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주C-001]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 인(引)은 문체의 명칭으로 서(序)와 마찬가지이다. 《소단적치》라는 책에 붙인 서문이란 뜻이다. 소단(騷壇)은 원래 문단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과거 시험장을 가리킨다. 적치(赤幟)는 한(漢) 나라의 한신(韓信)이 조(趙) 나라와 싸울 때 계략을 써서 조 나라 성의 깃발을 뽑고 거기에 한 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세우게 하여 적의 사기를 꺾어 승리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범(典範)이나 영수(領袖)의 비유로 쓰인다. 요컨대 ‘소단적치’란 과거에서 승리를 거둔 명문장들을 모은 책이란 뜻이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이요, 고사(故事)의 인용이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照應)이란 봉화요, 비유란 유격(遊擊)이요, 억양반복(抑揚反覆)이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요, 파제(破題)한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요, 함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요, 여운을 남기는 것이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주D-001]억양반복(抑揚反覆) : 문장의 기세를 억제했다가 고조했다가 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는 수법을 말한다.
[주D-002]파제(破題) :
당송(唐宋) 시대에 과거 답안지의 첫머리에서 시제(試題)의 의미를 먼저 설파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명청(明淸) 시대 팔고문(八股文)에 이르러 고정된 법식이 되었다.
[주D-003]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 :
원문은 ‘不禽二毛也’인데,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2년 조에서 송(宋) 나라 군주는 적이 불리한 처지에 있을 때 공격하는 것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머뭇거리다가 패전한 뒤에 “군자는 부상자를 거듭 상해하지 않고 반백(半白)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다.〔君子不重傷 不禽二毛〕”고 변명하였다.


무릇 장평(長平)의 병졸은 그 용맹이 옛적과 다르지 않고 활과 창의 예리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었지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승리할 수 있고 조괄(趙括)이 거느리면 자멸하기에 족하였다. 그러므로 용병 잘하는 자에게는 버릴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에게는 따로 가려 쓸 글자가 없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만나면 호미자루나 창자루를 들어도 굳세고 사나운 병졸이 되고, 헝겊을 찢어 장대 끝에 매달더라도 사뭇 정채(精彩)를 띤 깃발이 된다. 진실로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면, 하인들의 상스러운 말도 오히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고 동요나 속담도 고상한 말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글이 능숙하지 못한 것은 글자의 탓이 아닌 것이다.


[주D-004]장평(長平)의 …… 족하였다 : 장평은 전국 시대 때에 조(趙) 나라 군사 40만이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에게 몰살당한 곳이다. 즉 진 나라 백기가 조 나라를 공격하자 조 나라에서는 처음에 명장 염파(廉頗)가 장수로 나와 진 나라를 상대로 승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진 나라의 반간계(反間計)에 속은 조왕(趙王)이 염파를 쫓아내고 싸움에 서투른 조괄(趙括)을 장수로 삼음에 따라, 백기가 이를 이용하여 조 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투항한 40만 군사를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조괄은 조 나라의 장군인 조사(趙奢)의 아들로 병법을 조금 배워서 알게 되자 천하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늘 자부하고 다녔으므로 아버지 조사로부터 조 나라 군대를 망칠 사람은 틀림없이 조괄일 것이라는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글은 똑같은 군대라도 장수가 누구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짐을 말한 것이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대저 자구(字句)가 우아한지 속된지나 평하고 편장(篇章)의 우열이나 논하는 자들은 변통의 임기응변과 승리의 임시방편을 모르는 자들이다. 비유하자면 용맹스럽지 못한 장수가 마음에 미리 정해 놓은 계책이 없는 것과 같아서, 갑자기 어떤 제목에 부딪치면 우뚝하기가 마치 견고한 성을 마주한 것과 같으니, 눈앞의 붓과 먹이 산 위의 초목을 보고 먼저 기가 질려 버리고 가슴속에 기억하고 외우던 것이 모래 속의 원학(猿鶴)이 되어 버린다.


[주D-005]산 …… 질려 버리고 : 동진(東晉) 때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격하였다. 이때 동진의 장수 사석(謝石)과 사현(謝玄) 등이 이를 맞아 싸웠는데, 부견이 성에 올라 동진의 군대를 바라보니 진용(陣容)이 정제되고 군사들이 정예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북쪽으로 팔공산(八公山) 위를 바라보니 초목들이 마치 동진의 군사로 보여 겁을 먹었다고 한다. 《晉書 卷114 苻堅下》
[주D-006]모래 …… 되어 버린다 :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주 나라 목왕(穆王)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는데 전군이 몰살하여 군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와 모래가 되었다.” 하였다. 즉 아무것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이 다 잊어버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글 짓는 자는 그 걱정이 항상 스스로 갈 길을 잃고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무릇 갈 길이 밝지 못하면 한 글자도 하필(下筆)하기가 어려워져서 항상 더디고 깔끄러움을 고민하게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얽어매기를 아무리 튼튼히 해도 오히려 허술함을 걱정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오추마(烏騅馬)가 달리지 못하고, 강거(剛車)가 겹겹이 포위했지만 육라(六騾)가 도망가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실로 한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기를 눈 오는 밤에 채주(蔡州)에 쳐들어가듯이, 한마디 말로 핵심을 뽑아내기를 세 차례 북을 울려 관문을 빼앗듯이 할 수 있어야 하니, 글을 짓는 방도가 이 정도는 되어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주D-007]음릉(陰陵)에서 …… 못하고 :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의 군사에게 쫓겨 음릉에 이르러 그만 길을 잃게 되자 그곳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그리고 배를 몰고 자신을 마중 나온 오강(烏江)의 정장(亭長)에게 타고 다니던 오추마(烏騅馬)를 주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항우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처했을 때 지은 시 속에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달리지 않도다.〔時不利兮騅不逝〕”라고 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08]강거(剛車)가 …… 것 :
한 나라 무제(武帝) 원수(元狩) 4년 대장군 위청(衛靑)이 무강거(武剛車)라는 전차로 진영을 만들고 흉노(匈奴)를 포위하였으나 흉노의 선우(單于)가 여섯 마리의 노새가 끄는 육라(六騾)를 타고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주D-009]눈 오는 …… 쳐들어가듯이 :
당 나라 헌종(憲宗) 때에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키자 당 나라 장수 이소(李愬)가 눈 오는 밤에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 반군의 근거지인 채주(蔡州)를 불의에 습격하여 오원제를 사로잡았다. 《舊唐書 卷133 李愬傳》
[주D-010]세 차례 …… 빼앗듯이 :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장공(莊公) 10년에 제(齊) 나라가 노 나라를 침범하자 조귀(曹劌)가 장공과 함께 장작(長勺)에서 제 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는데, 제 나라에서 북을 세 번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의 힘이 빠진 다음에 제 나라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春秋左氏傳 莊公10年》


친구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10권으로 편집하고 그 이름을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했다. 아! 이는 모두 승리를 얻은 병졸이요, 수백 번의 싸움을 치른 산물이다. 비록 그 격식이 동일하지 않고 정교한 것과 거친 것이 뒤섞여 들어갔지만, 각자 승리할 계책을 지니고 있어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가 있다. 그 예리한 창끝과 칼날이 삼엄하기가 무기고와 같고, 때에 맞춰 적을 제압하는 것이 늘 병법에 맞는다.


[주D-011]이중존(李仲存) : 중존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의 자이다.

[주D-012]과체(科體) : 과거 시험에서 보이던 여러 문체의 글을 이른다. 과문(科文), 공령(功令)이라고도 한다.

앞으로 글을 하는 자들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정원후(定遠侯)의 비식(飛食)연연산(燕然山)에 명(銘)을 새긴 것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인저, 여기에 있을 것인저!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거전(車戰)은 앞사람의 자취를 본받았으나 실패했고, 우후(虞詡)의 증조(增竈)는 옛법을 역이용하여 승리했으니, 그 변통하는 방편은 역시 때에 있는 것이요, 법에 있지는 아니한 것이다.


[주D-013]정원후(定遠侯)의 비식(飛食) : 정원후는 후한의 장수 반초(班超)의 봉호(封號)이다. 반초가 일개 서생으로 지내고 있을 때 답답한 마음에 어떤 관상쟁이를 찾아갔는데 그가 하는 말이 “제비의 턱에 호랑이의 목을 지니고 있으니 멀리 날아가서 고기를 먹을 것이다. 이는 만리후(萬里侯)의 관상이다.〔燕頷虎頸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고 하였다. 그 후 반초는 장수가 되어 서역(西域)의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정원후에 봉해지고 그가 서역에 있던 31년 동안에 서역의 50여 개국이 모두 한 나라에 복속하였다. 이 말은 반초가 멀리 서역에까지 이름을 날리듯 문장의 명성이 멀리 퍼진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後漢書 卷77 班超列傳》
[주D-014]연연산(燕然山)에 …… 것 :
후한 때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서 남흉노와 연합하여 계락산(稽落山)에서 북흉노를 대파하고는 연연산에 올라가 공적비를 세우고 반고(班固)로 하여금 연연산명(燕然山銘)을 짓게 하였다. 이 말은 두헌이 비석을 세워 공적을 후세에 남기듯이 문장의 명성이 오래도록 남겨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後漢書 卷53 竇憲列傳》
[주D-015]방관(房琯)의 거전(車戰) :
방관(697 ~ 763)은 당 나라 때의 장수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현종(玄宗)이 물러나고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방관에게 각군을 모아 장안(長安)을 수복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장안으로 진격하다 함양(咸陽)에서 적을 만났다. 방관이 직접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춘추 시대의 거전법(車戰法)을 흉내내어 소가 끄는 수레 2000승(乘)과 보병으로 진을 쳐서 적과 대치하니, 적들이 바람을 이용하여 소리를 지르고 불을 놓아 공격하여 방관의 군이 대패하였다. 《資治通鑑 卷219 唐紀》
[주D-016]우후(虞詡)의 증조(增竈) :
후한(後漢) 때의 장수 우후가 옛날 손빈(孫臏)의 전법과 반대로 취사하는 아궁이의 수를 늘려 병력이 증강되는 것처럼 위장한 고사를 말한다. 손빈(孫臏)이 제(齊)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위(魏) 나라의 장수 방연(龐涓)과 싸우게 되자 첫날에는 취사하는 아궁이를 10만 개 만들었다가 이튿날엔 5만 개로 줄이고 또 그 이튿날엔 3만 개로 줄여 군사들이 겁먹고 도망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에 방연이 방심하고 보병을 버려둔 채 기병만으로 추격을 하다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복병을 만나자 자결하였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우후는, 북방의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병력의 열세로 인해 몰리게 되자 구원병이 온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는 아궁이의 수를 매일 늘려 구원병이 계속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에 어떤 이가 묻기를, “손빈은 아궁이의 수를 줄였다는데 그대는 늘리고 있으니, 무슨 까닭이오?” 하자, “손빈은 허약한 척하느라고 아궁이 수를 줄인 것이고 나는 반대로 강하게 보이려고 아궁이 수를 늘린 것이니, 이는 형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後漢書 卷88 虞詡列傳》


붓과 먹이 날카롭고 글자와 글귀가 날고 뛴다. 이야말로 문예계의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이라 하겠다.


[주D-017]염파(廉頗)와 이목(李牧) : 모두 전국 시대 조(趙) 나라 최고의 명장이다.


세상의 이른바 ‘글제를 고려하여 거기에 꼭 들어맞게 지은 글’이란 것으로 과거(科擧)를 위한 글을 짓게 되면, 납이 섞이고 철이 섞여서 겉으로는 마치 정련(精鍊)된 것 같지만, 속을 보면 실은 참작해서 관대히 보아줄 곳이 있다. 진실로 충분히 고려하고 충분히 꼭 들어맞도록 하여 한 글자도 겉도는 말이나 두서없는 말이 없게 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득의한 고문(古文) 중에서도 상승(上乘 상품(上品))일 것이다.


[주D-018]속을 …… 있다 : 원문은 ‘內實有參恕處’인데 의미가 분명치 않다. 《하풍죽로당집》에는 “속을 보면 실은 경박하고 부실하다.〔內實浮浪〕”고 되어 있다.
[주D-019]이야말로 …… 것이다 :
원문은 ‘便是得意古文之上乘’인데 문장이 다소 어색하다. 《하풍죽로당집》에는 “이야말로 득의한 고문일 것이다.〔便是得意之古文〕”라고만 되어 있다.


주제를 결정하여 글을 엮기를 《울료자(尉繚子)》에서 병법을 말할 때정불식(程不識)이 군사를 출동할 때처럼 한다면 당연히 공령문(功令文 과체문(科體文))의 상승이 될 것이다. 편(篇)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심복하게 하지 않겠는가.


[주D-020]《울료자(尉繚子)》에서 …… 때 : 울료자는 전국 시대의 병법자인 울료(尉繚)가 지은 병서로 거기에서 그는 본말(本末)을 분명히 하고 빈주(賓主)를 구분하고 상벌(賞罰)을 명확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주D-021]정불식(程不識)이 …… 때 :
정불식은 전한 때의 명장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문제(文帝) 때에 이광(李廣)과 함께 변방의 태수로서 흉노를 공격하러 출동할 때에 이광과는 달리 군대를 엄중하고도 분명하게 통솔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109 李廣列傳》







'한문학 > 연암 박지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장의 사실성을 확보하라  (0) 2008.09.02
글이란 뜻을 표현하면 된다  (0) 2008.09.02
자기 시대의 문장을 구사하라  (0) 2008.09.02
법고와 창신  (0) 2008.09.02
아, 연암 선생님!  (1) 2008.09.02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홍덕보(洪德保 홍대용)에게 답함

네 번째 편지

 

한국고전번역원 참고

http://www.minchu.or.kr/index.jsp?bizName=MK

 

 

[은자주]

이 블로그의 앞에서 연암의 소설들과 박지원 년보와 홍대용의 <서유견문>을 소개한 바 있다

http://blog.paran.com/kydong/27029355

http://blog.paran.com/kydong/26693730

박지원 [朴趾源, 1737 ~ 1805]

 

박지원

《열하일기》, 《연암집》, 《허생전》 등을 쓴 조선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였다. 본관 반남(潘南),

terms.naver.com

 

홍대용 [洪大容, 1731 ~ 1783]

 

연암은 1778년(42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홍국영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에 은둔하였다. 2년 후 홍국영이 실각하고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그는 주로 연암협에서 살았다. 그래서 연암이란 호를 굳혔는데, 홍대용에게 써준 편지에는 그곳 풍광이 그린 듯 자세하다. 여기에 옮겨본다. 그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와 삼종형 박명원의 보디가드[자제군관]로 득의의 연경길에 올라 조선후기 명저로 손꼽히는 <열하일기>를 남겼다. 사실적 문장과 비판적 글쓰기의 전범을 보인 것이다.

 

이태백처럼 그냥 붓을 잡고 靑天一丈紙 [청천일장지]에 일필휘지한 것이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오랜 고심과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북학에 대한 신념을 유감없이 발현하였다. 나라의 경영은 청나라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 그룹의 주장이다. 그들은 이용, 후생을 도모해야 정덕도 펼칠 수 있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연암이 박제가의 <북학의>가 한 손에서 나온 듯하다고 서문에서 지적한 것도 같은 취지다.민족문화추진회의 완역과 꼼꼼한 주석에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연암집을 통째로 읽겠다고 매달렸던 20여년 전의 일이 새삼스럽다. 아래 꼭지에서 우선 번역으로나마 연암의 문장론을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한다.

 

 

이 아우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지어 먹으며, 아무것도 없이 두 주먹만 꽉 쥐었을 뿐이라, 마음은 지치고 재간은 서투르니 무엇을 이루어 놓았겠습니까.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 세 칸을 마련했을 뿐이지요. 그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를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 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부드러우며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탄하면서 툭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터의 형국(形局)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지요.

[주D-001]이 아우가 …… 되었습니다 :

연암은 1771년(영조 47) 과거를 포기한 뒤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을 답사하고 나서 장차 이곳에 은둔할 뜻을 굳히고 자신의 호를 연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연암집》 권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서문〔贈白永叔入麒麟峽序〕’ 참조.

 

전면의 왼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바위틈은 깊숙이 텅 비어 저절로 동굴을 이루매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쳤으니, 이것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 바위)이라는 거지요. 집 앞으로 100여 걸음 되는 곳에 평평한 대(臺)가 있는데, 대는 모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우뚝 솟은 것으로 시내가 그 밑을 휘감아 도니 이것을 조대(釣臺 낚시터)라 하지요.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퉁불퉁한 하얀 바위가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며, 혹은 잔잔한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데 노는 고기들이 몹시 많지요. 매양 석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리는데 이를

엄화계(罨畫溪)

라 하지요. 산이 휘돌고 물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촌락과 두절되니 한길을 나가 7, 8리를 거닐어야만 비로소 개짖는 소리와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된답니다.
[주D-002]엄화계(罨畫溪) : 엄화는 채색화(彩色畫)란 뜻이다. 《연암집》 권10에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이란 표제가 붙어 있다.

 

지난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도 현재 서너 가구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해진 옷에 귀신 같은 몰골로 무슨 소리인지 지절지절하며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고 농사는 짓지 않으니, 깊은 계곡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나 표범을 이웃 삼고 족제비나 다람쥐를 벗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험하고 동떨어짐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지요.
띠 지붕 소나무 처마로 된 집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며, 조와 보리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가 있고 채소와 고사리가 매우 왕성하게 자라 한번 캤다 하면 대바구니에 가득 찹니다. 더러는 눈 오는 날 - 이하 원문 빠짐 -

이 편지가 모두 여덟 편이라고 예전에 들었으나, 지금 상자를 뒤져 겨우 네 편을 얻었는데 그나마도 완전하지 못하다.


[주D-003]

이미 …… 썼으니 : 연암의 형수 이씨(李氏)는 1778년 음력 7월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그해 9월 연암은 형수의 유해를 연암협으로 옮겨 집 뒤뜰에 장사 지냈다. 《연암집》 권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참조.


[주D-004]이 편지가 …… 못하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것이다.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연암이 홍대용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는 《연암집》에 그 내용이 반 이상 결락된 채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 친필의 바로 그 결락된 편지를 내가 전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산거경제(山居經濟)를 기초한다고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으니 이 산거경제가 발전되어 만년의 《과농소초》를 이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박지원 작품선집1 연암집에 대한 해제》

 

[제1신] 참고

 

천리 밖에서 편지 전하기를

낭정(朗亭)과 문헌(汶軒)

이 하듯이 하여, 얼어붙은 비탈, 눈 쌓인 골짝 속에서 이를 얻어보게 되니, 어찌 위로가 되고 기뻐서 펄쩍 뛰지 않으리오. 청수하신 모습을 잠깐 접했다가 곧 이별의 회포를 자아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도리어 낫겠지요. 더구나

심한 추위에 부모님을 모시면서 관직 생활도 신령의 가호에 힘입어 잘하고 계시며, 아드님 또한 탈 없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주D-001]낭정(朗亭)과 문헌(汶軒) :

낭정은 서광정(徐光庭)의 호이다. 서광정은 항주(杭州)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홍대용과 결교한 반정균(潘庭筠)의 외사촌형이다. 북경의 매시가(煤市街)에서 점포를 열고 있었으므로, 홍대용은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으나 그에게 편지를 보내 반정균과의 서신 교류를 중개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이를 계기로 홍대용과 서광정 사이에도 서신 교류가 있었다. 문헌은 등사민(鄧師閔 : 1731 ~ ?)의 호이다. 등사민은 산서(山西) 태원(太原)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삼하현(三河縣)에서 소금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만나 교분을 맺었다. 그 후 홍대용과 꾸준히 서신 교류를 했으며, 자신의 벗 곽집환(郭執桓)을 위해 연암 등 조선의 명사들에게 ‘담원 팔영(澹園八詠)’ 시를 지어주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주D-002]심한 …… 말입니다 :

홍대용은 1780년(정조 4) 음력 1월 경상도 영천(榮川)의 군수로 부임하였다.

 

우리들이 작별한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으니, 얼굴이며 수염과 모발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나를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다만 알지 못하겠는 것은, 스스로 점검하기에 정력과 기개가 쇠퇴하거나 왕성한 정도가 어떠하신지 하는 점입니다.
성인(聖人)의 수천 마디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객기(客氣)를 없애게 하려는 것입니다. 객기와 정기(正氣)는 마치 음(陰)과 양(陽)이 서로 반대로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과 같지요. 비유하자면 큰 풀무에서 쇠를 녹여 두들기는 것과 같아서, 객기가 겨우 조금만 없어져도 정기가 저절로 서지요. 그러나 정기란 더듬어 볼 수 있는 형체가 없으며, 오직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매 부끄럼이 없는 경지에서만 찾을 수 있지요.


성인이 제 한 몸을 다스릴 뿐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큰 도적이나 큰 악당처럼 여겨서, 성급히 하나의 이길 ‘극(克)’ 자를 썼겠습니까?

‘극’이라는 말은,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날짜를 다그쳐서 기필코 이기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목서(牧誓)에는“상 나라를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戎商必克〕”

하였고,

《주역》에는“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여 3년 만에 이겼다.〔高宗我鬼方 三年克之〕”

했으니,

이른바

“한(漢)과 적(賊)은 양립하지 못한다.”

는 것이지요.
[주D-003]성인이 …… 썼겠습니까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제 자신을 이기고 예의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4]《서경》 …… 하였고 :

인용상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인용된 구절은 목서(牧誓)가 아니라 태서 중(泰誓中)에 나온다. 목서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 주왕(紂王)과 목야(牧野)에서 싸우기 전에 훈시한 내용이고, 태서는 역시 주 나라 무왕이 맹진(孟津)에서 훈시한 내용이다.


[주D-005]《주역》에는 …… 했으니 :

《주역》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종(高宗)은 은 나라의 임금 무정(武丁)이고, 귀방(鬼方)은 지금의 귀주(貴州) 지역에 살았던 서융(西戎)의 하나이다.


[주D-006]한(漢)과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한(漢)은 촉(蜀)을 가리키고, 적(賊)은 조조(曹操)의 위(魏)를 가리킨다.

 

이 아우는 평소 늘 객기가 병통이 되어 왔는데, 이를 이겨내고 다스리는 수단으로는 이미

구용(九容)

의 방어도 없고

사물(四勿)

의 무기도 없으니, 귀며 눈이며 입이며 코가 도둑떼의 소굴이 아님이 없고, 지의(志意)와 언동은 모두 객기의

성사(城社)

가 되었습니다.
[주D-007]구용(九容) : 구용은 군자의 아홉 가지 자태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색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禮記 玉藻》


[주D-008]사물(四勿)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물(勿)’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주D-009]성사(城社) :

안전한 은신처를 말한다. 성안의 여우나 사당의 쥐처럼 권세의 비호 아래 몰래 나쁜 짓을 하는 자를 성호사서(城狐社鼠)라 한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평소의 병의 근원이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졌으나, 이른바 정기(正氣)까지도 함께 사라져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궁지에 몰린 도적이 험한 지세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게 날뛰다가, 급기야 군사가 흩어지고 식량이 다 떨어지자 그대로 앉아서 곤욕을 받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리하여 포부와 사업이 도리어 객기가 득세할 때만 못하니, 어떻게 정기를 함양하며, 어떻게

집의(集義)

하며, 어떻게 스승으로 삼고 본받으며, 어떻게

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마침내 예(禮)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본래 지닌 천상(天常 천부적 윤리)인데 노상 객기에 눌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객기가 이미 제거되면 모든 일이 다 이치에 들어맞아, 정기가 서지 않는 것은 걱정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른하게

지쳐 버리고 스러지듯 까라지며 닳고 닳아 버린 탓에 감정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맞부닥치니, 다시는 옛날의 기개를 찾아볼 길 없고 무기력한 일개 늙은 농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D-010]집의(集義) :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호연지기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의리를 속으로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지 의리가 밖에서 엄습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하였다.


[주D-011]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요 유해한 벗이 셋이니, 곧은 사람을 벗하며, 진실한 사람을 벗하며,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하였다.


[주D-012]나른하게 :

원문은 ‘苶然’인데, ‘薾然’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비슷하다. 뒤에 나오는 ‘苶’ 자도 같다.

 

지금 격려해 주신 별지(別紙)를 받고 보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땀이 얼굴을 뒤덮었으므로 잠시 이와 같이 늘어놓습니다. 아마도 반드시 이 편지를 보시고는 한 번 웃으며,“이는 필시

늙어가고

곤궁함이 날로 심해진 것뿐일세. 만약 객기를 제거할 수 있다면

하늘을 떠받치고 땅위에 우뚝 설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른하게 처져 있는 것인가? 나른하게 처지도록 만든 것이야말로 객기일세.”하실 테지요.
대개 제가 평소에 비록

장중하고 공손함이 부족하지만, 날로 더욱 노력하는 공부

역시 그와 같이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학문을 쌓아나가는 것도 기운에 따라 쇠퇴하거나 왕성한 법이지요. 그래서 형의 정력과 기개가 스스로 점검하기에 어떠하신지를 물은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자세한 답을 주시고, 또 가슴에 절실히 와 닿는 몇 마디 말씀을 기록하여 주신다면, 이 몸을 일깨워 주고 분발시켜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주D-013]늙어가고 : 원문은 ‘朽落’인데, 나이가 늙어 이가 빠진다〔年朽齒落〕는 뜻이다.


[주D-014]하늘을 …… 텐데 :

원문은 ‘頂天立地’인데, 이는 대장부의 기개를 형용하는 말이다.


[주D-015]장중하고 …… 공부 :

《예기》 표기(表記)에서 공자는 “군자가 장중하고 공손하면 날로 더욱 노력하게 되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고 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