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주C-001]영목당(榮木堂) : 연암의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 : 1716 ~ 1755)의 호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권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은자주]년보에서 지적했듯이 연암은 처숙 이량천이게서 사기, 좌전, 국어 등의 역사서와 한유, 유종원, 두보의 시문을 배웠다. 사마천의 발분(發憤)의 정신과 사실에 바탕한 시문의 글쓰기는 이때 터득되고 북학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명말청초 이지(李摯)의 동심설(童心說)에서 그의 문학관은크게 확충되었다. 그는 이량천에게서 3년간 수학하였지만 문학의 본령을 터득했으므로 그에 대한 애도가 남다르다.

余方有進 여방유진 내 한창 진취하려는데
公奄棄世 공엄기세 공이 갑자기 별세하시니
茫茫岐路 망망기로 갈림길 하많은데
我尙疇詣 아상주예 어느 분을 찾아가야 하리

我疑何質 아의하질 의심나면 뉘게 묻고
我惰孰勵 아타숙려 게으르면 뉘 잡아주리
念玆益悲 념자익비 생각할수록 슬픈 것은
實爲我地 실위아지 실은 제 처지가 슬퍼서네.

서두에서 벌써 그 지극한 정을 담아내는 솜씨가 독자의 가슴을 친다.


유세차(維歲次) 을해(1755) 11월 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에 반남(潘南) 박지원은 삼가 술과 과일로 제물을 갖추어, 홍문관 교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주D-001]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 : 고대에는 날짜를 적을 적에 ‘元嘉三年三月丙子朔二十七日壬寅’이라는 식으로 연월(年月) 다음에 반드시 초하루를 뜻하는 삭(朔) 자를 붙여서 삭(朔) 제(第) 몇 일(日)이라 쓰고 또 간지(干支)를 붙였다. 따라서 초하루를 적을 때에도 이 제문처럼 ‘乙亥十一月庚午朔一日庚午’라 하여, 번거롭지만 날짜를 중복해서 적었다. 《日知錄 卷20 年月朔日子》


余年二八 여년이팔 내 나이 열여섯에
入贅賢門 입췌현문 덕망 높은 집안에 장가드니
弟兄湛樂 제형담악 형제분이 우애로워
和氣氤氳 화기인온 화기가 애애했네
外舅謂我 외구위아 장인께서 이르시되
余季好文 여계호문 내 아우 글 좋아하여
仕宦雖疎 사환수소 벼슬에는 비록 소홀해도
文學甚勤 문학심근 문학에는 몹시 부지런하니

來舍甥館 래사생관 생관에 와 머물거라
余季汝師 여계여사 내 아우가 너의 스승이니라


[주D-002]생관(甥館) : 사위가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公之愛我 공지애아 나에 대한 공의 사랑
視舅亦深 시구역심 장인보다 더 깊어서
授我詩書 수아시서 내게 경서(經書) 가르칠 제
嚴課無私 엄과무사 엄한 일과 사정없었네
陪公周旋 배공주선 공 모시고 따라다닌 지
四年于玆 사년우자 이제 어언 사 년일세
文與世降 문여세강 세상 따라 문학도 쇠퇴해지매
公起其衰 공기기쇠 공이 다시 일으켜 세웠나니
文劈韓骨 문벽한골 산문은 한유의 골수를 취했고
詩斲杜肌 시착두기 시는 두보의 속살을 얻었네


소자불녕 소자불녕 재주 없는 이 소자는
才魯性癡 재로성치 어리석고 노둔한데
荷公誘掖 하공유액 공의 유도에 힘입어서

庶幾愚移 서기우이 우공이산(愚公移山) 바랐더니
余方有進 여방유진 내 한창 진취하려는데
公奄棄世 공엄기세 공이 갑자기 별세하시니
茫茫岐路 망망기로 갈림길 하많은데
我尙疇詣 아상주예 어느 분을 찾아가야 하리

[주D-003]우공이산(愚公移山) : 우공(愚公)이란 노인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들을 깎아 없애버리고자 결심하고 쉬지 않고 노력했더니 상제(上帝)가 감동하여 그 산들을 딴 곳으로 옮겨주었다고 하는 《열자(列子)》 탕문(湯問) 중의 우화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큰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讀古一傳 독고일전 옛 전(傳) 한 편 읽자 해도
已多觝滯 이다저체 막히는 곳 너무 많아
數行才下 수행재하 두어 줄만 읽어 내려가면
群疑交蔽 군의교폐 뭇 의심이 앞을 가려
廢書太息 폐서태식 책을 덮고 장탄식
繼以悲涕 계이비체 슬픈 눈물 뒤따르네


[주D-004]옛 …… 해도 : 《사기》나 《한서》에 실린 전(傳)들을 가리킨다. 연암은 이양천으로부터 사기를 배웠는데 항우본기(項羽本紀)를 본떠 이충무전(李忠武傳)을 지었더니, 이양천은 사마천(司馬遷)이나 반고(班固)와 같은 경지를 얻었다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1》


我疑何質 아의하질 의심나면 뉘게 묻고
我惰孰勵 아타숙려 게으르면 뉘 잡아주리
念玆益悲 념자익비 생각할수록 슬픈 것은
實爲我地 실위아지 실은 제 처지가 슬퍼서네


去夏潦暑 거하료서 지난 여름 장마와 무더위에 /
公疾始祟 公疾始祟 공의 병이 처음 생겼네 /

玉巖淸泉 옥암청천 아름다운 암벽 맑은 샘에서 /
公于濯纓 공우탁영 공은 갓끈을 씻고 /

浴沂新服 욕기신복 기수(沂水)에서 목욕할 제 입을 새옷 /
此日旣成 차일기성 그날에 다 지어졌는데 /
顧謂小子 고위소자 이 소자 돌아보며 이르시길 /
盍觀於水 합관어수 어찌 물에서 보지 않느냐 /
盈科而進 영과이진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니 /
有爲若是 유위약시 뜻 이루는 것도 이 같은 법 /

逝水其忙 서수기망 흘러가는 냇물처럼 바빠야 한다 /
言猶在耳 언유재이 그 말씀 아직도 귀에 쟁쟁 /
而今思之 이금사지 이제 와서 생각하니 /
警誨止此 경회지차 공의 마지막 가르침이셨네 /


[주D-005]기수(沂水)에서 …… 지어졌는데 :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포부를 물었을 때 증점(曾點)은 “늦은 봄이 되어 봄옷이 다 지어지면, 관(冠) 쓴 어른 5, 6명, 동자 6, 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論語 先進》 여기서는 이양천이 연암을 데리고 물가로 놀러 나갔던 일을 가리킨다.
[주D-006]어찌 …… 나아가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물을 보는 데에 방법이 있다. …… 흐르는 물이란 것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觀水有術 …… 流水之爲物也 不盈科 不行〕”고 하였고, 이루 하(離婁下)에 “근원이 있는 물은 용솟음치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 사해로 쏟아진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고 하였다. 쉬지 않고 실천함으로써 차근차근 학업을 성취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주D-007]흘러가는 …… 한다 :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께서 냇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아가는 것은 이 냇물과 같도다.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고 하였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따르면, 이 구절은 쉬지 말고 면학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天生我公 천생아공 하늘이 우리 공을 낳으시고 /
年命何屯 년명하둔 어찌 수명은 짧게 주셨는고 /
苫席無孤 점석무고 거적 자리엔 상주(喪主) 없고 /
萱堂有親 훤당유친 북당(北堂)에는 모친 계시네 /
昧昧者理 매매자리 모를 것이 이치라서 /
難質鬼神 난질귀신 신에게도 묻지 못해 /
無年無嗣 무년무사 후사 없고 단명한 건 /
昔人所愍 석인소민 옛사람도 슬퍼한 일 /
孰主張是 숙주장시 누가 이를 주장했나 /
其亦不仁 기역불인 그도 또한 잔인하이 /


早擢魁科 조탁괴과 장원 급제 일렀으나 /
家甚淸貧 가심청빈 집은 몹시 청빈했고 /

歷敭華要 력양화요 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養未專城 양미전성 고을 수령되어 부모 봉양 못 했네 /

金馬玉堂 금마옥당 금마옥당도 /
於公非榮 於公非榮 공에겐 영화가 아니었어라 /


[주D-008]장원 급제 일렀으나 : 이양천은 1749년(영조 25) 춘당시(春塘試)에 문과 급제하였다.
[주D-009]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이양천은 1749년 이후 1755년 작고할 때까지 사간원 정언 · 헌납, 홍문관 부수찬 · 부교리 · 교리, 세자시강원 사서 · 필선 등을 지냈다.
[주D-010]금마옥당(金馬玉堂) :
원래 한(漢) 나라 때 글 잘짓는 신하들이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던 궁중의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키는데, 후대에는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양천이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한림원의 학사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曩進一疏 낭진일소 전에 상소 한번 올렸다가 /
遂竄南荒 遂竄南荒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가고 마셨지 /
余病未別 여병미별 나는 병으로 송별을 못 해 /
來拜高堂 래배고당 고당에 와 절 드리니 /
壁掛輿圖 벽괘여도 벽에 지도 걸어놓고 /
指示泫然 지시현연 가리키며 눈물지으셨네 /


[주D-011]전에 …… 마셨지 : 이양천은 홍문관 교리로서 영조 28년(1752) 10월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연암집》 권3 불이당기(不移堂記) 참조.


逖矣遷人 적의천인 아스랗다 귀양 가시는 분 /
鬱繆山川 울무산천 산과 물이 얼기설기 /
某水某山 모수모산 아무 물 아무 산을 /
何時度越 하시도월 어느 제 다 거칠꼬 /
不忍生離 불인생리 생이별도 못 참거든 /
況此死別 황차사별 사별이야 오죽하리 /
昔公謫去 석공적거 전에 공이 귀양 가실 젠 /
奉慰有說 봉위유설 위로드릴 말이라도 있었지만 /
今公此行 금공차행 지금 공이 이렇게 가실 제는 /
忍作何言 인작하언 차마 무슨 말을 하오리 /
余懷抑塞 여회억새 이내 가슴 답답하여 /
不覺聲呑 불각성탄 저도 몰래 울음 삼키네 /


維廣之陽 유광지양 광주(廣州)라 그 남쪽이 /
卽公眞宅 즉공진댁 바로 공의 안식처일레 /
啓殯隔宵 계빈격소 밤 지나면
계빈이라 /
含哀告訣 함애고결 슬픈 영결 고하오니 /
文辭雖拙 문사수졸 문장 비록 졸렬해도 /
腑肺攸出 부폐유출 가슴속에서 우러나왔고 /
奠物雖薄 전물수박 제물 비록 박하지만 /
情禮所設 정례소설 정례로써 올린 거니 /
尊靈不昧 존령불매 밝으신 영령이시여 /
庶歆玆酌 서흠자작 이 술 한 잔 받으소서 /
尙饗 상향 상향 /


[주D-012]광주(廣州)라 …… 안식처일레 : 이양천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 돌마면(突馬面) 율촌(栗村)에 있었다.
[주D-013]계빈(啓殯) :
발인을 할 때에 관을 내오기 위하여 빈소(殯所)를 여는 것을 말한다.





소완정(素玩亭)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화답하다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주C-001]소완정(素玩亭) : 이서구(李書九 : 1754 ~ 1825)의 일호이다. 그 밖에 강산(薑山) · 척재(惕齋) 등의 호가 있다. 자는 낙서(洛瑞 : 또는 洛書)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연암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774년 정시(庭試)에 합격한 후 전라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냈다.


유월 어느날 낙서(洛瑞)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기(記)를 지었는데, 그 기에,

“내가 연암(燕巖) 어른을 방문한즉, 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었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연암이란 금천(金川)의 협곡에 있는 나의 거처인데, 남들이 이것으로 내 호(號)를 삼은 것이었다. 나의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


[주D-001]금천(金川) : 황해도에 속한 군(郡)으로 개성(開城) 근처에 있었다. 박지원이 은거했던 그곳의 한 협곡은 입구에 제비들이 항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으로 연암(燕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는 본래 몸이 비대하여 더위가 괴로울 뿐더러,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푹푹 찌고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매양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서울집은 비록 지대가 낮고 비좁았지만, 모기 · 개구리 · 풀 · 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여종 하나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눈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나가 버려서, 밥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행랑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다 보니 자연히 친숙해졌으며, 저들 역시 나의 노비인 양 시키는 일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버렸다.



[주D-002]
여름이면 …… 들끓고 : 원문은 ‘夏夜蚊蠅’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夏多蚊蠅’으로 되어 있는 몇몇 이본들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주D-003]시골에서 …… 받더라도 :
당시 연암은 식구들을 경기도 광주의 석마(石馬 : 지금의 분당)에 있던 처가에 보냈다. 그곳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안부 편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느릿느릿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文〕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주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錢〕을 푼〔文〕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주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주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주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贊)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吾爲我似楊氏 오위아사양씨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兼愛似墨氏 겸애사묵씨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屢空似顔氏 루공사안씨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尸居似老氏 시거사로씨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주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道)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주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이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曠達似莊氏 광달사장씨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參禪似釋氏 참선사석씨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不恭似柳下惠 불공사류하혜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飮酒似劉伶 음주사류령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령(劉伶)과 같고
寄食似韓信 기식사한신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善睡似陳搏 선수사진박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주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주D-011]술을 …… 같고 :
유령(劉伶)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주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 ~ 989)은 송(宋)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皷琴似子桑 고금사자상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著書似揚雄 저서사양웅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自比似孔明 자비사공명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吾殆其聖矣乎 오태기성의호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주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戶’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는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戶’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閉’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似□□’의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이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의 ‘戶’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 ~ 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郞)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은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주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蜀)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齊)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燕)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但長遜曹交 단장손조교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廉讓於陵 렴양어릉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慚愧慚愧 참괴참괴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주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湯)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척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도(道)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주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楚)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하고는, 혼자서 껄껄대고 웃기도 했다.
이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 지붕을 이어주고서 품삯을 받아, 비로소 밤에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며 먹으려 하지 않자, 행랑아범은 성이 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뒈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그에게 장괴애(張乖崖)가 촉(蜀 사천성(四川省))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들어 깨우쳐 주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주D-019]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 원문은 ‘旣困臥’인데, ‘旣’ 자가 ‘已’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20]장괴애(張乖崖)가 …… 고사 :
괴애(乖崖)는 북송(北宋) 초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호이다. 그는 강직함을 자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고 사나움을 숭상하여, 괴팍하고 모가 났다는 뜻의 ‘괴애’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太宗) 때 익주 지사(益州知事)로 나가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선정(善政)을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뒤 진종(眞宗)은 이러한 남다른 치적을 알고 그를 거듭 익주 지사로 임명했다. 《宋史 卷293 張詠傳》 장영이 촉(蜀) 지방 즉 익주(益州)를 다스릴 적에 어느 늙은 병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삼아 늙은 아비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격분한 장영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게 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48 耳目口心書1》 원문에는 장괴애가 ‘守蜀’했다고 하였는데, 조신(朝臣)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열군(列郡)을 지키는 경우 이를 수신(守臣)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는 지붕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낙서(洛瑞)가 와서,

“어르신은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였으니, 기(記)에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었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또 눈 내리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그 글에 기록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동자(童子) 때부터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당시 나의 집에는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했으며,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으니, 다시는 지난날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에 기(記)를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주D-021]
이미 병들고 지쳐서 : 원문은 ‘已病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已’ 자가 ‘因’ 자로 되어 있다.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이서구

 

[은자주]연암집에는 답글 아래 실었으나 글이 씌어진 순서에 따라 이 글을 먼저 소개하고 뒤꼭지에 연암의 답글을 싣는다 .

 

낙서의 기(記)는 다음과 같다.

유월 상현(上弦 7 ~ 8일경)에 동쪽 이웃 마을로부터 걸어가서

연암 어른 을 방문했다. 이때 하늘에는 구름이 옅게 끼고 숲속의 달은 희끄무레했다.

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시작할 때에는 우레처럼 은은(殷殷)하더니, 끝날 때에는 물거품이 막 흩어지는 것처럼 여운이 감돌았다.

 

[주D-023]연암 어른 : 원문은 ‘燕岩丈人’인데, 이서구의 《자문시하인언》에는 ‘燕巖朴丈人’으로 되어 있다.


[주D-024]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서울 종루(鐘樓 : 종각〈鐘閣〉)에서 초경(初更 : 저녁 7시 ~ 9시)을 알리는 타종을 했다는 뜻이다.

 

어른이 집에 계시려나 생각하며 골목에 들어서서 먼저 들창을 엿보았더니 등불이 비쳤다. 그래서 대문에 들어섰더니, 어른은 식사를 못한 것이 이미 사흘이나 되었다. 바야흐로 버선도 신지 않고 망건도 쓰지 않은 채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다가, 내가 온 것을 보고서야 드디어 옷을 갖추어 입고 앉아서, 고금의 치란(治亂) 및 당세의 문장과

명론(名論) 의 파별(派別) · 동이(同異)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므로, 나는 듣고서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주D-025]다리를 걸쳐 놓고 : 원문은 ‘加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加膝’로 되어 있다.


[주D-026]명론(名論) 
  여기서는 노론 · 소론 · 남인 등의 당론(黨論)을 가리킨다.

 

이때 밤은 하마 삼경이 지났다.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 빛은 갑자기 밝아졌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고, 은하수는 하얗게 뻗쳐 더욱 가볍게 흔들리며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내가 놀라서,

“저것이 어째서 그러는 거지요?”했더니, 어른은 빙그레 웃으시며,“자네는 그 곁을 한번 보게나.”하셨다.

대개  촛불이 꺼지려 하면서 불꽃이 더욱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전에 본 것은 이것과 서로 어리비쳐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았다.

잠깐 사이에 촛불이 다 되어, 마침내 둘이 어두운 방안에 앉아서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주D-027]내가 놀라서 : 원문은 ‘余驚曰’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顧謂丈人曰’로 되어 있다.


[주D-028]대개 
 원문은 ‘蓋’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驚視之’로 되어 있다.


[주D-029]잠깐 …… 되어 
  원문은 ‘須臾燭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그 다음에 ‘余欲歸待僕 卒不至 且檠上無膏燭可以繼者’가 추가되어 있다.

 

내가 말하기를,“예전에 어른이 저와 한마을에 사실 적에 눈 내리는 밤에 어른을 찾아뵌 적이 있었지요. 어른께서는 저를 위해 손수 술을 데웠고, 저 또한 떡을 손으로 집고 질화로에서 구웠는데,

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손이 몹시 뜨거운 바람에 떡을 잿속에 자주 떨어뜨리곤 하여, 서로 쳐다보며 몹시 즐거워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몇 년 사이에 어른은 머리가 이미 허옇게 되고 저 역시 수염이 거뭇거뭇 돋았습니다.”하고는,

한참 동안 서로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날 밤 이후 13일 만에 이 기(記)가 완성되었다.

 

[주D-030]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 원문은 ‘火氣烘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騰’ 자가 ‘動’ 자로 되어 있다.
[주D-031]한참 …… 탄식하였다 :
원문은 ‘因相與悲歎者久之’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久之’가 ‘良久 夜半始歸家’로 되어 있다.

 



https://kydong77.tistory.com/18202

 

박지원 - 이서구(李書九)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

[注]연암의 아래글 조회수가 많아 이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의 주석을 보면 연암선생의 박학다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명문장은 그의 독서량에 뿌리를 둔 지식에서 연원함을 쉽게 추정

kydong77.tistory.com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주C-001]유안재(遺安齋) : 이보천(李輔天 : 1714 ~ 1777)의 호이다. 이보천은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인 계양군(桂陽君)의 후손으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제자인 종숙부 이명화(李命華)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같은 농암 제자인 어유봉(魚有鳳)의 사위가 되어 그에게서도 사사받음으로써, 우암(尤庵)에서 농암으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 처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사위인 연암에게 《맹자》를 가르쳤으며, 정신적으로 큰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정유년(1777) 6월 23일 정사(丁巳)일에 사위 반남 박지원은 삼가 술을 올려 장인 유안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아아, 이 소자 나이 열여섯에 선생의 가문에 사위로 들어와서 지금 26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우매하여 선생의 도를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선생을 부끄럽게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제 선생이 멀리 떠나시는 날에 한마디 말로써 무궁한 슬픔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D-001]
그래도 …… 않았다 : 이 제문에서 장인을 예찬한 내용이 연암의 사호(私好)에서 나온 아부의 발언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기 위해 한 말이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맹자는 “재아(宰我)와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은 지혜가 성인(聖人)을 넉넉히 알아볼 만하였다. 낮추어 보더라도 그들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汚不至阿其所好〕”라고 하면서, 재아와 자공과 유약이 그의 스승 공자를 극구 예찬한 말을 공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서 인용하였다. 또한 이루 하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하였다.


嗚呼 오호 아아 /
以士沒身 이사몰신 선비로서 일생 마치는 걸 /
世俗所恥 세속소치 세상 사람들은 수치로 알지만 /

彼以卑賤 피이비천 이를 비천하다 여기는 저들이 /
惡能識士 악능식사 어찌 선비를 알 수 있으랴 /
所謂士者 소위사자 이른바 선비란 건 /

尙志得己 상지득기 상지하고 득기하나니 /
柳介莘囂 류개신효 유하(柳下)의 절개와 유신(有莘)의 자득(自得)도 /
不過如是 불과여시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 /
由是觀之 유시관지 이로써 보자하면 /
沒身以士 몰신이사 선비로 일생 마치기도 /
亦云難矣 역운난의 역시 어렵다 하리 /


[주D-002]이를 …… 저들이 : 원문 중 ‘卑賤’이 ‘貧賤’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주D-003]상지(尙志)하고 득기(得己)하나니 :
《맹자》 진심 상에서 제(齊) 나라 왕자 점(墊)이 “선비란 무슨 일을 하는가?”라고 묻자, 맹자는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했다. 또한 송구천(宋句踐)이 “어떻게 해야 이처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가?〔何如斯可以囂囂矣〕”라고 묻자, 맹자는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스스로 만족한다.〔窮不失義 故士得己焉〕”고 하였다.
[주D-004]유하(柳下)의 …… 자득(自得)도 :
유하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 전금(展禽)으로, 유하라는 곳에 살았고 시호(諡號)가 혜(惠)였기 때문에 유하혜(柳下惠)라고 불렀다. 《맹자》 진심 상에, “유하혜는 삼공(三公)의 지위로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하였다. 유신(有莘)의 자득(自得)이란 이윤(伊尹)이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을 때 탕(湯) 임금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자, 이윤이 “스스로 만족해하며 말하기를〔囂囂然曰〕 ‘내가 어찌 탕왕의 폐백을 받아들이리오. 내 어찌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이대로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嗚呼 오호 아아 /
先生存沒 선생존몰 선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
不違士也 불위사야 선비 본분 안 어겼네 /
六十四年 륙십사년 예순이라 네 해 동안 /
善讀書者 선독서자 글을 진정 잘 읽으시어 /
積久光輝 적구광휘 오랫동안 쌓인 빛이 /
溫乎發雅 온호발아 온아(溫雅)하게 드러났지 /
樂飢若飽 악기약포 배부른 듯이 굶주림을 즐기셨고 /
守節如寡 수절여과 과부처럼 절개 지키셨네 /
孤不離群 고불리군 고고해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
貞不詭物 정불궤물 꼿꼿해도 남을 책하지 않으셨네 /
發言破鵠 발언파곡 발언은 정곡을 찌르고 /
制事截鐵 제사절철 일 처리는 똑부러지게 하셨지 /

氷壺秋月 빙호추월 빙호추월처럼 /
外內洞澈 외내동철 안팎 모두 툭 틔었지 /
陋世酸儒 루세산유 천박한 세상의 썩은 유자(儒者)들은 /
恥士一節 치사일절 변함없는 선비 절개 부끄러워하는데 /
夙刊客浮 숙간객부 객기는 진작 다 없애셨고 /
晩韜英豪 만도영호 만년에는 호걸 기상 감추셨네 /
視眞履坦 시진리탄 진실만을 바라보고 탄탄대로 걸으시어 /
心降氣調 심강기조 심기가 차분히 가라앉으셨지 /
所性之外 소성지외 타고난 천성 외엔 /
不著一毫 불저일호 털끝 하나 아니 붙여 /
墨則斯浣 묵칙사완 먹 묻으면 씻어 버리고 /
稂豈不薅 랑기불호 논의 잡초 어찌 아니 뽑으리 /

曲肱飮水 곡굉음수 팔을 베고 물 마시건 /
繫馬千駟 계마천사 좋은 말 사천 필을 매어 놓건 /
旣無加損 기무가손 덜고 보탬 있지 않네 /
士之一字 사지일자 사(士)라는 한 글자엔 /
命有所定 명유소정 운명이란 정해진 것 /
時有所値 時有所値 때도 만나야 하는 법 /
能辨此者 능변차자 이를 분별할 줄 아는 이만 /
始識公志 시식공지 공의 뜻을 알게 되리 /


[주D-005]무리를 떠나지 않고 : 동문지간(同門之間)인 벗들을 떠나서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이군삭거(離群索居)라 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失明)을 하자 증자(曾子)가 조문을 왔는데, 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을 주었다고 자하가 하늘을 원망하므로 증자가 이를 나무라며 그의 잘못을 성토하니, 자하는 “내가 벗들을 떠나 혼자 산 지 역시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뉘우쳤다고 한다.
[주D-006]빙호추월(氷壺秋月) :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와 가을철의 밝은 달처럼 마음이 맑고 깨끗함을 말한다.
[주D-007]팔을 …… 놓건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시 즐거움은 있다. 의롭지 못하면서 부귀한 것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고,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은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짓고 살 적에 요순(堯舜)의 도(道)를 좋아하여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거든, 천하를 녹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좋은 말 4000필을 마구간에 매어 놓아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嗚呼 嗚呼 아아 /
梁木之哀 량목지애 대들보 부러진 슬픔에다 /
江漢之思 강한지사 강한 같은 그리움으로 /
奠斝一慟 전가일통 잔을 올리며 통곡하노니 /
萬事已而 만사이이 만사가 끝났도다 /
眉宇之寄 미우지기 공의 모습 빼닮은 /

獨有庭芝 독유정지 아들 한 분 두셨으니 /
歡戚造次 환척조차 즐겁거나 슬프거나 잠깐 사이라도 /
庶共挈携 서공설휴 바라건대 함께 손잡고 /

不忘偲怡 불망시이 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以報受知 이보수지 알아주신 은혜 보답 잊지 않으리 /


[주D-008]대들보 …… 그리움으로 : 《예기》 단궁 상에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을 꾸고는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지고 철인(哲人)이 죽을 것이다.”라고 노래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들보가 부러진다는 것은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또한 《맹자》 등문공 상에 증자(曾子)가 공자를 찬양하여 “강한(江漢)으로 씻은 것 같고 가을 볕으로 쪼인 것 같아서 밝고 깨끗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였다. 강한(江漢)은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말한다. 따라서 강한 같은 그리움이란 작고한 스승을 애타게 추모함을 뜻한다.
[주D-009]아들 한 분 두셨으니 :
빼어난 자제(子弟)를 뜰에서 자라는 지란(芝蘭)과 옥수(玉樹)에 비유하여 ‘정지(庭芝)’니 ‘정옥(庭玉)’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을 가리킨다.
[주D-010]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논어》 자로(子路)에서 자로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선비라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간절하게 서로 책선(責善)하고 화기애애하면 선비라고 부를 수 있다. 붕우간에 간절하게 책선하고 형제간에 화기애애하니라.〔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嗚呼 오호 아아 /
昔日小婿 석일소서 예전의 어린 사위 /
今亦白頭 今亦白頭 이젠 저도 백발이 되었다오 /
從今未死 종금미사 이제부터 죽기 전까지 /
庶寡悔尤 서과회우 허물 적기 바라오니 /
維德之愛 유덕지애 은덕과 사랑으로 /
願言冥酬 원언명수 음조(陰助)하여 주소서 /
肝膈之寫 간격지사 간장에서 쏟는 눈물 /
靈或知不 령혹지불 영령께서 아실는지 /
嗚呼哀哉 오호애재 아아 슬프외다 /
尙饗 상향 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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