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담헌홍덕보묘표,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72-378.

이 묘표는 정인보 선생의 이송의 고문에 대한 찬양을 하느라 그의 글을 인용한 글을 덧붙여 길어졌다. 그는 이송의 고문 예찬하고, 칭찬일색인 연암에 대해서도 "탕일하고 기이한 데가" 보인다고 고문복고운동을 펼친 정조처럼 말했다. 운영자는 한문을 잘 모르지만 근세 한문학의 일인자라면 무애 양주동 선생조차 위당 선생을 제일로 치니 뭐라고 토를 달순 없는 노릇이다. 용서가 허락된다면, 이미 그 시대에 사실주의의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는 북학파들의 연행문이 나오면서 고문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점이다. 위당 선생이 이송의 고문을 예찬한 것은 어쩌면 운을 맞춰가며 간결과 생략을 요체로 하는 고문시대를 자신으로 마감해야 하는 안타까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이칭 - 무백(茂伯), 고청(孤靑), 노초(老樵), 서림(西林)

아래 논문 참조

백진우 -老樵 李淞의 『老樵集』과 「湛軒洪德保墓表」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44768

이송이 남긴 자필 문집 『老樵集』(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내용을 개괄하고, 이 저술로부터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송의 생애를 재구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가 홍대용을 위해 지어준 墓表 「湛軒洪德保墓表」가 기존에 정인보와 같은 걸출한 평론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실에서 착안하여 조선후기 한문학사에서 『노초집』이 갖는 의미, 그리고 그의 비지문의 산문사적 의의를 점검해보고자 하였다.

이송,담헌홍덕보묘표/ 발췌

이송,담헌홍덕보묘표,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72-378.

이송의 묘표는 3쪽 정도이고, 나머지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논평과 명문 발췌이다.

[묘표 중에서]

아! 슬프다. 덕보가 일찌기 나와 담론한 것과 그가 간직했던 마음, 그리고 그 소행 등을 다 진술할 수는 없으나 그 학문이 오로지 平實을 숭상하고 과월하고 교격한 것이 없으며, 세속 선비들이 이론만 숭상하고 實行實用을 전연 방치함에 대해 일찍부터 민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 고금 인물들의 正邪 是非를 논함에 그 抑揚取捨한 것은 전배들의 定案밖에 뛰어난 것들이 많았다. 그가 지니 大心이야말로 공평하게 보고 이것 저것 다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으니, 大道에 돌아가 뾰족하고 작고 좁고 사사로운 것을 버리는 것은 진실로 지금 세상에 있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며, 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 이런 道가 보급되었으면 한다.

[정인보 선생의 西林 이송의 고문 인용과 논평]

이하는 담헌집을 해설하고 이 글을 부록란에 덧붙인 위당 정인보 선생의 논평이다.

인보가 난곡 李丈 댁에 가서 이월암참봉집을 보니, 구나말에 서림 이송이 월암을 곡한 제문이 붙어 있다. 그 제문의 문사가 심히 고상하였고 그 아래에는 대연(이면백의 호)의 기록한다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참봉군이 본래는 西林을 알지 못했는데 羅烈이 정릉의 令이 되어 참봉군을 초청함에 참봉군이 그 直所에 이르렀는데, 이때 西林도 마침 와서 같이 잤던 것이다.

그런데, 그후 다시 소식이 서로 끊겼고 참봉군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람들 또한 서림이 참봉군을 곡한 제문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승지인 강인(표암의 아들)이 일찌기 서림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참봉군에 대한 말이 나오니, 서림은 이 제문의 초를 내어 보였다. 강인이 빌어서 자기집에 가져가려고 청하자, 서림이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마침내 암송하여 돌아가서 기록하여 두었노라."

하였다.

(... 중략 ... )

서림의 글이 과연 이렇게도 귀한 것인가! 1개월 후에 영선이 이 묘표의 글을 가지고 왔기에 인보는 읽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아! 이 글이야말로 바로 소위 고문의 전아한 것을 훌륭히다한 글이다."고 하였다.

연암이 지은 묘지명과 비교하면 연암은 蕩逸(탕일)하며 奇異한 데가 보이지마는 醇實(순실)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그 꽃다운 향내가 멀리 풍긴다. 내가 감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속단하여 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글을 볼 때 담헌을 아는 면 같은 것이 서림이 더 깊은 것 같다. 그리고 또 서림의 글은 곡절이 있을 뿐더러 그 홀로 아는 데 이르러서는 염암과 어찌 그 우열을 비교할 뿐이겠는가!

(... 중략 ... )

지금 인보가 종합해 본 西林의 詩文은 비록 이것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 글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응당 農巖 이후 4-5명의 문장가에 서림이 그 사이에 들어감을 알 것이다.

[참고]

농암 이현보 신도비 [聾巖李賢輔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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