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SHEoLn_9I9M

 

고미숙,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2009.

7 상기 -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
상방 탐방기

코끼리의 형상, 코끼리의 힘
하늘이 코끼리를 낸 뜻은?
차이를 사유하라!

 

(1) 글쓰기 ‘프리랜서’ 연암 박지원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307022003

저잣거리 방황하다 데뷔작 써…청년기 우울증은 그에게 ‘선물’

●두 개의 미스터리 

하나, 1792년 10월 19일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청나라에서 들어오던 명청소품 및 패관잡서에 대해 강경하게 수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리기 위해서다. 동시에 과거를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문이 실시된다.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고 고문(古文)을 부흥시킨다는 명분 하에 정조와 노론계 문인들이 첨예하게 대립한 이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이다. 사건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정조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한다.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온 지 이미 10여년이 지났고, 당시 연암은 개성 근처 연암협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근데, 열하일기가 사건의 배후라고? 웬 뒷북? 아니면 국면전환용 포즈?

둘,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보기 어려운 법/ 연암 시를 본 이 몇이나 될까?/ 우담바라 꽃이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를 쓸 때라네”-연암 그룹의 일원인 박제가의 시다. 3000년에 한번 핀다는 꽃 우담바라. 살아서는 서릿발 같은 재판으로 유명하고 죽어선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포청천. 그가 웃는다고? 차라리 황하가 맑아지기를 바라는 게 나을 터. 그렇다! 연암은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시가 사대부 교양의 척도였던, 하여 저 이름 없는 향촌의 선비들까지 수백, 수천 수를 남기던 그 시대에 연암은 고작 평생 50수 정도를 남겼을 뿐이다. 대체 왜?

●청년기 - 우울증과 탈주

연암 박지원.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 새벽. 서울 서소문 밖 야동에서 태어났다. 노론 일당독재 시절에 노론 벌열가문에서 태어났고,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는 꿈의 예시까지 받았으니 일단 출생은 고귀했던 셈이다. 초상화로 보건대 거구에다 카리스마 또한 장난이 아니다. 명문가의 천재에게 주어진 코스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뿐. 하지만 연암의 생애는 그 입구에서부터 꼬여버린다. 십대 후반 한창 과거공부에 매진할 즈음,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년 연암은 저잣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분뇨장수, 건달, 이야기꾼 등 수많은 ‘마이너 그룹’과 접속한다. 이들에 대한 ‘톡톡 튀는’ 기록이 처녀작 ‘방경각외전’이다. 우울증과 ‘마이너리그’, 그리고 글쓰기. 이 일련의 체험 속에서 연암은 돌연 과거를 포기한다. 평생 권력의 외부에 남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 또한 미스터리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탈주를 감행케 한 것일까? 흔히들 정쟁의 격화 때문이라 여기지만 과연 그럴지는 미지수다. 만약 그 때문이라면 이 청년의 기질상 오히려 현실참여 의지가 솟구쳐야 더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그보다는 기본적으로 그는 격식과 관습에 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타고난 천재가 까다로운 격률이 싫다며 한시를 그토록 멀리했으니,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으랴. 말하자면 그는 ‘본 투 비 프리랜서’였던 것. 우울증은 이런 ‘원초적 본능’을 일깨워주기 위해 ‘신이 보낸 선물’이 아니었을지.


●‘백탑청연’ - 18세기 소셜 네트워크

사대부 문인이 과거를 포기하면 남는 건 시간이다. 연암은 그 시간들을 사유와 글쓰기로 충만하게 채웠다. 더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을 ‘벗’들과 함께했다는 것.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그의 평생의 철학 또한 타고난 기질에 속한다. 문중별, 당파별 강학이 일반적이었던 시절, 연암은 당파와 신분을 가뿐히 뛰어넘는 ‘우정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근거지는 다름 아닌 백탑(탑골 공원).

이덕무, 박제가, 정철조 등 다양한 벗들과 더불어 백탑 근처에 모여 살면서 밤마다 맑고 드높은 지성의 향연을 누렸다. 이름하여 백탑청연! 그들이 주고받은 지식의 스펙트럼은 실로 드넓다. ‘시서예화’는 기본이고, 천문지리에서 기술문명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인생과 우주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그런 점에서 백탑청연은 18세기 지성사의 ‘소셜 네트워크’였던 셈. ‘청 문명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의 이념이 탄생된 것도 거기였고, 소품문과 척독(편지글)을 통해 고문의 기반을 뒤흔드는 문체적 실험이 일어났던 것도 그 장에서였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정판이 바로 열하일기다.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

1780년, 연암의 나이 44세,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중국여행의 기회가 다가왔다.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사절단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애초 목적지는 연경이었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는 무려 2300리. 때는 바야흐로 폭우에 무더위가 교차하는 한여름이다. 천신만고 끝에 연경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동북부 변방의 피서지, 열하에 가 있었던 것. 그리고 한밤중 당장 열하로 들어오라는 황제의 명령이 도착한다. 이리하여 연암과 그의 일행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고북구 장성을 넘는다. 그것도 ‘무박나흘’의 살인적 여정으로.

이 지독한 고난이 그의 글쓰기 본능을 촉발했던 것일까. 이 여정에서 불후의 문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5000년래 최고의 문장이라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생사의 문턱을 넘으면서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를 통해 우주의 이치를 터득하는 ‘상기’(象記) 등등.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급력은 실로 뜨거웠다. 당장 태워버려야 한다는 극단적 ‘안티’에서 천고의 기이한 문장이라는 열렬한 찬사까지. 그래서인가. 열하일기는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공적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오직 필사본으로 떠돌면서 수많은 버전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호학군주였던 정조는 충분히 감지했으리라. 고문에서 소품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가 성리학적 지반에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그런 점에서 문체반정 때 열하일기를 배후로 지목한 것은 ‘뒷북’도, ‘쇼’도 아니었다. 열하일기 없이 18세기 지성사를 논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졌음을 왕의 입으로 직접 증언해준 것일 뿐이다.

연암은 묘비명의 대가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누이와 홍대용, 정철조에 대한 묘비명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에 해당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정작 연암 자신에 대한 묘비명은 없다. 이 또한 미스터리다. 안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 아무튼 지금이라도 누군가 그에 대한 묘비명을 쓴다면, 아마도 이 한 줄이면 족하리라.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

●연암 vs 다산 -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18세기는 별들의 시대였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선도한 정조의 시대이자 연암의 시대였고, 또한 다산의 시대였다. 이 화려한 ‘스타워스’에는 아주 놀라운 수수께끼가 하나 숨어 있다. 연암과 다산, 조선 후기 실학사에서 한쌍의 커플처럼 따라다니는 이 두 거성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

둘 다 서울 사대문 안에 거주했을뿐더러 정조를 중심으로 늘 양편으로 분립했던 두 파벌(연암그룹/ 다산학파)의 대표주자였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연암의 절친들이 다산과도 깊은 교유를 했었는데도 말이다. 더 놀랍게도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둘은 전혀 상이한 궤적을 밟았다. 연암이 일찌감치 권력의 궤도로부터 이탈해갔다면, 다산은 정반대로 권력의 중심을 향해 달려갔다. 재야 남인 출신임에도 그는 정계에 입문한 이후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왕의 남자’였다. 그 엇갈림이 극단적으로 연출되었던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이다. 보다시피 연암은 배후조종자로 찍힌 반면, 다산은 정조의 입장을 옹호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린다. “국내에 유행되는 것은 모두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 오는 자를 중벌로 다스리라.”는.

요컨대, 그 둘은 평행선이었다.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헤어지지도 않는다!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않는 이 운명적 조우 속에서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된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던가. 어디 친구만 그런가. 적을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암은 실로 인복을 타고난 인물이다. 평생을 벗들과의 교유 속에서 살았고, 사후엔 이토록 강력한 라이벌을 짝으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지복은 그가 평생을 권력의 외부에서 글쓰기의 향연을 누렸기에 가능했던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고미숙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2011-03-07 22면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307022003#csidxaa6441b95f34f97bbe4216a619b7023

 

연암 박지원

*아래 글에서 별난 양반 연암 선생의 自贊 부분만 발췌해 보았다.

소완정(素玩亭)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화답하다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느릿느릿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文〕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주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錢〕을 푼〔文〕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주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주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주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贊)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吾爲我似楊氏 오위아사양씨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兼愛似墨氏 겸애사묵씨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屢空似顔氏 루공사안씨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尸居似老氏 시거사로씨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주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道)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주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이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曠達似莊氏 광달사장씨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參禪似釋氏 참선사석씨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不恭似柳下惠 불공사류하혜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飮酒似劉伶 음주사류령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령(劉伶)과 같고
寄食似韓信 기식사한신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善睡似陳搏 선수사진박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주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주D-011]술을 …… 같고 :
유령(劉伶)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주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 ~ 989)은 송(宋)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皷琴似子桑 고금사자상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著書似揚雄 저서사양웅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自比似孔明 자비사공명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吾殆其聖矣乎 오태기성의호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주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戶’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는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戶’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閉’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似□□’의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이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의 ‘戶’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 ~ 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郞)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은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주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蜀)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齊)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燕)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但長遜曹交 단장손조교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廉讓於陵 렴양어릉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慚愧慚愧 참괴참괴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주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湯)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척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도(道)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주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楚)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201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鍾北小選自序

http://blog.naver.com/namu8821/60024242649

 

鍾北小選自序(종북소선자서)/ 박지원

鍾北小選自序 아아! 포희씨礈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의 더듬이...

blog.naver.com

아아! 포희씨礈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 돌의 초록빛과 새깃의 비취빛 등 그 문심文心은 변치 않았다. 솥의 발과 호리병의 허리, 해의 둘레, 달의 활 모양은 자체字體가 아직도 온전하다. 그 바람과 구름, 우레와 번개 및 비와 눈, 서리와 이슬, 그리고 새와 물고기와 짐승과 벌레와, 웃고 울고 소리내고 울부짖는 것들의 성색정경聲色情境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그런 까닭에 《역易》을 읽지 않고는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 그런가? 포희씨礈犧氏가 《역》을 지음은 우러러 관찰하고 굽어 살펴보아 홀수와 짝수를 더하고 갑절로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와 같이하여 그림이 되었다. 창힐씨蒼綖氏가 글자를 만든 것 또한 정情을 곡진히 하고 형形을 다하여 전주轉注하고 가차假借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하여 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글에 소리[聲]가 있는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의 대신大臣 노릇 할 때와 주공周公이 숙부叔父 역할을 할 때 내가 그 말소리는 듣지 못하였어도 그 소리를 상상해 본다면 정성스러울 따름이었으리라. 고아孤兒인 백기伯奇와 기량杞梁의 과부寡婦를 내가 그 모습은 못보았지만, 그 소리를 떠올려 보면 간절할 뿐이었으리라.

글에 빛깔[色]이 있는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잘 나와 있다. "비단옷에 홑옷 덧입고, 비단 치마에 홑치마 덧입었네. 衣錦啷衣, 裳錦啷裳"라고 하였고,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트레머리 얹을 필요가 없네. 珒髮如雲, 不屑痂也"라고 하였다.무엇을 일러 정情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이요 산이 푸르른 것이다.무엇을 일러 경境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먼데 있는 물에는 물결이 없고, 먼데 있는 산에는 나무가 없으며, 먼데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그 말하는 것은 가리키는 데 있고, 듣는 것은 손을 맞잡는데 있다.

그런 까닭에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께 고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의 사모함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소리를 논할 수가 없다. 글을 짓더라도 《시경》의 생각이 없으면 더불어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이별해보지 못하고, 그림에 먼 뜻이 없다면 더불어 문장의 정경情境을 논할 수가 없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모두 문심文心이 없는 것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한 글자도 모른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중에서

[출처] 鍾北小選自序(종북소선자서)/ 박지원 |작성자 나무

 

 

 

http://blog.naver.com/namu8821/60024242730

 

素玩亭記(소완정기)/ 박지원

素玩亭記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

blog.naver.com

박지원 - 素玩亭記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이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대저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눈이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는 바의 것이 모두 물이고 보니 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인게지. 이제 자네의 책은 용마루에 가득차고 시렁을 꽉 채워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비록 동중서董仲舒의 전일專一함을 본받고, 장화張華의 기억력에 도움 받으며, 동방삭東方朔의 암기력을 빌려온다 해도 장차 스스로 얻지는 못할 것일세. 그래도 괜찮겠나?"

낙서가 놀라 말하였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지요?"

내가 말했다.

"그대는 저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가? 앞을 보자면 뒤를 잃게 되고, 왼편을 돌아보면 오른편을 놓치고 말지. 왜 그럴까? 방 가운데 앉아 있으면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게 되고, 눈과 허공이 서로 맞닿기 때문일 뿐이야. 차라리 몸을 방밖에 두어 창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아 한 눈의 전일함으로 온 방안의 물건을 다 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約`, 즉 요약함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로군요."

내가 또 말했다.

"자네가 이미 `약約`의 도를 알았네그려. 또 내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비춤을 가지고 자네를 가르쳐도 괜찮겠는가? 대저 해라는 것은 태양이니, 사해를 덮어 씌워 만물을 기르는 것일세. 젖은 곳을 비추면 마르게 되고, 어두운 곳이 빛을 받으면 환하게 되지. 그렇지만 능히 나무를 사르거나 쇠를 녹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빛이 두루 퍼져서 정기가 흩어지기 때문일세. 만약 만리에 두루 비치는 것을 거두어, 좁은 틈으로 빛을 들여 모아서, 둥근 유리알에 이를 받아, 그 정채로운 빛을 콩알만하게 만들면, 처음에는 내리쬐어 반짝반짝 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 타오르는 것은 어째서겠나? 빛이 전일하여 흩어지지 않고, 정기가 한데 모여 하나가 되기 때문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제게 오悟, 즉 깨달음으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또 말하였다.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일세. 그럴진대 본시 바싹 가로막고 보아 한 방 가운데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닐세. 그래서 포희씨가 문장을 봄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폈다`고 한 것이야. 공자께서 그 문장을 봄을 크게 여겨 이를 이어 말씀하시기를, `편안히 거처할 때는 그 말을 익힌다[玩]`고 하셨지. 대저 익힌다 함이 어찌 눈으로만 보아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음미하여 그 맛을 얻고, 귀로 들어 그 소리를 얻으며, 마음으로 마주하여 그 정채로움을 얻는 것일세. 이제 자네가 창에 구멍을 뚫고서 눈으로 이를 전일하게하고, 유리알로 받아 마음으로 이를 깨닫는다고 하세. 비록 그러나 방과 창이 텅비지 않고는 밝은 빛을 받을 수가 없고, 유리알이 비지 않으면 정기를 모을 수가 없을 것이네. 대저 뜻을 밝히는 도리는 진실로 비움에 있나니, 물건을 받음이 담박하여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네. 이것이 자네가 바탕을 익히겠다는[素玩] 까닭인가?"

낙서가 말하였다.

"제가 장차 벽에 붙이렵니다. 써주십시오."

드디어 그를 위해 써주었다.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중에서

[출처] 素玩亭記(소완정기)/ 박지원 |작성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