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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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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

24 주금책(酒禁策)

25 유사경(兪士京 유언호 )에게 답함

26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27 어떤 이에게 보냄

28 홍덕보(洪德保 홍대용 )에게 답함

29 두 번째 편지

30 세 번째 편지

31 네 번째 편지

32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33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3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35 순찰사에게 답함

36 어떤 이에게 보냄

37 순찰사에게 올림

38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39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40 전라 감사에게 답함

 

 

 

주금책(酒禁策)

 

선친의 글은 유실된 것이 많다. 백이론(伯夷論) 등과 같은 작품은 남의 집 묵은 종이 속에서 발견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제목만 있고 글이 없는 작품이 10여 종이어서 그것을 일일이 수집하리라 기약할 수는 없으나, 주금책 3편의 경우는 동년배나 장로(長老)들 중에 그 구어(句語)를 외어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세상에 널리 퍼져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가 그 권()을 비워 두어 훗날 써서 메꾸기를 기다리노니, 혹시 동호자(同好者)가 본다면 수고를 아끼지 말고 등사하여 돌려주기를 바란다. 이는 당세의 대아 군자(大雅君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종간(宗侃 박종채)이 삼가 쓰다.

 

[D-001]주금책 …… 있다 :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이 태호(太湖) 홍원섭(洪元燮)에게 연암의 글 중 어느 작품이 가장 낫더냐고 물었더니, 홍원섭은 주금책을 몹시 애호하여 서산(書算)으로 글 읽은 횟수를 세어가며 여러 번 읽은 적이 있었노라고 답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4

[D-002]() : 한지를 묶어서 세는 단위로, 한 권은 한지 스무 장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사경(兪士京 유언호)에게 답함

 

 

어제 수레 타고 사람들 거느리고 위의를 갖추어 왕림하셨는데 마침 더위를 피하여 교외로 나가는 바람에 맞이하여 얘기할 기회를 잃어버렸으므로 못내 아쉬움이 배나 더하던 차에 바로 또 편지가 이르니 자못 깊이 위로가 됩니다.

창문 밖에 수레와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인데, 종자(從者)들의 발소리가 우레와 같아 지붕 모퉁이가 무너질 듯합니다. 처음 이사왔을 적에는 아이가 문득 책을 읽다가도 걷어치우고 먹던 밥도 내뱉고는 허둥지둥 나가 구경하더니만, 차츰 시일이 지나자 잘 나가 보지를 않더군요. 비단 우리 집 아이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이 동네의 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다 심상하게 보아 넘기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단지 날마다 보아 온 까닭이지요.

이로 말미암아 보면, 몇 자쯤 되는 외바퀴 수레에 몸을 싣고 하인배가 벽제(辟除)하는 소리를 빌리는 것 정도로는 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부러워서 허둥지둥 뛰쳐나오게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갑자기 잔뜩 거드름을 부려 목을 석 자나 뽑고 기세가 산처럼 솟구친다면, 과연 그 모습을 어떻다 해야 할지요.

전날에 안성(安城)의 유 응교(兪應敎)는 아무리 좀먹은 안장에 여윈 망아지를 타더라도 진실로 자기 본성에 손상됨이 없었고, 오늘 송도(松都)의 신임 유수(留守)는 비록 아기(牙旗 대장의 기)를 앞세우더라도 진실로 평소 행동과 달라질 것이 없겠지요. 서경(西京 개경)의 호수는 줄잡아 9000호에 밑돌지 않으니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호걸이 없다고는 못 할 뿐더러, 더더구나 그들의 지혜가 사대부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분별하고도 남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하하하!

 

 

[D-001]수십 명 : 원문은 數十輩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數百輩로 되어 있다.

[D-002]외바퀴 수레 : 조선 시대에 종 2 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초헌(軺軒)을 가리킨다. 개성 유수는 종 2 품의 관직이었다.

[D-003]안성(安城)의 유 응교(兪應敎) : 유언호는 포의(布衣) 시절에 안성에서 살았다. 그는 1772(영조 48)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으나, 곧 청류(淸流)로 지목되어 흑산도에 유배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으며, 그해 10월 탕척(蕩滌)되어 안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閔鍾顯 兪文忠公行狀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 나의 겸칭)는 머리를 조아려 인사드립니다. 얼마 전 청지기 김가(金哥)가 형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와, 여러 형제분들이 친상 중에 신령의 가호에 힘입어 건강을 지탱하고 계심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시골로 가서 선영에 의지하고 사는 것은 바로 이 아우가 지난가을에 미처 이루지 못했던 계획입니다. 작별할 때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으니, 어찌 나의 마음을 이다지도 슬프게 하는지요. 긴 장마가 걷히기 바쁘게 가을철이 하마 반이 지났는데, 여러 형제분들 기력은 어떠신지요? 군자의 효심에서 우러난 그리움은 계절의 변화에 감개하여 더욱 새로워지겠지만, 새로 거처한 곳의 갖가지 일들은 자못 정돈되어 두서가 잡히셨는지요? 마음에 걸리고 자꾸 생각나면서, 서글프고 암담한 심정을 누를 길 없습니다.

이 아우는 모진 목숨을 연명하여 어느덧 상기(喪期)를 마치게 되니, 천지가 텅 빈 듯하고 신세는 외로워 너무도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평생에 자식 구실을 한 적이 얼마 없었으므로 삼년상의 기간에나 모든 심력을 바쳐볼까 했는데, 오랫동안 고질을 앓느라고 몸소 상식(上食)을 받든 것도 며칠이 안 되건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궤연(几筵)을 걷게 되니, 소리 내어 울자 해도 울 곳이 없어 너무도 통탄스럽습니다.

원발(元發)은 박봉의 관직에 종사하느라 너무 바빠 겨를이 없고, 유구(悠久 이영원(李英遠))는 아마 벌써 남으로 내려갔을 게고, 여중(汝中)은 가끔 서로 보기는 하나 대개 1년 중에 두서너 차례에 지나지 않는데, 형 또한 상중에 있는 외로운 신세라 만나지 못한 지가 대략 3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무덤 곁에 여막을 이미 지었으니 초췌해진 모습을 뵐 날이 까마득합니다. 인생에서 만남과 이별, 슬픔과 기쁨이 다 성쇠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아득히 생각하면 대릉(大陵)과 소릉(小陵) 사이에서 서로 붙어 다니던 일이 한바탕 꿈과 같으니 어찌 감개스럽지 않으리까.

장례를 치른 이래로 외모는 매미 허물 같고 멍청하기는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과 같아, 염부계(閻浮界 이승)에 잠시 묵으며 오직 꿈에만 몰두하니, 잠잘 때는 즐겁지만 깨고 나면 슬퍼집니다. 30년 사이에 이리저리 이사다닌 것이 서너 번이지만, 어느 밤이고 꿈을 꾸면 넋이 떠돌다가 항상 도성(都城) 서쪽의 옛집에 머뭅니다. 몸소 살구 ·  · 복숭아 나무 밑에 노닐면서, 혹은 참새 새끼를 잡고 혹은 매미도 잡고 나비도 쫓으며, 동쪽 정원에는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어 또 잘 익은 과일을 따기도 합니다. ()의 양세(兩世 조부와 부친)께서 다 무양(無恙)하게 살아 계시고 중부(仲父)와 계부(季父) 및 나의 종형도 완연히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러다 꿈에서 깨고 나면 마치 무엇을 잃은 것 같고 쫓아가다가 되돌아온 듯하며, 다시 볼 듯하면서도 못 보게 되니, 슬피 울고 가슴을 치며 깬 것을 후회한답니다.

이 세상에 살아 계셨던 때를 가만히 헤아려 보면, 또한 꿈속에서처럼 많이 뫼시고 친밀하지 못했으니 꿈속이 즐거울 수밖에요. 비록 또한 이 때문에 편안히 누워 영영 잠들어 버린들 그 즐거움이 또 꿈속보다 더할 수 있을는지요?

네 살짜리 어린 자식은 이제 조금 분별이 생겨 다른 사람을 아비 어미라 부르지는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노상 품속에서 떠나려 들지 않으므로 수십 글자를 입으로 가르쳐 주었는데, 갑자기 묻기를,

 

나는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는 왜 유독 아버지가 없나요?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나요? 아버지도 일찍이 젖을 먹고 크셨나요?”

하여, 나도 모르게 무릎에서 밀쳐 버리고 엉겁결에 목 놓아 한참 울었답니다. 이는 다 이 아우가 상을 당한 뒤에 겪은 슬프고 쓰라린 심정을 말한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 지금 애형(哀兄)께서 새로 비통한 일을 당해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일 텐데, 아마도 필시 나 때문에도 한바탕 눈물을 흘리겠군요.

예서(禮書)를 읽는 여가에 다시 무슨 책을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의 생활 방편은 다만 경서를 몸에서 떼지 않으면서 몸소 밭을 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시경 빈풍(豳風)과 당풍(唐風)의 시들은 농삿집의 시력(時曆)이요, 논어(論語) 한 질은 시골에 사는 비결이요, 중용(中庸) 30()은 섭생(攝生)의 좋은 방법이니, 늘그막까지 힘써 할 일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아우는 9월 보름경에 북쪽으로 올라가 돌아다니면서 단양(丹陽)과 영동(永同)의 사이에서 농지를 찾아볼까 하는데, 생각대로 잘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총총하여 할 말을 다 못 하오며, 다만 슬픔을 절제하고 스스로 몸을 보호하여 상중에 건강을 손상하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윤지(允之) 대형(大兄)의 예석(禮席)

8월 초이틀 담제인(禫制人) 아우 모()가 절하며 올림.

 

 

[C-001]황윤지(黃允之) : 황승원(黃昇源 : 1732~1807)으로 윤지는 그의 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이조 판서를 지냈다. 연암과는 20세 전후에 산사(山寺)에서 과거 공부를 같이 한 절친한 사이이다.

[D-001]친필 서한 : 원문은 手書인데 手疏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부모상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는 편지나 부모상을 당한 사람이 위로 편지를 받고 보내는 답장을 소()라고 한다.

[D-002]군자의 …… 새로워지겠지만 : 예기 제의(祭義)에 군자가 계절이 바뀌는 봄과 가을에 각각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가을이 되어 서리나 이슬 내린 땅을 밟게 되면 반드시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워 서글픈 마음이 들고, 봄이 되어 비나 이슬 내린 땅을 밟게 되면 반드시 부모님을 장차 뵐 것처럼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D-003] …… 되니 : 부친상을 마친 사실을 말한다. 연암의 부친 박사유(朴師愈) 1767년 향년 65세로 별세하였다.

[D-004]삼년상의 …… 했는데 : 원문은 庶其自致於喪紀之間인데, ‘자치(自致)’ 논어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심력을 다 쏟는다는 뜻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사람 중에 자신의 심력을 다 쏟지 않는 자가 있으나 그런 자도 부모의 상에는 반드시 심력을 다 쏟는구나!人未有自致者也 必也親喪乎라고 하신 것을.” 하였다.

[D-005]소리 …… 없어 : 원문은 攀號無地인데, 원래 반호(攀號)’는 옛날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승천할 때 땅에 떨어진 용의 수염을 지상에 남은 신하들이 부여잡고 호곡(號哭)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왕의 죽음을 애도할 때 쓰는 말이다.

[D-006]원발(元發) : 신광온(申光蘊 : 1735~1785)의 자이다. 1762(영조 38) 진사시 급제 후 벼슬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지냈다. 연암과 젊은 시절부터 절친하여 1765(영조 41) 금강산 유람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연암집 4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참조.

[D-007]여중(汝中) : 이심전(李心傳)의 자이다. 그의 생년이 사마방목에는 1738, 문과방목에는 1739년으로 되어 있다. 이심전은 본관이 전주(全州), 대사간을 지낸 이성수(李性遂)의 아들이다. 유무(柳懋)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황승원과 동서(同壻)간이다. 1773(영조 49) 정시(庭試) 급제 후 정자(正字)에 제수되었으나 세손(世孫) 즉위 반대파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784(정조 8) 사면된 이후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D-008]대릉(大陵)과 소릉(小陵) :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말한다.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일대이다.

[D-009]오직 꿈에만 몰두하니 : 원문은 惟是大翫於夢인데, 한유(韓愈)의 정요선생묘지명(貞曜先生墓誌銘)에 맹교(孟郊) 오직 시에만 몰두하였다.唯其大翫於詞고 하였다.

[D-010]잘 익은 과일 : 원문은 黃熟으로, 잎이 누렇게 되어 떨어질 정도로 과일이 잘 익은 상태를 말한다.

[D-011]()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면 又摘黃熟梅로 앞구에 붙여 구두를 끊어야 하는데, 또한 兩世 앞에는 문의상  자가 있어야 할 듯하다.

[D-012]중부(仲父) …… 종형 : 중부는 박사헌(朴師憲)으로 자식이 없었고, 계부(季父)는 박사근(朴師近)으로 박필주(朴弼周)의 양자가 되었는데 진원(進源)과 유원(綏源) 두 아들을 두었다. 연암이 말한 종형은 진원으로, 요절하였다.

[D-013]깨고 나면 : 원문은 及旣悟로 되어 있으나, 이본들에는 及旣寤 또는 及其寤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 자는 잘못인 듯하다.

[D-014]편안히 …… 잠들어 버린들 : 원문은 偃然大寢인데, 장자 지락(至樂)에서 장자가 제 처가 죽었는데도 곡을 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부른 이유를 해명하면서 사람들이 장차 큰 집에서 편안히 쉴 터인데人且偃然寢於居室, 내가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덩달아 곡을 한다면 천명에 통달하지 못한 것을 자인하는 셈이라, 그래서 곡을 그쳤노라.”고 하였다.

[D-015]네 살짜리 어린 자식 :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를 가리킨다. 종의는 1766년에 태어났다.

[D-016]애형(哀兄) : 친상을 당한 황승원을 지칭한 말이다.

[D-017]시경》 …… 시력(時曆)이요 : 시력은 당대에 통용되는 책력(冊曆)을 말한다. 시경 빈풍(豳風)과 당풍(唐風)의 시들을 읽으면 농사철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빈풍의 칠월(七月)은 농사에 관한 월령가(月令歌)였다.

[D-018]중용(中庸) 30() : 중용은 모두 33개의 장()인데, 여기서는 대략의 숫자를 들어 말한 것이다.

[D-019]서식을 …… 못하였습니다 : 원문은 不備疏例인데, 소례(疏例)는 서식을 뜻하는 서례(書例)와 비슷한 말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不備疏禮로 되어 있는데, 이는 편지의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둘 다 편지를 끝맺을 때 공손하게 말하는 관례적인 표현이다.

[D-020]윤지(允之) 대형(大兄)의 예석(禮席) : 수신인을 밝힌 것이다. 상례(喪禮)를 지키고 있는 황승원에게 보낸다는 뜻이다.

[D-021]담제인(禫制人) : 삼년상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인 담제(禫祭)를 지낼 때까지 상중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요즘 자네는 친상 중에 기력이 어떠한가? 이 몸은 차츰 병이 깊어져 기동할 수 있는 날이 요원함을 고려하면, 피차간에 서로 면대하기란 당장에는 기약하기 어렵겠네. 알려주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방법이 없네그려. 지금 자네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상을 당했는데, 다른 도와줄 만한 벗도 없고 또 아주 가까운 친척도 없는 처지이니, 매양 그 점을 생각하면 어찌 기가 막히도록 슬프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을 깊이 터놓은 사이가 되었고, 외람되게 내가 나이도 몇 살 더 먹었으니, 어리석은 소견이나마 일러줄 수 있는 사람은 나만 한 이가 없을 걸세. 그러므로 이처럼 병중에 되는대로 적어 보내니, 양해하기를 간절히 바라네.

 

자네와 같은 재능으로 이미 얌전하고 부드러운 기질을 지닌 데다, 총명하면서도 신중한 바탕을 겸하였고 게다가 나이도 젊고 기력도 왕성하니, 어찌 심력을 문장과 같은 말단에만 낭비하고 실득(實得)이 없는 곳에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는가. ‘독서궁리(讀書窮理)’ 네 글자는 늙은 서생(書生)의 진부한 말이요 남을 권면하는 의례적인 말이네. 그러나 대저 지금에 이르러 실지(實地)에 공력을 쏟고 본령(本領)을 추구한다면 자연히 마음이 진정되고 기()가 귀착할 곳이 있을 걸세. 인의(仁義)에 정통하는 것은 잠깐 사이에 되는 것이 아니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분변하는 것도 스스로 차례가 있는 것이므로, 효과와 득실을 먼저 논할 수는 없으나, 양생(養生)하여 장수하고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는 점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것독서궁리이 중요한 실마리가 되지 않는다고는 못 할 것일세.

 

평소 문학에 있어서는 비평소품(批評小品)을 보기 좋아하여 애써 찾는 것은 오직 오묘한 지혜의 깨달음이요, 자세히 음미하는 것은 모두 신랄하기 짝이 없는 어휘들인데, 이런 것들은 비록 젊은 시절 한때의 기호(嗜好)이기는 하지만 차츰 노숙해지면 저절로 없어지게 마련이므로, 심각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네.

그러나 대체로 이런 문체는 전혀 법칙이 없고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것이네. 명 나라 말의 문식(文飾)만 성행하고 실질(實質)은 피폐해진 시대에 오() · () 지역의 잔재주는 있으나 덕이 부족한 문사들이 기괴한 설을 짓기에 힘써, 한 문단의 풍치(風致)나 한 글자의 참신한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이 빈곤하고 자질구레해서 원기라고는 찾아볼 곳이 없는 것이네. 그런즉 예부터 내려오는 오 · 초 지역 촌뜨기들의 괴벽스러운 짓거리요 추잡스러운 말투이니, 어찌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지금 자네는 아직 혈기가 안정되지 않은 나이에 거듭 상례를 당하여, 돌아보아도 한 몸을 의지하고 도움받을 곳이 없어, 외롭고 허약하며 천지가 텅 빈 것 같을 것이니, 슬픔과 괴로움과 근심 걱정으로 심정이 과연 어떻겠는가. 이는 인간 세상의 일대 궁민(窮民)인 동시에 인생에서의 일대 전환점이기도 하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은 혹 심기가 약하여 몹시 놀라고 기가 꺾여 그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 못해 생명을 잃은 자도 있으며, 혹은 상례를 치르고 난 뒤 달관하고 마음을 비워 심령(心靈)이 툭 트이게 되면, 백년 인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온갖 일이 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슬퍼하여,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고 제 몸도 돌아보지 않아 그로 인해서 본래의 심성을 잃어버리는 자도 있네. 혹 군자인 경우에는 예()로써 자신을 보전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시련을 견디어 더욱 큰 일을 해내니 비유하자면 초목이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고 바람과 서리가 매서워지는 즈음에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네. 지금 자네는 나이 비록 약관이나, 뜻이 일찌감치 정해지고 재능이 일찍부터 성숙했으니, 진실로 능히 뜻을 굳게 세우고 이런 가운데 조금만 더 스스로 분발하여 매사를 다 옛사람처럼 하기로 스스로 기약한다면, 어찌 역량이 크지 못하며 재기(才氣)가 미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사람이 매양 부모님 봉양을 할 수 없게 된 뒤에 가서 옛일을 추억해 보면, 자식 구실을 했다고 할 만한 이가 거의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특히 뼈가 저리고 심장이 찔리는 경우라네. 부모님 사후에 효성을 바치는 것이 단지 궤연을 모시고 제물을 받드는 데에 있는 것만은 아니네. 이러한즉 부모에 대한 자네의 다함 없는 그리움은 갈수록 무궁할 줄 아네만, 이 몸은 여막을 지키면서 질병에 시달리느라 심상한 예절도 모두 폐하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부끄럽고 송구하여 심장이 끓고 뼈가 후끈거린다네. 그러므로 뒤늦게야 뉘우치며 언급하는 바이네.

 

옛사람은 거상(居喪)할 때 읽는 것은 예서(禮書)일 따름이며, 그 나머지 허황하고 당장에 필요치 않은 책은 덮어 두고 보지 않았으니, 이것은 일념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잠깐이라도 잊어버린 적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네. 그러나 옛 성인의 경전(經傳)에 이르러서는, 어찌 일각인들 폐한 적이 있었던가.

 

가례(家禮)는 비록 주자(朱子)가 내용을 미처 확정하지는 못한 책이지만 먼저 익히 보아두는 것이 좋으니, 무릇 생전에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때에 차례와 절목(節目)을 절충하여 취할 수 있네.

 

어찌 꼭 예기(禮記)라야만 예서를 읽는다 하겠는가. 지금 자네는 이미 대인(大人)의 학문에 입문하였으니 소학(小學)에 힘을 쏟을 것까지는 없겠지만, 옛사람 중에 노년이 되어서도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한 이가 있었다네. 학문을 하는 차례는 함부로 등급을 뛰어넘어 버리면 안 되네. 곧장 먼저 소학에다 기초를 세우면, 학문의 방향이 올바르게 되는 법일세.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제목 아래에 이 글은 정리되지 않은 원고에서 발견했는데 누구에게 준 것인지 모르겠다. 후고(後考)를 기다린다.此篇得於亂藁 未知與何人 容俟後考는 주가 있다.

[D-001]자네는 …… 어떠한가 : 원문은 哀侍奠氣力何似인데 ()’는 부모의 상중에 있는 상대방을 지칭한 말이고 시전(侍奠)’은 제물(祭物)을 시봉(侍奉)한다는 뜻이다. 이하 ()’를 문맥에 맞추어 모두 자네로 의역하였다.

[D-002]독서궁리(讀書窮理) : 궁리는 천지 만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라 하여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수양 방법이다.

[D-003]신중히 ……  : 원문은 愼思明辨인데 중용장구  20 장에서 군자가 성()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박학(博學) · 심문(審問) · 신사(愼思) · 명변(明辨) ·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D-004]가도(家道) : 가정의 도덕을 말한다. 주역 가인괘(家人卦) 단사(彖辭) 아비가 아비답고 아들이 아들답고 형이 형답고 아우가 아우답고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다워야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니, 가정이 바르게 되어야 천하가 안정되리라.” 하였다.

[D-005]비평소품(批評小品) : 비점(批點)과 평주(評注)를 가한 짧은 산문이란 뜻이다.

[D-006]() · () 지역 : 춘추 시대 오 나라와 초 나라의 영토였던 지역으로, 지금의 양자강(揚子江) 중류와 하류 일대를 말한다. 중국에서 특히 문학 예술이 발달한 지역이다.

[D-007]기괴한 설을 짓기에 힘써 : 원문은 務爲弔詭인데, ‘조궤(弔詭)’ 장자에 나오는 말로, 기이한 말이라는 뜻이다. 즉 제물론(齊物論)에 인생을 한바탕의 꿈으로 여기는 이런 언설을 일컬어 조궤라고 한다.是其言也 其名爲弔詭고 하였다.

[D-008] · 초 지역 촌뜨기들 : 원문은 吳傖楚儂인데, 중국의 중원(中原) 사람들이 오 지역 사람들이 간드러진 말투를 구사한다고 해서 오농연어(吳儂軟語)’ 오농세타(吳儂細唾)’라고 비하하였다. 또한 오 지역 출신 문사인 육기(陸機)가 중원 출신인 좌사(左思)를 촌뜨기란 뜻의 창부(傖夫)’라고 비웃은 적이 있다.

[D-009]궁민(窮民) : 의지할 데가 없는 백성을 말한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환()이라 하고, 늙어서 지아비가 없는 이를 과()라 하고, 늙어서 자식이 없는 이를 독()이라 하고, 어려서 아비가 없는 이를 고()라 한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의 궁민이요 호소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D-010]경각심을 …… 해내니 : 원문은 動忍增益인데,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큰 소임을 맡긴 사람에게 혹독한 시련과 좌절을 겪게 하는 것은 경각심을 일깨우고 참을성 있는 기질로 만들어 그가 해내지 못했던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D-011]부끄럽고 송구하여 : 원문은 慚悚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慚惶으로 되어 있다.

[D-012]그러므로 …… 바이네 : 원문은 故乃追訟而及之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3]대인(大人)의 학문 : 대학(大學) 공부를 가리킨다. 대학은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학문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하였다.

[D-014]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한 이 : 성종(成宗) · 연산군(燕山君) 연간의 유학자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덕보(洪德保 홍대용)에게 답함

 

 

천리 밖에서 편지 전하기를 낭정(朗亭)과 문헌(汶軒)이 하듯이 하여, 얼어붙은 비탈, 눈 쌓인 골짝 속에서 이를 얻어보게 되니, 어찌 위로가 되고 기뻐서 펄쩍 뛰지 않으리오. 청수하신 모습을 잠깐 접했다가 곧 이별의 회포를 자아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도리어 낫겠지요. 더구나 심한 추위에 부모님을 모시면서 관직 생활도 신령의 가호에 힘입어 잘하고 계시며, 아드님 또한 탈 없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우리들이 작별한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으니, 얼굴이며 수염과 모발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나를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다만 알지 못하겠는 것은, 스스로 점검하기에 정력과 기개가 쇠퇴하거나 왕성한 정도가 어떠하신지 하는 점입니다.

성인(聖人)의 수천 마디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객기(客氣)를 없애게 하려는 것입니다. 객기와 정기(正氣)는 마치 음()과 양()이 서로 반대로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과 같지요. 비유하자면 큰 풀무에서 쇠를 녹여 두들기는 것과 같아서, 객기가 겨우 조금만 없어져도 정기가 저절로 서지요. 그러나 정기란 더듬어 볼 수 있는 형체가 없으며, 오직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매 부끄럼이 없는 경지에서만 찾을 수 있지요.

성인이 제 한 몸을 다스릴 뿐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큰 도적이나 큰 악당처럼 여겨서, 성급히 하나의 이길 ()’ 자를 썼겠습니까? ‘이라는 말은,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날짜를 다그쳐서 기필코 이기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목서(牧誓)에는

 

상 나라를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戎商必克

하였고, 주역에는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여 3년 만에 이겼다.高宗伐鬼方 三年克之

했으니, 이른바 ()과 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 아우는 평소 늘 객기가 병통이 되어 왔는데, 이를 이겨내고 다스리는 수단으로는 이미 구용(九容)의 방어도 없고 사물(四勿)의 무기도 없으니, 귀며 눈이며 입이며 코가 도둑떼의 소굴이 아님이 없고, 지의(志意)와 언동은 모두 객기의 성사(城社)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평소의 병의 근원이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졌으나, 이른바 정기(正氣)까지도 함께 사라져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궁지에 몰린 도적이 험한 지세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게 날뛰다가, 급기야 군사가 흩어지고 식량이 다 떨어지자 그대로 앉아서 곤욕을 받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리하여 포부와 사업이 도리어 객기가 득세할 때만 못하니, 어떻게 정기를 함양하며, 어떻게 집의(集義)하며, 어떻게 스승으로 삼고 본받으며, 어떻게 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마침내 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본래 지닌 천상(天常 천부적 윤리)인데 노상 객기에 눌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객기가 이미 제거되면 모든 일이 다 이치에 들어맞아, 정기가 서지 않는 것은 걱정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른하게 지쳐 버리고 스러지듯 까라지며 닳고 닳아 버린 탓에 감정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맞부닥치니, 다시는 옛날의 기개를 찾아볼 길 없고 무기력한 일개 늙은 농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격려해 주신 별지(別紙)를 받고 보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땀이 얼굴을 뒤덮었으므로 잠시 이와 같이 늘어놓습니다. 아마도 반드시 이 편지를 보시고는 한 번 웃으며,

 

이는 필시 늙어가고 곤궁함이 날로 심해진 것뿐일세. 만약 객기를 제거할 수 있다면 하늘을 떠받치고 땅위에 우뚝 설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른하게 처져 있는 것인가? 나른하게 처지도록 만든 것이야말로 객기일세.”

하실 테지요.

대개 제가 평소에 비록 장중하고 공손함이 부족하지만, 날로 더욱 노력하는 공부 역시 그와 같이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학문을 쌓아나가는 것도 기운에 따라 쇠퇴하거나 왕성한 법이지요. 그래서 형의 정력과 기개가 스스로 점검하기에 어떠하신지를 물은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자세한 답을 주시고, 또 가슴에 절실히 와 닿는 몇 마디 말씀을 기록하여 주신다면, 이 몸을 일깨워 주고 분발시켜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D-001]낭정(朗亭)과 문헌(汶軒) : 낭정은 서광정(徐光庭)의 호이다. 서광정은 항주(杭州)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홍대용과 결교한 반정균(潘庭筠)의 외사촌형이다. 북경의 매시가(煤市街)에서 점포를 열고 있었으므로, 홍대용은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으나 그에게 편지를 보내 반정균과의 서신 교류를 중개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이를 계기로 홍대용과 서광정 사이에도 서신 교류가 있었다. 문헌은 등사민(鄧師閔 : 1731~?)의 호이다. 등사민은 산서(山西) 태원(太原)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삼하현(三河縣)에서 소금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만나 교분을 맺었다. 그 후 홍대용과 꾸준히 서신 교류를 했으며, 자신의 벗 곽집환(郭執桓)을 위해 연암 등 조선의 명사들에게 담원 팔영(澹園八詠)’ 시를 지어주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2]심한 …… 말입니다 : 홍대용은 1780(정조 4) 음력 1월 경상도 영천(榮川)의 군수로 부임하였다.

[D-003]성인이 …… 썼겠습니까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제 자신을 이기고 예의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D-004]서경》 …… 하였고 : 인용상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인용된 구절은 목서(牧誓)가 아니라 태서 중(泰誓中)에 나온다. 목서는 주() 나라 무왕(武王)이 은() 나라 주왕(紂王)과 목야(牧野)에서 싸우기 전에 훈시한 내용이고, 태서는 역시 주 나라 무왕이 맹진(孟津)에서 훈시한 내용이다.

[D-005]주역에는 …… 했으니 : 주역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종(高宗)은 은 나라의 임금 무정(武丁)이고, 귀방(鬼方)은 지금의 귀주(貴州) 지역에 살았던 서융(西戎)의 하나이다.

[D-006]()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은 촉()을 가리키고, ()은 조조(曹操)의 위()를 가리킨다.

[D-007]구용(九容) : 구용은 군자의 아홉 가지 자태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색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禮記 玉藻

[D-008]사물(四勿)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D-009]성사(城社) : 안전한 은신처를 말한다. 성안의 여우나 사당의 쥐처럼 권세의 비호 아래 몰래 나쁜 짓을 하는 자를 성호사서(城狐社鼠)라 한다.

[D-010]집의(集義) :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호연지기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의리를 속으로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지 의리가 밖에서 엄습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하였다.

[D-011]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 논어 계씨(季氏) 유익한 벗이 셋이요 유해한 벗이 셋이니, 곧은 사람을 벗하며, 진실한 사람을 벗하며,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하였다.

[D-012]나른하게 : 원문은 苶然인데, ‘薾然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비슷하다. 뒤에 나오는  자도 같다.

[D-013]늙어가고 : 원문은 朽落인데, 나이가 늙어 이가 빠진다年朽齒落는 뜻이다.

[D-014]하늘을 …… 텐데 : 원문은 頂天立地인데, 이는 대장부의 기개를 형용하는 말이다.

[D-015]장중하고 …… 공부 : 예기 표기(表記)에서 공자는 군자가 장중하고 공손하면 날로 더욱 노력하게 되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이 아우의 평소 교유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덕을 헤아리고 지체를 비교하여 모두 벗으로 허여한 터이지요. 그러나 벗으로 허여한 자 중에는 명성을 추구하고 권세에 붙좇는 혐의가 없지 않았으니, 눈에 벗은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은 다만 명성과 이익과 권세였을 따름이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스스로 풀숲 사이로 도피해 있으니,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승이요 아내를 둔 행각승이라 하겠습니다. 산 높고 물이 깊으니, 명성 따위를 어디에 쓰겠는지요? 옛사람의 이른바 걸핏하면 곧 비방을 당하지만, 명성 또한 따라온다.”는 것 또한 헛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우 한 치의 명성만 얻어도 벌써 한 자의 비방이 이르곤 합니다. 명성 좋아하는 자는 늙어가면 저절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과연 나도 허황된 명성을 연모하여, 문장을 표절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예찬을 잠시 받고는 했지요. 그렇게 해서 얻은 명성이란 겨우 송곳 끝만 한데 쌓인 비방은 산더미 같았으니, 매양 한밤중에 스스로 반성하면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명성과 실정의 사이에서 스스로 깎아내리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더구나 감히 다시 명성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러니 명성을 구하기 위한 벗은 이미 나의 안중에서 떠나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른바 이익과 권세라는 것도 일찍이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으나, 대개 사람들이 모두 남의 것을 가져다 제 것으로 만들 생각만 하지 제 것을 덜어내서 남에게 보태주는 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명성이란 본시 허무한 것이요 사람들이 값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어서, 혹은 쉽게 서로 주어 버리는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이익과 실질적인 권세에 이르면 어찌 선뜻 자기 것을 양보해서 남에게 주려 하겠습니까. 그 길로 바삐 달려가는 자들은 흔히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지는 꼴을 보기 마련이니, 한갓 스스로 기름을 가까이 했다가 옷만 더럽힌 셈입니다. 이 역시 이해(利害)를 따지는 비열한 논의라 하겠지만, 사실은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 또한 진작 형에게 이런 경계를 받은 바 있어, 이익과 권세의 이 두 길을 피한 지가 하마 10년이나 됩니다.

내가 명성 · 이익 · 권세를 좇는 이 세 가지 벗을 버리고 나서, 비로소 눈을 밝게 뜨고 이른바 참다운 벗을 찾아보니 대개 한 사람도 없습디다. 벗 사귀는 도리를 다하고자 할진댄, 벗을 사귀기란 확실히 어려운가 봅니다. 그러나 어찌 정말 과연 한 사람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잘 깨우쳐 준다면 비록 돼지 치는 종놈이라도 진실로 나의 어진 벗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 충고해 준다면 비록 나무하는 아이라도 역시 나의 좋은 벗인 것이니, 이를 들어 생각하면 내 과연 이 세상에서 벗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돼지 치는 벗은 경서(經書)를 논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하기 어렵고, 나무하는 벗은 빈주(賓主)가 만나 읍양(揖讓)하는 대열에 둘 수는 없는 것인즉, 고금을 더듬어 볼 때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속으로 들어온 이래 이런 생각마저 끊어 버렸지만, 매양 덕조(德操)가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할 적에 아름다운 정취가 유유하였고,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짝지어 밭을 갈 적에 참다운 즐거움이 애틋하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산에 오르고 물에 다다를 적마다 형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답니다.

생각하건대 형은 벗 사이의 교제에 열렬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줄 잘 알지만, 심지어 구봉(九峯) 등 여러 사람들이 하늘가와 땅 끝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러 사람을 거쳐 힘들게도 편지를 부쳐오는 것은 천고의 기이한 일이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니, 곧 꿈속과 다를 바 없어 실로 진정한 정취는 드물 것입니다. 혹시 우리나라 안에서 한 번 만나 보아 서로 거리낌 없이 회포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천리를 멀다 아니 하고 찾아가고 말겠는데, 형도 이런 벗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영영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서 끊어 버렸는지요? 지난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 마침 한 가닥의 울적한 마음이 들어 우선 여쭙는 바입니다.

 

 

[D-001]교유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교유의  자가 로 되어 있다.

[D-002]나는 …… 있으니 : 1778(정조 2) 연암이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주한 사실을 말한다.

[D-003]걸핏하면 …… 따라온다 : 한유의 진학해(進學解)에 나오는 말이다. 단 진학해에는 動而得謗 ……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은 動輒得謗 ……으로 되어 있다. 이는 진학해의 앞부분에 動輒得咎라고 한 표현과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D-004]명성과 실정의 사이에서 : 원문은 名實之際인데,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하였다.

[D-005]덕조(德操) …… 적에 : 덕조는 사마휘(司馬徽)의 자이다. 사마휘는 후한(後漢) 말의 인물로 인재를 잘 알아보았는데, 유비(劉備)에게 제갈량과 방통(龐統)을 천거하였다. 사마휘와 제갈량 등은 양양(襄陽) 현산(峴山)에 사는 은사 방덕공(龐德公)을 존모하여 섬겼다. 제갈량은 방덕공의 집에 갈 때마다 상() 아래에서 절을 하곤 했다. 그러나사마휘는 방덕공의 집에 갔을 때 방덕공이 출타하고 없자, 그 부인에게 빨리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하여 방덕공의 처자들이 분주히 상을 차렸는데, 잠시 뒤 방덕공이 돌아오더니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서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三國志 卷37 蜀書 龐統傳 裴松之註

[D-006]장저(長沮) …… 적에 : 장저와 걸닉(桀溺)은 춘추 시대의 은자이다.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고 있을 때 그 앞을 지나가던 공자(孔子)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물었으나 가리켜 주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 하는 공자를 비웃었던 사람들이다. 論語 微子

[D-007]구봉(九峯) : 홍대용과 결교한 엄성(嚴誠)의 형인 엄과(嚴果)의 호이다. 북경에서 귀국한 뒤 홍대용은 편지를 보내 그와도 결교를 청하였고, 엄성의 부음(訃音)을 접하고 애도하는 편지도 보냈다. 연암집 2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참조.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8]그러나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然而로 되어 있다.

[D-009]천리를 …… 말겠는데 : 원문은 不難千里命駕인데, 천리명가(千里命駕)는 멀리 벗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 나라 때 여안(呂安)이 혜강(嵇康)의 고상한 취미에 탄복하여 그를 보고 싶은 생각이 날 적마다 즉시 천리 밖이라도 수레를 준비시켜 그를 만나러 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D-010]끊임없이 …… 때에도 : 원문은 談屑之際인데, 담설(談屑)은 톱으로 나무를 썰 때 톱밥이 술술 나오듯이 말이 막히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할 때 의기투합하여 화제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형암(炯菴 이덕무) · 초정(楚亭 박제가) 등이 관직에 발탁된 것은 가히 특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태평성대에 진기한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자연히 버림받는 일이 없겠지요. 이제부터 하찮은 녹이나마 얻게 되어 굶어 죽지는 않을 터입니다. 어찌 사람에게 허물 벗은 매미가 나무에 달라붙어 있거나 구멍 속의 지렁이가 지하수만 마시듯이 살라고 요구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귀국한 이래로 안목이 더욱 높아져서 한 가지도 뜻에 맞는 것이 없으며, 표정에까지 간혹 재기(才氣)를 드러내곤 합니다. 중국인과의 특이한 교유에 대해서는 이미 간정록(乾淨錄)을 통해서 귀에 젖고 눈이 익어 실로 제 자신이 답사한 것과 다름 없으니, 다시 야단스럽게 탐문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기이한 일이 없다고 보지는 않지만, 잠시 억눌러두고 일부러 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이를 자못 괴이히 여겨 답답한 생각이 없지 않은 모양이니, 아마 나의 이런 의중을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혜풍(惠風 유득공)이 길에서 천자를 본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답디다. 왼쪽에 천자기(天子旗)를 세우고 누런 비단덮개를 씌운 수레에다 수천 대의 수레와 수만 명의 기병이 뒤따르는 광경은 마치 벼락이 치는 듯 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듯 으리번쩍하더랍니다. 그런데 천자가 친히 말을 멈추고 고삐를 당긴 채, 손짓하여 우리 조선 사람을 불러 대등하게 서서 우러러보도록 했다는군요. 그의 콧날은 우뚝 솟아 두 눈썹 사이까지 쭉 뻗었고, 눈꼬리는 몹시 길어 귀밑머리 부분까지 옆으로 뻗쳤으며, 턱수염은 덤불 같고 광대뼈는 불끈 튀어나왔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대꾸하기를,

 

이는 바로 진 시황(秦始皇)의 복사판일세.”

했지요. 혜풍이 묻기를,

 

어찌 그런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내가

 

이미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제왕상(帝王像)을 보고 알았네.”

했더니, 형암 · 초정 · 혜풍 이 세 사람이 모두 크게 웃으며 내 앞에서 다시는 남달리 중국의 장관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더군요.

형암이 향조(香祖)가 쓴 연암산거(燕巖山居)’ 넉 자를 얻어 와서 주기에, 이미 새겨 산중의 서재에 걸고 그 진본은 형에게 드리니, 고항첩(古杭帖)에 함께 붙여 넣어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그 수인(首印 서화의 앞 부분에 찍는 도장) 무더운 여름철에도 서리 내린 듯 서늘하다.暑月亦霜氣고 하였고, 낙관(落款) 및 말미에 덕원(德園)’이라 칭했는데 그것이 그의 자인지 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 사람의 현재 직함이 모두 검서로 공교롭게도 한데 뭉치게 된 데다가, 그들이 평소 함께 지내며 교유하고 지취(志趣)도 같기 때문에, 저절로 시기와 원망을 당하는 일이 자못 많았는데 요새 와서는 더욱 심하다 합니다. 이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비록 시기와 질투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야 할 텐데, 하물며 신분은 낮으면서 벼슬길은 영화롭고 직책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은 어려우니, 더욱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도 조심하면서 오로지 서적의 교열에만 전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허황된 영화를 좇는 자들이 날로 그 곁에서 법석을 떨어 피하려 해도 피할 길이 없다 하니, 형세가 그럴 듯도 합니다. 이미 서한으로 이러한 나의 뜻을 알려주긴 하였는데, 형암은 물론 세심한지라 스스로 조심할 터이지만, 초정은 너무도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니 어찌 능히 그 뜻을 알겠습니까.

나는 지금 시골 오두막집에 영락(零落)해 있으니, 산 밖의 일은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묻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일에 상관할 바 없으나, 다만 평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기는 형과 사뭇 같기 때문에 편지를 쓰면서 자연히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서신 왕래가 있었으며, 그 친구들이 중국 다녀온 일기를 이미 완성하여 보여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D-001]형암(炯菴) …… 하겠습니다 : 1779(정조 3) 6월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가 유득공(柳得恭) ·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서얼 출신으로 처음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의 검서(檢書)로 임명된 사실을 말한다. 1781 1월 규장각으로 소속을 옮겼다.

[D-002]구멍 …… 마시듯이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맹자는 오릉중자(於陵仲子)가 청렴을 지키기 위해 인륜마저 저버림을 비판하면서, “오릉중자의 지조를 충족시키자면 지렁이가 된 뒤라야 가능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지하수만을 마시고 산다.”고 하였다.

[D-003]다만 …… 높아져서 : 이덕무와 박제가는 1778(정조 2) 음력 3월부터 7월까지 사은진주사(謝恩陳奏使)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D-004]간정록(乾淨錄) : 간정동 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말한다. 홍대용이 중국에 갔을 때 북경의 간정동에서 중국의 문사들과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연암집 1 회우록서(會友錄序) 참조.

[D-005]눈이 익어 : 원문은 目擩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같다.

[D-006]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 : 북경에서 보고 들었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노구교는 북경 광안문(廣安門) 밖 영정하(永定河)에 있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다리로서 노구효월(蘆溝曉月)이라 하여 북경 팔경(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단 노구교는 지금의 북경시 서남쪽 풍대구(豐臺區)에 속해 있어 엄격히 따지면 노구교 서쪽은 북경 서쪽의 외곽지역을 가리키는 셈이 된다. 노구교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약간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D-007]혜풍(惠風) …… 장관이었답디다 : 유득공은 1778년 가을 문안사(問安使)의 일원으로 중국의 심양(瀋陽)을 다녀왔다. 건륭(乾隆) 황제는 그해 7월에 성경(盛京) 즉 심양에 순행(巡幸)하여 9월에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그 행차를 목격한 듯하다.

[D-008]삼재도회(三才圖會) : 명 나라 때 왕기(王圻)가 편찬한 책으로 모두 106권이다. 천문 · 지리 · 인물 · 시령(時令) · 궁실 등 14()으로 나누어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D-009]향조(香祖) : 반정균(潘庭筠 : 1742~?)의 자이다. 반정균은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사람으로 호는 추루()이다. () · () · ()에 모두 능했으며, 과거 급제 후 벼슬은 어사(御使)까지 지냈다. 이덕무는 1778(정조 2) 연행 당시 북경의 종인부(宗人府) 근처에 있던 반정균의 자택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D-010]고항첩(古杭帖) : 홍대용은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766(영조 42) 음력 5 15일 반정균 · 엄성(嚴誠) · 육비(陸飛) 등 중국 항주(杭州) 출신 문사들의 편지를 모두 4개의 서첩(書帖)으로 장정하고 고항문헌(古杭文獻)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與潘秋庭筠書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이 아우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지어 먹으며, 아무것도 없이 두 주먹만 꽉 쥐었을 뿐이라, 마음은 지치고 재간은 서투르니 무엇을 이루어 놓았겠습니까.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이지요. 그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를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 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부드러우며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탄하면서 툭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터의 형국(形局)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지요.

전면의 왼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바위틈은 깊숙이 텅 비어 저절로 동굴을 이루매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쳤으니, 이것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 바위)이라는 거지요. 집 앞으로 100여 걸음 되는 곳에 평평한 대()가 있는데, 대는 모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우뚝 솟은 것으로 시내가 그 밑을 휘감아 도니 이것을 조대(釣臺 낚시터)라 하지요.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퉁불퉁한 하얀 바위가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며, 혹은 잔잔한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데 노는 고기들이 몹시 많지요. 매양 석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리는데 이를 엄화계(罨畫溪)라 하지요. 산이 휘돌고 물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촌락과 두절되니 한길을 나가 7, 8리를 거닐어야만 비로소 개짖는 소리와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된답니다.

지난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도 현재 서너 가구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해진 옷에 귀신 같은 몰골로 무슨 소리인지 지절지절하며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고 농사는 짓지 않으니, 깊은 계곡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나 표범을 이웃 삼고 족제비나 다람쥐를 벗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험하고 동떨어짐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지요.

띠 지붕 소나무 처마로 된 집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며, 조와 보리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가 있고 채소와 고사리가 매우 왕성하게 자라 한번 캤다 하면 대바구니에 가득 찹니다. 더러는 눈 오는 날  이하 원문 빠짐 

 

이 편지가 모두 여덟 편이라고 예전에 들었으나, 지금 상자를 뒤져 겨우 네 편을 얻었는데 그나마도 완전하지 못하다.

 

[D-001]이 아우가 …… 되었습니다 : 연암은 1771(영조 47) 과거를 포기한 뒤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을 답사하고 나서 장차 이곳에 은둔할 뜻을 굳히고 자신의 호를 연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연암집 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서문贈白永叔入麒麟峽序 참조.

[D-002]엄화계(罨畫溪) : 엄화는 채색화(彩色畫)란 뜻이다. 연암집 10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이란 표제가 붙어 있다.

[D-003]이미 …… 썼으니 : 연암의 형수 이씨(李氏) 1778년 음력 7월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그해 9월 연암은 형수의 유해를 연암협으로 옮겨 집 뒤뜰에 장사 지냈다. 연암집 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참조.

[D-004]이 편지가 …… 못하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것이다.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연암이 홍대용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는 연암집에 그 내용이 반 이상 결락된 채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 친필의 바로 그 결락된 편지를 내가 전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산거경제(山居經濟)를 기초한다고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으니 이 산거경제가 발전되어 만년의 과농소초를 이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박지원 작품선집1 연암집에 대한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금란(金蘭)과 같이 절친한 사이라 바야흐로 백열(柏悅)이 몹시 깊었는데, 오두막집에 향기가 진동하니 감사하게도 목노(木奴)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임금님의 은사(恩賜)임을 아는데, 또한 저까지 넘치는 은혜를 입었군요.

저는 어디에서나 즐겁게 지내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며 쓰라림만 많이 맛보았지요. 산속에 은거하여 욕심 없이 지내니 어찌 회수(淮水)를 건넌 티가 나는 것을 꺼려하겠습니까만, 경거(璚琚)로써 갚고자 해도 송() 짓는 재주가 모자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연암(燕巖) 한 지역은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려는 뒤늦은 계획에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자가 이곳에 이끌려 머물러 있으니 어찌 공손하지 못한 혐의가 없으리오만, 방덕공(龐德公)처럼 밭을 갈면서 남몰래 유안(遺安)의 술책을 본받고 있지요. 주읍(晝邑)에서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늦게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삶을 택했다고 하지만, 수레와 육식을 잊기 어려워했던 점을 비루하게 여기고, 고산(孤山)에서 학을 자식 삼고 매화를 아내 삼아 살았다고 하지만, 처자식이 여전히 딸려 있는 셈인 것을 가소롭게 여깁니다.

유상(留相) 합하(閤下)는 문장은 수호(綉虎)와 같다고 일컬어지고 도()는 용과 같기를 바라는 분으로서, 직제학이란 화려한 직함으로 새로 세운 규장각의 직무를 오래도록 겸임하고, 웅부(雄府 개성부를 가리킴)를 관할하여 고려의 옛 수도의 장()이 잠시 되셨습니다. 도성(都城)을 나고 들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구경하니 의연히 낙양(洛陽)을 지키던 군실(君實)과 같고, 청정(淸靜)함은 누구에 비할 건가 하면 완연히 제 나라를 다스렸던 개공(蓋公)과 같지요. 촛불 아래에서 시를 쓸 제 몇 번이나 산공(山公)처럼 거마(車馬)로 왕림하셨으며, 반쯤 이지러진 화로에 술을 데울 제 해당(亥唐)의 나물국도 배불리 드셨습니다.  이하 원문 빠짐 

 

 

[D-001]금란(金蘭) :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줄임말로, 매우 두터운 친교를 뜻한다.

[D-002]백열(柏悅) :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유언호(兪彦鎬)가 개성 유수로 부임하게 된 일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D-003]목노(木奴) : 감귤의 별칭이다. 삼국 시대 오() 나라의 단양 태수(丹陽太守) 이형(李衡)이 감귤 1000그루를 심어 두고는 죽을 때에 아들에게, ‘1000명의 목노(木奴)를 남겼으니 해마다 비단 1000필을 바칠 것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休傳 裴松之註

[D-004]회수(淮水) …… 꺼려하겠습니까만 : 회수는 중국 사대강(四大江)의 하나인데, 회수 이남 지역의 귤나무가 회수를 건너 그 이북 지역에 심겨지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설이 있다. 좋지 못한 환경을 만나면 타고난 좋은 자질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다.

[D-005]경거(璚琚)로써 갚고자 해도 : 경거는 아름다운 옥과 패옥(佩玉)으로, 상대방의 선물을 받고 답례를 후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시경 위풍(衛風) 목과(木瓜)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니, 경거로써 보답하였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D-006]() 짓는 재주 : 송은 대상을 찬송하기 위해 짓는 운문의 한 종류이다. 굴원(屈原)이 자신의 재주와 덕을 귤나무에 비유하여 노래한 귤송(橘頌 : 초사 구장九章의 한 편)이 있다.

[D-007]녹문산(鹿門山) : 은사(隱士)가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후한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D-008]유하혜(柳下惠) …… 없으리오만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는 노() 나라의 대부 유하혜의 처신을 공손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연암은 유하혜의 처신 중에서 특히 재야에 버려져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을 겪어도 근심 걱정하지 않으며 …… 자신을 끌어당겨 머물러 있게 하면 머물러 있었으니援而止之而止, 끌어당겨 머물러 있게 하면 머물러 있었던 것은 또한 떠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때문이었다.”라고 한 점에 공감하여 그와 같은 표현을 한 듯하다.

[D-009]유안(遺安)의 술책 : 유안은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 준다는 뜻이다. 방덕공이 현산(峴山) 남쪽에서 밭을 갈고 살면서 성시(城市)를 가까이 하지 않자,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찾아와서 선생은 시골에서 고생하며 지내면서도 벼슬해서 녹봉을 받으려 하지 않으니,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 주려오?” 하였다. 그러자 방덕공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남겨 주는데 나는 유독 편안함을 남겨 주니, 비록 남겨 주는 것이 똑같지는 않으나, 남겨 주는 것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D-010]주읍(晝邑)에서 …… 여기고 : ( : ‘으로도 읽음)는 전국 시대 제() 나라 도읍 서남쪽에 있는 가까운 고을이다. 孟子集註 公孫丑下 제 나라 선왕(宣王)이 은사(隱士) 안촉(顔斶)을 접견했을 때, 안촉은 선비가 왕보다 존귀하다고 주장하며 선비를 잘 대우하도록 선왕을 설득하였다. 이에 공감한 선왕이 안촉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최고의 의식(衣食)과 수레 제공을 약속하니, 안촉은 이를 사절하면서 재야로 돌아가 늦게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을 육식과 맞먹는 것으로 여기고, 느긋하게 걷는 것을 수레와 맞먹는 것으로 여기면서晩食以當肉 安步以當車 살겠노라고 하였다. 戰國策 齊策 안촉은 다른 문헌에는 왕촉(王蠋)’으로 되어 있는데, 사기 82 전단열전(田單列傳)에 왕촉은 주읍(晝邑)에 사는 어진 선비로 소개되어 있다.

[D-011]고산(孤山)에서 …… 하지만 : () 나라 때 임포(林逋)는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평생을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梅妻鶴子고 하였다.

[D-012]유상(留相) 합하(閤下) : 개성 유수 유언호를 존대하여 부른 말이다. 유상은 유수(留守)를 달리 부른 말이고, 합하는 편지에서 존귀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D-013]수호(綉虎) : 화려한 시문(詩文)을 민첩하게 짓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 나라 조식(曹植)이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 시를 지어냈으므로 사람들이 수호라 불렀던 데서 나온 말로, ‘는 수를 놓은 것처럼 화려한 글을, ‘는 호랑이처럼 민첩한 솜씨를 뜻한다.

[D-014]용과 같기를 : 원문은 유룡(猶龍)’인데,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용과 같이 도()의 경지가 심오하다는 뜻이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나서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D-015]낙양(洛陽)을 지키던 군실(君實) : 군실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 사마광이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다가 뜻이 맞지 않자 판서경어사대(判西京御史臺)를 자청하여 낙양으로 돌아가서 15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진재상(眞宰相)’이라 하였고, 촌로들도 모두 사마 상공(司馬相公)’이라 불렀으며, 부녀자들도 그가 군실인 줄을 알았다 한다. 宋史 卷336 司馬光傳

[D-016]청정(淸靜)함은 …… 같지요 : 청정은 청정무위(淸靜無爲)라 하여 도가(道家)에서 주장하는 통치술을 말한다. 백성들을 들볶지 않고 정치를 간편하게 행하는 것이다. () 나라 혜제(惠帝) 때 제 나라 승상 조참(曹參)이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고자 도가의 학설에 밝다는 개공(蓋公)을 초빙하니, 개공이 치도(治道)란 청정함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며,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안정된다.”고 하므로, 그의 말을 따라 제 나라를 다스린 결과 나라가 안집되어 어진 승상이라는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

[D-017]촛불 …… 왕림하셨으며 : 산공(山公)은 진() 나라 때 산도(山濤)의 아들로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지낸 산간(山簡)을 가리킨다. 산간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정남장군으로 양양(襄陽)을 지킬 때 항상 고양지(高陽池)로 놀러가 배에 실은 술을 다 마신 다음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濤傳 附

[D-018]반쯤 …… 드셨습니다 : 백거이(白居易)의 시 화자권(和自勸) 해 저무니 반쯤 이지러진 화로에 뜬숯이 타네.日暮半罏麩炭火 하였다. 해당(亥唐)은 춘추 시대 진() 나라의 현인(賢人)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 “진 나라 평공(平公)이 해당을 몹시 존경하여 그가 집에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고, 앉으라고 하면 앉고, 먹으라고 하면 먹어,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배불리 먹지 않은 적이 없으니, 아마도 감히 배불리 먹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뜻밖에 종놈이 왔기에 그가 가져온 편지를 뜯어 반도 채 읽지 않아서 글자 한 자마다 눈물이 한 번 흘러 천 마디 말이 모두 눈물로 변하니 종이가 다 젖어 버렸구나. 이런 일들은 내가 지난날에 두루 겪었던 일들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려 팥알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세상의 가난한 선비들 중에는 천 가지 원통함과 만 가지 억울함을 품고도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무릇 성() 하나를 맡아 국가의 보루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강성한 이웃나라의 오만한 적군이 번갈아 침략하여, 운제(雲梯)와 충거(衝車) 등으로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공격해 오는데도,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미미한 원조도 끊어지고 안으로는 참새나 쥐, 말 고기와 첩의 인육까지 다 떨어져 필경에는 간과 뇌가 성과 함께 으스러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뜻을 꺾고 몸을 굽히지 않은 것은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의로운 귀신이 되었으며, 아내는 봉작(封爵)되고 자손들은 음직(蔭職)을 얻어 만대에 길이 부귀를 누렸으며, 이름이 역사에 남겨지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다.

가난한 선비가 굳은 절조를 지킨 경우, 그가 겪은 곤란과 우환이 어찌 열사(烈士)가 고립된 성을 지킨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적이 있었겠는가. 그 또한 오직 나에게는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평생을 헤아려 보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는 씻은 듯이 찾아볼 수 없고, 종국에 성취한 것이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는 것을 흉내낸 데 불과하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못난 사내요 죽어서는 궁한 귀신이 되며, 종들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처자는 보존되지 못하며, 제 이름자는 묻혀 없어지고 무덤은 적막할 뿐이다.

, 슬프다! 하늘이 백성들에게 선()을 부여하실 때 어찌 그토록 다르게 했겠으며, 뜻의 독실함 또한 어찌 남과 같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이 원통함과 억울함을 끝내 풀어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세상의 논자들은 선뜻 한마디 말로 마감하여 말하기를, “가난이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 말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마침내 옛 성현들이 남긴 교훈을 뒤적여 보았더니, 공자는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君子固窮 했고, 맹자는 선비는 뜻을 높이 가진다.士尙志 하였다. 천하에서 본디 곤궁하고 뜻을 높이 가지는 선비 중에 이 사람若人 가난한 선비보다 더 심한 사람이 없는데도, 성인은 이 사람을 위해서 이와 같은 말을 준비하여 거듭 훈계하신 듯하니, 어찌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소계(蘇季)는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며 글을 읽고 곤궁한 매고(枚皐)는 독서에 더욱 매진했으니 이는 바로 그들이 원통함을 씻고 억울함을 푸는 밑천이 되었지.

종놈을 붙잡아 두어 무엇 하리오마는, 부득불 장날을 기다려 베도 사와야 하고, 겸하여 솜도 타야 하겠기에 자못 날짜를 허비하게 되었고, 또 비와 눈이 연달아 내려 즉시 떠나보내지 못했을 뿐이다. 둘째 아이 혼사는 아직 정한 곳도 없는데 미리 준비하는 것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느냐. 아마도 내가 평소에 물정에 어두운 줄을 잘 알 텐데, 오히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도리어 절로 웃음이 난다.

누이의 편지가 비록 위로가 되지만, 내행(內行)을 다 보내고 홀로 빈 관아를 지키고 있자니, 곁에서 대신 글을 읽게 하고 필사(筆寫)를 시킬 사람이 없어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이 일은 아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니, 나를 대신해서 이 말을 전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현수(玄壽)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약간의 물자를 보내어 도와주고 싶지만 애닯게도 인편이 없어서,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무엇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이 종놈에게 주어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놈의 생김새가 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우선 그만두고 다른 인편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부 정리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니 환곡을 다 받아들이면 결단코 돌아가려 한다.

이제 막 안경을 걸치고 이 편지 쓰기를 다 못 마쳤는데, 통진(通津)에서 편지 두 통이 또 왔구나. 아직 편지를 뜯어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사연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이만 줄인다.

 

 

[C-001]홍수(弘壽) : 박홍수(1751~1808)는 자가 사능(士能)으로, 박상로(朴相魯)의 아들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연암의 4대조 박세교(朴世橋) 이후 갈라진 집안이다. 그의 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외조부가 바로 연암의 고조 박필균(朴弼均)이었다.

[D-001]운제(雲梯)와 충거(衝車) : 성을 공격하는 무기들로, 운제는 높은 사다리이고, 충거는 충돌하여 성을 무너뜨리는 병거(兵車)이다.

[D-002]참새나 …… 말았지만 : 당 나라 안사(安史)의 난 때 어사중승(御史中丞) 장순(張巡)은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수양(睢陽)을 지키고 있었는데, 반란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곡식이 다 떨어져 많은 병사들이 굶어 죽자 장순은 자신의 애첩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였고, 허원은 종을 죽여서 군사들을 먹였다. 또 참새나 쥐 등도 모조리 잡아서 먹도록 하고 갑옷, 쇠뇌 등도 삶아서 먹게 했다. 이렇게 해서까지 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끝내 함락되면서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新唐書 卷192 張巡傳

[D-003]작은 ……  :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는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의 패자가 되어 한 번 천하를 바로잡게 한 덕분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되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행동하겠는가.” 하였다.

[D-004]군자는 본디 궁하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가 진() 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져 종자(從子)들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자로(子路)가 성난 얼굴로 공자에게 군자(君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 소인(小人)은 곤궁하면 외람된 짓을 한다.” 하였다.

[D-005]선비는 …… 가진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제 나라 왕자(王子) () 선비는 무엇을 일삼는가?” 하고 묻자, 맹자는 뜻을 높이 가진다.”라고 답하였다.

[D-006]소계(蘇季) …… 읽고 : 소계는 전국 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으로, 그의 자가 계자(季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진은 글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 잠을 쫓아, 피가 발까지 흘러내리곤 했다 한다. 戰國策 秦策

[D-007]곤궁한 …… 매진했으니 : 매고(枚皐)는 한() 나라 경제(景帝) 때의 저명한 문인 매승(枚乘)의 서자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함께 곤궁하게 살다가, 나중에 대궐에 글을 올려 자신이 무제(武帝)가 초빙하고 싶어했으나 작고한 매승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벼슬을 얻게 되었다. 부송(賦頌)에 뛰어나고 또 글을 빨리 지었기 때문에 무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漢書 卷51 枚皐傳 단 그가 독서에 매진했다는 고사는 출전을 알 수 없다.

[D-008]둘째 아이 …… 없는데 : 연암의 차남 종채(宗采) 1795(정조 19) 가을에 처사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D-009]내행(內行) : 먼 길을 나들이한 집안의 부녀자들을 가리킨다.

[D-010]50년 동안 해로한 아내 : 연암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연암과 동갑으로, 16세 되던 1752(영조 28)에 시집 와서 1787(정조 11) 향년 51세로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부부로서 해로한 햇수는 35년인데, 아마 부인의 향년을 들어 대략 ‘50이라 말한 듯하다.

[D-011]현수(玄壽) : 박현수(1754~1816)는 자가 사문(士門)으로, 박상규(朴相圭)의 아들이고 박홍수의 사촌 동생이다. 벼슬은 하지 못했다.

[D-012]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 원문은 若不信實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苦不信實  몹시 신실하지 않기에로 되어 있다. 이 역시 문리는 통한다.

[D-013]장부 …… 끝났으니 : 1792(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부임하자 아전들에게 그간 환곡을 횡령한 사실을 자수하도록 권하고, 처벌을 가하는 대신 자진하여 변상하게 하니, 아전들이 몇 년 안에 완납하여 장부가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14]통진(通津)에서 …… 왔구나 : 통진은 경기도 김포(金浦)의 한강 입구에 있던 현()이다. 그곳에 사는 연암의 친척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인편에 서한을 보내 주시어 자못 위로가 됩니다.

제방 쌓는 군정(軍丁)을 배정한 날짜를 이렇게 먼저 지시하여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만 귀군(貴郡)에서 부역을 시작한 뒤에, 또한 응당 저희 고을의 백성들 사정에 따라서 그 완급(緩急)과 선후(先後)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게 해야지, 억지로 맨 뒤로 돌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보면, 매양 거창(居昌) 고을을 들어 그 멀고 가까움을 비교해서 이런 배정이 나온 것 같으나, 저희 현에서 가호(家戶)를 가려 뽑아 징발하는 군정은 모두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 두 동에서 나오는데, 이 두 면()과 저희 관아와의 거리가 혹은 80, 혹은 90리가 되니, 부역 장소와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 모두 백수십 리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이로써 헤아린다면 거창이 도리어 저희 현보다 가까운 셈입니다. 왜냐하면 거창에서 모집하는 군정은 모두 읍내에서 대신 서 주므로 부역 장소와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 70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역하는 곳은 마찬가지이니, 특별히 선후에 따른 이해(利害)의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죄송하오나 저의 마음에는 스스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혹시 뒤질까 두려워하는 일은 있을망정, 무슨 이익이 있다고 빨리 달려 앞을 다투겠습니까. 수십 수백 명의 규율 없는 군정들을 몰아가다 밥은 제가 준비한 밥을 먹으면서 일은 남의 일을 하게 하니, 속담에 이른바 고양(高陽) 밥 먹고 파주(坡州) 구실 하러 간다는 격입니다.

만약 또 군정을 전진 후퇴하게 하는 호령을 본현에서 하지 않아서, 그들로 하여금 우선 천천히 하게 할 경우에는 이미 기약한 날짜가 저절로 다 지나가 버릴 것이요, 좀 기다리게 할 경우에는 저절로 한창 농사지을 때를 빼앗을 것입니다. 비록 11일까지 맞추어 가 억지로 지휘를 따른다 해도, 또 어찌 자기 일처럼 여겨서 허겁지겁 달려가 힘을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농사 형편을 들어 말하더라도 들판과 산골짜기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산은 높고 물은 차가워 바람과 서리가 자못 이른 편이니, 농토를 경작하는 모든 절차를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해야 하므로, 귀군의 평탄하고 넓은 지대와는 그 이르고 늦음을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또 돕는다는 것이 도리어 해를 끼친다.”고 책망하셨는데, 이 또한 어찌 저의 마음에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서로 돕는 의리에 있어서 오직 힘을 다할 뿐이거니와, 하물며 조정의 명령이 내렸는데 누가 감히 공사를 방해할 계획을 하겠습니까. 설사 귀군에서 역군(役軍)이 몹시 넉넉하여 이웃 고을을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해서 동원을 중지할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도 장차 잘된 일이라고 흡족하게 생각하고 머뭇거리다가 주저앉고 말겠습니까? 이 또한 감히 말씀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부역하는 곳이 이미 대단히 큰 데다가 다른 고을 군정까지 아울러 투입하게 되면 실로 감독하기가 어렵고, 모든 일에는 주객(主客)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진실로 저의 생각도 염려하신 바와 같습니다. 다만 초나흗날에 가마를 타고 병든 이 몸을 이끌고서, 친히 역군을 거느리고 가 몸소 감독하고 독려한다면, 함양군과 안의현 양쪽이 다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저의 우둔함을 채찍질하고 단련해 주신 점은 진실로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만, 바라건대 반드시 양찰하시어 이미 단속해 놓은 군정들로 하여금 중도에 기일을 바꾸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C-001]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초기에, 함양군의 제방(堤防) 보수를 돕기 위한 부역에 안의 고을 백성들을 동원하는 문제로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이 보내온 편지에 답한 것이다. 전에도 제방 보수를 위한 부역에 수차 동원되었으나 공사가 지지부진했으므로, 연암은 함양 군수와 약속하여 담당 구역을 확실히 분담한 다음에, 부역에 징발된 백성들을 몸소 통솔하고 식사도 제공하여 신속히 공사를 마쳤다. 이리하여 연암의 재임 중에 다시는 이런 일로 부역이 없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군정(軍丁) : 군적(軍籍)에 오른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성인 남자로, 병역이나 부역에 징발되었다.

[D-002]어찌 …… 받아들여지겠습니까 : 원문은 豈所安於鄙心耶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3]부역하는 …… 큰 데다가 : 원문은 旣已役處浩大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이는 같은 의미이지만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을 따를 경우에는 앞서 함양 군수의 편지 내용을 인용한 예에 준하여, ‘役處浩大부터 함양 군수의 편지 내용이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하교(下敎)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부임한 초기에 시노(寺奴)에 관한 사안으로 시끄럽게 말들이 귀에 들려오길래 그 김에 즉시 비밀리에 알아보았습니다. 계묘년(1783, 정조 7) 무렵에 시노의 두목(頭目)들이 신공(身貢)을 방납(防納)한다는 핑계로 돈을 거둬들인 것이 모두 900여 냥이나 되는데 그것을 모두 다 써서 없애버려, 이 때문에 패가망신한 자가 많으므로 원통함이 뼛속까지 사무쳤는데, 지난겨울에 추가로 노비를 찾아내어 신공을 거둘 때에 또다시 때를 타서 농간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시노들이 남몰래 뇌물을 바친 것은 본래 앞으로 있을 신공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10년 후에 마침내 추가로 찾아내어 신공을 거두는 대상에 들고 말았으므로, 이름을 누락시키고 몸을 숨긴 그 밖의 다른 자들도 모두 두려움을 품고, 지난 일을 뒤미쳐 끄집어내어 원망하는 말을 서로 퍼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교하신 것을 보면 일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아신 듯하나, 두목들이 방납을 빙자하여 침학(侵虐)하는 것은 본래 때가 있으니, 바로 세밑에 추가로 노비를 찾아내는 때입니다. 지금은 추가로 찾아내는 날짜가 아직 멀었으니, 아무리 농간을 부리고자 해도 형세상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대개 지난겨울에도 이러한 폐단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끌어다 붙여 원망과 비난이 떼지어 일어나고 있어, 엄정하게 조사하여 보고를 드려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일 뿐만 아니라 전임(前任) 수령과 관계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임 수령으로서 작고한 자가 이미 3()인데, 그중에서도 족숙(族叔)이 가장 곤란한 입장이 되겠기에, 반복해서 깊이 헤아리며 감히 경솔히 발설을 못 하고 사건의 추이를 관망하여 조처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근원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나, 다만 이들 무리가 원한이 깊어서, 외람되이 임금에게까지 소원(訴冤)하는 일이 자주 있는 점이 걱정됩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만약 거둬들인다는 따위의 말로써 두루뭉술하게 원통함을 하소연한다면, 본 고을에 탈이 생기는 것은 놔두고라도 영문(營門 경상 감영)에 근심을 끼치는 것은 응당 또 어떠하겠습니까. 원한이 쌓인 지 이미 오래이고 말이 멀리까지 퍼졌으니, 일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직관(直關)을 보내 엄중히 조사하라고 지시한다면, 또한 어찌 감히 적당히 얼버무리고 발뺌을 하겠으며, 뒤처리를 잘할 방책을 스스로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치는 별지(別紙)는 바로 저의 족질이 우의정에 제수됨을 축하한 편지입니다. 감영(監營)으로부터 황각(黃閣 의정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처음 연석(筵席)에 나갔을 때 임금께 아뢰면 힘써 도와주기가 쉬울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 폐단을 손이 가는 대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본(副本)입니다. 보시면 짐작하실 것이나, 이는 본디 제가 평소에 고심했던 바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답함 :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직후인 1792(정조 16) 족질(族姪) 박종악(朴宗岳)이 우의정에 제수됨을 축하하면서 그에게 시노(寺奴) 문제에 관해 건의한 편지,  연암집 2에 수록된 삼종질 종악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 문제를 논한 편지賀三從姪宗岳拜相 因論寺奴書를 보낸 뒤에, 역시 시노 문제로 경상 감사의 편지를 받고 그에 답한 것이다.

[D-001]신공(身貢)을 방납(防納)한다는 핑계 : 신공은 지방에 거주하는 시노들이 해당 관아에 가서 신역(身役 : 구실)을 하는 대신 공포(貢布)라고 하여 베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방납(防納)은 이 공포를 대신하여 납부하고 나중에 그 대가를 받는 것을 말한다. 중간에서 높은 이윤을 취하여 폐단이 심했다.

[D-002]3() : ()은 수령의 임기를 말한다. 수령의 임기 동안을 등내(等內)라고 한다. 여기서는 작고한 수령이 3명이라는 뜻이다.

[D-003]직관(直關) : 중앙의 각 관청에서 순영(巡營)이나 병영(兵營)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외읍(外邑)으로 보내는 관문(關文)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정아(政衙 수령이 정무 보는 곳) 서남쪽 100리 밖에 푸른 장막이 드리운 듯한 것은 바로 호남과 영남 아홉 고을에 웅거하여 도사린 산인데 그 이름은 지리산이오. 황여고(皇輿攷)에 이르기를 천하에 신선이 산다는 산이 여덟이 있으며 그중 셋은 외국에 있다고 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풍악산(楓嶽山)은 봉래산(蓬萊山)이고, 한라산은 영주산(瀛洲山)이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다.”라고도 하지요. () 나라 때 방사(方士)의 말에 삼신산(三神山)에 불사약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후세의 인삼입니다. 한 줄기에 가장귀가 셋이고, 그 열매는 화제주(火齊珠 보석의 일종)와 같고 그 형상은 동자(童子)와 같은데, 옛날에는 인삼이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불사약이라 일컬어, 오래 살기를 탐내는 어리석은 천자를 속여 현혹되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내가 돈 수백 냥을 내어서 산에서 캐다가 뒤뜰에다 길렀는데, 얼마 안 가서 갑자기 망양(亡陽)을 앓게 되어 거의 다 캐 먹었답니다. 맛은 몹시 쓰디쓰고 향기가 오래 남으나, 기실은 노상 먹는 당귀나 죽순채(竹筍菜)만도 못하더군요. 그러나 이것을 석 냥쭝 먹고 나자 여러 달 동안 계속해서 목욕하듯 흐르던 식은땀을 능히 막아주었으니, 반드시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든다고는 못 하겠지만, 역시 사람을 현혹하는 요사스러운 풀이 아니겠습니까.

나날이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을 대하고 있노라면, 그 푸르른 장막을 드리운 것이 문득 변하여 푸른 도자기 빛이 되고, 또 얼마 안 가서 문득 파란 쪽빛이 되지요. 석양이 비스듬히 비추면 그 빛이 또 변하여 반짝이는 은빛이 되었다가, 황금빛 구름과 수은빛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 수만 송이 연꽃으로 변하여 하늘거리는 광경이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 같으니, 신선이나 은군자(隱君子)가 무거(霧裾)를 열어젖히고 하대(霞帶)를 휘날리면서, 단아하게 그 사이를 출몰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였답니다. 나는 우리 팽()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지요.

 

지금 내가 복용한 인삼 한 줄기가 과연 사람을 죽지 않게 하여, 가벼운 몸으로 멀리 날아 삼신산을 구름처럼 노닌다 하더라도, 만약 가족들을 데리고 있지 않고 또 친구들도 없다면 무슨 좋은 정취가 있겠느냐. 비록 잠시 안기생(安期生)이나 적송자(赤松子)를 만났다 할지라도, 인간세상에서 도끼 자루 썩는 기간이 바로 신선 세상의 하루에 불과할 테니 그곳의 세월은 또 얼마나 촉박하겠느냐. 하루 동안 먹는 음식이 비록 화조(火棗)나 영지(靈芝)라 할지라도 어찌 요사이 먹는 언배氷梨나 홍시만 하겠느냐. 설령 참으로 안기생 · 적송자를 만나서 황정경(黃庭經) 녹자(綠字)를 강독한다 할지라도 또한 어찌  원문 7자 빠짐 현담(玄談)과 묘게(妙偈)만 하겠느냐.

설령 속세를 벗어나 이야기하고 웃고 하는 것이 혹 즐겁다 할지라도, 그와 같이 이야기하고 웃는 동안에 인간 세상에는 후손이 이미 십대(十代)가 지났을 것이다. 사랑스럽고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 때로 바람을 타고 돌아와서 그 후손들에게 내가 바로 너의 10대조이다.’라고 하면, 버럭 성을 크게 내며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진 시황과 한 무제(漢武帝)로 하여금 진작 이런 깨달음을 알게 했더라면, 어찌 기꺼이 부귀를 버리고 참즐거움을 놓아 버린 채 곤궁한 삶을 택하여 적막함을 달게 여기며, 만승(萬乘) 천자의 존엄을 집어던지고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머물려고 했겠느냐.”

바라노니 그대는 흥이 나면 한번 찾아와, 이 동산에 가득 찬 죽순을 나물로 데쳐 먹고 개천에 가득한 은어를 회 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맑은 못의 곡수(曲水) 위에 참말로 술잔을 띄워 흘려 보시지요. 그러면 진() 나라 제현(諸賢)의 풍류만 못하지 않을 것이며, 계축년의 수계(修禊)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던 1793년 봄에 김기무(金箕懋), 처남 이재성(李在誠), 사위 이종목(李鍾穆)과 이겸수(李謙秀), 문하생 이희경(李喜經) · 윤인태(尹仁泰) · 한석호(韓錫祜) · 양상회(梁尙晦) 등을 초청하여,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 고사를 본떠 술잔을 물에 띄워 흐르게 하고 시를 읊조리며 즐거운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過庭錄 卷2 그러므로 이 편지는 1793년 봄의 그 모임에 초청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로 짐작된다.

[D-001]황여고(皇輿攷) : 명 나라 신종(神宗) 때 장천복(張天復)이 편찬한 지리서이다.

[D-002]() 나라 …… 하였으니 : 진 나라 때 방사(方士) 서복(徐福 : 서불徐巿)이 진 시황(秦始皇)에게 글을 올려 봉래 · 방장 · 영주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고,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며 동남 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3]망양(亡陽) : 식은땀을 많이 흘림으로 인해 몸 안의 양기가 없어지면서 오한이 나고 손발이 차지며 심한 허탈 상태에 빠지는 병인데, 산삼이 특효약이라고 한다.

[D-004]죽순채(竹筍菜) : 삶은 죽순을 얇게 썰어 육편(肉片)과 함께 양념하여 볶은 나물을 말한다.

[D-005]석양이 비스듬히 비추면 : 원문은 夕陽乍映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夕陽斜映으로 되어 있다. 후자가 문맥과 더 합치한다고 보아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무거(霧裾) …… 휘날리면서 : 무거는 옅은 안개처럼 가벼운 비단 옷깃을 말하고, 하대(霞帶) 역시 노을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허리띠를 말한다. 신선은 노을로 옷을 삼는다고 하여 이를 하의(霞衣)라고 한다.

[D-007]우리 팽() : 원문은 阿彭인데, ()는 항렬이나 아명(兒名) 또는 성() 앞에 친밀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붙이는 말이다. 예컨대 이덕무(李德懋) 16세 연하인 그의 막내 아우 공무(功懋)의 아명이 정대(鼎大)였으므로 그를 아정(阿鼎)’이라 불렀다. 靑莊館全書 卷4 嬰處文稿2 題阿弟所學字卷末 그러므로 아팽(阿彭)은 당시 연암을 시종(侍從)하던 나이 어린 사람을 부른 애칭이었을 것이다. 연암을 따라가 있던, 당시 10대 초반의 둘째 아들 박종채의 아명이 아무였을 가능성이 있다.

[D-008]안기생(安期生) : () 나라 때 사람으로, 하상장인(河上丈人)에게 신선술을 배워 장수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를 천세옹(千歲翁)이라 불렀다. 진 시황이 금벽(金璧)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봉래산(蓬萊山)으로 떠나갔다 한다.

[D-009]적송자(赤松子) :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신선이다.

[D-010]도끼 자루 썩는 기간 : () 나라 때 왕질(王質)이란 사람이 벌목을 하다가 동자(童子)들이 잠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했는데 그 사이에 보니 자신의 도끼 자루가 다 썩어 버렸으며, 귀가했더니 동시대 사람들이 이미 죽어 아무도 없었더라고 한다. 述異記

[D-011]화조(火棗) : 전설에 나오는 선과(仙果)로 이것을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다.

[D-012]황정경(黃庭經) 녹자(綠字) : 황정경은 도가의 경전이다. 녹자 녹문(綠文), 녹도(綠圖)라고도 한다. 황하(黃河)에서 나왔는데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책이라 한다.

[D-013]현담(玄談)과 묘게(妙偈) : 불경을 가리킨다. 현담은 현묘한 담론이란 뜻으로, 불경의 제목과 저자 및 대의를 논술한 것이다. 묘게는 오묘한 게송(偈頌)이란 뜻으로, 운문으로 부처의 덕을 찬송하거나 경전의 내용을 부연 또는 총결한 것이다.

[D-014]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가리킨다.

[D-015]이 동산에 …… 데쳐 먹고 : 원문은 喫緊此滿園筍蔬인데, 순소(筍蔬)는 곧 죽순채(竹筍菜)를 가리킨다. ‘끽긴(喫緊)’은 원래 급박하다든가 중요하다는 뜻인데,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는 먹는다는 뜻으로 새길 수밖에 없다.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그런 뜻과 유사한 돈끽(頓喫)’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돈끽도 끼니마다 먹는다든가 단번에 먹는다는 뜻이어서 문맥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끽긴(喫緊)은 다음 문장의 회초(鱠錯)’와 대응 관계에 있으며, 회초(鱠錯) ()’ 자는 초()와 통하니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긴() 자에는 끓는 물에 데친다는 뜻이 있으므로, 원문을 살려 번역하였다.

[D-016]맑은 못의 곡수(曲水) : 연암은 안의현 관아의 빈터에 공작관(孔雀館)이라는 정각을 짓고 북쪽 연못의 물이 흘러넘쳐 그 앞을 지날 때에는 곡수(曲水)가 되게 만들어 연잎을 따서 그 위에 술잔을 실어 띄워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암집 1 공작관기(孔雀館記) 참조.

[D-017]() 나라 …… 않는다면 : 진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는 회계(會稽)의 산음현(山陰縣)에 있던 난정(蘭亭)에서 계축년(353) 3 3일 수십 명의 명사들과 함께 수계(修禊)하면서 곡수연(曲水宴)을 벌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1 蘭亭記 수계(修禊)란 옛날 중국에서 3월의 첫 번째 사일(巳日)에 냇가에서 몸을 씻고 놀았던 일로, 이렇게 하면 그해의 액운을 면할 수 있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김매기 한 뒤로 심한 가뭄이 들어, 갑자기 6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늘엔 한 점 구름도 없었습니다. 부채질을 하고 찬물을 마셔 대지만 밤낮없이 활활 타는 화로 속에 앉아 있는 듯하니, 이는 지난 60년 동안 처음 겪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순사또께서는 원기왕성하게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갈수록 쇠약하고 병이 깊어지고 있지만, 분주히 달려가 비를 빌었어도 신령의 보응은 한층 더 멀어지기만 하니, 백성들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목이 타는 듯합니다. 고을살이 3년에 한 가지도 은혜로운 정사가 없었으니, 재앙이 닥쳐오는 것은 이치상 혹시 당연할 듯도 합니다. 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붉은 도장을 마구 찍어 대는 것이 부정(不正) 아닌 것이 없는데,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하여 잘못된 전례를 답습하며 바로잡아 고쳐 가는 일이 없으니, 이는 어찌 거심(距心)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원문 74자 빠짐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大夫)와 사(), 지금의 이른바 수령이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입니다. 만약 백이(伯夷)나 오릉중자(於陵仲子) 같은 이로 하여금 지금 장리(長吏 고을 수령)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은 것같이 여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는 관문(關文)이나 가는 첩보(牒報 서면 보고)가 한 가지도 절실한 내용이 없으며, 백성의 근심이나 나라의 장래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어물어물 넘기고 모호하게 처리할 따름입니다.

지금과 같은 무더위에 걸리는 병은 학질과 이질이요 관격(關格)인데, 이는 풍한서습(風寒暑濕)이 원인이 되거나 허로(虛勞)와 내상(內傷)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삐 주명신(周命新)을 불러오지만, 애시당초 어찌 맥박이나 증세를 제대로 살펴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이진탕(二陳湯)의 약방문을 받아 적게 하고, 한편으로는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읊어 주고는, 국수에다 돼지고기까지 먹고 총총히 일어나 가 버리지요. 날마다 수백 가지 병을 살펴보지만, 가는 곳마다 이런 식입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 증세를 진단하기를, ‘인순고식(因循姑息)이요 구차미봉(苟且彌縫)이다라고 봅니다. 이렇게 하면서 복의(福醫)로 세상에 행세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그 복의부터 처벌해야만, 비로소 백성들의 병이 치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돼지 족발 하나로 풍년을 빌었던 사람은, 바친 것은 비록 보잘것없었으나, 그 뜻은 그래도 진실하고 그 말은 매우 정성스러웠습니다. 지금 비를 비는 제사로써 따져 본다면, 비록 땅을 깨끗이 쓸고 제사를 올린다고 하지만 자리를 깔고 장막을 친 것부터 그다지 평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릇들은 금 가고 비틀어졌으며 제기(祭器)들은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시골구석의 집사(執事)들도 예의에 익숙하지 못하여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며, 옛 법도에도 지금 법도에도 맞지 않은 관을 쓰고, 평성(平聲)인지 거성(去聲)인지도 분변하기 어려운 성조로 무미건조한 축문을 읽어 대니, 이렇게 하면서 사방 천리에 큰비를 맞이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세간의 만사가 모두 다 이런 부류입니다.  이하 원문 빠짐 

 

 

[D-001]거심(距心)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 고을 수령인 연암 자신의 죄라는 뜻이다. 공거심(孔距心)은 제 나라의 평륙(平陸)이란 고을의 수령이었는데, 맹자가,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장과 꼴을 구할 것이다. 목장과 꼴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또한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 하고 질책하니, “이는 저 거심의 죄입니다.” 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孟子 公孫丑下

[D-002]도신(盜臣) : 관청 창고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백승지가(百乘之家 : 경대부가卿大夫家)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聚斂之臣를 기르지 않는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盜臣)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D-003]만약 …… 것입니다 : 백이는 악인(惡人)의 조정(朝廷)에 참여하고 악인과 말하는 것을 마치 의관을 갖추고서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은 듯이 여겼다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제()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04]풍한서습(風寒暑濕) : 한의학에서 풍 ·  ·  · 습은 병을 일으키는 외부의 사기(邪氣)를 가리킨다. 이 사기가 인체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 것을 각각 중풍(中風), 중한(中寒), 중서(中暑), 중습(中濕)이라 한다.

[D-005]허로(虛勞)와 내상(內傷) : 허로는 한의학에서 오랫동안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과로한 결과 나타난 증상을 총칭한 말이다. 내상은 한의학에서 내인성(內因性) 질환을 말하는데, 음식을 잘못 섭취해 생기는 음식상(飮食傷), 술을 과음해서 생기는 주상(酒傷), 심신을 과도하게 사용해 생기는 노권상(勞倦傷) 등이 있다.

[D-006]주명신(周命新) : 조선 후기의 명의이다. 허준(許浚)의 제자로 동의보감을 참조하여 1724(경종 4) 임상치료학의 명저인 의문보감(醫門寶鑑) 8권을 저술하였다.

[D-007]이진탕(二陳湯) : 반하(半夏), 귤껍질, 붉은 복령(茯笭), 감초 등을 넣어 달인 탕약으로 담()을 다스리는 데 특히 효과가 있다.

[D-008]인순고식(因循姑息)이요 구차미봉(苟且彌縫)이다 : 인순고식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임시방편을 구하는 것을 뜻하고, 구차미봉 역시 비슷한 말로 대충 해치우고 임시변통하여 문제를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연암은 만년에 병풍에다 큰 글씨로 인순고식 구차미봉 여덟 자를 쓰고는, “천하만사가 모두 이 여덟 자를 따라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過庭錄 卷4

[D-009]복의(福醫) : 운 좋게도 병을 잘 낫게 하는 의사를 말한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운 좋게도 늘 승리하는 장수를 복장(福將)이라 하며, ‘지장(智將)은 복장(福將)만 못하다는 속담이 있다.

[D-010]옛날에 …… 정성스러웠습니다 : 사기 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순우곤(淳于髡)이 제 나라 위왕(威王)을 설득하면서 한 이야기에 나온다. 위왕은 초 나라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순우곤을 조() 나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보내면서도, 조 나라에 보내는 선물을 매우 인색하게 준비했으므로, 순우곤은 돼지 족발 하나로 풍년을 기원하는 사람의 예를 들면서 그 사람이 바치는 것은 보잘것이 없으면서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여 왕을 깨우치게 했다고 한다.

[D-011]무미건조한 : 대본은 古淡無味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古談無味로 되어 있다. 둘 다 잘못된 것으로, ‘枯淡無味라야 옳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지난가을에 자녀와 남녀 종들을 다 보내고 나니 관아가 온통 비었고, 몸에 딸린 것은 관인(官印)을 맡아 곁을 지키는 동자 하나뿐인데, 밤이면 문득 꿈결에 잠꼬대를 외치므로 한심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늘 그 아이로 하여금 동헌(東軒)을 지키도록 바꾸어주고, 홀로 매화 화분 하나, 파초 화분 하나를 동반하여 삼동을 났습니다. 옛사람 중에 매화를 아내로 삼은 이가 있었습니다만, 눈 내리는 날 푸른 파초는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될 만하더군요.

봄이 오자 위쪽의 연못에 물이 넘쳐 섬돌을 따라 졸졸 흐르는데, 그 소리는 마치 거문고를 타는 듯합니다. 대청 앞에 한 그루 하얀 배나무는 활짝 꽃이 피었는데, 땅에 자리 깔고 그 아래 누워서 옥 같은 꽃잎과 구슬 같은 꽃술을 쳐다보니, 위로 달빛을 받아 이슬방울과 서로 어리비쳐 경물(景物)이 너무도 조용하고 쓸쓸하더군요. 그래서 혼자 승천사기(承天寺記)를 읊었더니, 정신이 맑아지고 뼛속까지 싸늘하여 잠이 잘 오지 않았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중존(仲存 처남 이재성(李在誠))이 편지를 보내와 이 고독한 처지를 위로하기를,

 

자고로 가족을 거느린 신선은 없으니, 쓸쓸하다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쓸쓸해야만 신선을 만나 볼 수 있는 법이지요.”

하였답니다. 이 사람은 곧 이번에 급제한 노진사(老進士)이지요. 아마도 그와는 집안끼리 세의(世誼)가 있으실 터이기에, 환한 창 아래에서 글을 쓰면서 손길 가는 대로 그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 길사(吉士)가 이끌어 주실 때는 바로 지금인가 합니다. 다만 세상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그의 맑고 깨끗함은 옥수(玉樹 아름다운 나무)와 아름다움을 다툴 만하답니다.

저는 천은(天恩)을 두터이 입어 한 고을의 수령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지 4년 동안에 부엌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곳간에는 남은 곡식이 있으며, 하당(荷堂)과 죽각(竹閣)에는 맑은 정취가 있어 저절로 만족스럽습니다만, 노쇠로 인한 병이 날로 깊어만 가므로 돌아갈 생각이 갈수록 더하니 어찌하겠습니까. 천리 먼 곳에서 오랫동안 나그네 살이를 하느라고, 도리어 연암(燕巖)에서의 농사일만 제철을 어기고 있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일찍이 천고(千古)에 일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같은 이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밭 갈고 고기 낚고 담장 쌓는 일을 스스로 마치지도 못한 채, 남의 잔치에 바삐 달려가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훈수하고, 신 매실을 넣어라 짠 소금을 쳐라 하면서 귀 따갑게 떠들어 댈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은 본래 이미 자기 신분에 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소위 만냥태수(萬兩太守)란 모두가 멧돼지를 잡으려다 도리어 집돼지까지 잃는 자들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득실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낫고 어느 쪽이 못하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세간에는 원래 천금태수(千金太守)도 없지 않습니까.

어제 두서너 이웃 수령들과 모여 복어를 끓여 먹었는데, 부엌에서 일하던 사람이 복어 알을 우물가에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솔개들이 보고 한참 동안 공중에서 맴돌다가, 차례로 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칼을 뽑아 든 듯이 하다가 발을 오그리고 몸을 돌려 지나가 버리더니, 최후에 한 늙은 솔개가 대담하게 한 번에 채어 가지고 공중에서 배회하다가 마침내 용마루에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까마귀 한 마리가 와서 앉아 한참 동안 곁에서 흘깃대다가 가 버리더군요. 그걸 보고 집이 떠나갈 듯 일제히 웃으면서,

 

지독하구나, 이 사람이여! 먹을 것을 탐내는 솔개나 까마귀도 오히려 저 먹는 것에 조심하여 이와 같이 자상히 살피는데, 동파(東坡) 노인은 오히려 목숨을 걸었구려!”

하였습니다.

조금 있자니 그 까마귀가 다시 검은 색깔의 큰 덩어리 하나를 물고 와서, 득의한 양 머리를 들었다 숙였다 하며 좌우로 번갈아 쪼아 허겁지겁 배불리 먹은 뒤, 부리를 기와 위에 문지르고는 한 번 까악 하며 울고 날아가더군요. 관노비를 시켜 천천히 살피게 했더니 조금 전에 물고 온 것은 바로 똥덩이였습니다. 똥은 해독(解毒) 작용을 하니, 저 까마귀가 해독을 하는 데는 지혜롭지만, 맛은 아직 잘 모르는 놈입니다. 세간에 과연 오유선생(烏有先生)처럼 해독하는 좋은 처방을 지닌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C-001]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 우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보낸 편지이다. 1792년 그의 우의정 취임을 축하하면서 아울러 화폐 문제를 논한 편지가 연암집 2에 실려 있다.

[D-001]옛사람 …… 있었습니다만 : 송 나라 때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한 임포(林逋)의 고사를 가리킨다. 임포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평생을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梅妻鶴子고 하였다.

[D-002]땅에 …… 누워서 : 원문은 地臥其下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 앞에  자가 누락된 듯하다.

[D-003]승천사기(承天寺記) : 소식(蘇軾) 동파지림(東坡志林) 중 기승천야유(記承天夜遊)를 가리킨다. 원풍(元豐) 6(1083) 10 12일 달 밝은 밤에 소식이 승천사로 벗을 찾아가 함께 뜰을 거닐었다는 내용으로, 80여 자밖에 안 되는 짧은 산문이다.

[D-004]이 사람은 …… 노진사(老進士)이지요 : 이재성(李在誠) 1795(정조 19) 식년시에 45세로 진사 급제하였다.

[D-005]길사(吉士) …… 합니다 : 원문은 吉士之誘 迨其今乎인데, 시경 소남(召南) 야유사균(野有死麕) 여자가 이성을 그리워하니, 미남자가 유혹하네.有女懷春 吉士誘之라 하였고, 표유매(摽有梅) 나를 찾는 남자들이여, 바로 지금을 놓치지 마오.求我庶士 迨其今兮라고 하였다. 길사(吉士)는 미남자라는 뜻 외에 덕을 갖춘 훌륭한 인물이라는 뜻이 있고, ‘()’ 자에도 교도(敎導)한다는 뜻이 있다. 시경의 시구를 이용하여, 우의정 김이소에게 노진사(老進士) 이재성을 관직으로 이끌어 주도록 은근히 청탁한 말이다.

[D-006]하당(荷堂)과 죽각(竹閣) : 연못과 대숲이 있는 정각을 말한다. 연암은 안의 관아의 서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었다. 연암집 1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D-007]일찍이 …… 없었으나 : 이윤(伊尹)은 은() 나라 탕왕(湯王)의 재상이다. 사기 3은본기(殷本紀)에 이윤은 탕왕에게 기용되고 싶었으나 길이 없자, 탕왕의 비()인 유신씨(有薪氏)가 시집올 때 종으로 따라와 요리사가 되어 음식맛으로써 탕왕을 즐겁게 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는 그러한 설을 부정하고, 이윤은 유신국(有薪國)의 들에서 밭을 갈고 있다가 탕왕이 세 번이나 초빙했으므로 부득이 그에 응했다고 주장하였다. 부열(傅說)은 은 나라 고종(高宗)의 재상이다. 부열은 부암(傅巖)의 들에서 담장 쌓는 노역을 하다가, 꿈에 본 성인을 찾아 나선 고종을 만나 재상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서 고종은 부열에게 자신을 훈계해 주도록 당부하면서, “내가 만약 맛있는 국을 만들거든 그대는 소금과 매실 식초가 되어 주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을 도와서 선정을 베풀게 하는 것을 염매(鹽梅)라고 한다.

[D-008]만냥태수(萬兩太守) : 녹봉이 많은 고을 수령을 말한다.

[D-009]천금태수(千金太守) : 녹봉이 만냥은커녕 천냥이 되는 수령 자리도 없다는 뜻으로, 연암이 풍자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D-010]동파(東坡) …… 걸었구려 : 소식(蘇軾) ‘4 11일에 여지를 처음 먹다四月十一日初食荔支라는 시에 나오는 다시 복어를 씻어 복부의 기름진 고기를 삶누나.更洗河豚烹腹腴라는 구절을 두고 한 말이다. 복어는 독이 있는데도 복어 배 부위의 기름진 고기를 삶아 먹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풍자한 것이다.

[D-011]오유선생(烏有先生)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와 상림부(上林賦)에 등장하는 가공 인물이다. 오유(烏有)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 자는 이와 같이 어찌라는 뜻과 함께 까마귀라는 뜻도 있으므로, 연암은 익살스럽게 까마귀를 오유선생이라 부른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지난가을에 중존(仲存 이재성)이 편지 한 통을 손수 가지고 와 전해 주었고, 이어 또 성위(聖緯)가 와서 머물고 오일(五一)도 와서 합류하였지요. 쌍지(雙池)에 물은 맑고 언배와 붉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뜰에 가득하며, 더구나 또 동산에 가득한 고종시(高種柹)는 월중홍(越中紅)에 못지않은데, 운사(雲社)에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절반이 송원(松園)에 대한 말이었지요. 이때에 비록 한 글자의 답서도 올리지 못했지만, 그대의 두 귀가 몹시 가려웠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소이다.

그 뒤 중존은 세밑이 임박해서 떠나고, 성위도 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말을 달려 돌아가 버리니, 비로소 이 몸이 갑자기 대령(大嶺 새재) 남쪽800리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삼복더위가 요새 들어 더욱 심한데, 신령의 가호로 벼슬살이를 탈 없이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대의 사촌 형님 시가(時可)씨가 문득 고인이 되었다니 애통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원례(元禮)의 부고가 또 이르렀군요.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의 20대 친구로서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만하고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의 둑을 무너뜨릴 만하여 천지간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를 몰랐지요. 신선술을 배울 수도 있고, 장수가 될 수도 있고, 문장과 공훈을 머지않아 성취할 수 있었을 터인데, 40년 세월을 통틀어 결산해 보면 그저 분주하게 평범한 벼슬아치 노릇을 하면서, 겨우 건물 약간을 세운 데 불과했습니다. 인생 백년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으니 가슴속에 애착을 둘 것은 아니지만, 매양 한번 생각하면 아쉬움으로 마음에 걸릴 뿐이외다.

오늘날의 수령된 자들은 읍황(邑貺)이 후하고 박한 것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을 뿐, 산수의 승경(勝景)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이른바 후하고 박하다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킨답니까? 저는 고을살이한 지가 벌써 3년이지만, 날마다 책상 머리에서 읍총(邑摠)을 뒤져 보아도  원문 빠짐  도무지 먹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하루는 저의 아들더러 이르기를,

 

너는 예서(禮書)를 읽었느냐? 한 조각 고기가 비뚤게 잘린 것을 먹는다고 입과 배에 무엇이 해로우며, 잠시 쉴 때 한쪽으로 기댄다고 엉덩이와 다리에 무엇이 나쁘겠느냐마는, 성인은 임신했을 때에 대해 간곡히 훈계하시기를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말고,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앉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양생(養生)하는 데 바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했지요. 이로써 미루어 보면, ()에서 받는 만종(萬鍾)의 녹봉도 반드시 꽥꽥거리는 거위처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고, 낙읍(洛邑)의 구정(九鼎)도 어찌 백이(伯夷)로 하여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게 만든 시골 사람의 갓처럼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와 사(), 지금 이른바 좋은 태수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이니, 그가 먹고 입는 것에 명색이 부정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소이까? 백이와 오릉중자(於陵仲子)로 하여금 태수로서 처신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여길 뿐이겠소.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이외다. 하지만 까마귀는 온갖 새가 다 검은 줄로만 믿고, 개구리는 온갖 벌레가 다 같은 소리를 내는 줄로만 의심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 형은 벼슬길에 나섰소.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서이고,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장차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오. 모르겠소만 그대가 스스로 처신하는 바는 백이도 아니고 도척(盜跖)도 아닌, 옳고 그름의 중간쯤인가요?

그렇다면 소 잡는 칼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는 이 안의현만 한 데가 없을 거외다.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는 산음(山陰)과 흡사하고,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 것은 난정(蘭亭)에 못지않으며, 지금 한창 죽순이 껍질을 벗고 은어가 그물에 들고 있으니, 비록 백이로 하여금 현감이 되게 하더라도 응당 기뻐하며 배를 한번 불릴 거외다. 깊이 바라건대 그대는 꼭 돈 많이 생기는 좋은 태수를 바라지 말고, 앉아서 이 옛 친구와 임무 교대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술이 약간 취했길래 남을 시켜 적었소이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C-001]김계근(金季謹) : 계근은 김이도(金履度 : 1750~1813)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송원(松園)이며,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으로, 그의 형 김이소(金履素)와 함께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1800(정조 24)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경기도 관찰사, 예조 판서, 형조 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D-001]성위(聖緯) : 이희경(李喜經 : 1745~?)의 자이다. 그의 부친 이소(李熽)는 서자로, 생원(生員) 급제하였다. 이희경은 아우 이희명(李喜明)과 함께 연암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중국을 다섯 차례나 다녀왔다. 그가 남긴 설수외사(雪岫外史)는 박제가의 북학의에 비견될 만한 저술이다.

[D-002]오일(五一) : 윤인태(尹仁泰)의 자이다. 윤인태는 연암의 문하생으로 전서(篆書)를 잘 썼다.

[D-003]쌍지(雙池) : 연암은 안의 관아 서북쪽에 백척오동각(白尺梧桐閣)을 지으면서 북지(北池)를 만들었고, 그 남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으면서 남지(南池)를 만들었다고 한다. 연암집 1 백척오동각기(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孔雀館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D-004]고종시(高種柹) : 알이 다소 작지만 껍질이 얇고 씨가 거의 없으며 당도가 월등히 높으면서 육질이 연한 감이다. 산청 · 함양 · 하동 등지에서 생산되는 지리산 곶감은 모두 이 고종시로 만들어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D-005]월중홍(越中紅) : 홍시의 일종인데,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D-006]운사(雲社) : 연암이 이재성 · 이희경 · 윤인태 등과 함께 시주(詩酒)의 모임을 갖고 그 모임의 명칭을 운사라고 붙인 듯하다.

[D-007]시가(時可) : 김이중(金履中 : 1736~1793)의 자이다. 그는 김조순(金祖純)의 부친으로, 1771(영조 47) 36세로 뒤늦게 진사 급제 후 음직으로 중앙의 하위 관직과 지방관을 전전하여 용인 현령, 고양 군수, 평양 서윤, 과천 현감, 서흥 부사를 지냈다. 연암과는 소싯적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1793년 음력 9 29일 사망하였다. 楓皐集 卷12 先府君墓表

[D-008]원례(元禮) : 한문홍(韓文洪)의 자이다. 그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1736년에 태어났다. 1765년 진사 급제 이후, 벼슬은 1787년에서 1790년까지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재임하는 등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한 듯하다. 그의 몰년은 1792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로 미루어 보면 1794년이 아닌가 한다. 연암과는 젊은 시절에 같이 과거 공부를 했던 친구였다. 연암집 3 ‘대은암에서 창수한 시의 서문大隱菴唱酬詩序 참조.

[D-009]겨우 …… 불과했습니다 : 예컨대 한문홍은 1789(정조 13) 음력 12월 마전 군수로서 경내에 있는 고려 태조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을 중건하였다. 그 부근 잠두봉(蠶頭峯)에 그가 지은 중작숭의전(重作崇義殿)’이라는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D-010]인생 …… 같으니 : 원문은 人生百歲間 忽如遠行客인데, 문선(文選)의 고시(古詩) 19수 중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살아가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는 구절이 있다.

[D-011]읍황(邑貺) : 읍황(邑況)과 같은 말로, 고을의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邑況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2]읍총(邑摠) : 고을의 재정 현황을 적은 작은 책자이다. 목민심서 부임(赴任) 사조조(辭朝條), 읍총에는 녹봉으로 받는 쌀과 돈의 액수를 기록하고, 농간을 부려 잉여분을 사취하는 방법을 갖가지로 나열하고 있어, 수리(首吏)가 이를 바치면 신임 사또는 조목조목 캐 물어서 그 묘리와 방법을 알아내니, “이는 천하의 큰 수치이다.”라고 하였다.

[D-013]자른 …… 말라 : 논어 향당(鄕黨)에서 공자는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드시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고 하였고, 유향(劉向) 열녀전(列女傳)에 주() 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姙)의 태교(胎敎)를 예찬하면서, “옛날에 부인이 자식을 임신하면 ……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하였다. 열녀전의 이 대목은 주자(朱子)가 찬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등 예서(禮書)에 전재(轉載)되어 있다.

[D-014]()에서 …… 없고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오릉중자(於陵仲子)의 고사에 출처를 둔 말이다. 오릉중자는 제()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D-015]낙읍(洛邑) …… 아니겠소이까 : 낙읍은 주 나라의 수도이고, 구정(九鼎)은 우() 임금 때 중국의 구주(九州)에서 바친 쇠로 만들었다는 귀중한 솥으로, 은 나라 상읍(商邑)에 있던 것을 주 나라 무왕(武王) 때 낙읍으로 옮겼다고 한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D-016]도척(盜跖) : 고대 중국의 유명한 도적으로 많은 무리를 이끌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사기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백이와 같은 선인(善人)과 대비되는 악인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었다.

[D-017]소 잡는 칼 : 지방관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에서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論語 陽貨

[D-018]무성한 …… 못지않으며 : ()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산음현(山陰縣)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일을 기록한 난정기(蘭亭記) 높은 산 험준한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다.有崇山峻嶺 茂林脩竹 하고, “물을 끌어다가 술잔을 띄우는 곡수를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앉는다.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고 한 것을 끌어다 쓴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전라 감사에게 답함

 

 

눈보라 치는 추위에 순사또의 건강이 두루 좋으시다니, 구구한 제 마음도 삼가 위안이 됩니다.

전번 서한에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 버리고, 남아 있는 자는 새벽별처럼 드물다.”고 하신 말씀에는 너무도 깊은 슬픔이 뒤얽혀 있었으니,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인지요?

옛날의 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도 물정 모르는 유학자요 서투른 선비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어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능력이 있다고 자처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평일에 진실한 마음으로 옛사람의 글을 읽었고, 급기야 벼슬에 나가 당세에 할 일을 담당하게 되어서는 평탄함과 험난함을 막론하고 다만 옛사람의 글 가운데서 처방을 찾았을 뿐이니, 스스로 힘을 들인 것은 한낱 정성 ()’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서한에서 하신 말씀에, 마치 이 두 분을 보기를 하늘 높이 솟고 땅을 뒤흔드는 특별난 사람으로 여긴 듯하였으니, 이는 어리석은 제가 감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감사께서는 글 읽은 것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못하지 않을 뿐더러 범중엄과 부필보다 몇 백 년 늦게 태어났으니, 그 좋은 처방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반드시 많을 터입니다. 다만 감히 알지 못할 것은, ‘ 자 한 자에 힘을 들이는 것을 옛사람과 같이 할 수 있는지 하는 점입니다.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은 지금의 이른바 수령인데, 옛날의 이른바 재물을 긁어모은다聚歛는 책망 역시 귀속시킬 데가 어찌 없겠습니까.맹자는 말하기를,

 

거실(巨室)에 원망을 사지 말라.”

했는데, 한 고을의 아전들은 곧 한 고을의 거실이요, 각 읍의 수령들은 바로 한 도의 거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지키는 것이요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됨은 오직 저 관리들이 알고 있을 뿐이니, 저들이 비록 눈앞의 위협적인 형구(刑具)를 무서워할지라도 어찌 마음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저 옛 현인들은 거실에 원망을 사지 않았을 터입니다.

지난가을에 태풍 피해가 심한 데도 있고 심하지 않은 데도 있었으니, 이른바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다만 대령(大嶺) 이남은 노령(蘆嶺) 이북과는 같지 않아서,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아가는 일은 있었지만, 수만 그루의 나무들이 울부짖고 사방팔방이 뒤흔들린 건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한창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 영천(永川)에서 경주로 향해 가고 있었는데, 멀리 백리 밖을 바라보니 바다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먹이 번진 것 같았고, 또 무수한 버섯이나 수천수만 개의 수레바퀴와도 같았습니다. 길가는 사람이 멀리 하늘로 오르는 흰 용을 가리키는데, 그 형상은 또한 산언덕 사이에 나무꾼이 다니는 길이 여러 갈래 난 것 같고, 그 색깔은 희지도 검지도 않으며 맑고 밝은 것이 엷은 얼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이것이 용인지 구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풍력이 거세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 재해를 입지 않은 것을 축하하신 것은 축하가 아닙니다. 바람은 어찌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읍(下邑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서 1000여 리 밖의 대궐로 달려가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뵈었으니, 지극한 영광이었습니다. 본현이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먼저 물으시고, 다음으로 연로의 농작물 형편 및 도내의 백성들 사정이 어떠한지, 지난번에 태풍 피해가 있었는지를 물으셨는데 말씀을 간곡하게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백성들 사정에 대해서는 임자년(1792)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듣고 본 대로 대답하라는 뜻을 간곡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전상(殿上)에는 촛불이 휘황하고 좌우에는 다만 승지와 사관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천신(賤臣)을 대우하시는 것이 측근의 신하와 다름이 없었으니, 천신의 직분상 의견을 피력할 자리를 잠시 얻은 이상 오직 숨김없이 다 아뢰어야 마땅할 터인데, 가슴속에 글로 쓰지 않은 만언(萬言)의 상소가 등 위에서 한 섬의 땀으로 모조리 변하고 말았습니다. 소원하고 천한 몸이라 속에 있는 생각을 다 못 아뢴 것은 진실로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중엄이나 부필과 같은 분들에 비교하면 또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하 원문 빠짐 

 

 

[C-001]전라 감사에게 답함 :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낸 답서이다. 이서구는 1793(정조 17) 8월 전라 감사에 제수되었다.

[D-001]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 : 송 나라 인종(仁宗 : 1062~1063 재위) 때의 명재상들이다.

[D-002]옛날의 …… 없겠습니까 : 도신(盜臣)은 관청 창고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백승지가(百乘之家 : 경대부가卿大夫家)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聚斂之臣를 기르지 않는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盜臣)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중 聚斂之責이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聚斂之臣으로 되어 있다.

[D-003]거실(巨室) …… 말라 : 거실은 명문 대가를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임금이 정치를 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거실(巨室)에 원망을 사지 말아야 한다. 거실이 사모하는 바를 온 나라가 사모하고, 온 나라가 사모하는 바를 천하가 사모한다. 그러므로 덕으로써 교화하는 정치가 성대하게 사해(四海)에 넘치는 것이다.” 하였다.

[D-004]천리까지 …… 않는다 : 왕충(王充) 논형(論衡) 뇌허편(雷虛篇)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고, 백리까지 같은 우레가 치지 않는다.千里不同風 百里不共雷고 하였다.

[D-005]하읍(下邑)의 수령 : 원문은 下邑小吏인데 小吏는 대개 아전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적절치 않다.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고을 수령邑宰이란 뜻의 小宰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저는 …… 영광이었습니다 : 연암은 1794(정조 18) 가을에 차원(差員)으로 상경했을 때 임금의 특명으로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임금은 연암에게도 안의현과 연로의 농사 형편과 도내 백성들의 사정을 간곡하게 물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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