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9j-mgquJ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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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스님강설 金剛經

http://blog.naver.com/badre/30109864952

 

正信希有分 第六

정신희유분 제육

  

須菩提-白佛言하사대

수보리-백불언

  

世尊하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고 生實信不이까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佛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하야

불고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當知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  

  

五佛에 而種善根이요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이니 聞是章句하고 

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     문시장구    

 

乃至一念이라도 生淨信者니라 須菩提야 如來-悉知悉見是諸衆生이

내지일념       생정신자     수보리   여래-실지실견시제중생   

  

得如是無量福德이니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득여시무량복덕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이며 無法相이며 亦無非法相일새니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무법상     역무비법상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즉위착아인중생수자   하이고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   불응취법         

  

不應取非法이니 以是義故로 如來常設 汝等比丘하되

불응취비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니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가하니라.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제6 말세에도 바른 신심 있다(정신희유분)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어,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실다운 신심을 낼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부처님이 가신 뒤 후오백세에 계를 받아 지니고 복을 닦는 수행자가 있어서 이 같은 말과 글귀에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기리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 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한 사람이니,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거룩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 짓는 것을 다 아시고 보시느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은 다시는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생각>. <그릇된 법이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일 마음에 지키는 것이 있으면 곧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며, 만일 <법이란 생각>을 지켜도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며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을 지켜도 곧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정법을 지키지도 말고 그릇된 법을 지키지도 말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는 알라. 내가 말한바 법은 뗏목과 같으니 정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하였느니라.”

  

Section VI. Rare is true faith

 Subhuti said to Buddha: World-honoured one, will there always be men who will truly believe after coming to hear these teachings?

Buddha answered: Subhuti, do not utter such words! At the end of the last five-hundred-year period following the passing of the tathagata, there will be self-controlled men, rooted in merit, coming to hear these teachings, who will be inspired with belief. But you should realize that such men have not strenghtened their root of merit under just one buddha, or two buddhas, or three, or four, or five buddhas, but under countless buddhas; and their merit is of every kind. such men, coming to hear these teachings, will have an immediate uprising of pure faith, Subhuti; and the tathagata will recognize them. yes, he will clearly perceive all these of pure heart, and the magnitude of their moral excellences. Wherefore? it is because such men will not fall back to cherishing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they will neither fall back to cherishing the idea of things as having intrinsic qualities, nor even of things as devoid of intrinsic qualities. 

Wherefore? because if su men allowed their minds to grasp and hold on to anything they 

would be cherishing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and if they grasped and held on to the notion of things as having intrinsic qualities they would be cherishing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likewise, if they grasped and held on to the notion of things as devoid of intrinsic qualities they would be cherishing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so you should not be attached to things as being possessed of, or devoid of, intrinsic qualities.

This is the reason why the tathagata always teaches this saying: my teaching of the good law is to be likened unto a raft. the buddha-teaching must be relinquished; how much more so misteaching!

  

[科 解]

  우리가 만일 육신의 오관세계(五官世界), 물질세계만을 본위로 하여 3차원세계에서만 산다면 4차원세계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고 불법과는 거리가 먼 생활에 떨어집니다. 예컨대 육신 가지고는 장래를 예언할 수 있는 관능(官能)은 없지만, 정신이 무아지경(無我地境)에 들어서면 온갖 것이 다 보이고 자유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문을 닫아걸었는데 육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든지, 큰 종속에 집어넣었는데도 쇠종을 뚫고 육안으로는 지나간 줄도 모르는 새 어느 틈에 나가는 등입니다. 이런 것은 다 4차원세계에 들어서면 허다하게 많습니다.

  현실세계란 이것이 근본적으로 꿈이고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상(假相)으로 있는 것이니 법당은 불에 타면 재만 남는다는 생각. 인식. 그 관념 때문에 불이 붙는 것입니다. 3차원의 세계는 환상이고 그것은 다 생각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 없는데 들어서면 거기서 4차원세계가 벌어지는데 여기서 더욱 더 들어가면 육신으로 살 때 오관에만 의지했던 인간 능력을 초월하여 무한대한 절대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4차원세계 정도는 초학자(初學者)의 체험입니다. 나는 불교의 내용을 사의상학(思議上學). 사의하학(思議下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생각하기 이전, 마음이 생각을 내기 전은 <사의상학>입니다. 곧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말합니다. <사의하학>은 세상에서 말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하학(形而下學)이 다 포함되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다 생각 밑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의상학(思議上學)에서부터는 불교 냄새가 조금 납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아직 마음의 본바탕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4차원의 세계가 있다고 하여 전혀 없었던 것, 새로 발명한 것처럼 야단입니다. 4차원세계에 들어서서 시골에 있는 집이 보인다, 친구들이 지금 앉아서 밥 먹고 얘기하는 것이 보이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지만 이것은 아직 불교의 초입(初入)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천차원(千次元), 만차원(萬次元)의 무아경에 들어가서 생각의 주체인 마음의 본연자세(本然姿勢)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을 깨달으면 주객(主客)을 초월하게 되어 <나라는 생각>(我相). <남이라는 생각>(人相). <중생살이라는 생각>(衆生相). <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을 여의게 되는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 육체가 <나>가 아니라는 진리를 믿는 것이 바른 신심(正信)입니다. 불멸후(佛滅後) 2천 5백년의 말세에도 다생으로 부처님을 따라 배운 이들이 있어서 이와 같은 바른 신심(正信)으로 계를 지키고 큰 복을 닦으며 금강경의 진리를 읽고 거룩한 신심을 내어 무량한 복덕을 짓는 일은 심히 희유(希有)하다는 뜻에서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解 義 이제까지 말씀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보리존자가 의문을 일으킵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 다 허망할 뿐이니 모든 현상이 현상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까지의 법문을 듣고 육신 본위로만 사는 중생들이 육신이 내가 아니라는 그 법문을 얼른 알아듣고 믿음을 낼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파유중생(頗有衆生)에 파(頗)는 자못 파자인데 행여나, 진정 그런 중생이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득문여시언설장구(得聞如是言說章句)는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이와 같은 말과 글을 듣고 나서”란 뜻이니, <언설장구>는 곧 경문(經文)을 가리키며 말과 글을 가리키는데 말이 세련(洗練)되면 그것이 글이고 글이 서투른 것이 말이어서 마치 시와 소설이 다르듯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됐을 때 부처님이 이런 연설이나 이런 글자를 보고 이 금강경을 읽어 보고 천독만독(千讀萬讀) 자꾸 읽어서라도 “그것이 참말이구나.”하고 “실다운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정말 있을까.”(生實信不)하는 의심을 냈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쓸데없는 소리였구나, 하나도 사실 없는 헛소리를 듣는 것이었구나, 마치 미친 사람이 술을 먹고 잠들어서 잠꼬대하는 꿈속의 헛소리였구나, 하고 느끼겠습니까.” “이제까지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소리라,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나 아닌 다른 사람 얘기만 하는 도서관의 서적은 모두 다 미친 사람 술 먹고 자다가 헛소리하는 잠꼬대 녹음에 불과한 것이었구나. 그런 걸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 참말로 가치가 있는 진리의 실재 내용이 있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구나 하고 그런 신심을 낼 사람이 있겠습니까.”하고 부처님께 의문을 여쭈었습니다.

  

原 文 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解 義 수보리존자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그렇지 않다고 끊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 너 함부로 하지 말라(莫作是說) 부처님이 다른 세상으로 가신 뒤에, 불멸(佛滅)한 뒤에 부처님이 육신의 몸뚱이를 버리고 열반적멸(涅槃寂滅)의 부처님 세계에 멸도(滅度)하신 뒤에(如來滅後) 다섯 번째 오백세 되는 그 때에도(後五百歲) 계를 잘 받아서 목숨처럼 지키어 큰 복을 짓는 갸륵한 수행자가 있어서(有持戒修福者) 이 금강경의 이런 거룩한 법문을 듣든지 읽어 보고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라는 법문 듣고 깨치듯이 ‘참 그렇겠구나’하는 신심(信心)을 낼 것이다.(於此章句 能生信心). 그리고 ‘아 참말로 진실한 말이구나 이런 내용 이런 말씀이었구나. 그것은 정말 한 말 한 글자도 거짓말이 없구나’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후오백세(後五百歲)란 말은 오백년을 단위로 하여 제1 오백세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5백년까지를 가리키고, 제2 오백세는 부처님 가신 뒤 5백년에서부터 천년까지를 가리키고, 제3 오백세는 천5백년까지 제4 오백세는 부처님 멸도(滅度)하신 뒤 2천년까지, 제5 오백세는 불멸(佛滅) 2천 1년부터 2천 5백년까지에 해당합니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을 지으려는 수행인이라면 계를 바로 지키지 않고서는 큰 복을 성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직자라고 하면 남이 먹기 좋아하는 음식도 안 먹고 좋은 의복도 안 입고 좋은 데 거처(居處)도 안 하고 그리고 앉아서 밤에 잠도 안자고 저녁도 굶고 하루 한 끼만 먹고 밤새도록 정진(精進)해야 남다른 수행도 되고 남들이 고마운 생각을 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 하고 공부도 잘 안하고 하면 하나도 고맙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 곧 ‘계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 다 먹어서 말하자면 고기를 먹는다, 파. 마늘 먹는다 하면 영양 있고 자극성식물(刺戟性食物)이고 양기를 돕게 되기 때문에 비구나 비구니가 혼자 살 수 없게 됩니다. 몸뚱이는 뚱뚱하게 살이 찌고 정력이 강해지니 공부도 안 되고 번뇌가 막 일어납니다. 영양가치 있는 음식 먹어서 피가 자꾸 들끊고 술 같은 것 마셔 놓으면 온갖 생각이 나를 막 흔듭니다. 그래서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 강해지니 한번 흔들어 어지럽혀 놓고 나서 나중 술 깬 뒤에 생각해 봐야 후회막심하고 이런 일이 생겨 놓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다 먹으면 독신생활(獨身生活)도 안 되지만 억지로 참고 한다 하더라도 번뇌를 참느라고 공부도 안 됩니다.

  수도하는 데 제일 어려운 것이 남녀 성 문제인데 음식 같은 것은 좀 안 먹으면 참을 수 있지만 먹을 것 다 먹어 놓으면 이성끼리 만나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성끼리 아무도 없는 데서 만나면 할 수 없습니다. 성이란 본래 동물적인 본능일 뿐 눈도 코도 없고 머리꼬리도 없는 것이니 거기 이끌리면 동물입니다. 극단(極端)으로 말하면 애비와 딸을 이성이 하나도 없는 무인도에 갔다 놓으면 어린애라도 키워 가지고 손주를 낳습니다. 애비와 딸과 손주를 낳으면 그것은 딸이 낳았으니 손주고 애비가 낳았으니 자식이고 손주도 아니고 딸도 아닙니다.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충동 안 받으려면 애당초 영양가치 있는 것 먹지 말고 자극성 있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환경에 주의하고 계율에 맞추어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야 큰 복을 닦을 수 있지 계를 지키지 않고는 번뇌 망상에 끄달리게 되고 탐진치 삼독으로 사는 중생놀음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므로 큰 복을 지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를 안 지키고도 복을 지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계를 가지고 짓는 복에 비교해 볼 수가 없는 작은 복입니다. 이런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가 금강경의 이런 구절을 읽어 보고서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이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같은 구절을 읽어 보고서(於此章句) 능히 신심을 내어 “참말로 진실한 진리였구나. 한 글자 한 마디도 진리 아닌 것이 없구나”하고 깨달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能生信心以此爲實)

  

原 文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 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聞是章句 乃至一念 生 淨信者

解 義 당지시인(當知是人)하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 두라.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세 부처. 네 부처. 다섯 부처님이 출현(出現)하실 때마다 태어나서 이종선근(而種善根)이라. 예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부처님께 법도 묻고 같이 공부도 많이 해서 착한 바탕을 많이 심었을 뿐이 아니라.” 착한 일 하는 것은 착한 뿌리가 되고 악한 일 하는 것도 뿌리가 된다는 말은 하나의 바탕이 되고 습관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한 부처님께만 뵈옵고 따라 배우면서 하나도 빼지 않고 듣고 그걸 다 기억하면 전능만능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부처님만 친견하고 신행(信行)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한 다섯 부처님을 이 세상에서 만났다면 그건 참 큰 복 지은 사람입니다. 다섯 부처님한테만 이런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한두 부처님 계신 데서가 아니라 이미 오랜 과거세(過去歲)부터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已於無量千萬佛所) 그 많은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고 부처님 가르쳐 주시는 대로 목숨 내 놓고 철저히 좋은 수행을 했습니다(種諸善根). 부처님 직접 만나 놓으면 얼마나 신심이 나겠습니까. 휘발유가 불을 만난 것처럼 우리의 마음바탕이 그만 환 하게 드러납니다. 후오백세(後五百歲)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많은 부처님 앞에서 많은 선근(善根)을 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천 5백년이나 지난 말세에도 어려운 불법을 듣고 “그게 참말이구나.”하고 바른 신심을 내어 바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여러분들이 금강경의 어려운 법문을 듣기 위해 벌써 두해가 넘었는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게 나오는 신심을 보고 정말 고맙고 거룩하게 느껴 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지방에 가서 법문을 못하게 되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 정신자(聞是章句 乃至一念 生 淨信者)니라. 금강경 가운데 어떤 구절을 듣든지 한 생각이라도 청정한 신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바로 믿는다는 정신(淨信)은 깨끗한 신심을 낸다는 말이니 이 마음에 조금도 부처님 뜻을 빼 놓지 않고 다 받아들인 것을 정신(淨信)이라 합니다.

  

原 文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 福德

解 義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신령한 마음을 눈으로 다 아시고 다 보시느니라(如來悉知悉見). 이런 중생들이 곧 다생(多生)으로 부처님 처소(處所)에 인연을 맺어서 이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청정한 신심을 내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이 모든 중생들이 곧 말세에 가도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 있는 것이 아니고 선근중생(善根衆生)들이 인연 있는 곳에 태어나 불법을 받아 지니고 거룩한 신행을 닦는 중생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중생들이(是諸衆生) 무량한 복덕을 얻는 것을(得如是無量福德) 여래께서 다 아십니다. 금생에 이 중생이 죽어서 어디로 가고 내생에 공부를 많이 하여 그 후세에 가서는 어떻게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걸 부처님은 낱낱이 다 아십니다. 내생에는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서 글을 어디서 배우고 어떤 스님을 만나 출가(出家)하고 어디서 발심하여 어떻게 수행한다는 것을 활동사진 필름 들여다보는 것처럼 환히 듣고 보고 하시는 데, 그것은 부처님은 4차원. 천차원(千次元). 만차원(萬次元). 무한차원(無限次元)의 세계에 들어가서 시간공간을 자유자재하게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일일이 지나온 일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본인보다 더 잘 아십니다.

  

原 文 何以故 是諸衆生 無 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解 義 이 모든 중생들이 아(我)가 있어서 나라는 생각, 곧 아상(我相) 육체가 나거니 하는 그런 망상인데 이 생각이 앞서 가지고 제가 잘났다는 것이고 육신인 나 본위로 모든 것을 내세워서 남한테 안 지려고 싸우고 칼부림하고 합니다. 금강경을 아는 사람은 아상이 없어서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없고 동시에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생각이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 조건이 있게 됩니다. 난 공산주의다, 난 자본주의다, 난 기독교다, 난 불교다, 그런 게 붙습니다.

  그런데 3천 5백년 뒤에 금강경의 사구게에 발심한 이런 중생들은 아상도 없고 또 인상(人相)도 객관도 없습니다. 인상은 남이라는 소리도 되지만, 사회환경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 육체가 나인데 육체 밖에 객관을 인정하는 것이 인상 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시집가 봐야겠다. 자식 낳아야겠고 그러면 돈도 벌어야겠다.”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니 곧 살림살이 입니다. 또 중생들은 금방 죽는 건 생각 안 하고 죽게 되면 다 끝날 것인데 공연히 그 사람과 감정을 맺고 내가 공연히 마음 안 좋게 해 주었구나 이런 것이 모두 죽을 때 후회가 됩니다. 그러니 그거 천년 만년 살 줄 알고 생각하는 것, 오래 살려고 좋은 약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이런 법문(法門)을 처음 듣고 비로소 “아 진리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이런 법문 이제야 만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법상(法相)입니다. 그런 건 진리가 아니고 불법(佛法)만이 정법(正法)이니까 그것만 지켜야겠다는 마음도 없고 불법 믿는다는 생각도 없는 것 그것을 무법상(無法相)이라 합니다. 비법상(非法相)이란 건 “잘못된 법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법이라고 지키려는 법이 아니다” “법이 없는 게 참말 법이구나 하는 생각”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니 또한 법 아닌 것, 잘못 생각하는 것도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을 무비법상(無非法相)이라고 합니다.

  후오백세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깨끗한 신심을 낸 사람은 이렇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이 네 상(四相)과 <법이란 생각>(法相) <그릇된 법이란 생각>(非法相)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복덕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原 文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解 義 근본적으로 마음에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중생들이 마음 가운데 무언가 하나 고집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마음에 간직하는 게 있다면(若心取相) 아상, 곧 나라는 생각에 끄달리게 되고 따라서 사상에 끄달리게 되는 까닭이니, 그렇게 되면 사상이 따라오게 되므로 중생을 면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금강경의 이런 글귀를 듣고 보더라도 청정한 신심을 낼 수 없습니다. 사상이 다 없어져서 조건 없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으로 중생을 위해 봉사해야만 한량없는 복만 짓고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집착이 있고 선택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걸려서 결국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굴레를 뒤집어쓴 중생에 떨어지며, 그러다 보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의 삼악도(三惡道)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卽着我人衆生 壽者).

  

原 文 何以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 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解 義 또 마음속에 이것이 참다운 진리다, 이것이 바른 진리고 정법(正法)이란 생각을 가져도 안 됩니다. 불법도 법입니다. “불법 그게 옳구나.”하는 생각을 하면 불법에 이끌리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도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불법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불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고 그러다 보니 사상에 이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사람 미워하는 생각을 내가 내 버렸다 하더라도(若取法相) “나는 분함을 내버렸다”하는 생각 그것이 아(我)가 되어 거기에 대한 중생상이 생기고 수자상이 따라오게 됩니다(卽着我人衆生 壽者).

  법 아니란 생각,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있어도 역시 비법이란 생각을 일으킨 내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남이 있고 하여 사상이 있게 되는 때문에 그릇된 법이란 생각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런 것은 그릇된 법이다”하는 생각이 있으면(若取非法相) 상대적으로 옳은 법이 있고 옳은 법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남이 있게 되어 사상에 떨어집니다(卽着我人衆生 壽者).

  그러므로 중생을 면하고 생사를 벗어나려면 그래서 부처가 되어 우주의 주인공(主人公)이 되려면 정법도 집착하지 말고 그른 법에도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이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불법에 취하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아야 하며 정법이 아니라는 생각 그릇된 법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까지도 초월하는데 그 밖에 불법 아닌 것을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어떻게 하든지 좀 더 오래 살려고,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금방 죽을 것은 모르고 “백 년은 살겠지”안심하고는 허둥지둥(貪慾)으로 온갖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중생들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미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아 놓았으니 그 사형이 언제 집행(執行)될는지 모른다. 오늘 밤중에 갈지 내일 새벽에 갈지 내일 낮에 갈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없는 사람 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선근(善根)입니다.

  부처님께 이런 법문 듣고 이런 선근(善根) 심어서 이제 아상만 없애면 그 밑에 세 가지 상(相)은 저절로 다 없어집니다. <나>라는 생각만 없으면 남보고 남이라 하는 생각도 없게 되고 아무 생각 없이 대하니 중생이란 생각도 없어집니다. 이 몸이 <나>라 하니까 마음에 의. 식. 주가 필요하지 마음은 밥도 옷도 필요 없고, 남편도 아들딸도 필요 없고 그런 이 <나>는 말하는 이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런 법문을 듣고 확실히 알아들으면 벌써 나란 생각, 곧 아상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여러 백천억 부처님을 섬기다 보니 “아 육체가 내가 아니구나 이 말하고 말 듣는 마음자리가 바로 나구나!”하고 깨달아지고 하는 그게 선근입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고 또 중생의 업을 안 만들려고 좋은 일은 다 하는데 계지키는 것만 해도 큰 복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위에 착한 일 또 다 합니다. 부처님 법 만나 법문 듣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없어져야 그런 사람이 됩니다.

  

原 文 以是義故 如來常設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解 義 이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以是義故)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如來常設) “너희들 비구. 비구니나 선남선녀는(汝等比丘) 내가 설명한 법은(知我說法) 뗏목에 비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줄을 알아야 한다(如筏喩者)” 고 하셨는데 이것은 불법도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불법 자체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강물 건너는데 떼를 많이 사용 했습니다. 큰 나무를 연쇄적으로 연결을 시켜서 떼를 만들어 가지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쇠로 좋게 만든 요사이의 큰 배에 비유해도 좋고 군함이나 큰 기선으로 봐도 됩니다. 하여간 강은 그 폭이 넓어서 헤엄쳐 건너갈 수 없고 꼭 건너는 가야겠고 하니 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는 강을 다 건너고 나서까지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아무리 고마워도 강 건너 저 언덕에 왔으면 배를 버리고 가야 합니다. 배 타는 게 목적이 아니고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고 집에 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서너 살 먹은 애기를 앉혀 놓고 밝은 달밤에 “저 달 좀 봐라”하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이면 어린아이들은 달을 보지 못하고 엄마 손가락만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49구년 설법은 네 마음 깨치라고 목이 터져라 하고 일러 줬는데도 그 목소리만 따라 다니며 “아, 깨쳐라, 그 소리구나!” 그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에 끌려 다니는 것이 마치 소가 코에 끌려 산이나 들이나 끄는 대로 가듯이 말에 끌려 다니기만 하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자식 저 달을 볼 것이지 왜 내 손가락만 쳐다보느냐고 때려 줘봐야 울기만 하지 달을 볼 생각은 못 냅니다. 엿을 주며 달래 봐도 “저기 저기” 하는 소리밖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말로 가리킨 그것, 곧 팔만대장경에 있는 불법도 역시 남겨 두어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자기는 이미 깨쳤다 해도 후대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에서 실제로 깨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전의 말과 글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는 정도일 뿐, 실제의 달 자체는 아니며,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경이고 법일 뿐, 저 언덕의 목적지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습니다.

  불법인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法尙應捨) 어찌 하물며 법 아닌 것, 무당법, 삿된 법, 그릇된 법 그걸 의지해서 점을 친다든지 관상보고 사주보고 손금보고 하는 사람이 무슨 불교하는 사람이겠느냐. 또한 이 세상은 모두 허무한 존재이고 하나의 물거품이고 이것이 꿈인데 이것을 어찌 참말이라 하고 육신이 내라고 구집하겠느냐(何況非法).

  이와 같은 그릇된 법, 불법이 아닌 법들은 마땅히 다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체는 죽어 있고 살아 있다면 마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확실히 나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 일반적인 중생들은 입은 옷을 주지 않으면 네 목숨을 죽이겠다고 위협 당했을 때, 아무리 대낮이라도 종로 네거리에서 옷을 훌쩍 벗어 줍니다. 반대로 몸뚱이가 내가 아닌 걸 확실히 아는 사람은 몸뚱이 벗어라 하면 몸뚱이 내버리고 마음만 갑니다. 옷 벗어 버리듯 하게 됩니다.

  이럴 때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법이고 몸뚱이는 옷이고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법(正法)인데 마음을 깨치고 나면 이 두 가지를 다 버려야 합니다. 대승불법은 계를 지킬 필요도 없고 고기도 막 먹고 술도 계집질도 보리반야에 방해되지 않으니 삼가 할 것도 없다는 막행막식주의(莫行莫食主義)의 그릇된 생각은 비법(非法)이고 계를 지키고 음행도 술도 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육신이 내가 아니라 마음이 나라는 진리를 체득하고 깨달음을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은 정법인데, 우리가 마음을 일단 깨치고 나서는 계를 지니고 마음을 닦겠다는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아무렇게나 막행막식해도 관계없다는 그릇된 법은 더 말해 볼 것도 없이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說 義]

 (1) 막행막식은 전도된 비법

  계율(戒律)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유감스럽지만 요사이도 더러 있는 우리 주위의 일로서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큰 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승불법은 마음만 깨치면 일체에 걸림 없고 아무런 행동을 다 해도 파계가 아니고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 해방 전만 해도 이런 식으로 견성한 도인이 많았습니다. 모두 고기 먹고 술 마시고는 물 마시나 술 마시나 뭐가 다르냐고 하면서 술 기운에 화두(話頭)가 더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술 기운에 취한 기분이지 공부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 공부뿐 아니라 어떤 학문이나 과학이나 육체수련에 이르기까지 술 기운으로 인해서 더욱 좋은 효과가 나온다는 말은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특히 참선 정진을 어떤 술이나 약품에 취한 마취된 기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그들은 야채를 먹으나 고기를 먹으나 한가지고 무엇을 먹든지 참선만 하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도둑질을 하든지 음란(淫亂)한 성생활을 하든지 대보리(大菩提)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면서 마구잡이로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합니다.

  이런 풍습(風習)이 오늘까지 영향이 미쳐서 일대문제(一大問題)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불교를 거꾸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배운 금강경의 뜻으로 보더라도 보살은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해 보시하고 제도해야 할 것인데 남의 것 도둑질 하고 음행하라고 한 데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인데 이것을 편의상 남의 것을 훔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불교의 정신과는 정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소승불교의 이기주의(利己主義)는 차라리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므로 그 보다는 났습니다. 또 불교에서는 윤회(輪廻)하는 것을 절대 인정해야 하므로 금수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 형제동포와 같이 보고 자비심으로 이끌어 제도해야 하는 수행자로서 육식을 하고 음행을 하는 것은 자비의 종자를 끊고 번뇌를 가중하는 전도된 행동일 뿐입니다.

  

(2) 아란존자의 위기

  그래서 우리 승려는 비구나 비구니나 독신수행에 알맞은 생활규범을 마련해 가지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구나 비구니는 혼자 다니지 못합니다. 둘도 안 되고 꼭 셋씩 다니라는 것입니다. 혼자 다니다 보면 불량한 사람 만나면 유혹도 되고 겁탈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다녀도 서로 뜻이 야합하기 쉽고 또 망신을 당해 놓고는 입을 다물고 시치미를 뗄 수 있지만, 셋이 되면 서로 의사가 맞기도 힘들 뿐 아니라 일을 당했더라도 참회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네는 아무리 조그만 암자 움막에 살더라도 세 사람 이상이 살아야지 둘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이 살면 뜻이 맞고 파계를 하고도 서로 감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란존자가 어디 가셨다가 일행(一行)스님 두 분은 딴 데 볼일로 가시고 아란존자 혼자 오게 됐는데, 오시다가 목이 말라서 샘가에 앉아 있는 처녀에게 물을 얻어먹게 됐습니다. 물을 떠주던 처녀가 아란존자를 뵈오니 풍모(風貌)가 너무 잘 생긴데 아주 반했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 다음으로 아란존자가 잘 생기셨다고 합니다. 그 처녀는 상사병(相思病)이 나다시피 되어 그 어머니에게 아란존자에게 시집을 안 보내 주면 죽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되는 이는 주문(呪文)을 외워서 요즘 같으면 최면과 같은 신통력을 가진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문을 외워가지고 아란존자를 집으로 되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수양이 높은 사람은 수양이 낮은 사람에게 정신력으로 에너지의 압력을 가하여 강제체면을 걸어가지고 자유로 그 사람을 부립니다. 딸을 위해 주문에 능한 그 여인은 주문을 외워 가지고 아란존자로 하여금 그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딸 방으로 그를 인도했고 딸과 단 둘이만 있도록 했는데, 그때 아란존자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결사적으로 딴 데로 간다고 간 것이 그 처녀의 방으로 들어오게 됐고 아란존자는 이제 속옷 하나만을 입고 겁탈을 당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아란존자가 파계의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보시고 신통을 나타내시어 허공에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을 화신(化身)으로 나투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중이 다 볼 수 있도록 하시고 능엄주(楞嚴呪)라는 천수대다라니의 일곱 배나 되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시켜서 그대가 빨리 이 주문을 받아 가지고 가서 외도(外道)들이 하는 주문을 풀어 주고 아란존자와 처녀를 함께 그 상태 그대로 데리고 오라 하셨습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가서 주문을 외우니 강제최면(强制催眠)은 없어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대중이 수천 명 있는 데서 옷을 벗고 있는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아란존자는 부처님 앞이므로 부끄럽기 한이 없어 얼굴이 새빨개졌고 고개를 들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란존자는 울면서 부처님께 대법문(大法門)을 여쭈어 묻게 됩니다.

  “한량없는 우리의 선각자(先覺者)이신 부처님들께서는 처음에 어떻게 발심을 하셔서 아무 사고 없이 성불하시고 끝까지 어떻게 가시었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중이 되기는 했지만 문수보살님이 아니시면 오늘 틀림없이 파계를 당할 뻔했습니다.”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정직한 마음으로 내가 묻는 대로 틀림없이 대답하라.” “부처님께서 저의 마음을 환히 보고 계신데 무슨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능엄경의 법문이 시작된 것인데, 그 내용은 결국 “네가 무엇이냐. 아란존자 네가 네 정신을 못 차려서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니냐. 네 정신을 똑바로 차렸으면 부처님이라 해도 안 될 터인데 네가 무엇인지 그것을 모르니 그런 변을 당한 것이 아니겠느냐. 네 마음이 어디 있는지 그것을 먼저 밝히도록 하라.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안도 밖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느냐, 가슴에 있느냐, 눈에 있느냐.」라고 따지다가 나중에 마음이 무엇이냐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 네가 지금 속았다고 생각하는 그 주체가 무엇이냐, 무엇이 그렇게 속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아란존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방제불(時方諸佛)이 어떻게 발심해서 아무런 사고 없이 앉은 자리에서 부처가 되었습니까.”하고 파고 묻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답변하신 말씀도 결국 “그렇게 파고 묻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먼저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그런 강제최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옛날 요술한다는 사람들이 인생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육체본의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그런 삿된 짓을 합니다. 이런 강제최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일본만 해도 천명을 헤아릴 정도고 영국 미국 같은 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걸 무기로 해서 별짓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수양이 물론 도저한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아란존자는 속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속는 내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힘이 약했을 뿐이며, 또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서 밝히신 바 그 처녀와 아란존자는 전생에 다생겁래로 부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처녀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했다고 합니다.

  아란존자가 여인에게 겁탈당할 뻔했을 때도 부처님은 그것을 구해 주셨을 뿐 아니라 음행과 살생계를 계 가운데 제일 무거운 계로 삼았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를 가지고 수행을 해야 하는데, 계에도 소승계(小乘戒). 대승계(大乘戒)의 구별이 있습니다. 소승은 기초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고기라도 모르고 먹으면 허물없다고 말합니다. 정 죽게 됐거든 고기 먹어라, 많이도 먹지 말고 죽을 목숨만 건져 가지고 양치질하든지 참회를 해서 죄를 소멸해 가지고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 소승경전에 더러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 동남아시아 비구 스님들은 여자를 곁에 못 오게 합니다. 사진 좀 찍자고 해도 남자 처사를 불러 놓고 처사 앞에 여성을 앉게 하고서야 찍지, 직접 비구승 앞에다 바로 여성을 앉혀 놓고 사진 찍으면 그건 비구승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스님들은 한국. 중국. 일본 승려들은 비구가 아니라고 그럽니다.

  

(3) 계를 가지고 닦는 복

  계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도 유언(遺言)으로 훈계하신 일까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정말 부처님께서는 만사를 잘 일러 주시는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누구한테 의지해서 도를 받겠습니까.” 여쭈니 “네가 계를 지키면 내가 열반하고 천년 만년 지나도 부처님 옆에 있는 것이고 계를 파하면 내 곁에 있어도 부처님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계가 생명이니 성불하는 데도 그게 생명이고 또 복을 짓는 데도 그게 생명이니 계율(戒律)을 법사로 삼고 계를 따라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를 가지고 복을 짓는다는 말이 보통 뜻이 아닙니다. 계 안 가지고 복을 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계를 갖는 복에 비교해 볼 수도 없는 복입니다. 우리 스님들이 참말로 진실하게 중노릇 잘하는 율사(律師)가 하루 짓는 복이란 전 세계 인구들이 평생을 짓는 그 복을 다 모아도 억만분의 일도 못 따라갑니다.

  

(4) 나다 남이다 없어져야

  계율 지키는 것이 어렵고 거룩한 일이지만 그러나 불법이 계를 지키는 그것만 가지고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최소한도 지켜야 할 기본 과제이고 성불하는 최초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하고 배를 타기 위해서는 강가의 나루터에 나가야 하는데 계를 지키는 것은 나루터에 가기위한 신들매를 하고 떠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싶어도 나루터에는 가지 않고 육지 한 복판에서 잠이나 자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루터에 도착해서는 서슴지 말고 배를 타야 합니다. 만일 나루터에까지 갔어도 막상 배를 타려 하니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물길이 조심이 되어 주저하기만 하고 배를 타지 못 한자면 이런 사람은 강 건너 저 언덕에는 건너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배를 타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을 깨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니 남이니 하는 생각 없이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머무름 없는 경지에서 모든 중생을 위해 보시하고 일체 중생의 제도를 위해 지계(持戒)하고 중생들의 안락을 위해 인욕(忍辱)하고 더욱 많은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해 정진. 선정. 지혜(精進禪定智慧波羅蜜)의 보살행(菩薩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상(我相)이 없는 마음에서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야만 정말 남을 위해서는 큰 복을 지을 수 있고 참된 공덕을 짓습니다. 아상(我相)이 없어지면 참사람 진인(眞人) 좋은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적대시(敵對視)하지 않게 되므로 누구와도 잘 어울립니다. 미친 사람하고도 어울리고 잘 놉니다.

  서울 여자 한 사람이 해방 이십년 전부터 공부한다고 하다가 미쳐서 순사고 서장이고 만나면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일본 욕을 막합니다. 난 그 사람의 그런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 만나서 웃지도 않고 깍듯이 시치미 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기 지난 걸 다 얘기했는데 자기는 전차 기차도 공짜로 타고 다닐 때 운전수가 돈 내라면 “아 이놈의 자식아 네가 그렇게 충성해서 좋을 게 뭐 있냐. 결국 왜놈한테 가는 게 아니냐. 우리 조선사람 좀 공짜 차 타는 게 그렇게 배아프냐.”하고 도리어 호통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본 경찰 못 잡아 갑니다. 파출소나 경찰서로 데리고 가도 아무한테나 막 욕을 하고 덤벼드니 미친 여자라고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하나도 미친 말이나 행동도 안하고 그러는데 요사이는 이제 나이도 많고 그러니 나를 만나면 아무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돈 좀 달라는 표를 합니다. 뭐가 먹고 싶은 모양입니다. 나는 누가 보는데 줄 수도 없고 따라오라고 해서 살짝 뒤로 줍니다. 일 년에 두 번 세 번 그렇게 그 사람이 미친 짓을 하고 그랬습니다.

  자꾸 미쳤다고 하면 누구나 미칩니다. 아무리 성한 사람이나 인격자라도 사람 서넛이 짜가지고 그 사람이 미치게 만들려면 일주일 안에 그 사람 미쳐 돌아다닙니다. 인격 있는 사람은 처음엔 억울하다고 야단하지만 나중에는 여럿에게 집니다. 물론 같은 정도의 인격자가 해야 됩니다. 인격이 떨어지는 사람이 그러면 곧이듣지 않습니다. 아내가 하든가 좋은 친구들이 짜고 차차 자기를 의심하게 만들면 미쳐가지고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일주일내에 미쳐서 웃고 말도 함부로 합니다. 또 미친 사람을 성한 사람 대하듯 하면 미친 것이 나아집니다. 약을 먹이고 별별 치료를 해도 안 되지만 성한 사람끼리 앉아 그 사람 옳게 대해 주면 그는 성한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애초에 <나>란 생각(我相)이 없어 깨끗한 순수한 마음만 튼튼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슨 소리가 들어와도 거기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건 다 바람소리고 물소리다. 이해타산 할 소리 하나도 없다. 사람 지껄이는 소리 역시 다 그렇다.” 이걸 알고 나면 몸뚱이 그것도 내가 아닙니다. 이 몸뚱이는 지금도 자꾸 죽어가는 판이고 언젠가는 어디가나 차에 깔릴는지, 나쁜 사람 만나 칼이라도 맞아 넘어질는지 그걸 모릅니다. 어디가나 물에 빠질는지 불에 타서 죽게 될는지, 집이 무너져 자다 죽을는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몸뚱이가 나라고 기어이 아끼고 살아봤자 별수 없습니다.

  몸을 애착 않고 사건에 내가 관심을 갖는 일이 없이 하면 농사. 장사해도 피로가 안 생깁니다. 그러니 아상 없이 하라. 내가 없으니 내 소유물도 없다. 다 필요하면 누구든지 가져가라. 남의 것은 소유로 인정하지만 나에게는 소유권 행사 없습니다. 물질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몸뚱이를 저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니 불법(佛法)으로 교화해 주어야 내생에 나와서 악한 마음 안 먹고 법문 잘 듣고 부처님께 인도(引導)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육체가 내가 아니니 나라도 땅도 아들 딸도 자기 마누라도 버리고 누구든지 달라면 다 주고 안 간다고 그러면 업어다 주고 그런 식으로 나란 육체를 버리고 모든 지식을 다 버려 버리고 참선이나 불교공부까지 다 버리고 나면 그곳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정말 텅 빈 그런 경지입니다. “내 마음 자리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모든 생각이 없어지면 부처님까지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 <아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5) 그릇된 법은 뗏목도 못된다.

  내가 처음 도선사에 들어가니 종래에 다니던 신도가 약 7백 세대쯤 되었는데 모두 다 조상 때부터 이 절에 다녔기 때문에 다니는 것뿐 불교의 뜻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미신적으로 다니는 신도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도선사에 기도를 해서 아들을 낳았다든지, 산신각에 기도를 해서 복을 받았다든지 자손에 대한 소원을 빌어서 성취했다든지 하는 이들이고 부모의 유언에 따라서 다닌다든지 하는 무당불교에 가까운 신도들이었습니다.

  신라 고려 때에는 스님들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일반 국민의 불교에 대한 신앙과 교양도 높았으며 국가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으니, 불교의 지위와 교통이 거룩했지만, 이조 때에 와서는 죽일 것을 사정 봐서 살려두는 정도의 극한적인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말미암아 중은 식은 밥이나 얻어먹는 불교로 되었습니다. 신도들이나 스님이나 수준이 극히 낮아져서 여신도들은 부처님이 복 준다니 복 좀 타 오려고 절에 가고 스님을 무당 취급해서 그 풍습이 해방 후에까지도 그런 정도였습니다. 쌀 외는 돈 백원 가지고 와서 아랫목 차지해 가지고 스님들 보고 밥해 오라고 상심부름이나 시키는 불교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신도정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나는 도선사에 가면서 먼저 “점도 치지 말라. 사주도 보지 말라. 절에 온다고 택일도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는 사시공양을 하셨으니 불공도 다른 때는 하지 말고 공동으로 함께 하라. 부처님께서 굶어 돌아가신 분 아니니 밥만 자꾸 때 없이 해서 올릴 것이 아니라 제가끔 일심으로 마음으로 참회하라.”고 하며 미신적인 짓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 7백 세대가 다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도 안 왔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내려가서 밥을 얻어먹는 정도로 되었는데 요즘은 전혀 새로운 신도들이 1만 7천세대로 늘어났고 매월 5백 세대씩 늡니다. 나는 그 뒤에 산신각까지 헐고 신도들의 그릇된 신앙, 곧 비법(非法)을 고쳐 주기 위해 올바른 신앙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고 마음을 깨쳐 생사고뇌를 벗어나야 한다는 불법을 말해 주었고, 마음을 깨치고 나면 부처님의 법문까지도 다 버려야 하는데, 미신. 그릇된 법. 법 아닌 법을 버려야 한다고 얘기한 보람이 있은 것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쫓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개구리이고 죽음은 구렁이입니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찰나도 쉬지 못하고 죽음이란 구렁이에게 쫓깁니다. 자는 시간까지는 죽음의 구렁이에게 쫓기는 개구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생입니다. 그것도 한번 죽고 그치는 죽음이 아니고 천당. 지옥. 축생으로 내생에도 무량겁을 쫓기고 죽고 합니다. 마음을 깨쳐서 육신은 내가 아닌 것을 확인해야 죽음의 쫓김을 면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치면 모든 근심을 여의고 어떤 법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정법(正法)은 물론 사법(邪法)의 구애를 벗어납니다. 강을 건너서 뗏목을 버리듯 모든 것 다 버리고 사상(四相)이 떨어져 나갑니다.

  

(6) 말하고 듣는 그것이 주인공

  이상에서 말씀하신 부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40년 동안 하루도 쉬지 말고 법문하는 것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듣고 애쓰는 제자가 많았지만 내 말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내가 너희한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듣고 ‘과연 그렇구나, 거기 들어가면 뭐가 있긴 있겠는데 알 듯 알 듯 하구나.’하고 생각하는 놈, 생각할 줄 아는 그게 바로 무엇인가 그걸 알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뭔지 그걸 알고 앉아서 법문을 들으라는 것이니, 내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고 날 따라다니면서 배워봤자 그것은 한갖 바지 껍데기만 따라다닌 게 아니겠느냐. 따라서 내가 너희한테 법문을 한 것은 무엇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한 것이지 말이나 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인가.’ 그것 하나, 이름 성도 없는 것,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는 그것, 앉아 듣는 그것이 너의 마음인데,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듣고 있으면서 알지 못하겠느냐.

  무량겁으로 너희가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 왔으니 그래서 마음이 <나>라는 소리를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어째서 껍데기인 몸뚱이만을 알고 열매인 주인공을 모르느냐. 몸뚱이 위에 걸친 옷은 칼로 아무리 찢어봐야 아무 감각이 없지만, 몸뚱이는 바늘로 살가죽 어디에고 조금만 찌르더라도 곧 아픔을 느끼듯이, 몸뚱이는 너의 옷이고 껍데기며 참 너는 너의 마음이다. 몸뚱이는 하나의 기계이고 물질의 조직에 불과한데 그것을 자꾸 <나>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도 멀뚱멀뚱 무슨 소린가 그렇긴 한데 하면서도 정말 마음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이 어느 것인지 알아보려고 들면 가령 또 이것이 객관세계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한 십년 찾아서 땅속이든 어디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 이 놈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말하고 말 듣고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관념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생각만 놓아 버리면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그 주체가 드러날 것이다.

  아주 천하에 제일 쉬운 일이다. 쉽기로 말하면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마음 깨치기가 더 쉽고 낯 씻고 코 만지려면 시간이나 걸리지만 이 마음은 시간 걸릴 것도 없다. 말하는 이놈이고 듣고 있는 마음 그것이기 때문에 너무 쉬운 때문에 알려고 하는 생각이 도리어 장애가 된다. 저 말 듣지 말아야겠다고 하니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이걸 가만히 생각하노라면 피를 토하다 죽을 일이다. 지금 이 몸뚱이는 오늘밤에 내 버릴지도 모르는데 이것만 소중히 생각해서 세계사람 다 잡아 먹고 저만 살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깨치지 못하느냐. 깨치고 싶어하는 생각이 있어서 늘 객관시(客觀視)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가슴에 있는지 머리속에 있는지 모르겠다.’이런 망상을 다하는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버리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靑潭스님강설 金剛經

 http://blog.naver.com/badre/30108576761

 

如理實見分 第五

여리실견분 제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不也니이라 世尊하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何以故오 如來所設身相은 卽非身相일새니이다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佛告須菩提하사되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불고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니라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제2 실제의 마음을 바로 보라(여리실견분)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육신은 곧 육신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있는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Section v. Understanding the ultimate principle of reality 

Subhuti, what do you think? Is the tathagata to be recognized by some material

characteristic? No, world-honoured one; the tathagata cannot be recognized by 

any material characteristic. wherefore? because the tathagata has said that material characteristics are not, in fact, material characteristics.

Buddha said: Subhuti, wheresoever are material characteristics there is delusion; 

but who so perceives that all characteristics are in fact no-characteristics, perceives 

the tathagata.

  

[科 解]

  여기서 금강경의 핵심이 또 나옵니다. 그 골수는 소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냐, 그것을 모르면 네가 아무리 불교를 믿고 49년 동안 부처님 모시고 법문을 들어 보았자, 아무 필요 없는 헛일이 된다는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분절(分節)입니다. 소위 불성(佛性)자리가 있다고 하지만 불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역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철학자를 따라다니고 부처님을 따라다녀 봐도 마치 껍데기가 따라다니는 것에 불과합니다. 흔히들 불교를 피상적(皮相的)으로만 보고 “현실을 무시하고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 몸뚱이보다 한 발 더 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입니다. 몸은 마음 뒤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입니다. 마음이 앉아야 몸이 앉고 마음이 먼저 드러누워야 몸이 따라 드러누우니 어떤 것이 현실입니까. 항상 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 아닙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마음이 현실이고 주체입니다.

  이 마음이 만사(萬事)의 주체입니다. 남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마음이 먼저 시작하면 몸뚱이는 따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언제나 뒤에 쳐져 있고 마음은 어느 곳 어느 때에나 현실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 현실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 몸뚱이부터가 확고한 정체(定體)가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물건들 물질은 다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며 정체가 있어서 현실이라고 지적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보리 네가 지금 나한테 묻는 그것(마음)이 무엇이냐.” 수보리 존자는 그 뜻을 아시지만 미래 중생들을 위해서 일부러 물으시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시집을 가야 산다. 장가를 가야 산다.”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두 분께서 신파 연극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네가 무엇이냐. 여래가 무엇인가.” 하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밝힌 것이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인데 이치대로 진리 그대로를 실답게 보는 절이란 뜻입니다. 이 절에서 금강경의 진리를 대표하는 사구게(四句偈)인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이 나옵니다. 이 뜻을 잘 해득하면 금강경을 다 알게 됩니다.

  

原 文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解 義 부처님은 안으로 마음을 깨쳐 지혜가 밝으실 뿐 아니라 밖으로 생긴 몸의 모습도 곧 신상(身相). 몸매도 보통 사람에게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십니다. 부처님의 모습은 서른 두 가지로 거룩한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있고, 여든 가지로 뛰어난 팔십종호(八十種好)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량겁을 지내 오면서 보살만행(菩薩萬行)을 닦으실 적에 오직 중생만을 위하여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주었고,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가진 돈이 없으면 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약도 사 주고 먹을 것도 마련해 주고 합니다. 누가 당신 팔이나 눈을 약으로 쓰겠다고 하면 조금도 주저 없이 팔도 잘라 주고 눈을 빼 줍니다.

  이와 같이 선행(善行)을 하면 아주 복된 삶을 살게 되는데 부처님은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곧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어서 그 털이 보통 때는 말려 있지만 그것이 펴지면서 광명이 나오고 신통이 나옵니다. 또 정상육계상(頂上肉髻相)이 있는데 정수리에 살상투(肉髻)가 있어서 보통사람에게는 정수리 맨 위가 보이지 않으며 또 열자나 되는 광명이 부처님의 몸 위에 항상 있는 등 세상 사람에게 없는 서른두 가지 상(三十二相)과 여든 가지 좋은 모습(八十種好)이 있습니다. 이런 상호(相好)는 물론 범부에게는 다 없는 상이고 부처님에게 특별히 있는 상이고 공덕으로 나타난 상이니 “이런 상호로 여래 곧 부처님을 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原 文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解 義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 “부처님 몸의 상호가 아무리 거룩하다 하더라도 그런 육신의 몸매를 가지고 부처님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사뢰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을 <여래>(如來)라고 했는데, 이 마음은 본래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지식도 사상도 선도 악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이 마음은 알 줄 아는 것뿐이고 순수한 생명. 청정한 본심이며 질량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은 같은 것과 같다는 뜻으로 여여(如如)하다고 합니다. 여래(如來)란 말은 이와 같이 같은 여여한 데서 그와 같은 이가 왔다는 뜻입니다. 생로병사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 태어났다는 소리입니다. 언제나 같으니 거래(去來)도 직위도 동서남북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는 그런 사람이 탄생했습니다. 그이가 바로 석가여래입니다. 몸뚱이는 비록 뱃속에 들어가서 열 달 만에 아이가 되어 이 세상에 나왔고 실달태자가 되어 커서 출가해서 견성(見性) 오도(悟道)하여 설산(雪山)을 내려오셨지만 그 마음은 여여한 그대로 마침내 우리를 제도하려 오신 여래가 바로 석가여래십니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뿐만 아니라 석가여래의 육신도 불생불멸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육신은 환상이고 꿈에 있는 몸뚱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으로 있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환상이란 불교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이 마음자리는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어져서 없는 것조차도 없어진 것이니 참으로 빈 것이며 허공도 아닙니다. 차라리 허공도 초월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 뜻이 아주 쉬운데 빈 공자(空)를 써서 온갖 강의를 다해 놓으니 도리어 알기 어려워집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고 지식도 사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니다 보니 진짜로 공한 것인데, 그렇다고 허공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온갖 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졌다는 생각도 없고 그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없기는 없는데 어떻게 없는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짜로 없는 이것이 금강경 강의해 달라고 와서 물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대답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묻고 대답하고 하니 뭐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처럼 있는 것으로 있지도 않고 허공처럼 텅 비어 없는 것으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이 소리를 잘못 알아들으면 공부하다가 아무것도 없는 경지가 나타나면 견성했다 도통했다 그럽니다. 그러니 있기는 있는데 있는 것도 있는 게 아니고 물질로 있는 게 아니고 없는 허공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이것을 묘하게 있다(妙有)고 하는 것입니다. 물으면 대답하고 먹고 배부르면 변소 가서 꿍꿍 앓고 이런 신기한 짓을 하니 참 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붙잡을 수 있고 쳐다볼 수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들어 볼 수도 없고 대질러 볼 수도 없고 그러니 이런 편으로 보면 꼭 진공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중생도 부처도 아닌 그런 것이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먹으라면 먹고 추운 줄 알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무엇이 분명히 있는 것이 물질처럼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처럼 없는 것도 아니므로 있기는 있는데 기이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자리인 이 생명은 진공묘유(眞空妙有)한 것이니 따라서 물질의 구성체인 이 육신이 아무리 미묘한 상(相)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런 상호(相好)를 가지고 여래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原 文 何以故 如來所設身相 卽非身相

解 義 “왜 그러냐 하면(何以故)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뚱이의 모양(如來 所設身相)은 곧 몸뚱이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몸뚱이의 모양이 여래일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卽非身相).”하고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여 여자 몸뚱이 타고 나면 시집가려고 애를 쓰고 남자 몸뚱이 타고나면 장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애를 씁니다. 이런 망상을 버리지 못하여 죽어서 또 태어나고 업을 짓고 하게 되는데 한번 나서 늙어 죽는 고생이 보통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죽을 수 없어 살아 있는 것이지 살아 갈 이유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세상은 결국 먹고 똥 싸고 그것 때문에 무의미 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꼼짝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그것을 위해 죽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모두 농사짓고 장사하는 이유는 죽기가 싫어서 안 죽으려고 하는 짓에 불과합니다. 단 십분이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질합니다. 그러나 농사짓고 장사하는 게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 죽으려고 결정만 했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합니다. 농사짓고 장사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아닌 본래 우리의 생명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니 밥을 먹어 산 것도 아니고 무엇을 위해 산 것도 아니고 돈을 위해 산 것도 아닙니다. 이 <마음>을 발견하고 발심한 보살은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하고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그게 바라밀이고 응무소주(應無所住)하는 행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 생사를 초월하여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하루 밥 세 끼가 재미나서 먹는 것도 아닙니다. 밥 안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누가 씁쓸한 산삼을 먹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안 먹고 영원히 살아 있는 우리 마음을 깨쳐야 합니다. 그래서 전 우주의 관광여행이나 다니고 아무 할일 없는 관광여행, 중생제도를 위한 여행길에 올라서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모두 마음 깨쳐 생사해탈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육체와 정신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게 참 나인가, 이 육체는 언젠가는 늙어 죽을 것이며 그것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근육이나 뼈가 우리 몸뚱이의 주가 되는데 이것을 분석해 보면 결국 수분. 당분. 지방질 등의 물질적 요소에 불과합니다. 혈액이나 오줌 등을 보더라도 결국 이것은 물질이며 오장육부는 물론 뇌세포까지라도 그것은 물질적 구조에 불과하며 물질은 결국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마음이 없으면 송장입니다. 육체를 부려먹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은 운전수고 육체는 택시와 한 가지입니다. 마음이 몸뚱이더러 앉으라, 서라, 가자, 온갖 일을 다 시킵니다.

  그런데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므로 마음이 곧 나입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산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히 믿어지면 그날 저녁부터 잠도 잘 오고 영원히 죽음을 면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니 큰 환희를 얻습니다. 곧 이 몸뚱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原 文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解 義 이 금강경 계통을 전부 통틀어 반야부(般若部)라고 하고 그 부수(部數)만도 육백부나 되고 경책의 권수로는 이천권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반야심경(般若心經) 같은 작은 경도 있지만 큰 경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백부의 골수를 통틀어 얘기하는 대표적인 글이 다음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란 네 구절입니다. 이 네 귀 열여섯 글자 안에 금강경의 핵심은 물론 반야 육백부 전체의 뜻을 유감없이 표했다는 뜻에서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라고도 합니다. 그 게송(偈頌)의 뜻은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현상이 상이 아닌 줄을 직관(直觀)할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고 마음을 깨친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무릇 있는바 모양(凡所有相)이란 현상계를(現象界)를 말하고 이때에 현상은 모든 생각, 안 보이는 모든 것까지 다 포함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만분의 일초도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질량 변화를 쉴 새 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엇이 됐다가 돌아오고 하므로 이것은 결국 믿을 수 없는 허망상(虛妄相)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皆是虛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학문. 예술. 종교. 불교도 다 허망하고 오직 자기 마음만이 진짜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마치 실연당했을 때보다도 더 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여자하고 연애를 하다가 그 여자 뒤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또는 그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려고 했던 그 마음이 홱 돌아섭니다. 그 총각 처녀 지나간 길로 걷기도 싫어질 겁니다. 애정문제 가지고도 이렇게 마음이 돌아서는데 하물며 우주 인생의 근본문제에 있어서는 말할 게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날 죽이려 하고 부처님까지도 날 죽이려고 하는 것 같을 겁니다. 이 육신을 죽여서 구렁텅이에 꼼짝 못하게 해 놓고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 인생과 나와는 완전히 정이 뚝 떨어집니다. 연애하다 실연당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인 가짜 나는 이 얘기 끝나고 죽을지, 앞으로 계속 얼마나 살아 있을지 그걸 생각하고 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남편이 작은 여자를 얻어 속을 썩이더라도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른다. 내가 전생에 남편에게 속을 썩여서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니 달게 빚이나 갚자.”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배워야 할 지식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면 모든 것이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若見諸相非相). “이 세상에 미련이라고 남을만한 사건이란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허망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고 마음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니 그게 곧 참 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닳아 없어지도록 육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몸뚱이한테 정이 떨어지고 나니 마음만 드러납니다. 눈과 귀가 보는 게 아님을 확실히 알면 몸뚱이도 포기해 버리고 우주와 온 세상을 다 포기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나면 버릴 수 없는 것만 남는데 그것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자리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깨치기 전에도 여래(如來)하면 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연애하다 한번 배신 당하면 뜨겁던 정이 냉정하게 끊어져서 얼음보다도 더 식어 버립니다. 우리도 이 육체와 무서운 연애를 한 셈입니다. 그 어느 누구한테 어느 무엇에게 보다도 다시 없이 이 몸뚱이를 소중히 아끼고 거두고 하루라도 더 살리려고 아들딸도 제쳐 놓고 불성(佛性) 자리만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그것들이 다 상(相)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발견한다. 곧 자기를 자꾸 정리해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육체의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자리를 발견합니다(卽見如來).

  금강경에 사구절만 읽어 가지고 성불한 사람도 있고 반야바라밀만 읽어 가지고 신통(神通)이 나오기도 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만 외워서 견성(見性)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가지만 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다라니를 하든지 하나에 전념을 해야지 이것 저것 다하면 그것은 허욕이 되고 정신이 한 가지로 통일되기 어렵습니다. 가령<옴마니반메훔>만 자꾸 염송(念頌)하다 보면 나중에는 소리도 아니고<옴메>만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깨닫는 시간이 빨라집니다.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그런 줄 확실히 알았으면 마음이 드러난다는 금강경 사구게 곧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마음을 다해 읽었다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안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을 천독만독(千讀萬讀)해서도 안 된다면 내생에 또 독송할 각오로 자꾸 읽어야 합니다.

  

[說 義]

 (1) 마음을 찾는 생활

  모든 것이 다 허망한데 그 중에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이라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꼭 알아야겠다하면 그것은 이미 견성에 연결되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오직 이 마음을 알아야겠구나.”하는 마음으로 이 경문을 읽으면 이것이 곧 천 칠백이나 되는 참선의 화두공안(火斗公案)을 다 생각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도 내가 아니고 우주도 실재가 아니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이라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 가운데 마음만은 어제도 오늘도 그렇고 작년도 금년도 백년 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당을 가도 지옥을 가도 이대로고, 소가 돼도 개나 구렁이가 돼도 마음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몸뚱이가 개가 되고 구렁이가 되었을 뿐 내가 개고 구렁이이구나 하고 생각할 줄 아는 근본 마음자리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여자가 되나 남자가 되나 짐승이 되나 송장을 끌고 왔다 갔다 하고 배고프다고 밥 먹고 똥 누는 생각을 내는 주체, 부정하고 긍정하는 주체,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지금 말하고 듣는 이대로 영원히 살아 있는 <참 나>를 발견하면 그때부터 논이고 밭이고 재산을 전부 팔아서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고 배고프고 옷 없는 사람에게 밥을 주고 옷을 주어 다 보시 합니다. 의식주의 재산을 보시하고 그 다음에 또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게 옳게 사는 것인가, 다른 것은 다 하나마나하고 이것만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학문은 하나마나하고 세계 제일가는 박사가 돼 봐도 생로병사는 면하지 못하고 하루 밥 세 그릇 꼭 먹어야 합니다. 육신은 내가 아니고 죽어 없어질 한낮 물질이며 죽지 않는 마음 영원히 살아있는 <내>가 어디인가를 일깨워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꼭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 이 두 가지만은 꼭 배워야 합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마음 깨달아 우주에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바른 정신 넣어 주는 것이 정법(正法)을 펴는 법시(法施)인 것입니다. 또 위태롭고 외롭고 근심 속에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고 마음을 깨치면 생사를 초월한다. 마음을 깨치면 부처이니 석가여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믿는 것이다. 석가여래도 나 같은 사람으로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깨칠 수 있는 법을 그대로 남기어 놓았으니 부처님 하시던 그대로 수도를 하면된다.” 이런 이치를 알아서 몸뚱이가 나인 줄 알기 때문에 모든 근심걱정이 있는 것인데 마음이 나인 줄만 알면 아무 근심걱정 없어집니다. 남이 내 돈을 다 들어 먹고 알거지로 만들어 놔도 그 사람이 밉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바로 믿도록 정법을 일러 주면 확실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그래서 모든 근심걱정이 없어지므로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이 참 나임을 가르쳐 주는 것은 확실히 법시 이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의식주에 구애가 없으니 아무리 굶어도 걱정을 안 하고 우리 생활을 완전히 남만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바꿉니다. 바라밀을 도피안이라 하지만 그 말이 어렵고 차라리 현명한 생활을 한다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생존경쟁에만 몰두하던 생활을 아침저녁으로 다만 10분이라도 참선을 해서 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찾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의식주 생활도 반대로 자기를 깨치는 시간이 됩니다. 10분이 차차 20분이 되고 나중에는 열 시간쯤 참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밥 먹을 때도 옷 입을 때도 똥 눌 때도 기차시간이나 학교 가서 선생 강의를 들으면서도 화두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해 나가면 24시간 꼬박 참선이 됩니다. 염불도 그렇게 됩니다. 경희대학에 한 학생이 참선을 배워서 화두(話頭)를 하는데 전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화두만 하다가 어떤 때는 버스 종점으로 아주 간다는 것입니다. 화두에 열중하다 보면 나중에 그런 식으로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학교성적은 자꾸만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강의 한 번 들으면 완전히 기억되고 시험 때가 되면 다 알게 되는 때문입니다. 공부를 바로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해서 마음을 턱 놓고 살 수 있는 지경에 들어가면 그렇게 됩니다. 신경이 사방에 쓰이고 온갖 번뇌가 들끓고 그래서 피가 나빠지고 신경이 약해지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하던 것이 정신을 크게 안정하고 사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됩니다. 그래서 농사하는 사람 밭은 밭대로 더 잘 가꾸고 지혜도 나오고 하여 생(生)의 투사, 진리의 투사가 됩니다. 육체본위로 살던 생활을 마음 본위로 사는 혁명투사의 생활로 바꿔 나가는 셈입니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얘기가 이 금강경입니다.

 

(2)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든 것

  앞에서 진공묘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 육신과 일체의 물질은 다 환상이고 꿈에 있는 몸뚱이와 같으며 따라서 참 말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으로 있는 것이므로 아무것도 없는 진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진공도 한 개의 가상(假想)이고 진상은 아닐 뿐 깊이 생각하면 환각, 환상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이렇게 생시에 칠판 옆에 서서 강의하는 것을 본 여러분은 꿈에 가서도 이 청담이 칠판 옆에 서서 강의하는 걸 보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 나타난 이 청담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있는 이 청담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늘 보고 듣고 기억한 그 기억이 꿈에 가서 이 청담 목소리도 되고 몸뚱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하고 객관하고는 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자 곧 이 청담이고 여러분의 생각이자 곧 법당입니다. 그러니 물어 볼 것도 없이 이것은 확실히 여러분의 환각(幻覺)이고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생각 그것이 환상을 만들었고 그러므로 현재의 이것이 다 하나의 환상이고 참말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은 물질로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 의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객관으로 된 꿈에 가서 남편과 여러 달 살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지금 이불 속에 있는 남편이 자기 남편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 남편을 기억하고 있는 그 기억이 남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남편이 나를 그렇게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은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좋아한 것입니다. 꿈속의 남편은 내 생각이 만든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꼭 생각하고 있던 남편의 모양, 성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이 그대로 남편이 되어 가지고 밤에 나와 어디로 놀러 가자고 하여 남편 따라 호강을 하고 하는 것인데, 저 혼자 둘이 돼서 돌아다닌 것입니다. 제 마음의 생각이 자기도 되고 남편도 되고 해서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이게 환상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이 모든 것도 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다 그대로 꿈이라고 하면 처음 듣는 이들은 이해되지 않겠지만 확실히 생시(生時)도 꿈입니다. 서론에서 자세히 얘기한 바 있지만 꿈에 들어갈 적마다 생시를 모두 잊어버립니다. 나를 나아서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 준 우리 어머니가 여기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것이 어찌 꿈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을 베어도 이것이 생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시에는 꿈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 살 먹어서 꾼 꿈을 팔십 노인이 기억을 하고 있으니 우리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꿈입니다. 반면에 생시는 꿈에 의해 부정됩니다. 우리 기억에서 떠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바꾸어 생시를 꿈이라 하고 꿈을 생시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년만년 사는 게 꿈이고 백년 밖에 못사는 게 생시입니다. 따라서 긴 세월을 경험하는 꿈이 생시입니다. 그런데 꿈에 있는 몸뚱이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한상입니다. 환으로 있는 상이므로 있다 해도 안 되고 없다고 해도 안 되니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내 생각입니다. 생각이 에너지가 되어 있고 에너지가 물질로 남산으로 되어 가지고 올라가면 확실히 숨차고 힘듭니다. <있다 없다>를 초월하여 4차원세계에 들어가면 남산도 몸뚱이도 어떤 생각도 없고 번뇌도 환상도 없습니다.

 

(3) 착각의 연속 속에 산다

  현상세계도 꿈과 다름없이 하나의 환상입니다. 가령 여기 있는 나의 이 그림자도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여기서는 없어지고 저 쪽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그림자는 없어진 게 아닙니다. 광학적(光學的)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림자는 광선을 막은 것인데 광선을 막은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안이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림자 자체는 없는 것이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달 밝은 밤에 한강 둑에 나가 보면 한강 물 속에 비친 달이 자꾸 따라옵니다. 그런데 그때 물속으로 따라오는 그 달은 저 허공에 매어 있는 그 달의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달의 그림자란 무수한 광선이 쏟아져 내려 온 것이므로 온 땅 위에 달그림자는 꽉 차 있는 것입니다. 한강 물에 수 억 만개의 달그림자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있는 위치가 달라져서 안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A자리에 서 있다가 B의 지점으로 옮겼을 때 보이는 물속의 달은 곧 달의 그림자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A지점에서 본 달의 그림자가 B지점에서 보이는 자리로 이동된 것이 아니고 나의 위치가 바뀌었으므로 A지점에서 보던 달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된 것이고 그 다음 B지점의 달의 그림자가 보인 것뿐입니다. 따라서 전혀 다른 달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므로 우리 육안에는 달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도 실은 먼저 달그림자는 안 보이고 다른 달그림자가 보이는 것이며 자리가 달라질 적마다 보이고 안 보이고 다른 그림자가 또 보이고 이것이 연속된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그림자는 광학상 전혀 우리들의 착각에 의한 잘못된 인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관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착각의 연속 속에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사실대로 듣지도 느끼지도 못합니다. 모든 물체가 다 환이고 꿈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걸어서 이쪽으로 몸을 이동하면 여러분은 이 청담이 갔다고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처녀 인물이 참 잘 생겼다고 하는데 그것도 생각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4차원. 5차원 세계에 들어가면 이와 같은 오관으로 잘못 알아지고 있는 물질의 환상계(幻想界)가 사라지고 마음으로만 얘기하고 생활하게 됩니다. 그 마음은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4) 현실은 곧 마음

  우리가 이제 육체를 가지고 나라하고 오관에 의한 인간 이것이 참된 <내 생명>인 줄로 소중히 여깁니다.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무시하면 곧 “현실을 부정해서 되겠느냐.” 결사적으로 항의합니다. 그러나 “현실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현실이지 육체가 현실은 아닙니다. 육체는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실재의 현실이 아니고 환각으로 있는 것뿐이란 뜻입니다. 이 조계사의 이 법당도 그렇고 서울 시내도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이 다 환각으로 있는 것이지 진실상이 아니며 실재가 아니다. 그런 줄 알고 보면 곧 부처님을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하셨는데 부처님을 본다는 소리는 곧 자기 마음을 깨친다는 소립니다. 마음 깨치면 다 부처니 모두의 마음은 이미 다 부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견성(見性) 했느냐 하는 말은 부처님을 보았느냐는 말이 됩니다. 우리 불교는 따지고 보면 지나칠 정도로 무서운 틀림없는 이론 입니다. 전자계산기로 계산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몇 천배 더 철두철미한 이론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미리 질겁을 해서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과 수보리존자 두 분의 문답하시는 내용을 지세히 따라 들으면 견성합니다. 곧 자기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까지가 다섯 번째 구절로서 어느 구절에서나 견성할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듣기 싫으니까 설명방법을 바꿔 가며 말씀하십니다.

 

(5) 영차원(零次元)

  현상이 실다운 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발견한다(若見諸相非相)란 말은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말을 바꾸어 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환상이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니 지금 이 법당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지옥도 있고 천당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공간에 조그마한 법당 속에 한량없는 우주가 이 안에 다 있고 공간이 있고 시간이 다 있고 우주와 차원이 다른 하늘나라 등의 다른 현상계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를 본다 했으니 그 말 조리를 놓치지 말고 따라 붙어야 합니다. 자꾸 따라가도 이 이치를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금강경. 반야경의 공(空)의 뜻이 이리 엉기고 저리 엉켜서 쉽게 알기 어려우므로 <넝쿨반야경>이라고 일컬어 옵니다. 진공과 막 엉키어서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아서 소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내용을 해득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에 <공>을 세웠는데 그 공의 뜻이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어 무엇인지 사실 알기 어렵습니다.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라는 뜻이며 허공도 물질도 아니면 있을 게 없으니 그것은 4차원 5차원. 천차원. 무한차원(無限次元)의 세계를 말합니다.

  본래 우주가 처음 형성될 때 텅 빈 허공만 있었는데 지구도 태양도 공기도 없을 때, 텅 빈 그때의 그것을 영차원이라 한다면, 이 영차원의 시대에 무언가가 하나 생겼고 그걸 점이라 치고 이 조그만 점에 대해 여러 가지 술어가 있지만 이름뿐이지 반점이라 해도 기실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점을 여기 찍어 놓아도 이것은 면적이 있습니다. 좁쌀을 쪼개어 놓는다 해도 면적이 있습니다. 바늘 끝으로 조금만 찍어 놓아도 면은 있게 됩니다. 면이 있으면 넓이가 있는 것이므로 점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점은 무엇인가. 이 점이란 말로만 있고 글자로만 있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조차도 아닌 것 다시 말하면 숫자의 영이나 마찬가지로써 없는 거나 한가지입니다.

 

(6) 사차원(四次元) 오차원(五次元)

  영차원의 세계나 점이나 그 뜻은 다 같이 없다는 점에서 동일한데, 그 다음에 비로소 1차원의 세계가 벌어집니다. 1차원의 세계는 곧 물질의 단차원, 연속된 점의 세계를 말합니다. 점을 연속시킨 직선, 곧 선의 세계입니다. 그것도 외줄 단 하나의 줄만이 있어서 오른쪽 왼쪽이 없습니다. 앞과 뒤만 있는 기차선로나 전차선로는 1차원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담배씨보다도 더 작은, 가령 수소나 산소를 늘어놓아도 선이 될 것입니다.

  2차원의 세계도 선의 세계이긴 하지만 선을 포개어 놓아서 평면이 생긴 것, 그래서 앞뒤와 왼쪽 오른쪽 양면이 생긴 평면의 세계를 말합니다. 삼차원의 세계는 평면을 포개어 부피가 생긴 입체적인 세계를 가리킵니다. 두께가 생기어서 아래 위까지 생긴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1차원의 세계는 전후의 2면만의 세계고 2차원의 세계는 전후좌우 4면의 세계를 말하며 3삼차원의 세계는 전후좌우상하의 공간세계를 말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시방세계(十方世界)라고 합니다. 십방을 시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의 표음법(表音法)을 따른 종래의 습관입니다. 그러므로 1차원의 세계에 사는 중생은 앞뒤만 알지 옆을 모릅니다. 앞과 뒤로만 왔다 갔다 하는 것, 예컨대 전차나 기차 같은 것은 앞과 뒤로만 가므로 이것은 일차원의 세계라 하겠습니다. 자동차 같은 것은 동서남북 어디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 이차원이고, 비행기는 면을 달릴 수 있고 아래위로 다닐 수도 있으니 입체적인 삼차원의 세계입니다. 지구나 태양은 삼차원의 세계에 불과합니다. 지구도 선이 포개어지고 평면이 쪼개어져서 지구덩이가 된 것이고 태양도 그런 것입니다. 중생들은 다 이 3차원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으면 도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우리의 육체는 3차원의 세계에서 생겨서 여기서 우물쭈물 하다가 도로 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사람은 영원히 죽고 마는 것이다. 우주 전부가 물질 뿐이다. 사람. 개. 소 모두가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물질 놀음이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유물사상이 생긴 것입니다. 제일 고등동물인 우리 인간도 이 3차원의 세계에서 5관작용의 경험으로 살다가 마는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해도 이 3차원의 세계에서 헤매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3차원의 세계 밖에 4차원의 세계를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4차원의 세계는 흔히 막연히 시간세계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을 더욱 분석해서 3차원의 원리를 초월한 정신세계를 뜻하는 말로 설명하려 합니다. 정신수양이 된 사람에게 가끔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정신상태가 조용해졌을 때 뜻밖에 시골에 있는 식구들이 다 보이고 얘기하는 소리가 다 들리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육체의 작용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5관 가운데 육안으로 몇 백리 몇 천리 밖에 있는 시골집이 보일 수도 없고 귀를 가지고 시골에서 얘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3차원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 곧 5관이 아닌 다른 5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4차원의 세계가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가령 일본의 어느 시골 두메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십리만큼 집이 하나씩 떨어져 있는 시골에 두 집이 사는데 그 근방 산이 다 한사람의 소유이어서 이 사람들은 그 산에 벌목(伐木)을 해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두아람 세 아람 되는 큰 나무들을 50개 이상을 베고서야 제각기 제집으로 갑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나무를 베어 그 나무가 곧 넘어가게 됐는데 또 한사람이 그 나무 넘어가는 곳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비켜나라고 소리를 쳤지만 그 사람은 비켜나지 않고 있다가 나무에 깔렸습니다. 세 아람이나 되는 큰 나무에 깔려 떡이 되었을 것이라 겁이 나서 나무를 번쩍 들어 저쪽으로 옮겨 놓고 보니 그 친구는 완전히 떡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십 리 밖에 있는 경찰에 달려가서 신고를 했고 경찰은 현장 검증을 나왔습니다. 시체는 바싹 부서졌고 확실히 나무에 친 피투성이 흔적이 있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나무는 몇 백 명이 달려들어야 들어서 던질 수 있는 큰 나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네가 죽인 것이 아니냐. 누구하고 이 나무를 옮겼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 혼자 옮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거짓말이다. 저렇게 큰 나무를 네가 혼자 어떻게 옮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조사도 하고 고문까지 해 보았습니다. 마을에 가서 확인을 해 봐도 그 마을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남녀노소 다 올라온다 해도 들 수도 없습니다.

  결국 네가 친구를 구해야겠다는 정성에서 이 나무가 들렸던 것 같다고 판단한 나머지 20원을 상금으로 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20세기 부사의 사건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역시 4차원 세계의 정신능력이 발동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급하다고 생각됐을 때 그 때는 나무가 크니 적으니 하는 생각도 없이 그저 “들면 들릴 것이다”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렇게 확신한 그 정신력이 그것을 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7) 마음의 힘은 불가사의

  옛날에 어떤 노장(老丈)님이 큰 산꼭대기에 암자에서 칠. 팔세 되는 애기를 하나 데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김치가 떨어져서 마을에 김치 거리를 좀 얻으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단지 몇 개를 잘 씻어서 뒤집어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노장님이 마을에 내려가서 먹을 것과 김칫거리를 한 짐 잔뜩 얻어 걸머지고 올라와 보니 지금까지 보지도 못하든 낯선 단지가 절에 있었습니다. 우그러지고 삐뚤어진 것들이 대여섯 개나 뜰에 널려 있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아마 옹기장수가 왔었구나.” 하면서 “항아리를 사려면 돈을 주고 사지 왜 이런 것을 샀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사지 않았습니다. 옹기장수는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단지들은 어디서 난 것이냐. 모두 다 없던 것들 아니냐“ ”아닙니다. 그전에 있던 단지들입니다. 스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내가 뭐라 했더냐.“ ”씻어서 뒤집어엎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스님 가신 뒤에 좀 놀다가 씻어서 무릎에 대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버선 짝 뒤집듯 후딱후딱 잘 뒤집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순진해서 뒤집으면 뒤집어지는 것으로만 알았던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도 없이 산에서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놈 거짓말 하지 마라. 너 그러면 한번 뒤집어 봐라.” 그래서 아이가 무릎을 대고 뒤집으려고 하니 이제는 무릎이 깨어져도 안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의심이 생겨서 안됐던 것입니다. 요새 심리학자들도 그런 일을 혹 경험한다고 합니다.

  중국에 이광(李廣)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광 사호(射虎)라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광은 본래 힘이 많은 무사로서 중국 역사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달 밝은 밤에 활 쏘는 연습을 하고 저물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동네 앞에 있는 남산(南山) 근처에 왔을 때인데 큰 호랑이가 자기가 타고 오는 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광은 “저 놈이 배가 고픈 모양인데 나한테 달려들면 나도 죽고 말도 죽을 것에 틀림없다. 도망을 가자니 호랑이가 따라올 것만 같고 죽으나 사나 저놈하고 싸움이나 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 등에 올라 앉아 활을 호랑이에게 겨누어 정면으로 쏘았습니다. 호랑이는 자기 몸에 활을 맞으면 막 달려들어서 원수를 죽여 놓고 나서 죽는 영특한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자기가 소리를 지르면 자기가 탄 천리마가 단 걸음에 자기 집으로 달려 나갈 것이니 동네 앞에 닿으면 큰 소리를 질러서 동네 사람들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나오면 호랑이가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에 다 가도록 호랑이가 달려오는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랑이가 정통으로 내 활을 맞고 직사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큰 백호(白虎) 한 마리를 잡았다고 좋아서 밤새도록 잠도 한 숨 못자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호랑이를 잡으면 껍데기는 임금한테 바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고기나 뼈는 귀한 약으로 쓰이므로 큰 횡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새벽녘에 날이 새자마자 지개를 지고 호랑이 죽은 근처에 가서 보니 호랑이가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면 그렇지 내 활을 네가 피하겠느냐.”하고 가까이 가 보니 화살이 꽂힌 곳은 큰 바위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내 활 앞에는 이 세상에 감당할 놈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활을 겨누어 다시 한 번 바위를 향해 쏘아 봤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역시 부사의인데 이것도 4차원 세계의 힘이 발동된 것입니다. 5관의 힘으로는 화살이 아무리 세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호랑이 뼈가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내 화살이 안 들어 갈 수 없다고 자신한 때문이었고, “단지는 뒤집어 놓는 것이다. 아름드리나무도 내가 집어 던질 수 있는 나무다.”라고 아무 생각 없이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사심(私心)없이 한가지로만 생각하면 이 지구도 뚫고 나갑니다. 내가 경험한 일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마산에 있을 때인데 밤중에 일어나 보니 우리 바로 앞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는 상주(喪主)일 땐데 상복을 벗어 놓고 불을 끄려고 나가니까 상주가 그런 짓하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먼저 보았으니 가야겠다고 달려가서 보니 큰집 한 쪽에 불이 붙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고 불은 곧 옆집으로 번지게 생겼습니다. 나는 옆집 지붕에 얼른 올라가서 “불이야 !”하고 사방에다 대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올라선 그 집은 큰 부자집이었는데, “이 집에 멍석 있으면 올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멍석이 어찌나 컸는지 약한 사람은 지지도 못합니다. 나는 발이 썩은 집에 미끄러질까봐 한 손으로는 붙들고 내 몸뚱이도 거기 붙어 있을 수 없는 지경인데 한 짐이나 되는 멍석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집에 멍석을 쭉 펴놓고 물 가져오라 해서 물을 끼얹어 불이 안 붙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인데, 급한 사정에 부딪쳐서 이것을 집어던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안 된다는 생각 없이 던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8) 천만 차원(次元)의 마음의 세계

  꿈에도 바위는 무겁고 모래는 가볍고 그렇지만 이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꿈속의 세계에서는 중량이 없는 것인데 바위는 무겁다는 생각 그것이 무거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 그것만 끊어지면 현실 세계를 그대로 초월합니다. 화살이 돌을 뚫고 단지를 뒤집는 것과 같이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고 5관으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안 되지 이 5관 밖에 또 세계가 있고 5관 밖의 사람이 또 무수히 있습니다. 그것이 4차원의 세계에 의해 증명됩니다. 이 육체와 5관 밖에 참나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4차원세계란 우리의 모든 잡념이 쉬고 나면 그때는 육체 이대로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서 미국으로 바로 뚫고 나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속도는 그렇게 빠릅니다. 마음만 그렇게 가는 게 아니라 육체도 같이 갑니다. 마음과 몸뚱이가 한 덩어리이고 물질하고도 하나고 중생하고도 하나입니다. 마음에 아무 생각 없는 그 때가 4차원의 시절이며 모두가 하나로 됩니다. 구별이 없고 주객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차원의 세계에도 한없는 층계가 있습니다. 5차원 6차원 천차원 만차원의 경계가 있습니다. 경계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보살만행(菩薩萬行)을 닦아서 만차원의 세계에 들어선 정신상태에서는 모든 사건에 전지전능하게 됩니다. 모를 것도 하나도 없고 안 되는 것도 하나도 없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깨달아 놓고 나서 중생제도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해야 정말 사람 사는 멋을 알게 됩니다.

 

(9) 생각 여읜 마음자리

  육체를 나라고 해서 살기 때문에 하루 밥 세 끼 먹다 시간 다 가고 바빠서 쩔쩔맵니다. 앞으로 10년 20년 지나면 지금의 백배 천배 바빠집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전부 기계가 다하고 그때는 시간이 없어 밥도 먹을 틈이 없을 지경으로 됩니다. 지금은 태고적이 될 정도로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지나온 5천년 동안 발전한 것보다 몇 배 더한 발전을 해서 달나라 가는 것도 며칠이면 갔다 오고 화성 금성도 금방 갔다 올겁니다. 그런 것들을 발명해 내는 마음자리, 지금 말하는 이것을 확실히 알면 그것이 곧 여래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것은 다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의심합니다.

  즉견여래(卽見如來)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령 마루 가에 내가 앉아 있는데 마당에 호랑이 한마리가 왔다고 하면 그 호랑이를 피하려고 안방으로 자꾸 뒷걸음치면서 앉은 채 미끌어져 들어갈 것입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으니까 안방이 수백간이나 되는 큰 방이라 치고 맨 아랫목 구석까지 엉덩이를 비비면서 눈으로는 앞에 있는 호랑이를 주시하면서 문턱을 넘어 들어가서 문을 꼭 잠그고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호랑이를 피해서 방으로 자꾸 뒷걸음질 치듯이 마음에 모든 생각을 다 내버리고 나면 모든 생각의 주체인 이 마음자리, 기분 이전의 마음자리에 들어가 앉게 됩니다.

생각이란 생각을 다 떼어내고 객관을 세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마음자리만 남는데 그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어떤 귀신도 날 잡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이 와도 안 되고 부처님이 와도 안 됩니다. 모든 생각이 떨어지고 나면 나를 볼 사람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날 못 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끼리는 서로 못 본다는 말(佛佛不相見)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못 보는 곳까지 가면 완전한 자기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객관을 보고 무엇을 분별하듯이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안다는 소리는 안다는 말도 아니니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럴 수 있겠다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서남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이 있어서 중생들은 그것들한테 이끌리어 지배를 받고 사는데, 크고 작은 그 모든 사건을 다 버리면 마음의 본연 자세에 들어앉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어앉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한다 생각한다 하다가 생각을 내 버리면, 좋다 나쁘다 하는 기분을 내버리면, 그리고 나서 남는 것은 마음의 본연자세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걸 여래(如來)라 그럽니다.

본심(本心)자리, 마음자리, 이것이 진짜 <나>입니다. 모든 생각의 주체인 자리입니다. 이것이 모든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온 우주에 이 <나>를 안 거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웅이 되든지 바보가 되든지 일체 사건의 주체입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정신만 다소곳이 챙겨라, 거기는 호랑이도 못가고 하느님도 못가고 부처님도 못가는 마지막 자리에 도사리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러면 그때에는 “이제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엉뚱한 데 집착을 했구나.”하는 것이 알아집니다.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 가지고 마음의 본연 자세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련만 근본적으로 끊어지면 잠재의식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10) 육체를 여읜 마음이 부처

  이와 같은 미련, 잠재의식이 업보(業報)라는 것입니다. 이 업만 없어지면 부처님하고 똑같습니다. 지금도 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가지고 이놈이 하루 밥 세 그릇 필요하니까 이것이 사건이 되어 갖고 마음이 복잡해져서 35억 다 잡아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부모형제를 다 잡아먹어도 내가 살아야 하니 이것이 독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배타고 있다가 물에 빠져보면 압니다. 다 집어넣고 나 하나만 살려고 하는 지독한 독사가 한 마리씩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밝지 못하다, 모른다, 소리입니다.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내가 아닌 걸 모른다, 내 꿈인 줄 모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근본적으로 육체를 나라고 하는 것이 근본무명(根本無明)입니다. 그 생각만 놓아 버리면 우리는 4차원 이상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얕은 4차원의 세계에 들어가서 자꾸자꾸 깊이 들어가면 부처님같이 대열반(大涅槃). 대보리(大菩提)의 여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고 가는데 구애(拘碍)가 없어서 와도 오는 게 아니고 가도 가는 게 아니며 하루 종일 말해도 한 마디도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은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말하자는 상대가 있으니 말해 주는 것뿐이지 나를 위해 하는 것은 하나도 엇습니다. 나한테 아무 필요도 없는 거니까 해보아도 손해도 이익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는 이것이 불성자리고 마음자리입니다. 이것이 성불(成佛)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탁 내 버리고 살아라. 전 세계 재산 전부 내 것 만들어 놓아도 내 것 아닙니다. 돈 백 만원 모아 놓으면 돈 한장 한장에 내가 구속되는 겁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생명이 구속되는 것이고 좋은 마누라 얻어 놓으면 그 마누라가 완전히 나를 구속하는 겁니다. 현실이란 아무것도 아니어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은 하나도 없는데, 그것을 현실이라고 거기에 의지했다가는 눈에 핏물이 날 일이 생깁니다. 금방 없어질 테니까 거기 속지 말고 영원히 자기 생명을 찾자는 겁니다. 그것은 먼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이놈이고 말하는 이 자체 마음을 딱 곤두세워서 듣고 앉아 있는 생각의 주체 그것이 나라는 것입니다. 이 일부터 해놓고 남 도우려고 해야지, 뭐니 뭐니 해보아도 소용없습니다. 무슨 박사가 되어 보아도 박사가 되어서 밥 수월하게 벌어먹자는 밥벌이 수단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밥 먹어 보아야 아무것도 남는 것 없습니다. 아무것도 되는 것도 없는 그걸 현실이라고 하니 그것에 속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대로 살아야 될 걸 알았으니 그래야 분명하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허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은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 밖에 없다, 다른 건 다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서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바빴는가, 내가 이 소리를 하고 또 하는 것은 들을 때 마다 그만큼 긍정하면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생에 못하면 내생에라도 해야 합니다.

  남이 다 성불하고 맨 나중에 성불해야 합니다. 성불해야 안심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어디로 가나 고통 입니다. 천당을 가나 극락을 가나 높은 것 낮은 것 다 있습니다. 이 마음을 깨쳐 놓고 나면 나 보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고 그러니 평등의 세계입니다. 거기는 시기 질투도 없고 사람 만나면 서로 부처니까 서로 반갑고 치하를 하고 지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실다운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객관을 다 떨어 버리면 그러면 여래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한 것입니다.

 

(11) 마음에서 여래를 찾아야

  이 우주 허공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공간은 그것이 생명이 없고 무한대 무기체(無機體)입니다. 또 이 지구덩이가 생명이 없으니 그게 행동을 못하고 생각을 못합니다. 지구가 자전 공전하는 것이 제가 하는 것 아니고 자전 공전 안하면 안 되게 되어 있는 피동(被動)이고 자동(自動)이 아닙니다. 그러니 물질계도 생명이 없고 허공계도 생명이 없는 거라면 그러면 우주 객관에 생명이 없는 겁니다. 생명은 지금 말하고 듣는 이것밖엔 없습니다. 그러니 이건 내 생명이면서 전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우주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고 물질도 허공도 아닙니다.

  무기물질(無機物質)이 유기물(有機物)로 화한다는 것은 과학이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무기물질이 유기물질로 화했다는 건 허공이 바윗돌로 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같은 이치로 무기물질이 세포로 되었다 해서 생명으로 화할 수 있다는 건 허공이 바윗돌이 됐다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에서 생명을 찾을 수 없고 그것은 다 마음의 그림자이며 마음이 곧 여래이니 여래는 오직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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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스님강설 金剛經

http://blog.naver.com/badre/30107278104

 

妙行無住分 第四

묘행무주분 제사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應如是布施하되 不住於相이니 何以故오 若菩薩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수보리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라 世尊하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야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世尊하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福德도 亦復如是하야

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제4 머무름 없이 행하라(묘행무주분)

   “또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과 네 간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Section IV. Even the most beneficent practices are relative

 

Furthermore, Subhuti, in the practice of charity a bodhisattva should be detached.

That is to say, he should practise charity without regard to appearances; without regard to

sound, odour, touch, flavour or any quality. subhuti,

thus should the bodhisattva practise charity without attachment. Wherefore?

in such a case his merit is incalculable.

Subhuti, what do you think? can you measure all the space extending eastward?

No, world-honoured one, i cannot. Then can you, Subhuti, measure all the space extending

southward, westward, northward, or in any other direction, including nadir and zenith?

No, world-honoured one, I cannot.

Well, Subhuti, equally incalculable is the merit of the bodhisattva who practises

charity without any attachment to appearances. subhuti, bodhisattvas should persevere

one-pointedly in this instruction.

  

[科 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불교의 오묘한 법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묘행(妙行)은 수행(修行)한다는 말이고, 무주는 마음을 닦을 때 어떤 조건 어떤 법에도 머물러서 집착하고 걸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대승의 진리인데 세 번째로 묘행 무주의 도리를 말한다고 해서 제 사분(第四分)이라 한 것인데 그 내용의 요의(要義)를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성불(成佛)하고서야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고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당지옥(天堂地獄)의 윤회(輪廻)를 하고 돌아다니며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갖가지 몸뚱이를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기도 했지만 이 마음만은 문둥이도 아니고 재주 있는 것도 아니고 질량(質量)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계(現象界)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學問). 지식(知識). 돈. 권력(權力). 육체생활(肉體生活) 등에 얽매어 아무리 애써서 죽도록 해봐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다 헛것입니다. 온 세계 권력을 가지고 세계 돈 다 모아 봐도, 또 도서관(圖書館)의 지식 다 알아봐도 제일 큰 인생문제(人生問題)인 죽음만은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 밥 세 그릇 때문에 “밥 못 먹으면 죽는다. 육체가 죽으면 내가 죽는다.”고 착각(錯覺)을 하여 가지고 “하루 밥 세 그릇 가운데 한 그릇이라도 못 먹으면 영원히 못 먹는다 죽은 뒤에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보살은 이런 마음을 다 쉬라는 것입니다. 세 그릇 먹든 거 두 그릇 먹고 나머지 한 그릇 배고픈 사람 주자, 배고픈 사람 배를 채워 주었으니 복이 되고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 생명, 이것을 찾아 우주에 자유해 보자, 그래서 생사(生死)도 없어지고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면 이익 되고 저걸 버리면 손해가 클 테니 절대로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하는 등의 망상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지니기 때문에 소위 업(業)이란 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은 보고 듣는 거 꼭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심(無心)이 되어 생각이 없으면 하루 종일 다녀도 남과 싸우거나 장난을 하거나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어제 내가 저물도록 얘기해 놓고도 오늘 만나면 또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업(業)이 녹는 것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란 말은 비록 팔만사천계율(八萬四千戒律)을 다 지키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지만 그런 모든 걸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농사를 뼈 빠지게 짓더라도 그 농사지어 뭘하겠다는 생각 버리고 그냥 농사만 지어라 장사를 해도 이 돈 벌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아무 잡념(雜念) 없이 뼈빠지게 하라, 그래서 아껴 먹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에게 몽땅 다 베풀어 줘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씨와 그 공덕(功德)을 말씀한 것이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입니다.

  

原文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解義 부처님께서 수보리 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또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법에든지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應無所住 行於布施)” 하심은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내 것을 주고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기분 내지 말고 사회봉사(社會奉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안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그저 중생을 위해서 노력한 것뿐입니다. 중생(衆生)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해서 잘 했다는 서투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니 자연히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성인(聖人)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법(於法)이라 함은 모든 법이란 뜻이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 어떤 환경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그런 말입니다. 남자 건 여 자건 노인이건 젊은이건 한국사람 외국 사람을 가릴 것 없이 다 잘 살게 해 주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 주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 떠 주어도 은혜(恩惠)를 베풀어주었다 하여 공치사(功致辭)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굴레에다가 뒤집어 씌워서 구속을 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본래 있으니까 나를 준 것이지 네 것을 주었느냐.” 하고 감정적(感情的)으로 말을 해도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비(是非)가 분분(紛紛)해집니다. 그래서 생사번뇌(生死煩惱)가 질펀하게 벌어져서 고통(苦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니 무신경(無神經)이 되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남에게 받기도 하고 해야 합니다.

  보시(布施)에 대해서 시수물삼륜(施受物三輪)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출가(出家)해서 처음 절에 들어가면 이것부터 배웁니다. 곧 수레는 여기 있는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도구(道具)로서 세 가지 바퀴는 첫째 시륜(施輪). 수륜(受輪). 물륜(物輪)의 셋입니다. 시륜(施輪)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뜻하고 수륜(受輪)은 주는 물건 받는 것을 뜻하고 물륜(物輪)은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받는 돈이나 밥이나 물건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함을 알아서 주고받는 자리가 없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갚을 사람이 생기고 빚 받을 사람이 생깁니다. 땅 위에 공공연(公公然)히 있는 물건을 도둑질해서 이쪽 물건을 저쪽으로 옮긴 것뿐이니, 주는 생각 없이 주어야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내 것을 남에게 주었거니 하고 생각하면 이것이 지옥 갈 시초(始初)가 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도 아무 게한테 무엇을 받았으니 큰 빚을 졌구나 하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보다 더 급한 사람 있으면 생각 없이 또 주기도 합니다. 은혜를 졌다 해서 고맙다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받으면 이 사람은 물건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수륜이 청정한 것입니다(受輪淸淨).

  천지(天地)에 공공연하게 있는 땅을 마음대로 금을 그어 놓고 압록강(鴨綠江) 이쪽은 중국 땅이니 못 온다 하여 국경(國境)을 만들고, 물건은 아무개 것이라고 소유권(所有權)을 인정하며, 농사를 지어 추수(秋收)해 자기 집 곳간에 쌓아 두고는 이것은 내 것이니 아무도 가져가지 말라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잘못이고 중생살이입니다. 그러지 말고 입 있는 사람 배고픈 사람 다 오라고 해서 농사를 지어야 바로 하는 농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잘못된 근본 생각이고 생사를 윤회(輪廻)하게 된 근본 착각(錯覺)입니다. 나를 내 세워서 소유권(所有權) 행사를 하려하고 끝없는 욕심(慾心)을 내어 점령(占領)하려는 착각(錯覺)이 삼차전쟁(三次戰爭)을 일으키려는 근본망상(根本妄想)입니다. 천지(天地)에 공공연히 있는 청정한 물건을 아무 윤리(倫理)도 도덕(道德)도 없이 대포알이 한 개만 더 있어도 먼저 기습해서 점령하려고 하니 모두가 도둑의 심보입니다.

  그러므로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도리를 잘 배워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상 없는 무상(無相) 무소주(無所住)로 아무 생각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첫째 나부터 내 가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나절 일해 주고 밥만 한 그릇 달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시킬 겁니다. 옷은 쓰레기통에서 주어 깨끗이 빨아 꿰매 입을 요량(料量)하면 됩니다. 이것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를 배우는 태도입니다.

 

原文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解義 남을 위해서 보시(布施)하는 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식보시(知識布施)이고 돈이나 재물(財物)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布施),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외로울 때,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시를 함에 있어서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조건 없이 불교의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보시(法布施), 재물로 남을 구제해 주는 재보시(財布施), 외로움 두려움을 보살펴 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의 보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은 좋다고 집착하고, 더럽고 거칠면 싫다고 미워하여 좋아하는데 집착하든지 싫은데 집착하든지 합니다. 미인(美人)은 좋아하고 추녀(醜女)는 싫어하며 집도 크고 아름답게 지었으면 좋다고 집착하고 모양 없이 지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은 추하여 싫다는 생각에 집착됩니다. 이와 같이 눈을 통해서 집착될 수 있는 객관(客觀). 시각(視覺)의 대상(對象)으로 받아들이는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여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쓰는 빛색자(色)는 빛깔이나 물질의 모양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을 뜻하는 글자이니 부주색(不住色)이란 말은 곧 눈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聲)나 코로 맡는 향기(香)나 혀로 아는 맛(味)이나 몸으로 아는 촉감(觸)이나 어떤 사상. 지식. 도덕. 윤리. 신앙. 종교 등의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성악(聲樂)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나는 성대(聲帶)가 좋다 학급에서는 내가 제일이다.”하는 자존심(自尊心). 아만심(我慢心)을 가지고 남에게 노래를 들려주려면 잘 안 됩니다. 또 말을 잘한다고 해서 청중(聽衆)을 무시(無視)하고 강연(講演)을 해도 그것은 안 됩니다. 더구나 불법(佛法)을 설명하는 법사로서 “나 같은 법사 또 있을 수가 있나, 나 말고는 법사가 또 없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큰 탈입니다. 아상(我相)이 꽉 차서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 밑에 마당가에서나 설법을 하는 사람이지 방안에서 올바른 설법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가 좋다든지 말을 잘 한다든지 하는 등의 소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不住聲布施).

  또 의복(衣服)을 한다던가, 아들을 처녀한테 장가를 보낸다던가, 자기 딸을 어떤 총각한테 시집보낸다던가 하는 것을 다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좋은 촉(觸)을 수용(受用)하도록 해 준다는 뜻입니다(不住觸布施). 또 일체 만법(萬法)을 다 설명해서 세상 지식을 다 알고 불법도 다 알아 이런 것을 다 이해시켜 주지만 그 진리가 꼭 이런 것이라는 결정적인 고집(固執)을 버리고 그런 생각에 머물지 말고 가르쳐 주고 보시해 주라는 것입니다(不住法布施).

 

原文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解義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를 해석할 때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 “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기는 경우와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고 풀이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의 해석은 “보시하라”는 뜻이 있지만 뒤의 해석은 “보시하지 말라”는 뜻이 되므로 뒤의 해석에 따르면 중생을 제도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고 불법도 전할 자비심이 없는 독성나한(獨聖羅漢)이 되어 소승불교(小乘佛敎)에 가깝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證得)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불과(不果)를 증득하지 못 하게 됩니다.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해석해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되고 잘했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까지 버리고 설명하는 동시에 “발심(發心)하라, 일일이 활동하라,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인 대승심(大乘心)을 가지고 대승행(大乘行)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 앞에서처럼 새기면 소승이고 뒤의 해석대로 새기면 대승이 된다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새기든지 뜻은 바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는 말도 곧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고집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하므로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경문(經文)을 계속해서 새겨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빽빽이(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수菩提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 “이와 같이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한 말씀이 분명히 있으니 앞의 구절도(句節)도 <보시하라>는 뜻으로 긍정적(肯定的)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原文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解義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若菩薩) 상에 머물지 않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이 집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도와주고 보시하면(不住相布施), 그 복과 덕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이니라(其福德不可思量) 하셨는데, 가령 농사(農事)를 짓되 추수(秋收)를 해서 내 곳간에만 쌓아 두지 말고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 있으면 먼저 먹으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마침내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정말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 버립니다.

  금강경이 상하권(上下卷) 두 권인데 이 금강경만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경보는 힘이 생겨서 다른 경전(經典)을 볼 때에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경보는 눈이 열렸다고 하여 경안(經眼)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가들면 신랑 노릇 잘 할 수 있고 시집가도 요조숙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충신(忠臣)이 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게 됩니다. 금강경의 도리로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상대를 위해서 봉사했기 때문이고 나 없는 마음으로 인아산(人我山)을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에 그 복덕이 한량없어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므로 이 한 몸을 다 바쳐서 하나뿐 아니라 열 백 천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위해 보시할 수 있고, 생각 없이 하므로 상대의 뜻에 맞추어서 남을 가장 잘 위하는 방법으로 온 정성을 다 해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말씀을 해설해 주고 육신이 내가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갖 보살행(菩薩行)을 할뿐이므로 그 복덕이 한량없다고 한 것입니다.

原文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

       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 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解義 부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하는 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허공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허공이 얼마나 되겠느냐. 허공의 끝이 있겠느냐(東方虛空 可思量不)”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허공은 제일 큰 공간(空間)이어서 그 크기가 무한대(無限大)입니다.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無限)이니 동쪽의 허공도 무한이고 서쪽의 허공도, 남쪽의 허공도, 북쪽의 허공도 무한입니다.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의 간방(間方)도 그렇고 상하(上下) 아래위의 공간도 무한하여 끝이 간 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방팔방만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렇게 평면적인 공간세계만을 말하지 않고 방위(方位)를 말할 때에도 입체적으로 생각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4간방(間方)에다 상하방(上下方)을 합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말합니다. 경문(經文)에 남서북방사유상하(南西北方四維上下)라고 한 말들이 곧 그 말씀인데 사유(四維)는 네 간방을 가리킨 말입니다. 허공의 크기가 본래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므로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으로 하는 도심(道心)은 헤아릴 수 없고, <나라는 생각(我相)>. <남이라는 생각(人相)>.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 <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이 없어져서 머무는 것 없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중생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은 무한대(無限大)의 허공처럼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 것입니다.

 

原文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解義 부처님께서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결론으로 “보살은 다만 가르쳐 준 그대로 머무르라(菩薩但應如所敎住)”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께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청(請)하여 여쭈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云何應住) 어떻게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이까(云何降伏其心)”한 물음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십니다.

  부처님의 경전(經典)에는 언제든지 나중 물은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물은 것은 뒤에 대답하십니다. 마치 회의(會議)하는 규칙(規則)에 개의(改議). 재개의(再改議)가 나오며 재개의, 개의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문제를 낸 동의(動議)는 맨 나중에 결정하는 논리(論理)와 같습니다. 이 금강경에서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나중 물었으므로 잘난 체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없애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하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운하주(云何住)에 대한 말씀을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지 않고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머무는 일(住)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먼저 말씀하시고 운하주(云何住)를 나중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 가지든 백 가지든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말씀해 주셨으며, 49년 동안 이순서(順序)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삼장 대승정종뿐(大乘正宗分)에서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서 중생심(衆生心)을 가지고 내가 잘하거니 하는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설법(說法)을 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되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하는 방법이 “주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고 또 만일 “주하지 않는데 주한다”, 그러면 그것 역시 주하는데 떨어진 것이 됩니다. 마음을 주한다 함은 우리말로 마음먹는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라”하는 말도 마음먹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곧 열반을 향해서 보시를 꾸준히 행하라, “내가 본래 부처이니 부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라”는 것입니다.

 

[說義]

(1) 처음부터 끝까지 여시의 숙제

  금강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여시>(如是)가 자주 나옵니다. 이 “여시”가 어떤<여시>인가.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내가 묻기 전이라도 얘기하십시오. 경산림(經山林)을 다 마칠 때까지 이 여시(如是)가 숙제(宿題)가 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참말로 깨칠는지도 모릅니다. 뉴우톤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류 인력(萬有引力)의 원리를 발견(發見)하듯이 법문 듣고 오고가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 깨친 얘기를 들어보면 닭 우는소리를 듣고 깨치고, 물 내려가는 소리 듣고 깨치고, 복숭아꽃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보고 깨치고, 사람들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치기도 하고 상여 나가는데 상주(喪主)가 “아이고”하고 우는소리 듣다가 깨치기도 합니다.

  이 “여시”에 금강경의 내용 전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숙제로 해서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뉴우톤처럼 자나 깨나 오거나 가거나 법문을 들을 때나 식사(食事)를 할 때나 이 숙제만 가지고 있으면 홀연히 깨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여시”를 완전히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다같이 눈 둘 있고 코 하나 있고 하니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설사 우리가 그 분이 도인(道人)인 줄 모르고 산다 하더라도 이런 분이 우리나라에 계신 것만 해도 우리한테는 큰 은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용심(用心)이나 행동이 나만도 못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보살(菩薩)이라 한 말은 보리(菩提)와 살타(薩埵)가 합해진 말인데 보리 곧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밑에 살타 곧 중생은 아직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니 용심이 이러니 행동이 저러니 하고 함부로 말하다가는 까딱 잘못하면 큰 죄를 짓기 쉽습니다.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았다 해도 중생 놀음하던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것을 당장 떼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의 금강경 산림 가운데 정말 깨쳐서 <여시>에 대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생기고 경을 알고 대답할 사람이 생기면 참으로 경사(慶事)지만 그렇게는 못된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의 분별로라도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을 혼자서만 보는 것보다는 남하고 이렇게 저렇게 토론(討論)을 하고 같이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강원(講院)에서도 나 혼자서는 밤새도록 보고 새벽에 보고 아침에 보고 낮에 보고 해도 이해가 잘 안되다가도 서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번쩍 나서 풀리어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傲氣)로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주의(注意)를 집중하는 바람에 정신이 통일되어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신을 희미하게 가지니까 그렇지 정신을 일념으로 통일하여 마음자리에 가깝게 접근하면 <여시>의 지혜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2) 견성해도 대승행 닦아야

  그래서 반야경(般若經)의 실상반야(實相般若),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布施)를 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다 행하라, 하는 것은 실상 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이런 잘못은 없습니다.

  요새 참선(參禪)하는 수좌(首座)들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을 짓지 않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念慮)하여 육조대사께서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體得)했으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념(專念)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도하라. 제도를 하되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천당(天堂) 사람도 되고 태생(胎生). 난생(卵生)도 되고 지옥(地獄)도 되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내가 고쳤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지도(指導)했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것 느끼지 말고 저건 내가 제도한 중생이거니 저건 내 신도(信徒)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고 배우는 중생들에게도 듣고 배운 건 다 알고 나면 잊어버리고 들을 줄 아는 그것도 깨치도록 해서 지도를 받았거니 배웠다 거니 하는 아상. 인상이 없어지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인욕(忍辱)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辱)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남이 욕한다고 야단 치고 보복(報復)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煩惱)의 생사심(生死心)만 늘지 언제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합니까.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근본이지만 반야를 깨친 다음에는 그래서 나의 업보(業報). 망상(妄想)을 쉬고 녹이는 데는 인욕(忍辱)이 중심이 됩니다. 남이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할 것도 없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서 반죽음이 되었어도 “왜 그러냐”고 한마디 따질 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도 이 모양이고 오늘도 이 모양이고 내일도 이 모양이고 여려 천만 년 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成佛)한 뒤나 똑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른 건 모두 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갈팡질팡하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존재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이나 부처나 다 같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두루 다 평등한 것이므로 내가 깨우쳐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 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천하태평객(天下泰平客)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실패를 했다 성공을 했다.” 그런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현실(現實)은 마음에서 생긴 꿈이니 이런 식으로 알고 내일부터라도 흉내 내어 살아 봅시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하면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어도 능률이 더 나고 근심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죽고 살고 흥망성쇠(興亡盛衰). 시간세계(時間世界)를 다 초월(超越)해서 망각(忘却)했기 때문입니다. 공포증(恐怖症)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있고 욕심이 앞서 있으면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정구장(庭球場) 앞을 지나치던 정구선수가 친구의 권유(勸誘)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보려는 생각으로 몇 번 친 것이 선수 생활 십년 동안에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볼을 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나 지면 큰 일 이라는 공포심이 없이 아무 생각 없는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처가 정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한 근본 자성 자리에 합하기만 하면 이런 묘한 기술(技術)이 나옵니다. 권투나 축구나 검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연습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만능(萬能)하던 마음자리가 안심(安心)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옵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잘 써야 되겠다는 공포증(恐怖症) 때문에 잘 안 써집니다. 왕희지(王羲之) 같은 이도 어느 날 친구의 연회(宴會)에 초대되어 만취(滿醉)하여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 줄 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자기로서는 십년 백년이 걸려도 쓸 수 없는 명필(名筆)이 있어서 “어느 신선(神仙)이 와서 나를 깨우쳐 주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며칠 뒤에야 자기가 취중(醉中)에 썼다는 것이 기억(記憶)이 됐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글씨의 십분의 일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씨도 무심하면 자연히 명필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不住相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3) 불입문자 교외별전의 자리

  그러면 머무른 데 없이 보시를 행한다(應無所住 行於布施)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시하는 것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말한바 있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생활. 육체 생활을 정리해서 하루 종일 나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차차 돌리고 탐욕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정리해서 참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돌리며 오직 남만을 위해서 사는 보살행을 하라는 말입니다. 보살행은 본래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고 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보리. 열반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니 보리라 함은 생사도 열반도 없고 시간도 공간도 남자도 여자도 부처도 중생도 초월하여 초월한 그것까지 없는 자리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보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내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얘기를 계속해도 피로가 안 오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글이나 지식으로 분별해서 알아질 수 없는 자리이므로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도리라 합니다. 말이나 문자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이심전심의 법으로 전법하셨으므로 교 밖에 따로 전했다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합니다. 또 이 자리는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간접적인 방편에 불과하므로 마음을 직접 가르쳐서 그 본성을 깨우치게 함으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도리로 성불하게 하는 법이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그래서 대선사(大禪師)에게 법문을 청할 때나 주요한 의식을 할 때면 늘 이런 게송(偈頌)을 외웁니다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개권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開卷無一字 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 이 경전이 있지만 그러나 이 경전은 종이나 먹으로 쓴 글씨거나 인쇄 제본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므로 펴 봐야 한 글자도 없다. 이렇게 종이나 먹으로 된 책이 아니어서 한 글자도 없는 이런 경전이 나에게 한 권이 있는데 상방대광면(常放大光明)”이라, 항상 큰 광명을 발하여 전 우주를 환히 비추고 있다. 이것이 곧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금강경의 믿음으로 보면 반야(般若)고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입니다. 이 반야. 마음을 얻어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할 때면 손이고 발이고 눈이고 목숨이고를 돌보지 않고 다 보시하는데 지기를 희생했다는 생각도 중생이 구제됐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것이 “응무소주”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4) 부처님의 설법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제자들이 대개 청법을 해 오는데 무엇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때로는 열 가지 백 가지로 여쭈어 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처음 물은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물은 것부터 먼저 한 문제 한 문제 설명해 주십니다.

  금강경도 제2절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수보리존자가 먼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오며(應云何住)”를 여쭈었고 나중에 “마음을 어떻게 항복하겠사옵니까(云何降伏其心)”하고 두 가지를 여쭈었는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제3 대승정종분에서 나중에 여쭈어 온 “마음 항복 받는 법”을 먼저 말씀하셨고 먼저 여쭈어 온 “마음 머무는 법”에 대해서는 제4 묘행무주분에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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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스님강설 金剛經

http://blog.naver.com/badre/30107217094

 

大乘正宗分 第三

대승정종분 제삼

 

佛告 須菩提하사되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아개영입무여열반

 

而滅度之하리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하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實無衆生得滅度者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실무중생득멸도자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일세라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제3 대승불교의 진수(대승정종분)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 것이다. 무릇 일체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긴 것>. <태로 생긴 것>. <습기로 생긴 것>. <화하여 생긴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남김없이 다 부처되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Section III. The real teaching of the great way

Buddha said: subhuti, all the bodhisattva-heroes should discipline their thoughts as

follows: All living creatures of whatever class, born from eggs, from wombs, from moisture, 

or by transformation, whether with form or without form, whether in a state of thinking or exempt 

from thought-necessity, or wholly beyond all thought realms-all these are caused by me to attain 

unbounded liberation nirvana. yet when vast, uncountable, immeasurable numbers of beings

have thus been liberated, verily no being has been liberated. Why is this, Subhuti? it is because no 

bodhisattva who is a real bodhisattva cherishes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科 解]

대승정종분 제삼(大乘正宗分第三)이라 함은 대승의 골수를 말하는 제삼장이란 뜻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 소승불교(小乘佛敎)하는데 소승불교는 자기 하나만 열반(涅槃)을 얻어 가지고 이 세상에 근심. 걱정 없이 나 홀로 편안하게 지내는 불교를 말합니다. “열반의 대해탈(大解脫)을 증득(證得)했으므로 지구(地球)가 깨지거나 우리 민족 다 죽거나 정치 거꾸로 하거나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이 육신(肉身) 잡아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신경 쓸 것 하나도 없다. 말도 안 듣는 중생들한테 타이르고 가르쳐 줘 봐야 말 안 들으면 욕하고 야단하고 똑같이 해야 되니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중생들 시비에 나 까지 말려들어서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다시 일어나고 말겠다.”고 하여, 자기 본위(本位)로만 생각하고 중생들 구제(救濟)할 생각을 안하는 것이 소승불교(小乘佛敎)의 태도이고 나한(羅漢)님들의 용심(用心)입니다. 그러니 이런 열반은 옳은 열반이 아니고 옳은 깨달음이 되지 못하므로 소승불교라 이름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염세주의(厭世主義)라고 지탄합니다.

대승보살(大乘菩薩)은 자비심을 일으켜서 고약한 중생에게 이런 법을 얘기해 주고 그들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져주는 일에 헌신하는 구세주의(救世主義)입니다. 내 옳은 것을 남에게 옳다고 인식시키는 설교 시간이 나에게 가장 철저(徹底)하는 시간입니다. 나 혼자 독경(讀經)을 일 년 내 또는 평생 하는 것보다도 금강경을 한 번 읽고 단 반시간만이라도 남을 위해 해설하는 그 공덕(功德)이 참으로 비유도 안 되는 정도로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남이 알도록 설법하는 그 시간이 정말 불법이 자기 뼈 속에 골수 속에 박혀 자리 잡는 시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에게 법문 해 주는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한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나쁜 중생 이것이 나를 부처로 만드는 좋은 부처로구나, 도가 되는구나.”하고 부처와 중생과 마음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니 가령 신부나 목사나 유교의 선비나 누구나 간에 몇 달 며칠이 걸리든지 그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는 걸 봐야 안심하고 가만히 있지 그전에는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매일 자꾸 얘기만 합니다. “내 얘기 안들으면 못가겠다, 죽여도 좋다, 죽이려면 죽여라, 귀신이라도 당신에게 설교하고 말겠다.” 이렇게 까지 적극적이고 중생과 나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대원력(大願力)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여 마침내 성불하려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이와 같은 대승(大乘)의 참 불교가 여기서부터 나오게 된다는 뜻으로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라 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금강경의 요긴(要緊)한 대의를 밝힌 대문(大文)이라 할 것입니다. 금강경의 정종분(正宗分)은 서분(序分)과 맨 끝의 끝 부분인 유통분(流通分)을 뺀 전부이지만 그러나 금강경의 정종분(正宗分)을 다시 삼십일분으로 나누어서 볼 때에도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 된다는 뜻으로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라고 한 것입니다.

 

原 文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應如是住) 이와 같이 번뇌망상을 항복받으라(降伏其心)”하신 <이와 같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말씀하시려는 차례입니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보살은 인도 말로 보리살타(菩提薩埵), 곧 보리의 보(菩)자와 살타의 살(薩)자를 줄여서 합친 말입니다. 보리는 <깨달음>이란 말이고 <살타>는 중생이란 말이니 <보리살타>의 뜻을 번역하면 <깨친중생(覺有情)>이 됩니다. “마음을 깨쳤는데 아직 업이 남아 있어서 이성(異性)끼리 만나면 딴 생각이 나고 좋은 음식 봐도 먹고 싶고 그런 오욕업(五欲業)이 남아 있어서, 요새말로 덜 떨어진 걸로 봐선 중생이고 깨친 것으로 봐선 보리고 그래서 부처도 중생도 아닌 도인이다.” 이런 뜻을 가진 말이 보살입니다. 또 <마하살>(摩訶薩)이라고 하는데 마하(摩訶)는 크다는 뜻이며, 큰 보살이란 뜻으로 씁니다.

우리가 도인이란 말을 흔히 쓰는데 부처가 다 됐느냐 하면 아직 그렇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마구잡이 중생이냐 하면 중생도 아니란 뜻입니다. 참 중생도 참 부처도 아니고 부처가 되려가는 그런 중생, 부처에 가까워 가는 선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직 성인은 아니고 부처가 되지 못한 보살들, 마음이 완전히 밝게 드러나지 못한 도인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아라.” 그렇게 말씀하고는 여기서부터 조금씩 풀어 나가며 어찌해야 부처가 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다 같이 동냥해서 밥 먹고 똥오줌 누고 부처나 비구나 누구나 대중과 함께 앉았으니 표면상(表面上)으로는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수보리존자는 여기서 부처님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이며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따라 배우겠습니까. 부처님께 여쭌 것입니다. 아란존자가 경 첫머리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한 “이렇게”와 여기서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이와 같이 항복하라고 한 이렇게는 같은 말입니다. 곧 자세한 내용이 그 경안에 들어 있다는 뜻을 암시합니다. 하나의 전제로써 “이와 같이”란 말씀을 해놓고 이제 그 부처되는 길, 마음 항복 받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原 文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解 義 소유일체 중생지류”(所有一切 衆生之類)란 광대무변한 우주에 무수한 중생들이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 많은 중생들은 그 종류와 수가 많아서 사람. 벌레. 물고기. 날짐승 등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금강경에서는 이 중생들을 대체로 아홉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난생(卵生)인 알로 까는 중생이 있고, 둘째 태로 나온 태생(胎生)이 있고 셋째 습생(濕生)은 습하고 썩은 데서 나오는 세균 같은 벌레들을 말합니다. 또 화생(化生)이란 꿈의 몸뚱이, 지옥천당의 몸을 말합니다. 꿈에 있는 몸뚱이는 아버지 어머니한테 받는 몸뚱이가 아니고 우리 마음으로 만든 몸뚱이 인데 이 몸뚱이는 기억에 의해 생겨 나온 기억의 몸뚱이며, 이것은 난생. 태생도 아니고 습생도 아니며 이 몸뚱이는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지옥 중생의 몸뚱이도 영혼이 바로 지옥으로 들어가 받는 몸으로 꿈에 있는 몸뚱이와 똑 같습니다. 그곳에는 부부 생활을 통해 태어나는 난생, 태생류의 출생(出生)이 아니고 영혼이 바로 천당 지옥에 가서 태어나는 출생 입니다. 천당사람은 영혼이 그대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며 극락세계는 빨간 연꽃이 피어 나와 가지고 그 속에서 사람이 저절로 생깁니다.

일정(日政) 때 원산서 있던 실화로서 화생의 실제를 말해주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번뇌가 있어서 크게 고민하고 있던 한 청년이 밝은 달밤에 명사십리(明沙十里)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은 채 이 생각 저 생각 얼마를 고민하다가 눈을 떠보니 달도 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없는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집에나 들어가 보자 생각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나이도 자기와 비슷하고 키도 비슷한 웬 처녀가 자기 앞을 지나갑니다. 이 깊은 밤에 처녀가 혼자 가는 것을 보니 저 처녀도 나처럼 번뇌가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나 해 보려는 마음으로 자꾸 가까이 붙어 따라가는데 그 여자는 뒤도 보지 않고 급히 가기만 합니다. 이 처녀는 무슨 번뇌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동지적 입장일 것이라는 호기심에 끝까지 따라가기로 마음 먹고 가는데 나중에는 어떤 집으로 들어가더니 마루에 올라서서 건너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닭 쫓던 개처럼 그 집 마당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여러 사람이 나와서 “너 이놈 웬 놈인데 밤중에 남의 집에 왔느냐. 도둑놈 아니냐.”하고 끌어내어 파출소로 붙들려 갔습니다. 청년은 범인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사실을 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떤 고민이 있어서 명사십리에 나갔다가 정신없이 저녁 늦게까지 있게 되었는데, 마침 깊은 고민에 잠기어 걸어가는 처녀를 보고 나와 같은 입장인가 싶어 동정하는 뜻에서 끝까지 따라 왔을 뿐입니다.” “이놈아 우리 집 딸은 몸이 아파 석 달째나 몸 져 누어서 바깥출입을 못하고 지금도 미음을 못 마시는데 명사십리를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하며 그 딸의 아버지가 호통을 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딸이 아버지하고 그 청년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보니 딸의 이야기가 “아버지 제가 조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평소에도 명사십리 한번 나가 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밝은 달이 창문에 비춰 오는 바람에 명사십리생각을 몹시 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 꿈 가운데서 명사십리로 나갔습니다. 꿈속에서 저도 너무 늦도록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지런히 집으로 오는 중인데 웬 청년이 제 뒤를 자꾸 따라 왔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사람들도 없는 밤중에 가뜩 무서운데 청년이 따라 오므로 더 무서워져서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꿈이 깨었는데 지금 그 청년이 꿈에 본 청년인 것 같습니다.”하는 꿈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처녀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여러 달 명사십리만 자꾸 생각 하다 보니 자기 화신(化身:마음으로 화하여 된 자기의 분신(分身))이 꿈으로 나타나서 그 화신이 명사십리로 가게 된 것이고 그 청년과 만났던 것입니다. 이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자기 생각이 자기 몸으로 나타난 것인데, 꿈의 경우보다 한층 더 강한 마음의 힘에 의해 나타난 화신의 현실적 예라 할 것입니다. 요새 미국이나 영국이나 독일 일본의 심령학계(心靈學界)에서는 자기 화신을 외국에 보내서 같이 말도 하고 같이 일도 보고 그런 사람도 있고 말은 못하고 나타나서 얼마동안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있고 그런 화신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백억화신(百億化身)을 나타내시어 교화하셨습니다. 실달다태자도 사실은 부처님의 천억 백억의 몸 가운데 해당하는 화신입니다. 그래서 화신 보신(報身:공덕의 과보로 받는 불신의 하나) 하는 것이 다 꿈에 육신이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듯 다 같은 이치로 나타난 몸입니다. 인도의 실달다태자(悉達太子)는 천백억 분의 일의 화신으로서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뱃속에 들어가서 열 달 동안 커가지고 나오느라 애썼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제일성(第一聲)을 하신 것 그것이 다 마치 화신이 나타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꼭 엄마 뱃속에서 나온 역사적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역사적 인물 그대로가 화신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화신(化身)이란 꿈에 그 몸뚱이가 단순한 죽은 물질이 아니어서 꼬집으면 아프고 참으로 육신이 있는 것으로 느끼듯이 그런 마음으로 화해서 나서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유색(有色)이란 사람이든 짐승이든 벌레이든 간에 몸뚱이가 있는 중생세계를 말하고, 무색(無色)이란 정신만 있는 것 마음으로만 사는 중생을 말합니다. 하늘나라의 경우와 귀신의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유상(有想)은 정신활동을 하고 있는 중생세계, 무상(無想)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하늘나라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없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잠재의식 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 무색계천(無色界天)에 가면 현상계를 초월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어떤 근본적인 번뇌, 잠재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상이란 잠재의식만 있는 상태의 생활,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이 근본적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비하면 잠재의식까지도 끊어진 거나 한가지인 세계를 말합니다.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중생세계는 무슨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고 없고를 다 초월하고 나면 마음속에 저절로 이런 경지가 나옵니다. 인간세상에서도 공부를 해서 무아지경(無我地境)에 들어가면 자꾸 깊이 들어갈수록 재미납니다. 마치 고단할 때 잠이 푹 들어 깊어지면 그럴수록 재미있어서 잠을 깨기가 싫은 것처럼 선정(禪定)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 사는 하늘나라의 중생을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중생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의 가장 높은 최고의 하늘나라에 가면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이 있는데 이곳의 하늘나라가 바로 그런 정신의 경지에서 사는 중생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나라도 생사(生死)를 완전히 해탈(解脫)한 것은 아닙니다.

 

原 文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解 義 이렇게 각양각색 각종의 모든 중생의 수는 실로 무량무수이어서 한강모래의 천만억 배나 되는 그런 모래 수의 몇 억 제곱보다도 훨씬 더 많습니다. 그 많은 중생들을 “아개영입 무여열반(我皆令入 無餘涅槃), 내가 모두 부처님이 들어가시는 열반에 들어가도록 공부를 가르쳐 한 중생도 남김없이 부처가 되게 하고 말겠다.” 보살은 이렇게 원(願)을 세우고 그 원을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중생들을 다 제도해서 그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적멸열반(寂滅涅槃)에 들어가도록 했고, 번뇌망상을 남김없이 없애서 절대의 행복을 얻게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내가 인연 따라서 그들이 수도할 수 있도록 가르친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동안 무수한 나의 목숨을 저들을 위해 희생했고 그래서 그들이 다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실무중생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 곧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으로서 너 한테 배워 발심하고 네가 지도해서 마음 깨쳐 부처 된 중생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만 있고 다른 데는 없는 법문(法門) 입니다. 어느 중생도 제도(濟度)했다는 생각이 없는 이것은 일체 번뇌가 없기 때문이니 만일 그 생각이 남아 있으면 그 생각을 하는 것이 곧 번뇌가 되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다 떨어져서 열반의 경지에 마음이 합하면 그런 생각 낼 필요도 없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말이나 이치로만 그렇고 실제로 안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치도 실제도 완전하게 그렇다는 뜻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니 선(善)이니 악(惡)이니 하는 것은 다 중생의 현실이라고 하는 꿈속에만 있는 번뇌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解 義 한없이 많은 중생을 네가 실제로 제도했지만 제도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너는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모든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이것은 곧 아상(我相)이 되고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이 되고 수자상(壽者相)이 되는 때문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여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금강경에서 중요한 대문이니 역시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을 깨칩니다. 내가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 그것도 아상이 됩니다.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아무 딴 조건 없어도 이것이 주관(主觀)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무정. 유정 등의 온갖 객관(客觀)이 있게 됩니다. 객관을 전제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인상(人相)입니다. 더욱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하면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육체가 나다.”라고 하는 그 나라고 하는 생각 그것이 아상이고 또 나 아닌 모든 것, 현상계. 객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허공도 다 나는 아닙니다. 이것이 인상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이란 “결혼해야겠다, 돈을 벌어 살림살이 장만해서 아들 딸 대학까지 졸업시켜야겠다. 우리도 남들처럼 뭣도 하고 뭣도 해야겠다.”하여 모든 살림살이를 차리는 것이 중생상입니다. “장가가려면 부잣집 딸한테 가서 처갓집 덕을 좀 봐야겠다, 부잣집 총각한테 시집가서 호강 좀 해야겠다.” 하는 등의 이런 생각 내는 게 다 중생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살림살이에 대한 번뇌 망상을 중생상이라 합니다.

수자상(壽者相)이란 남도 칠십 팔십 사는데 나도 적어도 칠십 팔십은 살겠지, 금방 아파 죽을지도 모르면서 만날 오래 살기 위한 준비하느라고 온갖 애를 다 쓰다 준비도 못다 하고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술 먹은 깡패에게 맞아 죽을는지, 마누라하고 싸움하다 죽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칠십 팔십 나도 살 거니 안심하고 삽니다. 또 칠십 팔십 살았다 해서 만족하냐 하면 그렇지 못하고 몇 억만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을 적에 이 약 먹어야 산다고 하면 쓴 약을 자꾸 받아먹습니다. 이것이 삶에 대한 애착이고 수자상입니다. 산삼을 보면 한 뿌리 사먹었으면 해서 침 안 삼키는 사람 없습니다. 난 복이 없어 산삼 구경도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좋은 약 비타민 영양제 나왔다면 다만 한 병이라도 사먹고 싶어 하는 것, 이게 모두 수자상입니다.

그런데 만일 보살이 “어떤 중생 내가 제도했다” 그러면 그것이 아상입니다. 대승불교 하는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살림살이 걱정하든지 아들 딸 걱정하면 안 됩니다. 전 중생이 모두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 어머니이고 우리 딸이고 아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중생제도 하겠다고 나선 보살이 내가 지도해서 깨달은 중생이 있거니, 제도 받은 중생이 있거니, 생각하면 이것이 인상(人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이고 너는 제자라고 하면 이것이 중생상(衆生相)이고 그러면 자연히 수자상(壽者相)도 따라오게 됩니다.

 

[說 義]

(1) 육신 생활 떠난 보살의 세계

무량무변 중생을 모두 내 식구로 삼고, 이 식구를 모두 불문(佛門)에 들어오게 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성(人間性)을 개발해 가지고 생사를 초월하게 합니다. 이렇게 인간성(人間性)을 깨달아서 전지전능해 놓으면 아무 근심 걱정 없습니다. 내 앞에 죽은 귀신이 다 대들어도, 세계 깡패 다 모여들어도 내가 손톱 하나만 까딱하면 다 떨어지는 그런 완력(腕力)이 생깁니다. 그런 신통(神通)도 있을 뿐 아니라 지혜로도 모르는 게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마음 하나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데서 과오(過誤)가 있고 전생(前生)이고 후생(後生)이고가 있지, 마음이 나인 줄 깨달아 놓고 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고 이 전체가 마음 하나뿐이므로, 허공이 한없이 무한허공(無限虛空)이라고 하지만 마음한테 비하면 무한대의 허공도 역시 내 털구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깨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 근심걱정 일어날 조건이 없어지고 번뇌가 일어날 아무 이유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음만 깨치면 의식주(衣食住)가 필요 없고 권리(權利)도 돈도 필요 없고 꼭 살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죽을 수 없는 산 것이니까 영원히 자유한 것이고 그리고 남녀노소가 없는 평등한 것이니 오직 마음자리만이 전 우주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것이 <나>이거니 생각하고 우리의 육체생활(肉體生活)을 조금씩 축소시켜야 하며 하루 밥 세 그릇 가지고 세 끼 먹던 것을 두 그릇 먹고 한 그릇 남겼다가 불쌍한 사람, 거지 오면 밥 한술 더 주는 이것이 자기 육신생활 포기(抛棄)하는 것인 동시에 참 자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차차 “한 그릇 가지고 하루 먹고 두 그릇 남 주자” 그렇게 할수록 한 그릇 먹고 사는 때가 세 그릇 먹고 사는 때보다 욕심이 없으니, 그래서 욕심이 떠나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잠 안 자도 정신이 깨끗해지고 편해집니다. 밥 세 그릇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염불이나 참선해 봐야 큰 공부 할 수 없습니다. 아침 먹고 얼마 있다가 배고프면 또 점심 먹어야 하니 “이 밥 왜 안 주나. 왜 목탁(밥 먹는 신호)을 안치나”하는 생각으로 화두(話頭)고 참선이고 다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나라고 하는 생각을 떼어 버리는 생활, 이런 사고방식(思考方式)으로 나아가면 차차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조금 먹어도 건강이 유지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참 우리 생활개선(生活改善)입니다. 꼭 잘 먹어야 하는 줄 알고 영양가치 있는 것만 찾고 이런 것은 몸에 해로운 것인 줄로만 알았던 것도 마음이 편하고 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양잿물을 먹어도 독소(毒素)가 안 됩니다. 실지로 해 본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잘 먹고 못 먹는 것이 없어집니다. “항복기심”(降伏其心)을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육체 생활만 치중(置重)하는 것에서 차차 육체 생활을 감축(減縮)해가면 편안하고 잠 잘 오는 음식을 조금 먹어도 몸이 건강해지고 이렇게 마음 세계로 들어가서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완전히 마음을 깨쳐 불보살 지경(地境)에 들어서면 전지전능해집니다. 집도 밥도 없는 게 승려생활입니다. 남이 해 놓은 밥 얻어먹고 그저 만나는 대로 애나 어른이나 자꾸 따라다니며 <마음>을 일러주고 알아들었으면 또 딴 사람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를 모른다면 하나를 일러 주고 누워 자도 설법해 주고 죽어 송장이 되어도 가르쳐 주고 “죽어도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다. 네가 왜 죽느냐 너는 죽을 수 없다” 우리 불교법문 전부가 이런 소립니다. 경전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를 뿐 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하신 것입니다.

 

(2) 중생교화(衆生敎化)가 곧 나의 완성

불교는 말하기는 쉬운 것 같아도 실천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왜정 때 개운사(開運寺)에 시골서 큰 대법사(大法師)가 한 분 올라왔습니다. 그 법사가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설명을 하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우주관. 인생관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부처가 다 된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생긴 것도 그런 법문을 할 때 보면 얼굴이 꼭 부처님 닮았습니다. 밑에서 쳐다보면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잘 생길 수가 있나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법문 다 듣고 신도들이 다 돌아갔는데 어느 한 선비가 그 법사님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하는 말이 우리 조모님이 한 분 계신데 돋보기가 없습니다. 스님께서도 우리 조모님과 나이가 같으신 것 같은데 그 돋보기가 좋아 보이니 그것을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 스님은 “내가 이것 없이는 설법도 못하고 큰일 납니다. 다른 것은 다 줘도 이것만은 안됩니다.”하자 그 선비는 코웃음 치며 “안경도 못 내놓는 사람이 딴 걸 어떻게 내놓겠는가. 돈이 있어도 혼자만 쓰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껄껄 웃으며 “입으로만 부처 노릇 하면 됩니까”하고는 절한 뒤 물러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부처님의 뜻을 요약하면 “수보리야 발심한 보살은 이와 같이 네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다. 네 마음 가운데 죽 끓듯이 일어나는 태평양 파도 같은 번뇌를 항복받는 방법이 무엇이냐. ‘이와 같이’란 ‘여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이제 무량한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원을 세워가지고 동대문 시장도 가고 남대문 시장도 가고 남산도 올라가고 한강. 해운대. 금강산 어디에도 가서 길에서나 차안에서나 어디 가다가 아무데서나 사람 모인데 있으면 설법해 주고 그래서 실지로 미쳤다고 젊은 놈이 저런다고 쫒아내면 달아나다 안 쫒아오면 또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어라. 이렇게 확실히 미쳐야 하는데 여러 평생 미쳐 따라다니며 이렇게 하지만, 그래서 실지로 내가 많은 중생을 발심(發心)시켜서 성불시키지만 내 마음에는 내 설법 듣고 발심해 부처된 사람 하나도 없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너의 번뇌를 꺼 버리는 항복기심(降伏其心)하는 법이다.” 그러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뜻을 잘 모르면 염불(念佛). 참선(參禪)해 가지고 그 뜻을 알 때까지 하여 그 말을 알아들으면 부처가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몰라서 중생이지 불법을 다 알아듣고 나면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그러니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정말 부처님 말씀을 못다 알고 덜 닦아서 보살이 아니라 중생을 다 건지기 위해 일부러 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나 일체 중생이 그 법문을 듣고 깨달아도 문수보살에게는 부처 된 중생 한 중생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번뇌가 끊어지느냐. 왜 그렇게 똑바로 생각하는데 팔만 사천 번뇌를 일시에 다 해결 할 수 있느냐.”하는 그 뜻을 짐작이라도 바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3) 사상(四相)은 육체를 나로 삼는 데서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을 중시하는 것은 이것만 떨어지면 <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상>이라 함은 내가 항상 말하는 육체를 <나>라 하고, 생각을 <나>라고 하는 <가아(假我)>를 말합니다. 이 <가아>인 <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해서 사상(四相)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무엇인가. 발심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말은 인생을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本性)을 발굴해서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을 깨달은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깨달은 이인데,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떻게 백팔번뇌 팔만사천 번뇌를 항복받아야 하겠습니까.”하고 수보리가 질문을 하셨는데 그 뜻을 한 번 더 풀어보면 이런 것입니다.

“인생이 꿈속이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이해가 앞설 때는 욕심도 나고 남녀 이성끼리 만나면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고 이런 쓸데없는 꿈속의 일에 시달립니다. 태평양 바다 보다 더 복잡하고 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니 옳지 않은 이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항복 받아라.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제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중생을 교화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 <나다> <남이다> <중생이다> <부처다> <오래 산다> 하는 분별심(分別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발심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중생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집니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가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좋다 싫다 하고 생각 내는 주체가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항상 말한 바와 같이 물질도 허공도 아닌 산 생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그라미도 네모 세모도 아닙니다. 마음자리는 모나고 둥근 게 아닌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먹을 다 갈아도 하얗게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허공은 본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뭉치고 천층만층 높이 쌓아 봐도 그것이 듣고 보고 생각할 줄은 모릅니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들을 줄은 모릅니다.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싶어야 들립니다. 육체는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이전(次元以前)이고 태초이전(太初以前)이며 질량이전(質量以前)입니다. 이것이 온갖 생각의 주체(主體)이고 진아(眞我)입니다. 따라서 진아의 상대가 가아(假我)이며, 생각의 <나>입니다. <진아>니 <가아>니 해도 실제 마음은 <진아> <가아>를 초월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아닌 만사의(萬事)의 주체(主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설명으로 될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쳐야 합니다,

깨달았다 견성(見性)했다는 말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일어나고 할 줄 아는 그 자기를 깨친 것이니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 안 됩니다. 부처님이 깨쳐 놓고 보니 출가(出家)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고 실달태자(悉達太子) 그대로입니다. “육체 말고 자기 마음 그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닌 진실상(眞實相) 그대로의 마음이 있겠구나”하고 이해가 될 때 그래서 우주에 대자유(大自由)있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이 밥 먹고 똥 싸는 그 마음, 산모(産母)가 아기 어서 나가라고 힘주는 마음 그대로이니 이것은 깨쳤다고 해도 안 됩니다. 본래 미(迷)한 것도 아닌 게 어떻게 깨칩니까. 그런데 육체를 <나>라고 하는 데서 <아상(我相)> <가아(假我)>가 생기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술에 미친 사람, 아편에 미친 사람이 되고 정치에 미친 사람, 문학에 미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인간의 본성(本性)이 개발(開發)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인간성(人間性)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을 뜻하며 선한 것 악한 것이 인간성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걱정 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안 일으키려면 더 일어납니다. 망상 일어나려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지 망상 저 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망상은 가만두고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것만 하면 오늘밤에 깨칠지 금생에 깨칠지 여하튼 깨치게 됩니다. 사람이 전생에 공이 많으면 금생에 깨치고 공이 적으면 내생에 깨치게 됩니다. 하여튼 깨치게 될 그 시간을 바라고 금생에 못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염불이나 하고 참선하고 마치면 그러면 내생에는 깨칩니다.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복을 가지고 태어나고 머리도 지금보다 몇 억 만 배 좋게 태어납니다. 다만 공부하는 데는 깨치려 해도 안 되고 안 깨치려 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될 그런 요소가 나한테 있구나, 오온(五蘊)이 내가 아니구나, 말하는 여기에 배고프면 밥 먹는 여기에 있겠구나.” 여기서 자기 관혁(貫革)을 깨치게 됩니다. 그 부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까 하고 말씀하신 것이 49년 설법입니다. 그러니 경전마다 다 다른 것 같아도 이 이야기입니다. 온갖 세상 학문의 원리가 다 나옵니다. 그걸 모르고 경을 들여다보면 불교의 핵심(核心)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부처란 소리가 어떤 뜻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 입니다. 평생 강사(講師) 노릇해서 제자가 수천 명이 돼도 자기가 모르고 가르치니 제자도 모르고 듣습니다. 마치 눈먼 장님에게 매달려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염불도 그렇고 다른 어떤 공부를 해도 불교의 근본진리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어떻게 해서 해탈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의 기나긴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육조(六祖)대사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듣고 깨치셨는데, 그 뜻은 “번뇌 망상 없이 살아라. 아무 모양. 주의. 사상 그런 거 개의치 말고 지금까지 배운 거 다 청산(淸算)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라.” 그런 뜻입니다. 욕심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 없이 되면 물건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치워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 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리고 기분 나쁠 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妄想)입니다. 그것은 결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 늘 이것을 앞세워서 <나>다, <남이다.> 하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병원에 어떤 보살을 문병 갔다 온 일이 있는데 별안간 사람이 와서 스님 좀 꼭 보자고 해서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한 시간이나 이야기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복잡해져서 마음을 쉴 수 없다며 눈물을 자꾸 흘립니다. 가정불화(家庭不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因果) 얘기를 해주고 관세음보살님 자꾸 부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면 대번에 이것이 독소(毒素)로 변해서 온갖 병을 일으키는 때문입니다. 그래 당신이 그 마음을 풀기 전에는 천하 없이 기도(祈禱)를 하고 한국 돈 다 갖다 바치고 기도해도 천 년 만 년 해도 그 병이 낫질 않습니다. 당신이 전생에 첩이 되어 남편에게 곤란을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마누라가 되어가지고도 남편 번 돈으로 자꾸 딴 놈과 쓰고 다니고 나쁜 짓했기 때문에 이생에 와서 남편이 그러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인과법(因果法)인데 아무 까닭 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 시간 정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그러냐”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 꼭 믿겠다고 하면서 안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인과를 안 믿으면 죽는다. 암(癌)은 아무리 째고 해봐도 별 수 없어 다른데 또 생긴다. 기분이 만든 암이기 때문에 뇌가 또 나빠지기도 해 그러니 마음부터 항복 받으라”고 말해 주고 온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바로 안정이 되어야 병도 낫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도 “병원에 가면 의사가 우리 병을 책임지고 고쳐준다”고 믿는 마음의 안정이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치료하기 전에 벌써 자기 마음이 반은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체는 마음이고 이 현실은 꿈이어서 꿈은 다 마음이 꾸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서부터 백까지가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主宰神)의 피조물(被造物)이라 믿어 구속(拘束)되고 자연계(自然界)의 물리 화학(物理化學)의 원리가 절대적이라 하여 그것에 구속되고 무당이나 점장이에 구속되고 그러지만 중생들의 마음자리 불성자리는 본래부터 완전한 부처이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실존(實存)이어서 가사 우주를 창조(創造)한 신(神)이 온다 해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항복(降伏)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 자기 마음이 만들었던 망상(妄想)이었으니 망상이 천 리 만 리 사라진 본 마음자리가 나타나면 자연히 신이니 과학이니 신앙이니 미신이니 불교니 유교니 하는 따위의 제2의 산물(産物)인 그야말로 피조물(被造物)들은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主宰神)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自然科學)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支配)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실은 우리가 평소 아무것도 모르고 불법도 모르는 이런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개. 소. 도야지 같은 금수(禽獸)까지라도 산보고 높다는 말은 안하지만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은 압니다. 이렇게 말은 없어도 알 줄 아는 이 자리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時間)이나 공간(空間)이 아닌 실재(實在)이고 물질(物質)이나 에너지처럼 죽은 존재(存在)가 아닌 산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이 눈을 통해서 내다보고 귀 구멍을 통해서 듣고 이러지 다른 놈은 다 죽은 것들이므로 그럴 놈이 없습니다. 보인다 들린다 하는 생각 그것이 보고 들을 줄 아는 게 아니고 일체 보는 마음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며,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실재(實在)이고 실존(實存)이고 실상(實相)이고 한 이것이 직접 눈구멍으로 내다보고 귀 구멍으로 듣는 것입니다. 생각 그것도 이 실상의 반야(實相般若)인 마음으로부터 생각되어진 만들어진 피조물(被造物)임이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며칠 동안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인식(認識)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맨 처음 절에 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들을 때에도 실상(實相)인 적멸(寂滅) 그것이 귀를 통해서 잘 듣지 못하는 대로 들었지 딴 놈이 들을 놈은 없습니다. 허공이 들을 수 없고 고기 덩어리인 육체는 물질일 뿐이니 역시 못 알아들을 것이고 다른 귀신이나 도깨비가 와서 듣고 알려 준 것도 아닙니다. 설사 도깨비라 할지라도 그 실상은 역시 불성자리인 마음입니다. 지옥에 가서 두드려 맞고 아픈 줄 아는 것도 알고 보면 역시 실상자리인 그것이 알지 이것 빼 놓고는 무엇이 아픈 줄 알고 재미있는 줄을 깨달을 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들은 그때도 완전히 부처가 돼 가지고 들었고 차차 법문(法門)을 들어서 “세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참선(參禪)을 해야겠구나”하고 말을 알아들을 때에도 역시 본래 완전히 부처가 되어서 듣습니다. 그러니 제도(濟度)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번뇌 망상이 다 없어졌다고 해서 별것이 아니고 내내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 아는 그대로이고 다른 면목(面目)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가 다 돼 있는 것이므로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實無衆生得滅度者)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멀쩡한 부처가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술 취해서 길 가는 것 붙들어 준 폭 밖에 안 됩니다. 술 취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고 술이 깨도 그 사람, 취해도 그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이 탐진치(貪瞋痴) 삼독주(三毒酒)에 취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利害打算)하고 온갖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집착(執着)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진치의 삼독주(三毒酒)에서 깨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다 남이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공(我空)입니다. 번뇌. 망상. 온갖 지식(知識)과 경험(經驗)을 쌓아 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 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 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 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법공(法空)입니다. 부처님의 법공(法空)의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지식을 다 놓아 버리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寂滅) 그 자리가 나타납니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구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아아 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 버리는 이것이 구공(俱空)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서 본래 부처자리인 마음 바탕이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알 줄 아는 성품은 잘못된 착각을 품었다고 해서 손상(損傷)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근본 마음자리는 버러지나 굼벵이가 되었다고 해서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하나도 증감(增減)이 없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변(不變)하는 일여평등체(一如平等體)입니다. 그러니 애당초에 이렇게 완전한 부처가 되어 있으므로 제도(濟度)한다는 생각이 성립(成立)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내가 제도 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 제도할 자격(資格)이 없는 사람이고 보살(菩薩)이 될 수는 더욱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 전체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법사(法師)거니, 내가 누구를 가르쳐 주었거니, 계(戒)를 내가 일러 주었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제도 하지도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제도 하기는 하되 그런 생각이 없이 무심(無心)으로 하고, <하는 것> 없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소승이고 공(空)에 떨어진 것이며, 대승(大乘)이 아니고 금강경의 말씀을 바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말씀은 공의 사상을 철저히 말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여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고 상 없는 마음으로 머무름 없이 중생을 제도하고 인류의 구제를 위해 공의 원리로 백 천억의 육신을 바치고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중생을 발심 시켜서 일일이 지도를 해서 견성(見性)을 하게하고 보살만행(菩薩萬行)을 잘 하도록 호념(護念)해 주고 부촉(付囑)해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성불(成佛)을 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다 꿈속에서 하는 일이고 관념(觀念)일 뿐 꿈을 깨고 보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거기까지 가는 길인 노정기(路程記)만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 당처(當處) 자리는 시방제불(十方諸佛)이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곳은 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꿈속에 들어가서 꿈으로 꿈같은 이야기를 해서 꿈으로 꿈을 깨도록 하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꿈밖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못했고 실상(實相)의 소식에 대해서는 입을 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만 하셨지 사실로 중생이 제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 하는 자리이고 본래부터 그렇게 완전한 자리이므로 제도 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일체 사상. 인륜도덕(人倫道德)이 용납(容納)되지 않습니다. 선방(禪房)에서 참선(參禪)할 때 조금만 허술하면 방망이가 막 내려옵니다. 망상이나 피우는 그런 머리통은 부서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체 중생을 실제로 제도했다 하더라도 제도했거니 하는 생각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곧 중생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고 동시에 불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보살일 수 없고 중생을 제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굶는 사람에게 쌀말이나 주었다 하더라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我相). 인상(人相)이 있는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나선 보살이 제도를 했거니 제도를 받았거니 하는 생각이 있어서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고 불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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