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

다음 꼭지의 편지 아래 "부(附) 원서(原書)"라 한 것을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먼저 싣는다. 열하일기에 남긴 사실적 문장을 정조는 벌레소리 같은 것이라 하여 고문에 의거한, 열하일기의 명성에 걸맞는 고문을 지어 바치라는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남공철이 편지로 연암에게 전달한 내용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글의 방향을 제시한 남공철의 연암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느껴진다.

연암이 표방한 문체 창신의 길은 가시밭길이었고 험란한 파도에 비딪쳐 좌초의 운명을 맞을 지도 모르는 재난이 예고된 길이었다. 왕명인데 어찌 법고(法古)를 거역하겠는가?

이방익 표류사건에 대한 글과 농서 <과농소초>는 왕명에 따른 성과물이다.

정조의 문체반정책에 의한 이 지시는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에게도 내려져 북학파 인사들을 괴롭혔다. 이덕무는 임종의자리에서도 자식에게 당송팔가문을 읽게 했다.

부(附) 원서(原書)

서울에는 한 자가 넘게 눈이 내려 가죽옷을 껴입지 않고는 외출을 못할 지경인데, 남쪽 소식은 어떤지 몰라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요즘 정사(政事)에 수고로운 몸 안녕하신지요? 영남(嶺南)은 가뭄의 피해가 이루 다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귀하의 고을은 세금 독촉이며 기민 구제 사업으로 정신이 괴롭지나 않으신지 이것저것 삼가 염려되옵니다. 기하생(記下生)은 어지러운 진세(塵世)와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 예전의 저 그대로입니다.


[주D-017]기하생(記下生) : ‘기억해 주시는 아랫사람’이란 뜻으로, 편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다.


지난번에 문체(文體)가 명(明) · 청(淸)을 배웠다 하여 임금님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치교(穉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함추(緘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내각(內閣)으로부터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내각에서 북청 부사(北靑府使)로 부임하는 성사집(成士執)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대개 사집(士執)은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낙서(洛瑞) 영공(令公)과 여러 검서(檢書)가 다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성사(盛事)요 난파(鑾坡)의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


[주D-018]치교(穉敎) …… 하였습니다 : 치교는 심상규(沈象奎 : 1766 ~ 1838)의 자이다. 함추(緘推)는 함사추고(緘辭推考)의 준말로 6품 이상의 관원이 경미한 죄를 범한 경우 서면(書面)으로 죄를 추궁하고 서면으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심상규는 정조로부터 그의 이름과 자를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792년 음력 11월 규장각 대교로서 함추를 받아 지어 올린 함답(緘答)이 구두(句讀)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고 그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올리라는 엄명을 받았다. 당시 심상규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을 즐겨 본 전과가 있던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에게도 함추의 처분이 내렸다. 《正祖實錄 16年 10月 24日, 11月 3日 · 8日》
[주D-019]성사집(成士執) :
사집은 성대중(成大中 : 1732 ~ 1809)의 자이다. 성대중은 호가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에 오래 재직했으며 어명으로 문신들이 지어 올린 응제(應製)에서도 자주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 16년 12월 정조는 성대중이 공령부체(功令賦體)로 지어 올린 글을 칭찬하면서 서얼 출신임에도 특별히 북청 부사에 임명하고 규장각에서 그의 송별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6年 12月 18日》 《硏經齋全集 卷10 先府君行狀》 이와 같이 성대중은 정조의 보수적인 문예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출세한 인물로, 연암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주D-020]낙서(洛瑞) 영공(令公) :
낙서는 이서구(李書九 : 1754 ~ 1825)의 자이다. 이서구는 호가 척재(惕齋) · 강산(薑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조선 후기 한시(漢詩) 4대가로 불린다. 승지를 영공(令公)이라고도 부른다.
[주D-021]검서(檢書) :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담당하는 규장각의 5 ~ 7 품 벼슬로 주로 서얼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성대중을 위한 규장각의 송별연에는 승지 이서구, 규장각 직각 남공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검서로 이덕무와 유득공이 참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1 年譜 壬子 12月》
[주D-022]난파(鑾坡)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규장각을 가리킨다.


어제 경연(經筵)에서 천신(賤臣 남공철)에게 하교하시기를,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하시고, 천신에게 이런 뜻으로 집사(執事)에게 편지를 쓰도록 명령하시면서,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하시며, 이로써 곧 편지를 보내라는 일로 하교하셨습니다.


[주D-023]집사(執事) : 편지에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쓰는 경칭이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다.
[주D-024]남행(南行)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 즉 음직(蔭職)을 이른다. 문임은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종 2 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이른다.


이런 임금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줄 상상되오나, 다만 이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은 진실로 졸지에 지어 내기는 어려울 터이니,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성상의 고심과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나마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집사는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도리상 더욱이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나, 그 제목을 정하기가 딱하게도 쉽지 않으니, 명 · 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한두 권 글을 지어서 올려 보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남(嶺南) 산수기(山水記) 한두 권이나 혹은 서너 권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막론하고 두어 달 안에 올려 보내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보낸 것은 이 때문이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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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론(名論)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연암집 제 3 권

 

[은자주]공자님은 정명론(正命論)을 주장하셨다. 세상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 임금된 이는 임금의 역할 수행에 최선을 다해아 하고, 아비된 자는 자식양육에 개으름을 피워선 안된다.

한자문화권의 아이러니는 역성혁명에 성공한 주나라 무왕도 숭배하고, 이에 반대하여 은둔한 백이 숙제도 떠받는 데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근거는 공자님의 정명론에 바탕한 유가의 폭넓은 현실론이 아닐 수 없다.

 

천하라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그 그릇을 무엇으로써 유지하는가?

‘이름〔名〕’

이다.

 

[주D-001]이름〔名〕 : 명칭이라는 뜻 외에도 명분(名分)이나 명예(名譽)라는 뜻을 포함하므로 문맥에 따라 그 뜻을 변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용어의 통일성은 유지해야 하므로, 부득이 변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괄호 안에 별도의 표기를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이름을 유도할 것인가? 그것은 ‘욕심〔欲〕’이다. 무엇으로써 욕심을 양성할 것인가? 그것은 ‘부끄러움〔恥〕’이다.

 

만물은 흩어지기 십상이어서 아무것도 연속할 수 없는데 이름으로써 붙잡아 둔 것이요, 오륜(五倫)은 어그러지기 쉬워서 아무도 서로 친할 수 없는데 이름〔명분〕으로써 묶어 놓은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뒤라야 저 큰 그릇이 아마도 충실하고 완전할 수 있어, 기울어지거나 엎어지거나 무너지거나 이지러질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온 세상의 작록(爵祿)으로도 선(善)을 행하는 자에게 두루 다 상을 줄 수는 없으니, 군자는 이름〔명예〕으로써 선을 행하도록 권장할 수가 있다. 온 세상의 형벌로도 악(惡)을 행하는 자를 두루 다 징계할 수는 없으니, 소인은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밤중에 야광주(夜光珠)를 던지면, 칼을 쥐고 적을 기다리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주D-002]한밤중에 …… 왜인가 : 추양(鄒陽)의 옥중서(獄中書)에 출처를 둔 말이다. 추양은 참소로 인해 하옥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양 효왕(梁孝王)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편지에서 “신(臣)은 듣자온대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을 어둠 속에서 노상에 있는 사람을 향해 던지면, 칼을 쥐고 서로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까닭 없이 제 앞에 이르러 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文選 卷39 獄中上書自明》 명월주와 야광벽은 둘 다 야광주(夜光珠)를 뜻한다.

 

이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주어진 이름〔명예〕이라 기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하라는 큰 그릇임에랴.

조정에 갖옷을 모셔 놓으면,

옷섶을 여미고 예법에 따라 종종걸음을 하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주D-003]조정에 …… 놓으면 : 천자가 승하하고 새 천자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천자의 보좌(寶座)에 선왕(先王)의 갖옷을 모셔 놓았던 것을 가리킨다. 새 천자가 즉위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이렇게 보좌에 선왕의 갖옷을 모셔 놓고서 조하(朝賀)를 올렸다고 한다. 원문의 ‘朝堂’은 몇몇 이본들에는 ‘廟堂’으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이름〔명분〕이 건재하여 한계를 넘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참으로 충효(忠孝)를 다하여 비통해할 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주(周) 나라의 쇠퇴기에 빈 그릇을 끼고 강대한 제후들의 위에 군림해도 아무도 감히 먼저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여전히 그 빈 이름〔명분〕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슴과 말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지만, 한번 그 이름이 어지러워져 버리자 천하에 제 임금을 죽이는 자가 나오게 되었다.

 

[주D-004]사슴과 …… 되었다 : 진 시황(秦始皇)이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국권(國權)을 독차지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세(二世)인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였다. 이세가 말을 가지고 왜 사슴이라 하느냐고 묻자, 조고를 두려워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말이라고 답하였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했던 사람을 죄를 씌워 죽여 버렸으므로,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아, 저 사슴과 말의 이름이 천하의 존망(存亡)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만 그래도 하루도 구별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데, 더구나 선과 악처럼 서로 같지 아니하고 명예와 치욕처럼 분명히 갈라지는 경우에 있어서랴.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 담담하여 욕심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선왕(先王)은 사람들이 장차 태만하고 해이하여 한결같이 물러나기만 하고 나아감이 없게 될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

로써 그들의 눈을 유도하고, 종고(鍾鼓)와 금슬(琴瑟)과 생용(笙鏞 생황과 큰 종)으로써 그들의 귀를 유도하고, 인수(印綬 관직을 상징함)와 거마(車馬)로써 그들의 몸을 유도하고, 남다른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노래로 지어 찬탄함으로써 그들의 기개를 유도하였다.

 

[주D-005]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 : 보(黼)는 도끼 무늬이고, 불(黻)은 기(己) 자 둘이 서로 등진 모양의 무늬이다. 조회는 수초(水草) 무늬를 그린 것이고, 치수는 자수(刺繡)를 뜻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서 순(舜) 임금은 우(禹)에게 일(日) · 월(月) · 성신(星辰) ·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을 그리고, 종이(宗彛 : 종묘〈宗廟〉의 주기〈酒器〉) · 조(藻) · 화(火) · 분미(粉米 : 백미〈白米〉) · 보(黼) · 불(黻)을 수놓아 예복(禮服)을 만듦으로써 존비(尊卑)의 질서를 분명히 밝히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천자는 일(日) · 월(月) 이하 열두 가지 무늬로 장식한 12장복(章服)을 입었고, 왕은 산(山) · 용(龍) 이하 아홉 가지 무늬로 장식한 9장복을 입었고, 신하들은 계급에 따라 7장복 · 5장복 · 3장복 · 1장복 · 무장복(無章服)을 입었다.

 

그리하여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그 누구도 분발하고 단련해서, 의욕을 내야 할 일에 힘차게 나서고, 물러나 남에게 미루거나 제풀에 꺾이고 마는 마음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결같이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날 줄 모른다면, 천하의 재앙 중에 또한 태연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선왕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고상한 품성을 양성하고, 위로하고 타이르며 힘써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사양하고 물러나는 미덕을 양성하였다.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

은 절개를 양성한 때문이요,

형벌이 위로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 것

은 염치를 기르고자 한 때문이다. 신체에 형벌을 가하거나 유배의 형을 내린 뒤에

또한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표시하는 것은,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곧은 절개로써 자신을 지키고, 장차 아무 짓이나 다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때문이다.

 

[주D-006]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 속백은 비단 다섯 필을 한 묶음으로 만든 것으로 귀중한 예물로 쓰였다. 《예기》 예기(禮器)에 제후가 천자를 조회할 때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하는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존경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尊之〕”라고 하였고, 교특생(郊特牲)에서도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한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덕 있는 천자에게 귀의함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往德也〕”라고 하였다. 후대에는 왕이나 천자가 덕 있는 군자를 초빙할 때에도 속백가벽(束帛加璧)의 예를 갖추었다.
[주D-007]위엄과 …… 것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부귀도 그를 방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변절하게 할 수 없으며,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고 하였다.
[주D-008]형벌이 …… 것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예절은 아래로 서민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으며, 형벌은 위로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형벌이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의 형벌을 별도로 정해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대부를 이처럼 예우함으로써 스스로 염치를 알도록 장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주D-009]또한 …… 것은 :
원문은 ‘又從而示其傷慘矜恤之意’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而’ 자가 ‘以’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而’ 자가 옳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욕심 내기로는 부귀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그가 욕심 내는 대상이 도리어 부귀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다.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로는 형벌보다 더 큰 것이 없지만, 부끄러이 여기는 대상이 도리어 형벌보다 클 경우에는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는 법이다.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이른바 이름〔명예〕이 아니겠는가.

 

[주D-010]시퍼런 …… 법이다 : 보통 사람으로는 행하기 힘든 용기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제 9 장에서 공자는 “천하와 나라와 집안도 고루게 다스릴 수 있고,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으되, 중용(中庸)을 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형벌과 포상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방법이요, 이름〔명예〕을 장려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어디서든 제한이 없는 방법이다. 왜 그런가? 사람 중에 혹 선행을 하면서도 포상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작록이 그가 한 선행을 능가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또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형벌을 꺼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질과 회초리로는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억제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 중에는 반드시 포상을 할 필요 없이 권장하기만 하고, 형벌을 가할 필요 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게만 하면, 힘차게 의욕을 내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의(義)라는 이름은 공평하고 정대(正大)하나, 명(名)이라는 이름은 이기적이고 천박한 것이다. 그대의 논법대로 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을 다 몰아서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이른바 이름을 혐오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그 폐단은 어리석은 점이지만, 그래도 근엄하고 자중하여 세속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지경까지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아무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에게 갑자기 실정보다 지나친 칭찬을 가한다면, 그 역시 뒤로 물러서 겸손히 사양하고 불안해하며 그렇다고 자처하지 못할 터이다. 어찌 사람들을 몰아다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을 걱정할 게 있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모두가 다 군자라면, 또한 무엇 때문에 이름〔명예〕에 대해 힘쓰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성취하려고만 한다면,

인의(仁義)의 행실을 욕심으로써 인도할 수 있고, 불의(不義)의 일을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천하의 대중들이 무관심하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선왕이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

과 충효 인의(忠孝仁義)의 행실이 모두 다 텅텅 비어서 빈 그릇이 되고 말 터이니, 장차 어디에 의탁하여 스스로 행해지겠는가?”

 

[주D-011]만약 …… 한다면 : 《중용》에 출처를 둔 말이다. 《중용장구》 제 20 장에 “어떤 이는 편안히 실행하고, 어떤 이는 민첩하게 실행하고, 어떤 이는 있는 힘을 다해 실행하나니, 공을 이루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주D-012]세상을 다스리는 계책 :
원문은 ‘禦世之策’인데, ‘策’ 자가 ‘具’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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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환집서(蜋丸集序)


종북소선(鍾北小選), 연암집 제 7 권 별집


[주C-001]낭환집서(蜋丸集序) :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인 유련(柳璉 : 1741 ~ 1788)의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는 길강전서(蛣蜣轉序)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으나, 동일한 작품이다. 《길강전(蛣蜣轉)》은 유련의 시고(詩藁)로서, 다름 아닌 《낭환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낭환집서에서 《낭환집》의 작자로 소개되어 있는 자패(子珮)는 곧 유련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김윤조(金允朝) 교수의 조언에 의거한 것이다.


자무(子務)와 자혜(子惠)
가 밖에 나가 노니다가 비단옷을 입은 소경을 보았다.


[주D-001]자무(子務)와 자혜(子惠) : 자무는 이덕무(李德懋)의 자(字)인 무관(懋官), 자혜는 유득공(柳得恭)의 자인 혜풍(惠風)에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자혜가 서글피 한숨지으며,

“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구나.” 하자,

자무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자와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는가?” 하였다.


[주D-002]비단옷 …… 자 : 항우(項羽)가 진 시황의 아방궁을 함락하고 나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줄 것인가. 〔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誰知之者〕”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그래서 마침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함께 가서 물어보았더니,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몰라.” 하였다.

옛날에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蝨〕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訟事)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하였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놈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으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짚신을 신었는지 가죽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中〕’을 알 수가 있겠는가.


말똥구리〔蜣蜋〕는 자신의 말똥을 아끼고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蜋丸〕’을 비웃지 않는다.

[주D-003]여룡(驪龍)의 구슬 : 여룡은 검은 빛깔의 흑룡을 말한다. 용의 턱밑에는 여의주(如意珠)라는 영묘한 구슬이 있다고 한다.
[주D-004]말똥구리〔蜣蜋〕는 …… 않는다 :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螗蜋自愛滾丸 不羨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이라 하여 거의 똑같은 구절이 있다.


자패(子珮)가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로써 내 시집(詩集)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

하고는, 드디어 그 시집의 이름을 ‘낭환집(蜋丸集)’이라 붙이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자패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정령위(丁令威)가 학(鶴)이 되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가 정령위인지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격이 아니겠는가.


[주D-005]정령위(丁令威)가 …… 못하였으니 : 정령위는 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으로 신선이 된 지 천 년 만에 학(鶴)으로 변해 고향을 찾아갔으나, 그가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앉은 줄을 모르는 한 젊은이가 활로 쏘려고 했으므로 탄식하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搜神後記 卷1》


《태현경(太玄經)》이 크게 유행하였어도 이 책을 지은 자운(子雲 양웅(揚雄))은 막상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소경이 비단옷을 입은 격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을 보고서 한편에서 여룡의 구슬이라 여긴다면 그대의 짚신〔鞋〕을 본 것이요, 한편에서 말똥으로만 여긴다면 그대의 가죽신〔鞾〕을 본 것이리라.


[주D-006]짚신〔鞋〕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가죽신〔靴〕’으로 되어 있다.
[주D-007]가죽신〔鞾〕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짚신〔鞋〕’으로 되어 있다.


남들이 그대의 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정령위가 학이 된 격이요, 그대의 시가 크게 유행할 날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면 이는 자운이 《태현경》을 지은 격이리라. 여룡의 구슬이 나은지 말똥구리의 말똥이 나은지는 오직 청허선생만이 알고 계실 터이니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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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집서(自笑集序)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禮失而求諸野〕”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림없지 않은가! 지금 중국 천하가 모두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어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알지 못한 지 이미 100여 년인데, 유독 연희(演戱) 마당에서만 오모(烏帽)와 단령(團領)과 옥대(玉帶)와 상홀(象笏 상아로 만든 홀)을 본떠서 장난과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아아, 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이 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혹시 낯을 가리고 차마 보지 못할 이가 있지 않겠는가?

[주D-001]예가 …… 구한다 : 《한서》 권30 예문지(藝文志)에 인용된 공자(孔子)의 말이다. 안사고(顔師古)는 주(註)에서 “도읍(都邑)에서 예가 사라졌을 경우 재야에서 구하면 역시 장차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였다.
[주D-002]한관(漢官)의 위의(威儀) :
한(漢) 나라 관리들의 위엄 있는 복식과 전례(典禮) 제도라는 말로, 중화(中華)의 예의 제도를 뜻한다.
[주D-003]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 :
한족(漢族) 왕조인 망한 명(明) 나라에 대해 여전히 신민(臣民)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노인 세대를 가리킨다.


아니면 혹시 이 연희 마당에서 그것들을 즐겁게 구경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상상하는 이라도 있겠는가?
세폐사(歲幣使 동지사)가 북경에 들어갔을 때
오(吳) 지방 출신 인사와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주D-004]오(吳) 지방 출신 인사 : 오(吳) 지방은 중국의 동남쪽 강소성(江蘇省) ·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명 나라 말에 최후까지 만주족의 침략에 저항하여 유달리 반청(反淸) 사상이 강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고장에 머리 깎는 점방이 있는데 ‘성세낙사(盛世樂事 태평성세의 즐거운 일)’라고 편액을 써 걸었소.”

하므로, 서로 보며 크게 웃다가 이윽고 눈물이 주르르 흐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습관이 오래되면 본성이 되는 법이다. 세속에서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부인들의 의복이 이 일과 매우 비슷하다. 옛 제도에는 띠가 있으며 모두 소매가 넓고 치마 길이가 길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원(元) 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왕이 많아지면서 궁중의 수식(首飾)이나 복색이 모두 몽골의 오랑캐 제도가 되었다.

[주D-005]소매 : 원문은 ‘袖’인데, ‘袂’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궁중의 양식을 숭모하여 마침내 풍속이 되어 버려, 3, 4백 년 된 지금까지도 그 제도가 변하지 않고 있다.

저고리 길이는 겨우 어깨를 덮을 정도이고 소매는 동여놓은 듯이 좁아 경망스럽고 단정치 못한 것이 너무도 한심스러운데, 여러 고을 기생들의 옷은 도리어 고아(古雅)한 제도를 간직하여 비녀를 꽂아 쪽을 찌고 원삼(圓衫)에 선을 둘렀다. 지금 그 옷의 넓은 소매가 여유 있고 긴 띠가 죽 드리워진 것을 보면 멋들어져 만족스럽다.

그런데 지금 비록 예(禮)를 아는 집안이 있어서 그 경망스러운 습관을 고쳐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더라도, 세속의 습관이 오래되어 넓은 소매와 긴 띠를 기생의 의복과 흡사하다고 여기니, 그렇다면 그 옷을 찢어 버리고 제 남편을 꾸짖지 않을 여자가 있겠는가.”


[주D-006]예(禮)를 아는 집안 :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 범절을 대대로 전승해 오는 명문가를 ‘시례지가(詩禮之家)’라고 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는 5대조 박미(朴瀰)의 부인 정안옹주(貞安翁主)가 중국식의 상복(上服)을 착용한 이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이를 집안의 예(禮)로 확정했으며, 조부 박필균(朴弼均)도 집안 부인네에게 이를 따르게 했다고 한다. 《居家雜服攷 內服》


이군 홍재(李君弘載)는 약관 시절부터 나에게 배웠으나 장성해서는 한역(漢譯 중국어 통역)을 익혔으니, 그 집안이 대대로 역관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시 문학을 권면하지 않았었다. 이군이 한역을 익히고 나서 관복을 갖추고 본원(本院 사역원(司譯院))에 출사(出仕)하였으므로, 나 역시 속으로 ‘이군이 전에 글을 읽을 적에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를 알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을 터이니, 재능이 사라지고 말 것이 한탄스럽다.’고 생각하였다.


[주D-007]이군 홍재(李君弘載) : 홍재는 이양재(李亮載 : 1751 ~ ?)의 초명(初名)이다. 이양재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이언용(李彦容)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8) 역과(譯科)에 급제하고 사역원(司譯院)에 재직하였다. 《譯科榜目》 원문은 ‘李君’인데, ‘弘載’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아래에 나오는 ‘李君’은 모두 같다.
[주D-008]그 …… 때문이었다 :
원문은 ‘乃其家世舌官’인데, ‘也’ 자가 추가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09]재능이 …… 한탄스럽다 :
원문은 ‘乾沒可歎’인데 ‘간몰(乾沒)’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물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하루는 이군이 자기가 지은 글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소집(自笑集)’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논(論), 변(辨) 및 서(序), 기(記), 서(書), 설(說) 등 100여 편이 모두 해박한 내용에다 웅변을 토하고 있어 특색 있는 저작을 이루고 있었다.

[주D-010]특색 있는 …… 있었다 : 원문은 ‘勒成一家’인데, 글을 엮어 책을 만드는 것을 ‘늑위성서(勒爲成書)’ 즉 ‘늑성(勒成)’이라 하고, 특색 있는 저작을 ‘일가서(一家書)’라고 한다.


내가 처음에 의아해하며,

“자신의 본업을 버리고 이런 쓸데없는 일에 종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군은,

“이것이 바로 본업이며 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주D-011]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 대본은 ‘果有用 則’인데, ‘則’ 자가 ‘也’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則’이 되면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이본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대개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외교에 있어서는 글을 잘 짓고 장고(掌故)에 익숙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원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익히는 것은 모두 옛날의 문장이며, 글제를 주고 재주를 시험하는 것도 다 이것에서 취합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낯빛을 고치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태어나 어렸을 적에는 제법 글을 읽지만, 자라서는 공령(功令 과거 시험 문장)을 배워 화려하게 꾸미는 변려체(騈儷體)의 문장을 익숙하게 짓는다.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이를 변모(弁髦)나 전제(筌蹄)처럼 여기고, 합격하지 못하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거기에 매달린다. 그러니 어찌 다시 이른바 옛날의 문장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주D-012]변모(弁髦)나 전제(筌蹄) : 무용지물을 뜻한다. 변모는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쓸데없는 치포관(緇布冠)과 동자(童子)의 다팔머리를 말하고, 전제는 물고기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통발과 토끼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올가미를 말한다.


역관의 직업은 사대부들이 얕잡아 보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는 참된 학문을도리어 서리들의 하찮은 기예로 간주하게 된다면, 그것을 연희 마당의 오모나 고을 기생들의 긴 치마처럼 여기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까봐 두렵다. 나는 본시 이 점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이 문집에 대해 특별히 쓰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중국 고유의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보려면 마땅히 배우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요, 부인 옷의 고아(古雅)함을 찾으려면 마땅히 고을 기생들에게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장의 융성함을 알고 싶다면 나는 실로 미천한 관리인 역관들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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