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그림 오는쪽은 홍대용이 만든 망원경

 

박지원, 홍덕보 묘지명(洪德保墓誌銘)

한문 원문은 아래책 참조.

박지원 연암집 권2 연상각선본, 묘지명, 경인문화사,1974, p.51. 

박지원 연암집 1/3책, 권2 연상각선본 묘지명, 계명문화사, 1986, pp.201-204.

 

번역문은 아래 책 참조.

박지원저 홍기문역, 나는 껄껄선생이라오, 보리, 2004, pp.396-399.

홍대용,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69-372.

[참조]

*이송,담헌홍덕보묘표,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72-378.

박지원, 홍덕보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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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보(德保)가 별세한 지 3일이 되던 날 손님 중에서 연사(年使 해마다 가는 동지사(冬至使) 를 말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이가 있는데, 그 행로가 삼하(三河)를 통과하게 된다. 삼하 에는 덕보의 친구가 있는데, 성명은 손유의(孫有義)로 호(號)는 용주(蓉洲)이다. 지난해 내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던 길에 용주를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편지를 써 놓게 되어서 거기에 덕보가 우리 나라 남쪽 지방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까지를 갖추 말하고 또 가져간 토산물 몇 가지를 놓아 두어 정의를 표하고 돌아왔었다. 용주가 그 편지를 펴 보면 응당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을 알았을 것이리라.

그래서 손님 가는 편에 그에게 부고하기를, “건륭(乾隆) 계묘년(1783, 정조 7) 모월 모일에,

조선 사람 박지원(朴趾源)은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용주(蓉洲) 족하(足下)에게 아룁니다. 내 나라 전직 영천 군수(榮川郡守) 홍담헌(洪湛軒), 이름은 대용(大容), 자(字)는 덕보(德保)가 금년 10월 23일 유시(酉時)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에 아무 탈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말을 못하더니, 얼마 뒤에 곧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요, 아들 원(薳)은 통곡 중이라 정신이 혼미하와 손수 글을 올려 부고를 하지 못하고 또 양자강(揚子江) 이남은 인편의 계제가 없었습니다. 부디 비옵건대, 이를 대신하시어 오중(吳中)에 부고하여, 천하의 지기(知己)들로 하여금 그의 별세한 날을 알게 하여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에 한됨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하여, 손님을 보내고 나서, 손수 항주(杭州) 사람들의 서화(書畫)와 편지, 그리고 시문 (詩文) 등을 점검하니 모두 10권이었다.

이것을 빈소(殯所) 곁에 진설해 놓고 구(柩)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노니,

“아! 슬프다. 덕보는 통달하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이해가 정미하며, 더욱 율력(律曆)에 장기가 있어 혼의(渾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思慮)가 깊고 골독(汨篤: 한 가지의 일에 정신을 씀)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機智)가 있었도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地球)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 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 학설이 묘미하고 현오(玄奧)하였다. 다만 저서하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그 만년에 있어서는 더욱 지구가 돈다는 것에 대해 자신을 가졌으며, 이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세상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찍이 스스로 과거할 것을 그만두고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서 한가히 앉아 명향(名香)을 태우고 거문고와 비파를 두드리면서 ‘나는 장차 아무 욕심없이 고요히 자희(自喜)의 태도로 마음을 세속 밖에 놀게 하겠노라’ 하는 것만 보았지, 특히 덕보는 서물(庶物)을 종합정리하여 체계있게 분석하였으므로, 방부(邦賦)를 맡고 절역(絶域)에 사신 갈 만하며, 통어(統禦)의 기략(奇略)이 있었다는 것은 모른다. 그런데, 그는 홀로 혁혁(赫赫)하게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했던 까닭에 겨우 몇 군의 원을 지내면서 부서(簿書)를 조심하고 기회(期會)에 앞서 일을 잘 처리함으로써, 하부 관리들은 할 일이 없고 백성들은 잘 순화되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언젠가 그는 그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갈 때 따라가 유리창(琉璃廠)에서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 균(潘庭筠) 등을 만났다. 세 사람은 다 집이 전당(錢塘)에 있는데 그들은 모두 문장ㆍ예술의 선비였으며, 그들이 교유(交遊)한 이들도 모두 해내(海內 중국 전토를 가리킴)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덕보를 대유(大儒)라 하여 추복(推服)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필담한 수만 언(言)은 모두 경지(經旨)ㆍ천인 성명(天人性命)ㆍ고금 출처 대의(古今出處大義)에 대한 변석 (辨析)이었는데 굉사(宏肆)하고 준걸(儁傑)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었다. 그리고 헤어지려고 할 때, 서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 황천(黃泉)에서 서로 만날 때 아무 부끄러움이 없도록 〈생시에 학문에 더욱 면려하기를〉 맹세하자’ 하였다. 〈덕보〉는 엄성과 특히 뜻이 맞았으니 그에게 풍간(諷諫)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을 때를 따라 해야 한다.’고 하였을 때, 엄성은 크게 깨달아 이에 뜻을 결단하였다. 그 후 남쪽으로 돌아간 뒤 몇 해 만에 민(閩)이란 땅에서 객사를 하였는데 반정균은 덕보에게 부고를 하였다. 덕보는 이에 애사(哀辭 제문)를 짓고 향폐(香幣)를 갖추어 용주에게 부치니, 이것이 전당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날 저녁이 대상(大祥)이었다. 대상에 모인 사람들은 서호(西湖)의 여러 군에서 온 사람들인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르기를 ‘명감(冥感)의 이른 바다.’고 하였다. 엄성의 형 엄과(嚴果)가 분향 치전(致奠)하고 애사를 읽어 초헌(初獻)을 하였다. 엄성의 아들 앙(昻)은 〈덕보〉를 백부라고 써서 그 아버지의 철교유집(鐵橋遺集)을 부쳐 왔는데, 전전(轉轉)하여 9년만에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집 중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영정(影幀)이 있었다. 엄성은 민(閩)에서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기증한 조선산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오하(吳下)의 사람들은 유별난 일이라 하여 성하게 전하며, 이것을 두고 다투어 가며 서로 시문으로 찬술하였으니 이에 대한 사실은 주문조(朱文藻)란 사람이 편지를 하여 그 형상을 말해 주었다.

아! 슬프다. 그가 생존하였을 때 낙락(落落)한 것이 마치 왕고(往古)의 기적(奇蹟)과 같았으니, 그래서 지극한 성품의 좋은 벗이 있어 그의 이름을 반드시 널리 전하려고 함이라. 비단 그 이름이 강남(江南)에만 두루 전해질 뿐만이 아닐 것이니, 내가 묘지(墓誌)를 하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썩지 않을 것이다.”

고(考 돌아간 아버지)는 휘(諱)가 역(櫟)인데 목사(牧使)요, 조고(祖考)는 휘가 용조(龍祚)인데 대사간(大司諫)이요, 증조고(曾祖考)는 휘가 숙(潚)인데 참판(叅判)이다. 그리고 모(母)는 청풍 김씨(淸風金氏) 군수 방(枋)의 딸이다.

덕보는 영종(英宗) 신해년(1731, 영조 7)에 나서 벼슬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고 이어서 돈녕부 참봉(敦寧府叅奉)으로 옮겼으며, 세손 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에 고쳐 제수되었고, 그 다음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승진되었다가 나중에는 종 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전직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태인현감(泰仁縣監)이 되었다가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승진하여 수년 만에 어머니의 늙으심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딸이요, 자녀로는 1남 3녀를 낳았으니, 사위는 조우철(趙宇喆)ㆍ민치겸(閔致謙)ㆍ유춘주(兪春柱)이다. 그 해 12월 8일 청주(淸州) 아무 좌향의 둔덕에 장사하다.

[출처] 홍덕보묘지명-홍대용을 향한 박지원의 존경|작성자 ww6798

[참고] 연행은 연암보다 10년 앞섰지만, 담헌은 국적이나 연령을 초월하여 師友면 연령에 개의치 않았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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