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9X-vMf6UnNk

 

https://www.youtube.com/watch?v=ew0G09K1Ix4

 

[은자주] 돌아가신 맏누님에 대한 조사(弔辭)도 형식을 벗어나 망인에 대한 애틋한 정이 우러난다. 오죽했으면 문장의 틀을 부정하는 이 글을 처남 이재성의 아들이 상자 속에 넣어 두고 남에게는 보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까지 적었을까? 당시로서는 정조가 말하던 고문의 틀에서 벗어난 대단한 파격(破格)임을 감지할 수 있다. <가락국기> 명에서 보듯이 조상과 출생, 전생애를 4언으로 노래하는 것이 보통인데, 연암은 달랑 7언절구 한편 써 놓고 명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사실에 의거하여 진정성을 담는 데 노력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장은 뜻을 표현하면 그만이었다. 진실에 바탕한 達意위주의 문장이어야 한다.

부부를 불러 놓고 내용도 없는 출연자들의 수다로 채우는 TV프로그램이 나오면 화딱지가 난다. 방송이란 게 그렇게 할 일이 없는가. 방송의 공익성은 어디다 내팽개쳤는가?

맏누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제2권

연암집,게명문화사,1986,pp.198-199.[한문원본]

[주C-001]맏누님 …… 묘지명 : 《연상각집》의 ‘유인(孺人)’이나 《종북소선(鍾北小選)》의 ‘망자 유인 박씨 묘지명〔亡姊孺人朴氏墓誌銘〕’, 《병세집》의 ‘맏누님 유인 박씨 묘지명〔伯姊孺人朴氏墓誌銘〕’ 등과 동일한 작품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에서 크게 차이 난다. 초기작인 《종북소선》이나 《병세집》의 글을 개작한 것이라 판단된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를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중국인 호부 주사(戶部主事)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外從弟)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받아 연암에게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유인(孺人)의 휘(諱)는 아무요 반남 박씨이다.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 연암의 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16세에 덕수(德水) 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에게 출가하여 1녀 2남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 영조 47) 9월 초하룻날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것들과 계집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끌고 배를 타고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중미는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안에서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주D-001]유인(孺人) :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 족보에 의하면, 박씨의 남편인 이현모(李顯模)는 나중에 종 2 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선친 이유(李游)에게도 참판이 증직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인 박씨에게도 추후에 정부인(貞夫人)의 봉작(封爵)이 내렸던 듯하다.
[주D-002]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
택모(宅模)는 이현모(李顯模 : 1729 ~ 1812)의 처음 이름이다. 백규(伯揆)는 그의 처음 자이고, 나중에 이름을 고치면서 자도 회이(誨而)로 고쳤다. 이현모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주D-003]아곡(鵶谷) :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에 통합된 지평현(砥平縣)에 있었다.
[주D-004]두포(斗浦) :
지금의 팔당댐 부근에 있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수상 교통의 요지로 두미(斗尾 : 또는 斗迷), 두릉(斗陵) 등으로도 불렸다. 그곳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곧 양평군을 지나게 된다. 《병세집》에는 ‘豆浦’로 되어 있으나, 《종북소선》에는 대본과 마찬가지로 ‘斗浦’로 되어 있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응석스럽게 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은근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주D-005]말처럼 뒹굴면서 : 원문은 ‘馬전[馬+展]’인데 말이 토욕(土浴)하는 것, 즉 땅에 뒹굴며 몸을 비벼 대는 것을 말한다.
[주D-006]옥압(玉鴨)과 금봉(金蜂) :
옥압은 오리 모양으로 새긴 옥비녀를 가리킨다. 비슷한 것으로 옥봉(玉鳳), 옥연(玉燕) 등이 있다. 또 금으로 나비나 잠자리 모양 등을 만들어 비녀 위에 장식하는 것을 금충(金蟲)이라 한다. 금봉(金蜂)은 금으로 벌 모양을 만든 그와 같은 수식(首飾)을 가리킨다.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 뿐더러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으니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촉박했던고!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자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猶令送者淚沾衣   보내는 자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扁舟從此何時返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送者徒然岸上歸   보내는 자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주D-007]조각배 이제 가면 : 원문은 ‘扁舟從此’인데, 《종북소선》과 《병세집》에는 ‘此時此去’로 되어 있고, 《과정록(過庭錄)》 권1에는 ‘扁舟一去’로 되어 있다.
[주D-008]떠나는 …… 돌아가네 :
명(銘)을 대신하여 7언 절구를 실었다. 《과정록(過庭錄)》 권1에서 이덕무(李德懋)는 ‘배에서 누님의 상여 행차를 송별하며〔舟送姊氏喪行〕’란 제목으로 이 시를 소개한 뒤 이를 읽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인정(人情)을 따른 것이 지극한 예(禮)가 되었고, 눈앞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 참문장이 되었다. 문장에 어찌 일정한 법이 있었던가? 이 글을 옛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는다면 당연히 이의[異辭]가 없겠지만, 지금 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기 때문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자 속에 감추어 두기 바란다.

- 중존(仲存 : 이재성의 자) -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7981?category=563867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위의 아래 주에 대한 확인]

[주D-008]떠나는 …… 돌아가네 : 명(銘)을 대신하여 7언 절구를 실었다. 《과정록(過庭錄)》 권1에서 이덕무(李德懋)는 ‘배에서 누님의 상여 행차를 송별하며〔舟送姊氏喪行〕’란 제목으로 이 시를 소개한 뒤 이를 읽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박종채, 과정록 권1

번역서, 권1, 추가부여번호 47.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역,돌베게,1998,pp.61-62.

이덕무는 연암의 애도시 두 편을 소개하였다. 형과 누이의 죽음을 애도한 시다. 작품 번역만 소개한다.

[형 애도시] 연암골에서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굴 닮았나?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봤지.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네.

 

[형수 애도시]

떠나는 자 정녕 기약 남기고 가도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저 외배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까?

보내는 자 강가에서 홀로 돌아오네.

라는 시를 접했을 때다. 나는 이 시를 읽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다.

*박지원: 1737(영조 13) - 1805(순조 5)  

 이덕무 : 1741년(영조 17) - 1793년(정조 17)  

 

참고로 그의  효심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권1,번역서 no.18

정해년(1767) 연암 31세

당시 아버지는 화로에 약을 달이고 계셨다. 온 집안이 난리가 났지만 아버지는 돌아앉아 숫돌에 칼을 갈았다. 큰아버지께서, "칼을 갈아 무엇하려느냐?" 하고 꾸짖자

아버지는, "생강을 썰려고요." 하고 대답하셨다.

아버지는약을 짤 때에 칼로 왼쪽 중지를 베어 피를 뚝뚝 떨어뜨려 약에 타서 올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조금 있다 소생하셨다.

*위 용례는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옛날에는 부모나 가족간에 일체감 속에서 행복했었다는 얘기다. 자기중심주의의 현대인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실상 선대와의 유대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복원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아래는 한문본 원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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