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글에서 밝힌 '域外春秋論'이란, 중국이 지구의 중심이 아니라 조선이 지구의 중심이란 뜻이다. 지구는 구형을 의미하므로 이 구형이 自轉하는 한, 자신이 있는 곳이 지구의 중심이 된다. 홍대용 선생은 북경에서 목도한 서양문물 덕분에 지구자전설을 처음으로 주창한 조선인이시다.

이참에 외국 국명에 대해 반성해 보면, 중국은 차이나, 미국은 북미라 호칭함이 옳다고 본다. 1765년에 홍대용 선생이 이미 깨친 국명을 지금껏 서슴없이 사용하는 건 언어도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이린 국명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중미, 남미의 나라들이 있으니 그냥 북미로 눈감아 주는 거다. 해마다 토네이도가 끊이지 않고, 외국인들의 입국을 막기 위해 위험천만한 담장을 치는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라는 데 동의할 순 없다. 진정 아름다운 나라라면 국익을 나누는 시늉이라도 하는, 세계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여야 한다. 미국 제일주의는 국제적 고립만 자초할 뿐이다.

 

 

 

홍대용

 

https://www.youtube.com/watch?v=bKJ0_8BA13s

홍대용

화이(華夷)의 경계를 허문 세계주의자

[ 洪大容 ] 1731 ~ 1783

1765년(영조 41) 초겨울날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평소 시 짓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은 예외였다. 평생의 소원이 하루아침의 꿈같이 이루어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말고삐를 움켜쥐며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하늘이 사람을 내매 쓸 곳이 다 있도다.
나와 같은 궁색한 인생은 무슨 일을 이루었던가?
…(중략)…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들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망해정 제일층 취후에 높이 앉아
묘갈(墓碣)을 발로 박차고 발해를 마신 뒤에
진시황의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초한 행색이 누구의 탓이라 하리오.
[을병연행록] 중에서

…(중략)… 부분 보완(운영자)

등불 아래 글을 읽어 장문부를 못 이루고

말 위에서 활을 익혀 오랑캐를 못 쏘는도다.

반생이 녹록하여 전사(田舍)에 잠겼으니

비수를 옆에 끼고 역수를 못 건넌들

금등이 앞에 서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세계관을 바꿔 놓은 중국 여행

서른다섯의 나이로 머나먼 중국 땅에 가게 된 홍대용. 그는 좁은 조선 땅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아는 대부분의 조선 유자층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중국을 다녀 온 뒤 쓴 [을병연행록]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그리고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중국견문록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중국견문의 붐을 일으켰다.

홍대용은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선비 타입의 인물이다. 세속적인 선비가 아닌 진실한 선비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그가 동시대를 살았던 선비들과 다른 점이라면, ‘명(明)’이여야만 된다는 아집에만 젖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뒤 조선사회는 북벌(北伐)과 함께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올랐다.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젖은 조선 유학자들은 청을 중화(中華)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중국 연행(燕行)을 다녀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홍대용이다.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대용 [洪大容] - 화이(華夷)의 경계를 허문 세계주의자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연행과 연행록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0062&cid=59020&categoryId=59031

17세기 초 동아시아는 한·중·일 모두 역사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중국은 명·청 왕조의 교체가 있었고, 일본은 에도시대가 열렸다.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와 벌인 전쟁(병자호란, 1637년)에 패하면서 명이 아닌 청에 조공외교를 해야 했다.

만국래조도.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면서 조선은 매년 정기적으로 두 차례, 비정기적으로는 한 두 차례 외교사절단을 청에 파견하였다. 외교사절로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을 부경사행(赴京使行), 혹은 연행(燕行)이라고 하는데, 황제가 있는 연경(지금의 북경)을 가는 외교행위의 뜻을 담고 있다. 연경은 오늘날 중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과거 원, 명, 청의 수도였다. 오랜 기간 중국의 수도였던 탓에 연경을 가는 것이 곧 중국 사행을 뜻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사행을 천자를 알현한다는 의미를 써서 ‘조천(朝天)’이라 일컬었다. 반면에, 청나라에 가는 사행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감정에 따라 조천 대신 연행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조선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1637년(인조 15)부터 1894년까지이다. 250여 년 동안 줄잡아 500회 이상의 조선사행단이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사행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견문을 글로 남겼는데, 그 결과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현재 400여 종이 넘는 중국여행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여행을 기록하다 - 조선후기 연행록과 연행도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역외 춘추론(域外春秋論)

의산 문답(毉山問答) :홍대용

담헌서(湛軒書) 내집 4권(內集 卷四)

보유(補遺)

[은자주]중국 주나라 역사를 중국역사의 정통으로 취한 것이 공자가 저술한 주나라 역사서인 <춘추>이다. 이에 바탕한 것이 춘추대의론이다. 그러니까 역외춘추론이란 춘추대의론의 상대적인 말로 세계에 안과 밖이 없으니 내가 서 있는 땅이 세계의 중심이고 내 나라 역사가, 종전에 역외라 생각하던 땅이 사실은 나에게 있어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북학파가 도달한 지구에 대한 과학적 사고에 근거한다. 땅이 평면일 때는 중심이 존재했지만 땅이 구체(球體)로 되어 있음을 자각한 이상 이제 세계의 중심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홍대용은 이 <의산 문답(毉山問答)>에서 실옹(實翁)의 답변을 통하여 자기 나라의 역사가 바로 ‘춘추’라는 역외 춘추론(域外春秋論)을 역설했다.

<의산 문답>의 도입부[정황의 파악을 위함]와 결말 부분을 소개한다.

[도입부]

자허자(子虛子)는 숨어 살면서 독서한 지 30년에 천지의 조화와 성명(性命)의 은미(隱微)함을 궁구하고 오행(五行)의 근원과 삼교(三敎)의 진리를 달통하여 인도(人道)를 경위(經緯)로 하고 물리(物理)를 깨달아 통했다. 심오한 원위(源委)를 환히 안 다음에 세상에 나가 남에게 이야기했더니, 듣는 자마다 웃었다.

[주D-001]오행(五行) :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
[주D-002]삼교(三敎) :
유교(儒敎)ㆍ도교(道敎)ㆍ불교(佛敎).


허자가 말하기를,

“작은 지혜와 더불어 큰 것을 이야기할 수 없고 비루한 세속 사람과 더불어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하고, 서쪽으로 연도(燕都 북경)에 들어가 선비와 더불어 이것저것 이야기할 때 여관에서 60일 동안이나 있었으나 마침내 알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에 허자가 슬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주공(周公)이 쇠했는가? 철인(哲人)이 죽었는가? 우리 도(道)가 글렀는가?”

하고, 행장을 차려 돌아왔다.
이에 의무려산(毉巫閭山)에 올라 남쪽으로 창해(滄海)와 북쪽으로 대막(大漠)을 바라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노담(老聃)은 ‘호(胡)로 들어간다.’고 했고, 중니(仲尼)는 ‘바다에 뜨고 싶다.’고 했으니, 어찌 알건가, 어찌 알건가.”

하고는 드디어 세상을 도피할 뜻을 두었다.
수십 리쯤 가니 앞에 돌문[石門]이 나왔는데 실거지문(實居之門)이라고 씌어 있다. 허자가 말하기를,

“의무려산이 중국과 조선의 접경에 있으니, 동북 사이에 이름난 산이다. 반드시 숨은 선비가 있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가서 물어 보리라.”

하였다. 드디어 석문으로 들어가니 한 거인(巨人)이 새집처럼 만든 증소(橧巢) 위에 홀로 앉았는데, 모습이 괴이하였으며 나무를 쪼개서 글씨쓰기를 실옹지거(實翁之居)라 하였다.
허자는 혼잣말로,

“내가 허(虛)자로써 호(號)를 한 까닭은 장차 천하의 실(實)을 살펴보고 싶어 한 것이며, 저가 실(實)자로써 호한 것은 장차 천하의 허(虛)를 타파시키고자 함일 것이다. 허는 허대로 실은 실대로 하는 것이 묘도(妙道)의 진리리니, 내 장차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리라.”

하고, 엉금엉금 기어 앞으로 나아가 우러러 절한 다음, 공수(拱手 존경의 표시로 팔짱을 낌)하고 그의 오른쪽에 섰다. 거인(巨人)은 고개를 떨구고 멍하게 있는 채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허자가 손을 들고 말하기를,

“군자(君子)로서 사람을 대하는데 진실로 이와 같이 거만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거인이 말하기를,

“네가 이 동해(東海)에 있는 허자인가?”

허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부자(夫子)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거인은 무릎에 기대서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과연 허자로구나. 내가 무슨 술법을 가졌단 말이냐? 너의 옷차림을 보고 너의 음성을 들으니 동해라는 것을 알겠고, 너의 예법을 보니, 겸양을 꾸며서 거짓 공손함을 삼고 오로지 허로써 사람을 대한다. 이로써 네가 허자라는 것을 알았지, 내가 무슨 술법이 있겠느냐?”

하였다.

 

[역외 춘추론(域外春秋論)]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짓되 중국은 안으로, 사이(四夷)는 밖으로 하였습니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이와 같이 엄격하거늘 지금 부자는 ‘인사의 감응이요 천시의 필연이다.’고 하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하늘이 내고 땅이 길러주는,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모두 이 사람이며, 여럿에 뛰어나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자는 모두 이 임금이며, 문을 거듭 만들고 해자를 깊이 파서 강토를 조심하여 지키는 것은 다 같은 국가요, 장보(章甫)이건 위모(委貌)문신(文身)이건 조제(雕題)건 간에 다 같은 자기들의 습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이러므로 각각 제 나라 사람을 친하고 제 임금을 높이며 제 나라를 지키고 제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가 한가지다.

 

[주D-039]위모(委貌) : 주 나라의 갓 이름.
[주D-040]문신(文身) :
문신(文身)은 오랑캐의 별칭임.
[주D-041]조제(雕題) :
조제(雕題)는 미개한 민족의 별칭임.


대저 천지의 변함에 따라 인물이 많아지고 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물아(物我 주체와 객체)가 나타나고 물아가 나타남에 따라 안과 밖이 구분된다. 장부[五臟六腑]와 지절(肢節)은 한 몸뚱이의 안과 바깥이요, 사체(四體)와 처자(妻子)는 한 집안의 안과 바깥이며, 형제와 종당(宗黨)은 한 문중의 안과 바깥이요, 이웃 마을과 넷 변두리는 한 나라의 안과 바깥이며, 법이 같은 제후국(諸侯國)과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는 천지의 안과 바깥인 것이다.

대저 자기의 것이 아닌데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죄가 아닌데 죽이는 것을 적(賊)이라 하며, 사이(四夷)로서 중국을 침노하는 것을 구(寇)라 하고, 중국으로서 사이(四夷)를 번거롭게 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그러나 서로 구(寇)하고 서로 적(賊)하는 것은 그 뜻이 한 가지다.
공자는 주 나라 사람이다. 왕실(王室)이 날로 낮아지고 제후들은 쇠약해지자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중국을 어지럽혀 도둑질하고 해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춘추(春秋)란 주 나라 사기인 바, 안과 바깥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느냐?
그러하나 가령 공자가 바다에 떠서 구이(九夷)로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법을 써서 구이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 나라 도(道)를 역외(域外)에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즉 안과 밖이라는 구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가 스스로 딴 역외 춘추(域外春秋)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聖人)된 까닭이다.”

[의무려산]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7954?category=563867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