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222568727941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blog.naver.com

 

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

28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29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30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31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32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33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3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35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36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37 주공탑명(麈公塔銘)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원임(原任) 이조 판서 박공 상덕(朴公相德)이 맏아들 급제군(及第君) 수수(綏壽)의 상()을 당했다. ()에 맏아들을 위해 삼 년의 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의 조부인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 아무와, 선친 진사(進士) 증 이조 판서 부군 휘 아무를 계승하여 따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차 모년 모월 모일에 파주(坡州) 광현(筐峴) 모 좌향(坐向)의 벌에 장사할 예정이다.

공은 지원(趾源)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내 아이가 일찍이 숙부님의 글을 몹시 좋아했으니, 숙부님이 지은 묘지명을 얻음으로써 죽은 자를 불후(不朽)하게 하고, 그뿐 아니라 산 자도 가끔 읽어 보고 그의 용모와 목소리를 상상함으로써 무궁한 그리움을 메워 볼까 합니다.”

지원은 공에게,

 

예예, 알겠습니다.”

하고 답하였다.

박씨(朴氏)는 여덟 망족(望族 명망 높은 씨족)이 있는데 그중에 반남(潘南)을 본관으로 한 박씨가 일족도 많고 크게 출세하였다. 다만 그 천성의 졸박(拙朴)함을 성자(姓字)와 함께 얻어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모범이 다른 씨족과는 크게 달랐다. 모두들 안에서는 부형을 스승으로 섬기고, 밖에서는 결코 허황되게 남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명론(名論)은 집 밖을 벗어나지 않고 발걸음이 뒷골목에 미치는 일이 드물었다.

그중에 곤궁한 자는 춥고 배고픈 데에 이골이 나서 삼가 자신의 분수에 충실할 뿐이며, 현달한 자는 겸양과 염치를 길러 혹시라도 선비의 본색을 벗어날까 두려워했고, 어진 이는 스스로 터득하기에 있는 힘을 다하고 선()을 보면 단단히 지키며, 어리석은 자는 차라리 고루하고 견문이 적은 탓으로 떨쳐 일어나지 못할망정 세상 돌아가는 대로 따라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순박하고 촌스럽고 비타협적이고 어눌함으로써 확연히 남다른 하나의 가풍을 이루었으며, 이른바 세태와 시속(時俗)이란 것은 배우고 싶어도 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귀 기울이고 눈길 돌릴 줄도 모르니 물들려야 물들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속에 부끄러움으로 그 낯빛을 붉힌 채 마치 농사꾼이 번화가를 걷듯 하는 자는 물을 것 없이 우리 박씨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일찌감치 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홀()을 쥐고 허리띠를 드리운 채 조정에서 행동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가풍을 스스로 증험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간혹 우리 집안사람들의 성품이 이러한 줄은 모르고, 남과 친히 할 때 조금 곰살궂지 못하면 오만한 게 아닌가 자못 의심하며, 응대하는 일에 왕왕 소홀하다 보면 도리어 뻣뻣한 탓으로 돌리어, 모두 이르기를 반남 박씨란 거들먹거릴 것도 없으면서 제멋대로 교만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제 중에 총명하고 재주 있어 조금이라도 그런 티를 드러내는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집안끼리 모여서 두려워하며 이놈은 어째서 우리 집안의 상규(常規)와 다른가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보니 망자(亡者 박유수를 가리킴)는 재주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오히려 집안에서라도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두텁게 가리고 숨기느라 겨를이 없었는데, 하물며 딴 사람에게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록 과거에 우연찮게 급제하기는 했지만 담박하여 흥미 없어 했으며, 수시로 먼 데를 바라보며 사모하기를 마치 학이 새장 안에 있는 것같이 하였다. 그러나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홀로 술로써 속을 풀었다. 거처하는 방에는 먼지가 뽀얗고 책상에는 초라한 두어 질의 책뿐으로, 항상 하루 묵고 가는 주막집과 같았다. 감사로 나가는 아버지를 여러 번 따라다녔으나 상자 속에는 먹 한 자루도 저장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벼룻집을 만들고 싶었으나 그 품삯을 걱정하여 그만두었으니 그 졸박함이 이와 같았다.

평양은 도읍이 화려하고 돈이 물 흐르듯 하며, 높고 큰 누대들이 많아서 사방에서 유람객들이 몰려들어 오고 맑은 노래와 절묘한 춤이 노상 좌우에 있었지만, ()은 바야흐로 고개를 공손히 숙이고 날마다 정문(程文)을 공부하였다. 문밖에는 신 두 켤레밖에 없었으니,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동접(同接)의 선비였다. 때로는 스스로 아이종에게 술 한 병을 들려 따르게 하고서, 훌쩍 홀로 걸어 나가 먼 곳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조리곤 하였다. 홀홀하기가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았으니, 전 감영의 군교(軍校)와 이졸(吏卒)들도 군이 관아에 있는 줄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 군을 누가 조롱하였더니, 군은 말하기를 집에 있으면 감독(監督)이요, 관아에 있으면 나그네이지요.”라 하였다.

! ()은 아비가 된 29년에 그 아들에 대해 안 것이라곤 오직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박하여 가풍을 잃지 아니하고, 자신의 곤궁함과 현달함, 어짊과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맑고 트인 흉금이라든가 빛나고 화려한 문장 같은 것은 역시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었으니, 군의 어짊이 남보다 크게 나은 점이 있었지만 지금 그를 대신해서 그의 평생을 자상히 말하여 공의 마음을 거듭 아프게 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공은 듣고서 너무도 애통하여,

 

과연 그랬군요 과연 그랬다면 산 자의 원통함이 죽은 자보다 더욱 심하니, 이로써 묘지(墓誌)를 지어 주기 바랍니다.”

하므로, 드디어 그 말을 적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군의 자()는 공리(公履),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 첨정(僉正  4 품 벼슬) ()의 따님이다. 군은 지금 임금 갑자년(1744, 영조 20)에 태어나서 임진년(1772, 영조 48) 모월 모일에 죽었다.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 그 이듬해에 죽었으므로 미처 분관(分館)을 못한 까닭에 관례에 따라 홍문관 정자를 증직(贈職)하였다. 현감(縣監) 한산(韓山) 이응중(李應重)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딸 하나를 두었는데 현재 다섯 살이다.

군이 바야흐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장차 그의 가문을 이어 갈 터였으나, 다만 술에 병들어 갈수록 더 마시다가 황달이 들었다. 하루는 거울을 끌어다 자기 얼굴을 비춰 보고는 땅에 내던지며,

 

내가 어찌 오래가겠나.”

하고서, 공중에 대고 글자나 쓰며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더니, 이내 의관을 정제하고 부모님께 나아가 영이별을 고하는데 말이 너무나도 비창하였다. 온 집안이 크게 놀라며 비로소 그가 병든 줄 알고 바야흐로 의원을 맞아다 황달을 치료했으나 이미 늦어서, 군은 병으로 인해 혀가 굳어 말을 못한 채 며칠 만에 죽었다. 그는 사람 관상을 잘 보아 왕왕 기가 막히게 맞추었다. ()은 다음과 같다.

 

귀하게 되면 인색해지고 / 貴之徵嗇

부유해지면 더러워지고 / 富之徵濁

오래 살면 포악해진다 / 壽之徵虐

인자하고 진실한 자에겐 요절이 뒤따르고 / 慈諒者夭之躅

깨끗하여 찌끼 없는 자에겐 가난이 깃들고 / 皭無滓者貧之宅

베풀기 좋아하고 주는 것 많은 자는 높은 벼슬이 없다 / 好施多予者無高爵

이 여섯 가지 덕 중에 내 장차 어느 것을 택할꼬 / 于玆六德吾將焉擇

! 못난 자식에겐 격려하여 일으켜 세우고 / 吁不肖者勸以作

얌전한 자에겐 가로막아 억누르다니 / 愷悌者沮而抑

내 말을 못 믿거들랑 여기 새긴 글월을 보소 / 有不信視此刻

 

 

얼굴을 그려 낸 글로는 천고에 사마천(司馬遷) 같은 이가 없다. 그는 매양 사람의 흠 있는 부분이나 결여된 부분에 대해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그려 내었다. 요컨대 흠 있는 부분이나 결여된 부분은 그 사람의 여백이지만, 그 여백이야말로 그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정신이란 이른바 붓을 들어 표현하기 이전에 있으며, 표현된 문장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대가미(戴葭湄)가 남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 얼굴이 둥글면 모나게 그려 내고, 그 얼굴이 길면 짧게 그려 낸다. 그린 것은 모나고 짧지만, 초상은 둥글고 길다.” 하였는데, 이 말은 문장가에게 가장 합당하다 하겠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속에서 이 사람박수수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읽고는 글 짓는 요령을 대략 터득하였다.

 

[C-001]족손(族孫) …… 묘지명 : 정자(正字)는 홍문관의 정 9 품 벼슬이다. 동일한 제목의 글이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이 크게 차이 난다. 운산만첩당집 중 이 글에 붙인 이재성(李在誠)의 평어에 고친 원고가 처음 원고만 못하다.改本不如草本고 했는데, 병세집에 실린 글은 여기서 말한 처음 원고가 아닌가 한다.

[D-001]박공 상덕(朴公相德) : 상덕(相德)은 박종덕(朴宗德 : 1724~1779)의 초명(初名)이다. 박종덕은 이조 판서로 전후 18년간이나 재임하였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그의 조부는 박사정(朴師正 : 1683~1739)인데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연암에게는 재종숙부가 된다. 연암이 지은 묘갈명과 묘표음기(墓表陰記)가 각각 연암집 3과 권9에 수록되어 있다. 박종덕의 부친은 박흥원(朴興源 : 1708~1736)인데 진사 급제 후 요절하였다.

[D-002]() …… 하였으니 : 의례(儀禮) 상복(喪服) 아버지는 맏아들을 위해 참최(斬衰)의 복을 입는다.父爲長子고 하였다. 적장자(嫡長子)는 장차 대종(大宗)이나 소종(小宗)의 종주(宗主)가 되기 때문이다. 예기 대전(大傳) 서자(庶子)는 맏아들을 위해 3년의 복을 입을 수 없으니 그 맏아들은 선조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이다.庶子不得爲長子三年 不繼祖也라고 하였다.

[D-003]아무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연암속집(燕巖續集) 중편연암집에는 師正으로 이름을 밝혀 놓았다.

[D-004]아무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연암속집 중편연암집에는 興源으로 이름을 밝혀 놓았다.

[D-005]따로 …… 때문이다 : 소종(小宗)이 되었다는 뜻이다. 고래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의하면 무릇 고조(高祖)가 같은 형제들이 하나의 소종이 되며,  5 대가 되어 고조가 같지 않게 되면 별개의 소종(小宗)으로 나뉘게 된다.

[D-006]박씨(朴氏) …… 있는데 : 박씨 중 밀양(密陽) · 반남 · 고령(高靈) · 함양(咸陽) · 죽산(竹山) · 순천(順天) · 무안(務安) ·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른바 팔박(八朴)’을 가리킨다.

[D-007]명론(名論) :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사대부로서 처신하는 문제, 즉 출처(出處)의 명분(名分)에 관한 논의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8]() …… 지키며 : 중용장구  20 장에 성실하고자 하는 자는 선()을 가려서 단단히 지키는 자이다.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라고 하였다.

[D-009]부끄러움으로 ……  : 원문은 其色赧赧然若夏畦之行于莊嶽者인데,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유래한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다. 자로(子路) 남들과 의견이 합치하지 않는데도 그들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낯빛을 살펴보면 부끄러움으로 벌겋다.觀其色赧赧然 이와 같은 처신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증자(曾子) 어깨를 움츠리고 억지 웃음 짓는 것이 여름철 밭일하기夏畦보다 괴롭다.”고 하였다. ‘夏畦는 농사꾼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또한 맹자는 말하기를, () 나라 대부(大夫)가 아들에게 말을 가르칠 때 그 아들을 데려다 장()과 악()의 사이에 수년간 두면, 아무리 회초리질을 하며 제 나라 말 대신 초() 나라 말을 배우게 강요한들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장과 악은 각각 제 나라의 도읍 안에 있던 거리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D-010]() ……  : 임금 앞에서 신하는 반드시 홀을 손에 쥐어야 한다.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에는 허리를 굽히고 있으므로 관복의 허리띠가 아래로 드리워지게 된다. 禮記 玉藻

[D-011]먹 한 자루 : 원문은 一墨인데, 병세집에는 一筆로 되어 있다.

[D-012]정문(程文) : 과거 응시자가 지어 바치는 일정한 격식의 문장을 이른다.

[D-013]집에 있으면 감독(監督)이요 : 사기 4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집에 맏아들이 있으면 그 집안의 감독이라 한다.家有長子曰家督고 하였다. 원문은 在家則督인데, ‘ 자가 병세집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14]과연 그랬군요 : 원문 有是哉 논어 자로(子路)  3 장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다산(茶山)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예전부터 의심하던 것이 이제 증명되었다는 말이라 해석하였다.!

[D-015]진사시 : 원문은 進士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司馬, 병세집에는 生員으로 되어 있다.

[D-016]분관(分館) :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의 세 관청에 나누어 배치하여 일종의 임시직인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는 일을 이른다.

[D-017]홍문관 정자를 증직(贈職)하였다 : 원문은 贈弘文館正字인데, 병세집에는 그 다음에 兼知製敎’ 4자가 더 있다.

[D-018]공중에 …… 쓰며 : 원문은 書空인데, () 나라 은호(殷浩)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크게 실망한 경우를 비유할 때 쓴다. 은호(殷浩)가 무능하다 하여 먼 지방으로 쫓겨나자 온종일 어허! 괴상한 일이로고.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만 공중에 대고 쓰며 지냈다고 한다.

[D-019]부모님께 …… 고하는데 : 원문은 辭訣於父母인데, 병세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0]부유해지면 더러워지고 :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을 탁부(濁富)’라고 한다. 청빈(淸貧)의 정반대가 되는 말이다.

[D-021]포악해진다 : 원문은 인데,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22]격려하여 일으켜 세우고 : 원문은 勸以作인데, 여러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3]대가미(戴葭湄) : 가미(葭湄)는 청대(淸代) 초상화의 대가인 대창(戴蒼)의 자()이다.

[D-024]문장가에게 …… 하겠다 : 원문은 最宜操觚家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最宜省으로 되어 있다.

[D-025]이 글 : 원문은 此篇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유인(孺人)의 휘()는 아무요 반남 박씨이다.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 연암의 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16세에 덕수(德水) 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에게 출가하여 1 2남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 영조 47) 9월 초하룻날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것들과 여종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끌고 배를 타고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중미는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안에서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응석스럽게 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 뿐더러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으니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촉박했던고!

 

떠나는 자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 去者丁寧留後期

보내는 자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 猶令送者淚沾衣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 扁舟從此何時返

보내는 자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 送者徒然岸上歸

 

 

인정(人情)을 따른 것이 지극한 예()가 되었고, 눈앞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 참문장이 되었다. 문장에 어찌 일정한 법이 있었던가? 이 글을 옛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는다면 당연히 이의가 없겠지만, 지금 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기 때문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자 속에 감추어 두기 바란다.  중존(仲存 : 이재성의 자) 

 

[C-001]맏누님 …… 묘지명 : 종북소선(鍾北小選) 망자 유인 박씨 묘지명亡姊孺人朴氏墓誌銘’, 병세집 맏누님 유인 박씨 묘지명伯姊孺人朴氏墓誌銘 과 동일한 작품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에서 크게 차이 난다. 초기작인 종북소선이나 병세집의 글을 개작한 것이라 판단된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를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중국인 호부 주사(戶部主事)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外從弟)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받아 연암에게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D-001]유인(孺人) :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 족보에 의하면, 박씨의 남편인 이현모(李顯模)는 나중에 종 2 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선친 이유(李游)에게도 참판이 증직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인 박씨에게도 추후에 정부인(貞夫人)의 봉작(封爵)이 내렸던 듯하다.

[D-002]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 택모(宅模)는 이현모(李顯模 : 1729~1812)의 처음 이름이다. 백규(伯揆)는 그의 처음 자이고, 나중에 이름을 고치면서 자도 회이(誨而)로 고쳤다. 이현모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D-003]아곡(鵶谷) :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에 통합된 지평현(砥平縣)에 있었다.

[D-004]두포(斗浦) : 병세집에는 두포(豆浦)’로 되어 있다. 두포(豆浦)는 곧 두모포(豆毛浦)를 가리킨다. 두모포는 지금의 한강 동호대교 북단인 서울 성동구 옥수동 옥정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유명한 나루였다. 우리말로는 두뭇개라고 했는데, 이는 한강과 중랑천의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한다. 이와 같이 두모포(豆毛浦)가 원래 두뭇개를 음차(音借)한 것이었으므로, 그 준말인 두포(豆浦)’를 한자음이 같은 두포(斗浦)’로 적기도 했던 듯하다.

[D-005]말처럼 뒹굴면서 : 원문은 인데 말이 토욕(土浴)하는 것, 즉 땅에 뒹굴며 몸을 비벼 대는 것을 말한다.

[D-006]옥압(玉鴨)과 금봉(金蜂) : 옥압은 오리 모양으로 새긴 옥비녀를 가리킨다. 비슷한 것으로 옥봉(玉鳳), 옥연(玉燕) 등이 있다. 또 금으로 나비나 잠자리 모양 등을 만들어 비녀 위에 장식하는 것을 금충(金蟲)이라 한다. 금봉(金蜂)은 금으로 벌 모양을 만든 그와 같은 수식(首飾)을 가리킨다.

[D-007]조각배 이제 가면 : 원문은 扁舟從此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此時此去로 되어 있고, 과정록(過庭錄) 1에는 扁舟一去로 되어 있다.

[D-008]떠나는 …… 돌아가네 : ()을 대신하여 7언 절구를 실었다. 과정록(過庭錄) 1에서 이덕무(李德懋) 배에서 누님의 상여 행차를 송별하며舟送姊氏喪行란 제목으로 이 시를 소개한 뒤 이를 읽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공인의 휘()는 아무이니 완산(完山 전주(全州)) 이동필(李東馝)의 따님이요, 왕자 덕양군(德陽君)의 후손이다. 16세에 반남(潘南) 박희원(朴喜源)에게 출가하여 아들 셋을 낳았으나 다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공인은 평소 여위고 약하여 몸에 온갖 병이 떠날 새가 없었다. 희원의 조부는 당세에 이름난 고관으로서 선왕 때에 매양 한() 나라 탁무(卓茂)의 고사를 들어 벼슬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그분은 관직에 있을 때에 조그만큼도 재산을 늘려서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므로 청빈(淸貧)이 뼛속까지 스몄으며, 별세하던 날에 집안에는 단 열 냥의 재산도 남겨 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해마다 거듭 상()을 당했다.

공인은 힘을 다하여 그 열 식구를 먹여 살렸으며, 제사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명문 대가의 체면이 손실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미리 준비하고 변통하기 거의 20년 동안에,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으며 근소한 식량마저 바닥이 나게 되니, 마음이 위축되고 기가 꺾이어 마음먹은 뜻을 한 번도 펴 본 적이 없었다. 매양 늦가을에 나뭇잎이 지고 날이 차지면 마음이 더욱 허전하고 좌절됨으로써 병이 더욱 더치어, 몇 해 동안을 끌더니 마침내 지금 임금 2년 무술년(1778) 7 25일에 돌아갔다.

!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옛사람은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거니와, 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려 하나 언제 망할지 모르는 지경인데도 능히 제 힘만으로 외교사령(外交辭令)을 잘하고 나라의 체모를 갖추었던 약소국의 대부처럼,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서 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결코 제사를 거르지 않았으며 넉넉지 못한 부엌살림이나마 잔치를 너끈히 치러 냈으니, 어찌 이른바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둔 분이 아니겠는가?

시동생 지원(趾源)이 애를 낳아 막 탯줄을 끊자마자 공인이 사내임을 살펴보고서 드디어 아들을 삼았는데 그 아들이 지금 13세가 되었다. 지원이 화장산(華藏山) 속 연암(燕巖) 골짜기에 새로 살 곳을 정하고, 그곳의 산수를 좋아하여 손수 잡목 수풀을 베어 내고 수목에 의지하여 집을 만들었다.

일찍이 공인을 마주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 이제 늙었으니 당연히 이 아우와 함께 은거해야 합니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고,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稚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백 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다만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게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했다. 공인은 이때 비록 병이 심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머리를 손으로 떠받치고 한 번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였다.

그래서 같이 오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바랐던 터인데, 심어 놓은 곡식이 익기도 전에 공인은 이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관()에 담겨 돌아와서 그해 9 10일에 집의 북쪽 동산 해좌(亥坐)의 묘역에 장사하였으니, 공인의 생전의 뜻을 이뤄 드리고자 해서였다. 그 지역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속한다.

지원은 친구인 규장각 직제학 유언호(兪彦鎬)에게 명()을 청했다. 언호는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갓 부임했는데, 지역이 연암 골짜기와 인접하여 장례를 도와주고 명도 지어 주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연암 골짜기는 산 곱고 물 맑은데 / 燕巖之洞山窈而水淥

여기에 시아주비가 터를 닦았네 / 繄惟小郞之所營築

! 온 가족 다 함께 은거하려 했더니 / 嗚呼鹿門盡室之計

마침내 여기에 몸을 맡기셨도다 / 竟於焉而托體

안온하고도 견고하니 / 旣安且固

후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시리라 / 以保佑厥後

 

 

부드럽고 순하다婉嫕, 엄하고 착하다莊淑, 부지런하고 검소하다勤儉는 등의 글자가 하나도 없는데도, 조상 제사를 받들고 집안을 다스리고 우애하고 인자하고 온화하고 유순한 공인의 덕이 눈으로 보는 듯이 상상된다. 요컨대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깨끗한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슬픔과 탄식으로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존(仲存) 

 

 

옛날에 원헌(原憲)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최근 세상의 가난한 선비 집안의 부인네들에게는 가난이 바로 병이요, 병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병이 단단히 엉겨 붙어 벗어 내고 떼어 버릴 길이 없어, 집집마다 똑같은 증세요, 사람마다 매한가지 빌미이다. 왕왕 진찰하여 그 원인을 찾아내도, 가려서 취해 쓸 만한 묘한 약방문이 없으며, 이와 같은 묘한 약방문이 있어 가려서 취해 쓴다 한들 또한 국의(國醫)가 없어 처방을 낼 수 없다.

엽전 꿰미가 관복에 수놓은 이무기가 서린 것 같고, 상자를 열면 베와 비단이요, 쌀과 곡식이 창고에 가득 들어오면, 손으로 한번 어루만지기만 해도 고통이 씻은 듯 가셔 버리고, 눈을 들어 한번 보기만 해도 심장이 튼튼해지고 구미가 돌아와서, 죽다가도 되살아나니 이것이 바로 최상의 약이다. 사슴 머리에서 잘라 낸 녹용과 갓난애만 한 신비한 인삼으로도 이런 부인네를 낫게 하기란 마치 물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의 구고진경(救苦眞經)에서 나온 약방문이다.  중존(仲存) 

 

[C-001]맏형수 …… 묘지명 : 제목에 맏형수라는 伯嫂’ 2자가 없는 이본들도 있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제목이 伯嫂李恭人墓碣銘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도 상당히 차이 난다. 공인(恭人)은 정 5 품 또는 종 5 품 벼슬아치의 부인에게 내린 벼슬을 이른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 역시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하여,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D-001]덕양군(德陽君) : 중종(中宗)과 숙원(淑媛) 이씨(李氏) 사이에서 출생한 왕자인 이기(李岐 : 1524~1581)의 봉호(封號)이다.

[D-002]박희원(朴喜源)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喜源 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喜源도 같다.

[D-003]탁무(卓茂)의 고사 : 탁무(?~28)는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자강(子康)이다.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에 통유(通儒)로 불려 시랑(侍郞)에 천거되기도 하였고, 밀현령(密縣令)이 되어서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그를 태부(太傅)로 발탁하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다. 後漢書 卷55 卓茂列傳

[D-004]희원의 …… 올려 주었다 : 희원의 조부는 자헌대부(資憲大夫)요 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시호를 장간(章簡)이라 한 박필균(朴弼均 : 1685~1760)이다. 연암집 9에 실린 그에 대한 가장(家狀)에 의하면, 1758년 동지돈녕부사에 제수되어 입시(入侍)했을 때 영조(英祖)가 탁무(卓茂)의 고사를 들어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했다고 한다. 영조실록 34 7 24일 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벼슬을 올려 주었다增秩는 부분이 褒之로 되어 있다.

[D-005]게다가 …… 당했다 : 1759년에 공인의 시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가 사망한 데 이어 1760년 시조부 박필균이 사망하고, 1761년 시조모 여주 이씨(驪州李氏)가 사망하였다. 1767년에는 시아버지 박사유(朴師愈)가 사망하였다.

[D-006]열 식구 : 시동생인 연암의 가족들을 포함한 숫자이다. 당시 연암의 가족은 부부와 1남 종의(宗儀) 2녀로 모두 다섯 식구였다.

[D-007]뼛골이 빠졌으며 : 원문은 擢髓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8]병이 더욱 더치어 : 원문은 疾益發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9]가난한 …… 견주었거니와 : 주역 곤괘(困卦)에 대한 정이천(程伊川)의 전()에 구사(九四)의 효사(爻辭)를 풀이하면서, 처음에는 고생하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할 점괘이니 가난한 선비의 아내와 약소국의 신하는 각자의 올바른 명분에 안주할 따름이다.寒士之妻 弱國之臣 各安其正而已라고 하였다.

[D-010] …… 하나 : 원문은 拄傾支覆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1]제 힘만으로 : 원문은 自立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自强으로 되어 있다.

[D-012]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 원문은 澗蘩沼毛인데 계곡물과 늪에 자란 산흰쑥과 풀들이라는 뜻으로,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진실로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계곡물과 늪가에 자란 풀이나 개구리밥 · 산흰쑥 · 조류(藻類) 같은 나물澗谿沼沚之毛 蘋蘩薀藻之采 …… 귀신에게 바칠 수 있고 왕공(王公)에게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D-013]결코 …… 않았으며 : 원문은 不餒其鬼神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足以響神으로 되어 있고,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俾神不餒로 되어 있다.

[D-014]몸이 …… 그만둔 : 원문은 鞠躬盡瘁 死而後已인데,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D-015]지원(趾源)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도 같다.

[D-016]지원(趾源) …… 되었다 : 1766년에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가 출생하였다.

[D-017]화장산(華藏山) : 황해도 개성 동북쪽, 금천군(金川郡) 내에 있는 산이다.

[D-018] …… 뿌리고 : 원문은 一斗魚苗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十斛量魚, 동문집성에는 十斛養魚로 되어 있다.

[D-019] …… 놓고서 : 원문은 繫牛六角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이 다음에 身耕耘’ 3자가 추가되어 있다.

[D-020]길쌈하고 : 원문은 積麻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織麻로 되어 있다.

[D-021]여종을 …… 재촉해서 : 원문은 課婢趣榨油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收荏趣瀝油로 되어 있다.

[D-022]옛사람의 글 : 원문은 古人書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古書로 되어 있다.

[D-023]자기도 …… 웃으며 : 원문은 不覺蹶然起 扶頭一笑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聞輒欣然樂으로 되어 있다.

[D-024]심어 …… 전에 : 원문은 禾稼未熟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築室未竟으로 되어 있다.

[D-025]9 10 : 원문은 九月十日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6]규장각 직제학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內閣直學士로 되어 있다.

[D-027]유언호(兪彦鎬) : 1730~1796.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정조 즉위년(1776) 음력 9월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될 때 정 3 품 벼슬인 직제학(直提學)에 첫 번째로 제수되었으며, 또한 정조의 특지(特旨)로 이듬해 6월에는 개성 유수에 제수되었다.

[D-028]물 맑은데 : 원문은 水淥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9]온 가족 …… 했더니 :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이끌고,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D-030]안온하고도 견고하니 : 묏자리를 가리켜 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의 명사(銘辭) 여기는 자후가 묻힌 곳, 견고하고도 안온하니旣固旣安, 후손에게 복리(福利)를 가져다 주리라.”라고 하였다.

[D-031]원헌(原憲) …… 말했는데 : 공자의 제자 원헌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고 있었는데, 출세한 자공(子貢)이 찾아와 그를 보고는 탄식하며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묻자 원헌이 나는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우고서 행하지 못함을 병이라 한다고 들었소.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라오.” 하니, 자공이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莊子 讓王

[D-032]국의(國醫) : 나라 안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를 이른다.

[D-033]구미가 돌아와서 : 원문은 歸脾인데, 비장의 기능이 회복되어 식욕이 살아남을 뜻한다. 안신보심탕(安神補心湯)과 귀비탕(歸脾湯)은 정충증(怔忡症)에 특효가 있는데, 정충증은 심장이 갑자기 뛰고 누가 잡으러 오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증세로, 부귀에 급급하고 빈천을 근심하면서 소원을 이루지 못할 때 많이 생긴다고 한다. 東醫寶鑑 卷58 怔忡

[D-034]마치 …… 같다 : 돌을 물에 던져 보았자 물을 흡수하지 않듯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경우를 뜻한다.

[D-035]약왕보살(藥王菩薩)의 구고진경(救苦眞經) : 약왕보살은 불교에서 아미타불 25보살의 하나로 중생에게 좋은 약을 주어 몸과 마음의 병고(病苦)를 덜어 주고 고쳐 주는 보살을 이른다.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구고진경은 있으나, 약왕보살과는 무관하다. 여기서는 풍자를 위해 지어낸 불경 이름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가 죽은 지 3일 후에 문객(門客) 중에 연사(年使 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행길은 응당 삼하(三河)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친구 손유의(孫有義)란 사람이 있는데 호를 용주(蓉洲)라 하였다. 몇 년 전에 내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지방으로 원이 되어 나간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덕보가 보낸 토산물 두어 종류를 남기어 성의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용주가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면 응당 내가 덕보의 벗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문객에게 부탁하여 다음과 같이 부고를 전하게 했다.

 

건륭(乾隆) 계묘년(1783) 모월 모일 조선 사람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용주 족하(足下)에게 사룁니다. 폐방(敝邦 우리나라) 전임 영천 군수(榮川郡守) 남양(南陽) 홍담헌(洪湛軒) 휘 대용(大容) 자 덕보가 올해 10 23일 유시(酉時)에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입이 비틀리고 혀가 굳어 말을 못 하다 잠깐 사이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입니다.

고자(孤子 부친상 중의 아들) ()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어 제 손으로 부고를 써서 전할 수도 없거니와, 양자강(揚子江) 남쪽에는 편지를 전할 길이 없습니다. 이 부고를 오중(吳中)으로 대신 전달해서 천하의 지기(知己)들로 하여금 그가 죽은 날짜를 알도록 해 주어, 망자나 산 자나 족히 한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문객을 보내고 나서 나는 항주(杭州) 인사들의 서화와 편지 및 시문(詩文)들 총 10권을 손수 점검하여 관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면서 통곡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덕보는 통명(通明)하고 민첩하고 겸손하고 단아하며, 식견이 깊고 견해가 정밀하였다. 특히 음률과 역법(曆法)에 뛰어났으니, 그가 만든 혼의(渾儀) 제기(諸器)는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끝에 새롭게 기지(機智)를 짜낸 것이었다. 처음에 서양인들은 땅이 구형(球形)임을 설명하면서도 땅이 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덕보는 일찍이 논하기를 땅이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 하였다. 그 설이 미묘하고 심오하였으나, 다만 미처 그에 대해 저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는 땅이 돈다는 것을 더욱 자신하여 의심이 없었다.

세간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폐하고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 한가히 들어앉아 이름난 향을 피우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는 것을 보고서, 그가 장차 담담히 스스로 즐기며 속세에서 벗어나는 데 오로지 뜻을 두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덕보가 만물을 종합하고 정리해서 아무리 복잡한 것도 단호히 처리하여, 나라의 재정을 맡길 만도 하고 먼 외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도 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기발한 책략을 지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유독 남들에게 혁혁하게 과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어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문서를 신중히 처리하고 정령(政令)을 기한 내에 집행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아전들은 설치지 않고 백성들은 절로 따르게 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일찍이 그의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수행하여, 육비(陸飛)와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다 같이 전당(錢塘)에 거주하며, 모두 문장과 예술의 선비여서 그들이 교유하는 사람들도 중국 내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덕보를 추앙하여 대유(大儒)로 여겼다. 이들과 더불어 필담한 것이 누만언(累萬言)으로, 유교 경전의 뜻과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를 분석하였는데, 굉장하고 뛰어나서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급기야 작별하는 마당에 다다르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 한 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서로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게 살기를 맹세합시다.”

하였다. 엄성과는 더욱 서로 마음이 맞아서, 군자가 세상에 나서거나 숨는 것은 시대에 따라야 하는 것임을 살짝 깨우쳤더니, 엄성은 크게 깨달아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두어 해 만에 그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자 반정균이 편지를 써서 덕보에게 부고하였다. 덕보는 애사(哀辭)를 짓고 예물로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쳐 마침내 전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달된 그날 저녁이 바로 대상(大祥 2주기 제사) 날이었다. 제사에 모인 이들은 서호(西湖) 주위 여러 고을 사람들이었는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는 지극한 정성으로 혼령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일렀다. 엄성의 형 과()  이름이다.  가 예물로 보낸 향을 사르고 그 애사를 읽은 뒤 초헌(初獻)을 하였다. 아들 앙() 이름이다.  은 편지를 보내 덕보를 백부(伯父)라 칭하면서 그의 아버지 철교(鐵橋 엄성의 호)의 유집(遺集)을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비로소 받아보게 되었다. 그 문집 속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화가 있었다. 엄성이 민중에 있을 때 병이 위독하였는데도 덕보가 증정한 조선 먹을 꺼내 향내를 맡고 가슴에 얹은 채 죽었다. 마침내 그 먹을 관에 함께 넣었다. 오하(吳下)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특이한 일로 여기어 다투어서 시와 산문을 지었는데, 주문조(朱文藻)라는 이가 편지를 부쳐 와 그 상황을 이야기했다.

! 그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도 이미 비범하기가 마치 옛날의 특이한 사적 같았다. 벗으로서 지성(至性 선량한 천성)을 지닌 이라면 반드시 그 일을 널리 전파하여 비단 이름이 양자강 남쪽 지방에 두루 알려질 뿐만이 아닐 터이니, 구태여 내가 그의 묘지(墓誌)를 짓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을 불후(不朽)하게 할 것이다.

부친의 휘는 역()이니 목사(牧使), 조부의 휘는 용조(龍祚)니 대사간이요, 증조의 휘는 숙()이니 참판이요, 모친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 군수 방()의 따님이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며, 곧 돈녕부 참봉으로 옮겼으나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으로 고쳐서 제수되었다. 사헌부 감찰로 승진되고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 전직되었으며, 태인 현감(泰仁縣監)이 되어 나갔다가 영천 군수로 승진되어, 두어 해를 있다가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따님으로 1 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趙宇喆) · 민치겸(閔致謙) · 유춘주(兪春柱)이다. 그해 12 8일에 청주(淸州) 모 좌()의 벌에 장사 지냈다. ()은 다음과 같다.  명은 원고를 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800여 언()이 벗으로써 시작하여 벗으로써 맺었다. 한 글자도 효성과 우애, 자애와 공경 같은 집안의 바른 행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인륜에 독실했다는 것을 말 밖에서 찾아볼 수 있다.

 

[D-001]삼하(三河) : 하북성(河北省) 삼하현(三河縣)에 속한 고을로, 이곳과 통주(通州)를 거치면 곧 북경에 당도하게 된다.

[D-002]손유의(孫有義) : 거인(擧人)으로, 자를 심재(心栽)라고 하였다.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1766년 음력 3월 초에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계기로, 이후 10여 년간 서신을 통해 교분을 이어 갔다. 간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는 홍대용이 그에게 보낸 편지 6통이 수록되어 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3]몇 년 …… 것이다 : 열하일기 관내정사(關內程史)에 관련 기사가 있다. 1780년 음력 7 30일 연암은 삼하에 있는 자택으로 손유의를 찾아갔으나, 그가 부재중이라 홍대용의 편지와 선물만 전하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연암이 전한 홍대용의 편지가 간정동회우록 여손용주서(與孫蓉洲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편지에서 홍대용은 자신이 연초에 태인 현감(泰仁縣監)에서 경상도 죽령(竹嶺) 남쪽 고을인 영천(榮川)의 군수로 영전(榮轉)된 사실을 전하고, 아울러 그에게 연암을 문장과 품망(品望) 면에서 자신의 외우(畏友)라고 소개하면서 이번에 사행에 나선 연암 편에 이 편지를 부친다고 하였다.

[D-004]오중(吳中) : 항주(杭州)가 있는 절강성(浙江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오하(吳下)라고도 한다.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D-005]시문(詩文) : 운산만첩당집에는 文獻으로 되어 있다.

[D-006]혼의(渾儀) 제기(諸器) :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6 농수각의기지(籠水閣儀器志)에 혼의의 옛 제도를 개량하고 서양의 방법에 정통하여 새롭게 만들었다고 소개한 통천의(統天儀) · 혼상의(渾象儀) · 측관의(測觀儀) · 구고의(句股儀) 등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가리킨다.

[D-007]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 원문은 書狀之行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書狀使燕之行으로 되어 있다.

[D-008]일찍이 …… 만났다 : 홍대용은 1765(영조 41) 동지사의 서장관인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에 갔다. 유리창(琉璃廠)은 골동품 · 서화 · 서적 · 문방구 등을 파는 북경 선무문(宣武門) 밖의 유명한 상가(商街)이다. 그 이듬해 음력 2월 일행 중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과거 응시차 상경한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에서 우연히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홍대용이 간정동(乾淨衕)에 있던 그 두 사람의 숙소로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장시간 필담을 나누었으며, 뒤늦게 상경한 그들의 친구 육비(陸飛)까지 사귀게 되었다. 육비 · 엄성 · 반정균 3인에 대해서는 담헌서 외집 권3 건정록후어(乾淨錄後語)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D-009]전당(錢塘) : 절강성 항주부(杭州府)에 속한 현()이다.

[D-010]그런데도 …… 여겼다 : 엄성과 반정균은 홍대용이 주자학에 정통하다고 하여 그를 이학대유(理學大儒)’라고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3 乾淨衕筆談續 2 23

[D-011]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 : 천인성명은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뜻한다. 고금의 출처대의란 벼슬하거나 은거할 때를 올바르게 판단해서 처신하여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역사적 사례를 뜻한다.

[D-012]그 후 …… 객사하자 : 민중(閩中)은 복건성(福建省)을 이른다. 엄성은 정해년(1767) 봄에 복건성으로 가서 가정 교사를 하다가 학질에 걸려 귀향한 뒤 그해 겨울에 병사하였다. 淸脾錄 卷2 嚴鐵橋

[D-013]애사(哀辭) : 대개 요절한 경우에 짓는 추도사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담헌서 외집 권1에 실린 엄철교에 대한 제문祭嚴鐵橋文을 가리킨다.

[D-014]서호(西湖) : 절강성 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로, 서자호(西子湖) · 전당호(錢塘湖) 등으로도 불린다.

[D-015]아들 …… 되었다 : 엄앙(嚴昻)이 홍대용을 백부라 칭한 것은, 홍대용이 엄성과 결의형제(結義兄弟)하였으며 엄성보다 한 살 위였기 때문이다. 철교(鐵橋)의 유집(遺集)이란 엄성의 벗인 주문조(朱文藻)가 편찬한 소청량실유고(小淸涼室遺稿)를 이른다. 乙丙燕行錄 附錄 소청량실(小淸涼室)은 엄성의 서실 이름이다. 손유의는 이 책과 엄성의 초상화를 맡아 두었다가, 1778년 사행차 북경에 왔다 돌아가던 이덕무 편에 전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67 入燕記下 6 17

[D-016]오하(吳下) :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D-017]주문조(朱文藻) : 호를 낭재(朗齋)라고 하며, 육서(六書)와 금석(金石)에 정통했다. 엄성 · 육비 · 반정균 3인과 홍대용 등 조선 사행 6인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편찬한 일하제금집(日下題襟集)에 서문을 썼다.

[D-018]() ……잃었다 : 과정록 1에는 홍대용이 죽었을 때 연암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뇌사(誄辭)가 소개되어 있다. “서호에서 서로 만난다면, 그대는 날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아노라. 죽어서 입에 구슬 물지 않았으니, 도굴꾼 같은 타락한 선비를 공연히 딱하게 여겼도다.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 이는 다름아닌 홍덕보 묘지명의 상실된 명사(銘辭)로 추측된다. 한편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연암집 산고에는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라고 하여 宜笑舞歌呼’ 5자가 추가된 명사가 있었다고 하며,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열하일기에도 魂去不須 想逢西子湖 口裏不含珠 怊悵詠麥儒라는 명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세상에는 본래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돕느라고 천 냥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의로운 일이라도 한갓 은혜를 베푸는 데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다만 한 고을이나 마을의 협객은 될망정 나아가 온 고장이 선()을 향하도록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치암 최옹이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도운 것과 같은 경우는 그 자신이 의로운 일에 성급해서였다. 남에게 우환이나 상사(喪事)가 있으면 마음이 허탈하여 마치 허기진 사람이 아침을 넘길 수 없듯이 하고, 그 마음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마치 눈에 가시가 날아든 듯 여겨, 마침내는 성급하게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으며,

 

이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는 알리지 않았는가? 내가 혹시 남들에게 다랍게 보였던가?’

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이런 일이 없으면 기뻐하며,

나는 지금 다행히도 먼저 소식을 들었구나!’

하며, 허겁지겁 서두르기를 길 가는 사람이 해 지기 전에 대가듯이 한다. 남을 위해 시집 장가를 보내 준 것이 여러 집이고, 남을 위해 염()하고 장사 지내 준 것이 여러 집이었으니, 이러고 보면 그가 아침저녁으로 솥 씻어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일이다.

반면에 비웃는 자도 있어 말하기를,

 

너무도 하다, ()의 어리석음이여! 남이 달라고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베풀어 주기 때문에, 늘상 남을 급한 상황에서 건져 주어도 이렇다 할 감사도 못 받고 칭찬도 못 듣고 마는 게 아닌가?”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걸 가지고 무얼 어리석다 하는가? 혹시라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늘상 자기 처자나 형제들에게 숨기고 몰래 베푸니, 이야말로 어찌 대단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어리석을 ()’ 자로 옹에게 별호를 붙이니, 옹 또한 그 호를 받아들여 늙어 죽도록 바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잘난 이건 못난 이건 간에 옹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마치 옛일을 이야기하듯 하였으며, 몇 사람들이 앉아서 서로 이야기하다가 곧 크게 웃는 경우는 반드시 옹이 행한 무슨 일 무슨 일에 관한 것이었다.

종가(宗家)의 아우가 젊은 나이에 허랑방탕하여 전답과 가택을 다 잃고나니, 옹은 집을 사서 그의 선령(先靈)을 편안히 모시고 나아가 그를 대신해서 제전(祭田)을 다시 마련하자, 종족(宗族)들이 서로 옹을 말리며,

 

한갓 재물만 허비할 뿐이지 아무 보탬이 안 될 거요.”

하였다. 그러자 옹은 정색을 하면서,

 

제전이 있으면 비록 제사를 못 지내게 된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는 제사 올린 거나 마찬가지요.”

하며, 그를 도와서 가업을 일으키게 하느라 천 냥이 들었다. 종족들이 자기네끼리 몰래 비난하기를,

 

옹은 전에 이미 아무 보탬이 안 되고 그의 허물만 보태 주었는데, 지금 또다시 보태 주니 이 어찌 옹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했는데, 과연 몇 해가 못 가서 재산을 다 말아먹고 말았다. 그래도 또 그에게 천 냥을 주었더니 마침내 가업을 일으키고 착한 선비가 되었다. 옹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고야 이렇게 교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그래도 종가의 아우이기에 망정이요. 옹의 친구인 아무 어른이 어질었는데 일찍 죽자 옹은 그분의 어린애들을 어루만져 길러 주었으니, 이런 일은 옛적에나 들었지 지금 세상에는 보지 못했소이다. 고아가 된 그 아들이 장성해서는 가난하여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의 재산을 마련해 주기 위해 수천 냥을 썼으니 옛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더구나 또 그를 대신해서 돌에 새겨 묘에 비를 세워, 그분의 어진 행실이 사라지지 않게 하였거늘!

아무 성씨인 아무 어른은 옹의 부친의 친구였는데 어진 분으로서 늙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옹은 반드시 새벽에 가서 밤새 안부를 묻고 손수 음식을 살펴 드리며, 또 매달 지급하고 남은 것을 따로 저축하여 세제(歲制)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으니, 옛날에도 또한 옹과 같이 독실하고 후덕한 사람이 있었던가?”

하였다. 혹은 의아해하는 이도 있어 하는 말이,

 

옹이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의로운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심지어 먼 일가붙이들이 전염병에 걸렸을 때에도 반드시 몸소 간호해 주었으니 그런 일도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어찌 먼 일가붙이뿐이겠는가? 오랜 친구가 열병에 걸려 곧 숨이 넘어간다는 말을 듣고, 옹은 손수 약을 달여서는 곧 단번에 땀을 내어 낫게 한 일이 있으며, 그의 종이 병들었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네.”

하였다. 옹은 의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옹이 보살펴 주기만 하면 늘 살아났다. 옹은 이럴 때면 매양 분을 내어 말하기를,

 

한 사람이 전염병에 걸리면 일족이 모두 달아나 피하는 바람에, 병자가 제때 땀을 못 내게 되니 병자가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지금 가만히 그의 행적을 검토해 보면, 한결같이 모두 소학(小學)에 열거된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었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있다 해도 실로 월등하게 뛰어난 것일 터인데, 옹에게는 아침저녁으로 마시는 숭늉이나 국물이요, 좌우에 놓여 있는 옷가지나 그릇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높고 원대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인 줄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대개 그의 자질이 돈후하고 독실하여 겉모습을 엄숙하게 꾸미는 따위는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고례(古禮)를 몹시 좋아하여, 관혼상제의 예식이 시속(時俗)의 눈에는 사뭇 괴이쩍게 보이니, 향리에서는 이로써도 더욱 옹을 어리석게 여겼지만, 옹은 그럴수록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의 담론과 행동을 보면, 예식을 도맡아 하는 가운데 날마다 익힌 게 아닌 것이 없었다.

선산의 묘목(墓木)을 기르기를 어린아이 기르듯 하여, 열매 맺은 잣나무 수만 그루가 묘역을 빙 둘러 있었다. 그리고 객호(客戶)들을 두어 수호하게 하며, 은혜와 신의로써 그들을 어루만지니 모두 서로 타이르며 다짐하기를,

 

이는 효자가 손수 심은 것이니 가지 하나인들 차마 잘라 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 재산이 거만(鉅萬)이었지만, 죽는 날에 미쳐서는 한 냥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옹의 여러 아들들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옹을 자세히 알기로 나 같은 사람이 없다. 그러니 지금 묘 앞의 비를 새기는 데 정분상 글을 지어 주기를 사양할 수 있겠는가?

옹의 휘는 순성(舜星)이요, 자는 경협(景協)이다. 시조인 원()이 고려 때 양천(陽川)에 백()으로 봉해져 그대로 양천 최씨가 되었다. 증조의 휘는 아무인데 증() 집의(執義), 조부의 휘는 아무인데 증 좌승지요, 부친의 휘는 아무인데 증 호조 참판이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나서 모년 모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아무 좌()의 벌에 장사 지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진사(進士)인 진관(鎭寬)과 진함(鎭咸) · 진익(鎭益) · 진겸(鎭謙)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숭산(崧山)에 선영 / 有塋于崇

군자가 봉해진 곳이로세 / 君子攸封

새파랗다 저 나무는 / 有樹如蔥

오립송(五粒松)이 아닌가 / 五粒之松

뉜들 차마 훼손하리 / 誰忍毁傷

그 얼굴을 뵈옵는 듯한데 / 如見其容

잊으려도 잊을 수 있을까 / 俾也可忘

온후하신 치옹 어른을 / 恂恂癡翁

효를 확대하면 충이 되니 / 推孝爲忠

벗에게도 충실했네 / 忠厥友朋

의로운 일 예절에 맞아 / 義行禮中

다 충심에서 우러난 것 / 罔不由衷

명성만이 드넓은 게 아니요 / 匪博厥聲

덕이 실로 몸을 윤택하게 하였네 / 德實潤躬

천 년 뒤에 그 풍모 상상하려거든 / 千載想風

여기 새긴 명을 보시구려 / 視此刻銘

 

 

향리 사람들과 먼 일가붙이들의 입을 빌려, 시원시원하고 의로운 일을 즐기며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돕는 사람을 그려 내었는데, 옆에 있는 듯이 살아 움직인다.

 

 

9층의 누대를 오르면 한 층 한 층 높아질 때마다 곧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고, 동천(洞天)에 들어가면 물은 단지 맑은 원천 하나이건만 매양 한 굽이마다 전에 본 모습과 달라져서, 쏟아져 내리는 것은 폭포가 되고 부딪치는 것은 여울이 되고 멈춘 것은 못이 되며, 비단 무늬처럼 잔물결이 이는 것도 있고, 거문고와 축()과 환패(環珮) 소리가 나는 것도 있는 것과 같다.

나무는 구부러진 것이 싫지 아니하고, 돌은 괴이한 것이 싫지 아니하고, 기슭은 비스듬한 것이 싫지 아니하고, 오솔길은 경사진 것이 싫지 아니하고, 띳집과 대울은 어리비치고 이지러져 가린 것이 싫지 아니하다. 그리고 가끔 밭 가는 사람이나 나무꾼을 마주치게 되면 그들의 여윈 얼굴이 기이하고, 말라서 뼈가 울뚝불뚝 드러난 것이 싫지 아니하다.

 

[C-001]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 연암은 개성 사람으로 자신의 문생(門生)이 된 최진관(崔鎭觀)의 청탁으로, 1789년 가을에 그의 부친 치암 최순성(崔舜星)의 묘갈명을 지어 주고 비석에 새길 글씨까지 직접 써 주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최순성에 대해서는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전()이 있다. 崧陽耆舊傳 卷3 任恤傳 崔舜星

[D-001] …… 있다 : 음식을 곧 끓일 수 있게 솥을 깨끗이 씻어 놓고 기다리듯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는 뜻의 속담이다.

[D-002]마찬가지요 : 원문은 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동문집성 등에는 모두  자로 되어 있다. 의미는 같다.

[D-003]아무 어른 : 동문집성에는 고경항(高敬恒)’이라고 밝혀져 있다. 고경항은 본관이 제주(濟州)이고 자는 의중(義中)으로, 장창복(張昌復)의 문인이었다. 산중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다가 향년 38세로 병사하였다. 崧陽耆舊傳 卷1 學行傳 高敬恒, 3 任恤傳 崔舜星

[D-004]아무 …… 어른 : 동문집성에는 임군 두(林君㞳)’라고 밝혀져 있다. 임두는 본관이 곡성(谷城)이고, 해동악부(海東樂府)를 남긴 저명 시인이자 학자인 임창택(林昌澤)의 조카였다. 崧陽耆舊傳 卷2 文詞傳 林昌澤, 3 任恤傳 崔舜星

[D-005]세제(歲制) : 관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사람이 60세가 되면 죽을 때가 가까우므로 1년에 걸려 관을 미리 만들어 두는 법이라고 한다. 禮記 王制

[D-006]아름다운 …… 행실 : 소학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에 소개된 모범적인 사례들과 흡사했다는 뜻이다.

[D-007]객호(客戶) : 그 고장에 2() 이상 거주하고 있는 호구를 주호(主戶)라고 하고, 타향에서 새로 들어와 사는 호구를 객호라고 한다.

[D-008]() : 고려 말기에 공신들에게 내렸던 봉호(封號)이다.

[D-009]증조의 …… 참판이다 : 선계(先系)에 대한 기술(記述)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최순성의 선조 중에 집의(執義)를 증직받은 이는 증조가 아니라 고조인 천립(天立)이고, 좌승지를 증직받은 이는 조부가 아니라 증조인 일신(日新)이며, 호조 참판을 증직받은 이는 부친이 아니라 조부인 외형(巍衡)이다. 부친인 석찬(錫贊)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연암집 7에 수록된 운봉 현감 최군 묘갈명(雲峯縣監崔君墓碣銘)’은 최순성의 계부(季父)인 최석좌(崔錫佐)의 묘갈명인데, 거기에는 최석좌의 부친이 증 호조 참판, 조부가 증 좌승지로, 선계에 대한 기술이 올바르게 되어 있다. 박철상, 개성(開城)의 진사(進士) 최진관(崔鎭觀)과 연암(燕岩), 문헌과 해석 32, 2005. 10. 참조

[D-010]진관(鎭寬) : 대부분의 이본들과 관련 기록들에는 모두 鎭觀으로 되어 있다.

[D-011]진겸(鎭謙) : 그의 청탁으로 지은 독락재기(獨樂齋記) 연암집 1에 수록되어 있다.

[D-012]숭산(崧山) : 원문의  자는  자와 통한다. 숭산은 개성에 있는 산으로, 송악(松嶽)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 개성을 숭양(崧陽)이라 한다.

[D-013]오립송(五粒松) : 잣나무를 이른다. 잣나무는 잎이 다섯 개씩 모여 나기 때문이다.

[D-014]덕이 …… 하였네 : 대학장구 () 6장에 ()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富潤屋 德潤身고 하였다.

[D-015]환패(環珮) : 허리에 차는 고리 모양의 옥()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어제표충윤음(御製表忠綸音) 한 권에 () 사인 이성택의 집에 내사함內賜故士人李聖擇家이라 제()하고 윗머리에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어인(御印)이 모셔져 있다. 대개 무신년 3월은 바로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무위(武威)를 드날려 난리를 평정한 해와 달이었는데, 위대하신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12(1788)에 그해 그달이 거듭 돌아오자, 성심(聖心)의 감격이 여느 때보다 더하시어 윤음을 널리 선포하여 팔도에 환히 효유하셨다. 이 처사와 같은 이는 평소에 제 공을 말한 바 없었으나, 포상 기록이 서책에 열거되고 존휼(存恤)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랴!

처사의 처음 휘는 성시(聖時)요 자는 집중(執中)이며, 성택(聖擇)은 뒤에 고친 휘이다. 고려 때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가 하빈(河濱)에 봉해짐으로써 그로 인하여 하빈 이씨가 되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휘 책()이 평강현(平康縣)의 지사(知事)가 되었으며, 거창(居昌)에 대대로 살았다. 처사의 고조 때부터 비로소 안의(安義)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호는 농월담(弄月潭)으로, 동춘당(同春堂)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인근 동()에 잠시 거주할 적에 실은 주인 노릇을 했다. 증조의 휘는 아무요, 조부의 휘는 아무이고, 부친의 휘는 만령(萬齡)이다. 모친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참봉 규창(奎昌)의 따님이다.

처사는 숙종 병인년(1686, 숙종 12) 11 2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도 특이한 자질을 지녔더니, 차츰 장성하자 재주와 견식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비록 먼 시골에서 생장하였지만 국조(國朝)의 고사나, 사대부 집안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에 대한 예설(禮說)에 밝고 익숙하여, 원근을 막론하고 찾아와서 질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약관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학문을 닦았는데, 누구보다도 김삼연(金三淵 김창흡(金昌翕)) · 이도암(李陶菴 이재(李縡)) 등 여러 선생에게서 인정을 받았으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봉조하(奉朝賀) 이병상(李秉常)도 모두 그를 국사(國士)로서 허여했고, 정승 조도빈(趙道彬)도 그의 재주와 행실을 들어 조정에 천거한 적이 있었다.

급기야 신축년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드디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산과 늪 사이를 방랑하였다. 영조 4년에 흉적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거사하여 근방의 여러 고을을 연달아 함락시켰는데, 처사를 가장 꺼리어 몹시 급하게 추적하였다. 처사는 곧장 밤중에 도망을 쳐 서울로 빨리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한 필 말을 채찍질하여 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새로 부임하는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였다. 그는 바야흐로 적중(賊中)으로 달려 들어가는 길이었으나 요령을 알지 못하다가, 처사를 만나게 되자 크게 기뻐하여 역적들을 토벌할 것을 몰래 모의하였다. 현에 당도하여 보니 역적들은 이미 처형되었으며 잔당이 바위틈이나 수풀에서 잠시 목숨을 붙이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병마절제도위를 도와 모조리 잡아 베어 죽였다.

역적들이 평정되자, 임금은 이 현에서 원흉이 나온 것을 깊이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그 고을을 혁파하고 그 땅을 거창과 함양(咸陽)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이 두 고을은 모두 이 현의 하류(下流)에 있어, 지난날 농지에 물을 댈 적에는 항상 남아도는 물을 구걸해 갔으며, 산에 가서 나무하고 풀을 벨 때에도 도끼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땅이 두 고을에 종속되고 나자, 공공연히 제방을 터서 물을 빼 가며 대낮에 나무를 베고 남의 묘목(墓木)까지 모조리 찍어 가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입을 다물고 감히 따지지도 못했으며, 곧 입술만 달싹거려도 도리어 역적이라 매도하였다. 부역에 종사하는 아전과 관하인들은 종놈처럼 혹사당하며, 장정을 모아 군적(軍籍)에 올릴 때 사족(士族)까지 그 대상으로 삼으니, 그 고통이 뼈에 사무쳤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고을을 복구할 것을 원하고 있었으나 그 일을 맡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현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와서 처사에게 청하니, 처사는 당장에 일어나서 서울로 올라가, 만 자가 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고 5000호의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궐 문 앞을 지키기 여러 해였으나, 담당자들은 아무도 안의의 일로써 임금께 아뢴 자가 없었으며, 그 땅을 추하게 보아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는 듯이 여겼다. 그러기에 경상도에서 온 자라면 대면하여 말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여관을 찾아 헤매며 몹시 고생하고 초췌해져도 발을 들여놓을 곳조차 없었다.

처사는 일찍이 정승 김재로(金在魯)와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이렇게 설득하였다.

 

저희 고을의 산천 귀신이 어리석고 영험이 없어 극악무도한 종자를 낳은 것이 역적 정희량(鄭希亮)으로 변하였으니, 성황(城隍)에 벌이 미쳐 귀신이 굶주림을 당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무릇 역적이 나면 그자의 집터를 더러운 웅덩이로 만들어 풀도 돋지 못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고을로 말하면 마시는 우물도 그대로 있고 모여 사는 부락도 여전하지만, 마침내 그 관청 소재지를 없애고 그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었으니, 이는 100리 주위를 빙 둘러 웅덩이나 못으로 만든 셈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곡물로 바치던 세금과 베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토산물로 못 하게 하여 나라의 정세(正稅)를 축내게 하였으니, 후토씨(后土氏)가 무슨 죄이며, 구룡씨(句龍氏)가 무슨 죄입니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께 석전제(釋奠祭)를 올리자 해도 주재자가 없고 제사에 바칠 짐승도 이미 노쇠해 버렸으며, 글 읽고 공부하던 곳도 잡초만 무성하여 자제들로 하여금 임금의 교화 속에서 자립할 수도 없게 하였습니다. 사직이 폐기되어 제사를 못 지내는 것도 오히려 원통한데, 더구나 또 학교까지 죄를 얻어 폐기하게 된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어서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10여 건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감개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조가(朝歌)와 승모(勝母)는 땅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만 군자는 그래도 그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향이 그립고 양잠과 길쌈이 소중하고 조상 무덤들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거주하는 사람은 옮겨 가기를 생각하고 옮겨 간 사람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음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모두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스스로 죄악에서 탈피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그곳에 더 이상 사는 사람이 없는 상태를 보게 될 것이니, 저는 이 땅이 마침내 도깨비 떼가 들끓고 여우나 독사가 득실대는 곳이 되고 말까 두렵습니다.”

이에 김공(金公)은 크게 느끼고 깨달아,

 

그렇겠소! 마땅히 그대를 위해 힘껏 아뢰어 보리다.”

하고서, 다음 날 임금을 알현하고 안의를 폐치(廢置)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극력 말하였는데, 모두 처사가 조목조목 열거한 바와 같았다. 임금은 측은히 여겨, 마침내 명을 내려 그 고을을 회복하고 원을 예전같이 두도록 하였다. 고을이 혁파된 지 무릇 9년 만에 복구되니, 이에 현사(縣社)와 현직(縣稷)의 사방 경내가 정비되고 아전과 관하인으로 다른 고을에 나뉘어 소속된 자들도 모두 옛 직책으로 돌아왔으며, 성황(城隍)과 족려(族厲)의 귀신도 다 제사를 받아먹게 되었다.

처사는 임술년(1742, 영조 18) 9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그해 9월 모일에 현 남쪽 엄전동(嚴田洞) 오좌(午坐)의 벌에 안장되었다. 초취(初娶)는 정씨(鄭氏)로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인데, 1남 정전(廷銓)을 낳았으나 그 아들은 일찍 죽었고, 1녀는 선비 아무에게 출가했다. 후취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1남 택전(宅銓)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지금 나이 여든 살이다. 임금이 널리 국중에 은혜를 베풀어 선비나 평민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작위를 내렸으므로 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계급을 얻었다. 두 딸은 사인(士人) 아무와 아무에게 출가했다. 택전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종한(宗漢)은 정전의 양자가 되었고, 차남은 천한(天漢)이며, 손자는 아무와 아무이다.

! 예로부터 충의(忠義)의 선비치고 어찌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일개 현을 미루어서 천하와 국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그 제단의 제도에 등급의 차별이 있고 제물의 수효에 더하고 덜함은 있을망정, 신령과 사람이 의지하는 대상인 점에서는 원래 다름이 없다. 진실로 이미 없어진 뒤에 다시 존속하도록 도모할 수 있었다면, 어찌 혹시라도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이라 해서 그의 충신(忠信)을 하찮게 볼 수 있겠는가. ()은 다음과 같다.

 

저 옛날 무신년에 / 粵昔戊申

안음(安陰 안의(安義)의 옛 이름) 사직 없어졌네 / 安陰社亡

역적 나온 까닭으로 / 凶渠之故

그 태생지 증오한 탓 / 癉厥胎鄕

땅덩이가 더럽혀지고 말았으니 / 土壤遂醜

백성들 이 무슨 재앙인가 / 凡民何殃

신령과 사람 모두 의지할 곳 없이 / 人神無依

아홉 해가 바뀌었도다 / 九換星霜

임금께서 널리 은혜 내리사 / 王降沛澤

피비린내 단번에 씻어 내니 / 一滌腥衁

산은 높고 물은 맑고 / 山高水淸

초목조차 빛 되찾았네 / 草樹回光

사직단 고쳐 쌓아 / 靈壇改築

하늘 양기(陽氣) 다시 받고 / 復受天陽

글 읽는 노래 드높아라 / 絃歌增蔚

석전(釋奠) 제물 향기롭네 / 亦奉苾薌

이 누구의 공이런가 / 云誰之功

처사 집중(執中) 그 아니냐 / 處士執中

태수가 명() 지으니 / 太守作銘

참여만도 영광일레 / 亦與有榮

 

 

[D-001]어제표충윤음(御製表忠綸音) : 정조 12(1788)에 무신란(戊申亂) 평정 1주갑(周甲)을 맞아 당시의 공신들과 그 자손에게 내린 윤음을 편찬한 것으로, 1책이다. 그중에 제도계문포상인(諸道啓聞褒賞人)’이라 하여 포상자 명단이 실려 있다.

[D-002]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  : 영조 4(1728)에 이인좌(李麟佐) · 정희량(鄭希亮) 등이 일으킨 난을 평정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03]존휼(存恤)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니 : 존휼은 방문하여 문안하고 음식을 하사하는 것을 말한다. 정조실록 12 3 23일 조에, 경상 감사의 장계에 따라 무신란 때 공을 세운 안의(安義) 선비 이성택(李聖擇) 등을 표창하고 그 자손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도록 명하였다고 했다.

[D-004]평강현(平康縣)의 지사(知事) : 평강현은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이다. 지사는 조선 초기에 현을 맡아 다스리던 장관(長官)으로, 나중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D-005]동춘당(同春堂) …… 했다 : 송준길(宋浚吉 : 1606~1672)은 호란(胡亂)이 나자 1637년 초에 피난차 안의현에 내려와 원학동(猿鶴洞) 1년 가까이 거주한 적이 있다. 同春堂續集 卷6 附錄1 年譜 그 당시 이웃 마을에 살았던 이성택의 고조가 실질적으로는 송준길을 위해 숙식을 제공했던 듯하다.

[D-006]민진원(閔鎭遠) : 1664~1736. 송준길의 외손으로 노론의 영수로 활약했다.

[D-007]이병상(李秉常) : 1676~1748. 소론 배척에 앞장섰으며,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봉조하(奉朝賀)는 종 2 품 이상의 퇴임 관리에게 예우 차원에서 주는 벼슬이다.

[D-008]조도빈(趙道彬) : 1665~1729. 우의정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힘썼다.

[D-009]신축년의 무옥(誣獄) : 1721년 경종(景宗)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옥사로, 그해인 신축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임인년(1722)까지 이어졌다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경종이 후사가 없고 병약하자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사대신이 주장하여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소론의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 등이 반대하고 목호룡(睦虎龍)이 사대신을 역모로 무고하여, 사대신 이하 노론 일파들이 대거 실각한 사건을 말한다.

[D-010]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  6 품 무관직으로 지방 수령이 겸임했다. 안의 현감은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D-011]5000 : 연암제각기에는 4000호로 되어 있다.

[D-012]김재로(金在魯) : 1682~1729. 영의정을 지냈다. 노론의 선봉장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도 공로가 컸다.

[D-013]후토씨(后土氏) …… 입니까 : 후토씨와 구룡씨는 모두 토지를 맡아 다스리는 신을 이른다.

[D-014]선성(先聖)과 선사(先師)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무릇 처음 학교를 세웠을 때에는 반드시 선성과 선사께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고 하였다. 선성과 선사로 제향(祭享)된 인물들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다. 연암제각기(燕巖諸閣記)에 수록된 이본 중의 한 대목으로 보아, 여기에서의 선성은 공자(孔子)를 가리키고 선사는 안회(顔回) 이하 공자의 제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D-015]조가(朝歌) …… 않았습니다 : 음악을 금기시했던 묵자(墨子)는 고을 이름이 조가(朝歌)라는 것을 알고는 수레를 돌렸으며, 효자로 유명한 증자(曾子)는 승모(勝母)라는 이름의 고을을 만나자 그 고을에 들어가지 않았다.

[D-016]현사(縣社)와 현직(縣稷) : 각각 현의 토신(土神)을 모신 곳과 곡신(穀神)을 모신 곳을 말한다.

[D-017]사방 경내가 정비되고 : 연암제각기에는 그다음에 공자로부터 안회(顔回)와 증삼(曾參) 이하가 모두 그 위판(位版)을 복구하였다.自孔子顔曾以下 皆復其位矣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다.

[D-018]족려(族厲) : 후사가 끊긴 대부(大夫)의 신령을 이른다. 禮記 祭法

[D-019]초취(初娶) …… 후손인데 : 원문은 初娶鄭文獻公後인데, 중편연암집이나 여한십가문초에는 初娶鄭氏로만 되어 있다. 양자를 절충하여 初娶鄭氏 文獻公後가 되어야 문리가 순탄해진다.

[D-020]임금이 …… 얻었다 : 1794년 정조가 자신의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나이 일흔 이상 된 전국의 노인들에게 가선(嘉善) · 통정(通政) 등의 작위를 내리기로 하고 그 대상자를 보고하도록 하여 안의현에서도 보고를 올려 50여 명이 그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21]사직을 ……  : 원문은 社稷’ 2자뿐으로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여한십가문초 安社稷으로 되어 있어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2]어찌 …… 있겠는가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는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사람이 있을 터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라고 하였다.

[D-023]하늘 …… 받고 : 사직단은 하늘의 양기를 받기 위해 지붕을 만들지 않는 법이다. 禮記 郊特牲

[D-024]태수 : 안의 현감인 연암 자신을 가리킨다.

[D-025]참여만도 영광일레 : 연암제각기에는 이 아래에 從縣社廢興處 鋪述感慨 文氣菀然 凡爲人作遺事而可備一縣一國廢興沿革之故實者 必一縣一國磊落奇偉之士 然幾許不爲世間惡筆所抹殺奄奄無生意哉 處士不幸爲一縣之士 亦幸而得此文 足以不朽千古라는 평어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옛적에 대도(大道)가 행해졌을 때에는 천하의 자식된 자치고 누구나 안색이 부드럽지 않은 자 없고, 그 언성이 즐겁지 않은 자 없고, 그 기()가 다소곳하지 않은 자 없고, 그 용모가 온순하지 않은 자 없고, 부모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부지런히 하지 않음이 없고, 부모의 봉양에는 가까이 나아가지 않음이 없고, 부모의 상사(喪事)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는 천하에 효자가 없었으니, 효자가 없었던 것은 효자 아닌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어버이 섬기기를 증자처럼 하면 된다.”

하였다. 이는 증자의 어버이 섬김이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할 직분에 불과해서, 굳이 놀라며 이상하게 여기거나 크게 탄식하며 칭찬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무릇 크게 탄식하여 칭찬하기를,

 

효자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한다면, ‘이런 사람이란 칭찬을 받는 그는 진실로 장차 이 효자라는 명칭에다가 자신의 고통을 감출 것이니, 이는 비단 이런 사람의 불행일 뿐만이 아니라 곧 천하의 불행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당세에 특이한 존재로 만들어 놓으려 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사람이 천리(天理)의 극치에 직분을 다하는 동안, 그 간절하고 은밀한 사정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능히 살피지 못하는 점이 있으므로, 군자가 부득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교훈을 베풀어 천하와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는 것이다.

! 후세에 와서는 효자의 정문(旌門)이 어찌 그리도 자주 세워지는 것일까? 나는 효자의 여막(廬幕)을 지날 때마다 송구스러워 발이 머뭇거려지면서 효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증() 지평(持平) 예군(芮君) 같은 이는 어째서 칭찬하는 것인가?

군의 휘는 귀주(歸周), 자는 양경(讓卿)이니, 계통은 주() 나라 사도(司徒) 예백만(芮伯萬)으로부터 나왔다. 휘 낙전(樂全)이 고려 때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의 관직을 지내고, 비로소 의흥(義興) 고을 부계(缶溪)로 본관을 삼았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 휘 난()은 예조 참의요, 휘 사문(思文)은 병조 참판이요, 휘 승석(承錫)은 이조 참의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이르고, 휘 충년(忠年)은 경주 부윤(慶州府尹)인데, 이상은 모두 문과 출신이다. 고조의 휘는 경적(景績)으로 봉사(奉事 중앙 관아의 종 8 품 벼슬), 증조의 휘는 응선(應善)이요, 조부의 휘는 귀련(貴連)이요, 부친의 휘는 복림(福林)이다. 모친은 옥천 이씨(沃川李氏) 종신(宗信)의 따님이다.

군은 숭정(崇禎) 기묘년(1639, 인조 17) 모월 모일에 상주(尙州) 회룡리(回龍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차분하고 얌전하여 같은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며, 같은 군()의 통례(通禮) 이원규(李元圭)에게 글을 배웠다.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행하며, 영달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위해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당도하여, 장차 시험장에 들어가려다가 통례의 부음을 듣고서 그날로 돌아와 상복을 입었다. 드디어 은거하여 뜻을 높이 가지며, 금산(金山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금산동)의 북쪽에 서실을 짓고 그 거처를 모초(慕初)’라 이름 지었다. 경전(經傳)을 구명(究明)하고 산수(山水) 속에서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 세속의 재미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당연히 힘써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충성과 신의와 학문이요, 당연히 경계해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여색과 싸움과 이득이다.人之所當勉者三 忠信學 所當戒者三 色鬪得

하고 손수 써서 스스로 좌우명으로 삼았다. 또 말하기를,

 

남들 말이 아무가 어질다 하면, 그 부모들은 아들이 어질지 못할까 하여 항상 일깨워 주고, 부모가 내 자식은 효자다 하면 그 아들은 불효할까 하여 항상 두려워한다면 그 가도(家道)는 대체로 괜찮다 할 것이다.”

하였다. 또 글을 지어 아들들을 훈계했는데, 그 제목은 모사(慕思)’, ‘무은(無隱)’ 등이었으니 모두가 실학(實學 실천을 중시하는 참학문)이었다.

군은 숙종 무자년(1708, 숙종 34) 모월 모일에 죽었다. 모월 모일에 감문산(甘文山) 북쪽 해좌(亥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상산 김씨(商山金氏) 이명(以鳴)의 따님으로 3 2녀를 낳았다.

군이 죽은 뒤 수십 년에 그 고장 인사들이 군을 지극한 효자라 칭송하며 마땅히 표창할 만하다고 하여, 계유년(1753, 영조 29)에 감사를 통해서 임금께 사뢰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5 품 벼슬)이란 증직이 내려졌다.

그 증손 아무가 현 고부 군수(古阜郡守) 홍원섭(洪元燮)의 서한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 대제학 남공 유용(南公有容), 증 대제학 이공 진형(李公鎭衡), 규장각 직제학 심공 염조(沈公念祖)가 모두 글을 지어 그의 효성에 감응한 특이한 사적을 기록했으며, () 참찬 유공 최기(兪公最基)는 군의 묘지(墓誌)를 지어 그 언행을 자세히 차례로 서술했으니, 모두 징빙이 될 만하다.

대개 군의 어버이 섬김은 제 몸을 제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젖 먹을 때로부터 장례와 제사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고 공경하고 예법을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친척들이 다 감화되었으며, 심지어 신명(神明)에게 통하고 조수(鳥獸)까지도 느끼게 하였다. 이 점을 들어 온 고을에서는 지극한 효자라고 군을 칭송하게 되었으나, 군이 스스로 마음 갖는 것으로 말하면, ‘나는 자식된 직책에 있어 그 분수를 다하지 못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어느 겨를에 감히 어버이를 잘 섬겼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덩달아 대중에게 외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효자다, 효자야!’ 한다면, 역시 증자가 어버이를 섬겼던 의리와는 다르다 할 것이다. ()은 다음과 같다.

 

대개 소인이 부모 사랑하는 일은 있어도 / 蓋有小人而愛親

군자가 제 몸 제 것으로 여겼단 말 못 들었소 / 未聞君子而私其身

부모에게서 받은 살 한 점 터럭 한 올 / 一膚一髮

반 발자국 순식간이라도 / 跬步瞬息

빗나가면 방향 잃고 / 橫之則無方

곧추세우면 끝이 없네 / 竪之則無極

눈 속에 죽순 돋고 / 筍可雪抽

얼음물에 잉어 뛰니 / 鯉可氷躍

혹시라도 마지못해 한다면 / 有或俛黽

신명(神明)이 순응 않네 / 神不爾若

저 사나운 호랑이가 / 彼䯱髵者

사슴 물어 바쳐 주니 / 含鹿來効

남들은 이적(異蹟)이라 칭송하지만 / 人所稱異

그대에겐 어찌 여한(餘恨)이 없으리오 / 在君何恔

효도란 말 들먹이어 / 毋言其孝

그 마음을 아프게 마소 / 以戚其心

시로써 명()을 새기노니 / 我刻銘詩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잠계(箴戒)로 삼으소 / 同好爲箴

 

 

[C-001] …… 묘갈명 : 예귀주(芮歸周) 9세손 예종선(芮鍾璿)이 편한 모초재실기(慕初齋實紀) 1에는 묘지명(墓誌銘)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약간의 자구 차이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본문 중에 묘갈명을 청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원래 묘갈명으로 받았던 글을 묘지명으로 바꾸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모초재실기에는 정종로(鄭宗魯)가 지은 별도의 묘갈명과 유최기(兪最基)가 지은 별도의 묘지(墓誌)가 있다. 또한 모초재실기에 실린 연암의 글 말미에는 聖上十六年壬子月日 通訓大夫安義縣監潘南朴趾源撰이라고 명기(明記)되어 있어, 이 글이 179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D-001]그 용모가 …… 없고 : 예기 제의(祭義)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효자는 반드시 부드러운 기()를 지니고, 부드러운 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즐거운 안색을 하고, 즐거운 안색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온순한 용모를 갖춘다.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고 하였다.

[D-002]부모에 …… 없고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부모를 섬길 때에는 좌우에 가까이 나아가 봉양하며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죽을 지경이 되도록 힘든 일에 부지런히 종사한다.左右就養無方 服勤至死고 하였다.

[D-003]부모의 …… 없었다 : 논어 자장(子張)에 자유(子游)가 말하기를 ()은 슬픔을 극진히 하는 데 그칠 따름이다.喪致乎哀而止라고 하였다.

[D-004]어버이 …… 된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말이다. 증자가 그의 부친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었으며, 남에게 음식을 주기 좋아하는 부친을 위해 상을 치울 때에도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지 여쭈었고,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증자의 아들은 증자를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기는 했으나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지 여쭙지 않았고 남은 음식이 있어도 그것을 나중에 또 내놓을 속셈으로 없다고 답했다. 맹자는 증자의 아들처럼 하는 것은 부모의 몸만 봉양하는 것養口體이요, 증자처럼 해야 그 마음을 봉양하는 것養志이라고 하면서, 위와 같이 말하였다.

[D-005]천리(天理)의 극치 : ()를 가리킨다.

[D-006]예백만(芮伯萬) : 춘추 시대 예국(芮國)의 군주伯爵, 성은 희()요 이름이 만()이다. 春秋左氏傳 桓公3 그 선조인 예백(芮伯)이 주() 성왕(成王) 때 육경(六卿)의 하나인 사도(司徒)가 되었다. 書經 顧命 예백의 후예들이 나라 이름으로써 성씨를 삼았다.

[D-007]경적(景績) : 모초재실기 중의 의흥예씨세계도(義興芮氏世系圖)와 연암이 지은 묘지명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관련 기록에는 대적(大績)’으로 되어 있다.

[D-008]통례(通禮) 이원규(李元圭) : 통례는 궁중 의식을 관장하는 통례원(通禮院)의 정 3 품 벼슬이다. 이원규의 호는 서곡(鋤谷)이다.

[D-009]산수(山水) : 원문은 山林으로 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이본에 따라 山水로 고쳐 번역하였다.

[D-010]세속의 재미 : 원문은 世味인데, 이는 공명을 이루고 벼슬하고 싶은 욕심을 이른다.

[D-011]손수 …… 삼았다 : 원문은 手書以自警인데, 모초재실기 중의 유최기(兪最基)가 지은 묘지(墓誌)’에는 手書二十字以警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최기가 연암과 똑같이 인용한 좌우명은 모두 18자로, ‘所當戒者 人之所當戒者로 되어야 20자가 된다. 모초재실기 1 잡저(雜著) 손수 20자를 써서 좌우명을 삼다.手書二十字以警란 제목의 글이 있으나, 내용은 판이하다.

[D-012]남들 …… 것이다 : 모초재실기 1 잡저(雜著) 자도(自道)’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D-013]모사(慕思) : 원문은 思慕로 되어 있으나. 모초재실기 1 잡저에는 제목이 慕思로 되어 있으며, 돌아간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이다.

[D-014]무은(無隱) : 모초재실기 1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숨기면 허물을 고칠 수 없게 되고 악을 없앨 수 없게 된다.隱則過不至改 惡不至銷고 하면서, 오륜의 실천에 있어서 숨김 없음無隱의 공덕을 예찬한 글이다.

[D-015]감문산(甘文山) …… 지냈다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산이다. 이 부분이 모초재실기에는 初葬甘文山 後移窆于回龍里로 되어 있는데, 이는 후손이 나중에 고친 듯하다.

[D-016]아무 : 모초재실기에는 수겸(秀兼)’으로 되어 있다.

[D-017]홍원섭(洪元燮) : 1744~1807. 자는 태화(太和), 호는 태호(太湖),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충주 목사를 지냈으며 고문(古文)을 잘 지었다. 연암과 친교가 있었다. 연암집 4에 그의 비성아집(秘省雅集) ()에 차운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D-018]대제학 남공 유용(南公有容) : 모초재실기에는 參判洪公梓로 되어 있다. 실제로 모초재실기에는 남유용의 글이 없으며, 홍재(洪梓)의 글만 있다. 慕初齋實紀 卷1 孝行帖追錄

[D-019]심공 염조(沈公念祖) : 모초재실기에는 그다음에 今大提學吳公載純이 추가되어 있다.  모초재실기에는 심염조의 글은 없고, 오재순과 이진형의 글만 있다. 慕初齋實紀 卷2 孝行帖追敍

[D-020] …… 하였다 : 모초재실기에 의하면 예귀주는 세 살 때부터 이미 부모를 경애할 줄 알아 젖을 먹을 때에도 무릎을 꿇고 젖을 빨아 먹었다고 한다. 부모를 위해 노루 고기를 구했더니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 놓기도 하고, 꿩 고기를 구했더니 꿩이 스스로 날아왔다고 한다.

[D-021]증자가 …… 의리 : 연상각집에는 맹자가 증자에 대해서 효라고 칭찬했던 의리孟子所嘗稱孝於曾氏之義라 되어 있다.

[D-022]반 발자국 순식간이라도 : 모초재실기 1 무은(無隱)에서 한순간도 간사하게 꾸미는 태도一息私僞之態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D-023] …… 뛰니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소개된 효자 맹종(孟宗)과 왕상(王祥)의 고사를 말한다. 맹종은 오() 나라 사람으로 모친을 위해 죽순을 구했더니 겨울인데도 죽순이 돋았다고 하며, 왕상은 진() 나라 사람으로 계모를 위해 생선을 구하고자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갔더니 잉어가 뛰어올랐다고 한다.

[D-024]그대에겐 …… 없으리오 : 부모에 대한 효를 다했다고 후련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좋은 목재로 관곽(棺槨)을 두텁게 만들어 죽은 이의 피부에 흙이 닿지 않게 한다면 사람 마음에 어찌 후련하지 않겠느냐.於人心 獨無恔乎고 하였다.

[D-025]뜻을 …… 삼으소 : 모초재실기에는 이 다음에 聖上十六年壬子月日 通訓大夫安義縣監潘南朴趾源撰이란 내용이 추가되어 있고, 운산만첩당집에는 이 뒤에 또 老子云 六親不和 有孝慈라는 평어가 추가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왕씨(王氏)가 고려 시대에는 다 공족(公族 왕족)이었는데, 나라가 바뀌자 자기네끼리 서로 공포에 떨어 성()을 변경하고 도피하여 숨어 살았으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옥씨(玉氏), 금씨(琴氏), 마씨(馬氏), 전씨(全氏), 전씨(田氏) 등 다섯 성에 왕씨들이 많이 숨어들었다. 우연히 들에서 서로 만나면 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러 주고받기를,

 

()을 찬 저 사람은 근본을 잊지 않네.’

거문고는 있어도 줄이 없으니 벙어리나 마찬가지네.’

꼴 아닌 곡식으로 저 말에겐 밥을 먹이네.’

 사이에 엎디어서 달갑게 남 밑에 사네.’

하였다. 이는 대개 두려움으로 움츠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은어(隱語)를 만들어 서로 알아차리도록 한 것이라 한다.

우리 왕조에서 참봉이란 관직을 만들어 왕씨를 찾아서 마전(麻田)에 있는 왕씨는 숭의전(崇義殿)을 받들게 하고, 개성(開城)에 있는 왕씨는 현릉(顯陵)을 받들게 하였으니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들이었다. ()는 아무, ()는 아무가 있는데 그 증조 휘 아무, 조부 휘 아무, 부친 휘 아무로부터 군()에 이르기까지 4대를 연달아 모두 현릉 참봉이 되었다. 모친은 울산 박씨(蔚山朴氏) 아무의 따님이다.

군은 숙종 병진년(1676, 숙종 2)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겉으로는 겸손하여 몸 둘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능히 사물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실오라기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임금이 선죽교(善竹橋)에 거둥하여 어필(御筆)로써 고려 충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를 기려,

 

일월(日月)같이 밝은 충성 만고에 뻗치리니 / 日月精忠亘萬古

태산같이 높은 절개 포은(圃隱) 선생이로다 / 太山高節圃隱公

 

라 쓰고, 담당자에게 명하여 돌에 새겨 비()를 만들어 다리 입구에 세우게 하였다. 군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종족(宗族)을 거느리고 날마다 비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빗돌을 받치는 귀부(龜趺)가 완성되자 이를 끌어당기는 자가 거의 만 명이었으나, 너무도 무거워서 까딱할 수가 없었다. 비를 세울 날짜는 정해져 있어, 담당자는 그 시기에 대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군이 웃통을 벗고 밧줄을 잡아 호야!’ 하고 한 번 끌어당기자 대중들의 힘이 일제히 솟아나, 돌이 가기를 물 흐르듯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담력과 용맹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장차 비각(碑閣)을 건립할 양으로 주춧돌을 고궁의 터에서 캐어 오려 하자 군은 강개한 어조로 말하기를,

 

이 역사(役事)가 누구를 표창하기 위한 것인데 하필이면 고려 고궁의 대()를 헐어서 한단 말인가!”

하니, 담당자는 말을 못 하고 한참 있다가 탄식하면서,

 

저 사람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다른 곳에서 주춧돌을 가져왔다.

고려 왕릉의 제사는 세월이 오래되자 해이해져서, 석물(石物)이 이지러지고, 술 담는 제기(祭器) 등속이 깨지고 금이 갔으며, 겉에 새겨진 갖가지 무늬들이 마멸되어 선명하지 못하였다. 군은 개성부의 유수(留守)에게 간청하고 또 예조에 신고하여, 자리에 가선을 두르고 안석을 원래대로 했으며, 서직(黍稷) 담는 제기에 장식을 하고, 제물을 올리고 술을 땅에 붓고 일어났다가 엎드렸다 하는 것을 모두 의식에 맞게 하였다.

집안이 처음에는 몹시 가난했으나 군이 고생을 거듭하여 푼푼이 모으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주린 배도 견디곤 하여, 늘그막에는 살림이 윤택하였으며 자손들을 잘 깨우치고 이끌어서, 크게 재산을 이루어 향리에서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병인년(1746, 영조 22) 모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83세이다. 개성부의 남쪽 봉명산(鳳鳴山) 동녘 기슭 경좌(庚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단양 우씨(丹陽禹氏) 아무의 따님인데, 슬하의 아들은 아무요, 두 딸은 선비 아무와 아무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다섯인데 맏손자 아무는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전임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그다음 손자 아무는 진사(進士), 또 그다음 손자 아무도 진사요, 나머지 손자들은 어리다. ()은 다음과 같다.  명은 원고를 잃었다. 

 

 

[C-001]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 운산만첩당집의 목차에는 현릉 참봉(顯陵參奉) 왕군 묘갈명으로 되어 있고,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여릉 참봉(麗陵參奉) 왕군 묘갈명으로 되어 있다. 후자는 대본에 비해 간략하며 자구의 차이가 적지 않아 초기작으로 추정되지만, 명사(銘辭)를 갖추고 있다.

[D-001]공족(公族)이었는데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이 다음에 本其所自出이라는 말이 더 있다.

[D-002]나라가 바뀌자 : 원문은 鼎革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革除'로 되어 있다.

[D-003]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러 : 원문은 行歌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04]() …… 않네 : 예기 옥조(玉藻)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옥을 찼다.古之君子必佩玉고 하였다. 여기서의 군자(君子)는 왕이나 귀족을 뜻한다.

[D-005]남 밑 :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다는 말로서, 사람 인() 아래에 임금 왕()이 있는 전씨(全氏)’ 성을 가리킨다.

[D-006]대개 …… 만들어 : 원문은 蓋不能無畏約 爲隱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久畏約 故爲隱으로 되어 있다.

[D-007]왕씨를 찾아서 : 원문은 求王氏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求王氏後로 되어 있다.

[D-008]숭의전(崇義殿) : 조선 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과 일곱 임금, 즉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1397(태조 6)에 경기도 마전현(麻田縣)에 왕건의 묘()를 세운 뒤, 1399(정종 1)에는 고려 태조와 일곱 임금을 제사 지내고, 1542(문종 2)에는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D-009]현릉(顯陵) : 고려 태조 왕건의 능으로 개풍군(開豐郡)에 있다.

[D-010]모두 …… 후손들이었다 : 원문은 皆太祖後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獨皆太祖後로 되어 있다.

[D-011]() …… 있는데 : 원문은 有諱某字某로 되어 있으나, 그러면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돌출한 셈이 되어 문리가 순탄하지 않다. 아마 초서로  자가  자와 유사하므로, ‘ 자를  자로 잘못 판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의 휘는 아무, 자는 아무인데로 번역되어야 한다.

[D-012] …… 되었다 : 이 부분이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여릉 참봉이다. 부친의 휘는 아무인데 급제하였고, 조부의 휘는 아무이다.麗陵參奉 考諱某 及第 祖諱某라고 되어 있다.

[D-013] …… 같지만 : 원문은 無所措躬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4]사물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 원문은 綜理事物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綜密投會로 되어 있다.

[D-015]임금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영종(英宗)’으로 되어 있다. 영조(英祖)를 가리킨다. 1740(영조 16) 9월에 영조가 개성에 거둥하여 과거를 열고 성균관에서 알성례(謁聖禮)를 행한 후 선죽교(善竹橋)에 정몽주(鄭夢周)를 추숭하는 비를 세우게 하였다.

[D-016]어필(御筆)로써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단지 손수 글을 써서 돌에 새겼다.手書刻石라고만 되어 있다.

[D-017]장차 …… 하자 : 원문은 將建閣 採礎故宮之墟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有司將建閣 採礎麗墟로 되어 있다.

[D-018]하필이면 …… 말인가 : 원문은 而壤麗氏臺爲哉인데, 운산만첩당집 하풍죽로당집에는 而壤麗氏臺爲閣哉로 되어 있고,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壤麗氏臺爲悅者乎로 되어 있다. ‘고려 고궁의 대()’란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는 만월대(滿月臺)를 이른다.

[D-019]탄식하면서 : 원문은 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20]세월이 오래되자 해이해져서 : 원문은 歲久弛墮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吏滋不虔으로 되어 있다.

[D-021]예조 : 원문은 秩宗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禮曹로 되어 있다.

[D-022]자리에 …… 하였다 : 서경 고명(顧命)에 천자가 죽으면 궁중 여러 곳에 가선을 두른 자리를 깔며 안석은 생시와 같이 놓아둔다고 하였다. 원문의 은 자리의 테두리를 천으로 둘러 꾸민 것을 말하고, 안석을 생시와 같이 놓아두는 것을 잉궤(仍几)’라 한다. 주례 춘관(春官) 사궤연(司几筵)에도 무릇 길사(吉事)에는 안석을 새로 바꾸고 흉사(凶事)에는 안석을 그대로 쓴다.凶事仍几고 하였다. 이 부분이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罍雲尊彪 席几純仍 式秩式威 昻頫愀喜로 되어 있다.

[D-023]집안이 …… 가난했으나 : 원문은 家初赤貧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家赤貧으로 되어 있다.

[D-024]군이 …… 모으고 : 원문은 君積苦錙銖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徒手無絲髮綠 能積苦錙銖로 되어 있다.

[D-025]주린 …… 하여 : 원문은 貶腹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6]윤택하였으며 : 원문은 阜潤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稍潤則으로 되어 있다.

[D-027]병인년 …… 83세이다 : 착오가 있는 듯하다. 생년이 숙종 병진년(1676)이므로, 향년이 83세이면 몰년은 영조 34(1758) 무인년이 되어야 옳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병인년에 합치되도록 향년이 ‘71로 되어 있다.

[D-028]손자는 다섯인데 : 원문은 孫五人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有孫五人으로 되어 있다.

[D-029]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 의영고는 호조(戶曹) 소속으로 궁중에서 쓰는 각종 기름과 조미료 등 식품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관청이다. 주부는 종 6 품 벼슬이다.

[D-030]() …… 잃었다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티끌 모아 태산 같은 항산(恒産) 이루었으되, 누가 알리 그분이 항덕(恒德)도 지녔음을. 덕에는 크고 작음이 없나니, 자손에게 남긴 가업 항상 변함없으리.聚塵成泰恒 孰知厥德恒 德無大小然 遺厥嗣業恒라는 명사(銘辭)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오호라! 청 나라 사람들이 처음 그 국호(國號)를 세우면서, 우리나라 사신을 겁박하여 잡아다가 기필코 한 번 그 뜰에 꿇리고서 큰 절을 받고자 했다. 이는 틀림없이 온 천하에 소리쳐 떠들기를,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서 여러 나라들에 솔선하여 우리를 황제로 섬긴다.”

하려는 것이었으니, ! 사신된 자는 이보다 더 사정이 급박할 수 없었다. 그 머리가 잘릴망정 조아려서는 안 되고, 그 무릎이 끊길망정 꿇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진실로 고()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사신 노릇 하듯이 하지 아니했다면, 동해(東海) 주변 수천 리의 우리나라가 장차 무엇으로써 천하에 대해 스스로 떳떳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힘은 족히 심양(瀋陽)을 함락시키고 요동(遼東)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약한 나라의 일개 사신을 이기지 못했고, 그들의 위엄은 족히 몽고의 40여 왕을 굴복시키고 하루아침이 못 걸려서 두송(杜松) 20만 군사를 깨뜨렸지만, 필부의 허리를 꺾어 뜰에 꿇리지는 못했다. 옥쇄를 획득하고 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기세등등하게 하늘로부터 이를 얻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저와 같이 용이했건만, 그들이 우리 사신의 절 한 자리 받기란 이와 같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사건이 영토 밖에서 벌어져 국내 사람들이 통쾌하게 직접 본 바 아니었고 몸이 살아서 돌아온 데다가 저들의 서한을 받아 왔다는 혐의를 받았으므로 그 당시에 나라를 욕되게 했다는 논란이 어찌 그칠 수 있었겠는가!

그 뒤 명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천자에게 아뢴 사실과, 중원(中原)의 망한 명 나라 백성들이 당시의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둔 사실을 전문(傳聞)을 통해서 차츰차츰 알게 되자, 국내의 의심이 점점 풀리어 비로소 표창하고 증직(贈職)하는 특전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 적국의 뜰에서 강하고 굳세게 맞선 사적에 대해서는 상기도 국내 사람들이 반신반의해 온 것이 지금까지 140여 년이었다. 이는 당연히 만세가 되어도 공론(公論)에 힘입어 사라질 수 없을 사적이요, 청 나라 황제로서도 덮어 버릴 수 없었던 사적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확()이요, 자는 여량(汝量)이다. 계통은 선파(璿派)에서 나왔으니, 시조는 왕자 경녕군(敬寧君) ()였다. 부친의 휘는 유인(裕仁)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함경도 관찰사로서 왜병이 침략했을 때 싸우다 피살되어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 2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세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다. 장성하자 키는 팔 척이요, 음성은 큰 쇠북을 울리는 것 같았으며, 용력이 절등하여 우뚝한 장수의 재목이었다.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그가 고아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무과(武科)를 권하니, 응시하여 갑과(甲科 첫째 등급)로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는데, 사나운 범이 금원(禁苑)에 들어오자 공이 쏘아 죽였다. 그리고 적신(賊臣)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대궐 뜰에서 대비를 폐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그 반열에 참여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공에게 병을 핑계 대라 권하자, 공은 성을 내며,

 

병들지 않았다면 참여해야 된단 말인가?”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날이 갈수록 패악하므로 공의 뜻을 떠보려는 자가 있자 공은 사양하기를,

 

나는 어머니가 있으니 감히 그대들을 따르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에 대한 의심은 말고 다만 노력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정사(靖社)에 미쳐 밀약이 있었다.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이 공에게 함께 가자고 요청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공이 이때에 어영청 천총(御營廳千摠  3 품 벼슬)을 맡고 있었는데, 박승종(朴承宗)이 평소 공을 믿었으므로 급히 공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대장 이흥립(李興立)과 더불어 모반한다고 고자질하는 자가 있으나,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으니 급히 군사를 돈화문(敦化門 창덕궁 정문) 밖에 모아 비상에 대비하라.”

하자, 공은 드디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오늘은 내가 특장(特將)으로 지휘를 도맡았으니 감히 어기는 자는 베어 죽이리라!”

하였다. 밤에 반정군의 깃발이 돈화문을 향하자 군중이 동요하였다. 외병(外兵)이 있다고 보고하므로, 공은 말을 타고 동으로 향해 서서,

 

내 말 머리만 보고 따르라.”

하였다. 막 공의 자()를 부르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공은 짐짓 못 들은 척했는데, 공을 부른 사람은 바로 동성군이었다.

일이 평정되자 여러 공신들이 공을 의심하여 공도 함께 베어 죽이려고 했으나,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그들과 맞서 힘껏 다투면서,

 

가령 이확(李廓)이 진()을 물리지 않았더라면 누가 감히 궁궐로 들어갔겠는가?”

하였다. 연평군이 평산 부사(平山府使)로서 의거를 일으켜 일약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제수되자, 공을 힘껏 보호하여 중군(中軍)을 삼았으며 다시 공을 천거하여 평산 부사를 대신 맡게 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나 박승종은 영의정으로서 처형을 당했는데, 공은 일찍이 그에게 신임을 받던 처지라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어 늘 울적하게 지내면서 뜻을 펴지 못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전해 오자, 공은 마침 심리(審理)를 받던 중이었으나, 임금이 급히 불러 접견하고 활과 칼을 내려 주어 출정케 하였다. 저탄(猪灘)에서 적을 막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역적들은 상금을 걸고 공을 잡으려고 서둘렀으나, 급기야 공이 타던 말이 죽어서 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공이 이미 죽었다고 여겨 마침내 가 버렸다. 공은 흘러가는 시체에 올라타서 죽음을 면하게 되자, 알몸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군대로 달려갔으나 군중에서는 공을 역적의 첩자로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장만은 공을 특별히 사면하여 선봉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속죄하게 하였다. 드디어 역적을 쳐부수고 서울을 회복하였으나, 그 공로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책훈(策勳)되지 못했다. 외직으로 나가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가 곧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옮겼다.

강홍립(姜弘立)이 만주족(滿洲族)을 인도하고 와서 의주성(義州城)을 함락시키자 인접 고을들도 따라서 와해되었으므로, 관찰사 윤훤(尹暄)이 급히 공을 불러 평양성(平壤城)을 구원하게 하였다. 공은 도중에서 평양성이 이미 함락되고 자산 역시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근거지조차 잃어버려 낭패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격문(檄文)을 띄워 여러 고을 군사를 소집하여 절도사에게로 달려갈 작정이었는데, 김기종(金起宗)이 윤훤을 대신하여 관찰사가 되자, 공이 도중에 기웃거리기만 하고 급히 평양성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는 공에게 김덕경(金德卿)과 고한룡(高汗龍)이란 자를 얼른 잡아 없애도록 맡겼다. 이 두 역적은 모두 서쪽 변방의 보잘것없는 역관으로 만주족에게 투항하였는데, 김덕경은 만주족에 의해 임시로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된 자였다. 공은 이 두 역적을 사로잡아 스스로 속죄할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계획을 세워 고한룡을 참수하고 김덕경을 사로잡았으며, 강물을 반쯤 건넌 역적들을 공격하여 잡혀가는 우리 백성들을 빼앗아 오고, 고차 박씨(高遮博氏)를 추격하여 그를 호종하는 기병 두 명을 쏘아 죽였다.

그러자 김기종은 손을 잡고 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서로 늦게 안 것이 한스럽소.”

하고, 드디어 만류하여 중군(中軍)으로 삼고 군사에 대한 것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내직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외직으로 나가 경원 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가 곧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옮겼다. 다시 들어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고, 또다시 나가 제주 목사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 사직하고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때 만주족이 이미 심양을 점거하여 자주 산해관(山海關)을 침공하였으며, 몽고의 여러 부족들을 다 복속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교린(交隣)의 도리로써 대우하여 사신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다.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인조 14)에 만주족은 영아아대(英兒阿代)와 마복탑(馬福塔)을 보내와 서신을 전달했는데, 그 사연이 몹시 패악하고 거만하여,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전날과 아주 달랐다. 그래서 대각(臺閣 사헌부 · 사간원) 및 성균관 유생들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그 사신을 베어 머리를 함에 넣어 명 나라 황제께 아뢰자고 요청하니, 영아아대 등은 크게 놀라 숙소에서 뛰쳐나가 말을 빼앗아 타고 달려가면서 국서(國書)를 도중에 내버렸다.

이때 사대부들은 모두 심양에 사신 가기를 회피했으므로 마침내 공을 회답사(回答使)에 충원시키니, 서신을 가지고 뒤를 쫓아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때마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이 공보다 먼저 출발하여 막 용만에 머물러 있다가, 드디어 동행하여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 공들을 접견하고서 더욱 거만하게 굴며 폐백을 선뜻 받아 주지 않고, 사자(使者)를 숙소로 번갈아 보내어 10여 건의 일을 들어 트집만 잡곤 하였다. ()이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 하면서, 먼저 정명수(鄭命壽)를 시켜 오만 가지로 회유하고 협박했으므로, 공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정명수에게 주면서,

 

내 머리를 가지고 가라!”

하였다. 이튿날 만주족 기병 수십 명이 채찍으로 문을 후려치고 크게 호통 치면서,

 

조선 사신은 빨리 예복을 갖추라!”

하자, 공은 탄식하며,

 

오늘에야 죽을 자리를 얻었나 보다.”

하고, 드디어 나공(羅公)과 함께 동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드려 멀리서 임금께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고 손수 관복을 찢고 사모(紗帽)를 밟아 뭉개뜨려 다시 입지 않을 뜻을 나타냈으며, 스스로 상투를 풀고 머리를 맞대어 두 가닥을 한데 합쳐 묶고 서로 보듬고 누웠다.

()이 장사(壯士)를 보내어 공들을 좌우로 끼고서 내달리어 제단 아래 이르자, 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들이 다 줄지어 서고, 몽고의 수십 만 기병이 제단을 빙 둘러 진을 쳤다. ()은 자황포(柘黃袍)를 입고 규()를 잡고 제단에 올라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尊號)를 받고, 국호를 세워 대청(大淸)’이라 하고 숭덕(崇德)’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장사들이 공을 끼고 서자, 공은 즉시 나자빠져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장사들이 앞을 다투어 그 팔과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억누르고 꽁무니를 쳐들고 사지를 들어 땅에 엎어뜨리자, 공은 크게 호통 치며 몸을 뒤쳐 바로 누우며, 앞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누운 채 발길로 그 얼굴을 차서 코가 깨져 피가 터지곤 하니, 이날 구경하던 자들은 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차마 보지를 못했다. 마침내 거꾸로 질질 끌어다 숙소에 가두었다.

이튿날 다시 동교(東郊)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 또 공들을 끌고 갔다. 공들은 더욱 사납게 항거하며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니, 정말로 그 사나움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만주족의 여러 신하들이 흔고(釁鼓)하여 대중 앞에 위엄을 보일 것을 청하자, (),

 

저것들이 시방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판인데, 지금 죽이면 도리어 저놈들의 소원을 풀어 주는 것이 되고, 또 사신을 죽였다는 악명을 무릅쓰게 된다. 그러니 놓아 돌려보내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드디어 서한을 만들어 보따리 속에 넣어 주고 기병 100여 명을 시켜 공을 압송하여, 아골관(鴉鶻關)까지 이르러 되돌아갔다. 공들이 비로소 보따리를 점검하고 과연 한()의 서신을 발견하자 놀라며,

 

서신에 새 도장을 찍어 봉했으니 그 내용은 뻔하다. 만일 서신을 떼어봤다가 예전 격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장차 어찌하랴?”

하고, 드디어 서신을 여점(旅店)에 놓아두고 말을 달려 돌아와 책()을 벗어났다. 변방에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공들이 적의 뜰에서 절하고 춤을 추었다 했고, 관찰사 홍명구(洪命耈)는 장계를 급히 올려 국경에서 그들을 효시(梟示)할 것을 청했다. 이에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와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상소를 올려 베어 죽이기를 청하므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역설하기를,

 

두 사신을 아직 신문해 보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유독 먼저 베어 죽인단 말인가!”

하여 말감(末減)을 얻었다. 그리하여 공은 선천(宣川)으로 귀양 가고, 나덕헌은 백마산성(白馬山城)을 병사(兵士)로서 지키게 되었다.

한참 뒤에 조정에서는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명 나라 황제에게 아뢰는 수본(手本 손수 작성한 보고서)을 얻어 보고서야 비로소 공들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양사(兩司)에서는 효수(梟首)하자는 계문(啓聞)을 잠시 정지했다. 그러나 말 많은 자들은 오히려 심 도독이 명 나라 조정에 거짓 보고한 것이라 했다. 급기야 마복탑(馬福塔)이 공들이 여점(旅店)에다 버린 서신을 이유로 몹시 성을 내며 하는 말이,

 

황제가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사신된 자는 의당 공손히 예를 행해야 할 것이거늘 이확(李廓) 등은 패악스럽게 난동을 부려 뜰에서 천자를 욕보였으니 어찌 이놈을 당장에 죽여 대국에 사과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따라갔던 역관 신계음(申繼愔) 등이 비로소 속을 털어놓고 원통함을 호소하여 공들의 귀양을 풀게 되었다.

이해 겨울에 만주족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습격하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공은 모친 최 부인(崔夫人)의 상을 당했으나, 임금은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포위한 가운데로 들어가 임금을 뵙자, 임금은 공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육식을 권했을 뿐 아니라 친히 왕림하여 위로하고 격려했다. 독전어사(督戰御史) 김익희(金益熙) · 황일호(黃一皓) · 김수익(金壽益) · 이후원(李厚源) · 임담(林墰) 등 여러 공들이 공이 방비하는 데 신기한 계략을 지녔음을 보고, 국사(國士)로서 허여하며, 비로소 전에 심양에 사신 간 때의 일을 믿게 되었다. 포위가 해제되자, 돌아가 최 부인을 장사하기를 요청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발탁되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심양에 있을 적에 하도 두들겨 맞아서, 어혈이 들고 속으로 곪아 하체가 마비되었다. 연로하자 시골에 살며 누차 제수받은 직을 사양했다. 현종(顯宗) 을사년(1665, 현종 6)에 집에서 죽으니, 양근군(楊根郡) 북쪽 울업리(鬱業里) 을좌(乙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興陽李氏)로 응배(應培)의 따님인데 3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익장(益章) · 익상(益常) · 익행(益行)이요, 딸은 윤세미(尹世美)에게 출가했다. 익장과 익상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익행은 5남을 두었는데 현() · () · () · () · ()이다.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등주(登州)에 들어갔다가 마홍주(馬弘周)에게 사로잡혀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길에서 한 그림을 보니 바로 공들이 굴하지 않은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이에 앞서 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가 어사 황손무(黃孫茂)를 보내어 공의 절의를 굉장히 칭찬했는데, 이때는 벌써 가도(椵島)가 깨어진 뒤라 그 조서(詔書)는 마침내 전해질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명 나라 천자의 사신은 다시 조선에 오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청 나라 황제가 역대 제왕으로부터 한()이 국호를 세운 때의 일까지를 논술하여 제목을 어제전운시(御題全韻詩)라 했는데, 시는 5권으로 간행되어 천하에 유포되었다. 그 시 속에는, “조선 사신이 절을 아니 하고 유독 틀어졌네.”라는 말이 있고, 친히 주석(註釋)을 자세히 달아 아래와 같이 말했다.

 

태종(太宗)이 이미 존호를 받았는데, 조선 사신 이확과 나덕헌이 유독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뭇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사신이 무례한 것은 짐()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나에게 맹약을 무너뜨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이니, 짐은 끝내 한때의 분풀이로 그 사신을 죽이지 않으련다. 그러니 이를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그리고 곧 이확 등을 돌려보냈다.”

거기에서 태종이라 일컬은 자가 한()이었다.

지금 임금 3(1779)에 특명으로 그 책을 구입해 들여오게 하여 어람(御覽)하고는 가상히 여기고 탄식한 다음, 이확의 집 문에 정표(旌表)하도록 명하고 시호를 충강(忠剛)이라 내렸다.

오호라! 이는 어찌 공들에 대해 백 년 동안 내려온 의심이 하루아침에 통쾌히 밝혀진 것일 뿐이겠는가? 천하로 하여금 만세토록 우리 조선만이 홀로 당시에 만주족을 황제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더욱 의롭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드디어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大明)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이 천명 받기 전엔 / 淸未受命

이웃의 강국일 뿐이었는데 / 卽我强隣

요동 심양 점령하고 나서는 / 入據遼瀋

창 휘두르고 사방으로 눈 부릅뜨니 / 揮戈四瞋

악라(鄂羅)라 회회(回回) / 鄂羅回回

두이백특(杜爾伯特)이라 / 杜爾伯特

찰뢰(扎賴)라 옹우(翁牛) / 扎賴翁牛

오주(烏珠)라 토묵(土黙)들이 / 烏珠土黙

모두 신하로 자처하자 / 莫不稱臣

더욱 강경하고 오만해져 / 益强以傲

가한(可汗)이란 칭호 부끄러워 / 羞稱可汗

황제 칭호 넘보려네 / 謀僭大號

범 같은 우리 장수 / 我有虎將

이확(李廓)이요 자는 여량(汝量) / 曰廓汝量

사신으로 저들 관사에 묵으니 / 聘在彼館

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元不忘喪

제아무리 황제라 자처해도 / 彼雖自帝

꿈속에 배부른 격 / 若飽于夢

공의 절을 꼭 받아서 / 必借公拜

군중에게 과시하려 했네 / 以誇其衆

변발에다 붉은 모자 / 辮髮朱帽

부리부리한 눈에 귀신 같은 이빨로 / 焰瞳鬼齶

앞뒤로 끼고 몰아 / 前擁後驅

번갯불에 산 무너지듯 / 若霆摧嶽

청이 황제 노릇 할지 못 할지 / 淸之帝不

공의 절 한 번에 달렸는데 / 係公一俯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서 / 撑宙亘宇

기둥처럼 굳게 박혔네 / 確植如柱

나의 목은 토제 인형이요 / 項領土梗

등과 배는 옹기나 마찬가지 / 腹背瓮盎

창자를 베건 위장을 도려내건 / 屠腸刳胃

네 멋대로 실컷 배를 채우려무나 / 任汝飫脹

오직 이 무릎만은 간직하여 / 獨保此膝

천하 위해 굽히지 않으니 / 爲天下伸

저 역시 의()에 부끄러워 / 彼亦赧義

제 신하에게 자중하게 하였네 / 以儆厥臣

장순(張巡) 허원(許遠)처럼 죽지 않고 / 巡遠不剮

소무(蘇武) 장건(張騫)처럼 살아 오니 / 武騫生還

국론이 물 끓듯이 / 國言沸騰

입 달린 자 모두들 탓하고 헐뜯네 / 喙喙郵訕

적에게 아양 떨어 / 謂公媚敵

절 올리고 춤췄으니 / 跳躍拜舞

진실로 이런 놈은 / 洵若斯者

목을 베어야 한다 했네 / 其咽可斧

살아서건 죽은 뒤건 / 于存于歿

업적과 명성 더럽혀지니 / 跡穢名衊

황하 물 끌어다 세숫물 삼은들 / 挽河爲盥

누가 대신 씻어 주리 / 誰爲滌之

화산(華山) 돌 깎아서 송곳을 만든들 / 斲華爲觿

누가 대신 찔러 터뜨려 주며 / 誰爲摘之

깜깜하고 암담한데 / 幽昧暗黮

누가 대신 밝혀 주리 / 誰爲晳之

청은 이제 사대가 되어 / 淸今四葉

건륭이라 연호 세우고 / 號登乾隆

황제 몸소 시가 지어 / 親作歌詩

조상 공덕 찬송했네 / 頌厥祖功

공이 절 아니한 걸 의아해하며 / 訝公不拜

뜻이 유독 틀어졌다 했으니 / 謂志獨乖

이 한 말 얻기란 / 獲此一言

하늘 오르기 어려움과 같네 / 若天難階

시의 주석(註釋) 살펴보면 / 觀其所註

응당 공의 뼈를 가루로 만들었을 텐데 / 理當粉骸

패역(悖逆)하다 꾸짖은 건 / 詈公悖常

공에게는 의용(義勇)일세 / 卽公義勇

제 아량 자랑이지 / 自述宏度

공을 칭송한 것 아니고 / 非爲公頌

대서특필한 것도 / 大書特書

공을 총애한 것 아니라 / 非爲公寵

누가 글 올려 황제 구워삶았으며 / 孰章賂帝

누가 함께 달래고 권했기에 / 孰與慫慂

어찌 한 번 죽임 아끼어 / 胡靳一殺

백 년 동안이나 공을 해쳤나 / 刻公百年

곧은 일은 펴지는 법 / 無直不伸

의심나면 하늘에 물어보소 / 可質蒼天

우리 왕조 역대의 법도는 / 我聖家法

오랑캐 물리치고 중화(中華)를 받드나니 / 攘夷尊周

동해 주변 삼천리 우리나라 / 環東爲國

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一部春秋

공과 같은 신하는 / 有臣若公

오랜 세월 지났어도 어제런 듯하여 / 曠世如昨

태상시에 명 내리고 / 爰命太常

정부 관각 불러다가 / 政府館閣

글자 살펴 시호(諡號) 정하고 / 考文選號

굳센 넋을 정표(旌表)하니 / 以旌毅魄

작설(綽楔)이 엄연할사 / 綽楔有儼

이름과 작위 높이 걸렸구려 / 揭名列爵

현저한 보답 융숭하였으니 / 顯報旣崇

저승으로부터 되살아나서 / 九原可作

이 크고 아름다운 비석을 본다면 / 視此豐珉

공의 낯빛에 부끄럼 없으리라 / 色庶無怍

 

 

글 전체가 의심할 의()’ 자로써 안건(案件)을 삼았다. 사건에 대한 서술이 기발하고 변화가 많으니, 사마천(司馬遷)의 진수를 터득했다. () 역시 극도로 기이하고 전아하여,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를 배웠으면서도 거기서 환골탈태하여 묘경(妙境)을 얻었다고 하겠다.

 

 

이확(李廓) · 나덕헌(羅德憲)의 성명이 일통지(一統志)에 보이기는 하지만, 어제전운시가 나오기 이전에는 특별히 표창한 사람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백여 년 동안 적막하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당시 만에 하나라도 혹시 마음은 자기 몸을 드러눕게 하고 싶지만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엎드리게 되어, 저놈들이 장차 절을 한 것으로 임시변통으로 인정해 버렸다면 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이는 다행히도 하늘이 공에게 곰과 범 같은 자질을 주어서 이 지경을 견뎌 내게 한 것이다. 그때에 여러 공들도 누군들 척화(斥和)할 생각이 없었으리오마는, 대저 모두 글 짓는 선비들이라 마음은 강하지만 뼈대는 연약하고 외모는 씩씩하지만 체질은 약하니, 비록 절의야 천지에 우뚝 세울 만하고 뜨거운 분노야 우주를 떠받칠 만하다 해도 반드시 용력이 장군과 같이 굳셀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적이 없다.

 

[C-001]가의대부(嘉義大夫) …… 신도비명(神道碑銘) : 가의대부는 종 2 품의 품계이다. 삼도통제사는 곧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종 2 품의 관직이다. 자헌대부는 정 2 품의 품계이다. 자헌대부의 품계가 추증되었으므로, 품계보다 관직이 낮음을 표시하는 행() 자가 삼도통제사의 관직 앞에 붙었다. 오위도총부는 조선 시대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軍令) 기관이고, 도총관은 그 우두머리인 정 2 품의 관직이다. 원문에는 시호가 충렬(忠烈)’로 되어 있으나, 이확(李廓)에게 실제로 내린 시호는 충강(忠剛)’이었다. 正祖實錄 4 11 9, 5 11 20 혹시 그와 고난을 같이하여 함께 증시(贈諡)되었던 나덕헌(羅德憲)의 시호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전주 이씨 경녕군파 세보(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권지수(卷之首)에도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말미에 통정대부 행 안의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 박지원 지음通政大夫行安義縣監兼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朴趾源撰이라고 되어 있어,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D-001]두송(杜松) : 명 나라 말기의 장수로 담력과 지혜가 뛰어나 주요 군직(軍職)을 역임하면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1619년에 양호(楊鎬)가 후금(後金)을 공격할 때 그의 주력(主力)이 되어 함께 출전하였으나, 자신의 용맹을 믿고 경솔하게 진격하다 후금의 군대에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D-002]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 제왕이 천명을 받은 증거로서 하늘이 보여 주는 상서로운 조짐을 부명이라 한다. 또한 그러한 상서로운 조짐들을 늘어놓으며 제왕을 예찬하는 글도 부명이라 한다.

[D-003]덮어 …… 사적이다 : 원문은 不得掩也인데,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 동문집성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4]선파(璿派) : 전주 이씨(全州李氏)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宗派)를 이른다.

[D-005]경녕군(敬寧君) () : 태종(太宗)과 효빈(孝嬪) 김씨(金氏) 사이에 출생한 왕자이다.

[D-006]응시하여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 원문은 中甲科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그 앞에 光海中이 더 있다.

[D-007]선전관(宣傳官) : 임금이 행차할 때 호위와 명령 전달 등을 맡던 종 9 품부터 정 3 품까지의 관직이다.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므로 장차 출세가 보장되는 무반(武班)의 명예로운 요직으로 간주되었다.

[D-008]적신(賊臣)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주도한 이이첨(李爾瞻)을 일컫는다. 중편연암집에는 그 앞에 光海君時가 더 있다.

[D-009]공의 뜻 : 원문의 公意인데, 동문집성에는 公議로 되어 있다.

[D-010]정사(靖社) : 사직(社稷)을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D-011]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 : 1590~1643. 무신 신립(申砬)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공로를 세워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책훈(策勳)되고 동성군에 봉해졌다.

[D-012]박승종(朴承宗) : 1562~1623. 광해조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인목대비 폐비에는 극력 반대했다. 반정이 일어나자 자결했다. 인조반정 직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나중에 신원(伸寃)되었다.

[D-013]이흥립(李興立) : 박승종과 사돈으로서 그의 추천으로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반정군(反正軍)에 합세하여 공이 컸으므로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투항했다가 난이 평정되자 자결했다.

[D-014]특장(特將) : 어느 한 방면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부대의 주장(主將)을 이른다.

[D-015]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 : 1557~1633.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D-016]호위대장(扈衛大將) : 인조반정 이후 왕궁의 호위를 강화할 목적에서 설치한 호위청(扈衛廳)의 우두머리인 정 1 품 관직이다. 설치한 초기에는 호위 4()’이라 하여 공신인 이귀 등 4인이 대장이 되어 각기 군관(軍官)들을 거느렸다.

[D-017]공은 …… 처지라 : 원문은 嘗爲其所厚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公嘗爲其所厚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18]뜻을 펴지 못했다 : 원문은 不得意인데, 동문집성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9]이괄(李适) : 원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李适로 되어 있다.

[D-020]저탄(猪灘) : 마탄(馬灘)이라고도 하며, 황해도 평산의 예성강(禮成江) 상류에 있었다.

[D-021]장만(張晩) : 1566~1629. 인조반정 직후 후금(後金)의 침략에 대비하여 평양에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자 그 우두머리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었다. 1624년 평안병사 겸 부원수(平安兵使兼副元帥)인 이괄의 반란군이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던 평양을 피하여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장만은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아 추격하여 마침내 서울 근교에서 격파했다. 그 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책훈되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D-022]강홍립(姜弘立) : 1560~1627. 명 나라의 후금(後金) 정벌 요청에 응해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서 출정했다가 패하자, 후금에 투항하고 억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강화도에서 양국의 화의(和議)를 주선했다.

[D-023]윤훤(尹暄) : 1573~1627.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25년 평안 감사로 부임했다. 정묘호란 때 평양을 버리고 성천(成川)으로 후퇴함으로써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D-024]공은 …… 듣자 : 원문은 道聞平壤已陷 而慈亦失守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앞에  자가 더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5]김기종(金起宗) : 1585~1635.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종사관으로서 무공을 세워 진무 공신 2등으로 책훈되고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

[D-026]서쪽 …… 역관 : 의주(義州)의 통사(通事)를 이른다.

[D-027]고차 박씨(高遮博氏) : 박씨(博氏)는 만주어(滿洲語)를 음역(音譯)한 관직 이름이고, 고차(高遮)는 만주족의 이름인 듯하다. 병자호란 직후 청 나라의 차사(差使)로 박씨들이 누차 입국한 바 있다. 숙종실록 36 10 7일 조의 주() 박씨(博氏)는 호인(胡人) 군졸의 명목이다.”라고 하였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6 27일 조에도 책문(柵門)을 지키는 청 나라 관원들에게 줄 예물 명단에 박씨(博氏), 가출박씨(加出博氏), 세관박씨(稅官博氏) 등의 관직이 열거되어 있다.

[D-028]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 원문은 歡飮인데, 문맥으로 보아 勸飮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라고 권하면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D-029]영아아대(英兒阿代) : 용골대(龍骨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백기인(正白旗人)으로, 호부 상서를 지냈다. 조선에 누차 사신으로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淸太宗)의 막료로서 참전했다.

[D-030]마복탑(馬福塔) : 마부대(馬富大 : 또는 馬夫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의 막료로서 참전했다.

[D-031]회답사(回答使) : 교린(交隣) 관계에 있는 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국서를 보내왔을 때 그에 회답하는 국서를 전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을 이른다.

[D-032]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 :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후금(後金)과 형제 맹약을 맺고 매년 봄과 가을에 사신을 심양에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봄에 보내는 사신을 춘신사라 하였다. 나덕헌(1573~1640)은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훈되었다. 1636년 춘신사로서 회답사인 이확과 함께 심양에 가 청 태종이 칭제건원(稱帝建元)하는 의식에서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 이후 오히려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교동수사(喬桐水使) 겸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지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D-033]() : 고대 북방 민족의 족장(族長) 또는 왕()을 일컫던 말로 가한(可汗), (khan)으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청 태종을 이른다.

[D-034]정명수(鄭命壽) : 평안도의 천민으로 1619년 강홍립의 군대를 따라갔다가 포로가 되자 잔류하여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때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갖은 횡포를 부렸다.

[D-035]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 : 패륵은 청() 종실(宗室)의 봉작(封爵)의 하나이다. 청 종실의 봉작은 친왕(親王), 군왕(郡王), 패륵(貝勒), 패자(貝子)의 순서로 되어 있다. 팔고산은 곧 팔기병(八旗兵)을 이른다. 팔기병은 병졸 300인이 하나의 우록(牛彔)을 이루고, 다섯 우록이 하나의 갑라(甲喇)를 이루고, 다섯 갑라가 하나의 고산(固山)을 이루어, 모두 여덟 고산이 된다. 번자는 형사(刑司)에 소속되어 체포와 형장(刑杖)을 맡은 벼슬아치를 이른다.

[D-036]자황포(柘黃袍) : 뽕나무 즙을 물들여 만든 적황색의 도포로, 수당(隋唐) 이래 황제들의 복색(服色)으로 사용되었다.

[D-037]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 원문은 駭惡인데, ‘駭愕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깜짝 놀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D-038]이튿날 …… 갔다 : 원문은 明日復祀東郊 又擁公等去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明日復擁公等去로 되어 있다.

[D-039]흔고(釁鼓) : 전쟁을 할 때 사람을 죽여 그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두 조선 사신을 죽이자는 뜻이다.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祭纛으로 되어 있고, 여한십가문초에는 祀東郊 又釁鼓로 되어 있다.

[D-040]보따리 속 : 원문은 裝中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公裝中으로 되어 있다.

[D-041]아골관(鴉鶻關) :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에 있는 관문의 이름이다.

[D-042]() : 요령성의 압록강 부근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 일대에 말뚝을 박아 국경 출입을 통제한 시설물을 이른다. 그곳의 책문(柵門)을 통해서만 사신 왕래와 교역이 이루어졌다.

[D-043]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 원문은 讙言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譁言으로 되어 있다.

[D-044]홍명구(洪命耈) : 1596~1637. 인조반정 이후 등용되어, 병자호란 때 평안 감사로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해 달려가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D-045]말감(末減) : 가벼운 죄에 처하는 것을 이른다.

[D-046]백마산성(白馬山城) : 평안도 의주(義州) 백마산(白馬山)에 있던 성으로,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지켰던 곳이다.

[D-047]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 : 명 나라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의 군대가 후금의 군대에 쫓긴 끝에 국경을 넘어 평안도 철산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게 되자, 1623년 명 나라는 후일을 도모하려고 가도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다. 모문룡이 조정의 명에 따라 요동(遼東)에 출전했다가 실패하고 죽은 뒤, 가도로 도망한 그 잔당 사이에 누차 내분이 일어난 끝에 장사꾼 출신으로 그 딸이 모문룡의 첩이었던 심세괴가 도독이 되었다. 심세괴는 1637년 청 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도독 앞에  자가 더 있다.

[D-048]기복(起復) :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으로,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상중에 벼슬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특별히 조정에 불러 올리는 제도를 이른다.

[D-049]독전어사(督戰御使) …… 임담(林墰) : 독전어사는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어사로, 병자호란 때 군 통솔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관직이다. 김익희(金益熙 : 1610~1656)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로서 후일 대제학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황일호(黃一晧 : 1588~1641)는 척화파(斥和派)로서,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재임할 때 명 나라를 도와 청을 치려고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청 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수익(金壽益 : 1600~1673)은 의주 부윤, 병조 참의, 목사(牧使) 등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후원(李厚源 : 1598~1660)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3등으로 책훈되고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후일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담(1596~1652)은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D-050]아들은 익장(益章) : 원문은 益章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男益章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51]임경업(林慶業) …… 압송되었는데 : 임경업(1594~1646) 1640년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함에 따라 출전했으나 오히려 명 나라 군대와 협력했다. 이 사실이 탄로 나자 청 나라의 압력으로 국내에서 체포되어 청 나라로 압송되던 도중 해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 표착(漂着)한 뒤 등주(登州)에서 명 나라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되어 병사를 거느렸다. 그러나 청 나라가 마침내 북경을 함락하고 명 나라 조정이 남경(南京)으로 후퇴하자, 임경업은 1645년 명 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속아서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D-052]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 :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장렬제(莊烈帝) 의종(毅宗 : 재위 1627~1644)을 이른다.

[D-053]황손무(黃孫茂) : 1636년 심세괴가 상주한 내용을 본 명 나라 의종(毅宗)이 우리나라를 표창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감군어사(監軍御使) 황손무를 가도(椵島)로 파견했으나, 그 이듬해 내분으로 인해 황손무는 도독 심세괴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D-054]공의 절의 : 원문은 公節義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公等節義로 되어 있다.

[D-055]조선 :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속국(屬國)’으로 되어 있다.

[D-056]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 : 청 고종(淸高宗) 건륭제(乾隆帝)가 지은 것으로, 106()에 맞추어 상평성(上平聲) 15수는 청 나라의 발상(發祥)부터 태조(太祖) · 태종(太宗)의 사적을 다루었고, 하평성(下平聲) 15수는 세조(世祖) · 성조(聖祖) · 세종(世宗)의 사적을 다루었으며, 상성(上聲) · 거성(去聲) · 입성(入聲) 76수는 요() · ()부터 명 나라 최후의 복왕(福王)까지의 사적을 다루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어제시집(御製詩集) 4()  47 ,  48 ,  49 권에 수록되어 있다.

[D-057]조선 …… 틀어졌네 : 원문은 朝鮮使不拜獨乖로 되어 있으나 어제전운시에 실린 것과 차이가 있다. 그 전문은 조선 사신이 있었는데, 절을 아니 하고 뜻이 유독 틀어졌네. 가식적으로 명에 대한 예의를 지켜서, 나를 격분시켜 그 무리를 죽이게 하려는 게지.乃有朝鮮使 不拜志獨乖 知爲假守禮 激我戮其儕라고 되어 있다.

[D-058]태종(太宗) …… 돌려보냈다 : 어제전운시의 실제 주와 차이 난다. 그 전문은 태종이 존호를 받고 나서 뭇 신하들에게 선유(宣諭)하니, 모두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했으나 유독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유시(諭示)하기를, ‘조선 사신이 무례한 경우를 이루 열거하기 힘들지만, 이는 조선 국왕이 원한을 맺으려는 의도를 품고, 짐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짐에게 맹약을 저버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일 뿐이다. 짐은 종래 한때의 하찮은 분풀이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이 쩨쩨하게 굴어 두 나라는 이미 원수지간이 되었다. 전쟁할 때에도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내면 역시 보낸 사자를 즉시 죽이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조회(朝會)하러 온 경우이겠는가?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곧 그 사신을 돌아가게 하면서 서신으로 조선 국왕을 힐책하고, 다시 그 사신에게 유시하기를, ‘너희 왕이 만약 스스로 죄를 후회할 줄 안다면 응당 자제를 인질로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짐은 즉시 대군을 일으켜 너희의 국경에 닥칠 것이니,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였다.太宗旣受尊號 宣諭群臣 皆行三跪九叩禮 惟朝鮮使臣羅德憲李廓不拜 太宗諭曰 朝鮮使臣無禮處 難以枚擧 是皆朝鮮國王有意構怨 欲朕先啓釁端 戮其使臣 加朕以背棄盟誓之名耳 朕從不肯逞一時之小忿 如此瑣屑 卽兩國已成仇敵 戰爭之際 以事遣人 亦無卽戮其來使之理 況朝會乎 其勿問 尋遣其使臣歸 以書詰責朝鮮王 復諭其使臣曰 爾王若自知悔罪 當送子弟爲質 不然 朕卽擧大軍 以臨爾境 雖悔何及乎라고 되어 있다.

[D-059]지금 임금 …… 내렸다 : 정조 2(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가 북경에 체류하던 중 수역(首譯) 이언용(李彦容) 어제전운시 4책을 빌려 와서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귀국 후 서장관 심염조(沈念祖)가 임금에게 보고하여 동지사(冬至使)가 이 책을 구입해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조 3년에 어제전운시의 기록을 근거로 이확과 나덕헌에게 증시(贈諡)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나덕헌과 달리 이확은 그의 고향과 자손을 몰라 어명을 중지했다가, 그 이듬해 심염조의 건의에 따라 재차 증시하도록 명했으며, 정조 5년 이확에게 충강(忠剛)이란 시호가 내렸다. 入燕記 下 6 12》 《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卷之首 嘉林君派 七世 廓》 《正祖實錄 3 9 3, 4 11 9, 5 11 20

[D-060]악라(鄂羅) …… 토묵(土黙) : 악라는 곧 악라사(鄂羅斯)로 러시아(Russia)의 음역(音譯)이다. 회회(回回)는 회흘(回紇)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위구르(Uighur)족을 이른다. 두이백특(杜爾伯特)은 내몽골 철리목맹(哲里木盟) 4()의 하나로, 청 나라 초기에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를 세우고 흑룡강성(黑龍江省) 용강도(龍江道)의 동남쪽에 자리잡았다. 찰뢰(扎賴)는 찰뢰(扎賚)라고도 하며 내몽골의 찰뢰특부(扎賚特部)를 이른다. 철리목에 통합되었으며 본거지는 거란(契丹) 땅이다. 옹우(翁牛)는 내몽골의 옹우특부(瓮牛特部)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 동북쪽에 거주했다. 오주(烏珠)는 내몽골의 오주목심부(烏珠穆沁部)로 역시 고북구의 동북쪽에 거주했다. 토묵은 내몽골의 토묵특부(土墨特部)로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남쪽, 성경(盛京)의 변두리에 거주했다. 淸史稿 卷77 52 地理24 內蒙古

[D-061]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용사는 제 머리가 잘려 잃게 될 것을 잊지 않는다.勇士不忘喪其元고 하였다.

[D-062]변발에다 붉은 모자 : 모두 만주족의 풍습이다. 청 나라 때 남자의 예모(禮帽)는 붉은 실로 짠 모위(帽緯)로 장식하였다.

[D-063]나의 …… 마찬가지 : 토경(土梗)은 흙으로 빚은 인형으로, 비에 젖으면 무너진다고 하여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옹앙(瓮盎)은 곧 옹기로, 흔해 빠져서 역시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D-064]장순(張巡) 허원(許遠) : 장순과 허원은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D-065]소무(蘇武) 장건(張騫) : 소무는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武帝) 천한(天漢) 원년(기원전 100)에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들에게 구금되어 회유를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기원전 81년 소제(昭帝)가 흉노와 화친을 하자 19년 만에 한 나라로 돌아왔다. 장건은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 건원(建元) 2(기원전 139)에 월지국(月氏國)으로 사신 가다가 도중에 흉노에게 사로잡혀, 전후 11년 동안 억류를 당하여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았다. 마침내 그곳을 탈출하여 본래의 목적지인 월지국에 갔다가, 한 나라를 떠난 지 13년 만에 돌아왔다.

[D-066]절 올리고 춤췄으니 : 원문 중 拜舞 연상각집에는 抃舞로 되어 있다. 또한 蹈躍 跳躍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跳躍抃舞가 되어, “기뻐 날뛰며 손뼉 치고 춤췄으니로 번역되어야 한다.

[D-067]화산(華山) …… 만든들 : 화산은 중국 오악(五嶽) 중의 서악(西嶽)으로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 남쪽에 있는데, ‘화산지금석(華山之金石)’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금석(金石)이 난다고 한다. 淮南子 地形訓

[D-068]청은 …… 되어 : 명 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자결하고, 청 세조(淸世祖) 순치제(順治帝)가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북경을 차지한 때부터 쳐서 4대가 된다. 원문의  자가 동문집성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69]하늘 …… 같네 :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선생님께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은 하늘을 사다리 타고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고 하였다.

[D-070]시의 …… 물어보소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手復詳註 孰與慫慂 自述宏度 非爲公寵 胡靳一劉 刻公百年 寔破積疑 撥露覩天 帝口雖詈 筆則斯揚 公所見乖 允爲國光으로 되어 있다.

[D-071]동해 …… 우리나라 : 원문의  자가 여한십가문초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72]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一袞一鉞 曰維春秋로 되어 있다.

[D-073]태상시(太常寺) : 봉상시(奉常寺)의 옛 이름으로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D-074]정부 관각 : 정부는 의정부(議政府)를 이르고, 관각은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봉상시에서 삼망(三望 : 세 가지 시호 후보)과 함께 시장(諡狀)을 홍문관에 보내면, 홍문관에서 삼망을 의논한 뒤 봉상시 관원과 다시 의정(議定)하고, 의정부로 넘겨 서경(署經)하는 절차를 거쳐 시호가 정해진다.

[D-075]글자 …… 정하고 : 조선 시대의 시법(諡法)에서 사용하는 글자는 모두 301자로 그 범위 내에서 시호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세종(世宗) , 주례(周禮)의 시법(諡法)에 나오는 28자와 사기(史記)의 시법에 나오는 194자에다, 의례(儀禮),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참조하여 107자를 추가해서 시호로 사용할 수 있게 정했다.

[D-076]작설(綽楔) : 효자(孝子)나 충신(忠臣) 등을 정표(旌表)하기 위하여 문 옆에 세운 대()를 이른다.

[D-077]환골탈태 : 원문은 換脫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78]일통지(一統志) : 청 나라 건륭 29(1764)에 청 고종(淸高宗)의 명에 따라 지어진 지리지(地理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이른다. 이 책 권421 ‘조선조(朝鮮條)’를 보면, “조선 사신 나덕헌 · 이확이 돌아갈 때 서신을 보냈으나, 조선국왕이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D-079]그 때문에 …… 뿐이다 : 원문은 故百餘年寥寥無聞耳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 앞에 今得此銘 庶可以照耀千古라는 내용이 더 있다.

[D-080]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 원문은 公將奈何乎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公將奈何奈何乎로 되어 있다.

[D-081]이는 …… 주어서 : 원문은 此幸天賦公熊虎之材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此幸 此何幸으로 되어 있다.

[D-082]그때에 …… 선비들이라 : 원문은 其時諸公 孰不斥和 而大抵皆文儒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其時斥和諸公 大抵皆文儒也로 되어 있다.

[D-083]두려워서 : 원문은 怵然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주공탑명(麈公塔銘)

 

 

주공 스님이 입적(入寂)한 지 6일 만에 적조암(寂照菴)의 동쪽 대()에서 다비(茶毗)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온숙천(溫宿泉) 회나무 아래와 거리가 열 발자국도 안 되었다. 밤이면 거기서 늘 빛이 어른거리는데 벌레 등처럼 파랗기도 하고 고기 비늘처럼 하얗기도 하고 썩은 버드나무처럼 까맣기도 했다.

대비구(大比丘) 현랑(玄朗)이 뭇 중들을 거느리고 다비 장소에 둘러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재계를 올리고 마음으로 공덕 쌓기를 다짐했더니, 나흘 밤이 지나서 마침내 스님의 뇌주(腦珠 사리) 세 개를 얻어, 장차 부도(浮圖 사리탑)를 세울 양으로 글과 폐백을 갖추어 나에게 명()을 청해 왔다. 나는 본시 불교의 설을 잘 모르나, 그 청이 너무도 간곡하기에 시험 삼아 다음과 같이 물었다.

 

현랑아, 내 예전에 병이 나서 지황탕(地黃湯)을 마셨는데, 약을 짜서 그릇에 부었더니 가는 거품들이 활짝 퍼져, 황금빛 좁쌀들이나 은빛 별들, 물고기 입에서 뽀글대는 물방울이나 벌집과도 같은 거품에 나의 살과 털이 찍혀, 마치 눈동자에 부처가 깃든 것처럼 각각으로 상()을 나타내고 여여(如如)하게 성()을 머금었지. 열이 식고 거품이 그쳐, 모조리 마셨더니 그릇이 텅 비었더라. 예전에 성성(惺惺)했다 한들, 어느 누가 네 스님이 그랬음을 증명하랴?”

현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로써 아()를 증명하니 저 상()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허허 웃으며,

 

()으로써 심()을 본다면, ()이 몇이나 있다는 건가?”

하고서, 드디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붙였다.

 

구월이라 하늘에서 서리 내리니 / 九月天雨霜

나무들 모두 말라 잎이 졌는데 / 萬樹皆枯落

얼핏 보니 맨 꼭대기 나뭇가지에 / 瞥見上頭枝

과일 하나 벌레 먹은 잎에 가렸네 / 一果隱蠹葉

위는 붉고 아래는 누렇고 퍼런데 / 上丹下黃靑

굼벵이가 반은 먹어 씨가 드러났네 / 核露螬半蝕

뭇 아이들 고개 뒤로 젖히고 서서 / 群童仰面立

손을 모아 다투어 따려고 드네 / 攢手爭欲摘

팔매로는 멀어서 맞히기 어렵고 / 擲礫遠難中

장대를 이어 봤자 높아 안 닿네 / 續竿高未及

갑자기 바람 일어 툭 떨어지니 / 忽被風搖落

온 숲을 뒤져도 얻지 못했네 / 遍林索不得

아이는 나무에 도로 와서 맴돌며 울다 / 兒來繞樹啼

부질없이 까막까치 욕해대누나 / 空詈烏與鵲

나는 저 아이들에 비유하노니 / 我乃比諸兒

네 눈에도 응당 나무가 나타나 보였을 터 / 爾目應生木

쳐다보고 없어진 줄 알았을진대 / 爾旣失之仰

굽어보고 주울 줄은 어찌 모르나 / 不知俯而拾

과일이 떨어지면 필시 땅에 있는 법 / 果落必在地

발 밑에 응당 밟힐 터인데 / 脚底應踐踏

하필이면 허공에서 찾으려 드나 / 何必求諸空

실리란 보존된 씨와 같나니 / 實理猶存核

씨를 일러 인()이라 자()라 하는 건 / 謂核仁與子

낳고 낳아 쉴 줄을 모르는 때문 / 爲生生不息

마음으로 마음을 전할 양이면 / 以心若傳心

주공의 탑을 찾아 증거를 삼게 / 去證麈公塔

 

 

부처의 설법 중 비유품(譬喩品)은 온갖 사물의 모양을 곡진하게 그려 내어 고묘(高妙)함을 더욱더 깨닫게 한다. 이 글이 그와 근사하여, 육제(六諦)를 해탈하고 실상(實相)을 원증(圓證 두루 증명함)하니, 결코 대승(大乘) 이하의 구기(口氣 어조(語調))가 아니다.

 

[C-001]주공탑명(麈公塔銘) : ‘()’가 원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다. ()는 사슴의 일종이고, ()는 고라니에 속하여 서로 다르나 글자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는 사슴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그 꼬리가 움직이는 대로 뭇 사슴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사슴 중의 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왕중왕(王中王) 주중주(麈中麈)’라 한다. 또한 그 꼬리인 주미(麈尾)는 고승이 설법할 때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서 손에 쥐는 불자(拂子)로 쓰이는데 이를 승주(僧麈)라 한다. 이 글은 연암의 젊은 시절 작품으로, 그 시절 연암과 절친했던 김노영(金魯永1747~1797)이 이를 애송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리(李正履 : 1783~1843)는 이 글을 불교를 배척하는 작품이라 보았고, 아들 박종채가 이 글을 어느 노승에게 보였더니 그 노승 역시 불교를 배척하는 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아울러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글은 실존했던 고승의 사리탑에 대한 명()이 아니라, 승주(僧麈)를 의인화(擬人化)한 이름의 가상적인 고승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탑명(塔銘)의 형식을 빌려 불교를 비판한 희작(戱作)이 아닐까 한다.

[D-001]벌레 …… 하고 : 원문은 蟲背之綠也 魚鱗之白也인데, 종북소선에는 魚鱗之白也 蟲背之綠也로 되어 있다.

[D-002]썩은 …… 했다 : 썩은 버드나무는 캄캄할 때 빛이 나므로 이를 도깨비불이라 하여 무서워하였다.

[D-003]대비구(大比丘) : 덕이 높고 나이 많은 비구승을 이른다. 종북소선에는 앞에  자가 더 있다.

[D-004]장차 …… 양으로 : 원문은 將修浮圖인데, 종북소선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5]폐백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6]나에게 …… 왔다 : 원문은 請銘于余인데, 종북소선에는 磨頂請銘으로 되어 있다.

[D-007]지황탕(地黃湯) :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이라고도 하며, 숙지황 · 구기자 · 산수유 등 6종의 약재를 넣어 만든 탕약(湯藥)으로 폐결핵 등에 효험이 있다.

[D-008]활짝 퍼져 : 원문은 細張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은 앞 구절의 운자인 과 같은 평성 양() 자 운이 아니라 거성 양() 자 운이어서 운이 맞지 않는다.

[D-009]각각으로 …… 머금었지 : ()은 불교에서 주관(主觀)의 인식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삼라만상의 모습을 이르는데, 이는 아직 참모습眞如대로가 아닌 가상(假象)이라 한다. 여여(如如)는 진여와 같은 말이다. ()은 상()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본질을 이른다. 그러나 상()은 또한 성()을 머금고 있다고 본다.

[D-010]성성(惺惺)했다 한들 : 성성은 선불교에서 참선을 통해 마음이 최고조로 각성되어 있는 상태를 이른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하여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또렷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D-011]()로써 아()를 증명하니 : 여기서 말하는 아()는 불교에서 가아(假我)로 간주하는 육신(肉身)을 갖춘 자아(自我)가 아니라, 진아(眞我)를 이른다.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면 본질이 변치 않고 진실되며 그 작용이 자재무애(自在無碍)한 아덕(我德)을 갖추게 되는데 이를 진아라고 한다.

[D-012]()으로써 …… 건가 : 불교에서는 관심견성(觀心見性)이라 하여, 자기 마음을 관조해서 그 본성을 밝히고자 한다. 주희(朱熹)는 관심설(觀心說)에서 불교의 학설은 심()으로써 심()을 구하고 심()으로써 심()을 부리니, 입이 제 입을 씹고 눈이 제 눈을 보는 것과 같다면서, 이는 하나인 심()을 둘로 나누고, 주체인 심()을 객체인 물()로 만들며, ()에 대해 명령하는 심()을 물에게 명령을 받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晦庵集 卷67 정도전(鄭道傳)도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이는 별도로 일심(一心)으로써 이 일심(一心)을 본다는 것이니 마음에 어찌 둘이 있으랴?”라고 하면서, 이심관심(以心觀心) 입이 제 입을 씹는 것과 같아, 응당 볼 수 없는 것으로써 본다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三峰集 卷9

[D-013]다음과 …… 붙였다 : 원문은 爲係詩曰인데, ()을 지어 붙였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한유(韓愈)가 지은 비지문(碑誌文) 중에도 명왈(銘曰)’ 대신 계왈(系曰)’, ‘시왈(詩曰)’로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D-014]나는 …… 비유하노니 : 원문의  자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및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15]과일이 ……  : 원문의 必在地 종북소선에는 應歸土로 되어 있다.

[D-016]실리란 …… 같나니 : 이 부분이 종북소선에는 核存猶自托으로 되어 있다.

[D-017]실리란 …… 때문 : 성리학에서는, 불교가 공허한 이치를 추구하는 데 비해 유교는 진실된 이치實理를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하늘의 도()가 곧 인()이라고 보고, 그러한 인()이 사람의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종종 곡식의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연암집 1 ‘이자후의 득남을 축하한 시축의 서문李子厚賀子詩軸序에도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D-018]주공의 …… 삼게 : 병세집에는 그 다음에 地黃湯喩 演而說偈曰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여 놓았다. “我服地黃湯 泡騰沫漲 印我顴顙 一泡一我 一沫一吾 大泡大我 小沫小吾 我各有瞳 泡在瞳中 泡中有我 我又有瞳 我試嚬言 一齊蹙眉 我試笑焉 一齊解頤 我試怒焉 一齊搤腕 我試眠焉 一齊闔眼 謂厥塑身 安施堊泥 謂厥繡面 安施鍼絲 謂畫筆描 安施彩色 謂檀木鐫 安施彫刻 謂金銅鑄 安試皷橐 我欲撥泡 欲抱其腰 我欲穿沫 欲撫其髮 斯須器淸 香歇光定 百我千我 了無聲影 咦彼麈公 過去泡沫 爲此碑者 現在泡沫 伊今以往 百千歲月 讀此文者 未來泡沫 匪我暎泡 以泡暎泡 匪我暎沫 以沫暎沫 泡沫暎滅 何歡何怛 그런데 이덕무(李德懋)의 손자 이규경(李奎景)이 지은 시가점등(詩家點燈)에도 주공탑명의 전문을 소개한 다음, 다시 평왈(評曰)”이라 하면서 위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병세집과 몇 자 차이가 있다. 또한 매탕(梅宕 : 이덕무)이 평열(評閱)했다는 종북소선에도 두주(頭註) 余讀麈公塔地黃湯喩 演而說偈曰이라 하면서 역시 위와 같은 글을 싣고 있다. 다만 이 역시 병세집, 시가점등과 글자 및 순서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위의 글은 연암이 아니라 이덕무의 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시가점등에는 다시 評之又評曰이라 하면서 假佛語 寓儒旨 用筆微而婉 江郞曰 黯然消魂 余斷章取義 以評麈公塔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종북소선 말미의 평어와 일치하므로, 이덕무의 평어임을 알 수 있다.

[D-019]비유품(譬喩品) : 대승(大乘)의 교법을 설한 법화경(法華經) 28() 중 제 3 품을 이른다. 속세의 중생을 노느라 정신이 팔려 불이 난 집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는 아이들에 비유한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로 유명하다.

[D-020]육제(六諦) : 불교에서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를 영원히 변치 않는 네 가지 진리 즉 사제(四諦)라고 하며, 여기에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쳐 육제(六諦)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 Recent posts