 心隨萬境轉 심수만경전하니 轉處實能幽 전처실능유니라 隨流認得性 수류인득성하니 無喜亦無憂 무희역무우로다마음이

civil58.tistory.com

 

https://civil58.tistory.com/3286

 

佛祖直指心體要節 / 祖師 偈頌 5

佛祖直指心體要節 三十三 祖師 偈頌禪宗의 初祖 ■ 제28조 보리달마존자- 菩提達磨尊者 吾本來玆土 오본래자토는 傳法救迷情 전법구미정이라 一花開五葉 일화개오엽하니 結果自然成 결과자연

civil58.tistory.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