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누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제2권

 

[은자주] 돌아가신 맏누님에 대한 조사(弔辭)도 형식을 벗어나 망인에 대한 애틋한 정이 우러난다. 오죽했으면 문장의 틀을 부정하는 처남 이재성이 상자 속에 넣어 두고 남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했을까? 당시로서는 대단한 파격(破格)임을 감지할 수 있다. 가락국기> 명에서 보듯이 조상과 출생, 전생애를 4언으로 노래하는 것이 보통인데, 연암은 달랑 7언절구 한편 써 놓고 명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는 데 노력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장은 뜻을 표현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주C-001]맏누님 …… 묘지명 : 《연상각집》의 ‘유인(孺人)’이나 《종북소선(鍾北小選)》의 ‘망자 유인 박씨 묘지명〔亡姊孺人朴氏墓誌銘〕’, 《병세집》의 ‘맏누님 유인 박씨 묘지명〔伯姊孺人朴氏墓誌銘〕’ 등과 동일한 작품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에서 크게 차이 난다. 초기작인 《종북소선》이나 《병세집》의 글을 개작한 것이라 판단된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를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중국인 호부 주사(戶部主事)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外從弟)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받아 연암에게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유인(孺人) 의 휘(諱)는 아무요 반남 박씨이다.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 연암의 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16세에 덕수(德水) 
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에게 출가하여 1녀 2남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 영조 47) 9월 초하룻날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 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것들과 계집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끌고 배를 타고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중미는 새벽에 
두포(斗浦) 의 배 안에서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주D-001]유인(孺人)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 족보에 의하면, 박씨의 남편인 이현모(李顯模)는 나중에 종 2 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선친 이유(李游)에게도 참판이 증직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인 박씨에게도 추후에 정부인(貞夫人)의 봉작(封爵)이 내렸던 듯하다.


[주D-002]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택모(宅模)는 이현모(李顯模 : 1729 ~ 1812)의 처음 이름이다. 백규(伯揆)는 그의 처음 자이고, 나중에 이름을 고치면서 자도 회이(誨而)로 고쳤다. 이현모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주D-003]아곡(鵶谷)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에 통합된 지평현(砥平縣)에 있었다.


[주D-004]두포(斗浦) 
  지금의 팔당댐 부근에 있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수상 교통의 요지로 두미(斗尾 : 또는 斗迷), 두릉(斗陵) 등으로도 불렸다. 그곳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곧 양평군을 지나게 된다. 《병세집》에는 ‘豆浦’로 되어 있으나, 《종북소선》에는 대본과 마찬가지로 ‘斗浦’로 되어 있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응석스럽게 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은근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 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주D-005]말처럼 뒹굴면서 : 원문은 ‘馬

’인데 말이 토욕(土浴)하는 것, 즉 땅에 뒹굴며 몸을 비벼 대는 것을 말한다.


[주D-006]옥압(玉鴨)과 금봉(金蜂) :

옥압은 오리 모양으로 새긴 옥비녀를 가리킨다. 비슷한 것으로 옥봉(玉鳳), 옥연(玉燕) 등이 있다. 또 금으로 나비나 잠자리 모양 등을 만들어 비녀 위에 장식하는 것을 금충(金蟲)이라 한다. 금봉(金蜂)은 금으로 벌 모양을 만든 그와 같은 수식(首飾)을 가리킨다.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 뿐더러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으니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촉박했던고!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자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猶令送者淚沾衣 보내는 자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扁舟從此何時返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送者徒然岸上歸 보내는 자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주D-007]조각배 이제 가면 : 원문은 ‘扁舟從此’인데, 《종북소선》과 《병세집》에는 ‘此時此去’로 되어 있고, 《과정록(過庭錄)》 권1에는 ‘扁舟一去’로 되어 있다.


[주D-008]떠나는 …… 돌아가네 :

명(銘)을 대신하여 7언 절구를 실었다. 《과정록(過庭錄)》 권1에서 이덕무(李德懋)는 ‘배에서 누님의 상여 행차를 송별하며〔舟送姊氏喪行〕’란 제목으로 이 시를 소개한 뒤 이를 읽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인정(人情)을 따른 것이 지극한 예(禮)가 되었고, 눈앞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 참문장이 되었다. 문장에 어찌 일정한 법이 있었던가? 이 글을 옛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는다면 당연히 이의가 없겠지만, 지금 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기 때문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자 속에 감추어 두기 바란다. - 중존(仲存 : 이재성의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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