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열하일기 산장잡기(山莊雜記)

 

[주C-001]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다백운루본(多白雲樓本)’에는 도고북구하기(渡古北口河記)로 되어 있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에 이르는 데는 창평(昌平)으로 돌면 서북쪽으로는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게 되고, 밀운(密雲)을 거치면 동북으로 고북구(古北口)로 나오게 된다. 고북구로부터 장성(長城)으로 돌아 동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7백 리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기는 2백 80리로서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요(險要)로서는 고북구 만한 곳이 없다. 몽고가 출입하는 데는 항상 그 인후가 되는데 겹으로 된 관문을 만들어 그 요새를 누르고 있다. 나벽(羅壁)의 지유(識遺)에 말하기를,

“연경 북쪽 8백 리 밖에는 거용관이 있고, 관의 동쪽 2백 리 밖에는 호북구(虎北口)가 있는데, 호북구가 곧 고북구이다.” 하였다.

 

[주D-001]나벽(羅壁) : 송의 학자. 자는 자창(子蒼).

 

당(唐)의 시초부터 이름을 고북구라 해서 중원 사람들은 장성 밖을 모두 구외(口外)라고 부르는데, 구외는 모두 당의 시절 해왕(奚王 오랑캐의 추장)의 근거지로 되어 있었다. 《금사(金史)》를 상고해 보면,

“그 나라 말로 유알령(留斡嶺)이 곧 고북구이다.”

했으니, 대개 장성을 둘러서 구(口)라고 일컫는 데가 백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산을 의지해서 성을 쌓았는데, 끊어진 구렁과 깊은 시내는 입을 벌린 듯이 구멍이 뚫린 듯이 흐르는 물이 부딪쳐 뚫어지면 성을 쌓을 수 없어 정장(亭鄣)을 만들었다.

 

[주D-002]정장(亭鄣) : 요새(要塞)같이 만들어 사람의 출입을 검열하는 곳.

 

황명(皇明) 홍무(洪武) 시절에 수어(守禦) 천호(千戶)를 두어 오중관(五重關)을 지키게 했다. 나는 무령산(霧靈山)을 돌아 배로 광형하(廣硎河)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 나가는데, 때는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다. 중관(重關)을 나와서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 길이나 되었다. 필연(筆硯)을 끄집어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쓰되,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朴趾源)이 이곳을 지나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으면서,

“나는 서생(書生)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

했다.
옛적에 몽 장군(蒙將軍 몽염(蒙恬))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임조(臨洮)로부터 일어나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는데, 그 중에는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제 그가 보니 그가 산을 헤치고 골짜기를 메운 것이 사실이었다.

 

슬프다. 여기는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운 전쟁터이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유수광(劉守光)을 잡자 별장(別將) 유광준(劉光濬)은 고북구에서 이겼고, 거란의 태종(太宗)이 산 남쪽을 취할 적에 먼저 고북구로 내려 왔다는 데가 곧 이곳이요, 여진(女眞)이 요(遼)를 멸망시킬 때 희윤(希尹 여진의 장수)이 요의 군사를 크게 파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요, 또 연경을 취할 때 포현(蒲莧 여진의 장수)이 송의 군사를 패한 곳도 여기요, 원 문종(元文宗)이 즉위하자 당기세(唐其勢 여진의 장수)가 군사를 여기에 주둔했고, 산돈(撒敦 여진의 장수)이 상도(上都) 군사를 추격한 것도 여기였다.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쳐들어 올 때 원의 태자는 이 관으로 도망하여 흥송(興松)으로 달아났고, 명의 가정(嘉靖) 연간에는 암답(俺答 미상)이 경사(京師)를 침범할 때도 그 출입이 모두 이 관을 경유했다.

 

[주D-003]유수광(劉守光) : 후량(後梁)의 장수로서 뒤에 연(燕)의 황제라 자칭하였다.


[주D-004]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 :
몽고 사람. 원실(元室)의 지예(支裔).

 

그 성 아래는 모두 날고 뛰고 치고 베던 싸움터로서 지금은 사해가 군사를 쓰지 않지만 오히려 사방에 산이 둘러 싸이고 만학(萬壑)이 음삼(陰森)하였다. 때마침 달이 상현(上弦)이라 고개에 걸려 떨어지려 하는데, 그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세운 칼날 같았다. 조금 있다가 달이 더욱 고개 너머로 기울어지자 오히려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어 졸지에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횃불 두 개가 산 위에 나오는 것 같았다. 북두(北斗)는 반 남아 관 안에 꽂혀졌는데, 벌레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은 숙연(肅然)한데,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그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 놓은 것 같고, 큰 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하늘 밖에 학이 우는 소리가 대여섯 번 들리는데, 맑고 긴 것이 피리소리 같아 혹은 이것을 거위소리라 했다.

 

 

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우리나라 선비들은 생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강역(疆域)을 떠나지 못했으나, 근세의 선배로서 오직 김가재(金稼齋)와 내 친구 홍담헌(洪湛軒)이 중원의 한 모퉁이를 밟았다. 전국(戰國) 시대 일곱 나라에서 연(燕)이 그 중의 하나인데 우공(禹貢)의 구주(九州 《서경(書經)》의 편명)에는 기(冀)가 이 하나이다. 천하로써 본다면 가위 한 구석의 땅이지만 원과 명을 거쳐 지금의 청에 이르기까지 통일한 천자들의 도읍터로 되어 옛날의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과 같다. 소자유(蘇子由)는 중국 선비지만 경사(京師)에 이르러 천자의 궁궐이 웅장함과 창름(倉廩)ㆍ부고(府庫)와 성지(城池)ㆍ원유(苑囿)가 크고 넓은 것을 우러러 보고 나서 천하의 크고 화려한 것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거늘, 하물며 우리 동방 사람으로서야 한번 그 크고 화려한 것을 보았다면 그 다행으로 여김이 어떠했으리요. 지금 내가 이 걸음을 더욱 다행으로 생각한 것은 장성을 나와서 막북(漠北)에 이른 것은 선배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깊은 밤에 노정(路程)을 따라 소경같이 행하고 꿈속같이 지나다 보니 그 산천의 형승(形勝)과 관방(關防)의 웅장하고 기이한 것을 두루 보지 못했다. 때는 가을 달이 비끼어 비치고, 관내(關內)의 양쪽 언덕은 벼랑으로 깎아 섰는데, 길이 그 가운데로 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膽)이 작고 겁이 많아서 혹 낮에도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조그만 등불을 만나더라도 미상불 머리털이 움직이고 혈맥이 뛰는 터인데, 금년 내 나이 44세건만 그 무서움을 타는 성질이 어릴 때나 같다. 이제 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섰는데, 달은 떨어지고 하수(河水)는 울며,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이 날아서 만나는 모든 경개가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고 이상하였건만 홀연히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고 기흥(奇興)이 발발(勃勃)하여 공산(公山)의 초병(草兵)이나 북평(北平)의 호석(虎石)도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하니, 이는 더욱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 한스러운 바는, 붓이 가늘고 먹이 말라 글자를 서까래만큼 크게 쓰지 못하고, 또 장성의 고사(故事)를 시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동리에서 다투어 병술로 위로하며, 또 열하의 행정(行程)을 물을 때에는, 이 기록을 내 보여서 머리를 모아 한 번 읽고 책상을 치면서 기이하다고 떠들어 보리라.

[주C-001]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주D-001]김가재(金稼齋) : 조선 문학가 김창업(金昌業). 가재는 그의 별호인 노가재(老稼齋)의 준말.
[주D-002]소자유(蘇子由) : 송의 문학가 소철(蘇轍). 자유는 그의 자.
[주D-003]초병(草兵) : 팔공산(八公山)에 서 있는 풀까지도 군사로 보였다는 부견(符堅)의 고사.
[주D-004]호석(虎石) : 한(漢)의 이광(李廣)이 우북평(右北平)의 바위를 범으로 보고서 활을 쏘았다는 고사.

 

 








 

맏누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제2권

 

[은자주] 돌아가신 맏누님에 대한 조사(弔辭)도 형식을 벗어나 망인에 대한 애틋한 정이 우러난다. 오죽했으면 문장의 틀을 부정하는 처남 이재성이 상자 속에 넣어 두고 남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했을까? 당시로서는 대단한 파격(破格)임을 감지할 수 있다. 가락국기> 명에서 보듯이 조상과 출생, 전생애를 4언으로 노래하는 것이 보통인데, 연암은 달랑 7언절구 한편 써 놓고 명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는 데 노력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장은 뜻을 표현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주C-001]맏누님 …… 묘지명 : 《연상각집》의 ‘유인(孺人)’이나 《종북소선(鍾北小選)》의 ‘망자 유인 박씨 묘지명〔亡姊孺人朴氏墓誌銘〕’, 《병세집》의 ‘맏누님 유인 박씨 묘지명〔伯姊孺人朴氏墓誌銘〕’ 등과 동일한 작품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에서 크게 차이 난다. 초기작인 《종북소선》이나 《병세집》의 글을 개작한 것이라 판단된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를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중국인 호부 주사(戶部主事)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外從弟)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받아 연암에게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유인(孺人) 의 휘(諱)는 아무요 반남 박씨이다.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 연암의 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16세에 덕수(德水) 
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에게 출가하여 1녀 2남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 영조 47) 9월 초하룻날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 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것들과 계집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끌고 배를 타고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중미는 새벽에 
두포(斗浦) 의 배 안에서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주D-001]유인(孺人)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 족보에 의하면, 박씨의 남편인 이현모(李顯模)는 나중에 종 2 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선친 이유(李游)에게도 참판이 증직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인 박씨에게도 추후에 정부인(貞夫人)의 봉작(封爵)이 내렸던 듯하다.


[주D-002]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택모(宅模)는 이현모(李顯模 : 1729 ~ 1812)의 처음 이름이다. 백규(伯揆)는 그의 처음 자이고, 나중에 이름을 고치면서 자도 회이(誨而)로 고쳤다. 이현모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주D-003]아곡(鵶谷)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에 통합된 지평현(砥平縣)에 있었다.


[주D-004]두포(斗浦) 
  지금의 팔당댐 부근에 있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수상 교통의 요지로 두미(斗尾 : 또는 斗迷), 두릉(斗陵) 등으로도 불렸다. 그곳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곧 양평군을 지나게 된다. 《병세집》에는 ‘豆浦’로 되어 있으나, 《종북소선》에는 대본과 마찬가지로 ‘斗浦’로 되어 있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응석스럽게 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은근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 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주D-005]말처럼 뒹굴면서 : 원문은 ‘馬

’인데 말이 토욕(土浴)하는 것, 즉 땅에 뒹굴며 몸을 비벼 대는 것을 말한다.


[주D-006]옥압(玉鴨)과 금봉(金蜂) :

옥압은 오리 모양으로 새긴 옥비녀를 가리킨다. 비슷한 것으로 옥봉(玉鳳), 옥연(玉燕) 등이 있다. 또 금으로 나비나 잠자리 모양 등을 만들어 비녀 위에 장식하는 것을 금충(金蟲)이라 한다. 금봉(金蜂)은 금으로 벌 모양을 만든 그와 같은 수식(首飾)을 가리킨다.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 뿐더러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으니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촉박했던고!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자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猶令送者淚沾衣 보내는 자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扁舟從此何時返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送者徒然岸上歸 보내는 자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주D-007]조각배 이제 가면 : 원문은 ‘扁舟從此’인데, 《종북소선》과 《병세집》에는 ‘此時此去’로 되어 있고, 《과정록(過庭錄)》 권1에는 ‘扁舟一去’로 되어 있다.


[주D-008]떠나는 …… 돌아가네 :

명(銘)을 대신하여 7언 절구를 실었다. 《과정록(過庭錄)》 권1에서 이덕무(李德懋)는 ‘배에서 누님의 상여 행차를 송별하며〔舟送姊氏喪行〕’란 제목으로 이 시를 소개한 뒤 이를 읽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인정(人情)을 따른 것이 지극한 예(禮)가 되었고, 눈앞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 참문장이 되었다. 문장에 어찌 일정한 법이 있었던가? 이 글을 옛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는다면 당연히 이의가 없겠지만, 지금 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기 때문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자 속에 감추어 두기 바란다. - 중존(仲存 : 이재성의 자) -






기린협(麒麟峽)으로 들어가는 백영숙(白永叔)에게 증정한 서문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제1권


[은자주]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수월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궁핍을 면하기 위해 산속 생활에 묻혀야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연암도 1786년(50세) 7월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기까지 일정한 수입원이 없었으니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도 연암협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어 살고 있던 처지였다.


[주C-001]기린협(麒麟峽)으로 …… 서문 :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의 산골짜기로 이주하고자 떠나는 벗 백동수(白東修 : 1743 ~ 1816)를 위해 지은 증서(贈序)이다. 백동수는 자(字)가 영숙(永叔)이고, 호는 인재(靭齋), 야뇌(野餒) 등이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백시구(白時耈 : 1649 ~ 1722)의 서자(庶子)인 백상화(白尙華)의 손자였다. 따라서 신분상 서얼에 속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오랜 낙백(落魄) 시절을 거쳐, 1789년(정조 13) 장용영 초관(壯勇營哨官)이 되어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후 비인 현감(庇仁縣監)과 박천 군수(博川郡守) 등을 지냈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기도 하다. 《硏經齋全集 本集 卷1 書白永叔事》 박제가도 기린협으로 이주하는 백동수를 위해 장문의 송서(送序)를 지어 주었다. 《貞蕤閣文集 卷1 送白永叔基麟峽序》


영숙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그 조상 중에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목숨 바친 이가 있어서 이제까지도 사대부들이 그를 슬프게 여긴다.
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고 전장(典章)과 제도(制度)도 익숙히 잘 알며, 젊은 나이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비록 시운(時運)을 타지 못해서 작록(爵祿)을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그 뜻만은 조상의 공적을 계승함직하여 사대부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아! 이런 영숙이 무엇 때문에 온 식구를 거느리고
예맥(穢貊)의 땅으로 가는 것인가?


[주D-001]그 조상 …… 여긴다 : 백동수의 증조 백시구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옥사한 사실을 말한다. 소론이 집권하자 백시구는 평안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기로소(耆老所)에 은(銀)을 대여해 준 일로 문초를 받으면서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의 죄를 실토하라는 것을 거부했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으며 사후에 가산을 몰수당했다. 영조(英祖) 즉위 후 호조 판서에 추증되고 가산을 환수받았으며, 1782년(정조 6)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렸다. 《夢梧集 卷6 平安道兵馬節度使贈戶曹判書諡忠壯白公神道碑銘》

[주D-002]예맥(穢貊)의 땅 : 강원도를 가리킨다.


영숙이 일찍이 나를 위해서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집터를 살펴 준 적이 있었는데,
그곳은 산이 깊고 길이 험해서 하루 종일 걸어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정도였다. 갈대숲 속에 둘이 서로 말을 세우고 채찍을 들어 저 높은 언덕을 구분하며,

“저기는 울을 쳐 뽕나무를 심을 만하고,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일구면 일 년에 조〔粟〕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다.”

하면서 시험 삼아 부시를 쳐서 바람 따라 불을 놓으니 꿩이 깍깍 울며 놀라서 날아가고, 노루 새끼가 바로 앞에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쫓아가다가 시내에 가로막혀 돌아와서는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인생이 백 년도 못 되는데, 어찌 답답하게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조 농사나 짓고 꿩 · 토끼나 사냥한단 말인가?”

했었다.


[주D-003]영숙이 …… 있었는데 : 연암은 1771년(영조 47) 과거를 폐한 뒤 백동수와 함께 개성(開城)을 유람하다가 그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을 답사한 뒤 장차 그곳에 은거할 뜻을 굳혔다고 한다. 《過庭錄 卷1》
[주D-004]나무와 …… 거처하면서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이 깊은 산속에 살 적에,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사슴이나 멧돼지와 상종하였으니, 깊은 산속의 야인(野人)과 다를 바가 없었다.〔舜之居深山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고 하였다.


이제 영숙이 기린협에 살겠다며 송아지를 등에 지고 들어가 그걸 키워 밭을 갈 작정이고, 된장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장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 그 험색하고 궁벽함이 연암협에 비길 때 어찌 똑같이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 자신은 지금 갈림길에서 방황하면서 거취를 선뜻 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하물며 영숙의 떠남을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의 뜻을 장하게 여길망정 그의 궁함을 슬피 여기지 않는 바이다.

그 사람의 떠남이 이처럼 슬피 여길 만한데도 도리어 슬피 여기지 않았으니, 선뜻 떠나지 못한 자에게는 더욱 슬피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절이 호방하고 웅장하여 마치 고점리(高漸離)의 축(筑) 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주D-005]그 사람의 떠남 : 원문은 ‘其人□行’으로 1자가 빠져 있으나, 이본들에는 ‘其人之行’으로 되어 있다.
[주D-006]고점리(高漸離)의 …… 소리 :
전국 시대 말기 진(秦) 나라에 의해 위(衛) 나라가 멸망당하자 위 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로 망명을 갔다가 축(筑) 연주를 잘하는 고점리를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형가가 연 나라 태자의 간청을 받고 진 나라 왕을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자 역수(易水)를 건너기 전에 전송객을 향해 고점리의 축 반주에 맞추어 강개한 곡조로 노래를 불렀더니, 사람들이 그에 감동하여 모두 두 눈을 부릅떴으며 머리카락이 곤두서 관(冠)을 찌를 듯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열하일기 서문(熱河日記序)

주소창 찾기

http://www.minchu.or.kr/index.jsp?bizName=MK

>열하일기 >서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되 신명(神明)의 경지를 통하고 사물(事物)의 자연법칙을 꿰뚫은 것으로서 《역경(易經)》과 《춘추(春秋)》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역경》은 미묘하고 《춘추》는 드러내었으니, 미묘란 주로 진리를 논한 것으로서, 그것이 흘러서는 우언(寓言)이 되는 것이요, 드러냄이란 주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것이 변해서 외전(外傳)이 이룩되는 것이다.


[주C-001]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 다른 여러 본에는 모두 이 서(序)가 보이지 않고, 다만 최근에 발견된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 실려 있으므로 이에 추가하였다.
[주D-001]우언(寓言) :
말이나 글에 실제가 아닌 뜻을 의탁한 것이니, 장주(莊周)의 《남화경(南華經)》 중에 우언편(寓言篇)이 있다.
[주D-002]외전(外傳) :
정사(正史)에 싣지 않은 전기를 내전(內傳)과 구별하기 위한 서술이니, 《방경각외전(放瓊閣外傳)》이 이에 해당한다.


저서(著書)하는 데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내 일찍이 시험삼아 논하여 보았노라. 《역경》의 육십사괘(六十四卦) 중에서 언급한 물건으로서 용이니, 말이니, 사슴이니, 돼지니, 소니, 양이니, 범이니, 여우니, 또는 쥐니, 꿩이니, 독수리니, 거북이니, 붕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다 참으로 있었던 물건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진 못할 것이다. 또 인간에 있어서는 저 웃는 자, 우는 자, 부르짖는 자, 노래부르는 자나, 또는 눈먼 자, 발저는 자, 엉덩이에 살이 없는 자, 그 척추의 고기가 벌어진 자 들을 언급하였는데, 그런 인간이 참으로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초(蓍草)를 뽑아서 괘(卦)를 벌이면, 그 참된 상(象)이 곧 나타나고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주D-003]시초(蓍草) : 괘(卦)를 뽑는 데 쓰는 영초(靈草).
[주D-004]회린(悔吝) :
회(悔)는 괘(卦)의 상체(上體)요, 린(吝)은 인색(吝嗇)함이니, 곤괘(坤卦)에서 나타난 효상(爻象)의 하나.


미묘한 곳으로부터 드러내는 경지로 지향하는 까닭이었으니, 우언(寓言)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쓴 것이다. 《춘추》중에 기록된 2백 42년 사이의 일에는, 온갖 제사와 수렵(狩獵)과 조회와 회합과 정벌(征伐)과 침입이, 실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좌구명(左丘明)공양고(公羊高)곡량적(穀梁赤)추덕보(鄒德溥)ㆍ협씨(夾氏) 등의 전(傳)이 제각기 같지 않을 뿐더러, 이를 논하는 자들이 남이 반박하면 나는 지키기로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주D-005]좌구명(左丘明) : 춘추 때 노(魯)의 태사(太史).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다.
[주D-006]공양고(公羊高) :
춘추 때 자하(子夏)의 제자. 역시 《춘추전》을 지었다.
[주D-007]곡량적(穀梁赤) :
역시 자하의 제자로서 《춘추전》을 지었다.
[주D-008]추덕보(鄒德溥) :
명(明)의 학자. 덕함(德涵)의 아우. 《춘추광해(春秋匡解)》를 지었다.


이는 드러난 곳에서부터 미묘한 곳으로 드는 까닭이었으니, 외전(外傳)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 “장주(莊周)가 저서에 능하다.”고 일렀던 것이다. 장주의 저서 중에 나타난 제왕(帝王)과 성현(聖賢)이나, 임금과 정승, 처사(處士)와 변객(辯客) 들에 대한 일도, 더러는 정사(正史)에서 빠뜨린 일을 보충할 수 없지 않을 것이다. 장(匠) 석(石)이나 윤(輪) 편(扁)이 반드시 그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부묵자(副墨子)니 낙송손(洛誦孫)이니 하는 자는 어떤 인물들이었던가.


[주D-009]장주(莊周) : 춘추 시대의 철학가(哲學家). 저서에는 《남화경(南華經)》이 있다.
[주D-010]장(匠) 석(石) :
옛 장인(匠人). 석(石)은 그의 이름.
[주D-011]윤(輪) 편(扁) :
옛 수레바퀴를 만드는 공인. 편(扁)은 그의 이름.
[주D-012]부묵자(副墨子)니……하는 자 :
문자(文字)에 대한 의인칭(擬人稱)이니, 《남화경》 대종사(大宗師)에, “나는 부묵자에게 들었고, 부묵자는 또 낙송손(洛誦孫)에게 들었노라.” 하였다. 낙송은 반복(反復)하여 외는 것을 이름이니, 역시 의인칭이다.


또 망량(罔兩 물귀신)이니 하백(河伯 물귀신)이니 하는 귀신이 과연 말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잇따라 변해지곤 하여, 사람으로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조궤(弔詭 궤변(詭辯))라 불러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학설을 결국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논평을 잘 전개하였기 때문이니, 그를 저서가(著書家)로서의 웅(雄)이 아니라 이르진 못할 것이다. 이제 대체로 연암씨(燕巖氏)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알지 못하겠다. 그 어떠한 글이었던고. 저 요동(遼東) 들을 건너서 유관(渝關)으로 들어 황금대(黃金臺) 옛 터에 서성이고, 밀운성(密雲城 하북성에 있다)으로부터 고북구(古北口)를 나서 난수(灤水) 가[邊]와 백단(白檀 밀운성의 현(縣))의 북녘을 마음껏 구경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땅이 있었으며, 또 그 나라의 석학(碩學)ㆍ운사(韻士)와 함께 교제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인물이 있었으며, 사이(四夷)가 모두 이상한 모양과 기괴한 옷에 칼도 머금고 불도 마시며, 황교(黃敎) 반선(班禪)의 난쟁이가 비록 괴이한 듯하지마는 그가 반드시 망량이나 하백은 아닐 것이요, 진귀한 새나 기이한 짐승, 아름다운 꽃이나 이상한 나무의 그 정태(情態)를 곡진히 묘사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어찌 일찍이 그 등마루의 길이가 천 리라느니, 그 나이가 8천 세라느니 하는 따위가 있었단 말인가.


[주D-013]연암씨(燕巖氏) : 저자 연암을 일컫는 말.
[주D-014]유관(渝關)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
[주D-015]황금대(黃金臺) :
하북성(河北省)에 있는데, 춘추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세웠다.
[주D-016]고북구(古北口) :
하북성에 있는 관(關) 이름. 곧 호북구(虎北口).
[주D-017]난수(灤水) :
찰합이(察哈爾)에서 발원하여 열하성(熱河省)을 거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주D-018]사이(四夷) :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동이(東夷)ㆍ남만(南蠻)ㆍ서융(西戎)ㆍ북적(北狄)을 말한다.
[주D-019]황교(黃敎) :
서장(西藏) 라마교(喇嘛敎)의 한 파. 그 교의 중들이 누른 빛깔의 옷을 입었으므로 이름하였다.
[주D-020]반선(班禪) :
황교 즉 라마교의 교주(敎主). 반(班)은 박학(博學)이요, 선(禪)은 광대(廣大)의 뜻을 가졌다.
[주D-021]그……천 리라느니 :
《남화경》에 새 위나 대붕(大鵬)의 등마루가 천 리나 된다 하였다.
[주D-022]그……8천 세라느니 :
《남화경》에 이른바 영춘(靈椿)이 8천 년을 묵었다 하였다.


나는 이에서 비로소 장주의 외전에는 참됨도 있고 거짓됨도 없음이 아닌 반면,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하여 이에는 실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논함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패자(覇者)에 비한다면, 진 문공(晉文公)은 허황하고 제 환공(齊桓公)은 올바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ㆍ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주D-023]진 문공(晉文公) : 춘추 시대 진의 임금. 문공은 시호요, 이름은 중이(重耳)니, 당시 오패(五覇)의 하나.
[주D-024]제 환공(齊桓公) :
춘추 시대 제의 임금. 환공은 시호요, 이름은 소백(小白)이니, 역시 오패의 하나.
[주D-025]이용(利用)ㆍ후생(厚生) :
정덕(正德)과 함께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이른바 삼사(三事)가 된다. 산업을 잘 다스려서 민생의 일용에 이롭게 하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모든 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